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스 - 매와 소년
배리 하인즈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교육은 아이들한테 어떤 구실을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 차분하게 들려주는 <케스-매와 소년>이라는 소설책입니다. 책이름만 보고는 교육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지 매 이야기를 다룬 책인지 짐작을 하기 어렵겠지만, 한번 손에 쥐면 마지막 쪽을 펼칠 때까지 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도 느낌을 적기 참 힘들군요. 두 차례 읽은 뒤 <케스-매와 소년>에 나오는 주인공 빌리가 학교를 다녔을 나이에 저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느낌글을 올려 봅니다. 


 학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 《케스―매와 소년》을 읽고


 〈1〉 ‘학교’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1

 한때는 학교에서 저를 가르쳤던 교사 이름을 퍽 떠올리곤 했지만, 이제는 거의 떠올리지 못합니다. 어쩌면 떠올릴 까닭이 없는지 모릅니다. 국민학교 때 만난 교사 가운데 세 사람쯤, 중학교 때 만난 한 사람쯤, 고등학교 때 만난 네 사람쯤이 그래도 교사 노릇을 하지 않았냐 싶기는 하지만, 다른 분들은 글쎄요. 그분들한테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그분들이 저한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학교에서 그분들이 저한테 가르친 것 가운데 아무것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친 셈이에요.


.. 침묵이 짙어졌다. 소년들은 목젖을 삼키기 시작했고 꼼짝않고 있는 머리에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선생들은 서로 마주 쳐다보고는 곁눈으로 강단을 바라보고 했다.
 그때 한 소년이 기침을 하였다.
 “누가 그랬어?”
 모두들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가 그랬느냐 말야?”
 선생들이 가까이 다가들었다. 폭동진압대처럼 경계태세를 갖추고.
 “크로슬리 선생! 그 가까운 데예요! 못 보셨소?”
 크로슬리는 낯을 붉히고 공포에 찬 아이들을 밀치며 소년들 사이로 달려들어갔다.
 “거기요, 크로슬리 선생! 거기서 났소! 그 주위요!”
 크로슬리는 한 소년의 팔을 잡고 넓은 데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제가 아니에요, 선생님!”
 “아니긴 뭐가 아냐.”
 “아니에요, 선생님. 정말예요!”
 “우기지 마, 내가 봤어.”
 그라이스는 콧구멍으로 씩씩 숨을 내뿜으며 독경대 너머로 턱을 내밀었다.
 “맥도월! 바로 너였구나! 내 방으로 가!” ..  〈48쪽〉


 고등학교까지 마치며 학교를 그만두지 못한 제 자신을 얼마나 나무라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 끔찍한 학교를 다니면서 참을성 하나는 끈덕지게 기른지 모릅니다. 아, 저는 이 나라 제도권 교육에 고맙다는 말씀을 올려야 할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여태껏 한 가지 일을 다부지게 붙잡고 언제까지나 힘내어 밀고 나가는 바탕에는 끔찍한 제도권 교육 열두 해를 큰 탈 없이 마치도록 참게 한 도움이 큰지 모르니까요.

 어릴 적에는 하나도 몰랐던 일들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이오덕 교육일기》나 《전은이 선생의 교단 30년 일기》 같은 책을 보면서 하나둘 깨달았습니다. 국민학교 때 골목길 청소를 나가고, 열 사람씩 모여서 새마을노래나 건전가요를 부르면서 하나둘 하나둘 구령도 붙이며(높은학년 언니가) 학교까지 걸어가던 일을 왜 시켰는지, 골마루에 왁스를 맨들맨들해지다 못해 사람 얼굴까지 비칠 때까지 닦으라고 시키던 일이나 환경미화를 왜 했는지 말입니다. 방위성금은 얼마나 자주 내야 했으며, 평화의댐 짓는 성금은 왜 그리도 재촉이 모질었는지, 폐품 모으기는 또 왜 그다지도 반 경쟁까지 시키며 들들 볶았는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한 사람 앞에 가지고 오라는 부피(빈병 둘, 신문지 한 뭉치(한 달치쯤))를 못 채운 아이들이 매를 맞고 운동장을 한 시간 동안 돌며 벌을 받을 때에도 ‘빈병이 있으려면 집에서 사이다를 사마시든 술을 사마시든 해야’ 하며, ‘헌 신문지가 있으면 집에서 신문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나도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에도 폐품 모으기를 했는가 모르겠는데, 국민학교 때 그 무거운 빈병과 신문뭉치를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낑낑 들고 학교까지 가지고 갔던 일, 달마다 폐품 모으기를 할 때면 한두 시간쯤 운동장에 모든 학년이 다 모여서 얼마를 모았는가 세고 순위를 매겨서 발표하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 소년들은 창문 앞에 열을 짓고 카펫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쳤다. 그라이스는 마치 시원찮은 상품들 중에서 물건을 골라야만 하는 사람처럼 번번이 고개를 저으며 하나씩 그들을 살펴보았다.
 “늘 보는 얼굴이야. 어째서 항상 그 얼굴이지?”
 심부름 온 학생이 한 발 나서서 한 손을 들었다.
 “저, 선생님.”
 “끼어들지 마, 내가 말하고 있을 때.”
 그는 물러서서 열의 빈 자리를 채웠다.
 “난 너희들이 지긋지긋하다. 너희들이 날 죽일 거야. 하루도 내가 처리해야 할 녀석들 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어. 하루도 없었다구, 하루도. 내가 이 학교에 온 뒤로 내내. 그게 얼마나 됐는지 알아? … 십 년이야. 그런데 학교는 처음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어.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구.”
 소년들도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그들의 얼굴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듯 살피고 있을 때 그들은 시선을 떨구었다 ..  〈57쪽〉


 지금 가만히 돌이켜보면, 지난날 저를 가르쳤던 교사 가운데 퍽 많은 이들이 ‘지금 제 나이보다 어립’니다. 중고등학교를 갓 문을 연 곳을 다녔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십대 중반인 교사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떠들거나 말썽을 일으킨다는 아이들한테 손찌검, 매질 한 번 못하고 큰소리도 한 번 못 친 교사도 한둘 있었지만, 나머지 교사 가운데 4/5쯤은 당구채, 각목, 야구방망이, 쇠자 따위를 출석부와 함께 꼬박꼬박 챙기며 다녔습니다. 더러 출석부도 안 들고 맨몸으로 다니는 교사도 있었는데, 이런 교사한테 수업을 받을 때면 주번이나 반장ㆍ부반장이 미리 출석부를 챙겨서 교탁에 얹어 놓아야 했고,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번이나 반장ㆍ부반장이 곧바로 교탁으로 불려나와 ‘맨몸으로 온 교사’한테 따귀 한두 대 얻어맞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맨몸 교사’는 언제나 ‘몽둥이 현지조달’ 교사였고, 교실에 밀대자루가 있으면 밀대자루로, 밀대자루를 숨겨 놓았으면 빗자루로, 빗자루마저 숨겨 놓았으면 칠판지우개로, 출석부로, 또 우리들이 쓰던 필통 가운데 쇠로 된 것을 빼앗아서 휘둘렀습니다. 이런 교사 가운데 하나로 중학교 때 기술 선생이 떠오르는군요. 어느 날인가 기분이 아주 나빴는지, 한 아이를 불러내어 권투를 하듯 엄청나게 주먹세례를 퍼부어 그 아이가 코피를 흘리며 교단 구석에 몰려서 벌벌 떨고 있는 데에도 때리기를 멈추지 않아 교실에 온통 소름이 끼치던 일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젊은 선생이라면 ‘젊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더욱 젊게 껴안고 부대끼면서 가르쳐야 했을 터인데, ‘젊다는 객기와 넘치는 힘’으로 우리들을 짓누르고 모질게 때리기 일쑤였습니다. 제 초중고등학교 때 떠오르는 일 하나를 대라면, 아니 가장 크게 떠오르는 일을 대라면 이 몽둥이질 천국, 하루도 매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록 억눌려 있는 세상, 이것을 들겠습니다.

 어쩌면 학교 교사들은 아이들(그러니까 저를 비롯한 우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겠지요. 《케스―매와 소년》에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학교 교사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사들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미친개-불독-또라이-개뼉다귀’였습니다. 어쩌면 학교 교사들도 우리들을 ‘미친놈-또라이-개뼉다귀’ 따위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어요.


 〈2〉 ‘학교’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2

 지금 생각해도 참 낯부끄럽지만, 고등학교 다니던 때에 시를 쓴다고 깝죽거리기도 했습니다. 이 시쓰기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뚝 끊었지만요. 아마 고2인가 고3 때로 떠올립니다. 저는 부지런히 습작을 했고, 언제나 습작공책을 들고 다녔습니다. 국어 시간에도 수학 시간에도 음악 시간과 과학 시간에도요. 체육 시간만 빼고. 어느 날 국어 시간에 한참 문제풀이에 골똘하고 있던 때입니다. 교실을 죽 돌아다니던 국어 선생이 제 옆에서 멈추더니 제 책상에 올려진 여러 가지 가운데 이 습작 공책을 보고는 냉큼 집습니다. 저는 다른 동무들과는 좀 다르게 참고서와 문제모음 빼고도 틈틈이 읽던 소설이나 다른 문학책, 역사책 들을 늘 책상에 함께 올려놓곤 했어요. 그래서 이 국어 선생도 ‘이놈이 또 뭘 올려놓고 있나’ 하고 구경해 보다가 이 낯선 공책을 보았지 싶습니다. 남들한테 보여주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습작 공책. 이 공책 두 권을 국어 선생은 한참 보다가 내려놓고 지나갔습니다. 그때 ‘부지런히 써 봐’라고 한마디 했는지 아무 말도 안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 이 습작 공책을 본 뒤로 교실에서 우리들한테 수업하는 모습이 좀 달라졌다는 것.


.. 그는 파아딩 선생을 내려다보았다. 빌리의 눈은 빛났고, 눈물과 때로 범벅이 된 뺨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넌 아주 흥미롭게 얘길 했어.”
 “사실 흥미로워요. 그렇지만 제일 멋진 건 처음으로 줄 없이 날렸을 때예요. 그때 거기 계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저는 놀라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파아딩 선생은 학생들을 향했다. 의자는 움직이지 않고 몸만 돌려서.
 “너희들 그 얘길 듣고 싶니?”
 합창 ―“네.” ..  〈73쪽〉


 고등학교 다니던 때에 세계사 선생과 정치외교 선생이 떠오릅니다. 이 두 사람은 아마 이십대 중후반에 처음으로 교사일을 했을 텐데, 매를 든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아이들을 이끄는 일은 제법 잘했지 싶어요. 그분들 스스로는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요. 우리가 떠들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을 하는데, 두 사람은 교과서를 거의 안 썼습니다. 세계사 선생은 ‘민맥’ 출판사에서 펴낸 《세계사 수첩》 상ㆍ하권이 우리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였습니다. 정치외교 선생은 우리한테 ‘신문기사 스크랩’ 공책을 만들게 해서, 이것으로 점수를 매겼고 수업을 이끌었고 더러 발표도 시켰습니다. 대학입학시험에 세계사나 정치외교 문제가 몇 가지 안 나오니까 수업이 자칫 흐트러질 수도 있는데, 외려 이 두 사람은 아예 그런 틀을 벗어나서 ‘우리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계 역사-우리 정치와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라도 우리 스스로 깨닫고 느끼기를 바랐구나 싶어요. 어쩌면 이런 교사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끔찍한 체벌 천국에서 열두 해를 가까스로 버텼지 싶어요.

 《케스―매와 소년》에서 주인공인 꼬마 ‘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선생을 비롯해서 반 동무들까지도 빌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괴롭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빌리와 동무들을 가르치던 파아딩이라는 사람이 ‘빌리’한테 말하기 발표를 한 번 시킵니다. 그 뒤 빌리가 쓴 글을 보며 무엇인가를 느꼈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서 외롭고 힘든 아이 하나인 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가서려고 합니다. 빌리도 학교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사람, 나이는 많아도 동무로 여길 만한 사람 하나를 알게 된 셈이라서 마음이 놓이게 되었고, 자기 혼자서 즐기는 ‘매 키우기’를 파아딩 선생한테 한 번 보여주기도 합니다.


 “쥬드?”
 “뭐야?”
 “늦겠어.”
 “어유, 닥쳐!”
 “시계가 빠른 거 아니잖아.”
 “닥치라고 했어.”
 그는 담요 속에서 주먹을 휘둘러 빌리의 아랫배를 쳤다.
 “하지 마! 아파!”
 “그럼 닥치고 있어.”
 “엄마한테 이를 테야.”
 쥬드는 또 한 번 휘둘렀다.  〈4쪽〉


 “아빤 집에 없어요.”
 “그럼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겠구나.”
 “그런 식으로 없는 게 아녜요. 집을 나갔다구요.”
 “아, 알겠다 … 그렇다면 너의 어머니가 서명을 하셔야겠구나.”
 “일하러 갔어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명을 하실 수 있겠지, 그렇지?”
 “알아요. 그런데 저녁때까진 안 돌아와요. 그리구 내일이 일요일이구요.”
 “바쁠 거 없지, 안 그래?”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난 오늘 보고 싶어요.”
 “기다릴 수밖에 없겠는걸.”
 “보세요, 그냥 가서 있는지 보게만 해 주세요. 저기 책상에 앉아서 읽을게요.”
 “그럴 순 없어. 넌 회원이 아니야.”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규칙 위반이야.”
 “그렇게 해 주세요. 그럼 월요일에 이 종이를 갖고 올게요.”
 “안 돼! 집에 가서 신청서에 서명을 받아 와.”
 그녀는 몸을 돌려 조그만 유리 칸막이 방으로 들어갔다.
 “저.”
 빌리는 손짓으로 여자를 불러내었다.
 “뭐지?”
 “책방이 어디 있어요?”  〈32∼33쪽〉


 빌리는 집에서나 마을에서나, 또 학교에서마저도 ‘한 사람 몫’ 사람 대접을 거의 못 받습니다. 집에서는 배다른 형한테 시달리고 어머니는 아예 빌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매를 키울 때 도움을 받으려고 책을 빌려 보려고 하지만 마을 도서관에서(책 줄거리를 보면 도서관뿐 아니라 마을 어디에서고 반겨 주는 곳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도 고달프기만 할 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셔요. 빌리라고 하는 아이 하나뿐일까요? 또 빌리이건 다른 아이이건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지 않는 아이가 얼마나 있을는지요? 어디 먼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를 생각해 보셔요. 이웃 아이를 생각할 것 없이 우리 자신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어떠했는가 돌이켜보셔요. 우리가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아늑한 분위기에서, 배움과 나눔과 얻음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인가를 느끼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는지요?


 〈3〉 무엇을 하며 살면 좋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했던 독일말 교사가 문득 떠오릅니다. 이분도 그때 나이는 서른이 채 안 되었지 싶어요. 제 나이가 올해 서른둘인데, 나이 서른인 사람치고 세상을 밝게 보거나 훤히 꿰뚫는 사람 드뭅니다. 또한 저마다 다 다른 아이들, 한 반에 예순쯤 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부대끼면서 껴안을 만한 그릇을 갖춘 교사란 드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한테만 모든 것을 쏟아붓고 바쳐도 이렇게 부대끼기란 힘들 테지요.

 독일말 교사는 저한테 ‘생각을 늘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생각한다고, 밥먹을 때에도 수업을 들을 때에도 걸어다닐 때에도 생각을 한다’고 대꾸했습니다. 가만 생각하면, 독일말 교사는 ‘생각하는 중요성’은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르나 ‘무엇을 생각해야 좋은지’를 말하지 못했고, ‘무엇인가 생각할 거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또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만난 교사들 거의 모두는 ‘교과서에 나온 지식을 교수법에 맞게 진도를 나갈 수’는 있었겠지만, ‘한 반 예순에 가까운 아이들이 나중에 저마다 어떻게 자기 삶을 다 다르게 꾸려 나가야 좋을지’를 살피거나 헤아리면서 가르칠 수는 없었구나 싶어요. 주어진 지식, 진도에 맞추고 시험문제를 잘 맞힐 수 있도록 머리속에 쑤셔넣는 일은 하는 교사인지 몰라도,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고 사람마다 다 다른 모습을 가꾸고 돌보는 스승, 참 선생 노릇은 하지도 못했지만 이렇게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고 할까요?


 “그리구 오늘 아침 영어시간에요, 제가 안 듣고 있었을 때요. 관심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손 땜에요. 아파 죽을 지경이었어요! 손이 아려 죽겠는데 정신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그러긴 어렵겠지.”
 “그래두 그 때문에 또 야단을 맞았잖아요. 그죠?”
 “넌 그걸 보상했지. 그렇지?”
 “알아요. 그래도 늘 그렇단 말예요.”
 “뭐가?”
 “선생님들요. 선생님들은 자기들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절대로 안 해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진 않겠지.”
 “선생님들은 언제나 자기들은 옳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떤 때는 어쩔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오늘 아침처럼요. 또 정말 지루할 때 안 듣는다고 매를 맞을 때요. 제 말은요, 재미가 없을 때에는 딴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고요. 안 그렇겠어요, 선생님?”  〈89쪽〉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숫자는 40만이 넘습니다. 이 40만이 넘는 교사들한테 배우는 아이들 숫자는 얼마나 많을까요? 교사 40만이라고 할 때, 생각이나 마음이나 몸가짐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겝니다. 그래서 40만 교사마다 자기가 맡은 과목을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방법과 차례와 말씨는 모두 다릅니다. 어느 교사는 말씨가 굵직하고 어느 교사는 말씨가 가느다랗고, 어느 교사는 말씨가 상냥하고 어느 교사는 말씨가 투박할 테지요.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수백만에 이르는 ‘다 다른’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다 다른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다 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대학교 입학시험이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대학교에 갈 수도 없을 뿐더러, 모든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야 할 까닭도 없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네 교육은 어찌 되어 있는가요? 대학교에 가지 않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야 할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조선일보〉부터 〈한겨레〉까지 ‘대입 논설시험 대비’ 지면을 한 해 내내 특별판으로 찍어서 뿌립니다. 대학교 입시요강 따위는 틈만 나면 꽤나 넓은 지면을 내주며 싣습니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사람다운 마음씨를 기르고 착하고 맑고 싱싱한 생각과 몸을 추스르도록’ 하려는 교육 이야기를 다루거나, 우리 삶 이야기를 기사로 담는 신문은 아직 한 가지도 없습니다.

 굳이 언론매체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학교부터, 교육인적자원부 행정부터,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우리 부모님들 생각부터(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는가 하는) 달라지지 않는다면 선생들 몸가짐과 교과서 줄거리와 학교 터전과 대학입시 문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실마리를 잡을 수 없지 싶어요.

 아이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대학교까지 나온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 대학교를 나오지 않는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 이 대목을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는 학교라면 제구실을 못하는 ‘교과서와 대학입학시험 지식 훈련터’가 학교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4339.4.5.물.ㅎㄲㅅㄱ)

 

- 책이름 : 케스―매와 소년
- 글쓴이 : 베리 하인즈
- 옮긴이 : 김태언
- 펴낸곳 : 녹색평론사(1998.8.20.)
- 책값 :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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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기요시코 카르페디엠 11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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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싶었을까?
 - 내 마음에 담긴 《안녕, 기요시코》


 《안녕, 기요시코》란 책을 다 읽은 지 제법 되었습니다. 아마 서너 달 지났지 싶군요.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난 뒤 무어라 말을 못했습니다. 마음속 깊이 참 많은 이야기가 남았는데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더군요. 책에 나오는 `기요시'라는 아이한테서 제 지난날 모습 가운데 적잖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선뜻 어떤 말을 하기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보는 동안 밑줄을 칠 만한 곳은 많지 않았으나 이야기 하나하나가 가슴에 깊이 남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쉬 꺼내기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글 하나 써 봅니다. 책 이야기라기보다는 제 이야기를. 이야기책 《안녕, 기요시코》는 `기요시'란 아이 이야기를 펼쳤다면, 저는 `최종규'란 아이가 세상과 부대끼며 자기 자신을 만나며 `잘 있었니?' 하고 인사를 하게 된 대목까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요.


 〈1〉 싫어하는 말

 인천사람은 인천사람대로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음성사람은 음성사람대로 싫어하는 말이 있겠지요. 남원사람도, 부산사람도, 서울사람도, 제주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서로서로 달가이 여기지 않는 말이 있어요.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가 달가이 여기지 않는 말'이 있는데도, 맞은편 사람한테도 자기처럼 달가이 여기지 않는 말이 있는 줄을 생각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인천을 떠났습니다. 인천이 싫어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인천 아닌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인천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어요' 하고 말하면 `인천은 서울과 똑같은 도시'인 줄 알거나 말하기 일쑤입니다. 인천사람으로서 이 말처럼 듣기 싫고 거북한 말도 없습니다. 인천은 인천이고 서울은 서울이지만, 인천은 서울이 바로 옆에 있다는 까닭 때문에 온갖 차별과 푸대접과 깔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광역시 가운데 지역방송국이 없는 곳은 인천뿐이지만, 인천에 생긴 지역민간방송국은 서울에 본거지를 둔 세 군데 방송사 입김 때문에 끝내 사라지고야 말았습니다. 꼭 그 방송사(iTV)가 인천사람들 꿈은 아니었으나, `인천에도 지역방송국이든 다른 방송국이든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참 깊었습니다.

 인천에는 공장이 대단히 많습니다. 요새는 안산이나 구로 쪽에 더 많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천에 있는 공장은 공장 가운데 무척 지저분한 배기가스와 오염물질을 내뿜는 공장들입니다. 인천에는 서울사람들이 쓰는 연탄을 찍는 공장부터(요샌 연탄을 많이 안 쓴다지만), 유리공장, 제철소, 화학공장 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살림집 바로 옆에 화학공장과 유리공장이 있는 곳은 인천뿐일 것입니다. 제가 다닌 국민학교 옆에는 연탄공장이, 중고등학교 옆에는 화학공장과 폐수처리장과 목재처리장(수입한 나무를 쌓아 놓는 곳)이 있었습니다. 제 살가운 벗이 사는 만석동과 화수동에는 유리공장과 제철소에서 날아오는 쇠먼지 때문에 빨래를 늘 집에다 널어야 했지만, 바깥에 널 만한 자리도 없었어요. 인천 앞바다가 똥물이라 말하는데, 인천 앞바다가 똥물이 될 수밖에 없도록 온갖 공장을 인천 앞바다에 지었고, 서울사람들이 버리는 온갖 쓰레기더미와 똥오줌이 한강을 따라서 인천 앞바다로 모입니다. 그러니 인천 앞바다가 똥물이 될밖에요. 그 똥오줌이 다 누가 눈 똥오줌일까요?


.. "긴장을 풀고 말을 하면 돼요. 걱정을 하니까 더 말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말을 더듬어도 상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맘 편히 자기 자신을 격려하며 말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번에는 속에서 뭔가 울컥,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좀 막힌다고 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어른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남들이 보고 웃는다고 뭐가 어때, 그런 녀석은 그냥 무시해."
 "말 더듬는다고 기죽을 것 없어."
 "말이 서툰 것도 다 개성이야."
 이런 말들을 하는 어른들은 모두 막힘 없이 술술, 아무런 고민도 없이 지껄인다 ..  〈70쪽〉


 인천은 서울 옆에 있어서 `살기 좋지 않느냐'고(서울 옆에 있다고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사람들, 서울에 쉬 놀러갈 수 있고 문화혜택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참 속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마음 가붓이, 누릴 것 다 누리며 사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2〉 나는 어느 길로 가면 좋을까

 바다를 보며 자랐습니다. 바닷가에서 놀며 자랐습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랐고, 바다낚시도 즐기고 먼바다에서 들어오는 커다란 배를 보며 놀았습니다. 비둘기나 참새보다 갈매기를 더 많이 보았고, 밀물과 썰물이 언제 바뀌는지, 해질녘 바다가 얼마나 붉게 물드는지 날마다 보며 자랐습니다. 봄이나 가을마다 뿌옇게 끼는 안개는 코앞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짙었습니다. 예전 살던 집 옆에 있는 제일제당이란 공장에서 흘러보내는 폐수가 얼마나 끔찍한 빛깔이고 냄새가 풍겼는지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그래서인지, 제일제당에서 만든 설탕이나 먹을거리는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 Y대학에 합격한다 해도 도쿄에 있는 W대에 가고 싶다. Y대학에도 W대학에도 둘 다 불합격했을 경우엔 재수를 하고, 다음에는 처음부터 지원 대학을 W대학만으로 좁힐 것이다. 왜 그러냐고 누가 묻더라도 똑 부러지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말을 더듬는 데 왜 학교 선생님을 하겠다는 거냐?"고 물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갖고 싶은 캔디는 이거다, 이것뿐이다 ..  〈252쪽〉


 살아도 인천에서, 죽어도 인천에서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나날이 더러워지고 나날이 메말라가고 나날이 병들어가는 이 터전에서도 꿈을 간직하며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인천을 떠나서 서울로 왔습니다. 골목골목 모르는 길이 없고, 사람들 마음씀씀이나 살림살이나 훨씬 푸근하고 따뜻한 곳이 인천이었지만(저한테는), 인천은 바닥이 좁아서 좀더 많은 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좀더 세상을 알고픈 저한테는 참 좁은 곳이었고, 우리 세상을 이끌어 가는 더 많은 일거리를 만나기 어려웠으며, 늘 한 단계나 몇 단계 아래쯤에 머물러 있는 곳에서 자꾸만 `그냥 이대로'에 묻혀 버릴 듯했습니다.

 손쉽게 살아갈 수 있는 길, 그저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하는 길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안녕, 기요시코》에 나오는 아이처럼 저도 말더듬이였고, 여자 앞에서는 늘 얼굴이 붉어지고 어디에 눈길을 두어야 할는지도 모르는 수줍음쟁이였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건만 누가 볼세라 걸음도 똑바로 걷지 못하는 반편쟁이처럼 지내면서, 이런 저를 있는 그대로, 글쎄, 있는 그대로였을는지 모르겠지만, 큰 어려움 없이 살도록 마음써 주던 고향에서 죽 지내고 싶었는데.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여자들 앞에서도 말을 하고 싶었고, 큰길에서 떳떳하게 여자친구 손을 잡고 걷고 싶었으며, 누가 보거나 말거나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제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참말로 제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그 길만 꿋꿋하게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천에 있는 대학교 원서는 일부러 안 사고 시험도 치지 않았습니다. 딱 두 군데,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만 시험을 쳤고, `안전하게 붙을 수 있는 곳도 치라'는 모든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붙어도 내가 붙고, 재수를 해도 내가 재수를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 대학교에 붙는다고 제가 갈 길이 그 길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손쉽게 살아가는 길에 길들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직 무엇을 가지면 좋을지 모르던 그때,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닌, 아직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지면 좋을까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내 꿈은 무엇인지, 내가 이룰 수 있는 꿈은 무엇인지, 내가 이룰 수 없어도 죽는 날까지 힘껏 애쓰면서 보람을 얻을 만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조금씩 이뤄 갈 수 있는 꿈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몸으로 부대끼고 싶었고 겪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 가운데 한 군데에 가까스로 붙었습니다. 추가합격 2번으로. 다행이면 다행이고 불행이면 불행인데, 저보다 좋은 성적으로 앞에 붙었던 두 사람이 그만두는 바람에 턱걸이로 들어갔어요.


 〈3〉 걸어가고 싶은 길을

 인천에서 서울 한쪽 끝에 있는 대학교로 다녔습니다. 이 학교를 그만두기 앞서까지 알아보니, 인천에서 서울 한쪽 끝에 있는 이곳까지 4년 내내 전철로 다닌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도 꼽기 어려울 만큼 드물다고 하더군요. 거의 두 손을 든답니다. 너무 힘드니까요. 저는 집에서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역에서 내린 뒤 주안역에서 동인천역으로 돌아가서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안 그러면 부평도 안 되어 지옥철이 되어서 거의 오징어처럼 되니 책도 못 읽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오로지 사람들한테 덜 밀리면서 책읽을 자리를 마련하려고 전철을 돌아 내려간 셈입니다.) 한 시간 이십 분쯤 달리면 비로소 목적지입니다. 새벽 6시 7분이나 15분 차를 타면 인천-서울 오가는 시간이 4시간 30분 안에 들었고, 6시 30분이나 45분 차를 타면 거의 5시간 가까이 걸리곤 했습니다. 그래,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은 하루 가운데 으레 4시간쯤은 전철이나 버스에서 보내곤 했어요.

 이 삶을 1년 잇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집에서 쓸돈도 넉넉히 못 받는 한편, 집안 형편도 썩 좋지 못하다고 느껴서 신문사지국에 들어갔어요. 먹고잘 수 있는 곳으로요. 덕분에 찻삯을 아낄 수 있었고, 신문 돌려 번 돈으로 책도 더 많이 살 수 있었으며, 신문도 거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지나가는 사람 A, 지나가는 사람 B라고 했는데 이 세상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니?"
 등장 인물 모두에게 이름을 붙이라는 말씀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도 좋고, 새로 지어 붙여도 좋다. 연극 중에 이름이 꼭 불리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이름이 없는 등장 인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  〈136쪽〉


 작은 과에 들어가기를 참 잘했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뭐, 아무것도 없지만요. 한 과에 서른 사람. 이렇게 작은 과다 보니 이웃한 작은 과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네덜란드말, 포르투갈말, 이탈리아말, 스웨덴말. 한 과에 서른 사람인 이 작은 과들은 `네이포스'란 이름으로 서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래서 기마전을 하건 체육대회를 하건 술마시기 겨루기를 하든, 우리 작은 과 연합이 늘 이기곤 했어요.

 배우는 것은 달라도 품은 꿈은 비슷했는지 모르고, 품었던 꿈이 하루하루 사그라들며 똑같은 취업준비생이나 고시생이 되는 흐름은 비슷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자그마한 모둠에서도 있기 어렵겠구나 느꼈습니다. 그래, 이젠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제 막 스물을 넘기려는 나이, 몸에서 힘은 넘치지만 마음은 붙잡아 둘 곳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1년 365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주 2병 넘게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없어서 석 달을 술을 쉬고 다시 석 달을 마시고, 다시 쉬고. 술을 쉰 마지막 때에 군대에 갔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갔습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낸 뒤 학교로 돌아옵니다. 학교는 많이 밝아졌다는 느낌이고 여학생도 많이 늘어났지만 제가 있을 만한 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안녕, 기요시코》에서 주인공 아이가 학예회 때 내놓을 연극 대본을 쓸 때 `지나가는 사람 A', `지나가는 사람 B'라고 적었듯, 제 자신이 그 `A-B'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나일 뿐인데. 나는 똑같이 굴러가고 싶지 않은데. 외국말을 배우는 강의요 수업인데도 교재 베껴쓰기 숙제를 해서 내야 하고, 이런 베껴쓰기 숙제를 안 내면 학점이 깎이고, 이 베껴쓰기 숙제에는 골똘하면서 정작 자기가 배우는 말은 힘써서 익히려고 하지 않는 동무들… 혼자서 이 외국말을 배우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배울 마음이 사라집니다. `남들이 제대로 안 하는 것을 하는 일'도 좋겠지만, 이곳에는 제가 갈 길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 갈 길은 무엇일까? 내 꿈은 무엇일까? 내가 무엇하러 날고생 하면서 서울까지 왔을까? 이렇게 살려고 서울에 왔나? 부모님 집하고 인연을 끊을 마음을 먹고 학교는 아예 그만두기로 하고 한 해 동안은 이 학교를 떠나기 앞서 나한테 모자란 것을 채우고 내 나름대로 혼자서 살아갈 길을 깨우쳐 줄 사람들 강의만 골라 듣자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해. 둘레에서 아무리 무어라 떠든들 한 귀로 흘린 채 신문배달 부수를 늘렸고, 새벽에 신문 돌리고 아침잠을 잤다가 신문을 읽고, 낮잠을 잤다가 책방과 도서관을 다니고 저녁나절까지 책에 파묻혔다가 다시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이렇게 해서 그동안 써 왔던 굴레는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한테 손을 벌릴 수도 없지만 벌리고 싶지도 않은 제 자신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아주 자유로운, 어쩌면 아주 외로운 사람이 된 채 세상과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안녕, 기요시코》에 나온 기요시가 걸어가고픈 길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4339.1.25.물.ㅎㄲㅅㄱ)


- 책이름 : 안녕, 기요시코
- 글쓴이 : 시게마츠 기요시
- 옮긴이 : 오유리
- 펴낸곳 : 양철북(2003.12.19.)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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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는 즐거움
리처드 파인만 지음, 승영조 외 옮김 / 승산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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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발견하는 즐거움
- 글쓴이 : 리처드 파인만
- 옮긴이 : 승영조, 김희봉
- 펴낸곳 : 승산(2001.4.6.)
- 책값 : 9800원

 지난번 대통령 뽑기가 떠오릅니다.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사람 가운데 둘, 이회창 씨와 노무현 씨는 ‘옥탑방’이 무엇인 줄 몰랐습니다. 옥탑방이 무엇인 줄 몰랐으니 ‘지하방-반지하방’이 무엇인 줄도 모르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사람을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군대 조직인 터라 군대에는 안 가야 하고, 군대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돈과 이름과 힘이 없는 사람은 군대에 끌려가기 마련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군대에 끌려가서 개죽음을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돈과 힘과 이름이 있는 이들은 군대에 안 가거나(뒤로 빼돌리지요), 가더라도 아주 아늑한 곳에서 탱자탱자 놀면서 지냅니다. 이들한테 ‘군대’란 무엇이고 ‘병역면제’란 무엇일까요?

 서울시든 다른 곳이든 교통이 참 엉망입니다. 길은 수없이 깔지만 길마다 막히며, 사람들이 다니는 길도 아주 안 좋아요. 길섶은 늘 파여 있기 일쑤고, 사람이 걷는 길이나 자전거가 다니는 길은 곳곳이 끊어져 있는 한편, 길턱이 너무 높아 휠체어나 자전거나 유모차가 다니기 매우 나빠요. 그런데 이게 왜 그럴까요? 바로 공무원이고 건설담당자고 정치꾼이고 누구고 ‘대중교통’을 타는 일이 없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일터를 오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국회의원 가운데 하나라도 자전거를 타고 한강 자전거길을 달려서 국회의사당을 오간다면,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한강 자전거길은 ‘지금 이 길에 깃든 온갖 문제’가 하루아침에 사라질는지 몰라요.


..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름만 가르쳐 주는 법이 없었지요. 아버지는 이름만 아는 것과 진짜로 아는 것의 차이를 알고 계셨어요. 덕분에 나는 그걸 아주 일찍 깨달을 수 있었지요 ..  〈24쪽〉


 어릴 적에 흔히 듣던 말로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 주제에” 같은 말이 있습니다. 야구 규칙이고 야구선수 이름이고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야구’를 있는 그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소리입니다. 저는 헌책방을 참 즐겨 다니는데, 저도 아직 헌책방의 ‘헌’ 자도 제대로 모릅니다. 그런데 저뿐 아니라 대단히 많은 분들이 헌책방의 ‘헌’ 자조차 모를 뿐더러, 이렇게 기본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고치거나 가다듬으려 하지 않아요.

 속살까지 지긋이 파헤치거나 살피려 하지 않고, 참다운 모습을 느끼려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파인만 님은 ‘새가 어떤 이름인지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라고, 그 새를 어느 나라에서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만 아는 것뿐이다’고 말합니다. ‘새가 즐겨먹는 먹이가 무엇이고 소리를 내는 까닭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잠을 자고 짝짓기는 언제 어디에서 얼마 동안 하며 새끼는 언제 까고 몇이나 낳으며 어떻게 기르는가…’를 알아야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도 ‘그 새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고 ‘새의 모습과 삶 가운데 어느 만큼만 안다’고밖에 할 수 없다고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말합니다.

 ‘안다’는 말은 섣불리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란 그처럼 쉬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아요. ‘알았다’면 바로 이때부터 중요합니다. 알았으면 무얼 해야 하나요? 바로 ‘실천’입니다. 아는 것을 ‘펼치는’ 일입니다. 정치꾼들이 ‘옥탑방’이 무엇인지를 지식으로 안다고 해서 옥탑방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 삶을 헤아리는 정책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요? 점심에 국수를 먹는다고 하루 세 끼니를 라면으로 때워도 가까스로 살림을 버티는 이들 형편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 위대한 종교라 해도 위대한 지도자가 직접 가르친 내용을 잊어버리고 형식만 추구하면 퇴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형식만 추구하며 그것을 과학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이비 과학입니다. 사이비 과학적 조언자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수많은 단체나 제도 속에서 오늘날 우리는 일종의 학정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  〈70쪽〉


 파인만한테는 ‘과학’, 이 가운데 ‘물리학’이 ‘종교’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좋아하고 믿고 즐기는 것을 ‘종교’란 자리에 넣어서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겉이 아닌 속을,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거짓이 아니라 참을, 그릇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찾아서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4339.3.3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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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아이들 - 미세기 다큐멘터리
윌리엄 에이어스 지음, 양희승 옮김 / 미세기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법정의 아이들
- 글쓴이 : 윌리엄 에이어스
- 옮긴이 : 양희승
- 펴낸곳 : 미세기(2004.1.15.)
- 책값 : 12000원


 요즘은 조금 나아졌는가 모르겠는데,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또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퍽 많은 교사들은 우리를 ‘○번’ 하고 불렀습니다. 이름표도 가슴 잘 보이는 곳에 달고 다녔고, 교사들은 출석부도 늘 가지고 다녔지만 우리들 이름보다는 ‘번호’로 부르곤 했습니다. 굳이 이름을 외울 까닭이 없다고 느꼈는지 모르지요.


.. 선정된 관선 변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건 서류를 챙겼다. 그는 자신이 변호를 맡게 된 조단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음 공판 일정이 정해졌다. 다음 사건 ..  〈31쪽〉


 우리들을 숫자로 부르고 지나친 교사들은 우리한테 교과서 지식만 건넬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시험을 치를 때마다 점수에 따라서 몽둥이 찜질을 했습니다. 어떤 교사는 지난번 시험보다 1점이라도 떨어지면 1대씩 때리곤 했는데, 이때마다 우리는 아찔할 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100점을 받았는데 이번에 97점을 받으면? 지난번에 82점을 받았다가 이번에 81점을 받으면? 처음엔 50점, 다음엔 80점, 다음엔 60점을 받으면?

 학교를 떠나서 살아가는 지금, 우리 사회를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교사가 학생을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부르듯, 우리 사회를 이루는 많은 사람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숫자로, 이웃이 아닌 대상으로, 사람이 아닌 짐짝처럼 다루지 싶어요. 정치꾼들은 늘 ‘국민을 생각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공무원들은 ‘민원인에게 봉사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작가나 출판사는 ‘독자를 믿는다’고 말해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다들 겉발림일 뿐이거나 입에 발린 소리이지 싶어요.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거나 꾸밈없이 다가가려는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 실제적인 의미에서 법원이 자신들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문제를 처리하지는 못한다. 빈곤과 실업, 경제 공황, 인종 갈등, 계층 갈등, 불평등한 분배 구조, 좌절감과 반목으로 가득한 사회 환경 등은 법원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고유 영역 안에서도 법원은 기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법정에 서는 청소년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법적 권리를 대변해 줄 대상을 갖지 못하며 또 보호나 상담을 해 줄 대상조차 갖지 못한다 ..  〈81쪽〉


 아이들이 여덟 살에, 아홉 살에, 열 살에, 열두 살에, 열세 살에… 범죄를 저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아주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왜 어떤 아이는 어릴 적부터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삶터에서 헤매이다가 온갖 차별과 푸대접을 받아야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일찌감치 범죄 소굴에 심부름꾼처럼 이끌려 다니다가 법정에까지 서야 할까요? 어른 범죄가 있는 곳에 청소년 범죄가 있고, 어른들도 참답게 살 수 없는 터전이라면 청소년도 참답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4339.3.3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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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마단 사람들
오진령 지음 / 호미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곡마단 사람들
 - 글 / 사진 : 오진령
 - 펴낸곳 : 호미(2004.1.15)
 - 책값 : 12000원


 '곡마단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 동춘서커스단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1> 곡예사와 관객


 어릴 적 제가 살던 인천에도 동춘서커스단이 꽤 오래 머물렀습니다. 한창 지는 별이었던 동춘서커스단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우리 고향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또 제가 사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고 신나게 보고 동무들하고 얘기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가 들고 이것저것 보고 배울 때까지 '동춘서커스단'이 이 모임을 만든 '박동춘' 씨 이름에서 왔다는 걸 몰랐습니다. 인천에 '동춘동'이란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나온 모임이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동춘서커스단은 지금 나라안에 딱 하나 남은 서커스단입니다. 지금 이 서커스단을 이끄는 박세환 단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 "서커스를 보면서 울고 웃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저 사람들의
 웃음과 감동을 뺏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동춘은
 내 것이 아니고 관객들의 것,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 <28쪽>


 서커스. 저는 서커스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커스를 보며 받는 감동과 웃음과 눈물이 어떠한지를 잘 몰라요. 다만 "공연을 보고 나서 하루 종일 회상에 젖어 주위를 떠나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철 지난 양복을 빼어 입은 어느 할아버지는 비싸다며 기어코 천 원을 깎아 표를 산다. 서커스 사람들은 다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어느 엄마가 아이에게 말해 주는 소리도 들려오고,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중년 남자<22쪽>"도 보는 서커스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가요? 동춘서커스단은 "웃지 못했다면, 재미없다면 입장료 반환합니다"란 푯말을 큼직하게 써붙이고 공연을 한다는데 아직까지 입장료를 물어 내라 한 사람이 없었대요.

 누구나 찾아오고, 모두들 공연에 흠뻑 빠지고 즐긴달까요. '불쌍한 사람'이 아닌 '삶을 즐기고 곡예를 즐기는 사람'인 곡예사이나 공연을 즐기는 우리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느 나라는 곡예를 가르치는 전문학교도 있고 나라에서 뒷배도 하지만 우리 나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 곯고 불쌍하고 할 짓 없는 년놈들이나 하는 일을 '서커스'라 여기면서도 서커스를 보러 오기 주저하지 않는 우리들이에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누가 곡예사이고 누가 관객일까요?


 <2> 똑같은 사람 삶인 곡예사 삶


 ..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곡예를 하다가 떨어져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진 그들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처럼 아름다운 비행을 하고 있다 .. <54쪽>


 곡예사는 날마다 수없이 하늘을 납니다. 관객은 하늘을 나는 사람을 멀거니 구경합니다. 하늘은 누구나 날 수 있고, 하늘을 날며 느끼는 짜릿함이란 누구에게나 즐거울 텐데 우리들은 그저 구경만 합니다.

 곡예단 사람들 사진을 찍은 오진령 씨는 1998년부터 여섯 해 동안 곡예단 사람들과 함께 다니며 사진을 담았답니다. 어느 날 본 서커스 공연에 꼼짝도 못할 만한 감동을 받아 사로잡힌 그이는 서커스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싶었답니다. 여섯 해 동안 한 달에 한 번 꼴로 찾아가 열흘씩 함께 지내며 살았답니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던 오진령 씨였는데, 곡예사들과 함께 지내며 곡예사들에게도 '자기와 똑같이' 소박하고 자유롭고 진정 어린 삶을 살아가지만 순정하고 여린 탓에 생채기를 많이 받는 모습에 함께 가슴 아팠답니다.

 곡예사 가운데에는 자기과 같은 나이 동무가 있었답니다. <곡마단 사람들>에는 그 동무 이야기가 곧잘 나오는데, 어느 날 곡예사 동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다죠.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이나 88열차도 함께 탔다는데 그렇게 무서워하더랍니다. 줄 타는 곡예사인 그 동무가 말이죠.


 .. 줄 타는 곡예사가 고작 바이킹 따위에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이
 처음에는 의아스러웠다. 그 공포심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래, 곡예사라고 해서, 줄을 탄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
 다. 그들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낀다. 다만 날마다
 그 큰 두려움을 견디는 것일 뿐이다 .. <156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곡마단 사람들' 삶을 사진과 글로 알뜰히 담은 <곡마단 사람들> 머리말을 읽습니다. 오진령 씨는 우리들에게, 그러니까 서커스를 겉으로 구경만 하는 우리들에게 "서커스를 어린 시절의 과거 한때의 추억으로 돌려 버리고 외면"하는 우리들에게 말을 겁니다. 동춘서커스단에 있는 곡예사들은 "팔십 년 가까운 역사를 등에 지고서, 곡예사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사람들을 재미와 감동으로 울고 웃게 하면서 한 해 내내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고. "과거가 아닌 오늘의 것"으로 서커스를 바라보면 좋겠다고요.


 <3> 소중한 이야기가 아닐까


 곡마단 사람들은 열흘 걸려 공연할 천막을 세운답니다. 공연이 끝난 뒤 걷어 내릴 때에도 닷새 남짓 걸린답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이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형편이기에 제대로 연습할 짬이 없고 새로운 곡예를 갈고 닦을 짬이 없답니다. 한겨울 공연이 없을 때에는 노동판에 나간다는 그이들. 여느 때에 20~30미터 되는 곳도 너끈히 올라가던 사람들이라 건물을 높이 쌓는 노동판에서 인가가 '가장 좋답'니다. 인기 있고 돈 많이 버는 운동선수들은 한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가서 '전지훈련'을 하지만 곡마단 사람들은 살림돈을 벌고자 노동판에 갑니다.

 "곡예사로 꼭 성공해서 사람들 기억 속에 남고 싶"은 이들이 곡마단에, 동춘서커스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 공연장 밖에서 손님을 맞는 원숭이들에게 사람들은 인사 치레인 양
 손가락질을 하거나 무언가를 집어던지곤 한다. 그러나 정작 원숭이들
 은 사람들의 그런 무례한 행동도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아량을 보인다.
 서커스와 동고 동락해 온 오랜 연륜을 그들에게서 느끼게 된다 .. <148쪽>


 는 이야기에서 보듯 곡마단과 함께 다니는 짐승들은 거의 놀림감입니다. 하지만 곡마단 사람들에게 '함께 공연하는 짐승'들은 둘도 없는 벗이요, 아낌없는 동무예요.

 책을 두어 번 되풀이해서 읽고 보다가 이제는 덮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난 뭐하러 <곡마단 사람들>이란 책을 사서 읽었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곡마단 이야기를 뭐하러 보았는지, 보면서 무슨 느낌이 들었는지를요.

 사회에서 푸대접받는 사람들 이야기라서 가슴 아프게 읽었는지?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 곡마단 사람들 이야기를 제대로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는지?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호기심인지? 찬찬히 헤아려 보지만 뚜렷한 실마리는 잡히지 않습니다. 그저 곡마단 사람들이라 해서 어디 먼 별나라 사람도 아니고, 뚱딴지 같은 사람도 아니며, 불쌍한 사람도 아니고, 성공만을 좇는 딴따라도 아닌 한편으로, 나와 똑같이, 우리와 똑같이 삶을 즐기는 이웃이라고 봅니다.

 오진령 씨에게 사진 찍힌 어느 곡예사가 한 말을 마지막으로 책소개를 마치겠습니다. 덧붙여 44~45쪽, 74~75쪽, 102~103쪽, 134~135쪽 사진은 두 쪽에 걸쳐 사진을 담았으나 사람 얼굴과 몸이 가운데에 접힌 채 잘려서 보기가 참 안 좋습니다. 사진을 많이 넣어서 엮는 책이라면 좀더 엮음새에 눈길을 두어야지 싶어요. 130쪽에 '대한 민국'이라고 띄어서 썼는데 '대한민국'이라고 붙이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 "사회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커스 하면 불쌍한 놈들,
 몹쓸 놈들이라고 하지. 이런 데에 산다고 해서, 옷도 아무렇게
 나 입는다고 해서 불쌍한 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우리
 사진은 왜 찍어? 뭐에 쓰려구 그래? 서커스를 찍어간 사람이야
 많지. 그래도 내가 보기엔 제대로 찍은 사람은 드물어. 이왕
 찍는 거, 잘 좀 찍어 봐" ..  <158쪽>

***
곡마단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곡마단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느끼고 보고 겪은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풀어낸 책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낮은 자리에 있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인 곡마단 사람들입니다. 그네들 삶과 목소리와 모습을 느끼며 겉이 아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이끄는 책이라고 생각하여 소개하는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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