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야생으로 - 시튼의 야생동물 이야기 6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지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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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다시 야생으로
- 글쓴이 : 어니스트 톰슨 시튼
- 옮긴이 : 장석봉
- 펴낸곳 : 지호(2004.2.27.)
- 책값 : 11000원



 이 책 하나 34 ― ‘멧돼지, 너구리, 박쥐’는 우리 이웃
 :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다시 야생으로》를 읽고



 (1) 사진과 삶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기꺼이 내걸어 주면서 사진잔치를 열어 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저녁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마십니다. 저녁 먹는 밥집에서 나물 반찬을 많이 내어줍니다. 달래무침이 보이고 원추리무침이 보입니다. 쉬 맛볼 수 있다면 쉬 맛볼 수 있는 나물이지만, 쉬 맛보기 어렵다면 쉬 맛보기 어려운 나물입니다. 아직 봄이 아니라 이런 나물을 맛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비닐집에서도 키우고 중국에서도 사들이고 있을 테지요.

 원추리무침을 냠냠짭짭 하다가 문득, 이 원추리무침이 원추리무침인 줄 아는 분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추리가 봄에 노랗게 고운 꽃을 피우는 줄 아는 분은 또 얼마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제 그 말들도 콜리베이가 자신들과 같은 동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대로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야성의 피가 흐르는 말이라는 것을. 자줏빛으로 물든 평원에 밤이 찾아왔을 때 녀석은 야생마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길고 힘든 여행을 한 끝에 드디어 고향을 찾은 것이다 ..  (29쪽)


 밥집 나물 반찬을 여러 그릇 비웁니다. 그렇게까지 맛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물 반찬이었기에 자주 손이 갑니다. 좀 시고 달고 짠 맛이 있습니다. 양념을 많이 하신 듯합니다. 버섯칼국수를 먹는데, 여기에 넣는 양념도 아주 목과 혀를 건드릴 만큼 맵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이나 맵다고 느끼지, 다른 분들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저와 옆지기는 나물을 먹을 때 따로 무치지 않습니다. 그냥 날것 그대로 물에 헹구기만 해서 먹습니다. 무도 배추도 날것 그대로 먹습니다. 정구지도 그냥 먹으면 더 맛납니다. 시금치도 얼갈이도 흙만 씻어내고 먹습니다. 이렇게 먹으면서 풀맛이 참 달다고 느낍니다. 그러면서 배부르게 먹지 못합니다. 익힌 푸성귀는 배부르도록 먹으면서도 더 먹게 되지만, 날 푸성귀는 많이 먹지도 못하게 되고 꼭 배에 알맞도록만 먹게 됩니다.


.. 그곳에는 인간이 마련해 주는 맛있는 목초도 없고 곡물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야생의 질긴 풀과 드넓은 평원, 그리고 그곳으로 불어오는 바람뿐이다. 그러나 콜리베이는 이곳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얻었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  (31쪽)


 사진잔치를 여는 곳에서 여러 분들하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분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진기로 담아내는 모습은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에서 어느 한 순간을 훔치는 일’이 아닐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한 말씀 올립니다. “어떤 사진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한 순간을 훔치는 사진일 수 있을 테지만, 제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끼기로는, 제가 그분 삶에서 한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내면서 그 순간을 선물해 드리는구나 싶어요.” 하고.

 한 분이 말씀합니다. “디지털사진으로 찍기보다는 필름사진도 함께 찍어 보면, 사진을 찍는 맛을 남달리 느낄 수 있”다고. 저는 필름과 디지털 두 가지 모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낀 대로 한 말씀을 올립니다. “필름사진이라고 해도 똑같이 기계이고, 디지털사진이라고 해도 똑같이 손이 많이 가게 되어요. 둘은 좋은 대목과 아쉬운 대목이 다르게 있으니, 이 다름을 잘 느끼고 헤아리면서 찍으면 좋으리라 생각해요. 이제는 필름사진 쓰는 이가 많이 줄어서 예전처럼 여러 가지 필름을 고루 쓰지 못해 아쉬워요. 디지털은 무엇보다도 돈 나가는 소리가 적게 들려서 좋기도 하지만, 필름보다 좀더 자유롭게 흐름을 죽 이어가면서 담을 수 있는 좋은 대목을 살리면 한결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하고.


.. 5월의 숲은 먹을 게 풍족하다. 일찍 피는 작은 꽃들에는 대개 양분의 저장소인 구근이 있다. 꽃이 없어지면 그 다음에는 딸기가 식량이 되었다. 하지만 독이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만물의 어머니는 그런 식물은 아주 고약한 냄새나, 얼얼한 맛이 나거나 아니면 따끔따끔하게 만들어 놓아서 숲에 사는 현명한 돼지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 어미는 독이 있는 식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끼들은 어미를 따라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 보면서 그런 식물에 대해 알아갔다 ..  (37쪽)


 그러게.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요즈음 우리 둘레에서 사진기 없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손전화에는 기본으로 사진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만 안 붙이고 있을 뿐이지, 누구나 사진을 찍거나 즐기면서 살아간다고 느껴요. 그런데 참말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몇 사람쯤 될는지요. 사진을 그저 찍어대기만 하고, 못 즐기면서 지내지는 않나요. 사진 찍는 재미를 느끼지 않을 뿐더러, 느끼려는 마음도 없지는 않나요.

 일을 하는 재미나 즐거움, 놀이를 하는 재미나 즐거움, 사람을 만나는 재미나 즐거움, 책을 읽는 재미나 즐거움, 무엇보다 우리한테 주어진 목숨 하나 부여잡고 살아가는 재미나 즐거움을 얼마쯤 헤아리는 우리들일까요.


.. 그렇다면 야생동물들이 사용하는 치료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숲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일광욕, 냉수욕, 따뜻한 진흙욕, 단식, 물 치료, 구토, 설사약, 먹이나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 휴식. 그리고 다친 부위를 혀로 핥는 것들이다. 그러면 치료법을 처방하고 치료 시간을 정해 주는 의사는 누구일까? 단 하나, 그것은 “몸의 갈망”이라는 의사이다 ..  (71쪽)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길, 건너편 마주앉은 아주머니 한 분이 삼십 분이 넘도록 손전화로 이야기를 합니다. 큰 목소리로. 아주머니가 건 손전화 건너편 사람과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가를 우리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꾸벅꾸벅 졸다가 엉뚱한 데에서 내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왱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덜컹거리는 전철 소리로도 버거운 귀는 수다 소리에 시달리고 들볶이며 아파 옵니다. 어지러워서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아도 소리는 들립니다.


.. 이 강인한 멧돼지 전사가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치 자기가 이긴 것처럼 느꼈다. 그는 그 멧돼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다. 녀석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 그는 이 멧돼지 부부가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도 보았다.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유대감을 말해 주는 어린 새끼들도 보았다. 당신은 동물에게는 육체적인 사랑밖에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물들의 사랑은 인내하고 함께 싸우고 또 인내하면서 유지된다 ..  (126∼127쪽)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이부자리를 깔고 안쪽으로 파고들어도 전철 소리는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가 깃든 집 바로 앞이 철길이거든요. 오 분에서 칠 분마다 한 번씩 전철이 오가며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집안까지 들려옵니다. 밤에는 일찍 자지 않도록, 새벽에는 늦잠 자지 않도록 깨워 주는 전철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전철 소리는 늘 함께하는 벗인 셈입니다. 우리 형편으로는 조용하며 값싼 집을 얻을 수 없으니, 도시 재개발로 이 동네를 쓸어버리지 않는다면 오래오래 벗삼을 전철 소리입니다.


.. 너구리가 우리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이런 내용일 것이다. 너구리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의 상징이다. 그리고 만약 이 나라의 우둔한 의원들이 흉악한 정책을 펴서 텅 빈 나무들과 함께 너구리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땅이 온통 돈과 배금주의에 정복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부디 나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세상을 뜨고 싶다 ..  (131쪽)


 잠깐 바람이나 쐴까 하고 장바구니를 들고 가게 마실을 갑니다. 집 둘레 구멍가게가 아닌 동인천역 앞쪽에 있는 조금 큰 가게로 갑니다. 그곳에는 번데기깡통을 하나에 550원에 팔아요. 동네 구멍가게는 1000원, 할인마트는 850원, 그 가게는 550원. 약과 열 개들이도 가게마다 값이 달라, 어느 곳은 1000원 어느 곳은 1300원 어느 곳은 1800원입니다.

 집을 나서니 밤바람이 제법 찹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은 시립니다. 코를 훌쩍이면서 걷습니다. 열한 시를 갓 넘긴 밤길에 비틀비틀 걷는 사람이 보이고, 술꾼을 태우려고 기다리는 택시가 보입니다. 길을 거니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가게에는 손님이 얼마나 들었을까나.

 몇 가지 먹을거리를 고르며 셈을 치릅니다. 제가 뻔히 장바구니를 들고 값 치른 물건을 담고 있는데에도 “봉투 드릴까요?” 하고 묻습니다.


.. 겨울이 없는 곳에는 멋진 봄도 없는 법이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땅에서만이 매년 찾아오는 꿀벌과 제비꽃의 기적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법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곳에는 매서운 눈과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야자나무가 무성하고 일 년 내내 따뜻한 땅일지라도 봄의 비밀스러운 힘은 나타났다 ..  (231쪽)


 장바구니를 손목에 끼고 돌아가는 길. 이제 때는 늦어 지하상가는 쇠문을 내립니다. 이렇게 되면 건널목이 없는 요 동네에서는 찻길 가로지르기를 해야 합니다. 느즈막한 이맘때 찻길을 가로지르는 우리들을 보고도 교통순경은 붙잡지 않습니다. 저희들도 알 테지요.


.. 사실 그는 자신의 말을 동물들이 알아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친절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은 동물들도 이해할 것이라고는 느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  (312쪽)


 밤하늘 별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 집에 닿습니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등불이 그닥 안 많은 이 골목길에서도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는 하늘이 아닌 땅에 별이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했다는데, 참말 우리네 땅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네 땅에 놓여 있는 이 많은 별들은 서로를 얼마나 비추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나 모르겠어요. 밤하늘 빛나는 별은 길잡이가 되기도 했고 길동무가 되기도 했는데, 도심지 땅에 내린 별은 누구한테 도움이 되고 있을까요. 누구한테 길을 일러 주고 누구와 동무를 삼고 있을까요.


 (2) 한 해 천만 원


 어제, 사진잔치 자리에는 대학교 다니는 어린 학생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밥자리에서 잠깐 등록금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요즘은 한 해에 등록금이 얼마쯤 나가는지. 인문대학인데 한 학기에 360만씩 낸답니다. 그러면 한 해에 720만 원. 책값이며 밥값이며 찻삯이며 하면 천만 원은 우습지 않게 들겠네.


.. 스라소니는 무시무시한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악마처럼 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미 멧돼지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미 멧돼지에게 겁을 준다고? 어린 새끼가 “엄마, 엄마, 도와줘요!” 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  (92쪽)


 하하, 천만 원이라니. 그러면 대학교를 네 해 만에 잘 마친다면 사천만 원이라는 소리? 이야, 사천만 원이라니. 아이 하나에 사천만 원이면, 아이가 둘이면? 셋이면?

 어이구, 어버이 된 사람은 허리가 휘어서 어찌 사나. 이렇게 엄청나게 아이들 배움값을 치러야 하니, 그렇게 들인 돈을 ‘본전 뽑기’ 해야겠다면서 눈이 돌아갈밖에 없겠네. 본전에다가 이자를 붙여서 돌려받아야겠다고 생각할밖에 없겠네. 돈 버느라 바쁘고 돈 갚느라 힘겹고 돈 끌어들이느라 눈이 벌걸밖에 없겠네.

 이런 세상이라면, 대학교가 학문을 참다이 파고들기란 꿈 같은 소리가 되겠네. 대학교 졸업장으로 한 사람 마음밭을 알뜰히 다스려 주는 일이란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겠네. 대학까지 다니며 얻거나 이룬 열매를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나누거나 베풀자는 이야기는 미친놈 방귀 소리로나 여기겠네.


.. 내면의 충동에 의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짝짓기를 했다. 자기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 그곳에는 구멍이 난 커다란 나무가 아직도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그 귀중한 땅은 그 귀중함이 인간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름다움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너구리 부부는 만물의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보다 좀더 많은 것들을 새끼들에게 가르쳤다. 세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  (168∼169쪽)


 한 달 이삼십만 원 벌기에도 빠듯한 내 처지를 돌아보자니, 뒷날 아이를 낳아서 기르게 된다면 대학교는커녕 제도권 초중고등학교나 제대로 넣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돈으로 굴러가야 하는 학교 틀거리라면, 이런 학교 틀거리에서 아이들한테 안겨 주고자 하는 지식이란 무엇일는지. 돈에 엄청나게 기울어져 있는 학교 틀거리라면, 이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마음에는 무엇이 싹트고 자라서 동무들끼리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갈는지.


.. 어미는 자기 어미에게 배웠던 것들을 새끼에게 주로 실습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  (217쪽)


 하긴, 그렇구나. 꼭 이래서만은 아니지만, 우리 옆지기는 ‘우리가 가르치면 되지요’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학교에 떠넘기면 안 된다고, 학교 교사한테 떠맡기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가 배워야 할 것들은 누구보다 우리들, 어버이 된 사람이 먼저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먼저 제대로 살피고 돌아보고 추스르면서 배울 수 있어야, 아이들도 기꺼이 배우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지식이라면 아이들한테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어버이 스스로 고맙게 새길 수 없는 지식이라면 아이들 삶과 얼과 넋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 박쥐 한 마리가 잡아먹는 벌레의 수는 하루 밤에만 수백 마리에 달한다. 그러므로 집 주위의 벌레가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 박쥐가 날아다니는 벌레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인간의 적에게 매서운 타격이 가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아탈라파(박쥐)를 우리에 가뒀던 소년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와 관련해서는 이것 말고는 밝혀진 것이 없었다. 파리 때문에 생긴 전염병이 집을 습격했고, 그 병마가 떠난 뒤 새롭게 생긴 작은 흙무더기가 두 개 생겼다. 옆에 나무 탑이 하나 있는 조용한 묘지였다 ..  (248, 249, 258쪽)


 지난주에 보건소에 찾아갔습니다. 인천 중구와 동구에 있는 보건소에 차례차례 갔습니다. 먼저 중구 보건소에서는, 우리 주소지가 중구가 아니라며 동구로 가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중구 보건소가 코앞에 있어서 가까운데. 한참 걸어서 동구 보건소로 가니, ‘산부인과에서 임신증명서를 떼어 와야’ 기초진료를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중구 보건소로 가서 알아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중구 보건소에서는 동구로 가라고 하고, 동구에서는 임신증명서를 떼어서 중구로 가라고 하고. 허허 참.


.. 무정한 만물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만물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신의 자식들 중에 가장 강한 아이를 영원히 사랑한다. 그 위대한 어머니가 지금 아탈라파에게 다가왔다 ..  (284쪽)


 (3) 《다시 야생으로》라는 책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이 쓴 《다시 야생으로》를 다 읽어냅니다.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눈물을 쪼르르 흘렸습니다. 집말이 되고 싶지 않아 끝끝내 들말로 돌아간 짐승 이야기, 자기 어미를 곰한테 빼앗긴 앙갚음을 끝내 해내면서 자기 짝과 새끼를 지켜낸 멧돼지 이야기, 들너구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박쥐가 사람 삶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 들기러기 식구들이 죽는 날까지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이야기, 사람한테 붙잡혀 동물원에 갇혀서 구경거리 신세가 되는 원숭이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나갑니다.


.. 육식만 하는 곰은 무시무시한 피부병에 자주 걸린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곰은 더욱 심하다 ..  (76쪽)


 시튼 님 《다시 야생으로》를 우리 말로 옮긴 장석봉 씨는,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이야기 역시 그의 다양한 재주를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어찌 재주만으로 이런 이야기와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갖춘 자연학자이기도 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도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따뜻한 마음씨로 자연 삶터와 들짐승을 꾸밈없이 바라보고 아낌없이 껴안으면서 살았기에 이런 글을 그리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 다른 요정들과 달리 인간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녀석은 동굴이나 나무 구멍에서 사는데, 낮에는 항상 몸을 숨기고 있고 또 겨울에는 지하에서 잠을 자든지 아니면 따뜻한 지방으로 슬그머니 옮겨간다. 깃털은 없지만 비행에는 놀라운 재능을 타고났다. 게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을 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달빛 속에서도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라면 그런 놀라운 능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결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198∼199쪽)


 돌이켜보면, 우리 스스로 마음을 따숩게 추스르지 않으니 사회 문제와 범죄가 끊일 수 없습니다. 대학교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온 똑똑한 분들이지만, 정작 그분들 마음에 따스함이 깃들고 있지 않으니, 정치 권력을 붙잡아도 기득권 지키는 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영어만 잘하는 재주꾼, 지식만 가득한 재주꾼, 가방끈만 긴 재주꾼, 그렇지만 머리통만 굵어서 몸통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재주꾼인 우리들로 바뀌어 간다면, 우리 세상은 아름다움하고 차츰차츰 멀어지기만 합니다.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부자한테 ‘여보쇼, 그 돈 좀 사회에 내놓으시오’ 하고 말하기 앞서, 한 달에 오십만 원 버는 우리들부터 ‘다문 만 원이나 오천 원이나마 덜어내며 사회에 내놓는’ 매무새로 살아가야지 싶습니다. (4341.2.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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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한쪽에서 똑 똑 똑 하는 소리가 납니다. 아침에 몸을 씻으며 빨았던 바지 몇 벌을 벽에 걸어 놓았더니 물이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바닥에는 걸레를 대 놓습니다. 요즈음은 빨래를 마당에 내다 널면 꽁꽁 얼어붙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불을 적게 때고 바깥바람이 잘 들어와서 잠자는 방을 빼놓고는 영 도 밑으로 육 도나 팔 도까지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마루에 널어도 빨래가 얼어붙어, 잠자는 방 벽에 못을 잔뜩 박아 놓고 겨울 빨래를 널어 놓습니다.

 세탁기를 안 쓰고 탈수기도 없으니 빨래마다 물이 방울지어 떨어집니다. 제아무리 힘껏 비틀어 물을 짜내어도 방울이 집니다. 세탁기를 안 쓰니 겨울 손빨래를 마치면 손이 차갑게 얼어붙습니다. 동무와 피붙이 들은 뭐 하러 사서 고생이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손빨래를 하면 아무 옷이나 막 입지 않게 되는걸요. 물을 한결 적게 쓰고 옷을 좀더 아끼게 되는데요.

 사진기자 삶을 다룬 만화책 《제 3의 눈》(닉스미디어,2001)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여섯 권을 내리 읽어냅니다. 판이 끊어져 뒤엣권은 더 찾아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부하가 소신을 가지고 한 잘못이라면 상사가 덮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 그래서 상사가 있는 거니까.(6권 114쪽)”, “그냥 상황에 맞춰 셔터를 누를 뿐. K대 대학원에서 저널리즘 과정을 졸업한 재원인 너와 논쟁으로 이길 순 없겠지. 반박할 맘도 강요할 맘도 없어. 단지 방해는 하지 마.(6권 132쪽)”, “그런 건 상관없다니까. 정사원과 계약사원, 남자 여자를 따지는 게 아니야. 우리 포토저널리스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6권 88쪽)” 같은 대목을 만날 때마다 한동안 책에 눈을 박고 깊이 생각에 잠깁니다.

 문득, 대학교 한 해 학비가 1천만 원에 이르는 요즈음, 이 나라에서 대학생으로 공부하는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누구한테 얼마만큼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대학교에 가려고 밤잠 새벽잠 쫓아가며 형광등 불빛에 눈이 벌개진 아이들은 대학교에 나아가 무엇을 왜 배우고 싶어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그 돈, 한 해 천만 원이면 네 해면 사천만 원. 이 돈은 대학교 과정을 밟는 데에만 써야 할까 궁금해집니다. 큰마음 먹고 3백만 원짜리 좋은 자전거 장만해서 7백만 원은 잠값으로 쓰며 한 해 동안 전국 나들이를 해 볼 수 있겠지요. 또는, 시골에 논밭 조금 마련해서 손수 먹을거리를 일구어 내는 땀맛을 느껴 볼 수 있어요. 사진기 한 대 장만한 다음, 자기 식구들부터 동네 삶터와 모습을 차곡차곡 담는 가운데 세상을 배울 수 있고요. 태양광 전지판을 집에 달고 지구자원 덜 쓰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요. 성노예로 시달린 할머님 돕는 일에, 우토로사람들 돕는 일에, 어두운 곳에서 야무지게 일하는 조그마한 시민단체 돕는 일에 써 볼 수 있습니다. 요새 책값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천만 원이면 새책 천 권 안팎을 장만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헌책은 거의 오천 권 가까이 장만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예 책방 하나 차려도 좋고요. (4341.1.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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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이야기 카르페디엠 19
안케 드브리스 지음, 박정화 옮김 / 양철북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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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두 친구 이야기
- 글쓴이 : 안케 드브리스
- 옮긴이 : 박정화
- 펴낸곳 : 양철북(2005.11.18.)
- 책값 : 8500원



 이 책 하나 25 ― 엄마한테 얻어맞는 아이를 지키는 동무
 : 안케 드브리스, 《두 친구 이야기》


 

 (1) 서울, 전철, 동무, 고향


 서울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달픕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가 아니라, 누구 하나 안 지친 사람이 없는 사람들만 가득한 대중교통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볼일 마치고 전철을 타고 수원이나 안산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고달플 테지요. 전철에 탈 때부터 자리에 앉을 꿈을 꿀 수도 없는 가운데, 적어도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반을 서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전철로만 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전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또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을 들어가야 하고, 버스에서 내린 뒤 또 걸어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걸어야 할 테니까요.


.. 그러나 벤 아저씨도 나중엔 유디트의 아빠처럼 떠나버렸다. 어느 목요일 밤, 아무 말도 없이. 아저씨와 엄마는 싸우지도 않았다. 처음에 엄마는 무척 초조해 하더니 나중엔 화를 냈다. 그 후 며칠 동안 유디트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덕분에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어느 날 밤 엄마는 유디트를 후려갈겼고, 유디트는 쓰러지면서 옷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  (18쪽)


 옆지기 고등학교 적 동무를 서울 회기동에서 만나고 헤어진 때는 저녁 열 시 반. 전철을 타니 열 시 사십육 분. 터덜터덜 달리는 전철이 동인천역에 닿으니 열두 시를 훌쩍 넘겼고, 역부터 집까지 걸어오니 거의 새벽 한 시.

 서울사람들은 대중교통도 늦게까지 있으니, 저녁 열 시 조금 넘었을 무렵부터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하는, ‘서울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서울에서 사는 회사사람들은 일곱 시나 여덟 시쯤 끝나 가볍게 술을 한잔 마신다고 하여도 겨우 한 시간 남짓 앉아 있다가 금세 자리를 떠야 하는 아쉬움을 살갗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어도 자기 집에 닿으면 열두 시는 우습지 않고 한 시께에 이르니, 몸이 축날 테지요. 더욱이 이튿날 새벽 다섯 시 반쯤부터 짐 챙기고 부랴부랴 새벽버스 타고 전철역에 가서 서울 가는 전철에 몸을 싣고 오징어처럼 짓눌리며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며 회사에 닿아도 여덟 시가 넘어가니, 날이면 날마다 몸은 고단하고, 어서 빨리 주말이 찾아와 모자란 잠 좀 자자고 재촉하게 됩니다.


.. “왜 못했니?” “저…… 또 두통이 도져서요.” 유디트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우선 해 놓은 것만 보자꾸나.” 유디트는 초조하게 책가방을 뒤졌다. 베크만 선생님은 기다리면서 유디트의 수그린 머리를 보았다. 곧은 금발이 얼굴을 덮었다. 베크만 선생님은 문득 저런 스웨터를 입으면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가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힐끗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겁먹은 눈이었다. 왠지 이 아이는 너무 연약해 보여. 도저히 화를 낼 수 없는 아이야 ..  (31쪽)


 서울 회기동에서 인천 끝자락까지 달리는 전철에 타고 있는 고단함에 찌들고 쩐 사람들 얼굴을 봅니다. 갓 스물을 넘긴 아가씨들은 얼굴에 화장을 짙게 발랐지만, 그 화장 뒤에 감춰진 얼굴이 얼마나 힘겨워할까가 마음에 그려집니다. 젊은 사내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리가 없어 서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까요. 그렇다고 자리에 앉아서 가는 사람도 아늑하지만은 않습니다. 좁아터전 전철 걸상에 옹크린 채, 더구나 겨울이라 다들 옷이 두툼하니 더욱 낀 채로 꼼짝을 못하고 한 시간 넘게, 또는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일은 고문이에요.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자율학습에 목이 매어 얼굴이 파리해졌던 중고등학교 수험생 때에도 오십 분에 십 분씩 틈을 주고 걸상에 짓물러진 엉덩이를 쉴 수 있게 했습니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이리도 먼 길을, 날마다 네 시간 남짓 전철과 버스에서 보내며 살아야 할까요. 날마다 네 시간씩 전철과 버스에서 보내면서 만나는 사람은 몇이나 되고, 이렇게 만나는 사람과 몇 시간쯤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가요.

 얼마나 깊은 만남과 사귐이 되는지요. 우리들 ‘서울 아닌 곳 사람’은 왜 ‘서울 아닌 우리 고향이나 터전’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가요. 왜 인천에서, 왜 수원에서, 왜 안산에서, 왜 부천에서, 왜 강화에서, 왜 일산에서, 왜 용인에서, 왜 구리에서, 왜 문산에서, 왜 광명에서, 왜 안양에서, 왜 군포에서, 왜 이천에서, 왜 의정부에서, 왜 동두천에서, …… 서울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찾아가고 돌아가고 해야 하나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우리와 어릴 적부터 같은 골목길과 놀이터와 집과 학교와 마을에서 뒹굴고 뛰놀던 동무들하고 복닥이고 부대끼면서 오붓하게 살아가지는 못하는가요.


.. 미하엘이 말을 더듬거려도 아빠는 결코 재촉하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의 돌 같은 침묵 때문에 미하엘은 더욱 긴장했다. 미하엘은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등과 배의 발진과 갑작스럽게 높아지는 열에 시달렸다.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조차 아빠는 읽을 책과 공부할 거리를 주었다. 당연히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다 ..  (50쪽)


 광명에서 태어나고 일산에서 자란 옆지기네 동무들한테 뿌리는 무엇일까요. 옆지기가 태어났던 들판 판자집은 모두 아파트로 바뀌어, 이제는 어디에서 태어나고 뛰놀았는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숲과 쇼핑센터로 바뀌어 가는 일산에는 새 학교를 자꾸자꾸 짓습니다. 분당도 그렇고 성남도 그렇고 용인도 그렇습니다. 인천에서도 논밭을 메우고 산을 깎아서 만든 연수동에 새 학교를 뚝딱뚝딱 지었고 예전 도심지에 있던 학교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서울 강북 종로에 있던 학교를 강남으로 옮겼듯이. 그러면서 요즈음은 송도 새도시에 새 학교를 짓는다고 법석입니다.

 우리들한테는 새로 짓는 집이 바로 고향이고 일터이며 동네가 되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이름은 주민등록증에만 남을 뿐, 인천사람이고 서울사람이고 부산사람이고 다른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산속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골목길 달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멘트 병원에서 태어나고 시멘트 학교에서 배우며 시멘트 아파트에서 삽니다. 쇳덩이 자가용에 아버지 어머니가 태워서 움직이게 하며 두 다리는 흙 한 뼘 밟을 일이 없지만 십만 원도 넘는 아주 좋은 운동신을 신고 발바닥은 보송보송 말랑말랑입니다.


.. 유디트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동생을 데리러 오는구나.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러면 네 시간이 없지 않니?” 소피가 다시 콜라를 따르며 말했다. “이,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나를 위한 시간이라……. 데니스를 데리고 집에 가면 할 일이 언제나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엄마가 하루 종일 직장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  (64쪽)


 늦은밤 인천으로 달리는 전철은 알맞게 이야기가 있고 알맞게 조용합니다만, 사람들 말소리는 시끄러운 전철 소리에 묻힙니다. 창밖으로는 높직한 울타리가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땅위를 달리고 있어도 땅위를 달리는지 어쩐지 알 수 없습니다. 창문을 내다보아도 어느 역에 서는 줄 모릅니다. 전철 안에 마련된 자막방송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아야 겨우 알 수 있습니다.

 졸고 있는 사람, 자고 있는 사람, 주정하는 사람, 수작 거는 사람, 손전화 문자 보내는 사람, 들고다니는 텔레비전 보는 사람이 있으나 책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긴요,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이 뻘쭘한 때에, 이 지친 때에. 그래도 더러더러 책 하나 손에 쥐는 사람이 보입니다. 흔한 싸구려 사랑타령 소설이든, 한 달 만에 일억을 벌었다는 재테크 놀음이든, 윗사람한테 잘 보이고 빨리 진급하는 재주를 일러주는 처세학이든, 책 하나 쥘 수 있는 매무새가 반갑습니다.

 아침에 서울로 들어가는 전철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양복쟁이 아저씨가 으레 두 사람, 옷 말끔히 차려입고 예수 사랑 외치는 아주머니가 으레 한두 사람 있습니다. 밤깎이 칼을 팔고, 석유 냄새 코를 찌르는 실장갑을 팔며, 주머니에 넣는 손전등을 파는 한편, 몇 장에 만 원짜리 음반을 팔고, 양말도 팔고, 허리띠도 팔고, 우산도 팔고, 선풍기덮개도 팔고, 싸구려 볼펜도 팔며, 덤 얹어 주는 반창고를 파는 한편, 하모니카 장애인 아저씨가 지나가고, 서로 꼭 붙잡은 채 걷는 장님 늙은 부부가 지나가고, 휠체어에 몸을 실은 말없는 아저씨가 둘쯤 지나가고, 한 다리를 절며 동냥을 하는 아저씨, 예수찬양 테이프를 틀어놓고 눈감은 채 동냥하는 아지매, 껌을 들이밀며 파는 할머니, 쇠돈 담긴 종이잔을 흔들며 돈 좀 넣으라는 할머니, 말없이 복사종이를 돌리며 천 원을 바라는 젊은이, …… 들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인천으로 돌아가는 밤전철에는 아무런 장사꾼이 없고 아무런 설교자가 없으며 아무런 동냥꾼이 없습니다.


.. 엄마는 유디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생크림 케이크까지 사 왔다. 하지만 그 케이크 때문에 배가 아팠다니 묘한 일이었다. 생크림은 너무 기름지고 달았다. 유디트는 위장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제 몫으로 준 큰 조각 하나를 억지로 입에 쑤셔넣었다. 때맞춰 화장실에 가서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다행히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  (98쪽)


 인천에서 서울 이문동으로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던 1994년 한 해 동안, 날마다 줄잡아서 일곱∼열쯤 되는 장사꾼과 동냥꾼과 설교자를 만났습니다. 한 해쯤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보는 사람이 있어서 나중에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굵직한 목소리로 “조금∼만, 도와, 주쎄요!” 하고 외치던 절름발이 아저씨가 어느 날 말끔하게 머리를 깎고 옷도 깔끔하게 입은 채 그 “조금∼만, 도와, 주쎄요!” 하고 외치며 지나가는데, 제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아이구, 오늘은 머리 깔끔하게 깎고 왔네!” 하며 웃습니다. 동냥꾼 아저씨는 살짝 곁눈으로 바라보다가 지나가는데, 목소리에 살며시 더 힘이 실리며 한결 굵어집니다.


.. 유디트는 미하엘을 집에 들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그렇게 멍이 들었냐고 물어 볼 것이 뻔하고, 그러면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너무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위해 일부러 찾아온 친구를 모른 척하다니. 이 학교에서는 유디트를 찾아온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  (105쪽)


 어릴 적 한동네에서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고, 골목길 술래잡기도 하고, 숭의동야구장 빈터에서 야구놀이도 하던 어릴 적 동무들 가운데 고향 동네에 그대로 눌러앉아서 살아가는 녀석들이 몇몇 있는 한편, 서울로 기나긴 전철길을 따라서 졸음과 고단함에 쩔디쩐 채로 살다가 슬그머니 서울로 집을 옮기며 떠나간 녀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혼인한다고 전화하면서 예식장을 알려줄 때면 으레 자기들 고향 동네가 아닌 서울 예식장이기 일쑤고, 새살림 얻는 집도 인천이 아닌 서울이기 마련이며, 한동안 돈이 없어 집값 싼 인천에 머물다가 어느새 서울로 훌쩍 날아가곤 합니다.

 집을 서울로 옮기면서, 동무 녀석들은 전철을 버립니다. 버스에서 떠납니다. 한결같이 자가용을 굴립니다. 그 옛날, 똥배 하나 없고 허벅지 단단하여 공차기를 하든 농구나 배구놀이를 하든 지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뛰어놀던 동무들이, 이제는 오 분 달리기를 해도, 아니 일 분만 달리기를 해도 헉헉대지를 않나, 백 미터를 못 걸어가서 택시를 타자고 하지 않나, 애엄마도 아닌데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고 해마다 새로 나오는 손전화 기계를 장만하며 또닥또닥 누르면서 지냅니다.


 (2) 주먹질


 한 사람한테는 땅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돈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책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그이를 아끼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그이가 나누려는 뜻과 마음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 “게다가 싸구려도 아니지. 진열장에서 그 옷을 보자마자 생각했지. 내 딸한테 사 줘야겠다고.”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디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찻주전자한테 말하고 있었다 ..  (122쪽)


 1994년 봄날, 대학교 선배가 된 형들이 우리들 새내기를 부르며 주먹질을 하고 머리박기를 시킵니다. 다른 동무들은 선배들 말이 무서워 따르지만, 저는 선배들 주먹질을 손으로 막고 머리박기를 하지 않습니다. “니가 뭔데? 이러는 게 선배냐? 이 따위 짓거리가 대학생이라는 선배자식들이 하는 거냐? 부끄럽지 않아?” “뭐야? 이 자식이!”

 1995년 11월 어느 날, 논산 훈련소에서 조교한테 발차기를 맞고 머리박기며 얼차려며 갖가지 쓰라림을 겪습니다. 1996년 1월,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디엠지 안쪽에 있는 소총중대로 배속을 받아 들어간 첫날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 다섯 시께. ‘비상’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니, 싸리비 한 자루씩 나누어 주며 병장 한 사람이 이끄는 대로 어디 산속을 깊디깊이 들어갑니다. 한 시간 남짓 걷기만 해서 들어간 산속에서 길이 하나 나옵니다. 헉헉거리면서도 병장 그이 엉덩이만 보며 일 미터 거리를 지킨 채 올라가서 뒤를 돌아보니, 분대원이며 내 전입동기며 낙오를 했습니다. 병장은 나를 빼놓고 다른 분대원과 전입동기한테 머리박기를 시키고 군화발로 갈비뼈와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죽어야 하는구나. 그냥 죽어야 하는구나. 그냥 있어도 죽고, 뒹굴어도 죽고. 또 죽어야 하는구나.


.. 유디트는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해. 미하엘은 생각했다. 유디트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애를 알아야만 해. 유디트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므로 미하엘은 종종 몸짓이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고 생각이나 감정을 짐작해야만 했다. 가끔은 상처받은 것 같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받은 표정이라…….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  (130쪽)


 상병 계급장을 달고 6호봉이 지난 1997년 사월 어느 날, 1소대 내무반으로 들어가 김 아무개 일병 이름을 부릅니다. 침상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고 ‘네’ 하는 그녀석. 군화 신은 채로 침상에 올라가 그대로 김 아무개 일병 얼굴을 걷어찹니다. 잇달아 어깨며 배며 가슴이며 다리며 걷어차고 밟습니다. 그러고 나서 1소대 왕고참 병장한테 거수경례를 붙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나옵니다.

 때리면 맞고 굴리면 구르고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만 내며 살다가, 살다가, 그만 나도 때리는 사람 굴리는 사람 죽으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김 아무개 일병이라고만 말해 오다가 ‘야이 찢어죽을 종간나 아무개 새끼야’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어대는 내 고참과 똑같은 군인이 되어 버립니다. 삽을 들었으면 삽날이고 삽자루고 몽둥이가 되고, 총을 들었으면 총부리고 개머리판이고 몽둥이가 됩니다. 빈손이면 주먹이, 군화를 신었으면 군화발이 몽둥이입니다.


.. 이모가 있는 한 주는 후닥닥 지나갔다. 유디트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그 안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리아 이모가 있는 집안엔 구석구석 봄기운이 감돌았다. 엄마도 달라 보였다. 엄마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  (215쪽)


 뺨을 맞으면 뺨이 얼얼하면서도 뒷간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제가 뺨을 후려갈기면 뺨맞은 그 녀석이 뒷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1997년 12월 강원도 양구 눈덮인 도솔산을 군짐차에 실려 만기전역을 하며 떠났지만, 얻어맞은 뺨에 흐르는 눈물은 1998년에도 1999년에도 2000년에도 2008년인 오늘에도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군대라는 곳이 있는 동안. 사람을 사람이 아닌 계급으로 나누고, 사람이 사람을 따스하게 껴안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빨리 총알 적게 쓰며 죽여 없앨 수 있는가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몸에 익히도록 하는 그런 군대라는 곳이 우리 사회에 또아리를 틀며 버티고 있는 동안.


.. “그래, 뭐라던?” 할머니는 뭔가를 캐내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매맞는 것 말이다.” “트루더!” “얘기 좀 하게 입 다물어요!”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미하엘에게 몸을 돌렸다. “그 애가 늘 맞고 지낸다는 건 알고 있었니?” “한 번 맞았던 건 알아요. 그 후로 학교가 끝나고 바래다주었죠. 때린 남자애들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남자애? 남자애라니?” “유디트를 마구 때린 애들요.” “남자애들!” 다시 한 번 할머니는 조롱하는 듯이 웃었다. “남자애들이 자기를 때렸다고 하던? 그건 엄마 짓이었어!” 미하엘은 놀란 눈으로 할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로 피가 쏠렸다. 비좁고 후덥지근한 방 안에 있으려니 점점 어지러워졌다. “엄마가?” “놀랄 줄 알았다. 그 여자는 대낮에 별이 보일 정도로 호되게 자식을 팼다. 그 애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가끔 여기까지 들렸지.” ..  (256∼257쪽)


 주먹질과 욕설과 얼차려와 괴롭힘과 따돌림 들로 ‘저마다 소중한 목숨붙이’였던 사람을, ‘누구보다도 끔찍하고 몸서리쳐지는 살인병기’로 뒤바꾸어 놓는 군대계급 소굴은, 군대를 벗어난 뒤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집안에서도, 동네에서도 어쩌는 수 없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아가씨를 만나도 제멋대로가 되어 쉽게 손찌검을 하고, 자기 아이한테도 이웃 아이한테도 쉬 짜증을 부리며 손이 먼저 올라가는 남정네가 되게 합니다. 스스로 못된 손목아지를 잘라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며 고치고 추스르고 깎아내고 도려내는 동안에도.


.. “장볼 돈으로 인형을 샀지!” 섬뜩한 목소리로 으르렁대는 엄마의 손에 빵칼이 들려 있었다. 유디트는 숨이 멎었다. “안 돼, 엄마……. 안 돼! 인형은 안 돼!” 유디트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는 코알라 인형에 칼을 쑤셔넣었다. 네 번, 다섯 번 칼질을 반복하는 사이에 인형은 넝마조각이 되었다. 엄마는 칼을 다시 치켜올리고 유디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얼어붙은 채, 칼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다 ..  (282쪽)


 농약을 뿌려서 거두는 곡식에 농약이 배이고 쌓입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넘치는 도심지에 뿌연 먼지띠가 겹겹이 쳐지고 늘어납니다. 돈 많이 벌자고 하는 곳에 돈이야 많이 들어오겠지요. 바라는 것은 돈뿐이니까요.


 (3) 《두 친구 이야기》라는 책


 2005년 12월, 《두 친구 이야기》를 눈깜짝할 사이에 읽어냈습니다. 2008년 1월, 《두 친구 이야기》를 다시 집어들고 열흘에 걸쳐서 자근자근 씹어먹듯이 천천히 읽습니다. 할머니가 자기 어머니한테 모질게 했던 끔찍한 주먹질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이 어머니가 자기 딸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퍼붓고 있는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돕니다.

 여리고 작은 아이 ‘유디트’는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한테 얻어맞습니다. 이웃집 할머니한테까지 들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이한테 잘못이 있어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니고, 아이가 미워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닙니다.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그랬듯이, 어머니가 딸한테 하는 주먹질과 괴롭힘과 따돌림은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아무 까닭 없이, 그냥 미워서, 그러면서도 제 자식이니 때린 다음에 눈물을 흘리고.


.. “유디트를 도와야 해. 유디트의 엄마도 마찬가지고. 더 손을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런데 어떻게 주소를 찾아내지?” ..  (263쪽)


 작지는 않지만 여린 아이 ‘미하엘’이 있습니다. 미하엘은 자기를 때리지는 않지만 모질게 괴롭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홀로 외로우며 아버지한테 시달리다가 병까지 앓는 미하엘한테, 이웃에 살던 ‘스테피’라는 계집아이는 마음을 열어 주면서 ‘함께 나누어서 좋으니까 친구지’ 하는 깨달음을 나누어 줍니다. 이 아이 스테피는 뒷날 미하엘이 당차게 ‘아버지하고 안 살겠다’고 하면서 네덜란드에 있는 이모하고 살겠다고 자기 권리를 말하는 뒷힘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미하엘은 고향나라 네덜란드에서 만난 유디트를 보면서, 미국에서 지내며 아버지한테 시달리는 동안 만났던 스테피 모습을 그림자처럼 느낍니다. ‘새로운 두 친구’가 무엇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가를 느낍니다.


.. 유디트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여전히 숨쉴 때마다 힘들었다. 엄마가 조리대에 처박을 때 갈비뼈를 다친 게 틀림없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나도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야. 내 코알라처럼 말이야. 다시 한 번, 유디트는 미하엘의 목소리를 들었다. “뭔가 해야만 해…….” ..  (284쪽)


 스테피는 미하엘한테 “텔레비전을 혼자 보면 엄마하고 같이 볼 때보다 훨씬 재미없어. 같이 있으면서 엄마가 웃으면 나도 더 많이 웃게 돼.”(52쪽) 하고 말했습니다. 미하엘은 유디트한테 “유디트, 너한테 엄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너희 집에 갔을 때 …… 넌 남자애들이 때렸다고 말했지?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난 친구잖아, 안 그래? 왜 그냥 맞고만 있어? 누군가한테 말을 해야 해. 엄마가 자기 자식을 때리는 건 정상이 아니야.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네가 기다리기만 하면 엄마는 널 계속 때릴 거야. 뭔가 해야만 해. 계속 비밀로 할 수 없어. 우리가 도와줄게. 약속해.”(273∼279쪽) 하고 말했습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아끼는 동무이기 때문에, 몸과 몸으로도 아끼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싶은 동무이기 때문에, 내 즐거움은 네 즐거움이 되고 네 아픔은 내 아픔이 되는 동무이기 때문에, 나 혼자 걷는 두 걸음이 아닌 너와 함께 한 걸음씩 걷고 싶은 동무이기 때문에. 그런데, 유디트를 괴롭히며 때리는 어머니는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동무를 만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동무를 찾으려고 할까요? (4341.1.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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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임자도 압니다. 자기가 파는 책 가운데 그냥 ‘돈이 될 만한 책­’인지, 우리 ‘책 문화에서 더없이 소중한 책’인지. 그러나 책을 사고팔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 책들을 팔아야 살림을 꾸릴 수 있거든요. 이 책들을 팔아야 다른 좋은 책을 사들일 수 있고, 다른 좋은 책을 사들인 뒤 또 팔아야 또 다른 좋은 책을 사들일 수 있거든요.

 몇 해 앞서, 1910년대인가 1920년에 처음으로 나왔다고 하는 국어사전 이야기가 잠깐 신문에 오르내린 적 있습니다. 이 국어사전을 찾아낸 교수는 ‘어디에서 찾았는지’ 밝히지 않았고 ‘고서점’이라고만 했는데, 부산 보수동에 있는 어느 헌책방에서 찾았지 싶어요. 그래, 이런 책들을 헌책방 임자들이 모를 리 없겠지요. 더구나 100해 가까이 된 책이라면, 어떤 헌책방 임자도 그 책을 허투루 다루지 않으며 함부로 아무한테나 내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들이 그 책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 좋은 책이 나한테 있다’는 보람을 느낄 테고요. 그렇지만 헌책방 임자는 이 책을 가장 잘 알아볼 만한 사람한테 팝니다. 이 책을 가장 잘 알아볼 만한 사람이라면 그 책 값어치를 가장 잘 느끼며, (헌책방 임자한테) 가장 괜찮은 값을 쳐 줄 만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이 얼마나 왜 소중한가를 알고 있는 이라면, 자기가 끌어들일 수 있는 책값을 헤아리기 마련이고, 자기가 가진 돈 테두리에서 소중한 책 하나를 기꺼이 사곤 합니다.

 헌책방 임자한테는 책을 잘 알아보는 사람 못지않게 값을 제대로 쳐 줄 사람이 소중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또한, 헌책방 임자한테 책을 대주는 샛장수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때때로 이런 옛책 한두 권을 팔면서 팍팍하고 고달픈 요즘 살림형편에 기지개를 켤 수 있고요.

 우리들 책손은 헌책방에 ‘우리들이 반가이 여길 만한 책’이 있어야 즐겨찾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반갑게 여길 만한 책을 기꺼이 사들일 만한 돈이 주머니에 넉넉해야 헌책방을 즐겨찾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삐걱거리면 헌책방 나들이가 뜸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즐겨찾던 헌책방 임자가 애써 갈무리해 놓았던 ‘우리한테 반갑거나 좋았던 책’이 안 팔리거나 묵어 버리곤 합니다. 다른 책손이 알아보고 사들여 준다면 그 헌책방으로서는 ‘책돌이’가 잘되어 ‘다른 반갑거나 좋은 책’을 사들일 밑돈을 마련하는 한편 헌책방 살림을 꾸릴 테지만, ‘우리한테 반갑거나 좋은 책’을 우리 스스로든 다른 사람이든 알아보지 않거나 못하며 팔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하거나 대단한 책이라 해도 맞돈이 되지 못하고 말아요. 이리 되면 헌책방 일꾼도 힘듭니다. 가게세 내고 살림돈 얻어야 하는데, 책돌이가 안 되니, 책돌이가 될 만한 책에 자꾸 눈을 돌리게 됩니다.

 헌책방에 책이 안 나오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나날이 책읽는 사람이 줄고, 나올 만한 책은 웬만큼 나왔으며, 더 많은 이익을 바라며 책을 물건으로 다루는 사람이 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 책눈길을 좀더 넓히지 않는 까닭이 있습니다. 좀더 부지런하게 책을 즐기지 못하는 까닭도 있고요.

 책이 돌고 돌려면, 자료로 둘 책이 아니고서는 다른 이한테 내어주거나 헌책방에 내놓아야 좋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한테 새로우며 반갑거나 좋은 책’을 꾸준하게 찾아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읽은 책은, 이 세상에 나온 책 가운데 아주 적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우리한테 반가울 책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 책들은 예나 이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이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줄 모르거나 못 느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동안 읽을 수 있는 책 부피는 어느 금을 넘어갈 수 없으니, 우리한테 반갑거나 좋을 모든 책을 죄 알아보며 읽어낼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만큼은 알아야 할 테며, 우리가 볼 수 있는 만큼은 찾아보려는 몸짓과 움직임을 잃어서는 아니될 일이라고 느낍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일도 잘못이라고 느껴요.

 헌책방 일꾼들은 말합니다. ‘당신들이 서른 해 마흔 해 쉰 해 일하면서도 참 놀라운 대목이, 그렇게 많은 책을 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당신들이 처음 보는 책이 많다’고. 우리들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만나거나 손에 쥐어드는 책은, 헌책방 일꾼이 ‘만져 본’ 책 가짓수나 권수와 견주면 새발가락에 낀 먼지만큼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책을 많이 읽었다고, 제법 안다고, 무슨 지식이 있다고, 어디 교수라고, 무슨 학자라고 이름쪽을 내밉니다. 뭐, 이름쪽 내미는 일이야 자기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이름쪽을 내밀려면, 자기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힘써야지요. 마음을 기울여야지요. 부지런히 자기 머리와 마음과 몸을 갈고닦거나 추슬러야지요. 여태껏 우리 삶터와 세상을 밝혀 온 훌륭한 이들 얼과 넋이 고이 담긴 소중한 책 하나가 끝없이 묻혀 있음을 헤아리면서 차근차근 찾아나서기도 해야지요. 헌책방 일꾼들이 ‘우리들 책손한테 반가울 책’인 한편 ‘헌책방 일꾼한테는 밥벌이가 될 고마운 책’을 한결같은 매무새로 찾아나설 수 있어야지요.





 책이 살면 우리 삶도 삽니다. 우리 삶이 살면 우리가 즐기는 일이나 놀이도 삽니다. 우리가 즐기는 놀이와 일이 산다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회 얼거리나 문화 터전도 힘을 얻으며 살찔 수 있을 테지요. 우리 사회와 문화가 북돋운다면, 우리가 마음껏 즐기며 누릴 책도 한껏 나아질 테며 푸짐하게 펼쳐질 테고요.

 우리가 애쓰는 만큼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새책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베스트셀러에만 눈길을 맞춘다면 새책방 책꽂이는 베스트셀러에 더 많은 자리를 내어줍니다. 우리가 처세와 실용서적에만 마음을 쏟는다면 새책방 책꽂이는 처세와 실용서적에 자리를 훨씬 많이 내어줍니다. 우리들이 어린이책을 많이 찾아보니 새책방 꾸밈새가 확 달라지지요? 우리들이 인문학 책을 좋아한다면, 자연과학 책을 좋아한다면, 생태와 환경 이야기를 다룬 책을 좋아한다면, 돈-이름-힘이 아닌 사랑-믿음-나눔을 담은 책을 좋아한다면, 새책방 책꽂이와 꾸밈새는 어떻게 거듭나겠습니까. 우리가 도서관에서 즐겨 빌려읽는 책에 따라 도서관 사서 눈높이도 달라집니다. 도서관 높낮이는 도서관을 즐겨찾는 우리들 몸가짐과 손뻗음에 달려 있습니다. (4341.1.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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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리고 뒤돌아보니 극장에 남은 사람 열대여섯
 [내가 본 영화 10]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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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는 ㄱ출판사 사장님이 시내에 나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때 극장에 함께 있던 사람 숫자는 다섯이라고 합니다. 제가 인천 ㅇ극장에서 옆지기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열대여섯쯤 함께 보았습니다. 사백 사람 남짓 들어올 수 있는 극장에 열대여섯이라.

 고등학교 다니던 때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나 〈숲속의 방〉을 보러 인천 ㅇ극장이나 시민회관에 찾아갔을 때, 영화를 함께 본 다른 사람들 숫자는 너덧이었습니다. 그때 뒤로 이렇게 적은 숫자가 큼직한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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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분에 걸친 짧지 않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핸드볼 하나로 살아가는 아줌마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펼칩니다. 배경은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훈련과 올림픽 때 경기를 치르던 일.

 국민학교 적부터 핸드볼이라는 운동경기가 참 좋았고, 학교에 운동부라도 있으면 이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며 고등학교며 대학입시에 따른 교과서 외우기에만 치달을 뿐, 동아리 활동으로라도 핸드볼 운동을 즐길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운동장 한쪽 구석에 핸드볼 골대라도 있어야 이 운동을 하지요. 골대가 있어도 그물이 없으니 공 한 번 넣으면 주으러 가는 것도 일이지만.

 혼자서는 핸드볼을 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평일 낮 두어 시에 가끔 보여주는 방송중계를 보곤 했습니다. 그것도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 때 드문드문.

 중고등학생 때(1988∼1993) 집에서 핸드볼 중계방송을 보노라면, 관중자리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는데, 저처럼 핸드볼 중계방송을 ‘재미있다고 지켜본’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제가 핸드볼 중계방송을 보던 때, 형은 으레 ‘재미없는 걸 왜 보냐?’ 하면서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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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첫머리에, 전국대회 결승전을 치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응원하는 관중 거의 없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인천 ㅎ’ 팀은, 우승을 했어도 팀이 해체가 됩니다. 해체되는 핸드볼 팀 연고지가 ‘인천’이라는 대목이, 인천을 연고지로 했다가 해체된 숱한 운동팀들을 떠올리게 해서 살짝 아찔합니다. 현실 삶과 영화 이야기가 다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또 누구나 알면서도 바꾸지 않다시피, 핸드볼이건 하키건 체조건 펜싱이건 양궁이건 배드민턴이건, 여느 때에는 이러한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선수들한테 눈길 한 번 따숩게 건네는 사람이 드뭅니다.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운동 하나만 해서 먹고살아간다는 일은 아주 위험합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즐기는 가운데 자기 밥벌이가 따로 있어야지요. 따로 자기 밥벌이가 되는 일을 하면서 생활체육으로 운동경기를 즐길 수 있어야지요. 그렇지만 우리 나라 얼거리를 살피면, 돈이고 힘이고 이름이고 없는 사람들이 돈과 힘과 이름을 얻는 어렵고 고달프지만 고작 하나 보임직한 길이 ‘운동선수로 금메달을 따거나 세계대회 1등’이 되는 길입니다. 박세리는 그저 골프를 즐기면 좋았을 사람이지만, 세계대회 1위를 하지 않고는 스스로 먹고살 길도 자기 운동을 이어나갈 길도 없습니다. 어느 한편으로 보면 불쌍하고 쓸쓸하고 고단한 삶입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나오는 핸드볼 선수들은 어떠한가요. 팀이 우승을 해도 포상금 한 푼이나마 제대로 주어졌을까요. 고작 스물 앞뒤일 선수들이 ‘뛸 곳이 없어지’면 어찌해야 할까요. 운동 하나만 죽어라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 나오는 ‘한미숙’ 남편처럼, 핸드볼 하나만 알고 사회는 ‘좆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사기에 걸리고 폐인이 되다시피 스러져 갈밖에 다른 길이 있을까요. 그래서 몇몇 생각있던 운동선수들은 영화에 나오는 ‘김혜경’처럼 나라밖으로 눈을 돌리며, 더 가시밭길과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일본 구단으로 가고 스위스로 가고 오스트리아로 가고 하면서 선수목숨을 이어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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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경기는 돈이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일까요. 그러면, 고작 서른다섯도 못 되어 거의 다 은퇴를 해야 하는 이런 운동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서른다섯, 또는 마흔쯤 되는 나이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들 여느 사람들한테는 왜 자기 일터를 다니는 가운데, 야구며 축구며 핸드볼이며 하키며 체조며 달리기며 헤엄치기며 활쏘기며 탁구며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터전이 없을까요.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구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천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침 축구’ 하나를 빼면 무슨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을까요. 그나마 아침 축구도 남정네들이 하지, 남녀가 아우르며 즐길 수 있는 놀이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마음껏 맑은 바람을 쐬면서 뛸 수 있는가요. 하다못해 골목길에서 자동차 빵빵거림에 시달리지 않으며 배드민턴이라도 할 수 있는지요. 초중고등학교 잘 닦인 테니스장에서 동네사람들이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지요. 운동부가 있는 초중고등학교 체육관에서 동네사람들도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는지요.

 “생각도 하고,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시골학교 체육교사가 된 스승이 한미숙한테 하는 말)

 ‘한미숙’과 ‘송정란’ 들이 뛰던 핸드볼팀 감독이었던 분은 어느 시골학교 체육교사가 되어 아이들한테 핸드볼을 가르칩니다. 실업팀 감독이었을 때는 늘 찌푸린 얼굴이었는데, 시골학교 체육교사로 일할 때에는 활짝 갠 밝은 얼굴입니다.


 - 5 -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갑니다. 얼마쯤 나오다가 툭 끊어집니다. 영화를 볼 때는 자막 올라가는 마지막까지 보는 맛이 있는데, 인천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늘 자막을 잘라먹습니다.

 뒷간에 들러 물을 빼고 낯을 씻습니다. 옆지기와 손을 잡고 터덜터덜 싸리재 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 앞에 섭니다.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동네 구멍가게에 들르기로 합니다. 보리술 두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삽니다. (4341.1.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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