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안는 마음


 스물한 달째 살아가는 아이를 가슴으로 안으며 다닐 때에는 팔이 떨어질 듯하다. 더욱이 애 아빠가 하는 일이란 책방마실이나 골목마실인 터라, 바깥에 한 번 나오면 예닐곱 시간은 우습게 돌아다닌다. 아이는 너덧 시간을 아주 신나게 놀더라도 지쳐 걸음이 더디거나 졸음에 겨워 하기 마련이다. 이때에는 애 아빠가 아이를 안고 다녀야 하고, 아이를 품에 안으며 재워야 한다. 아이 옷가지며 책이며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등에 메고 사진기를 목에 건 채 아이를 안고 걷자면 다리통이 퉁퉁 붓고 발바닥이 후끈거리며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내가 더위를 타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날이 쌀쌀하다며 나보고 왜 긴옷을 안 입느냐고 물을 때면 그저 빙긋 웃는다. 아이를 키워 본 분들조차 아이를 안고 다니면 얼마나 힘들고 더운 줄을 잊었을까. 아이를 수레에 태워 밀고 다니면 나처럼 땀 뻘뻘 흘리며 온몸이 뻑적지근할 일은 없겠지. 하루하루 아이 몸무게가 차츰차츰 늘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팔이 빠지고 고되리라 본다. 오늘은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가 넘을 때까지 아이하고 돌아다니며 똥 싼 바지를 빨고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이고 품에 안아 낮잠을 재우고 아이 손에 붙잡혀 여기저기 다니고 계단 오르내리기 도와주고 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힘에 부친다고 느낀다. 함께 골목마실을 하던 분들이 아이를 한동안 안아 주었기에 지쳐 쓰러지지는 않았는데, 배고프고 졸린 아이를 혼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래도 콩물 두 잔을 마시고 밥 조금 먹은 아이가 속이 든든해졌는지 투정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아빠하고 있어 주어 고맙게 달래면서 토닥토닥 재웠다. 팔이 저린 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아이를 수레에 싣고 걷는 다른 애 엄마나 애 아빠를 보며 오늘 하루만큼은 슬며시 부러웠는데, 부러우면서도 저이들은 팔 빠지고 팔 저리고 온몸 쑤신 어버이로 지내는 괴로운 기쁨을 모르겠구나 싶어, 나는 앞으로도 아이수레는 쓰고 싶지 않다. 힘에 겨우니까 이렇게 힘에 겨운 대로 살고 싶다고 할까. 힘에 겨우니까 힘에 겨운 짐을 내려놓는다기보다 힘에 겨운 짐을 더 단단히 붙잡으며 내 삶을 다스리고 싶다고 할까. (4343.5.3.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니코니코 일기 2
마리 오자와 지음, 정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조촐한 꿈, 그리고 조촐함을 좋아하는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13] 오자와 마리, 《니코니코 일기 (2)》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던 때, 퍽 많은 골목집 할매와 할배와 아주머니 들이 크고작은 꽃그릇에 온갖 꽃과 나무와 푸성귀를 기르는 모습을 보며 즐거웠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거나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면 도시 한켠 골목동네는 참 작고 꾀죄죄하며 볼썽사납다 할 만합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거나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도시 한복판 골목동네는 몹시 넉넉하고 아름다우며 따사롭다 할 만합니다. 십일월이라 하면 쌀쌀하다 못해 추운 날을 맞이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발이 휘날리기도 하는데, 이런 날씨에도 해바라기 알뜰히 키워 내어 소담스러운 노란 꽃송이를 구경할 수 있는 골목집이 있습니다. 골목집 꽃그릇에 배추포기 알차게 여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이분들한테 배추값이 오르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멀리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구경하라는 꽃이 아닙니다. 대단한 도시농업을 하고 있으니 지식인들이 눈여겨보거나 활동가가 알아보라는 환경운동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들 삶입니다. 당신 스스로 좋아하는 삶이고, 당신 스스로 누리는 삶이며, 당신 스스로 일구는 삶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거나 심으며 풀을 뽑아 돌보는 모습을 바라보면 몹시 가지런하고 정갈합니다. 누가 와서 보라고 논밭을 이처럼 돌보지는 않을 텐데, 시골버스를 타고 지나가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든 둘레 논밭을 바라볼 때마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즐거우며 몸이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농사짓기를 경제활동지수라든지 농업생산지수라든지 하는 숫자로 재거나 따지는 이들한테는 이렇게 돌보든 저렇게 가꾸든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머리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지식인이나 공무원이나 정치꾼이나 회사원이나 기자나 교사가 도시 삶터를 바라볼 때에는 ‘한 달 벌이’를 잣대로 삼습니다. 이이가 버는 돈이 많으면 잘산다 여깁니다. 이이가 버는 돈이 적으면 못산다 여깁니다. 이이네 집에 꽃그릇이 몇 개요, 꽃그릇마다 몇 가지 꽃이 피는가로 잘사는가 못사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이네 집에 탱자나무가 몇 살이요 대추나무가 몇 살이며 배나무가 몇 살인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이이네 집 빨래대는 언제 세웠고, 얼마나 많은 빨래가 이 빨래대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말랐으며, 이 빨래대 둘레에 질그릇이 몇 놓였는지를 헤아리지 않아요. 공무원은 나무전봇대를 베고 시멘트전봇대를 박을 뿐입니다. 골목사람은 목아지와 몸통이 뭉청 잘린 나무전봇대에 수국을 심어 흐드러지게 피워 냅니다. 골목사람이 따로 무슨 꽃씨를 심지 않아도 나무전봇대 서던 자리에는 들풀과 들꽃이 뿌리를 내리기 일쑤입니다.

 내 삶은 누구한테 드러내려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좋아하여 즐기는 삶입니다. 네 삶 또한 누가 들여다보거나 재거나 따질 삶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사랑하여 누리는 삶입니다.


- 이 아이를 맡기로 하면서 사랑을 포기했던 건 아니야.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했어. 애인이 생기면 어린아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저어, 니코, 언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래서, 올 크리스마스이브엔 그 사람과 데이트 하기로 약속했거든. 니코랑은 이브이브에 파티하자.” “이브이브?” “23일. 이브의 전날.” (53∼54쪽)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 2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는 한결 무르익은 ‘삶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결 무르익었다뿐, 아주 단단히 여물거나, 매우 튼튼히 뿌리내린 삶사랑까지는 아닙니다. 이제야 한결 무르익으며 참으로 신나며 보람찬 삶사랑입니다. 어떻게 이어가야 좋을지까지 살피지 못하는 한편, 얼마나 즐거운가를 느끼지 못하는데다가, 어느 만큼 아름다운가를 헤아리지 못하는 삶사랑이에요.

 그런데요, 아직 잘 모르거나 못 느낀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어설프거나 어수룩하다 하여 사랑이 아니라 못박을 수 없어요. 어리석어도 사랑입니다. 모자라도 사랑입니다. 어줍잖아도 사랑이요, 어리둥절하더라도 사랑입니다. 설레면서 좋고, 씁쓸하면서 좋습니다. 달콤할 때뿐 아니라 쓰디쓸 때에도 좋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예 사랑이니까요. 사랑일 뿐이기에 언제나 좋습니다. 사랑임을 아니까 슬퍼도 좋고 기뻐도 좋습니다. 사랑을 하는 만큼 뜻을 이루어도 반갑고 뜻을 못 이루어도 고맙습니다. 이기거나 지려고 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듯, 얻거나 가로채려고 하는 사랑이 아니에요. 빼앗는다든지 사로잡으려는 사랑이 아니랍니다. 나와 네가 즐거우며 아름답고자 하는 사랑이에요.


- “24일에 만날 수 없다니, 갑자기 왜.” “아는 사람의 아이를 맡을 때, 그 아이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 왜냐면 그 애는 친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크면서 지금까지 충분히 상처받아 왔으니까. 난 그 애가 날 필요로 하는 동안은 그 애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했었어.” “24일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애한테도 특별한 날이야. 우린 어른이니까 지금까지 그런 날을 얼마든지 지내 왔고, 얼마든지 특별한 날을 만들 수 있지만, 어린아이는 다르잖아?” (62∼63쪽)


 꽤 어설프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딪힙니다. 참 어수룩한 탓에 이래저래 휘둘립니다. 퍽 멍청하거나 바보스럽다 할 만하기에 으레 헷갈립니다. 망설이거나 갈팡질팡합니다. 머뭇거리거나 조마조마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느낌이 좋아 사랑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느낌들이 썩 달갑지 않겠지요.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하나둘 치러내면서, 차근차근 느끼면서, 바야흐로 사랑이란 이런 맛이구나, 사랑이기에 이렇게 멋있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글동글한 사랑이란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또는 하나부터 백까지, 모가 없거나 티가 없는 사랑이란 없답니다. 아파하고 슬퍼하며 힘들어하는 사랑입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며, 고단하다가 개운해지는 사랑입니다.

 니코 어린이와 케이 언니는 이제까지 살면서 참다이 누리지 못하던 사랑을 늦깎이로 누립니다. 늦깎이 사랑이지만 둘도 없는 사랑임을 차츰 알고, 늦깎이 사랑이건 꽃등 사랑이건 새내기 사랑이건, 어떠한 사랑이든 사람을 곱게 가꾸어 주는 줄 배웁니다.


- “전부 합해서 782엔. 한 달에 500엔씩 용돈을 받고 있는데, 만화잡지 사고 남은 돈을 모은 거예요.” (81쪽)
- “니코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집에서 자랐으니까. 그날이 처음이었어. 가짜라도 엄마 아빠랑 셋이서 외출한 것 같은 기분.” (161쪽)



 그렇지 않나요. 한 달에 백만 원을 벌면 넉넉하지 않나요. 세 식구이건 네 식구이건 다섯 식구이건. 아니, 한 달에 오십만 원을 벌어도 알뜰하지 않나요. 오십만 원 가운데 사십만 원을 밥값으로 쓰고 십만 원을 방삯으로 쓰더라도 살뜰하지 않나요. 돈이 모자라면 손전화는 안 쓰면 되지요. 돈이 없으면 텔레비전이나 빨래기계나 냉장고는 치우면 되지요. 돈이 없으니까 자가용은 안 몰면 돼요. 돈이 없는 만큼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됩니다. 돈이 없으니 아껴서 살아가면 되고, 돈이 없으니까 아파트 투자나 주식 투자 따위란 처음부터 아예 생각조차 않으며 살아가면 좋아요. 텔레비전을 안 보니까 연예인이든 연속극이든 운동경기이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 나누어도 됩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우리 식구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겪은 일을 돌이키면 됩니다. 이웃과 동무랑 서로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됩니다. 우리 집 숟가락이 몇 있고, 너희 집 숟가락이 몇 있구나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됩니다. 우리 집 아이 기저귀 빨래는 몇 장 나오고, 너희 집 아이 기저귀는 몇 장이구나 하는 얘기를 하면 되어요.

 살림집 숟가락 갯수를 도표로 만든다든지 수첩에 적바림해 놓고 외울 까닭이 없습니다. 이름이나 나이나 태어난 해나 띠나 다닌 학교나 뭐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머리속에 안 담아도 됩니다. 그때그때 말문을 열고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말을 섞으면 그만입니다. 부침개를 몇 장 더 했으니까 접시에 담아 나누어 주면 됩니다. 고맙게 부침개를 얻어 먹었으니 접시를 돌려줄 때에 잘 익은 감알 몇 따서 아이한테 들려 보내면 됩니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몇 점 걸렸는가 세 보아도 즐겁습니다. 오늘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에, 멧등성이를 멋들어지게 날아가던 누렁조롱이를 마주한 일을 어머어머 오늘 있잖니 하면서 조잘조잘 떠들어대어도 신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내 삶에 다 있습니다. 즐거운 일은 내 삶에 고루 있습니다. 고운 꿈은 내 삶에 알맞게 있습니다.


- 그러나 이 아이의 주위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온통 거짓뿐이었다. (156∼157쪽)
- 지금부터라도 관계는 얼마든지 쌓을 수 있는데, 미후유는 자신이 얼마나 아까운 걸 놓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158쪽)


 《니코니코 일기》 2권에 이르러 비로소 무르익는 삶사랑을 맛보는 케이 언니는 ‘아이를 낳는 아픔과 기쁨’이라든지 ‘갓난쟁이가 어린이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돌보는 고단함과 보람’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덟 살 어린이가 아홉 살 어린이가 되는 결’하고 ‘아홉 살에서 열 살로 접어드는 고비’를 복닥이면서 갓난쟁이일 때에는 갓난쟁이일 때대로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꼬맹이였을 때에는 꼬맹이였을 때대로 어느 만큼 어여뻤으며, 오늘 여덟아홉 살 어린이는 이 나이대로 어찌어찌 아리따운가를 헤아립니다. 쉬 놓칠 뻔한 삶을, 아니 이제껏 생각조차 하지 못한 삶을, 어쩌면 앞으로도 꿈꾸지 못했을 삶을 고맙게 마주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고마운 하루하루임을 깨달으면서 더 보람차며 알차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케이 언니 스스로 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케이 언니 둘레 사랑스러운 동무와 좋은 짝꿍한테 조촐히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케이 언니 둘레 사랑스러운 동무는 케이 언니가 왜 이렇게 촐랑대는지를 잘 알아챕니다. 케이 언니 둘레 좋은 짝꿍은 겉훑기로만 돌아봅니다. 사랑스러운 동무는 사랑스러운 여러 가지 얼굴을 모두 껴안습니다. 좋은 짝꿍은 틀림없이 좋은 짝꿍이기는 한데 속읽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 “괜찮아.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돼! 이리 와! 케이 언니도 그렇게 할게. 지금부터 니코의 친엄마라고 생각할게!” “언니.” “엄마답지 못한 엄마라 미안해. 그래도 니코를 정말 사랑해!” (165쪽∼166쪽)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사는 딸아이 손을 잡거나 발을 잡거나 작은 몸뚱이를 껴안을 때에 ‘내가 이 아이 아버지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볼일을 봐야 해서 홀로 인천이나 서울로 마실을 가야 할 때에 시외버스를 타며 깡통보리술을 하나 톡 따곤 합니다. 홀짝홀짝 들이키며 가슴이 저밉니다. 글쎄, 가슴이 저미기 때문에 홀짝홀짝 들이킨다고 해야 옳겠지요. 오늘 하루 또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이는 아이대로 심심할 테고 엄마는 엄마대로 고단하겠다고 헤아리면서, 내가 집에 있는 동안 우리 살붙이하고 얼마나 따사롭거나 넉넉한 사람으로 지냈는가를 뉘우칩니다. ‘내가 참, 한 집안에서 지아비요 아버지임을 잊으며 살지 않았나.’ 하고 되새깁니다.

 만화책으로 다 보았고 거듭 보았으니 줄거리를 뻔히 알지만, 만화영화로 만들어 새롭게 나온 《블랙 잭》을 보면서 스르르 눈물이 흐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든 〈기적의 팔〉이든 훤히 꿰는 줄거리인데, 다시 보고 또 볼 때마다 가슴이 촉촉히 젖어듭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만화를 그려냈을까 곱씹으며 가슴이 뭉클합니다. 《니코니코 일기》를 2권째 차근차근, 한 장 두 장 천천히 넘기면서 오자와 마리 님은 어떠한 넋으로 이 만화를 담아냈을까 곰삭이며 가슴이 찡합니다.

 바로 사랑이겠지요.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일 테지요. 내 몸하고 나눈 피가 흐르는 살붙이라 해서 사랑인가요. 내 몸하고는 동떨어진 피가 흐르는 동무나 이웃이나 짝꿍이라 해서 사랑이 아닌가요.

 아이한테는 어머니 품처럼 보드랍고 포근한 살결은 없다 합니다. 그런데 내 어머니가 아닌 품이면서 어머니 품하고 똑같이 보드랍고 포근한 살결이 있습니다. 어머니 품하고는 사뭇 다르게 보드랍고 포근한 살결이 있어요. 내 어머니는 내 어머니대로 온누리에 꼭 하나만 있는 품으로 맞아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가 아닌 사람 또한 이 땅에 꼭 하나뿐인 품으로 맞아들여요.


- “난 그 애와 함께 즐기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도 가끔은, 이 ‘가족’ 놀이를 함께 즐겨 주었으면 해.” (172쪽)


 꿈은 조촐합니다. 꿈인 만큼 조촐합니다. 꿈이니 조촐해요. 조촐하지 않을 때에는 꿈이 아닙니다. 조촐하지 않은 생각은 부질없는 허우적거림입니다. 조촐하지 않은 생각을 자꾸 품으면 덧없이 갈팡질팡해댈밖에 없습니다. 조촐함하고 등지며 살아가는 동안 사랑이나 믿음을 맛볼 수 없어요.

 니코 어린이는 엄마랑 아빠랑 니코랑 셋이 조촐히 나들이를 하는 삶을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케이 언니는? 케이 언니는 어떤 삶을 누리고 싶어 하나요. 아마, 케이 언니는 니코 어린이를 만나지 못했으면 좁은 도시에서 좁다란 속알맹이로 좁다란 돈을 벌면서 좁다란 집에서 좁다란 삶을 좋다란 나날에 허덕이며 좁다란 줄 모르고 좁다랗게 숨을 거두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케이 언니는 니코 어린이를 만나 ‘거짓 엄마’라는 허울이 아닌 ‘참 엄마’라는 삶을 누립니다. 케이 언니 삶을 참다웁고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넉넉히 맞아들입니다. 조촐함을 즐기는 삶을 새롭게 느끼며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케이 언니가 품는 꿈이란? ‘니코 어린이 가슴에 더는 생채기가 안 생기도록 지키는’ 일이 아니라 ‘니코 어린이와 케이 언니 두 사람 가슴에 사랑을 심도록 서로서로 좋아하는’ 삶입니다. (4343.11.4.나무.ㅎㄲㅅㄱ)


― 니코니코 일기 (2) (오자와 마리 글·그림,장혜영 옮김,대원씨아이 옮김,2002.9.30./판 끊어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코니코 일기 1
마리 오자와 지음, 정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즐거한 삶, 그러니까 즐거움을 아끼는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13] 오자와 마리, 《니코니코 일기 (1)》



 깊은 밤이나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오면 찬바람에 몸을 살짝 움찔합니다. 이 찬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어 즐겁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밤이나 새벽에 쉬를 눌 때에는 반드시 밖으로 나와 개울이 졸졸 흐르는 멧기슭까지 걸어가서 풀숲에 눕니다. 쉬를 누는 동안 별을 올려다보고, 찬바람을 쐬며, 더없이 깜깜한 모습을 즐깁니다. 시골길에는 거리등이 거의 없어 한길이라 해도 썩 밝지 않은데, 마을 몇 집 모인 곳하고 꽤 떨어진 우리 집은 그야말로 깜깜한 나라입니다.

 오늘은 새벽 네 시 이십오 분에 깨어납니다. 자다가 쉬를 눈 아이는 으레 꽁알꽁알 하면서 “아부지.”나 “어머니.” 하고 부릅니다. 얼핏 꽁알꽁알 소리를 들었으나 곧바로 잠에서 깨지 못했는데, 아이 엄마가 “아버지, 기저귀 갈아 주셔요.” 하고 말하는 바람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그래, 내가 일어나서 갈아 주어야 하는구나.

 집 바깥처럼 집 안도 깜깜합니다. 빛이라곤 한 줄기 없습니다. 손을 살며시 뻗어 아이 머리에 닿을 때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는 바지를 천천히 내립니다. 오줌으로 푹 젖은 기저귀를 벗기고 베개맡에 미리 두었던 기저귀를 집어 갈아 줍니다. 아이랑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고 있는 만큼, 아무리 캄캄하건 어둡건, 또 눈을 뜨건 감건, 기저귀 갈기란 손쉽게 할 만합니다. 아이가 앞으로 언제쯤 ‘잠자리 기저귀’까지 뗄 수 있을까 궁금한데, 아이가 어른들 말을 제법 배운 뒤까지 잠자리 기저귀 갈기를 해야 하겠지요. 밤마다 이렇게 잠을 제대로 못 이루며 기저귀를 갈아야 하니 고단하지만, 아이 눈높이로 생각한다면 아이 또한 밤마다 오줌으로 젖은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하니 얼른 갈아 주기를 바라는 한편 그때그때 잠이 깨겠지요. 몇 해쯤 지나야 아이는 밤이든 새벽이든 스스로 잠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쉬를 눌까 모르겠는데, 아이 스스로 밤이나 새벽에 잘 일어나 쉬를 눌 수 있다면, 그때에는 제 아버지처럼 마당으로 나오고 멧기슭으로 걸어가며 밤하늘 별밭 올려다보기를 즐기겠지, 하고 꿈을 꿉니다. 나중에 더 크면 혼자만 나올 터이나 아직 어릴 때에는 아버지를 불러 함께 멧기슭 풀숲에서 쉬를 누며 밤하늘바라기를 나란히 할는지 몰라요.


- “실은 아는 사람의 아이를 봄까지 데리고 있게 됐어. 지난주에 짐이 왔는데, 보니까 옷이 하나같이 다 작잖아. 부모란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몰라.” “몇 살인데?” “8살. 초등학교 3학년이야. 전학 수속이다 뭐다 해서 일은 하나도 못했어.”  (22쪽)
-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머리가 아팠다.“너무 마셨군. 오랜만에 마셨더니만.” 니코는 이미 훨씬 전에 등교한 후였다. “앗, 교환일기다. 어디 볼까나?” ‘안 익숙해. 안 생겼어. 안 될 거야. 없어.’ ‘도쿄는 안 익숙해. 친구는 안 생겼어. 어른은 안 될 거야. 아빠는 없어.’ 그것이 대답. 자기혐오. (29∼31쪽)
-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혈연이란 게 과연 뭘까?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할까? 이 세상엔 사랑하지 않는 부모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의 결합이 슬프도록 많은데. (62쪽)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 1권을 읽습니다.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가운데 하나인데, 2002년에 처음 우리 말로 나올 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2005년인가 2006년에 비로소 이 만화가 진작에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니코니코 일기》는 판이 끊어지고 말았으며, 얼마 앞서까지 너덧 해에 걸쳐 헌책방을 뒤지고 살폈으나 좀처럼 찾기 힘들었습니다. 지난주에 가까스로 한 질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품에 안은 《니코니코 일기》는 대여점에 있던 책입니다. 겉에 비닐을 싸며 테이프로 붙인 자국이랑 대여점 스티커랑 덕지덕지 있습니다. 2002년에 나온 책이니 여덟 해가 된 셈인데, 고작 여덟 해를 지났으나 테이프가 녹으며 비닐과 책 앞뒤에 테이프 삭은 자국이 남습니다. 책을 펼치기 앞서 이 테이프부터 떼어내야 합니다. 비닐과 겉종이에 붙은 테이프를 살그머니 떼어 이렇게 떼어낸 테이프를 한손으로 가만히 쥐어 비닐과 책에 톡톡 하고 대면서 테이프똥이 묻어나도록 합니다. 이러기를 책 한 권마다 오 분이나 십 분 남짓 합니다. 테이프를 많이 붙인 책일수록 테이프 떼는 데에 오래 걸립니다. 아주 단단히 붙은 ‘대여점 바코드 딱지’를 뗄 때에는 더 골이 아픕니다. 테이프 떼기를 하며 히유 하고 한숨을 쉬니, 옆에서 바느질을 하며 바라보던 아이 엄마가 한 마디 합니다. “대여점 책이라도 이 책을 살 수 있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옳은 소리입니다. 판이 끊어진 만화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을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데요. 우리는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무척 아름다우며 멋진 책을 오래오래 곁에 둘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책방 일꾼이 땀을 흘려 주었기 때문에 아주 알차며 재미난 책을 두고두고 아끼거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모든 책을 빠짐없이 장만해서 읽을 수 없거든요. 누구나 놓치는 책이 있어요. 책방마실을 하면서 내 코앞에 있는 책시렁에 꽂힌 모든 책을 한눈에 알아내지 못합니다. 누리책방에 들어가 다람쥐로 콕콕 눌러 찾아보기를 한다 할지라도 못 알아보거나 못 찾아내는 책이 있습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인터넷이든 모든 책소식을 빈틈없이 다루지 않아요. 언론 소개를 한 줄조차 못 받는 책이 대단히 많습니다. 언론 소개를 타는 책이라 해서 읽을 만하거나 훌륭하다 할 수 없어요. 언론 소개를 못 받는 책이라 해서 안 읽을 만하거나 안 훌륭하다 할 수 있나요. 더구나, 새로 나오는 만화책을 제대로 소개하는 매체는 한국땅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 나는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 아이가 가장 상처받고 있다는걸. 모르는 척 지나치려 했었다. 더 이상 깊이 연관되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의 기분은 무시당한 채 어른들 편의대로 휘둘리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32∼33쪽)
- 네 주위의 어른들은 나를 포함해 하나같이 최악. 하지만 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어. 네가 생각한 네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어른이 되기 싫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35∼36쪽)
- “하지만,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아.” “어, 어떤 엄마라도?” (59쪽)



 만화책 《니코니코 일기》에 나오는 ‘니코’는 ‘코바코 니코’입니다. ‘니코’라는 이름은 우리 말로 하자면 ‘싱글’이라 합니다. ‘니코니코’라 하면 ‘싱글싱글’이거나 ‘싱글벙글’쯤 됩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 니코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웃은 적이 없습니다. 즐겁게 웃은 날이 하루조차 없습니다. 니코 어린이는 제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제 아버지한테서도 사랑을 얻지 못했습니다. 니코 어린이를 낳은 어머니는 니코를 돌보지 않습니다. 니코와 말을 섞고자 하지 않습니다. 니코 어린이를 낳은 아버지는 제 씨앗으로 니코가 태어난 줄을 모릅니다. 니코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랑 아버지랑 따스히 사랑해 주며 사랑을 물려받거나 받아먹으며 싱글싱글 웃으며 커야 할 니코인데, 정작 니코한테는 웃음기란 하나 없이 차갑고 메마르며 슬픈 삶을 보내며 ‘빛나는 여덟 살’까지 빛을 잃은 채 주눅만 듭니다. 계집아이라 해서 꼭 치마만 입고 예쁘장하게 차려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내아이라 해서 반드시 바지만 입고 거칠게 놀아야 할 까닭이 없어요. 니코는 계집아이이면서 예쁘장하게 차려입는다거나 치마를 입는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개구지게 놀거나 마음껏 뛰놀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있다고 느끼기 어렵고, 없으면 없으니 그만인 듯한 채 ‘니코를 낳은 어머니네 어머니(할머니) 집’에 얹혀서 살다가, 니코네 할머니가 저승으로 간 다음 맡아 줄 사람이 딱히 없어 ‘니코 어머니가 배우로 일할 때 심부름꾼(매니저) 노릇을 하던’ 케이라는 아가씨 집으로 갑니다. 케이라는 아가씨는 서른둘 나이로 혼자 살면서 만화 대본이나 연속극 대본을 써서 밥벌이를 고만고만하게 하는 사람.


- “메구미네 집은 절인데 해마다 산타 할아버지가 오신대. 그치만 우리 집엔 한 번도 오신 적 없단 말야. 할머니가 불교 신자라서.” “한 번도?” “한 번도!!”
- ‘오늘 엄마가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분해서 울지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엄마는 예쁘게 꾸미고 나가 버렸다. 니코도 엄마 딸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케이 언니 딸로 태어나고 싶었어.’ (117쪽)
- 필사적으로 젖을 빠는 작고 귀여운 니코의 모습에, 미후유도 마치 그때만은 성모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142쪽)


 아이를 낳아 본 적이든 아이를 길러 본 적이든 없을 뿐더러 ‘어린 애들은 싫어’ 하고 말하던 사람이 아이를 맡아 기르며 함께 살아야 할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합니다. 아니, 멀리 헤아리기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되겠지요. 혼자 일만 사랑하면서 살다가 온갖 집안일을 다 치르는 가운데 아이를 낳아 아이랑 하루 내내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니코니코 일기》에 나오는 ‘케이 언니’가 어떤 마음과 매무새로 니코 어린이를 처음 맞이하고, 비로소 맞아들이며, 바야흐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깨달을 만하겠지요.

 그래요, 사랑받아 오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물려주기 어렵습니다. 사랑을 받아먹으며 어린 나날을 보내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 스물이 되건 서른이 되건 마흔이 되건 예순이 되건 일흔이 되건, 따스히 사랑하는 손길을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한테 나누어 주기 힘듭니다. 어쩌면 ‘니코를 낳은 연예인 엄마’부터 당신이 어렸을 때에 살갑거나 따스히 사랑받은 적이 없을는지 몰라요. 니코 어린이를 맡기로 한 케이 언니라고 딱히 사랑받으며 자랐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케이 언니는 당신 어머니하고 틈틈이 전화로 소식을 나눌 뿐더러, 틈틈이 고향으로 찾아가 어머니를 만나면서 마음과 몸을 쉬곤 합니다. 케이 언니한테는 마음쉼터 고향이 있고 마음쉼을 베푸는 너그러운 어머니가 있어요. 케이 언니는 시골집에서 따사롭게 살아가다가 도쿄라고 하는 ‘경쟁으로 피를 튀고 집삯이니 뭐니 하며 고단하기 짝이 없는 도시살이’ 때문에 ‘어린 애들은 싫어’ 하고 느끼도록 마음이 메말라 가고 말았으나, 서른둘 나이에 갑작스레 찾아온 ‘아이키우기’를 맞닥뜨리며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케이 언니 마음이 생채기투성이일 뿐 아니라, 케이 언니 또한 둘레 사람들한테 생채기를 입히며 살았음을. 이제부터 케이 언니 스스로 사랑받는 삶을 일구고 싶은 한편, 케이 언니 또한 스스로 당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가꾸고 싶음을.


- “네가 간다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순 거짓말!” “진짜야.” “흑, 히잉, 훌쩍, 으아앙.” (56∼57쪽)
- 잘렸다. 전화 한 통으로 깨끗이 잘리고 말았다. 아주 보기 좋게. (182∼184쪽)



 한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나날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우지끈 뚝딱 하고 거듭나지는 않아요. 크게 탈바꿈하는 모습이 새삼스레 보이는 가운데, 아주 찬찬히 거듭나는 모습이 더디게 보입니다. 사랑받는 즐거움과 사랑하는 즐거움을 아주 천천히 느끼는 케이 언니입니다. 그리고 케이 언니처럼 사랑받고 사랑하는 놀라움을 아주 빠르게 느끼는 니코 어린이입니다. 니코 어린이는 케이 언니보다 훨씬 빠릅니다. 왜냐하면 여덟 살이란 나이는 아주 어리다 할 만하지만, 니코 어린이한테는 온삶이 여덟 해예요. 이 여덟 해를 살아오는 가운데 니코 어린이 가슴에 ‘사랑’이란 이름표가 붙은 날이란 하루조차 없었어요. 삼백예순닷새를 여덟 번 보내는 동안 처음으로 맞이한 사랑이에요. 이 사랑에 흠뻑 빨려들밖에 없고, 이 사랑에 흠씬 젖어들밖에 없습니다. 놓칠 수 없고, 잃을 수 없으며, 잊을 수 없습니다. 잡고 싶으며, 누리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요.

 케이 언니는 어른입니다. 어른인 케이 언니는 사랑받아 온 삶이 있고 사랑을 못 받았던 삶이 있습니다. 슬픔도 겪지만 기쁨도 겪습니다. 슬플 때에는 담배를 태운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할 수 있어요. 풋사랑으로 그치더라도 사랑놀이를 하기도 하며,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내 주머니 돈으로 얼마든지 합니다. 니코 어린이는 누구한테서 돈을 얻어야 택시나 버스를 탈 수 있으며, 어른들처럼 홀가분하게 사랑을 한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니코 어린이는 모든 일 모든 자리에서 빠르게 깨닫고 빠르게 몸을 맞추며 빠르게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케이 언니는 늘 나중에 깨닫고 비로소 알아채며 바야흐로 당신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느낍니다.


- “하지만 불쌍해. 즐거운 여름방학에 학원이나 다니고.” “그러게.” “같은 4학년이라도 날이면 날마다 놀고만 지내는 아이도 있는데. 요기!” “어른도!” (134쪽)


 모두 여섯 권으로 이루어진 《니코니코 일기》 1권은 이렇게 ‘사랑에 처음 눈 뜨는’ 두 사람 이야기를 영글어 냅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겪거나 느끼거나 받아먹을 수 없던 사랑을 처음으로 만난 니코 어린이하고, 이제까지 숱하게 겪거나 느끼거나 받아먹기는 했으나 사랑이 참다이 사랑이었다고 느끼지 못하던 케이 언니하고 알콩달콩 툭탁툭탁 벌이는 투박한 살림살이를 보여줍니다.

 참 그렇거든요. 저한테 옆지기라든지 딸아이를 갈음할 만한 사람이나 삶이나 사랑이 있으려나요. 곰곰이 따지자면 어딘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는 내 모든 ‘삶 발자국’을 남김없이 훌훌 잊으며 조용히 떠나도록 이끄는 무언가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우리 옆지기한테는, 또 이제 막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는 딸아이한테는 어떠할까요.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는 딸아이한테 제 아버지를 갈음할 만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으려나요.

 밥을 먹이고, 오줌기저귀 갈아 주고, 똥을 눈 밑을 닦아 주고, 머리 감기고 몸을 씻어 주며, 옷을 갈아입히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며, 방바닥과 집을 쓸고닦으며, 안고 어르고 업고 무등 태워 놀다가는, 팔베개를 하며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리며 새근새근 재우는 제 아버지를 갈음할 무언가가 있다면 어디에 어떻게 있으려나요.


- 나에게 이 아이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어. 이 아이에게 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듯이. 일에서도, 아무도 날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보이겠어. 언젠가 기무라 씨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주겠어. (194∼195쪽)


 누구한테나 즐거운 삶입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을 아끼는 삶입니다. 《니코니코 일기》를 이루는 두 사람, 니코 어린이와 케이 언니는 여덟 해 삶과 서른두 해 삶을 보냈지만, 이동안 제대로 즐겁다 느끼지 못하며 보낸 삶입니다. 바로 오늘, 여덟 살과 서른두 살 나이부터 즐거움을 참다이 깨달으며 새롭게 보내려는 삶입니다.

 니코 어린이는 갓난쟁이부터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살았다면 더 나았을는지 모릅니다만, 여덟 살부터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살아가도 나쁘지 않습니다. 케이 언니 또한 어린 나날부터 사랑을 받아먹으며 사랑내음 물씬 풍기는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갔어도 좋았겠으나, 서른두 살부터 사랑내음 물씬 나는 사랑스러운 어른으로 살아가도 아쉽지 않아요.

 언제 깨닫든, 언제 첫 실타래를 풀든, 언제 첫 걸음마를 떼든, 즐거운 삶임을 헤아리며 오순도순 손을 맞잡을 수 있으면 좋아요. 좋은 만화책이라면 첫 권부터 끝 권까지 차곡차곡 갖추어 모두 읽어도 즐거웁고, 짝을 잃어 딱 한 권만 읽을 수 있어도 즐겁습니다. 《니코니코 일기》 1권은 ‘처음 깨닫는 즐거운 삶’을 알차게 보여줍니다. (4343.11.4.나무.ㅎㄲㅅㄱ)


― 니코니코 일기 (1) (오자와 마리 글·그림,장혜영 옮김,대원씨아이 옮김,2002.8.15./판 끊어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는 너 스스로 포도 알 까서 먹으렴. 그래야 아빠도 낮잠을 자지. 아이구야 힘들어라. 

- 2010.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골목이 품는 삶은 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조촐히 느낍니다. 그러나 골목에서 살아가면서도 골목 삶을 못 느끼기도 합니다. 살아야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살고 있어도 마음이 닿지 않으면 코앞에 있어도 느끼지 못해요.

- 2010.8.22. 인천 동구 송림1동. 

(왼쪽 작은 수풀 밑에 조그마한 빗돌이 서 있는데, 퍽 오래된 '숨은 유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