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80 ― 책읽는 생각, 살아가는 생각, 장정일 생각
 : 장정일, 《생각, 장정일 단상》



- 책이름 : 생각, 장정일 단상
- 글쓴이 : 장정일
- 펴낸곳 : 행복한책읽기 (2005.1.17.)
- 책값 : 8900원



 (1) 책읽는 생각


 생각없는 사람이라면, 생각없는 줄거리 가득하고 생각없이 만들어진 책을 으레 집어들게 마련입니다.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있는 줄거리 차곡차곡 담기고 생각있게 만들어진 책을 저절로 집어들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제 눈높이에 따라서 책 하나 집어듭니다. 누구나 제 눈높이에 걸맞게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제 눈높이에 어울리게 집자리를 알아보며 살고, 제 눈높이에 따라 일거리를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생각없는 삶이요 생각없는 눈높이요 생각없는 사람이라고 하여 ‘나쁜’ 쪽으로만 빠지지는 않습니다. 생각있는 삶이요 생각있는 눈높이요 생각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게’만 흐르지는 않아요.


.. 취미에 빠진 사람에 의해 그의 가족이나 친구가 착취당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은 자기 취미 속에 빠지기 위해 늘 “다음에” 하면서 달아나 버린다 ..  (22쪽)


 생각이 있다면 아무 책이나 집어들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주어진 책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습니다. 생각이 있어도 돈이나 이름이나 힘에 매여서 책을 집어들곤 합니다. 생각이 없으나 이웃에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책을 건네주는 바람에 철부지 매무새를 하루아침에 벗어던지기도 합니다.


.. 종교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가 믿는 신의 가르침을 나타내야 한다. 아주 모범적인 시민이 알고 보니 불자로 밝혀지거나 카톨리커로 밝혀졌을 때 이웃은 그와 종교가 달라도, 그 종교를 편견 없이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던 것은 인간들에게 신앙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일깨워 주신 것이지 단순히 자선의 원칙으로 새겨서는 안 된다 ..  (36쪽)


 우리 나라 사람들이 나라밖 사람들보다 좀더 책을 안 읽거나 멀리한다고들 합니다. 얼마나 책을 안 읽기에 그러느냐 싶곤 한데, 조금만 생각을 해도 이와 같은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아이한테 책을 읽히는 어버이는 몹시 드뭅니다. 그저 책이 좋고 아름답고 훌륭하기에, 책에 깃든 좋음과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아이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서 읽히는 어버이가 매우 드뭅니다.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철썩 붙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아가 손꼽히는 대학교 졸업장으로 손꼽히는 재벌회사 직원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서 연봉 수천만 원이나 억대를 떵떵거리며 받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쥐어 주는 권장도서나 교양도서 목록만 있습니다. 더욱이 학과 공부라는 이름으로 책을 멀리하도록 하는 일이 법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교과서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치러야지, 교과서 아닌 책을 읽다가 교과서 지식하고는 담을 쌓고 시험을 못 보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교과서가 얼마나 올바르게 되어 있는지를, 교과서가 얼마나 알맞게 짜여져 있는가를 살피는 눈이 없습니다. 교과서는 그야말로 간추린 이야기일 뿐인데, 아이들 스스로 교과서 틀을 넘어서 제 몸뚱아리로 세상을 부대끼면서 참 지식과 참 슬기를 갈고닦도록 하지 못합니다.


.. 예쁜 사람이 머리 나쁜 것은 신이 그만큼 공평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 쪽팔릴 일도 아니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안티미스코리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엄청 잔인하게 느껴진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할 수 없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서 가장 뛰어난 장점과 특기로 성공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나처럼 구구단도 못 외우고 영어도 할 줄 모르지만 기막히게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1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고, 타고난 두뇌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듯이 타고난 미모로도 자긍심과 성취욕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예쁘고 머리 나븐 여자는 이벤트 도우미나 대형 마트의 점원을 해야만 당신들의 직성이 풀리나? ..  (39쪽)


 우리들은 학교를 다니는 기나신 세월에 걸쳐서 ‘책방 나들이’를 배우지 못합니다. 새책방 나들이건 헌책방 나들이건 배우지 못합니다. 하물며 도서관 나들이는 배울는지요. 요즈음은 학교마다 도서관이 생기고 있으나, 아이들이 학교 도서관을 마음껏 드나들면서 책을 즐길 수 있게끔 ‘시험 공부 짐’이 적은지, 교과서로 모자란 지식을 채우도록 도서관이 활짝 열려 있는지 궁금합니다.

 국어사전 찾기도 제대로 배워야 하는 한편, 책을 읽을 때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고, 책장은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넘기는지, 책을 다치지 않게 하는 길, 책꽂이에 알맞게 꽂는 일, 책꽂이를 손수 나무질을 해서 짜기, 책을 끈으로 묶어서 나르기(이삿짐), 책을 봉투에 넣어서 보내기(동무 생일선물로 보낼 때)처럼, 아주 밑바탕이 되는 이야기들을 학교에서는 얼마나 알뜰히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교사 된 분들이 학교(교대나 사범대)에서 ‘책읽기를 가르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더러, 교사 되기 앞서 스스로 책하고 벗삼지 못했기에 자기가 교사가 된 다음에 아이들하고 책읽기를 삶으로 즐기는 버릇을 못 들이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교사가 먼저 책을 즐겨야 아이들이 책읽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사가 먼저 아이들한테 책읽는 삶이 기쁨임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아이들이 책에서 기쁨보따리를 찾으려고 나설 수 있습니다.


 (2) 살아가는 생각


.. 민중을 위하여 시를 쓰는 민중시인이 일류 호텔의 바텐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면 사기꾼처럼 보일 것이다. 반대로 모던한 시인이 거진 인민복 차림으로 시장통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표절가로 보인다 ..  (42쪽)


 부모님 집을 나와서 혼자서 살림을 꾸린 때는 1995년 4월 5일입니다. 어느덧 열세 해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어디에서나 찬방입니다. 제가 추위를 덜 타서 차디찬 방에서 깃드는지 모릅니다만, 언제나 짐차로 여러 번 날라야 할 만한 책더미를 이고 지고 다니는 터라, 책더미를 집어넣을 만한 집을 적은 돈으로 얻어서 달삯 내고 살자면, 살림집이 추운 곳 아니고는 얻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군대에 있던 스물여섯 달 동안에도 내무반은 늘 추웠고, 부대는 참으로 추웠습니다. 남녘땅에서 가장 추운 곳이기도 했지만, 한여름인 8월에도 밤에는 0도로 떨어져서 야상을 입어야만 했어요. 눈이 녹는 때는 부처님오신날이었고, 첫눈은 시월이 다 갈 무렵 비로소 내렸지만, 한 번 내린 눈은 두 번 다시 녹지 않는데다가, 영 도 밑으로 20∼30도 내려가는 일은 아주 우스웠어요. 1997년 12월 31일에 전역하던 그날까지 뻬치카를 쓰던 내무반이었기에, 난로가 아닌 난로에서 떨어진 곳은 내무반이었음에도 영 도 밑으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살 때에도 한결같이 추위에 떨었는데, 한겨울에도 실장갑 한 켤레 끼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자전거를 몰면서 집집마다 신문을 두어 시간 돌리고 돌아오면, 한 시간 가까이 이불에 파묻힌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녹이고 코와 귀를 녹이며 사타구니와 팔다리를 녹였습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니 실장갑이고 옷이고 찬물로만 빨래를 했어요. 나이 서른이 넘어간 뒤부터는 겨울 찬물 빨래는 도무지 힘들어, 물을 덥혀서 쓰곤 하는데, 빨래를 마친 뒤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 버스 요금보다 비싼 돈을 주고 택시를 탈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중교통이 아닌 바에야 그것은 아주 사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진짜로 조용한 택시를 타 보지 않아서 그게 얼마만큼 호젓할 수 있는지, 그래서 도시생활 속의 내밀한 축복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걸 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문득 내 영혼을 돌아보게 하는 정일한 공간과 시간을 상상하지 못한다 ..  (58∼59쪽)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며, 서울을 떠나 강원도 양구에서 살며, 강원도 양구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살며, 서울을 떠나 충북 충주에서 살며,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서 살며, 잠자는 방을 뺀 집구석 다른 데는 겨울이면 꼭 영 도 밑입니다. 그래도 한데에서 안 자고 기름보일러라도 돌릴 수 있는 집이니 얼마나 고마우랴 싶습니다. 다만, 잠자는 방에서도 잠바떼기를 걸치고 손가락을 엉덩이에 깔아 녹이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안 마르는 기저귀를 다리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감자와 당근을 헹구어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서른 줄이 꺾이는 나이에 다다르면서 ‘겨울에 추위 걱정을 않고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방 하나 얻어서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빨래를 했을 때 한나절이 지나면 제법 마르게 되는 곳에서 지낸다면 얼마나 넉넉할까. 글을 쓸 때 손가락이 뻣뻣하게 얼어붙어서 눈물이 찔끔 나오는 일이 없으면 얼마나 잘 써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따순 방에서 살게 된다고 하여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지내게 된다고 하여 우리 살림이 더 넉넉해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따사로운 방에서 일하게 된다고 하여 내 글이 더 알차고 훌륭해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영화평론가가 일반적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비법은 물론 ‘다섯 번 이상’이 기본인 준비 과정에만 있지 않다. 오랫동안 영화를 공부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은 제작 현장을 방문할 수 있고 제작자와 감독ㆍ작가ㆍ스태프 등과 작품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기술 시사회와 같은 중요한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다 ..  (77쪽)


 아기를 안고 길을 걷거나 전철을 타거나 어디 가게에 들어갈 때면, 우리한테 고이 마음써 주는 분들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틀림없이 우리가 아기를 안고 있음을, 아기를 안고 건널목에 서 있음을 알면서도 바로 옆에서 담배를 태우는 어르신(모두 다 남자입니다)이 꼭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차림새를 본 분은 그림이 그려질 텐데, 앞뒤로 가방 서너 개씩 대롱대롱 매달면서 사진기까지 오른어깨에 걸치고 아기를 안고 걷는 사람 앞에서 길을 터 주지 않을 뿐더러 툭툭 치고 가는 분들(거의 모두 남자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도 많고 아가씨나 어린 학생도 많습니다)이 참 많습니다. 전철을 타고 일산 처가집에 찾아갈 때, 아기가 젖을 먹어야 되어 물려야 하는데, 빈자리가 없어서 맨바닥에 털푸덕 앉아서 젖을 물리지만, 자리 두 칸을 내어주는 분을 보기란 힘듭니다(‘두 칸’을 내주어야 하는 까닭은 아기와 애 엄마가 둘이기도 하지만, 십 킬로그램에 가까운 아기를 내내 무릎에 올려놓고 젖을 물리거나 안는다는 일이 얼마나 팔 빠지고 무릎 뽀개지는 일인 줄을 모르면, 그야말로 모를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거의 할머님들이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라고 부르시지만, 한 자리만 날 때에는 차라리 맨바닥에 털푸덕 앉아서 젖을 물리고, 제가 무릎 꿇고 앉아서 무릎에서 오줌기저귀를 갈아 줄 때가 훨씬 수월합니다.

 용케 세 자리를 모두 얻어서 아기를 눕힌다고 해도, 전철 걸상은 살짝 기울어져 있으니 아기 목이나 허리에 참 안 좋습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영유아 동반자’ 자리라 한다면, 갓난아기가 어린 아기를 눕힐 때를 헤아려야 할 텐데, 그런 마음씀이란 없어요. 인천에서도 동인천역에는 ‘수유실(젖먹이는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그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며 드나드는 신도림역이나 서울역이나 용산역이나 시청역이나 종로3가역이나 동대문역 들에서 젖 물릴 수 있는 조용하고 바람 안 드는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 반면 인간들은 배우는 일에 속수무책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 ‘거짓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싸우지 말라’는 도덕과 교훈을 배우지만, ‘배운 놈이 더 무섭다’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배움은 아무 소용 없고 말짱 도루묵이다 ..  (82쪽)


 그러나, 이렇게 온몸으로 부딪히게 되니까 보일 뿐이에요. 이처럼 온몸으로 살아가니까 깨닫고 있을 뿐이에요.

 어느 시인 말마따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머리로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버스나 전철을 탈 때에 거의 자리에 앉는 일이 드물었고, 자리에 앉았어도 벌떡벌떡 일어나서 다른 이가 앉게 내어주었지만,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들한테 자리 하나 내어준다고 해서, 그분들 나들이길이 수월하지는 않음을 뼛속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막상 아이를 낳아 키우기까지, ‘아기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를 어떻게 재우는가’를, ‘아기를 어떻게 씻기는가’를, ‘아기 사는 집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를 조금도 살피지 못했습니다. 겨우겨우 알아가고 있으며, 차근차근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듯 세상을 보고 있으며, 앞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삭여야 할 일이 많다고 느낍니다.


.. 예를 들어, 가야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을 반대하기 위해 100만 인 서명운동이 필요할까? 혹은 시인 이상화의 생가를 보존하기 위해 그게 필요할까? 박정희기념관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필요악일까? 열 명 혹은 다섯 명으로는 안 될까? 진정 단 한 명의 의견이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고심하는 사회에서라면 100만 인 서명운동 따위는 우스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명운동의 규모와 목표가 걸핏하면 100만 인이 넘는 진풍경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00만 인 서명운동은 그것이 어떤 선의에서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 사회가 물량과 물리적인 세가 득세하는 사회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머릿수가 말하기 시작할수록 소수 의견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  (88쪽)


 (3) 장정일을 생각


 소설쓰는 장정일 님을 딱 두 번 보았습니다. 두 번 모두 헌책방에서 보았습니다. 두 번 보기 앞서는 장정일 님이 자주 들렀다고 하는 헌책방 아저씨한테 틈틈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헌책방 아저씨는 처음에는 몰랐다고 하는데, 나중에 다른 분한테 이야기를 듣고는,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장정일 님이 당신이 보던 책을 헌책방에 내놓았다’는 대목을 읽고 당신 헌책방에 ‘장정일 님이 내놓았음직한 헌책’을 찾으려는 손님이 꽤 있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무렵, 나라 안팎에 내로라하는 분들 말 한 마디와 글 한 줄이 얼마나 큰힘을 내는가 싶어 새삼 놀랐습니다. 내로라하는 분들이 헌책방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 이분들을 따르거나 좋아하는 분들도 으레 헌책방을 사랑스럽게 바라봅니다. 내로라하는 분들이 헌책방을 개골창만도 못한 낡아빠진 시시껄렁 껍데기로 바라보면, 이분들을 따르거나 좋아하는 분들도 으레 헌책방을 개골창만도 못한 낡아빠진 시시껄렁 껍데기로 바라봅니다. 이냥저냥 아무 눈길도 안 두면,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강 너머 불 구경입니다.


..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어 왔지만, 나에게 영화란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된다. ‘두 번 본 것’만이 영화다. 한 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것 ..  (131쪽)


 다른 헌책방에서 듣는 장정일 님은 ‘헌책방 아저씨와 때때로 술잔을 부딪히기도 하는 사이’였기에, 좀더 다른 이야기를 들었고, 또 만났습니다(다만, 아직 장정일 님과 술잔을 부딪혀 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장정일 님하고 술잔을 부딪히면서 두런두런 시끌버끌 수다를 떨게 된다면, 그 뒤로 읽는 장정일 님 책은 사뭇 달라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루에 다섯 차례씩 헌책방 나들이를 한다’고 했는데, ‘글쓰느라 바쁜데 하루에 다섯 차례나 오려니 너무 힘들다’고, ‘나(장정일)한테 돈이 많다면 헌책방을 통째로 사서 집에서 신나게 책만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장정일 님은 책을 참으로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비록 한 군데만 다섯 차례를 들락거린다고 하지만, 하루에 책방을 다섯 차례나 갈 수 있을 만큼 주머니 형편이 되는구나 싶어서 부럽습니다. 제 살림살이는 하루에 한 번은커녕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가면 괜찮으려나 싶을 만큼이기에(저 또한 예전에는 날마다 두어 군데씩 들르곤 했습니다), ‘나도 돈을 넉넉히 벌면 날마다 한 군데씩 헌책방 나들이를 하고 싶구나’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지금대로 좋다고, 지금은 날마다 책방 나들이를 하면 못 읽게 되는 책이 많이 늘어날 테니, 지금 이대로가 딱 알맞다고 느낍니다. 아이 돌보고 집살림 꾸리고 하는 데에도 밤잠이 모자라서 허구헌날 눈밑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데, 무슨 얼어죽을 책 타령을 하겠느냐 싶어요.


.. 이런 생각이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개꿈이라고 하더라도 신문 사회면을 매일 스크랩해서 읽는 작가가 어디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낸 L형의 신작 장편은 홍콩 느와르나 할리우드 문법과 너무 가까운 만큼, 내가 공들여 읽는 신문 사회면과는 동덜어져 있었다 ..  (175쪽)


 《생각, 장정일 단상》을 덮으면서, 저는 제 깜냥껏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숱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만, 새롭게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며 또다시 생각합니다.

 민방위훈련장에 가서 졸음을 쏟아지게 하는 비디오를 보는 내내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흔들리는 전철간에서 아기 오줌기저귀를 갈고 나서 한숨 돌리는 가운데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고단하게 잠든 아기와 옆지기 머리를 쓰다듬다가 나 또한 잠이 쏟아졌지만 찬물로 낯 씻고 눈 부릅뜨고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내 삶은 얼마나 나다운 삶인지를. 지금 내가 손에 쥐는 책은 내 마음밭을 얼마나 일구어 놓는 책인지를. 지금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내 몸이 기쁨으로 들뜨게 해 주는 만남을 꽃피우고 있는지를. (4341.1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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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코
리영희 지음 / 까치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71 ― 쉽게 읽을 수 없을 뿐더러 쉬 버려지는 ‘리영희’ 넋
 : 리영희, 《스핑크스의 코》



- 책이름 : 스핑크스의 코
- 글쓴이 : 리영희
- 펴낸곳 : 까치 (1998.11.5.)
- 책값 : x (판 끊어짐 /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어야 함)


 (1) 리영희 님 책


 1999년 봄, 늦게 군대에 간 고등학교 적 동무녀석이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동네 책방에 들러서 《스핑크스의 코》를 샀습니다. 군대에서 ‘리영희 님 책’을 불온도서로 삼아 자칫 동무녀석이 괴롭힘을 받을지 모르는 노릇이지만, 책이름만 살피는 군대 검열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차례를 살핀들, 또 책을 좀 훑는들 《스핑크스의 코》가 담은 넉넉한 이야기를 얻어내야지, 책 하나를 불온도서로 삼으며 우리 생각과 삶을 억누르면 안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무녀석이 군대에서 돌머리가 되고 봉건계급질서에 길들이게 되더라도 마음 하나만은 다부지게 가꾸어 주기를 바라면서 이 책 《스핑크스의 코》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동무녀석한테 선물해 주기 앞서 제가 먼저 이 책을 다 읽고서 건넸습니다.


.. 신에게도 국적이 있는 것일까? 하느님도 인간처럼 인종차별적 존재일까? 미국인에게 손가락질 한 번 하지 않은 무고한 베트남인들에게 폭탄세계를 퍼붓는 폭격기 편대의 출격에 앞서서 조종사와 폭격수들에게 그렇게 축도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한국전쟁 최전방의 건봉산 향로봉 진부령 꼭대기에서 품었던 심각한 종교적 회의를 더욱 굳힐 수밖에 없었다 … 과연 종교가 없는 것이 ‘불행’일까? 종교가 있는 사회는 종교가 없는 사회보다 반드시 더 나은 사회일까? … 남한의 종교와 종교인이 북한과 북한인에게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려고 나서기에 앞서, 자신과 자신의 종교와 자신의 사회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23, 32, 35쪽)


 책을 선물해 준 지 어느덧 열 해가 가까운 2008년, 세월은 흘렀어도 틀거리나 제도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군대에 ‘돌머리 되기 + 봉건계급질서에 길들기’에 시달려야 할 후배가 있다면 《스핑크스의 코》를 다시 한 권 사서 선물해 주고 싶은데, 그만 판이 끊어져서 더는 새책으로는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판이 끊어진 지는 몇 해 되었지 싶습니다. 《리영희 저작집》(한길사)이 지난 2006년 8월에 나오기는 했는데, 자그마치 26만 4천 원이나 하는 열두 권짜리 책도 ‘품절’이 되었고, 다시 찍어서 우리가 즐겁게 만날 수 있을는지는, 아니면 《스핑크스의 코》처럼 ‘절판’이라는 길을 걸을는지는 모를 노릇입니다.

 세상이 아는 ‘시대를 밝힌 지성’이며 ‘사회를 일깨우는 스승’이며 ‘나라를 빛내는 어른’이라 할 만한 리영희 님입니다만, 우리들이 리영희 님 책을 대접하는 매무새는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지나치게 비싼 판짜임으로 펴낸 출판사 탓이 한몫 하기는 했어도, 한 달 기름값조차 되지 않을 《리영희 저작집》임을 헤아린다면, 집에서 자동차 굴리는 분들께서는 ‘3개월 카드 할부’나 ‘6개월 카드 할부’로 긁어서라도 장만해서 마음밭 살찌우기쯤은 해 줄 만한 마음바탕은 되어야 이 사회고 세상이고 나라가 바뀔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 한국이라는 사회와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계율에 역행할수록 교회는 ‘번창’한다는 방정식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혹시 ‘장사’가 되지는 않았는지?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 ‘하나님의 집’은 저렇게 화려하고, 크고, 웅장하고, 돈으로 발라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다. 사찰은 어떤가? … 내가 2년 전에 이사 와서 살고 있는(1994년) 경기도 군포시 산본이라는 작은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도 거대한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경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밤이 되면 주민이 고작 10만의 신도시에 수백 개의 교회와 성당의 첨탑 끝 십자가의 빨간 네온사인이 밤하늘을 비춘다 … 1백 미터의 거리도 두지 않고 서로 담을 잇대어서 올라가고 있다. 그 건축비를 모두 모으면 아마도 수백억 원이 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확실한 성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저렇게 엄청난 돈이 드는 최고급의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가 매일같이 새로 세워질 수 있겠는가? … 하느님과 부처님을 초대하여 모시겠다는 물질적 표시인 성당과 교회와 절은 날마다 숫적으로 늘어나면서 크고 높고 화려해지는데, 그 인간들이 엉켜서 살아가는 이 나라와 사회는 인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날마다 메말라가고 있다 ..  (42∼44쪽)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을 뿐더러 카드 긁을 틈이 없다면, 헌책방이 있습니다. 비록 판이 끊어지기는 했어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라든지 《반핵》(창작과비평사,1988)이라든지, 《역설의 변증》(두레,1987)이라든지, 《베트남 전쟁》(두레,1985)이라든지, 《10억인의 나라》(두레,1985)라든지,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동광출판사,1984)라든지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1977)라든지 《우상과 이성》(한길사,1977) 같은 책은 얼마든지 싼값으로 찾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단돈 몇 천 원이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나 《역정》(창작과비평사)이나 《인간만사 새옹지마》(범우사) 같은 책은 아직도 새책방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책은 헌책방에 꾸준히 나오기도 합니다.

 새책방에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반세기의 신화》(삼인)나 《대화》(한길사)는 그나마 남아 있는 리영희 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매일 매순간, 신문의 증권 동향의 깨알 같은 숫자를 들여다보면서, 아침에는 기뻐 날뛰고 저녁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두려움과 ‘기대의 배신’에 분노하는 삶이란, 상상만 해도 겁이 나고 역겹다 … 주식의 긍정적 기능만을 찬양하는 천박한 일부 경제학자와 주식꾼들은 증권시장을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꽃’은 돈을 만들어 주는 한편으로, 인간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서 요긴하게 쓰일 물자를 대량으로 낭비하는 군비확장을 다그칠 뿐만 아니라, 수천만 명의 인간생명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재부를 파괴해 버리는 처참한 전쟁을 만들어내는 ‘독을 품은 꽃’이기도 하다 ..  (112, 114쪽)


 생각해 보면, 1970∼80년대에는 리영희 님 책이 널리 읽혀야 할 때였고, 1990∼2000년대에는 리영희 님 책이야 읽건 말건 아랑곳 없을 때인지 모릅니다. 다가올 2010∼20년대에는 리영희라는 이름 석 자는 먼지처럼 잊혀질 때가 될 수 있어요. 판이 끊어진 리영희 님 70∼80년대 책들은 몸글에 한자가 많이 드러나 있기도 해서 읽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한글로만 된 책도 옛 말투가 퍽 많아 요즘 사람한테는 벅차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핑크스의 코》는 《반세기의 신화》와 함께, 리영희 님이 손수 생각을 가다듬고 되새기면서 쓴 둘도 없이 애틋한 책이건만, 이러한 책을 우리가 어느 동네 책방에서나 홀가분하게 만날 수 없게 된 일은 더없이 안타깝고 슬프고 서운합니다.


..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가 도미노 패가 쓰러지듯이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공산화된다.” 이것이 미국이 작은 베트남은 사태를 ‘인도지나 전쟁’으로 확대한 전쟁 논리였다. 그 당시 한국국민은 미국의 현대판 십자군 전쟁과 같은 광신적 반공주의의 허구 논리의 본질을 간파할 지식과 사상적 능력이 없었다. 사회와 국민을 계몽해야 할 나라의 소위 ‘언론기관’들과 ‘언론인’들이 앞다투어 ‘도미노 이론’의 나팔수가 되었다 ..  (250쪽)


 지난해 2월, 헌책방 책시렁에서 《스핑크스의 코》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뒤로 며칠 걸러 조금씩 다시 읽어 나갔습니다. 이제는 리영희 님이 손수 쓰는 새로운 책이 다시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이 책이 제가 읽을 수 있는 리영희 님 마지막 책이 아닐까 싶어서, 다시 읽는 책이기는 하지만, 아주 천천히, 야금야금, 곱씹고 되씹고 거듭 씹으면서 새로 읽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1970년대나 2000년대나, 또 1960년대나 2010년대나, 그리고 1970년대나 1980년대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사회 얼거리뿐 아니라 사회에서 주름잡는 사람부터 초중고등학교 입시교육과 문화예술과학기술 모든 자리와 농어촌 살림과 도시 노동자 일삯과 노동조합까지, 어느 한 군데 한결 나아지거나 튼튼하게 뿌리내렸다고 할 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2010년을 앞두고 있는 2008년인 오늘날, 1998년에 나온 《스핑크스의 코》며, 1987년에 나온 《역설의 변증》이며, 1977년에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며, 다루는 이야기감만 달라졌을 뿐, 다루려는 속내와 밑뿌리는 똑같다고 느낍니다.

 세상이 발돋움하면 우리가 ‘고전’으로 삼을 만한 책도 발돋움하는 흐름에 맞추어 새로 꾸며야 할 텐데, 세상은 발돋움하지를 않고 껍데기만 번드레레하게 덧바르고 있습니다. 조금도 발돋움하지 않는 세상이고 쓰레기만 늘어나는 세상이건만, 이런 흐름에다가 쓰레기를 꿰뚫어보는 눈길이 지나치게 얕거나 모자라기에, 리영희 님 책을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2) 책 하나와 삶


.. 시가 ‘쉽게’ 쓰여져서는 안 되듯이 소설도 이처럼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각고한’ 흔적이 뚜렷할 때에 감동을 준다 … 그밖에도 위고는 어느 한 대목도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작가가 각고한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는 큰 기쁨이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작가의 안이함과 나태를 비꼬는 말들을 자주 들었따. ‘쉽게’ 문학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들이다 ..  (69∼70쪽)


 골목길을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늘 이 골목이 어느 구 무슨 동 몇 번지인가를 머리속으로 그립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길그림책을 뒤적이면서 제가 거닐었던 골목을 번지수까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조각맞추기를 합니다. 골목길 사진은 예술작품 만들기가 아니라 골목사람 삶을 담아내어 적바림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집이 어디에 깃들인 곳인지를 헤아려야 하고, 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웃은 누구인가를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 오늘 찾아간 이곳 책시렁이 지난번 찾아왔을 때하고 어떻게 바뀌었는지 헤아립니다. 다른 헌책방 책시렁하고는 무엇이 다르며, 동네마다, 또 큰도시와 작은도시마다 책시렁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핍니다. 그림으로 보기 좋게 담아내는 헌책방 사진이 아니라, 책 하나 매만지는 헌책방 일꾼 손길을 느끼는 사진이면서, 헌책방 한 곳이 깃든 동네 문화를 담아낼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자취를 담으려고 합니다. 딸아이 사진을 찍을 때에는 딸아이가 하루이틀 자라는 흐름을 담으려고 합니다. 혼인잔치나 돌잔치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는 죽 흘러가는 차례보다도 잔치날 어우러지는 사람들 마음과 느낌을 담으려고 합니다.


.. 아!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참 바쁘겠다! 온갖 유행마다 따라야 하는데 그냥 유행을 따라가기만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이다. 재빨리 눈치를 살펴서 유행의 홍수 속에 몸을 내던져야 한다 … 그녀들은 ‘현대여성’을 만드는 그 많은 변화무쌍하고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는 짧은 생명의 ‘유행’들이, 실제로는 유행을 조작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자본가들과 ‘유행’이라는 마술로 무제한의 소비주의적 낭비를 조장하는 상품선전 산업의 요술에 불과하다는 사실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다. 그와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소비주의적 유행문화는 만물을 상품화하고, 인간을 오로지 그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버리는 경제적, 사회적 매커니즘의 비인간성을 쉽게 드러내 보이지도 않는다. 유행의 탁류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행복’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의 유행 창조자들은 젊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풍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여성이 배꼽을 드러내거나 반나체가 되는 새 유행의 옷을 남보다 먼저 걸치는 것을 ‘여성 해방’의 ‘실천적 행위’로 미화하는 소비주의 경제와 그 광고산업의 돈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남성들이다. 경제력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이 여성의 육체에 수백만 원짜리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거나, 여성들의 손에 다이아몬드를 끼웠다 빼었다 하는 유행을 ‘현대화’니 ‘풍요’로 미화할 때, 그런 유행 속에 현대화와 풍요를 찾으려는 여성은 남성의 지배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 ..  (88∼89쪽)


 책 하나를 골라서 읽을 때면, 무엇보다도 책이름을 살피고 지은이 이름을 살피며 펴낸곳 이름을 살핍니다. 낯익은 이름과 눈길을 끄는 이름을 집어들기도 하지만, 낯설거나 어설퍼 보이는 이름을 집어들기도 합니다. 낯익은 이름이라고 해서 집어들어 펼친 뒤 책값을 셈해서 집까지 가져가지 않습니다. 낯선 이름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치지는 않습니다. 살펴야 할 대목은 줄거리입니다. 읽어야 할 대목은 줄거리가 얼마나 참되었는지, 줄거리에 얼마나 피땀을 바쳤는지입니다.

 책 하나 사들인 다음 읽을 때면, 이 책이 제 가슴에 어떻게 파고드는가를 헤아립니다. 머리를 무겁게 하는 지식이 넘치는 책인지, 머리를 가볍게 하면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책인지, 머리와 몸뚱이 모두 쓰도록 이끄는 책인지 가름합니다.

 책 하나를 다 읽고 덮을 때면, 두고두고 되읽을 만하구나 싶어서 둘레에 알리고픈 생각이 드는지, 아니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런 토를 달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드는지, 돈이 참 아까웠는데 다른 이들도 돈을 헤프게 버릴까 걱정되어 이 책은 사읽지 않게끔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지, 또는 아무 말 없이 책시렁에 얌전히 모셔 두기만 해야겠구나 싶은지를 가누어 봅니다.


.. 뫼와 골짜기, 들과 개울, 나무와 물, 그리고 흙과 공기는 우주창생 때의 색깔 그대로 청명했고 그대로 순수했다. 대자연은 은은한 태고의 내음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사람과 동물의 후각을 쓰다듬어 가벼운 졸음으로 잠들게 하였다. 그 자연의 품 속에서 소년(리영희)은 일 년 열두 달 구리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마음과 정서를 소년과 함께했던 온갖 나무열매와 산새와 작은 짐승들이 자연 속에 가득했다. 소년은 그 자연의 품에 안겨서 생물들처럼 마음은 싱싱했고 몸은 팔팔했다. 자연도 ‘오염’을 모르고 인간도 ‘공해’를 몰랐다. 자연과 수목과 동물과 인간이 ‘생명’으로서 하나가 된 삶이 있었다. 물질이 인간이었고, 인간이 물질이었다. 그렇게 생각했건 말았건 적어도 소년은 그런 마음으로 자라면 살았다. 그로부터 50년이 훨씬 지났다 ..  (262∼263쪽)


 성경을 읽는다고 하느님 사랑을 널리 나누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불경을 왼다고 부처님 믿음을 고이 베풀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리영희 님 책을 읽는다고 리영희 님처럼 세상과 사회와 나라를 깊숙이 파헤치는 마음결이나 손결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담긴 하느님처럼 세상과 사회와 나라와 부대끼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불경에 깃든 부처님처럼 사람과 자연과 뭇 목숨하고 어우러지려고 할 때에야 바야흐로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립니다. 리영희 님처럼 무던히 자기를 갈고닦고 다스리며 일으켜세우고자 할 때에도 시나브로 슬기란 무엇인가를 받아들입니다.

 서재 가꾸기를 해서는 삶을 가꿀 수 없습니다. 서재가 아닌 마음을 가꿀 노릇이고, 서재가 아닌 몸을 움직일 노릇입니다. 서재가 아닌 마음을 다스릴 노릇이고, 서재가 아닌 몸을 추스를 노릇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먹은 책이 된다면, 이 책은 내 이웃사람 누구한테나 스스럼없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몸으로 뛰어드는 책이 된다면, 이 책은 헌책방에 내놓아 주머니 가벼운 이가 싼값에 다시 사서 읽을 수 있도록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 소년소녀들의 용돈까지 털게 하여 황당무계한 ‘평화의 댐’을 건설했던 군부정권의 바로 그 국민 속임수였다. 군인권력이든 문민권력이든, 친일적 혈통의 권력의 발상은 언제나 같다. 이렇게 해서 민족이 해방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겨우 지어진 것이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이다. 일본에서 역사 교과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곡절 끝에 지은 독립기념관에 일제하에서 진정 영웅적인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나 유물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 쓰러뜨려야 할 친일파의 동상들이 아직도 수없이 많은데, 이 나라는 언제나 제 정신을 차릴 것인가 ..  (190∼191쪽)


 굳이 책 하나를 엮어내는 까닭이 있습니다. 굳이 책 하나 찾아서 읽는 까닭이 있습니다. 굳이 책을 가까이하면서 내 매무새와 생각틀을 손질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저마다 얼굴을 손보고 몸매를 가꾸는 까닭이 있을 테지요. 사람마다 자가용을 굴리고 큰 아파트를 장만하고픈 까닭이 있을 테고요. 누구나 손꼽히는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고픈 까닭이 있습니다. 어떤 이든 영어를 배우는 까닭이 있으며, 말과 글에 영어를 섞어 쓰는 까닭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사람 되는 길을 찾고 싶어서 책 만드는 일을 합니다. 저로서는 아직 제 됨됨이가 너무 모자라고 성겨서 틈틈이 제 삶을 돌아보면서 다그치고자 책을 읽습니다. 저로서는 이제까지 알게 되고 부대끼게 된 세상과 우리 삶터가 모든 세상과 삶터가 아님을 똑똑히 느끼면서 고개숙일 줄 아는 매무새를 갖추고자 책을 가까이합니다.





 (3)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된 《스핑크스의 코》


.. 처음 5조8천억 원으로 예상한 고속철도 사업은 이제 그 5배에 가까운 이십 몇 조 원으로도 서울-대구 구간이 건설될까 말까 하다니, 세계의 웃음거리도 보통 웃음거리가 아니다 … 나라의 끝에서 끝까지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나라에서 애당초 고속철도가 왜 필요했을까? … 지금 서울-부산 간의 공간이 과학ㆍ기술의 종합적 혜택으로 다섯 시간에 가던 것이 TGV라는 고속열차로 두 시간에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축소될 것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그 나머지의 세 시간을 무엇에 어떻게 쓰려는 것일까? … 우리가 정보화 시대의 덕택으로 예전에 몰랐던 수천만 수억만 가지의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의 질은 얼마나 풍요해지는 것일까? ..  (120∼121, 131쪽)


 리영희 님 책에 앞서 송건호 님 책 또한 헌책방에서나 찾아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송건호 님 책에 앞서 문익환 님 책 또한 헌책방에서나 살펴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문익환 님 책에 앞서 숱한 사람들 책이 헌책방 아니면 찾아볼 길이 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문익환이든 송건호든 리영희든 헌책방에서조차 찾아보는 손길이 줄어듭니다. 찾아 읽는 눈길이 옅어집니다. 찾아서 받아먹는 마음길이 사라집니다.

 약발이 다 되었는지 모릅니다. 늙은 사람은 떠나고 새 사람이 자리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서슬이 퍼렇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온몸으로 국가보안법 문제를 느끼지 않는 때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남과 북이 갈라진 채 예순 해가 지났습니다만, 구태여 남과 북이 평화롭고 사랑스레 하나될 까닭은 없다고 느끼는 우리들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가난한 이와 가멸찬 이 사이가 벌어질 뿐더러, 사람과 사람 사이에 푸대접과 괴롭힘이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가멸찬 자리를 꿈꾸고 정규직을 바라며 힘센 무리힘에 한몫 끼고 싶은 생각이 훨씬 크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제는 도덕 교과서조차 착함과 아름다움과 올바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회 교과서마저 통일과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국어 교과서마저 말을 알맞고 바르게 쓰는 즐거움과 고마움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밝히지 못합니다. 이제는 역사 교과서마저 그예 임금님들 발자취 좇기에 머물기만 할 뿐, 우리들 여느 사람 발자취에는 터럭만큼도 마음을 안 쏟습니다.


..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는 ‘돈’일 수밖에 없다 … 한국인이 자동차를 몇 만 대 생산하고, 세대마다 승용차를 가지게 되고, 교통법규와 안내판, 신호 등의 교통체계를 갖추었다고 해서 문화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현재의 지옥과 같은 교통환경에서 실감한다 … 사람들은 무제한한 자연수탈과 무절제한 소비와 낭비를 ‘미덕’으로 착각하고 ‘문화생활’로 분장한다 … 돈이라는 신 앞에 인간과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  (194, 276, 277쪽)


 리영희 님 책을 바라지 않는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을 이야기하는 일이란 몹시 부질없다고 느낍니다. 리영희 님 책을 읽어도 속알맹이를 캐내지 못하는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을 되살리는 일이란 대단히 쓸데없다고 느낍니다. 리영희 님 책이 없어도 잘만 굴러가는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 하나 티끌처럼 바람에 쓸려 구르다가 구정물에 퐁당 빠져서 가라앉아 사라지든 말든 참으로 아무 영향을 못 끼친다고 느낍니다.

 괜히 머리 아프게 이런 책을 왜 읽으라고 말하겠습니까. 괜히 눈 아프게 이런 책을 왜 살피라고 말하겠습니다. 괜히 가방 무겁게 이런 책 왜 들고 다니면서 펼치라고 말하겠습니까.


.. 많은 호남 출신이 직장에 남기 위해서 또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그들의 호적을 바꾸었거나 전라도 사람이 아닌 척하면서 살려고 애쓰는 경우를 나는 수없이 알고 있다. 그들은 ‘3등국민’의 처지였고, ‘내국 식민지적’ 멸시를 당했다. 주장할 의견이 있어도 참고 소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동포집단의 큰 부분에 강요된 ‘자기부정’이고 현대적 ‘소외’였다.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라. 남에게 자기부정과 소외를 강요하는 행위 역시 자신의 자기부정과 소외이고 보면, 영남사람들 또한 불행한 소외된 존재였을 것이다 ..  (306쪽)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을 노릇입니다. 돈만 벌면서 살면 그만이라고 하니 돈만 벌다가 죽을 노릇입니다. 사랑놀이만 하면서 살면 넉넉하다고 하니 사랑놀이만 하다가 죽을 노릇입니다. 아파트와 큰차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 아파트에서 살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을 노릇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니 수능시험에 목매달다고 얼굴 허옇게 되면서 죽을 노릇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라면 리영희 님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옛날 한자까지 배워 가면서 읽습니다. 내 마음그릇을 고치고 싶은 다짐을 세운다면 리영희 님 책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읽습니다. 돈이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엉덩이에 뾰루지가 나도록 앉아서 읽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되 내 이웃과 동무가 당신들 삶을 좀더 슬기롭고 알차게 여미기를 바라는 넋이 있다면 리영희 님 책을 제 주머니를 털어서 선물하고 읽히고 느낌을 나눕니다.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을 차려야 하는데, 배가 고파도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손전화 꾹꾹 눌러 밥 배달 시켜 먹고는 대충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아무 데나 내다 버리는 요즘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을 이야기하자니 입만 아픕니다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주절주절 떠들어 봅니다. (4341.11.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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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여자를 키우는 남자, 아니 두 여자가 키우는 남자


 딸아이 백일을 며칠 앞두고, 신포시장 떡집에 백설기와 가래떡을 맡기려고 흰쌀 사십 킬로그램 남짓을 지고 안고 갑니다. 모두 해서 사십 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무게일 텐데(어쩌면 더 나갈는지 모릅니다만), 집부터 떡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리 멀지는 않으나 썩 가깝지 않습니다. 높은 언덕을 넘어야 하지는 않으나, 인천이라는 데는 오르락내리락 골목이 끝없이 이어진 곳이다 보니 다리가 후들후들입니다.

 새벽나절 깨어나 일손을 붙잡다가 잠깐 눈을 붙인다고 했지만, 언제나 새벽같이 깨어나서 아빠 엄마랑 함께 눈 말똥말똥 뜨면서 놀아 달라고 하는 딸아이하고 씨름하노라면, 새벽잠도 낮잠도 저녁잠도 밤잠도 어영부영, 아니 대충대충 넘기게 됩니다. 어른들은 ‘아기가 잘 때 어른도 자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몸이 썩 좋지 않은 애 엄마는 집안일을 하나도 할 수 없는 터라, 먹고사는 일을 하는 애 아빠는 홀로 집안일까지 도맡습니다. 없는 틈을 쪼개어 집안일을 해야 하니, 아기가 자도 깨고 아기가 깨도 함께 깨는 때가 잦습니다. 한 시간 넘게 깊이 잠들기 어렵고, 조금 쉬는가 싶으면 기저귀 빨래가 밀리니 부랴부랴 언손 녹여 빨래를 하노라면 잠이 달아납니다. 잠이 달아나면서 쌀과 콩팥을 씻고 불려 놓아야 하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 놓고는 잠깐 아기를 안고 어르다가 바깥 일손을 붙잡다가, 하루 밥거리를 무엇으로 마련할까를 헤아리다가 기저귀를 빨다가, 또 아기하고 애 엄마하고 함께 어울리다가 밥을 안치다가, 그러면서 찌개나 반찬거리 하나 장만하다가 아까 걷어 놓은 기저귀를 개다가 …… 하면 하루가 훌쩍 지나갑니다.

 일기를 쓸 겨를이란 없지만, 달력 귀퉁이에다가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지나가는가를 적어 놓을 겨를조차 못 내고 넘어가는 날이 늘어납니다. 겨우 잠자리에 들 무렵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돌아보면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머리속이 새하얗습니다.

 더구나 오늘은 민방위훈련이 있는 날. 일은 겹쳐서 온다고, 그나마 아침잠조차 한 시간 느긋하게 잘 수 없어 퀭한 눈으로 민방위훈련 하는 곳까지 부랴부랴 종종걸음. 세 시간 동안 졸음이 쏟아지는 강의가 이어지는데, 여느 사람들 상식밖에 안 되는 구급법과 119 전화 거는 법을 그토록 오래도록 떠벌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교육장에서 문득 휘 둘러보니 5/6쯤 되는 우리 동네 아저씨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엎드려 자거나 코를 골고 있습니다. 그래도 1/6이나 되는 아저씨들은 자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때야말로 책을 읽어야 하지 않느냐 싶어 두 권을 챙겨 와 감기는 눈을 비벼 가면서 읽습니다. 세 시간 동안 이백 쪽 안팎 읽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시간에 비디오를 보여주는데, ‘세계 5위 군사대국 북한의 위협 가운데 화학무기가 가장 무섭다’고 하는 말머리로 ‘가정에서 화생방 대피 요령’을 연속극처럼 찍어서 틀어 줍니다.

 힘들 일은 없다고 하는 민방위훈련이기는 해도, 억지스럽게 국민의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내 이웃이 간첩인지 아닌지 살펴보라’는 비디오까지 귀가 멍멍하도록 듣고 나서야 도장 꾹 찍히고 풀려납니다. 동사무소에서 나와 출근부(?) 도장 찍는 젊은 직원은 한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넣고 한손으로 도장을 쾅쾅 찍습니다.

 어질어질한 머리로 집으로 돌아와 그사이 밀린 기저귀를 빨다가, 애 엄마가 ‘뜨거운 물이 씻을 만큼 되느냐’고 묻기에, 넉넉하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면 아기하고 함께 씻어도 되겠네 하기에,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졸음을 꾹 참고 큰 통에 뜨거운 물을 받습니다. 기저귀 빨래를 마치고 빨래줄에 널어도 물은 더 받아야 합니다. 방을 들여다봅니다. 애 엄마도 자고 딸아이도 잡니다. 통에 2/3쯤 찼을 무렵 애 엄마를 흔들어 깨웁니다. 애 엄마도 고단한 몸이라 겨우 일어납니다. 애 엄마가 먼저 씻는방에 들어가고, 딸아이는 애 아빠가 옷을 벗겨서 나중에 들어갑니다. 물통에 들어가 앉은 애 엄마가 딸아이를 안습니다. 저는 한손으로 아기 귀를 막은 채, 한손으로 바가지에 물을 퍼서 아기 몸에 끼얹습니다. 어제까지는 작은 통에 물을 담아서 손바닥으로 끼얹으며 씻겼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제대로 씻겨 봅니다.

 다 씻기고 나와서는 떡집으로. 이렇게 새벽 아침 낮나절을 보내고야 떡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거운 쌀짐을 이고 가기 앞서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은 몸대로 고단하면서 짐은 짐대로 무거우니 다리가 후들거릴밖에요. 게다가 아기를 낳아 기르는 동안 몸무게가 7킬로그램쯤 빠지며 힘도 많이 줄었으니 더욱 후들거리고요.

 그래도 떡집까지 가까스로 쌀을 다 지고 안고 찾아갔습니다. 안은 쌀과 진 쌀을 내려놓으니 팔과 등이 가볍습니다. 아니, 등짝이 없는 듯하고 팔이 없는 듯합니다. 문득, 군대에서 훈련 뛴다며 완전군장에다가 부대 깃발 들고 전화기를 목아지에 걸친 데다가, 탄약통까지 군장 위에 올려놓고 낑낑대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 내 군장 무게도 오늘 쌀 무게에 버금갔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용케 버티면서 여덟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걸었을까 놀랍습니다. 낙오는커녕 낙오하는 후임병들 군장을 뒤에서 밀어 주고 앞에서 잡아당기고 하면서 산길을 타고 오르기까지 했으니 ……. 하기는, 그때는 지금과 견주면 몸무게가 십 몇 킬로그램이 더 나갔으니 힘이야 더 있었을 테고 젊기도 젊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배고픈 애 엄마한테 밥을 먹이려고 밥을 차리고 찌개를 끓입니다. 그런데 애 엄마는 맛있게 먹기는 먹었으되 조금 많이 먹은 탓에 그만 숟가락질을 멈추지 못하고 더 먹어대어 탈이 납니다. 애 엄마한테 식사장애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밥차림 부피를 늘 제대로 못 맞춥니다. 딱 알맞게끔, 아니면 조금 모자라게끔 해야 하는데. 탄수화물을 안 먹이든지 아주 조금만 먹이든지.

 탈이 난 애 엄마는 저녁 여덟 시부터 밤 두 시 가까이까지 힘겨워하며 게워내고 끅끅거리다가 겨우 잠이 듭니다. 애 엄마가 잠이 들 때까지 애 아빠는 팔다리와 등허리를 주무르고 안아 주고 등을 비벼 주고 합니다. 이동안 딸아이는 때맞춰 오줌을 누면서 기저귀갈이를 시킵니다. 그래도 낮에 똥 한 번 누고 저녁에는 안 누어 주니 이만 해도 고맙습니다. 오늘은 어인 일인지 잠투정도 얼마 안 하고 고이 잠들어 줍니다. 이리 귀여울 수가.

 애 엄마가 자리에 눕고 나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흐릅니다. 애 아빠도 자리에 눕고 싶으나 어느새 잠이 싹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나 이동안 밀려 있는 기저귀를 빨 엄두는 못 냅니다. 팔과 팔꿈치가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새벽과 낮에도 기저귀를 빨고 물을 짤 때 손목과 팔꿈치가 저릿저릿해서 ‘이러다가 앞으로 어쩐담?’ 하는 소리가 ‘아이고 아이고!’ 소리와 함께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이제 슬슬 몸뚱아리가 더 버티지 못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니 잠자리에 들면 달게 잘 수 있을 듯한데,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면 언제쯤 깨어날까요. 아니, 딸아이는 새 하루에도 어김없이 새벽같이 눈 번쩍 뜨고는 까르르 웃어대면서 놀아 달라고 할 텐데, 애 아빠는 얼마나 아이 웃음을 모르는 척하면서 잠자리에서 꼼지락거릴 수 있을까요.

 속탈이 난 애 엄마 등을 어루만지면서, 애 아빠가 집일이 아닌 바깥으로 나가서 돈버는 일을 했다면, 이 모든 집살림에서 홀가분하거나 느긋할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돈만 벌고 들어오면 애 엄마가 혼자서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며 마음이 갑갑해지기도 하는지를 조금도 못 느끼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출산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하나도 못 느끼면서 닦달을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벌 수 있을 때 밖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둘레에서 자꾸자꾸 말을 하지만, 그렇게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는가를 헤아린다면, 저로서는 돈은 조금 적게 벌더라도 딸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뿐 아니라 함께 돌보고 함께 자라고 함께 놀고 함께 생각하면서 살 때가 돈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고마운 삶을 배우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딸아이 옆에 있고, 애 엄마 곁에 있는 일이, 돈으로 아기돌봄이 아줌마를 사서 쓸 때보다 훨씬 사랑 나누는 일이요, 한결 사랑 키우는 일이 아니겠느냐 싶어요.

 애 아빠는 젖을 물릴 수 없으니, 오롯이 애를 키운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여러모로 많은 대목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편,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고 힘든 애 엄마를 키우고(돌보고) 있습니다. 흔히들, ‘엄마 한 사람이 아이와 아빠를 키운다’고 하는데요, 우리 집에서만큼은 ‘아빠 한 사람이 아이와 엄마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지요, 옆지기도 이런 말을 하고 저도 이런 생각, ‘두 여자를 키우는 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애 아빠가 애 엄마와 딸아이를 키운다기보다, 애 아빠가 애 엄마하고 딸아이한테 배운다는 느낌이 짙게 들곤 합니다. 먹여살리지 살림하지 뒤치닥꺼리와 앞치닥꺼리 도맡지 하지만, 세상에 둘도 없이 깊은 가르침을 고마이 배우는 셈입니다. 가난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축복이라는 말씀처럼, 애 엄마와 딸아이 키우는 고단함은 오히려 애 엄마와 딸아이가 애 아빠를 키우는 첫손 꼽을 축복이지 싶습니다. 고단한 만큼 배우고, 고달픈 만큼 깨달으며, 지치는 만큼 느끼고, 벅찬 만큼 보람이 있습니다. 괴로운 만큼 기쁘고, 속썩이는 만큼 즐거우며, 애태우는 만큼 찡합니다.

 날마다 다짐합니다. 두 여자를 키우는 남자가 아닌 두 여자가 키우는 남자이고, 두 여자가 키워 주는 남자인 이 삶은 누구한테도 내주고 싶지 않다고. 가슴속에 켜켜이 묻어 놓고 싶습니다. 이 삶을. 몸뚱이에 알알이 새겨 놓고 싶습니다. 이 하루를. 마음밭에 차곡차곡 다져 놓고 싶습니다. 오늘 부대낀 온갖 일들을.

 눈물 한 줄기 눈가에 타고 흐릅니다. (4341.11.21.쇠.05:01.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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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이야기 - 아주 특별한 사막 신혼일기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79 ―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사하라’를 사랑해
 : 싼마오, 《사하라 이야기》


- 책이름 : 사하라 이야기
- 글쓴이 : 싼마오
- 옮긴이 : 조은
- 펴낸곳 : 막내집게 (2008.7.21.)
- 책값 : 9800원



 (1) 겨우살이와 우리 길


 이제까지 제가 얻어서 살고 있는 집 가운데 따뜻했던 데는 아직 없습니다. 옆지기와 함께 살며 아기도 낳고 지내는 이 집 또한 겨울에는 춥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추위를 덜 탄다고는 하여도, 함께 사는 이는 추위를 안 탈 리 없고, 저는 그럭저럭 견디고 손이 얼어도 비비고 녹이며 산다 하지만, 함께 지내는 이는 몸을 옹송그리다가 괴로울 텐데, 제가 알아보며 얻는 집은 하나같이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넉넉한 돈으로 움직이면서 알아볼 수 없는 집이고, 제가 늘 짊어지고 다니는 여러 만 권에 이르는 책을 간수할 만한 자리를 헤아리자면, 사람 삶이 고단할밖에 없는 응달자리에서만 맴돌게 되는가 싶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좀 따뜻하게 몸을 뉘이고 녹이고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고 싶은데, 우리 형편에 우리 동네에서 이와 같은 집자리가 나올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 동네가 오로지 높은층 아파트로만 다시 때려짓는 ‘구도심 재개발’로 허물리게 된다면, 우리가 갈 곳이란 고향동네에서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떠나야 하는 살림이 아니라, 이를 앙다물고 떠나야 하는 판입니다.


.. 나는 까무러칠 듯 놀라 할아버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위대한 예술가여, 이것들을 살 수 있나요?” 나는 손을 뻗어 사람 얼굴 조각을 집어들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투박하고 감동적인 자연의 창작물이라니!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었다 … 나는 그날 밥도 먹지 않고 바닥에 누워 그 위대한 무명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하라위족 이웃들은 내가 이 예술품을 사는 데 1천 페세타나 썼다는 것을 알자 나를 마구 비웃고 백치 취급까지 했다 ..  (233∼234쪽)


 옆지기가 말합니다. 겨울에는 집을 두고 따뜻한 데를 찾아서 나들이만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백일이 채 안 된 갓난쟁이를 안고 업고 다니기에는 수월하지 않지만, 옆지기 말마따나 그리 떠돌아다녀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떠돌아다녀도 달삯은 나가게 마련이라 만만찮은 달삯이 허리를 휘게 할 터이나, 혼자 꾸리는 삶이 아니기에 옆지기 말을 흘려들을 수 없습니다.

 한편, 추운 날엔 추운 대로 받아들이고, 더운 날엔 더운 대로 맞아들이면서, 몸은 고달프더라도 마음은 느긋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겨울이니 찬물에 언손 녹이며 빨래를 합니다. 여름이니 시원한 물에 더위를 씻으며 빨래를 합니다. 겨울이니 집에서도 옷을 여러 벌 껴입으며 지내고, 여름이니 집에서는 반바지 하나만 걸치면서 지냅니다.

 다만, 우리는 고단함을 부러 찾아나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골목동네에서 골목집 한켠에서 옹크리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아파트 같은 데에 들어갈 마음도 없지만, 아파트 같은 데에 들어갈 만한 살림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형편이 이러하니 이만큼 살고, 무언가 더 얻거나 가지고픈 마음이 없으니 이 자리에서 흐뭇하게 여기며 살 뿐입니다.


.. (운전면허) 시험지에 적힌 문제는 이러했다. “1. 차를 몰고 가는데 빨간불이 켜지면? (1) 그냥 지나간다 (2) 멈춘다 (3) 클랙슨을 마구 누른다. 2. 차를 몰고 가는데 횡단보도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1) 손을 흔들어 행인이 빨리 지나가도록 한다 (2) 무시한 채 지나간다 (3) 멈춘다” 두 장의 커다란 시험지에 적힌 문제들은 모두 이렇게 배꼽 빠지는 것들이었다. 나는 꺽꺽 하고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억누르느라 사레가 들어 혼났지만, 번개처럼 답을 써 내려갔다. 맨 마지막 문제는 이러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천주교인이 성모마리아상을 메고 지나가면? (1) 손뼉을 친다 (2) 멈춘다 (3) 무릎을 꿇는다” ..  (193쪽)


 엊저녁, 옆지기가 묻습니다. “당신, 만들고 싶어하는 국어사전을 만들지 못하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아요?” “그다지. 만들 수 있으면 만들겠지만, 만들 수 없으면 못 만들 뿐이지.” “나도. 못 만들어도 억울하거나 아쉽지 않을 것 같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이고, 이 꿈을 이루려고 더딘 걸음을 참 더디게 걷고 있는 ‘국어사전 엮기’입니다. 우리한테 있어야 하는 국어사전이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떤 낱말을 어떻게 그러모으고 어떤 풀이와 보기글을 다는 한편, 어떤 짜임새로 내놓아야 하는가를 밑그림을 마련해 놓기는 했지만, 이러한 꿈을 이루면 즐겁고, 이루지 못해도 아쉽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이지, 할 수 없는데 억지로 밀어붙일 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대로 하지, 주어지지 않은 몫을 할 수 없습니다. 저한테 돈이 넉넉하게 있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제 일을 거들 도움이가 많다 하여 이룰 일이 아닙니다. 내 살림 흐름과 세상 흐름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차곡차곡 읽고 곱새기면서 간직해 온 여러 가지 책들을 마련해 놓은 도서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들을 알아보거나 즐기려고 꾸준히 찾아와 주는 분들이 있다면 고맙기도 고맙지만, 저한테 고맙기보다는 그분들한테 고맙습니다. 그분들한테는 새 세상을 열 책길을 만나고, 새 눈길을 틀 책눈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야, 우리 도서관 책을 더 널리 나누지 못하더라도 아쉬움이 없습니다. 알아볼 사람은 언제든 알아볼 책이었고,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앞으로도 알아보지 못할 책인데, 이 책들이 어떻고저떻고 미주알고주알 떠들면서 ‘책 좀 읽으시지?’ 하고 옷소매를 잡아당길 수 없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백만 번 외친들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겠습니까. ‘도를 아십니까?’ 하면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중얼중얼 읊조린들 우리가 깨우치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 믿음을 나누자면 하느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도를 깨우치려면 도 닦인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책으로 살고 책으로 믿으며 책으로 길을 걷습니다. 그 모양 그대로 책이 삶으로 되어 도서관을 동네 한켠에 열었 놓았을 뿐입니다. 가슴에 품은 국어사전 엮는 일 또한, 내 삶이 말이 되고, 말이 삶으로 녹아나고, 말마디와 글줄과 삶자락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도록 살아가기 때문에 꿈 하나가 됩니다.


.. “빨리 좀 몰아. 기숙사에 혼자 사는 친구들 불러다 저녁 먹자!” “생선은 절여 두고 먹을 거 아냐?” 호세가 물었다. “처음이니까 손님을 초대해 한턱 내자. 그 사람들 평소에 잘 못 먹잖아.” 호세는 무척 즐거워했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맥주 한 상자와 포도주 여섯 병을 사서 손님을 초대했다 … 여러 대의 자동차가 해안선을 따라 신나게 질주했다. 밤에는 야영을 하며 (물)고기를 구워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눴다. 이렇게 노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돈을 모으려던 다짐은 알게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  (140쪽)


 (2) 앎 쪼가리와 사람 사는 길


 어제와 그제 밥을 태웠습니다. 이제껏 밥하기를 하며 밥을 태운 일이 없었는데, 밥을 태웠습니다. 밥을 하건 찌개를 끓이건 늘 옆에서 책을 펼쳐들면서 했으니 태울 일이란 없었는데, 어제와 그제는 방에서 언몸을 녹이면서 글쓰기를 하다가 밥을 태웠습니다. 그러나 탄밥은 탄밥대로 맛이 있었고, 까맣게 눌러붙지는 않았으니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다만, 어쩌다가 밥을 태울 만큼 마음을 놓고 말았나 싶어 속이 쓰립니다. 내가 이렇게 내 몸 하나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사나 싶어 허전합니다.


.. 하루는 이웃집 꼬맹이 라푸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집채만 한 낙타 시체가 문 앞에 놓여 있었고, 바닥은 시뻘건 피로 흥건했다. 나는 기겁을 했다. “엄마가 이 낙타를 아줌마네 냉장고에 좀 넣어 두래요.” 나는 고개를 돌려 조그만 냉장고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라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라푸, 엄마한테 너희 집 큰 방을 나한테 반짇고기로 쓰라고 주면, 이 낙타를 우리 냉장고에 넣어 준다고 해라.” 라푸는 곧바로 물었다. “아줌마 바늘이 어디 있는데요?” 당연히 낙타는 우리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라푸 엄마는 거의 한 달 동안 굳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단지 이 말 한 마디만 했다. “내 부탁을 거절하다니, 당신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요.” ..  (122쪽)


 어제 우리 집에 온 《함께 웃는 날》이라는 잡지 3호를 보니, 장애 있는 아이를 둔 어느 어머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만약 아이한테 장애가 없었으면 난 아주 극성스러운 엄마가 되었을 거다. 요즘 엄마들처럼 아이한테 마구 욕심을 부리며 괴로워하고 아이도 괴롭히지 않았을까. 다른 엄마들이 나보고 성격 좋다는 말 많이 한다. 그게 다 아이 덕분이다. 내가 겸손해졌다.(9쪽)”

 저도 느끼고 옆지기도 느끼지만, ‘남자’라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딱한지’ 모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못 느끼고 못 깨닫고 못 배우는 대목이 얼마나 많고 큰지 모릅니다. 세상 모든 일을 몸소 겪거나 부대껴야만 알지는 않아요. 그러나 말입지요, 몸소 겪거나 부대끼지 않을 뿐 아니라 눈길 한 번 두지 못하게 되는 매무새로 굳어져 가기 때문에 말썽입니다.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하고 길러 보지 못하니, 아이낳기와 아이기르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릇합니다. 어린이를 어린이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여자를 여자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나라밖 사람들, 이 가운데 이주노동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몸 한쪽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장애인을 장애인 그대로 껴안지 못합니다.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꾸밈없이 부둥켜안지 못할 뿐더러, 힘이 여린 사람과 돈이 모자란 사람과 이름이 없는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안지 못하고 맙니다.


.. 여자들은 모두 작은 돌멩이를 물에 적셔 몸을 문질렀다. 한 번 문지를 때마다 시커먼 때가 주룩주룩 밀렸다. 그들은 비누를 사용하지 않았고 물도 많이 쓰지 않았다. 온몸의 때를 모조리 벗겨 내면 비로소 물을 끼얹었다. “4년 만이에요. 4년 동안 목욕을 못했어요. 난 샤이마에 살아요. 아주아주 먼 사막에 있는…….” … “당신은 왜 안 씻어요? 돌을 빌려 줄까요?” 그녀는 상냥한 표정으로 내게 돌을 건네주었다. “전 때가 없어요. 집에서 씻었거든요.” “때도 없는데 뭐 하러 왔어요! 목욕은 나처럼 3∼4년에 한 번씩 하는 거라고요.” ..  (92∼93쪽)


 우리 아버지를 보면서, 또 옆지기 아버지를 보면서, 또 동네뿐 아니라 서울이고 어디에서고 부대끼는 숱한 ‘남자’들을 보면서, 이이들이 얼마나 스스로 어리석은 줄도 모르고 이처럼 막나갈까 싶어 안쓰럽습니다. 지식으로만 알 때하고 몸으로도 알 때가 사뭇 다른데, 지식으로 좀 겉핥기를 해 보았다고 우쭐대는 사람이 많아서 놀랍니다. 겉핥기가 마치 모든 모습을 다 깨우친 일이라도 되는 듯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많은 모습을 보며 더 크게 놀랍니다.

 어쩔 수 없을까?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손을 놓아도 되느냐? 싶으면서도, 다 제멋에 따라 사는데 무어라무어라 할 수 있나? 싶으면서도, 나도 너도 우리도 누구나 다 지 잘난 줄 아는데? 싶으면서도, 숨이 자꾸자꾸 막힙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흐립니다.

 얼마 앞서 《논 생물도감》이라는 책이 새로 나왔습니다. ㅂ출판사에서 농사일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 나온 적이 있지만,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논농사’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게끔 다룬 책은 아직 우리 나라에서 한 번도 안 나온 줄 압니다. 그나마 밭농사 이야기를 다룬 책은 더러 있습니다. 감자 농사나 고구마 농사나 텃밭 농사 이야기는 좀 있습니다. 그리고 ‘뜰(정원) 가꾸기’ 책은 제법 많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늘 먹어야 한다고 하는 쌀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꾸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룬 일반교양책은 한 권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잡지는 없어도, ‘전원생활’이나 ‘전원주택 생활’ 이야기를 다루는 잡지는 있고, 꽤 팔리는 우리 형편하고 똑같습니다. 그래, 세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

 늪을 다룬 책, 갯벌을 다룬 책, 산 이야기와 바다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많지만, 정작 논을 다룬 책은 참으로 드뭅니다. 논에서 농사짓는 이야기라든지, 논에 어떤 목숨붙이들이 살고 있는가를 다룬 책은 아예 눈씻고 찾아볼 수 없습니다.


.. 그리하여 우리는 현지 법원으로 가서 결혼 절차를 알아보았다. 법원 서기는 백발의 스페인 남자였다. “결혼하시게요? 아이고, 우리는 지금까지 결혼 절차는 한 번도 처리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신들도 알다시피 여기 사하라위족은 자기네 풍속대로 결혼하니까 말이에요. 일단 법률책을 좀 찾아보고…….” 서기 선생은 책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결혼 공증이라…… 아, 여기 있네요. 이겁니다. 출생 증명, 독신 증명, 거주지 증명, 법원 공고 증명…… 여자 분 서류는 대만에서 가져와야 하고, 다시 포르투갈 주재 대만 공사관에서 번역 증명을 받아야 해요. 증명이 끝나면 포르투갈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서 공증을 받고, 그 다음에 스페인 외교부에서 심사를 받고, 심사가 끝나면 여기서 우리가 보름 간 공고를 하고, 다시 두 사람의 결혼서류를 마드리드로 보내 당신들의 과거 호적지 법원에 공고하고…….” ..  (26쪽)


 잘 익은 감을 먹으면 굵고 딱딱한 감씨가 나옵니다. 이 감씨를 심으면 무엇이 싹틀까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는지, 감 열매 얻는 감나무는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를 아는 이는 몇이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감을 안 먹는 한국사람 드물고 감잎차 안 좋아하는 한국 지식인 드물 텐데, 감씨를 심어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아는 사람은, 감잎이 어찌 생겼고 감꽃은 어떤 빛깔 어떤 크기 어떤 맛인지 아는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최순애 님이 지은 어린이노래 〈오빠생각〉을 아기한테 불러 주곤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잘못 알려진 노래말을 바르게 고쳐서’ 불러 줍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댕기 사 가지고 오신답니다.” 이원수 님이 지은 어린이노래 〈고향생각〉도, 당신이 살아 계실 때 그리 고쳐졌으면 하고 바랐지만 사람들이 워낙 입에 굳어서 고치지 못하니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고 했던 아쉬움을 털어서 한 군데만 고쳐서 부릅니다. “우리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사람들 누구나 부르는 노래입니다만, 뜸북새를 본 젊은 사람은 이 나라에 없을 테고, 살구꽃 봉오리를 쓰다듬어 보면서 얼마나 곱고 향긋한가를 느끼고 나서 살구비누를 써 보는 사람도 이 나라에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저는 살구나무며 살구꽃은 보았어도 뜸북새는 못 보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 나라에서는 뜸북새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논에서 사는 뜸북새인데, 논에 비료와 농약 안 치는 농사꾼이 얼마나 됩니꺼. 뜸북새가 살려면 농사꾼이 낫으로 벼를 베어야 하는데, 기계 안 쓰며 가을걷이를 하는 농사꾼이 얼마나 됩니꺼. 우리 먹는 쌀에 농약과 비료가 얼마나 듬뿍듬뿍 쳐지고 있는 줄 압니꺼.


.. “언젠가 우리는 이 황량한 벌판에서 죽고 말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차는 덜컹거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달리면서 사막을 못살게 굴었잖아. 그의 화석을 캐고, 그의 식물을 뽑고, 그의 짐승들을 쫓고, 사이다병이며 종이 상자며 온갖 쓰레기를 그의 몸 위에 버려대고, 또 차바퀴로 마구 짓밟고 다니잖아. 사막은 그러는 게 싫대. 그러니까 우리 목숨으로 배상하래. 이렇게. 우우우우…… 우우우우…….” ..  (68∼69쪽)


 모르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알면서 움직이지 않는 일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를 붙이고 싶습니다. 허튼 앎 찌끄레기를 잔뜩 붙잡으면서 맑은 앎 알맹이를 하나도 붙잡을 마음이 없는 일 또한 잘못이면서 더없이 큰 잘못이라고.

 교육이 말썽인 줄 안다면, 자기 딸아들한테 입시교육을 시킬 수 없는 데다가 섣불리 대학교에 보낼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교육이 말썽인 줄 알기에 사회와 정치도 말썽인 줄 알아야 하고, 사회와 정치가 말썽인 줄 알기에 경제가 말썽인 줄 알아야 하며, 경제가 말썽인 줄 알기에 문화와 예술도 말썽인 줄 알아야 합니다. 문화와 예술이 말썽인 줄 알기에 과학과 기술이 말썽인 줄 알아야 하고, 과학과 기술이 말썽인 줄 알기에 환경이 말썽인 줄 알아야 하며, 환경이 말썽인 줄 알기에 말과 글이 말썽인 줄 알아야 합니다. 말과 글이 말썽인 줄 안다면 다시 교육이 말썽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 돌고 돕니다. 어느 한 가지에서 고이거나 그치거나 맴돌지 않습니다. 교육비평을 할 줄 안다면 영화비평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영화비평을 할 줄 안다면 문화비평을 할 줄 알아야 하며, 문화비평을 할 줄 안다면 정치비평 또한 할 줄 알아야 하고, 정치비평을 할 줄 안다면 우리 말과 글 비평까지 할 줄 알아야 하는 가운데, 우리 말과 글을 비평할 줄 안다면 교육비평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다’는 사람은 무엇을 알고 있으려나요. 사하라에 사막이 있는 줄은 아나요. 그러면 사막이 왜 있는 줄은 아나요. 사막에는 누가 사는 줄 아나요. 사막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삶을 꾸리는 줄 아나요. 사막에서 살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줄 아나요.

 한국땅에는 무엇이 있는 줄 아나요. 한국땅에서 살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서 즐겁게 살자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놀이를 하며 어떤 이웃과 동무삼으면서 살아야 하나요. 한국에서 꾸리는 삶이란 무엇인가요.


.. “축하! 축하!” “어? 천리안이 달렸나?” “감옥 옥상에 있는 죄수들이 말해 줬어.”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람들이 울타리 밖의 사람들보다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정말 나쁜 사람은 마치 전설 속의 용처럼 마음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숨었다 나타났다 하기에 붙잡을 수도 없고 가둬 둘 수도 없을 것이다. 점심 준비를 하는 사이에 호세더러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콜라 두 상자와 담배 두 보루를 가져다주고 오라고 했다. 그들은 마치 고적대처럼 나를 응원해 주었다. 나는 그들을 깔보지 않았다. 나나 그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까 ..  (197쪽)





 (3) 사막을 사랑한 사람들 이야기


 1인 출판을 하는 ‘막내집게(인터넷 블로그 : blog.naver.com/makzip)’에서 첫 번째 책으로 《사하라 이야기》를 펴냈습니다. 저로서는 처음 읽는(어쩌면 예전에 읽고도 잊어버렸을 수 있지만) 대만문학 ‘싼마오’ 작품인데, 출판사 블로그에 적힌 글을 살피니, 1990년대에 여러 번, 그리고 2001년에 마지막으로 옮겨지곤 했던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나온 싼마오 책은 모두 판이 끊어진데다가 정식계약을 해서 나온 책은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1인 출판 길을 걷게 된 펴낸이이자 옮긴이께서는, 얼결에 출판등록을 해서 갑작스레 이 책을 옮겨서 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차례 나온 적이 있음에도 굳이 이 책을 다시 펴내는 까닭, 아니 새로 우리 말로 옮기고 새 옷을 입혀서 펴내는 까닭이 있습니다. 펴낸이이면서 옮긴이로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책”을 즐겨읽으면서 사랑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옮겨냅니다. 당신 마음을 사로잡았던 좋은 책이었기에 앞으로도 오래오래 많은 이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 옮겨서 펴냅니다. 누구보다도 글쓴이 싼마오를 그리워하고 아끼기에 책을 낼 수 있고, 꿋꿋하게 출판사 문을 열고 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사하라 이야기》가 숨을 거두어 사라지는 일이 없을 테지요. 번역 글월도 ‘자기가 아끼는 작품’이기 때문에 더 땀을 들이고 마음을 쏟아서 알뜰히 여미어 내게 됩니다. 펴낸이와 옮긴이 두 가지 몫을 함께하고 있는 분은 “도대체 왜 싼마오가 호세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지? 중국어에는 존댓말도 없고, 둘은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하고 이야기합니다.


.. “우리에겐 왜 가구가 꼭 있어야 할까? 왜 사하라 사람들처럼 평생 자리 하나만 깔고 살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그들이 아니니까.” “왜 우리는 그들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지?” 나는 세 개의 판자를 껴안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돼지고기를 안 먹을까?” 호세가 웃으며 반문했다. “그건 종교적인 문제지, 생활방식의 문제는 아니잖아.” “그럼 당신은 왜 낙타도기를 안 먹어? 기독교 신자는 낙타를 먹으면 안 되나?” “내 종교에서 탁타는 바늘구멍에 밀어넣는 데나 써먹지 다른 데는 안 쓴다네.” “그러니까 우린 가구가 있어야만 생활이 비참하지 않아.” ..  (218∼219쪽)


 사막을 사랑한 싼마오이고, 이런 싼마오를 사랑한 투박한 스페인 사내 호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한테 따습고 넉넉할 보금자리를 사막에 마련했습니다. 누구 보란 듯이 마련한 삶터가 아닌, 서로 즐기려고 마련한 삶터입니다. 싼마오가 남긴 글 《사하라 이야기》는 사람들한테 읽히려고 쓴 글이라 할 테지만, 남들한테 읽히기 앞서 싼마오와 호세 둘이 보낸 발자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 삶자락을 적바림해 놓았다고, 꼭 일기를 쓰듯 남겨 놓았구나 싶습니다.

 ‘사막으로 오셔요. 사막은 참 좋답니다!’ 하고 외치는 책이었다면 곧바로 덮거나 집어치웠을 텐데, ‘나는 사막이 좋아. 그래서 사막에서 살지.’ 하고 조곤조곤 말문을 여는 책이기에 책상맡이나 잠자리에 얌전히 놓고 쉬엄쉬엄 읽었습니다. 제 손을 떠날 이 책은 곧 ‘사막과 고래를 좋아하는’ 우리 옆지기 손에 쥐어질 테고, 옆지기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아기한테 또박또박 읽어 주면서 함께 가슴으로 받아들이리라 봅니다.


.. 처음으로 사하라를 가로지르며, 우리는 둘 다 사막이 만든 사랑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제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이 황야를 결코 떠날 수 없게 되었다 ..  (225쪽)


 어느새 날이 밝아 자판이 다 보이게 되는군요. 이제 곧 해가 나면 집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질까요. 새벽바람은 쌀쌀하니 보일러 살짝 돌리고 밀린 기저귀 빨래를 해야겠습니다. (4341.11.19.물.ㅎㄲㅅㄱ)

***
중국 현대문학에서 손꼽히는 싼마오는 1943년 중국 쓰촨 성 충칭에서 태어나 대만으로 옮겨서 살았습니다. 마음 넓고 넉넉한 부모와 함께 살다가 틀에 박힌 학교에서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난 뒤 가정교육을 받았습니다. 스물네 살부터 세계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고, 1973년 북아프리카 서사하라에서 스페인 사내 호세와 혼인하여 살아갑니다. 이곳에서 살던 이야기를 쓴 첫 작품이 《사하라 이야기》이고, 이 책에 쏟아진 사랑에 힘을 얻은 싼마오는 부지런히 글쓰기를 하게 됩니다. 그 뒤 《흐느끼는 낙타》와 《허수아비의 수기》와 《너에게 말 한 필을 보낸다》 들을 펴냈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호세가 잠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싼마오는 대만으로 돌아옵니다. 문화대학에서 문학창작을 가르치며 글쓰기와 강연을 이어갔는데, 《곤곤홍진》을 마지막으로 1991년에 마흔여덟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대만 황관출판사에서 모두 스물일곱 권에 이르는 전집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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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 3


 볼일이 있어 옆지기와 아기까지 함께 전철을 타고 서울 외국어대 있는 데까지 나들이를 합니다. 퍽 먼길이라서 아기도 걱정이고 옆지기도 걱정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용산역에서 내려 뒷간을 갈 때부터 조금씩 불거지고, 서울역부터 땅밑으로 파고드는 전철을 타고 달리는 내내 깊어집니다. 아기도 힘들고 옆지기도 힘겨워, 같이 나들이를 하자고 이끈 아빠는 참 바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듭니다.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길기 때문에, 책을 세 권 가방에 챙겼지만, 머나먼 길을 오가는 동안 책은 겨우 두 번 펼칠 뿐입니다. 그나마 돌아오는 길에 아기며 옆지기며 고단한 잠에 깊이 빠져들었기에, 두 사람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책을 펼쳤습니다.

 갓난쟁이하고 나들이를 가야 할 때에는 책 펼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면 두 사람을 돌보면서 둘 모두 새근새근 잠들고 나서야 비로소 애 아빠는 잠을 좇으면서 그 작은 틈을 쪼개어 책을 펼쳐야 하는지. (4341.11.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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