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글쓰기


 흔히들 ‘아끼거나 어루만지며 살아가기에도 짧은 삶’이라 하지만, ‘아끼거나 어루만지며 살아가기에 알맞춤한 삶’이 아닌가 싶다. 오래 산다고 더 즐겁지 않으나, 짧게 산다고 덜 즐겁지 않으니까. 예쁘고 착하게 살아가면 즐거운 나날이니까.

 내 삶을 들여다보며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는 가운데 맑게 웃으면 고맙다. 책이란 무엇이고 삶은 또 무엇이며 글쓰기는 참말 무엇이겠는가. 어머니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꾸리는 삶과 보듬는 사랑과 빚는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어머니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어머니들한테 하루란 어떠한 나날인가.

 얼마 앞서 아이랑 둘이 사흘 동안 서울마실을 하면서 자주 퍽 오래 안고 걸었다. 아이가 힘들어 하니까 안지 않을 수 없다. 아빠는 앞과 뒤로 멘 가방이 제법 무겁다. 어깨가 눌리는 무게를 느끼지만, 이렇다 해서 고단하여 걷기 힘들다는 아이보고 “힘들지만 더 걸어 보렴.” 하고 말할 수 없다. 삼십 분쯤 ‘아이가 앞을 보도록 안으’면서 걷다가는, 십 분쯤 아이보고 아빠하고 손 잡고 걷자고 말한다. 둘레 사람들은 날이 추우니 옷을 꽁꽁 싸매듯 입으며 걸어다니지만, 애 아빠는 겉옷을 훌러덩 벗고 싶다. 땀줄기가 등판으로 줄줄 흐른다.

 함께 마실을 오느라 애쓴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에서 가까스로 잠든다. 시외버스 기사가 버스를 너무 거칠게 모느라 아이 속이 메스꺼울까 걱정스럽다. 아이를 아빠 무릎에 눕힌다. 사십 분 남짓 이렇게 있다가 내릴 즈음 아이를 옆자리에 눕히고는 가방을 챙긴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안 깬 아이였는데, 막상 버스에서 내리니 잠에서 깬다. 아빠는 속으로 생각한다. ‘녀석아, 이렇게 깨려면 좀 일찍 깨지. 네가 잠이 깰까 살몃살몃 안으며 내렸는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잠이 제대로 들자면 넉넉히 드러누워서 따숩게 있어야 하는데, 흔들거리는 버스가 잠을 잘 만했겠는가. 그나마 좀 잘까 싶던 버스에서 내리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으니 아이가 깰밖에 없지 않은가.

 아이한테 얼음과자를 하나 사 준다. 아이는 아주 좋아라 하면서 야금야금 깨어 문다. 시골버스역에서 시골버스를 기다리는 시골할매는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누.” 하지만, 아이는 춥건 말건 얼음과자 노래만 부른다. 생각해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추운 겨울이건 더운 여름이건 얼음과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집에서까지 냉장고 얼음칸에다가 설탕물을 얼려 먹지 않았던가.

 아이하고 살아가며 젊은 살결은 금세 쭈글쭈글해지고, 보드랍던 살갗은 어느덧 투박하며 거칠어진다. 잠자리에 들던 엊저녁, 내 손바닥 딱딱한 꾸덕살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아이도 아빠 손바닥 꾸덕살을 살살 만져 본다. 아이는 나중에 제 아빠 나이만큼 자랐을 때에 제 아빠 손바닥 꾸덕살 느낌을 떠올릴 수 있을까. 나는 내 아이만 한 나이는 아니고, 열 살 무렵 즈음 어머니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던 느낌을 곱다시 떠올린다. 아이하고 살아가며, 아니 옆지기랑 함께 살아가던 나날부터 내 어머니 젊은 날 손바닥 느낌을 늘 떠올린다. 글 한 줄 쓸 틈이 없는 어머니들 삶은 손바닥에 아로새겨진다. 책 한 권 읽을 겨를이 없는 어머니들 이야기는 손바닥에 차곡차곡 적바림된다. (4343.12.1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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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으로 파일을 올리고 받을 때에 '업-다운'이나 '업로드-다운로드'라 하기도 하지만, '올리기-내리기'나 '올리다-내려받다'라고도 하는데, 난 이런 광고를 보면 참 구리다고 여긴다. 이렇게밖에 쓸 만한 말이 없나. 영어를 쓴다고 멋이 날 까닭이 없으나, 영어로밖에 광고를 만들지 못하는 한국사람은 철이 없고 생각이 짧다. 따지고 보면 토씨 빼고는 다 영어 아닌가. 그나마 '맛'은 영어로 안 적었네. 그냥 'taste'라 적어 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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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사용설명서'를 읽어 보면, 영어로 풀이하는 대목은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맨 앞쪽에는 언제나처럼 영어를 적어 놓는다. 하기는, 자전거 이름 가운데 우리 말 이름이 아니라 한글 이름조차 하나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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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노래노래 하던 아쮸끄림(얼음과자)을 서울마실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먹으며 노래하며 좋아하는 아이. 다 먹고 논둑길을 걸을 무렵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쪼쪼아 아님(성부와... 하느님)을 왼다.

 - 201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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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2-15 22:01   좋아요 0 | URL
ㅎㅎ 추운 겨울날이지만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따님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네요^^

숲노래 2010-12-17 06:56   좋아요 0 | URL
좋아하니 안 줄 수 없답니다.
다만... 읍내에 마실을 나왔을 때만 ^^;;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황석영 지음 / 시와사회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사랑하니까 알아야 할 사람과 삶
― 황석영, 《사람이 살고 있었네》



- 책이름 : 황석영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 글 : 황석영
- 펴낸곳 : 시와시학사 (1993.9.1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를 모른다면, 참말 사랑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힘든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참으로 사랑한다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즐겁게 어우러져야 하는 한편, 서로서로 조금 더 깊이 살피어 받아들이는 가슴이어야 합니다.

 내가 먹는 밥을 내가 손수 지었는지, 누군가 지은 쌀을 돈으로 사다가 먹는지를 곰곰이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손수 지은 쌀로 한 밥이라면, 내가 쌀 한 줌 얻기까지 흙이랑 햇살이랑 비랑 바람이랑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아야 하고, 돈으로 사먹는 쌀이라면 내 몫을 애써 일구어 준 농사꾼이 어떻게 고마운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 우리는 말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한다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그에 맞추어 우리 생각의 한계까지 그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잠재의식적입니다 … 한참 동구권이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에 신문·잡지마다 사회주의가 망했다느니 안 맹했다느니 하루 걸러서 서로 업어치고 메치고 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덜어서 북한을 알려는 노력을 했으면 싶었습니다 ..  (232∼233쪽)


 꽤 여러 해 앞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고 나서 책 하나를 그만 전화기에 올려놓고 돌아나온 적 있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책을 놓고 온 줄 깨닫고는 부랴부랴 먼길을 거슬러 찾아갔는데, 한 시간 남짓 지나 공중전화로 돌아와 보니 제 책을 누군가 가져가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 사이에 책을 가져간 이는 공중전화에 얹힌 책임자가 찾으러 돌아올 줄을 몰랐으려나요.

 이때 잃은 책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입니다. 이 책을 잃고 나서 영 쓸쓸하고 씁쓸해서 좀처럼 되사지 못하며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한동안 헌책방 책시렁에서 이 책이 안 보이더니 이제는 곧잘 보입니다. 여러 차례 되살까 말까 망설이면서 되사지 않았습니다. 이동안 황석영 님이 보인 매무새가 몹시 달갑잖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 책을 되사서 못 다 읽은 대목을 마저 읽습니다. 퍽 두툼할 뿐 아니라,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두 나라 삶자락이 살가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가만히 보면, 황석영 님이 만난 북녘사람은 ‘수많은 북녘사람 모습 가운데 1/1000이나 1/10000’일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1/십만이나 1/백만일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황석영 님은 북녘땅을 밟았고 북녘사람을 만났으며 북녘마을을 거닐었습니다. 몸으로 겪는다 해서 더 잘 알지는 않으나, 적어도 몸으로 겪으면서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남녘땅 모든 사람이 황석영 님처럼 할 수 없는 노릇이요, 이렇게 하며 모두들 국가보안법 사슬에 걸려 감옥살이를 할 테니까 선뜻 나서기는 어려울 텐데(어쩌면 이렇게 한다면 문익환 목사님 말마따나 쇠울타리가 싹 걷힐 수 있겠지요. 백만 천만 사람들이 기나긴 줄을 이루어 북녘에서 남녘으로 또 남녘에서 북녘으로 걸어가서 만난다면 쇠울타리를 지키는 군인들도 총을 내려놓겠지요.), 적어도 “남녘사람은 북녘사람을 알려고 애쓰기”라도 해야 합니다. 북녘사람은 남녘사람이 쓴 책이나 글을 거의 못 읽는다지만, 남녘사람은 이래저래 북녘사람 이야기를 책으로나 글로나 드문드문 마주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읽고 헤겔도 읽고 체 게바라도 읽고 지젝도 읽고 홍세화도 읽고 진중권도 읽으면서, 왜 북녘사람 삶자락은 읽을 수 없을까요. 남·북녘이 하나되기를 바라거나 꿈꾼다면, ‘남녘 만세!’나 ‘북녘 만세!’가 아니라 남·북녘 한겨레 눈물과 웃음을 읽어 알며 살아야 합니다. (4343.12.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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