[헌책방 사진 이야기] 5. 인천 아벨서점 2008

 헌책방은 고마운 곳입니다. 갓 나온 책을 때때로 만나기도 하지만, 잊거나 잃고 지나친 책을 새삼스레 만날 수 있으니 몹시 고마운 헌책방입니다. 웃돈을 얹는대서 사라진 책을 장만할 수 있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사라진 책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스스럼없이 내놓는 책이 헌책방이라는 데에서 빛이 나며 새로 읽힙니다. 이 나라 헌책방치고 널따랗거나 커다란 곳은 드뭅니다. 으레 조그맣거나 조촐합니다. 그런데 이 조그맣거나 조촐한 책쉼터에 수많은 책이 끊임없이 드나들면서 내 눈과 넋과 삶을 아리땁게 여미는 데에 길동무가 되어 줍니다. (4344.3.20.해.ㅎㄲㅅㄱ)


- 2008년.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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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3-22 22:43   좋아요 0 | URL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가장 책 정리가 잘된 매장이더군요.책도 많고요^^

숲노래 2011-03-23 07:42   좋아요 0 | URL
책방살림에 마음을 가장 넓고 크게 쓰는 책방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쪽글과 글쓰기


 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떨리는 손으로 부들부들 몇 글자 끄적인다. 그렇지만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나 마음에 피어오르는 모든 이야기를 적바림하지 못한다. 한두 낱말을 적으면서 나중에 수첩을 다시 펼칠 때에 왜 이 낱말을 적었는지 떠올릴 수 있을 만하게 해 놓는다.

 자전거 발판을 밟는다. 등허리가 결리고 팔뚝이 저린다. 그래도 좋다. 내 몸을 내 힘을 써서 움직일 때에 참 기쁘다. 날마다 빨래에 밥하기에 설거지에 갖은 집일을 하면서 몸을 쓰기에 기쁘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살림을 한다고는 여기지 못한다.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를 달리든, 혼자 부리나케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느라 자전거를 달리든, 뒷주머니나 옆주머니에 작은 수첩을 챙겨 넣는다. 자전거를 살짝 세워야 할 때에 수첩을 꺼내어 땀내 나는 글을 적바림한다. 때때로 일부러 자전거를 멈추어, 머리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조각을 글로 옮긴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아이 손을 잡고 춤을 추다가,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다가, 문득문득 뭔가가 자꾸자꾸 생각나서 수첩을 펼쳐 쪽글을 적는다.

 쪽글 적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는 저도 ‘공부’하겠다면서 종이나 수첩에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가 보기로는 그림이지만, 아이로서는 글이다. 아이는 아버지가 쓰는 글을 흉내내어 아버지가 깨알처럼 쓰는 글을 베끼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내 머리를 그닥 못 믿는다. 잘 새겨들었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엉뚱하게 떠올리거나 잊는 일이 잦다 보니, 반드시 수첩에 쪽글을 남겨야겠다고 느낀다. 여기저기 마음쓸 곳이 많으니까 쪽글을 남기지 않으면 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진을 찍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쪽글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웬만하면 쪽글을 쓰지만, 쪽글조차 끄적일 겨를이 없으면 부리나케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또는, 나 혼자 즐기기 너무 아쉽구나 싶은 아름다운 모습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기에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나 혼자 바라보기에 몹시 슬픈 모습을 동무와 함께 나누고자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쪽글을 쓴다. 내 삶을 하루하루 다 다르게 맞이하며 다 다르게 마감하는 즐거움을 듬뿍 맛보고 싶어서 쪽글을 쓴다. 그날그날 이야기를 그날그날 적바림한다. 그날그날 새로워진 내 넋을 곱씹고, 그날그날 거듭나려는 내 몸을 되새긴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며 마음이나 몸을 쉰다고 할 텐데, 나는 손목아지와 손가락이 저리도록 재빨리 쪽글을 휘갈기면서 마음과 몸을 쉰다.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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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터 뒤지기


 어제와 오늘 집안을 치운다. 다 치우지 못한다. 여느 때에 꾸준히 돌보았다면 애써 날을 잡아 집안을 치울 일이 없었을 터이나, 여느 때부터 집안을 제대로 건사하지 않았으니 날을 잡아 집안을 치운다 하더라도 제대로 치우지 못하고 여러 날이 걸리고 만다. 앞으로 며칠 더 치워야 비로소 조금 건드렸다 할 만하리라 느낀다.

 자질구레하며 쓰잘데없는 물건을 치우고, 이곳저곳에 흩어 놓던 물건을 갈무리하면서 생각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꾼이란 얼마나 대단하며 고마운 사람일까. 밥을 차려 주는 사람과 함께,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참으로 고마우며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새삼 느낀다.

 그러고 보면, 밥을 하는 일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으레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곧 살림꾼이었다. 나는 집안일을 도맡고는 있으나, 나 스스로 살림꾼이라고는 여기지 못한다. 옆지기도 내가 살림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보기로도 살림을 못하고, 옆지기가 생각하기에도 살림을 ‘안 한’다.

 살림하기란 밥하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밥을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몫을 해야 비로소 살림꾼이다. 그런데, 밥을 해서 차린다 할 때에 얼마나 옳고 좋은 밥을 얼마나 옳고 바르게 차리느냐를 살펴야 한다. 밥으로 차릴 먹을거리는 어떻게 일구거나 얻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고, 밥을 차리고 치울 때에 어떻게 하는가 또한 헤아려야 한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쓰레기터를 뒤진다. 집은 집인데, 틀림없이 살림집은 살림집인데, 살림을 엉망으로 내팽개치듯 살아온 사람이기에 쓰레기터를 뒤지고야 만다. 밤을 잊으면서 쓰레기터를 뒤질까 하다가 그만둔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이듬날 또 새 하루를 열어야 하고, 아이와 옆지기와 내가 먹을 밥을 차려야 하며, 이렁저렁 또 하루일을 해야 하니까.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은 건드렸으니, 이쯤에서 몸을 쉬면서, 이듬날에는 어디를 어떻게 손을 대어 치우면 좋을까를 곱씹는다. (4344.3.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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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3.19.
 : 고개 넘어 피자 나르기



(17:27) 옆지기가 피자 먹고 싶다 말한다. 피자라니, 피자라면 읍내 버스역 건너편에 있는 피자집에서 만드는 피자일 테지. 우리 집 물이 아직 녹지 않아, 녹지 않는다기보다 땅밑에서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은데, 집에서 물을 못 쓰니 옆지기는 몸을 씻을 수 없다. 몸을 씻으러 읍내 목욕탕으로 가야 한다. 읍내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씻고 나서 피자를 먹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집안을 쓸고닦으며 치우느라 읍내마실을 나가지 못했으나, 피자는 얼마든지 사다 나를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얼른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아이도 자전거 함께 타고 싶다 이야기하지만,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집에 있으라 이른다. 왜냐하면 피자를 사서 짐수레에 담아야 모양이 깨지지 않으니까. 아이를 태우면 피자 놓을 자리가 없다.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를 도서관에서 꺼낸다.

(17:38) 숯고개에 닿다. 피자 두 판을 사러 읍내로 나가느라 깔딱고개를 하나 넘는다. 읍내 가는 길은 가방에 비었으니 몸이 가볍다. 돌아오는 길은 이것저것 사서 가방에 채울 테니 몸이 무겁겠지. 옆지기는 자동차들이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니 수레를 달아야 하지 않느냐 얘기했다. 짐수레 무게가 꽤 나가니까 이 수레를 달고 깔딱고개를 넘으면 땀이 뻘뻘 난다. 그러나, 피자를 가방에 넣으면 한쪽으로 뭉그러질 테니까 짐수레를 달아야 한다. 어찌 되든 짐수레를 뒤에 달았기 때문에 자동차들이 옆으로 꽤 크게 에둘러 가며 빵빵거리지는 않는다. 오르막에서 입이 아닌 코로 숨을 들이마신다. 코로 두 번 마시고 입으로 한 번 뱉는다.

(17:49) 음성 읍내에 닿다. 공부를 마친 듯한 고등학교 아이들이 쳐다본다. 이 아이들로서는 자전거에 수레를 단 모습을 본 적이 없을 테지. 이 아이들이 나이를 더 먹어 아이를 낳으면 나처럼 수레를 장만해서 아이를 태우고 다닐까. 아마, 이 아이들 거의 모두는 ‘손쉽게 자가용을 장만해’서 싱싱쌩쌩 내달리기만 하지 않을까.

(17:50∼18:07) 피자집에 닿아 피자 두 판을 주문한다. 15분이 걸린단다. 엊그제 장날이 지났기에 델타마트라는 데에 가다. 마트 쓰레기통에 쓰레기 두 봉지를 넣는다. 시골자락으로 쓰레기 걷으러 쓰레기차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읍내로 가지고 와서 버린다. 시골에서는 빈병이건 페트병이건 종이건 나누어 내놓을 수 없다.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문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면사무소 일꾼이 돌아다니며 걷어야 하지 않을까. 시골 면사무소나 읍사무소는 여느 때 보면 다들 한갓지게 노닥거리는데, 읍과 면 곳곳을 돌며 쓰레기걷이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읍사무소나 면사무소 일꾼은 늘 건물 안쪽에서만 지내기에, 막상 시골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저희 읍이나 면이 얼마나 넓고, 시골자락 사람들 살림살이를 도무지 모른다. 읍사무소나 면사무소 일꾼이 한 사람씩 돌며 읍과 면을 골골샅샅 누비지 않고서야 참다이 시골 공무원으로서 일할 수 없다고 느낀다. 표고버섯하고 곤약하고 땅콩하고 마늘하고 사다.

(18:08) 피자를 받아서 짐수레에 넣다. 아이를 태우며 춥지 말라고 덮는 이불로 피자를 여민다. 이렇게 하면 흔들리지 않으면서 집에까지 따뜻하게 할 수 있겠지.

(18:10) 읍내 신호등에서 신호를 한참 기다린다. 읍내에는 차도 얼마 안 다니는데 신호등이 없어도 되리라 생각하지만, 신호등이 없을 때에 천천히 느긋하게 오갈 자동차는 찾아보기 어렵겠지.

(18:15) 읍내를 빠져나온다. 용산리 쪽으로 접어든다. 읍내로 나올 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얼굴바람이다. 아까는 등바람이었나 보다. 얼굴로 제법 세게 부딪히는 바람을 느낀다. 길바닥에 짐승 주검 몇이 보인다. 아주 떡이 된 주검은 벌건 자국만 길바닥에 남긴다. 음성읍에서 생극면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두찻길에서 네찻길로 넓힌다며 한창 길 한쪽을 뜯는다. 여느 때에 이 두찻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매우 적은데, 애써 네찻길로 넓혀야 하는지 알쏭달쏭하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면 모르지만, 오가는 차가 명절날조차 막히는 일이 한 번도 없을 이런 데에서 왜 길을 더 넓혀야 할까. 이렇게 길넓히기 할 돈이 있으면, 시골사람들 농사일을 돕는 데에 써야 할 텐데.

(18:20) 오르막에서 체인이 빠지다. 못물 옆길 가파른 자리를 다 올라와서 기어를 낮추는데 픽 빠진다. 자전거를 세워 기어를 맞추다. 손에 또 기름이 묻는다. 다시 자전거에 오르려다가, 이렇게 멈춘 김에 자전거 모습이랑 내 수첩에 쪽글을 적바림해 놓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어쩌면, 체인 빠진 일이 퍽 고맙다 할 만하다. 다시 자전거에 오르면서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사진을 못 찍는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조차 사진을 못 찍는다. 나처럼 사진기를 목걸이로 걸고 한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한손으로 사진을 찍을 수는 있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모습 가운데 내 마음 사로잡는 곳을 제대로 느끼거나 제대로 찍지는 못한다. 언제나 스쳐 지나가는 사진만 찍을 뿐이다. 달리던 자전거를 멈추어야 하고, 달리던 차를 멈추어야 하며, 달리던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걸어다니면서도 사진을 못 찍는다. 걷던 걸음을 멈추어야 비로소 사진을 찍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몇 초쯤 숨을 멎은 다음 조용히 단추를 눌러야 한다. 사진찍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자동차를 타서는 안 된다. 사진찍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두 다리로 걸어야 하고, 어쩔 수 없는 때에만 자전거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

(18:28) 숯고개 오르막에 닿다. 시골길 걷는 시골 아이랑 어머니를 본다. 자전거로 고개를 넘기 때문에, 시골 아이가 제 어머니한테 조잘조잘 말을 거는 목소리를 듣는다. 자동차로 달리는 사람들은 이 고운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멧자락 비탈논 개구리들이 깨어나 왁왁 우는 소리 또한 자동차를 모는 동안 들을 수 없을 테고. 자동차를 타는 동안 듣는 소리란 자동차 소리에다가 자동차에 붙인 작은 텔레비전이 들려주는 소리뿐이다.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사람소리도 물소리도 들을 수 없는 자동차란 무엇일까.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차바람이 불어 자전거가 흔들린다. 차바람을 일으키는 자동차는 마주 걷거나 마주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들이 애먹는 줄을 조금도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한다.

(18:30) 집으로 돌아가는 깔딱고개에서 자꾸 자전거를 쉬며 사진 몇 장 찍는다고 하다가 너무 늦을까 걱정스럽다. 내리막에서 발판을 더 힘껏 밟는다. 조금 앞서 오르막 한켠에 쓰레기봉투 몇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았는데, 시골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오가는 사람은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 없지. 자동차로 길을 달리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휙휙 내던진다. 잘못해서 쓰레기가 창밖으로 날려 갔다 한들 자동차를 멈추어 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을까. 가만히 보면,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듯 ‘걸어다니며 길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 버리기’를 하기도 한다.

(18:37) 드디어 집에 닿다. 피자는 식지 않았다. 그런데 옆지기가 사 오라는 피자가 아니란다. 옆지기는 아무것도 안 든 피자를 하나 사라고 했는데, 나는 엉뚱하게 사고 말았다. 피자 사다 나른다며 고개 넘어 마실을 다녀오느라 몸을 부리면서, 정작 제대로 사다 나르지 못하다니, 참, 나 스스로 할 말이 없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다.
 

 

 그나저나, 다들 배가 불러서 얼마 못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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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3.17.
 : 노래하는 자전거



-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타고 노래를 부른다. 아이는 봄볕을 쬐며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른다. 시골길을 달릴 때면 가끔 마주치는 시골 어른들은 아이가 수레에 앉아 노래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다. 마을길을 벗어나 자동차 오가는 한길로 나오면 자동차들이 조금 멀찍이 떨어진 채 지나가 주기는 하지만, 아이가 수레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아채지는 못한다.

- 아이 아버지는 노래하는 자전거를 달린다. 아이 앞에서 궁둥춤을 보여주면서 자전거를 달린다. 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듯하면 힘내라고 노래를 부른다. 아직 제힘으로 세발자전거 발판조차 밟지 못하는 만큼, 아이 아버지 된 사람은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즐겁게 달린다.

- 예전 사람들은 자전거 몸통에 수건을 친친 감고는 이 자리에 아이를 앉혔다. 퍽 예전 그린 그림책이나 꽤 예전에 찍은 영화를 보니, 이런 모습을 얼핏설핏 스치듯 만난다. 요즈음 사람들은 자전거집에서 아이걸상을 장만해서 붙인다. 생각해 보면, 수건을 친친 감아 짐자전거 앞쪽 몸통에 아이를 앉히기보다는 걸상을 따로 붙일 때가 더 걱정없다 할 만하리라. 그래도 나는 언젠가 내 자전거 몸통에 수건을 친친 감고 조금 폭신한 깔개를 받쳐 아이를 여기에 앉히고 자전거를 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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