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은 끊은 지 오래인데 - 우리는 왜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김정 지음 / 호밀밭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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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5.24.

인문책시렁 425


《탯줄은 끊은 지 오래인데》

 김정

 호밀밭

 2025.4.11.



  전남 고흥에서 경남 합천으로 부릉부릉 달리면 2시간 남짓 걸릴 테지만, 시외버스를 타고서 돌고돌면 7시간 남짓 걸립니다. 이러다 보니 쇠(자가용)를 거느리려는 사람이 늘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길에서 7시간을 보내느냐고 여길 테니까요. 그런데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길에서 오래 보냅니다.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쇠를 안 몹니다.


  어느덧 스무 살이 넘어가면 쇠를 거느릴 만한 살림을 꾸려야 할까요? 아니면, 서른 살이나 마흔 살이나 예순 살을 지나더라도 느긋이 온누리를 누빌 만한 터전으로 나아갈 노릇일까요? 옆마을과 옆고을과 옆고장을 오가는 수수한 길이란, 누구보다 어린이하고 푸름이를 살피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살림살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러면서 수수하고 가난하게 보금자리를 짓는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삶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탯줄은 끊은 지 오래인데》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 자리에 서면서 부대낀 나날을 차근차근 적바림한 꾸러미입니다. ‘낳은 어버이’ 곁에서 자라다가 ‘태어난 고을’이 싫어서 서울로 달아났던 젊은날을 그대로 밝히고는, 이제 부산이라는 터전에서 곁님과 아이들하고 누리는 하루를 고스란히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버이라는 자리에 서기에 ‘어버이 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버이하고 나는 다르거든요. 또한 나하고 아이들도 다릅니다. ‘낳은 아이’가 여럿이라 하더라도 ‘내가 아이로 살던 때’하고 섣불리 맞대어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어버이와 나와 우리 아이는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다 다른 숨결입니다. 이러면서 ‘사람’과 ‘사랑’이라는 대목에서는 같고, ‘삶’을 저마다 찾아서 누린다는 대목도 같습니다.


  어버이 곁에서 자랐기에 “난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면서 나를 찾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서 곁에서 돌보기에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서 나를 이야기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탯줄은 끊은 지 오래인데》처럼 스스로 남기는 내 발걸음 이야기란, 누구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적는 손끝이면서, 나를 둘러싼 어버이와 아이와 곁님한테 “너랑 다른 나”를 알아보기를 바라면서 옮기는 손길입니다.


  하룻길로 전남 고흥하고 경남 합천 사이를 열네 시간에 걸쳐서 오간 길을 문득 돌아봅니다. 고흥이라는 시골에서는 걸어다닐 만한 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수도 군의원도 그냥 벼슬아치(공무원)도 ‘거님길’에 아무 마음이 없습니다. 이와 달리 합천이라는 시골에는 걸어서 집과 배움터나 일터를 느긋이 오갈 만하더군요. 고흥군은 버스나루가 온통 담배냄새로 절어서 매캐하고 지저분하다면, 합천군은 버스나루도 깨끗하고 담배꽁초를 못 봤습니다. 이른바 꼰대는 어느 곳에나 있게 마련이라, 갑갑하거나 답답한 늙은사람은 골골샅샅 있을 텐데, 왜 늙고 마는가 하고 돌아본다면, 아이를 안 바라보고 아이를 안 돌아보고 아이를 안 헤아리는 탓이지 싶습니다.


  새롭게 아이가 태어나서 실컷 뛰놀고 자라나기를 바라는 살림길을 바란다면, 거님길을 푸른숲길로 가다듬을 노릇입니다. 아이가 푸르게 자라서 어른스럽게 일어서기를 바란다면, 맨발과 맨손으로 돌흙나무를 어루만지면서 파란하늘을 맞아들일 터전이어야 할 테고요.


  아이는 들숲메에서 낳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들숲메에서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과 어버이는 들숲메를 푸르게 품고서 풀어내는 어진 눈빛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온나라 앞길에 푸른어른과 푸른아이가 푸른눈으로 푸른살림을 짓는 푸른마음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바라요. 이 길에 ‘아버지’란 자리에 설 사내들은 ‘어머니’란 자리에 서는 가시내가 남기는 글을 좀 읽고 새기면서 이야기를 할 노릇이라고도 느낍니다.


ㅍㄹㄴ


너는 이토록 나의 생을 뒤흔들고, 존재를 재배치하고, 사랑하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구나. 네 덕분에 이렇게 엄마는 자란다. (26쪽)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되짚어보다가 나는 어느새 어리고 불안했던 작고 약한 나에게 시선이 머무른다. (57쪽)


나의 허물벗기는 왜 이토록 타당하지 못할까. 나 자신으로 거듭나고자 결정한 것들이 이렇게 자잘하게 나를 괴롭힌다. 그만 좀 피고름을 보고, 그만 죄책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172쪽)


만들고, 식히고, 소분하고, 얼려서, 담아내는 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운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온종일 서서 일하고 돌아와 밤새 뚝딱거리고 부엌에 서 있을 엄마의 고된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213쪽)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는 것이다. 마산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대학 입학을 명목으로 기를 쓰고 서울로 도망을 왔다. 그래 나는 도망을 갔다. (222쪽)


우리 집에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산다. 아이는 지금 가족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잠같은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281쪽)


+


《탯줄은 끊은 지 오래인데》(김정, 호밀밭, 2025)


이 힘든 육아를 세세손손 아무 일도 아닌 듯이

→ 이 힘든 돌봄길을 여태 아무 일도 아닌 듯이

→ 이 힘든 사랑을 이제껏 아무 일도 아닌 듯이

→ 이 힘든 보듬길을 늘 아무 일도 아닌 듯이

7쪽


나를 지배하던 원가족에 대한 원망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 내가 미워하던 보금자리가 매우 낯설다

→ 내가 싫어하던 첫터전이 매우 낯설다

→ 내가 달갑잖던 자람터가 매우 낯설다

7쪽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통은 언제나 이야기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해결되었다

→ 그저 내 삶인 마음앓이는 언제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떠올리자 다 풀렸다

→ 오롯이 내 삶인 속앓이는 언제나 이야기해야 한다고 되뇌자 모두 풀렸다

8쪽


태어나자마자 1살로 쳐서 1령 누에라고도 한다

→ 태어나자마자 한살 누에라고 한다

→ 태어나자마자 애벌 누에라고 한다

29쪽


소란스러운 가운데 말투가 고운 것이

→ 시끌거려도 말씨가 고우니

→ 왁자하지만 말씨가 고우니

45쪽


잘 만들어진 옷에는 반드시 공간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 잘 지은 옷은 반드시 부피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 잘 지은 옷은 반드시 부피가 드러난다

46쪽


인생은 수련의 연속인가 보다. 운동도, 식이조절도

→ 삶은 가다듬길인가 보다. 달리기도, 군살덜기도

→ 삶은 갈고닦기인가 보다. 움직이기도, 몸가꿈도

61쪽


토요일부터 두 아이와 칩거 4일째

→ 흙날부터 두 아이와 집콕 나흘째

→ 흙날부터 두 아이와 숨은 나흘째

117쪽


우연히 만난 남자 동문과 자리에 서서 나눌 만한 화제는 못 된다 하더라도

→ 어쩌다 만난 또래 사내와 자리에 서서 나눌 만한 말은 못 된다 하더라도

152쪽


테이블이 일곱 개인 작은 민속주점이다

→ 자리가 일곱인 작은 막걸리집이다

→ 일곱 자리로 자그만 옛술집이다

162쪽


13개월간의 모유 수유 끝에 드디어

→ 열석 달 엄마젖을 먹은 끝에

→ 열석 달 젖을 물리고서 드디어

170쪽


피어싱을 한 지가 벌써 2년이 되어 가는데도

→ 뚫은 지가 벌써 두 해가 되어가는데도

→ 구멍낸 지가 벌써 이태가 되어가는데도

171쪽


수변공원까지 함께 걸었다

→ 물가쉼터까지 함께 걸었다

→ 냇가뜨락까지 함께 걸었다

→ 둔덕뜨락까지 함께 걸었다

188쪽


사이드 안주로는 아이들이 저녁에 먹다가 방치한 사과나

→ 곁거리로는 아이들이 저녁에 먹다가 남긴 능금이나

→ 곁밥으로는 아이들이 저녁에 먹다기 둔 능금이나

206쪽


두세 번 먹을 양으로 일회용 팩에다 소분해 주셨다

→ 두세 끼니 먹도록 한벌 꾸러미에 갈라 주셨다

→ 두세 벌 먹을 만큼 한벌 구럭에 나눠 주셨다

212쪽


산복도로 위 주택가 골목

→ 가맛길마을 골목

→ 고갯마을 골목

221쪽


여기서 중요한 철칙은

→ 여기서 반드시 지킬

→ 여기서 꼭 해야 할

244쪽


어린이집 일일 교사로 참여해서

→ 어린이집 하루길잡이로 가서

→ 어린이집 하루길님으로 들어서

267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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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 말넋 2025.5.24.

오늘말. 곧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곧게 금을 이으면 어느 곳이든 닿습니다. 하늘끝이건 바다끝이건 모두 만나요. 푸른별은 둥그렇게 나란한 삶인 터라, 가장자리나 가운데가 따로 없이 맞닿습니다. 곧은금이나 바른금이 아니더라도 구름을 올려다보고 냇물을 지켜보면 알 만하지요. 모든 구름은 모든 곳에 알맞게 비를 뿌리고, 모든 빗물은 어디에나 고루 북돋우니, 손잡고 나아가는 한뜰이요, 어깨동무로 일구는 한마루입니다. 누구나 다 다른 밥을 지어서 먹되, 파란별에서 돋는 숨결을 받아들입니다. 알고 보면 한솥밥입니다. 곰곰이 보면 한지붕이에요. 너랑 나랑 맞아떨어지기도 할 테고, 어쩐지 서로이웃이 아닌 서로남남처럼 안 맞출 수 있습니다만, 함께 안 가는 듯싶어도 언젠가 새롭게 맞물리게 마련입니다. 날숨이란 들숨이고, 들숨이란 새삼스레 날숨이니, 이 별에서 나란길을 걷는 나란빛이면서, 이 터전에서 나란풀이요 나란꽃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등돌리는 팔짱이 아닌, 마주보면서 오붓이 거니는 팔짱을 해요. 늘 한마음이나 한넋이기는 어려울는지 모르나, 사랑이라는 한길을 가꾸는 한꽃뜰을 나눌 수 있어요. 푸른별살이란 한집살이입니다.


ㅍㄹㄴ


나란긋기·나란하다·나란길·나란빛·나란북·나란꽃·나란풀·나란살이·나란살림·나란삶·나란금·나란줄·나란누리·나란마을·-도·동·-랑·-과·-와·-하고·같다·같이가다·똑같다·똑바로·함께·함께가다·고루·고루두루·골고루·고르다·고루눈·고루눈길·고루길·고루빛·고루보다·고른길·고른넋·고른얼·고른빛·곧다·곧바르다·곧은금·곧은줄·꽃대·꽃줄기·꽃어른·참어른·끝금·끝줄·물금·물끝·물매·바다금·바다끝·하늘금·하늘끝·도란도란·도란살림·두런두런·두런살림·오붓하다·걸맞다·보기좋다·입바르다·만나다·맞다·맞닿다·맞물다·맞아떨어지다·맞잡다·마주잡다·맞추다·반반하다·바르다·바른금·바른줄·반듯금·반듯줄·반듯하다·판판하다·서로이웃·서로하나·하나되다·한몸마음·한마음몸·손잡다·어깨동무·팔짱·팔짱꽃·한결같다·한뜻·한마음·한넋·한얼·한마당·한마루·한꽃뜰·한뜰·한몸·한바탕·한솥밥·한집·한지붕·한꽃집·한집살이 ← 수평(水平), 수평적, 수평선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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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6. 흰나물



  열여덟 살을 살아가는 큰아이하고 논두렁을 걷는 어느 늦봄날, 찔레꽃을 한 송이씩 훑으며 먹다가, 마삭줄꽃은 두 송이씩 훑으며 먹습니다. 큰아이가 ‘마삭줄’이라는 이름이 안 떠오르는 듯 “어, 무슨 꽃이었더라?” 하기에 “꽃을 보면 뭐가 떠오르지 않니?” 하고 묻고는 “네가 어릴적에는 바람개비를 닮았다고 여기면서 ‘바람개비꽃’이라고 했어. 다른 사람들도 꽤 ‘바람개비꽃’이라고 말을 해.” 하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고작 쉰 해쯤 앞서 1975년 언저리까지만 해도 으레 들숲메에서 풀꽃과 나무꽃을 따서 나물로 삼았습니다. 다들 긴긴 겨울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들숲메를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나물을 캐고 꽃을 먹고 장작을 날랐습니다. 요사이는 “꽃을 그냥 먹어도 되나요?” 하고 묻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괭이밥꽃이나 씀바귀꽃이나 잣나물꽃이나 꽃마리꽃이 모두 나물인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꽃이 핀 돌나물꽃도 즐겁게 누릴 만하지만, 쑥갓꽃도 고스란히 나물인데, 어쩐지 들살림과 숲살림과 멧살림을 몽땅 잊다가 잃는구나 싶습니다. 서울에서 일하며 살다가 합천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즐겁고 야무지게 살아가는 이웃님을 만나러 가는 시외버스에서 문득 ‘흰나물’이라는 이름이 떠오릅니다. 적잖은 나물꽃이 ‘흰빛’이더군요. 한겨울 흰눈은 나물은 아니되, 눈내리는 겨울이면 입을 크게 벌리고서 그대로 눈송이를 받아먹으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네철 내내 다 다른 흰빛을 밥으로 나물로 꽃으로 빛으로 숨결로 넉넉히 누리면서 어른으로 자랐구나 싶어요.



흰나물


둘쨋달에 매나무꽃 먹고

이윽고 흰민들레 먹는데

냉이꽃 피기 앞서 캐고

새봄에 잣나물꽃 누려


넷쨋달에 딸기꽃 가득해

어느새 앵두꽃 소복하고

닷쨋달에 찔레꽃 훑다가

마삭줄꽃 달콤히 딴다


엿쨋달에 감쫓 주울까

봄끝에 이팝꽃 넘실댔고

한여름에 파꽃 동그랗고

슬금슬금 부추꽃 오른다


고추꽃은 고추 못잖게 매워

나락꽃은 밥알 닮은 냄새야

흰눈은 겨울에 덮는 꽃송이

하얗게 별이 돋으며 잠든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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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5. 비



  밤에 드러누워서 꿈을 맞이해도 갖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고흥에서 순천을 거쳐 수원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살짝 눈을 감아 보는데 새록새록 온갖 그림이 떠올라요. 지난날 제가 ‘종(노예)’으로 살며 어느 공주님 눈썹을 그려 주는 일을 하는 그림, 고기잡이가 되어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낚아 맨손으로 척척 손질해서 날로 먹는 그림, 아주 능구렁이 훔침질을 하는 거짓말쟁이로 살다가 붙들려 오른팔이 뎅겅 잘렸는데 이렇게 오른팔이 잘리고 왼팔마저 뎅겅 잘려도 훔침질을 더 신나게 하면서 노닥거리는 그림, 이밖에 여태 살아온 갖가지 옛모습이 뭉게뭉게 나타납니다. 아주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어요. 때바늘이 10눈금이나 5눈금 흐를 만큼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이동안 본 옛삶을 말로 옮기자니 몇 날로도 모자랄 뿐 아니라, 몇 해로도 모자라겠더군요. 아주 긴 나날을 한때에 불쑥 보았어요. 이러고서 하루가 지난 오늘, 서울 광화문 앞길을 걷다가 갑자기 자리에 앉고프다는 생각이 들어 두리번두리번하는데 국립극장이 보여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이곳 지킴이한테 “살짝 앉았다 가도 될까요?” 하고 여쭙니다. 이동안 노래꽃 한 자락이 술술 흘러나옵니다. 이 노래꽃 ‘비’는 제가 예전 어느 때에 빗방울로 살면서 스스로 겪은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오롯이 나였으나 이제는 오롯이 사람이라는 옷을 입은 내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떻게 맞이하면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바로 ‘나였으나 내가 아닌 내’가 ‘나이면서 내가 아닌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아직 궁금하지 않아서

조용히 나무 품에

잎사귀 품에 꽃송이 품에

줄기 품에 뿌리 품에


문득 이 바깥이 궁금해

햇볕을 타고서 조용조용

아지랑이 되어 나오더니

바람 타고 하늘로 올라


나처럼 궁금쟁이인 동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어

참 많구나 가득하구나

우리는 궁금덩이 구름 되네


이윽고 뭉실뭉실 춤추다가

저마다 수수께끼 풀려고

여기로 저기로 새록새록

날아가며 마실하는 빗방울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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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44. 이슬



  알지 못하니까 알지 못할 테고, 알 테니까 압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말 그대로인 줄 느끼기는 해도 ‘이렇게 느낀 내 마음대로 알아도 되나?’ 하고 망설였어요. 어릴적부터 둘레 어른이나 또래는 하나같이 ‘네가 느낀 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라든지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친 것이 아니면 다 틀려!’ 같은 말을 했을 뿐 아니라, 좀 배웠다는 이들은 ‘교과서는 거짓말투성이야, 이 책을 봐, 이 책에 내온 줄거리가 맞아!’ 같은 말을 보탰어요. 그러나 저는 학교뿐 아니라 이름높다는 분들이 쓴 책조차 교과서처럼 거짓말투성이, 아니 ‘그들한테는 참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하나도 안 맞구나 싶은 이야기’로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릴적부터 맨눈으로 바람결과 깨비(귀신)을 볼 수 있었고, 맨귀로 풀이나 이슬이나 빗물이 들려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적은 교과서도 인문책도, 게다가 종교책조차 못 만났습니다. 이러다가 드문드문 멋진 길잡이를 만났지요. 저는 바람결을 맨눈으로 보지만, 어느 길잡이는 제가 미처 못 본 ‘물결’을 맨눈으로 보시고, ‘헤엄이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결’도 마음이나 살갗으로 느끼셔요. 이때에 온몸이 찌릿찌릿하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내 눈은 미치지 않았구나’ 하고 깨닫고, ‘나는 내 눈을 사랑할 노릇이로구나’ 하고 여기기로 합니다. 저는 이슬방울 겉모습을 노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분은 그런 겉모습을 노래하겠지요. 저는 이슬하고 나눈 말, 이슬이 들려준 노래를 노래하려 합니다.



이슬


해가 기울면 어느새

바람 한 줄기가 죽

돌고 감돌고 맴돌며

이슬을 뿌려


해가 뜰 즈음

풀밭이며 숲은 온통

새벽이슬로 반짝이는

그림판이 돼


풀도 꽃도 나무도

개미도 사마귀도 벌도

아침이슬 마시면서

새기운 내네


맨발로 풀이슬 느끼며

우리 밭에 선다

맨손으로 꽃이슬 맡으며

오늘을 연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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