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데기 죽데기 (컬러판) - 작은 등불 1
권정생 지음 / 바오로딸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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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45 ― 내 몸이 아파서 내 이웃한테 사랑을
 : 권정생, 《밥데기 죽데기》를 읽고



- 책이름 : 밥데기 죽데기
- 글쓴이 : 권정생
- 펴낸곳 : 바오로딸(1999.8.10.)
- 책값 : 5500원



 (1) 사람 삶이란


 이웃에 사는 양조장 할머님이 당신 삶을 조곤조곤 풀어냅니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 있을 때에도 당신을 괴롭히더니, 병이 들어서 욕창까지 다 씻어 주고 닦아 주고 하는 짓을 열다섯 해나 해야 되느냐고. 참으로 괴롭고 못살겠다고 마음앓이를 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문득, 욕창을 닦아 주는 당신보다도 아무 소리 못하고 몸에 욕창이 나며 드러누워 있는 저이가 더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신이야 몸에 욕창이 날 일 없고, 힘겨우나마 당신 삶을 이끌어가지만, 병자리에 누운 사람은 그저 아기처럼 받아먹고 씻김받으면서 지내야 하는데, 정작 불쌍하고 괴로운 사람은 누구이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이 약초는 아주 깊은 산에서 캔 것이니 딴 데 것보다 갑절은 받아야 하오.” 할머니는 아주 당당하게 값을 정했습니다. “하지만 약초 값이 지난 장날보다 떨어졌습니다.” 장사꾼도 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줄 건가요?” “삼만 원 드리지요.” “싫소. 오만 원은 받아야 하오.” “삼만 원도 비싼데 오만 원을 달라면 이 물건 팔기는 글렀어요.” “오만 원도 싼데 삼만 원이라니 당신 이것 사기는 글렀소.” 할머니도 지지 않고 맞받았습니다 ..  (9쪽)


 그제, 도서관에 ㅈ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님이 찾아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해묵은 사진첩을 함께 넘겨봅니다. 박정희 독재정권 때 왼팔 노릇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 집안에서 나온 사진첩입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던 권력을 누리던 ㅈ씨 집안에서 사진첩이 세 상자 나왔고, 저는 이 가운데 셋째 상자를 헌책방에서 장만했습니다. 앞 두 상자에는 어떤 사진이 깃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셋째 상자를 열어 보았을 때, ㅈ씨가 어떤 모습과 매무새로 권력 단맛을 실컷 누렸는지 남김없이 드러납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스무 권이 넘는 사진첩 가운데에는, 1960년대 국가대표 테니스 여자선수를 시골로 불러서 시범경기를 치르고 저녁에는 술잔치를 한 다음, 이튿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사진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사진 옆에는 ㅈ씨 비서가 빼곡한 글씨로 권력 앞잡이를 우러르는 말을 달아 놓습니다.

 그러나 ㅈ씨는 이제 죽어서 이 땅에 없습니다. ㅈ씨 딸아들은 이 땅에 있을까요. 이 땅 어디메쯤에서 아버지 권력을 물려받아서 한 자리 큼직하게 차지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당신 아버지 발자취가 물씬물씬 담긴 이 사진첩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나라를 떴을까요.


.. “똥통에서 한 달 만에 건져내어 이번에는 깨끗한 개울물에 한 달 동안 담가 뒀지. 아무리 원수를 갚아야 할 달걀귀신이지만 물처럼 깨끗하고 정직해야 하니까. 너희는 그러니까 저 흉측한 인간들처럼 비겁하거나 더러워서는 안 된다. 원수를 갚아도 정당하게 갚고 깨끗하게 행동해야 한다, 알았지?” “예!” “예!” 밥데기 죽데기는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16쪽)


 포근한 사월 날씨를 느끼는 하루하루입니다. 삼월 들어 확 풀렸던 날씨가 이레 남짓 다시 쌀쌀해졌으나, 사월을 넘기면서는 내내 포근합니다. 비를 뿌린 뒤에도 따사롭고 먹구름이 끼었다가 걷히는 날에도 따뜻합니다. 동네 골목길 꽃그릇에 늦철쭉이 피어 있고, 벚꽃도 흐드러지려고 합니다. 손바닥 만한 텃밭은 골골이 잘 갈려서 나물씨가 심기고, 벌써 새싹이 오른 텃밭도 보입니다.

 이제는 옥상마당에 책걸상을 올려놓아도 되겠구나 싶어서, 아침나절에 책상 하나 걸상 둘 올려놓습니다. 저는 도서관을 지키고 옆지기는 옥상마당에서 햇볕을 쬐면서 글을 씁니다.

 한참 일을 보다가 어깨가 뻑적지근해서 살림집으로 올라갑니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이불 빨래를 하나 담가 놓은 뒤 웃도리 빨래 하나를 해치웁니다. 탁탁 털어서 옥상마당 한쪽에 걸어놓습니다. 햇볕이 좋아 금세 마르겠습니다.


.. 할머니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순경 아저씨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오십 년 전에 죽은 걸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세요?” “오십 년 전에 죽은 건 아무 소용 없다는 거요?” “아무리 흉측한 살인범도 삼십 년만 지나면 시효가 끝나 버립니다.” “시효가 뭐요?” ..  (44∼45쪽)


 덮고 자는 이불 한 채를 방에서 꺼내어 담벼락에 널어놓습니다. 담벼락 한쪽에 비둘기똥이 굳어 있습니다. 깨진 벽돌을 주워서 북북 벗겨냅니다. 마지막으로는 손바닥으로 쓱 닦습니다. 이불을 얹고 벽돌 둘을 올려놓습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전철이 건너편으로 지나갑니다. 나도 듣고 옆지기도 듣고 배속 아이도 듣는 전철 소리입니다.

 그제는, 옆지기 배속에서 자라는 아이가 발차기를 해서 밤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어제는 아직 발차기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배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지어미가 따순 햇볕을 받으면서 느긋하게 봄날씨를 즐기고 있는 동안에는, 작은 목숨붙이도 따순 햇볕과 봄날씨를 느긋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 사는 동네에 공장이 많아서 공장 매연을 우리들이 쐬어야 한다면, 우리 어린 목숨도 이 공장 매연을 쐬어야 합니다. 우리 사는 마을에 자동차가 많이 드나들어서 자동차 빵빵 소리와 배기가스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 어린 목숨도 이 빵빵 소리와 배기가스를 남김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버섯과 시금치를 볶고 무쳐서 먹은 아침밥은 우리한테 피와 살이 되는 한편, 새로 자라나는 아이한테도 피와 살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터전에서 맑은 바람을 쐬고 밝은 햇볕을 쬘 수 있다면 어린 목숨한테도 맑은 바람과 밝은 햇볕이 스며들 테고, 지금 우리가 디디고 지내는 이 땅에서 매캐한 바람과 찌뿌둥한 햇볕만 쬘 수 있다면 어린 목숨한테도 매캐함과 찌뿌둥함이 고이 파고들 테지요.


.. 늑대 할머니는 울고 있는 할머니 손을 꼭 잡았습니다. 늑대 할머니가 이렇게 사람 손을 따뜻하게 잡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할머니들이 이런 일을 숨기고 있다가 몇 해 전부터 세상에 알렸지요. 못된 짓을 한 일본 군인들을 고발하고 원수를 갚고 싶었지요. 하지만 지나간 일이 그리 쉽게 되나요. 거리에서 할머니들이 깃발을 들고 일본이 저지른 못된 짓을 사과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들은 척도 않고 있어요.” “맞아요, 원수 갚는다는 건 쉽지 않아요.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하면 당한 사람만 가슴에 한을 품고 살 수밖에 없어요. 아아, 이제 알았어요!” ..  (122쪽)


 아침을 먹다가 생각했습니다. 어제 송현시장에 가서, 버섯 한 근 이천 원에 시금치 천 원어치를 장만했는데, 어제 저녁밥과 오늘 아침밥으로 버섯은 다 먹고, 시금치는 반쯤 남았으니 두 사람 먹는 한 끼에 천 원쯤 치였나. 가스와 물과 쌀을 빼고, 나중에 숟가락 하나 더 놓아야 한다면 한 끼니에 얼마쯤 치이게 될까.

 봄부터 가을까지는 여러 가지 나물을 실컷 즐기면 되고, 올겨울에는 어떤 푸성귀로 밥거리를 삼으면 좋으려나. 천기저귀 얼마쯤은 이웃집 할머니가 선물해 준다고 했지만,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중앙시장에서 기저귀천을 떼어와야겠고, 앞으로는 빨래가 세 사람 몫일 테니 비누도 많이 들겠지. 겨울에는 보일러를 돌려야 할 텐데 올겨울 기름값은 더 올라갈 텐데, 지금이라도 일찌감치 기름을 받아놓아야 할까.

 오늘 날아온 전기값 고지서를 보니 3층 도서관은 51kw 3630원, 4층 살림집은 50kw 3610원. 겨울에는 냉장고를 안 돌려도 되었지만 이제 슬슬 돌려야 할까. 아니, 올해에는 여름에도 아예 냉장고 없이 나 볼까. 그런데 냉장고를 돌리지 않으면 된장은 어찌하지. 된장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지금은 옆지기가 밥을 하면 나는 빨래를 하면 되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밥과 빨래를 혼자 맡아야 할 텐데, 기저귀 빨래를 밀리지 않고 해낼 수 있을까.


.. “헤어지기 싫으면 우리하고 같이 솔뫼골로 가서 살자꾸나.” 늑대 할머니가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솔뫼골엔 가고 싶지 않아요.” “왜 싫으냐? 이 시끄러운 서울보다는 훨씬 좋지. 거기는 자동차도 없으니 차에 치으는 일도 없고, 땅을 갈고 열심히 농사지으면 먹을 걱정 안 해도 되고, 공장 같은 데서 쫓겨나지 않아서 좋고.” 늑대 할머니가 이렇게 점잖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는 아직 서울에서 할 일이 있어요.” ..  (137쪽)


 이웃집 할머니들 이야기를 곰삭이고, 옆집 아주머니들 젊었을 적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 어머니 젊었을 적을 떠올려 봅니다. 세탁기가 있다고 해서 집일을 덜지 않습니다. 세탁기가 옷을 더 깨끗이 빨아 주지 않으면서 물과 전기는 물과 전기대로 많이 먹습니다. 우리 두 식구, 앞으로 세 식구는 먹을거리를 쟁여 놓고 먹는 사람이 아니라 그때그때 시장 나들이를 하면서 바구니 반쯤 채울 만큼만 푸성귀를 사다가 먹으니, 잘하면 도시에서도 냉장고 없이 거뜬히 보낼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기 옷이 걱정이지만, 송림동에 있는 재봉틀집에 가서 발디딤 재봉틀이 얼마쯤 하는지 여쭈어 보고, 형편이 되면 들여놓을 생각입니다. 우리가 입던 옷을 치수 줄여서 아이한테 입히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기를 키워낸 동무한테 얻어도 되고. 무엇보다도 겨울에 몹시 추운 집을 따뜻하게 해 주는 일이 근심인데, 옷상에 작은 툇마루 같은 칸막이를 하나 만들어 볼 수 있을까. 벽에 스티로폼을 두 겹으로 대어 볼까. 바닥에도 스티포롬을 깔고 깔개나 담요를 얹어 볼까. 창문을 모두 틀어막고 지내야 할까.


 (2) 사람과 사람 아닌 목숨


 새끼 길고양이를 거두어서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다가, 어느 만큼 자라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다고 느껴지는 때에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산업도로 예정터라며 파헤쳐 놓은 땅에 수풀이 우거져 있고, 동네사람들 마음씀이 너그러워서 길고양이들마다 살이 토실토실합니다. 동네 밥집에서는 남은 밥을 따로 그릇에 담아서 길고양이한테 주기도 합니다.

 골목을 걷다 보면, 마주오는 길고양이를 으레 만납니다. 깜짝 놀라며 자동차 밑으로 기어드는 녀석이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길가 여느 집 대문 밑으로 들어가는 녀석이 있습니다. 총총총 발걸음을 옮기며 샛골목으로 접어드는 녀석이 있고, 껑충 지붕으로 뛰어올라간 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녀석이 있습니다.

 길개는 드물고 길고양이가 많습니다. 우리가 풀어놓은 길고양이를 다시 만나기도 하는데, 길고양이답게 흙먼지를 온몸 가득 뒤집어쓴 채로 돌아다닙니다. 길고양이 주검은 아직 구경하지 못했는데, 길고양이는 어디에서 깃을 들이고 어디에서 숨을 거두고 있을는지.


 .. “이 세상 인간들이 우리 짐승들을 어떻게 했는지 아니? 활로 쏘아 죽이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덫을 놓고 독약을 놓고 산 채로 잡아다 우리 안에 가둬 놓고 잡아먹고 부려먹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있단다.” “……” “너희는 아직 몰라서 그렇지, 내일이라도 나하고 현장에 가면 그걸 알 수 있을게다.” ..  (20쪽)


 틈을 내어 서울 나들이를 할 때에도 길개나 길고양이를 보곤 합니다. 서울도 동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쩐지 서울에서 살아가는 길개나 길고양이는 가엾어 보입니다. 인천에서 갈매기와 함께 하늘을 누비는 비둘기와 달리, 서울에서 땅걸음만 디디는 비둘기를 보노라면, 얘야, 너도 우리 동네로 와서 살지 않으련? 하고 부르고 싶습니다. 틀림없이 먹을거리는 서울이 넘칠 테고, 버려지는 밥찌꺼기도 많을 텐데, 그냥 쓰레기차가 주욱 실어가기만 하나요.

 밥그릇을 나누는 일이 평화이고, 밥그릇을 혼자 차지하는 일이 전쟁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밥그릇 나눔이란, 다 먹지 못해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밥그릇 독차지는 홀로 다 먹지 못하고 버리면서도 이웃과 나누지 않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남녘사람은 남녘사람대로 홀로 다 먹지 못하고 음식물쓰레기로 버리면서 북녘사람하고 밥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남녘사람끼리도 밥그릇을 나누지 않고, 한뎃잠을 자는 떨꺼둥이한테도 밥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한뎃잠은 아니지만 달셋방에서 쪽잠을 자는 가난이한테도 밥그릇을 나누는 일이란 드뭅니다. 죽어 흙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돈을 두 손에 움켜쥐고 돌아간다고. 이웃들한테 기꺼이 나누어 주는 자기 재산은 세금공제도 된다고 하는데, 그냥 세금 더 내면 내지 이웃나눔은 달갑지 않은 일인지.


.. “그래요. 그렇게 많은 짐승들이 죄없이 죽었으니 슬픈 일이죠.” “그런데 어째서 그 사마귀 할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란 거죠?” “그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라는 건, 그렇게 나쁜 짓을 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고 계시니까요.” “?” “세상엔 그보다 더 끔찍한 죄를 짓고도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큰소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뭐, 아무리 뉘우친들 죽은 짐승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  (81쪽)


 지난해 우리 집 옥상마당 담벼락에 까마중이 자라서, 우리 집에 놀러온 사람한테 입가심거리가 되기도 하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참새나 비둘기한테 먹이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옥상 담벼락만이 아니라 창턱에도 까마중이 자라던데, 올해에도 씨를 뿌려서 옆자리에 새로운 풀줄기를 올릴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귤이나 양파 따위를 벗기며 나오는 껍데기를 모아서 옥상 한켠에 쌓아놓습니다. 나중에 거름으로 만들려고. 동네 비둘기들은 요 껍데기더미로 찾아와 자기한테 먹이가 될 만한 것이 있는가 콕콕 집곤 합니다. 저 비둘기들을 생각해서 껍데기더미 옆에 헌 그릇 하나 놓고 쌀 한 줌씩 올려놓을까 싶습니다.


.. “에고 답답해라. 그래, 그런 길고 복잡한 역사 같은 건 그만두고, 그래, 남한 군인하고 북한 군인하고 누가 못된 짓을 했냐?” “그게 말이에요, 누가 잘못한 걸 설명 못 해요. 사람들은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더 힘이 센지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 알았다!” ..  (129쪽)


 인천시에서 산업도로를 닦는다며 밀어놓은 땅 한켠에 동네 분 누군가가 울타리를 치고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지난주에 요 텃밭을 보았습니다. 줄맞추어 곱게 갈아 놓은 텃밭을 보면서, 이 골에는 무엇을 심고 저 골에는 무엇을 심었을까 궁금합니다. 파헤쳐진 한쪽 귀퉁이에 또 어느 분이 다른 텃밭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로도 가 보고 그분은 무엇을 심었는가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두어 평쯤만 땅을 일구어 콩이라도 심어 볼까 생각해 봅니다. 자동차 있는 동네 분들은 이 너른 터를 주차장처럼 쓰고 있는데, 주차장으로 쓰기보다는 동네사람 너도나도 찾아들면서 텃밭으로 일구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이따가 시장 나들이를 할 때 자리를 한번 봐야겠습니다.

 시장 나들이를 하는 김에 송림초등학교 옆길로 가면서, 그곳 골목집 앞에서 기르는 해바라기밭에 올해도 해바라기를 심으셨나 살펴봐야지요.


 .. “아니에요, 저는 사람보다 늑대가 더 좋아요. 훨씬 착하게 살고 있잖아요.” “자꾸 그런다고 내가 속을 줄 아니?” “정말이에요. 늑대도 그렇고 너구리도 오소리도, 산에 사는 짐승들은 사람들처럼 총도 안 만들고 폭탄도 안 만들고 전쟁도 하지 않잖아요. 자동차도 안 만들고 학교도 없고 교회당도 절간도 안 만들어도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잖아요.” “……” “쓰레기도 안 버리고 농약도 안 치고, 모두 깨끗하게 살고 있어요.” ..  (141쪽)


 (3) 《밥데기 죽데기》라는 이야기책


 지난해 봄 5월 17일에, 경상북도 안동땅에 살던 권정생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찾아간 하늘나라는, 할아버지 어머님이 먼저 가 계신 하늘나라이고, 할아버지 형제들이 먼저 찾아간 하늘나라입니다. 할아버지 살던 마을에 함께 살던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찾아갔던 하늘나라이며, 할아버지네 집 앞 마당에 자라던 푸성귀가 할아버지 밥거리가 되면서 찾아간 하늘나라이기도 합니다.

 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토끼가 하느님처럼 이슬과 바람만 먹으면서 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뒤 찾아간 하늘나라입니다. 한 핏줄 한 겨레를 넘어서 한 식구요 한 이웃이며 한 동무였던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미워하고 손가락질하면서 다 함께 찾아간 하늘나라입니다. 할아버지가 찾아간 하늘나라는 우리들이 아직 발을 붙이고 있는 땅나라처럼 싸움이 없을까요. 다툼질이 없을까요. 빼앗음과 괴롭힘은 없을까요.


.. “안 되겠어요. 119에 알려야겠어요.” 할머니는 도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산동네 이웃들이 또 바빠졌습니다. 모두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꺼번에 바빠지는 것입니다 ..  (85∼86쪽)


 권정생 할아버지는 몸은 몸대로 힘겹고 마음은 마음대로 무거워서, 여느 사람들처럼 연필을 손에 쥐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댁에 찾아온 손님하고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면 그예 힘이 다 빠져서 그 뒤로 하루 내내 죽은 듯 쓰러져서 쉬어야 겨우 일어날 힘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늙고 아픈 이한테 한 말씀 올리는 이보다 한 말씀 얻으려는 사람이 훨씬 많아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때까지도 고달프게 보냈습니다.

 원고지 한 장 채우는 데에 꼬박 하루를 들여도 힘들다고 하셨는데, 할아버지한테 힘이 넘쳐서 날마다 원고지 열 장씩 채울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처럼 우리들이 웃음과 눈물로 가슴으로 담아내고 받아들이는 이야기책에 몇 권이나 나왔을까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힘이 넘치고 아프지도 않은 권정생 할아버지한테는 아무런 이야기책이 못 나오지는 않았을까요.

 내 몸이 아프면서 내 이웃 아픔을 느끼는 삶이었기에, 내 몸이 무너지면서 내 이웃 무너짐을 깨닫는 삶이었기에, 힘들고 벅찬 마지막때까지 피를 뱉으면서 원고지 한 칸 두 칸을 채워 나갈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밤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울긋불긋 반짝이는 불빛이 눈이 부시게 예뻤습니다. “서울의 불빛이 참 예쁘지?” “정말 예뻐요.” “먼 곳에서 보니까 그런 거야.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 속에서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잖니?” “……” “지금도 어둡고 추운 지하철 시멘트 바닥에서 떨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  (160∼161쪽)


 더 많은 글도 좋고 더 많은 책도 좋습니다. 더 많은 돈도 좋으며 더 많은 이름값도 좋습니다. 더 많은 물질문명과 더 많은 전기제품도 좋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누리는 우리들은 서로서로 얼마나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달콤하게 와닿는 좋은 것을 혼자서만 많이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는가요. 나한테 달콤하다면 내 이웃한테도 달콤할 텐데, 이웃과 함께 달콤함을 맛보기보다는 홀로 달콤함에 푹 젖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달콤함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씁쓸함과 서운함과 안쓰러움과 고달픔이란 무엇인지 잃어버리거나 놓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못 느끼는 씁쓸함과 서운함 들을 내 이웃이 온통 떠안고 있지는 않은지요. (4341.4.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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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3 ― 할머니한테 듣는 ‘사람 사는’ 슬기
 : 타샤 튜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책이름 :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글 : 타샤 튜더
- 사진 : 리처드 브라운
- 옮긴이 : 공경희
- 펴낸곳 : 윌북(2006.8.20.)
- 책값 : 9800원



 (1) 비와 술과 골목가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저녁입니다. 이제 막 여섯 시를 넘겼는데 날은 꽤 어둡습니다. 매지구름이 짙게 깔렸습니다. 이번 비는 지난주에 내린 비처럼 차갑지는 않습니다.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참말로 봄을 부르는 비로구나 싶습니다.

 봄내음 맡으면서 밟아 줄 흙이 없는 도시이지만, 나긋나긋한 바람을 느끼면서, 집에서 가까운 송현시장으로 걸어가 보면, 아주머니랑 할머니랑 차려놓은 고무다라이에는 풋풋한 봄나물이 가득가득. 찬거리로 무엇을 살까 망설이다가 나물다라이 앞에 멈추자, 나물집 아주머니는 “이거는 냉이고, 이거는 진달래고, 이거는 취나물이고 ……” 하면서 하나하나 알려줍니다. 이름을 알아보는 나물이 있지만, 언뜻선뜻 아리송한 나물이 있는데, ‘젊은이가 고것도 모르남?’ 하는 투는 조금도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가르쳐 주듯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 1830년대의 미국인들은 젊은 조국에 대해 열등감을 지녔다. 그들은 유럽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나라면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보면 안다. 이 순결한 나라를 상상해 보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밑에 덤불이 자라지 않는 숭고한 나무들, 순수한 강과 호수, 하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숲을 없애버렸다. 나무는 사람들의 적이었고, 땅을 개간하느라 거대한 뿌리와 밑동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에 자욱했다. 우리 국민은 받은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다 ..  (130쪽)


 시장을 죽 둘러보니 봄나물을 이곳처럼 가지가지 늘어놓고 파는 데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사고, 앞으로도 이 집에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묻습니다. “어떻게 주세요?” “한 근에 1500원씩이요.” “음…….” 무슨 나물을 할까 망설입니다. 쑥을 할까? 냉이를? 홑잎나물을? 그래도 이때 아니면 먹기 힘든 나물을 먹자는 생각으로, 진달래 한 근과 냉이 한 근, 취 천 원어치를 삽니다. 취나물은 천 원어치만 사는 데에도 거의 한 근만큼 담아 줍니다. 가만히 보면, 한 근어치 산 다른 나물도 말이 한 근이지, 아주머니가 저울도 안 달고 담아 주는 품새가 한 근 반이나 두 근쯤 될 듯.


.. 20∼30년 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  (34쪽)


 집으로 돌아와서 옆지기하고 나물무침으로 밥을 먹습니다. 큰 그릇에 된장을 비벼서 나물밥을 먹습니다. 취나물은 물에 씻어서 그냥 먹습니다. 물에 씻을 때 보니, 나물집 아주머니가 먼저 손질을 깔끔하게 해 두셨습니다. 흙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득, 한 근 천오백 원은 무척 싼값이 아니냐 싶습니다. 봄철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나물을, 하나하나 손질해서 파는데, 아주머니 품삯을 헤아리면 다문 500원이라도 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 어머니와 오빠는 내가 중요한 일에 무관심하자 몹시 실망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 청년 연맹(상류 여성들의 사회봉사 단체)’과 ‘빈센트 클럽’을 심드렁해 했으니까. 보스턴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도 그렇고. 난 오로지 정원에서 일하고 소젖을 짜고 싶어했다 ..  (42쪽)


 냠냠짭짭 맛나게 밥을 먹다가 또다른 생각이 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주머니는 저한테 내내 높임말을 쓰셨습니다. 아주머니 나이를 헤아리면 저는 아들 뻘일 텐데, 아들도 맏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쯤 될 텐데, 어쩌면 손주를 본 할머니일지 모르는데.

 아주머니는 당신 나물집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한테 높임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또한, 나물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젊은내기한테도 높임말로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저 돈 몇 푼으로 사먹을 줄은 알아도 손수 들판이나 산으로 가서 뜯거나 캐어 먹을 줄 모르는 우리들 젊은내기를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나, 귀엽고 애틋하게 돌아보아주는 마음결은 아니었을까요.


.. 나는 개들을 제대로 먹이려고 무척 애를 쓴다. 깡통에 든 사료는 먹이지 않는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녀석들에게 집에서 만든 수프나 염소 고기를 먹이고, 마늘을 듬뿍 먹게 한다 ..  (56쪽)


 우리 집 둘레에는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골목마다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는 열한 군데? 아니 큰길 건너편까지 치면 열다섯? 열일곱? 스물? 걸음이 닿는 데까지 치면 서른이나 마흔 군데가 넘습니다. 전철역 둘레까지 치면 쉰 군데도 넘고 예순 군데, 아니 백 군데까지 헤일 수 있을 만큼 아주 많습니다.

 이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 하나 낸 듯한’ 가게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님들 사는 집에서 방 한 칸을 터서 만든 구멍가게로 보입니다. 달삯 받고 내어주는 그런 가게가 아니라, 조그맣게 꾸리면서 골목집 동네사람을 마주하며 장사하는 가게입니다. 골목골목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디 먼 데까지 가서 장만해 오기에는 멋쩍고 그때그때 써야 할 자잘한 물건을 갖추고 있는 가게입니다. 150원짜리 볼펜부터 귀후비개에 손톱깍이에 라면에 장기판과 바둑알에 100원짜리 소시지에 50원짜리 초콜릿과 알사탕을 갖춘 작은 가게.

 며칠 앞서였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가게 가운데 한 곳에 찾아갑니다. 저는 이곳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발길을 끊고 있는데, 옆지기가 가 보자고 합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가게거든요. 그러면 옆지기 구경삼아 가야지 하고 들어갑니다. 들어갔으니 무어라도 하나 들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저는 막걸리 한 병을 고르기로 합니다.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 한 병을 꺼내는데 유통기한이 두 주 지났습니다. 헉, 두 주나 지난 막걸리……. 꺼낸 막걸리를 집어넣고 옆엣것을 봅니다. 한 주 지난 막걸리입니다. 다른 막걸리 유통기한도 비슷비슷.

 뒤에서 구멍가게 할머니가 부릅니다. “왜? 유통기한 지났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거듭니다. “뭘, 젊은 사람들이 눈이 좋으니까 알아보지.”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유통기한 지난 막걸리’를 치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유통기한이 두 주가 지난 막걸리라면 석 주 앞서 들여놓은 물건일 텐데, 맥주나 소주가 아닌 막걸리를 이렇게 두고 있다니. 한두 병도 아닌 모든 막걸리가.


.. 하지만 오래된 물건들을 지닌 것은 내가 소중히 다루기도 했고, 집안 어른들이 잘 간수한 덕분이다 … 나는 다림질, 세탁, 설거지, 요리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게 좋다.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늘 가정주부라고 적는다. 찬탄할 만한 직업인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 … 물레질, 뜨개질, 직조를 하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자급자족하고 싶고, 내가 쓰는 물건을 어떻게 만드는지 익히고 싶다 … 내 물레는 1700년대부터 집안에서 쓰던 것이라, 페달이 많이 닳아서 매끄럽다. 혹시 오래된 나무의 감촉을 좋아하지 않는지? 쇠처럼 차지 않고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다 …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난 하루에 한 시간씩 천을 짠다. 이런 일은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 우리는 선물을 다 직접 만들려고 애썼다. 뜨개질을 하고 종이상자를 꾸미고 나무를 깎아 엄마 거위와 아기 거위 네 마리를 만들었다 ..  (142∼158쪽)


 제가 단골로 가는 구멍가게, 가장 자주 찾아가는 구멍가게에는 냉장고에 술이 하나도 없는 날이 있습니다. 이곳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늘 알맞춤하게 물건을 갖추어 놓기 때문에, 그날 따라 잘 팔려서 금세 동이 나는 물건이 있으면 더 팔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더 많은 물건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물건이 떨어져서 없으면 “오늘은 다 팔렸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면서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 구멍가게로 갑니다. 다음 구멍가게에도 우리가 바라는 물건이 없으면 또다른 구멍가게로, 그 옆에 있는 구멍가게로, 또 그 구멍가게에서 스물이나 서른 걸음 떨어져 있는 구멍가게로 갑니다.

 이 가운데 어느 집은 밤늦도록 불을 켜 놓기도 하지만, 웬만한 집들은 저녁 열 시나 열한 시면 문을 닫습니다. 더 일찍 닫는 집도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동네사람을 만나고 동네장사를 합니다.


.. 바랄 나위 없이 삶이 만족스럽다. 개들, 염소들, 새들과 여기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는 없다. 철학이 있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 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 그게 내 신조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을 ..  (174쪽)


 어제는, 단골 구멍가게 할배 할매가 저녁을 자시고 있더군요. 집에 곁달린 구멍가게에 밥상을 차려놓고 두 분이 마주앉아서 저녁을 자시더군요. 그래서, 한 말씀 여쭈었습니다. “아이고, 저녁 드시는데, 사진 한 장 찍어야겠네요!”


 (2) 몸 냄새


 오늘은 조금 나아졌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과 도서관을 잇는 계단에 담배 연기 자욱하고 냄새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도서관은 3층에 있고, 우리 집은 1957년에 지은 집이라 그때 문화를 보여주듯이 계단이 참 많습니다. 올라오는 계단짬에는 언제나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아래층에서 일하는 학습지 도매상 아저씨들이 담배를 태운 뒤 계단에 그냥 버려 놓습니다. 이걸 어찌할까 어쩌면 좋나 한참 생각한 끝에, 빈 깡통 하나 놓으면 될까 싶어서, 큼직한 참치깡통 하나를 놓았습니다. 계단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비질을 하여 깡통에 쓸어 넣습니다.

 이렇게 하니 아래층 일꾼들이 계단짬에 꽁초 버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담배를 태울 때 깡통 옆에서 태우곤 합니다. 이웃한 다른 가게 일꾼도 우리 계단으로 놀러와서 담배를 태웁니다. 아마, 당신네들 일하는 가게 임자가 담배 태우는 모습을 싫어하는가 봐요.


.. 저녁에 염소 우리에 내려가다가 날씨가 추워지리란 걸 깨달았다. 맨발로 걸으면, 땅의 냉기가 느껴져 다음날 날씨를 짐작할 수 있다 ..  (25쪽)


 그런데 말이지요, 어제 아침에, 이 담배깡통에 불이 났습니다. 갑자기 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나 해서 들여다보니까, 누군가 불을 제대로 안 끄고 깡통에 넣어서, 그 안에 있던 종이컵이며 종이붙이(담배 태우는 이들이 버린 쓰레기)에 불이 옮겨 붙었더군요.

 콜록콜록 재채기를 하면서 물을 부어서 불을 끕니다. 그러는 사이 담배 냄새가 제 몸에 배어듭니다. 몇 초 안 되는 짧은 동안임에도 옷이며 몸이며 온통 담배 냄새가 …….


.. 내 삽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아, 본인의 창의력에 흠뻑 사로잡혀 계시는군요’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상업적인 화가고, 쭉 책 작업을 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내 집에 늑대가 얼씬대지 못하게 하고, 구근도 넉넉히 사기 위해서! ..  (37쪽)


 계단가 창문을 활짝 열고 여러 시간 있으나 냄새가 안 빠집니다. 오늘까지도 냄새는 다 빠지지 않습니다. 하긴, 불타며 나던 냄새가 빠진다 해도 새로새로 담배를 피우실 테니, 새로운 냄새가 자꾸자꾸 올라올 테지요.

 아이고, 담배 냄새가 이리도 모진지, 이리도 오래 가는지, 이리도 안 빠지고 남는지 이번에 처음 압니다.


.. 난 항상 삽화의 가장자리에 나뭇가지나 리본, 꽃을 그린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은 적도 없다. 사람들은 가장자리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를 즐긴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나오기 때문일 터다. 젖소의 어느 쪽에서 젖이 나오는지, 말을 탈 때 어느 쪽으로 올라타야 하는지, 어떻게 건초더미를 만드는지 난 훤히 알고 있다. 그러니 적당히 짐작으로 그리지 않는다. 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내 손자들, 친구들이고, 주변 환경은 실제 내 환경이다. 꽃들은 내 정원이나 주변 들판에서 자라는 것들이다 ..  (53쪽)


 그러나, 우리 몸에 배어 있는 냄새는 담배 냄새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몸에는 술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 몸에는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과 운동선수한테는 땀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충주에서 살던 때,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할라치면, 적잖은 사람들이 제 옆에 앉거나 서기를 싫어했어요. 몸에서 땀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하루 대여섯 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몸은 아무리 씻고 씻어도 땀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땀내를 자연스럽게 여기거나 좋아한다면 모르되, 요즘 사람들은 몸에서 땀내가 나도록 몸을 쓰는 일이 드물다 보니까, 이 냄새가 더없이 고약하거나 괴롭다고 느낄밖에 없구나 싶어요. 여름에는 춥게 살고 겨울에는 덥게 살잖아요. 자가용뿐 아니라 버스나 전철도 에어컨 바람이 얼마나 빵빵한가요. 요즘 도시사람한테는 땀흘릴 겨를이 없어요.


.. 정원을 가꾸면 헤아릴 수 없는 보상이 쏟아진다.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다.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아직도 맞고, 턱걸이도 할 수 있다. 평생 우울하거나 두통을 앓아 본 적도 없다 ..  (68쪽)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흙냄새와 거름냄새,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일하는 사람한테는 사무실 냄새와 펜 냄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기름 냄새가 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일하는 곳 냄새를 몸에 풍깁니다. 누구든 자기가 몸담은 곳 냄새가 몸에 스밉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하고 부모 삶을 몸에 받아들이듯, 우리들 어른도 우리가 깃든 곳 문화와 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옳은 마음과 생각으로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저절로 옳고 아름다운 쪽으로 자리잡습니다. 우리가 얄궂은 마음과 생각으로 비뚤어진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비틀리고 뒤틀리고 구린내를 풍깁니다.

 우리 생각에 따라, 우리 마음 가는 데에 따라, 우리 몸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우리가 깃든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 냄새는 바뀝니다. 꼭 시골에서 산다고 하여 자연스러운 냄새가 가득하지 않아요.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라 해서 억지스럽거나 딱딱한 잿빛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다.


.. 가을마다 배가 열리면 나는 병조림을 만든다. 시장에서 산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 ..  (115쪽)


 저는 충주 산골짝에 살 때부터 고무신을 신었습니다만, 도시인 인천에 와서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무신 값이 쌉니다. 한 켤레에 3000원이거든요. 그러나 값보다 좋은 대목은, 고무신을 신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한결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요. 바닥이 아주 얇으니, 제 발이 밟는 대로 땅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시골에서는 흙 느낌을 받아들이고 도시에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이러는 동안 제 몸부터 흙을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느낍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가 되면, 이 느낌이 고스란히 제 몸에 남아 있을 테니, 아이한테도 무엇을 가르치면 좋고, 무엇을 보여주면 좋으며, 무엇을 함께하며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추스를 수 있으리라 봅니다.


 (3) 사람이 살아가는 뿌리를 밝히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우리 옛사람한테 물려받은 우리 나라 우리 땅 우리 바다 우리 하늘 우리 산과 들 우리 논밭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읊을 줄 알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느낀다면, 시화호와 새만금을 어찌 ‘죽음이 떠도는 바다’로 만들 생각을 하겠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왜 이리 자꾸 늘리려고만 하겠습니까. 전기를 덜 쓰면서 발전소를 줄일 수 있는 삶으로 바꿔야지요. 찻길이 모자라다고 외치지 말고, 찻길을 줄여서 우리 삶터를 고이 지켜야지요.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야 나라살림이 북돋울까요. 자동차 만드느라 더러워지는 이 나라 삶터는 얼마나 큰돈을 들여야 되살릴 수 있는데요. 아니, 더러워지고 무너진 자연 삶터는 돈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 있다. 난 행복이란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모든 것은 내게 만족감을 안겨 준다. 내 가정, 내 정원, 내 동물들, 날씨, 버몬트주 할 것 없이 모두 ..  (22쪽)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타샤 튜더 할머니 책을 봅니다. 사진이 많이 들어가서도 그렇지만, 금세 읽고 한 번 더 읽고, 두 번 다시 봅니다. 며칠 사이에 여러 번 다시 봅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다시 한 번 더듬은 뒤, 이제야 책꽂이에 살며시 얹어놓습니다.


.. 조경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난 계획해서 화초를 심지 않고, 되는대로 쑥쑥 심는다. 많은 꽃이 뒤섞여 자라는 게 좋다 … 뱀의 얼굴을 찬찬히 본 적이 있는지? 얼마나 낙천적으로 생겼는지 모른다. 늘 배시시 웃고 있다 ..  (86쪽)


 타샤 튜더 할머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당신은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픈 대로 자기 삶을 꾸리려고 하다 보면, 어느 누구도 돈을 갖다 앵기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니 그림을 그릴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할머님은 먹고살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이 남긴 이 책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어 보니까, 그저 당신 입만 채우는 먹고살기가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을 꾸려 나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밥은 밥이고 삶은 삶이면서 꿈은 꿈일까요. 밥을 놓을 수 없는 가운데 삶 한 자락을 다부지게 붙잡은 타샤 투더 할머님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품어 온 당신 꿈이 소록소록 묻어난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으면서, 또 책을 덮으면서, 할머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옵니다. ‘네가 아무리 기쁘게 살더라도 그 기쁨이 너한테만 기쁨이라면 너한테도 기쁨이 아닐 수 있다, 네가 아무리 슬프게 살더라도 그 슬픔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 수 있다면 너한테는 슬픔이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4341.3.2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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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외보 한 곳에서 글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마땅한 벌이가 없이 사는 형편으로는, 조그마한 글삯이라도 주는 글 청탁이 몹시 반갑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글에다가 사진까지 보내 주어도 다리품 값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데요.

 날이 갈수록 디지털사진기가 널리 퍼지는 가운데, 사진 저작권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번 사외보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 헌책방을 다니며 사진 찍을 때마다 필름값 나가는 소리에 주머니가 후줄근하고, 찍은 필름은 현상을 하고 필름스캐너를 돌려서 하나하나 파일을 만들어 놓느라 눈알이 빙글빙글 돌고 팔이 저립니다.

 이런 일은 돈을 벌자고 한 일이 아니기에, 헌책방 사진을 찍고 글을 남겨 놓은 대가를 딱히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사외보든 신문사든 잡지사든, 이분들이 누군가한테 글 하나 써 달라고 할 때에는, 글 한 꼭지를 놓고 원고지 장수를 헤아리며 글삯을 주는데, 이 글과 함께 쓰는 사진을 놓고도, 사진 한 장에 얼마쯤 품값을 매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어제 낮, 이번에 저한테 글을 청탁한 사외보에서 다시 연락이 옵니다. 헌책방 찾아가는 길그림을 하나 넣으면 좋겠다면서. 길그림이요? 좋지요! 길그림까지 곁들이면 ‘헌책방 이야기’는 글과 사진과 그림이 어우러져서 멋진 작품으로 태어나리라 봅니다. 더욱이, 헌책방에서 만난 책 겉그림을 스캐너로 긁어서 넣으면 한결 멋있을 테고요. 그런데, 사외보 엮어내는 곳에서 저한테 줄 수 있다는 일삯은 오로지 ‘글쓴 대가’ 한 가지.

 사진을 찍는 데에 들어가는 품과 시간, 책을 사는 데 들어간 돈, 필름과 책을 스캐너로 돌리는 데 들어가는 품과 시간, 마지막으로 헌책방 길그림을 그리는 데에 들어가는 품과 시간 ……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일삯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네 가지는 자원봉사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ㄱ방송국에서 사진 좀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무슨 사진인가 하니, 제가 있는 이곳 인천 배다리에서, 인천시 공무원들이 ‘너비 50미터가 넘는 산업도로를 동네 한복판을 꿰뚫으며 놓으려고 하는 짓’을 놓고, 이와 얽혀서 찍은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을 꾸준히 찍어 놓은 사진을 100장쯤 보내 줍니다. 지난주에는, 인천 지역 신문사들에서, ‘산업도로 반대 농성을 하고 몸싸움을 하며 공사강행을 막는 모습’ 찍은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웃으면서, “네, 보내 드리지요. 명함을 하나 주시거나 인터넷편지 주소를 적어 주셔요.” 하고 말을 합니다. 현장에는 와 보지 않고 사진만 보내 달라고 하는 기자님들은, 당신들 신문사에서 다달이 꼬박꼬박 넣어 주는 달삯을 받으실 테지요.

 요즈음 《발칙한 한국학》(이끌리오,2002)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스콧 버거슨이라고 하는 미국사람이 쓴 책입니다. 이이는 책 앞머리에 ‘어느 방송국에서 자기를 찍겠다는 연락이 와서 있었던 일’을 적어 놓습니다. 자기를 취재하겠다던 방송국 피디와 방송작가는 당신 스콧 버거슨이 펴낸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버거슨 씨는, 그 책을 읽고 다시 연락해 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방송작가는 시간이 없고 바빠서 힘들겠다고 합니다. 한참 생각하던 버거슨 씨는, 바쁘다니 어쩌겠느냐 싶어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루 내내 고달픈 취재에 시달립니다. 자기들이 촬영장비를 들고 찾아와서 찍기는 찍지만, 무엇을 찍어서 내보내야 ‘스콧 버거슨이 누구인가?’ 하는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 몰랐을 테지요. 버거슨 씨는 하루 내내 괴로웠지만, ‘공짜 밥’ 얻어먹었고, 한국땅 방송작가와 피디 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버거슨 씨 같은 일을 수없이 겪습니다. 퍽 자주 그러는데, 방송사든 신문사든 잡지사든, 저를 취재하면서 ‘제가 찍은 헌책방 사진’을 ‘그림으로 넣고 싶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그러면 저는 슬그머니 한 마디 합니다. ‘사진에는 저작권이 있을 텐데요.’ 그러면 맞은쪽에서는, ‘방송에 나가면 최종규 씨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는 ‘저희가 취재경비가 얼마 없어서 저작권료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는 대꾸. 그러면서 저녁밥이든 낮밥이든 같이 먹자고 합니다. 그러면 ‘밥은 안 사 주셔도 되니까, 다문 만 원이라도 사진값을 치러 주시면 좋을 텐데요.’ 하고 여쭙니다. 이러면 으레 ‘글쎄요.’ 하는 대꾸. 그러다가 요즘 들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명함에 웹하드나 인터넷편지 주소를 적어 주면서, ‘사진 좀 주세요!’ 하고 당차게 이야기합니다. 그래, 달라면 줘야지, 어쩌겠는가? 싶어서 ‘그러면 어떤 사진을 보내드릴까요?’ 하고 여쭙니다. 그러면 거의 ‘최종규 씨가 보기에 괜찮은 사진으로 보내 주세요.’ 다시 여쭙니다. ‘저는 제가 찍은 사진 가운데 버리는 사진이 한 장도 없어요. 필름값이 없기에 한 장 한 장 곰곰이 생각한 다음에 찍어서, 모든 사진을 스캐너로 긁어서 파일로 담아 두고 있어요. 바라는 사진이 무엇인지, 제 인터넷방에 들어와서 살펴보시고 파일번호를 알려 주셔요. 인터넷방에 올려놓은 사진만 해도 수천 장이 되거든요.’ 이런 여쭘에 돌아오는 대꾸는 하나같이 ‘그런가요? 그래도 알아서 골라 주셔요.’

 어쨌든. 사외보에 글과 사진과 그림을 모두 보냈습니다. 마감 맞추느라고 힘들었는데, 한숨 돌립니다. 그런데 사외보 엮는 분은 ‘최종규 씨가 헌책방에서 책을 보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한 장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찾아서 보내 드려얍지요! 예전에 어느 자전거잡지 기자가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이 사진은 제가 잡지를 사서 스캐너로 손수 긁어 파일로 만들었습니다)을 보내 줍니다.

 이제 더 없겠지? 낮참을 먹으면서, 물 한 잔을 마시면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그저께부터 이곳 사외보에 보낼 글을 쓰랴 사진 추리랴 책 겉그림 긁으랴, 여기에다가 아침부터 헌책방 길그림을 손으로 그려서 스캔질 하랴 …… 손가락과 손목과 팔뚝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아침과 낮밥을 먹는데, 손이 후덜덜 떨립니다. 책읽은 느낌도 글로 끄적이고, 헌책방 나들이도 갈무리하고, 우리 말 이야기도 좀 끄적거릴까 했더니 팔이 아파서 글을 못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드러누워서 팔을 주물러 주면서 쉬어야겠습니다. 자판 두들기기도 힘듭니다. 그렇지만, 뭐, 세금 빼고 13만 얼마쯤 벌었습니다. 통장에는 다음달에나 다다음달에 일삯이 들어올 테지만. (4341.4.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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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의 행복한 자전거 -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두 바퀴 이야기
김세환 지음 / 헤르메스미디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하는 세상이지만
 [잠깐 읽기 1] 김세환, 《김세환의 행복한 자전거》



- 책이름 : 김세환의 행복한 자전거
- 글쓴이 : 김세환
- 펴낸곳 : 헤르메스미디어(2007.4.5.)
- 책값 : 9800원



 (1)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하는 세상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한 소리를 듣습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한 소리를 듣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한 소리를 듣습니다. 실업자는 실업자대로 한 소리를 듣고,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한 소리를 듣습니다. 농사꾼은 농사꾼대로, 글쟁이와 사진쟁이는 글쟁이와 사진쟁이대로 한 소리를 듣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한 소리를 듣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아이들대로 자전거로 학교를 오가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아직 어려서 찻길에까지 나오면서 자전거를 타면 차에 치일까 걱정이라고 합니다. 골목길에서도 씽씽대며 자동차를 들이미는 사람들은 쉴새없이 빵빵질을 하면서 아이들한테 욕지거리 퍼붓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아이들대로 학교까지 자전거로 다니기 어렵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험공부에 시달려서 몸이 고단하기도 합니다. 자전거로 다닐 시간에 부모님이 자가용에 태워서 씽 보내주어야 몸이 덜 고단하고 공부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많다고들 이야기를 한답니다.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학점따기 공부나 동아리 활동이나 사랑놀이나 온갖 일거리에 바쁘니 자전거 탈 겨를을 마련하기 힘듭니다. 일터를 나가는 사람들은 일터에 나가는 사람대로 치이고 볶입니다. 더욱이 저녁에는 툭하면 술자리인데 어느 세월에 자전거를 타겠습니까. 아침에 늦잠을 자고 부랴부랴 길을 나서니 자전거를 타고다닐 엄두는 도무지 내지 못합니다.


.. 내가 처음 산악자전거를 탄 것은 내 나이 마흔을 넘긴 시점이었다.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그 나이에 젊은 사람들도 타기 어렵다는 산악자전거를 타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놀라는 반응을 보내 왔다. 그런 시선들 속에는 부러움과 비웃음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현란한 복장과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겠다는 것이, 나이로 보나 사회적인 위치로 보나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열망이 그 모든 부정적인 반응보다 강렬했다 ..  (77쪽)


 자전거 타기 힘든 세상, 아니, 가만히 살펴보면, ‘자전거는 타고다니지 말라는 세상’입니다. 지금 아이들 교육 얼거리를 보면, 참다운 사람으로 크도록 이끄는 학교교육이 아닙니다. 더 높은 대학교에 가도록 시험점수 잘 받게 지식을 집어넣는 교육일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를 일찌감치 가르치는 까닭이, 아이가 ‘착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뜻인가요? 아이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재주를 기르라’는 뜻에서 가르치는 영어가 아니던가요? 한자를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를 가르칠 때에도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푸대접도 아닌 똥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한둘이 아닐 테지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사람으로 살기보다는 ‘사람 아니게’ 살도록 내모는 사회 얼거리가 갈수록 깊어지기 때문에 인문학은 똥대접, 찬밥대접이 아니겠느냐 싶어요. 느긋하게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가꾸도록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두 다리로 우리 땅을 디디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일깨우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자기 몸뚱이를 움직여서 일하는 기쁨과 땀흘리는 맛깔스러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들이마신 산소는 몸만 정화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받은 온갖 스트레스와 걱정까지 날려 주곤 했다 ..  (8쪽)


 자전거는 취미일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삶입니다. 손빨래를 취미로 하는 분도 없지는 않을 터이나, 손빨래는 어디까지나 삶입니다. 1회용 기저귀를 안 쓰고 천기저귀를 쓰면서 손빨래를 하고 삶아서 빨랫줄에 널어서 햇볕에 말리는 사람들은 그저 환경운동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새로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좀더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1회용 나무젓가락을 안 쓰고 쇠젓가락을 쓰거나, 나무젓가락을 깨끗이 씻고 말려서 다시 쓰는 사람들도 그래요. 한낱 환경운동으로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을 가꾸고 보듬으려는 마음이라서 이렇게 합니다. 내 이웃과 내 식구들, 그리고 내 자신까지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1회용품 한 가지로도 우리 삶터를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자전거입니다. 자가용도 안 몰지만, 또는 자가용을 모는 분들이라 한다면 조금 덜 몰지만, 내 몸뚱이를 움직여서 내 힘으로 내 사는 이 나라 이 터전을 밟는 자전거입니다.


.. 편안한 복장 때문에 마음까지 가벼웠고, 페달을 밟는 다리에 더욱 힘이 갔다. 역시 나에게는 갇힌 공간인 자동차나 목을 누르는 넥타이보다 이렇게 자유로운 복장과 자전거가 제격이었다 … 정장을 벗고 자동차를 버렸던 그날, 내가 풍경을 즐기면서 가장 빨리 도착점에 이르렀던 것처럼 … “이런 오르막길을 어쩌면 그렇게 잘 오르세요?” 웃음으로 답하지만, 사실 나의 비결은 천천히 포기하지 않고 내 속도로 올라가는 것이다. 빠르게 올라갈 자신은 없지만 지치지 않고 오래 올라갈 자신은 있다 ..  (41∼42쪽, 50쪽)


 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눈 비 바람 햇볕 어느 때에나 자전거로만 움직이면서 지난 몇 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자동차꾼들이 일으켜 주신 ‘뺑소니 사고’ 여러 차례에 몸이 망가져서 팔다리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사랑스럽고 그리운 자전거가 먼지 먹는 모습을 씁쓸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걸레질만 해 줍니다. 아무래도 자전거 세상이 아닌 자동차 세상인데, 이런 세상을 거스른 탓일까요. 더 높은 학교를 다니고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크고 빠른 차를 몰면서 살아야만 ‘내 이웃을 밟고 올라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인데, ‘위로 올라갈’ 생각은 않고 아래에서 자전거만 타고다닌 보람일까요.


 (2) 김세환 님, 다음에는 부디 ‘행복한 자전거’ 이야기로 …


 연예밭에서 일하는 김세환 님은 1986년부터 자전거를 탑니다. 그리고 2007년, 당신이 스무 해 남짓 즐겨 온 자전거 이야기를 책으로 하나 묶어냅니다.

 김세환 님이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 몰기로 당신 길을 걸었다면, 이렇게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 하나로 묶을 수 없었을 겝니다. 그래도 당신 자서전을 쓰기는 쓰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만, ‘자동차와 살아온 발자국’만으로 펴낸 자서전이었다면, 우리 눈길을 그다지 사로잡지는 못했으리라 봅니다.


.. 어찌된 일인지, 좋은 자전거를 사면 다들 윌리부터 시도하려고 한다. 좋은 장비를 갖췄으니 뭔가 그에 걸맞은 멋진 기술을 구사해 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러나 산에서 자전거를 탈 때 기술은 곧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다. 겸손하게 하나씩 단계를 밟아 배우겠다는 마음가짐부터 가져야 안전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  (154쪽)


 그러나, 《김세환의 행복한 자전거》는 못내 아쉽습니다. 김세환 님 당신이 스무 해 넘는 세월을 자전거와 함께 살면서 ‘행복했다’고 말씀을 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행복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책은 ‘행복한 자전거’를 말하는 책이라고 내세우지만, ‘자전거 풋내기한테 알려주고 싶은 선배 도움말’ 몇 가지에다가, ‘아직 자전거를 안 타는 사람한테 해 주고 싶은 말’ 몇 가지에다가, ‘산타는자전거를 즐기고픈 이한테 미리 알려주는 말’ 몇 가지에 무게가 지나치게 쏠려 있습니다.

 자전거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너무 적게 들어가 있고, 책에 담은 글은 ‘자전거에 앉아서 땀흘리며 쓴’ 글이 아니라,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로 생각하며 쓴’ 글이라는 느낌이 짙습니다. 김세환 님 자전거 삶 스무 해를 헤아려 본다면, 알맹이가 빠져 있다고 할는지요, 팥소가 빠진 찐빵이라고 할는지요. 한편, ‘행복한 자전거’를 알뜰하게 채우지 못하는 가운데 책끝에 ‘김세환 님 자서전’ 비슷한 이야기를 달아놓습니다. 김세환 님을 좋아하는 분들한테 드리는 선물 같은 꼭지라고 보아도 좋을 수 있으나, 이 또한 ‘행복한 자전거’하고는 너무 멀리 떨어지고 맙니다.

 책을 읽으며 별 숫자로 점수를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만, 부디 김세환 님이 다음에는 좀더 ‘행복한 자전거’ 이야기를 들려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별 다섯 만점에서 둘 반을 드립니다. (4341.3.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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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할머니의 나의 수채화 인생
박정희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42 ― 우리 어머니 삶도 예술이요 문화가 아닐까?
 :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나의 수채화 인생》



- 책이름 : 나의 수채화 인생
- 글ㆍ그림 : 박정희
- 책만든곳 : 미다스북스(2005.3.31.)
- 책값 : 13000원





 (1) 손과 얼굴과 하얀 빛


 안양에 볼일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사람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어쩐지 사람들 얼굴에 자꾸 눈이 갑니다. 손에도 눈이 가고, 하얗게 드러낸 종아리나 허벅지에도 눈이 갑니다. 그러다가 제 손을 들여다보고, 뒷간에 있는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곰곰이 살핍니다.

 때는 바야흐로 삼월하고도 스무 날을 넘기는 때. 지난해까지만 해도 삼월에 한 차례 눈보라가 치고 나서야 따순 기운이 돌았는데 올해에는 삼월 눈은 찾아오지 않을 듯한 느낌. 벌써부터 반소매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이 생겨나고, 자동차 에어컨 돌리는 사람도 있고.


..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밖의 일을 보고 돌아온 나에게 남편은 정색을 하고 앉으라더니, “나, 왜 살아?”라고 물었다. 남편의 그 말에 무어라 얘기를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준엄한 표정 앞에 나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의 명령으로 사는 거지요. 당신은 팔십 평생 참 좋은 의사로 수고 많이 했고, 이제는 머리도 몸도 늙고 망가져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지요. 먼저 하나님께로 가세요. 제가 뒤따라갈게요.” ..  (6쪽)


 무릎이 맛이 가고 왼어깨가 나가고 오른팔꿈치도 반편이가 된 가운데 먹통인 오른손목도 내 손목 같지가 않은 지금, 다문 1분 자전거를 타도 네 군데 다섯 군데에서 아이고 아야 엉엉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합니다.

 한창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면서 살던 때에는, 고무신 안쪽 발가락과 발바닥만 하얗고 나머지 몸뚱이는 죄 새까맸는데,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된 지금은 ‘살갗이 참 하얗네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도서관 지키랴 천막농성 하랴, 길에서 햇볕 쬐며 움직일 일이 없어진 요즘이니, 싫디싫은 허연 얼굴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이 진저리가 쳐집니다. 햇볕을 쬐며 일하고 싶은데. 햇볕 쬐는 곳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해도, 낮에는 햇볕을 쬐면서 돌아다니고 싶은데.


.. 행복이라 느끼면서 살다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주었던 사랑을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나에게 베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라는 권위로 혼내고 다그치기보다는, 함께 즐기고 어떻게 하면 서로 즐거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 왔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이에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받은 추억들이 너무나 많다 ..  (39쪽)


 어릴 적부터 제 살결은 허연 편이었습니다. 동무들하고 똑같이 바깥에서 뒹굴며 놀아도 동무들은 금세 까맣게 그을리는데 저는 허여멀겋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늘을 부러 찾아가지 않고 그냥 땡볕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노는 데에도 살갗이 잘 타지 않았습니다. 군대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하얀 얼굴이라고 해서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휴가를 받아 한두 번 세상 구경을 할라치면 ‘꼭 도적놈 같다’는 소리를 듣지만, 부대에서는 ‘얼굴 허연 놈’ 소리를 듣습니다.

 책만 읽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그다지 안 많은 사람임에도, 또 책읽기보다는 밖으로 나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은 사람임에도, 얼굴이 허여니 책상에서 펜대나 굴리는 놈팽이로 여기는 눈길이 달갑지 않습니다. 남들 눈길이 어떠하든 제 나름대로 살면 그만일 텐데, 저부터 사람 보는 눈길에서 홀가분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잘 그을렸다고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얼굴이 허옇다고 해서 못난 사람이 아닐 텐데,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얼굴 허연 사람’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대접을 해서 무척 꺼려졌습니다.


.. 초등학교에 근무한 경험이 있던 나는,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어린이가 질색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한글도 모른 채 선생님께 맡기고 싶었다 ..  (76쪽)


 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 얼굴은 저보다 훨씬 허여멀겁니다. 안양에 닿아 찾아간 사무실에서 일하는 공무원들 얼굴은 더더욱 허여멀겁니다. 아주머니 할머니는 얼굴에 허옇디허연 화장품을 바르고, 젊은 아가씨도 얼굴에 하얗디하얀 화장품을 바릅니다. 얼굴 하얀 서양사람처럼 되어야 살결 곱고 예쁜 사람으로 보인다고 느껴서 이리 할 텐데, 서양사람도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은 살결이 까무잡잡합니다. 기록사진으로 남아 있는 1900년대 첫머리, 또는 1800년대 끝머리 서양사람들 살결을 보면 우리가 ‘깜둥이’라고 하는 사람들 살결하고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화기 무렵 우리 나라 백성들 사진을 살펴보면 모두들 까만 얼굴에 까만 손에 까만 발입니다. 이 무렵 임금과 높은 신하들 사진을 살펴보면 퍽 허여멀건 얼굴에 허연 손입니다.


.. “오늘 하늘의 빛은 코발트로 칠하고,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은 오렌지색이네? 이렇게 드문드문 가로 점을 찍은 다음, 굵은 붓에 맑은 물을 묻혀서 슬슬 가로 퍼뜨리면 시원하게 그려졌지? 그리고 수건을 손가락에 감고 찍어내면 구름이 되는 거란다. 마른 뒤에 구름의 표정에 조심스럽게 그늘을 넣어 볼까?” “우와∼ 쉽다. 나도 선생님처럼 저 구름을 그려야지.” 아무리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애를 써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오묘한 광선과 바람을 어찌 그릴 수가 있겠는가.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없이 즐거워하며 행복을 만끽하며 자연을 흉내내듯 그리는 것도 자연이 내려준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인 것이라 생각한다 ..  (139쪽)


 잠깐 일을 멈추고 제 손을 바라봅니다. 서른네 살 먹은 아저씨 손을 봅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넓게 박혀 있습니다. 자전거를 못 타고 있음에도 굳은살은 그대로입니다. 손마디에는 주름이 굵직하게 패였고, 손가락이며 손등께며 불그스름합니다. 손끝은 빨갑니다. 책을 읽는다며 또 글을 쓴다며 할 때 보면 손이 시려서 자주 비빔질을 하고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끼고 녹이곤 합니다. 날이 풀렸다고 찬물로만 빨래를 하다 보니 두어 점 손빨래를 하고 나면 손끝까지 쩡쩡 얼어붙어 살짝 아픕니다.

 어릴 적을 더듬어, 우리 어머니가 제 나이였을 때 손이 어떠했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때 어머니 손을 보면서, ‘어머니 손은 왜 이렇게 누래요?’ 하고 여쭈곤 했습니다. 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불긋불긋한 가운데 누릇누릇합니다. 그때 어머니 손이 왜 누랬는지 알 만합니다.







 (2) 우리 어머니


 환갑 나이가 된 어머니한테 ‘어머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지요?’ 하고 여쭈면, 으레 ‘알잖아?’ 하면서 ‘없어.’ 하고 끊어버립니다. 하긴, 누군가 저한테 무슨 먹을거리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글쎄 …… 없는데.’ 하고 대답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안 그러느겠느냐만,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있을 텐데, 당신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오셨지 싶습니다. 당신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즐길 틈이 없이 사는 가운데 그예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아니, 당신 머리속 한켠에 아주 조그맣게 숨겨 두고는 다시 들추어낼 생각을 못하시지는 않는지.

 입가림이 많아서 반찬을 골고루 못 먹던 저였습니다. 어머니는 걱정도 많고 다그침과 꾸지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웬만해서는 봐주며 제 입에 무엇이 맞나 찾아 주려고 애쓰셨습니다. 우유도 못 마시지 치즈도 못 먹지 버터도 게우지 배추김치는 못 씹지 김은 숨막히지 찬국수에는 속이 뒤집히지 ……(우유는 몇 번 물똥을 누고 나서 입에 맞으면 즐겨먹게 되지만, 한 주쯤 안 먹고 끊다가 다시 마시면 꼭 탈이 났고, 배추김치는 영 삼키기 힘들어 했습니다. 이제는 다 잘 먹고 있습니다만). 어린 그때를 생각하면, 밥먹는 자리는 바늘방석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눈치밥을 먹어야 하나, 오늘은 또 얼마나 울면서 억지로 삼켜야 하나.

 꼭 저 때문은 아니지만, 저를 비롯해 다른 두 식구가 먹지 않고 남기는 반찬이 있을 때면 어머니는 그 반찬을 꼭꼭 남김없이 드셨습니다. 날짜가 지난 우유는 벌컥벌컥 들이키셨고, 두 형제와 아버지가 지저분하게 먹고 남긴 물고기 반찬도 뼈까지 우걱우걱 씹으면서 마무리를 지으셨습니다.


..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아낙네들 서너 명이 무엇인가를 심고 있었다. 저 멀리 울멍줄멍한 산 위에 청명한 하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상태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집에 가서 빨랫감을 놓고 그림도구를 가지고 오겠다면서 돌아섰다. 하지만 이내 집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되돌렸다. ‘말도 안 돼! 신랑이 입고 나갈 와이셔츠를 빨아야 하잖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몇 번 되풀이하던 끝에 결국, 지난해의 잡초가 말라 있는 자리에 털퍼덕 앉아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폈다. 그런데 그 순간 두 눈에서 더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것은 무슨 조화였을까. 그 얼굴을 남들이 보기라도 했다면 무어라 했을지. 그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어, 이렇게 좋은 풍경화를 어디서 샀나?”라고 내게 물어 보았다. “제가 그린 거예요.” ..  (25∼27쪽)


 남은 밥이나 반찬을 뒤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모습을 늘 보면서 마음에는 죄스러움과 미안함이 쌓입니다. 밥상머리에서 늘 꾸지람을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막내아이 몸이 걱정되어 어떤 먹을거리를 주어야 하느냐로 마음앓이 많으셨겠지요. 이런 걱정 저런 마음씀은 제 몸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가 지나는 동안, 그 어린 날에는 몸에서 안 받는 여러 가지가 몸에 받게 되고 잘 먹게 됩니다. 지금도 물고기 대가리는 못 먹습니다만, 꼬리와 지느러미와 내장만 빼고는 깨끗이 먹습니다. 반찬 남기는 일이 없고 밥풀 하나 흘리는 일이 없습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밥그릇에 밥풀 하나라도 남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어쩌다가 바닥에 밥풀을 흘렸으면 곧바로 주워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밥알 하나 함부로 여기지 말고 옳게 간수하라는 뜻이었고, 밥 한 그릇 비우는 고마움을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내 소중한 목숨을 이어가도록 나한테 바쳐진 다른 목숨을 먹는 일이 밥임을 깨닫게 해 주는 뜻이었습니다.


― [육아일기] 현애를 나았을 때의 엄마(1947)
: 25세 때였다. 모든 것이 내 힘에 벅찼든 때였다. 나라의 상태도 그렇지만 나 개인의 사정도 힘들어 내가 무한히 좋아하는 그림과 글씨를 못 그린 기간이였다. (55쪽)



 허구헌날 병치레요, 툭하면 비실대니, 바람 잘 날 없는 막내둥이입니다. 그러다가 육학년 때, 저한테도 마마가 찾아와서 여러 날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서 밥 한 술 못 뜨며 열이 잔뜩 올라 앞뒤 못 가리며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일기장 숙제가 걱정되어(일기를 안 쓰면 학교에서 얻어맞았으니까) 어머니한테 애타게 부탁을 했고, 어머니는 저 대신 일기장을 채워 줍니다.

 “1987년 5월 27일 수요일 날씨 맑음. 종규에게 - 몸이 약한 너의 모습을 볼 때, 엄마는 걱정이 많이 된단다. 선생님의 열의에 감동도 되고, 숙제를 하느라 잠도 모자라겠지? 그렀지만 열심히 노력을 해야지 종규야, 힘 내도록 열심히 먹고 열심히 운동도 해야지? 너의 편식은 너무 심해져가니 어떻게 하면 좋겠니? 엄마는 몹시 걱정이란다. 아들아, 노력하는 성실한 어린이가 돼길…….”


..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 가슴이 뛰도록 기쁜 것이 더 대단한 재주일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공감하는 가슴을 갖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168쪽)


 제 머리가 닿는 대로 되새겨 보면, 어머니는 언제나 일하는 어머니였고, 저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고 훨씬 늦게 잠들면서도 쉬지 않고 일손을 놓지 않아서 집안에 있을 때는 딴짓을 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놀 수가 없었습니다. 어영부영 시간죽이기 하며 놀다가 문득문득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가 생각이 나 매무새를 바로잡게 됩니다. 밖에 나가 동무들하고 놀다가도 어머니가 생각이 나고 아무 허튼 짓을 하면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국민학생 때까지는 호되게 구두주걱질을 받아서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았습니다만, 여느 때에는 늘 말없이 부업 일감을 한 아름 떠안고서는 바삐 지내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달이 틈틈이 떨어지는, 저와 형 독후감 숙제나 만들기 숙제를 무던히 도와주었습니다. 반공 글짓기, 과학 만들기, 저축 감상문 따위를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해내겠으며, 스무 가지 서른 가지 식물채집을 도시에서 어찌 해내겠습니까. 방학 때 탐구생활 라디오듣기 숙제를 놓치게 되어도(밖에 나가 노느라) 어머니는 집에서 혼자서 듣고서는 찬찬히 알려주셨습니다. 이때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개집니다. 낮은학년(2학년) 때에는 그림일기 숙제를 어머니가 그려 주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어머니 자국을 옛 일기장이며 쪽지며 원고지며 돌아볼라치면, 맞춤법도 틀리고 하셨지만, 글씨는 참으로 반듯하고 그림도 빛느낌이며 어우러짐이며 참 곱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어머니가 교과서 겉에 쓴 글씨(달력으로 교과서를 싸서 겉에 쓴 글씨)며, 공책에 적은 이름이며, 그림일기에 그려 준 어머니 그림이며를 보면서, “종규 어머니가 글씨를 참 잘 쓰시는구나, 그림을 참 잘 그리시는구나” 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난 언제쯤 어머니처럼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공부끈을 바지런히 붙잡습니다.








 (3) 《나의 수채화 인생》에 담긴 이야기


 2005년에 한 번 읽었던 《나의 수채화 인생》을 세 해 만에 집어들어서 또 한 번 읽습니다. 마침, 인천 동구 화평동에 자리한 박정희 할머님 ‘평안수채화의 집’을 찾아뵈어 말씀을 듣고 사진도 찍고 여러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사들고 읽던 때에는, 여든 넘기신 할머님이 참 곱게 늙으시면서 당신 좋아하는 그림을 저렇게 즐기시는구나 하고만 여겼습니다. 할머님 아버님인 박두성 선생님 삶과 발자국만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할머님을 몸소 뵙고 당신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우리 어머니가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그리고, 한글 점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장님들 마음눈을 틔워 준 박두성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훌륭하지만, 박정희 할머님은 또 할머님대로 훌륭한 대목이 있는데, 미처 못 보고 있었다고 느낍니다. 열 평이나 될까 싶은 조그마한 집에 스물세 식구가 다닥다닥 모여서 살아야 하는 살림을 꾸리면서도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즐겁게 살았다’고 할 만큼 알뜰히 보내온 당신 발자국을 느끼면서, 당신 어머니 처녀 적 사진부터 해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하면서 그때 그 이야기들을 올올이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놓고 우리들한테 차곡차곡 들려주면서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모습을 보면서, ‘남들은 다 쓰레기라고 버리지만 나는 못 버린다’고 하는 천쪼가리 종이쪼가리를 주워모아서 멋진 손가방을 만들어내어 쓰고 있다면서 보여주실 때,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면서 무릎을 칩니다. 사람들이 인천 동구 화평동을 한낱 ‘세숫대야 냉면거리’로 잘못 알리고 잘못 알면서 찾아가는 발걸음이 어떻게 뒤틀려 있는가를 여태 못 깨닫고 있었네 하면서 뒷통수를 칩니다.


.. 내게 있어서 그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마법과도 같다 ..  (185쪽)


 나이가 들어갈수록 당신 스스로도 당신 그림이 더욱 나아진다고 느끼신다는 박정희 할머님. 앞으로 백 살까지 꾹꾹 눌러채우며 몸 튼튼히 마음 튼튼히 살아 주셔야지요. 아니, 꼭 백을 채우기보다는 백하나나 백둘이 더 나으려나.


.. 소원컨대 부디 건강하게 즐겁게 지내다가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으면 한다. 그래서 같이 살아 주고 보살펴 준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에게 고마웠다고 인사하며 잠들고 싶다 ..  (216쪽)


 인천시는 스무 해쯤 앞서 진작에 송암 박두성 선생 살던 율목동 집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따지는 목소리는 인천시장이나 인천시 공무원 귀에 가 닿지 않았고, 귓등에 살짝 스친 목소리는 모기 앵앵 소리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화평동 박정희 할머님 그림집(평안수채화의 집)마저도 ‘재개발해야 하니 도장 찍어 달라’고 하는 판입니다. 화평동 한켠에 쉰 해 가까이 ‘평안의원’ 간판을 걸고 있던 이 집을, 그 뒤로는 ‘평안수채화의 집’ 간판으로 바뀐 채 처음 모습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집을, 인천시에서는 문화재로도 동네 삶터로도 바라보는 눈이 없습니다. 인천 바깥에서는 ‘그림 할머니’며 ‘육아일기 할머니’며 높이 사고 훌륭하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나, 할머님뿐 아니라 할머님 아버님 삶과 발자취를 높이 기리고 모시고 있으나, 인천에서 문화 행정을 하는 이들은 눈이 멀었습니다. 역사 행정을 하는 이들은 귀가 먹었습니다.

 하긴, 함세덕 선생 생가가 버젓이 있음에도 인천시는 이 집을 사들여서 고유한 문화유적지로 삼지 않고 있는 판인데(지금 이 집은 소주방으로 쓰입니다). 우리 나라 첫손 꼽는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 발자국도 살려 놓고 있지 않는 터인데.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일장기 지운 사건(손기정 님 마라톤 우승)’을 일으킨 사진부기자이자 한국 사진밭을 처음으로 개척한 신락균 선생 기리는 어떤 것 하나 없는 형편인데. 여기에다가 ‘존슨 별장’을 엉터리로 되살리려 하고, ‘만국공원(자유공원)’도 패키지관광코스로 까뭉개는 재생사업을 하려 하는 가운데, 인천 서민 오랜 땀방울과 피눈물이 서린 배다리 골목길을 한꺼번에 날려 없애려고 하는 인천시이니, 말 다한 셈인가요. ‘자유공원’이 아닌 ‘만국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아닌 함세덕, 고유섭, 신락균, 박두성, 현덕, 조봉암 같은 분들 동상이 서야 할 텐데, 참말로.

 역사가 있어도 역사를 보지 않고, 문화가 있어도 문화를 느끼지 않고, 주민 삶이 있어도 함께 살려고 하지 않으니, 배다리이든 박정희 할머님 ‘수채화 인생’이든, 몇 해 지나지 않아, 어쩌면 2014년 아시안게임을 맞이하여, 티끌 하나로도 남지 않고 갈갈이 찢겨진 채 땅속에 깊이깊이 파묻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4341.3.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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