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지기 신발 뒤축이 한쪽으로 많이 갈리는 바람에 걷기 몹시 나쁩니다. 걸음새가 한쪽으로 쏠리면 신발도 한쪽이 많이 닳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쪽만 갈리면서 걸음새가 뒤틀립니다. 신집에 가서 이놈 저놈 둘러보노라니, 신집 아저씨가, “신발이 안 갈리면 어떻게 해요. 우리들도 먹고살아야지요.” 하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니 마주보며 빙긋 웃습니다. 그렇지만 뒤축이 단단해 잘 안 갈리는 신발이라 한다면, 몇 푼 더 얹어 주고라도 그 신으로 사 신지 않을까요. 싸게싸게 많이 팔아도 장사가 될 수 있지만, 알맞는 값을 제대로 치르면서 팔아도 장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지난 토요일, 개봉동에 사는 고등학교 적 선배네 집에 놀러갔습니다. 선배네 집은 아파트. 아파트 이름은 ‘로즈빌’. 선배는 혼인한 뒤로는 책 한 권 사읽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갓 혼인했을 때 집들이를 가니 “내 꿈이 서재 하나 가지는 거다.” 하면서 “책이 얼마 없지만 함 봐라.” 하면서 자랑을 했건만, 이제는 ‘책 있는 방’이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선배는 날마다 현장에 나가 공무원들과 복닥이는 게 일이라는데. 자동차 몰고 쉴 틈 없이 출장을 다니는 만큼 마음 다잡고 책을 손에 쥐기 힘들겠지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밥먹고 아기 보고 텔레비전 보다가 술 한잔 마시고 잠들기 바쁠 테고.

 눈없는 예수님나신날이 지났습니다. 날짜가 12월하고도 25일이면 ‘세 번 춥고 네 번 따뜻하더라’는 우리네 날씨가 아니더라도 오들오들 쌀쌀해야 하건만, 자전거 타고 나들이 다녀오기에 걸맞을 만큼 따사롭습니다. 앞으로도 눈있는 예수님나신날을 맞이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래도 예수님오신날이라 하기에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골목길 마실을 다녀 봅니다. 옛 미림극장 앞을 지나고 화평동을 지나 화수동을 거쳐 화도진공원을 가로질러 만석동으로 갑니다. 너나들이가 사는 만석동 9번지 쪽방골목에서 서성거리며 사진을 찍다가 동인천 쪽으로 나오는 길, 9번지 들머리에 사는 아저씨가 빨래를 걷으면서 “포근합지요?” 하고 인사말을 건넵니다.

 만석동 9번지를 가운데 놓고 동서남북으로 제강소 제분소 철공소 방직공장 들이 줄줄줄 늘어서 있어, 걷는 내내 코가 냅습니다. 집에 뒷간을 들일 수 없어 공동뒷간을 쓰는 사람들. 이 골목 사람들한테 나라나 지역정부는 무엇을 베풀어 주면 좋을까요. 열 해쯤 앞서처럼 동네 1/4을 싹둑 잘라서 공장으로 드나드는 큰차 다니기 넉넉하도록 찻길 넓히기? 동네 1/5씩 잘라내며 빌라나 아파트 올려세우기? 만석동 9번지 사람들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까요? 큰 짐차 씽씽 내달리는 넓혀진 길에 이 골목 사람들이 차로 오갈 일이 있을까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집 허물고 30층 가까이 올려세운 아파트를 올려다봅니다. 놀이터 하나 보이지 않고 땅위 주차장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땅밑 주차장 들머리만 보입니다. 달동네 판자집처럼 다닥다닥 붙인 30층 안팎 아파트 건물들. 이웃끼리 얼굴 볼 일도 없겠습니다. (4340.12.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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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나들이를 하며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책 하나 선물해 줍니다. 제가 펴낸 잡지를 선물해 주기도 하지만,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천 원이나 이천 원쯤 주고 산 책을 곧잘 선물합니다. 함께 만난 분한테 밥이나 술이라도 얻어먹는 날이라면, 몇 만 원짜리 사진책을 슬그머니 내밀기도 합니다. 밥값이나 술값으로 돈이 나가는 일은 꺼리지만, 책값으로 돈이 나가는 일은 꺼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지기도 합니다. 책 선물 받은 분이 다음에 다시 한잔 사겠다고 하면, 뭘요 얻어먹는 마음이나 얻어읽는 마음이나 다르지 않을 텐데요, 아무개님은 책방 나들이를 하기가 수월하지 않으나 저는 늘 책방 나들이를 하니까, 지금 책방 나들이를 해서 책 한 권 장만했다고 생각하시면 되지요, 저는 밥 한 그릇 사먹었거나 술 한 잔 사마셨다고 생각하면 되고요.

 모든 헌책 값이 ‘천 원’이지 않습니다. 요즘 물건값을 헤아리면, 헌책방에서 파는 여느 책 한 권 값은 ‘삼천∼사천 원’이 알맞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싸게 파는 헌책방이라고 해도, ‘한 권 = 천 원짜리’ 책을 사는 일이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천 원짜리 책 선물”이나 “삼천 원짜리 책 선물”이라고 말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값싸게 나오는 〈범우문고〉라든지 〈책세상문고〉라든지 〈살림문고〉는 삼사천 원이면 장만할 수 있습니다. 새책방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자리에 밀려나 있는 손바닥책이지만, 우리들이 찾아 주고 사랑해 주면 사람들 손길 많이 탈 만한 곳으로 옮겨나올 수 있겠지요.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3년까지, 인천에 있는 새책방들에서 〈서문문고〉와 〈을유문고〉를 천오백 원 안팎으로 사서 읽을 수 있었고, 손쉽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1970년대 세로쓰기판 소설책 재고가 남아 있는 새책방에서는 옛날 값으로 눅게 사들여서 읽은 뒤 동무들한테 선물하기도 했어요. 어쩌면 책 선물이란, 값나가고 소중하며 훌륭하다고 하는 책을 나누어 주는 일이라기보다, 값싸게 사서 읽으면서도 마음을 적시거나 움직이는 책, 단출해서 뒷주머니나 잠바 안주머니에도 들어갈 만한 작은 책, 예수님이나 부처님 말씀처럼 훌륭하다고는 못해도 고이고이 되새기며 헤아릴 만한 줄거리를 담은 책을 함께 즐기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주는 쪽에서도 짐스럽지 않고, 받는 쪽에서도 짐스럽지 않게. 주는 쪽에서도 ‘받아서 읽어 줄 이’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재미나게 읽고 받아들이거나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책, 받는 쪽에서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책을 골랐을까’ 헤아리면서 지금 내(받는 사람)가 내 삶을 어떻게 꾸리고 있는가 돌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책을 같이 나누는 일이기도 할 테고요.

 한두 주에 한 번쯤 서울땅을 밟아 봅니다. 인천땅 헌책방으로는 살짝 아쉽다고 느끼는 대목, 좀더 너른 헌책방 품을 느끼고 헌책방마다 다 다른 가슴을 맛보고 싶어서. 쉽지 않은 발걸음인 만큼, 한 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연락을 해 보며 만나자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반가운 이를 만날 때면, 헌책방에서 골라든 책을 죽 보여주면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하나 가져가시라 하거나, 예전에 읽고서 참 좋았다고 느낀 책을 다시 장만해서 조용히 내밀어 봅니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책을 선물하자면, 제가 선물할 책을 받는 사람이 반길 만한 책인지 아닌지를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책 선물을 받을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며, 어떤 사람들과 복닥이며 어떠한 걱정이나 어려움이 있는지를 짚어 나갑니다. 그분이 벌써 읽은 책이어서는 안 되고, 그분이 하는 일에서 다 느끼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 건네는 책이어도 안 됩니다. 책 선물 값으로 치면 다문 천 원, 또는 이천 원, 또는 삼천 원, 또는 오천 원쯤이지만, 이만한 돈을 들이는 일보다, 책 선물 받을 사람 형편과 매무새와 둘레 터전을 헤아리는 데에 들이는 마음씀이 훨씬 큽니다.

 옷 선물, 음반 선물, 공연표 선물, 물건 선물하고 책 선물이 다르다면 이러저러한 대목이라고 느껴요. 선물로 들어가는 돈은 적다고 하지만, 선물할 책을 고르는 데 들어가는 품이나 시간이며 마음씀은 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책 하나 선물하려고 생각하고 찾고 움직이노라면, ‘그러면 나는 어떤 책을 읽어서 마음이 흐뭇하지?’ 하고 되짚게 됩니다. ‘나부터 나한테 선물할 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곱씹게 됩니다. ‘내가 나한테 책 하나 선물하듯이, 내가 만나는 분한테도 책 하나 선물해야겠지.’ 하고 되뇌이게 됩니다.

 우리가 읽어서 우리 마음을 알뜰히 채워 주거나 쓰다듬어 주거나 북돋워 주는 책 하나 엮어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당신들 온삶을 바쳐서 책 하나 엮어냈는데, 이런 고마운 책을 내면서 돈을 조금 만진 사람이 있고, 돈푼 구경 못해 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글쓴이는 죽고 난 뒤 비로소 책 값어치가 알려져서 두루 읽히거나 사랑받기도 합니다. 우리들 ‘읽는이’는 돈 몇 푼 치르면 ‘글쓴이가 피땀 흘려 이뤄낸 열매’를 앉은자리에서 큰 고달픔 없이 맛볼 수 있습니다.

 책 하나 펴내는 어려움이자 책 하나 펴내는 즐거움을, 선물할 책 하나 고르면서 ‘책 하나 고르기 참 어렵네. 그래도 참 즐겁네’ 하고 생각하면서 살짝살짝 느낍니다. 책 하나 선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선물한 책을 나는 얼마나 마음깊이 되읽고 거듭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되묻습니다. 한 목숨이 죽어서 제 배속으로 들어왔고, 한 책에 바쳐진 피땀이 제 주머니돈을 거쳐서 다른 이 마음속으로 옮아갑니다. (4341.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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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 땅과 아이들을 살리는 먹을거리 교과서
요시다 도시미찌 지음, 홍순명 옮김 / 그물코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잘 먹겠습니다
- 글 : 요시다 도시미찌
- 옮긴이 : 홍순명
- 펴낸곳 : 그물코(2007.5.31.)
- 책값 : 6000원


 이 책 하나 31 ― 밥을 먹습니까, 돈을 먹습니까?
 : 요시다 도시미찌, 《잘 먹겠습니다》



 (1) 내 밥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밥을 먹기 앞서 두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이며 비손을 올립니다. 우리 옆지기는 천주교를 믿기에 천주교 틀에 따라 비손을 합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믿기에, 먹을거리를 내어준 흙과 뭇 목숨붙이들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 다음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 부디 옛날 어른들의 먹는 지혜에 귀기울여 주세요. 우엉도 대충 씻어 뿌리 잔털까지 먹었습니다. 우엉은 껍질에 맛이 있습니다 ..  (79쪽)


 조금 앞서 아침을 들었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베풀어 준 흰김치, 양조장집 아주머니가 베풀어 준 무채, 지난주에 성당에서 얻은 빨간무, 이웃 아주머니가 나누어준 달걀을 반쯤 익힌 것, 가게에서 사 온 콩과 누런쌀로 지은 밥, 이렇게 밥상을 차려서 먹었습니다.


.. 모든 먹을거리는 뿌리를 찾아보면 흙에서 나왔습니다. 흙이 변해서 된 우리들은 흙에서 가꾼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 튼튼한 아이를 키우고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려면 먼저 그 바탕이 되는 흙을 건강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7∼9쪽)


 술안주 삼아서 가끔 과자부스러기를 먹을 때가 있는데, 과자는 대여섯 봉지를 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여 방귀가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집에서 손수 쌀을 일고 씻고 안쳐서 지은 콩밥에다가 한두 가지 푸성귀나 김치로 밥을 먹으면 반 그릇으로도 배가 부르고, 한 그릇을 다 비우면 더는 밥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까지 배가 고프지 않고, 저녁에 밥을 먹을 때에도 반 그릇쯤 먹으면 속이 넉넉합니다. 이튿날 아침이면, 냄새 살짝 구수하고 푸른빛 슬며시 도는 똥이 시원하게 나오면서 방귀는 거의 안 뀌게 됩니다.


.. 자기들이 흙과 미생물과 연결되어 서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친근감이 나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체험이 없으면 자연 환경문제를 아무리 가르쳐도 다만 지식의 조각으로 끝나고 말 두려움이 있습니다 ..  (19∼20쪽)


 책상 앞에 앉아서 글쓰는 일을 해야 할 때면 힘이 많이 들어서 때때로 입이 심심합니다. 요즈음은 귤이 나는 철이니 썰렁한 부엌에 귤을 한 바구니 모셔 놓고서 두 알씩만 방으로 가지고 와서 천천히 벗겨서 먹습니다. 불은 잠자는 작은 방만 땝니다. 거의 ‘외출’로 맞추어 놓으니 불을 땐다고 할 수 없고, 잠자는 방바닥에는 이불이 늘 깔려 있습니다. 한참 일하다가 허리가 아프면 이불로 들어가 옹크리기도 하고 다리를 쭉 뻗어 보기도 합니다. 불을 때지 않아도 이불 속에서는 따뜻해서 손도 녹이고 몸도 풀어 줄 수 있어 좋습니다.


.. 고기, 달걀, 우유는 조금씩 소중하게 먹는 것이 좋습니다. 싼 고기, 달걀, 우유는 값을 낮추기 위하여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동물들을 기릅니다. 그런 동물들은 허약하고 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약품을 써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축과 연결된 우리들은 어떨까요? ..  (83쪽)


 우리 집으로 놀러오는 분들이 감이나 능금이나 배를 들고 오곤 합니다. 이럴 때 감이나 능금이나 배를 흐르는 물에 씻은 뒤 쟁반에 담아서 내옵니다. 우리 식구는 감씨는 못 먹지만 능금씨나 배속까지 오독오독 씹어서 먹습니다. 껍질은 열매에서 가장 맛있는 곳이니 마땅히 그냥 먹습니다. 손님한테 내어준다고 해서 껍질을 벗기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곳을 쓰레기로 버릴 수 없으니까요. 가장 맛있는 곳이니 “껍질째 드시면 훨씬 맛있어요. 열매는 껍질 맛으로 먹어요. 씨앗도 얼마나 맛있는데요. 감이나 능금이나 배가 다시 태어나자면 바로 고 작은 씨앗 때문에 다시 태어나잖아요. 새로운 열매가 될 유전자와 영양분을 담뿍 안고 있는 씨앗이니 오도독 깨물어 먹으면 우리 몸에도 좋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 인간도 닭장의 닭처럼 완전히 격리된 방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  (22쪽)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껍질이나 씨앗이나 배속을 남기는 분들이 거의 모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꺼려지기도 해서 그렇기도 하고, 쓰고 텁텁해서 입맛에 안 맞아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땅콩조차 껍질을 벗겨서들 먹고 있으니까요.





 (2) 선배와 후배와


 지난주 토요일, 개봉역 둘레에 우뚝우뚝 솟은 아파트 가운데 ‘로즈빌’이라는 곳 22층에 사는 고등학교 선배네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아파트 이름 ‘로즈빌’이란 무슨 뜻일까 한참 머리를 굴렸지만, 돌머리로는 그 뜻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24층까지 우뚝 솟은 아파트들인데,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가 매우 좁습니다. 햇볕이 들지 않겠군요. 놀이터는 놀이기구 몇 가지가 있지만 흙 한 줌 없습니다. 참 썰렁하네, 하고 느꼈지만, 다른 아파트도 이와 비슷하겠지요.


.. 역시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 넘쳐나는 정보 홍수에 밀려 생명이나 앞날에 관한 귀중한 정보는 여간해서 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 사람들은 그것을 싸다고 삽니다. 서로가 자기 돈벌이를 위하여 사는 사회, 청소년 흉악범죄는 그런 사회를 토양으로 자라난 검은 꽃입니다 ..  (29쪽)


 저도 어릴 적에 아파트에서 열세 해 살았습니다.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동과 동 사이는 5층 아파트 높이만큼 띄엄띄엄이었습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바닷가 항구 바로 옆에 있던 우리 아파트는, ‘전쟁이 나서 포탄을 맞아서 쓰러져도 옆 동이 닿지 않아야 한다’는 잣대가 있어서 그런 잣대에 따라서 지었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놀이터는 두 군데 있었는데, 두 놀이터는 따로따로 아파트 한 동 넓이와 똑같을 만큼 무척 넓었습니다. 그래서 이 놀이터에서는 11:11 공차기 놀이나 9:9 공놀이를 즐길 수 있었어요. 놀이터 바닥은 모두 모래였습니다.


.. 파리는 정화된 세계에 사는 우리들에게 함께 생활할 수 없는 보기 싫은 생물이지만, 지구에게 또 우리들에게 없어서 안 되는 귀중한 생명입니다. 병충해도 파리와 마찬가지로 지구를 청소하는 일꾼입니다 ..  (34쪽)


 승강기를 타고 22층으로 지이잉 올라갑니다. 승강기는 ‘장애인도 바퀴걸상을 밀고 탈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이런 편의시설은 참 좋군요. 그런데, 바퀴걸상을 타고다니는 장애인들이 이 로즈빌 아파트에서 전세라도 얻어서 살 수 있을 만한 살림일는지.


.. 예전에는 사람의 똥오줌을 통에 숙성시키고 농사꾼은 그것이 완전히 정화했는지 손끝으로 찍어 맛보고 나서 거름으로 썼습니다. 그런 거름으로 키운 채소에 병충해는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기생충이나 병원균은 덜 숙성된 사람의 똥오줌을 직접 채소 가까이에 뿌렸을 때 크게 생겨났던 것입니다 ..  (45쪽)


 선배와 형수는 큰상 가득 먹을거리를 차려 줍니다. 두 사람 다 바깥일을 다니느라 시간도 없을 텐데, 참말 힘들겠습니다. 상차림도 일이지만, 나중 뒷갈무리도 일이잖아요. 형수님한테 슬쩍 여쭈니, “평소에는 안 쓰지만, 오늘 같은 날은 자동세척기 쓰니까 괜찮아요.” 합니다.


.. 초등학생은 아직 괜찮지만 고등학생, 대학생이 될수록 먹을거리는 황폐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먹는 지식을 가르쳐도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없으니까 먹을거리도 아무거나 먹게 되는 것이겠지요 ..  (63쪽)


 동기 녀석 부부와 후배 녀석 부부, 혼자 사는 후배 하나, 이렇게 하여 아홉 사람이 큰상에 둘러앉아 젓가락질과 숟가락질을 합니다. 부지런히 술잔을 부딪힙니다. 예전에는 ㅊ소주만 마시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다른 ㅊ소주를 더 마시게 된다며, ‘ㅈ회사 불쌍해서 어쩌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뭐, 둘 다 어마어마하게 팔릴 텐데.

 고기와 회는 밖에서 사 왔지만 다른 찬거리는 집에서 마련하신 듯. 참으로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저와 옆지기를 뺀 다른 사람들은 돈벌이 이야기, 주식 이야기, 자동차 이야기 들을 주고받습니다. 다들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선배는 “야, 결혼하고 나서 여지껏 책 한 권도 못 사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선배는 책이 있는 방(서재)도 따로 있잖아요. 요새 그렇게까지 책 있는 방 마련해 놓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고 대꾸해 줍니다.

 작지 않은 차, 큰 텔레비전, 헹굴 때 속이 들여다보이는 세탁기, 단추만 누르면 알아서 씻기는 설거지 기계, 슥 밀기만 하면 쓸고 닦고 해 주는 청소기 ……, 참으로 많은 전자 설비를 쓰는 우리들은, 집안살림이나 바깥일을 보면서도 손쓰거나 시간 들일 일이 참으로 줄었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 틈 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갖 전자 설비를 쓰면서 아껴진 시간으로도 ‘더 많은 돈을 벌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힘들고 바쁜가 봐요.


.. 먹는다는 것은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입니다 ..  (74쪽)


 넌지시 물어 봅니다. “아이가 크면 나중에 학교 보낼 생각이에요? 학교 보내면 바보 될 텐데.” 선배는, “학교 왜 안 보내? 보내야지.” 하고 말하고, 동기 녀석은 “나는 안 보낼까 봐.” 하고 말합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다가 유치원까지 하면 열두 해는 훨씬 넘고 열대여섯 해쯤 되겠지요. 이만한 세월 동안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영어? 한문? 상식? 또 뭘 배우지요? 논술? 태권도? 컴퓨터? 그리고 또?

 수능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면 처음부터 수능 시험문제만 가르칠 일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이름있는 대학교에 가야 한다면, 그런 대학교에 가서 좋을 일이 무엇일까요. 나중에 돈 많이 주는 큰회사에 일자리 얻으려고? 그러면 처음부터 돈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시키면 될 노릇이 아닐는지.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수 아이들을 가르치면 될 텐데. 다들 대학교 나오고 어쩌고 하면서 다른 집 아이들 과외는 잘만 시킨 지식인들인데, 그런 지식으로 자기 아이 하나 못 가르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고, 돈벌이에 너무 푹 빠져서도 그러한지 모르며, 돈벌이보다도 일에 잔뜩 매이면서 자기 삶을 안 찾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아이들을 학교에 ‘버려’ 놓거나 ‘가두어’ 놓으며 햇볕 한 줌 바람 한 줌 못 쬐게 할까요.

 모두 다 똑같은 시멘트집 아파트에 살면서 집과 학교와 학원 사이를 자가용이나 학원버스로 오가며 땅 한 번 아이들 스스로 못 밟게 하는 이런 모습이, 부모가 할 노릇일는지요.


.. 영양사는 숫자를 맞추려 먹을거리 재료를 사방에서 모을 것이 아니라, 지금 지역에 있는, 농약이 적은 제철의 건강한 먹을거리 재료를 조사하여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아이들이 물리지 않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  (64쪽)


 저녁 열한시 즈음 자리를 접기로 합니다. 우리 식구는 전철을 타고 돌아가도 되는데, 인천 사는 후배가 자기 차로 같이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대리운전 부르면 된다고.


.. 왜 아픈 사람은 자꾸 늘고 새로운 병원체가 나타나는지? 왜 집중력이 약한 어린이가 늘고 돌발성 범죄가 느는지? 왜 사람은 툭하면 싸우는지? 앞날이 어두운데 왜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는지? 이 모든 현상의 바탕 원인에 대해 말로 하기 어렵지만, 우리들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언제부터인가 사람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도 얼마 전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어린이들도 지도자도 대부분의 사람이 잊어버렸습니다 ..  (98쪽)


 후배 녀석도 머잖아 색시를 만나 혼인을 하겠지요. 후배 녀석도 예식장에서 혼인을 할 테고, 청첩장 받아서 예식장을 찾아가면 뷔페로 밥 한 끼니 차려놓겠지요. 서양 예복을 입고 사진 촤라락 찍은 뒤, 케익을 자르고 나서, 비싼 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을 올린 다음, 다른 동무들이 꾸며준 웨딩카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나라밖 어디로 나들이를 한 주쯤 다녀올까요.





 (3) 작은 책, 《잘 먹겠습니다》


 고작 105쪽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 《잘 먹겠습니다》를 지지난달에 사서 이달 첫머리에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책상맡에 그대로 올려둔 채 틈틈이 집어서 되읽습니다. ‘땅과 아이들을 살리는 먹을거리 교과서’라는 작은이름이 붙은 조그마한 이 책은, 일본에서 ‘농사체험 학습’을 할 때 교과서처럼 쓴다고 합니다.

 일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하고 마찬가지로, 논밭에서 풀을 뽑으라 하면 잡풀이 아닌 곡식 풀을 땀 뻘뻘 흘리면서 뜯는답니다. 날마다 ‘어머니가 부엌일 하며’ 밥상에 차려 주니 먹기는 먹었겠지만, 벼가 어떤 모양인지, 보리가 어떤 모습인지, 수수가 어떤 생김인지, 감자풀과 고구마풀은 무엇인지 하나도 가려내지 못할 테지요. 고구마케익은 맛있다면서 먹어도 고구마줄기 하나는 못 찾겠지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다는 울릉도 호박엿’ 이야기는 흔히 들었겠지만, 그 호박이 얼마만한 크기와 빛깔로 꽃을 피우는지는 모르겠지요. 고기를 구으며 깻잎은 즐겨먹었어도 깻잎이 깨를 심어서 거두는 잎이고, 깨가 얼마나 자잘한 알갱이로 열매를 남기는지 모를 테지요.


.. 우선 알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행동에 주의하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지역기업이 자라납니다. ‘뭐야! 사회를 바꾸는 것은 먼저 자기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그때 왜 거기서 포기했을까, 그때 왜 좀 분명히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야깃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왜 학교의 교육위원회에서는 이런 것을 전해 주지 않을까?’라고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우선 그렇게 생각한 당신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  (31쪽)


 우리들은 무엇을 ‘안다’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장은 우리 아이들한테 ‘너희한테 지식이 얼마만큼 있고, 너희가 이 사회에서 얼마만큼 너희들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줄까요. 대학교 졸업장이 있으면, 혼자힘으로 꿋꿋하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졸업장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사람 쓰레기’일 뿐일까요.


.. 병원균이 세포를 침범한다기보다 건강치 못한 부위에 병원균이 모여들었을 뿐입니다 ..  (37쪽)


 오늘은 12월 25일, 예수님오신날입니다. 예수님오신날에 눈이 오면 ‘하얀 성탄절’, 영어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만,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12월 25일은 따뜻합니다. 2008년은 어찌 될까요. 2009년은? 2010년쯤 뒤부터는 우리 나라도 ‘반소매 옷을 입고 맞이하는 예수님오신날’이 되지 않을는지요. (4340.12.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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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마치다 준 지음, 김은진 옮김 / 삼인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각하!
- 글ㆍ그림 : 마치다 준
- 옮긴이 : 김은진
- 펴낸곳 : 삼인(2007.6.18.)
- 책값 : 8000원



 이명박 새 대통령한테 읽히고픈 만화책
 [살가운 만화 31] 마치다 준, 《각하!》



 (1) 나무젓가락과 헌책


.. 2001년 11월. 우리는 그림자 여단을 결성했다. 단원은 단 둘. 세계에서 유일한 최대의 조직이다. 아무리 큰 그림자라도  실체를 알고 나면 보잘것없는 것이 많다 … 민중은 그림자를 두려워한다. 권력자의 그림자를. 권력자의 그림자는 항상 거대하고 선명한 법이니까 ..  (9∼11쪽)


 모임이나 일터마다 한 해 마무리를 한다면서 조촐하게 잔치마당을 꾸리는 때입니다. 엊저녁 어느 모임 마무리잔치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이런저런 먹을거리가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공연도 있습니다. 차려진 먹을거리는 찾아온 사람들한테 주는 것들인 만큼, 저와 옆지기도 몇 가지 냠냠짭짭 집어먹습니다.


.. “공원 나무가 전부 잘려 있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요즘 서민들이 밥을 지을 때 땔감으로 나무가 모자라서요.” “아니, 이건! 내 석상도 깨져 있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서민들이 몸을 녹이려고 태우는 것이거든요.” ..  (131쪽)


 그런데 먹을거리 마련된 자리에 놓인 접시와 젓가락과 물잔은 모두 ‘한 번 쓰면 버리는 것’들뿐입니다.

 젓가락이나 물잔을 100개 200개 300개 마련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두고두고 쓸 수 있는 것’으로 마련해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마무리잔치에 오는 손님들한테 ‘젓가락과 물잔을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값싸면서도 튼튼하고 손쉽게 챙길 수 있는 꾸러미로 묶어서 줄 수도 있을 테고요.

 중국집에서 쓰는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갖추어 두는 일도 돈으로나 나중 설거지로나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요새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작은 물잔도 얼마든지 쓸 만하다고 느낍니다.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접시를 사서 쌓아 둔다면 치우기도 수월하다고 하겠지만, 잔치판 뒤끝에 치워 쓰레기봉투에 담으면 우리 눈앞에서만 사라질 뿐이지, 그 쓰레기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 “이 추운 날씨에 저자들은 왜 밖에 모여 있는 거야? 불순분자들 아냐?” “각하, 살 곳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진짜야? 그렇다면 어디 빈 건물을 찾아서 빌려 주지 그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정부 시설이 남아돌잖아.” “여긴 내 집무실이잖아!” “네, 각하, 쓸모없는 곳이라고…….” ..  (87∼88쪽)


 그렇게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것으로만 갖추어 두는 줄 알았다면, 찾아갈 때부터 수저며 쟁반이며 들고 갈 텐데. 아마 다른 마무리잔치에서도 먹을거리를 마련할 때는 이렇게 할 테지요. 출판사들이 하는 출판기념잔치에서도 ‘씻어서 다시 쓸 수 있는 것’을 놓아 두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뜻을 담은 책이라고 해도, 그 책 하나를 만드는 동안 베어 넘어뜨리는 나무와 쓰여지는 물이며 갖가지 자원을 헤아릴 때면, ‘좋은 책이랍시고 내놓지만 참으로 미안합니다’ 하면서 고개숙일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즐거운 잔치가 그저 먹고 마시고 버리는 모습으로 끝맺기보다는 어떤 남다른 뜻과 느낌까지 선서하거나 함께 나누도록 이끌어 가도록 눈길 한 번 더 둘 수는 없을까요.


.. “정말 감동적인 그림이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웅의 죽음인가. 이봐, 가까이 가서 이 그림의 제목을 읽어 보게.” “알겠습니다. 저……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고 씌어 있는데요.” ..  (43쪽)


 나무젓가락 담긴 껍데기는 비닐이기도 하고 종이이기도 합니다. 종이껍데기에 싸인 나무젓가락을 보면 겉에는 으레 ‘고급위생젓가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급위생’ 젓가락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고급위생’이라 한다면, 이런 ‘좋은’ 젓가락은 잘 씻고 말려서 다시 써도 좋은 젓가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나무젓가락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으레 가방에 챙겨 놓고 집으로 가져와서 씻어서 말린 뒤 잘 싸서 가방에 다시 넣고, 다음에 젓가락 써야 할 자리에 이 녀석을 쓰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새 나무젓가락을 톡톡 끊어서 쓰고, 저는 옆에서 ‘예전에 썼던’ 젓가락을 꺼내어 씁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젓가락 다시 쓰면 위생에 안 좋은데.” 하면서 말리거나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무젓가락이 더러우면 얼마나 더럽다고요. 햇볕에 잘 말려서 쓰면 되잖아요. 우리가 먹고 마시는 밥이나 물은 얼마나 깨끗한데요. 우리 사는 이곳은 얼마나 깨끗한데요.” 말도 안 되는 대꾸일 수 있지만,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물건을 볼 때마다 손가락 하나가 잘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 “이봐.” “네, 각하.” “그런데 이건 뭔가?” “네, 고슴도치입니다, 각하.” “음.” “순조롭게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건 어디에 쓰이는 거지?” “글쎄요, 그 건에 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각하.” ..  (28쪽)


 한쪽에서는 새 물건을 더 많이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새 물건을 더 많이 사서 쓰고 꾸준하게 버려 주어야 경제성장률이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만들고 쓰고 버려야 우리 살림살이가 나아질까요. 이렇게 해서 나아지는 살림살이는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어 줄까요. 우리들은 얼마나 즐거울 수 있나요.


.. “각하, 아호리카가 또 지하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흠, 비겁하게 숨어서 하긴. 기왕에 하는 거 떠들썩하게 해야지. 어차피 전 세계에 알려질 거잖아. 좋아, 우리도 이에 대항해야지. 그래, 우리는 거리 중앙 광장에서 하자구! 세계 각국의 수뇌부를 초대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큰 놈으로 한 방 쏴 주는 거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즉시 준비해!” ..  (57쪽)


 날이 갈수록,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읽는 책들은 ‘한 번 읽고 그만’인 책들로 몰립니다. 한 번 읽고 책꽂이에 꽂아 두면 그럴싸해 보이는 책들로 쏠립니다. 두 번이나 세 번쯤 읽을 책들은, 네 번이나 다섯 번쯤 읽을 책들은, 열 번이나 백 번쯤 돌아볼 만한 책들은 자꾸 우리 손에서 멀어집니다. 책도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되어 버렸을까요. 연속극도 한 번 보면 버리면 되고, 인터넷소식과 이야기도 한 번 보고 잊으면 되고, 사람도 한 번 만나서 같이 일한 다음 헤어지면 되고 …….


.. “각하, 보시는 바와 같이 형무소는 어딜 가나 만원입니다.” “그만큼 반란분자가 많다는 건가. 그런데 묘하게도 즐거워 보이는군…….” “길거리엔 아무도 없는 거야?” “네, 각하. 거의 다 체포되었으니까요.” “거리에 사람들이 없으니 쓸쓸하군……. 우리도 형무소 들어가서 지낼까?” “아, 네…… 각하…….” ..  (91∼93쪽)


 책이 소중하지 않은 때가 되어서 그럴까요. 적은 돈으로도 손쉽게 책 하나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 그럴까요. 책을 소중하게 아끼던 때에는, 책 하나를 자기 몸뚱이처럼 아끼면서 다루었고, 이렇게 아끼던 책을 이웃이나 동무한테 빌려 주는 일을 즐겨 했습니다. 나한테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면 남한테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나한테는 속 줄거리를 읽어서 가지는 책이지 물건으로 책꽂이에 쟁여 두어 가지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책은 ‘물건이나 재산으로 가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책은 ‘읽어 주는 사람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자기 삶을 가꿀 때’ 비로소 뜻이 있기 때문이지요.


.. “각하, 가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 나라의 농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식량 위기에 빠질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좋아! 그럼 즉시 식량을 확보해!” ..  (29∼30쪽)


 도서관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읽고 또 읽습니다. 수많은 사람 손을 거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손길을 거치는 책들은 다치고 찢기고 뜯어지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서관 책을 놓고 ‘헌책’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헌책방 책은 누군가 한 번 사서 읽은 뒤 흘러나와서 꽂힌 뒤, 새로운 책손이 찾아들면서 만지고 또 만집니다. 수많은 사람 손길을 탑니다. 하지만 헌책방 헌책은 많은 사람 손길을 거쳐도 다치지 않고 찢기지 않고 뜯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돈을 치르고 사야 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껍데기가 비록 헐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살 책이 아닌 만큼은 함부로 다룰 수 없어서’ 그럴는지 모르겠습니다. 새책방 새책도 그렇겠지요. 내가 사기로 마음먹고 서서 읽는 책과 그냥 구경할 마음으로 서서 읽는 책을 다루는 매무새는 같을 수 없습니다.




 (2) 만화책 《각하!》


 12월 19일,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이명박 씨는 48.6% 지지율로 다른 후보를 제치고 1등으로 뽑혔습니다. 거의 모든 신문에서는 ‘압승’을 했다고 말하지만, 한국 사회 절반이 지지하는 한편, 절반은 지지하지 않은 1등입니다. 한 표 권리를 쓰지 않은 37%나 되는 사람들 숫자를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 1/3만 지지해 준 1등입니다.


.. 9ㆍ11테러 이후, 우리들은 매우 언짢고 관용이 없는 사회에 살게 됐다. 나날이 연출되는 테러의 위협, 위정자의 망언을 맹목적으로 믿어 버리는 사람들, 개인의 작은 이익을 지키려고 강대국의 국제법 위반과 그 희생자를 보고도 못 본 체하는 사람들……. 세계를 이렇게 참담하게 만든 것은, 미국 대통령과 그 충실한 연합국의 애완견들일까? ..  (한국 번역판에 붙이는 머리말)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 뽑힌 뒤, 신문마다 어슷비슷한 기사가 실립니다. “이 당선자는 ‘고졸’ 출신 두 대통령과 달리 고등학교 졸업 직후 서울로 상경, 막노동을 해 번 돈으로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으로 공부해 1961년 고려대 상대(현 경영대)에 입학했다”(문화일보), “돈이 없어 중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수험서를 사서 대학에 도전, 고려대 상대에 붙었다.”(해럴드경제)

 이명박 씨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서 연설을 할 때면,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야간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모두 선생님, 헌책방 주인, 시장상인 도움을 받아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이웃이 도와줬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합니다.”(이명박 네이버블로그 자료) 하고 말했습니다. 청계천 헌책방 사장님들이 책을 거저로 주기도 했다는 말도 연설문 곳곳에 실려 있습니다.


.. 지금, 이 나라(일본)는 빛을 잃고 있다. 소년들은 노숙자를 덮치고,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회사가 도산해도 정치가는 “개혁을 위한 통증”이라는 한마디뿐. 강국 아호리카에 아첨하고, 그 아호리카는 최빈국을 폭격하며 헤스라헬에 최신 병기를 착착 공급한다. 그 헤스라헬은 게토의 역사를 팔레스타인에 재현한다. 결국 세계가 퇴색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이나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하나 있다. 근시안적인 세상의 흐름에서 한 발 떨어져 세계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쪽에 몸을 싣는 것 ..  (마치는 말)


 청계천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모여들던 사람들은 있는 돈과 없는 돈을 푼푼이 모아서 길거리 장사를 했고, 이런 장사꾼이 하나둘 늘면서 저절로 저잣거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저잣거리에다가 살림집이 다닥다닥 붙어 선 이곳은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장보기를 하고 물건 구경도 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청계천은 뚜껑이 덮이고 고가도로가 놓이고 삼일아파트가 올라섰습니다. 그렇게 된 뒤 서른 해쯤 뒤, 청계천 뚜껑은 다시 걷히고 고가도로는 치워집니다. 이러는 동안 청계천을 따라서 길거리 저잣판을 벌였던 사람들 살림은 어찌 되었을까요.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에 어느 날부터인가 노점상이 싹 사라졌습니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름 하나로 아주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붕어빵이나 어묵꼬치 하나도 상가에 가게를 들여서 판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고, 붕어빵이나 어묵꼬치 또는 떡볶이와 순대 들은 도시사람들이 먹을 만하지 않은 ‘미관을 해치고 위생에 나쁜’ 것이라고 느껴서 이렇게 조치를 했는지 모릅니다.


.. 시대는 여지없이 과거를 버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도 이라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로벌 자본이 투입되어 지구 자체가 상품 패키지화된 지금, 사람들은 작디작은 일상에서 서로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  (머리말)


 청계천 사람들은 그저 그 모습 그대로 그 사람들 깜냥에 맞게 스스로 집을 짓고 가게를 열고 판을 벌여 장사를 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쉰 해 백 해가 되어 가며 저절로 문화와 사회와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문화와 사회와 마을은, 집권자들 명령 하나로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가, 또 한 번 크게 물갈이가 되듯 바뀌었습니다.

 권력을 움켜쥔 이들 명령은 아주 쉽게 내려질 수 있고, 그야말로 짧은 동안에 후다닥 바뀌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아파트 한 채가 새로 서기까지도 한두 해쯤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지만, ‘재래’ 소리를 듣는 오래된 저잣거리는 참으로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 피땀과 발자국과 손품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새로 대통령으로 뽑힌 이명박 씨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이명박 각하!’로? 당신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우리들한테 밝혔듯, “옛날에는 이웃이 도와줬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합니다” 하는 말처럼, 보통사람을 돕는 사람으로?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보통사람인 우리들한테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는지요. 무엇을 어떻게 돕는다고 할 때 ‘누구’ 목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들한테 일을 맡겨서 ‘어디’에서 ‘언제’ 하실는지요. (4340.12.2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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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셋 + 셋 + 여섯 해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남겨 줄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얻으며 보낼까요. 아이들은 어떤 즐거움을 나누거나 함께하고 있나요. 초ㆍ중ㆍ고등학교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이만큼 가르치고 배워서는 한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없기 때문에, 제도권 교육과정에서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면서 다부지게 살아가도록 이끌기 어렵기 때문에, 이동안 가르치고 배운 여러 가지로는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갈 깜냥과 슬기가 보잘것없어서 고단하기 때문에, 대학교 네 해가 더 주어져야 할까요.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을 동네 분식집에서 만납니다. “와, 아주머니, 아저씨다!” 하고 반기다가 내처 묻습니다. “이번에 누구 찍을 거예요? 이명박 찍으실 거죠?” “이명박을 왜 찍어야 하는데?” “멋있잖아요.” “무엇이 멋있는 모습인가요?” “…….” “대통령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고를 때에는 그 사람이 무슨 정책을 내놓고 우리 삶터와 사회를 어떻게 가꾸려 하는가를 꼼꼼히 살펴야 해요.”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 뽑힙니다. 이명박을 찍겠다던 제 둘레 사람들은 “이명박을 찍어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살지. 지금 서민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데.” 하고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책방 나들이를 합니다. 몇 가지 책을 주섬주섬 살펴봅니다. 만화책 《각하!》(삼인,2007)를 들춰봅니다.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던 때부터 그린 만화입니다. 《달려라 냇물아》(녹색평론사,2007)를 집어듭니다. 자동차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슬그머니 털어놓는 이야기부터 해서 삶이 고스란히 말로 되어 나옴을 보여줍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2000)를 골라듭니다. 일본이 엄청난 번역나라가 된 까닭은, 서양나라 쳐들어옴을 겪고 나서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유학생을 서양나라로 보내면서라 합니다. 자기들을 쳐부순 나라한테 배워야 한다고. 《박정희》(살림,2007)라는 작은 책을 집습니다. 지겨워도, 지겹겨만 여겨서는 우리 삶터를 새롭게 추스를 수 없음을 느낍니다.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녹색평론사,2007)를 챙겨듭니다. 대안 에너지를 마련하여 지구자원 줄어듦을 이겨낼 수 있어도 우리 스스로 헤픈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면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음을 들려줍니다.

 골라든 책을 집으로 들고 와서 하나씩 읽습니다. 50쪽, 100쪽, 150쪽 쭉쭉 읽다가 덮고 다른 책 읽다가 덮습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골목길 마실을 나옵니다. 인천시에서 ‘남북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서, 동네 골목집 한복판을 꿰뚫으며 놓으려는 산업도로 터 앞에 섭니다. 벌써 800억이 들어간 공사라 그만둘 수 없다며 밀어붙입니다. 다문 1억만 ‘좋은 책 장만’ 하는 데 들여서, 동사무소나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너른 터에 꽂아 놓으면 저절로 동네 문화가 살고 사람들 생각과 마음씀씀이를 북돋워 줄 텐데. 그예, 앞으로 수천 억 더 들여 우격다짐으로 새 찻길을 닦아세우려는지. (4340.12.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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