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미나마타
이시무레 미치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4 ― “죽으면 나도 해부되겠지요.”
 : 이시무레 미치코, 《슬픈 미나마타》



- 책이름 : 슬픈 미나마타
- 글 : 이시무레 미치코
- 옮긴이 : 김경인
- 펴낸곳 : 달팽이(2007.6.5.)
- 책값 : 12000원



 (1) 영화 한 편 보려고


 황윤 감독이 찍은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가 인천을 뺀 나라안 큰도시 모두에서 지난 3월부터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걸렸는데, 그때는 충주에 살고 있었기에 좀처럼 짬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전국 개봉관에서 건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러면 우리 동네에서도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인천만 빠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에서만 걸더군요.

 그러다가 엊그제 4월 15일부터 드디어 인천에서도 자리 하나 얻어서 겁니다. 황윤 감독 인터넷방에서 소식을 보고는 부랴부랴 인천 개봉관 인터넷방에 들어가 봅니다. 그러나 상영 소식이 없습니다. 아침 아홉 시 반에 전화를 겁니다. 받지 않습니다. 하루 지나 16일 낮에 다시 겁니다. 인천 개봉관에 걸린 지 이틀이 되도록 인터넷방에는 소식이 없기에 “황윤 감독님 〈어느 날 그 길에서〉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인터넷방에는 올라오지 않아서요. 지금 상영하고 있나요?” “네, 그런데 상영 주최가 달라서 인터넷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응? 상영 주최? 상영 주최가 다르든 말든,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으면 알림글 한 줄이라도 달아 놓아야 하지 않나? 주최가 달라도 자기 극장에 걸고 있으면, 시간표라도 적어 놓아야 사람들이 찾아가지, 시간표도 없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알고서 이 영화를 본다고. 더우기, 영화를 틀어 주는 시간은 낮 두 시와 저녁 여섯 시. 회사원들이 일 마치고 찾아가서 보기에도 뻘쭘한 때. 살림하는 분들이 밥차리다가 찾아가서 보기에도 어중간한 때.


.. 아이들은 엄마의 뱃속에서 이미 유기수은에 중독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 생선이라곤 먹어 본 적도 없는 젖먹이 아기가 미나마타병일 거라고는 엄마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진단이 내려질 때까지, 시내 병원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고, 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배며 어구들을 내다 팔아야만 했다 ..  (23쪽)


 히유, 그래도 먼 데까지 비싼 찻삯과 품과 시간을 안 들이고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영화를 볼 수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 테지요. 며칠까지 영화를 걸어 주느냐고 여쭙니다. “아마 4월 말일까지는 걸 거예요.” “그러면 4월 30일까지는 사람들이 찾아가서 볼 수 있지요?” “그럴 겁니다.”

 뜨뜻미지근하다 못해 쌀쌀맞다 싶은 안내전화를 끊습니다. 오늘(16일)은 늦었고 내일(17일) 짬을 내어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먼저 큐헤이가 죽을 줄 알았지. 나도 한숨도 못 자고. 눈도 안 보여, 귀도 안 들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인간 같지도 않은 소리로 울어대면서 날뛰는 거예요. 아이고, 이제 제발 죽자,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뭐냐, 우리가 있는 여기가 지옥이지……. 우물을 조사하고, 된장단지를 검사하고, 심지어는 단무지까지. 소독을 한답시고 몇 명이나 다녀갔는지 몰라요 … 물건을 살 수 있기를 하나, 물도 받으러 안 가면 안 되지. 가게에 가도 겁먹은 가게 주인은 동전도 제 손으로 안 받아요 … 다시 태어나고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못 잊지. 물도 못 얻어먹던 그 한을” ..  (42∼43쪽)


 17일 낮 한 시. 이제 가방을 챙겨 극장으로 가야 할 때. 도서관에서 하던 일을 마치고 살림집으로 올라갑니다. 옆지기는 누워 있습니다. 흔들어 보지만 꿈쩍을 않습니다. 요사이는 밤새 배속 아기가 꿈지럭거려서 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몸이 고단하여 못 일어나는 듯. 그렇다면 어떡하나. 내일과 모레와 글피는 꼼짝없이 도서관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다음주에? 다음주에는 아무 일 없으려나?


.. 선생님은 노인을 위로하며, “할아버지 안 추우세요?” 하고 묻는다. 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 퉁명스럽게 “어나”라고 대답한다. 미나마타병에 걸린 일흔네 살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그는 병에 걸려 본 적이 없었고, ‘의사선생님’에 몸을 맡겨 본 적도 없었다 ..  (54쪽)


 고이 잠든 옆지기를 그대로 둔 채 옥상마당으로 나옵니다. 눈부신 햇볕을 눈을 안 찡그리며 쬐며 섭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다고, 이불빨래 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널찍한 뒷간으로 들어갑니다. 뒷간이자 씻는방. 이 집은 겨울에 몹시 추운 대목이 얄궂지만, 씻는방이 넓어서 이불빨래하기에는 매우 좋습니다. 따순 물 쓰자면 보일러 돌리는 기름값에 땀이 비질비질 나지만, 그래도 집에서 걱정없이 씻을 수 있는 대목은 그지없이 즐겁습니다. 처음 이 집을 계약할 때에도 겨울추위가 걱정이었으나, 빨래할 때 바닥에 죽죽 펼쳐놓고 할 수 있다는 대목과 이불빨래 신나게 할 수 있다는 대목이 아주 좋았어요.


.. “그 당시 바다색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 나빠. 바다가 저리 된 줄도 모르고 참 잘도 고기잡이를 나갔네 그려. 뭐랄까, 바다가 걸쭉해졌다고나 할까……. 도대체 그때, 회사는 뭘 만들고 있었던 걸까요? 이물질이 질펀하게 떠 있는 바다를 가르고 나가면 배도 끈적끈적한 이물질로 묵직해져 오죠. 기분 나쁜 물질을 흘려보낸 게 분명해. 우리같이 머리 나쁜 사람들이야 뭐가 뭔지 모르지만, 그런 물질은 빨리 대학교 선생님들한테 가져가서 봐달라고 했어야 옳았어요” ..  (76∼77쪽)


 밟고 비빕니다. 꾹꾹 밟는 만큼 비눗물이 넘실거립니다. 깨끗한 물을 틀어서 새로 받고 또 밟고 비비고, 다시 헹구고 또 물을 받고, 또 밟고 …… 이불을 헹군 물은 씻는방 바닥에 널찍하게 뿌리면서 바닥솔로 신나게 쓱쓱싹싹 합니다. 이불을 빨 때는 씻는방 바닥 닦기도 함께 하는 셈.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면 아기를 씻기면서 이불을 빨 생각이고, 이불을 헹구면서 아이한테 솔을 쥐어주고 바닥 닦이를 시킬 생각입니다. 그러자면 적어도 너덧 해는 지나야 하겠지만.


.. “시집와서 3년도 안 돼 이런 희귀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애석타. 나 혼자서는 단추도 못 채워 … 나 다시 한 번,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부모님이 일해서 먹고 살라고 주신 몸인데. 병 같은 거 앓아 본 적이 없었는데. 난, 전에는 손이고 발이고, 어디가 됐든 끄떡없었는데 … 지금쯤이면 보리 갈 땐데. 보리도 갈아야 하고 거름도 내야 하는데 … 일 생각만 하면 맘이 맘이 아니네. 그러고 또 숭어철인데. 이렇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도, 안절부절 애가 타서 죽겄네 … 일하고 싶어라, 내 이 손발로 … 나는 세 살 적부터 배 위에서 커서, 바다는 우리 집 앞마당이나 진배없어요 … 바다에 가고 싶네 … 우리는 처음에 폐병환자 옆 병동으로 보내졌는데, 그 폐병환자들조차도 우리를 싫어했어. 미나마타에서 희귀병에 걸린 사람들이 왔다, 옮는다더라 하면서. 그러더니 우리가 있는 병동 앞을, 그 폐병환자들이 입을 손으로 막고 숨도 안 쉬고 내빼듯 지나가는 거야. 자기네가 진짜 전염병인 주제에” ..  (126∼137쪽)


 어느덧 이불빨래는 끝납니다. 물은 다 짜지 않고 고무대야에 담은 채로 밖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담벼락에 널어야 하니, 이불이 머금은 물기를 조금씩 담벼락에 쏟습니다. 담벼락을 얼추 물로 닦아낸 뒤 이불을 넙니다. 조금 뒤 이불 아래쪽을 쭉쭉 잡아당겨 물을 쪽 뺍니다. 자, 이제 제 몫은 다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오로지 햇볕한테 맡기면 됩니다.

 기지개를 켭니다. 덜컹덜컹 전철 소리를 듣다가는 아래층으로 내려옵니다. 젖은 고무신은 창턱에 올려놓아 말립니다.


..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까? 나 역시, 다른 것으로 말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 원이 없겠네. 다시 한 번 영감하고, 배를 저어 바다에 나가고 싶어. 내가 측면 노를 젓고 영감은 앞 노를 젓고. 어부의 아내가 되려고 아마쿠사에서 시집왔는데” ..  (154쪽)


 책상 앞에 앉습니다. 쓰다가 만 글을 다시 쓸 생각입니다. 너저분한 책상에 쌓인 책도 좀 갈무리를 해 봅니다. 보내야 할 편지도 마무리를 짓습니다. 오늘은 책방 나들이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아차,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다 빠졌다는 동무네 집에도 찾아가서 바람도 넣고 자전거 손질도 좀 해 주어야겠습니다. 햇볕도 좋은데, 슬금슬금 걸어가며 찾아가 볼까 싶습니다.


.. “여보, 새댁, 미나마타병은 가난한 어부가 걸린다, 그러니까 쌀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걸린다고들 하는데, 난 정말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겠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봐요, 나처럼 평생을 고기 낚는 배 한 척, 아내 한 사람, 나는 집사람 하나만을 내 여자라고 믿고 … 도쿄에는 사람 수보다 차가 더 많아서 어디 다니지도 못한다더구먼. 집도 사람도 너무 많아져서 햇빛도 제대로 안 든다면서. 그래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다 가늘디가는 버섯같이 된다대. 도쿄사람들은 그러니까 불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 들으니까 도쿄 어묵은 썩은 생선으로 만든다는데, 새댁 그거 알어? 익혀서 먹어도 식중독에 걸린다더라고. 그러고 보니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평생 신선한 생선 맛도 모르고 햇빛도 제대로 못 쐬고, 불쌍하게 살다 가겄네. 우리가 봐도 도쿄사람들은 정말 불쌍해. 도미도 청어도 물들여서 팔고 있다잖어? … 새댁, 그거 알아요? 물고기는 하늘이 주신 거라고. 하늘이 내려주신 것을 공짜로 우리가 필요한 만큼 잡아서 그날 하루를 사는 거여” ..  (179∼181쪽)


 이러는 동안 옆지기가 부시시 일어나서 ‘왜 안 깨웠느냐’고 한 마디 합니다. 그러다가 ‘깨웠어도 못 일어났을 거’라고, 몸이 많이 무겁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함께 옥상마당으로 올라갑니다. 말리고 있는 이불을 뒤집습니다. 햇볕이 아주 좋아서 저녁이 되기 앞서 다 마를 듯합니다.

 다시 전철 소리를 듣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전철 소리가 너무 큽니다. 전철 회사에 이 끔찍한 소음 공해를 따질 수 없을까 옆지기한테 이야기를 하니, 옆지기는 전철보다 아래층 도매상에서 자동도르레를 쓰면서 내는 소리가 더 크다고, 저 소리를 이 집 임자한테 따지고 싶다고 대꾸를 합니다.

 앞에서는 차 소리, 옆에서는 전철 소리, 아래에서는 도매상 도르래 소리. 여기에다가 머잖아 인천에 아시안 게임을 치른다며 온 동네를 재개발지구로 삼아서 파헤치려고 하는 쇠삽날 소리까지 하면.


.. 신문기자나 잡지사 기자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정말 많은 것들에 대해 묻는다. 그들은 메모지와 펜을 먼저 꺼내든다. ‘저, 생활수준은?’ ‘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밭은 몇 평이고 배는 몇 톤짜립니까?’ ..  (201쪽)


 아침나절에 날카로운 고양이 소리를 들었는데, 요즈막이 고양이들 발정기가 아니냐 싶습니다. 엊그제 옆동네를 거닐며 발정난 고양이를 한 마리 보았습니다. 몹시몹시 괴로워하며 날카롭게 니앙니앙니앙 하더군요.

 동네 비둘기는 우리 집과 이웃집 창턱이나 옥상 담벼락에 앉아서 구우구우 웁니다. 옛날 집 창턱은 들새가 앉기에 넉넉합니다. 빈집 창턱은 들새가 사람 걱정 없이 해바라기를 하면서 쉴 만한 터입니다. 겨울에는 힘들지만 여름에는 요 창턱에서 새근새근 잠들 수 있어요.


.. “나무에도 풀 한 포기에도 영혼은 있다고 나는 믿어요. 물고기에게도 지렁이에게도 영혼은 있다고 믿는데. 우리 유리한테는 그것이 없다니, 그게 말이 돼요?” “하아∼ 세상에 없던 병이라잖어.” “병하고는 달라요. 대여섯 살 한창 예쁠 나이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빼앗겼는데 … 유리는 이미 빈껍데기라고, 영혼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은 인간이라고, 신문기자가 그렇게 썼데요. 아마도 대학 선생님 소견이겠지요. 그렇담 여보, 유리가 뱉어내고 있는 저 숨은 대체 뭐지요? 풀이 뱉어내는 숨인가? ……” “그만 좀 해, 여보.” “안 할게요, 안 할게요. 영혼이 없는 아이라면, 유리는 무엇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  (219∼220쪽)


 저와 옆지기가 보려고 하는 황윤 감독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치여 죽은 짐승(영어로 하면 ‘로드킬’)’ 삶터를 담아낸 97분짜리 작품입니다. 영화 본 사람들 이야기와 소개를 살피면,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 나라 ‘국도’에서 치여 죽은 수천 마리에 이르는 짐승들을 몸소 찾아나서며 담아냈습니다. 자가용으로만 움직이는 분들은 잘 못 느끼고,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다녀도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시골에서 살거나 시골길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면 날마다 ‘치여 죽은 짐승 주검’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납니다. 제가 충주에서 살며 서울로 자전거로 오갈 때에는, 날마다 열셋∼스물둘에 이르는 ‘새로운 주검’을 늘 보았습니다.

 국도를 달리는 차는 빠르기를 줄이지 않아요. 100킬로미터도 아닌 120킬로미터나 140킬로미터 빠르기로 내처 달리기만 합니다. 길가에 자전거가 달리건 할매 할배가 걷건 그예 빵빵질을 하거나 위협운전을 합니다. 사뿐사뿐 다니는 운전자도 많지만, 아슬아슬 달리는 몇몇 운전자 때문에 많은 사람들 간이 콩알만해지고 옆마을 마실을 느긋하게 다니지 못해요. 그나마 짐승들은 씽씽 달리는 차에 치이면 어떻게 되는 줄 하나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치이고 밟히고 죽고. 이렇게 죽어서도 또 밟히고 자꾸 밟혀서 아예 떡이 되어 버리고.


.. 햐쿠켄 배수구가 있는 코이지섬 근처에 멸치나 미역이 이상번식해서, 채취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은 우리 마을까지 금세 전해지게 마련이다. 미나마타병 미역이라도 봄의 미각. 그렇게 믿는 나는 그 미역으로 된장국을 끓인다.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된장이 응고되어 미역 된장무침이 만들어진 것이다. 입에 넣으면 그 된장이 걸쭉하니 기분 나쁘게 잇몸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미역은 뽀득뽀득 마찰음을 낸다. ‘회사는 밤이 되면 냄새나는 기름 같은 것을 바다에 흘려보내. 밤낚시 나가서 물속에서 팔을 집어넣으면 그놈의 것이 살에 딱 들러붙는데, 끈적끈적한 것이 꼭 살갗이 벗겨지는 것 같다니까!’ 어민들이 희귀병 발생 당시에 주고받았던 말을, 나는 멍청히 입을 벌린 채 기억해 낸다 ..  (235쪽)


 국도를 자전거로 달리면서 짐승 주검을 볼 때마다, 이 짐승들은 온몸을 내던져서 ‘빠르기에 목매다는 사람들’ 앞날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고 느꼈습니다. 짐승들은 ‘우리는 이렇게 죽지만, 우리를 죽이는 너희들은 목숨 값어치를 아느냐’고 자꾸자꾸 되묻는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없이 죽어 가지만, 우리를 죽이는 너희들은 이 땅에서 얼마나 시간을 아끼고 큰차를 즐기면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고 캐묻는다고 느꼈습니다.


 (2) 삶과 전통


.. 젊은이들이 마을에, 그러니까 어부로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  (15쪽)


 가만히 생각하면, 저는 굳이 〈어느 날 그 길에서〉 같은 영화를 안 보아도 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치여 죽는 짐승’ 이야기를 여태껏 줄기차게 보면서 사람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세상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요. 막개발 삽날이 아닌 사랑스러운 동네 문화를 북돋우려고 일손을 거드는 움직임이라면,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이야기를 온몸으로 살고 있는 셈이라고도 느낍니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 우리 이웃들하고 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지금 우리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동네 문화를 꺾으려고 하는 인천시장 마음 씀씀이를 좀더 깊이 헤아려야겠다고 느낍니다. 머리로 아는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인 영화 이야기를 이웃 아주머니와 할머니들한테 해 주면서,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이끌 수 있습니다. 영화 전단지라도 몇 장 챙겨 보여드리면서 시간 날 때 영화 보러 가시라고 이끌 수 있습니다.


.. “위로금 인상이라……, 그게 없으면 목에 풀칠하기도 어렵지요. 우리 큐헤이는 병에만 안 걸렸어도 이제 어엿한 어른인데. 남자애들은 중학교만 올라가도 이 근방에선 어엿한 어부가 아니던가요. 그런데 위로금은 아직 아이라고 고작 일 년에 3만 엔 ..  (29쪽)


 그동안 치여 죽은 이들은 들짐승이요 산짐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골길에서만 들짐승과 산짐승, 때때로 시골 아지매와 할배였습니다. 한국사람 거의 모두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개발(뉴타운) 바람에 밀려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과 마찬가지’인 더 아래인 밑바닥으로 나동그라집니다.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빼앗깁니다. 서민들 사는 집터는 ‘낡고 허름하니 빨리 없애야 할 나쁜 것’이라는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 판입니다. ‘재개발 이익을 동네 주민한테 돌려 주겠다’고 한들, 우리 삶이 돈 몇 푼으로 무엇이 나아집니까. 어느 날 갑자기 천만 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만큼, 그 천만 원에 값하도록 우리는 살림터에서 떠나야 합니다. 천만 원을 냉큼 챙기는 그때 우리 집터 임자는 우리가 아니라 개발업자와 시청 공무원입니다. 천만 원에 눈이 돌아가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 앞날은 오로지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젖어듭니다. 그런데 기껏 그 천만 원으로 어디 가서 집 얻고 사나요.


.. “그런데 후생성이라고 찾아가 봤자 아무도 몰라요. 미나마타에서 왔다고 해도, 미나마타라는 데가 어디 있는 동네냐고. 규슈에 있는 벽촌으로, 지도를 꺼내서 어디 있는 데냐며 짚어 보라고 하고. 게다가 그 미나마타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있는 츠키노우라니 유도니 모도니 아무리 말해도, 상대도 안 해 주는 거라. 전혀 듣지를 않아요. 들어줘도, 도쿄사람 특유의 콧소리로, 아, 그래, 그래요? 하면서 흘려듣기만 하더라 이거예요” ..  (91쪽)


 우리 나라 ‘온산병’이나 ‘원진병’, 이웃 일본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 그리고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려서 생긴 ‘원폭병’, 우리 나라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걸리고 연탄공장 옆에 살던 사람이 걸리던 ‘진폐증’, 더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기름배 사고 들은 하나같이 우리들이 돈에 매이고 돈만 바라보면서 터져나옵니다.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는 일, 무기를 끊임없이 만드는 일, 무기 팔아먹는 일 또한 제 배만 불리고 이웃 배는 굶어도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정작 참다운 삶과 아름다운 삶에 눈을 두고 있다면, 무기개발과 군대거느리기에 그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지 말고, 사회문화와 보건복지에 아낌없이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 “바다 속 풍경도 육지하고 똑같이, 봄도 가을도 여름도 겨울도 있다우. 나는 바다 속에는 반드시 용궁이 있다고 믿어. 꿈처럼 아름다울 거야. 바다에 질리거나 하는 일은 죽어도 없어” ..  (140쪽)


 무지개를 볼 수 없다고 푸념을 하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우리가 날마다 타고다니는 자동차(대중교통까지) 문제를 먼저 풀 생각을 해야 합니다. 흰구름과 뭉게구름을 볼 수 없는 하늘을 탓하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과 종이잔부터 해서, 온갖 쓰레기를 어떻게 줄이거나 안 나오도록 살아갈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빗물을 그릇에 받아서 먹던 지난날이 그립다고 하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전기제품을 돌리면서 꾸리는 살림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면서 꾸리는 살림이어야 합니다.

 벼농사를 지어야만 땅살리기가 아닙니다. 텃밭농사를 지어야만 땅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에 눈길을 두고, 우리가 함께할 만한 일에 어깨동무를 해야지요.


.. “여보 새댁, 우리 부부는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찢어진 것은 기워 입고, 하늘이 먹여주신 것을 먹고, 조상을 섬기고, 신들을 믿음으로 받들고, 다른 사람 원망하지 않고, 남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 살아왔다오” ..  (182쪽)


 새 대통령 이명박 씨가 벌이는 ‘서울-부산 물길’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아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명박 씨가 놓으려는 ‘서울-부산 물길’ 막기에만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이명박 씨한테서 ‘서울-부산 물길’을 앗아가 버리면, 이이는 그 다음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할까요. 여태껏 돈을 들여서 공사를 벌여 더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분인데, 이분 머리에서 무슨 생각이 나오게 될까요.

 이명박 씨뿐 아니라, 이명박 씨가 거느리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이명박 씨와 이명박 씨 둘레사람뿐 아니라, 우리 나라 공무원과 개발업자들도 그렇습니다. 대한주택공사가 해 온 일이 무엇이며, 산업자원부가 해 온 일이 무엇이고, 건설교통부가 해 온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땅장사 집장사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한결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들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를 꾸준하게 말하는 가운데 ‘서울-부산 물길’이 터무니없는 생각임을 깨닫도록 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바보스럽게 살면서 바보인 줄 모르는 바보한테 우리 모두 즐거울 길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함께 아름다운 쪽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미나마타병이었다고, 죽어도 말 안 할 생각이여. 벌써 옛날에 거기를 떠나왔고, 우리 고향 미나마타라고 하면 갈 곳이 없어진다고” ..  (254쪽)


 제주 물맛이 좋아 ‘삼다수’라는 먹는샘물을 팔려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제주 물맛이 좋으면, 우리 사는 이곳에서 마시는 물도 제주섬 물맛 못지않게 시원하고 싱그러울 수 있도록 동네 삶터를 가꾸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집집마다 정수기를 들여놓고 즐기는 물맛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손으로 떠먹으면서 싱긋 웃을 수 있는 맛을 느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삶터를 찍으려고 멀리멀리 ‘깨끗한 나라’로 비행기 타고 떠나는 데에 돈을 쓰지 말고, 우리 삶터가 오래오래 아름다운 자연 삶터가 되도록 ‘돈을 이 나라 이 땅에서 쓰면서 우리 삶터를 가꾸어야’ 할 노릇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심정으로, 시민들은 골목골목이며 사거리며 텔레비전 앞에서 열을 올려가며 말하고 있었다. 미나마타병 환자 111명과 미나마타시민 4만5천 명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하는 말들이 들불처럼 확산되더니, 갈수록 대합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 ‘질소공장을 지켜라! 회사를 지켜라!’와 같은 구호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  (275, 278쪽)


 (3) 덮을 수 없는 책, 《슬픈 미나마타》


 어른들이 읽을 만한 ‘미나마타병’ 이야기책은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병》(한울,2006)과 《하라다 마사즈미-끝나지 않은 수은의 공포》(대학서림,2006) 두 권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으로는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의 붉은 바다》(우리교육,1995)가 있습니다. 세 권 모두 한 사람이 쓴 책입니다. 여기에 1927년 쿠마모토현 아마쿠사군에서 태어난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아주머니로 집안살림을 꾸리는 가운데 1969년에 펴냈던 《슬픈 미나마타》(우리 나라에는 2007년에 옮겨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에 앞서 ‘미나마타병’을 다룬 책이 더 있는가 헤아려 보면, 《구와바라 시세이/구와바라 가즈꼬 옮김-미나마타의 아픔》(을지서적,1990) 한 권이 있습니다. 제 다리품이 모자란 탓이 있을 텐데, 여태까지 제가 알아본 ‘미나마타병 이야기’를 다룬 책은 이 다섯 권이 모두입니다.


.. 미나마타병을 잊어버려야 한다면서, 결국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과거 속으로 묻어버려야 한다는 풍조, 지금도 알게 모르게 매몰되어 가고 있는 그 암흑 속에 소년만이 우두커니 혼자 남겨져 있다 ..  (31쪽)


 이 다섯 권 가운데 꾸준하게 읽히는 책은, 어린이책으로 나온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 한 가지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보도사진으로 담아낸 《미나마타의 아픔》은 일본 사회에서나 큰 울림을 이루어냈을 뿐, 한국 사회에서는 터럭만한 울림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하라다 마사즈미 님 두 가지 번역책은 적잖이 전문책이라 할 만하지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조차 거의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 어민들은 상처입고 지치고,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는 더없이 고독해 보였다 ..  (110쪽)


 그래도 아이들을 믿어 볼 수 있을까요. 어린 날부터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을 아이 가운데 하나라도 뒤엉킨 우리 세상과 뒤틀린 우리 사회를 깨달아서, 차근차근 고쳐 나가는 데에 힘을 쏟으리라 믿어 볼 수 있을까요.


.. “죽으면 나도 해부되겠지요.” 어부의 아내 사카가미 유키의 목소리 ..  (151쪽)


 교수님도 하지 않고 지식인도 하지 않으며 의사들은 등을 돌리는 가운데 기자 또한 하지 않던 ‘미나마타병 참모습 캐기’를, 집살림을 하는 아주머니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온몸으로 다부지게 부딪히면서 《슬픈 미나마타》라는 책 한 권을 여미어 놓았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병든 몸으로 혼자 살아갈 힘도 벅찬 할아버지가 옥구실 같은 동화를 수없이 남겼습니다(권정생). 동화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이 땅과 이웃 땅 들풀 같은 아주머니들이, 우리 가슴을 시리게 하는 알뜰한 이야기책을 꾸준하게 엮어내고 있습니다. 전문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평교사 한 사람이 우리 말과 글을 올곧게 추스르는 이야기책을 수없이 남겼습니다(이오덕). 평교사 한 분만큼은 아니지만 이 땅과 이웃 땅 들꽃 같은 헌책방 일꾼들이, 먼지구덩이를 파헤치고 뒤지면서 오래도록 빛이 나는 고운 책들을 꾸준하게 되살려 내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댁의 할머니도 미나마타병이 아닌가요?” 이렇게 묻기는 쉽다. 하지만 미나마타병은 문명과 인간의 존재의 의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  (205쪽)


 수은공장(질소공장)에서는 미나마타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수은공장 사장은 끝까지 ‘우리는 지역발전에 힘을 썼을 뿐이다’면서 핑계를 대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아무 책임을 안 지려고 발뺌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수은공장이 있습니다. 수은공장 못지않게 다른 온갖 공장에서는 우리 공기와 물과 흙을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쏟아냅니다. 제대로 걸러내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돌아가는 공장이 수두룩합니다. 쇠붙이 다루는 공장 옆에 1분만 서 있어 보십시오. 숨이 막히고 코가 뚫어질 듯 아픕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는 공장보다 더하다고 할 만한 공해물질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추 하나로 텔레비전을 켜고 세탁기와 전자레인지와 청소기와 에어컨을 돌리고 겨울을 여름같이 살고 있습니다. (4341.4.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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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 산하세계어린이 27
고시미즈 리에코 지음, 이시이 쓰토무 그림, 조영경 옮김 / 산하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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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46 ― 우리는 다 함께 아픔 나누며 사는 이웃
 : 고시미즈 리에코,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



- 책이름 :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
- 글 : 고시미즈 리에코
- 그림 : 이시이 쓰토무
- 옮긴이 : 조영경
- 펴낸곳 : 산하(2006.9.22.)
- 책값 : 8500원



 (1) 나와 이웃 이야기


 어제는 옆지기 태어난 날. 그제는 옆지기 동생 태어난 날. 두 사람은 하루 걸러 태어났습니다. 이런 날에는 옆지기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기쁨을 나누어야 좋으니, 먼걸음이지만 전철을 타고 세 시간 거리 나들이를 갑니다.

 제 또래, 또는 제 손아래들은 거의 모두 자동차를 굴립니다. 인천에서 일산까지 전철로 가면 돌고 돌아서 세 시간이지만, 자가용으로 가면 잘 닦인 찻길을 따라 사오십 분이면 넉넉합니다. 차를 몇 번 얻어타면서, ‘차 있는 사람은 참 좋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차를 굴리고 싶지 않습니다. 차 굴릴 돈도 없지만 차를 장만할 돈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같은 사람까지 자동차를 굴리면 우리 삶터 공기는 몹시 끔찍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 식구가 자동차 타고 움직일 일도 드문데, 하염없이 길 한켠에 멀뚱하게 세워져 있으면 얼마나 걸치적거릴까요.

 돌고 도는 전철길은 멉니다. 전철 걸상은 딱딱한 쇠붙이이거나 비좁습니다. 몇 해 앞서 전철에 불을 낸 사람 때문에 쇠붙이 걸상이 생겼습니다. 먼길을 가야 하는 사람은 두어 시간 동안 쇠붙이 걸상에 앉아야 합니다. 불지름은 전철에서만 할 수 있지 않고 비행기며 기차며 버스에서도 할 수 있는데, 오로지 전철만 걸상이 이 모양입니다. 공무원이나 나라님이 전철로 두어 시간 출퇴근을 한다면 전철 걸상을 이렇게는 안 만들 테지요. 전철역 걸상을 아예 안 놓거나 어쩌다 몇 군데 시늉으로 놓는 일은 없고요. 전철역 뒷간도 구석자리에 한 칸 겨우 마련해서 찾아가기 어렵게 하지 않을 터입니다. 세 시간 거리를 뒷간도 못 가며 꾹 참고 전철에서 버텨야 하는 노릇은 참으로 고단합니다. 가는 길에 몇 군데 역에서는 아직까지도 ‘간첩신고 안내방송’을 2분 가까이 큰소리로 틀어놓습니다.


.. “만져 보렴.” 바구니 안의 꽃잎들을 만져 보았더니 바짝 말라 있었따. “말린 꽃이에요?” “그래. 건조제랑 함게 신문지 사이에 끼워 두면 예쁜 색이 그대로 남게 돼. 하늘도 모르게 내리는 눈을 담아 두면 행복도 여기에 그대로 남게 될지 모르지.” “하늘도 모르게 내리는 눈이 뭐예요?” “흩날리는 벚꽃잎을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단다. 그 사람이 가르쳐 주었어.” 아주머니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더 있어. ‘하늘도 모르는 비’라는 게 뭔지 아니?” 아주머니가 물었다. “뭘까요? 아, 분수?” “틀렸어.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살짝 흘리는 눈물을 그렇게 말해. 예쁜 말이지?” ..  (31쪽)


 전철을 타며 책을 읽습니다. 먼저 《마음의 조국, 한국》(범우사,2002)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외로운 아이로 자랐다가 버림받아 길에서 쓸쓸히 죽을 뻔한 글쓴이는, 어느 날 재일조선인 넝마주이 할아버지가 거두어 주어서 길에서 얼어죽지 않게 되고, 스물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글(일본글)을 배워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야간중학교에 다니며 ‘무기가 되는 글과 말’을 처음으로 깨닫고는, 자기처럼 배울 기회가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 혜택을 누려야 하지 않느냐면서 ‘야간중학교’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자기 목숨을 건져준 넝마주이 할아버지 고향인 한국(조선)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는 이야기를 책 하나에 담습니다.

 용산에서 잠간 내려 뒷간에 들른 뒤, 다시 전철을 타고 종로3가, 그리고 내처 3호선으로 대화역까지. 이제는 두 번째 책을 꺼냅니다. 제국주의 일본시대부터 일제가 저지른 짓을 슬퍼하던 한 사람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쓴 글을 모은 《반달의 노래》(1977)라는 책. 글을 쓴 할머니는 쭈그렁 늙은 나이가 되었어도,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적어 놓아야 할 이야기가 많다면서 이와 같은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얼마나 많은 모습을 보셨겠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겪고 스치고 만나고 어울리셨겠어요. 좋은 만남이 있었을 테고 슬픈 만남이 있었을 테지요. 오랜 세월 겪어낸 그 이야기를 차곡차곡 풀어놓아 준다면, 지난 세월을 몸으로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이지만, 이 조그마한 책 하나를 넘기면서 눈물이 핑 돌거나 슬며시 웃음이 묻어날 수 있겠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젊은 넋과 얼한테 당신 모든 땀과 피를 책 하나에 남겨 놓습니다.


.. “결혼식 전날에 큰비가 내려서 여기 도랑이 넘쳤단다. 사진관도 물이 차서 이층에서 사진을 찍었지. 길이 온통 물바다여서, 갈 때 올 때 우리 남편이 배를 저었단다. 그게 가장 재미있었어.” “그런데 쇼고 할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전쟁을 할 때여서 그럴 거야.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남편에게 곧바로 소집영장이 왔단다. 소집영장이라는 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되어 전쟁이 나가라는 명령이야. 막 결혼을 했어도, 아기가 있어도, 병든 가족을 돌봐야 하는 형편이라도 젊은 남자라면 다른 나라 전쟁터까지 가야 했어. 그땐 그랬단다. 그래서 남자들이 모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사실은 모두 부드럽고 착한 사람들이었어.” ..  (44∼45쪽)


 전철 옆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몸을 비빕니다. 조금이라도 당신 앉은 자리가 넓기를 바라면서 옆으로 비빔질을 합니다. ‘뭐여?’ 하는 마음으로 꿈쩍을 않다가, ‘그래, 고 1센티미터가 그리도 그립더냐?’ 하는 마음으로 옆으로 옮겨 앉습니다. 책을 읽으며 웅크리던 몸이 더 웅크리게 됩니다. 덩치는 나보다 작으면서 더 넓게 앉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란, 참.

 자동계단을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계단이 아닌 자동계단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제 앞으로 슥슥 지나갑니다. ‘사람 앞으로 함부로 지나가지 말라’고 배운 적이 없을까? 젊은 사람도, 어린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다른 사람 가는 길을 그렇게 막으면서 가고 싶을까? 몇 초나 더 빨리 간다고.

 대화역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가 멎을 때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달려듭니다. 이웃사람한테 자리를 내어주고 살며시 기다리는 사람을 못 봅니다. 아주 드물에, 타는문 앞에서 법석이면서 먼저 타려고 하는 사람들 뒤에 떨어져서 맨 나중에 타는 사람을 봅니다. 백에 하나쯤? 또는 이백에 하나쯤? 모두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공질서를 배우지 않았는가.

 버스는 잘 달립니다. 참 빠르게 잘 달립니다. 굽은길을 돌 때에도 빠르기를 줄이지 않고, 정류장에 닿을 때는 확 멈춥니다. 퍽 드문드문 느긋한 버스를 만납니다. 그렇지만, 버스를 타고내리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빨리빨리 제 갈 길을 가고 싶어할 터이니, 버스 모는 분들이라고 얌전하거나 다소곳하게 차를 몰지는 못하겠구나 싶습니다.


.. “엄마는 고치에 다녀와야 해. 이모부가 강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대. 그 아들이, 그러니까 사요코한테는 이모 아들이니까 이종사촌이네. 그 아이가 충격 때문에 병이 난 거 같아.”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 결국 외톨이가 되고 말았어. 그래서 엄마는 시골에 가야 해. 알았지?” 엄마는 그 아이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다케시 오빠야?” 이렇게 묻자 엄마는 순간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  (74쪽)


 옆지기네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은 다음, 텔레비전 앞에 앉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오는 사람들이 얼굴에 화장품을 떡바르는 이야기, 예뻐 보이지만 알고 보니 뜯어고친 얼굴이구나 하는 이야기, 최진실 씨 나이가 얼마쯤 되었을까 하는 이야기, 연예인들이 혼인하고 헤어지는 이야기, 신은경 씨가 얼굴살이 쪽 빠진 이야기 …… 옆지기 어머님이 연속극을 봐야 한다며 세 군데 것을 착착착 돌리며 함께 봅니다. 세 방송사 연속극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모두들 이야기 짜임새가 같습니다. 으리으리한 비싼 집이 있는 부자집에 사는 젊은 아이 하나와 서울 변두리에서 가난하게 사는 집 아이 하나가 서로 사랑하지만, 두 집안이 기싸움이라도 하는 듯 으르렁거리면서 비꼬는 이야기. 그런데 ‘가난한’ 집이라고 해서 나오는 사람들 집크기나 살림살이나 여러 가지를 보면, 조금도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서 된장국을 먹고 홍어찜에 막걸리를 마신다고 ‘가난한 살림’이 아닐 텐데.

 태어날 때부터 외제차만 타고다녔다고 하는 부잣집 여주인공이 ‘차면 다 똑같은 차이지, 외제차는 싫고 무슨 차만 탄다는 게 어디 있어?’ 하고 꺼내는 말은 철없는 소리를 넘어서, 불쌍하다고 느껴지는 말이지만, 이런 모습은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 둘레만 알고, 이웃사람 삶은 모르며, 우리 삶터를 차지하는 훨씬 많은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에는 도무지 눈길을 두지 않고 혼자만 배부르고 넉넉하면 그만인 사람들한테 무슨 웃음 묻어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는지. 부잣집이라고 하며 나오는 사람들 집안살림은 죄다 ‘옛날 유럽 냄새’가 나는 모습이며, 스스로를 ‘공주나 귀족’이라도 되는 듯이 여깁니다. 유럽 냄새 나는 물건을 쓰고 발레를 배우고 서양 차린옷을 입으면 잘나가는 사람이 될까요.


.. “엄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알아? 그 사람이 조선을 침략해서 조선사람들의 귀와 코를 베어 오게 했다던데, 정말이야?”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아버지가 조금 화가 난 듯이 물었다. “미키네 엄마가.” “그랬구나. 흠, 조선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엄마가 아버지를 흘겨보고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사실이야. 일본에서 천하를 얻은 히데요시가 바다 건너 중국까지 자기 밑에 두려고 조선을 침략했단다 ……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것이 침략전쟁이라고 말하지 않지. 어느 나라 대통령이나 수상이나 왕도 모두 거짓말을 하면서 전쟁을 한단다 …… 중요한 것은 자신만 옳다며 싸우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 엄마가 힘을 주어 말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121∼123쪽)


 엊저녁, 옆지기가 동생과 저를 이끌고 동네 이웃 몇 곳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읽고 퍽 좋았다고 느낀 책을 선물해 주자고 해서 다섯 권을 들고 왔고, 한 집 한 집 찾아가면서 나누어 주기로 합니다. 한 집은 길에서 만나서 건네고, 두 집은 아이들만 집에 있습니다. 두 집은 비어서 못 건넵니다. 아이들만 있는 집 부모님은 어디에 가셨을는지. 아이들은 집안에 박혀서 무엇을 하며 놀는지. 아파트는 썩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제법 집이 많은데, 놀이터에 나와서 노는 아이는 없습니다. 놀이터 한켠에 마련된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녁 이맘때는 시내에 나가서 흥청망청 즐기며 노는 때인지, 또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때인지, 또는 집에서 컴퓨터나 텔레비전을 끼고 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모래밭도 있는 놀이터에서 잠깐 몸풀이를 합니다. 거님길 돌 사이사이 살아가는 개미귀신을 내려다봅니다. 새잎이 돋아나려고 하는 은행나무를 봅니다. 아직도 흐드러진 노란 꽃을 늘어뜨린 개나리를 봅니다. 개미귀신 집 옆 조그마한 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올린 민들레와 작은 들꽃을 봅니다.

 옷가게가 가득가득 모여 있는 이곳으로 자가용을 몰고 와서 옷 장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길가에 심긴 벚꽃 구경을 합니다. 벚꽃잎이 소리없는 눈으로, 따뜻한 눈발처럼 날립니다.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으면 벚꽃에 넋이 빠져서 들꽃을 그예 밟아버리겠습니다.


.. “이영동이 시노부 누나 남편의 이름인가?” 미키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아저씨의 부모님도 여기에서 일하셨나? 그래서 아저씨가 이런 노래를 만든 걸까?” 미키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미키 할아버지도, 시노부 언니 남편의 부모님도 모두 강제로 끌려와 여기서 일했을까? 왜 그런 힘든 일을 해야만 했을까? ..  (167쪽)


 아이와 함께 옷 사러 나온 젊은 부부가 벚꽃을 보다가 “사쿠라가 많이 폈네?” 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며 우리 옆을 지나갑니다. 이 집 아이한테는 벚꽃이 아닌 사쿠라가 보이겠네요. 멀찍이 지나가는 젊은 아이 아버지가 “저기 고무신 신은 사람 있네?”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립니다. 슬쩍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왜 이렇게 똥배 나온 사람들이 많어?” 하고 내뱉고 싶었으나 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 배가 꽤 뽈록뽈록입니다.

 백 군데는 훨씬 넘는 옷가게들이 장사가 될까 싶었지만, 새 옷가게는 더 늘어납니다. 앞으로 더욱더욱 늘어날까요. 연속극을 보면, 부잣집이든 가난하다는 사람들 집이든, 마루나 방 어디에도 책을 차곡차곡 마련해 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옷가지는 셀 수 없이 많고 장식품과 그림붙이는 촘촘히 걸려 있고 집은 집대로 널찍합니다. 마음은 가꾸지 않고 몸치레만 해야 돈 많이 벌고 이름값이 높아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마음 가꾸기란 우리가 눈길을 쏟을 데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책 하나 읽기 빠듯하도록 바쁘기 때문인가요. 책 하나 읽기 빠듯하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놀이를 즐기느라 그렇게 버거운가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몸은 얼마나 추스르는 우리들인가요.


.. 하지만 범인이 잡혔어도 사카모토 할아버지의 집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유키코 아주머니네 벚나무도 살아나지 않았다 ..  (204쪽)


 책이란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책은 이웃을 살피는 눈길입니다. 여태 몰랐던 일을 느끼게 해 주고, 이제껏 돌아보지 못한 세상을 가만히 돌아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멀디먼 남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보여줍니다. 얼핏설핏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삶터를 차분하게 되새기도록 도와줍니다. 집식구뿐 아니라 살가운 동무한테 일어나는 일을 팔짱낀 채 고개 돌리지 말라며 넌지시 알려줍니다. 저마다 다른 자리에 있으나 모두들 한 마을에 살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지금 우리 세상은 책하고 담을 쌓습니다. 책에 담긴 이웃사람 피땀하고 담을 쌓습니다. 책에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들 눈물과 웃음하고 담을 쌓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책으로 엮어내지 않고, 나라밖 이야기를 옮겨내기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 삶이 녹아든 책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2) 어른이 되어 가는 동안


 지금은 책을 가까이하면서 살아가지만, 어릴 적에는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지는 않아도 집에는 책이 늘 있었고, 학교에도 모자라나마 학급문고가 언제나 있었습니다.


.. 나도 미키 옆에 가만히 앉아 보았다. 창문 반대편에 큰 도로가 있는데도 차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나도 꼭 먼지를 뒤집어쓴 궤짝이나 나무상자가 된 것 같았다. 미키가 왜 여기에 있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  (47쪽)


 반공독후감과 과학독후감 따위를 한 해에 두 차례씩은 써야 해서 반공동화와 과학동화를 자주 읽어야 했습니다. 반공동화를 읽을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빨갱이는 나쁜 놈이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나아가고부터 억지스러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저녁 열 시까지 매이고, 머리는 아주 짧게 깎아야 하고, 교사들은 당구채와 각목과 밀대자루와 야구방망이를 당차게 들고 다니며 휘두르는 한편, 남학교뿐이었던 인천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툭하면 싸움질에 동무들 괴롭히기를 보면서, 북녘을 깎아내리고 못난 나라라고 헐뜯는 일이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묶어 놓으니, 따분하게 문제모음 풀이에만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신문을 읽게 되고 교과서 아닌 책을 읽게 됩니다. 추천권장도서 목록으로 뽑은 100권도 찾아서 읽지만, 이 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책을 하나하나 손수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찾아서 읽습니다.


.. 문득 시노부 언니와 손을 잡고 야시장에 오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노부 언니는 늘 미키도 데리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다 엄마들이 밤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함께 노는 일이 많았다 ..  (111쪽)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책하고 가까이 지내지 않았어도 또래 동무와 손위 손아래 형 누나 동생하고 어울리는 가운데, 또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한테 귀여움을 받는 가운데, 또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듣는 가운데(개구쟁이 짓을 많이 해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부끄러움을 배웠습니다. 중학교부터는 또래 동무 만나기도 힘들어지고, 한 반에서도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워집니다. 다른 아이들은 당구장에 나가고 몰래 술집에도 가고 사랑놀이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했지만, 저는 이런 놀음놀이가 내키지 않았습니다. 몸을 내돌리기 싫었고 마음을 망가뜨리기 싫었습니다.


..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어. 하지만 이거…….” 미키 엄마는 붉은 봉숭아꽃 몇 송이를 뜯더니 꽃잎을 짓이겼다. 그러고는 시노부 언니의 손톱 하나하나에다 꽃잎을 정성스럽게 문질렀다. 시노부 언니의 손톱은 발그레한 불빛이 켜진 듯 예쁜 붉은색이 되었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봉숭아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야. 그래서 시들어도 금방 씨앗에서 싹이 나와 한여름에 두 번씩 꽃을 피우지. 우리 고향에서는 여름이 되면 어느 집에서나 봉숭아가 가득 핀단다. 불 타듯 아름다워서 …….” ..  (127쪽)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인가, 어머니가 하는 여러 가지 부업을 형하고 거듭니다. 국민학교 때에도 거들었지만, 이때에는 신문돌리기를 거들고, 아랫집 아주머니 우유돌리기를 거듭니다. 그리고 중3 때에는 윗집 아이 과외를 해 주며 적으나마 제가 쓸 돈을 법니다.


.. 나는 꾸러미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자전거 열쇠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다케시 오빠가 빌려 왔다는 자전거에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다. ‘사요코에게. 중고이지만, 첫 월급 탄 돈으로 어제 샀어. 다케시가.’ 나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오빠……!’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오빠! 오빠! 오빠!’ 나는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 오빠, 날 두고 가지 마!’ ..  (209쪽)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나마 방학 때 하던 신문돌리기를 못합니다. 여느 날에는 중학교 적보다 오랫동안 학교에 붙잡히니 어머니 부업 거들기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한 주에 두 차례씩, 학원 가는 길에 한 시간쯤 짬을 내어 책방 나들이를 하고, 주말에 인천 시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할 때에도 서너 시간씩 옛 신문 읽기와 묵은 잡지 읽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헌책방 책맛을 알게 되어, 고2 때부터는 주말과 명절에는 헌책방에 파묻혀 책이 이끌어 주는 길로 몸을 맡기면서, 학교와 집이라는 울타리에서는 도무지 만날 길이 없는 사람들을 책을 거쳐서 만납니다.

 제가 겪을 수 없는 일을 겪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제가 보지 못한 일을 본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한 사람들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3)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라는 이야기책


 꼭 세 해에 걸쳐서 읽은 이야기책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를 덮습니다. 덮고 나서 한참 동안 숨을 길게 내쉬고 하늘을 봅니다. 옥상마당에 올라 햇볕을 쬐면서 바람을 맞아 봅니다. 넓게 펼쳐져 보이는 동네 골목집들 지붕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지금은 아직 그대로 있기에 지붕이 두루 보이는 동네 골목집들입니다. 그러나 머잖아 이곳이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또 ‘도시환경정비’라는 이름으로, 또 ‘주거환경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싹 사라져 버리면, 우리 집 옥상마당에서 수봉공원 있는 데에까지 바라보던 모습은 끝입니다. 예전에는 이 옥상마당에서 자유공원이나 인천 앞바다까지 내다보았을 터이지만, 이제는 새로 솟은 엄청난 아파트와 갖가지 건물 때문에 막혀서 보이지 않습니다. 머잖아 태어날 우리 집 아이는, 이 집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나는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보도록 하고 무엇을 느끼도록 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도록 이끌 수 있을는지.


.. ‘내가 꾼 것은 그냥 꿈이 아니야. 언젠가 어딘가에서 정말로 보고 들은 것이 보고 싶은 얼굴이 되어 나타난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꿈의 조각들이 모여들면서 하나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눈이 빨갛게 되도록 울던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요코, 이리 오렴, 안아 줄게.”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  (98쪽)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에 나오는 사요코는 곧 중학생이 되는 초등학교 어린아이입니다. 훨씬 어려서는 미처 모르고 있었으나, 식구들 가운데 자기한테만 갓난아기 적 사진이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곧잘 어머니한테 자기 어린 날을 여쭙곤 하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가끔 꾸는 꿈에 낯설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지 않은 아저씨와 오빠를 만나고, 오빠 이름을 듣습니다. 어렴풋하던 꿈속 모습은, 차츰차츰 환해지면서, 지금 자기를 길러 주고 있는 부모는 친부모가 아님을 시나브로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자기가 살아가는 조금 가난한 골목집에서 이웃사람들, 그러니까 이웃 어른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배웁니다. ‘나이에 걸맞는 슬기’를 이웃 어른들한테 익힙니다.

 그리고, 자기 친오빠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찾아와서 말없이 주고 간 선물(자전거)을 받고는, 여태껏 흐릿하게 어려 있던 자기 그림자를 또렷하게 깨닫습니다.


.. 이 작품은 내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 거리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만났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나는 그 거리에서 삶과 죽음을 보았고,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배웠습니다. 나는 그 거리만이 지니고 있던 슬픔의 깊이와 삶의 소중한 기쁨을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1960년대가 이야기의 배경이지만, 잊어서는 안 될 그 시절의 가치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  (214쪽 / 글쓴이 말)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를 쓴 분은 두 부모를 두었습니다. 낳은 부모와 기른 부모. 또한, 낮은자리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동네에서 이웃사람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이 작품,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에는 글쓴이 고시미즈 리에코 님이 ‘자기 스스로 고를 수 없이 주어졌던’ 운명대로, 그 삶대로, 리에코 님이 찬찬히 받아들인 발자취가 담깁니다. 리에코 님이 눈물로 살았다면 이 작품에 눈물이 담길 터이고, 리에코 님이 웃음으로 살았다면 이 작품에 웃음이 담깁니다. 리에코 님이 재일조선인 역사를 어릴 적부터 하나둘 들으면서 컸다면, 이 작품에도 재일조선인 발자국이 살포시 배입니다. 이리하여, 리에코 님이 ‘서울과 부산을 물길로 이으려는 정책이 거침없이 밀어붙여지는 한국땅’에서 태어났다면, 이러한 형편을 몸속 깊이 삭이는 가운데 당신 삶을 이야기책 하나로 남겼겠지요. (4341.4.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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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놓고 미처 못 읽는 책이 있습니다. 아직 사 놓지도 못해서 못 넘겨보는 책이 있습니다. 나온 줄도 몰라서 사 놓을 생각조차 못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 제 곁에 있으면서도 제 손길을 제대로 타지 못하는 책들은, 한편으로는 쓸쓸하지만 언젠가 저 아닌 다른 누군가한테 손길을 탈 수 있는 책입니다. 적어도 제가 잘 간수해 놓고 있으면 이 책은 제 살림집에서 고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사 놓지 못한 책들은 누군가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들이지 않으면서 헌책방 책시렁, 또는 새책방 책꽂이에서 조용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재고정리 하듯 찢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와 있을 텐데 아직 나와 있는 줄 모르는 책 또한 누군가 알아보고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어 눈물만 흘리고 기다리다가 고요히 잠들어 버릴 수 있어요.

 모든 책을 다 사서 읽을 수 없습니다. 모든 책을 고루 장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 힘이 닿는 데까지는, 제 눈길이 끌리는 데까지는, 제 손길이 미치는 데까지는, 제 곁에 책을 마련해 놓고 싶습니다. 제가 이 책을 하나하나 넘겨보게 되든, 짬도 없고 틈도 없어서 미처 들춰보지 못하게 되든. (4341.4.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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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에 마음쓰기 - 골목길 거닐며 우리 말 생각
 (12) 투표의 즐거움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투표하는 곳으로 곧바로 가지 않습니다. 먼저 집 앞 헌책방에 찾아갑니다. 출판사에서 보도자료로 보내준 책 세 권을 드립니다. 저한테는 쓸모가 없을 테지만, 누군가한테는 재미있는 책이 될 수 있겠지요. 어제 들렀던 막걸리집으로 갑니다. 잔돈이 없어서 이천 원을 치르지 못하고 나왔기에 오늘 드리러 갑니다. 가게 문이 닫혀 있습니다. 아직 안 여시는 듯합니다. 창영초등학교 옆 분식집 앞을 지나갑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오늘은 학교가 쉬니까 학교 앞 분식집도 쉽니다. 백 해가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학교 건물 옆에 조촐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를 봅니다. 언덕배기를 지나고 나오는 골목집마다 대문 위며 울타리 앞과 위며 꽃그릇이 가득 놓여 있습니다. 꽃그릇마다 새줄기가 솟고 새잎이 돋습니다. 노란 꽃과 잇빛 꽃과 발그스레한 꽃이 올망졸망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릅니다만, 보기에 좋아서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 투표의 즐거움은 물론! 다양한 문화체험까지∼ (열여덟째 국회의원 뽑기를 하면 한 장씩 나누어 주는 ‘투표확인증’에 적힌 말)




 빈 차가 서 있지 않으니 널찍하게 느껴지는 골목을 걷습니다. 동사무소 가는 간판이 서 있습니다. 아차, 이제는 ‘동사무소’가 아니지요. ‘주민센터’이지요. 동사무소 이름에 영어를 섞어서 쓰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전국 동사무소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간판이 바뀌고 푯말이 바뀌고 길그림이 바뀝니다. 이름 하나 갑작스레 바뀌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갑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에다가! 온갖 문화를 누리기까지∼




 걷다 보니 어디선가 밥 냄새가 나는 듯. 뭔가?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살피니, 아하, 금창동 사무소 앞에 뻥튀기 차가 서 있군요. 뻥튀기 냄새가 온 골목에 퍼지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골목 안쪽 꽃그릇에 이팝나무 한 그루 조그맣게 자라고 있습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도심지 한복판에 있는 헌 꽃그릇에 자라는 이팝나무라니! 볕을 얼마 못 쐴 듯한 자리에 자라는 이팝나무.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사진 한 장에 살그머니 담습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 더하기! 듬뿍듬뿍 맛보는 문화∼

 동사무소 계단 앞입니다. 굴렁걸상을 밀어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옆으로 나 있기는 한데, 이런 계단을 왜 만들어야 했을까 잠깐 생각합니다. 계단 없이 살짝 비알을 주기만 해도 빗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을 텐데.

 계단을 하나 둘 셋 밟고 들어섭니다. 문간에 풍선으로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투표하는 곳에 풍선문이라, 국회의원 뽑기를 동네잔치로 즐기자는 소리일 테지!




 신분증을 보여주어 표를 받고, 흰종이와 푸른종이를 한 장씩 받은 다음, 6번과 13번을 꾹꾹 누릅니다. 반으로 접어서 흰상자와 푸른상자에 넣습니다. 앞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종이 한 장을 건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쓸 수 있다는 ‘투표확인증’입니다. 주차장에서도 쓸 수 있다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책방에서는 쓸 수 없군요.

 투표확인증은 주머니에 쑤셔넣습니다. 둘레를 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투표확인증을 한 손에 들고 휘저으면서 걸어다닙니다. 이분들한테 이 투표확인증을 쓸 자리가 있을는지? 차 없는 사람은 어디에 쓸는지? 아, 우리 동네에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있으니 거기서 쓸 수 있을 텐데, 그곳은 어른 한 사람이 500원인데. 뭐, 동네에 미술관이라도 있고(창영동에는 ‘스페이스 빔’이 있으나 거의 다 공짜이니 쓸 수도 없군!), 박물관이라도 있어야지. 우리 나라에 지정문화재가 얼마나 있다고, 그와 같은 곳에서 쓰나? 국립공원 들어가는 삯도 2007년부터는 사라졌는데, 차라리 극장값 깎아 주기라도 하든지.




 한낮에도 전기를 켜 놓아야 하는 동사무소를 나오니, 바로 앞은 기와집. 기와집 안쪽 마당에는 우람하게 자라난 목련나무 한 그루. 하얀 꽃이 사랑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에 길너비 50미터가 넘는 끔찍한 산업도로를 내 버리면, 이 기와집은 문화재도 뭣도 아닌 ‘낡아빠지고 지저분한 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아파트로 바뀔 테지요. (4341.4.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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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배영사 교육신서 36
성내운 / 배영사 / 1988년 9월
평점 :
절판




성내운 씀, 《다시, 선생님께》


 국회의원 선거를 코앞에 둔 어젯밤, 우리 동네 후보 가운데 한 분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 동네 이웃으로 지켜보았을 때, 지난 여러 해 동안 동네일을 부지런히 하던 분이지만, 지지율은 높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다른 후보 사무실로 전화를 넣습니다. 이분들이 그동안 무엇을 말해 왔고 무슨 정책을 내놓고 있는지 알아봅니다. 신문기사를 훑고 후보자 인터넷방을 살펴봅니다. 진보를 말하는 정당 후보를 빼놓고는, 모두들 ‘돈 들여서 개발하는 공약과 정책’으로 가득합니다. 돈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공약과 정책은 없습니다. 동네 재개발, 항구 개발, 인천 지하철 이야기는 있으나, 동네사람들 삶과 문화와 복지를 헤아리는 눈매와 손길은 없습니다.

 수백 또는 수천이라는 억을 들여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짓는다고 문화나 복지가 넉넉해지지 않습니다. 아시안경기를 치른다며 큰 운동장 수십 곳을 지어 놓는다고 생활문화나 복지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쉼터가 없다면.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 느긋한 어울림터가 없다면. 도서관을 짓는 데에 100억을 들여도, 책을 사서 갖추는 돈으로 1억도 안 쓰거나 못 쓴다면. 문화회관을 짓는다고 200억을 들여도, 동네 골목길에서 배드민턴 칠 만한 자투리땅이 없다면.

 1000원짜리 막걸리를 한 병에도, 650원짜리 라면 한 봉지에도, 100원짜리 소시지에도 세금이 붙습니다. 이 세금으로 공무원과 국회의원과 대통령 일삯을 치릅니다. 새 찻길을 닦든 새 아파트를 올리든 새 철길을 깔든 새 도시를 만들든,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이루어냅니다. 법원과 경찰서도 세금으로 꾸리고, 군인과 전경도 세금이 없으면 둘 수 없습니다. 서울부터 인천까지 내려는 물길과 서울부터 부산까지 내려는 물길도 우리들 주머니에서 거둔 세금으로 내야 합니다. 끊임없이 토목공사를 하면, 틀림없이 일자리는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는 어떤 돈으로 일삯을 치러 주는 자리인가요.

 책시렁을 뒤져서 《다시, 선생님께》(성내운 씀,배영사 펴냄,1977)라는 조그마한 책을 뽑아듭니다. 세월이 흘러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안타까움, 세상이 바뀌어도 다시금 꿈틀거리는 슬픔을 가슴속에 접어 두고 읽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머니도 교사입니다. 아니, 어릴수록 어머니야말로 교사입니다. 한 어린이를 두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 셈이지요.(113쪽) …… 학생에게 학습을 보장하자고 교단에 선 교사이지, 교사에게 교과서 떼게 하고 월급을 보장하자고 앉아 있는 학생들은 아닌 것입니다.(153쪽)”

 한 표를 얻자고 길거리에 나선 국회의원 후보들은 책 한 권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예비후보 경선을 치렀을 때에는 책 넘길 틈이 있었을까요. 선거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하던 때에는 책 구경할 짬이 있었을까요. 선거를 마친 다음에는 책방이나 도서관 나들이를 할 만한 느긋한 마음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4341.4.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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