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역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75
버지니아 리 버튼 글, 그림 | 임종태 옮김 / 시공주니어 / 199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목숨과 삶과 자연을 지식으로 다루는 사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4] 버지니아 리 버튼, 《생명의 역사》(시공사,1997)



 가을로 접어들면서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다녀올 때에 얼굴이 몹시 까칠해집니다. 찬바람 쐬며 땀이 흘러 마르니까 얼굴이 아주 뻑뻑하면서 당깁니다. 이제 겨울 문턱을 넘어서면 얼굴이 더 까칠해지고 당길 테지요. 따스하며 시원했던 철은 지났습니다.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추우며 고단한 철을 보내야 합니다. 마냥 따스할 수 있으면 한결 낫다 여길 수 있으나, 따스한 철만 보내다가는 갖가지 벌레에 시달립니다. 땅도 쉬고 사람도 쉬며 뭇목숨 모두 쉴 겨울을 고맙게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겨울로 접어든 뒤로는 자전거를 타고 읍내 마실을 하기 꽤 힘들밖에 없습니다.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 자전거로 내리막을 달릴 때 얼마나 아슬아슬할까요. 아니 눈이 옴팡 쌓인 철에 시골버스는 다닐 수 있을까 모르겠군요. 아마 공무원들이 길에 염화나트륨을 뿌리느니 무어니 하겠지요. 자동차 오가는 길만 걱정하고, 이 염화나트륨이 땅으로 스미면 우리가 마실 물을 더럽힐 뿐 아니라 우리들 먹을거리를 얻도록 너른 품을 내어주는 흙을 망가뜨리는 줄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인천에 볼일을 보러 가는 길에 서울에 들릅니다. 아는 분들을 만나 함께 움직이느라 택시를 탑니다. 광화문 앞쪽에 새로 마련한 자전거길에 택시가 들어섭니다. 길이 하도 막혀 택시기사는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자전거길에 올라섭니다. 택시 뒤로 자가용 두어 대가 뒤따릅니다. 앞에 택시가 자전거길에 접어들었으니 당신들도 슬그머니 자전거길을 타고 싶겠지요. 꽉 막힌 찻길에서 벗어나고픈 듯합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자전거길을 씽 하니 내달립니다. 택시기사 아저씨를 보며 말을 겁니다. 싱긋 웃으며 “이 택시에 탄 사람들이 자전거를 몹시 좋아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있었으면 아마 이 택시보고 무어라 무어라 했을는지 몰라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뚱딴지 같은 말을 합니다. “자전거 가운데 800만 원이 넘는 자전거가 있다면서요?”

 엊그제 프란츠 알트 님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프란츠 알트 님은 온갖 통계와 자료를 섞어 ‘스스로 망가지는 길을 걷는 지구사람’을 걱정하는 글을 씁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다지 고개를 끄덕이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하나같이 맞는 이야기입니다만, 굳이 통계와 자료를 대지 않아도 될 텐데요. 이런저런 숫자를 드러내어 알리지 않고 프란츠 알트 님이 살아가며 겪거나 부대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한결 아름다울 텐데요. 이를테면 자동차를 사는 데에 드는 돈과 정부가 자동차길을 닦는 데에 쓰는 돈이 얼마나 되며, 이 돈을 공공교통으로 바꾸면 돈을 얼마나 아낄 수 있으며 환경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느냐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통계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시에서 자가용을 타고 더 빨리 이곳저곳 오가려고 하는 얼거리를 더욱 깊이 파헤쳐서 이러한 얼거리를 사람들 스스로 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참 아름다움과 참 사랑으로 거듭날 새 삶을 밝힐 수 있으면 훨씬 기쁘며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환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타라는 자전거는 아니니까요. 지구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태에너지를 찾거나 햇볕힘을 받아들여 전기로 쓰자는 움직임이 아니니까요.

 버지니아 리 버튼 님이 일군 놀라운 그림책 가운데 하나라 하는 《생명의 역사》를 읽습니다. 1997년에 우리 말로 옮겨진 이 책은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하고 《작은 집 이야기》와 함께 널리 사랑받습니다. 세 가지 그림책 모두 훌륭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그림책을 그려낼 그림쟁이가 태어날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생명의 역사》라는 그림책은 썩 달갑지 않습니다. 이 그림책을 처음 알아본 2000년에도 《작은 집 이야기》는 꽤 살갑다 생각했으나 《생명의 역사》는 그린이 스스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각’을 지나치게 큰 이름을 담아 내놓지 않았나 하고 보았습니다. 영어로 나온 책에는 “Life Story”라는 이름이 붙더군요. 삶을 이야기한다라. 그래요, 삶일 테지요. 그러면 누가 꾸리는 삶이고 어디에서 일구는 삶이며 어떻게 가꾸는 삶일는지요. 어떠한 눈길과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지구 역사이고 우주 역사이며 자연 역사일는지요.

 《생명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옮긴 그림책입니다만, 이 그림책 무대는 ‘지구’도 ‘생명’도 아닌 ‘미국’입니다. 더구나 미국이라는 나라 발자취를 훑으면서 정작 미국땅에서 ‘흰둥이보다 오래 살아온 누렁둥이’ 겨레 이야기는 한 구석에도 깃들지 않습니다. 대륙이 갈라지고 공룡이 뛰놀고 하는 이야기를 연대에 따라 차곡차곡 적바림한다고 해서 “생명이 거친 발자취”를 다룬다고 할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풀꽃 한 송이를 다룰 수 없다면, 나무 한 그루를 보듬지 못한다면,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을 사랑하며 스스로 흙과 같이 살아온 목숨붙이 ‘미국땅 옛 토박이 겨레’ 삶을 읽거나 어깨동무하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생명의 역사”가 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예나 이제나 제도권 초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역사란 ‘왕조를 이룬 권력자’ 눈길에서 바라본 모습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임금님 이야기와 권력자와 지식인 이름만 잔뜩 싣는 교과서입니다. 예부터 무척 오랫동안 이 겨레 이 나라에는 권력자나 지식인이나 임금님보다 ‘땅에 몸을 붙이며 농사를 짓거나 바다를 품에 안으며 고기잡이를 한’ 여느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아니 99퍼센트는 농사꾼이요 1%만이 농사꾼 아닌 사람이었겠지요. 교과서에는 안 실리고 역사 수업에서는 다루지 않는 여느 사람 농사꾼이 바로 이 겨레 이 나라를 살찌우며 이어온 발자취입니다. 역사예요.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농사꾼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듭니다. 도시에서 차를 타고 한참 벗어나 들판을 만난 뒤에라야 겨우 찾아볼 농사꾼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여느 사람 여느 일꾼은 회사원이거나 공무원입니다. 누구라도 밥을 안 먹으면 살 수 없고, 물을 안 마시면 목숨을 이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국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하늘을 고맙게 올려다보는 농사꾼은 줄어들기만 합니다. 참다이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은 굶어죽을 판인데, 참다운 농사가 아닌 비료농사와 농약농사를 짓더라도 숨통이 막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배추값이 비싸다고 법석입니다만, 스스로 배추씨를 심어 밭에서 배추를 기르고 배추벌레를 잡으며 비와 햇볕한테 고개 숙이는 가운데 여러 달에 걸쳐 배추 한 포기를 얻어 보셨나요. 손수 농사지어 배추를 마련하여 먹어 본 사람이라면 배추값이 비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겠지요. 유기농 곡식이나 푸성귀는 돈있는 사람만 사다 먹는다고요? 돈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유기농 곡식이나 푸성귀를 사다 먹거나 스스로 농사를 지어 밥을 해 먹습니다. 우리는 머리속에 갖가지 지식은 참 많이 집어넣습니다만, 바야흐로 삶이 될 이야기는 담지 못해요. 삶이어야지요. 지식이 아닌 삶이어야지요. 삶을 다루는 지식이어야 하고, 삶을 사랑하는 지식이어야지요.

 배추값이 비싸다고 하지만, 배추 한 포기를 김치로 담가 놓으면 며칠 동안 먹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배추는 몇 포기쯤 될까요. 내가 먹을 배추를 내가 심어 기른다 한다면 몇 포기를 심어서 기르면 되고, 이만 한 배추를 기르자면 밭이 몇 평쯤 되어야 할까요. 내가 먹는 밥을 농사지으려면 벼를 얼마나 거두어야 하고 나한테는 논이 몇 평쯤 있어야 할까요.

 스스로 농사를 지어 밥살림을 할 수 있다면, 저마다 내 논밭으로 ‘참 작은 땅’이 있어도 넉넉할 뿐 아니라 넘쳐서 남으니까 이웃한테 절로 나누어 줄밖에 없습니다. 애써 톨스토이 님 작품을 들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한테는 참 작은 땅이 있어도 즐거이 먹고삽니다. 한 사람은 대단히 큰 돈이 있어야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조촐하게 한식구를 이룰 때에도 그렇게까지 넓은 땅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아파트를 장만한다든지 큰차를 마련한다든지 해야 잘사는 나날일까요. 이름난 대학교를 나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왔어야 멋진 나날인가요.

 그림책 《생명의 역사》는 잘 짜 놓은 양탄자와 같습니다. 빈틈이나 허울이란 없습니다. 어설픈 겉치레나 껍데기 또한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이 그림책을 읽히며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든 뭇목숨이든 굵직한 흐름을 만들고자 살지는 않습니다. 나팔꽃 한살이와 잠자리 한살이에도 거룩한 목숨길이 깃듭니다. (4343.10.2.흙.ㅎㄲㅅㄱ)


― 생명의 역사 (버지니아 리 버튼 글·그림,임종태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7.4.26./1만 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


 우리 집 깃든 멧기슭이 며칠째 구름에 폭 싸인다. 방앗간에 가려고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나올 무렵 비로소 햇볕을 구경한다. 아침 열 시가 넘고 열한 시가 되도록 우리 집 둘레 구름이 걷히지 않는다. 빨래 말리기는 젬병이다. 참말 우리 살림집은 멧집이구나. 그런데 읍내에 나와 보니 읍내사람조차 우리 멧집을 잘 헤아릴 수 없겠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더더욱 시골 멧집을 헤아릴 길이 없을 테지만, 읍내사람 또한 읍내에 구름이 내려앉아 폭 감싸일 일이 없으니까 한낮이 가깝도록 구름을 품으며 지내는 나날을 알 수 없겠지. 우리 딸아이가 며칠 앞서까지만 해도 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으로 가리킨 뒤 “구·름!” 하고 말하면 “기·윰!”이나 “기·륨!” 하고 따라했는데 오늘은 “구·륨!” 하고 말한다. 아이가 커서 나중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는지 모른다만, 이렇게 품에 안고 흰구름을 가리키며 함께 올려다볼 수 있어 좋다. (4343.10.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손톱과 글쓰기


 엊저녁에 아이 손발톱을 깎다. 아이 오른엄지발톱이 또 부러졌다. 자주 깎아서 부러지지 않게끔 해야 하는데 늘 갖은 일에 치이니까 손발톱 깎기를 자꾸 잊거나 놓친다. 하기는, 내 손발톱조차 못 깎으니까. 아이 손발톱을 깎았으니 내 손발톱도 깎아야 할 텐데 언제쯤 틈을 내어 깎을 수 있을까. 문득 내 손톱을 들여다보니 오른쪽 넷째와 닷째 손톱이 한쪽으로 갈려 있다. 넷째 손톱은 갈린 끄트머리가 꽤 쓰라리다. 날마다 손에 물이 마를 새 없이 집일을 하고 손빨래를 하니까 내 손발톱은 남아날 수 없다. (4343.10.2.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역신문


 광벌로 가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음성읍사무소에서 충북 신문들을 훑다. 운동경기 소식을 아예 안 싣는 신문이 여럿 된다. 운동경기 소식을 싣더라도 방송편성표하고 주식시세표를 안 싣는 신문이 꽤 많다. 어쩌면 충북 쪽 신문들은 이 세 가지를 거의 안 다루거나 다루더라도 아주 작게 다룬다고 할 만하다. 생각해 보면, 시골사람한테는 박지성이나 추신수나 김연아나 추성훈이나 …… 여자축구나 …… 거의 부질없는 얘기이다. 이런 얘기까지 시골신문이나 지역신문이 다룰 까닭이 없다. 시골신문이나 지역신문이라면, 시골사람 삶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와 지역 살림살이와 자연 터전을 보듬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을 노릇이다. 그러나 충북 신문들은 시골사람 삶이나 지역 살림살이 이야기보다는 지역 정치꾼과 지역 공무원 이야기로 가득하다. (4343.10.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으로 보는 눈 138 : 숨을 거둔 교육잡지와 에누리 책잔치

 다달이 나오던 교육잡지 《우리교육》은 첫 책이 나온 지 스무 해가 된 올 2010년에 그예 문을 닫습니다. 돈벌이가 잘 안 된다면서 출판사와 전교조 간부들은 ‘교육 월간지’를 ‘전교조 기관지’로 바꾸었습니다. 잡지 《우리교육》을 만들던 일꾼들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쫓겨났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교사 권리를 지키거나 북돋우자며 일어선 전교조에서 ‘정리해고’를 했습니다.

 1990년 10월에 나온 통권 8호 《우리교육》을 펼칩니다. 지난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님이 쓴 글 하나 실려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문학 교육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시를 머리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쓰나? 시는 머리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이다. 아니 손과 발로, 온몸으로 쓴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도 그렇다. 아무것도 겪은 것이 없이 머리로만 재주로만 만들어 낼 수는 결코 없는 것이 시다(95쪽).”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시쓰기뿐 아니라 소설쓰기도 마찬가지이고, 동화나 신문글을 쓸 때에도 매한가지라고 느낍니다. 아니 글쓰기를 비롯해 집살림을 꾸린다든지 정치를 한다든지 교육운동을 한다든지 환경운동을 한다든지 똑같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머리로 할 수 없습니다. 머리로 생각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할 때에는 몸으로 합니다. 손을 쓰고 발을 씁니다. 온몸을 움직여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어린이 글을 읽습니다. 1990년에 경기 금광국 5년인 황미소 어린이는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고 우리 입장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어른이 싫어요. 우리들에게 학원을 몇 개씩이나 보내고, 조금만 잘못해도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잖아요(12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 공부만 시키는 어른들 삶은 1990년이나 2010년이나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1980년에도 1970년에도 엇비슷했습니다. 2020년이 다가온대서 나아질 성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온갖 학원에 집어넣는 매무새도 그렇고, 아이들을 두들겨패거나 윽박지르는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우리 어른들 삶은 그리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1990년에 스물이었다면 올해에는 마흔이요, 이무렵에 서른이었다면 올해에는 쉰입니다. 마흔이 되고 쉰이 되며 예순이 된 2010년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얼마나 씩씩하며 튼튼하고 슬기로운 삶을 일구고 있는지요. 우리 어른들 스스로 씩씩하며 튼튼하고 슬기롭기에 돈벌이 하나 때문에 교육잡지 목숨줄을 끊어도 괜찮은지요.

 교육잡지 목숨줄을 끊은 우리교육 출판사는 “여름방학 어린이책 파격! 균일가전!!”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우리교육에서 펴낸 낱권책을 모조리 2000원씩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서울 홍대 앞에서 벌어지는 와우북페스티벌이라든지 서울 삼성동에서 이루어지는 서울국제도서전이라든지 경기 파주에서 마련하는 북페스티벌 같은 자리는 으레 ‘에누리 책잔치’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좋은 책을 싸게 사고판다’고 하지만 좋은 책이라면 알맞춤한 값을 붙여 올바로 사고팔아야 할 텐데, 몸집이 커지는 출판사들은 자꾸 ‘책 팔아 더 많은 돈 벌기’로 쏠립니다. (4343.10.1.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