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집 들어서는 섬돌마다 칸칸이 놓인 꽃그릇에는 봄부터 겨울까지 온갖 꽃이나 푸성귀가 자랍니다. 배추가 다 자라서 뽑은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늦가을 국화 한 포기 심으며 한 해 갈무리를 하실 테지요. 

- 2010.10.7. 인천 중구 송월동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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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58
한스 피셔 지음, 유혜자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 아빠로서 그림책 읽기
 [즐기는 그림책 15] 한스 피셔, 《피치》(시공사,1996)



 아이 엄마랑 아이 아빠가 보는 그림책은 같지 않습니다. 아이 엄마랑 아이 아빠가 같은 그림책을 보더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나 마음은 다릅니다. 서로서로 참 좋다고 느끼는 그림책이 있고, 한 사람만 좋다고 여기는 그림책이 있으며, 서로 내키지 않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아이 아빠 된 사람으로서 아이 엄마보다 그림책을 더 잘 읽어 내거나 받아들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 아빠는 여러 가지 이론책을 읽었고,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이 아빠가 아이 엄마보다 그림책에 깃든 넋이나 땀을 한결 잘 알아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지식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라면 아이 아빠가 할 말이 있겠지요. 그러나 지식이 아닌 삶을 보여주는 그림책이 되거나 사랑을 나누는 그림책이 된다든지 믿음을 펼치는 그림책이라 한다면 사뭇 다릅니다. 아이 아빠는 아이 엄마한테 여러모로 배워야 합니다. 아이 아빠는 지식을 내려놓고 마음을 보듬어야 합니다. 비평이든 평론이든 곱다시 내려놓고 웃음과 눈물을 살며시 얼싸안아야 합니다.

 그나마 저는 집에서 몇 가지 집일을 꽤 하고 있어 여느 아이 아빠보다는 그림책을 조금 더 깊이 읽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그나마 거의 모든 아이 아빠들은 집일을 할 겨를이 없을 뿐더러, 집에서 느긋하게 오래도록 지낼 만할 때에도 집일을 잘 거들지 못합니다. 아이하고 놀아 주기는 할 테지만 ‘놀아 준다’뿐이지 아이하고 ‘함께 살며 놀지’는 못해요.

 그림책이든 어린이책이든 초등학교 교과서이든 으레 학자들이 쓰고 엮습니다. 집일을 하지 않거나 집일하고는 울을 쌓는 남자 학자들이 흔히 쓰고 엮습니다. 집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아마 거의 여자일 테지요)는 글을 쓸 틈이 아주 적으며 가까스로 글을 쓴다 하더라도 책으로 내주려는 곳이 몹시 드뭅니다. 정작 그림책을 아이랑 함께 읽는 사람은 ‘여자 어른(어머니)’이기 일쑤이지만, 아이랑 그림책을 같이 읽으며 살아가는 어머니 눈높이에서 ‘그림책 이야기 이론’을 들려주는 학자는 몇 안 된다고 느낍니다. 어머니는 이론도 모르고 추천도서도 모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가르치려고 들 뿐입니다.

 그림책 《피치》를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헌책방 일꾼은 이 그림책 값을 셈하며 “꾸준히 들어오면서 금세 팔리는 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앙증맞은 그림이 좋으며 수수한 이야기가 사랑스럽다고 말씀합니다. 저 또한 이 그림책 《피치》에 나오는 어린 고양이 삶이 애틋하다고 느낍니다. 구불구불한 그림결이 썩 괜찮고, 애써 꾸미려 들지 않는 그림투가 살갑습니다. 나라밖에서는 이와 같은 그림책을 알뜰히 그려내는구나 싶어 놀랍습니다. 그림결이나 그림투도 남다르다 할 만하지만, 수수한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빚는 솜씨하고 손길이 한결 반갑습니다. 온누리에 널리 사랑받는 그림책이라든지 세계명작으로 손꼽히는 그림책은 하나같이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니, 그림책만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가 명작으로 손꼽히지 않아요. 시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매한가지예요. 영화이든 연극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똑똑한 머리로 멋지게 지어낸 작품 가운데에도 훌륭하다 싶은 작품이 틀림없이 있는데, 똑똑하지 않은 머리일지라도 따스하며 넉넉한 가슴으로 빚은 작품은 거의 어김없이 착하고 참되며 곱습니다.


.. 피치는 잔뜩 겁에 질려서 더는 울지도 못하고 발발 떨고 있을 뿐이었어. 리제테 할머니는 피치를 안아서 집으로 데려갔어. 물기도 깨끗이 닦아 주고, 따뜻한 담요로 폭 싸 주었고. 그러고 나서 피치에게 우유병을 물려 주었어. 피치는 우유를 빨아먹었지! 리제테 할머니는 몹시 흐뭇해 했어 ..  (22∼23쪽)


 그림책 《피치》를 보며, 가녀린 고양이 한 마리를 비롯해 숱한 짐승을 아끼며 사랑하는 할머니 삶자락이 참 예쁘다고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오래도록 한식구로 여기며 살아가는 개가 고양이들을 괴롭히거나 해코지하지 않으며 알뜰히 돌보는 모습이 새삼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참말 좋은 할머니가 참말 좋은 삶을 일구며 참말 좋은 꿈을 나눈다고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제법 많은 나이인데에도 홀로 농사를 짓고 손수 밥을 하며 스스로 집안을 쓸거나 닦거나 치우며 살아갑니다. 무슨 일이든 몸소 하셔요.

 아마 이 할머니가 시골집이 아닌 도시집에서 살아가는 분이었다면 퍽 많은 나이인데에도 온갖 일을 즐겁게 알뜰히 하지는 못하지 않았으랴 싶어요. 어쩌면 도시에서 가난하고 수수한 사람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신다면 집 안팎을 온통 꽃잔치로 가꾸면서 크고작은 텃밭을 알뜰살뜰 일구기도 하셨겠지요.

 그러니까, 그림책 《피치》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라든지 씩씩한 여러 짐승들은 바로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면서 곱고 착한 기운을 받습니다. 할머니가 온몸으로 삭이며 살아온 이야기가 뭇 짐승 매무새에 살포시 깃들었어요.


.. (개) 벨로가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들어왔어. 예쁘게 장식된 생크림 케이크였지. 피치는 등에 쿠션을 받치고 의자에 앉았어. 여전히 특별 대우를 받은 거야. 피치는 리제테 할머니를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어. “정말 좋은 분이야! 다시는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고양이들이 식탁에 앉아 있는 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  (31쪽)


 그러나 이 그림책을 읽으며 아쉽다고 느낀 대목이 있습니다. 왜 ‘피치’라는 어린 고양이는 다른 짐승들 모양을 좇으려고만 했을까요. 왜 피치라는 어린 고양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 고양이는 피치를 고양이답게 사랑하며 돌보지 않았을까요.

 그림책 첫머리에는 “언제나 다른 것이 되고 싶어하는 고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피치는 수탉이 되고 싶어 하고 영양이 되고 싶어 하다가는 오리가 되고 싶어 하면서 물에 빠져 흠뻑 젖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무언가로 되고 싶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느끼기로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프다는 삶이라기보다는 ‘피치다운 피치가 되는 길’을 모르는 삶이 아닌가 싶어요. 고양이로서 즐겁게 꾸리는 삶을 모르고, 고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어린이로서 신나게 일구는 삶을 모른다고 할까요. 퍽 철부지로 까불다가 큰코 다친다고 할까요.

 이런 철부지 고양이 피치인데 리제테 할머니는 ‘어린 고양이이니까 철부지일밖에 없겠지’ 하고 받아들입니다. 어린 고양이인데다가 아직 철부지이니까 더 사랑해 주고 한결 아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부대끼며 살림을 꾸리는 아이 아빠로서 생각합니다. 살림돈도 벌고 집살림도 꾸리며(참 어설피 꾸립니다) 아이랑 옆지기랑 사랑하며 살아가기란 몹시 만만하지 않다고. 이 땅에서 어머니라는 자리에 서서 살아온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며 거룩한가를 새삼 느끼겠다고.

 아버지들은 돈도 벌고 살림도 꾸리며 아이도 알뜰히 사랑하는 길을 잘 못 걷습니다. 어머니들은 돈은 돈대로 벌며 살림은 살림대로 꾸리는 가운데 아이는 아이대로 알뜰히 사랑하는 길을 퍽 힘들어 하면서도 슬기롭게 걷곤 합니다. 아이가 아무리 말썽을 피운다 하여도 아이는 아직 잘 모르니 ‘어른 눈으로 보기에 말썽을 부린다’ 할 만합니다. 아이 눈으로 헤아린다면 말썽이 아닌 ‘아이 삶’입니다. 아이는 어른 눈으로는 말썽처럼 보이는 짓을 하면서 하루하루 배우고 크며 튼튼해집니다. 아이한테는 다그침이나 손찌검이나 꾸지람이 밥이 아니에요. 아이한테는 사랑과 믿음이 밥입니다. 그리고 아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사랑과 믿음이 밥입니다.

 한스 피셔 님이 일군 그림책 《피치》는 다른 무엇보다 할머니가 베푸는 고우면서 너르고 따사로운 사랑이 둘레 사람들을 얼마나 즐겁고 기쁘게 보듬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4343.10.20.물.ㅎㄲㅅㄱ)


― 피치 (한스 피셔 글·그림,유혜자 옮김,시공사 펴냄,1996.9.2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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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네이버까페에 오른 글을 읽으며 문득 적어 본다. 책이란 나 스스로 내가 읽고 싶을 때에 내 마음에 와닿을 이야기를 찾아 조용히 다리품을 팔면서 내 주머니 깜냥에 맞추어 장만한 다음 차근차근 되새기는 읽을거리라고 느낀다. 누군가 나한테 책을 사 준다고 해서 한꺼번에 100만 원어치이든 1000만 원어치이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나한테 책을 사 주리라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꿈조차 꾸지 않는다. 아마, 누군가 1000만 원어치 책을 나한테 사 준다 한다면, 이 가운데 200만 원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삯과 잠자는 방 삯으로 치러 주고, 나머지 800만 원으로는 간다 헌책방거리에서 책을 사서 한국으로 돌아오도록 해 달라 이야기할 테지. 그렇지만 이런 일은 이루어지리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난 로또를 생각하지 않는데다가, 로또에 뽑힌들 내가 쓸 일조차 없으리라 느끼니까. 

 문학동네 출판사 깜짝잔치에서는 5만 원을 살짝 넘는 책값으로 헤아리며 책을 사 준다고 한다. 5만 원이라면, 요즈음 책값으로 보았을 때에 거의 돈이라 할 수 없는 돈이다. 지난주에 서울에 볼일 보러 간 김에 혜화동 이음책방에 들러 오윤 전집 세 권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동화책하고 북미 토박이 이야기책 하나를 샀더니 책값이 10만 원이 가볍게 넘었다. 오윤 전집은 판짜임이 썩 내키지 않을 뿐더러 펼쳐 보기 몹시 나쁘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판화쟁이 오윤 님 책이 드디어 전집으로 나왔기에 판짜임은 영 못마땅하더라도 기쁘게 샀다. 왜 오윤 님 책을 이렇게밖에 못 만드는지 슬프지만 한국땅에서는 그나마 오윤 님 책을 내어준 일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내 동무 한 사람이 책 5만 원어치를 내 생일선물로 사 줄 수 있겠지. 그러면 생일선물 5만 원어치 책으로 무엇을 받으면 좋을까? 사진책? 사진책이면 좋으나 사진책 한 권은 으레 7만 원 안팎인데다가 나라밖 사진책은 10만 원을 가볍게 넘긴다. 요새 여느 소설책조차 거의 2만 원 가까이 하기 일쑤이다. 새로 나온 헐먼 멜빌 소설책은 얼마나 비싼 값이 붙었는가. 그러면, 나는 그림책하고 만화책을 골라 볼까. 

나라밖 문학 - 《아와 나오코-손수건 위의 꽃밭》(문학동네,2010) : 9000원
그림책 - 《하세가와 요시후미-오늘도 화났어!》(내인생의책,2010) : 9000원
그림책 - 《주디스 커-친구 거위 찰리》(문학사상사,2003) : 7500원
사진책 - 《김지연-근대화상회》(아카이브북스,2010) : 18000원
만화책 - 《심흥아-우리, 선화》(새만화책,2008) : 8000원

= 51500원

 

 

 

 

 

 

 

 

문학동네 해외소설 추천작품을 하나 고르라 하는데, 나는 추천작품보다는 어린이문학을 고르고 싶다. 어쩌면, 추천작품 아닌 책을 고르면 깜짝잔치에 붙을 일이 없을는지 모른다. 그래도 난 추천작품보다 이 작품이 훨씬 좋다. 아와 나오코 님 문학은 어린이문학 테두리에 들 테지만, 크게 보면 어린이문학이 아닌 그냥 문학이요 그냥 소설이다. 사람들은 어린이문학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하세가와 요시후미 님 그림책 가운데 하나. <내가 라면을 먹을 때>하고 <안돼 삼총사>로 하세가와 요시후미 님 그림책을 만났다. 이제 세 번째 그림책을 만나려고 장바구니에 이 책을 넣었는데, 마침 깜짝잔치를 한다기에 내 목록에 함께 담는다. 부드러우며 따뜻한 가운데 힘찬 그림에 너른 마음결이 살포시 담긴 그림책이라 좋다. 

 

 

 

 

 

 

주디스 커 님 그림책. 우리 둘레 어디에서나 좋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으며 좋은 문학(작품)으로 영글 수 있다. 멀리 나라밖으로 나간다든지 어디 별나라로 가야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문학책 줄거리가 태어나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수수히 일굴 줄 아는 주디스 커 님이 아닌가 생각한다. 

 

 

 

 

 

 

2만 원짜리 사진책. 사진책으로 2만 원이면 몹시 싸다. 시골이나 골목동네 작은 가게 삶자락을 사진으로 차근차근 담은 책. 진작부터 사려고 했으나, 이음책방이나 풀무질 마실을 갔을 때에 이 책을 보지 못한 바람에 아직 사지 못했다. 누군가 선물을 해 준다면 아주 고맙게 받을 사진책 하나이다. 

 

 

 

 

 

 

 

지난주와 지지난주에 서울 홍대 앞 한양문고에 갔을 때에 이 만화를 못 보았다. 그러고 보니 2008년에도 못 보았다. 왜 못 보았을까. 새만화책 출판사 만화는 거의 다 사서 보는데. 성은 봉씨이고 이름은 선화인 아가씨가 살아온 발자국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만화책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자그마한 낱권 하나로 만화를 일구면서 만화밭을 튼튼히 다져야 비로소 참다운 만화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으리라 본다.  

.. 

깜짝잔치에 뽑히면 즐거울 테고, 뽑히지 않아도 나 스스로 내 선물목록을 만들어 보아도 즐겁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적바림했으니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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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하고 옆산을 탄다. 아이를 아빠 품에 안고 산을 탄다. 산을 조금 타니 판판한 길이 나온다. 산길을 걷다가 아이 사진을 한 장 찍으려는데 아이는 언제나처럼 '세 살 브이'를 한다. 저 브이 모양을 어느 동네 언니가 하는 모습을 한 번 본 뒤로 내내 저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넌 산골아이야. 

- 201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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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숩게 껴안을 내 이웃과 벗과 살붙이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2] 《북한동포의 일생》(국제문화사,1987)


 사진책은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책으로 엮인 사진을 따스히 돌아보거나 사진이 묶인 책을 포근히 보듬을 고운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따사로이 감싸며 책은 책대로 넉넉히 헤아릴 맑은 사람을 바랍니다.

 아이는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랑을 담아 따스히 돌보거나 어깨동무할 고마운 어버이를 기다립니다. 믿음을 실어 넉넉히 껴안거나 손잡고 놀 동무를 바랍니다.

 따순 손길은 따순 삶에서 비롯합니다. 입으로 벙긋벙긋한다고 따뜻할 수 있는 삶이나 손길이 아닙니다. 몸으로 부대끼며 따뜻할 삶입니다. 머리에 앎조각을 넣는다고 따스함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가슴에 애틋함을 품어야 비로소 따스한 넋을 북돋웁니다.

 우리 집 아이가 제 아버지하고 더 놀고 싶어 우산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아버지는 바삐 길을 나서야 하는데, 이모저모 짐을 챙긴 다음 집을 나설 무렵 우산을 함께 챙기려 하니 우산을 붙잡고 씨익씨익 웃습니다. 도시처럼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시골인 까닭에,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버스 타는 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가 우산을 갖고 놀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며 부랴부랴 집을 나섭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우산을 갖고 더 놀지 않고 나가 버리니 엉엉 웁니다. 엉엉 울며 우산 가져가라고 제법 멀리까지 좇아 나옵니다.

 누군가 ‘아이가 엉엉 우는 모습’만을 크게 잡아당겨 사진 한 장 찍었다면 이 사진만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아이랑 아빠가 우산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이 사진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무엇을 살피거나 헤아릴는지 궁금합니다. 치고박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어느 한쪽이 때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정작 때린 쪽은 딱 한 번 때렸을 뿐이고 숱하게 얻어맞아 나자빠졌다면,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품을는지 궁금합니다.

 북녘사람은 남녘사람하고 견주어 무척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모든 북녘사람이 가난하거나 힘겹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남녘사람은 북녘사람하고 대면 참 넉넉하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모든 남녘사람이 넉넉하거나 즐겁게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관계기관에서 사진을 얻어’서 엮었다고 하는 사진책 《북한동포의 일생》은 1987년 9월에 나옵니다. 1987년 9월이라면 무척 어수선하다 싶은 때라 할 수 있지만, 다른 눈길로 바라보면 비로소 군사독재 울타리를 벗어내는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기득권과 정권이 아슬아슬한 때이며, 누군가한테는 숨통을 트며 꽁꽁 닫힌 입을 조금이나마 열 수 있는 때입니다.

 ‘관계기관 사진으로만 엮은’ 《북한동포의 일생》은 책이름 그대로 북녘사람이 보내는 한삶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으로 북녘사람을 바라보면 하나같이 불쌍하고 딱하며 안쓰럽습니다. 모두들 안타까우며 슬프고 고달픕니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요, 북녘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간다는데, 북녘사람 삶이 이렇다면 우리들 남녘사람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북녘사람 터전이 이토록 쪼들린다면 우리들 남녘사람은 어떡해야 하나요.

 남녘과 북녘이 손을 맞잡고 모든 총칼과 탱크와 전투기와 군함을 녹여 호미와 낫과 쟁기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군인들이 쳐 놓은 쇠가시울타리와 지뢰밭을 허물어 논밭으로 바꾸며, 오순도순 지낼 조촐한 살림터와 마을을 일굴 수는 없는가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공장이나 더 빨리 달릴 찻길과 기찻밀 말고, 스스로 조용하며 아름다이 살아갈 예쁜 마을을 온누리 곳곳에 마련할 수는 없을는지요.

 사진을 찍는 이라 한다면, 내 사진 한 장에 꽃씨 하나와 같은 마음을 심어 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이라 한다면, 내 그림 한 장에 열매 하나와 같은 가슴을 나누어 놓으면 무척 기쁘겠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이라 한다면, 내 글 한 줄에 구름 하나와 같은 넋을 실어 본다면 아주 예쁘겠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깎아내리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여 어깨동무할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로 거듭나면 반갑겠습니다. 서로 총칼을 겨누며 해코지하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은 털고, 나란히 어깨를 겯고 씩씩하며 튼튼하게 놀이와 일을 즐기는 이웃과 동무로 사귈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기운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찌우는 기운이 있습니다. 사진에는 꿈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아가도록 하는 꿈이 있습니다. (4343.9.15.물.ㅎㄲㅅㄱ)


― 북한동포의 일생 (관계기관 자료제공,국제문화사,1987.9.25./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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