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핀 - 꼬마 빌리의 친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83
로얼드 달 지음, 우미경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숲삶을 찾는 사람, 숲이야기를 잊은 사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6] 패트릭 벤슨·로알드 달, 《민핀》(시공주니어)



 깊은 밤에 쉬를 하려고 일어납니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는데 뒷산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새일까, 올빼미 소리일까,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새소리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텃밭 가에 쉬를 누고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새소리는 내처 이어집니다.

 낮에 자전거를 타고 읍내 장마당으로 다녀오는 길에는 용산리 숯고개 비탈논 얼음 녹은 자리에서 멧개구리 깨어나 우는 소리 가득했습니다. 사람이 논둑을 거닌다면 멧개구리 울음소리가 뚝 하고 그치지만, 한길에서 자전거로 낑낑대며 오르막을 타는 동안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곽곽 하면서 이어집니다.

 길디길었다는 겨울이 어느덧 저뭅니다. 우리 살림집 깃든 멧자락 비탈논에는 아직 눈과 얼음이 다 안 녹았고, 이 둘레 멧개구리 또한 아직 깨어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눈과 얼음이 제법 녹은 자리가 있으니, 어쩌면 이곳에 멧개구리가 알을 낳았을는지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하고 논둑을 거닐며 개구리알이 있는가 돌아보면 군데군데 보일 수 있겠지요.

 날이 풀리니 멧등성이나 풀섶이나 논둑마다 파릇파릇 새 풀이 돋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날씨 탓에 먹이가 모자라 애먹었을 ‘풀 먹는’ 멧짐승은 이제부터 조금씩 살 만해질까 궁금합니다. 머리는 검고 턱은 하얀 작은 멧새들도 새끼를 치며 새봄을 기쁘게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살림집 물은 여태 녹지 않아 날마다 물을 길러 멧길을 오르내리는데, 낮나절 물을 길으러 오가다 보니 새로 깬 듯한 새끼 새들 지저귀는 소리가 기스락에 가득합니다.


.. 빌리의 엄마는 항상 꼬마 빌리에게 해도 좋을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정확히 일러 줍니다. 그런데, 해도 좋은 일은 하나같이 재미없는 일들뿐이고, 해선 안 되는 일은 하나같이 신나는 일들입니다 … 하지만 빌리는 언제나 그냥 얌전히 있는 게 너무도 지겨웠습니다 ..  (5쪽)


 햇볕이 따사롭다고 느끼기에, 방마다 깔아 놓던 담요와 이불을 걷어 먼지를 털고 볕바라기를 시킵니다. 이 가운데 이불 두 채를 빨아 봄볕에 말립니다. 네 살 난 아이는 아버지 일하는 둘레에서 어정거리면서 저도 제 이불을 들고 이리 나르고 저리 나릅니다. 이제 날이 꽤 따스하니까 아이가 마당이며 멧자락에서며 더 신나게 뛰어놀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다리힘을 더 씩씩하게 길러 세발자전거를 스스로 탈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느낍니다. 뒤에서 밀지 않으면 발판을 스스로 굴리지 못하기는 하지만, 머잖아 혼잣힘으로 자전거를 낑낑 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림책 《민핀》을 펼칩니다. 그림책 《민핀》에 나오는 어린이는 우리 아이하고 견주면 나이가 꽤 많다 할 열 살 남짓인데, 이 아이는 시골자락에서 살면서 바깥마실을 거의 못합니다. 《민핀》에 나오는 어린이네 어머니는 아이가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도록 하거든요. 집에서 얌전히 지내라고만 하거든요.

 알쏭달쏭합니다. 도시 아닌 시골자락에서 살아가면서 아이를 집에 가두다니요. 아이는 숲을 신나게 쏘다니고 싶어 하는데, 아이 어머니는 숲에는 무서운 녀석들이 많아서 잡아먹힐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림책 《민핀》에서는 참말 숲에 무서운 녀석들이 있다고 나옵니다. 깊디깊은 숲이라면 그러할는지 모르나, 어쩐지 거짓스럽습니다. 불을 뿜는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그리 믿기지 않습니다. 불 뿜는 괴물을 아이가 슬기롭게 물리쳐서 숲속 ‘민핀’들이 걱정하지 않으며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줄거리인데, 글쎄, 얼마든지 생각날개를 펼쳐 이런 얘기도 짓고 저런 얘기도 꾸밀 수 있겠지요. 제가 어른이라서 불 뿜는 괴물을 안 믿는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아이 엄마가 아이를 숲으로 못 가게 막는 까닭’이 ‘불 뿜는 괴물’ 때문이요, 참말 숲에 불 뿜는 괴물이 산다고 하는 줄거리는 우리 터전에 그리 맞갖지 않습니다.

 불 뿜는 괴물보다는 늑대라든지 여우라든지 곰이라든지 살쾡이라든지 무늬범을 이야기해야 알맞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양사람은 불 뿜는 괴물 이야기를 꽤나 좋아하는 듯한데, 깊디깊은 숲은 사람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아 들짐승이나 멧짐승이 그나마 홀가분하게 지내는 보금자리이고, 이 보금자리에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선다면 들짐승이나 멧짐승으로서도 썩 달갑지 않을 뿐더러, 때로는 ‘좋은 먹이’가 나타났다고 여길 만하겠지요.


.. “새들이 그렇게 잘 도와주나요?” 빌리가 다시 물었습니다. “새들은 우리한테 무슨 일이든 다 해 준단다. 새들은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도 새들을 좋아해. 우리가 새들의 식량을 나무 속에다 저장해 두니까. 모든 것이 얼어붙을 듯한 추운 겨울이 와도 새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거든.” 돈 미니가 대답했습니다 ..  (25쪽)


 숲에서 숲사람을 만나고 숲짐승을 마주합니다. 숲에서는 숲나무를 느끼고 숲풀을 얼싸안습니다. 숲이기에 숲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숲그림자에 자리를 펴고 드러누울 수 있습니다. 숲길은 사람 발자국 하나 없을 테지만, 짐승 발자국이 여기저기 있기도 할 테지요.

 참말 숲에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발자국을 남깁니다. 숲흙은 더없이 깨끗하며 기름지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눌러도 소옥 들어갑니다. 도시에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발자국을 남길 수 없습니다. 온통 시멘트바닥이거나 돌바닥이거나 아스팔트바닥입니다.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도무지 않을 수 없으며, 도시에서는 길바닥에 퍼질러 앉으면 차에 치인다든지 사람들 발길에 채입니다. 아니, 워낙 지저분해서 아무 데나 퍼질러 앉지 못해요. 게다가 얼마나 시끄러운가요. 더구나 자동차 배기가스는 얼마나 매캐한가요.

 숲에서는 자리를 깔고 앉아야 합니다. 고운 흙과 풀을 타고 물기가 올라오니까 자리를 깔고 앉아야 엉덩이가 안 젖습니다. 도심지 길바닥에서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습니다. 이곳도 막히고 저곳도 막힙니다. 사람들은 도심지에서 잘도 버티면서 용하게 돈벌이를 하며 살아갑니다. 풀포기 하나 마음껏 고개를 내밀 수 없는 터전에서 사람들은 참 대단하게 복닥거리면서 꿈을 키운다든지 예술을 펼친다든지 스포츠를 즐긴다든지 정치나 경제를 한다든지 얼크러집니다.

 어쩌면, 불 뿜는 괴물이란 숲이 아닌 도심지 한복판에 있지 않을까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은 숲이 아닌 도심지에 있지 않나요.


.. “빌리야, 넌 정말 빨리 자라는구나. 네가 곧 백조를 못 탈 정도로 무거워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돈 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빌리가 말했습니다. “우리에겐 백조보다 더 큰 새는 없단다. 하지만 백조가 더 이상 널 데려다 주지 못하더라도, 네가 우리를 보러 여기로 와 주면 좋겠다.” ..  (46쪽)


 아이들은 실컷 뛰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얌전히 굴 때에는 얌전히 굴어야 하지만, 여느 때에는 거리낌없이 뛰놀아야 합니다. 그런데 얌전히 굴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문득 궁금합니다. 저부터 우리 집에서 아이한테 밥자리에서 얌전히 좀 굴라고 말하는데, 아이로서는 이리 장난하고 저리 놀며 그리 딴청 피우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래, 다 좋아요. 다만, 놀려면 놀 기운이 있어야 하고, 놀 기운이란 밥을 먹으며 샘솟습니다. 밥은 밥대로 알뜰히 먹고 배가 불러야지 이리 뛰든 저리 달리든 하겠지요.

 밥을 먹을 때에는 고맙게 밥그릇 비울 수 있다고 두 손 모아 하늘과 흙한테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는 오늘 하루 신나게 놀도록 목숨을 불어넣어 주어 고맙다고 두 손 가지런히 배에 올려놓고 눈을 감을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이 두 가지를 아이가 함께 즐거이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싶은데, 잘 안 됩니다. 어버이 된 나부터 조금 더 옳고 바르게 잘 지키지 못하니까 아이도 어버이 따라 개구지거나 어긋나게 놀지는 않을까요. 어버이부터 한결 신나며 알맞게 살아가는 매무새를 다스리지 못하니까, 아이도 자꾸 막나가려 하지는 않는가요.

 우리 살아가는 터전에서 고맙지 않은 일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어찌저찌 해서 돈을 제법 벌어들일 수 있어도 고마운 노릇이고, 이래저래 하는 일마다 막히며 가난하게 지내고 말아도 고마운 노릇입니다. 돈을 제법 거머쥐어 마음껏 쓸 수 있는 사람은 이대로 삶을 마주하거나 배우거나 느낍니다. 돈을 거의 만지지 못하며 쪼들리는 사람은 이대로 삶을 맞아들이거나 익히거나 깨닫습니다. 더 나은 삶이나 더 슬픈 삶이란 없습니다. 주어지는 삶을 어떻게 느끼느냐를 대수로이 살펴야 합니다.

 그림책 《민핀》에 나오는 아이는 제 어머니한테 ‘숲속 민핀’ 이야기를 숨깁니다. 《민핀》에 나오는 아이는 어느덧 몸이 꽤 자라서 그만 해오라기 등에 타며 하늘을 신나게 날아다니는 놀이를 즐길 수 없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예나 이제나 아이한테 숲에 가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고만 말합니다. 아이는 어머니 말을 고분고분 듣지만 속으로는 ‘어머니 말을 안 듣고 숨기는 이야기를 자꾸자꾸 쌓’습니다.

 아이는 제 어머니 손을 잡고 “어머니, 우리 숲 나들이 함께 해요. 깊이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숲에서 자리 깔고 함께 밥을 먹거나 책을 읽어 봐요.” 하고 이끌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보고 집에서만 지내지 말고, 집 곁에 펼쳐진 숲으로 조금씩 발을 디뎌 보자고 손을 잡고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하지는 못하나 궁금합니다.

 어머니도 처음부터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 또한 아이였을 텐데, 어머니는 왜 아이였던 당신 넋을 건사하지 못하고, 아이는 또 왜 어머니하고 ‘좋으며 사랑스러운 숲삶과 숲이야기’를 함께 나눌 생각을 못하는지 아쉽습니다.

 비밀은 비밀대로 살가우며 좋기도 할 테지만, 비밀 아닌 비밀로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즐거이 살아갈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이 함께해야 한결 살가우며 좋습니다. 숲삶은 혼자 찾거나 누린다고 해서 좋은 숲샆이 되지 않습니다. 숲이야기를 자꾸 잊는 사람은 착한 마음과 살가운 이야기 또한 자꾸 잊거나 잃습니다. (4344.3.13.해.ㅎㄲㅅㄱ)


― 민핀 (패트릭 벤슨 그림,로알드 달 글,우미경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9.2.5./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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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3.11.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담벽 한쪽에 구멍을 내고, 이 구멍 한쪽에 옥수수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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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한글을 왜 어렵게 만들었나요
 : 한글은 어렵게 만든 글이 아닙니다. 한글은 아주 쉽게 만든 글입니다. 한글은 ‘중국말을 우리 겨레가 글로 쉽게 담으려’는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옛 임금이나 관료나 지식인이 애써 한글을 만든 까닭은 ‘어차피 임금이나 관료나 지식인은 한문으로 말하고 한문으로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나, 임금이나 관료나 지식인이 펼치던 정책을 이 나라 95%가 넘는 여느 사람들한테 알려주자면 ‘여느 사람이 쓰는 쉬운 말’로 풀어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쉽게 배워서 아주 쉽게 쓸 수 있는 글’로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한글이 어렵다고 느낀다면, 맨 처음 한글을 만든 뜻은 쉽게 배워 쉽게 쓰도록 하는 데에 두었으나, 오늘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말법이 너무 딱딱하거나 어렵게 틀에 박히는 바람에, 말사랑벗이 쉽고 즐겁게 배우기 힘든 탓입니다.

 13. 한글이 과학이라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 한글은 ‘중국사람이 중국말로 읊는 소리’를 빈틈없고 빠짐없이 담아낼 수 있게끔 만들었습니다. 말사랑벗이 중국말을 배워 보았는지 궁금한데, 중국말 소리는 아주 많습니다. 중국사람은 영어를 꽤 잘합니다. 중국사람 말소리는 그야말로 온갖 소리가 다 있다 하도록 넓습니다. 이와 같은 중국말을 아주 꼼꼼하면서 대단히 쉽게 담아내어 누구나 수월하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글이 한글입니다. 그 어느 글도 한글처럼 온갖 소리를 쉽게 알뜰히 담을 수 있게끔 만들지 않았고 만들지 못했어요.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 한글은 아주 과학이요 잘 짜였고 훌륭하다 이야기할 만합니다. 처음 만든 뜻은 ‘그리 과학답지 못한 뜻’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겨레는 ‘우리 겨레 삶을 북돋우는 글’로 한글을 알뜰히 살리거나 살찌운다면, 우리 스스로와 다른 겨레한테도 좋은 글 선물을 베풀 수 있습니다.

 14. 무엇 때문에 한글이 생겨났나요
 : 한글은 한겨레가 쓰려고 만든 글입니다. 다만, 맨 처음 이 한글을 만든 까닭은 ‘여느 사람’이 아닌 ‘양반 계급 지식인’하고 ‘궁궐사람과 권력자’가 쓰도록 만든 글이었습니다. 한겨레 누구나 기쁘게 쓰려고 만든 글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누구나 쓰도록 만든 글이 아니었대서 한글을 만든 뜻이 바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1400년대나 1500년대 같은 조선 때에는 권력과 계급과 신분이 또렷하게 갈렸어요. 이무렵에는 양반 아니고서는 글(한문)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여느 사람인 평민은 흙을 일구기만 해야 했습니다. 흙을 일구는 여느 사람은 논밭일이 많으니 따로 글을 배울 겨를이 없어요. 곧,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꿈꾸는 글’인 한글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 때를 지나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고 나서 비로소 우리 스스로 우리 한글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고마운가를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글을 배울 수 있던 사람은 돈과 계급과 신분이 있던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독립을 하자면 지식인만 한글을 알아서는 안 되었어요. 이 나라 모든 사람이 한글을 깨우치며 슬기롭게 살아야 비로소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리하여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온 나라 모든 사람이 한글을 배우도록 하는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우리 나라는 온누리에 드문 ‘글장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5. 한글에서만 찾아보는 모습은 무엇인가요
 : 한글은 거의 모든 소리값을 담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느 글도 한글처럼 거의 모든 소리값을 담지는 못합니다. 한글은 소리값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빛깔과 무늬와 냄새와 모습까지 거의 그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데에서 한글은 참으로 돋보이는 글입니다.

 16. 속담이 있어 무엇이 좋은가요
 : ‘속담’이란, 여느 사람들이 살아오며 몸으로 깨달아 이룬 말입니다. 예전 지식인은 여느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깎아내리며 ‘속담’이라는 한자말을 지었는데, 여느 말로 하자면 ‘옛이야기’이거나 ‘삶이야기’라 할 만한 ‘속담’이란 오랜 나날에 걸쳐 온몸과 온마음으로 부대끼며 배우거나 일깨운 슬기를 갈무리합니다. 중국사람은 고사성어라는 말을 지어서 중국사람 슬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우리는 우리 옛이야기나 삶이야기인 속담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면서 우리 겨레 슬기가 오래오래 빛나도록 이끕니다.

 17. 준말을 쓰면 안 되나요
 : 엉뚱하게 줄이거나 억지로 줄이는 말은 사람들이 널리 알아듣기 힘듭니다. 엉뚱하게 줄이거나 억지로 줄이는 말은 안 쓸 때가 한결 나아요. 그러나 사람들이 한결 알뜰히 알아듣도록 줄인 말이라든지, 조금 더 수월하게 쓰기 좋게끔 줄인 말이라면 얼마든지 쓸 만하며, 퍽 괜찮은 낱말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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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순우리말을 알려주셔요
 : 순우리말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순우리말’이라 할 때에 ‘純’은 ‘깨끗한’이나 ‘티없는’을 뜻하는 한자로 적는데, 우리말에도 ‘순’이라는 낱말이 있어요. “순 거짓말”이나 “순 바보”라 할 때에 쓰는 ‘순’이에요. 우리말 ‘순’은 좋지 않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자리에만 쓴다고 하지만, 우리 말사랑벗부터 이 토박이말을 알뜰히 북돋우면서 ‘순 우리말’처럼 써 볼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아주 우리말”이란 소리가 되고, 한자나 영어나 일본말 따위가 깃들지 않은 낱말, 곧 이 나라에서 예부터 옛사람이 익히 즐겁게 써 오던 낱말을 가리킬 수 있어요. 아무튼, ‘순 우리말’로는 “하늘, 바람, 땅, 흙, 물, 햇볕, 그림자, 손, 얼굴, 몸, 사랑, 발바닥, 발톱, 꿈, 잠, 밥, 옷, 일, 놀이, 이야기, 말, 웃음, 눈물, 슬픔, 괴로움, 고단함, 참다, 먹다, 베풀다, 나누다, 믿다, 보다, 쓰다, 찾다, 걷다, 바다, 길, 동무, 어른, 어린이, 계집, 사내, 장사, 돈, 밑, 위, 오른쪽, 왼손, 가운데, 한복판, 동그라미, 네모, 물결, 이랑, 고랑, 논밭, 수수하다, 투박하다, 여느, 온, 즈믄, 날, 달, 해, 하나, 둘, 셋, 읽다, 받다, 주다, 챙기다, 빼앗다, 싸우다, 맑다, 곱다, 환하다, 똑똑하다, 어리석다, 방귀, 똥, 자지, 보지, 젖, 배, 엉덩이, 아기, 뚱뚱하다, 마르다, 홀쭉하다, 파리하다, 살결, 목, 털, 수염, 손톱깎이, 신나다, 재미나다, 맛있다, 쓸모있다, 값어치, 기름, 종이, 하양, 빨강, 풀, 나무, 꽃, 잎, 주머니, 보름, 이태, 그믐, 어머니, 동생, 누이, 언니, 할아버지, 바구니, 그릇, 돌, 깨, 가시, 물고기, 돌보다, 살피다, 보살피다, 안다, 어울리다, 예쁘다, 밉다, 고맙다, 구름, 비, 눈, 별, 무지개, 미리내, 골짜기, 냇물, 멧토끼, 도랑, 도토리, 울타리, 징검다리, 지게, 땔감, 밥, 숟가락, 비녀, 댕기, 목도리, 바느질, 길쌈, 바늘, 실, 빨래, 옹알이, 줄, 금, 그림, 글, 예전, 오늘, 어제, 앞, 뒤, 사람, 빠르다, 누비다, 개, 고양이, 새벽, 아침, 반갑다 ……” 들이 있습니다.

 8. 한자말이 우리말 가운데 절반이 넘나요
 : 한자말이 우리말 가운데 절반을 넘지 않습니다. 다만, 국어사전에 실린 한자말 숫자는 절반을 넘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 실린 한자말 가운데 말사랑벗이 알 만하거나 쓸 만한 낱말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세어 보셔요. 국어사전에는 말사랑벗뿐 아니라 어른이나 전문가조차 알 수 없는 낱말이 잔뜩 실렸습니다. 우리가 안 쓰는 한자말이 너무 많이 실렸을 뿐 아니라, 예전 조선 때에 궁궐사람이나 지식인만 주고받던 한문 낱말을 아무렇게나 싣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쓸 까닭이 없으며 모르는 군더더기 한자말을 국어사전에 덜고 나면, 국어사전에 실릴 한자말은 아마 1/4쯤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국어사전에 제대로 안 실은 우리말을 차근차근 싣는다면, 국어사전에서 한자말이 차지할 자리는 1/10쯤 되겠지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대목이 있어요.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쓰는 ‘한자말’은 그냥 한자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 때문에 흘러든 ‘일본말’입니다. 지난날에는 중국사람이 쓰던 중국 한자말을 양반이나 권력자가 즐겨썼고, 요즈음에는 일본사람이 쓰는 일본 한자말을 누구나 아무렇게나 즐겨씁니다. 겉보기로는 한자말이지만, 속알맹이를 살피면 예전에는 중국말이고 오늘날에는 일본말을 쓴다고 해야 맞습니다.

 9. 왜 우리는 한자로 이름을 지어야 하나요
 : 왜 그럴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우리가 한자로 이름을 지은 지는 기껏해야 백 해가 채 안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날에는 양반만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양반은 모두 한자로 이름을 지었어요. 더구나, 양반 가운데 남자한테만 항렬을 따지고 십이지를 따지며 한자로 이름을 지었고, 양반 가운데 여자한테는 아무 이름이나 붙이곤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양반 계급과 권력이 무너지’면서 여느 사람들도 권리를 찾자면서 여느 사람들 또한 이름을 한자로 붙였어요. 이때부터 비로소 한자이름이 막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한자로 이름을 지어야 할 까닭이 없기도 하고, 이름이란 내 아이한테 가장 사랑스러우며 어버이로서 가장 아끼거나 좋아할 낱말을 살펴서 붙여야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10. 욕을 써서는 안 되는 까닭은 뭔가요
 : 욕을 써서 안 되는 까닭은 없습니다. 욕을 안다면 욕을 할 수 있고, 욕이 나오는 때라면 욕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욕이 나와서 욕을 할 때에는 나한테서 욕을 듣는 사람 마음이 다칩니다. 그리고, 내 욕을 듣는 사람이 나 때문에 마음이 다칠 뿐 아니라, 욕을 하는 사람 스스로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을 할 때에는,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부터 스스로 제 마음을 갉아먹기 마련입니다. 듣는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니까 욕이 안 좋다고도 하지만, 이에 앞서 말하는 사람부터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마음을 북돋우는 길하고는 사뭇 동떨어지기 때문에 욕을 쓰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11. 욕은 언제 생겼나요
 : 욕이 언제 생겼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욕이란 거친 말입니다. 거친 말이란 사랑하며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며 서로를 감싸는 말이 아닌 욕인 만큼, 이런 말이 처음 생긴 때라면,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때가 아닌,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거나 괴롭히는 때였겠지요. 이를테면 전쟁이 터지는 때에는 사람들 삶이 팍팍하며 괴롭습니다. 우리 쪽에서 전쟁을 일으키든 바깥에서 전쟁이 찾아들어 고달프든, 사람들 마음에서 저절로 욕이라고 하는 거친 말을 내뱉고 싶어질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 손으로 흙을 일구어 살림을 꾸리던 조촐하며 아늑하던 나날에는 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무기를 만들어 이웃사람 살림이나 곡식을 빼앗는다든지 땅을 넓히려 할 때에 비로소 욕이 생깁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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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봄 새 나비와 새 개구리


 오늘부터 드디어 이불 빨래를 한다. 손으로 빨까 생각했는데 옆지기가 이오덕학교에서 빨래기계를 빌려서 쓰자고 말한다. 요즈음 가뜩이나 기운이 많이 떨어졌다고 느끼기에 옆지기 말을 듣기로 한다. 빨래기계를 빌리는 김에 이불을 두 채 빨자고 생각한다.

 가장 때 많이 탄 이불부터 두 채를 안고 빨래감과 설거지거리를 안고 멧길을 오른다. 계단논 얼음은 아직 다 안 녹았다. 학교 헤엄터에도 얼음이 아직 그대로이다. 이러니 우리 집 물도 아직 안 녹을 테지. 그런데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린다. 어, 어, 벌써 나비인가? 저녁이 되면 퍽 쌀쌀한데 나비가 이렇게 팔랑거려도 괜찮은가.

 빨래기계 앞에 선다. 이불을 한 채씩 넣고 대야로 물을 부으며 비누를 골고루 문지른다. 단추를 누르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기계를 들여다보니 멈췄다. 왜 멈추었을까. 다시 단추를 누른다. 돌아간다. 씻는방에 가서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하고 나서 능금을 씻는다. 능금과 빨래를 통에 담고 빨래기계 있는 데로 간다. 빨래기계가 또 멈췄다. 빨래기계를 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일까. 아니, 나는 빨래기계를 만진 적이 없나. 요새 빨래기계는 단추 몇 번 누르면 다 되는 듯한데, 아닌가. 다시 단추를 이래저래 누른다. 이번엔 제대로 돌아가려는 듯하다. 한 시간 육 분 걸린다고 불이 깜빡인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 마친 빨래감을 들고 집으로 내려온다. 옆지기가 수제비 반죽을 한다. 아이가 옆에서 알짱알짱하면서 거들겠다고 나선다. 함께 밥을 먹고 나서 아이가 또 더럽힌 옷 두 벌을 벗겨 빨래하러 올라간다. 빨래기계 있는 데로 가니 빨래가 다 되었다. 아이들이 노는 철봉대에 이불을 하나씩 펼쳐서 넌다. 아이 옷가지 두 벌을 새로 빤다.

 아침부터 해바라기를 시킨 이불은 방으로 들인다. 방과 마루를 옆지기하고 함께 치우고 이래저래 쓸고 닦기를 더 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가기로 한다. 오늘은 장날이라서 반찬감을 좀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읍내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숨을 헐떡이는데 왼편 비탈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 이곳에서는 벌써 개구리가 깼나.

 어제 집식구들 다 함께 읍내마실을 나올 때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골버스라 할지라도 차에 타면 멧개구리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이렇게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서야 이른봄 첫 개구리 울음소리를 맞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읍내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르막에서 다시금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구불구불 멧길을 걷는 아저씨 하나 보인다. 아저씨도 개구리 소리를 함께 듣겠구나. (4344.3.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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