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책 (100쇄 기념판)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랑해 주어야 사랑을 받아먹는 아이
 [즐기는 그림책 19] 앤서니 브라운, 《돼지책》(웅진주니어,2001)



 며칠 앞서, 우리 집 어린 딸아이는 늦도록 더 놀고픈 나머지, 잠자리에 들 깊은 밤에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고 자꾸 “아빠, 쉬.”나 “아빠, 응가.” 하며 보채었습니다. 쉬를 누거나 응가를 할 마음이 없는 아이입니다. 불을 켭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킵니다. 아이한테 스스로 쉬를 하든 응가를 하든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바지를 내리고 똥걸상에 앉습니다. 아주 마땅히 아무것도 안 눕니다. 아이는 씨익 웃습니다. 아빠는 아침부터 고단하고 지쳐서 마주 웃어 주지 못합니다. “이제 그만 자야지.” 하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며 아이 아빠는 이내 골을 부리며 아이한테 툭탁거립니다. 아이랑 신나게 놀아 주었다든지, 아이가 스스로 곯아떨어질 만큼 산을 오르내렸더라면 아이가 잠을 안 자겠다며 떼를 쓸 일이 없을 텐데요.

 겨우겨우 아이를 재우기까지 두어 시간 걸립니다. 아이 아빠는 몸이 고단하지만 잠이 달아나 힘들게 깨어 있다가 어찌어찌 가까스로 잠듭니다. 이튿날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 《돼지책》을 펼칩니다. 아이가 퍽 어릴 무렵부터 아이를 부를 때에 “돼지야∼.” 하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더 어려 혀가 훨씬 짧았을 때에는 아빠가 “돼지!” 할 때에 “디지!” 하고 따라했는데, 이제는 거의 “돼지!” 소리에 가깝게 말을 합니다. 아이를 보며 “예쁜 돼지!”라 말할 때가 있으나 으레 “요 말괄돼지 같으니!”라 말하기 일쑤입니다.

 이튿날까지 골이 말끔히 안 풀린 미련스러운 아빠는 《돼지책》을 넘기며 곳곳에 깃든 예쁘장하고 짓궂은 ‘돼지 무늬’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돼지다! 돼지네. 여기에 또 돼지야.” 하고 말하다가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며 엄마 아빠 힘들게 하는 벼리(아이 이름)도 돼지야. 벼리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며 신나게 뛰어놀면 얼마나 좋겠니.”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 피곳 씨와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피곳 부인은 설거지를 모두 하고, 침대를 모두 정리하고, 바닥을 모두 청소하고, 그러고 나서 일을 하러 갔습니다 ..  (8∼9쪽)


 “이 그림 좀 봐. 여기에서는 아줌마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러네. 우리 집에서는 아빠가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벼리 씻어 주고 옷 입히고 그러지? 그림책 아줌마도 참 힘들 텐데, 아빠도 힘이 많이 드는구나.” 하는 말을 아빠가 조잘조잘합니다. 그림책 《돼지책》 여기저기를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함께 짚으며 웃고 떠들던 아이가 조용합니다. 아이는 아빠 말을 알아들었을까요. 아이는 아빠가 골부리며 푸념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을까요.

 아이는 틀림없이 아빠 푸념을 ‘이야기’로든 ‘느낌’으로든 알아채리라 봅니다. 그런데 살짝 뾰로통하듯 풀이 죽던 아이는 조금 지나서 다시 웃고 떠들며 노래를 부릅니다. 슬픔을 느꼈어도 슬픔을 금세 잊으며 웃는 아이입니다. 아빠나 엄마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나무랄지라도 한때를 지나면 어느덧 깔깔거리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책을 읽을 때에 곁에서 함께 책을 펼칩니다. 엄마는 엄마 책을 읽고 아빠는 아빠 책을 읽으며 아이는 아이 책을 읽습니다. 아빠가 빨래를 하면 곁에서 빨래하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는 따라서 빨래놀이를 합니다. 엄마이든 아빠이든 호미를 들고 텃밭에서 깨작거리면 아이도 호미를 찾아 들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밭에 호미를 폭폭 찍습니다. 아직 불이 뜨거우니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막지만, 아이가 제법 커서 너덧 살쯤 된다면 아이한테 쌀씻기를 맡긴다든지 가스불을 켤 때에 켜도록 시킬 수 있겠지요. 아이는 아빠가 도서관 책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에 옆에서 “무거워. 무거워.” 하면서도 책을 들고 옵니다. 아빠 일을 거든다며 책을 날라 줍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가위나 칼을 들면 다치니 안 된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가 칼과 가위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찬찬히 보여주며 차분히 말을 들려주면 아이는 잘 알아듣습니다. 그냥저냥 마구 내어주어서는 다칠 테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며 어버이 스스로 아이 앞에서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면 다칠 일이 없습니다. 작은 가위를 아이한테 쥐어 주면서 신문 종이나 못 쓰는 종이를 자르도록 해 주면 돼요. 어른들도 바느질을 할 때에 바늘에 찔리면서 익숙해지고, 밥하기를 하며 칼로 손을 베는 가운데 배웁니다. 넘어지거나 부딪치며 자전거를 잘 탈 수 있습니다. 애써 쓴 글이 푸대접을 받는다든지 사진 공모전에 내놓았는데 사진이 떨어진다든지 하면서 내 글과 사진을 새삼스레 돌아보거나 다잡을 수 있어요.


.. 피곳 씨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자마자, 피곳 부인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그러고 나서 먹을 것을 조금 더 만들었습니다 ..  (13쪽)


 앤서니 브라운 님이 일군 그림책 《돼지책》에는 “피곳 씨네 아줌마”하고 피곳 씨하고 피곳 씨네 두 아들이 나옵니다. 피곳 씨하고 두 아들 사이먼과 패트릭은 ‘크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크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인 ‘엄마’한테는 아무런 이름이 없이 “피곳 부인”입니다. 집일은 한 가지조차 안 하면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거나 힘을 누리는 남자들 삶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더 높은 이름을 얻거나 더 큰 힘을 거머쥐는 데에 눈길을 맞춥니다. 학교를 다니거나 일터를 다니거나 더 많고 높고 큰 쪽으로만 기울어집니다. 사람을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돕는 마음결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아가거나 참되게 살아가거나 곱게 살아가는 쪽으로는 눈썹 한 번 찡긋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피곳 씨네 아줌마가 비로소 웃음을 찾습니다만, 아줌마가 웃음을 찾더라도 아줌마 이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웃음을 찾기란 한때로 그칠 수 있으며, 오래오래 웃음을 찾는달지라도 미국이든 한국이든 온누리 삶터에서 ‘여자가 보내야 하는 억눌린 삶결’은 나아지지 못한다는 대목을 넌지시 빗대는구나 싶어요.

 그림책 끝자락에 “피곳 씨와 아이들은 요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요리는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30쪽)!”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남자들은 ‘엄마가 빈 자리’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기쁘게 집일을 돕는 셈’일까요. 이 남자들은 왜 웃으면서 “요리는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하고 외치는가요.

 언뜻 보자면 남자들이 제 마음을 차리면서 기쁘게 집일을 거든다는 줄거리를 보여준다 할 테지만, 《돼지책》을 내놓은 앤서니 브라운 님은 ‘집살림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일구는 길’임을 슬며시 보여주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사람이더라도 잠을 자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씻어야 하고 식구들하고 말을 나누어야 하며 아이와 놀아 주며 사랑어린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온누리에 널리 알려진 사람은 밥을 안 먹어도 되나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총리나 법관이나 시장이나 군수쯤 되면 빨래를 안 하고 한 가지 옷만 입고 지내도 되는가요?

 나 스스로 살림을 맡든 누군가 살림을 맡아 주든 살림을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나 스스로 내 살림을 내 힘으로 꾸리며 내 삶을 가꿀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내 땅에서 내가 농사지어 곡식을 거둔 다음 밥상을 차릴 수 있을 때하고 돈으로 바깥밥을 사 먹을 때하고 밥맛과 밥느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한테 차려 주는 밥이 전화 걸어 시켜 먹는 밥하고 비슷할 수조차 있겠습니까.

 “피곳 씨네 아줌마”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을 맡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곳 씨네 아줌마는 당신 스스로 당신 살림살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당신 이름조차 사라지며 당신 삶이 무엇인지 더듬는다거나 나눌 길이 꽁꽁 막혀 있거든요. 이와 마찬가지로 피곳 씨네 아저씨와 아이들도 당신들이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스스로 틀어막고 거들먹거렸습니다. 종이조각뿐인 돈과 허울뿐인 이름에 사로잡혀 ‘어머니 자리를 얕보는 권력’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피곳 씨네 아저씨는 아버지다운 길을 버렸고, 피곳 씨네 아이들은 아이다운 길을 놓쳤어요.

 함께 밥하고 함께 설거지하며 함께 빨래하여 함께 빨랫줄에 넌 다음 다 마른 빨래를 함께 개어 함께 옷장에 가지런히 놓는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함께 텃밭이나 들판에서 땀흘려 일하고 함께 씻으며 웃고 떠드는 보람이란 아주 큽니다. 함께 드러누워 쉬며 수다를 떠는 저녁나절은 기쁨으로 마무리짓는 하루입니다. 기쁜 하루가 모여 삶이 되고, 기쁜 삶을 오래오래 이으며 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고 제금날 때에 또다른 테두리에서 새삼스러운 삶빛을 길어올립니다.

 그림책 《돼지책》을 내놓은 앤서니 브라운 님은 남자입니다. 남자 목소리와 눈길로 ‘살림하는 보람과 뜻과 기쁨과 아름다움’을 깨달으며 그림책에 고스란히 담아냈기에 참 놀랍습니다. 아마 앤서니 브라운 님 스스로 ‘손수 밥을 해서 살붙이랑 즐겁게 먹는 아름다운 삶’을 알기에 이러한 그림책을 빚지 않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빨래를 북북 비벼 빨아 햇살 좋은 마당가 빨랫줄에 빨래를 탁탁 펼쳐 널어 놓는 시원하고 싱그러운 삶을 누리기에 이처럼 그림책을 엮지 않느냐 싶어요.

 사랑해 주어야 사랑을 받아먹는 아이입니다. 내 삶을 사랑할 때에 내 아이와 이웃과 동무 삶을 다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좋은 삶 좋은 넋을 일구며 좋은 말이 샘솟고, 좋은 내 삶은 좋은 네 삶으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3.10.9.흙.ㅎㄲㅅㄱ)


― 돼지책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허은미 옮김,웅진주니어,2001.10.1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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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보문고에 책을 안 팔면?


 내 헌책방 이야기를 펴내 준 그물코 출판사에서 내놓은 다른 책들을 교보문고에서 만나기 힘들어진 지 꽤 된다. 문득 궁금해서 교보문고에서 그물코 책들을 죽 헤아리는데 하나같이 ‘품절’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교보 추천’ 빨간 댕기가 붙은 책이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이건 송두리째 ‘품절’이다. 그러고 보면 그물코 출판사에서 요사이에 새로 내놓은 책은 아예 안 뜨기까지 한다. 펴낸 책 가짓수가 제법 되는 출판사치고 교보문고에 책을 안 파는 곳이 몇 군데쯤 될까.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교보문고에 책을 넣지 않겠다고 하는 곳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교보문고만 출판사 일꾼을 들볶거나 얄궂은 짓을 하기 때문에 교보문고에 책을 안 팔지는 않는다. 다른 큰책방이라고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누리책방이라 해서 한결 낫다고 여기기 어렵다. 작은책방이 차츰차츰 큰책방한테 잡아먹힐 뿐 아니라 큰책방 말고는 여느 책방이 살아남을 수 없는데다가 인문책을 즐겨 다루는 책방이라든지 예술책을 힘써 다루는 책방이 버틸 수 없는 한국땅이다. 그래도 서울 홍대 앞쪽에는 만화책만 다루는 책방 〈한양문고〉와 〈북새통〉 두 군데가 씩씩하게 뿌리내린 지 꽤 되었다. 사람들이 책을 책다이 마주하며 어깨동무할 뿐 아니라 착하게 사랑할 수 있자면, 가까이에 걸어가서 책을 찾아보는 작은책방이 동네마다 있어야 한다. 동네빵집과 동네술집과 동네밥집처럼 동네책집이 자그맣게 있어야 한다. 때때로 다리품을 팔며 멀리 마실을 다닐 만한 좋은 인문책방이나 예술책방이 함께 있어야 한다. 어린이책방이나 만화책방이나 그림책방 또한 곳곳에 있는 한편, 크고작은 헌책방이 도시와 시골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이렇게 책방이 책방답게 마을살림을 할 수 있다면 온 나라에 크고작은 예쁜 도서관 또한 맑고 싱그러이 태어나겠지.

 도서관은 기적처럼 지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은 작은책방이 밑바탕에 깔려 있은 다음에 스스로 태어나도록 해야 한다. 기적 어린 도서관은 책을 살리지 못한다. 기적에 흠뻑 빠진 도서관은 책을 돈푼이나 상품으로 다루고 만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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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맞이해 우리 말 이야기를 한 꼭지 걸쳐 본다.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52) 시작 37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


.. 단원이 삼 년간 현감으로 재직한 연풍현 관아는 오래 전에 답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20쪽

 “삼 년간(三 年間)”은 “세 해 동안”이나 “세 해”나 “세 해를”로 다듬고, ‘재직(在職)한’은 ‘있던’이나 ‘일한’이나 ‘지낸’으로 다듬습니다. “오래 전(前)에 답사(踏査)한”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퍽 예전에 다녀 본”이나 “꽤 옛날에 밟아 본”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여행(旅行)’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이라 하기보다는 우리 말이라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고, ‘마실’이나 ‘나들이’나 ‘길’로 손질해 볼 수 있습니다.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x)
 └ 여행은 옥순봉부터 하기로 (o)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 해에 한 차례 ‘한글 난 날’을 맞이합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서 이날을 기리는 사람이 있으나, 이날이 한글날인지 아닌지 못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했기에 조금 더 내 말과 글을 돌아보며 아끼고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글날이건 말건 엉터리 말글을 아무렇지 않게 뇌까리는 사람이 있어요.

 한글날이라 해서 더 아름답거나 알차게 말글을 북돋우려는 사람이 있지만, 한글날조차 내 말글을 멍청하고 미련스레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한 아침 책을 한 권 꺼내어 읽다가 씁쓸하게 웃습니다. 굳이 한글날이기에 우리 말글을 헤아리는 책을 찾아 읽고 싶지 않을 뿐더러, 한글날이라 해서 사람들이 한결 알차며 곱게 여민 말글로 이루어진 책을 읽을 마음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날이 한글날이다 보니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글월에 자꾸 마음을 쓰고야 맙니다. 이분은 왜 이런 글로 이렇게 당신 삶을 이야기해야 하나 싶고, 이분 글을 책으로 낸 책마을 일꾼은 이분 글을 찬찬히 어루만지거나 보듬을 수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한자말 ‘시작’을 생각합니다. 이 낱말을 한자말로 여긴다거나 이 낱말을 다듬어 보고자 마음을 쏟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시작’과 같은 낱말을 알뜰살뜰 털어내거나 씻어내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이와 같은 낱말 하나 털어내지 못한들 한글이 크게 망가진다든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이 낱말 하나마저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이 나라 말글을 비롯해 이 나라 넋이 튼튼히 서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시작’과 같은 숱한 한자말이 우리 삶에 스며든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뗄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참말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떼어 보고자 애쓴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참다이 말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한국사람입니다. 착하게 말글 가꾸기를 해 보려 땀흘리지 않는 한겨레입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돌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오르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어린 날, “준비, 시이작!” 하는 말을 곧잘 듣고 으레 꺼냈습니다. 그러나 “준비, 땅!” 하는 말을 나란히 듣고 흔히 주고받았습니다. 따로 우리 말글을 더 아끼려고 하면서 ‘시작’을 ‘땅’으로 고쳐쓰지는 않았습니다. 어쩐지 ‘시작’이라는 낱말이 썩 내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4학년이나 5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은데, ‘준비’라는 낱말도 ‘시작’이라는 낱말과 함께 한자말이 아닌가 하고 느끼면서, 이 낱말들을 곰곰이 되씹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 살펴보았고, 책에는 이런 말을 꺼내야 할 자리에 어떻게 적혀 있는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자, 해 보자!”나 “하나, 둘, 셋!” 같은 말마디는 이무렵 느끼고 들으며 받아들입니다. 따로 말다듬기나 글다듬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저한테 더 알맞거나 살가울 말마디를 찾고 싶었습니다. 말을 사랑하거나 글을 아끼려는 마음까지는 아니고, 더 쉬우며 포근한 말이나 글을 맞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머나먼 옛날 농사짓던 여느 할매와 할배가 쓰던 말을 나 또한 쓰고 싶었고, 까마득한 지난날 산골과 들판과 바닷가에서 살아가며 뛰노는 아이들이 쓰던 말을 나도 함께 쓰고 싶었습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다니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보기로 했다

 시골집에서 고무신을 신고 흙을 밟으며 나무를 쓰다듬는 가운데 생각합니다. 나무를 쓰다듬어 보지 않고서야, 흙을 밟아 보지 않고서야, 텃밭에서 풀을 뽑거나 무를 뽑아 보지 않고서야, 내 삶을 어루만질 만한 말마디를 얻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릴 때에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을 할 말미를 마련하는구나 싶지만, 이만큼으로는 모자랍니다. 두 다리로 어디를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어디를 오가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무엇이며, 내 삶자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를 알아채야 합니다.

 “한글사랑 나라사랑” 같은 푯말을 아무리 드높인다 하더라도 이 나라 사람들이 두루두루 한글과 우리 말을 사랑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바꾸어야 하고, 삶터를 스스로 일구어야 하며, 삶사랑으로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을 사귀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외침말이라 할지라도 한낱 외침말에 그칩니다. 우리 말 살리기이든 우리 강 살리기이든 우리 땅 살리기이든, 입으로 할 수 없고 글쓰기로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내 하루로 할 뿐입니다.

 한글날을 기리며 한글과 우리 말을 다루는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살뜰히 말사랑 글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아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지식입니다. 나와 너는 머리에 담는 지식이 아닌 날마다 살아내며 나누는 이야기를 가누어 빛깔 고운 슬기를 살포시 베풀어야 합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며 오늘과 어제와 글피를 보내는 나라면, 내가 세우는 일터에 ‘무슨무슨 주니어’나 ‘무슨무슨 닷컴’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지 못하며 오늘도 어제도 글피도 달력에 적힌 날짜로 바라보는 나이기에, 내가 다니는 일터 이름이 적힌 이름쪽 하나에 갖가지 자잘한 영어나 한자를 새겨 놓습니다.

 처음 그대로 살고 처음처럼 죽습니다. ‘시작’과 끝이 아닌 ‘처음’과 끝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지만, 세 살뿐 아니라 어머니 배에 깃들어 있을 때부터 내 삶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어머니가 살아온 바탕을 내가 받아먹고, 내가 태어나 자라며 보는 그대로 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으려면 내 어머니가 당신 쓰던 말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는다면 내 아이가 쓰는 말 또한 내 아이 스스로 사랑으로 보듬습니다.

 첫머리를 옳고 착하며 곱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머리를 바르며 맑고 밝게 다잡아야 합니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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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0-09 23:3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순수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어로 바꾼 경우에 그 말을 살릴 필요도 있지만 오랜기간 사용한 한자어를 굳이 한글로 억지로 고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보다는 요즘에 10~20대 층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오히려 한글을 더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란놀 2010-10-10 06:17   좋아요 0 | URL
어린이와 청소년이 쓰는 말은 모두 '어른이 쓰는 말'을 따라하고,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 어떤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 말은 달라집니다. 어른들이 '말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만큼' 아이들도 아무 말이나 함부로 안 쓰지요.

4대강 같은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말과 글을 '한 나라 사람 누구나(학력이 짧든 아는 것이 적든) 손쉽고 즐거이 나누는 테두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한글로 억지로 고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제자리로 가도록 바로잡는' 일입니다.
 


 전철에서 책읽기 2


 송명규 님이 쓴 산문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다가 126쪽에서 멈춘다. “가방을 팽개치고 허겁지겁 차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들었다. 렌즈 한켠에 달걀처럼 생긴 검은 물체가 아른가렸다.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초점을 맞췄다. ……. 부엉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에 걸린 채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까만 비닐봉지였다. 나는 무엇에 얻어맞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시대를 착각했다. 나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미루나무에 부엉이 대신 비닐봉지가 앉아 있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다.”라는 대목을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 되읽는다. 고개를 그리 끄덕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이 땅 모습이다. 틀림없이 우리 삶자락 이야기이다.

 오늘 이대 앞에서 지하철을 타는데 코를 찌르고 살을 후벼파는 냄새가 잔뜩 나서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 바깥은 그지없이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데, 지하철역으로 들어서니 온통 불빛이요, 눈이 어두워지고 만다. 새삼스레 이 도시 서울을 생각한다. 우리는 왜 땅밑으로 내려가야 하는가. 왜 이 땅밑 기차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가. 우리한테 얼마나 넓은 땅이 있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나다니며 사람을 사귀거나 다른 마을 구경을 해야 하는가. 내 조그마한 보금자리와 삶터를 조촐히 사랑하며 아낄 수는 없는가. 지하철을 타며 책을 읽으면 ‘시간 살리기’라 여겨 왔는데, 굳이 지하철까지 타야 하거나 책까지 챙겨 읽어야 하느냐 싶다.

 맑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빨래를 해서 널고, 이 햇살을 아이와 옆지기랑 느끼며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릴 때에 한결 기쁘며 뿌듯하겠구나. 얼굴과 손발이 푸석해지고 목이 마르다. 오늘이 한글날이라고 한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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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레와 글쓰기

 걸레를 손으로 빨아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훔치면, 내가 얼마만 한 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야 좋을까를 알 수 있다. 연필을 손으로 깎아 조그마한 쪽종이 하나, 이를테면 껌종이라든지 부동산에서 골목마다 붙이는 전세방 알림종이를 길에서 주워 여기에 몇 줄 글월을 적바림해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써서 나누어야 좋을까를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번 돈을, 그러니까 텃밭농사를 지어 배추 몇 포기나 무 몇 뿌리를 저잣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를 얻어 길장사를 해서 번 돈을 손에 쥐고 다리품을 팔아 책방마실을 하는 가운데 책 하나를 장만해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 내 삶을 일구어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을 수 있다. (4343.10.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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