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만세발가락 - 마음으로 보는 그림 같은 이야기
리타 페르스휘르 지음, 유혜자 옮김 / 두레아이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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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아빠의 만세발가락
- 글 : 리타 페르스휘르
- 옮긴이 : 유혜자
- 펴낸곳 : 두레아이들(2007.9.21.)
- 책값 : 8300원



 이 책 하나 36 ― ‘골목도시’ 인천과 ‘피카소’ 그림
 : 리타 페르스휘르, 《아빠의 만세발가락》을 읽고


 (1) 골목도시 인천과 그림


 우리 동네에 미술전시터가 한 곳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평에 자리하고 있던 곳인데, 인천 배다리 골목집을 꿰뚫으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뜻에다가, 일흔 해 역사가 깃든 양조장 건물에 전시터를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옮겨 온 곳입니다. 동네에 이런 전시터가 들어오니, 어슬렁어슬렁 골목길 마실을 하다가 슬그머니 들를 수 있습니다. 전시터에서는 따로 구경값을 받지 않으니 걱정없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우리 집으로 놀러오는 손님이 있으면 ‘이럴 때 그림 예술도 맛보아야지’ 하면서 팔짱 끼고 찾아가곤 합니다.

 예전에는 인천으로 놀러오는 사람이 있으면, 배다리 헌책방골목에서 잠깐 책을 둘러보았다가 월미도를 간다든지 연안부두를 간다든지, 그냥 인하대 뒷문 쪽으로 가서 술이나 마신다든지 했습니다. 그때는 서울에도 골목길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 인천 골목길 마실을 굳이 함께하지 않았습니다만, 딱히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줄 만한 모습이 없다고 느꼈어요.

 번듯한(?) 건물이 있나, 바닷가 갯벌을 밟을 수 있나(지금도 갯벌은 밟을 수 없습니다. 군사철책 때문에), 널찍한 공원이나 쉼터라도 있나(이제는 인천대공원이 생겼으나 대중교통으로는 찾아가기 아주 어렵습니다).

 ‘인천 맛’이나 ‘인천 멋’을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고 함께 부대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을 만한 어떤 꺼리가 없었어요.






.. 리타가 말했다. “너도 대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소시지를 만들 수 있잖아, 안 그래?” “우리가 가는 정육점 주인은 소시지의 품질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야.” 내가 말했다. “상장 때문에.” ..  (26쪽)


 요즈음이라고 해서 그다지 달라지거나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몇 가지 남다른 대목은 있습니다. 경제개발과는 늘 머나먼 쪽에 있던 인천이기에, 오래된 골목길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이란 거의 없었거든요. 공장만 잔뜩 지어서 서울로 올려보내는 노릇, 또 공장 노동자로 있는 사람들이 값싸게 묵을 달동네 판자집은 숱하게 두는 노릇으로 있던 인천입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억지로 항구문을 열면서 지었던 집이 제법 남아 있기도 합니다. 1950∼60년대 자취도 두루두루 찾아볼 수 있어요. 이제는 서울 둘레 새도시 재개발이 거의 꽉 차다시피 하니, 인천까지 손을 뻗습니다만.

 한편에서는 영화를 찍기도 합니다(〈고양이를 부탁해〉, 〈파이란〉). 뮤직비디오를 찍는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아프고 아파도〉). 퍽 넓은 자리에(인천 중구와 동구와 남구에 걸쳐) 마흔 해나 쉰 해는 묵은 골목길과 골목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편, 서른 해 넘긴 예전 간판까지 손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지나온 우리 삶을 되짚는 영상’을 바라는 분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곳입니다. 그러나, 땅장사를 해서 목돈을 움켜쥐고 싶은 이들한테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싶은이들한테는, 유행이 아닌 물질문명 대명사가 되어버린 아파트로 숲을 이루어야 참된 도시라고 느끼는 이들한테는, 이런 옛 골목길과 골목집은 하루빨리 걷어내야 할 ‘낡고 지저분한’ 모습일 뿐입니다.


.. 다 완성된 그림을 뒤집어 공책들이 쌓여 있는 제일 아래 칸 서랍 밑에 넣었다. 그 그림은 엄마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면 무엇이 못생겼다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둥,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렸다는 둥 엄마의 따가운 질타를 듣지 않아도 된다 ..  (30쪽)


 문득, 국민학교 다닐 적 사회 시간에 배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서울과 인천 교통그물이 어떠한가를 견주면서 “인천은 거미줄 가운데에서도 아주 촘촘한 거미줄과 같은 곳이야. 진짜 골목이 많거든. 아무리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인천에 와서 차를 몰면 길을 헤매지. 인천 택시기사가 서울에 가서 택시를 몰 수 있어도, 서울 택시기사가 인천에 오면 택시를 못 몰아.” 하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안 해도 우리들은 몸으로 느끼며 알고 있었습니다. 인천에는 마땅히 너른 터가 없고 놀이동산도 없었지만, 그다지 좁지 않으면서 잘 발돋움해 있는 골목길은 우리 모두한테는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풀과 나무와 숲은 드물었지만, 바닷가에서 배를 보거나 타고, 기찻길가에서 철길놀이를 하거나 쇠돈 납짝꿍 만들기를 하고, 늦은밤까지 숨바꼭질을 하면서 박쥐들 날갯짓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면서 살았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천이라는 도시는 지금 시장이 외치고 있는 ‘명품도시’가 아닌 ‘골목도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부터 골목도시였고 지금도 골목도시이며, 앞으로도 골목도시로 나아갈 때, 인천이라는 곳이 인천다움을 지키거나 가꾸면서 한껏 키돋움을 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골목도시는 아니었으리라 봅니다. 개항기에는 ‘한국에서 빼앗은 물자를 일본으로 빼내는 들머리’ 구실을 해야 했고, 해방 뒤에는 ‘일제가 지은 공장과 여러 시설을 바탕으로 서울을 개발하도록 물자를 올려보내는 들머리’ 구실을 해야 했습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싼 일삯으로 묶어 두는 ‘서울 변두리 공장 도시’로 인천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러는 가운데 ‘하꼬방’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게딱집집이 잔뜩 들어서게 되었을 테지요. 그리고 이런 역사가 한두 해도 아니고 열 해나 스무 해도 아닌 서른 해 마흔 해를 거치며, 이제는 자연스러운 인천 문화로 인천 삶으로 자리를 잡았으리라 봅니다. 이리하여 인천 옛 달동네 한켠을 쓸어내고 아파트를 올려세우면서도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라는 곳이 서는구나 싶어요.


.. 베르트는 창문이 나 있는 머리 같은 것은 잘 그리지 못한다. 아니, 잘 그릴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심사위원들은 베르트가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고 말할 것이다. 피카소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을 내면, 전에 그린 내 그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  (49∼50쪽)


 먼 옛날에는 조용조용 사는 터전이었다가 비류백제가 뿌리를 내린 곳이었습니다(미추홀). 온조백제한테 무너지면서 흐지부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듯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순사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은 뒤 숨어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권리를 되찾은 조봉암 선생이, 일제한테 짓눌렸던 우리 나라를 올곧게 일으키려고 동지를 모으고 후배를 북돋우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류백제가 무너지듯 백범 선생도 조봉암 선생도 역사에서 이슬로 스러집니다.





.. “아니, 유명한 화가의 기법으로 그린 거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칼라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죠.” 내가 말했다. “그 애는 내가 말해 준 대로만 그렸으니까요. 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더구나 유명한 화가의 기법으로 직접 그렸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똑같이 멋진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그 그림이 진짜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몰려오지 않았나요?” “거장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믿었던 거야.” 엄마가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써 있었다면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인가요?” “당연히 그렇지.” “사람들은 무엇을 감상했나요? ‘그림’이었나요, 아니면 그림 밑에 써 있는 ‘서명’이었나요?” ..  (84쪽)



 지난 토요일, 옆지기 동생과 옛동무하고 동네 미술전시터(스페이스 빔) 나들이를 갔습니다. 올해 미술대학을 마치는 인천 그림꾼들 ‘신진작가 초대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그림 보는 눈이 없고, 그림 즐길 줄 모르는 저입니다. 이번 그림잔치를 보면서도, ‘음, 음.’만 나올 뿐, 딱히 어떠한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 제 눈높이가 낮고 눈길이 얕아서일 테지요. 어쩌면 새내기 그림꾼들 그림 눈썰미나 깊이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는 터라, 살짝 아쉬울 수 있습니다. 그저, 오즈음 그림꾼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느낌은 조금 받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저마다 자기가 발딛고 살아가는 곳에서 부대끼는 사람들 삶이 그림이나 사진이나 글로 나타나거든요.


.. 실로 뜬 테이블 보, 피아노 덮개, 양복 등에는 왜 만든 사람의 이름이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든 이름을 쓸 자리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  (90쪽)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그렸던 그림을 떠올려 봅니다. 연필로도 그리고 크레파스로도 그린 1960∼70년대 산골마을 아이들 그림을 떠올려 봅니다. 이 아이들 그림에는 이 아이들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습니다. 또, 저는 이 아이들과 같은 삶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예전 아이들 그림을 보며 눈물이 핑 돌곤 했어요. 동네 미술전시터에 내걸린 새내기 그림꾼들 그림에도 이 그림꾼들 삶과 생각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시에서 살고는 있어도 도시 삶을 그닥 달가워하지 않고 반기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탓에 이분들 그림이 제 마음 깊은 자리까지 못 파고들지 않나 싶습니다.


.. 난 사람들이 기도를 올려 신을 귀찮게 하는 일을 될수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신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면 신은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먼저 도와줄 것이다 ..  (114쪽)


 하긴. 그러겠네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볼 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떤 마음이겠네’ 하고 느낍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왜 그렸을까?’ 하고 묻게 됩니다.





 한 세월 두 세월 겹겹이 쌓인 인천이라는 곳은,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며 골목도시 문화를 이루어 낸 사람들 삶이 진득하게 배어 있습니다. 이런 골목도시 문화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라면, 인천에 발을 디디면서 ‘이야, 참말 재미난 곳이네. 하늘나라가 따로 없어.’ 하고 웃음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목길을 도시문화나 도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전국에서 공기와 물이 가장 더러운 곳이라더니, 영판 글러먹었군’ 하고 되뇌이지 싶습니다.

 제가 깃든 배다리 골목집 한복판에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종합건설본부 공무원 분들은 골목을 모르거나 골목을 느끼려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2009년 도시엑스포와 2014년 아시안게임으로 이름값을 높여 뒷날 대통령 출마까지도 노리는 ㅇ 시장님은 언제나 자가용으로만 아파트에서 아파트 사이로, 큰 건물에서 다른 큰 건물 사이로만 움직이실 테니, 골목집과 골목길로 가득한 인천 삶터를 있는 그대로 돌보거나 가꾸면서 ‘참다운 명품이란 무엇이며, 인천에만 있는 명품은 무엇이고, 인천에서 돋보이도록 하면서, 사람들이 인천으로 찾아오도록 이끌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에서는 크게 놓칠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2) 그림 그리는 즐거움


 저도 가끔 그림을 그립니다. 그야말로 가끔 그립니다. 저는 스스로 ‘참 못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좋아하니까’ 그립니다. 헌책방을 그려 보고도 싶지만, 지금은 사진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느껴서 헌책방 그림은 그리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두 눈으로 더 많이 들여다보고 온몸으로 더 많이 부대끼는 가운데, ‘빈 방에 고요히 앉아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대로’ 뒷날 언젠가 헌책방 그림을 그려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 피 카 소. 엄마는 전에 그 화가가 훨씬 정상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많이 그렸었는데, 다른 기법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아요.” 내가 말했다. …… 어떻게 죽은 새 옆에 있는 소녀의 조각상은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하고, 물고기 모자를 쓴 여자의 그림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은 그런 그림을 미술관에 버젓이 걸어 두고, 할아버지 집을 지나갈 때 혹시 조각상을 살 수 없겠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지나칠 수 있을까? ..  (43∼44쪽)






 서너 해 앞서였나, 중국 연길시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아주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석 점. 연길시 골목길을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다니다가 꽤 살갑다고 느껴진 어느 집 한 채를 그리고, 짐자전거를 둘 그렸습니다. 한 시간 남짓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자니, 중국사람 몇몇이 뒤에 서서 멀거니 들여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더군요. 사진을 찍을 때는 싫어하거나 공안이 달려오기도 했는데, 그림을 그릴 때에는 모두들 군말이 없었습니다.


.. 월등한 1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엄마는 그렇게 말한다. 특히 ‘월등하다’는 말을 강조한다. 엄마는 그런 식으로 나를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렇지만 내가 별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해 엄마가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난 공부를 특별히 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 사실 나는 공부로 1등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최고가 되고 싶다 ..  (60, 62쪽)


 예전에는 헌책방 찾아가는 길그림을 손으로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요사이는 안 그립니다만. 셈틀 그림풀그림을 다룰 줄 몰라서 손으로 그리기도 했는데, 연필과 볼펜을 써 가며 손으로 종이에 그리는 그림이 한결 좋았어요. 느낌도 나고요. 제가 두 다리로 골목골목을 죄다 헤집고 다니면서 몸으로 느낀 다음, 1:5000 길그림책을 펼쳐 놓고, 어느 길로 어떻게 다녔는가를 떠올립니다. 그러고 나서 길 하나까지 샅샅이 따지면서 그렸습니다.


.. 엄마가 집을 떠난 뒤 난 그 사이 나이를 네 살이나 더 먹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내 정신적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를 자주 보지 못했고, 어쩌다 만나도 난 마음속에 있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강당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내 친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 ..  (123쪽)


 글을 쓸 때는 글맛이 있어 좋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맛이 있어서 신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맛이 있어 즐거워요. 사랑을 나눌 때에는 사랑맛이, 밥을 먹을 때는 밥맛이, 잠을 잘 때는 잠맛이, 골목길을 거닐 때에는 길맛이 느껴지니 반갑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땀맛이 싱그럽습니다. 일을 마치고 술 한 잔 걸칠 때에는 술맛이 짜릿합니다. 오랜 너나들이를 만나면 사람맛이 기쁩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맛은 얼마나 속을 시원하게 비워 주는지요.




 (3) 《아빠의 만세발가락》이라는 책


 지난날 《피카소는 미쳤다》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사라져 버렸던 책이 《아빠의 만세발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책이름 때문에 사랑을 못 받았는지, 우리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책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이 책이 나온 네덜란드에서는 크게 사랑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 아빠는 기진맥진하게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구두코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빠의 구두코는 하늘을 향해 들려 있다. 아빠의 발가락이 만세를 부르듯 하늘을 향해 뻗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아빠의 발가락을 ‘만세발가락’이라고 부른다 ..  (8쪽)


 옮긴이께서 마음을 야무지게 먹고 책이름을 고쳐서 새로 냈는데, 글쎄, 어찌 될는지 모릅니다. 책을 두 번 읽고 나서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아 놓은 저로서는, 처음 나왔던 《피카소는 미쳤다》라는 이름이 한결 마음에 드는데.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도 잘 와닿고.


.. 내가 여러 가지 다양한 눈이 있는 얼굴을 그려 놓고 피카소처럼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일이 피카소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좋게 아니면 나쁘게? ..  (85∼86쪽)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한껏 드러내면서 신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이야기를 건네는 책이라면, 우리 어른들이 ‘껍데기 이름값’에 파묻힌 채 ‘그림을 그림 그대로 느끼고 즐기지 못하는’ 형편을 슬그머니 꼬집기도 하는 책이라면, 아이들 마음자리와 생각자리를 고이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거품과 다를 바 없는 숫자(성적 따위)’에만 매달리는 교육 얼거리를 알게 모르게 나무라는 책이라면, ……. (4341.2.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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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우리 급료 시스템이 바뀌어서 점수제가 됐단 말이야! 점수를 따면 월급이 자꾸자꾸 올라가는 시스템이라고. 지금 그 포인트를 열심히 버는 중이야.” “점수제?” “즉, 좋은 교사가 된단 말야!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나…… 아무튼 지금 열심히 버는 중이야! 전에는 등교거부하는 놈을 등교시켜 100포인트를 벌었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꼭…….”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당연 빠따지! 전에도 왕따 문제를 해결했다니까? 이대로 가면 다음 월급은 꼭 올라갈 거야!” “헤에,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월급이 올라간다? 그것 참 편리하구나.” “그치? 이건 진짜 천재 문제 해결사라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니까.” “너 정말 썩었구나.” “응?” “뭐가 포인트야, 점수에 놀아나면서? 너 언제부터 그런 월급쟁이 교사가 됐어? 그런 선생들은 우리가 옛날에 제일 싫어하던 것 아니었어?” “뭐?” “돌아가. 다신 오지 마. 너같이 썩은 녀석하고는 오늘로 절교다!” ..  《후지사와 토루/서현아 옮김-반항하지 마 (21)》(학산문화사,2002) 62∼64쪽


 만화책 《반항하지 마》를 보다가 속이 싸합니다. 주인공 영길이가 오랜 동무 용이한테 한소리 듣고 쫓겨나면서 들은 말 “너 정말 썩었구나.”에서 가슴이 찌릿합니다. 거짓부렁 교사가 아닌 참된 교사가 되겠다던 동무녀석이 점수(숫자와 돈)에 눈이 멀어서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하는 교사’와 마찬가지가 되는 꼴을 못 봐주겠다며 내뱉은 말 한 마디, 이 말마디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습니다.

 나는 얼마나 책다운 책에 내 마음과 몸을 바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책 만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합니다. 책 하나에 얽힌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 되새깁니다.

 책 하나를 만들 때에는 여러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맨 먼저, 책에 담긴 속살인 줄거리를 이루어내는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이들은 글을 쓰는 사람일 수 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수 있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들 글꾼-그림꾼-사진꾼 이야기를 잘 추스르고 매만지고 다듬고 보듬어서 종이에 담아내도록 엮어내는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이들을 가리켜 출판편집자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 글-그림-사진(원고)을 찍어낼 종이를 알아보는 사람(출판제작자)이 있고, 출판제작자한테 종이를 파는 지업사가 있습니다. 지업사에서 넘긴 종이를 받아서 찍는 인쇄업자가 있고, 책겉이 좀더 단단하도록 꾸미는 코팅업자와 제본업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은 배본회사 일꾼 손을 거쳐 나누어지고, 운송업자가 짐차에 실어서 책방으로 하나하나 나릅니다. 그러면 책방 일꾼은 갈래에 따라 책꽂이에 꽂아 놓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땀을 쏟는 이들이 더 있습니다. 책 몸글이나 겉그림을 꾸미는 사람(디자이너)이 있습니다. 몸글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는가 돌아보는 사람(교정/교열)이 있습니다. 주문을 받아서 책방으로 보내는 몫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출판사 살림을 꾸리는 사람(경리)이 있습니다. 책방에 진열이 잘되어 있는가 살피고, 책방에서 책을 판 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영업)이 있습니다. 새책 소식을 알리려고 바쁜 사람(홍보)이 있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글꾼-그림꾼-사진꾼이 자기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도록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사람, 볼펜을 만드는 사람, 붓과 물감을 만드는 사람, 사진기와 필름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들 글꾼-그림꾼-사진꾼과 책마을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차를 몰아 주는 사람(버스기사, 전철기사, 택시기사, 기차기사)이 있습니다. 늘 밥을 해먹을 수 없으니, 밥때 되면 밥을 해 주는 사람(밥집 일꾼)이 있어요. 밥집 일꾼은 농사꾼과 고기잡이가 거두어들인 곡식과 물고기 들을 사들여서 밥을 할 테지요. 이들 모두가 입을 옷을 만드는 일꾼이 있습니다. 이들이 마음과 몸을 쉬도록 해 주는 사람(술집이나 찻집 일꾼)이 있습니다. 이들이 손수 집을 지을 수 있으나,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일꾼도 있습니다. 겨울에는 춥지 않도록 불을 때야 하니 석탄이나 석유를 캐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하나가 나오면, 맨앞이나 맨뒤 자리 한쪽에 ‘판권’이라는 이름으로, 책 엮어내느라 애쓴 사람들 이름 몇이 함께 찍힙니다. 앞쪽 겉그림에는 글꾼-그림꾼-사진꾼 이름이 적힙니다. 틀림없이 이들은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고 품과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렇게 땀을 흘리며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애쓴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꾼-그림꾼-사진꾼으로 있는 분들이, 또 책마을사람으로 있는 분들이 이런 애씀이들 얼과 넋을 고이 헤아려 줄 때, 고이고이 읽을 책이 우리 앞에 나옵니다. 세월이 갈수록 빛을 더하는 책이 우리 앞에 놓입니다.

 그렇지만 글꾼부터 해서 책마을사람들이 애씀이들 얼과 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아예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으로서는 불티나게 팔리거나 엄청나게 사랑받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고 해도 언젠가 뽀록이 납니다. 볼장을 보지요. 좋은 책 하나 아닌 돈으로, 이름값으로, 권력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이들 껍데기에는 생명이 없거든요.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사람한테 빛을 줄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하루에 열두 끼나 이백 끼를 먹을 수 없어요. 비싼 밥을 먹는다고 몸에 더 좋지만은 않으며 병원 진료를 많이 받는다고 더 오래 살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과 매무새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조금 덜 팔리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팔리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덜 알려지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알려지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덜 읽히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읽히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책쓰기, 책엮기, 책팔기 모두 사람 사는 일입니다. 돈(숫자)을 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책 하나 쓰고 엮고 팔면서 얼마나 ‘책’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인지요. 책 하나 사서 읽으며 얼마나 ‘책’을 돌아보고 있는 우리들인지요.

 1969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끄집어내 봅니다. 이때 뒤로 두 번 다시 나왔습니다. 요새는 제대로 읽히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1977년에 처음 소개된 뒤로는 다시 못 나오는 《폴 란돌미-슈베르트》라는 책을 책상맡에서 잠깐 집어들어 넘겨 봅니다. 앞으로도 다시 나올 일이란 없을는지. 2006년에 나온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병》(한울,2006)이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잠깐 뽑아서 읽습니다. 이 책을 사 준 사람은 몇이나 될까나. 요새 사티쉬 쿠마르 님 책이 곧잘 읽히는데 《부처와 테러리스트》 같은 책도 읽히고 있나? 《아레오파지티카》라는 책을 아는 언론인은 얼마쯤 있으려나. 《항일유적답사기》 같은 책은 두루 사랑받기 힘들까. 맛집이나 멋집 따위를 이야기했다면 잘 팔릴 텐데 왜 구태여 ‘항일유적’ 같은 데를 돌아본다고. 무교회를 말하건 예배당을 말하건, 똑같이 하느님을 모시고 우리 스스로 올곧게 살자는 소리일 텐데, 어이하여 우리네 종교인들은 우찌무라 간조를 안 읽고 김교신을 못 읽을까. 글쎄.

 그러나 남 말할 형편이 아니지. 나부터 내 삶을 다스리고 내 자신을 돌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책을 얼마나 허물과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나. 스스로도 참 좋다고 한 책을 읽어낸 뒤 내 삶을 내 스스로 얼마나 가꾸거나 갈고닦거나 다스리고 있었나. 나는 남들을 보며 “너 참말 썩었구나.” 하고 읊는 입은 있되, 나를 돌아보며 “난 참말 썩었구나.” 하고 무릎꿇거나 뉘우치는 입까지 있었는지. (4341.2.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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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야생으로 - 시튼의 야생동물 이야기 6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지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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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다시 야생으로
- 글쓴이 : 어니스트 톰슨 시튼
- 옮긴이 : 장석봉
- 펴낸곳 : 지호(2004.2.27.)
- 책값 : 11000원



 이 책 하나 34 ― ‘멧돼지, 너구리, 박쥐’는 우리 이웃
 :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다시 야생으로》를 읽고



 (1) 사진과 삶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기꺼이 내걸어 주면서 사진잔치를 열어 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저녁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마십니다. 저녁 먹는 밥집에서 나물 반찬을 많이 내어줍니다. 달래무침이 보이고 원추리무침이 보입니다. 쉬 맛볼 수 있다면 쉬 맛볼 수 있는 나물이지만, 쉬 맛보기 어렵다면 쉬 맛보기 어려운 나물입니다. 아직 봄이 아니라 이런 나물을 맛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비닐집에서도 키우고 중국에서도 사들이고 있을 테지요.

 원추리무침을 냠냠짭짭 하다가 문득, 이 원추리무침이 원추리무침인 줄 아는 분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추리가 봄에 노랗게 고운 꽃을 피우는 줄 아는 분은 또 얼마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제 그 말들도 콜리베이가 자신들과 같은 동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대로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야성의 피가 흐르는 말이라는 것을. 자줏빛으로 물든 평원에 밤이 찾아왔을 때 녀석은 야생마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길고 힘든 여행을 한 끝에 드디어 고향을 찾은 것이다 ..  (29쪽)


 밥집 나물 반찬을 여러 그릇 비웁니다. 그렇게까지 맛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물 반찬이었기에 자주 손이 갑니다. 좀 시고 달고 짠 맛이 있습니다. 양념을 많이 하신 듯합니다. 버섯칼국수를 먹는데, 여기에 넣는 양념도 아주 목과 혀를 건드릴 만큼 맵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이나 맵다고 느끼지, 다른 분들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저와 옆지기는 나물을 먹을 때 따로 무치지 않습니다. 그냥 날것 그대로 물에 헹구기만 해서 먹습니다. 무도 배추도 날것 그대로 먹습니다. 정구지도 그냥 먹으면 더 맛납니다. 시금치도 얼갈이도 흙만 씻어내고 먹습니다. 이렇게 먹으면서 풀맛이 참 달다고 느낍니다. 그러면서 배부르게 먹지 못합니다. 익힌 푸성귀는 배부르도록 먹으면서도 더 먹게 되지만, 날 푸성귀는 많이 먹지도 못하게 되고 꼭 배에 알맞도록만 먹게 됩니다.


.. 그곳에는 인간이 마련해 주는 맛있는 목초도 없고 곡물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야생의 질긴 풀과 드넓은 평원, 그리고 그곳으로 불어오는 바람뿐이다. 그러나 콜리베이는 이곳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얻었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  (31쪽)


 사진잔치를 여는 곳에서 여러 분들하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분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진기로 담아내는 모습은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에서 어느 한 순간을 훔치는 일’이 아닐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한 말씀 올립니다. “어떤 사진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한 순간을 훔치는 사진일 수 있을 테지만, 제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끼기로는, 제가 그분 삶에서 한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내면서 그 순간을 선물해 드리는구나 싶어요.” 하고.

 한 분이 말씀합니다. “디지털사진으로 찍기보다는 필름사진도 함께 찍어 보면, 사진을 찍는 맛을 남달리 느낄 수 있”다고. 저는 필름과 디지털 두 가지 모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낀 대로 한 말씀을 올립니다. “필름사진이라고 해도 똑같이 기계이고, 디지털사진이라고 해도 똑같이 손이 많이 가게 되어요. 둘은 좋은 대목과 아쉬운 대목이 다르게 있으니, 이 다름을 잘 느끼고 헤아리면서 찍으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이제는 필름사진 쓰는 이가 많이 줄어서 예전처럼 여러 가지 필름을 고루 쓰지 못해 아쉬워요. 디지털은 무엇보다도 돈 나가는 소리가 적게 들려서 좋기도 하지만, 필름보다 좀더 자유롭게 흐름을 죽 이어가면서 담을 수 있는 좋은 대목을 살리면 한결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하고.


.. 5월의 숲은 먹을 게 풍족하다. 일찍 피는 작은 꽃들에는 대개 양분의 저장소인 구근이 있다. 꽃이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딸기가 식량이 되었다. 하지만 독이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만물의 어머니는 그런 식물은 아주 고약한 냄새나, 얼얼한 맛이 나거나 아니면 따끔따끔하게 만들어 놓아서 숲에 사는 현명한 돼지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 어미는 독이 있는 식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끼들은 어미를 따라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 보면서 그런 식물에 대해 알아갔다 ..  (37쪽)


 그러게.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요즈음 우리 둘레에서 사진기 없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손전화에는 기본으로 사진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만 안 붙이고 있을 뿐이지, 누구나 사진을 찍거나 즐기면서 살아간다고 느껴요. 그런데 참말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몇 사람쯤 될는지요. 사진을 그저 찍어대기만 하고, 못 즐기면서 지내지는 않나요. 사진 찍는 재미를 느끼지 않을 뿐더러, 느끼려는 마음도 없지는 않나요.

 일을 하는 재미나 즐거움, 놀이를 하는 재미나 즐거움, 사람을 만나는 재미나 즐거움, 책을 읽는 재미나 즐거움, 무엇보다 우리한테 주어진 목숨 하나 부여잡고 살아가는 재미나 즐거움을 얼마쯤 헤아리는 우리들일까요.


.. 그렇다면 야생동물들이 사용하는 치료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숲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일광욕, 냉수욕, 따뜻한 진흙욕, 단식, 물 치료, 구토, 설사약, 먹이나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 휴식. 그리고 다친 부위를 혀로 핥는 것들이다. 그러면 치료법을 처방하고 치료 시간을 정해 주는 의사는 누구일까? 단 하나, 그것은 “몸의 갈망”이라는 의사이다 ..  (71쪽)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길, 건너편 마주앉은 아주머니 한 분이 삼십 분이 넘도록 손전화로 이야기를 합니다. 큰 목소리로. 아주머니가 건 손전화 건너편 사람과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가를 우리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꾸벅꾸벅 졸다가 엉뚱한 데에서 내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왱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덜컹거리는 전철 소리로도 버거운 귀는 수다 소리에 시달리고 들볶이며 아파 옵니다. 어지러워서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아도 소리는 들립니다.


.. 이 강인한 멧돼지 전사가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치 자기가 이긴 것처럼 느꼈다. 그는 그 멧돼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다. 녀석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 그는 이 멧돼지 부부가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도 보았다.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유대감을 말해 주는 어린 새끼들도 보았다. 당신은 동물에게는 육체적인 사랑밖에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물들의 사랑은 인내하고 함께 싸우고 또 인내하면서 유지된다 ..  (126∼127쪽)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이부자리를 깔고 안쪽으로 파고들어도 전철 소리는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가 깃든 집 바로 앞이 철길이거든요. 오 분에서 칠 분마다 한 번씩 전철이 오가며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집안까지 들려옵니다. 밤에는 일찍 자지 않도록, 새벽에는 늦잠 자지 않도록 깨워 주는 전철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전철 소리는 늘 함께하는 벗인 셈입니다. 우리 형편으로는 조용하며 값싼 집을 얻을 수 없으니, 도시 재개발로 이 동네를 쓸어버리지 않는다면 오래오래 벗삼을 전철 소리입니다.


.. 너구리가 우리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이런 내용일 것이다. 너구리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의 상징이다. 그리고 만약 이 나라의 우둔한 의원들이 흉악한 정책을 펴서 텅 빈 나무들과 함께 너구리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땅이 온통 돈과 배금주의에 정복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부디 나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세상을 뜨고 싶다 ..  (131쪽)


 잠깐 바람이나 쐴까 하고 장바구니를 들고 가게 마실을 갑니다. 집 둘레 구멍가게가 아닌 동인천역 앞쪽에 있는 조금 큰 가게로 갑니다. 그곳에는 번데기깡통을 하나에 550원에 팔아요. 동네 구멍가게는 1000원, 할인마트는 850원, 그 가게는 550원. 약과 열 개들이도 가게마다 값이 달라, 어느 곳은 1000원 어느 곳은 1300원 어느 곳은 1800원입니다.

 집을 나서니 밤바람이 제법 찹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은 시립니다. 코를 훌쩍이면서 걷습니다. 열한 시를 갓 넘긴 밤길에 비틀비틀 걷는 사람이 보이고, 술꾼을 태우려고 기다리는 택시가 보입니다. 길을 거니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가게에는 손님이 얼마나 들었을까나.

 몇 가지 먹을거리를 고르며 셈을 치릅니다. 제가 뻔히 장바구니를 들고 값 치른 물건을 담고 있는데에도 “봉투 드릴까요?” 하고 묻습니다.


.. 겨울이 없는 곳에는 멋진 봄도 없는 법이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땅에서만이 매년 찾아오는 꿀벌과 제비꽃의 기적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법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곳에는 매서운 눈과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야자나무가 무성하고 일 년 내내 따뜻한 땅일지라도 봄의 비밀스러운 힘은 나타났다 ..  (231쪽)


 장바구니를 손목에 끼고 돌아가는 길. 이제 때는 늦어 지하상가는 쇠문을 내립니다. 이렇게 되면 건널목이 없는 요 동네에서는 찻길 가로지르기를 해야 합니다. 느즈막한 이맘때 찻길을 가로지르는 우리들을 보고도 교통순경은 붙잡지 않습니다. 저희들도 알 테지요.


.. 사실 그는 자신의 말을 동물들이 알아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친절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은 동물들도 이해할 것이라고는 느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  (312쪽)


 밤하늘 별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 집에 닿습니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등불이 그닥 안 많은 이 골목길에서도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는 하늘이 아닌 땅에 별이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했다는데, 참말 우리네 땅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네 땅에 놓여 있는 이 많은 별들은 서로를 얼마나 비추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나 모르겠어요. 밤하늘 빛나는 별은 길잡이가 되기도 했고 길동무가 되기도 했는데, 도심지 땅에 내린 별은 누구한테 도움이 되고 있을까요. 누구한테 길을 일러 주고 누구와 동무를 삼고 있을까요.


 (2) 한 해 천만 원


 어제, 사진잔치 자리에는 대학교 다니는 어린 학생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밥자리에서 잠깐 등록금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요즘은 한 해에 등록금이 얼마쯤 나가는지. 인문대학인데 한 학기에 360만씩 낸답니다. 그러면 한 해에 720만 원. 책값이며 밥값이며 찻삯이며 하면 천만 원은 우습지 않게 들겠네.


.. 스라소니는 무시무시한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악마처럼 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미 멧돼지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미 멧돼지에게 겁을 준다고? 어린 새끼가 “엄마, 엄마, 도와줘요!” 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  (92쪽)


 하하, 천만 원이라니. 그러면 대학교를 네 해 만에 잘 마친다면 사천만 원이라는 소리? 이야, 사천만 원이라니. 아이 하나에 사천만 원이면, 아이가 둘이면? 셋이면?

 어이구, 어버이 된 사람은 허리가 휘어서 어찌 사나. 이렇게 엄청나게 아이들 배움값을 치러야 하니, 그렇게 들인 돈을 ‘본전 뽑기’ 해야겠다면서 눈이 돌아갈밖에 없겠네. 본전에다가 이자를 붙여서 돌려받아야겠다고 생각할밖에 없겠네. 돈 버느라 바쁘고 돈 갚느라 힘겹고 돈 끌어들이느라 눈이 벌걸밖에 없겠네.

 이런 세상이라면, 대학교가 학문을 참다이 파고들기란 꿈 같은 소리가 되겠네. 대학교 졸업장으로 한 사람 마음밭을 알뜰히 다스려 주는 일이란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겠네. 대학까지 다니며 얻거나 이룬 열매를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나누거나 베풀자는 이야기는 미친놈 방귀 소리로나 여기겠네.


.. 내면의 충동에 의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짝짓기를 했다. 자기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 그곳에는 구멍이 난 커다란 나무가 아직도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그 귀중한 땅은 그 귀중함이 인간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름다움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너구리 부부는 만물의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보다 좀더 많은 것들을 새끼들에게 가르쳤다. 세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  (168∼169쪽)


 한 달 이삼십만 원 벌기에도 빠듯한 내 처지를 돌아보자니, 뒷날 아이를 낳아서 기르게 된다면 대학교는커녕 제도권 초중고등학교나 제대로 넣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돈으로 굴러가야 하는 학교 틀거리라면, 이런 학교 틀거리에서 아이들한테 안겨 주고자 하는 지식이란 무엇일는지. 돈에 엄청나게 기울어져 있는 학교 틀거리라면, 이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마음에는 무엇이 싹트고 자라서 동무들끼리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갈는지.


.. 어미는 자기 어미에게 배웠던 것들을 새끼에게 주로 실습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  (217쪽)


 하긴, 그렇구나. 꼭 이래서만은 아니지만, 우리 옆지기는 ‘우리가 가르치면 되지요’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학교에 떠넘기면 안 된다고, 학교 교사한테 떠맡기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가 배워야 할 것들은 누구보다 우리들, 어버이 된 사람이 먼저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먼저 제대로 살피고 돌아보고 추스르면서 배울 수 있어야, 아이들도 기꺼이 배우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지식이라면 아이들한테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어버이 스스로 고맙게 새길 수 없는 지식이라면 아이들 삶과 얼과 넋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 박쥐 한 마리가 잡아먹는 벌레의 수는 하루 밤에만 수백 마리에 달한다. 그러므로 집 주위의 벌레가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 박쥐가 날아다니는 벌레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인간의 적에게 매서운 타격이 가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아탈라파(박쥐)를 우리에 가뒀던 소년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와 관련해서는 이것 말고는 밝혀진 것이 없었다. 파리 때문에 생긴 전염병이 집을 습격했고, 그 병마가 떠난 뒤 새롭게 생긴 작은 흙무더기가 두 개 생겼다. 옆에 나무 탑이 하나 있는 조용한 묘지였다 ..  (248, 249, 258쪽)


 지난주에 보건소에 찾아갔습니다. 인천 중구와 동구에 있는 보건소에 차례차례 갔습니다. 먼저 중구 보건소에서는, 우리 주소지가 중구가 아니라며 동구로 가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중구 보건소가 코앞에 있어서 가까운데. 한참 걸어서 동구 보건소로 가니, ‘산부인과에서 임신증명서를 떼어 와야’ 기초진료를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중구 보건소로 가서 알아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중구 보건소에서는 동구로 가라고 하고, 동구에서는 임신증명서를 떼어서 중구로 가라고 하고. 허허 참.


.. 무정한 만물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만물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신의 자식들 중에 가장 강한 아이를 영원히 사랑한다. 그 위대한 어머니가 지금 아탈라파에게 다가왔다 ..  (284쪽)


 (3) 《다시 야생으로》라는 책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이 쓴 《다시 야생으로》를 다 읽어냅니다.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눈물을 쪼르르 흘렸습니다. 집말이 되고 싶지 않아 끝끝내 들말로 돌아간 짐승 이야기, 자기 어미를 곰한테 빼앗긴 앙갚음을 끝내 해내면서 자기 짝과 새끼를 지켜낸 멧돼지 이야기, 들너구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박쥐가 사람 삶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 들기러기 식구들이 죽는 날까지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이야기, 사람한테 붙잡혀 동물원에 갇혀서 구경거리 신세가 되는 원숭이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나갑니다.


.. 육식만 하는 곰은 무시무시한 피부병에 자주 걸린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곰은 더욱 심하다 ..  (76쪽)


 시튼 님 《다시 야생으로》를 우리 말로 옮긴 장석봉 씨는,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이야기 역시 그의 다양한 재주를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어찌 재주만으로 이런 이야기와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갖춘 자연학자이기도 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도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따뜻한 마음씨로 자연 삶터와 들짐승을 꾸밈없이 바라보고 아낌없이 껴안으면서 살았기에 이런 글을 그리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 다른 요정들과 달리 인간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녀석은 동굴이나 나무 구멍에서 사는데, 낮에는 항상 몸을 숨기고 있고 또 겨울에는 지하에서 잠을 자든지 아니면 따뜻한 지방으로 슬그머니 옮겨간다. 깃털은 없지만 비행에는 놀라운 재능을 타고났다. 게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을 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달빛 속에서도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라면 그런 놀라운 능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결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198∼199쪽)


 돌이켜보면, 우리 스스로 마음을 따숩게 추스르지 않으니 사회 문제와 범죄가 끊일 수 없습니다. 대학교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온 똑똑한 분들이지만, 정작 그분들 마음에 따스함이 깃들고 있지 않으니, 정치 권력을 붙잡아도 기득권 지키는 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영어만 잘하는 재주꾼, 지식만 가득한 재주꾼, 가방끈만 긴 재주꾼, 그렇지만 머리통만 굵어서 몸통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재주꾼인 우리들로 바뀌어 간다면, 우리 세상은 아름다움하고 차츰차츰 멀어지기만 합니다.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부자한테 ‘여보쇼, 그 돈 좀 사회에 내놓으시오’ 하고 말하기 앞서, 한 달에 오십만 원 버는 우리들부터 ‘다문 만 원이나 오천 원이나마 덜어내며 사회에 내놓는’ 매무새로 살아가야지 싶습니다. (4341.2.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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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한쪽에서 똑 똑 똑 하는 소리가 납니다. 아침에 몸을 씻으며 빨았던 바지 몇 벌을 벽에 걸어 놓았더니 물이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바닥에는 걸레를 대 놓습니다. 요즈음은 빨래를 마당에 내다 널면 꽁꽁 얼어붙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불을 적게 때고 바깥바람이 잘 들어와서 잠자는 방을 빼놓고는 영 도 밑으로 육 도나 팔 도까지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마루에 널어도 빨래가 얼어붙어, 잠자는 방 벽에 못을 잔뜩 박아 놓고 겨울 빨래를 널어 놓습니다.

 세탁기를 안 쓰고 탈수기도 없으니 빨래마다 물이 방울지어 떨어집니다. 제아무리 힘껏 비틀어 물을 짜내어도 방울이 집니다. 세탁기를 안 쓰니 겨울 손빨래를 마치면 손이 차갑게 얼어붙습니다. 동무와 피붙이 들은 뭐 하러 사서 고생이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손빨래를 하면 아무 옷이나 막 입지 않게 되는걸요. 물을 한결 적게 쓰고 옷을 좀더 아끼게 되는데요.

 사진기자 삶을 다룬 만화책 《제 3의 눈》(닉스미디어,2001)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여섯 권을 내리 읽어냅니다. 판이 끊어져 뒤엣권은 더 찾아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부하가 소신을 가지고 한 잘못이라면 상사가 덮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 그래서 상사가 있는 거니까.(6권 114쪽)”, “그냥 상황에 맞춰 셔터를 누를 뿐. K대 대학원에서 저널리즘 과정을 졸업한 재원인 너와 논쟁으로 이길 순 없겠지. 반박할 맘도 강요할 맘도 없어. 단지 방해는 하지 마.(6권 132쪽)”, “그런 건 상관없다니까. 정사원과 계약사원, 남자 여자를 따지는 게 아니야. 우리 포토저널리스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6권 88쪽)” 같은 대목을 만날 때마다 한동안 책에 눈을 박고 깊이 생각에 잠깁니다.

 문득, 대학교 한 해 학비가 1천만 원에 이르는 요즈음, 이 나라에서 대학생으로 공부하는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누구한테 얼마만큼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대학교에 가려고 밤잠 새벽잠 쫓아가며 형광등 불빛에 눈이 벌개진 아이들은 대학교에 나아가 무엇을 왜 배우고 싶어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그 돈, 한 해 천만 원이면 네 해면 사천만 원. 이 돈은 대학교 과정을 밟는 데에만 써야 할까 궁금해집니다. 큰마음 먹고 3백만 원짜리 좋은 자전거 장만해서 7백만 원은 잠값으로 쓰며 한 해 동안 전국 나들이를 해 볼 수 있겠지요. 또는, 시골에 논밭 조금 마련해서 손수 먹을거리를 일구어 내는 땀맛을 느껴 볼 수 있어요. 사진기 한 대 장만한 다음, 자기 식구들부터 동네 삶터와 모습을 차곡차곡 담는 가운데 세상을 배울 수 있고요. 태양광 전지판을 집에 달고 지구자원 덜 쓰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요. 성노예로 시달린 할머님 돕는 일에, 우토로사람들 돕는 일에, 어두운 곳에서 야무지게 일하는 조그마한 시민단체 돕는 일에 써 볼 수 있습니다. 요새 책값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천만 원이면 새책 천 권 안팎을 장만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헌책은 거의 오천 권 가까이 장만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예 책방 하나 차려도 좋고요. (4341.1.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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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이야기 카르페디엠 19
안케 드브리스 지음, 박정화 옮김 / 양철북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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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두 친구 이야기
- 글쓴이 : 안케 드브리스
- 옮긴이 : 박정화
- 펴낸곳 : 양철북(2005.11.18.)
- 책값 : 8500원



 이 책 하나 25 ― 엄마한테 얻어맞는 아이를 지키는 동무
 : 안케 드브리스, 《두 친구 이야기》


 

 (1) 서울, 전철, 동무, 고향


 서울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달픕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가 아니라, 누구 하나 안 지친 사람이 없는 사람들만 가득한 대중교통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볼일 마치고 전철을 타고 수원이나 안산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고달플 테지요. 전철에 탈 때부터 자리에 앉을 꿈을 꿀 수도 없는 가운데, 적어도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반을 서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전철로만 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전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또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을 들어가야 하고, 버스에서 내린 뒤 또 걸어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걸어야 할 테니까요.


.. 그러나 벤 아저씨도 나중엔 유디트의 아빠처럼 떠나버렸다. 어느 목요일 밤, 아무 말도 없이. 아저씨와 엄마는 싸우지도 않았다. 처음에 엄마는 무척 초조해 하더니 나중엔 화를 냈다. 그 후 며칠 동안 유디트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덕분에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어느 날 밤 엄마는 유디트를 후려갈겼고, 유디트는 쓰러지면서 옷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  (18쪽)


 옆지기 고등학교 적 동무를 서울 회기동에서 만나고 헤어진 때는 저녁 열 시 반. 전철을 타니 열 시 사십육 분. 터덜터덜 달리는 전철이 동인천역에 닿으니 열두 시를 훌쩍 넘겼고, 역부터 집까지 걸어오니 거의 새벽 한 시.

 서울사람들은 대중교통도 늦게까지 있으니, 저녁 열 시 조금 넘었을 무렵부터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하는, ‘서울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서울에서 사는 회사사람들은 일곱 시나 여덟 시쯤 끝나 가볍게 술을 한잔 마신다고 하여도 겨우 한 시간 남짓 앉아 있다가 금세 자리를 떠야 하는 아쉬움을 살갗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어도 자기 집에 닿으면 열두 시는 우습지 않고 한 시께에 이르니, 몸이 축날 테지요. 더욱이 이튿날 새벽 다섯 시 반쯤부터 짐 챙기고 부랴부랴 새벽버스 타고 전철역에 가서 서울 가는 전철에 몸을 싣고 오징어처럼 짓눌리며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며 회사에 닿아도 여덟 시가 넘어가니, 날이면 날마다 몸은 고단하고, 어서 빨리 주말이 찾아와 모자란 잠 좀 자자고 재촉하게 됩니다.


.. “왜 못했니?” “저…… 또 두통이 도져서요.” 유디트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우선 해 놓은 것만 보자꾸나.” 유디트는 초조하게 책가방을 뒤졌다. 베크만 선생님은 기다리면서 유디트의 수그린 머리를 보았다. 곧은 금발이 얼굴을 덮었다. 베크만 선생님은 문득 저런 스웨터를 입으면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가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힐끗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겁먹은 눈이었다. 왠지 이 아이는 너무 연약해 보여. 도저히 화를 낼 수 없는 아이야 ..  (31쪽)


 서울 회기동에서 인천 끝자락까지 달리는 전철에 타고 있는 고단함에 찌들고 쩐 사람들 얼굴을 봅니다. 갓 스물을 넘긴 아가씨들은 얼굴에 화장을 짙게 발랐지만, 그 화장 뒤에 감춰진 얼굴이 얼마나 힘겨워할까가 마음에 그려집니다. 젊은 사내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리가 없어 서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까요. 그렇다고 자리에 앉아서 가는 사람도 아늑하지만은 않습니다. 좁아터전 전철 걸상에 옹크린 채, 더구나 겨울이라 다들 옷이 두툼하니 더욱 낀 채로 꼼짝을 못하고 한 시간 넘게, 또는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일은 고문이에요.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자율학습에 목이 매어 얼굴이 파리해졌던 중고등학교 수험생 때에도 오십 분에 십 분씩 틈을 주고 걸상에 짓물러진 엉덩이를 쉴 수 있게 했습니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이리도 먼 길을, 날마다 네 시간 남짓 전철과 버스에서 보내며 살아야 할까요. 날마다 네 시간씩 전철과 버스에서 보내면서 만나는 사람은 몇이나 되고, 이렇게 만나는 사람과 몇 시간쯤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가요.

 얼마나 깊은 만남과 사귐이 되는지요. 우리들 ‘서울 아닌 곳 사람’은 왜 ‘서울 아닌 우리 고향이나 터전’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가요. 왜 인천에서, 왜 수원에서, 왜 안산에서, 왜 부천에서, 왜 강화에서, 왜 일산에서, 왜 용인에서, 왜 구리에서, 왜 문산에서, 왜 광명에서, 왜 안양에서, 왜 군포에서, 왜 이천에서, 왜 의정부에서, 왜 동두천에서, …… 서울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찾아가고 돌아가고 해야 하나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우리와 어릴 적부터 같은 골목길과 놀이터와 집과 학교와 마을에서 뒹굴고 뛰놀던 동무들하고 복닥이고 부대끼면서 오붓하게 살아가지는 못하는가요.


.. 미하엘이 말을 더듬거려도 아빠는 결코 재촉하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의 돌 같은 침묵 때문에 미하엘은 더욱 긴장했다. 미하엘은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등과 배의 발진과 갑작스럽게 높아지는 열에 시달렸다.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조차 아빠는 읽을 책과 공부할 거리를 주었다. 당연히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다 ..  (50쪽)


 광명에서 태어나고 일산에서 자란 옆지기네 동무들한테 뿌리는 무엇일까요. 옆지기가 태어났던 들판 판자집은 모두 아파트로 바뀌어, 이제는 어디에서 태어나고 뛰놀았는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숲과 쇼핑센터로 바뀌어 가는 일산에는 새 학교를 자꾸자꾸 짓습니다. 분당도 그렇고 성남도 그렇고 용인도 그렇습니다. 인천에서도 논밭을 메우고 산을 깎아서 만든 연수동에 새 학교를 뚝딱뚝딱 지었고 예전 도심지에 있던 학교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서울 강북 종로에 있던 학교를 강남으로 옮겼듯이. 그러면서 요즈음은 송도 새도시에 새 학교를 짓는다고 법석입니다.

 우리들한테는 새로 짓는 집이 바로 고향이고 일터이며 동네가 되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이름은 주민등록증에만 남을 뿐, 인천사람이고 서울사람이고 부산사람이고 다른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산속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골목길 달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멘트 병원에서 태어나고 시멘트 학교에서 배우며 시멘트 아파트에서 삽니다. 쇳덩이 자가용에 아버지 어머니가 태워서 움직이게 하며 두 다리는 흙 한 뼘 밟을 일이 없지만 십만 원도 넘는 아주 좋은 운동신을 신고 발바닥은 보송보송 말랑말랑입니다.


.. 유디트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동생을 데리러 오는구나.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러면 네 시간이 없지 않니?” 소피가 다시 콜라를 따르며 말했다. “이,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나를 위한 시간이라……. 데니스를 데리고 집에 가면 할 일이 언제나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엄마가 하루 종일 직장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  (64쪽)


 늦은밤 인천으로 달리는 전철은 알맞게 이야기가 있고 알맞게 조용합니다만, 사람들 말소리는 시끄러운 전철 소리에 묻힙니다. 창밖으로는 높직한 울타리가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땅위를 달리고 있어도 땅위를 달리는지 어쩐지 알 수 없습니다. 창문을 내다보아도 어느 역에 서는 줄 모릅니다. 전철 안에 마련된 자막방송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아야 겨우 알 수 있습니다.

 졸고 있는 사람, 자고 있는 사람, 주정하는 사람, 수작 거는 사람, 손전화 문자 보내는 사람, 들고다니는 텔레비전 보는 사람이 있으나 책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긴요,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이 뻘쭘한 때에, 이 지친 때에. 그래도 더러더러 책 하나 손에 쥐는 사람이 보입니다. 흔한 싸구려 사랑타령 소설이든, 한 달 만에 일억을 벌었다는 재테크 놀음이든, 윗사람한테 잘 보이고 빨리 진급하는 재주를 일러주는 처세학이든, 책 하나 쥘 수 있는 매무새가 반갑습니다.

 아침에 서울로 들어가는 전철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양복쟁이 아저씨가 으레 두 사람, 옷 말끔히 차려입고 예수 사랑 외치는 아주머니가 으레 한두 사람 있습니다. 밤깎이 칼을 팔고, 석유 냄새 코를 찌르는 실장갑을 팔며, 주머니에 넣는 손전등을 파는 한편, 몇 장에 만 원짜리 음반을 팔고, 양말도 팔고, 허리띠도 팔고, 우산도 팔고, 선풍기덮개도 팔고, 싸구려 볼펜도 팔며, 덤 얹어 주는 반창고를 파는 한편, 하모니카 장애인 아저씨가 지나가고, 서로 꼭 붙잡은 채 걷는 장님 늙은 부부가 지나가고, 휠체어에 몸을 실은 말없는 아저씨가 둘쯤 지나가고, 한 다리를 절며 동냥을 하는 아저씨, 예수찬양 테이프를 틀어놓고 눈감은 채 동냥하는 아지매, 껌을 들이밀며 파는 할머니, 쇠돈 담긴 종이잔을 흔들며 돈 좀 넣으라는 할머니, 말없이 복사종이를 돌리며 천 원을 바라는 젊은이, …… 들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인천으로 돌아가는 밤전철에는 아무런 장사꾼이 없고 아무런 설교자가 없으며 아무런 동냥꾼이 없습니다.


.. 엄마는 유디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생크림 케이크까지 사 왔다. 하지만 그 케이크 때문에 배가 아팠다니 묘한 일이었다. 생크림은 너무 기름지고 달았다. 유디트는 위장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제 몫으로 준 큰 조각 하나를 억지로 입에 쑤셔넣었다. 때맞춰 화장실에 가서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다행히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  (98쪽)


 인천에서 서울 이문동으로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던 1994년 한 해 동안, 날마다 줄잡아서 일곱∼열쯤 되는 장사꾼과 동냥꾼과 설교자를 만났습니다. 한 해쯤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보는 사람이 있어서 나중에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굵직한 목소리로 “조금∼만, 도와, 주쎄요!” 하고 외치던 절름발이 아저씨가 어느 날 말끔하게 머리를 깎고 옷도 깔끔하게 입은 채 그 “조금∼만, 도와, 주쎄요!” 하고 외치며 지나가는데, 제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아이구, 오늘은 머리 깔끔하게 깎고 왔네!” 하며 웃습니다. 동냥꾼 아저씨는 살짝 곁눈으로 바라보다가 지나가는데, 목소리에 살며시 더 힘이 실리며 한결 굵어집니다.


.. 유디트는 미하엘을 집에 들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그렇게 멍이 들었냐고 물어 볼 것이 뻔하고, 그러면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너무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위해 일부러 찾아온 친구를 모른 척하다니. 이 학교에서는 유디트를 찾아온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  (105쪽)


 어릴 적 한동네에서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고, 골목길 술래잡기도 하고, 숭의동야구장 빈터에서 야구놀이도 하던 어릴 적 동무들 가운데 고향 동네에 그대로 눌러앉아서 살아가는 녀석들이 몇몇 있는 한편, 서울로 기나긴 전철길을 따라서 졸음과 고단함에 쩔디쩐 채로 살다가 슬그머니 서울로 집을 옮기며 떠나간 녀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혼인한다고 전화하면서 예식장을 알려줄 때면 으레 자기들 고향 동네가 아닌 서울 예식장이기 일쑤고, 새살림 얻는 집도 인천이 아닌 서울이기 마련이며, 한동안 돈이 없어 집값 싼 인천에 머물다가 어느새 서울로 훌쩍 날아가곤 합니다.

 집을 서울로 옮기면서, 동무 녀석들은 전철을 버립니다. 버스에서 떠납니다. 한결같이 자가용을 굴립니다. 그 옛날, 똥배 하나 없고 허벅지 단단하여 공차기를 하든 농구나 배구놀이를 하든 지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뛰어놀던 동무들이, 이제는 오 분 달리기를 해도, 아니 일 분만 달리기를 해도 헉헉대지를 않나, 백 미터를 못 걸어가서 택시를 타자고 하지 않나, 애엄마도 아닌데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고 해마다 새로 나오는 손전화 기계를 장만하며 또닥또닥 누르면서 지냅니다.


 (2) 주먹질


 한 사람한테는 땅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돈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책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그이를 아끼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그이가 나누려는 뜻과 마음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 “게다가 싸구려도 아니지. 진열장에서 그 옷을 보자마자 생각했지. 내 딸한테 사 줘야겠다고.”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디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찻주전자한테 말하고 있었다 ..  (122쪽)


 1994년 봄날, 대학교 선배가 된 형들이 우리들 새내기를 부르며 주먹질을 하고 머리박기를 시킵니다. 다른 동무들은 선배들 말이 무서워 따르지만, 저는 선배들 주먹질을 손으로 막고 머리박기를 하지 않습니다. “니가 뭔데? 이러는 게 선배냐? 이 따위 짓거리가 대학생이라는 선배자식들이 하는 거냐? 부끄럽지 않아?” “뭐야? 이 자식이!”

 1995년 11월 어느 날, 논산 훈련소에서 조교한테 발차기를 맞고 머리박기며 얼차려며 갖가지 쓰라림을 겪습니다. 1996년 1월,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디엠지 안쪽에 있는 소총중대로 배속을 받아 들어간 첫날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 다섯 시께. ‘비상’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니, 싸리비 한 자루씩 나누어 주며 병장 한 사람이 이끄는 대로 어디 산속을 깊디깊이 들어갑니다. 한 시간 남짓 걷기만 해서 들어간 산속에서 길이 하나 나옵니다. 헉헉거리면서도 병장 그이 엉덩이만 보며 일 미터 거리를 지킨 채 올라가서 뒤를 돌아보니, 분대원이며 내 전입동기며 낙오를 했습니다. 병장은 나를 빼놓고 다른 분대원과 전입동기한테 머리박기를 시키고 군화발로 갈비뼈와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죽어야 하는구나. 그냥 죽어야 하는구나. 그냥 있어도 죽고, 뒹굴어도 죽고. 또 죽어야 하는구나.


.. 유디트는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해. 미하엘은 생각했다. 유디트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애를 알아야만 해. 유디트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므로 미하엘은 종종 몸짓이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고 생각이나 감정을 짐작해야만 했다. 가끔은 상처받은 것 같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받은 표정이라…….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  (130쪽)


 상병 계급장을 달고 6호봉이 지난 1997년 사월 어느 날, 1소대 내무반으로 들어가 김 아무개 일병 이름을 부릅니다. 침상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고 ‘네’ 하는 그녀석. 군화 신은 채로 침상에 올라가 그대로 김 아무개 일병 얼굴을 걷어찹니다. 잇달아 어깨며 배며 가슴이며 다리며 걷어차고 밟습니다. 그러고 나서 1소대 왕고참 병장한테 거수경례를 붙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나옵니다.

 때리면 맞고 굴리면 구르고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만 내며 살다가, 살다가, 그만 나도 때리는 사람 굴리는 사람 죽으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김 아무개 일병이라고만 말해 오다가 ‘야이 찢어죽을 종간나 아무개 새끼야’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어대는 내 고참과 똑같은 군인이 되어 버립니다. 삽을 들었으면 삽날이고 삽자루고 몽둥이가 되고, 총을 들었으면 총부리고 개머리판이고 몽둥이가 됩니다. 빈손이면 주먹이, 군화를 신었으면 군화발이 몽둥이입니다.


.. 이모가 있는 한 주는 후닥닥 지나갔다. 유디트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그 안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리아 이모가 있는 집안엔 구석구석 봄기운이 감돌았다. 엄마도 달라 보였다. 엄마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  (215쪽)


 뺨을 맞으면 뺨이 얼얼하면서도 뒷간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제가 뺨을 후려갈기면 뺨맞은 그 녀석이 뒷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1997년 12월 강원도 양구 눈덮인 도솔산을 군짐차에 실려 만기전역을 하며 떠났지만, 얻어맞은 뺨에 흐르는 눈물은 1998년에도 1999년에도 2000년에도 2008년인 오늘에도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군대라는 곳이 있는 동안. 사람을 사람이 아닌 계급으로 나누고, 사람이 사람을 따스하게 껴안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빨리 총알 적게 쓰며 죽여 없앨 수 있는가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몸에 익히도록 하는 그런 군대라는 곳이 우리 사회에 또아리를 틀며 버티고 있는 동안.


.. “그래, 뭐라던?” 할머니는 뭔가를 캐내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매맞는 것 말이다.” “트루더!” “얘기 좀 하게 입 다물어요!”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미하엘에게 몸을 돌렸다. “그 애가 늘 맞고 지낸다는 건 알고 있었니?” “한 번 맞았던 건 알아요. 그 후로 학교가 끝나고 바래다주었죠. 때린 남자애들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남자애? 남자애라니?” “유디트를 마구 때린 애들요.” “남자애들!” 다시 한 번 할머니는 조롱하는 듯이 웃었다. “남자애들이 자기를 때렸다고 하던? 그건 엄마 짓이었어!” 미하엘은 놀란 눈으로 할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로 피가 쏠렸다. 비좁고 후덥지근한 방 안에 있으려니 점점 어지러워졌다. “엄마가?” “놀랄 줄 알았다. 그 여자는 대낮에 별이 보일 정도로 호되게 자식을 팼다. 그 애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가끔 여기까지 들렸지.” ..  (256∼257쪽)


 주먹질과 욕설과 얼차려와 괴롭힘과 따돌림 들로 ‘저마다 소중한 목숨붙이’였던 사람을, ‘누구보다도 끔찍하고 몸서리쳐지는 살인병기’로 뒤바꾸어 놓는 군대계급 소굴은, 군대를 벗어난 뒤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집안에서도, 동네에서도 어쩌는 수 없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아가씨를 만나도 제멋대로가 되어 쉽게 손찌검을 하고, 자기 아이한테도 이웃 아이한테도 쉬 짜증을 부리며 손이 먼저 올라가는 남정네가 되게 합니다. 스스로 못된 손목아지를 잘라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며 고치고 추스르고 깎아내고 도려내는 동안에도.


.. “장볼 돈으로 인형을 샀지!” 섬뜩한 목소리로 으르렁대는 엄마의 손에 빵칼이 들려 있었다. 유디트는 숨이 멎었다. “안 돼, 엄마……. 안 돼! 인형은 안 돼!” 유디트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는 코알라 인형에 칼을 쑤셔넣었다. 네 번, 다섯 번 칼질을 반복하는 사이에 인형은 넝마조각이 되었다. 엄마는 칼을 다시 치켜올리고 유디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얼어붙은 채, 칼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다 ..  (282쪽)


 농약을 뿌려서 거두는 곡식에 농약이 배이고 쌓입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넘치는 도심지에 뿌연 먼지띠가 겹겹이 쳐지고 늘어납니다. 돈 많이 벌자고 하는 곳에 돈이야 많이 들어오겠지요. 바라는 것은 돈뿐이니까요.


 (3) 《두 친구 이야기》라는 책


 2005년 12월, 《두 친구 이야기》를 눈깜짝할 사이에 읽어냈습니다. 2008년 1월, 《두 친구 이야기》를 다시 집어들고 열흘에 걸쳐서 자근자근 씹어먹듯이 천천히 읽습니다. 할머니가 자기 어머니한테 모질게 했던 끔찍한 주먹질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이 어머니가 자기 딸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퍼붓고 있는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돕니다.

 여리고 작은 아이 ‘유디트’는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한테 얻어맞습니다. 이웃집 할머니한테까지 들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이한테 잘못이 있어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니고, 아이가 미워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닙니다.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그랬듯이, 어머니가 딸한테 하는 주먹질과 괴롭힘과 따돌림은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아무 까닭 없이, 그냥 미워서, 그러면서도 제 자식이니 때린 다음에 눈물을 흘리고.


.. “유디트를 도와야 해. 유디트의 엄마도 마찬가지고. 더 손을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런데 어떻게 주소를 찾아내지?” ..  (263쪽)


 작지는 않지만 여린 아이 ‘미하엘’이 있습니다. 미하엘은 자기를 때리지는 않지만 모질게 괴롭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홀로 외로우며 아버지한테 시달리다가 병까지 앓는 미하엘한테, 이웃에 살던 ‘스테피’라는 계집아이는 마음을 열어 주면서 ‘함께 나누어서 좋으니까 친구지’ 하는 깨달음을 나누어 줍니다. 이 아이 스테피는 뒷날 미하엘이 당차게 ‘아버지하고 안 살겠다’고 하면서 네덜란드에 있는 이모하고 살겠다고 자기 권리를 말하는 뒷힘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미하엘은 고향나라 네덜란드에서 만난 유디트를 보면서, 미국에서 지내며 아버지한테 시달리는 동안 만났던 스테피 모습을 그림자처럼 느낍니다. ‘새로운 두 친구’가 무엇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가를 느낍니다.


.. 유디트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여전히 숨쉴 때마다 힘들었다. 엄마가 조리대에 처박을 때 갈비뼈를 다친 게 틀림없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나도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야. 내 코알라처럼 말이야. 다시 한 번, 유디트는 미하엘의 목소리를 들었다. “뭔가 해야만 해…….” ..  (284쪽)


 스테피는 미하엘한테 “텔레비전을 혼자 보면 엄마하고 같이 볼 때보다 훨씬 재미없어. 같이 있으면서 엄마가 웃으면 나도 더 많이 웃게 돼.”(52쪽) 하고 말했습니다. 미하엘은 유디트한테 “유디트, 너한테 엄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너희 집에 갔을 때 …… 넌 남자애들이 때렸다고 말했지?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난 친구잖아, 안 그래? 왜 그냥 맞고만 있어? 누군가한테 말을 해야 해. 엄마가 자기 자식을 때리는 건 정상이 아니야.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네가 기다리기만 하면 엄마는 널 계속 때릴 거야. 뭔가 해야만 해. 계속 비밀로 할 수 없어. 우리가 도와줄게. 약속해.”(273∼279쪽) 하고 말했습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아끼는 동무이기 때문에, 몸과 몸으로도 아끼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싶은 동무이기 때문에, 내 즐거움은 네 즐거움이 되고 네 아픔은 내 아픔이 되는 동무이기 때문에, 나 혼자 걷는 두 걸음이 아닌 너와 함께 한 걸음씩 걷고 싶은 동무이기 때문에. 그런데, 유디트를 괴롭히며 때리는 어머니는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동무를 만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동무를 찾으려고 할까요? (4341.1.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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