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59] 오줌그릇

 오줌그릇을 씻는다. 옆지기가 쓰는 오줌그릇을 씻고, 첫째 아이가 쓰는 똥오줌그릇을 씻는다. 옆지기가 쓰는 오줌그릇은 오줌을 여럿 눈 다음에 비우고 나서 씻는다. 첫째 아이가 쓰는 똥오줌그릇은 오줌을 두 번쯤 눈 다음에 비우고 나서 씻는다. 똥을 누면 곧바로 비운다. 오줌그릇을 비우고 나서 물로 헹구고 수세미로 오줌 기운이나 똥 기운을 닦곤 한다. 비가 내리고 나서 냇물이 불었으면 냇가에 흐르는 물에 오줌그릇을 대고는 맨손으로 훌훌 휘저으며 닦는다. 집안 씻는방에서도 수세미를 안 쓰고 그냥 맨손으로 닦곤 한다. 오줌그릇 닦은 손으로 빨래를 하고, 빨래를 한 손으로 쌀을 씻으며, 쌀을 씻은 손으로 밥을 하고, 밥을 한 손으로 둘째 기저귀를 갈며, 둘째 기저귀를 간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걸레질을 한 손으로 젓가락을 쥐며, 젓가락을 쥐던 손으로 책을 겨우 집어든다. 모처럼 낱말책을 펼쳐 ‘요강’이라는 낱말을 살핀다. ‘요강’은 한자를 빌어 이래저래 적기도 한다지만 토박이말이란다. 토박이말이면 토박이말이지 왜 굳이 한자를 빌어서 적어야 할까. 밥을 밥으로 적으면 되지 애써 ‘食事’로 적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오줌이 마려운 사람한테 “요의(尿意)가 있다”고 일컫는 병·의학 전문가들이 무섭다. (4344.6.4.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 생각
― 사진과 삶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모두 사진이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틀림없이 사진이라 할 테지만, 속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사진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밥을 하면 다 밥이 되겠지만, 밥을 하다가 그만 간장인 줄 알고 염산을 부었다든지, 된장인 줄 알고 흙을 넣으면 어떻게 될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밥이라 할 테지만, 이러한 밥은 아무도 먹지 못합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얻을 때마다 방사능이 나옵니다. 이 방사능을 막으려고 원자력발전소는 시멘트를 아주 두껍게 바릅니다. 그러나 시멘트벽을 아무리 두껍게 한들 모든 방사능을 막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에서 무척 떨어진 곳에 마련합니다. 이른바 두메나 시골에 마련합니다. 방사능은 아주 조금만 새더라도 사람과 들판과 물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방사능에 젖으면 아기를 낳을 때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거나 팔다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흔히 가볍게 쓰는 전기라 하지만, 전기는 흔히 가볍게 쓸 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아슬아슬하게 다루면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두메나 시골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도 괜찮은 곳일까 궁금합니다. 두메사람이나 시골사람은 방사능덩어리를 곁에서 떠안으면서 살아야 할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쓰는 전기를 왜 도시에서 안 만들고 두메나 시골에 발전소를 짓고, 길디긴 전깃줄을 드리워 도시로 가져가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말 그대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으면서 놀이를 즐기려 한다면, 이들은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놀이를 한다’고 해야 옳습니다.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 사진쟁이 앞에서 ‘사진기를 들고 놀’ 때에도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놀이’라 하거나 ‘모델’이라 하겠지요.

 멋스러이 보이는 사진을 노리는 분들이 퍽 많습니다. 사람들이 멋스러이 바라보기를 바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도 멋스러이 느끼고픈 사진을 노린다 할 만합니다. 이분들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찍기’를 한다 여길 텐데, 속으로 본다면 ‘멋부리기’를 하는 셈입니다. 멋부리기는 멋부리기이지 사진찍기는 아니에요. 사진찍기는 멋부리기가 아니라 사진찍기입니다.

 사진을 찍어 그러모은 다음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도 사진잔치를 스무 차례 가까이 했습니다. 사진잔치를 마련할 때에는 그동안 내가 걸어온 사진길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걸어갈 사진길을 새롭게 살펴보려는 뜻입니다. 땀흘려 찍은 사진을 이웃한테 선보이면서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맑아지거나 흐뭇해지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며 좋아해 주거나 사랑해 주기를 빌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사진으로 내 삶을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끼니를 때울 때에 내 몸을 북돋우고 내 삶을 이을 마음이지,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내 이웃이 배가 부르리라 여길 수 없어요. 내 사진잔치는 오로지 내 사진길을 밝히거나 채우는 잔치마당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잔치를 마련하면서 ‘내가 맞아들여 나를 북돋우는’ 뜻이 아니라 ‘남한테 내보여 남한테 평가(값매김)를 받으려’ 하는 이가 꽤 많습니다. 전시관마다 수많은 사진잔치를 꾸준히 잇고, 신문과 잡지와 방송마다 새로운 사진잔치를 알립니다. 사진잔치는 왜 알리고 어떻게 알리며 누구하고 나누는 자리일까요.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은 바로 내 삶입니다. 내가 찍는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내 삶이 겉치레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거들먹거리거나 자랑하려는 매무새라 한다면 내 사진 또한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여주거나 멋스러이 보여주려는 매무새가 되고 맙니다.

 내 삶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에 맞추어졌다면, 내 사진 또한 돈을 벌 만한 사진찍기로 기울어집니다. 내 삶이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듯이 ‘역사에 남을 사진 한 장’을 꾀하는 데에 맞추어졌으면, 내 사진 또한 이름값을 높이거나 얻거나 누리는 데로 치우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며, 살아가는 대로 바라보고, 바라보는 대로 살다가, 사진기를 쥐어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하고 왜 어떻게 살림을 꾸리는 한 사람일까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사랑을 바라는 사람인지 돈값을 꾀하는 사람인지를 가만히 되뇝니다. 나는 꿈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는 착하게 살고픈 사람인지, 나는 어여쁜 살림살이를 아끼고픈 사람인지 찬찬히 곱씹습니다.

 멋부리는 삶은 그럴듯하겠지만, 따사로운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름있는 삶은 빛나겠지만, 너그러운 삶은 참답습니다.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 글 한 줄, 만화 한 쪽, 노래 한 가락, 춤 한 사위, 어느 곳에서나 예쁜 넋이 어리는 예쁜 삶이 고마우면서 반갑습니다. (4344.6.4.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함께 살아가는 말 58] 거스러기

 거스러기는 아주 작습니다. 거스러기는 딱히 생채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그마한 거스러기 하나가 나면 손을 쓸 때마다 따끔거립니다. 거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떼어내든 손톱깎이로 자르든 해야 합니다. 짐을 나르건 설거지를 하건 빨래를 하건 아이를 안건 아기 기저귀를 갈건 책을 읽건 거스러기가 자꾸 걸립니다. 몸이 튼튼할 때에는 거스러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몸이 여릴 때에는 거스러기가 시나브로 생깁니다. 몸이 힘들거나 고단한 날 무언가를 하다가 자꾸 걸리적거리기에 손가락을 들어 바라보면 거스러기가 생겼습니다. 엊저녁,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고 나서 손톱깎이를 찾습니다. 거스러기를 똑똑 자릅니다. 오른손가락에는 하나도 없으나, 왼손가락에는 예닐곱 군데가 있습니다. 뭐에 살짝 긁히더라도 물이 닿으면 쓰라리거나 따끔합니다. 집밖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뭐에 살짝 긁힌 만큼이라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손끝에 거스러기가 생기더라도 호미질과 낫질과 괭이질을 할 때에는 마음쓰이지 않을 뿐더러 실장갑을 끼면 됩니다. 집안에서 밥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빨래를 하다가는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걸레를 빨아 닦든지 치우든지 하는 살림꾼은 아주 자그마한 생채기나 거스러기 하나 때문에 힘들거나 아픕니다. 거스러기는 사투리라 하고, 서울말은 거스러미입니다. (4344.6.4.흙.ㅎㄲㅅㄱ)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11-06-05 22:37   좋아요 0 | URL
거스러기라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
 



 들꽃을 꺾어서


 읍내 장마당 마실을 가는 길목, 두 시간에 한 대 오는 시골버스를 기다린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버스가 몇 분 늦는다. 아이는 “버스가 늦네.” 하고 말하다가는 버스타는곳 둘레 풀밭에서 들꽃을 꺾는다. 꺾은 들꽃을 한손에 모아 쥔다. 이윽고 시골버스가 들어온다. 읍내로 가는 십이 분쯤 되는 길을 지나고, 읍내에 닿아 우체국에 볼일 보러 가는 길에서 몇 분 더 흐른다. 아이가 손에 쥔 꽃은 그새 고개를 폭 숙인다. 더운 날씨에 금세 시들고 만다. “꽃이 벌써 시드는구나. 흙에 놓고 가자. 꽃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자.” 아이는 손에 쥐던 꽃무더기를 흙자리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4344.6.4.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笑顔大好き地球の子 (大型本)
田沼 武能 / 新日本出版社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이야기하는 사진책은 안 뜨지만, 다른 사진책에서도 이분 사진결을 느끼면 좋으리라 생각해서 다른 사진책에 느낌글을 걸칩니다) 



 지구별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랍니다.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이는 저처럼 작고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작고 어여쁜 아이는 새롭게 태어나고, 이 작고 어여쁜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다시금 저처럼 작으면서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온누리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아이가 새로 태어나서 자라기 때문에 나라살림을 이룹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때라야 비로소 한 나라 살림을 이룹니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일을 하거나 돈을 벌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오직 놀 수 있을 뿐이요,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을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여리디여리며 작디작은 아이가 있어야 비로소 어느 나라이든 나라꼴을 갖춥니다.

 잠수함이 없고 군함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군대가 없거나 경찰이 없어도 나라를 돌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돌볼 수 없습니다. 아파트가 없고 쇼핑센터가 없어도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어요.

 ‘애국’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넋을 사랑하며 내 말을 사랑하는 나라사랑입니다. ‘경제개발 역군’이 되자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작은 살림집을 사랑하고, 내 살가운 살붙이를 사랑하자는 나라사랑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과 걸레질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먹으려고 밥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한테 입히려고 빨래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오순도순 지내려고 비질과 걸레질을 해서 집안을 말끔히 치웁니다. 오직 사랑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을 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집안에서 살림을 꾸립니다.

 사진책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를 읽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어린이》는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님이 온누리 숱한 나라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을 담습니다. 한두 나라 어린이가 아니라 백 나라를 훨씬 넘는 수많은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사귑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서도 제법 잘사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멸차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서도 퍽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많디많은 나라 많디많은 어린이를 사진책 하나로 마주하며 곱씹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아이들 웃음꽃은 서로 닮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눈물꽃 또한 서로 닮습니다. 아이들 눈망울은 비슷합니다. 아이들 몸짓은 비슷합니다. 저마다 즐기는 놀이가 다르고, 저마다 낳은 어버이와 키우는 어버이가 다를 테지만, 아이들 살림살이는 엇비슷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아간대서 더 불쌍해 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지낸대서 다 가엾게 보이거나 딱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나라살림이 넉넉해서 돈 걱정이나 배곯이 걱정이 없는 곳에서 지낸다 하는 아이들이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할는지 모릅니다. 주어진 틀에 따라 학교를 다녀야 하고, 시키는 틀에 따라 시험을 치러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하는 아이들이 훨씬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한데다가 고단할는지 모릅니다.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그저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이 아이들 차림새를 살피면 한눈에 이 아이가 살아가는 집안살림이 어떠한지 헤아릴 만합니다. 그런데 ‘집안살림 = 돈 크기’가 아니에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겁거나 오붓하게 지내는 집안이 있습니다. 돈은 있으나 돈만 넘치게 쓸 뿐, 기쁨이나 애틋함하고는 동떨어진 집안이 있어요.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만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은 끼니를 굶을 근심이 없더라도 마음속에 사랑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을 알맞게 나누어 서로서로 살뜰히 맡으면서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을 알뜰히 여민다면, 이러한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가슴속 깊이 사랑씨를 뿌립니다. 아이들 웃음꽃이란 아이들을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뿌린 사랑씨에서 비롯합니다. 아이들 눈물꽃이란 아이들을 보살피며 함께 지내는 어버이가 뿌린 미움씨에서 비롯해요.

 새삼스레 《지구별 어린이》를 거듭 넘기고 다시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지구별에서 가 보지 않은 나라가 없겠지요. 모든 나라 모든 아이를 마주하며 사귀었을 텐데, 아마 어느 나라 어느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들 낯빛과 사랑빛과 눈물빛은 매한가지로구나 하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나라로 찾아가서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지 않더라도 아이들 맑은 눈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가난하거나 더 ‘두메’라 하는 데까지 찾아가야 아이들 밝은 웃음빛을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일본 사진쟁이로서는 일본에서 얼마든지 만나는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입니다. 한국 사진쟁이라면 한국에서 얼마든지 만날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일 테지요.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일본부터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만을 거쳐 지구별을 샅샅이 밟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느 겨레를 찾아가서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는 아이답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어린이”가 아닌 “일본 어린이”가 되어도, 또 “일본 훗카이도 어린이”가 되어도, 또 “우리 집 내 아이”가 되어도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은 똑같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나한테 있습니다. 사진감과 사진말과 사진꽃과 사진빛과 사진뜻과 사진값과 사진꿈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나를 보고 내 삶을 볼 때에 내가 걸어갈 사진길을 깨닫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