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Strand (Hardcover)
Mark Haworth-Booth / Aperture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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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홀로 거룩할 수 없습니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폴 스트랜드(Paul Strand), 《Paul Strand》(Aperture,1987)



 먹고 싶지 않은 밥을 먹으면서 맛을 살피거나 가누어야 하는 요리비평가라면 무척 따분하면서 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밥먹기나 맛보기를 즐기지 않으면서 요리비평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오직 돈벌이로 요리비평을 하는 일이란 참 고단하겠지요.

 키우고 싶지 않던 아이를 낳았다는 어버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혼인을 해서 제금을 나면 두 어른이 집일과 집살림을 도맡아야 하는데, 제금을 나기 앞서까지 집에서 일이나 살림을 몸소 안 할 뿐더러 배우지 못하는 남자 어른은 집식구가 집일과 집살림을 나누어 맡으라 이야기할 때에 어떤 마음일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쓰고 싶지 않으나 돈을 벌어야 하거나 이름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적잖은 신문기자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기자가 되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만화를 그리는 사람 가운데 그림이나 만화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림쟁이나 만화쟁이가 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진쟁이 한길을 걷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진찍기를 돈벌이로 삼으면서 틈틈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Paul Strand》(Aperture,1987)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폴 스트랜드 님은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숨을 거둡니다. 1987년에 나온 《Paul Strand》는 폴 스트랜드 님 사진삶을 기려 96쪽으로 간추린 작은 책입니다. 이 한 권으로 여든여섯 해에 걸친 폴 스트랜드 님 삶을 모두 그러모은다든지 낱낱이 보여준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책으로 폴 스트랜드 님이 ‘얼마나 거룩한 사진쟁이인가?’라든지 ‘새로운 사진밭을 어떻게 일구었는가?’를 밝힐 수 없습니다. 그저 ‘폴 스트랜드 님이 좋아하며 즐긴 사진’ 가운데 ‘폴 스트랜드 님이 죽고 난 다음, 뒷사람 눈으로 바라볼 때에 더욱 좋아하며 즐기는 사진’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 들출 뿐입니다.

 1915년에 찍었기에 ‘첫무렵 사진밭을 일군’ 작품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1953년에 찍었으니 ‘2053년에 누군가 찍을 사진’과 견주어 더 나은 작품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폴 스트랜드 님은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1915년에도 사진을 찍고 1953년에도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폴 스트랜드 님이 몸과 마음에 기운이 감돌며 한창 신나게 온누리 곳곳을 씩씩하게 밟으면서 마주한 사람과 삶과 사랑을 사진이라는 이야기로 갈무리했을 뿐입니다.

 어린이를 바라보면 보드랍고 탱탱한 살결이 아름답습니다. 늙은이를 바라보면 깊이 패거나 퀭한 주름살과 눈자위가 아름답습니다. 가느다란 풀잎에 살짝 생채기가 나는 버섯이 아름답습니다. 풀잎에 곧게 나는 무늬가 아름답습니다. 사람들 살림살이를 만들건 전쟁무기를 만들건, 무언가를 만드는 공장 기계가 아름답습니다.

 파란하늘 하얀구름이 아름답습니다. 돌길을 아이를 안고 맨발로 걷는 아주머니가 아름답습니다. 장님이라는 이름패를 목에 건 할머니 목 언저리에 붙인 인증딱지가 아름답습니다. 내리쬐는 햇살이 건물에 살짝살짝 가리며 새삼스레 이루어지는 그림자와 빛무늬가 아름답습니다. 울타리가 아름답고 살림집 창문과 문턱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아름답습니다.

 사진에는 무슨무슨 주의나 주장이란 부질없습니다. 패션에는 유행이 있어 열 해나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돌고 돈다는데, 사진에도 이런 물결이 있어 돌고 돌는지 모르지만, 무슨무슨 주의나 주장에 따라 찍는 사진이란 참 덧없습니다. 내 삶이나 사랑이나 사람 이야기가 아닌 주의나 주장을 사진에 담으면 재미없습니다. 몸을 돌보려고 입는 옷이고, 몸을 살찌우려고 먹는 밥이며, 몸을 쉬려고 보살피는 집입니다.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집을 건사하는 사람들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과 땀으로 삶을 일굽니다. 다 다른 사진쟁이가 다 다른 사진기를 손에 쥐고는, 다 다른 삶을 어떠한 꿈과 땀으로 일구는지를 찬찬히 살피면서 천천히 담습니다.

 홀로 거룩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거룩한 사진입니다. 홀로 아름다울 수 없는 사진입니다. 아름다이 지내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맑은 눈으로 맑게 바라보는 사람이 맑은 사진을 얻을는지 모릅니다. 밝은 눈썰미로 밝게 알아채는 사람이 밝은 사진을 이룰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맑게 바라보든 흐리멍텅하게 바라보든, 내가 바라보는 곳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늘 그대로 있습니다. 밝게 알아채든 알아보든 알아내든, 내가 알아채거나 알아보거나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사람이나 사물이나 자연은 언제나 고스란히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았기에 더 거룩하거나 뜻있거나 값있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지 못했기에 아쉽거나 안타깝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느낄 사진이라면 가슴으로 찍으면 됩니다. 가슴으로 찍은 사진을 가슴으로 느끼면 넉넉합니다. 역사에 적바림하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역사에 적바림하려 하지 말고, 내 마음에 찬찬히 아로새기면서 좋아하면 기쁩니다. 새로운 흐름이나 물결을 만들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내 삶이라고 느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면 좋은 사진입니다. 새로운 바람이 되거나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 되는 사진이란 없어요. 한 번 보고 휙 덮는 사진이 아닌, 우리 집 가장 시원한 벽 한켠에 예쁘게 붙여 언제까지나 바라볼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가 좋아하면서 즐기는 어여쁜 삶을 사랑스레 담을 뿐입니다. 2500년대나 3000년대를 살아갈 뒷사람이 보기에는, 1900년대를 가로지르는 폴 스트랜드 님 사진이든 2000년대를 아우를 오늘 우리들 사진이든 똑같습니다. (4344.6.27.달.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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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소리 책읽기


 첫째가 오줌그릇에 눈 똥을 치우려고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 가장자리에 놓은 거름통에 아기 똥오줌을 붓는다. 도랑 뒤쪽 숲에 하얀나비 하나 팔랑거린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지만 엿새째 이어지는 날씨에 어디에서 어디로 날아가는 나비일까. 빗방울을 맞으며 한동안 바라보니, 하얀나비는 텃밭 감자꽃에 살짝 앉으려다가 다시 팔랑거리며 다른 곳으로 간다.

 집으로 들어온다. 쇠수세미로 아이 오줌그릇을 씻는다. 물기를 털어 제자리에 놓는다. 집 안쪽에서 바깥쪽에서나 빗소리만 들린다.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개구리가 우는 소리나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다.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논마다 찾아 날아드는 왜가리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빗줄기가 스무 날 서른 날 이어지지는 않겠지. 머잖아 똑 끊기고 쨍쨍 눈부신 날이 찾아오겠지. 쨍쨍 눈부신 날이 찾아오면 비로소 빗소리에 잠기거나 숨죽이는 모든 소리가 깨어나겠지.

 아침 낮 저녁 밤 새벽 내내 빗소리만 들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토록 빗소리만 들으면서 지낼 수 있는 나날이 좋다. 첫째하고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보다가는, 아버지 혼자 문학책 《하이디》를 읽는다. (4344.6.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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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치구이와 책읽기


 갈치를 굽는다. 스텐팬에 불을 아주 작게 넣고 천천히 굽는다. 어머니가 하셨듯 접시에 구운 갈치를 얹고, 어머니가 하셨듯 갈치 살을 발라 아이 밥그릇에 얹는다. 어머니가 하셨듯 몸통을 아이랑 옆지기한테 주고, 어머니가 하셨듯 가장자리 가시 있는 데를 오물오물 씹어먹는다. (4344.6.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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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1-07-03 09:24   좋아요 0 | URL
하하하 !!! 종규님은 저랑 똑같네요~~

파란놀 2011-07-03 16:26   좋아요 0 | URL
아, 네. ^_^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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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수컷’은 키울 값어치가 없을까
 [책읽기 삶읽기 43] 요네하라 마리,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일본에서 나온 책이름은 “사람 수컷은 안 키우나?”였다는데, 한국에서 나오는 책이름은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가 되고 만, 요네하라 마리 님 산문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책이름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사람 수컷은 안 키우나?”하고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는 아주 다르다. 뜻과 느낌과 마음과 생각과 매무새가 모두 다르다. 살아가는 결과 어우러지는 무늬가 다르다.

 요네하라 마리 님 책에 이런 이름을 붙여야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요네하라 마리 님 같은 사람한테 이런 책이름을 달아야 알맞다고 여겼을까. ‘수컷인 사람’을 키울 겨를이 없이 통역 일과 글쓰기로 바쁜 요네하라 마리 님이니, 집에서 ‘수컷인 사람을 키울’ 수 없을 텐데, 이러한 대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붙인 이름이라고 느낀다.

 ‘사람 수컷’은 손이 좀 많이 가는가. ‘어른인 사람 수컷’은 ‘아이인 사람 수컷’과 견주어 손에 얼마나 많이 가는가. 아이는 어버이가 차린 밥을 고맙게 받아먹고, 아기는 어머니가 물리는 젖을 즐거이 빨아먹는다. 어른인 사람 수컷은 요 투정 저 투덜로 골을 부리기 일쑤이다. 어른인 사람 수컷 가운데 스스로 밥과 옷을 챙기거나 집안을 쓸고 닦거나 치우는 이는 얼마나 될까. 스스로 제 삶을 건사하는 ‘사람다운 사람 수컷’을 찾자면 얼마나 힘을 들이고 품을 들여야 할까. 애써 애먼 품을 들였다가 나중에 빈 껍데기인 줄 알아채면 얼마나 기운이 빠질까.

 글쓴이 요네하라 마리 님한테 ‘사람 수컷이 쓸모없을’ 까닭이 없다. 굳이 ‘사람 수컷은 안 키우며 즐거이 누리는’ 삶이다.


.. “그 어떤 보석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못해.” 너무 흔해빠진 비유에 나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이런 눈동자가 바라보는데 거역할 자가 그 어디에 있을 것인가 ..  (47쪽)


 고양이나 개 아닌 사람한테서 ‘맑은 눈빛과 밝은 눈망울’을 느낀다면, 요네하라 마리 님은 틀림없이 ‘사람 수컷도 참 좋구나’ 하고 받아들이리라 본다. 다만, 이렇게 느낄 일이 거의 없었으니 사람 수컷은 안 키웠겠지.

 생각해 볼 노릇이다. 사람 수컷은 집일이나 집살림에 눈길을 안 둔다. 집안에 사람 수컷을 들이면, 이때부터 사람 암컷은 집일과 집살림에다가 사람 수컷을 건사하는 몫을 맡고, 나중에 아이를 낳을 때면 집일과 집살림에다가 사람 수컷이랑 아이 돌보기까지 도맡아야 한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사람 수컷이 회사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도맡아 돌본다든지 집일과 집살림을 힘껏 보살피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 1억 연봉을 집어치우고 집에서 아이를 사랑하는 길을 걸으려는 사람 수컷이 있기나 있을까.


.. “그래서 중성화수술, 즉 에리는 4개월쯤에 피임수술, 우리는 6개월쯤에 거세수술을 하는 편이 좋겠네요.” “뭐라고요?” “마리 씨, 피임과 거세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아세요?” “아아, 네.” “피임은 임신을 피하다, 거세는 생식력을 없애는 거죠.” “하지만 선생님, 좀 가여운데요. 조금은 경험하게 해 주고 싶다고 할까…….” “흠, 경험하게 해 주고 싶다라.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죠. 저 역시 이 녀석들 몸에 칼을 대고 싶지 않거든요.” “바로 그거예요.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태어나면 키울 각오는 하고 있어요.” “자연스러운 거요. 네, 좋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죠. 단, 녀석들은 암수니까 1년에 2∼3차례, 4∼6마리씩 낳겠죠.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이 각각 또 낳고 그 새끼들이 다시 낳으니까, 뭐, 1년 후에는 대략 64마리 정도 될까요. 다음해에도 계속 늘어나겠죠. 그 정도 키울 각오가 있으시면 저는 전혀 말리지 않습니다.” ..  (68쪽)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마음산책,2008)라는 책은 책이름을 옳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낀다. 책이름부터 옳게 바로잡으면서 이 책이 우리들한테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곱게 아로새기도록 도와야 한다고 느낀다.

 사람 수컷이 없으면 사람 암컷도 새로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 수컷이 쓸모없거나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책이 아니라, 맑지 않고 밝지 않을 뿐더러 사랑스럽지 않은 길을 자꾸자꾸 걷는 숱한 사람 수컷이 바보스러운 굴레를 벗어던지기를 바라는 이야기책이라고 여긴다면, 출판사에서는 책이름부터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낀다.

 사람 수컷만 돌보지 않을 뿐, 맑은 목숨과 밝은 목숨과 사랑스러운 목숨을 사랑하던 삶을 찬찬히 적바림하는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이기에, 이 책이름은 이 책을 가까이하려는 사람한테 너무도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만다(‘발칙한 도발’ 같은 책이름이 될 수 없다. 요네하라 마리 님은 ‘발칙한 도발’ 같은 이름을 붙이며 글을 쓰지 않았다). 집짐승 돌보기를 즐기는 사람한테뿐 아니라, 고운 목숨을 아낄 줄 아는 사람한테 예쁘게 다가설 이야기책이 되도록 하자면, 더 보드라이 마주하고 더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게끔, 책이름부터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도록 해야지 싶다.


.. “잘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부러 오셔서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오셨으니 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하타나카 씨가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로 나가자 남자는 그다지 싫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뭐든 물어 보시오.” “‘먹이’라는 통역이 적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푸드’라고 하시오, 푸드.” “네, 알겠습니다.” 하타나카 씨를 따라서 통역사 여섯 명이 넙죽 인사를 하자 남자는 만족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  (132쪽)


 “만족한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이는 ‘사람 수컷’이다. 통역 일을 하면서 만나야 하는 숱한 ‘사람 수컷’ 가운데 아름다운 이도 어김없이 있을 테지만, 아름답지 못할 뿐 아니라 바보스러워 슬픈 이가 훨씬 많으리라 본다. 짐승한테 ‘먹이’를 주지 ‘푸드’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사람 수컷은 짐승한테 먹이 아닌 푸드를 주라고 이야기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사람 수컷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나 ‘뉴라이트’를 이야기한다. 몇몇 정치꾼 사람 수컷뿐 아니라, 문화나 예술을 한다는 사람 수컷 또한 ‘라이팅’을 이야기하고 ‘북마케팅’이나 ‘북쇼’를 이야기한다. ‘버라이어티 쇼’란 무엇일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수컷은 무엇을 생각할까. 아니, 생각하는 머리가 있기는 있을까. ‘뉴타운’이 엉터리라고 여긴다면 ‘에코페미니즘’이건 ‘그린마켓’이건 집어치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땅 사람 수컷은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다. 그닥 맑지 못하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사람 수컷이 쓸모없는지 모를 노릇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는 사람 수컷이요,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이 또한 사람 수컷이며, 전쟁무기를 만들고 전쟁무기를 좋아하는 이마저 사람 수컷이다. 전쟁을 기리는데다가 전쟁기념관이나 전쟁박물관까지 만드는 이는 바로 사람 수컷이다. 기리거나 섬겨야 할 것이 그렇게 없어서 전쟁을 기리거나 섬겨야 할까. 기리거나 섬겨야 한다면, 이토록 바보스러운 터전에서도 맑고 밝게 새로 태어나는 목숨들이다. ‘들꽃 기념관’이나 ‘아기 박물관’이나 ‘나무 기념관’이나 ‘흙 박물관’을 세울 줄 모르는 사람 수컷은 그야말로 부질없고 덧없으며 값없는지 모른다. (4344.6.26.해.ㅎㄲㅅㄱ)


―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요네하라 마리 글,김윤수 옮김,마음산책 펴냄,2008.8.5./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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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분 책읽기


 새벽 두 시 반에 번쩍 깬다. 저녁 열 시쯤 쓰러질 듯 가까스로 잠들었다. 첫째는 더 놀고 싶다며 앙앙 울고, 둘째는 토닥토닥 안아도 어머니가 젖을 물려도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잠자리에 네 식구가 드러눕고 불을 끄니 첫째는 금세 곯아떨어지고, 둘째도 어머니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었다. 새끼돼지 둘이 잠든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도 곯아떨어진다.

 이래저래 뭔가를 알 수 없는 참으로 뒤죽박죽인 꿈누리에서 헤매다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서 시계를 찾는다. 몇 시이지? 두 시 반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허둥지둥 첫째 엉덩이에 손을 댄다. 안 젖었다. 아직 쉬를 안 누었군. 여느 날보다 늦어서 걱정스러웠으나 잘 참았구나. 첫째를 덮은 이불을 걷고 두 손을 살며시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쉬, 쉬.” 하고 말한다. 아이는 발목이 꺾이고 무릎이 접히지만 용케 걸어 준다. 오줌그릇에 앉힌다. 아이 스스로 속옷을 내리고 쉬를 보아야 할 테지만, 몇 달쯤 아버지가 내려 주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쉬를 다 눈 다음에도 아버지가 올린다. 이러고 나서 다시 아이 손을 잡고 잠자리로 오고, 잠자리에서는 아버지가 번쩍 안아서 눕히고 이불을 여민다. 굳이 번쩍 안지 않아도 되지만, 둘째가 있기도 하고, 아이가 싫다고 할 때까지는 이렇게 해 줄까 하고 생각한다. 길어야 열 살까지 이렇게 해 주겠나.

 아이가 다시 잠든 모습을 보고 나서 기지개 켤 틈 없이 보일러 단추를 누른다. 잠자기 앞서 해 놓은 기저귀 빨래가 얼마나 말랐는가 만진다. 방바닥에 펼쳐 말린 기저귀는 꽤 말랐기에 차곡차곡 접는다. 보일러 도는 김에 더 마르라 해 놓고는 그동안 쌓인 새 빨래를 한다. 바닥에는 열석 장이 깔리고, 새로 할 빨래는 열 장.

 잠자리에 들기 앞서 빨래할 때에도 손바닥이 제법 아렸고, 새벽에 빨래할 때에도 손바닥이 꽤 아리다. 그렇다고 이 빨래를 누가 해 줄 수 없다. 빨래기계를 들인다고 될 일이 아닐 뿐더러, 빨래기계 값은 꽤 비싸다. 더욱이, 우리 집에는 빨래기계 놓을 마땅한 자리가 없다. 빨래기계 값이라면 어머니 자전거랑 아이 자전거수레를 새로 장만하고 남는다.

 똥오줌기저귀 열 장을 다 빨고 빨랫대에 여섯 장 걸고 넉 장은 집안 이곳저곳에 옷걸이로 걸친다. 남은 기저귀는 일곱 장이고, 열석 장은 삼십 분쯤 뒤에 개어 둘째 머리맡에 놓아야지. 이제 아침까지는 걱정없다. 다시 시계를 본다. 세 시 이 분. 빗줄기는 쉬거나 끊이지 않는다. 다른 날이라면 달빛이 저물며 새벽 햇빛이 천천히 어우러질 무렵인데, 엿새째 이어지는 빗줄기 새벽은 더없이 조용하면서 어둡다. 좋은 새벽이다. (4344.6.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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