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면서 책읽기


 옆지기하고 아이랑 읍내 목욕탕에 갔다. 나도 함께 갈까 하다가 그만둔다. 돈 오천 원을 아끼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꽤 졸려서 목욕탕에 가 보아도 얼마 못 있을 듯하지 않으랴 싶었다. 그러나 아이랑 함께 씻으려 하는 옆지기는 퍽 힘들 텐데. 그래도 옆지기는 어느덧 두 시간째 목욕탕에서 씻는다. 나는 읍사무소에 들어와서 책을 읽는다. 죠반니노 과레스끼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을 옛날 백제 판 1979년에 나온 책으로 읽는다.

 한참 읽으며 책에 밑줄을 긋는다. 읽다가 졸고, 읽다가 하품을 하며, 읽다가 눈자위를 꾹꾹 누르며 잠을 깨려고 한다. 셈틀 자리가 빌 때에 한동안 또각거려 보기도 한다. 아직 옆지기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 느긋하게 씻으라 했으니 참으로 느긋하게 씻는가 보다. 좋다. 아이가 신나게 뛰어놀기도 할 테지만, 모처럼 엄마랑 둘이 오붓하게 어울리면서 사랑을 듬뿍 받을 테니 서로 좋겠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책을 다시 읽는다. 나 또한 아주 모처럼 홀로 느긋하게 쉰다. 그런데 이렇게 홀로 느긋하게 쉬자니 외려 힘들다. 차라리 내가 아이를 씻긴다면 걱정하지 않을 텐데, 옆지기하고 두 시간 남짓 씻으며 아무 소식이 없으니 되레 걱정스럽다. 뭐, 걱정할 일이 있겠느냐만, 그냥 내가 아이랑 씻고 옆지기는 혼자 더 느긋하게 씻도록 했어야 하나.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옆지기는 또 옆지기대로 바빠맞지 않았으려나.

 읍사무소 쉼터 책상맡에서 졸며 깨며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아주 드물게 졸며 깨며 책을 읽는 한나절도 제법 즐길 만하지 않나 싶다. 읍사무소 일꾼들 일하는 소리를 귓결로 듣고, 사람들 뜸할 때에 도란도란 수다 떠는 소리를 잠결에 듣는다. 읍사무소 건물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모두들 두툼한 겉옷을 입고 일한다. 후덥지근하지 않아 좋다만 썰렁하니 그저 그렇기도 한데, 따스하기보다는 조금 썰렁한 기운이 나을 수 있겠지.

 이제 슬슬 가방을 꾸려 밖으로 나갈까. 혼자 이 골목 저 골목 천천히 쏘다니면서 옆지기랑 아이를 기다려 볼까.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도 나쁘지 않으나, 조용히 걷고 싶다. 시골집에서 아이 노랫소리랑 옆지기 말소리 말고는 듣는 소리 없이 지내다 보니, 호젓한 읍사무소에서마저도 귀가 따갑고 머리가 띵하다. (4343.12.29.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함께 살아가는 말 30] 시골버스

 도시에서 다니는 버스를 가리켜 ‘도시버스’라 하는 사람은 따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어로 ‘시티버스’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다니는 버스를 일컬어 누구나 ‘시골버스’라 이야기합니다. 굳이 영어로 ‘컨트리버스’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시내버스’입니다. 자그마한 시이든 커다란 시이든 시내버스입니다. 빨리 달리는 버스라면 ‘빠른버스’라 할 만하지만 언제나 ‘급행버스’라는 한자말 이름을 붙입니다. 그나마 영어로 ‘스피드버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도시를 둘러볼 때에 ‘도시마실’이라 하면 어쩐지 낯섭니다. 시골에서는 으레 ‘시골마실’이라 합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마실’이 아닌 ‘시티투어’라 할 때에 잘 어울리는구나 싶습니다. 도시를 오가는 기차길이니까 ‘철도공사’라는 이름보다는 ‘코레일’이라는 영어 이름이 어울리겠지요. 시골보다는 도시로 커지려 하는 경기도이기에 ‘g bus’라는 이름을 지어서 쓸 테고요. 흙을 가까이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흙내음 물씬 묻어나는 말이요, 아스팔트랑 시멘트하고 살 부비며 지내는 동안에는 아스팔트 빛깔과 시멘트 느낌이 짙게 스미는 말입니다. (4343.12.29.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물과 글쓰기 

  난 어릴 때부터 무언가 선물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열거나 뜯어 마음껏 즐겨 본 일이 없다. 늘 집까지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 앞에서 말씀드리고 나서 끌거나 뜯었다. 옆지기와 아이하고 살아가는 오늘날은 집에서 옆지기랑 아이가 보는 앞에서 선물을 끌른다. 내가 먼저 맛보거나 나부터 슬쩍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아니, 이런 마음이 드는 적이란 없다. 대수로운 선물이든 흔한 선물이든 똑같은 선물이고 한결같이 사랑스럽다. (4343.12.29.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 나누는 기쁨 ㉢ 글읽기와 사진읽기
 ― 좋은 글·사진에 앞서 좋은 내 삶·사랑이어야



 소 귀에 불경을 읽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돼지한테는 문학이나 예술이 부질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나 돼지를 깔보면서 읊는 말이 아닙니다. 소한테는 불경이란 참으로 쓸모가 없을 뿐더러, 돼지한테도 문학이나 예술은 쓸데가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저는 모나리자 그림을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만, 아무리 아름다운 모나리자 그림이라 할지라도 이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아무 값을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모나리자 그림을 벽종이로 삼을 수 있고, 누군가는 불쏘시개로 삼을 만하겠지요. 벽종이로 삼는 사람한테는 벽종이로 좋다고 느낄 테고, 불쏘시개로 삼는 사람은 불쏘시개로 쓸 만하다고 여길 테니까요.

 주명덕 님 사진이라고 알아보아야 사진이 좋다거나 주명덕 님 사진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개 사진이라고 알아보기에 앞서 사진이 좋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사진이 좋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아무개 님 사진이더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라키 님 사진책을 장만해야 아라키 님 사진을 헤아릴 수 있지 않습니다. 아라키 님 사진책을 장만하지 않더라도 아라키 님 사진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어야 비로소 아라키 님 사진을 헤아립니다.

 《태백산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해서 《태백산맥》이라는 문학이 내 마음속에 촉촉히 아로새겨지지 않습니다. 한 줄만 읽더라도 이 작품을 내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토지》를 읽은 사람이 박경리라는 분을 다 안다 말할 수 있으려나요. 그러나 박경리 님을 곁에서 오래오래 모신 분이라 할지라도 박경리 님을 하나도 모른다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 ‘맛나 보이는’ 밥을 먹을 때랑 눈을 감고 ‘누군가 떠 주는’ 밥을 먹을 때에는 어떻게 다르려나요. 눈으로 보면서 먹어야 참맛이고, 눈을 못 뜬 채 자리에 드러누워 밥술을 받으면 거짓맛이려나요.

 사진밭이든 그림밭이든 글밭이든 ‘전문가’란 없습니다. ‘작가’라든지 ‘선생님’이라든지 ‘프로페셔널’이라든지 ‘아마추어’라든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면 그저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그예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백만 권이 팔린 책을 하나 내놓은 사람이라 해서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뛰어난 글쟁이가 아닙니다. 대학교수라거나 사진잔치를 백 차례 열었다거나 사진책을 열 권 내놓았다거나 나라밖에서 이름을 날린다 하거나 사진상을 여러 차례 탔다고 해서 놀랍거나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다문 한 사람이 읽을 글을 쓰더라도, 아니 남한테 보이지 않고 나 스스로 읽는 글을 쓰더라도 훌륭합니다. 꼭 한 사람한테 선물하는 사진을 찍더라도, 아니 그냥 내 방에 얌전히 붙여놓을 사진을 찍더라도 아름답습니다.

 소한테는 불경이 아닌 여물이 반갑습니다. 여물보다는 들판에 스스로 자라는 풀이 훨씬 반갑습니다. 돼지한테는 피카소 그림보다 정갈한 돼지우리가 고맙습니다. 정갈한 돼지우리보다는 너른 들판과 축축한 웅덩이가 고맙습니다.

 사진쟁이 쿠델카가 훌륭하다면 여러모로 이름나거나 손꼽히는 작품 때문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쿠델카라는 사진쟁이가 내놓은 사진이나 책을 들여다보면서 나 스스로 가슴에서 뭉클하게 움직이는 무언가 있을 때에 훌륭합니다. 사진쟁이 전민조가 좋다면 이렁저렁 좋다 하는 작품이나 바지런한 삶자락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전민조라는 사진쟁이가 이룬 사진이나 책을 살피면서 나 스스로 따순 사랑과 예쁜 믿음을 느낄 때에 좋습니다.

 글은 내 삶에 맞추어 내 결에 따라 읽습니다. 사진 또한 내 삶에 걸맞게 내 눈썰미로 읽습니다. 어떠한 비평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나 잣대에 따라 문학을 읽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전문가가 밝히는 이야기나 실마리에 따라 사진을 읽을 수 없어요. 오로지 내 가슴으로 읽는 글이고, 오직 내 마음으로 읽는 사진입니다.

 내 삶을 차분히 읽으면서 글 한 줄 기쁘게 읽습니다. 내 삶터를 곰곰이 읽으면서 사진 한 장 즐거이 읽습니다.

 좋은 글이 있다 해서 누구나 이 좋은 글을 좋게 읽어내지 못합니다. 좋은 글이 아닌 나쁜 글이라 할지라도 내가 일구는 내 삶이 좋은 삶일 때에는 나쁜 글이라 하더라도 따숩게 보듬으면서 좋은 길로 이끄는 한편, 이 나쁘다는 글에서도 좋은 넋을 길어올립니다.

 좋은 사진이 있다지만 누구나 이 좋은 사진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사진이 아닌 나쁜 사진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꾸는 삶이 좋은 삶일 때에는 나쁜 사진을 보면서도 좋은 사진을 배우는 가운데, 이 나쁘다는 사진이 걸어가면 아름다울 좋은 길을 살피면서 서로서로 오붓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는 이론으로 문학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론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잘 쓴 글이란 없고, 잘 찍은 사진이란 없습니다. 글 잘 쓰기를 가르칠 수 없고, 사진 잘 찍기를 물려줄 수 없어요. 그런데 모든 글은 다 잘 쓴 글이며, 모든 사진은 몽땅 잘 찍은 사진이에요. 사랑스러운 삶을 꾸린다면 누구나 잘 쓴 글이면서 잘 찍은 사진입니다. 믿음직한 삶을 여민다면 언제나 잘 쓴 글이고 잘 찍은 사진입니다. 너그러운 삶을 엮는다면 한결같이 잘 쓴 글이요 잘 찍은 사진일밖에 없어요.

 이론이 아닌 삶으로 문학을 합니다. 이론 아닌 삶으로 문학을 받아들입니다. 이론이 아닌 삶으로 사진을 찍거나 배우거나 말합니다. 평론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기 때문에 사진 작품 하나를 천만 원을 들여 장만해서 큰방 너른 벽에 붙이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사진이요 아름다운 작품이기에 조그마한 사진일지라도 책상맡에 붙여놓고 날마다 수없이 들여다봅니다.

 왜 숱한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스러운 님(아이이든 짝꿍이든 어머니이든 동무이든 연예인이든)’ 모습이 담긴 사진을 수첩이나 지갑에 넣고 다닐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아이나 손주 사진을 벽에 붙여놓으려나요. 잘 찍은 사진이라서 갖고 다니거나 붙이겠습니까. 훌륭하다는 사진이라서 간직하거나 자랑하겠습니까.

 얼굴이 예쁘장한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삶이 귀여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얼굴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가꾸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요, 그럴듯한 겉치레 솜씨를 배우면서 선보이려는 사진은 아름다울 수 없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읽을 때부터 겉모습이 아닌 속모습을 읽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부터 옳게 하는 사람이 사진찍기를 신나게 즐기고 재미나게 나눕니다. 사랑을 먹으며 태어나는 글이고, 사랑을 받으며 꽃피우는 사진입니다. (4343.12.29.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 우리말 생각 ㉢ 말이랑 글이랑


 말사랑벗들은 말과 글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말은 무엇이고 글은 무엇인지 가를 수 있는가요.

 ‘한글’은 글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우리말’은 말을 가리키는 이름이에요. ‘한글’과 맞물려 ‘한말’이라는 낱말도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말사랑벗들은 들어 본 적 있나요?

 말과 글이 다르니 마땅히 이처럼 이야기할 만해요. 이제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한자를 드러내어 쓰는 일이 없어요. 몇몇 신문사는 종이로 찍혀 나오는 신문에 적는 이름에만 한자를 쓸 뿐, 이제는 99.999% ‘한글만 쓰기’를 하는 이 나라 이 겨레예요. 2%가 아닌 0.001%가 모자라 ‘말과 글이 하나되지’는 못했으나, 2011년을 놓고 보면 거의 빈틈없이 말이랑 글이랑 하나로 모두었답니다.

 말이랑 글이랑 따로 놀던 지난날, 앞서 말했듯이 조선 나라일 때부터 일본한테 짓눌리던 때까지는, 사람들이 입으로 하던 말하고 종이에 적던 글하고 동떨어졌어요. 입으로 나누는 말은 지식인하고든 장사꾼하고든 농사꾼하고든 공장 일꾼하고든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였지만, 종이에 적는 글은 지식인끼리만 주고받는 이야기였어요. 이 때문에 ‘한자 섞어쓰기’가 끊임없이 말썽거리가 되지요. 왜냐하면, 한자를 잘 알거나 한자 지식이 많은 사람한테는 한자를 섞어서 쓰든 안 쓰든 아랑곳할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한자 지식이 많은데 이 한자 지식을 뽐낼 수 없으면 아깝다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손쉽게 쓰는 말로 글을 적는다면, 지식 권위와 권력이 흔들릴 테고요.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학생 논문이나 학문책은 죄다 어려운 한자말에다가 영어로 뒤범벅이랍니다. 지식 권력 울타리를 높여야 밥그릇을 지키거든요.

 말사랑벗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사랑벗들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이모나 이모부, 또는 고모나 고모부가 ‘학교 문턱을 밟아 보지 못한 분’이라 할 때랑 ‘대학교에 대학원에 유학까지 거친 분’이라 할 때랑, 말사랑벗들이 쓰는 말이 어떠한가요. 일곱 살짜리 동생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나하고 나이가 같은 동무랑 이야기를 섞을 때, 나보다 두어 살쯤 위인 언니 오빠 형 누나랑 이야기를 즐길 때에는 어떠한 말을 쓰나요.

 저는 “언어구사능력”이라든지 “많은 버림이 필요하다”라든지 “악취는 가히 살인적”이라든지 “병역의 의무를 시작했다”라든지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이라든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라든지 “세세한 관찰이 이루어져야”라든지 “동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각적 파노라마로 존재한다”라든지 “차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라든지 “우아한 얘기가 난무한다”라든지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같은 말마디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읊는 어른들은 당신 어머니한테도, 당신 아이한테도, 당신 술동무한테도 이런 말마디를 읊으려나요. 우리 말사랑벗들까지 이런 말마디를 읊는다면 얼마나 슬프며 끔찍할까요.

 “말솜씨”라든지 “많이 버려야 한다”라든지 “냄새가 코를 찌른다”라든지 “군대에 들어갔다”라든지 “어떻게 쓸까”라든지 “몹시 고맙다고 말하다”라든지 “찬찬히 살펴보았다”라든지 “동네는 이야기가 넓게 펼쳐지는 곳이다”라든지 “바야흐로 차를 만든다”라든지 “아름다운 얘기가 쏟아진다”라든지 “깊이 생각하게끔 한다”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테고, 이렇게도 말할 줄 알 텐데요.

 예부터 말을 적을 뜻에서 글을 만들었고, 우리가 쓰는 ‘한글’이란 ‘우리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을 담는 한글이 아니라, 조선 나라일 때 나랏님부터 지식인이 쓰던 중국 한문에다가, 일본이 이 나라를 짓눌렀을 때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랑 일본 말투가 뒤섞이고, 여기에 영어가 잔뜩 넘나듭니다. 우리는 말이랑 글을 차분하게 가누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는 셈이고, 여태까지 우리가 쓰는 말이랑 글을 알뜰살뜰 가누는 나날을 맞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말이란 말재주가 아니라, 내 삶을 일구는 하루하루를 곱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글이란 글솜씨가 아니라, 내 꿈을 이루는 어제오늘을 예쁘게 나누는 이야기예요. 입으로 읊어 말이고, 손으로 적어 글입니다. 말을 하듯이 글을 쓰고, 글을 쓰듯이 말을 합니다. 말과 글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에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은 다르지 않습니다. 입으로 말할 때처럼 손으로 글을 써야 아름답고, 손으로 글을 쓰듯 입으로 말할 때에 어여뻐요.

 예부터 말과 글이 하나로 되어야 한다고들 했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 때 들었을는지 모르는데, 한문으로 ‘言文一致’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어요. 지난날 지식인한테는 ‘言文一致’인데, 우리 말사랑벗님한테는 ‘말글하나’예요.

 그런데 말글하나란 무엇일까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이 똑같으면 그만일까요?

 말글하나가 되려면, 먼저 내 말과 내 삶이 하나여야 합니다. 내가 말을 하듯이 내 삶을 꾸려야 말글하나예요. 내가 글을 쓰듯이 내 삶을 일구어야 말글하나입니다.

 나 스스로 몸으로 옮기지 못하는 일을 말로만 들먹이면 말글하나가 아니에요. 내 말투가 제아무리 예쁘장하거나 빈틈이 없거나 맞춤법이랑 띄어쓰기를 잘 맞춘달지라도, 내가 하는 말대로 내가 살아내지 못하면 거짓이랍니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정작 착하게 살지 못한다면 거짓이에요. 그런데, 설마, 입으로 나쁜 말을 하며 부러 나쁜 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나쁜 말과 나쁜 짓으로 말글하나가 되려는 말사랑벗님이 있으려나요.

 나쁜 말과 나쁜 짓으로 말글하나를 일삼는다면,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멍청이’라 하고, 이러한 삶을 가리켜 ‘바보짓’이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