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마실을 할 때마다 새로운 꽃을 만난다. 그러나 무슨 꽃인지 제대로 알아채는 일은 드물다. 아마 네이버지식인에 사진을 올리면 10분도 안 되어 누군가 잘 알려줄 테지. 그러나 네이버지식인에는 잘 안 올린다. 이름을 모르더라도 언제나 즐겁게 인사하며 고맙게 꽃잎을 쓰다듬으니까.

 - 2010.8.31.인천 중구 중앙동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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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11-06 05:12   좋아요 0 | URL
꽃범의 꼬리로 보이네요. ^^ 네, 꽃 이름이 '꽃범의 꼬리'에요.

파란놀 2010-11-06 08:33   좋아요 0 | URL
오오.. 범의꼬리라...
얼핏 들어 본 듯한 이름이네요.
이렇게 꽃이름을 잘 아는 분들은 참 대단하고 놀랍습니다~~~~ :)
고마워요~
 


 책으로 보는 눈 142 : 좋아하는 책을 말하기

 자전거에 수레를 다시 달았습니다. 아이를 둘 태울 수 있는 수레를 2005년에 진작 장만했으나 이때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서울로 책방마실을 할 때에 이 수레에 책을 잔뜩 싣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수레에는 모두 48킬로그램을 실을 수 있다 했기에, 이 수레에는 책을 200∼300권쯤 실었습니다. 가방에 가득 책을 담고 자전거 짐받이에까지 책을 꽤 무겁게 묶어, 서울부터 충주 시골집으로 돌아오자면 아홉 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아이를 태우는 수레에 아이는 안 태우고 책만 태운 채 너덧 해 남짓 살았습니다. 이러던 가운데 지난 시월에 드디어 아이를 태웁니다. 아이가 막 스물일곱 달로 접어들었기에, 이제는 태워도 괜찮겠거니 생각했고, 한 번 두 번 태우고 보니 아이는 수레 타기를 몹시 즐깁니다.

 우리 집 세 식구가 읍내에 마실할 때면 시골버스를 탑니다.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있는 우리 살림집에서는 충주 시내까지 버스로 가면 한 시간쯤 걸리지 싶은데(아직 가 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멉니다. 우리 살림집에서 음성군 음성읍으로 가면 버스로 10분이며, 자전거로 달리면 20분 남짓 안 걸립니다. 다만, 시골버스는 하루에 고작 여섯 대 있습니다.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헛걸음이에요. 시간을 놓치면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택시삯은 1만 원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수레에 아이를 태우고 마을을 빙 돌았습니다. 이웃마을 생극면 도신리에서 살아가는 친할머니 댁에 한 번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다니면서 ‘책을 태우고 달릴’ 때하고 ‘아이를 태우고 달릴’ 때 어떠한가를 살폈고, 지난 2005년과 견주어 다섯 살 더 먹은 아저씨가 잘 달릴 수 있나 가늠했습니다. 더욱이 겨울로 접어드는 날씨니까 아이랑 먼길을 나서면 어떠할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이제 오늘부터 아이랑 자전거를 함께 타고 읍내 장마당에 가 볼 생각입니다. 갔다가 돌아올 시간을 어림하자면 한낮에 가야 해 떨어져 춥기 앞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이하고 자전거로 조금 멀다 싶은 읍내에 다녀올 수 있으면, 이렇게 여러 달 다니면서 아이랑 아빠랑 몸이 익숙해질 때쯤 이웃 군(괴산군이나 옥천군)이나 이웃 도(경상북도 문경시라든지 강원도 춘천시라든지 충청남도 홍성군이라든지)까지 하루나 이틀에 걸쳐 천천히 자전거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집에서 혼자 살며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책방마실을 다니던 발자취를 갈무리해서 지난 2009년에 《자전거와 함께 살기》라는 책을 쓴 적 있는데, 아이하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 발자취를 곰곰이 되씹으며 무언가 내 삶을 새롭게 적바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고 즐기는 책이란,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온몸으로 부대낀 삶을 수수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니까요.

 지난주에 헌책방에서 《니코니코 일기》(오자와 마리 글·그림)라는 여섯 권짜리 만화책을 장만했습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나온 책인데 벌써 판이 끊어졌더군요. 눈물과 웃음으로 이 만화를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수수한 삶을 좋아하니 수수하게 살며, 이렇게 수수한 이야기 담은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살 때에 가장 즐겁다고. (4343.1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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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빛 보는 마음


 도시에서는 별빛을 볼 수 없다. 도시라는 곳은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별빛을 볼 수 없도록 가로막았는지 모른다. 도시에서는 오로지 한 가지만 보도록 꽁꽁 틀어막았는지 모른다.

 도시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도시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니까 사람을 보라는 도시일까? 글쎄, 도시에 가 보면 사람은 몹시 많다. 큰 도시로 갈수록 사람이 훨씬 많으며, 이 나라에서는 서울에 사람이 가장 많고 부산이 둘째로 많다. 그렇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시에는 자동차가 참 많다. 자동차들도 작은 차는 드물고 커다란 차가 많다. 어쩌면, 도시라는 곳은 자동차를 보라는 곳일까. 그러나 다들 ‘내 차’를 자랑하거나 뽐낼 뿐, 다른 사람 차는 바라보지 않는다. 다른 차들은 처음부터 없는 양 마구 휘젓거나 내달리기 일쑤이다.

 도시에는 높은 건물이 매우 많다. 어디를 가든 건물이다. 놀고 있는 땅이 없다. 놀고 있는 땅이 있는 데는 도시라 하더라도 어딘지 시골스럽다 할 만하다. 그러나저러나, 높은 건물 가득한 도시에서는 새로운 높은 건물이 끊임없이 들어선다. 오늘까지 무척 높거나 으리으리하던 건물도 이듬날 새로 들어서는 높은 건물에 대면 보잘것없다.

 도시에는 예쁘거나 멋나다는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이 많다. 값비싼 옷에 신에 노리개에 목걸이에 …… 손전화까지. 그러나 이런 옷차림이나 매무새 또한 서로서로 보아주는 옷차림이나 매무새라 하기 어렵다. 서로서로 내 모습을 뽐낼 뿐이다.

 도시에는 극장도 많고 책방도 많으며 도서관도 많다. 가게도 많고 술집도 많으며 밥집 또한 많다. 도시에는 우체국이 번쩍번쩍하고 동사무소 건물만 해도 몹시 크다. 새로 짓는 아파트는 어마어마한 마을을 이룬다. 하기는, 아파트라는 집은 ‘마을’이 될 수 없으나, 모든 아파트는 ‘무슨 마을’이라는 이름이 달라붙는다.

 볼일을 보러 도시로 나갈 때면 으레 숨이 막힌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때에는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시내라든지 중심거리로 가까워질수록 숨이 갑갑했다. 볼일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올 때면 차츰 마음이 풀리고 숨이 고르다. 문화라든지 여가라든지 시골에서 무엇을 즐기느냐고들 하지만, 시골에서는 하루하루가 늘 문화이고 여가이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아가며 주말을 맞이해 바다라든지 산이라든지 숲이라든지 공원이라든지 찾아가는데, 시골사람한테는 시골 보금자리가 바다이거나 산이거나 숲이거나 들판이다. 굳이 주말을 맞이해 ‘자연을 찾아 몸과 마음을 쉴’ 까닭이 없다. 시골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일할 때에는 도시사람이 일할 때처럼 땀을 흠씬 쏟았어도 일이면서 놀이가 된다. 일이면서 쉼인 셈이다. 장날에 맞추어 가끔 읍내에 나가 바깥구경을 한다 할 만한데, 읍내에 나가 장마당을 휘 돌아보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모처럼 ‘택시 같은 시골버스’ 타는 맛을 즐긴다고 할까.

 저녁부터 이듬날 새벽까지 밤하늘 별을 본다. 오늘은 밤안개가 짙게 깔려 별을 올려다보지 못한다. 그러나 밤안개를 느낄 수 있어 좋다. 별이 보이면 별을 보고, 별을 가리는 구름이 가득하면 구름을 본다. 밤안개가 짙으면 밤안개를 본다. 다만, 미리내만큼은 찾아보지 못한다. 제아무리 한국땅 시골이 정갈하거나 말끔하다 하더라도 온나라가 공장과 아파트와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와 재개발과 관광단지 들로 시끌벅적한데, 미리내를 예쁘게 즐길 만한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낮나절 무지개를 즐길 수 있을 때에 밤나절 미리내를 즐긴다. 자동차가 아닌 두 다리나 자전거를 사랑하면서 내 삶터와 내 보금자리를 고이 건사할 수 있을 때에 무지개와 미리내를 맞아들인다. 차소리 아닌 새소리를 들으며 맹꽁이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받아들일 때에 무지개와 미리내를 받아들인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선다면 미리내와 무지개는커녕 개구리와 잠자리까지 씨가 말라 버린다. 국민소득은 5천 달러로도 넉넉하며 1천 달러라 할지라도 모자라지 않다. 국민소득이 100만 달러가 된달지라도 미리내와 무지개는 사들이지 못한다.

 아는가? 100억 원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100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는가? 10억 원을 벌어들인 사람이 10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었는가? 1억 원을 벌고자 애쓰는 동안 1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을 겨를을 낼 수 있는가? 고작 1천만 원 번다며 아둥바둥하는 동안 기껏 1천 권에 이르는 책조차 손에 쥐지 못한다. (4343.1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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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 생활 팬터지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2
윌리엄 스타이그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꿈을 가슴에 품고 있나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67] 윌리엄 스타이그, 《도미니크》



- 책이름 : 도미니크
- 글·그림 : 윌리엄 스타이그
- 옮긴이 : 서애경
- 펴낸곳 : 아이세움 (2003.1.30.)
- 책값 : 7500원


 (1) 이웃을 사랑하는 삶


 온누리에는 책이 참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이 제법 있으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책이 참 많습니다. 짓궂은 책만큼 훌륭한 책이 많고, 못난 책만큼 거룩한 책이 많으며, 볼썽사나운 책만큼 아름다운 책이 많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면서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 잘 팔리지만 짓궂은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거룩한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졌으나 못난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는 책이면서 아름다운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기는 하나 볼썽사나운 책이 있어요.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하고 닮습니다. 나로서는 참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붙잡으며 씩씩하게 걸어간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정작 내가 걷는 이 길이란 더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울 수 있습니다. 나 홀로 못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을 즐겨읽으면서 이 책이 얼마나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지를 못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책을 찾아 읽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는 만큼 책을 찾아 읽어요.


..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나가면 자기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었다 … “나도 내 운수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맞혀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 도미니크에게 도전은 기쁨이었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은 무엇이든 한 생명의 재주와 능력에 대한 이런저런 시험이었다 ..  (11, 13, 26∼27쪽)


 내가 아는 대로 책을 읽지 못하는 얼거리 그대로,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해 준다지만, 내 이웃은 내가 보내는 사랑이 싫거나 못마땅하거나 껄끄럽거나 괴롭거나 힘들 수 있습니다. 나로서는 사랑을 보낸다며 보내지만, 내 사랑을 받는 쪽에서는 못 견뎌 할 수 있어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나 속으로는 앓거나 아파할 수 있답니다.

 참말로 사랑이라 한다면 ‘보내는 사랑’이기 앞서 ‘받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보내는 내가 ‘나로선 할 만큼 하는’데 ‘저이는 왜 이렇게 못 받아들이느냐’고 투덜댄다면, 이는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저이가 사랑을 보냈나?’ 하고 느끼지 못할 만큼 찬찬히 스며들 때라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주었다’고 하면서 우쭐거리는데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씀이란 권위이거나 권력이라는 이름이 붙는 못난 짓입니다. 흔히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불우이웃돕기’ 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웃을 돕겠다면 그냥 ‘이웃돕기’를 해야지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일은 말이 안 됩니다. ‘불우’란 무엇이며, 누가 ‘불우’한 삶인가요(더 살핀다면 이웃‘돕기’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돕는다니 뭘 도와? 돈푼 좀 보탠다고 돕는 셈인가?). 나한테 돈이 조금 더 있다고 나보다 돈이 더 적은 이를 섣불리 ‘불우’하다고 깔볼 수 없습니다. 내가 돈 좀 보태 줄 수 있다면서 나한테서 돈을 얻는 이를 얕볼 수 없어요.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을 받아 주는 쪽’이 훨씬 거룩하며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받아 주는 가슴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사랑을 베푼다는 쪽’은 으레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거나 못 깨닫곤 합니다.


.. 두 시간 전만 해도 바솔러뮤 배저 노인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 많은 이들이 지금 도미니크가 하듯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질문을 하겠지. 새로운 목숨들의 세상이 오면 도미니크의 세상은 끝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시간을 과거로 생각하겠지. 그때가 되면 미래는 현재가 될 테고 … 슬픔이 밀려들자 그 아름다움도 빛을 잃었다. 슬픔이 물러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얼굴을 드러내겠지 ..  (50, 51, 52쪽)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서양 종교를 믿는 한국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서양 종교를 밝히는 성경책에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아끼라 이야기하는 한편, 이런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자주 부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내 이웃한테 사랑을 베푼다 할 때에 내 이웃이 ‘불우’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 배가 고프면 금세 알지요? 하루에 한 끼니만 걸러도 배가 고프며 기운이 딸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이웃이 하루 내내 배를 곯는다든지 살림돈이 모자라 몇 달째 허덕인다든지 대물림을 하듯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나요? 나중에 내 이웃이 파산신고까지 하고 나서야, 달삯방조차 얻지 못해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을 때라야, 라면 몇 상자와 쌀 몇 봉지와 연탄 몇 장 가져다주면 사랑이 되겠습니까.

 지난날, 굳이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이웃으로 지내던 이들은 ‘쌀이 없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가마솥에 불을 끓이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참말 밥을 하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알아챘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하면 밥냄새가 나잖아요. 숟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테고요.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드글드글대지 않던 지난날에는, 흙으로 벽을 바른 자그마한 이웃집에서 내는 조그마한 소리조차 다 들리곤 했습니다. 구태여 숟가락 숫자가 몇인지 세지 않아도 뻔히 아는 살림입니다.

 요즈음은 이웃을 돕고자 돈을 내어놓기보다, 내 살림을 지키고자 감시카메라 마련하여 달아 놓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고자 돈을 덜기보다, 내 자동차를 더 크고 빠른 녀석으로 바꾸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른한테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이와 같이 살아간다면, 푸름이와 어린이도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어른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질 때에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앞날을 하나하나 톺아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에 옆 짝꿍 시험지를 훔쳐보거나 어딘가에 쪽글을 적바림해 놓고 몰래 베낀다 한다면, 어른들이 이런 짓을 하니까 푸름이와 어린이가 따라하지, 푸름이와 어린이 스스로 새로 만들어서 못된 짓을 일삼지 않아요. 푸르거나 어린 넋이 새로 만드는 못난 짓이란 없습니다. 구지레한 짓을 일삼는 어른이 푸르거나 어린 넋을 못난 사람으로 물들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싶으면 내 이웃도 착하게 살도록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스레 살고 싶다면 내 이웃 또한 사랑스레 살도록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즐겁게 살고 싶을 때에는 내 이웃이 언제나 즐겁게 살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 착한 이들하고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 누군가가 악당과 싸우고 있는 한, 착한 이들과 함께 있다고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  (182쪽)


 (2) 살붙이 사랑하는 삶


 어제 낮,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가 똥을 누고 나서 밑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며 몸을 씻어 줄 때에 좀 미지근한 물로 씻겼습니다. 미리 보일러를 돌려 물을 덥혔어야 했는데 보일러를 늦게 돌리는 바람에 따뜻한 물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몸을 말끔히 씻은 다음 덜덜 떱니다. 여느 때에는 양말을 벗는다느니 바지를 한 벌만 입겠다느니 웃옷을 얇게 입겠다느니 그러더니, 어제는 어머니 품에 꼭 안기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을 안 합니다. 저녁이 되니 몸이 후끈거립니다. 여느 때에는 말괄량이인 아이가 아주 얌전합니다. 고단한 아버지가 자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눕히고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이불을 폭 쓴 채 그림책을 너덧 권 함께 봅니다. 그런데 아이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또르르 구릅니다. 이런, 아이가 참으로 몹시 아프구나.


.. 도미니크는 생각했다. 만약 만물을 창조하는 일이 자기에게 주어졌다 해도, 만물을 하나도 똑같지 않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나뭇잎마다 꼭 알맞은 자리에 있었다. 자갈, 돌멩이, 꽃, 이 모든 것들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물은 흘러야 할 곳으로 흘렀다. 하늘은 꼭 알맞게 푸르렀다. 모든 소리는 조화로웠다. 모든 것들이 알맞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33쪽)


 아이를 일찍 재우려 하지만, 아이는 일찍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일찍 안 자려 하는 모습은 아플 때에도 마찬가지로군요. 하는 수 없이(?) 아이 아버지는 일찌감치 쓰러집니다. 이내 아이도 잠자리에 듭니다. 아주 고맙게. 아이는 자는 내내 아버지 곁에서 “쫀!” 하면서 아버지보고 손을 달라 하며 붙잡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잠들고 나서 잘 깨어나지 못하거든요. 아니, 깨어나지 못한다기보다 몸이 무거워 머리는 깨었어도 몸을 못 움직입니다. 이리하여, 지난주부터 어젯밤까지 밤새 아이하고 아이 아버지는 잠을 못 잡니다. 잠들라 치면 아이가 “아부지, 쫀!” 하면서 손을 달라 합니다. 조금 잠이 들어 쉴라치면 어느새 기저귀에 오줌을 누고는 “젖었어!” 하고 외칩니다. 새벽 네 시 사십오 분까지 어영부영 버티다가는 조용히 큰방으로 건너와 셈틀을 켜고 글쓰기를 하자니, 또 다섯 시 반까지 이렇게 복닥복닥합니다. 그나마 후끈 달아오르던 아이 몸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늘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는 내가 우리 아이만 한 나이였을 적에 나를 어떻게 돌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내 몸은 그리 튼튼하지 않아요. 어릴 적에 늘 갤갤거렸습니다. 우리 아이는 꽤 씩씩하고 튼튼해서 어버이한테 걱정을 끼치는 일이 드뭅니다.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몸앓이를 해요. 그렇지만 아이 아버지인 저는 어릴 적에 자주 몸앓이를 했는데, 이때마다 내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어떤 마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저처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단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받아들여 주었을까요.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모두 어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지만 아이하고 보내는 겨를이 몹시 짧거나 거의 없는 어버이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 서른 마흔 쉰이 된다고 어른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하나 둘 셋 넷 낳아 기른다고 어른이지 않아요. 삶과 넋과 말이 오롯이 어른이어야 해요. 삶과 넋과 말을 오롯이 아이하고 부대끼면서 살아내야 어른으로 자리잡아요.


.. 도미니크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미니크는 어떤 종류의 악한 짓도 증오했다 ..  (57쪽)


 집일을 남자가 하는 집은 썩 많지 않습니다. 예전보다는 늘었다 하겠으나 집일은 으레 여자가 합니다. 또는 밥어미를 두겠지요. 아니면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하면서 집일을 할머니한테 맡기든지요.

 아무리 몸이 힘들다 할지라도 그날그날 저녁을 먹은 다음 설거지를 하면서 이듬날 아침에 새로 밥을 할 쌀이나 곡식(콩이나 옥수수나 다른 곡식)을 씻어서 불려야 합니다. 누런쌀이라면 저녁에 불려놓고 이듬날 아침에 하고, 흰쌀이라면 새벽에 씻어서 불린 뒤 아침에 밥을 지으면 됩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며 품을 많이 들입니다. 그나마 저는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터라, 밑반찬은 거의 안 하고 찌개 하나를 끓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품과 땀과 틈을 들여야 하는지요. 밑반찬을 꼬박꼬박 새로 만들거나 도시락을 싸는 이 나라 수많은 어머님들은 집살림에 아주 온삶을 바치는 셈입니다. 이 나라 남자들은 이 나라 여자들 땀과 품과 틈으로 먹고산달 수 있어요. 이른바 ‘가사노동’은 돈이 나오지 않는다 하고, 돈으로 따지지 않으며, 아예 노동으로 안 치기까지 합니다. 죽은 전태일 열사는 생각하지만 산 이소선 어머님은 생각하지 못해요.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이 오래오래 살아가니까 이소선 ‘어머님’을 기리거나 모시는 이들이 있지, 당신이 일찍 숨을 거두었으면 ‘(남자) 노동자’만 돌아볼 뿐, ‘(여자) 살림꾼’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을 떠올릴 때에도 으레 ‘전태일 어머니’라고만 여기지, ‘집살림을 하는 여자’로는 살피지 못합니다.


.. 혈맹파 패거리가 세상을 파괴하는 온갖 짓을 일삼는 동안, 말 못 하는 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둘러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슬픔과 모욕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무들이 사랑하는 개 도미니크는 나무들 가운데서, 숲의 심장 한가운데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무들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뜻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꺾고 분질렀다. 도미니크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악당들은 무기를 높이 쳐든 자세를 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무들이 악당들을 향해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  (187쪽)


 날마다 밥을 새로 하고 설거지를 잔뜩 하며 이불을 털고 방바닥을 쓸고닦는데다가 빨래를 해서 털고 널고 걷고 개면서 생각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놀면서 생각합니다. 새벽에 졸립고 지친 몸을 일으켜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빛나는 옛 어르신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힌다 말씀하셨는데, 저로서는 하루라도 밥을 하지 않거나 걸레질을 하지 않거나 손빨래를 하지 않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손빨래가 퍽 고단하다고 느끼지만 빨래를 기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직 힘이 있어 할 만한지 모르지만, 서두르지 않으며 차근차근 나누어 하면 손빨래를 얼마든지 할 만합니다. 밥하기이든 쓸고닦기이든 이불털기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아이하고 놀 때에도 신나게 놀다가 드러누워서 “얘야, 좀 쉬면서 놀자.”고 말할 수 있으며, 아이 스스로 다른 놀이를 하도록 놀잇감이나 책을 내어 주고서는 한동안 등허리 펴자며 드러누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이것저것 잔뜩 늘어놓거나 어지른다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아이가 스스로 치울 수 있게끔 잘 타이르며 가르치면 됩니다. 어쩌면, 아이가 이것저것 늘어놓기 때문에 차곡차곡 갈무리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을 뿐더러, 이름값이나 권력으로 지키거나 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3) 나를 사랑하는 삶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이끄는 주인공은 멍멍이인 ‘도미니크’입니다. 도미니크는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하며 이야기 첫머리를 엽니다. 도미니크는 길디긴 모험을 해 보고자 합니다. 낯선 땅으로 찾아가 낯선 사람을 만나며 낯선 삶을 부대끼는 가운데 낯선 일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멍멍이 도미니크는 한창 젊은 나이이거든요. 이대로 고향마을에서 눌러 지내도 좋을는지, 다른 무슨 일을 찾아야 좋을는지, 이제껏 모르던 꿈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먼 나들이를 떠납니다.


.. “내 나이는 올해로 백 살이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부 다 하려면 백 년이 걸릴 걸세.” ..  (40쪽)


 도미니크가 만난 돼지 할아버지는 백 살이랍니다. 백 살치 이야기는 백 해에 걸쳐 해도 다 못할 수 있어요. 그러면 도미니크는? 글쎄요. 아마 며칠쯤 하다 보면 금세 동이 날는지 모릅니다. 도미니크가 살아온 햇수가 스무 해라 할지라도 스무 해치 이야기를 ‘어떻게 어느 만큼 어찌어찌’ 풀어내면 즐거울는지를 도미니크 스스로 아직 모르거든요.


.. “세상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서 살아 있는 것들에 경의를 표하지요.” … “나는 아주 위대한 예술가인 코끼리의 작품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코끼리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요. 그럴 능력도 인내심도 없지요.” … “온 세상이 눈에 뒤덮여 있을 때면 나뭇잎을 볼 수 있소? 쓸쓸한 한겨울에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면, 내 그림에서 수선을 보고 봄이 눈앞에 있으니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오.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고 있다면, 맨프레드 라이언이 그린 차가운 겨울 풍경을 보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거요. 내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곁에 없는 친구나 사랑하는 이랑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 ..  (113, 114, 115쪽)


 도미니크는 짓궂은 사람을 만날 때이든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이든 ‘내가 만난 사람이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을 만한 이야기이든 들을 만하지 않은 이야기이든 어찌 되든 귀담아듣고 봅니다. 그런 다음 받아들일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다 싶으면 손사래를 칩니다.

 왜냐하면, 바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로 지내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다만, 도미니크는 내 삶을 사랑하기는 사랑하는데,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는지 모르며, 어느 만큼 사랑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모름투성이입니다. 알쏭달쏭투성이요, 아리송투성이예요.

 앞으로 도미니크 삶이 어떻게 이어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모험을 하러 떠났다가 하루 만에 숨을 거둘 수 있고, 두어 해쯤 살다가 저승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가난뱅이가 될 수 있겠지요. 어찌 되든 좋습니다.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다운 도미니크 삶’을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도미니크로서 도미니크 삶을 꾸릴 수 있다면 부자라고 더 기쁘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더 슬프지 않아요. 스스로 알차게 여미는 삶을 붙잡을 수 있고, 스스로 힘차게 일구는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도미니크》를 쓴 윌리엄 스타이그 님은 멍멍이 도미니크를 빌어 이야기 한 자락 풀어놓습니다. 내 삶에 걸맞게 내 길을 걸어가자고.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이웃 삶을 사랑하자고. 내 삶을 즐기면서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자고. 도미니크는 모험가이기 앞서 젊은이이고, 이 책에서는 영웅이기 앞서 수수한 한 사람입니다. 밥 한 그릇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나무 한 그루를 사랑스레 보듬을 줄 아는 따스한 목숨붙이입니다. (4343.1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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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즐겨찾기 100 사람이 되다. 

그러면서 방문자도 100 사람일 때에 맞추어 갈무리~ 

어느새 즐겨찾기를 해 주신 님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나 '공개 즐겨찾기'는 두 분뿐이던가? -_-;;;;; 

아무렴, 그냥 이 100이 좋다. 

국민학교 다닐 때에 100점을 거의 못 맞아 보아 100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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