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여행
신혜 글.그림 / 샨티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2 ― 힘든 앎, 힘든 사람, 힘든 뜻
 : 신혜, 《먼지의 여행》


- 책이름 : 먼지의 여행
- 글ㆍ그림ㆍ손글씨 : 신혜
- 펴낸곳 : 샨티 (2010.2.16.)
- 책값 : 12000원



 (1) 아이하고 보내는 하루란


 아이와 함께 바깥마실을 나오려고 했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아직 아이 비옷을 마련해 주지 못한 까닭에 아이를 걸릴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애 아빠가 아이를 한팔로 안고 우산을 받으며 걷습니다. 아이도 비 때문에 걸리지 못함을 알고 있는지 아빠한테 안겨 가면서도 내리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느 때라면 바둥바둥하면서 얼른 내려 달라 했을 테지만 아빠 품에 꼬옥 안긴 채 한손으로 우산대를 잡습니다. 아이는 품에 안겨 우산을 함께 잡으며 다니고 싶은가 봅니다.

 아이를 안고 우산을 받아 본 분은 알 텐데, 이러한 몸으로 몇 분 걸어도 팔이 저리고 힘듭니다만 한두 시간쯤을 이렇게 걷는다 한다면 내 팔은 내 팔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팔이 저리더라도 이렇게 걸을밖에 없고, 이렇게 걷는다고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팔은 저리지만 세 식구가 함께 바깥마실을 할 수 있으니 기쁩니다.

 생각해 보면 여느 식구들은 으레 자가용을 몰고 있으니,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날이 맑건 흐리건 이냥저냥 자동차에 타고 움직입니다. 추운 날에 추위를 느끼며 걸을 일이 없을 테고, 더운 날에 더위를 느끼며 걸을 일이 없겠지요. 눈이 오는 날 눈을 느끼며 걷는 요즘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비가 오는 날 비를 느끼며 걷는 오늘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워낙 아기수레 없이 아이를 키웠고, 자가용 또한 없이 아이와 살고 있습니다. 아이랑 바깥마실을 다닐라치면 아이 기저귀며 옷가지며 잔뜩 짊어지고 다닙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느 식구라 한다면 자가용에 아기수레며 갖가지 물건이며 잔뜩 챙기고 다닐 테지만, 우리 식구는 아기 옷가지에 천가방을 여럿 챙기고 다닙니다. 걸어서 저잣거리를 찾아가고, 한참 둘러본 다음 물건을 장만하며, 장만한 물건은 등에 메는 가방과 어깨에 걸치는 천가방에 담아 집으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라면 아이까지 품에 안고 우산을 받는 몸으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제 어린 날을 더듬어 봅니다. 더 어린 날은 떠오르지 않으나 일고여덟 살 적부터 떠오르는데, 어머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물건을 장만했습니다. 어머니가 물건 사러 나갈 때에 따라나서면 시내 구경도 하지만 길에서 무언가 얻어먹을 수 있고, 어머니랑 함께 어울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버스 타기 또한 신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가 장만한 물건을 함께 나누어 들고 오는 일쯤이야 아무것 아닙니다. 시내 구경에 버스를 타고 주전부리를 할 수 있다면 무슨 심부름인들 못하겠습니까. 어린이일 때 어머니와 저잣거리 마실을 다닌 일이 몸과 마음에 생생히 아로새겨졌기 때문이라 할 수 없으나, 우리 아이하고 저잣거리 마실을 다닐 때에는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바깥바람을 함께 쐬고 돌아오는 길이 즐겁습니다. 이래저래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 집으로 돌아온 뒤 그대로 나가떨어지거나 곯아떨어지더라도 저녁나절에 깨어나고 보면 개운하고 후련합니다.

 저잣거리에 나간다 한들 따로 무언가 가르치거나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아이 스스로 이리 촐랑 저리 촐랑 들여다보고 구경하는 양을 지켜봅니다. 아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면서 사람들한테 알은체를 하고 웃음을 띄우며 때때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넌!” 하는 한 마디를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른들은 사탕이나 만두나 국화빵이나 떡을 한 점 집어 주곤 합니다.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할 줄 몰라 아이보고 “자,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하고 꼬박꼬박 말을 걸지만 두 번 가운데 한 번만 고개를 까딱까딱 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어린 날을 되새기노라면, 어머니를 따라나선 저잣거리 마실도 즐거웠고 홀로 심부름을 하던 일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리고 달음박질을 하며 가게로 갑니다. 어머니가 내어준 돈은 한손에 꼭 움켜쥐고 달립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으나, 주머니에 넣고 달리다가 빠진 적이 있습니다. 가게에 닿고 보니 돈이 없어 화들짝 놀라 오던 길을 헐레벌떡 돌아가 돈을 주워 다시 달린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가게에 들어서기 앞서 후욱 하고 큰숨을 들이쉬며 숨을 고릅니다. 가게 이곳저곳을 잽싸게 둘러보고서는 사야 할 물건을 얼른 골라 셈대에 올려놓습니다. 셈을 치를 때면 으레 가게 아주머니가 “심부름을 왔구나. 착하지.” 하면서 50원쯤 에누리를 해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에누리를 해 주시면 10원이든 50원이든 몰래 감추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 나중에 오락실에 가거나 군것질을 합니다. 때로는 만화책을 사고 어느 때에는 우표를 삽니다.

 퍽 이르다고 할는지 모르나, 집에서 스무 달짜리 우리 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밥을 하며 먹을거리 한 점을 포크에 찍어 “자, 아빠 드시라고 해.” 할 때가 있고, 페트병에 담긴 물병을 아이한테 안기며 “자, 엄마한테 갖다 드리렴.”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걸상을 끌어 개수대 앞에 착 갖다 붙이고는 부엌살림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만지며 놀기를 좋아합니다. 방에 창문을 열어 놓으며 공기갈이를 할라치면 방까지 걸상을 들고 올 수 없으니 낑낑대면서 창가에 걸상을 대 달라고 합니다. 걸상을 번쩍 들어 창가에 대 놓으면 아이는 영차영차 기어올라가서는 창가에 착 붙고는 바깥바람을 쐬며 골목길을 내려다봅니다.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며 지켜보면, 아이는 쉴새없이 뛰고 걷고 말하고 놀고 달려듭니다. 아직 스스로 오줌을 가리지 못하니 때 맞춰 쉬를 시킵니다. 배고파 할 즈음 밥을 차려서 먹이고, 하루에 두 번쯤 똥을 눌 때에 잘 받아서 치우고 닦입니다. 엊그제 아이가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요 며칠 못 씻기지만, 날마다 아침빨래를 하면서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깁니다. 그러고는 낮에는 낮잠을 한 번 재웁니다. 낮잠을 안 자고 놀 때가 있으나, 이렇게 낮잠 없이 놀면 저녁에는 아이가 부리는 짜증이 대단하며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데다가 새벽에 자꾸 깨며 칭얼거립니다. 어제 한 빨래가 다 말라서 갤 때쯤 아이는 어느새 다시 배가 고파 저녁을 차려야 하고, 저녁을 차리고 함께 먹고 치우고 하노라면 그만 하루해가 저뭅니다.

 이 나라 숱한 남자들이 몸소 ‘전업주부’ 노릇을 해 본 적이 없는 까닭에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빠듯하게 하루를 보내며 날짜를 모르는지’를 살피지 못합니다. 밥때는 왜 이리 금세 돌아오고, 빨래는 왜 날마다 수없이 쌓이며, 날마다 치우고 쓸고 닦아도 이튿날이 되면 어인 먼지가 이리 다시 쌓이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아이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히고 바깥마실을 시킵니다. 혼잣몸으로 아이를 훌륭히 잘 돌보면서 돈벌이까지 척척 해내는 분이 있다지만, 이렇게 척척 해내는 분들은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기에 당신한테 쏟는 시간이 하나 없고,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면 갑작스레 몸이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오늘도 아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안기고 하다가는 두 시간 만에 비로소 ‘혼자 놀기’를 합니다. 혼자 놀기란 온갖 인형과 놀잇감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어른이 보기에는 ‘아무렇게나’이고 아이한테는 아이 ‘나름대로’) 늘어놓는 놀이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늘어놓기만 하다가 요사이는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도 하지만, 이렇게 돌려놓는 일은 드뭅니다. 인형을 통에서 다 끄집어 낸 다음 인형 담던 통에 아이가 들어가 쭈그려앉으며, 머리띠를 둘이나 셋이나 넷을 한꺼번에 머리에 씌우고 헤헤거리며 웃습니다. 아빠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 아이는 인형통에 들어가 쭈그려앉다가는 아빠 사진기를 끙끙대며 잡아당겨서는 켭니다. 그런데 또 끙끙대기에 “왜?” 하고 물으며 바라보니, 사진기에 사진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앞서 메모리카드를 비웠거든요. “미안해. 곧 사진 만들어 줄게. 엄마 사진 찍자.” 하면서 엄마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아이한테 사진기를 건넵니다. 지난주쯤 엄마가 팔찌 놀잇감을 아이한테 보여주었더니 아이는 길쭉한 종이를 팔찌처럼 팔에 감으며 놉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하나를 들고 아빠한테 다가옵니다. 이 그림책을 펼쳐서 보여주고 읽어 달라며 “빠빠! 빠빠!” 합니다. 그림책을 두 번 읽어 주고, 길쭉한 종이를 아이 왼팔에 감싸 줍니다. 종이 팔찌를 아이가 벗기더니 끙끙거리기에 다시 팔찌를 만들어 주니 팔찌가 벗겨질세라 한쪽 팔을 가만히 든 채 사진기로 다가가 한 번 들여다보고는 엄마 무릎에 앉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옹알옹알거리면서 온 방을 돌아다닙니다. 이제 곧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테니까 밥상을 차려야겠지요. 오늘 하루도 참으로 빠르게 한 시간 두 시간 지나갑니다. 어버이한테는 참으로 빠른 나날인데 아이한테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아이한테는 더없이 더딘 나날일까요. 어버이한테는 그지없이 고단하고 바쁘니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더 짧다고 느끼는 셈이고, 아이한테는 더 오래 많이 놀고픈데 엄마 아빠가 오래오래 저하고만 놀아 주지 않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면서 길디긴 하루라고 느낄까요.


 (2) 힘들게 살며 힘들게 얻은 《먼지의 여행》


 1984년에 태어나 ‘여느’ 아이와 같이 여느 제도권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다음 대학교까지 마친 분이 어느 날 문득 ‘남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비슷하거나 똑같이 살아야 하는 나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조용히 부모님 집을 떠납니다. 부모님 곁에서 떠나 홀로 돈 없이 나라밖을 돌아다닌 젊은 넋은 한 해 동안 일본과 인도와 네팔과 태국과 중국을 거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짧지 않은 나날을 나라밖에서 돈 없이 돌아다니며 마주한 사람과 삶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든 젊은 넋은 도무지 ‘제도권 틀 그대로’ 살아갈 재주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목숨 하나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면서, 이렇게 먼지와 같은 목숨이기에 참 좋고 가볍고 밝으며, 나한테도 남한테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아님을 새삼 느낍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갈피잡지 못하고 있으나, “괜찮아. 다음 길은 다음 걸음에 보일 거야.” 하는 생각을 고이 품습니다.

 젊은 넋은 스스로 제도권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던 나날과 굳이 용을 쓰지 않으면서 제 삶고리를 느끼며 보내던 나날을 글과 그림으로 남겨 놓습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제도권 울타리에서 하루하루 보냈을 때에는 구태여 제 삶을 글이든 그림이든 남길 까닭이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내 삶이든 네 삶이든 다 비슷비슷하니까요. 내 어버이 삶이든 동무 어버이 삶이든 거의 같거나 닮았으니까요. 이리 보거나 저리 보거나 엇비슷한 옷에 차림에 얼굴에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니까요.

 내 길이 아닌 제도권 길을 걷기에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슬픔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아니, 알아야 할 까닭이 없고, 알지 않아도 되며, 알지 않더라도 잘못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애써 눈을 두어 살피라고 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남들이, 아니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바라거나 시키는 대로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나다운 삶을 나답게 찾거나 즐길 까닭이 없는 한편, 나다운 삶을 나답게 찾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좀더 높다 하는 대학교 졸업장을 움켜쥐면 되고, 이 졸업장으로 연봉을 한푼이라도 더 주는 큰 일터를 찾아서 들어가면 되며, 정 안 되면 집식구들이 꽤 잘사는 짝꿍을 찾아서 시집장가를 가면 되는 세상 얼거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맞는 좋은 짝꿍을 찾아 빛나는 사랑을 꽃피우는 젊은 넋이 있습니다만, 이 나라 젊은 넋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빛나는 사랑’을 스스로 하도록 배운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이 나라 젊은 넋이나 푸른 넋이나 어린 넋 가운데, 제 둘레에 빛나는 사랑을 곱게 꽃피우는 어른을 마주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늘 보느니 돈바라기 어른이요, 으레 보느니 이름바라기 어른이며, 노상 보느니 힘바라기 어른입니다. 국가경쟁력이니 세계경쟁력이니 무한경쟁이니 하면서 나다운 내 삶을 찾는 길은 경쟁력이 하나도 없는 못난쟁이 헛놀음이라는 생각만 키울 뿐입니다. 주식이니 펀드이니 아파트이니 투자이니 처세이니 경영이니 자기계발이니 하면서 옳은 삶이나 바른 삶이나 예쁜 삶이나 멋진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살도록 내몰리고 있을 뿐입니다.

 힘겹게 떠돈 삶을 《먼지의 여행》이라는 책에 조촐히 담은 앳된 넋은, 여태껏 보낸 스물 몇 해를 훌훌 털어 보내면서 아무것도 또렷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가고자 다짐합니다. 아무래도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을 키워 온 어버이한테는 가시밭길일 테지만, 이 책을 쓴 젊은 넋으로서는 풀숲길이리라 봅니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으며 한 해 두 해 온갖 풀이 돋아나고 자라난 길 없는 길이리라 봅니다. 왜, 사람들 떠난 자리이면 시골이든 도시이든 풀이 돋아나잖아요. 서너 해쯤 지나면 제법 큰 나무가 자라나 있고, 사람손을 하나도 안 탄 채 열 해쯤 되면 어느새 집 모양은 찾아볼 길이 없이 숲으로 바뀝니다.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은 바로 이러한 풀숲길을 찾아서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풀숲길에 발자국을 남겨 젊은 넋 뒤로 누구나 따라올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때로는 젊은 넋 발자국 하나 안 남기면서 풀숲에 조용히 녹아들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몇 사람쯤 밟는다고 해서 풀숲은 꺾이거나 시들거나 사라지지 않거든요.

 곰곰이 헤아려 보면,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은 이녁대로 반가운 풀숲에 들어가 풀빛을 온몸 가득 받으면서 푸른빛을 받아들인다고 하겠습니다. 전업주부이자 밥벌이하는 아빠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저대로 살가운 풀숲에 들어가 제가 좋아하는 풀빛을 온마음 가득 껴안으면서 푸른결을 곰삭인다고 하겠습니다. 남이 걷는 길을 괜히 따라 걸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좋고 반가우며 살갑다면 남이 걷는 길을 따라 걷는 노릇이 아니라, 남이 걸었든 안 걸었든 내 깜냥껏 신나게 걷는 셈입니다. 내가 걷는 길이기에 가시밭길이어도 좋고 풀숲길이어도 좋으며 한길이어도 좋고 골목길이어도 좋습니다. 내가 바라는 삶이기에 혼자 살아도 좋고 옆지기를 만나 살을 섞어도 좋으며 아이를 낳아 복닥이며 살아도 좋습니다.

 안 힘들게 살아가면 안 힘들게 살아가는 대로 세상을 보면서 내 삶을 다스립니다. 힘들게 살아가면 힘들게 살아가는 대로 세상을 부대끼면서 내 삶을 추스릅니다. 주머니 넉넉한 채 살아가면 주머니 넉넉한 눈높이로 세상을 헤아리면서 내 삶을 보듬습니다. 가난한 몸뚱이로 살아가면 가난한 몸뚱이로 세상을 살피면서 내 삶을 어루만집니다.

 손글씨와 손그림이 정갈한 책 《먼지의 여행》을 덮으면서, 이 책을 일구어 낸 젊은 넋 ‘신혜’ 님이 앞으로 서른 살을 맞이할 때까지는 어떤 길을 얼마나 더 힘겹고 벅차게 부딪히고 뒹굴면서 새로운 얼굴과 몸빛으로 거듭날는지 궁금합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즐겁게 잘 싸우겠지요. 즐겁게 잘 싸우고 즐겁게 잘 어깨동무하며 즐겁게 잘 울고 잘 웃으며 하루하루를 뜻있게 되새길 테지요.


 (3) 힘들이지 않고 다시 읽는 글월


 유행처럼 나도는 손글씨나 손그림이 아니라, 젊은 넋 스스로 반가이 맞이했던 삶을 꾸밈없이 담아낸 손글씨와 손그림으로 이루어진 책 《먼지의 여행》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던 대목을 되읽습니다. 가슴에 아로새기는 책은 두 번 되읽고 세 번 곱읽을 때마다 새록새록 스며듭니다. 성경을 수없이 되읽고 곱읽는 분들은 어떤 교리나 주의주장이 아닌 당신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픈 마음으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수없이 되읽고 곱읽겠지요. 저는 저한테 반갑고 기쁘며 고마운 책을 하느님 말씀으로 삼으며 차근차근 되읽고 곱읽습니다. (4343.3.5.쇠.ㅎㄲㅅㄱ)


[11∼13, 18, 44∼45쪽] 이 느낌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자라며 고생도 해 보고 사람들과 정도 나누며 살아온 부모님은 이미 알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도시에 살면서 시키는 공부만 하고 거래와 경쟁을 당연히 여기며 자란 나에게는 특별했습니다 … 대학을 졸업할 때쯤 사회와 부딪치며 다행히도, 내가 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6년 동안 책상에 앉아 공부했지만, 비싼 돈 들여 입시 교육을 받았지만,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건 배운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학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밖에 얻은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 아, 이렇게 길들여져 있었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낯설 정도로 하라는 것만 하고 배우라는 것만 배우도록. 권위자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13, 28∼29, 32쪽] 돈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돈이 먼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먼저가 되더군요 …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순수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느낌은 정말 뿌듯하고 기쁜 거였다 … 내 주변 친구들은 모두 바빠서 한 달에 한 번이나 겨우 만났다. 만나도 각자 고민거리가 많아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했다. 부모님과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의견 차이 때문에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 가진 게 없어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돈이 있으면 자기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면 되니까 그 이상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을 필요가 없었지만 돈이 없을 때는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야 필요한 걸 얻을 수 있었다.

[50, 51, 136, 161쪽]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제일 바라는 건 그저 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사는 건데, 그분들이 정해 놓은 길이 내 행복과 건강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부모님이 가장 바라는 것을 위해서라도 지금 갈등을 각오하는 게 낫지 않을까? … 난 부모님과 대화할 줄 몰랐다. 부모님도 나와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 아름다운 일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은 거라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 콜카타에 있을 때 한 한국인 여행자가 말했다. “당신이 배우고 느낀 사랑을, 당신의 변화를, 부모님께도 느끼게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람살라에서 만난 여행자가 말했다. “네가 진실한 삶을 위해 사는 이상, 너의 부모님도 그런 삶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어.”

[80쪽]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 없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면, 머리속이 점점 단순해졌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지금 내 마음을 사랑에 열어 두는 것에 집중하게 됐다 … 돈 가지고 여행하며 돈 계산, 여행 예산 짤 시간에 우리는 만족한 마음으로 많은 친구를 사귀며 멍하니 떠가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95, 124, 178쪽] 다행히, 길에서 순례자들에게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약을 나눠 주었다. 나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으로 느끼고 도와준 그들이 고마웠다 …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홀로일 때,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내 마음을 따라 여행하면서, 없이 사는 것이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다.

[133∼134쪽] 사진 찍기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색연필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 카메라로 찰칵 찍고 말 순간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리며,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나를 오래 쳐다보고, 나도 아이들을 오래 바라봤다.

[189, 207쪽] 천국은 죽어서, 예수를 믿어야만 가는 게 아니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을 실천하면, 살아 있는 그 순간이 천국이 되는 거였다 … 나를 둘러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 나아가는 것, 이게 진짜 예술이 아닐까? 이렇게 나의 삶이 예술이 되었을 때 내가 일상에서 표현하는 모든 것들도 예술이 될 거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건 글 그림 음악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이 분열하지 않는 일, 하나가 되는 일, 그 길을 찾는 일이다.

[220쪽] 나에게 여행은 유명한 곳을 구경하려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 익숙한 영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필요한 걸 배우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색다른 쇼핑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쇼핑은 어디를 가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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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웅진책마을 52
오카 슈조 지음, 김정화 옮김, 이윤엽 그림 / 웅진주니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사람만 사는 아파트숲에서 생각하는 자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6] 오카 슈조,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도시 물질문명, 환경파괴, 입시지옥, 공장과 기계, 자동차와 아파트, 이기주의와 무관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 들이 얼크러져 자꾸자꾸 뒤틀리는 사람들 삶을 ‘동물 우화’ 틀로 담아낸 어린이문학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읽었습니다. 어린이문학에서 이 같이 무겁고 큰 이야기를 다룰 수 있구나 싶어 놀라운 한편, 곰곰이 헤아리면 오늘날은 어린이문학에서고 어른문학에서고 이와 같은 이야기는 잘 안 다루고 있으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이라고 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즐겨 다룬 문학작품이 많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다룬 인문책이라고 얼마나 되겠습니까. 곧잘 나오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히는 일은 드물고, 더러 나오기는 하여도 밑바탕까지 샅샅이 살피며 다루어 내지는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우리 삶터를 좀더 낱낱이 깨달으며 하나하나 바로세우거나 아름다이 가꾸고자 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를 꾸준히 다루면서 가다듬으리라 봅니다. 아쉬운 대목은 아쉬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바로잡을 테고, 반가운 대목은 반가운 그대로 껴안으면서 널리 나눌 테지요. 그러나 모두들 더없이 바쁜 나머지, 내 삶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다들 그지없이 힘들고 돈벌이에 매인 탓에, 나와 내 이웃 삶이 어떻게 엮이어 있는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 “아휴, 어떡해.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하지? 다음주부터 학원에서 중학교 입시 수업이 시작되는데…….” 요시코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 학원 걱정을 하다니, 난 기가 막혀서 요시코를 보았다. “중학교 입시? 아직 5학년인데?” “유명한 사립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지금도 좀 늦은 편이야. 넌 걱정 안 돼? 공부 뒤처질 텐데.” ..  (60쪽)


 우리는 어린이였을 때부터 신나게 뛰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어린이였을 때 골목이든 들판이든 갯벌이든 바다이든 산이든 어디이든 마음껏 쏘다니며 신나게 뛰어놀았다고 떠올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나이가 제법 든 분들뿐입니다. 1980년대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나 1990년대 뒤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재미있고 거리낌없이 뛰놀던 어린 나날’을 되새길 만한 분이 얼마나 될는지요. 1970년대로 살짝 거슬러 올라가 헤아리면 또 얼마나 될는지요. 날짜를 앞당겨 2000년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얼마나 되지요? 2010년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랄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마땅히 있다고 할 만한지요?

 아파트숲에 꽁꽁 갇힌 조막만한 놀이터에 햇볕과 바람과 무지개와 빗줄기와 눈발이 얼마나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쉴새없이 오가는 자동차들이 뿜는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가 어린이한테 얼마나 좋은 동무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흙 한 줌이나 돌멩이 하나를 쥐어 보도록 할 만한 터가 어느 만큼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물수제비를 뜰 만한 물가나 바닷가가 아이들 보금자리 가까이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롯하여 우리 아이들 모두한테 ‘좋은 어린 날’이 아닌 ‘더 이른 나이부터 공부에 매달려야 더 좋은 대학교에 남을 누르고 들어갈 수 있고, 대학교에서도 더 공부만 붙잡아야 더 크고 돈벌이 잘 되는 회사에 들어가 남을 내려다보며 값진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길들이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 아빠는 산에 오를 때는 늘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면서 옷과 스웨터, 비상 간식과 라이터를 반드시 배낭에 챙기게 했다. 솔직히 나는 그걸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빠가 옳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건빵과 초콜릿으로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도 조금 덜하고 추위가 사라지자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 산포도는 시었다. 으름은 달았지만 씨가 너무 많았다. 처음으로 날밤을 먹었다. 하지만 버섯은 날로 먹을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지만 배는 조금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동물들은 이런 것만 먹고도 참 팔팔하게 잘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  (14, 37쪽)


 빨래를 할 때면 늘 곁에 붙어서 아빠가 빨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따라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빗자루를 들면 저도 빗자루질을 하고파 하고, 걸레질을 하면 저 또한 걸레질을 하고파 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이제는 키가 제법 자라 걸상에 혼자 낑낑거리고 올라서서는 엄마 아빠가 도마질을 하고 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곤 합니다. 젓가락질이며 책읽기이며 볼펜 쥐기이며 옆에서 늘 바라보는 대로 배우고 따라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백 마디 말로 가르칠 수도 있으나, 한 가지 몸짓보다 더 깊이 가르칠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몸짓이란 가르침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살아가는 매무새는 고스란히 아이한테 이어집니다. 대물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 어버이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를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 저희들 삶을 새롭게 꾸린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께서는 당신 삶을 어떻게 꾸리고 있으온지요. 바삐바삐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은 우리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며 어떤 몸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으온지요.

 스무 달짜리 우리 아이는 사진기를 제법 잘 다룹니다. 가끔 고 자그마한 손으로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는 찰칵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셈틀을 켤 줄을 알고, 자판을 두들길 줄 압니다. 여느 집 아이였다면 텔레비전을 켤 줄을 알 테며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돌릴 줄 알겠지요. 어버이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아이들이 귀로 가만히 들으면서 흥얼흥얼 따라하며 익힐 테고요.

 ‘신동’이라는 아이도 있겠으나, 아이일 때 곁에서 바라보는 그대로 쏙쏙 받아들이면서 배우고 커 가는 아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어버이들이 남녀평등을 잘 헤아리면서 살아간다든지, 이웃사랑을 즐거이 나누면서 살아간다든지, 잘못된 사회 얼거리를 바로잡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든지, 동네를 곱게 여미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든지 한다면, 아이들은 이러한 어버이 매무새를 스스럼없이 바라보고 배우며 제 몸으로 삭여낸다고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버이가 보여주는 온갖 얄궂거나 짓궂거나 씁쓸한 모습 또한 아무렇지 않게 배우고 따르고 길들어 간다고 느낍니다.


.. 순간, 손 안에서 버둥거리던 새끼 토끼가 천이 찢어진 틈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빨갛고 동그란 토끼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토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을 본 순간 도끼로 내리칠 기력이 푹 꺾여 버렸다. 하지만 이 토끼를 놓치면 나는 굶어서 꼼짝도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것은 죽음을 뜻했다. 가엾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토끼의 목숨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 난생처음 내 손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 먹으려고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무서운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156∼157쪽)


 어린이문학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은 이 땅 어버이들이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라고 일깨우고자 애씁니다. 아이들한테는 어버이들이 보여주는 얄딱구리한 모습을 고스란히 배우거나 물려받지는 말도록 깨우치려고 힘씁니다.

 ‘숲속 짐승들이 사람들을 잡아서 사람이 저지른 죄값을 따지는 대목’을 보면 멧돼지 검사는 “너는 마음에 걸렸고, 마땅찮았다고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적은 없었어. 생각은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하나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어. 연구실에서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고. 당신 연구는 대체 무엇을 위한 연구였지? 그저 당신은 자기가 좋은 일만 하면서 만족하고 살았지(98∼99쪽).” 하고 외칩니다. 멧돼지 검사는 농사꾼부터 학자와 도시사람과 어린이까지 무슨무슨 잘못을 저질러 숲을 망가뜨리거나 자연을 어지럽히거나 짐승들을 괴롭혔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지청구를 마무리하며 ‘자연 목장’에서 ‘원시 사람’으로 돌아가 살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자연 목장에서 목숨이란 무엇인가를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니다. 엉엉 울면서 자연 목장으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한 해 두 해 세 해 흐르는 동안 옳은 길을 깨달아 풀려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끝까지 옳은 길을 깨닫지 않으며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외치다가 죽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은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가장 깊이 들여다보거나 돋보아야 할 대목이라면 바로 ‘자연’이요 ‘자연다운 삶’이요 ‘자연스러운 사람’이라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책을 덮으면서 《금수회의록》(안국선,1908)과 《동물농장》(조지 오웰,1945)이라는 작품이 떠오릅니다. 한국사람이 쓴 《금수회의록》과 영국사람이 쓴 《동물농장》과 일본사람이 쓴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어슷비슷한 글감과 주제를 다룬다고 느낍니다. 영어권 사람들로서는 《금수회의록》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읽을 일이 없겠지요. 일본사람들로서는 《금수회의록》이라는 작품을 볼 일이 없을 테고, 영어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이 빚은 작품 《금수회의록》부터 《동물농장》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함께 읽은 사람으로서, 세 작품은 저마다 다른 눈높이와 눈썰미로 우리 삶을 걱정하고 우리 앞날을 밝게 일구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었다고 느낍니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그릇이 살짝 모자라고 번역 또한 조금 어설프구나 싶습니다.


.. 한여름 멱을 감으며 신나게 놀던 강도 이제 더러워져서 아이들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요.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었지만 오히려 개발로 인해서 사람들은 소중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잃고 말았어요. 이런 개발을 계속해서 밀어붙여도 괜찮을까요?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거라 할 수 있을까요? ..  (글쓴이 말)


 우리 집은 신문을 안 보고 텔레비전이 없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고는 꽤 동떨어져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이라든지, 이름을 바꾸어 네 줄기 큰강을 손질한다는 일이라든지, 다가온다는 선거라든지, 겨울올림픽이라든지 거의 어느 일에도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아니, 눈길을 못 둔다고 할는지 눈길을 둘 값어치를 못 느낀달는지 그렇습니다. 밖에서 만나거나 어울리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곤 하는데, 이런 소식 저런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 나라는 참으로 갈 길이 멀다고 느낍니다. 아니, 이런저런 소식이 아니더라도 동사무소에 가 보고 무슨무슨 공공기관에 가 보면 이 나라는 참 아찔하다고 느낍니다. 아니, 저잣거리 마실을 다니고 큰길로 한 발자국 나서고 보면 이 나라는 참 무시무시하다고 느낍니다.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정치판에서만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자락 구석구석에는 ‘또다른 이름으로’ 경부운하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얽어매는 국가보안법은 언제나 ‘또다른 이름으로’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곤 합니다. 과자봉지를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아이들을 볼 때에도, 좁은 골목을 무섭게 내달리는 오토바이와 자가용을 볼 때에도, 번쩍번쩍하는 옷가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을 볼 때에도, 커다란 할인매장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수없이 새로 짓는 아파트더미를 볼 때에도, 전철에서 먼저 타고 먼저 내리려는 사람들한테 밟히고 밀리면서도 늘 느낍니다. 우리 나라는 참 모질고 팍팍한 나라임에 틀림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모질고 팍팍한 나라인 까닭에 1908년에 일찌감치 《금수회의록》이라는 작품이 나왔고, 2010년에는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이 번역됩니다. 뒤틀리는 우리 삶터가 더는 뒤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어김없이 있어, 우리 모습을 우리 스스로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올바로 일구자고 용쓰는 사람들 땀방울이 하나둘 모입니다. 우리는 어영부영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인 한편으로, 아름답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한테는 바쁘고 힘든 삶 그냥저냥 맞추어 살자는 몸가짐 하나와, 바쁘고 힘들기에 더 즐겁고 알차게 살자는 매무새 하나가 함께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쪽 길을 고를지는 우리한테 달렸습니다. 내 삶을 어떻게 즐기면서 나눌지는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우리는 한결 곱고 맑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더욱 못나고 꾀죄죄한 사람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습니다. 한 달 벌이 다문 백만 원으로 기쁘고 벅찬 나날일 수 있고, 한 달 벌이 천만 원으로도 모자라고 어두운 나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도 있고 숲속에도 있으며 우리 마음과 몸 속에도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4343.3.4.나무.ㅎㄲㅅㄱ)


 ┌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웅진주니어 펴냄,2010)
 ├ 글 : 오카 슈조
 ├ 옮긴이 : 김정화
 ├ 그림 : 이윤엽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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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자, 빠작
심조원 지음, 원혜영 그림 / 호박꽃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큰보름날 맞이하는 애 아빠 마음
 [그림책이 좋다 73] 심조원(글)+원혜영(그림), 《까먹자, 빠작》



- 책이름 : 까먹자, 빠작
- 글 : 심조원
- 그림 : 원혜영
- 펴낸곳 : 호박꽃 (2010.2.16.)
- 책값 : 8500원


 (1) 애 아빠가 맞이하는 큰보름


 저녁나절, 천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신포시장으로 마실을 나옵니다. 한 시간 남짓 드러누워 골골대던 몸을 일으켜 무언가 먹을거리를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섭니다. 때는 아홉 시를 훌쩍 넘겼습니다. 저잣거리 사람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들어갈 무렵입니다. 늦은 때에 저잣거리를 찾아온들 달리 무슨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으랴 싶지만, 한 번 슥 돌아보고자 합니다. 저잣거리 들머리에서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바닥에 땅콩을 깔아 놓고 됫박으로 팔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낮나절에 이웃사람이 “부럼 나물 드셨어요?” 하고 안부인사를 하기에 “네? 그럴 겨를이 없어요.”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정월대보름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언제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설날에는 그때가 설이라고 알기는 했으나 설을 쇠고 나서 큰보름이 찾아오는지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저녁 느즈막한 때에 저잣거리 길바닥장사를 보고서야 ‘큰보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땅콩 됫박 가져가세요. 사천 원인데 삼천 원에 많이 드릴게요.” 하는 말씀에 “네, 됫박 하나 주셔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에누리를 안 해 주셔도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늦은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가시고 남은 물건 펼쳐 놓은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밤부터 다시금 몹시 아파하는 옆지기는 한낮이 되도록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이른아침에 빨래를 하며 아이한테 물놀이를 시키고, 물놀이를 시킨 다음 씻기며, 씻긴 다음 밥을 해서 먹입니다. 옆지기는 한낮이 되어 겨우 일어났으나 관장을 두 번 하고 속을 비운 뒤에야 겨우 말문을 엽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쓰러질 판입니다. 아이한테 겨우 밥을 다 먹이고 오줌을 누인 뒤에는 그대로 벌렁 드러눕습니다. 그렇다고 오래 눕지 못하고 몇 분 만에 다시 일어납니다. 도서관이며 생협이며 들러야 한다는 옆지기 말을 들으며, 나도 일어나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옷을 입히고 걸음을 걸립니다. 차가 많이 오가는 길가를 걸을 때에는 품에 안습니다. 조금씩 키가 크고 뼈가 단단해지는 아이를 안고 걷다 보면 팔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이가 스스로 걸을 줄 아니까 아주 갓난쟁이였을 적하고 견줄 수 없이 수월해진 셈 아닌가 싶으면서도, 외려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한결 고단하고 벅차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쩌면 지난날보다 오늘이 힘겹고, 오늘보다 앞날이 힘들지 모릅니다. 이듬달이나 이듬해를 맞이하며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면 오늘 하루란 그리 힘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첫 세이레를 하던 때에는 잠 한 숨 잘 수 없었고, 백일 때까지는 하루 두 시간쯤 잤는가 싶으며, 돌 때까지는 길게 자야 삼십 분인 나날이었습니다. 아이가 열넉 달쯤 될 무렵까지는 밤이면 시간마다 깨어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빨래와 밥하기와 씻기기로 온 하루를 보내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젖떼기를 하는 요즈음처럼 고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느새 훌쩍 지나고 만 나날이기에 지난날은 그럭저럭 보냈고 바로 눈앞에 닥친 오늘 하루가 가장 힘겹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땅콩 한 됫박과 얼음과자 둘과 보리술 두 병과 먹는샘물 여섯 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헤아립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설이든 한가위이든 큰보름이든 삼짓날이든 동짓날이든 단오날이든 챙길 겨를이 없다고. 내 몸이 어떠한지 살필 틈이란 배부른 소리이고, 아이키우기를 하는 가운데 옆지기 보살피기를 알뜰히 하기에도 허리가 휜다고. 그러나 아이키우기와 옆지기 보살피기와 집살림 꾸리기 어느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나한테 명절이란 없고, 나한테 생일이란 없었으며, 나한테 무슨 기림날이란 없다고.

 젖을 안 준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애 엄마가 겨우 달래고 토닥이며 재워 조용해진 새벽녘, 아이가 몇 시간쯤 칭얼거렸나 어림하니 세 시간쯤입니다. 우는 소리가 그치니 참으로 조용하구나 하고 새삼 느끼면서, 이렇게 흐르는 삶일 줄 모르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지를 곱씹습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흐르는 삶일 줄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니, 살피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과 함께 궂은 일이 찾아올 테고, 반가운 일과 맞물려 얄궂은 일이 찾아오는 삶이니까요. 좋으면 좋은 대로 내 삶이고, 궂으면 궂은 대로 내 삶입니다. 더 낫거나 더 못한 삶이란 없습니다. 옆지기와 아이를 함께 낳고 기르는 길에서도 더 잘 키우거나 더 못 키우는 매무새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결대로 사는 동안 아이가 제 결을 잘 느끼고 찾으면서 클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손을 잡는 길벗이라고 느낍니다. 아이가 많이 어려 이닦기를 홀로 못하니 아빠가 칫솔을 들고 살살 닦아 주고 젓가락질도 맡아서 해 주지만, 이렇게 돌본다고 하여 아이가 어버이 뜻대로 살아가는 목숨이지는 않습니다.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고 잠을 더 달게 잤다거나 살림이 더 알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옆지기를 만나지 않고 홀로 살림을 꾸렸다고 더 넉넉하거나 즐겁게 제 삶을 꾸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주는 만큼 받는 삶이 아니요, 받은 만큼 주는 삶 또한 아니라고 느낍니다. 곱다시 흐르는 삶이요, 살며시 보듬는 삶이며, 나란히 붙잡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아플 때에는 아프고, 쉴 때에는 쉬며,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고, 배고플 때에는 먹으며, 웃을 때에는 웃고, 울 때에는 우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날짜도 시간도 햇수도 나이도 또 뭣뭣도 제대로 가눌 새 없이 지나는 삶이니, 명절이고 생일이고 기림날이고 챙긴다든지 생각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편으로 곱씹으면 무엇 하나 챙기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벅차고 고단한 삶이기에 명절이든 생일이든 기림날이든 마련하면서 아주 살짝이라도 돌이켜보면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들여다보도록 하자는 뜻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우리 세 식구가 함께 맞이하는 두 번째 큰보름이 되었습니다. 






















 (2) 큰보름이 아니어도 즐거운 책읽기


 땅콩이다,
 까먹자.
 빠작!
 부스럭부스럭 비벼서
 오독오독 씹어 먹자.
 아, 고소해.


 큰보름을 맞이하면 어떻게 부럼을 먹는지 보여주는 그림책 《까먹자, 빠작》을 봅니다. 방바닥에 깔아 놓고는 아이가 집어서 보도록 하고, 아이를 아빠가 무릎에 앉히고 읽어 주다가는, 아이 옆에 앉은 엄마가 그림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읽어 줍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글이 짧고 그림 장수가 적어 금세 한 번 읽고 또 읽는다지만, 참말 하루에도 여러 차례 되읽고 다시 보곤 합니다. 아이는 장난이나 재미 삼으며 책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 내어 방바닥에 펼쳐 놓고 넘길는지 모르는데, 어른 눈길로는 책읽기가 아닐 수 있어도 아이한테는 어김없는 책읽기입니다. 서로 바라보는 자리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며, 새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잣이다,
 까먹자.
 탁!
 갉작갉작 갉아서
 오물오물 냠냠.
 아, 향긋해.


 그림책 《까먹자, 빠작》(2010년 2월 16일)에 앞서 《옹기종기 냠냠》(2010년 1월 15일)이 나왔으며, 이에 앞서 《투둑 떨어진다》(2009년 10월 16일)가 나왔습니다. 퍽 어린 아이가 보는 그림책인 만큼 두툼한 종이로 되어 있는데, 두께가 있어 방바닥에 세워 놓아도 보기가 꽤 좋습니다. 이냥저냥 허술한 그림책이라면 이 그림책을 방바닥에 세워 놓지 않습니다. 그림이 퍽 고와 책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 손을 많이 타면서 책이 좀 찢어지거나 구겨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며, 이 책으로서는 싫지 않은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보는 책은 숱하게 넘긴 손자국이 아주 곱게 책등 한켠에 묻기 마련이고, 아이들이 보는 책은 숱하게 쥐어든 손때가 꼬깃꼬깃 책 곳곳에 깃들어 낡고 닳기 마련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들며 살던 지난날에는 그저 ‘좋다고 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이 좋다고 하는 책을 어떻게 즐기는가까지는 제대로 몰랐습니다. 아마, 아이를 안 낳고 어린이책 출판사에 그대로 남아 편집장 자리까지 눌러앉았으면 ‘좋다고 하는 책 만들기’에만 머물고 ‘좋다고 하는 책 즐기기’를 깨닫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내 짬을 더 낼 수 있으니, 더 많은 책을 보고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말을 뇌까리기만 하며 살았겠지요.

 저로서는 옆지기를 만나고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안 새로운 책읽기와 새로운 책삶을 날마다 새삼스레 깨우치고 있습니다. 예전에, ‘좋다고 하는 책’을 아이가 100번 넘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어머니한테서 들으며 홀로 속으로는 ‘그 책 말고도 좋은 책이 많은데 그 책만 100번을 읽었구나’ 하고 생각한 적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 어린이책은 꽤 좋은 책이었으며, 저 또한 100번 넘게 보기도 한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읽을 때에는 혼자서 눈으로 읽기만 하지, 소리를 내어 여럿이 함께 읽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이 앞에서 글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읽으며, 때로는 책에 적힌 글을 요모조모 바꾸어 가며 읽으며, 때로는 그림만 짚고 슬쩍슬쩍 넘어 가며 함께 보면서, ‘아이가 같은 책을 100번 읽었다’고 할 때에는 사뭇 다른 느낌이요 배움임을 헤아립니다. 애 아빠로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같은 책을 수없이 다시 읽고 또 읽을 때면, 새로 들출 때마다 다른 느낌이요 새 느낌입니다. 어제는 열아홉 달하고 열흘이 된 아이한테 읽힌 책이라면 오늘은 열아홉 달하고 열하루가 된 아이한테 읽히는 책입니다. 오늘 하루로만 보아도 아침 다르고 낮 다르며 저녁 다릅니다. 그리고, 아이가 혼자서 책을 넘기다가 손길과 눈길을 멈추고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림이 있으면 ‘응? 뭔 그림인데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지?’ 하면서 함께 들여다봅니다. 아빠나 엄마가 “뭘 보는데?” 하고 물으면, 아이는 “눈!”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림 무언가를 짚습니다. 아이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골목강아지 또는 골목고양이 그림이 있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멍멍!” 하면 아이는 가녀린 목소리로 “머머!”를 되풀이합니다.


 밤이다,
 까먹자.
 아닥!
 아드득아드득 깨물어서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자.
 아, 달콤해.


 토끼가 밤을 ‘아닥’ 하고 깨먹는 그림을 보면서 ‘토끼가 밤을 먹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토끼가 무얼 먹는지 낱낱이 들여다본 적은 없지 않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산에서 풀과 잎을 뜯어먹는 토끼라 한다면 나무열매인 밤이나 도토리도 먹을 터이고, 나무껍질이나 나무뿌리 또한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겨울에는 흰눈처럼 하얗게 털빛이 바뀌는 멧토끼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정작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흰털멧토끼를 보기란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멧토끼는 겨울에도 잿빛 털이 바뀌지 않는다는데, 잿빛이든 흰빛이든 토끼가 토끼답게 산과 들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먹이가 넉넉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큰보름을 맞이하여 먹는 부럼 나물을 보면, 우리가 손수 거두거나 기르거나 캐서 마련하는 부럼 나물이 아니라, 저잣거리나 마트에서 돈을 치르고 장만하여 먹는 부럼 나물입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님, 달님!” 하며 찾고 싶어도 달보다 환한 불빛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달만 환하게 잘 보이는 곳을 찾아나서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구름 없이 맑은 밤이면 어디에서고 올려다보며 두 손 모아 비손하는 달이 아니라, 애써 도심지를 벗어나야 올려다볼 수 있는 달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뒤져야 만나는 달일 테고요. 스스로 누리고 즐기면서 스스럼없이 깨닫고 살갗으로 받아들이는 큰보름 삶자락이라기보다, 달력에 아로새겨진 행사거리 큰보름이라고 할까요.


 달님 달님
 이빨 튼튼하게
 해 주세요.
 달님 달님 부스럼 안 나게
 해 주세요.
 모두 모두
 달님 보고 빌자.



 오늘 저녁, 구름이 걷히고 달님이 환하게 얼굴을 드러내면, 아이를 데리고 아픈 옆지기와 함께 달맞이를 할 만한 언덕받이를 찾아가고 싶습니다. 또는, 우리 집 앞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님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니, 굳이 먼 데를 찾아가기보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조용히 달님을 올려다보며 비손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픈 사람은 아픔 때문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새 기운을 북돋아 주소서 하고. 자라는 사람은 자라는 하루하루를 늘 싱그럽고 씩씩하게 받아들여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고 아끼는 착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고.

 새근새근 잠든 아이가 오늘은 언제 다시 깨어나 함께 놀자고 방방 뛸까를 헤아리며, 아이맡에 그림책 세 가지를 살며시 세워 놓습니다. 먼저 큰보름 이야기 그림책 《까먹자, 빠작》을 세워 놓습니다. 다음으로 가을날 떨어지는 열매 이야기 그림책 《투둑 떨어진다》를 세워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모락모락 나는 먹을거리 이야기 그림책 《옹기종기 냠냠》을 세워 놓습니다. 이제 애 아빠도 다시 잠자리에 누워 등허리를 펴야겠습니다. 기나긴 새벽이었습니다. (4343.2.2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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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돼지 생명의 숲에서 길을 묻다 1
조슬린 포르셰 & 크리스틴 트리봉도 지음, 배영란 옮김 / 숲속여우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1 ― 갇힌 삶, 갇힌 사람, 갇힌 밥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우리 안에 돼지》



- 책이름 : 우리 안에 돼지
- 글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 옮긴이 : 배영란
- 펴낸곳 : 숲속여우비 (2010.2.5.)
- 책값 : 7000원


 (1) 밥, 고기, 책, 삶


 스물한 달째를 맞이하는 우리 집 아이는 밥을 참 안 먹습니다. 왜 이렇게 밥을 안 먹을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보면, 아이 젖떼기를 억지로 하지 않아서일 수 있고, 아이가 밥을 그닥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젖을 먹으면 밥을 도무지 안 먹으려 합니다. 엄마가 젖을 안 주고 한참 굶겨야 비로소 밥을 날름날름 먹습니다. 아이 스스로 밥 있는 데로 쪼르르 달려가 손으로 조금씩 떠먹곤 하고요.

 아이는 저 스스로 몹시 배고플 때에는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거의 가리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그리 배고프지 않으면 이도저도 받아먹을 생각이 없이 고개를 홱 돌리거나 아예 밥상 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뒷걸음이나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나서 옆이나 뒤를 보며 실쭉샐쭉 웃습니다. 이러면서 물만 잔뜩 마십니다. 날 때부터 이런 몸이었는지, 엄마와 아빠한테서 이런 모습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은 하루에 두 끼니만 먹기는 하지만 그렇게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그제 저녁 세 식구가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부평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두 아이를 기르며 육아휴직을 하는 분 댁에 놀러갔습니다. 이분은 올 삼월에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한답니다. 이러면서 이분 옆지기가 육아휴직을 받아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는군요. 그런데 늘 바깥일이 많아 집에 늦게 들어와 버릇하는 아저씨가 하루 내내 집에서 아이하고 씨름하고 복닥이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얼마나 견디실는지 걱정입니다. 여자라고 아이키우기를 잘하도록 타고나지 않았고, 남자라고 아이키우기는 여자한테 떠맡기며 돈만 잘 벌어오면 되는 노릇이 아닐 터인데, 육아휴직을 받는다고 하루아침에 사뭇 달라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눈여겨볼 수 있다면, 아이키우기란 밖에서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 때와 견줄 수 없이 보람이 있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줄을 살갗으로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세상 모든 목숨은 몸을 살찌우는 밥으로 숨을 잇는 한편, 마음을 북돋우는 사랑으로 넋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늘 가까이 어울리며 껴안거나 보듬는 따순 손길이 있어야 씩씩하고 튼튼하게 큽니다. 어른이 된 몸이라면 더 자라지 않으나, 더 자라지는 않더라도 살결과 몸뚱이가 싱그러우려면 좋은 먹을거리뿐 아니라 좋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 서울에서 우리 집으로 나들이를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손님맞이를 하려고 집에서 걸어 오 분쯤 되는 곳에 있는 가톨릭생협에 찾아가서 불고기 한 근과 남새만두 한 봉지를 장만합니다. 고기 장만은 무척 오랜만입니다. 지난해 여름쯤 한 번 장만해 집에서 해먹은 뒤 거의 열 달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가톨릭생협에서 푸성귀하고 곡식하고 두부하고 국수만 사먹지, 다른 먹을거리는 사먹지 않습니다. 동네 저잣거리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고기가 당기는 일은 드물고, 굳이 고기를 먹을 생각을 안 합니다. 나물 반찬에 누런쌀로 지은 밥을 파는 곳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으나, 이러한 밥집을 찾기란 퍽 힘듭니다. 혼자 살 때에도 고기 반찬은 아주 가끔 해먹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술자리에서 고기 안주가 너무 자주 차려지니, 여느 밥자리에서는 고기 없는 밥상을 바라지 않느냐 싶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어울리다 보면 으레 ‘고기집 가자’는 소리가 나오며, 길가 밥집들은 하나같이 고기집투성이입니다.

 얼은 고기를 물에 담가 녹인 다음 당근과 양파와 고구마를 썰어 스탠냄비에 물 조금 붓고 익힙니다. 살짝 익을 무렵 다 녹은 고기를 넣고 소금과 설탕을 골고루 뿌린 뒤 버섯을 뜯어서 얹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불고기는 양파에 당근 조금 넣고 국물을 조금 많이 내어 밥을 비비거나 말아 먹을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하는 불고기 또한 국물로 밥을 비비거나 말 수 있는데, 지난날과 대어 보면 양파며 당근이며 다른 남새를 꽤 많이 넣습니다. 풀밭에 고기 한 점 있는 투로. 이렇게 불고기를 마련해 먹으면서도 고기 한 점에 반드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함께 먹습니다. 사람들과 고기집에서 어울려야 할 때에는 노상 밥 한 그릇을 먼저 시키어 밥과 함께 먹거나 집에서 싸 들고 온 밥을 꺼내어 같이 먹습니다. 고기만 먹으면 욕지기가 나오고 이빨이 아프기 일쑤입니다. 고기를 먹은 뒤에는 으레 속이 더부룩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 배속은 고기 탓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기보다 풀과 곡식이 제 몸에 한결 어울린다고 여길 수 있는 한편, 풀과 곡식이라 하여도 농약과 비료로 키운 풀과 곡식이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풀과 곡식일 때가 몸에 잘 받고 즐겁습니다. 시골 농사꾼이 손수 기르던 닭과 염소를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이러한 닭고기와 염소고기는 매우 부드러우면서 입맛을 돋우고 몸에 잘 받았습니다. 공장에서 사료와 항생제로 한꺼번에 잔뜩 키워서 내보내는 닭고기는 양념을 아무리 맛깔나게 하더라도 제 입에는 맛있지 않으며 여러 날 속이 메쓰껍습니다.

 아이한테 능금을 사서 먹일 때이든 다른 과일을 장만해서 먹일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여느 저잣거리에서는 좀더 값싸고 굵직한 과일이 있으나, 이와 견주어 조금 더 비싸고 못생긴 과일을 생협에서 사다 먹입니다. 작고 못생겼다 할지라도 비료와 농약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과일이 몸에 즐겁게 받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살아가며 내 몸을 살찌우는 먹을거리를 장만하려 할 때에는 나한테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사람들이 제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책을 장만할 때에 출판사에서 매긴 책값을 고스란히 치르며 장만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도 알맞게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더 값싸게 파는 책방을 뒤적거리기보다 내 넋을 살찌우는 책장을 넘기고 껴안는 데에 품을 들이고 싶습니다. 더 에누리를 해 주는 인터넷을 알아내기보다 내 얼을 북돋우는 책을 살피는 데에 시간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님하고 마주앉은 자리에서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요즈음 좋은 커피를 갈거나 내려받아 마시는 사람이 많은데, 커피알만 좋은 녀석으로 갖추고 물은 제대로 걸러서 마시지 못한다고. 제아무리 유기농 커피라 할지라도 수도물에 타서 먹을 때하고 ‘맑은 물’에 타서 먹을 때는 맛이 크게 다르다고.

 그러고 보면 맑고 시원한 물은 두 손으로 떠서 맹물로 마셔도 참 맛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늘 시원하고 맑은 물은 다른 아무것을 안 타더라도 온몸에 새숨을 불어넣어 줍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를 넘기면 물 이야기가 사이사이 나옵니다. 제아무리 밥을 맛있게 지어서 초밥으로 빚는다 하여도 ‘밥을 짓는 물’이 어떤 물인가에 따라 밥맛이 다르다고. 한 걸음 나아가 ‘처음 농사를 짓던 곳에 흐르는 물이 나락에 어떻게 스며들었는가’에 따라 깊은 밥맛이 다르다고. 마땅한 노릇이지만, 맑은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하고 지저분해진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에는 맛이 다릅니다. 맛뿐 아니라 우리 몸에 스며드는 숨 또한 다를 테지요.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 삶터는 물다운 물을 언제 어디에서나 시원하고 맑게 마실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쩔 길 없다지만 우리 터전은 밥다운 밥을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고 배불리 먹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탓만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 탓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 탓만이 아닙니다. 고속철도와 뉴타운과 아파트 탓만이 아닙니다. 독재정권 탓만이 아니며,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 탓만이 아닙니다.


 (2) 작은 책에 담은 큰 이야기


 《우리 안에 돼지》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책을 읽습니다. 1인출판사 ‘숲속여우비’에서 나온 세 번째 책입니다. 숲속여우비 출판사는 지난해에 《엄마가 사랑해》하고 《라니아가 떠나던 날》 두 권을 펴냈고, 올해에 《우리 안에 돼지》를 펴냈습니다. 《엄마가 사랑해》는 나라밖으로 입양된 한국 어린이 삶을 담은 책이요,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노동착취로 푸른 삶을 잃는 어린이 발자취를 담은 책이며, 《우리 안에 돼지》는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으며 사람 먹을거리 또한 엉터리가 되는 슬픔을 담은 책입니다. 세 가지 책 모두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아,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세상을 속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주는 줄거리요, 어른들이 우리 세상을 차분히 돌아보도록 돕는 짜임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어린이는 어린이다움을 건사하면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며 다시 들썩이거든요. 한자 하나만으로 아이들 삶이 팍팍하지는 않습니다. 숱한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은 어른들은 한자라는 또다른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으려 하니 더더욱 팍팍해집니다.

 정작 아이들한테 베풀거나 나눌 손길이란 지식조각이 아닌 사랑이지만,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사랑 한 줌 쥐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마다 억대가 넘는 돈을 들여 영어교실을 짓고 영어강사를 부르고 영어교재를 만들어 팔며 장사속 키우는 일로도 모자라 또다른 장사속을 불러들이려 합니다. 배움다운 배움하고 동떨어지는 학교입니다. 배움다운 배움을 생각하지 않는 교사이고 부모입니다.

 더 많은 교과서가 아닌 더 열린 운동장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시험이 아닌 더 싱그러운 학교 둘레 자연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지식조각이 아닌 더 열린 가슴이어야 합니다. 더 높거나 이름난 학교가 아닌 더 따순 손길이어야 합니다.

 시늉이 아닌 참다운 얼거리로 ‘비장애 어린이와 장애 어린이가 함께 배우는 터전’을 어린이집일 때부터 마련하여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두루 이어지는 틀을 짜야 합니다. 지식산업과 예체능산업만 키우는 교육 시설과 제도가 아닌, 저마다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름다운 넋으로 어우러지는 세상을 이루는 튼튼한 한 사람으로 이끄는 한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비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암퇘지들의 사진이 그렇게 예쁘게 나올 것 같진 않네요. 하지만 우리 돼지들도 쥘리앙네 염소들처럼 그렇게 바깥에서 키운다면, 틀림없이 염소들 못지않게 예쁜 모습으로 사진이 찍힐 거예요(21쪽).”라는 대목을 여러 차례 곱씹어 봅니다.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도록 하는 이란 바로 우리들입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이 돼지들 스스로 싫어하는 냄새 나는 돼지우리를 만들고 맙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인 까닭에 스물하루를 거쳐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무럭무럭 자라 중병아리가 되었다가 어른 닭이 되도록 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다음, 너덧새만에 부화기에서 알을 깨도록 하고 갖은 항생제와 사료를 먹여 고작 한 달이 안 되는 때에 ‘어른 닭으로 만들어’서 닭고기로 팔아치우도록 만듭니다.

 병아리에서 닭이 되는 삶고리가 아닌, 한 달이 안 되는 나날에 고기닭이 되어 버리는 공장입니다. 풀밭을 뒹굴며 땅을 파고 놀면서 통통하고 예쁘장하게 자라는 돼지로 보내는 삶자락이 아닌, 좁은 시멘트바닥에 가두어 하루빨리 살을 디룩디룩 찌워 얼른 팔아치우는 돈셈을 하도록 내모는 공장입니다. 곱고 튼튼하고 착하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어린이가 아닌, 어릴 때부터 더 빨리 더 많은 지식을 쌓아 더 애늙은이가 되어 버리게 한 다음, 더 이른 나이에 더 연봉 많은 큰회사에 사무직으로 일해야 하는 성과급 기계가 되도록 내모는 한국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풀과 고기에 우리와 같은 목숨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이웃과 동무가 나와 같이 고운 목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피지 않습니다. 나날이 더 갈라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입니다. 계급이 있는 우리 사회이며, 신분이 뿌리깊은 우리 나라입니다. 너무 바쁘고, 참으로 바쁘며, 더없이 바쁜 우리 겨레입니다. 고요한 아침나라라는 말은 벌써 옛말일 뿐 아니라,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시끄러이 밤을 새는 나라인 한국이요, 서로서로 더 빨리 많이 크게 누리려고만 하는 한국입니다. 나눔을 잊거나 잃고, 어깨동무를 모르거나 모르쇠이며, 두레를 버리거나 내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돼지》라는 작은 책은 우리 안에 갇힌 돼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면, 정작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란 돼지가 아닌 사람입니다. 스스로 우리에 갇히려 하는 사람이고, 서로서로 우리에 가두려 하는 사람입니다. 나 스스로 갇히고 내 이웃과 동무를 가두고 있습니다. 너른 들판이 아닌 쇠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푸른 하늘이 아닌 시멘트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깊고 맑은 바다가 아닌 돈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3) 작은 책 작게 읽기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대목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되읽으면서 생각을 가누어 봅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나 누구도 쉽게 알고자 하지 않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새삼 느낍니다. 누구라도 꼼꼼히 알고 느끼며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으나 누구라도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슬픔이 담겨 있다고 거듭 느낍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책에 갇힌 지식이 아닌 몸에 배는 슬기로 가다듬는 사람이 하루에 한 사람씩 늘어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러한 줄거리를 책에 머무는 지식이 아닌 삶에 녹아드는 넋으로 되새기는 사람이 한 해에 한 사람이라도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4343.2.26.쇠.ㅎㄲㅅㄱ)


[14, 15, 30, 55쪽] 축사 안에는 먼지가 많습니다. 구석의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올 때면 날아다니는 먼지가 다 보입니다 … 돼지의 몸은 창살 안에 갇혀 있으며, 십여 개의 칸막이로 줄지어 늘어선 공간에는 암퇘지 십여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돼지들이 벌을 받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감옥처럼 보였거든요 … 쥘리앙 말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해야 몸집이 빨리 불어나고,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 사실 돼지 축사 건물 전체가 자연과 차단된 구조랍니다. 마치 이 세상에 자연이 없는 것처럼, 공기도 식물도 해도 없는 상태에서 동물을 사육합니다. 그런 것들이 동물에게 해롭기라도 한 양 말이죠.

[16, 23쪽] 아저씨는 돼지들을 보고 나온 뒤에는 으레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돼지들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것이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어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야. 네 발 달린 햄이라고 생각하면 돼. 햄 좋아하니? 그럼 멀리 가서 찾을 것 없다.” … 축사 사무실에는 돼지들에 관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컴퓨터에는 암퇘지들이 무엇을 먹는지, 언제 새끼를 가지는지, 어떻게 가지는지 따위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 그런데 컴퓨터는 암퇘지들을 알지도 못하고,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컴퓨터는 다만 수치만을 알고 있을 뿐이죠.

[17, 33∼34, 36쪽] 돼지의 분만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은 ‘산파’가 아니라 ‘사육자’입니다 … 그날 이 돼지는 새끼를 낳을 때의 고통 때문에 온몸을 묶어 놓은 거였습니다. 아프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칫 새끼들을 깔아뭉갤 수도 있거든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암퇘지가 아니라 새끼들입니다. 사실 암퇘지는 죽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 암퇘지를 얼러 주고 다독여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입을 꽉 다물고는 마치 고장난 기계 다루듯 했습니다 … 두 사람은 어미 돼지의 몸에서 새끼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직접 만든 갈고리 같은 것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게 말을 잘 듣지 않자, 둘은 배를 갈래 새끼들을 빼낸 다음 암쾌지에게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는 죽었습니다.

[31, 40∼41, 66쪽] 내가 볼 때 어른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이 없어요 … 어른들은 텔레비전 앞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요 … 요즘에는 간호사들도 돼지 축사의 분만용 우리 같은 ‘아기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빨리 처리해야 돈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 끝도 없이 달리기만 하는 건 노동자들이지만, 정작 돈을 많이 버는 건 대규모 축산 공장의 업자들과 상인들이에요.

[59, 61쪽] 칸막이 우리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돼지를 좋아하게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돼지 탓이 아닙니다. 온통 암흑천지에다 먼지투성이고 악취가 풍기는 칸막이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돼지들에게 무얼 바라겠어요 … 비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돼지들은 너무 외로워 보였고 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돼지들과 잘 지낼 수 없는 걸까요?

[79, 81∼83쪽] 암퇘지들은 움직이고 싶어 하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있어 싶어 합니다 … 암퇘지들은 미리 수퇘지에게서 채취한 정액으로 수정을 할 뿐, 수퇘지와 직접 교미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더 빠르기 때문이죠 … “임신을 못하면 암퇘지로서는 끝인 거야. 실수란 용납이 안 돼. 먹이를 축내면서도 새끼를 못 낳는다면 그건 문제지 … 젊은 암퇘지가 한 번쯤 임신을 못할 수는 있어. 그런 건 괜찮단다. 그런데 늙은 암퇘지가 임신을 못한다면 그건 바로 도살장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얼마인지 아니? 온통 난리가 나는 거야. 우리에겐 판에 박힌 일이란다. 암퇘지는 새끼를 낳아야 해.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퇘지는 정상이 아니야.”

[89쪽] 나는 돼지들이 우리가 변화하기를, 우리가 조금 더 친절해지기를, 우리가 돌덩이같이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가소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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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13 : 책 하나에 담는 땀

 전라남도 장흥에서 살고 있는 마동욱 님이 십만 원에 이르는 사진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사진책 이름은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호영)입니다. 당신 고향마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수십만 장 찍은 사진을 고르고 추려 내놓은 두툼한 선물입니다. 온몸으로 부대끼고 두 눈으로 살펴보며 마음으로 삭여낸 삶자락이 깊고 넓다 보니 수십만 장이라는 사진을 찍고도 모자라, 앞으로도 새롭게 수십만 장에 이르는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저는 수십만 장까지는 아니지만, 제 고향동네인 인천 골목길을 해마다 만 장 남짓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이 만 장이 넘어가면, 요 한 해치 사진 만 장을 갈무리하는 데에만 여러 날이 걸립니다. 아니, 한 번씩 죽 돌아보고 추리는 데에만 보름은 걸리고, 애써 추린 사진을 갈래에 따라 나눈다든지 하자면 한 달이 훌쩍 넘어가며, 갈래에 따라 나눈 사진 가운데 어느 녀석을 얼마만한 크기로 다루어 엮느냐를 살피자면 또 한참 걸립니다. 사진 하나로 담을 때부터 오래오래 품을 들이기 마련인데, 작품으로 빚었다 할지라도 낱낱이 있는 사진을 ‘이야기 있는 꾸러미’로 묶자니, 사진기를 들고 골목마실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더 오랜 품을 들여야 하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 나 스스로 미처 즐기거나 누리지 못하는 열매가 더없이 많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동무와 이웃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는 열매 또한 아주 작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열매를 일구고자 애써야 하는 사람이지만, 힘껏 거두어들인 열매 또한 바지런히 맛보면서 나누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아주 흔히 하는 말인데, ‘나누며 따뜻한 사랑은 그리 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내 주머니에서 아주 조금만 덜어도 이 작은 돈푼으로 무척 넉넉히 나누는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아주 조금이라 할지라도, 열 사람 숟가락이 모이면 밥 한 그릇이 되니까요. 한 사람 숟가락으로 열 사람을 먹여살리는 밥그릇이 아니라, 열 사람 숟가락으로 한 사람을 먹여살리는 밥그릇이 되면 즐겁습니다. 내가 내 이웃하고 무언가를 나눈다고 할 때에는 ‘내가 대단한 부자라서 나누는’ 셈이 아니니까요. 내가 그지없이 가난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으니까요. 내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기 때문에 나보다 벅차거나 버거운 이웃을 알아봅니다. 내가 힘들고 고단한 탓에 나보다 힘들고 고단한 동무를 알아챕니다. 내 마음밭이 얕거나 어수룩하다고 느끼기에 즐거이 새로운 책을 장만하여 새롭게 곰삭이며 읽습니다. 내 배움이 짧거나 모자라다고 느끼기에 기쁘게 책방마실을 하며, 만 권이든 십만 권이든 아직 머나먼 책읽기일 뿐임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지난 2004년에 우리 말로 나온 《환경 가계부》를 아주 흐뭇하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새 판이 끊어졌습니다. 둘레에 선물하고 싶어도 사 줄 수 없습니다. 헌책방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옆지기는 이 책을 살며시 넘겨 보더니 묻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책이에요?” “응? 왜?” “이런 책은 꼭 일본책이더라구요.” 뒤통수가 뜨끔합니다. 그러고 보니 《즐거운 불편》도 일본책, 《백성 백작》도 일본책입니다. (4343.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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