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장 사적인 평범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부희령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7.4.
인문책시렁 436
《가장 사적인 평범》
부희령
교유서가
2024.9.4.
우리집에는 ‘에어컨’이 없습니다. ‘선풍기’도 안 씁니다. 이미 저는 1995년에 어버이집을 떠날 무렵부터 ‘맨손’과 ‘온몸’으로 살아가려는 뜻이었고, 빨래도 집안일도 으레 손발로 일굽니다. 이불도 손으로 빨래하고, 저잣마실은 등짐으로 나릅니다. 나라에서는 가난집(빈민)한테 에어컨을 들이는 일을 꽤 예전부터 했고, ‘에어컨을 돌리는 가난집이 치를 삯(전기세)’까지 내주는 줄 알지만, 이런 이바지를 모두 안 받기로 했습니다. 인천에서는 동사무소 일꾼이, 전남 고흥에서는 면사무소와 군청 일꾼이 놀라더군요. “아니, 왜 공짜인데 안 받으려고 해요?”
낱말책(국어사전)을 쓰느라 온갖 책을 끝없이 읽지만, 언제나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합니다. 펴냄터에서 보내주는 책을 으레 손사래칩니다. 그냥 보내주는 책이라 하더라도 ‘읽어 보고’서 ‘아닌 책은 아닙니다’ 하고 느낌글을 씁니다. 이 삶터에 이바지할 책이 아닌, 돈장사를 바라보면서 내놓는 책은 티가 나지 않나요? 티가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돈을 바라는 글과 그림과 빛꽃(사진)은 다 티가 납니다. 돈바라기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돈만 바라니 안쓰러울 뿐입니다. 먼저 글과 그림과 빛꽃을 가다듬고 갈고닦으면서 스스로 빛날 노릇이지 않을까요?
까칠글을 쓰더라도 책을 꾸준히 보내는 펴냄터는 딱 한 곳이고, 글님도 딱 한 분 있습니다. 까칠글을 받아들이는 펴냄터하고 글님을 보면, 언제나 조금씩 스스로 거듭나는 대목을 엿봅니다. 이는 거꾸로 보아도 매한가지예요. 우리는 서로 배우려고 까칠하게 잔소리를 할 노릇입니다. 그냥그냥 좋게좋게 넘어가 주면, 서로 굴러떨어집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기가 혼자서 서려고 할 적에 손을 안 잡습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걸음마를 떼려고 할 적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기다립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다릿심을 키우는 동안 일부러 안 업고 안 안습니다. 어미새는 새끼새가 둥지나기를 할 때부터 먹이를 더는 안 줍니다. ‘까칠읽기’에 ‘까칠쓰기’란, 누구나 스스로 까풀(꺼풀)을 벗고서 ‘껍데기’ 아닌 속빛으로 깨어나라고 북돋우는 길입니다.
《가장 사적인 평범》을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꽤나 까칠하게 적는 글발이 반갑습니다. 다만 ‘너무 여린 까칠글인걸?’ 싶더군요. 이른바 ‘부드럼 까칠글’입니다. 조금 더 ‘매콤맛 까칠글’로 펼쳐냈다면 한결 빛났을 만하다고 느껴요. 우리나라 민낯을 신나게 벗겨낼 적에 이 나라가 아름답게 거듭날 길을 다같이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반드르르한 겉치레를 몽땅 벗겨내지 않고서야 새길을 못 갑니다.
먼나라 옛말에 “새 포도술은 새 자루에”가 있어요. 새 자루 아닌 헌 자루에 새술을 담그면 어찌될까요? 퀴퀴하고 케케묵은 냄새와 맛이 고스란히 밸 뿐 아니라, 새로 빚은 술이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름지기 글빗(비평·평론)은 가장 까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글꾼은 글빗을 읽고서 울어야 합니다. 글꾼을 울리지 않으면 글꾼은 못 거듭납니다. 우리나라는 글빗과 글꾼이 짝짜꿍 장난질이 지나칩니다. 되도 않는 글을 끝없이 치켜세우면서 잔뜩 팔아치우니, 어느새 우리 스스로 눈이 멀고 말아요. “눈뜬 장님”인 글빗과 글꾼이 판치는 나라입니다.
부디 “그저 나다운 나(가장 사적인 평범)”를 더 까칠하게 여미어서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 그대로 “그저 나다운 나”이면 됩니다. 껍데기를 벗고서 “나다운 나”를 품을 줄 알아야 “너다운 너”을 알아보게 마련이에요. 우리는 서로 “눈감은 눈”으로 마주할 노릇입니다. 겉모습에 사로잡히는 겉눈이 아닌, 속빛을 마주하는 ‘감은눈’으로 보는 눈길을 키울 일입니다.
ㅍㄹㄴ
(백화점) 점원은 나를 흘낏 보더니 빠르게 말했다. “그거 비싼 거예요.”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40쪽)
그해 겨울, 종로의 서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사람은 너였을까? (47쪽)
(슬로베니아 분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사회주의를 몰라서 그래. 속속들이 알아봐라. 똑같이 지어진 아파트 안 통로를 걸어가면, 어느 집에서나 할 것 없이 양배추 삶는 냄새가 나지. 양배추가 어떤 채소인지 아니? 냉장고에 넣어두면 한 달 동안 썩지 않는 거란다. 사회주의란 그런 거야. (96쪽)
이모는 일 년에 한두 번쯤 우리집에 불쑥 찾아왔다. 명절도 아니고 어머니 생일도 아니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대문을 열면, 흐릿한 빛깔의 한복 차림에, 보따리를 가슴에 안은 이모가 서 있었다. (139쪽)
사람들은 정말 자유를 원하는 걸까. (174쪽)
인간을 바라볼 때 드론의 시점을 취하기 쉬운 위치가 있다. 한 집단의 리더, 군대의 지휘관, 대통령, 기업의 경영자, 고위 관료처럼 높은 지위와 권력이 밀어올려놓은 자리들이다. (187쪽)
+
《가장 사적인 평범》(부희령, 교유서가, 2024)
요즘에는 부캐라고 부르며 여러 자아를 운용하는 사람을 능력자로 여긴다
→ 요즘에는 곁빛이라 하며 여러 나를 돌보는 사람을 대단하다고 여긴다
→ 요즘에는 다른꽃이라며 여러 나를 부리는 사람을 빼어나다고 여긴다
10쪽
경로석에 앉아 마음껏 연애소설 읽는 할머니로
→ 어른자리에 앉아 마음껏 사랑글 읽는 할머니로
→ 늙님칸에 앉아 마음껏 사랑얘기 읽는 할머니로
11쪽
비행기를 탈 때마다 심한 불안을 느낀다. 그래도 아직은 호흡곤란이 오거나 기절한 적은 없다
→ 날개를 탈 때마다 몹시 두렵다. 그래도 아직은 헐떡이거나 넋나간 적은 없다
→ 하늘을 날 때마다 무척 떤다. 그래도 아직은 숨가쁘거나 뻗은 적은 없다
17쪽
식당에 가면 서빙하는 이들이 무척 바쁠 때가 있다
→ 밥집에 가면 나르는 이들이 무척 바쁠 때가 있다
→ 밥집에 가면 일하는 이들이 무척 바쁠 때가 있다
52쪽
류블랴나에서 십오 년을 살았다는 교민의 말이 떠올랐다
→ 류블랴나에서 열닷 해를 살았다는 이웃 말이 떠오른다
→ 류블랴나에서 열다섯 해를 산 한겨레 말이 떠오른다
98쪽
누군가가 빈정거린 것처럼 운하에서 물비린내나 하수도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 누가 빈정거리듯 물골에서 물비린내나 밑길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따
→ 누가 빈정거리듯 뱃길에서 물비린내나 구정길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따
106쪽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전신마취를 하고
→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온재움을 하고
→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온몸잠을 하고
120쪽
필요 없는 책, 옷, 가구 등속을 모두 버렸다
→ 쓸데없는 책, 옷, 세간 들을 모두 버렸다
→ 안 쓰는 책, 옷, 살림을 모두 버렸다
178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