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바람이 불 때에 따뜻하던 나날을 떠올린다고 하던가. 여러 날 퍽 길게 따뜻하다 싶더니 바야흐로 칼바람이 한 번 몰아치니까, 한창 무덥던 여름날 골목 모습을 생각하고 싶다. 골목동네를 온통 꽃나라로 일구던 아줌마들 고운 손길을 헤아려 본다.

 - 2010.6.13. 인천 동구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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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보듬는 마음


 지난 열흘 동안 애 아빠는 다른 어디로 혼자 볼일 보러 먼길을 나서지 않습니다. 아이랑 옆지기랑 꼭 붙어서 지냅니다. 옆지기는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기에 아이랑 노는 몫은 으레 아빠가 맡습니다. 아빠한테는 할 일이 멧더미 같으나 멧더미 같은 일거리는 흔히 뒤로 젖혀 놓습니다. 다만, 날마다 쓸 글은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아이가 잠이 깰 무렵까지 신나게 써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단하지만 고단하다는 티를 되도록 안 내려고 용을 쓰면서 아이랑 놉니다. 이러면서 이렇게 잠도 안 자는 아이랑 하루 내내 부대끼자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고, 옳게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이’들이 얼마나 힘겨운 노릇이며 이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뼛속 깊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먼저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아이를 부릅니다. 그림책을 하나 꺼냅니다. 하나 더 꺼내고 또 하나 더 꺼냅니다. 드러누워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도 함께 보자고 부릅니다. 아이가 와서 “누워! 누워?” 하면서 엉덩이를 들이밉니다. 그림책은 배에 얹고 아이를 두 손으로 안아 얌전히 눕힙니다. 팔베개를 할까 말까 하다가 아기 베개에 머리를 놓습니다. 그림책을 듭니다. 여느 때라면 누워서 책을 든다고 팔이 아플 까닭이 없지만, 아침부터 갖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랑 놀다 보면 누구나 팔이 저립니다. 그래도 꾹 참고 그림책을 넘깁니다. 새로운 그림책을 보고도 싶지만, 아주 재미나다고 느끼는 그림책만 보고 또 보고 다시 봅니다. 팔이 저리고 졸리며 고단할 때에도 언제나 새롭게 보고 즐길 만한 아주 훌륭하다 싶은 그림책이 아니면 아이를 재우면서 읽힐 수 없습니다. 그림책은 지식책이 아니에요. 그림책이란 삶책이요 사랑책입니다.

 세 권을 내리 읽으니 참말로 팔이 후들후들. 아이보고 이제 “벼리도 코 자야지. 토끼도 코 자고 고양이도 코 자는데, 코 자자.” 하고 말합니다. “토끼 코 자? 고양이 코 자?” 하면서 도무지 곱게 잠들어 줄 낌새가 아닙니다. “응, 아빠도 코 잘게. 드르렁! 드르렁!” 일부러 코고는 소리를 내다가 실눈을 뜹니다. 아이는 잘 생각을 않으며 조그마한 손으로 살며시 아빠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아빠가 가여워 보였을까요. 아빠가 힘들어 보였을까요. 아니면 아빠를 사랑해 주려는 마음일까요. 엄마나 아빠가 저를 그렇게 살며시 쓰다듬어 주곤 하니까, 이런 손길을 떠올리며 아빠한테 돌려주는 셈일까요.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 얼마나 고마우며 사랑스러운가를 살 떨리도록 느낍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살결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습니다. 부드러이 보듬는 글이란, 나도 좋고 당신도 좋겠지요. 인문책이란 지식책이 아니랍니다. 인문책이란 사랑책이며 삶책입니다.

 지식을 주워담아서는 그림책이든 인문책이든 될 수 없으나, 책조차 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꽉꽉 들어찬 낱말을 엮어 지식을 꽃피우는 놀라운 얼거리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림책이나 인문책이 될 턱이 없어요. 이런 책은 모두 부질없는 자랑책이자 돈책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책다운 책이고자 한다면 눈물책이거나 웃음책이어야 합니다. 땀방울책만으로는 책이 되지 못합니다. 차근차근 살림책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살림책이 되려면 땀방울은 밑바탕으로 깔아 놓으니 땀방울책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햇살책 달빛책 별빛책 구름책 하늘책 흙책 배추책 보리책 바람책 냇물책 바다책 멧새책 무지개책 들이 고루고루 어우러지면서 바야흐로 살림책이 되고, 이 살림책 가운데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인문책이든 가지를 칩니다. (4343.10.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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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 : 에드워드 슈타이켄
최봉림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사진과 사람과 삶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찾아 읽는 사진책 1] 최봉림,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디자인하우스,2000)


 사진길을 걸었던 에드워드 슈타이켄(에드워드 스타이겐) 님 이야기를 ‘마치 에드워드 슈타이켄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주고받기라도 하는 듯 꾸며’서 엮은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를 읽습니다. 나라안 출판사에서 에드워드 슈타이켄 님 책을 펴낸 적은 딱 한 번입니다. 다만, 이 책은 해적판으로 《인간가족》을 몰래 펴낸 판으로, 그나마 1986년에 월간사진사에서 한 번 나오고 다시 나오지 못합니다. 해적판이면서도 제대로 낼 만하지만, 해적판이면서 제대로 내지 못한 책이기에, ‘인간가족’이라는 사진잔치를 마련하여 도록을 엮은 슈타이켄 님 삶이나 넋을 고이 싣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한글로 된 자료라든지 책으로는 슈타이켄 님이 어떤 사진길을 걸으며 어떠한 사진밭을 일구었는가 헤아리기 몹시 어려워요.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라는 책은 2000년에 나옵니다. 슈타이켄 님 작품이라든지 슈타이켄 님이 마련한 사진잔치 모습이라든지 슈타이켄 님이 사진길을 걸을 무렵 둘레에서 이룬 남다른 사진 작품 들이 이 조그마한 책(128쪽)에 찬찬히 실립니다. 도판은 퍽 깔끔합니다. 그러나 슈타이켄 님이 이루었거나 일구었다 할 만한 작품세계를 차분하게 살필 만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살짝 엿볼 만큼입니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오직 생각날개로) 책을 쓴 최봉림 님은 “회화주의의 역사적 소임은 사진적 재현이 기계적 복제술이 아니라, 회화처럼 인간의 지성과 감수성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이라는 것을 예술계와 사회에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45쪽).”라든지 “선생님의 전시회는 인류의 희망과 화해를 기원하고 손짓했지만, 실제로 ‘인간 가족’이라는 이상적 개념은 오히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를 호도하고 가리는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97쪽).”라든지 하면서, 말이 좀 많습니다.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틀이라 한다면 이처럼 말이 좀 많을 수도 있다 할 만하지만, 이 작은 책은 최봉림 님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서 읽을 책이 아닙니다. 최봉림 님이 이토록 온갖 말을 당신 입으로 더 드러내어 밝히고자 했다면 ‘마주이야기 틀’이 아닌 ‘비평 틀’로 책을 엮어야 옳다고 느낍니다.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를 읽는 내내 ‘슈타이켄 님 목소리’로 나오는 이야기가 참말 슈타이켄 님이 했던 말인지, 또는 당신이 손수 쓴 글에 적힌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로 붙임말을 달아 어느 자료 몇째 줄에 실린 글에서 따서 적었다고 밝히지 않으니까요. 최봉림 님이 생각해 내어 적은 ‘슈타이켄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하는 말인지, 최봉림 님이 ‘슈타이켄 증언 자료를 이리저리 깁고 새로 엮으면서 묻는 말을 새로 만들었’는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곧이곧대로 믿으며 읽어야 할 뿐입니다.

 슈타이켄 님 목소리로 “점, 선, 면과 흑과 백의 계조도가 만들어 내는 항공사진의 추상적 형태미는 오직 사진이라는 매체만이 실현할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55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라든지 “아름다움이 미술관과 살롱의 전유물로 갇혀 있기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술 운동의 한 결실인 셈이었죠(79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와 아울러 자잘하게 묻고 대꾸하는 안부인사가 꽤 깁니다. 아마, 이런 안부인사란 ‘마주이야기 틀’로 엮은 책임을 또렷이 드러내면서 감칠맛나는 짜임새를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200쪽이나 300쪽짜리 책이 아닙니다. 사진 자료까지 곁들여 128쪽으로 자그맣게 엮은 책입니다. 더 깊이 파고들면서 한결 속내를 캐내는 이야기를 뽑아 올려야 하는데, 그만 허울을 좋게 꾸미려 하면서 알맹이를 다루는 자리가 아주 줄어들고 맙니다. 이러면서 슈타이켄 목소리보다 최봉림 목소리가 더 높습니다.

 이를테면, 슈타이켄이 바라보는 사진과 사진길과 사진쟁이와 사진누리 들을 날카롭게 잡아채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슈타이켄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이렇게 말했다’ 하는 마주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 몹시 아쉽습니다. ‘슈타이켄은 사진쟁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이와 같이 말했다’ 하는 마주이야기 또한 나타나지 않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스티글리츠의 ‘사진 분리파’가 성취하려 했던 것은 ‘사진 작가’에 의한 ‘예술 사진’, ‘예술 사진’을 위한 ‘사진 작가’, 사진작가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사진이었습니다(31쪽).” 하는 이야기처럼, 슈타이켄 이야기보다 스티글리츠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이 차지합니다. 이런 마주이야기라면 아흔네 살까지 잘 살았다는 안부인사가 아니라, 슈타이켄 어린 나날 이야기를 여쭙고, 어린 나날 어떠한 터전에서 무엇을 누리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마음을 살찌웠는가 귀기울여 들으며, 사진과 삶과 문화와 사람을 슈타이켄 님 나름대로 어떻게 배우며 받아들였는가를 아로새겨 주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마주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최봉림 님은 굳이 슈타이켄 님 입을 빌어 “만족했지요. 돈, 명예, 그리고 권력은 언제나 내 편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은 사진가’는 아니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진가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을 겁니다(103쪽).” 하는 말을 끄집어 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끄집어 내면서도 책을 통틀어 ‘왜 슈타이켄이 온누리에서 널리 우러르는 사진쟁이’인가 하는 이야기를 한 번도 끄집어 내지 못했습니다. 128쪽짜리 책에서 103쪽까지 이루어진 마주이야기 내내 ‘슈타이켄이 이룬 열매’와 ‘슈타이켄 발자취와 이 발자취 비평’을 이야기하는 데에 쏠립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마주이야기를 이토록 따분하게 엮으면서 온갖 지식과 정보만을 담으려 한다면, 차라리 마주이야기가 아닌 ‘슈타이켄 사진론 비평’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식으로 사진비평책을 낼 노릇이라고. 평전을 쓰든 비평책을 내든 ‘주관이 아닌 객관’이라는 자리에 튼튼히 서면서 더욱 낱낱이 따지거나 파헤치는 비평책을 써야 한다고. 슈타이켄 님이 일군 사진을 1부에 넣고 슈타이켄 님이 빚은 사진잔치를 2부에 넣으며 슈타이켄 님이 가르친 사진쟁이 이야기를 3부에 넣은 다음 슈타이켄 님과 스티글리츠 님이 맺은 사진삶을 4부에 넣으면서 5부에 이르러 ‘슈타이켄 종합 비평’을 하는 정식 이론책을 내놓아야 비로소 읽을 만한 사진책 하나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라는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국도 밥도 죽도 아닙니다. 게다가 책이름에 적바림한 “성공신화의 셔터”라는 이야기조차 풀어내지 못합니다. 왜,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성공하여 신화를 이루었는지’ 밝히지 못합니다. (4343.10.26.불.ㅎㄲㅅㄱ)


-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 (최봉림 글,디자인하우스,2000.6.15./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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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밥 하는 마음


 내 어머니를 뵈러 찾아가든, 옆지기 어머님을 뵈러 찾아가든, 언제나 밥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가 두 어머니한테 밥 대접을 해 드리고 싶으나 좀처럼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힘듭니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란 뒤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 딸아이가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다면 나와 옆지기는 쉰을 넘고 예순을 넘겠지요. 이때에 딸아이가 밥을 차려 주겠다 할 때에 나나 옆지기는 어떻게 마주할까 궁금합니다. 가만히 앉아 넙죽 받아먹기만 하려나요.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두 할머니가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 뒤까지 튼튼히 살아가신다 하면 어떻게 하실는지 궁금합니다. 나이를 많이 자셨으니 조용히 밥상을 받으실는지, 나이가 많으신데에도 어찌 귀여운 손녀한테 밥상을 받느냐며 당신이 차리실는지요.

 두 어머니는 두 아이한테 늘 새로 한 밥을 차리고 새로 한 반찬을 내놓습니다. 해 놓은 밥이건 식은 밥이건 도무지 내놓지 않습니다. 먹던 반찬 또한 되도록 내놓지 않습니다. 그냥 손쉽게 주셔도 되건만, 또는 우리가 알아서 차리면 되는데, 두 어머니는 당신 몸을 움직이고 당신 손을 놀립니다.

 아침마다 아이가 먹을 새밥을 합니다. 아침에 몸이 몹시 고단하여 새밥을 못한다면 낮이나 저녁에 새밥을 합니다. 하루에 한 번만 새밥을 합니다. 두 번 새밥을 하고 싶으나 아이가 아직 밥을 조금만 먹기에 밥을 두 번 하기 힘듭니다. 나중에 씩씩하게 커서 밥을 꽤 먹는다면, 아이랑 아빠가 먹을 밥을 하루에 두 번 할 날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여느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 되면 아이가 잘 안 먹어 밥이 조금 남기 일쑤입니다. 이 밥은 고스란히 이듬날로 넘어갑니다. 아이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밥상에 이 밥을 그대로 놓습니다. 이듬날이 됩니다. 새밥을 합니다. 새밥 냄새가 구수합니다(아이한테도 구수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구수하다고 느껴 주기를 빌지만 참말 모를 일입니다). 아이 밥그릇에 있던 헌밥은 아빠 밥그릇으로 옮깁니다. 아이 밥그릇은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은 다음 새밥을 담습니다. 이러면서 떠올립니다. 아하, 두 어머니가 당신 두 아이한테 새밥을 굳이 차리는 마음이란 내가 내 아이한테 노상 새밥을 해서 가장 먼저 떠서 주는 마음이랑 똑같다고. 책을 새로 써낼 때 서양사람은 으레 당신 아이라든지 옆지기라든지 어머니한테 바친다는 말을 거의 빠짐없이 적어 놓는데, 이 마음도 새밥 하는 마음이랑 고스란히 이어지겠다고.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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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와 글쓰기


 옆지기 어머님이 전화를 했다. 오늘 갑자기 바람 몹시 불며 날이 썰렁해졌는데 우리 식구들 시골집에서 잘 지내느냐고 물으신다. 어머님 지내시는 집은 들판이라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 트인 들판이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우리 시골집보다 훨씬 춥다고 느끼리라 생각한다. 아이 엄마랑 아이는 일찌감치 곯아떨어져서 내가 전화를 받으며 고맙다고 말씀드린다. 전화를 받는 내내, 또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곱씹는다. 제대로 따진다면, 날씨가 이렇게 갑작스레 추워질 때에는 아들(이나 사위) 되는 사람이 먼저 ‘잘 지내시느냐?’ 하는 인사를 두 어머니한테 따로따로 전화로 여쭈어야 할 노릇이 아니었는가. 돌이켜보면, 날씨를 여쭙는 인사이든 살림을 여쭙는 인사이든 제대로 챙긴 적이 없지 않느냐 싶다. 집식구한테 알뜰히 한다고 느끼지 못하지만, 집식구한테뿐 아니라 바깥식구한테조차 살뜰히 못한다고 느낀다.

 부끄러우니까 글을 끄적인다. 두 시간쯤 앞서 곯아떨어진 집식구와 마찬가지로 나도 일찍 곯아떨어지고 싶으나, 홀가분한 저녁때에 글 한 줄이나마 적바림하고 싶어 아직 잠을 미룬다. 그러나 정작 홀가분한 저녁때를 맞이하니 글이 나오지 않는다. 불을 켤 수 없어 책을 읽지도 못한다. 억지로 볼펜을 쥔들 셈틀을 켠들 글을 쥐어짤 수 있겠나. 아이가 기저귀에 오줌을 눈 듯하다. 아이 기저귀를 갈고 나도 드러누워야겠다.

 아이 기저귀를 갈았다. 기저귀를 갈며 다리 쭉쭉이를 하니 아이 키가 또 제법 자란 듯 싶다. 날마다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조금씩 키가 자란다고 느끼기는 하는데, 이렇게 쭉쭉이를 해 보면 훨씬 잘 느낄 수 있다. 오늘 낮과 저녁, 아이가 졸음에 겨워 일부러 짓궂게(아이는 짓궂은 줄을 모르리라) 아빠 책을 마구 끄집어 내며 어지럽힐 때에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하니 “그러며 아 대지.” 하고 따라한다. “제자리에 꽂아 놔.” 하고 말하면 “지자리에 꼬아 나.” 하고 따라한다. 아, 이렇게 쏙쏙 받아먹는 아이를 어떻게 꾸짖을 수 있으랴. 이처럼 하나하나 제 엄마 아빠를 배우며 크고자 하는 아이 앞에서 어찌 이맛살을 찌푸릴 수 있으랴. 더 느긋하게 살아가며 더 차분하게 책을 사귀고 더 조용히 글을 쓰는 가운데 더 착하게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고 다짐한다.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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