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집 골목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마다 똑같이 피고 지는 일이란 없다. 올 오월에는 이 꽃을 보았다면 다음 2011년 오월에는 어떤 꽃을 마주할 수 있을까.

- 2010.5.7. 인천 중구 율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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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 연구 파랑새 그림책 69
이자와 마사코 지음, 히라이데 마모루 그림, 이예린 옮김 / 파랑새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고양이 삶을 들여다보면 즐겁다
 [즐기는 그림책 24] 이자와 마사코·히라이데 마모루, 《도둑고양이 연구》(파랑새,2008)



 아이가 어릴 적부터 “돼지야.” 하고 불렀습니다. 이제 아이는 아빠가 “벼리는 돼지지.” 하면 “대지지.” 하고 따라합니다. ‘돼지’가 무엇이고, 돼지라 일컬을 때에는 무슨 뜻인지는 읽지 못하지만, 소리를 고스란히 따라합니다(아직 ‘돼·지’라고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커서 저를 가리켜 돼지라 말한 줄 안다면, 아이는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아마,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당신은 돼지야.” 하고 말할 때에 나는 어떤 느낌일까 하고 헤아린다면 아이 마음을 살필 수 있는지 모릅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 나를 두고 “넌 돼지네.” 하고 말한다면 어떠한 느낌일는지. 돼지, 돼지, 돼지. 음, 돼지를 키우거나 곁에서 지켜본 분이라면 알 텐데, 돼지는 참 귀엽습니다. 착하고 어여쁩니다. 심술돼지 아닌 사랑돼지라고 할까요. 어쩐지 돼지라는 이름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돼지라는 짐승이름은 놀림말로 흔히 썼어요. 밥을 많이 먹어도 돼지, 뭘 잘 못해도 돼지, 굼뜬다 할 때에도 돼지 ……, 그야말로 돼지는 못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씨처럼 자리잡은 우리 나라입니다. 이런 흐름이니까 제가 아이를 보며 “요 돼지야!” 할 때에 둘레 사람들이 “아니, 그렇게 예쁜 아이한테 돼지가 뭐예요?” 하고 물을밖에 없습니다.

 그림책 《도둑고양이 연구》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은 꽤 사랑받은 작품이지만 출판사에서 더는 안 찍습니다. 왜 안 찍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다시 내준다면 책이름은 고쳐 주면 좋겠습니다. 일본사람 이자와 마사코 님과 히라이데 마모루 님이 이 책을 1991년에 내놓으며 붙인 이름은 “Let's Follow And Observe A Town Cat!”입니다. 일본사람은 이 그림책에 ‘A Town Cat’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도둑고양이’가 아닌 ‘도시고양이’ 또는 ‘동네고양이’ 또는 ‘마을고양이’ 또는 ‘시골고양이’인 셈입니다.

 그림책 무대를 살피면 자그마한 도시인데 논이 함께 있습니다. 아마 큰도시는 아닐 테며 작은도시조차 아닐 수 있어요. 우리로 치면 읍내이거나 면내에서 고양이를 살핀다 할 만해요. 그러니까 영어로 하자면 ‘A Town Cat’일지라도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시골고양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고친다면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가 가장 어울릴 테고, 이 가운데에서는 ‘골목고양이’가 한결 어울립니다. 그저 길을 다니는 고양이가 아니라,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고양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을 내놓은 분은 “여러분은 아프리카 초원이나 아마존 정글에 가야만 동물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동물들만 잘 관찰해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연구할 수도 있어요(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이 그림책은 고양이를 찬찬히 살피는 분이 하루 동안 고양이 삶이 어떠한가를 돌아본 이야기를 담습니다. 골목개를 꼼꼼히 살펴도 이와 같은 그림책을 엮을 수 있으며, 하루살이를 하루 내내 살펴도 이처럼 그림책을 엮을 수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하루 동안 어찌 지내는가를 살펴도 이러한 그림책을 엮을 수 있습니다.

 문득, 열여섯 해 앞서 일이 떠오릅니다. 인천을 처음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던 때에 동무 하나가 자취방에서 지내는데, 이 녀석 집에 ‘도둑고양이’가 드나들며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동무녀석도, 또다른 동무들도, 저도 으레 ‘도둑고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쩍 마른 가난한 자취생 집에서 ‘얼마 안 되는 밥’을 얻어먹으니까 이렇게들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고양이를 보며 ‘동네고양이’라거나 ‘길고양이’라거나 ‘골목고양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고양이 눈높이가 아닌 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보았으니까요. 늘 고양이 눈썰미가 아닌 사람 눈썰미에서 살폈으니까요. 노상 고양이 삶이 아닌 사람 삶에서 곱씹었으니까요.

 《도둑고양이 연구》를 내놓은 분은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나오스케는 계속 자고 있습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데……. 드디어 나오스케가 일어났어요. 커다란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나도 나오스케를 따라나섭니다(21쪽).” 하고 이야기를 잇습니다. 글쓴이(와 그린이)는 고양이가 얌전히 잠들어 있을 때에는 가까운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기다립니다. 고양이가 부시시 일어나 천천히 거닐면 고양이를 좇아 부시시 일어나 한들한들 거닙니다.

 고양이가 밥을 먹으면 지켜보는 사람도 밥을 먹고 싶으나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고양이를 지켜봐야 하니까요. 고양이가 다시 잠들어 준다면 비로소 밥을 먹겠지요. 그러나 고양이는 좀처럼 잠들어 주지 않습니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겨우 잠들어 줍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납니다. 깊은 밤 깨어나 다시금 동네마실을 합니다.

 “나오스케는 논 쪽으로 걸어갑니다. 가다가 뭔가를 보았는지 때때로 냄새를 맡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고양이처럼 밤에도 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빛이 거의 없는 밤, 좁다란 논둑길을 걸을 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미끄러질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조용한 밤길이 기분 좋네요(33쪽).” 하고 말하는 글쓴이(와 그린이)입니다. 아무래도 글쓴이(와 그린이)가 살펴본 고양이는 도시 한복판 길고양이가 아닌 작은 시골마을 길고양이었기 때문이라 할 텐데, 깊은 밤에 논둑길을 거니는 고양이를 따라 논둑길을 거닐면 참 싱그럽고 시원합니다. 깊은 밤 달빛에 기대어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아무 불빛이 없고 어떤 소리도 없는 밤나절 달빛 옆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을 느끼며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도시에서는 너무 힘들겠지요. 도시에서는 꿈조차 못 꾸겠지요. 그래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 또한 달빛이랑 별빛을 못 느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달빛이랑 별빛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한결 애틋하며 포근하고 너그러운 나날이라 한다면, 이러한 도시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골목고양이들 삶 또한 더욱 애틋하며 포근하고 너그러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마주하는 비둘기를 놓고 으레 ‘닭둘기’라 하지요? 그런데, 이들 닭둘기는 스스로 좋아 닭둘기가 되었겠습니까. 메마르고 팍팍한 도시에서 살아남자면 어찌할 수 없어요. 평화이니 사랑이니 떠벌이며 수십 수백 마리를 잔뜩 풀어 주어 공원 하늘을 가득 채우도록 하면서 손뼉칠 때는 언제고, 도시에 무슨 애벌레가 있고 풀씨가 있으며 열매가 있다고, 이 비둘기들이 살아가겠습니까. 비둘기도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낳고 싶습니다. 비둘기도 어디에서든 오순도순 조용히 살아가고 싶어요. 도시라는 곳은, 그리고 큰도시라는 곳은, 비둘기이든 고양이이든 느긋하며 포근히 지내기 어렵습니다. 이와 함께 사람들 누구나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고 힘차게 머물기 힘듭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도시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를 보면서, 또 시골에서도 흔히 ‘들고양이’이든 ‘길고양이’이든 ‘고샅고양이’이든 ‘골목고양이’이든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도둑고양이’라 말해 버리는구나 싶어요. 사람들 스스로 내 이웃 등살을 울궈먹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도시이잖아요. 사람들부터 내 동무 등짝을 후려치며 밟고 올라서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든 한국땅이잖아요.

 고양이는 흙을 좋아합니다. 흙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똥을 눌 때에 땅을 파고 눈 다음 흙으로 덮어야 합니다. 고양이는 풀을 좋아합니다. 풀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잠을 잘 때에 부드러우며 따사로운 풀숲에 음전히 누워 새근새근 잠듭니다.

 사람은 흙이나 풀을 안 좋아하기 일쑤이고, 생각조차 안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 흙이랑 풀이랑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흙이랑 풀이랑 없을 때에 살아남을 사람이란 없습니다.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며 ‘가짜 흙’을 마련하여 똥오줌을 누이고 ‘퓰처럼 느낄 폭신한 잠자리’를 마련하여 쓰다듬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들 사람 삶이란 ‘참말 있어야’ 할 무언가를 마련하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하면서 ‘거짓으로 만든’ 무언가에 휩싸인 채 목숨만 잇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자와 마사코 님하고 히라이데 마모루 님은 고양이 한 마리를 하루 내내 들여다보면서 즐거움을 듬뿍 느낍니다. 이분들이 고양이 삶이 아닌 사람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보았다면 무엇을 느낄는지 궁금합니다. 연봉 1억을 받는다는 사람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본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국회의원님이나 선생님이나 군수님 하루 삶을 들여다볼 때에 무슨 재미가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4343.10.25.달.ㅎㄲㅅㄱ)


― 도둑고양이 연구 (이자와 마사코 글,히라이데 마모루 그림,파랑새 펴냄,2008.2.2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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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한테 책 읽히기 2


 아이한테 책을 읽힙니다. 책을 읽어 주다가 그만 숨이 막힙니다. 글 몇 줄이 고작인 그림책에 적힌 글월이 하나같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어쩜 이 한두 줄조차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마구 써갈기는지 궁금합니다. 창작이든 번역이든 골이 아픕니다. 낱말 하나 이렇게 못 고르는지 슬픕니다. 말투 하나 이렇게 못 가다듬는지 괴롭습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히며 책에 적힌 글이 아닌 다른 글을 읽습니다. 책에 적힌 글을 그때그때 다듬거나 고쳐서 새로 읽습니다. 엉터리 말투는 바로잡고 얄궂은 낱말은 손질해서 읽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마저도 고달파 아예 글은 집어치웁니다. 그림만 놓고 새 이야기를 짜서 들려줍니다. 이럴 바에는 한글로 된 그림책이 아닌 외국말로 된 그림책을 읽힐 때가 차라리 낫습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히다가 한숨이 푹푹 나옵니다. 아이한테 읽힐 만한 괜찮다 싶은 그림책은 하나같이 ‘나라밖 좋은 그림책 번역’이기 일쑤입니다. ‘나라안 좋은 그림책 창작’은 몇 가지 손꼽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무슨무슨 모임에서 손꼽는 괜찮다 싶은 책일지라도 그림결이라든지 줄거리라든지 말마디라든지 티와 모자람과 아쉬움이 자꾸자꾸 보입니다. 나라밖 좋은 그림책처럼 부드러우면서 따사로운 얼과 넉넉하면서 사랑스러운 넋을 나라안 창작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혀야 할까 망설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아이한테 책을 읽히기 어렵지 않나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문득, 아이 엄마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야말로 아이한테는 좋은 ‘책 읽히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골로 옮겨서 지내는 살림집은 씻는방이 너무 작아 아이랑 함께 들어가서 빨래를 하지 못합니다. 조금 넉넉하게 크다면 아빠가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는 곁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빨래하기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인천 골목동네 살림집에서 지낼 때에는 씻는방이 꽤 넓어 아이는 언제나 아빠 곁에서 빨래하기를 보고 배우며 물놀이를 즐겼습니다.

 아이는 아빠하고 엄마랑 헌책방마실을 함께하면서 책읽기를 스스로 익히고, 아빠하고 엄마랑 골목마실을 함께하면서 사진찍기를 저절로 배웁니다. 집에서 빗자루와 걸레로 쓸고닦는 동안 아이는 빗자루와 걸레로 쓸고닦기를 익힙니다. 집에서 엄마하고 아빠랑 밥을 하면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며 배우고 싶어 합니다.

 아이한테는 책을 읽힌다기보다 삶을 읽힌다고 느낍니다. 아이를 처음 낳을 때부터 아이가 스물일곱 달을 지나는 요즈막까지, 아이한테는 ‘책 읽히기’가 아닌 ‘삶 읽히기’라고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인 저로서는 ‘책읽기’가 아닌 ‘삶읽기’라고 느낍니다. 삶이 있어야 죽이든 밥이든 있습니다.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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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한테 책 읽히기 1


 아버지나 어머니가 저한테 책을 읽어 준 일은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그러나 모르는 노릇입니다. 제가 떠올리지 못할 뿐, 제 나이 두어 살이나 서너 살 적에 그림책이든 글책이든 알뜰히 읽어 주셨을 수 있어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책을 넉넉히 사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고작 전집책 몇 가지 사 주셨을 텐데, 얘기를 들어 보면, 그나마 싸구려 전집책 한두 질조차 사 주지 못한 집이 많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였으니 그무렵 이만큼이나마 있던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무렵 교사 가운데 집에 책 없는 사람이 꽤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원수 님 동시책이나 동화책 하나 없던 일이란, 이제 와 돌이키면 참 슬픈 일입니다. 배부른 소리일 수 있겠는데.

 요즘은 참말 책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알짜가 될 만한 책’까지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찌 되었든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좋든 나쁘든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책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책에는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담겼을까요.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 어른인 우리가 읽을 만한 책에는 어떤 줄거리가 담겼을까요.

 책읽기를 좋아하는 저입니다만, 책보다 더 즐거워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저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살면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같은 이야기가 더 반갑고 재미있으며 신납니다.

 그래, 저는 사람들과 만나 ‘책 이야기’ 나누는 일이 즐거운 한편, ‘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눌 때 아주 즐겁습니다. 저는 아직 아이를 낳아서 기르지는 않고 있는데, 제가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면, 또 제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다면, ‘책 읽어 주기’는 가끔 하거나 아예 안 하고 싶으며, 제가 살아온 이야기하고 제가 아이들 나이였을 때 무엇을 하면서 놀고 배우며 동무를 사귀어 이 땅을 부대겼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2006.8.1.불.처음 씀/2010.10.25.달.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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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히기 2


 책을 좋아합니다. 책을 즐겨읽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라고는 할 수 없으나, 조용히 신문배달 일꾼으로 살아가려 했으나 책 만드는 일꾼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함께 신문배달 일꾼으로 살아가는 형들이 지나치게 게을러터져 도무지 함께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일으키는 배달사고 전화를 받다가 지치고, 새벽에 깨우고 깨워도 안 일어나는 형들을 깨우다가 지쳤습니다. 때마침 제가 돌리는 신문에 실리는 글이 자꾸 어그러지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나는 기자가 아닌 신문배달 일꾼일 뿐인데 신문값 거두러 달마다 집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독자들은 기자가 아닌 배달 일꾼한테 된소리 쓴소리 막소리를 퍼붓습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난 그저 이 신문을 돌리는 삼천 일꾼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따져야 한다면 이 따위 글을 갈겨써서 신문에 버젓이 찍어 내놓은 기자들한테 전화를 걸어 따져야지.

 돌이켜보면 내 어버이 사는 집에서 뛰쳐나왔기에 신문배달 일꾼이 되었습니다. 신문배달 일꾼으로 함께 지내던 형들이 더없이 게으르게 살아갔기에 이 자리에서 뛰쳐나와 책마을 일꾼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와 같이 살아온 내 이야기를 책삶으로 이어 이야기 한 자락 쓰는 사람으로 지냅니다.

 책만 읽다가 책을 만들다가 책으로 엮일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책만 읽을 때에는 다 만들어진 책에 실린 그대로 읽습니다. 책을 만들 때에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읽혀야 할까를 헤아리며 낱말 하나 토씨 하나 매만집니다. 책으로 엮을 글을 쓸 때에는 내가 털어놓아야 할 내 삶이 무엇인가를 차분히 되새깁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없으나, 누구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모든 글이 책으로 태어나지 않으나, 모든 글은 책으로 태어날 만합니다. 책읽기에서 책만들기를 거쳐 책쓰기로 오는 동안, 일기쓰기가 왜 뜻있고 값있는가를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일기를 안 쓰면 담임교사가 흠씬 두들겨패며 꾸짖다가는 윽박지르니까 억지로 칸을 채웠어요. 일기를 쓰는 맛과 멋은커녕 재미조차 없던 여섯 해였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달리 돌아보곤 합니다. 억지로 써야 하는 글을 써 보았기에, 내 이웃이나 내 벗이나 내 뒷사람한테 ‘글을 억지로 쓰지 마셔요. 힘들고 따분해요.’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죽은 듯이 밟혀 지냈기 때문에 젊거나 어린 사내들한테 ‘군대라는 곳에 일부러 가지 마셔요. 우리는 군대가 아닌 평화를 찾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저 책읽기가 좋던 때에는 좋은 책을 사람들이 널리 많이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때에는 좋은 책이라면 잘 팔리는 책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높은 등수에 드는 책이라면 좋은 책이 될 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책만들기를 하면서 잘 팔리는 책이 한결같이 좋은 책이 아니라고 깨닫고, 때로는 잘 팔리는 책 모두 좋은 책하고는 동떨어지기까지 한다고 깨닫습니다. 책한테 매기는 등수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사람한테 등수를 매길 수 없듯 책한테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학교한테든 나라한테든 겨레한테든 짐승한테든 등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책쓰기를 하는 자리까지 오면서, ‘좋은 책 = 잘 팔리는 책’이란 생각은 싹 집어치울 뿐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니 나도 참 철딱서니없는 바보였다고 깨닫습니다. 한 사람이 읽는 책 하나만큼 소담스러운 책이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쓰는 책이고 만드는 책이며 읽는 책입니다.

 책 한 권 변변하게 읽지 않는 우리 어머니가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책 한 권 마땅하게 읽지 못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그지없이 곧바릅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겨를 없는 동네 농사꾼 할배가 가없이 훌륭합니다. 책 많이 읽는 저보다 한결 곧바르며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100만 번을 살았지만 몸소 겪은 일이란 없습니다. 그저 100만 번을 살았을 뿐입니다. 드디어 100만 번째로 살 무렵에 처음으로 ‘한 가지 일을 겪’습니다.

 이 고양이한테는 백만째 삶에 이르러야 ‘삶을 겪’는, 그러니까 ‘삶을 품에 안’는, ‘삶을 껴안’는 셈입니다. 책을 만 권 읽든 십만 권 읽든 백만 권 읽든 삶을 겪지 못한다면, 삶으로 품에 안지 않는다면, 삶으로 껴안지 않는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100만 번 산 고양이》하고 똑같아요. 100만 번을 살아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100만 권째 책을 읽어도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슬픈가요.

 우리는 책만 읽고 살 수는 없습니다. 책을 먹으며 살 수도 없습니다. 일을 하고 놀이를 하며 삶을 꾸리는 사람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책도 읽습니다. 일을 하고 놀이를 하며 삶을 꾸리는 가운데 사랑을 나누고 사람을 사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갈무리하며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이부자리를 개고 빨래를 하며 아이를 낳고 돌보며 하루하루 삶을 꾸립니다. 이처럼 삶을 꾸리는 가운데 책이 있고 노래가 있으며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책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도 사람살이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리들이 일구는 삶처럼 책답고 연속극다운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는가요. 우리들이 겪고 부대끼며 부딪히는 온갖 이야기와 일이 바로 ‘책’이 된답니다. 책에 담는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이랍니다.

 재미와 즐거움, 슬픔과 아픔, 앎과 슬기란 어디 먼 나라가 아닌 가장 가까운 내 삶에서 비롯합니다. 바로 이 삶에서 책이 나옵니다. 삶 없는 책은 없습니다. 아니, 요새는 삶 없는 책이 많더군요. 삶 없이 돈만 있는 책이 참말 많아요.

 책 없는 삶은 있습니다. 노래 없는 삶도 있고, 사진이든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없는 삶 또한 있어요. 삶이 있기에 책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있습니다. 삶에서 비롯하는 모든 문화요 예술이며 교육이고 정치랑 사회랑 경제입니다.

 들판에 목숨이 있습니다. 숲속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하늘에 구름이 흐릅니다. 깊은 밤에 달과 별이 있습니다. 한낮에 해맑고 따사로운 햇살이 있습니다.

 저는 헌책방을 자주 다니며 책을 만납니다. 헌책방을 바지런히 다니며 책을 꽤 많이 만나는데, 책만 만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헌책방 일꾼도 만나고 헌책방을 찾는 다른 책손도 만납니다. 헌책방 가는 길에 숱한 사람과 부대낍니다.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책을 펼칠 때에 이 책하고 얽힌 갖가지 이야기하고 만납니다. 오랜 나날 묵은 책을 들추며 오랜 나날에 걸쳐 어떤 삶이 이 책 하나에 녹아들었는가를 되새깁니다.

 책도 책이지만 책한테만 박히기보다 책 안팎을 오가며 사람 삶을 느끼고 나 스스로 꾸릴 삶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책을 읽히기보다 삶을 읽히고 싶습니다. 내 고마운 벗님한테랑, 또 내 사랑스러운 살붙이한테랑, 좋다고 하는 책을 읽혀도 나쁘지는 않다지만, 좋다고 할 만한 삶을 읽히며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책이란, 알뜰히 잘 끓인 국에 한 방울 똑 떨어뜨리는 ‘생협 유기농’ 참기름입니다. (2003.10.20.처음 씀/2010.10.25.달.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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