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엮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천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묶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니 천 해나 백 해는 꿈꾸지 말고, 쉰 해쯤이라도, 아니 서른 해쯤이라도, 아니 스무 해, 아니 열 해쯤이라도 사랑받을 만한 책을 펴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쩌면 한 해가 채 지나지도 않았으나 고침판을 내야 할 만큼 책을 엮지는 않는지. 어쩌면 새로 펴낸 그때에만 반짝 팔아치운 뒤 또다른 책을 새로 펴내며 그때그때 반짝반짝 팔아치울 마음은 아닐는지. 출판사 도서목록에는 수많은 책이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이리하여 출판사 햇수가 길어지면서 도서목록은 두꺼워지고, 알음알이하는 작가가 늘어나지만, 자기 출판사 일꾼조차도 자기 출판사에서 낸 책을 찬찬히 읽고 아끼면서 둘레사람한테 두루 소개하고 나누는 일은 못하고 있지 않을는지. (4341.6.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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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내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전철은 책을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곳입니다. 쇠바퀴와 쇳길이 부딪히며 내는 치치 소리 시끄럽고, 간첩신고 하라는 방송이 아직도 끊이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손전화 받는 사람 많은 가운데, 옆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밟고 치고 미는 사람 많은 전철입니다만, 마음을 그러모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서 가며 책을 읽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버릇을 들이면 괜찮아집니다. 버스는 너무 덜컹거릴 뿐더러, 운전기사가 지나치게 마구 몰아서 책을 읽기 아주 나쁩니다. 자가용을 몰면 책은 못 읽습니다. 집이나 일터에서는 수많은 일거리가 끊이지 않으니 책에 마음을 쏟기 어렵습니다. 일거리가 줄거나 고된 일을 마친 뒤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는 일이 한결 낫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전철은 책을 가까이하는 소중한 곳이 되기도 합니다. 가방에 책 한 권 언제나 챙겨 놓고 있다면. 가방 없는 빈손이라 해도 한손에 책 하나 들고 움직일 만큼 매무새를 추스를 수 있다면. (4341.6.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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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책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남 곤충의 변태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지음, 윤효진 옮김 / 양문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51 ― 수수한 애벌레한테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비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곤충ㆍ책》



- 책이름 : 곤충ㆍ책,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남 곤충의 변대
- 글ㆍ그림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 옮긴이 : 윤효진
- 펴낸곳 : 양문(2004.10.20.)
- 책값 : 12000원



 (1) 내 삶터에 함께 있는 꽃과 풀


 망초가 있고 개망초가 있습니다. 살구가 있고 개살구가 있듯, 둘은 조금 다릅니다. 개망초가 먼저 꽃을 피우고, 망초는 조금 늦게 꽃을 피웁니다. 이 풀꽃 이름을 놓고 이런저런 옛이야기가 있는데,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다만 한 가지, 우리들한테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풀꽃 가운데 하나입니다. 농사꾼들도 무척 싫어하는 잡풀 가운데 하나입니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돋는 망초, 꺾어도 꺾어도 다시 자라는 망초. 끈질기디끈질기기 때문에 풀약을 치지만, 풀약에도 꿈쩍을 않는 망초입니다.

 이러한 망초이지만, ‘망초’는 느즈막이 꽃을 피우고(7월이 넘어야), ‘개망초’는 일찌감치 꽃을 피웁니다(6월이 되기 앞서). 먼저 꽃을 피운 개망초는 자기 씨를 널리널리 퍼뜨립니다. 느즈막이 꽃을 피운 망초는 일찌감치 개망초한테 자리를 빼앗겨 차츰차츰 구석으로 몰립니다. 구석으로 몰리다 못해, 도시에서는 골목길 담벼락 밑자락 틈바구니에 겨우 보금자리를 틀곤 합니다. 개망초는 손바닥 만한 땅뙈기라도 있으면 먼저 차지를 해 버립니다. 개망초가 한창 꽃을 피워도 푸른 꽃잎만 내보이는 망초를 보고서, ‘오호라, 넌 여기에서도 잘 자라는구나.’ 하고 줄기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 질기네. 어쩜 저런 데서도 살아나나.’ 하면서 징그럽게 여기는 사람만 많습니다.

 조그마한 꽃을 피우는 망초와 개망초.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자그마한 꽃을 피우는 망초와 개망초. 때때로 한갓지기도 하여, 또는 공원 걸상에 잠깐 앉기도 하여, 사람들은 이 풀이 피워낸 꽃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이때마다 ‘이야, 조그마한 꽃이 퍽 예쁜데?’ 하면서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조그맣고 예쁘장한 꽃이 무슨 풀인 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게 되면, ‘뭐야, 그랬단 말야?’ 하면서 고개를 모로 돌리곤 합니다.


.. 무르익은 파인애플의 모습이다. 껍질이 엄지손가락만큼 두꺼워 깎아내고 먹어야 하는데, 자칫 어설프게 깎았다가는 날카로운 가시에 혀를 다칠 수도 있다. 포도, 살구, 까치밥나무열매, 사과, 배를 뒤섞어 놓은 것처럼 맛이 절묘하다 ..  (18쪽)


 지난 일요일 아침, 형과 함께 동인천 뒤편 골목길을 거닐었습니다. 우리 모두한테 고향인 인천이고, 어릴 적 참말로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놀던 곳인 동인천 둘레입니다. 저는 지난해에 인천으로 돌아와서 거의 날마다 이곳 골목길을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처음 인천으로 돌아와서 다닐 때에는, 어릴 적 그토록 신발이 닳도록 다닌 길이 잘 떠오르지 않아 낯설기도 했지만, 하루이틀 다시 걷고 또 걷는 가운데 예전 일이 하나둘 떠올랐고, 어릴 적 걷던 일도 차츰차츰 생각났습니다.

 늘 걷는 골목이지만, 늘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철 따라 골목길 꽃이 다르고, 꽃이 다 진 뒤에도 날마다 느낌이 달랐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꼭 한 해를 보내고 난 뒤 맞이하는 두 번째 여름도 새삼스럽습니다.

 송현동 골목길을 거닐다가, 늘 지나가는 길을 거닐다가, 낯익인 듯 낯익지 않은 듯한 열매나무를 보았습니다. 뭐지? 앵두인가?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살그머니 열매를 만져 봅니다. 말랑말랑합니다. 앵두 같은데. 그러나 앵두가 열매 맺힐 때 이런 모습이었나? 형은 “앵두는 아닌 듯한데. 앵두 열매를 보면 다르게 생겼잖아?” “그런가?”


.. 이 아메리카 버찌는 유럽의 버찌와는 맛이 틀리다. 하얀 꽃과 붉은 꽃을 같이 피운다. 나무의 크기도 네덜란드나 독일에서 자라는 버찌나무보다 크지 않다. 만약 이곳이 이윤에 덜 눈이 멀고 느긋한 농장주들이 지배하는 곳이라면 이 버찌들도 좀더 완숙한 맛을 내게 되지 않을까 ..  (32쪽)




 나중에 집에 와서 도감을 살펴보고, 찍은 사진을 둘레에 보여주니 ‘앵두가 맞다’고 합니다. 그래, 앵두. 그러나 척 보고도 앵두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앵두인 듯 아닌 듯 느끼는 가운데에도, 앵두나무 줄기가 이렇던가, 앵두잎이 이렇던가 하면서 고개를 몇 번이고 갸우뚱했습니다. 정작 앵두를 먹으면서 살아도, 또 ‘앵두 같은 내 입술 예쁘기도 하지요’ 하는 노래를 어릴 적부터 익히 들었어도, 앵두나무를 코앞에 두고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날, 형과 골목길을 거닐던 날, 앵두나무 꽃그릇에서 오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토마토 꽃그릇’을 보았습니다. 처음 토마토 꽃그릇을 보면서도, 이 꽃그릇에서 자라는 녀석이 토마토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노란 꽃이 어여삐 피기는 했는데, 무슨 꽃일까 한참 헤아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헤아리다가, 바로 옆에 꽃이 지고 열매가 맺은 앙증맞은 토마토 열매를 보고서는, 비로소, 아하, 깨달았습니다.


.. 나는 유별나게 생긴 이 애벌레가 어떻게 변신할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그런데 1700년 8월 10일 볼품없는 나방으로 변해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처럼 아름답고 특이하게 생긴 유충에서는 별 볼일 없는 녀석이, 평범하게 생긴 유충에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비와 나방이 탄생하는 일은 흔하다 ..  (50쪽)


 거리마다 은행나무가 가득입니다. 요사이는 벚나무를 아주 많이 심어서, 봄마다 사람들은 벚나무 구경을 갑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를 쿵쿵 찧으면서 은행 열매 거두려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태껏 한 번도 은행꽃을 못 보았습니다. 가지치기를 하도 해대는 바람에 은행꽃이 피었는지 안 피었는지 알아볼 수 없기도 했을 테지요(키높이에서는 은행 열매가 보이지도 않으니, 은행꽃이 피어도 여느 사람 키높이로는 알아보기 어려울 테니까요). 벚나무가 그렇게 곳곳에 피고 지고 하는데, 정작 버찌 열매는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다지 안 큰 벚나무도 많아서 벚꽃은 눈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왜 버찌는 구경할 수 없는지. 누군가 미리 따 가기 때문일는지. 들새가 모조리 따먹어서 버찌를 구경할 수 없었을는지.


.. 수리남에는 형형색색으로 다양한 종류의 포도나무가 사방에 우후죽순처럼 자란다. 가지를 꺾어 땅에 꽂아두기만 해도 6개월만 지나면 어느새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린다. 만약 매달 심는다면 1년 내내 포도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년에도 몇 차례씩 포도 수확이 가능한 수리남으로 포도주를 챙겨 온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  (98쪽)


 성당 나들이를 다녀온 옆지기가 쥐눈이콩 한 봉지를 사 옵니다. 우리는 서리콩도 먹고 까만콩도 먹고 푸른콩도 먹습니다. 어릴 적, 집에서 어머니한테 배우면서 콩을 심어 거두어서 먹곤 했습니다. 저잣거리에서 사먹는 콩맛도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국민학교 1학년 그 어린 날, 제가 손수 심고 날마다 가꾸어서 열매를 맺어 손수 콩깍지를 까서 밥에 넣어 먹은 그 콩맛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으며 군침이 도는 콩맛입니다.

 그때, 콩 열매만 먹는 줄 알고 콩잎 먹는 줄은 몰랐습니다. 고추를 먹으면서도 고추잎을 먹는 줄 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깨와 깻잎을 이어서 생각한 지도 몇 해 안 되었습니다. 호박과 호박잎, 무와 무잎, 그리고 김치와 날배추잎, 이 모두를 한동아리로 바라보고 받아들이지 못해 온 삶이었다고 할까요.

 도시내기니 어쩔 수 없다지만, 도시내기라고 해서 이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배속만 채우는, 슬픈 삶이라고 느낍니다. 흙이 어떤가에 따라서 콩맛이 달라지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콩맛이 달라지며, 쬔 햇볕에 따라서 콩맛이 어찌 달라지는가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저 무슨 콩이 영양소가 어떠하다는 수치와 정보만으로 콩밥을 먹는다면, 너무 딱한 삶이 아니랴 싶습니다.





.. 플로스 파보니스는 높이가 280센티미터 정도이며 노란 꽃과 붉은 꽃을 피운다. 씨는 출산 진통을 겪는 임산부를 위해 사용된다. 네덜란드인들 밑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는 여성 노예들은 아이를 지우기 위해 이 씨를 사용한다.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다. 서아프리카의 기니나 앙골라에서 끌려온 흑인여성 노예들은 보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 무자비한 착취가 계속되는 한 이들의 낙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  (127쪽)


 논이 있고 밭이 있는 시골에서 밥 한 그릇 받을 때하고, 논도 없고 밭도 없는 도시에서 자동차 씽씽 달리는 길에 둘러싸인 채 전기불 아래에서 밥 한 그릇 받을 때하고는 아주 크게 다릅니다. 해와 바람과 물과 흙으로 빚어낸 밥 한 그릇과 돈 몇 푼으로 얻는 밥 한 그릇이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히 갈무리된 도감과 그림책을 보면서 익히는 꽃 이야기, 풀 이야기, 나무 이야기하고, 우리가 손에 흙을 묻히면서 심고 가꾸는 꽃과 풀과 나무 이야기하고 같을 수 있겠습니까. 꽃집에서 소담스레 만들어 주는 장미꽃다발도 틀림없이 곱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에서 씨앗을 받아서 심는 꽃 한 송이도 틀림없이 곱습니다.


 (2) 《곤충ㆍ책》과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수리남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풀과 나무에 깃들어 살아가는 벌레 또한 가만히 살핀 이야기를 담은 《곤충ㆍ책》이 있습니다. 1600∼1700년대 수리남 자연 삶터를 담았다고 할 만한 책입니다. 그래서 2000년대 오늘날 수리남과 견주면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거의 300∼400이라는 햇수이니까요. 열 해만 되어도 강산이 바뀐다고 했거늘, 삼백과 사백이라는 숫자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동안 사라지는 푸나무가 있을 테며 새롭게 생겼다고 할 만한 푸나무가 있습니다. 삼백 해와 사백 해라는 세월 동안 달라지는 우리들 사람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백과 사백이라는 숫자를 놓고도 달라지지 않거나 고이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사백 해가 아닌 오백 해나 천 해가 가도록 바뀌지 않는 우리들 사람 삶 또한 있습니다.


.. 출판을 통해 큰 이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다. 그저 들어간 비용만 회수되면 족하다. 나는 책을 만드는 데 비용을 아낌없이 지출했다. 곤충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만족감과 즐거움을 주려는 일념으로 저명한 장인에게 동판화의 제작을 의뢰했고, 가장 질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으로 나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고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이다 ..  (12쪽)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사람들 삶터는, 식민지로 부리던 살갗 하얀 사람들 때문에 크게 바뀌었습니다. 수리남사람 스스로 즐거웁거나 기쁘도록 농사를 짓고 문화를 가꾸고 마을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수리남사람이 먹고마실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수리남사람끼리 신나게 어울리며 애틋하게 사랑을 나눌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수리남 삶은, 또 삶터는, 또 자연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요. 나아지고 있습니까. 나아졌다고 할 만할까요.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는지요. 우리하고는 너무 먼 나라이니까,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이니까, 그곳이 어찌 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을 일인지 모르고, 또 우리들은 우리들 일로도 너무 바빠서 그런 곳까지 헤아릴 까닭이 없을지 모릅니다만, 수리남 사람과 자연 삶터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요.


.. 메리안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리남 식민사회를 지배하는 오만한 사탕수수 농장주들과 갈등관계에 놓인다. 그는 흑인을 비인간적으로 착취하는 농장주들을 비난했고, 그들은 메리안을 돈도 되지 않는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는 괴상한 여자라고 비웃었다. 노예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나 노예를 데리고 열대림을 누비는 행동이 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메리안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농장주들을 의식하지 않았고, 또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 메리안은 아무리 혐오스러운 생물일지라도 가까이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 주목받지 못하는 미물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로 하여금 열대의 자연을 더욱 놀랍고 감동적으로 체험하게 했다 ..  (헬무트 데케르트/189∼190쪽)


 어쩌면, 《곤충ㆍ책》을 그리고 쓴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라고 하는 사람한테도, 더구나 1600∼1700년대 그때에, 게다가 여자라는 몸으로 미루어보건대, 수리남이라고 하는 식민지 나라에, 또한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고 있지 않던 ‘수리남 벌레들 탈바꿈’에 눈길을 두는 일은 몹시 철없는 짓이고 어처구니없는 짓이며 시간과 돈이 남아도니 하는 짓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자기 스스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할 만한 일이 무엇이고, 자기가 애틋하게 바라볼 만한 일이 무엇이며, 자기가 몸바쳐서 이루어내면 좋을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식민지 지배자들 편견과 끔찍한 날씨와 말라리아와 어려운 살림살이 모두를 견디어내거나 이겨내면서 책 하나를 빚어냈습니다. 《곤충ㆍ책》을. 그리고 새로운 꿈도 꾸었어요. “(도마뱀은) 죽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구하지 못하면 개미나 파리를 먹기도 한다. 만약 이 책이 독자의 호평으로 많은 판매수익까지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런 동물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싶다(24쪽).”는 꿈을. (4341.6.6.쇠.ㅎㄲㅅㄱ)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1647∼1717)

동판화가이자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이자 서지학자로 이름을 날린 ‘마테우스 메리안’이 낳은 딸. 그렇지만 마테우스 메리안 후광은 식구들한테 조금도 퍼지지 못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을 낳은 어머니는 ‘마테우스 메리안이 나중에 얻은 여자’였고, 아버지라는 사람이 죽자 그 집안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신분에 하잘것없는 살림에 아무것도 없는 형편으로 스스로 모든 삶을 일군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독일 마르크돈 500마르크짜리에 얼굴을 새기기도 한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이이가 조그마한 벌레 삶을 헤아리며 그림으로 남기던 때에는, “애벌레나 구더기들이 더러운 쓰레기에서 생겨난 악마”라고 여기던 때. 마녀로 도장찍혀 죽을 수 있었고,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 오랜 경험과 지켜보기로 빚어낸 책과 그림을 놓고 ‘거짓말’이라고 깎아내리는 터무니없는 말을 들으면서 쓴맛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러나 자기 연구와 예술을 지키고 가꾸조가 가시밭길을 꿋꿋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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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저장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훈 할머니 편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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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50 ― ‘나라’는 내버리고, ‘우리’는 등돌린 여자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책이름 :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 글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펴낸곳 : 아름다운사람들(2004.2.24.)
- 책값 : 8000원


 (1) ‘미친’ 소와 ‘미친’ 날씨


 유월을 사흘 넘긴 아침, 찌푸린 하늘에서는 비가 오다가 구름이 걷히다가 해가 나다가 슬며시 더웠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합니다. 벌써 유월인데 올해 여름은 어찌 되려나 궁금합니다. 올여름은 지난여름처럼 끔찍하려나. 올해에는 여름이란 싹 사라지고 곧바로 겨울로 이어지려나. 그치지 않는 더위만 이어졌다가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었다가 갑자기 얼어붙은 채 두 달 가까이 이어졌던 지난 한 해 날씨인데.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사라지고 철과 절기도 사라진 오늘날, 하루하루 날씨를 헤아릴 때마다 두렵습니다.

 우리들 밥상에 올려질 밥과 반찬도 걱정이지만, 우리 삶에 골고루 영향을 끼치는 날씨도 걱정입니다. 여름인데 덥지 않아서 걱정이고, 여름인데 햇볕이 뜨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모기가 온 집안을 휘젓지는 못하고 바퀴벌레도 좀처럼 나다니지 않아서 한숨을 돌리지만, 이 같은 날씨가 우리 몸에, 또 아기 몸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겹겹이 걱정입니다.


.. 이남이는 경상남도 마산 진동에서 나고 자랐다. 집에서 걸어가면 바다 푸른 물결을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방파제에 나란히 앉으면 고깃배가 드나들었다. 부두에서 배를 타고 앞바다 섬에도 가 보았다. 부두로 가기 전 지나치는 곳엔 제법 큰 염전이 있었다 ..  (16쪽)


 지난 토요일, 목포에서 일하는 형이 동생을 보러 인천 나들이를 왔습니다. 하루밤 함께 묵고, 이튿날 아침에 슬슬 골목길을 거닐었습니다. 형은 이 골목을 아주 오랜만에 걷기도 하고 많이 바뀌어서 못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인천역에서 내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데 중앙시장에서 헤맸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헤맸습니다. 골목골목 늘어서 있던 집들이 죄 사라지고 길이 넓어졌거든요. 없던 찻길이 생기고 없던 넓은 길이 늘어났거든요. 극장은 한 군데 빼고 모조리 문을 닫았고, 극장을 둘러싸고 있던 온갖 집과 길도 싹 바뀌었습니다. 저잣거리도 바뀌었습니다. 다만, 섣불리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들에는 예전 자취가 남아 있어요.

 동인천역 뒤편, 송현동 골목길마다 활짝 피어 있는 꽃을 구경하며 거닐던 때입니다. 조그마한 노란 꽃이 꽃그릇에 줄줄이 피어 있습니다. 오이꽃일까, 생각하며 다가갑니다. 오이꽃이 아닙니다. 토마토꽃입니다. 이야, 이렇게 집에서 토마토를 꽃그릇에 심어서 기르기도 하는구나.

 이제 막 어른 새끼손톱 만하게 열매가 영글기도 하는 토마토. 아직도 꽃을 마알갛게 피우기도 하고, 하나둘 열매가 맺기도 하고. 그래, 5월 끝머리부터 6월 첫머리에 오이꽃도 피고 호박꽃도 피고 참외꽃도 피고 수박꽃도 피지.


.. 그 일본사람은 이남이에게 ‘하나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남이는 왜 ‘이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나코’가 되어야 하는가. 일본사람은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게 했다. 일본사람을 ‘주인’이라 불러야 하는 조선 여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도착하고서야 이제 분명해졌다. 조선 여자들은 일본군인의 성노예로 이 먼 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것이다 ..  (32∼33쪽)


 응? 그러고 보니, 정작 오이며 참외며 수박이며 토마토며, 꽃필 무렵은 유월 앞뒤인데. 커다란 할인매장에는 철없이 늘 토마토가 있었고 오이가 있었잖아. 저잣거리에 참외가 모습을 드러낸 지도 거의 석 주가 되었고, 수박도 두어 주 앞서부터 많이 나왔는데.

 철에 따라 움직인다면, 철에 따라 피고진다면, 참외며 수박이며 이제 막 꽃을 피울 때인데. 토마토도 이제부터 꽃이 필 때인데. 제철을 따지자면, 바로 이맘때 딸기를 먹고 살구를 먹고 복숭아를 먹어야 하지 않어?

 그런데 우리는 포도를 언제 먹지? 딸기가 어느 날부터 저잣거리에서 싹 사라졌지? 밤은 언제 거두지? 능금과 배는 언제 열매가 익어서 언제 우리가 먹었지?


.. 그들에게 조선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남이는 일본군인에게 성욕을 배설하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 프놈펜에 도착해서 처음 이틀은 쉬었다. 단지 군인들이 안 왔을 뿐이지 그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일본병원에 갔다. 성병검사. 그 검사는 여자들을 위한 검사가 아니었다. 성병검사는 일본군인들을 위해서였다 … 그 높은 사람은 이남이의 부탁쯤 군복에 살짝 달라붙은 먼지 털어 버리듯 아무렇지 않게 털어 버렸다. 이남이는 아픈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  (34,38,44∼45쪽)


 모내기는 유월에 했다지만, 요새 유월에 모내기를 한다고 하면 건달농사도 아닌 바보짓을 한다고 할 테지. 보리를 심거나 거두는 때, 밀을 심거나 거두는 때, 수수를 심거나 거두는 때, 옥수수를 심거나 거두는 때가 도무지 어찌 되었나. 지금 우리들은 쌀도 먹고 보리도 먹고 율무도 먹고 겨자도 먹고 파도 먹고 감자도 먹고 고구마도 먹고 양파도 먹고 빨간무도 먹고 고사리도 먹고 시금치도 먹고 냉이도 먹고 고들빼기도 먹고 두릅도 먹고 하지만, 정작 어떤 나물이 어느 때에 어디에서 나고 자라는지, 정작 어떤 푸성귀를 어느 때 캐거나 따거나 뜯는지를 알고나 먹고 있으려나.

 아니, 우리들한테는 딸기가 언제 어떤 빛깔 꽃을 피우는지, 딸기가 덩굴풀인지 아닌지, 딸기가 한해살이인지 두해살이인지 여러해살이인지, 딸기가 언제 익어 언제 따서 먹는지는 몰라도 될는지 모를 일일는지도.

 가게마다 딸기값이 어떻게 다른가만 알아도 넉넉한지도. 어느 가게에서 사는 딸기가 크고 달고 좋더라, 하는 정보만 알면 그만인지도. 여름이 아닌 봄에 먹든, 여름이 아닌 가을이나 겨울에 먹든 알 바 없는지도.


..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누나 이남이. 남동생 이태숙은 그렇게 누나를 그리워하다 92년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56년 아버지, 72년 어머니, 79년 언니 덕이가 그립던 동생 소식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동생마저 갔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이남이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65쪽)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동무들이 공부를 지루해 하고 모두 축 처져서 힘들어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당신 옆지기가 아이 낳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 입덧을 하면서 딸기를 먹고 싶어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날 어디에서 딸기를 얻겠습니까. 요즘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을 터이나, 1980년대 국민학교 교실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입덧을 하면 여자도 걱정이지만, 남자도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느라 참 힘들겠구나. 그런데 나는 나중에 커서 옆지기가 한겨울 밤에 딸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이 밴 여자가 입덧을 한다 할지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어떤 열매도 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안에서 키우지 않는 먹을거리라 해도 돈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게다가 금세 사들일 수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배를 먹을 수 있거든요. 여름날 쌀 떨어질 걱정을 누가 합니까. 식량자급율이 20%를 가까스로 넘는 한국땅이지만, 밥이 없어서 못 먹는 일이란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밥을 굶을 뿐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만 못 사고 못 먹고 못 즐길 뿐입니다.


.. 우리 나라에 캄보디아말을 전공한 사람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어서 훈 할머니의 속마음을 쉽게 헤아리기는 힘들었다. 말로 통할 수 없기 때문에 할머니는 눈빛, 표정, 몸짓을 잘 지켜봐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사람이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 그래서 더욱더 캄보디아말만 열심히 했을 할머니를 떠올리면 ..  (115∼116쪽)


 ‘미친소’ 고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나 옆지기는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거의 사먹을 일이 없어서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걱정은, 우리들이 늘 먹는 곡식과 푸성귀를 마음놓고 얻거나 먹을 수 없는 대목, 또 싱싱한 푸성귀 구경이 어렵다는 대목에 있습니다. 우리 형편은 닿을 수 없어서 손수 논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농약과 비료 안 쓴 곡식값이 비싸다고 하나, 제가 느끼기로는, 지금 우리네 곡식값은 너무나도 낮은 헐값입니다. 유기농 곡식을 사먹는 일은 조금도 비싸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외려 싸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씨눈이 살아 있는 누런쌀을 먹고 싶으나, 우리처럼 쌀깎기를 거의 안 한 누런쌀을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이런 누런쌀 얻기가 쉽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눈밝히고 귀밝히면서 좋은 곡식을 얻어서 먹는다 한들, 나날이 날씨가 미치고 물과 바람이 어지러워지고 말면, 제아무리 유기농이라고 하는 곡식도 오롯이 살아 있는 밥이 되기 힘듭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 구석구석 공장이 들어서잖습니까. 산골짜기 안쪽까지도 아스팔트가 놓이잖습니까. 손으로 짓고 똥오줌으로 거름내어 짓던 농사가 자취를 거의 감추어 버렸잖습니까. 날마다 똥오줌 안 누는 사람이 없건만, 그 어마어마한 똥오줌이 거름이 아닌 쓰레기가 되어 하수구로 흘러들며 물을 더럽히고 자원을 헤프게 버리는 한편, 쓸데없는 데에 시설투자와 건물짓기가 끊이지 않잖습니까.

 ‘미친소’ 고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나라 땅에서는 이 많은 도시사람들 밥상을 채울 수 있을 만큼 고기소를 기르기 어렵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어쩌다가 한 번 먹는다고 한다면 한국땅에서도 고기소를 기를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한 주에 한 번도 아닌, 거의 날마다 고기를 밥상에 올려 버릇하고, 술안주로 삼는 우리들 삶이라 한다면, ‘미친소’ 고기가 아닌 ‘한국땅 소’ 고기라 하더라도 항생제와 사료로 자라는 소고기일밖에 없어요. ‘미친소’ 고기가 왜 ‘미친소’ 고기가 되었겠습니까. 하루치 사료 값이라도 줄이려고 성장촉진제를 먹이고 갖가지 ‘질병 막는 항생제’를 먹입니다. 사료에는 처음부터 이러한 항생제와 호르몬제를 담아 놓고 내다 팝니다. 우리는 고기를 먹는다기보다 항생제를 먹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 할머니는 누가 누군지 모르니 투표 안 하겠다고 하셨다. 다음날 잔니에게 전화가 왔다. 투표하고 왔다고.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이 집에 왔었노라고. 할머니는 집에 계시고 싶어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갔다고. 한 회원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방송사에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정말 투표하고 싶으셨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취재를 하는 것만도 관심을 갖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단다. 관심이란 어떤 것일까? 우린 정말 어떤 것을 보고 관심이라고 부르는 걸까? ..  (126쪽)


 한여름도 아닌 5월부터 참외를 먹으면서 속이 찜찜했습니다. 여름도 아닌 3월부터 딸기를 먹으면서 속이 께름했습니다. 나라밖에서 들어온 오렌지를 먹고 바나나를 먹으면서, 시큼달콤한 석류를 먹으면서, 더구나 한국땅에서 석류를 거두어들이지도 못하면서 한국땅에 넘쳐나는 ‘석류 마실거리’를 이웃사람한테 얻어마시면서 속이 껄쩍지근했습니다.

 참말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처럼,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마시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노릇인가요. 햇볕을 쬐고 물만 마시고 바람을 들이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인가요. 사람으로 태어난 몸, 어쩌는 수 없이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면서 살아갈밖에 없나요.

 철을 잊건 말건, 공기가 나빠지건 끔찍해지건,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없고 수도물도 바로 마실 수 없으니 끓이거나 정수기를 집집마다 달아 놓고 마셔야 하건 말건, 이리하여 날마다 더더욱 찌푸려지고 미쳐가는 날씨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우리 삶은 돈벌이만 잘할 수 있으면 그만인 셈인지요. 몸이 무너지고 망가지더라도 몇 손가락으로 꼽히는 대학교에 동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으면 즐거운 노릇인지요. 참사람 되는 매무새를 익히지 않더라도, 어릴 적부터 한자 지식과 영어 지식을 머리속에 많이 집어넣고 있으면, 늙어서 죽는 날까지 걱정 하나 없을는지요.


.. 고향에 와서는 캄보디아에 있는 자식들이 못내 눈에 밟혔고, 그래서 다시 돌아간 캄보디아에서는 다시 이 땅이 그리웠다 ..  (138쪽)


 촛불집회로 그나마 ‘미친소’ 고기 하나라도 막아 보려는 그 발버둥 같은 몸부림조차 주먹질과 몽둥이질과 물뿜질과 발길질과 방패질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야 하는 이 나라입니다. 이 땅을 어찌 ‘큰 한겨레인 민주 나라(大:크고 韓:한겨레이며 民:백성이 임자인 國:나라)’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라는 책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이름은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이지만, 정작 이 책에서 다루는 “버려진 조선의 처녀”는 오직 한 사람,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던 ‘훈 할머니(이남이)’입니다.


.. 피해자들을 침묵에 가두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일본 정부만이 아니다. 당연히 피해자들을 대신해 싸워야 할 정부, 그리고 이 사회에 사는 우리도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건 아닌가 ..  (80쪽)


 누군가 훈 할머니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음을 ‘찾았다’고 했지만, 누군가 찾지 않았어도 할머니는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못 보고 있었을 뿐, 아니 보려고 안 했을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래요. 훈 할머니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 아니 아시아 곳곳에는 당신들 어린 날 받은 깊은 생채기를 가슴에 끌어안고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둔 할머님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 숫자를 제대로 모릅니다만, 한둘이나 이삼백이나 삼사천이 아닙니다. 사오만도 아닙니다. 얼추 이십만이라는 숫자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또 나라밖에서도 당신들 아픔과 괴로움을 선뜻 털어내지 못합니다. 정작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달래면서 새힘을 얻어야 할 피해자는 할머님들인데, 할머님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할머님을 고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일본 제국주의자와 군인이 먼저 이 나라 여자를 괴롭혔다고 하겠습니다만, 일본 제국주의와 군인이 물러간 자리에서 이 나라 사람들(그 가운데 남자들)은 무엇을 했던가요.


.. 할머니가 자신을 되찾은 날은 77년 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날이다. 훈 할머니는 가족을 찾았는데, 할머니가 찾아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했는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처벌을 받았는가. 당시 끌려간 아시아 20만 일본군 ‘위안부’를 향해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했는가. 일본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알렸는가. 진실을 알렸는가 ..  (89쪽)


 저는 꿈꾸기를 좋아합니다. 꿈을 꾸고 난 다음에는 제 깜냥껏 조금이나마 움직여 보고자 애써 봅니다. 요즈음 꾸는 꿈 하나는 이렇습니다. 제 몸은 인천 배다리라는 곳에 있고, 이곳에서 동네사람하고 힘에 벅차도록 인천시 개발업자 공무원하고 싸워야 할 일이 있어서 멀리까지 힘을 북돋우거나 거들지는 못합니다만, 광화문이나 청계천 둘레, 또 시청 둘레에서 촛불을 들고 한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수요일 하루쯤은 한두 시간이어도 좋고 삼십 분이어도 좋으니, 일본 대사관 앞에 함께 찾아가서 할머님(일본군 성노예로 몸과 마음이 다친 할머님)들과 함께 ‘수요집회’를 한 다음, 다시 촛불집회 터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 한 이산가족의 애달픔으로 바라보지 말자. 잠시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우리 자신을 위로하지 말자. 이 눈물의 현장에 일본 제국주의를 불러다 놓자. 역사를 왜곡하며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는 일본을 불러다 놓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 끝났다고 재를 뿌리는 정부를 갖다 놓자. ‘다 지나간 일, 좋게 좋게’라고 하는, 역사를 잊은 우리를 불러다 놓자 ..  (97쪽)


 촛불집회를 하려고 날마다 꾸준하게 광화문에 모이시는 분들이라면, 목요일에는 탑골공원 앞으로 잠깐 걸어가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분들하고 목요집회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왜 저 할머니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 해도 넘는 긴 세월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저렇게 싸우시나’ 하고 생각해 보고, 목요일에는 ‘왜 저 아주머니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렇게 국가보안법 문제를 외치나’ 하고 생각해 보는 셈입니다.


.. “내가 살아온 것, 어떻게 다 말로 해요. 말을 하려면 자꾸만 눈물이 나요.” ..  (143쪽)


 이명박 대통령과 이 나라 공무원과 수입업자들이 ‘미친소’이든 ‘미치지 않은 소’이든 자꾸자꾸 들여오는 까닭과 뿌리는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멀리 있지도 않아요. 바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못 느끼거나 안 돌아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금만 둘러보면 됩니다. 살며시 마음을 기울여 보면 됩니다. 촛불이 횃불이 되고 횃불이 우둥불이 되도록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면 됩니다. (4341.6.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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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가나아트갤러리 편집부 엮음 / 가나아트갤러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알라딘 목록에도 없고, 교보 목록에도 없기에, 아무 책에다가 걸어 놓을 수밖에 없다.

 사진이라도 보시라고, 겉그림을 긁어서 붙인다.)





 이응노를 모르는 한국, 이응노를 모르게 하는 한국
 [사라진 책 25] 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 다에코,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책이름 :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이야기 나눈 이 :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
- 엮은이 : 도미야마 다에코
- 옮긴이 : 이원혜
- 펴낸곳 : 삼성미술문화재단(1994.4.30.)



 (1) 사라진 책 만나기란


 판이 끊어진 책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헌책방에서? 헌책방에 간다고 해도, 판이 끊어진 책이 ‘팔렸던 부수’만큼만 있을 테고, 또 ‘그 책을 사 갔던 사람이 집에 모셔 놓지 않고 내놓아 주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바라던 책 하나가 헌책방에 들어왔다손 치더라도, 그 책이 들어온 그날 내가 그 헌책방에 찾아가서 만나지 않는다면 헛일입니다. 다른 책손이 먼저 알아보고 가져가면 물거품입니다.

 이응노(1904∼1989), 박인경(1926∼ ), 도미야마(1921∼ ), 이렇게 세 사람이 프랑스에서 두 달에 걸쳐서 만나서 나눈 이야기, 그러니까 당신들 살아온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풀어낸 책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헌책방에서 뜻하지 않게 만났습니다. 천천히, 아주 더디게 곱새기면서 읽습니다. 보기 드문 책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그러나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으로.

 반 해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어냅니다. 책을 다 읽은 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나, 아니, 도서관에는 이 책을 갖추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전국 도서관 찾아보기’를 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딱 한 권 뜹니다. 이곳에 가면 이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군요. 아예 없지는 않네요. 그러면,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 가면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구경을 넘어서 두고두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권 살 수 있을까요?

 새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이응노 선생 책은 몇 가지 없습니다. 목록에는 여러 권 나오지만, 품절과 절판이라는 딱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이책 한 가지만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어린이책으로 한 권이라도 있으니, 아이들이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삶’을 살짝이나마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권으로 이응노 님 삶을, 그림세계를,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을는지요.

 작은 발자국을 남겼든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든, 가까이하기에느 그지없이 어렵겠구나 싶은 한편으로, 그림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발자취를 어떻게 짚어 나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대학생들이 논문을 쓴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갈무리해서 쓸 수 있을는지요. 그나마 그림은 제대로 살펴보고 쓸 수 있을는지요.


 (2) 우리 곁에 있는 그림이란, 또 그림책이란


 ‘이응노’ 이름을 내건 미술관에서 내부직원이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이응노 선생 그림 도둑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홀어미 박인경 님은 지아비 이응노 님 그림 삼백 점을 믿고 맡기려고 하다가 주춤했다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응노 님 그림세계를 좀더 두루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맛보기는 한결 어려워지기만 하는 셈인지.

 이렇든 저렇든, 이응노 님은 당신을 기리는 미술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복받은 몸입니다. 이 나라에는 제대로 기림을 못 받은 채 숨죽이는 그림쟁이가 많잖아요. 기림을 받더라도, 여느 사람들이 넉넉히 당신들 그림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즐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잖아요.

 서울 아닌 곳에서 느긋하게 그림을 즐길 만한 곳은 어디에 얼마쯤 있을까요. 도시에서는 중심지 말고 변두리에서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에서는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살풋이 그림을 맛볼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그러니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얼마나 그림을 자기 삶 가까이에 놓고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학교마다 ‘미술 수업’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미술 수업 때에는 어떤 그림을 살펴보면서 배우고 자기 스스로 그림그리기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는가요.

 오늘날 우리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들러싸여 있습니다. 글만 담는 책은 아주 드뭅니다. 사진이 없으면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책에도 그림을 잔뜩 곁들이지 않으면 팔기 어렵습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수도 없이 쏟아집니다. 어린이 그림책에 그림을 담는 새로운 그림쟁이는 날마다 태어납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있고, 셈틀 화면을 보며 그리는 이가 있습니다.

 그림쟁이를 이야기하는 책도 무척 많습니다. 비록, 거의 모든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은 서양 그림쟁이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한국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조차 역사책에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몰려 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또 온갖 이야기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우리들은,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림을 어떻게 헤아리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 와닿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란 무엇이라고 받아들입니까.

 넘치는 사진과 그림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사진과 그림은 안 넘치다 못해 모자라지는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자기 스스로 가슴을 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유행에 따라서 몸이 굳어지거나 흔들린 탓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삶을 담는 예술에서 멀어지고, 예술에 담는 삶이 사라지는 오늘날, 우리가 마음 느긋하게 즐기는 그림이나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자꾸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거나 우리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그림쟁이는 누구이고, 이분들 그림을 얼마나 손쉽게 마주할 수 있을까,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응노를 알 수 없게 하는’ 한국땅에 남아 있는 말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읽는 동안 제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 가운데 몇 대목을 옮겨 봅니다. 생각있는 어느 분이 있다면 앞으로 언제가 되더라도 이 책을 되살려 주시겠지, 하고 믿으면서. 이 책 하나 헌책방에서 캐내는 분은 캐내는 분대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고, 끝내 못 찾아내는 분은 못 찾아내는 아쉬움을 씁쓸히 곱씹더라도 이 몇 마디 말이라도 만나보시길 바라면서.


[도미야마] 정말 놀라셨겠군요. 감쪽같이 속인 납치극이에요.
[이응노] 내 나라니까 철석같이 믿은 거지요. 난 뭣 땜에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조사하던 사람 중 하나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한 거다. 그러니 솔직히 다 털어놓으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겁니까?” 그랬더니 커다란 나무몽둥이를 보여주었는데, 고문할 때 쓰는 거였지요. “이것 봐요, 이 몽둥이로 한 번 맞았다가는 목숨 건지기도 힘들어요. 여긴 프랑스가 아닙니다. 노인네라고 봐주는 줄 알아요?”라고 소리치며 겁을 주더군요. 하지만 나는 정말 뭣 땜에 그러는지 몰랐었지요. 그러자 KCIA가 “당신, 평양 갔었지?” 그러는 겁니다. “간 적 없다”고 하자, “안 되겠군. 맞아야 털어놓을 거요?”라며 협박을 하더군요. 가지도 않았는데 뭘 털어놓느냐, 그렇다면 증인을 불러내라고 하니까, 동베를린엔 왜 갔느냐, 정치자금은 얼마나 받았느냐, 무엇에다 썼느냐, 누구누구에게 얼마나 건네줬느냐, 5만 달러냐, 10만 달러냐 등등, 이런 식의 취조가 저녁 7시부터 한 새벽 2시쯤까지 계속되었어요 ..  (19∼20쪽)

[이응노]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하기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 ..  (22쪽)

[도미야마] 선생님의 인생에서 옥중 생활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요?
[이응노] 나는 형무소에 수감될 때까지는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어요. 일제 때는 한국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생각도 했지만, 해방 후엔 오로지 그림만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비리를 저지르고 들어오는 부자의 수감 생활이란, 그야말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떨어진 독방에서 마치 호텔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매일같이 불고기가 나오고 외제 고급 위스키를 마시고, 간수들도 그 덕을 보니까 그들은 간수들을 마치 종 다루듯 했지요 ..  (25쪽)

[이응노] 형무소야말로 사회를 배우게 해 준 학교였답니다. 한국사회는 사람들을 나쁜 길로 가게끔 만들어요. 아니, 한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등에 진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금권정치의 부패겠지요. 일본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일본엔 민주주의가 있잖습니까? ..  (28쪽)

[도미야마] 근대로 향한 첫걸음은 그런 가부장적인 가정과의 대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그런 면에서는 훨씬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이응노] 유교적인 가족제도는 아직도 남아 있지요.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결혼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보다 내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을 차츰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하고 서양식 양복도 입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 시대를 앞서가는 신사처럼 보였어요. 그런 모습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는 이대로 있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하게 되었지요 ..  (55쪽)

[이응노] 그때서야 내가 왜 그동안 낙선만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작품이 입선을 하기는 했지만, 그 7년 동안 내 그림은 완전히 죽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림을 모방만 하고 있었던 거지요. 대나무 가지 치는 것도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애쓰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좋아, 입선감이다.” 하셨더라도 심사위원은 여러 사람이었으니까요 ..  (69쪽)

[도미야마] 저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그림을 택했기에 자식 둘과 함께 전쟁 뒤의 참담하고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로서도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오게 된 것이지요.
[박인경] 나는 지금 여류작가 박경리 씨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고 있습니다. 김지하 씨의 장모 되는 사람의 글인데,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우리 나라 여류화가들은, 나를 포함해서입니다만, 사상성이나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애를 쓰지 않아요 …… 동양화 수업이란 것이 그야말로 전통적인 모방기술에 불과했으니까요. 예술이란, 진정한 전통이란 이런 것이 아닌데, 감동도 창작도 타오르는 열정도 없는, 마치 타고 남은 재 같은 분위기였답니다 ..  (94쪽)

[도미야마] 저도 그렇답니다. 그 시대에 저는 아직 병아리 화가였고 미술학도였으니까 전쟁화를 그리지 않아도 되었지요. 그러나 만약 생활고에 시달리는 화가였다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자문자답을 해 보게 됩니다. 부양가족을 둔 가난한 화가는 소년잡지에 〈황취(荒鷲) 전투도〉 같은 것을 마지못해 그리곤 했지요. 반면에 부유한 화가는 값비싼 프랑스제 물감을 쌓아 놓고 아틀리에에서 우아하게 정물화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어요. 전쟁화를 그렸느냐의 여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서 그 후의 출발점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고무시키는 것에 협력한 화가들이 스스로 그것을 감추고 오히려 화폭에 민족적인 소재를 담는 것으로 대가의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  (102쪽)

[이응노] 국전이란 대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위한 전람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나는, 혼자 버티면서 국전을 비판했지요. 정치 세계든 미술 세계든 간에 모두 사기꾼 같은 자들이 멋대로 설치고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  (120∼121쪽)

[이응노] 1955년에 그린 〈취야〉는 자화상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1954년에 그린 〈영차, 영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내는 소리가 있는데, 서까래 하나를 4명이서 들처메고 ‘영차, 영차’ 입을 맞추면서 옮겨가고 있었지요. 역시 나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  (144쪽)

[이응노] 옛날 사람의 문자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서 흉내내기만 한다면 그건 단지 모방에 지나지 않아요. 만약 혁명가라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창조적인 자기 것을 만들어 표현하겠지요 …… 그렇지요, 고전의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전으로부터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정신과 사상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동양화는 아직도 옛날사람들이 했던 것 그대로 틀만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  (145, 146쪽)

[이응노] 그림이란, 벽에 거는 장식품으로만 그쳐서는 안 돼요. 사회의 모습, 순수한 인간에 대한 애정……, 이런 피끓는 발언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에 생명이 깃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67쪽)

[이응노] 그게 바로 파리의 한국인과 베를린의 한국인의 차이점이지요. 파리에도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지만, 그들은 모두 돈 많은 집 자식들이고, 또 귀국 후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민주화운동 같은 것에는 일절 관여하지를 않아요 ..  (170쪽)

[이응노]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4341.5.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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