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와 글쓰기


 나한테 1억이라는 돈은 꿈조차 꿀 수 없으나, 누군가한테는 1억이라는 돈으로 골프채 한 대를 사거나 자가용 한 대를 쉽게 산다. 나로서는 백만 원 아닌 천 원 한 장 벌기란 몹시 빠듯하지만, 누군가한테는 1억뿐 아니라 10억이나 100억이 어렵지 않게 돌고 돈다. 나 혼자 지내자면 보증금 50에 달삯 5만 원짜리 방 하나 얻어 살겠지. 보증금 50조차 이웃한테 꾸어서. 옆지기와 아이가 있으니 보증금 300에 달삯 20쯤 되는 살림집을 얻어야 도시 골목동네 깊숙한 데에서 몸을 누일 수 있다. 이런 살림에서 백만 원뿐 아니라 천만 원은 더없이 까마득한데, 보금자리가 아닌 운동이나 취미로 쓰는 물건이 꿈조차 꿀 수 없는 돈크기라면 나와 누군가는 어떤 삶이고 사람일까. 골프 또한 좋은 운동이거나 취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운동이나 취미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에서 얼마든지 다룰 수 있겠지. 진보이든 개혁이든 바라면서 골프 이야기를 다루지 말라는 법이란 없다. 다만 내 살림살이로서는 큰돈 아닌 푼돈을 버는 데부터 마음을 쏟기 어려울 뿐더러 손길이 가 닿지 않는다. 나는 칭얼대고 투정대며 어리광부리는 딸아이에다가 몸과 마음 모두 힘들며 아파하는 옆지기하고 시골집에서 복닥이는 데에 온 품을 들여도 언제나 허덕이거나 허우적거린다. 아, 오늘은 아침부터 맑고 고운 햇살이 내리쬐었다. 이런 날 인천에서 세 식구가 느긋하게 골목마실을 하며 땀을 흘린 다음 저녁나절 보리술 한잔 걸치고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흐뭇할까. 가까운 헌책방 한 곳 가뿐하게 들러 책 한 권 마련한 다음 이 책을 넘기며 저녁밥을 같이 먹으면 얼마나 기쁠까. 그래도 옆지기 어버이와 살붙이 살아가는 일산 바깥쪽 비닐집에서 어머님 밥 얻어먹으며 그저 펑퍼짐히 지내는 하루 또한 홀가분하면서 즐겁다. (4343.10.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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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시간 골목 걷기 1


 시월 들어 첫날 인천으로 마실을 와서 골목길을 다섯 시간 남짓 혼자서 걷다. 그야말로 걷고 또 걷고 다시 걸으며 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내리 걸었다. 시월 첫날 빗줄기가 가늘게 흩뿌렸기에 여느 때처럼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 싶은 모습을 더 많이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흐린 날 느낌을 담으며 사진으로 옮기면 되고, 비가 흩뿌리거나 때때로 빗방울이 굵을 때에는 이러한 느낌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이으면 된다. 종아리가 퉁퉁 붓고 무릎이 시큰거리며 등허리가 저리도록 걸으며 생각한다. ‘에휴, 겨우 틈을 내어 왔는데 오늘은 날씨가 궂구나. 날이 궂으면 사진에도 궂은 느낌이 깃들고 마는데.’ 인천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즐거이 마실 다니는 사진을 더는 찍을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이제는 인천사람이 아닌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니까 나 또한 그동안 인천 골목동네에서 마주했던 ‘골목 아닌 아파트숲에서 살며 아주 가끔 출사 나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골목마실을 하는 셈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저녁나절, 고단하고 지친 몸을 겨우 이끌어 일산에 있는 옆지기 식구들 살림집으로 온다. 전철을 타고 멀고 먼 길을 가까스로 오다. 다리가 제법 무거워 하룻밤 인천에서 자고 이튿날 새벽이나 아침에 갈까 싶었으나, 아이를 혼자 돌보느라 힘겨울 옆지기하고 식구들을 떠올리며 이를 앙다물고 전철을 타고 간다. 인천에서는 끝역이라 앉아서 가지만, 용산역부터는 내내 서서 간다. 주안역을 지날 무렵부터는 졸음이 쏟아져 모처럼 아이보기를 안 하며 책읽기만 할 수 있으나 그예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느긋하게 책을 읽겠느냐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과 달리 내 몸뚱이는 눈을 붙이잔다. 노량진역까지 꾸벅꾸벅 졸며 자며 온다. 용산역에서 내려 종로3가까지 오고, 여기에서 다시 3호선을 갈아타는 동안, 전철을 기다리며 큰 배낭에 책을 받치고 쭈그려앉는다. 쭈그려앉아 책을 읽는다. 어쩌면 자리를 얻지 못하고 서서 가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셈.

 마련해 놓기는 거의 반 해가 되었으나 아직 펼치지 않던 《별을 헤아리며》(양철북,2003)를 드디어 읽어 본다. 책을 처음 마련할 때에도 꽤 괜찮은 작품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읽고 보니 참 괜찮다. 우리 나라에는 이만 하게 작품을 빚을 글쟁이가 몇이나 될까 하고 곱씹는다. 아직은 멀었다고, 아직은 힘들다고, 아직은 슬프다고,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고 느낀다. 가볍게 읽거나 가르침을 베푸는 작품은 많다. 그러나 곰곰이 되새기면서 우리 터전과 사람과 목숨과 꿈과 발자국 모두를 아우르며 사랑하고 믿는 작품은 드물다. 이원수 권정생 임길택으로 살포시 이어지던 끈을 씩씩하며 즐겁고 당차게 이은 글쟁이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꼽을 수 있으려나. 아름답다 느낄 글을 쓰려면 스스로 아름답다 느낄 삶을 일구어야 하는데, 오늘날 이 나라 글쟁이 가운데 아름답다 느낄 삶을 즐거우며 곱고 신나게 보듬는 분으로 누가 있다 할 만할까. 가난하고 아프지만 가난을 좋은 벗으로 삼고 아픔을 고마운 스승으로 여기는 분으로 어느 분을 꼽을 만한가. 자가용을 타지 않을 뿐더러 자가용을 가질 만한 살림살이가 아닌 분이 누구인가. 아파트에 살지 않는데다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슬프며 따사로이 어루만질 만한 가슴으로 지내는 분이 누구일까.

 이어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내일을여는책,1997)을 들춘다. 어린이문학을 쓰는 송언 님이 서울살이를 접고 시골살이를 하면서 쓴 글을 모은 산문책. 이 책은 올 2월에 헌책방에서 만났으나 여태까지 펼칠 엄두를 못 냈다. 책을 사 놓고 여덟 달 만에 읽는 셈이네. 마흔 가까이 되어 비로소 서울을 벗어나 시골집에 전세를 얻어 시골 터전을 살갗으로 느끼는 이야기를 담는다. 송언 님 스스로 이무렵에 느끼셨는지 모를 노릇인데, 이와 같이 쓰는 글이야말로 문학이고 어린이문학이 된다. 따로 어떻게 꾸미고 자시고 해야 문학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한테 동시하고 동화만 들려주어야 어린이문학이지 않다.

 김밥 두 줄을 가끔 꺼내어 조금씩 먹으며 다섯 시간을 걷는다. 마실을 마치고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갈 무렵, 도화2동 142번지 둘레 ‘한창 집이 비며 철거를 할랑 말랑 하는 골목동네’에서 퍽 오래 머문다. 두어 달 앞서 이곳을 지날 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살던 동네였는데, 그사이 텅텅 비다시피 한다. 텅텅 비다시피 하면서 더없이 쓸쓸하다. 그런데 쓸쓸하기만 하지는 않다. 일찌감치 비어 버린 골목집을 치워 텃밭으로 일군 자리에서는 노랗고 큰 호박꽃이 소담스레 피어 있다. 가꾸어 주는 사람이 없는 비어 버린 텃밭에는 갖가지 들꽃이 앙증맞게 피어난다. 설마 싶어 크고 굵직하게 달린 열매가 있나 살피는데 아직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꽃만 시원하게 많이 피어 있다. 이 호박꽃들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이 빈집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비어 있는 골목집은 모두 흙으로 지은 집이다. 요새 도시사람들은 시골로 살림집을 옮긴다고 할 때에 흙집을 짓는다며 집짓기를 배운다지. 그런데 그 흙집이 바로 도시 한복판 가난하고 조그마한 골목동네마다 있거든요. 아니, 쉰 해 예순 해를 이어온 도시 골목동네 살림집들은 으레 흙집이거든요. 흙집 겉에 시멘트만 살짝 발랐을 뿐이거든요. 기둥과 지붕은 나무예요. 골목동네 살림집을 요모조모 뜯어 보고 살피면 얼마든지 나무집과 흙집 짓는 솜씨를 익힐 수 있거든요.

 흙집에 나무지붕에다가 나무창문인 집 앞에 우뚝 선다. 창호지를 댄 나무문살 작은 창문 한쪽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이 비고 나서 틀림없이 동네 푸름이들이 담배 피고 술 마시러 와서는 망가뜨렸으리라. 집들이 비니까 동네 푸름이들은 이 빈집에 몰려들어 담배 피고 아무 데나 버릴 뿐 아니라 술 마시고 병을 깨뜨리기까지 한다. 한쪽만 남은 나무문살 창문은 그냥 후두둑 떨어진다. 이 창문을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내 가방에 넣기로 한다. 다시 붙일 수 없는 노릇이니까. 어제 새로 장만한 70리터들이 큰 가방에 넣어 본다. 꼭 맞게 들어간다. 얼마 뒤면 무시무시한 쇠삽날로 밀어버릴 이 골목집 자취 가운데 하나인 ‘창호지를 댄 나무문살 작은 창문’ 하나를 건사해 놓고 이곳에 어떠한 골목이웃이 어떠한 살림을 꾸리며 어떠한 꿈과 삶을 이었는가를 마음으로 품고 싶다.

 텅텅 비어 버린 동네를 걷는데, 집집마다 ‘새 주소 사업’을 한다며 새로 붙인 주소패가 반짝거린다. 쓰겁게 웃다. 이렇게 곧바로 허물 집이면서 저 새 주소패는 뭣하러 붙였을까. 새 주소패를 붙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 생각이면서 이런 짓을 왜 했을까. 새 주소패를 둘 떼어낸다. 붙인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본드 냄새가 물씬 난다. 반들거리는 새 주소패 겉에 이 주소패를 붙였던 살림집 주소와 오늘 날짜를 네임펜으로 적는다. 문이 열린 빈집으로 들어가 본다. 빈집이니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다. 살림살이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치웠다. 집 옮길 돈은 받고 옮기셨을까. 바깥 골목에서 보면 알 수 없던 골목집 누리가 펼쳐진다. 바깥 골목에서는 골목집 안쪽 마당에 이렇게 예쁜 꽃밭과 텃밭이 앙증맞게 있는지 알 수 없다. 쇠붙이 문짝 잠금쇠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잠금쇠 또한 우리네 가난하고 수수한 여느 살림꾼들 발자국인데, 이 잠금쇠 하나를 ‘서민 역사’로 여기며 건사해 놓는 박물관이 한 군데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골목집을 허물어 아파트로 바꾼다고 할 때에 골목집 살림붙이를 찬찬히 보듬으며 모셔 놓을 박물학자라든지 전문가라든지 역사학자는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에 갑자기 돌아가신 재능대 사진학과 박재건 교수님은 송림4동과 5동 골목동네를 쓸어버릴 때에 동네를 다니면서 문패이니 주소패이니 몇 가지를 건사해 놓으며 “이 동네가 여기 있었음을 생각하고 싶었다.”고 말씀했다.

 새로 장만한 큰 배낭은 비를 맞아도 끄떡없다.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목돈을 쏟아 장만한 배낭이라 그런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쓰던 가방은 십만 원 넘는 돈을 들였는데 그 가방은 쟈크가 망가지고 빗물이 스몄고, 이 가방은 이십만 원 넘는 돈을 들여서 그런가, 쟈크는 한결 튼튼해 보이고 빗물이 스밀 틈이 없다. 빗물막이 천을 두르면 훨씬 야무지다. 돈이란 좋은가 무서운가 고마운가 대단한가 놀라운가.

 거의 다 비어 버린 골목동네를 거닐며 대문 안쪽으로 살짝살짝 들여다보이는 살림살이를 살핀다. 마루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아저씨 한 분 보인다. 그래, 거의 다 비어 버렸으나 이렇게 살아가는 골목이웃이 있어.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라고. 사람이 있는 터전이라고. 사람이 뿌리내리고 자리잡는 쉼터라고. 막걸리이든 보리술이든 한 잔이 그립다. (4343.10.3.해.ㅎㄲㅅㄱ)
 

= 사진은 보름 앞서 마실 할 때 찍은 녀석들. 엊그제 찍은 사진은 며칠 뒤에나 갈무리할 수 있어서 못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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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살이


 시골에서 살아가며 애써 도시로 마실을 해야 할 까닭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름다이 스미는 책을 곁에 두면서 따로 지루하거나 딱딱한 책을 쥐어들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랑스레 자라는 아이를 따스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굳이 텔레비전을 켜야 하지 않습니다. 텃밭에서 땀방울 똑똑 흘리는데 괜히 비행기 타고 나들이길을 나서야 하지 않아요. 흰구름 안고 밀잠자리 보며 범나비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기에, 냄비밥 한 그릇에 국수 넣은 찌개 하나로 배부른 아침저녁으로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4343.10.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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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역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75
버지니아 리 버튼 글, 그림 | 임종태 옮김 / 시공주니어 / 199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목숨과 삶과 자연을 지식으로 다루는 사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4] 버지니아 리 버튼, 《생명의 역사》(시공사,1997)



 가을로 접어들면서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다녀올 때에 얼굴이 몹시 까칠해집니다. 찬바람 쐬며 땀이 흘러 마르니까 얼굴이 아주 뻑뻑하면서 당깁니다. 이제 겨울 문턱을 넘어서면 얼굴이 더 까칠해지고 당길 테지요. 따스하며 시원했던 철은 지났습니다.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추우며 고단한 철을 보내야 합니다. 마냥 따스할 수 있으면 한결 낫다 여길 수 있으나, 따스한 철만 보내다가는 갖가지 벌레에 시달립니다. 땅도 쉬고 사람도 쉬며 뭇목숨 모두 쉴 겨울을 고맙게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겨울로 접어든 뒤로는 자전거를 타고 읍내 마실을 하기 꽤 힘들밖에 없습니다.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 자전거로 내리막을 달릴 때 얼마나 아슬아슬할까요. 아니 눈이 옴팡 쌓인 철에 시골버스는 다닐 수 있을까 모르겠군요. 아마 공무원들이 길에 염화나트륨을 뿌리느니 무어니 하겠지요. 자동차 오가는 길만 걱정하고, 이 염화나트륨이 땅으로 스미면 우리가 마실 물을 더럽힐 뿐 아니라 우리들 먹을거리를 얻도록 너른 품을 내어주는 흙을 망가뜨리는 줄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인천에 볼일을 보러 가는 길에 서울에 들릅니다. 아는 분들을 만나 함께 움직이느라 택시를 탑니다. 광화문 앞쪽에 새로 마련한 자전거길에 택시가 들어섭니다. 길이 하도 막혀 택시기사는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자전거길에 올라섭니다. 택시 뒤로 자가용 두어 대가 뒤따릅니다. 앞에 택시가 자전거길에 접어들었으니 당신들도 슬그머니 자전거길을 타고 싶겠지요. 꽉 막힌 찻길에서 벗어나고픈 듯합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자전거길을 씽 하니 내달립니다. 택시기사 아저씨를 보며 말을 겁니다. 싱긋 웃으며 “이 택시에 탄 사람들이 자전거를 몹시 좋아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있었으면 아마 이 택시보고 무어라 무어라 했을는지 몰라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뚱딴지 같은 말을 합니다. “자전거 가운데 800만 원이 넘는 자전거가 있다면서요?”

 엊그제 프란츠 알트 님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프란츠 알트 님은 온갖 통계와 자료를 섞어 ‘스스로 망가지는 길을 걷는 지구사람’을 걱정하는 글을 씁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다지 고개를 끄덕이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하나같이 맞는 이야기입니다만, 굳이 통계와 자료를 대지 않아도 될 텐데요. 이런저런 숫자를 드러내어 알리지 않고 프란츠 알트 님이 살아가며 겪거나 부대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한결 아름다울 텐데요. 이를테면 자동차를 사는 데에 드는 돈과 정부가 자동차길을 닦는 데에 쓰는 돈이 얼마나 되며, 이 돈을 공공교통으로 바꾸면 돈을 얼마나 아낄 수 있으며 환경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느냐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통계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시에서 자가용을 타고 더 빨리 이곳저곳 오가려고 하는 얼거리를 더욱 깊이 파헤쳐서 이러한 얼거리를 사람들 스스로 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참 아름다움과 참 사랑으로 거듭날 새 삶을 밝힐 수 있으면 훨씬 기쁘며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환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타라는 자전거는 아니니까요. 지구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태에너지를 찾거나 햇볕힘을 받아들여 전기로 쓰자는 움직임이 아니니까요.

 버지니아 리 버튼 님이 일군 놀라운 그림책 가운데 하나라 하는 《생명의 역사》를 읽습니다. 1997년에 우리 말로 옮겨진 이 책은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하고 《작은 집 이야기》와 함께 널리 사랑받습니다. 세 가지 그림책 모두 훌륭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그림책을 그려낼 그림쟁이가 태어날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생명의 역사》라는 그림책은 썩 달갑지 않습니다. 이 그림책을 처음 알아본 2000년에도 《작은 집 이야기》는 꽤 살갑다 생각했으나 《생명의 역사》는 그린이 스스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각’을 지나치게 큰 이름을 담아 내놓지 않았나 하고 보았습니다. 영어로 나온 책에는 “Life Story”라는 이름이 붙더군요. 삶을 이야기한다라. 그래요, 삶일 테지요. 그러면 누가 꾸리는 삶이고 어디에서 일구는 삶이며 어떻게 가꾸는 삶일는지요. 어떠한 눈길과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지구 역사이고 우주 역사이며 자연 역사일는지요.

 《생명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옮긴 그림책입니다만, 이 그림책 무대는 ‘지구’도 ‘생명’도 아닌 ‘미국’입니다. 더구나 미국이라는 나라 발자취를 훑으면서 정작 미국땅에서 ‘흰둥이보다 오래 살아온 누렁둥이’ 겨레 이야기는 한 구석에도 깃들지 않습니다. 대륙이 갈라지고 공룡이 뛰놀고 하는 이야기를 연대에 따라 차곡차곡 적바림한다고 해서 “생명이 거친 발자취”를 다룬다고 할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풀꽃 한 송이를 다룰 수 없다면, 나무 한 그루를 보듬지 못한다면,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을 사랑하며 스스로 흙과 같이 살아온 목숨붙이 ‘미국땅 옛 토박이 겨레’ 삶을 읽거나 어깨동무하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생명의 역사”가 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예나 이제나 제도권 초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역사란 ‘왕조를 이룬 권력자’ 눈길에서 바라본 모습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임금님 이야기와 권력자와 지식인 이름만 잔뜩 싣는 교과서입니다. 예부터 무척 오랫동안 이 겨레 이 나라에는 권력자나 지식인이나 임금님보다 ‘땅에 몸을 붙이며 농사를 짓거나 바다를 품에 안으며 고기잡이를 한’ 여느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아니 99퍼센트는 농사꾼이요 1%만이 농사꾼 아닌 사람이었겠지요. 교과서에는 안 실리고 역사 수업에서는 다루지 않는 여느 사람 농사꾼이 바로 이 겨레 이 나라를 살찌우며 이어온 발자취입니다. 역사예요.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농사꾼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듭니다. 도시에서 차를 타고 한참 벗어나 들판을 만난 뒤에라야 겨우 찾아볼 농사꾼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여느 사람 여느 일꾼은 회사원이거나 공무원입니다. 누구라도 밥을 안 먹으면 살 수 없고, 물을 안 마시면 목숨을 이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하늘을 고맙게 올려다보는 농사꾼은 줄어들기만 합니다. 참다이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은 굶어죽을 판인데, 참다운 농사가 아닌 비료농사와 농약농사를 짓더라도 숨통이 막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배추값이 비싸다고 법석입니다만, 스스로 배추씨를 심어 밭에서 배추를 기르고 배추벌레를 잡으며 비와 햇볕한테 고개 숙이는 가운데 여러 달에 걸쳐 배추 한 포기를 얻어 보셨나요. 손수 농사지어 배추를 마련하여 먹어 본 사람이라면 배추값이 비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겠지요. 유기농 곡식이나 푸성귀는 돈있는 사람만 사다 먹는다고요? 돈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유기농 곡식이나 푸성귀를 사다 먹거나 스스로 농사를 지어 밥을 해 먹습니다. 우리는 머리속에 갖가지 지식은 참 많이 집어넣습니다만, 바야흐로 삶이 될 이야기는 담지 못해요. 삶이어야지요. 지식이 아닌 삶이어야지요. 삶을 다루는 지식이어야 하고, 삶을 사랑하는 지식이어야지요.

 배추값이 비싸다고 하지만, 배추 한 포기를 김치로 담가 놓으면 며칠 동안 먹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배추는 몇 포기쯤 될까요. 내가 먹을 배추를 내가 심어 기른다 한다면 몇 포기를 심어서 기르면 되고, 이만 한 배추를 기르자면 밭이 몇 평쯤 되어야 할까요. 내가 먹는 밥을 농사지으려면 벼를 얼마나 거두어야 하고 나한테는 논이 몇 평쯤 있어야 할까요.

 스스로 농사를 지어 밥살림을 할 수 있다면, 저마다 내 논밭으로 ‘참 작은 땅’이 있어도 넉넉할 뿐 아니라 넘쳐서 남으니까 이웃한테 절로 나누어 줄밖에 없습니다. 애써 톨스토이 님 작품을 들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한테는 참 작은 땅이 있어도 즐거이 먹고삽니다. 한 사람은 대단히 큰 돈이 있어야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조촐하게 한식구를 이룰 때에도 그렇게까지 넓은 땅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아파트를 장만한다든지 큰차를 마련한다든지 해야 잘사는 나날일까요. 이름난 대학교를 나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왔어야 멋진 나날인가요.

 그림책 《생명의 역사》는 잘 짜 놓은 양탄자와 같습니다. 빈틈이나 허울이란 없습니다. 어설픈 겉치레나 껍데기 또한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이 그림책을 읽히며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든 뭇목숨이든 굵직한 흐름을 만들고자 살지는 않습니다. 나팔꽃 한살이와 잠자리 한살이에도 거룩한 목숨길이 깃듭니다. (4343.10.2.흙.ㅎㄲㅅㄱ)


― 생명의 역사 (버지니아 리 버튼 글·그림,임종태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7.4.26./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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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우리 집 깃든 멧기슭이 며칠째 구름에 폭 싸인다. 방앗간에 가려고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나올 무렵 비로소 햇볕을 구경한다. 아침 열 시가 넘고 열한 시가 되도록 우리 집 둘레 구름이 걷히지 않는다. 빨래 말리기는 젬병이다. 참말 우리 살림집은 멧집이구나. 그런데 읍내에 나와 보니 읍내사람조차 우리 멧집을 잘 헤아릴 수 없겠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더더욱 시골 멧집을 헤아릴 길이 없을 테지만, 읍내사람 또한 읍내에 구름이 내려앉아 폭 감싸일 일이 없으니까 한낮이 가깝도록 구름을 품으며 지내는 나날을 알 수 없겠지. 우리 딸아이가 며칠 앞서까지만 해도 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으로 가리킨 뒤 “구·름!” 하고 말하면 “기·윰!”이나 “기·륨!” 하고 따라했는데 오늘은 “구·륨!” 하고 말한다. 아이가 커서 나중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는지 모른다만, 이렇게 품에 안고 흰구름을 가리키며 함께 올려다볼 수 있어 좋다. (4343.10.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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