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3.3.
 : 봄은 오는가


- 날이 포근하다. 그러나 물은 안 녹는다. 날이 따뜻하니, 아이 자전거도 밖으로 꺼낸다. 아이한테 스스로 타 보라고 한다. 아이는 발이 발판에 닿지만 스스로 굴리지는 못한다. 자꾸 밀어 달라고만 한다. 그러나 밀어 주기만 할 수 없다. 밀다 말다 하다가는 나중에는 물끄러미 지켜보기로 한다. 아이가 아직 발에 힘이 모자라서 발판을 더 힘차게 못 밟을는지 모르나, 밀어 주는 데에만 익숙하면 안 된다. 아이한테 안 된 일이지만, 아이가 스스로 신나게 발판을 밟아야 비로소 자전거 타기가 된다.

- 포근한 날씨를 느끼며 아이한테 자전거를 태워 주기로 한다. 아이한테 “자전거 탈까?” 하고 말하니, “어, 자전거 타자.” 하면서 양말을 주워 스스로 신는다. 양말 안 신고 겉옷 안 입으면 자전거 안 태워 준다고 하도 타일렀기 때문인지, 이제 아이는 스스로 양말을 챙겨 신는다.

- 밖으로 나오니 아이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뛴다. 수레 달린 자전거를 도서관에서 꺼낸다. 수레에 내려진 덮개를 말아 올린다. 아이를 번쩍 안아 태운다. 이불을 잘 여민다. 아무리 따뜻하더라도 시골바람은 차니까.

- 얼음 녹은 논둑길을 달린다. 아이는 뒤에서 조잘조잘 노래를 부른다. “시원해. 시원해.” 하고 말하기도 한다.

- 보리밥집에 닿아 달걀 스무 알을 산다. 이제 달걀은 아이가 하나하나 집어서 담는다. 아이는 저번에 달걀 하나를 깼기 때문인지 얌전히 잘 옮겨 담는다. 예쁘다.

- 슬슬 달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수레에 앉은 채 이리 살피고 저리 살핀다. 하루하루 나이를 더 먹으면서 보고픈 모습이 훨씬 늘어나겠지. 아이야, 네 아버지가 힘이 닿는다면 앞으로는 꽤 멀리까지 자전거로 마실을 다녀 보자. 집살림하고 다른 일 한다며 늘 너하고 잘 못 놀아 주는데, 아무쪼록 사랑스레 함께 살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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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3-11 11:43   좋아요 0 | URL
ㅎㅎ 된장님이 앞에 타고 뒤에는 따님이 타시나봐요.정말 정겨워 보입니다^^

숲노래 2011-03-20 08:39   좋아요 0 | URL
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만화책과 사진책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1.3.9.



 나는 도서관을 열면서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처음부터 ‘사진책 도서관’을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문득 사진책으로 도서관을 꾸려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진책을 즐겨 사서 읽지만, 사진책만 즐겨 사서 읽지 않는다. 인문책이든 국어사전이든 과학책이든 문화책이든 만화책이든 어린이책이든 환경책이든 믿음책이든 교육책이든 딱히 가리지 않는다. 내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여기면 기꺼이 사서 읽는다. 내가 굳이 안 읽어도 될 책이라면 애써 사지 않으며, 내 삶하고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룬다면 애써 읽을 까닭이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왜 사진책이었을까. 더구나 왜 인천이었을까. 사람들은 내 ‘사진책 도서관’에 찾아오면서 “책이 많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책도 많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진책 도서관이기에 사진책만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진책 도서관이 아니라 그림책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그림책만 갖출 수 없다. 그림책 하나가 이루어지기까지 읽으며 받아들일 수많은 책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다만, 그림책 도서관이라면 한복판에는 그림책을 놓겠지.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거나 읽는 사진책이란 사진을 담은 책이다. 사진을 담은 책을 들여다보면 ‘사진으로 무언가 찍어야’ 이 책이 태어난다. 그러면, 사진쟁이는 무엇을 찍는가. 사진쟁이가 찍는 사람이나 자연이나 사물은 어떤 사람이나 자연이나 사물인가.

 사진쟁이는 사진기를 쥐기 앞서 오롯한 한 사람으로서 온누리를 껴안아야 한다. 내 사진감이 될 사람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사진쟁이는 여러 가지 사진책뿐 아니라 인문책과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 어린이를 사진으로 담으려 하는 사람이 어린이 넋과 삶과 꿈을 모르고서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겠나. 그저 예쁘장한 모습을 담으려 한다면 어린이 삶을 모르고도 찍을 수 있을 테지만, 어린이 삶을 모르며 찍는 예쁘장하기만 한 사진도 사진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내 도서관에는 사진책 옆에 만화책이 놓인다. 인천에 있을 때에도 사진책 곁에 만화책이 있었고, 옆에 그림책이 있었으며, 한쪽에 국어사전 수백 가지하고 인문책이 나란히 놓였다. 왜냐하면 사진길을 걸어가면서 이 모든 책을 두루 살피지 않고서야 사진쟁이 꿈을 이루지 못하니까.

 멧골자락으로 옮긴 뒤에도 사진책 옆에는 만화책이 놓인다. 이웃한 이오덕학교 어린이들은 사진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마, 사진책이 있는 줄조차 못 느끼리라. 어린이들은 만화책만 읽는다. 앞으로는 그림책이나 동화책도 읽을 테고, 다른 글책도 읽을 테지.

 아마 내 도서관에 찾아올 사진쟁이라면 사진책만 보일 텐데, 사진책과 함께 만화책도 읽을 수 있을까. 만화에 담는 꿈과 넋과 눈길을 곰곰이 살피면서, 사진으로 담는 꿈과 넋과 눈길이 어떠할 때에 더없이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는지를 느낄 수 있을까.

 도서관을 인천에서 연 까닭은 내 고향이 인천이기도 했지만, 예전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일할 때에 낸 통계를 보면, 우리 나라에서 책을 가장 안 읽는 곳이 인천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지지리도 안 읽는 인천사람한테 책 선물을 하듯이 책 나눔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새책이든 헌책이든 그닥 장만하여 읽지 않는 인천사람인 탓에 도서관을 연대서 더 즐거이 찾아와서 책하고 사귀지는 못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서울 등쌀에 시달리고, 늘 서울 들러리 노릇을 하는데다가, 좁은 우물인 인천을 벗어나 큰물인 서울에서 놀고픈 인천사람인 나머지, 인천이라는 터전을 고이 사랑하면서 인천사람 넋을 키우기란 만만하지 않다. 그래도 인천에서 예쁘게 뿌리내리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한테는 책이라는 씨앗 하나가 깃들었을까. 나는 내 고향마을 이웃한테 책씨 하나 남기고 멧자락으로 도서관을 옮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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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3-1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골목에 된장님의 도서관을 보고 방문하려다 문이 닫혀 못간적이 있습니다.근데 충주로 이사를 가셨다는데 아직도 인천에서 도서관을 운영하시는지 궁금해 지네요.지난주인가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 갔는데 된장님의 도서관을 못본것 같아서요^^

숲노래 2011-03-12 07:04   좋아요 0 | URL
인천에는 이제 없고 충주에만 있습니다~
 

 

- 2011.3.9. 

멧골바람 모질게 불던 아침, 가랑잎 하나 내 신짝에 고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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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3-11 11:38   좋아요 0 | URL
ㅎㅎ 고무신 정말 오래만에 보는군요^^
 
너의 눈이 되어 줄게 따뜻한 책꽂이 1
오오니시 덴이치로 지음, 야마구치 미네야스 그림,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장님 개’를 보살피는 어린이와 할아버지
 [푸른 책과 함께살기 71] 오오니시 덴이치로, 《너의 눈이 되어 줄게》(청어람미디어,2003)



- 책이름 : 너의 눈이 되어 줄게
- 글 : 오오니시 덴이치로
- 그림 : 야마구치 미네야스
- 옮긴이 : 이규원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 (2003.5.21.)
- 책값 : 7500원



 예전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를 함부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개나 고양이를 알뜰히 사랑하거나 개나 고양이를 키울 까닭이 있을 때에만 키웠습니다. 알뜰히 사랑할 수 있는 개나 고양이가 아닌데 섣불리 키우면, 이 개나 고양이가 죽는 날까지 곁에서 지켜보거나 함께 살아내지 못합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까닭이 있어 키우면, 개나 고양이는 그런대로 잘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마냥 귀여워 보이기만 해서 개나 고양이를 기르려 하다 보면, 새끼일 때에는 귀엽다지만 크고 나면 덩치가 너무 커진다든지 ‘말을 안 듣는다’든지 하면서 재미없거나 미워집니다. 사람들 살림집이 시골에서 도시로 많이 옮겨졌을 뿐 아니라,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도시에서만 살다가 죽을 때에도 도시에서만 죽다 보니까, 집에 외롭게 남는 개나 고양이는 그야말로 외로워지다가는 버려집니다. 사람들은 집짐승이라며 개나 고양이를 집으로 들이지만, 정작 어디를 다니거나 일하러 움직이거나 놀러 쏘다닐 때에는 개나 고양이를 집에 두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개나 고양이가 자꾸 새끼를 낳으면 도무지 모두 맡아서 기를 엄두를 못 내겠지요.


.. 노조미가 강아지를 안아 주었어요. 강아지는 바들바들 떨면서 작은 소리로 낑낑거렸어요. 그 소리는 마치 ‘무서워요. 제발 나 좀 살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  (11쪽)


 예부터 집짐승은 고기를 얻으려고 길렀습니다. 또는 집에서 논밭 일을 할 때에 큰힘을 내어 거들 수 있도록 부리려고 길렀습니다. 고양이는 집에서 기른다기보다 집에 깃드는 쥐를 쫓아 주는 보람으로 먹이를 주면서 고맙게 여겼습니다. 개라는 짐승은 사람한테 잘 길들면서 사람이 집을 비운 뒤에도 집을 지키는 노릇을 해 주었습니다. 개 또한 고기를 얻으려고 기른 짐승이었는데, 이제는 개고기를 얻으려는 개가 아니라 집에서 한식구로 지내는 짐승이 됩니다.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 눈으로는 흙밭을 뒹굴며 집지킴을 해야 할 개를 집안으로 들이는 일이 마뜩찮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도시살림에서는 개가 굳이 집지킴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시라는 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섬처럼 동떨어집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개이든 고양이이든 사람하고 도시에서 살아가자면 몹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는 나무나 지붕을 잘 타기에 이곳저곳 홀가분하게 누비면서 다른 골목고양이 동무를 사귄다지만, 개는 함부로 풀어서 기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개는 늑대하고 한 핏줄이요, 늑대는 거칠게 싸워서 고기를 얻어야 비로소 목숨을 잇는 들짐승이거든요. 덩치 큰 개를 길에 가만히 풀어서 키운다고 한다면, 동네사람은 두려워 할밖에 없습니다.

 개 또한 목숨이면서 짐승이지만, 개로서는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자면 목줄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목줄을 안 하자면 집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해서 살아가던 핏줄을 타고난 개인 만큼, 사람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니지조차 못하면서 집안에서만 지내야 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그런데 개는 더없이 착해서 집안에서만 지내면서도 사람하고 잘 어우러집니다. 저 가고픈 대로 마음껏 가지 못하면서도 저하고 함께 지내는 사람 말을 잘 따르며 귀여운 짓을 합니다.


.. “강아지를 기른다고? 노조미, 그럴 수는 없단다.” 노조미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물었어요. “왜 안 돼, 엄마? 이 강아지는 집도 없는데.” “노조미, 아파트단지에서는 애완동물을 기를 수가 없단다. 강아지가 불쌍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안 돼.” ..  (16쪽)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 할 때에는 ‘귀염둥이 장난감’이 아닌 ‘산 목숨’을 키우는 노릇입니다. 산 목숨은 밥을 먹습니다. 산 목숨은 움직여야 합니다. 산 목숨은 똥오줌을 눕니다.

 아기를 낳은 어버이라면 아기를 알뜰히 보살펴야 할 뿐 아니라, 아이가 신나게 뛰어놀거나 움직일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본다든지 함께 손잡고 놀아야 합니다. 이제 밖으로 나왔으니까, 아기 스스로 기고 서고 걷고 밥먹고 뛰라 할 수 없어요. 차근차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하나 보살피며 이끌어야 합니다. 아기가 자라는 동안 누는 똥오줌을 치워야 하고, 똥오줌을 가리도록 가르쳐야 하며, 스스로 밥을 먹게끔 이끌어야 합니다.

 아이도 개도 모두 귀염둥이가 아닙니다. 아이도 개도 모두 장난감이나 놀잇감이 아닙니다. 인형 아닌 산 목숨인 아이이며 개입니다.

 집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든 개를 거두어 돌보든, 우리들은 누구나 ‘산 목숨’이자 ‘산 동무’요 ‘산 살붙이’인 줄을 깨달아야 해요. ‘애완동물’, 곧 ‘귀염둥이 짐승’일 수 없습니다. ‘애완 아이’일 수 없거든요.

 한식구이자 나와 같은 산 목숨인 줄을 똑똑히 느끼면서 어깨동무하지 않고서야 아이이든 개이든 사랑스레 돌보면서 서로를 아낄 수 없습니다. 한식구이자 나와 같이 어여쁜 목숨이라고 찬찬히 느껴야 비로소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이니 무어니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운 목숨을 내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았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하여 만난 짝꿍하고 맺은 아이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이요 목숨인가를 가슴 깊이 느껴야 합니다.


..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부탁하고 또 부탁했어요. 강아지를 내버려두면 죽어버릴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너무 아팠던 거예요 … 사카모토 할아버지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어요. 강아지는 불쌍하지만, 규칙은 규칙 아닌가? 그때 노조미가 또박또박 물었어요. “앞 못 보는 사람은 맹도견이 도와주는데, 앞 못 보는 개는 누가 도와주나요?” … 할아버지는 간절한 애원에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건 생명이라고 말해 왔으면서,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 강아지를 내버리라고 할 수는 없지.’ ..  (26∼28쪽)


 《너의 눈이 되어 줄게》를 읽습니다. 일본에서는 “目の見えない犬ダン”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입니다. 일본책 이름을 풀자면 “눈이 보이지 않는 개, 단”입니다. 일본책에는 수수한 이름이 붙었으나 한국책에는 좀 ‘아이들이 감동하도록 이끌려는 이름’을 붙였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책이름을 이렇게 새로 붙이더라도 “너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이나 “네게 눈이”라 적어야 할 텐데요. 아이들한테 잘못된 말버릇을 심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어찌 되든, 이 책 《너의 눈이 되어 줄게》는 ‘앞 못 보는 개’ 이야기를 다룹니다. 앞을 못 본다며 새끼일 때부터 누군가한테서 버림받은 개를 동네 어린이가 살려내어 알뜰히 보살피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 “단, 기쁜 소식이 있단다. 네 이야기로 만든 그림연극이 올해 최우수상을 받았다는구나. 금메달이라구. 네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사카모토 할아버지는 단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어요 ..  (56쪽)


 버림받은 ‘장님 개’는 아파트단지 어린이가 찾아서 보살핍니다. 그런데 아파트단지에서는 개를 키울 수 없다고 못박습니다. 어른들, 그러니까 아이들 어버이는 개를 내다 버리라고 말합니다. 장님 개를 불쌍히 여기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딱 한 사람, 아파트단지를 지키는 할아버지 한 분은 ‘규칙은 규칙’이지만 ‘산 목숨을 내다 버릴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저희 집에서 돌아가며 맡아 보살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파트단지 빈터에 몰래 개집을 마련해 돌보면 어떻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이내 어른들한테 들킵니다. 이때에 아파트단지 지킴이 할아버지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섭니다. 할아버지가 곁에서 개집과 울타리를 마련해서 돌보아 줄 테니까, 아이들이 바라는 대로 장님 개를 우리가 건사하자고 허리 숙여 바랍니다.

 할아버지는 젊은 엄마 아빠 앞에서 기꺼이 허리를 숙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이를 더 먹었달지라도 목숨 하나 앞에서는 똑같은 목숨이기 때문이에요. 어린이들 또한 장님 개를 그저 딱하게만 여긴 채 지나칠 수 있고, 제 엄마 아빠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며 내다 버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제 어버이한테 꾸중을 듣더라도 장님 개를 내다 버릴 수 없다고 외칩니다. 장님 개도 똑같이 아름다운 목숨이라고 외칩니다. 이 가녀린 목소리를 아이들 어버이는 듣지 못합니다. 할아버지가 허리 숙여 바라며 바랄 때에 겨우 마음이 움직입니다.


.. 산비둘기들은 번갈아 가며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아예 전부가 단의 밥그릇으로 몰려와 머리를 집어넣고 콕콕 쪼아먹기 시작했어요. 단은 산비둘기들과 함께 사이좋게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밥을 먹었답니다 ..  (74∼75쪽)


 《너의 눈이 되어 줄게》라는 책을 읽다 보면, 장님 개를 살려낸 몫은 어린이들이지만 장님 개를 보살피며 아낀 몫은 바로 할아버지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먼저 장님 개를 알아보아서 건져내어 돌보려 했다면 아마 아파트단지 한켠 빈터에 개집과 울타리를 마련해서 키우지 못했겠지요. 지킴이 할아버지는 지킴이 노릇을 해야지, 왜 규칙을 어기며 엉뚱한 짓을 하느냐고 한소리를 듣거나 쫓겨났겠지요. 아이들 또한 지킴이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도움을 받지 못했을 테고요.

 이 땅에서 가장 여리다 할 만한 어린이와 늙은이가 장님 개를 지켜 주었습니다. 가장 힘없다 할 어린이와 늙은이가 힘없는 목숨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이웃입니다. 힘든 동무를 돕는 사람은 힘여린 동무입니다. 걸음이 어려운 할머니가 지하철 높은 계단에서 힘겨워 할 때에 한쪽 팔을 붙잡거나 한쪽 어깨를 내어주어 도와주는 이는 할머니처럼 몸이 힘들거나 몸이 힘들어 본 사람입니다.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장님 개를 알아봅니다.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장님 개를 따스히 돌봅니다.

 부자라 해서 다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서 착한 마음이나 참다운 넋을 자꾸 잃거나 잊습니다. 부자가 되었으면 즐거이 이웃사랑을 하면 좋으련만, 더 큰 부자가 되려고 돈굴리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나는 네 살 딸아이를 돌보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곧 둘째 아이를 맞아들여 집살림을 꾸릴 어버이로서 생각합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 집은 부자로 살아가는 나날은 꿈꿀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 살붙이들이 사랑스레 살아갈 나날을 꿈꾸면서 조금 더 예쁘며 착하게 어우러지자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착한 어린이로 살아가면서 착한 푸름이로 마음껏 흐드러지도록 곁에서 돕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착한 어른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어버이 노릇을 착하게 하고 싶습니다. 내 몸처럼 네 몸을 생각하고, 네 마음과 내 마음이 살가이 만날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4344.3.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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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인터넷에서 ‘뭥미’처럼 쓰는 말도 나중에 표준말이 되나요
 : ‘뭥미’이기 때문에 표준말이 되지 말란 법이 없어요. 어떠한 말이든 우리가 두루 쓸 만하거나 우리가 알뜰히 쓸 만하다면 언제라도 표준말이 됩니다. 다만, 인터넷에서 장난스레 쓰는 낱말이 표준말이 되는 일은 아주 드물어요. 딱 하나, ‘꿀꿀하다’는 표준말이 되었습니다. ‘꿀꿀하다’는 인터넷에 앞서 컴퓨터통신이라는 매체가 쓰이던 무렵에 태어난 낱말이에요. 1990년대 첫무렵부터 젊은이와 푸름이 사이에서 널리 쓰인 ‘꿀꿀하다’를 놓고 수많은 어른들은 몹시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낱말은 이제 표준말이 되었습니다. 억지스레 새로 만들어 본다 해서 널리 쓰이는 말이 될 수는 없고, 사람들 마음을 살며시 건드리면서 예쁘게 움직일 수 있으면 얼마든지 새말이 태어납니다.

 5. 한자말은 쓰면 안 되나요
 : 밑생각을 말씀드린다면, 한자말은 쓰면 안 됩니다. 한자말은 한자말을 써야 하는 자리에만 써야 합니다. 이는, 영어도 마찬가지예요. 영어는 영어를 해야 하는 자리에만 써야지, 아무 데에서나 영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말을 아무 데에서나 써도 되겠습니까. 네덜란드말이나 핀란드말을 아무 곳에서나 써도 될까요. 한자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사람이 중국사람끼리 생각을 주고받으려고 쓰는 중국말이에요. 우리는 중국사람이 쓰는 중국말 가운데 우리도 쓰기에 괜찮다 싶은 낱말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영어에서도 매한가지예요. 영어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쓰기에 알맞다 싶은 낱말을 받아들입니다.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일본말이든 러시아말이든 필리핀말이든, 우리 삶과 넋을 북돋우는 말이라면 곰곰이 살피며 알맞게 가다듬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지식이나 정보를 자랑하려고 함부로 쓰는 한자말이나 영어가 될 때에는 올바르지 않아요. 하나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가 써도 될 한자말이란 ‘한자로 지은 중국사람 낱말’이라고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따로 한자를 밝힐 까닭 없이 한글로만 써도 누구나 알아듣는 낱말’입니다. 이를테면 ‘학교’나 ‘학생’이나 ‘칠판’이나 ‘교과서’나 ‘시험’ 같은 낱말이 우리말로 녹아든 한자말입니다.

 6. 똥오줌은 지저분한 말인가요
 : 똥과 오줌을 지저분하다고 여긴다면 ‘똥오줌’이라는 낱말을 지저분하다고 여길 테지요. 아마, 요즈음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몹시 적은데다가, 어린이나 푸름이 가운데 어버이를 도와 농사를 짓는 동무는 아주 적을 테니까, 똥오줌을 지저분하다고 여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으며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삼지 않으면 농약과 화학비료를 써야 합니다. 요사이는 ‘유기농’이라는 말을 제법 쓰지요? ‘유기농(有機農)’이 무엇일까요? 한자로 지어서 쓰니까 알기 참 어려운 낱말이 되고 마는데, 유기농이란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삼아 짓는 농사”입니다. 한 마디로 ‘똥오줌농사’예요. 그런데 유기농이라는 낱말을 쓰는 분들은 여느 사람들이 ‘똥오줌’이라는 낱말을 안 좋게 받아들이니까, 이렇듯이 한자로 뒤집어씌워서 이야기합니다. 정작 똥오줌을 거름으로 농사를 지어야 ‘깨끗한’ 농사이고 ‘깨끗한’ 먹을거리를 얻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농사이름을 ‘똥오줌농사’라 가리키지 못하는 우리나라예요. ‘똥오줌농사’라 말하면 지저분한 듯 여기는 한국사람이에요. 그러면서 ‘유기농’ 먹을거리를 맛있다며 즐기는 한국사람입니다. 저도 텃밭농사를 지으면서 똥오줌을 거름으로 쓰는데, 내 몸으로 들어온 밥이 똥과 오줌이 되어 나와서, 이를 잘 갈무리하여 거름으로 쓰면 흙이 한결 살아나며 제 마음과 몸도 한결 튼튼해집니다. 도시에서는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지 않으니까, 도시에서는 똥오줌은 모두 수세식변기로 흘려보내며 쓰레기처럼 버리니까, 도시사람한테는 똥오줌이 참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낱말이 되고 맙니다. 

(난 유기농이라는 말이 참 싫다. 왜 똥오줌을 이런 한자말로 뒤집어씌워서 말해야 하나.)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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