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가시


 오이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겉에 오돌토돌 돋은 뭔가가 있구나 하고 느끼지만, 있거나 없거나 날로 그냥 먹어 버릇했다. 다른 사람이 먹도록 차릴 때에는 손바닥으로 슥슥 훑어서 썰었다.

 오이를 딸 때에 손바닥이 가시에 찔린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오이를 따며 장갑을 낀 일이 없다. 그냥 맨손으로 딴다. 뭔가 손바닥을 간질이지만, 이 간질이는 녀석이 가시라고 여기지 않았다.

 문득 예전 어머니들을 떠올린다. 빨래기계가 없던 지난날, 고무장갑이 없던 지난날, 실장갑이 없던 지난날 어머니들을 헤아린다. 집안일을 하든 집밖일을 하든, 으레 맨손으로 모든 일을 하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

 오이에는 틀림없이 가시가 있단다. 텃밭에서 오이를 따며 가만히 돌아보니 틀림없이 가시라 할 만하다. 두릅싹을 딸 때에도 두릅나무 가시에 찔려야 한다. 반창고라느니 연고라느니 하나도 없던 지난날 어머니들 손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예쁘장하거나 연기가 빼어나다는 연예인이 역사연속극에서 ‘어머니 차림’으로 멋진 모습을 뽐내는 일은 흔할 테지만, 또 잘생기거나 울퉁불퉁한 힘살을 뽐내는 연예인이 역사연속극에서 ‘아버지 차림’으로 훌륭한 말을 들려주는 일은 흔할 테지만, 오늘을 살아숨쉬는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어디에서 만나야 좋을까. (4344.7.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협 - 한 재일 사학자의 반평생
이진희 지음, 이규수 옮김 / 삼인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멀지 않은 뒷날, 아이가 어른이 될 무렵
 [푸른책과 함께 살기 83] 이진희,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삼인,2003)


- 책이름 :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
- 글 : 이진희
- 옮긴이 : 이규수
- 펴낸곳 : 삼인 (2003.9.20.)
- 책값 : 15000원


 (1) 아이와 살아가는 하루


 아이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짧으면서 깁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집일을 도맡으면서 아이하고 부대끼다 보면, 하루란 참 금세 기웁니다. 이 하루 내내 지치지 않고 뛰놀고파 하는 아이랑 부대끼는 만큼, 하루란 참 길디깁니다.

 새벽 다섯 시에 잠에서 깨든, 아침 열 시에 잠에서 깨든, 아이는 언제나 잠에서 깬 때부터 놀자고 조잘조잘댑니다. 네 살 아이는 아직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수 있겠지요. 눈을 번쩍 떴으니 다시 잠들기 힘들어 이러할 수 있겠지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 아이랑 복닥이면서 아침을 보내며 둘째 오줌기저귀를 빨고 옆지기 미역국을 끓이고 난 다음, 밥을 하느라 미처 헹구지 못한 빨래를 마저 하고, 이동안 새로 나온 빨래를 더 한 다음 설거지를 하고 방바닥을 비질합니다. 몇 시쯤 되었을까 헤아리지만 시계를 들여다볼 겨를 없이 몰아치다가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때는 열두 시 이십 분. 이제 더는 버티기 힘들어 첫째 아이가 이렇게 떠들건 저렇게 안기건 아랑곳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둘째 갓난쟁이 옆에 털푸덕 눕습니다. 첫째는 어느새 아버지 곁으로 달라붙으며 조잘조잘댑니다. 그림책 하나 읽고 싶기도 하지만, 이럴 기운이 없습니다. 끄응 하고 일어나서 아이 이불을 바닥에 펼친 뒤 아이한테 여기에 누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얌전히 눕습니다. 틀림없이 졸립기 때문입니다. 새벽 일찍 깨어 논 뒤 밥을 먹을 때부터 졸린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살살 부채질을 하며 아버지는 까무룩 잠이 듭니다. 얼마쯤 지난 뒤인지 모르겠는데 문득 눈을 뜨니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잠들었습니다. 부채를 살살 흔듭니다. 땀 맺힌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한동안 이렇게 부채질을 살살 하면서 부디 깊이 낮잠을 자라고 마음속으로 빕니다.


.. 해방 후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에 잔류하게 된 데는 남한 정국이 불안했다는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귀국자 한 사람에게 1천 엔의 지참금만을 허용한다는 비인도적인 처우가 더욱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 돈으로는 부산에 내려 당장 숙식을 해결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 (일본 정부로) 몰수된 조선인연맹 학교의 재산은 일본 전국적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점령군을 방패 삼아 이런 조치를 강행하였지만, 결과는 오히려 재일조선인의 반미·반일 감정을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 일본이 낙랑 유적에 그토록 고집한 것은 한나라의 침략에 의해 토착 사회가 발전했다는 궤변이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 지배 논리를 합리화하는 데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 조선고등학교에서는 2학년이 되면 반드시 자포자기하는 아이들이 생기곤 했다. 성실하게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취직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은 부모 세대 재일교포들의 쓰라린 역사를 모를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미래 또한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  (17, 24, 90, 110쪽)


 팔월에 태어난 첫째는 두 달 뒤에 석 돌을 채웁니다. 석 돌을 채우면 이때부터 다섯 살로 차근차근 나아가는 셈입니다. 아이하고 살아온 나날은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때부터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머니 뱃속에 조그마한 목숨씨로 깃들 때부터라고 느낍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조그마한 목숨씨로 새근새근 잠들던 나날부터 우리 집은 세 식구였고, 둘째를 바라볼 때에도 똑같습니다.

 첫째가 벌써 이만큼 컸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복닥였는데 이렇게 자라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지켜보면 ‘아이가 얼마나 크는가’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날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지켜보기 때문에 ‘아이가 날마다 얼마나 씩씩하게 새로 거듭나면서 크는가’를 환하게 느낍니다. 어제 아이를 안고 오늘 아이를 안을 때에 느낌이 다릅니다. 아이 머리를 감길 때에 고개를 숙이라 하면서 감길 수 있으나 부러 무릎에 누여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감깁니다. 이렇게 머리를 감기노라면 아이 키가 어느 만큼 컸고, 아이 몸무게가 어느 만큼 늘었는지 몸으로 깨닫습니다. 이제 첫째는 머리를 받치지 않아도 스스로 머리를 잘 가누어, 머리감기기 할 때에 그닥 힘들지 않아요. 몸무게가 꽤 나가서 버거울 뿐입니다.

 둘째 기저귀를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널 때면, 첫째는 부리나케 좇아나옵니다. 통에 든 빨래집게를 제가 꺼내어 건네겠다고 나섭니다. 아버지는 기저귀만 빨랫줄에 걸치고는 기다립니다. 아이는 한손에 하나씩 쥐고는 “자!” 하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응.” 하고 대꾸하거나 “네, 고맙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똑같은 빛깔인 빨래집게를 들고 오기도 하다가는, 다른 빛깔인 빨래집게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한손에 하나씩 쥔 채 딱딱 벌렸다 오므렸다 놀면서 가지고 옵니다.

 사진을 찍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요즈막에는 기저귀를 널며 목에 사진기를 겁니다. 아이가 빨래집게를 들고 달려올 때에 얼른 사진기를 쥐어 찰칵 하고 찍습니다.

 집에서 첫째가 둘째를 귀여워 하는 모습을 보면 잽싸게 사진기를 쥐어들어 찰칵 하고 찍습니다. 심심해 하며 홀로 책을 펼쳐 읽는다든지, 둘째 겉싸개를 뒤집어쓰고 논다든지, 아버지는 넌지시 알아채어 살그머니 사진으로 담습니다.


.. (한국전쟁) 뉴스 필름은 B-29 폭격기가 도시와 민가에 화염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을 생생히 전해 주었고, 보기만 해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처음으로 제트 전투기가 등장하고 바주카포가 북한 탱크를 파괴하는 데 뛰어난 화력을 발휘한 것도 그무렵이었다. 나는 민간인을 포함한 대량 살육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름에서는 미군이 북한군을 섬멸하고 있다고 설명하였지만, 공중 폭격으로 파괴된 것은 평양과 신의주 등 도시만이 아니었다. 북한 탱크가 숨겨져 있다며 한국(남녘)의 초가 농가에도 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었다 … 1950년부터 4년 동안의 일본의 전쟁 특수 경기는 24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1957년까지는 45억 달러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은 메이지 이후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 중국 침략으로 시작된 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한 전쟁 책임을 애매하게 한 채 미국의 반공 정책에 가담함으로써 경제 부흥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미군은 처음으로 제트 전투기를 투입하였고, 최신 살인 병기의 성능을 확인하는 실험장으로 삼았다 … 1965년 말에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은 18만 명에 달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잃으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차례로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동맹국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부패 정권이라도 반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 지원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변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에 부응하여 한국군 파견을 강행하였다. 파병 군인은 1973년까지 연 40만 명에 이르렀고, ‘베트남 특수’로 사회 전체가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 희생을 부른 해외 전쟁에 군대를 보내 타민족을 무력으로 억압했다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우리 역사에 남겼다 ..  (39∼40, 63, 131쪽)


 사진을 찍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사진을 보노라면 첫째가 처음 태어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가를 읽을 만합니다. 날마다 한 장만 찍었다 하더라도 석 돌까지 천 장을 찍는 셈이라 하겠으나, 첫째 아이 사진은 날마다 서른 장 남짓 찍었으니까, 석 돌이 된다면 삼만 장을 넘겠지요.

 사진을 찍는 아버지로서, 그동안 아이를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사진을 보며 지난 삶을 가만히 되새길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으로만 모든 이야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와 사진을 찍고 난 다음, 사진을 찍을 때까지, 사진에 찍히지 않은 하루, ……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이야기는 숱하게 많습니다.

 글을 쓰는 아버지로서 곰곰이 돌이켜봅니다. 아이하고 보내는 나날을 글로 날마다 신나게 적바림한달지라도, 아이하고 보내는 모든 이야기를 글로 옮기지 못합니다.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아이가 뒷날 어른이 될 무렵, 아이가 보낸 갓난쟁이일 때하고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이런 어린 나날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며 들려주어야 좋을까 곱씹습니다. 아이한테는 무슨 이야기가 도움이 되거나 쓸모가 있거나 기쁨이 되거나 웃음꽃이나 눈물나무가 될는지 헤아립니다.


.. 선명하게 남은 손목 안쪽의 상처를 보자 마음이 얼어붙었다. 북한이 내건 ‘주체 사상’은 평등과 인간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혁명 동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전화 도청 사건’과 이종수 사건에서처럼 민족교육에 대한 꿈이나 이상과는 달리 비열한 방법으로 동료에게 ‘적’의 딱지를 붙이려고 획책하였다 … 남한 출신의 이종수가 북한을 지지하고 김일성이 내건 사회주의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따뜻한 사회,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로운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으로 ‘추방’된 그는 10여 년 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이에도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었다 … 마오쩌둥의 서거를 알고 나서 위대한 지도자도 독재자도 언젠가는 죽고 만다는 감회에 잠겼다. 슬픔보다는 오히려 안도의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1966년에 그의 주도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10년간에 걸쳐 류사오치와 펑더화이 등 노혁명가를 비롯해 많은 지식인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 마오쩌둥이 고난의 투쟁을 통해 중국 민중을 제국주의자로부터 해방시킨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권력의 자리에 앉고 나서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똑같이 과거의 혁명 동지를 숙청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조차 짓밟아 버렸다 ..  (165∼166, 229쪽)


 날짜와 시간에 따라, 이날 이때에는 무얼 했다고 적으면 좋을까요. 아이가 읊는 말을 모두 적을까요. 날마다 사진 한 장에 글 하나를 붙이면 좋을까요. 어버이가 바라보는 아이일 때하고, 아이가 바라보는 어버이일 때에는, 삶이 얼마나 달라 보일까요.

 아이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 온누리에 무슨 일이 터졌는가를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 그러모으면 뜻이 있으려나요. 뒷날 아이 스스로 읽을 만한 좋다 싶은 책을 차근차근 갈무리하면 기쁘려나요.

 한 시 무렵에 잠든 듯한 아이가 일어나면, 쉬를 한 번 누이고 옷을 챙겨 입혀, 금왕읍 장마당에 다녀올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아버지는 예순터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낑낑거려야 하겠지요. 긴 장마 사이 살짝 비가 멎은 오늘 하루, 푸성귀를 장만하려고 바지런히 마실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수레에 탄 채 길을 나서면 수레에서 종알종알 떠들거나 노래를 합니다. 음성읍으로 갈 때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적어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금왕읍으로 갈 때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많아 “빠방이가 시끄러워!” 하고 빽 외칩니다.

 아이는 늘 느끼는 그대로 몸으로 드러내어 살아갑니다. 아이 못지않게 어버이 또한 언제나 느끼는 그대로 몸으로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좋은 바람을 쐬고 좋은 햇볕을 맞으면 좋은 하루라 여기며 고맙게 살고, 후덥지근한 바람을 안고 찌뿌둥한 하늘을 바라보면 고단한 하루라 헤아리며 고맙게 삽니다. 어느 하루 고맙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어느 하루 반갑지 않은 날이 없어요.


.. 국경선상에 멈춰선 지 10여 분. 여러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강폭은 200미터에 불과하고 상류로 올라가면서 더욱 좁아진다. 국경은 간단히 건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계로 언어와 풍습, 습관이 완전히 다른 민족이 존재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영토가 대륙에 이어져 있는 한반도가 민족으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굴욕의 역사는 이를 덮음으로써 자국의 긍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교훈으로서 냉정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 국가와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역사 교육이야말로 인류의 미래에 기대를 거는 교육이 아닌가! ..  (313, 321, 325쪽)


 바야흐로 석 돌을 꽉 채울 첫째는 이제 빨래 개는 솜씨가 많이 늘었습니다. 빨래 개기는 두 돌이 채 안 되었을 때부터 시늉으로 했지만, 엊그제부터 곁에서 아버지가 거들지 않아도 퍽 말끔히 갭니다. 몇 달 앞서부터 혼자서 옷을 벗고 입고 잘 해냅니다. 이 옷 입었다가 벗고 저 옷 입었다가 벗고 하는 놀이를 꽤나 즐깁니다. 처음 단추꿰기를 해내던 날에는 하루 내내 온갖 옷에 붙은 단추를 꿰다가 풀다가 하며 놀았어요. 아이 손은 하루가 다르게 야물어지고, 아이 몸은 하루가 새롭게 튼튼해집니다. 아이 눈은 하루가 다르게 빛날 테며, 아이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거나 넓어지겠지요.

 이 아이가 어린이집이라든지 유아원이라든지 유치원 같은 데에 다녔다면, 아이는 꽤 어린 나이인데에도 뭔가를 알거나 깨치거나 누리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대끼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목숨과 삶을 느끼면서 어버이가 누리는 목숨과 삶을 아이한테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어버이가 밥상 앞에 앉는 매무새대로 아이도 밥상 앞에 앉습니다. 어버이가 빨래를 어떻게 하고 청소를 어찌하느냐에 따라 아이도 이러한 집일을 익힙니다. 어버이가 자가용을 모는지 두 다리로 걷는지 자전거를 타는지에 따라, 아이가 앞으로 즐길 탈거리가 달라집니다.

 어버이가 텃밭을 일구면서 푸성귀를 거두면, 아이는 일찍부터 텃밭 호미질에 익숙합니다. 어버이가 꽃밭을 가꾸면서 푸나무를 돌보면, 아이는 어린 날부터 꽃밭 푸나무를 아낄 줄 압니다.


 (2) 내가 사랑하는 하루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삼인,2003)을 읽습니다. 재일사학자인 이진희 님은 당신 아이한테 당신이 살아온 나날을 들려주려고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한겨레붙이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 삶이 어떠한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어디에서든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며 이러한 책을 썼겠구나 싶습니다.

 《해협》은 역사책이나 기록이라는 테두리에서 쓴 책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를 사랑하는 손길로 어루만지는 어버이 마음으로 쓴 책입니다. 이런 역사를 알거나 저런 발자국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절주절 읊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는 동안 너희 어버이는 어떠한 살림을 꾸리며 어떠한 생각을 품었고, 저런 일을 겪는 동안 너희 어버이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길을 걸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옳은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며 옳은 길을 걸었든, 젊을 적에는 옳은 줄 알았으나 나중에 돌아보니 철없이 잘못 길을 걸었든, 스스럼없이 하나하나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잘 한 일만 보여주려는 이야가기 아닙니다. 기쁜 일만 드러내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웃은 일과 운 일, 기쁜 일과 슬픈 일, 벅찬 일과 아픈 일을 골고루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삶에는 눈물과 함께 웃음이 있고, 웃음과 함께 눈물이 있거든요. 삶에는 오르막과 함께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과 함께 오르막이 있거든요.


..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는 영어를 배워 미국을 잘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높았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미 군정청이 일제의 앞잡이였던 관료와 경찰관을 일제 때보다 더 높은 자리에 등용함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 훗날 안 일이지만 조선고등학교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두 명의 형사가 시골집에 들이닥쳐 나에 관한 모든 물건들을 압수해 갔다. 아버지는 ‘좌익’에 물든 아들 문제로 치안 당국에 자주 출두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에는 ‘연좌법’ 때문에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동생도 감시는 물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당국의 방해 공작은 계속 이어져 시골집 논밭만이 아니라 조상 전래의 가옥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6년이나 지난 1981년 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였다 … 한국에서는 1978년 6월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노려 관변 단체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쥔 박정희는 ‘개발 독재’를 보다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정치가뿐만 아니라 학생과 지식인의 저항도 날로 높아졌다 … 메이지 정부는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과 사할린 남부를 빼앗고, 동청철도와 다롄, 뤼순의 조차권 등을 획득했다. 일본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구미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또 수많은 ‘영웅’과 ‘전쟁 미담’을 만들어 ‘일본의 긍지’를 널리 선전하기도 했다 … 부상자의 전후는 참혹하여 ‘폐병(廢兵)’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더욱이 “가혹한 세금이 호랑이와 같다”고 할 정도로 무거운 세금이 국민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러일전쟁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민중의 목소리는 압살되고 말았다.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군비 확장에 매달렸다 ..  (13, 85∼86, 243, 323∼324쪽)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면 땀을 몇 바가지 쏟습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얼굴이 벌개집니다.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오르막은 길디길다고 느끼고, 내리막은 짧디짧다고 느낍니다. 이 긴 언덕을 오르고 나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내리막은 참으로 짧구나 싶지만, 이렇게 바람을 쐬면서 길디긴 언덕을 오르며 쏟은 땀을 모두 씻거나 텁니다.

 앞으로 낑낑거리며 자전거를 달리는 동안 생각합니다. 수레에 앉은 아이 눈높이에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보이고, 시골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어떻게 보일까 하고.

 수레에 탄 아이는 자동차가 곁을 스치고 달릴 때에 “빠방이 시끄러워!”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자동차 소리는 시끄럽다고 느끼지만, 수레에 앉는 나즈막한 높이에서 헤아리자면 훨씬 무서우면서 시끄럽겠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이러한 줄을 모르겠지요. 생각을 안 하겠지요. 언덕을 낑낑거리며 오르느라 손잡이나 몸에 힘이 빠져 비틀비틀 할 때에 뒤에서 빵빵거리지 않고 빠르기를 줄이면서 옆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달리는 자동차는 그리 안 많습니다. 열 대가 지나가면 여섯 대는 아슬아슬하게 붙으며 씽 하고 바람을 일으킵니다. 때로는 시끄럽게 빵빵 울리고 지나가기까지 합니다. 도심지에서라면 모르되, 시골길에서 규정속도를 훨씬 넘기며 달리는 자동차들이 아이를 태운 자전거수레한테 살가이 마음을 쓰기란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들 자동차에 아이를 태웠다면? 아이를 자동차에 태워 달리면서 아이를 수레에 태운 자전거를 바라볼 때에도 아슬아슬 무시무시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도 좋을까 궁금합니다.

 일본에서 나온 만화나 영화를 보면 중·고등학교 여학생이 짧은치마를 입고도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아주 흔히 자주 봅니다. 일본에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고 데려오는 모습을 만화나 영화로 살피면 으레 자전거에 아기걸상을 마련해서 태우고 다니기 마련입니다.

 한국에서도 장바구니에 먹을거리를 잔뜩 싣고 앞뒤로 아이를 하나씩 태운 채 다니는 아주머니를 가끔 보곤 합니다. 그렇지만, 가끔 볼 뿐, 으레 어디에서나 보지는 못합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기는 어버이 가운데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서 맡긴 다음, 자전거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요. 이 나라 아이들은 갓난쟁이일 때부터 ‘자동차 타기’에 길들거나 익숙한 삶이 된다고 느낍니다.


.. 이해에 읽은 몇몇 책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와나미쇼텐이 간행한 하타다 타카시의 《조선사》는 그 중 한 권이다. 바로 전 해인 1951년에 출판됐는데 내가 읽기 시작한 것은 신학기가 시작된 4월인가 5월부터였다. 아오야마 교수가 강의에서 소개하여 곧바로 구입하여 자세히 읽었다. 조선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된 것은 한국에 대한 하타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 공부한 것을 고토 교수 앞에서 피력했지만 단지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내용은 부실했다. 말뿐인 ‘진보적 해석’에 대해 고토 교수는 ‘주관적인 생각만으로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냉정히 비판하였다 …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우리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극심한 지배를 받고 있던 1922년이었다. 해방 전에 이처럼 용기 있는 학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나는 8·15 해방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었다 … 마음이 깨끗해지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일본의 지식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야나기의 맑은 눈과 깊은 사상에 감동한 것이다. 나는 야나기를 생각하면서 (석굴암) 동굴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본존불의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상 앞에 섰을 때 그만 두 다리가 멈춰 버렸다. 풍만한 육체에 얇은 천의를 걸친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자비에 가득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한국을 이해하는 하타다와 같은 일본 지식인이 스무 명만 있었다면 일본인의 한국관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  (55, 62, 75∼76, 278, 297쪽)


 《해협》을 쓴 재일사학자 이진희 님은 어떤 삶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해협》을 쓴 재일사학자 이진희 님이 낳아 함께 살아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된 다음에는 저마다 어떤 삶을 일구는가 헤아려 봅니다. 멀리 살피기 앞서,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나부터 어떤 삶을 사랑하려는지를 돌아봅니다. 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좋아할는지를 곱씹습니다.

 보금자리는 어디에서 마련하고, 일자리는 어떻게 맞아들이며, 마음이 맞는 짝꿍은 어떻게 사귀려는지 생각합니다. 어떤 밥을 어떻게 차려서 어디에서 어떻게 즐기려는지를 헤아리고, 고맙게 즐긴 밥으로 얻은 기운으로는 무슨 꿈을 펼치는 어떤 일을 붙잡을는지를 곱씹습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을까요. 어버이가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면 아이들도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할까요.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고자 할까요. 어버이가 이웃하고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고자 한다면 아이들도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을까요.

 참다운 사람으로 씩씩한 나날을 누리려 할까요. 어버이 스스로 참다운 사람길을 찾으려 하면 아이들도 참다운 사람길을 찾으려 할까요.


.. 첫 귀국선이 출항한 1959년 말부터 귀국자들은 트럭과 기계류를 가지고 돌아갔지만, 상공인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무슨 기념일에는 조선의 문화재를 구입하여 보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 슬픈 일이지만 러일전쟁 때 개성 주변의 고려 왕릉과 귀족 묘가 파헤쳐져 고려청자 등 엄청난 양의 부장품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개성의 고려 고분에서 도굴당한 고려청자를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천황에게 헌상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의 도굴품,그리고 수많은 석불·석탑·석인이 골동품업자를 통해 반출되었다. 예를 들면 도쿄의 오쿠라집고관에는 평남 대동군 율리사 고려팔각오층탑과 경기도 이천의 정토사에서 가져간 고려오층탑이 있다. 또 네즈미술관에는 고려 귀족의 묘지에서 가져간 석인과 석수 일식이 있고, 석탑과 불상 등이 정원에 진열되어 있다 … 공주에 체재한 시간은 짧았지만 오랜 기간의 의문을 씻을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하지만 시내에는 5∼6층의 건물이 여기저기에 세워지고 있었다. 무모한 재개발을 막지 않으면 지하 2미터에 묻힌 옛 도읍의 유적은 영원히 파괴될 것 같아 몹시 걱정되었다 … 임진왜란의 격전지 진주성을 방문했다. 논개가 왜의 장수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성 안에 있던 많은 민가를 밖으로 옮기고 공원으로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안 단구와 강을 이용한 다소 기복이 있는 성이지만, 외적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역한 규모와 구조였다. 성벽 위의 총구멍 설비를 보고서는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군은 철포가 없었기 때문에 고전했는데, 총구멍을 설치한 것은 해방 후로, 복원에서 시대 고증을 무시하는 일은 역사의 날조와 연결되는 법이다 ..  (116∼117, 266, 271쪽)


 재일사학자 이진희 님은 당신 삶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으스대려고 글을 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무슨 반성문이나 참회록을 쓰는 마음이 아니요, 회고록이나 자서전처럼 되는 책을 내려고 글을 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고마운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선물받은 목숨을 하루하루 알뜰히 사랑하면서 보냈기에, 이렇게 보낸 기쁜 나날을 찬찬히 적바림하면서 당신 아이들 또한 당신 아이들 나름대로 하루하루 알뜰히 사랑할 나날을 보내기를 비손하듯이 글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기뻐하는 일이나, 《해협》이라는 책이나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더 빼어난 사진기를 갖추어 아이들 모습을 찍어야 어여쁘거나 사랑스러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스티커사진을 찍어도 얼마든지 어여쁘거나 사랑스러운 사진이 태어납니다. 1회용 사진기를 써도 애틋하며 살가운 사진이 태어납니다. 값싼 필름사진기를 쓰든 싸구려 똑딱이를 쓰든, 나 스스로 사랑하는 손길로 찍는 사진이라면 사랑스러운 사진이 태어나요. 나 스스로 사랑하는 손길로 쓰는 글이라면 사랑스러운 글이 태어납니다.


.. 조선대학 시절에는 풍경이나 화초에 마음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산진달래 꽃잎을 입에 머금자 고향 뒷산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이 뇌리를 스쳤다 … 30여 년 전 어머니 옆을 떠나던 때가 뇌리를 스쳤다. 우리 집은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있었는데 내가 몇 번이나 뒤돌아보아도 어머니는 ‘대문’ 앞에 서서 꼼짝도 않고 계셨다. 하얀 치마저고리 모습이 점점 작아져 점이 되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이별이었다. 참는 것만을 미덕으로 사시다가 마흔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생애를 생각하니 세상의 덧없음에 화가 났다. 언제 다시 성묘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니 어머니의 묘 옆을 떠나는 것이 가슴 아팠다. 눈물을 겨우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  (185, 284∼285쪽)


 집에서 살림하고 일하는 어머니들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집 바깥에서 훌륭하다는 일을 하는 아버지들도 글을 쓰면 좋을 텐데, 갓난쟁이일 때부터 집에서 아이랑 씨름하며 살아가는 숱한 여느 어머니들이 글을 쓰면 좋겠어요. 아이를 씻기거나 재우거나 젖을 물리면서 느끼는 사랑스러운 느낌을 찬찬히 글로 옮기면 좋겠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힘들었던 일이나 고달팠던 이야기를 찬찬히 글로 적바림하면 좋겠어요. 아이 스스로 당차게 서서 뜀박질을 하던 첫 날 이야기를 쓰고, 아이가 뛰며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진 이야기를 쓰며, 아이가 말썽을 피워 꾸짖었더니 울고 불고 하던 이야기를 쓰면 좋겠습니다.

 따로 책 한 권으로 태어나야만 글을 쓰는 보람이 있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꾸준하게 ‘아이와 어우러지는 삶’을 수수한 빛이 감도는 글로 담아서 내 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으며 생각밭을 일굴 만할 때쯤 넌지시 건네면 더없이 아름다운 일이 되리라 생각해요. (4344.7.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로 옮기는 일본 만화책


 일본사람은 한국사람보다 영어를 즐겨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일본사람은 웬만한 낱말을 으레 영어로 적어 버릇한다고까지 합니다. 일본말을 배우는 이는 따로 ‘일본 외래어 사전’을 곁에 두지 않으면 일본말을 익히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네 살 아이하고 일본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노라면, 어린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끌고 다니면서 거두어 도시로 가져가는 것은 ‘우유’ 아닌 ‘미루크(milk)’라고 이야기합니다.

 일본사람이 그린 만화책을 읽을 때에도 엇비슷합니다. 일본 만화책을 한글로 옮긴 이들은 일본사람이 쓰는 영어를 고스란히 옮겨 적기 일쑤입니다. 《네가 없는 낙원》(학산문화사,2006) 11권 106쪽에 “내 휴대폰으로 메일 주세요.”라는 대목이 나오고, 107쪽에는 “머리 위에서는 지금 지상의 눈보라로 인한 3D 아트 전개 중. 타이틀은, 으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손전화’까지 바라기는 힘들다지만, ‘휴대전화’라 적을 수 있었을 테고, ‘쪽지’나 ‘쪽글’까지 바라기 힘들더라도 ‘문자’라 적을 수 있어요. 그나저나 “3D 아트 전개 중”은 어떻게 살펴야 할까요. 어쩌면, 번역하는 분마저 이런 말은 도무지 어쩔 수 없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놀라운 예술이 펼쳐진다”라든지 “꿈 같은 예술이 펼쳐짐”이라든지,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면 좋겠습니다. 122쪽에는 “한 장밖에 티켓을 구하지 못했어.”라는 대목하고 “이 메모 순서대로 병원으로 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꽤 흔히 쓰는 낱말이라지만, ‘티켓(ticket)’은 우리 말이 아니에요. 영어예요. 들온말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 없는 바깥말인 영어입니다. ‘메모(memo)’야 워낙 자주 많이 쓰니 바깥말이라 느끼는 사람이 적다 할 텐데, 한국말은 ‘쪽글’이나 ‘쪽지’입니다.

 《치무아 포트》(대원씨아이,2011)라는 만화책 69쪽에서는 “나라는 샘플을 원하고 있지.”라는 대목을 봅니다. 한자말 ‘견본’이나 한국말 ‘보기’를 쓰지 않습니다. 123쪽에서는 “서비스로 드리지요!”라는 대목을 봅니다. “덤으로 드리지요!”나 “더 드리지요!”나 “그냥 드리지요!”라 적지 않아요.

 《봄으로 가는 버스》(대원씨아이,2007) 4권에 나오는 “선생님! 나이스 슛이에요!”는 일본사람만 흔히 쓰는 영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도 이제는 이런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아주 보드랍게 써요. 농구를 하건 축구를 하건 “나이스 슛”이라고만 해요. “멋진 슛”이나 “멋져”라 하지 않습니다.

 《조폭 선생님》(대원씨아이,2011) 완결편 185쪽에서 보는 “어쩌고 하는 작업멘트를 날리다 그만”에서는 ‘작업멘트’라는 대목이 돋보입니다. “어쩌고 하며 작업을 거는 말을 날리다 그만”처럼 적지 않을 뿐더러, “작업을 거는 말”을 ‘작업말’이라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요. 으레 영어로 ‘멘트(ment)’라 해야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더 들여다보면 ‘作業’이라는 낱말부터 알맞지 않게 쓴 셈인데, ‘꼬드기다’나 ‘꾀다’라 적어야 하는데, 이렇게 엉뚱한 낱말을 쓰면서 영어 또한 얄궂게 들러붙는구나 싶어요. 180쪽에서 보는 “내 휴대폰 벨소리인데?”에서는 어느덧 한국말로 뿌리를 내렸다고 할 만한 ‘벨소리’가 보입니다. “휴대전화 소리”나 “손전화 울림소리”나 “손전화 노랫소리”처럼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1) 5권 114쪽에 나오는 “아니, 오버야.” 같은 말 또한 어느새 영어로 느끼지 않는 한국말처럼 받아들입니다. “아니, 지나쳤어.”나 “아니, 김치국 마시지 마.”나 “아니, 헛물 켜지 마.”처럼 주고받던 말씨는 이제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는 듯합니다.

 《아빠는 요리사》(학산문화사,2011) 112권 107쪽에는 “둘이서 크리스마스 & 해피 버스데이 파티를 여는 거 어때?”라는 대목이 보이고, 111쪽에는 “몽자들은 이웃의 홈파티에 간 모양이다.”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그나마 ‘생일파티’조차 아닌 ‘버스데이 파티’라 하고, 꾸밈말을 덧달아 “해피 버스데이 파티”라 말하는군요. 일본사람이 이렇게 영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더라도, 한국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이 보는 만화책에는 “둘이서 성탄맞이와 즐거운 생일잔치를 열면 어때?”처럼 적기란 어려웠을까 궁금합니다. ‘홈파티’라는 말도 그렇지요. 집에서 여는 잔치라면 ‘집잔치’일 텐데요.

 《신의 물방울》(학산문화사,2005) 1권 37쪽에는 “와인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빈티지였어.”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만, ‘빈티지(vintage)’는 포도술을 가리킵니다. 어느 해 어느 곳에서 만든 좋은 포도술을 가리킨다고 하는 만큼 “와인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빈티지였어”는 말이 될 수 없어요. “포도술을 빚기에는 가장 좋은 해였어.”처럼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그나저나, ‘빈티지’라는 영어를 ‘구제(舊製)’라는 한자말과 같은 뜻으로 쓰면서 “오래되면서 무언가 멋이 있는 옷이나 물건”이라 여기곤 하는데, 이렇게 쓰는 일은 알맞지 않아요. 빈티지이든 구제이든, 한국말로는 ‘헌옷’입니다. 낡은 옷이거나 오래된 옷이에요. 헐거나 낡거나 오래되었으나 빛이 난대서 달리 영어로 나타내려 하는지 모르나, ‘헌책’이든 ‘헌집’이든 값이나 뜻을 찾는 사람은 나 스스로입니다. 물건은 물건 그대로 꾸밈없이 가리키면서 내 마음을 따스히 돌보아야지 싶어요. 41쪽에는 “신의 솜씨 같은 그의 디켄팅이 쇠사슬에 묶여 있던 떨떠름한 리쉬부르를 해방시켜 줬고”라는 말마디를 봅니다. ‘디켄팅(Decanting)’이라고만 해야 전문 낱말인 듯 생각하기에 그대로 영어로만 적는구나 싶은데, 한국말 ‘옮겨따르기’나 ‘옮겨담기’로 적으면 됩니다. 번역하는 일이란 ‘옮기기’나 ‘옮겨적기’입니다. 옮기어 따르는 동안 찌꺼기를 거르는 만큼, 이렇게 ‘옮겨따르기’라고만 하면서 얼마든지 포도술 거르기를 보여줄 수 있어요.

 《미녀는 못 말려》(서울문화사,2004) 3권 85쪽에 “자아, 클린 스태프는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하는 말이 나옵니다. ‘클린 스태프’라 해서 무언가 했더니 ‘청소 일꾼’, 곧 ‘청소부’를 가리킵니다. 말놀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청소하는 분”이나 “청소를 맡는 분”으로도 옮길 수 있고, ‘맑음이’나 ‘깔끔이’처럼 새말을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8쪽을 보면, “집에서 얘랑 디너하기로 했거든.” 하고 나옵니다. ‘저녁’이나 ‘저녁잔치’처럼 쓰지 않아요. 영어로 겉멋이나 겉치레를 부리는 아이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111쪽에는 “빅뉴스야, 빅뉴스!” 하고 나옵니다. “대단한 소식이야!”나 “놀라운 이야기야!”처럼 이야기하지 않아요. ‘빅’이든 ‘뉴스’이든 가볍게 써요.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1) 2권 6쪽에서는 “하루카의 걸프렌드 사호구나!” 하는 글월을 봅니다. 여자인 친구이니 ‘여자친구’이지만, 이렇게 영어로 가리키는 일을 더없이 마땅하다는 듯 여깁니다. 143쪽에는 “모처럼 즐거운 피크닉에 와서” 같은 글월을 볼 수 있어요. “즐거운 나들이”나 “즐거운 들놀이”나 “즐거운 봄나들이”라 적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제아무리 영어로 온갖 삶과 이야기를 나타낸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만화책은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즐기도록 해야 할 테지만, 한국말을 어떻게 가다듬으면서 알맞게 적바림해야 좋을까 하는 대목을 거의 돌아보지 못한다고 하겠어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이러하며 이듬날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리라 느낍니다. 사랑을 깊이 담아 주고받는 말이 되지 못합니다. 생각을 알뜰히 기울여 나누는 글이 되지 못합니다. 즐거이 놀이하듯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로 뻗지 못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여기에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즐겨 읽는 만화책에서도,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곱게 아로새기기란 너무 힘듭니다. (4344.6.30.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야 마법의 신문 기자 동글이의 엽기 코믹 상상여행 2
야다마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노란우산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랑 살아가면 신문을 읽지 않는다
 [어린이책 읽는 삶 1] 야다마 시로,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



 집에서 아이 아버지는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 어머니도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종이신문을 받아보지 않거든요. 따로 인터넷을 누비며 누리신문을 읽지도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으니 방송을 볼 일도 없습니다. 때때로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누리방송이나 동영상을 보는 일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나거나 터지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일어나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나라밖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죽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한창 무언가를 많이 배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살짝 대학교에 발을 담가 다섯 학기를 다니던 때를 떠올립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 배움삯은 내 아버지가 돈을 빌어 마련해 주었고, 대학교 둘레에서 먹고지낼 잠자리는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장만했습니다. 어쨌든 신문사지국은 밥과 잠을 얻는 곳이요, 일삯이 나오면 이 돈으로 책을 사읽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니 이곳에서 돌리는 몇 가지 신문은 거저로 읽을 뿐 아니라, 다른 지국하고 신문을 바꾸어 읽곤 합니다. 대학교 다섯 학기를 다니며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는 동안 날마다 열 가지 ‘중앙일간지’라 하는 ‘서울에서 나오는 큰 신문’을 읽었습니다.

 열 가지 큰 신문에다가 스포츠신문과 경제신문과 영어신문을 날마다 찬찬히 읽는 동안 시나브로 느낍니다. 열 가지 신문을 읽든 스무 가지 신문을 읽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모두들 똑같은 일과 사람을 다루며, 똑같은 곳에서 취재를 해서 글을 씁니다. 이름은 중앙일간지이지만, 정작 왜 ‘한복판(중앙)’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일간지를 채우는 이야기는 95퍼센트 ‘서울에서 일어나는 서울 이야기’였거든요.

 열 가지 신문을 날마다 읽으면서, 열 가지 신문마다 글투가 다르고 사진결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놓고 조금씩 다른 글투와 사진결로 기사를 채운대서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열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면서도 다 다르게 느끼거나 생각하잖아요. 구름을 바라보든 비를 느끼든, 열 사람은 열 가지 느낌입니다. 열 가지 신문이라면 열 가지 글투가 될밖에 없습니다. 굳이 ‘다른 글투를 느끼자’며 여러 신문을 볼 까닭이 없어요. 이 신문이 못 짚는 이야기를 저 신문이 짚는다든지, 저 신문이 안 다루는 이야기를 고 신문이 다루어야 바야흐로 여러 가지 신문을 보는 보람이 있습니다.


.. 한참 생각한 끝에 ‘벽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벽신문은 커다란 종이에 기사를 적어서 어딘가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 뉴스거리는 여기저기에 많기 때문에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 1호 신문을 만들었다 ..  (5쪽)


 신문이나 방송하고는 금을 그으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책 또한 그닥 많이 읽지 못합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하고 견주면 많이 읽는 셈일 테지만,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아가며 책읽기가 줄고, 아이 하나를 낳으며 책읽기는 훨씬 줄며, 아이 둘이 되니 책읽기는 더더욱 줍니다.

 집일을 도맡지만, 집일을 제대로 도맡는다 말하지 못합니다. 옆지기가 잔소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옆지기가 ‘집일이 이게 무어냐?’ 하고 따지면 하나부터 열까지 할 말이 없습니다. 날마다 할 집일을 날마다 옳게 건사하지 못하니, 집일을 도맡느라 하루 열 시간을 넉넉히 쓰더라도 집꼴이 그닥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다든지 신문을 들춘다든지 방송을 뒤적일 겨를이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집일로 바쁘니 이것저것 챙길 수 없습니다.

 이레째 퍼붓던 비가 하루 그친 다음 다시 비가 퍼붓는가 싶더니, 밤에만 조금 흩뿌리고 날이 살며시 갭니다. 언제 다시 퍼부을는지는 모르지만, 구름이 살며시 걷히면서 햇살이 드리웁니다. 멧자락에서는 멧새 소리가 예쁘게 들리고, 웃마을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에 나가면 도랑에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빗소리에 잠겨 숨죽이던 소리들이 모조리 깨어납니다.

 갓난쟁이를 안고 마을길을 걷거나 멧길을 거닐 때에 물소리가 콰르르 조르르 들리면, 이 소리를 듣고 갓난쟁이가 참 잘 잡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히면 응애 하면서 곧바로 깹니다. 물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곱게 재웁니다. 이와 달리, 자동차 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놀래킵니다. 아이 곁에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가 무엇하고 살가이 사귀도록 해야 좋을까를 몸으로 느낍니다. 아이하고 살아갈 어른으로서 내 하루를 어떻게 다스려야 아름다울까를 마음으로 깊이 되새깁니다.


.. 어떤 사람의 창피스러운 이야기를 신문에 쓰면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아예 신문을 만들 수 없는 건 아닐까? … 나는 가짜 신문 제 1호를 붙였다. ‘이제 두고보라지. 모두들 깜짝 놀랄 거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가짜 신문이라고 분명히 써 놨는데도 사람들은 진짜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 “아예 냉장고를 넣어 두면 편리할 텐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배 안에 먹거리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게…….” 아무리 장난 삼아 하는 이야기라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뿐이었다  ..  (19, 24, 45쪽)


 어린이책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를 읽습니다. 앙증맞은 그림에 앙증맞은 글이 어우러진 어여쁜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에서는 1985년에 나왔고, 한국에서는 2010년에 옮겨집니다. 나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일찌감치 일본책으로 보았습니다. 그림이 퍽 귀여웁다고 느꼈고, ‘잘 그렸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줄거리는 어떠할는지 모르나, 일본 어린이책을 꽤 많이 옮기는 우리 흐름을 돌아본다면, 퍽 예전부터 옮길 만하지 않겠느냐 싶었으나, 이제서야 한국말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책을 쓴 야다마 시로 님은 책끝에 “‘진짜’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먼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아요(81쪽).” 하는 말을 붙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몸소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 또한 내가 몸소 알아보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믿기도 하지만, 내가 받아들여 즐길 이야기라면, 내 몸으로 겪어야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요.

 몸소 아기를 안아야 아기 느낌을 압니다. 아기를 달래고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주어야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손수 밥을 차리고 손수 밥을 치우며, 손수 빨래를 하고 손수 빨래를 걷어 개야, 비로소 집일이 어떠한가를 깨닫습니다. 걸레를 손수 빨고, 빗자루를 손수 들어야, 집을 돌보는 나날을 알아차립니다.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어야 밥맛을 압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밥맛을 모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신문을 읽기’만 해서는 모를 뿐 아니라 ‘내 눈으로 지켜본다’고 해서 알 수 있지 않아요. 더 깊이 스며들어야 해요. ‘삶으로 받아들이도록 몸으로 부대낄’ 때에 천천히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만든 재미있고 멋진 신문을 붙여 주면 이 알림판도 좋아하겠지?’ ..  (6쪽)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로서 아이하고 보내는 오늘 하루가 즐겁기에, ‘아이를 키우는 보람과 재미와 힘겨움과 고단함’을 날마다 새롭게 적바림하는 신문이 없다면, 굳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더라도, 나 스스로 내 아이하고 살아가며 날마다 새롭게 느끼는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며 어여쁩니다.

 아침에 깬 첫째 아이가 새소리를 듣는 멧자락 작은 집이 좋습니다. 첫째 아이가 깨며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에 깬 둘째 아이가 끄응끄응 하면서 옹알옹알 꽁꽁거리며 눈알을 굴리는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좋습니다. 오늘은 비가 없이 아주 후덥지근할 듯합니다. 아침부터 집안 온도가 27도. 이제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둘째 갓난쟁이를 씻기고 집안을 첫째랑 함께 치워야겠습니다. 첫째 아이는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돼지’ 그림을 보며 무척 좋아합니다. 네 살 아이는 앞으로 네 살쯤 더 나이를 먹어 글자를 깨치면, 스스로 이 책을 넘기면서 신나게 읽겠지요. (4344.6.28.물.ㅎㄲㅅㄱ)


―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 (야다마 시로 글·그림,오세웅 옮김,노란우산 펴냄,2010.4.30./8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선엽


 백선엽이라는 분이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에서는 참모총장을 했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났으니,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스스로 겪지 못해 모른다. 오직 책에 적힌 이야기로만 들을 뿐이다.

 1970년대에 태어나서 1980∼90년대를 인천에서 살아낸 사람으로서 백선엽이라는 분을 떠올린다면, 인천 제물포역 뒤쪽 도화동에 널찍하게 자리한 ‘선인재단’이다. 선인재단은 백선엽 씨와 백인엽 씨 이름을 따서 붙인 곳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우글우글 모였다.

 선인재단은 사립학교인데, 이 사립학교는 열 해 즈음이던가, 인천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싸우고 싸운 끝에 백선엽 씨와 백인엽 씨한테서 재단을 빼앗아 시립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선 뒤로 끝없는 부정부패와 비리와 폭력으로 얼룩졌으니까.

 제물포역 둘레에 갈 때면 우람하게 버틴 선인재단이 드리우는 먹구름 때문에 서슬퍼런 기운에 싫었다. 버스가 선인재단 둘레를 거쳐 갈 때에는 이쪽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몇 만을 웃돌 학생들이 선인재단 수많은 학교에 우글거리도록 하는 일이 참말로 교육이 될는지 알쏭달쏭했다. 뺑뺑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야 할 때에, 부디 선인재단에 깃든 학교에 안 걸리도록 비손을 했다. 여중과 여고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남중과 남고는 선인재단 쪽 학교로 가면 교사와 선배가 어마어마하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리를 일찍부터 들었으니까.

 학교에서 교사는 왜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교과서를 펼칠까. 학교에서 선배들은 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쉽게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걸어다닐까. 학교에서 또래 동무들은 왜 서로 무리를 지어 패싸움을 벌이거나 돌림뱅이 짓을 벌이려 할까. 학교라는 곳에서 조용하면서 착하게 배우고 어깨동무할 수는 없을까.

 한국전쟁에서 훈장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면, 아무래도 ‘전쟁 영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전쟁 영웅이란 무엇이지?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사람이 영웅 아닌가? 적군이라는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죽여야 영웅 아닌가?

 군대에서 장교로 있는 사람은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한다. 군화발로 걷어차며 어서 총알받이로 달려가라고 뒤에서 내몬다. 적군을 수없이 쓰러뜨리려고 아군이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쓰러져야 했을까. 적군을 죽이는 숫자만큼 아군이라는 사람도 죽어야 하지 않았을까. 두 나라 총알받이 군인, 곧 여느 사람들은 왜 싸움터로 나와서 낯도 이름도 모르는 서로를 나쁜 놈이라 여기면서 죽이고 죽어야 할까.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흙을 일구며 착하게 살아가면 될 이웃이 아닌가.

 내 어릴 적 인천에서 지내던 나날을 곰곰이 떠올린다. 교사는 몇 해에 한 번씩 학교를 바꾼다. 나는 고맙게도 선인재단 쪽 학교에 안 걸리며 여섯 해를 보냈으나,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아주 마땅히 선인재단에서 일하던 교사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선인재단에서 일하던 교사가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들 사이에서 수근수근 이야기가 퍼진다. “야, 선인재단 내기는 되게 무섭다며?” “선인재단에서는 엄청나게 줘팬다는데, 거기에서 온 선생은 어떨까?” “그 선생이 우리 학년을 안 맡으면 좋겠는데.”

 선인재단이 사립재벌에서 시립으로 바뀐 지 어느덧 열 해 즈음 되는 듯하지만, 나는 아직도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또 선인재단 이름 넉 자를 이루는 백선엽 씨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시커먼 소름이 돋는다. 부디, 백선엽 씨가 스스로 영웅이라는 이름표를 내려놓고, 백선엽 씨가 거느리는 널따란 산과 들에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흙을 일구면서 무랑 당근이랑 배추랑 오이랑 가지랑 고추랑 감자랑 고구마를 길러서 예쁘게 살아가시기를 빈다. (4344.6.28.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