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윤구병의 생태 에세이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을 닮고 자연스럽게 꾸리는 삶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0] 윤구병,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자연을 버린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고 하면 거짓말이 아니랴 싶습니다. 자연을 닮거나 자연과 가깝게 나아간다고는 하지만 자연이 있다거나 자연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도시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요즈ㅊㅍ음은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마저 ‘푸른 아파트’임을 내세웁니다. 아파트라고 하는 공동주택은 산을 깎거나 갯벌을 메우거나 논밭을 뒤집어서 세우고 있는 데에도 ‘푸른’ 아파트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자연을 닮은 집이라 할 때에는 자연을 더럽히지 않고 지어야 하며, 나중에 낡아서 허물어야 할 때에 자연에 피해를 입히지 않아야 하는데, 아파트라고 하는 공동주택 가운데 처음 지을 때에나 나중에 허물 때에나 자연을 걱정하는 집짓기란 없다고 느낍니다. 더구나 아파트에서는 물과 전기와 가스와 기름을 ‘고지서’로 헤아릴 뿐, 우리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돌아보기 어렵습니다.

 요사이 널리 퍼지는 말마디로 ‘환경친화’와 ‘생태’와 ‘웰빙’이 있습니다. 이 말마디는 우리들이 누리는 물질문명이나 자본주의 사회로는 앞날이 시커멓다고 깨달으면서 하나둘 불거집니다. 그런데 ‘환경을 생각한다’거나 ‘환경과 사람이 하나로 된다’는 테두리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공산품이란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환경을 생각한다는 공산품이란 목숨이 얼마나 되며, 나중에 이 공산품이 쓸모를 다해 쓰레기로 버려야 할 때에 어느 만큼 자연으로 조용히 녹아들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자동차 바퀴가, 자동차 오가는 아스팔트길이란 ‘환경친화’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물질문명이 될 수 있을까요. 거름으로 써야 마땅한 똥오줌이지만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똥오줌을 거름으로 쓰기 힘들어진 터전에서, 우리들은 어떤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하면서 무슨 돈을 벌고 내 삶을 어느 쪽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있을는지요.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꾸리는 하루하루일는지 궁금합니다. 나와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들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사랑하고 즐기도록 가꾸는 하루하루일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먹는 밥이란 모두 자연에서 얻는데, 밥이 되는 푸성귀이든 고기이든 어떻게 얻는지를 도시사람으로서 어느 만큼 깊고 넓게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날푸성귀를 먹는달지라도 손수 길러서 먹는지, 사다가 먹는지, 또 이 날푸성귀를 제대로 가리고 골라서 먹더라도 우리 스스로 하는 일과 품는 넋과 주고받는 말이란 얼마나 ‘환경과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거나 생각하거나 걱정하거나 마음을 쓰면서’ 하는 일이요 품는 넋이요 주고받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 어느 날 새 기술이 개발되면 이제까지 유용하던 기술이 그 기술을 지닌 전문가까지도 포함해서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 입으로 ‘반미’ 외치면 무얼 하나. 쌀만 겨우 90퍼센트쯤 자급이 되고 밀과 보리, 콩 같은 그밖의 주곡 자급률은 5퍼센트 남짓밖에 안 되는걸 … 근대화도 경제개발도 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러나 그 동기가 이윤에 있으면 이윤을 얻는 한 사람이 잘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못살게 된다 ..  (26, 33, 69쪽)


 전라도 변산에서 농사짓는 두레마을을 이루고 있는 윤구병 님이 쓴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을 올바르게 적는다면 “자연이라는 밥상에 둘러앉다”이거나 “자연스러운 밥상에 둘러앉다”이거나 “자연을 사랑하는 밥상에 둘러앉다”가 아니랴 생각합니다. 아무튼, 자연을 내버리는 이 나라에서 자연을 보듬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려는 농사짓는 두레마을이요, 자연하고 등돌리는 이 겨레 사람들한테 자연을 얼싸안는 넋을 나누며 농사짓는 두레마을이고, 자연을 짓밟는 이 누리에서 자연을 쓰다듬는 매무새를 기르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보내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책입니다.


.. 비가 내리고 난 뒤 쌀쌀한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물에 불은 콩을 주웠다. 떨면서 한나절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면서 주운 콩이 한 됫박이나 될까. 돈으로 바꾸자면 누가 2000원도 주지 않으리라. 그 시간에 대기업 사보 같은 데에서 온 청탁을 거절하지 않고 원고를 썼으면 100배쯤 높은 고료를 받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도 뒤늦게 떠올랐지만 콩을 줍는 순간에는 밭에 널린 흰콩밖에 보이지 않았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은 흙을 딛고 서 있다 … 자연이란 그저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생명체들이 자라고 열매 맺고 뛰노는 커다란 삶터이고, 사람도 생명계의 한 구성원인 만큼 이 커다란 생명 공동체에서 그야말로 ‘한살림’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31, 83, 134쪽)


 머리를 굴려 적바림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짓는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적바림한 글이 깃든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입니다. 그러나 농사짓기 열 몇 해라 하더라도 옹근 농사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또한 옹근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는 글쓴이 윤구병 님이 스스로 밝힙니다. 당신이 제아무리 시골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또한 농사짓는 두레마을을 이루어 농사짓기 열 몇 해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아직 모르는 풀이름 꽃이름 나무이름이 수두룩합니다. 아직 들나물 멧나물을 손질해서 나물하기를 다 모르며, 책 곳곳에 나오듯 윤구병 님 당신이나 농사짓는 두레마을 일꾼들이나 ‘불량식품 몰래 맛나게 먹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책을 덮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농사짓는 삶으로 거듭난 지 열 해가 되었어도 이렇게 ‘도시에서 살던 버릇’을 떨치기 힘들다면 농사짓는 삶으로 거듭난 스무 해가 되어도 힘들지 않으랴 하고. 서른 해가 된다 한들 얼마나 나아지겠으며, 마흔 해가 된다 한들 어느 만큼 알차거나 알뜰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열 해가 되어도 도시 티를 못 벗을 수 있으나 한 해 만에 도시 티를 벗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더 모질게 먹거나 단단히 품으면서 도시 내음을 걷어치운다든지 도시 빛깔을 접을 수 있으면, 한 해가 아닌 한 달 만에도 아름다운 농사꾼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요. 윤구병 님은 ‘대기업 사보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고 글에서 밝히지만, 대기업 사보를 들추면 ‘자주’는 아니나 ‘틈틈이’ 당신 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출판사 일로 달마다 여러 차례 서울마실을 하느라, 시골에 살면서도 시골사람으로 시골살림을 꾸리는 삶이란 반토막이라고 할까요.

 윤구병 님이 좀더 옹근 농사꾼으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비내린 뒤 쌀쌀한 날씨에 콩을 주으면서 대기업 사보를 떠올리며 품값을 셀 노릇이 아니라, 비내린 뒤 쌀쌀한 날씨에 콩을 줍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적바림하면서, 비내린 뒤 달라진 콩밭 모습과 시골 논밭 모양새를 써 내려 갈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 삶에서는 놀라운 주의주장이나 철학 또한 어느 만큼 값이 있을지라도, 이보다는 삶에서 묻어나오거나 우러나온 이야기만큼 사람들한테 애틋하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으니까요. 짜릿한 뒤집기 한판이 펼쳐지는 운동경기를 볼 때에도 즐겁다 할 만하지만, 동무들하고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금긋기놀이를 하거나 돌치기놀이를 하면서 웃음꽃을 터뜨릴 때에도 즐겁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크고 신나는 즐거움이라고는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만, 윤구병 님이 도시에서 얻은 ‘교수님’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시골에서 얻으려는 ‘농사꾼’이라는 이름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운동경기 이야기가 아닌 고무줄놀이 이야기 쪽으로, 대기업 사보 글삯 이야기가 아니라 농사짓는 삶으로 열 해를 보내며 얻거나 깨달은 거룩하고 놀라운 즐거움 이야기로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를 차곡차곡 채웠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 도시에서 사람을 뺀 다른 생명체들이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는 까닭은 도시인들의 위생 관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 나는 한때 거시경제학이나 정치경제학 같은 것에 빠지고 《자본론》을 줄을 그어 가며 열심히 읽은 적도 있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이론을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그런데 10년 남짓 농사지으면서 그걸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89, 198쪽)


 다시금 책을 펼쳐 읽습니다. 윤구병 님은 시골을 버리고 도시에서 살다가, 홀로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와서 살아갑니다. 시골살이 열 몇 해 삶자락을 책 여러 권으로 한꺼번에 내놓습니다. 바쁘고 힘겹다 하는 시골살이라 하지만 열 몇 해에 걸쳐 적바림한 글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시골사람이었고 예순 해 일흔 해에 걸쳐 시골사람인 농사꾼들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또는 책을 써내지 않습니다. 굳이 책으로 써내지 않더라도 스스로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고, 농사꾼 삶을 책으로 펴내려고 하는 출판사가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었다가 농사꾼이 된 사람들 귀농일기는 곧잘 책으로 내놓는 책마을이지만, 처음부터 농사꾼이었던 사람들 농사일기는 한 번도 책으로 내놓지 않은 책마을이거든요.

 이는 나라안이나 나라밖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농사꾼 스스로 농사꾼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내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아마, 구멍가게 장사꾼 또한 당신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내는 일이란 거의 없겠지요. 저잣거리 장사꾼들은 어떠할까요. 장돌뱅이와 배무이와 목수들 삶은 어떠할까요. 큰회사 씨이오라는 분들은 당신 자서전을 끝없이 내놓습니다만, 신집 할배나 나물장수 할매 삶을 당신들 스스로 글로 남기라고 이끌거나 가르칠 만한 초중고등학교 교사나 대학교 교수는 몇 사람이 있을까요.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 삶을 고이 여기거나 살가이 눈여겨보면서 꾸밈없이 글로 써내거나 사진으로 담아내거나 그림으로 그려내는 분은 얼마나 되나요.


.. 또 부자들이나 밥상에 올리는 비싼 ‘유기농 식품’으로 수지를 맞출 생각을 말고도 가용을 쓸 마련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꼬 ..  (18쪽)


 유기농 먹을거리란 ‘똥오줌을 삭여 거름을 내어 지은 곡식’을 가리킵니다. 몇몇 부자들이 적잖은 돈을 들여 ‘몸에 좀더 좋다는 먹을거리’를 즐기기도 한다지만, 유기농 먹을거리란 부자들만 즐기는 먹을거리가 아닙니다. 착하고 참된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즐기는 먹을거리이고, 도시에서는 생활협동조합을 이루면서 도시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건사하며 아이들과 맑고 맑은 나날을 꿈꾸는 사람들이 조그맣게 모두는 따순 손길이기도 합니다. 거름을 내어 지은 곡식이 ‘조금 더 비싼’ 까닭은 풀약을 치고 항생제를 먹여 좀더 손쉽게 더 많이 거두는 곡식이 아니라, 곡식부터 맑고 밝게 키우고자 땀을 들이고 힘을 들이기 때문에 땀값이 ‘마땅한 일삯’으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변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일군 먹을거리 또한 ‘여느 먹을거리’와 견주면 값이 셉니다. 설마 변산 농사짓는 두레마을에서 부자들 밥상에 비싼값으로 내다 팔 농사를 짓지는 않을 테지요. 그리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농약에 찌든’ 먹을거리가 아닌 ‘깨끗하고 더 나은’ 먹을거리를 먹어야 하며,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삶을 옳게 바라보고 자연을 꾸밈없이 껴안으면서 맑고 밝은 사람으로 거듭나며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만 잘살면 되는 온누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잘살아야 할 온누리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든 머리 나쁜 사람이든 잘생긴 사람이든 못생긴 사람이든 잘못을 안 저지르는 사람이든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든 누구나 고르게 권리를 누리며 착하고 곱게 살아가야 할 온누리입니다.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이 뭇목숨을 살리는 힘이라지만, 물과 불과 땅과 바람만으로는 뭇목숨을 살리는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너른 믿음과 따뜻한 사랑과 넉넉한 손길과 착한 매무새가 함께해야 합니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라는 책에서 윤구병 님은 물과 불과 땅과 바람이 어우러지는 시골마을 논밭 일구는 농사꾼 땀방울이 얼마나 값있는가를 날카롭게 짚어내어 차근차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날카로움에 한결 보드랍고 더욱 싱그러운 믿음과 사랑과 손길과 몸짓을 어우러 놓는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4343.4.9.쇠.ㅎㄲㅅㄱ)


 ┌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휴머니스트,2010)
 ├ 글 : 윤구병
 └ 책값 : 1만 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은진의 희망 분투기 - 중동, 브라질, 아프리카, 그리고 세상의 끝
정은진 지음 / 홍시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도사진가란 아름다움을 담는 이야기꾼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5] 정은진, 《정은진의 희망분투기》



- 책이름 : 정은진의 희망분투기
- 글ㆍ사진 : 정은진
- 펴낸곳 : 홍시 (2010.3.24.)
- 책값 : 12800원


 (1) 아름다움을 찍는 사진


 어디를 다니든 늘 사진기를 갖고 다닙니다. 아이를 안고 마실을 다니든 동네 구멍가게에 보리술 한 병을 사러 다녀오든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갖고 다닙니다. 어제는 옆지기와 아이와 저 세 식구가 충주 무너미마을로 나들이를 왔습니다. 여러 해 만에 모처럼 찾아온 이곳에 있는 자그마한 학교 밥집에서는 사진기를 놓고 밥술을 뜹니다. 밥먹는 자리에는 우리 아이한테 오빠와 언니뻘 놀이동무가 북적입니다. 아이는 밥먹을 생각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신바람이 납니다. 무너미마을 할아버지가 밥집에 있는 건반을 두들깁니다. 아이는 노래소리 나오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뒷짐을 지고 구경합니다. 건반 앞 걸상에 앉아 한손으로 건반 누르기를 하는데, 한두 번씩 건반을 누르고는 다시 뒷짐을 집니다. 이 녀석 참 귀여운 짓을 하네 하고 생각하다가는 사진기를 밥집으로 들고 오지 않았다고 깨닫습니다. 여기에서는 따로 사진 찍을 일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제가 제 사진감으로 헌책방과 골목길을 찍기도 하지만, 우리 딸아이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찍고 있음을 헤아렸다면 밥집으로 들어올 때에도 사진기를 목에 걸었어야 할 노릇입니다. 아이가 이렇게 두 손 곱다시 뒷짐을 지고 있다가 한손으로 건반을 누르며 노는 모습을 다시 또 언제 볼 수 있겠습니까.

 아이하고 내내 붙어서 살아가는 만큼, 오늘 아침이 되든 앞으로 또 언제가 되든 오늘과 같은 모습을 새삼스레 마주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엊저녁에 마주한 이 놀랍도록 귀여운 모습은 바로 엊저녁 이때에만 마주하는 느낌과 시간이기 때문에 나중에 찍더라도 이날 느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아마 이제부터는 이와 비슷한 모습을 두 번 다시 놓치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사진쟁이로서는 더없이 바보짓을 했습니다. 바보짓을 했다고 배웁니다. 속이 쓰리도록 배웁니다. 사진쟁이한테는 기회가 두 번 찾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사진쟁이한테는 언제나 한 번 기회만 있습니다. 같은 사람 같은 곳을 찍는다 하여도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 가운데에서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다릅니다. 똑같은 모습이란 한 장조차 찍을 수 없는 사진입니다. 만듦사진이라면 빛이며 장비이며 똑같이 해 둔 채 단추만 누르도록 마련해 놓았다면 똑같은 모습을 찍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처럼 만듦사진이 아닌 삶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는 똑같은 모습이란 두 번 다시 없을 뿐 아니라, 똑같은 모습을 찍을 일이 없어요. 언제나 다 다른 모습을 저마다 다른 깊이와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찍는 사진만 있습니다.

 사진은 어느 한때를 담는 예술이라고 일컫습니다. 한자말로는 ‘순간’이나 ‘찰나’를 찍는다는 소리인데, 우리 말로는 ‘어느 한때’를 담는 사진입니다. 점과 점을 찍으면서 점과 점을 이어 주는 이야기를 엮는 사진입니다.

 사진은 한 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진이라 할 때에는 한 장으로 마무리할 수 없습니다. 북극성처럼 움직이지 않는 큼직한 사진 한 장으로 우리 가슴을 크게 울리며 촉촉히 적실 수 있는 한편, 숱한 별자리처럼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빛깔로 모두 다른 이야기를 엮으면서 이어지는 사진이 참된 길을 걷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사진 낱낱은 별자리 하나를 이루는 별 낱낱과 같고, 이렇게 하여 별자리 하나를 이룰 만한 사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별자리를 이루는 무리별처럼 무리사진이 하나 나오고, 이러한 무리별로 밤하늘 가득 아름다이 빛나는 별들이 되듯, 무리사진이 우리 삶터 가득 아름다이 빛나는 사진들이 된다고 느낍니다. 떨어진 듯하지만 하나로 이어져 있고, 모조리 이어져 있기는 하지만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 조금씩 떨어진 채 가로놓여 있다고 할까요.

 이 사진 하나는 이 사진 하나대로 이야기가 있는 한편, 다른 사진 하나로 이어지는 징검돌 노릇을 합니다. 징검다리는 숱한 징검돌이 알맞게 어우러지면서 다리 노릇을 하는데, 이렇게 다리 노릇을 하면서도 물살 흐름을 막거나 거스르지 않습니다. 징검돌은 촘촘하게 놓아서는 안 되지만 너무 성기게 놓아도 안 됩니다. 꼭 알맞춤한 숫자로 놓되 물살이 끊이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하고, 물살이 거세어질 때에는 휩쓸리지 않게끔 단단히 놓아야 합니다.

 징검돌 노릇을 하는 사진이란 사람들이 발을 디딜 때에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야 합니다. 이는 곧, 사진을 하나하나 따로 떼어내어 보더라도 이 사진 하나로 내 가슴이 뭉클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 하나가 다른 사진 하나로 넘어가도록 이어주는 노릇을 못하거나 안 한다면 큰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서로서로 이어 주되 서로서로 홀로서기를 해야 할 사진이거든요. 또한, 사진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이 사진에 얽매이지 않도록 우리 눈과 머리와 마음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징검돌 사이를 물살이 제 결대로 고이 흐르듯, 사진을 보고 가슴이 움직이고 머리가 맑아지는 우리들은 ‘사진을 다 보고 뒤돌아섰을 때’에 저마다 살아갈 자리에서 새로운 마음과 넋과 매무새가 되어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일과 놀이를 한결 튼튼하고 힘차고 맑고 아름다이 펼치도록 돕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사진들은 하나하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면서도 아무것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엊그제까지는 허구헌날 골목길만 걷다가 모처럼 산길을 걷고 고샅길을 걸었습니다. 산길과 고샅길을 걷는 동안 제가 요 몇 해 사이에 걷던 골목길이란 다름아닌 산길과 고샅길을 닮은 도시 한켠이었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어린 나날 달리고 뛰고 놀고 먹고자고 어울리던 동네와 길이란 바로 도시에 깃든 산길과 고샅길이라 할 만한 골목길이었구나 하고 비로소 느낍니다. 비록 흙이 아닌 시멘트였다 할지라도, 비록 돌이 아닌 아스팔트였다 할지라도, 도시 골목길에는 도시라는 갑갑한 잿빛 터전에 푸른빛 숨결을 불어넣고픈 고즈넉한 손때가 배어 있달까요. 모든 도시 골목길에 푸른빛 숨결이 깃들지는 않습니다만, 자동차하고 멀어지거나 자동차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샛골목이 될수록 골목사람은 푸른사람을 닮아 가고 골목길은 푸른길을 닮아 가며 골목꽃은 푸른꽃 푸른잎을 닮아 가는구나 싶습니다.

 삶이란 우리가 깃든 어느 자리에나 고루 있되, 삶이 맑고 밝게 깃드는 자리라 한다면 우리 목숨을 살리는 흐름을 붙잡고 있고, 우리 목숨을 살리는 흐름이란 밥을 낳는 흐름이요, 밥을 낳는 흐름은 논밭과 산바다가 있는 터전이며, 이러한 터전이 어떤 기운을 끌어안고 있는가를 느끼면서 살며시 이어지는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싱그러운 사랑이 꽃피어 납니다.

 사랑은 참사랑일 노릇임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참사람일 노릇임을 새삼 헤아립니다. 사진은 참사진일 노릇임을 거듭 돌아봅니다. 참사랑이랑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참사람이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참사진이란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내가 누구를 어디에서 어떻게 사랑하든 참사랑일 노릇이고,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놀이를 어떻게 즐기든 참사람일 노릇이며, 내가 어떤 갈래로 어떤 이야기 사진을 엮는다 하더라도 참사진일 노릇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진으로 걸어갈 노릇입니다. 






 (2) 보도사진가가 찍는 사진


..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약자들을 취재할 때, 모든 취재원들에게 허락을 얻어내기도 힘들고, 특히 그들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리를 찍는다고 우리 삶에 무슨 변화가 온다고 그러죠? 그동안 수많은 기자들이 다녔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간 경찰관의 지인, 카불의 정신병원 원장,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빌라 미모사’라고 알려진 창녀촌, 그리고 아프리카 민주콩고의 성폭력 피해자 병동 …… 이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나에게 불평을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무슨 영광을 보자고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가? 나는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내가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일을 그만둬야 하지 않는가? … 이제는 내 사진 한 장이 세상을 절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허황된 꿈은 갖지 않기로 했다 ..  (12, 15쪽)


 《정은진의 희망분투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한국 바깥에서 보도사진을 취재하고 담아내는 일을 하는 정은진 님이 중동과 브라질과 아프리카 땅을 밟으면서 만난 사람과 삶터와 아픔을 글과 사진으로 묶은 책입니다. 빛깔이 저마다 다른 세 곳인데, 이 세 곳에서 보도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거의 흰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곳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아픔이 생기는 까닭은 바로 흰둥이 때문입니다. 흰둥이들은 온누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돈벌이를 하고자 토박이를 끝없이 끔찍하게 죽였을 뿐 아니라 노예로 부렸고 내전을 부추기는 한편, 이와 같은 다툼과 아픔을 보도사진으로 담는 일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병 주고 약 주고는 아닙니다만, 북 치고 장구 치고 또한 아닙니다만, 온누리를 흰둥이들이 망가뜨리면서 또다른 흰둥이들이 망가지고 있는 온누리를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며 글로 씁니다.

 정은진 님은 바로 이 흰둥이 판에 뛰어든 누렁둥이입니다. 흰둥이들 스스로 온누리를 평화롭고 사랑스레 보듬기를 바라지 않는 마당에 끼어든 누렁둥이입니다. 세계 보도사진가 가운데 한국사람 같은 누렁둥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데, 일본 누렁둥이 사진작가는 꽤 많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죽은 보도사진가를 살피면 미국사람 다음으로 일본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는데, 일본 누렁둥이 보도사진가는 온누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흰둥이 눈길과 다른’ 보도사진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자, 그렇다면 한국 누렁둥이 정은진 님은 어떤 눈길과 생각과 마음과 넋으로 ‘흰둥이가 벌여 놓은 싸움판’에서 사진으로 보도기사를 쓰는 취재기자 노릇을 하고 있을까요. 부질없는 꿈을 꾸며 마음앓이를 했다가 부질없는 꿈은 내려놓기로 했다는 정은진 님은 무슨 사진으로 당신이 마주하고 부대낀 ‘이웃사람 삶’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 어느 날 저녁 맷이 바에서 나를 조용히 불러 이런 얘기를 했다. “진, 다 좋은데……. 사진기자 조끼는 좀 입지 말지 그래? 너무 깨.” 그때 나는 뉴욕의 B+H라는 사진 기자개 가게에서 산, 엄청나게 크고 주머니가 수십 개 달린 카키색 사진기자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 아일랜드식 영어를 구사하는 앤드류는 키가 180센티미터 정도에 삐쩍 마른 편이었다. 그는 2008년 콩고에서 취재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하룻밤에 미화 10달러를 내는, 아주 허름한 ‘슈슈’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난민촌에는 매일 아침 오토바이를 타고 가 혼자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같이 촬영하니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즐기는 자세로 훌륭한 사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한다 ..  (38, 201, 202쪽)


 《카불의 사진사》(동아일보사,2008)와 《내 이름은 ‘눈물’입니다》(웅진지식하우스,2008)를 내놓은 정은진 님 세 번째 보고서 《정은진의 희망 분투기》(홍시,2010)는 지난 두 차례 보고서를 쓴 뒤 당신이 밟은 ‘아픔 서린 땅’ 사람들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돌아보는 뒷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정은진 님은 이번 보고서에서 지난 두 차례 보고서 때와 견줄 수 없이 ‘아픔 서린 땅’에 비자와 취재허가를 얻어 들어가는 일이 몹시 힘들고 바가지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두 해가 아닌 여러 해에 걸쳐 ‘아픔 서린 땅’에 취재를 갔다는 정은진 님임에도 아직까지 “뉴욕의 B+H라는 사진 기자개 가게에서 산 …… 사진기자용 조끼”를 입고 있습니다. 다른 동료가 이를 일깨울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마 지난 두 차례 보고서를 내놓는 동안에도 이런 차림새였을까요. 설마 보도사진을 배우고 취재기자로 뛰는 몸이었음에도 이런 몸차림으로 ‘아픔 서린 땅’ 사람을 마주할 마음이었을까요. ‘아픔 서린 땅’에 멀디먼 구경꾼으로 찾아가는 ‘아픔 서린 땅을 만든 흰둥이’하고 똑같은 매무새로 찾아가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보면, 《정은진의 희망 분투기》라는 책을 읽으니 ‘아픔 서린 땅’에서 정은진(Jean Chung) 님을 마주한 토박이들은 정은진 님을 가리켜 ‘흰둥이(백인)’라고 부릅니다. 정은진 님은 흰둥이 아닌 누렁둥이요, 미국사람 아닌 한국사람일 텐데, 정은진 님은 ‘아픔 서린 땅’ 토박이한테 당신들 이웃으로 찾아오거나 당신들 동무로 다가서는 사람으로는 잘 비치지 않습니다. 당신 스스로 밝히기도 하지만, 정은진 님은 조금도 “즐기는 자세로 훌륭한 사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보여주나, “즐기는 자세”로 “훌륭한 사진”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즐기는 사진이란 훌륭한 사진을 바라지 않고, 더군다나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다. ‘즐기’기 때문에 ‘사진’이라는 껍데기마저 훌훌 벗어 놓습니다. 그저 옆지기나 동무로서 ‘아픔 서린 땅’에 발을 디딥니다. 아니, 온몸과 온마음을 담급니다. 스스로 ‘아픔 서린 땅’ 사람이 되어 아픔을 듬뿍 맛봅니다. 정은진 님은 ‘남자 보도사진가’가 되어야 ‘한 달 동안 목욕도 안 하면서’ 취재를 잘할 수 있구나 하고 부러워 하기도 하는데(책 곳곳에 이 이야기가 되풀이됩니다), ‘아픔 서린 땅’ 사람들이 당신들 몸을 얼마나 자주 씻고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주 씻거나 못 씻거나에 마음을 쓸 겨를이 있다면, ‘아픔 서린 땅’ 사람들 삶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합니다. 씻기 힘들거나 씻지 못할 뿐 아니라 마실물조차 모자란 곳에서 무슨 사치를 바라는지요.


.. 나는 그들에게 6년 전 촬영한 사진과 한국에서 모은 성금 중 일부를 기부하러 왔지만, 모슬렘 가정에서 용건만 전하고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슬람 교도들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기 때문에 집을 찾은 이에게 꼭 차를 대접하고, 자신들의 먹을 것 중 일부를 나누어 준다. 아무리 피난민 가정이라도 초콜릿과 사탕은 꼭 내주는 법이며,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아야 예의다 ..  (61쪽)


 정은진 님은 ‘아픔 서린 땅’ 사람들한테 성금을 나누어 줍니다. 그렇지만 성금을 받은 ‘아픔 서린 땅’ 사람들이 돌려주는 예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예의라고 적어 놓았으나 예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은진 님은 ‘아픔 서린 땅’ 사람들한테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몇 해에 한 번 목돈 들고 찾아와 비행기에서 구호물자 툭툭 떨어뜨리고 가듯 돈다발을 안겨 주는 산타클로스? 사진 찍혀 주는 대가로 성금을 받아드는 취재원?

 “용건만 전한다”는 말이란 더없이 무섭습니다.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아픔 서린 땅’에 무슨 용건만 남기려 하는지 참으로 두렵습니다. ‘아픔 서린 땅’ 사람들한테 성금 몇 푼이 더없이 도움이 되기도 할 터이나 몇몇 집에만 도움이 되지 모든 ‘아픔 서린 땅’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도움이란 세상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사진을 일구는 길이 아닙니다. ‘아픔 서린 땅’ 사람들과 나눌 사랑과 손길이 성금으로만 마무리되어야 하는지를 정은진 님 스스로 헤아려야 하며, 당신이 찍는 사진이 ‘아픔 서린 땅’ 사람들과 삶터를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지는 않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프레드도 이 파벨라에 처음 와 보기 때문에 주택 앞에 앉아 있는 한 중년 여성에게 길을 물어 보았다. 그녀는 파벨라에서 고속도로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면서, 갑자기 검지손가락을 입으로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보지 마세요.” … 인터뷰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허시냐 빈곤 지역을 통과했다. 다음날 찾아야 할 곳이었다. 석양의 파벨라는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마약 밀매와 갱단이라는 어두운 그늘 말고도 결핵이라는 치염적인 적이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고 있었다 …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사진 촬영을 못한다니. 히타는 우리를 안전하다는 어느 주차 공간에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주차장 주인의 허락을 받아 주차장 내부가 아닌 바깥쪽에 보이는 파벨라 전경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해가 질 무렵, 파벨라의 집에 켜진 전깃불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곳을 제대로 사진에 담지 못하다니 너무 안타까워.’ ..  (124, 126, 129, 137쪽)


 《정은진의 희망 분투기》라는 책에는 정은진 님이 밟은 ‘아픔 서린 땅’에 어떤 아픔이 얼마만큼 있는가를 3/4쯤에 걸쳐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픔이 왜 생기고 어떻게 생기며 언제부터 생겼으며 누가 생기도록 이끌었는지는 한 줄로도 적어 놓지 못합니다. 뿌리를 캐지 않고 잎사귀를 들여다보고 있으며, 뿌리에 난 혹은 파 보지 않으며 잎사귀가 말라비틀어지는 모습만 붙잡고 있습니다.

 보도사진이란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모양새 그대로만 담는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모양새 그대로 사진으로 찍으면서 ‘잎사귀가 말라비틀어진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도록 이끌어야 비로소 보도사진입니다. 뿌리없는 생각 뿌리없는 삶 뿌리없는 사진으로는 이름으로 내세울 ‘포토저널리스트’는 될는지 몰라도, 참다운 ‘보도사진가’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참말 아름다운 곳을 제대로 사진에 담지 못하는 까닭은 갖가지 통제와 금지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은진 님 스스로 ‘아픔 서린 땅’에 ‘아픔을 먹고사는 사람’으로 녹아들지 못한 탓입니다.


.. “이 아이들은 엄마들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괜찮지만 다른 아이들은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부모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학교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지금 내 말을 안 듣고 학교로 가서 꼭 취재를 해야 한다면 당신과 나는 이제 끝입니다. 나는 당신을 파벨라로 데리고 들어왔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사람들은 나에게 책임을 돌릴 거예요. 여기에는 당신 말고도 여러 사람이 와서 취재를 하고 가지만 항상 몰래 촬영을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리기도 해요. 당신은 이곳이 얼마나 심각한 곳인지 잘 몰라요. 여기는 내전 지역이라고요. 학교는 못 갑니다. 나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어요.” 세상에 이렇게 취재하기가 힘들다니. 게리 나이트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안 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 그러나 그건 게리 나이트고 나는 나 아니겠는가. 이곳은 빈민촌이고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다. 간단한 카포에이라 취재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히타에게 불평을 할 수도 있었다 ..  (176∼177쪽)


 《정은진의 희망 분투기》를 읽으며 정은진 님이 몸으로 부대끼며 깨달은 앎보다는, 정은진 님이 취재하도록 도운 ‘아픔 서린 땅’ 토박이 입에서 나온 목소리하고 동료 보도사진가가 들려준 목소리에서 ‘무언가 깨달은 이야기’를 엿봅니다. 정은진 님은 희망을 찾고자 애써 싸웠다며 세 번째 보고서를 내놓습니다만, 정은진 님이 찾으려던 희망이란 ‘정은진 님 당신이 사진을 왜 찍어야 할까’ 하는 희망이지, ‘아픔 서린 땅 사람 스스로 희망을 찾는 길에 정은진 님이 사진으로 무엇을 하면서 희망을 들여다볼까’ 하는 희망이 아닙니다.

 어느 분은 굳이 중동이니 브라질이니 아프리카이니를 찾아가지 않아도 나라안에 사진으로 담을 이야기감이 가득 있다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나라안에 사진감이 많다 하더라도 나라밖에 나가지 않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나라안에는 나라안대로 이야기가 있고, 나라밖에는 나라밖대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밖에서만 살아간다면 나라밖 이야기에만 눈을 두고 삶을 맞출 터이나, 나라안에서 나라밖을 찾아다닌다면 나라 안팎 이야기를 골고루 눈을 두며 삶을 맞추면 됩니다. 정은진 님으로서는 한국에서 중동을 보듯 중동에서 한국을 볼 수 있고, 한국에서 브라질을 보듯 브라질에서 브라질을 볼 수 있으며, 한국에서 아프리카를 보듯 한국에서 한국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은진 님 보도사진과 《정은진의 희망 분투기》에서 몹시 모자라거나 텅 빈 대목이라 한다면, 세상을 보는 눈길과 눈높이와 눈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희망인 사람이 나라안에 있을 때에는, 나라안 희망이 둘레 어디에나 희망을 나누며 희망을 담고 희망을 어깨동무합니다. 정은진 님 스스로 당신 삶을 희망으로 어루만지고 있으면, 애써 나라밖으로 나가는 때마다 희망을 찾고 나누고 선물받을 수 있는 한편 나라안 어디에서나 희망으로 넘실거릴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기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인 ‘보도사진가가 되는 곧고 착하고 슬기롭고 맑은 매무새’를 기를 수 있다면, 훌륭한 사진을 찍든 못 찍든 대수롭지 않으며 어설프거나 어줍잖은 사진 한 장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착한 보도사진가로서 당신 길을 씩씩하게 걸으면, 맨몸뚱이로도 온누리 어느 곳에서나 당신 둘레 사람들을 착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보도사진가로서 당신 삶을 곱게 다스린다면, 후줄근한 똑딱이 하나로도 이 땅 어느 자리에서나 당신 곁 사람들을 아름다이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보도사진가란 아름다움을 담는 이야기꾼입니다. 네 번째 보고서를 꿈꾸는 당신이라면, 아무쪼록 참다운 보도사진가 길하고 참다운 아름다움에다가 참다운 이야기를 낮은자리에서 고개숙이며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돌아보면서 손수 일구고 손마디에 꾸덕살을 박으며 땀을 흘리시면 좋겠습니다. (4343.4.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도야 놀자 비룡소의 그림동화 204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쁜 그림책과 예쁜 마음결
 [그림책이 좋다 77] 이수지, 《파도야 놀자》



- 책이름 : 파도야 놀자
- 그림 : 이수지
- 펴낸곳 : 비룡소 (2009.5.22.)
- 책값 : 9500원


 (1) 예쁜 그림책 또는 예쁜 책이란


 예쁜 그림책을 펼쳐 읽는다고 내 마음이 예뻐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내 삶을 어여삐 보듬고 싶기 때문에 저절로 예쁜 그림책에 손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림결을 놓고 예쁘다 할 만하고, 어떤 줄거리를 펼치는 그림책을 두고 예쁜 그림책이라 할 만할까요.

 예쁜 사람을 만나거나 마주한다고 내 삶이 예뻐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내 눈과 마음을 어여삐 어루만지고 싶기 때문에 시나브로 예쁜 사람하고 가까워지고자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놓고 예쁘다 할 만하고, 어떤 마음밭 일구는 사람을 두고 예쁜 사람이라 할 만할까요.

 스물한 달째 접어들고 있는 딸아이는 ‘이쁜’ 짓을 자주 합니다. 잘 쥐기는 해도 잘 집지는 못하는 젓가락질로 온 방바닥을 어지럽히면서 밥을 먹는 모습부터 이쁩니다. 마시지도 않는 물이면서 물잔을 들고 걷다가 뚝뚝 흘리더니 와락 쏟아 놓고는 모르는 척하다가 엄마나 아빠가 이를 눈치채면 손가락으로 물 흘린 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또한 이쁩니다. 걸레를 가지고 오면 저 스스로 닦겠다며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 자그마한 손으로 영차영차 비비는 꼴이 이쁩니다. 아이 코를 흥흥 해 주고 손과 얼굴을 닦아 주는 손수건인데 아이한테는 꼭 걸맞는 걸레 크기라, 아이는 제 손수건으로 벽을 닦는 시늉을 합니다. 방마다 벽에는 아이가 색연필과 볼펜으로 끄적여 놓은 줄그림이 가득합니다. 빨래하는 아빠 곁에서 말끄러미 지켜보다가는 저도 빨래를 해 보겠다고 쑤석거리며 헤집어 놓는 모양이란 더없이 이쁩니다. 바쁘고 고단하고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라 할 때에는 집일에 걸리적거리는 아이라 여길 수 있으나, 바쁘고 고단하고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임에도 생각을 살며시 달리 품는다면 얼마든지 귀엽고 아름다운 아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먹고살겠다며 밥숟가락 들고 다니는 품이라든지, 이제 좀 배가 불렀다며 더 안 먹겠다고 고개를 팩팩 돌리는 품이라든지, 아이는 아이다운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어른들마냥 돈 걱정에 뭔 근심에 갖은 끌탕으로 골머리를 앓지 않습니다. 밥과 놀이와 사랑과 잠과 동무와 따순 품이면 넉넉한 삶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밥과 놀이와 사랑과 잠과 동무와 따순 품이면 넉넉한 삶이지 않을까요. 더 많은 돈이나 더 보람찬 일이나 더 거룩한 이름이나 더 멋진 자동차나 더 넓은 아파트가 굳이 있지 않아도 넉넉하고 고운 삶이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스스로 예쁜 삶을 저버리고 있지 않나요. 어쩌면 오늘날은 어린이일 때부터 스스로 예쁜 삶을 마주할 겨를이 없고, 예쁜 삶을 마주하지 못한 채 시험공부와 지식쌓기에 얽매이면서 푸름이를 거쳐 대학생을 지나 사회인이 되고 나면 멋없고 맛없고 재미없고 신바람 없는 맹숭맹숭 철까지 없는 어른으로 나뒹굴고 말지는 않는지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2008년보다 2009년에 좋은 어린이책이 훨씬 많이 나왔고 더 많이 팔려서 읽혔으며 훨씬 많은 사람이 좋은 어린이책 만들겠다며 책마을로 들어옵니다. 2009년보다 2010년에 좋은 어린이책이 더더욱 많이 나왔고 더 많이 팔려서 읽히며 더더욱 많은 사람이 좋은 어린이책 만들겠다며 책마을로 뛰어듭니다. 2007년을 헤아리고 2006년을 돌아보며 2005년을 곱씹으면, 해마다 좋은 어린이책은 끝없이 늘어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숱한 좋은 어린이책을 품에 안으면서 좋은 넋을 키우는 어린이는 뜻밖에 자꾸자꾸 줄어드는구나 싶습니다. 좋은 얼을 북돋우는 푸름이는 나날이 줄어들고, 좋은 마음을 건사하는 젊은이는 하루하루 스러지며, 좋은 꿈을 꽃피우려는 어른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구나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어린이책이란 어린이한테만 좋은 책이 아닙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 좋을 때에 좋은 어린이책이라고 합니다. 훌륭한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훌륭하게 곱새기면서 반가이 곰삭일 수 있는 책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하느님의 눈물》이라는 어린이책은 사람이 무엇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가장 깊고 넓은 생각밭을 일깨웁니다. 고기도 풀도 불쌍하고 가슴아파 못 먹겠다고 하는 토끼는 바람과 이슬만 마시면서 살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고, 토끼가 흘리는 눈물 실린 울음을 듣던 하느님은 아무 말을 못하고 토끼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짧은 이야기 담긴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육식이든 채식이든) 모두 다른 목숨을 먹는 일이요, 우리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잇자면 다른 이 목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 ‘풀 먹는 사람입니다(채식주의자입니다)’ 하고 밝히더라도 좋은 이웃집에서 고기 반찬 차려 애써 대접해 주면 고맙게 받아먹을밖에 없습니다. 아무 티를 내지 않고. 왜냐하면 밥 한 그릇에 담긴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이 있거든요. 푸성귀를 길러 먹는다고 목숨을 먹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돼지를 잡고 닭을 잡고 소를 잡을 때에만 불쌍하고, 개를 잡고 염소를 잡고 오리를 잡을 때에만 가여우며, 냉이를 캐고 쑥을 뜯고 두릅을 자를 때에는 불쌍하지 않는데다가, 벼를 베고 콩을 털고 밀을 빻을 때에는 가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밥을 먹고 옷을 깁고 집을 짓는 모든 일은 자연한테서 선물을 받는 삶입니다. 옛사람들은 예부터 자연한테서 얻은 선물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돌보면서 당신들이 숨을 거둘 때에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개화기’라는 이름으로 갖은 공장이 들어차며 우리 스스로 이 땅과 마을과 삶터와 사람 모두를 더럽히기 앞서, 사람 삶이란 언제나 되돌림이고 되살림이고 되풀이였습니다. 이렇다 하여 머나먼 옛날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바탕과 밑마음을 고이 깨닫고 가누면서, 저마다 아름답고 알차게 삶을 일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나 스스로 맑은 넋을 붙잡고, 나 스스로 고운 뜻을 이으며, 나 스스로 예쁜 삶을 가꾸어야 좋다는 소리입니다.

 예쁜 그림책 하나란 나 스스로 내 삶을 어여삐 붙잡고 잇고 가꿀 때에 비로소 태어납니다. 무슨무슨 일류 대학을 나온다든지 어디어디 나라밖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든지 해야 예쁜 그림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떤어떤 상을 받았다거나 얼마얼마 많이 팔리는 그림책이라 해서 더 예쁜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열다섯 살 나이에 그렸다고 모자란 그림책이 아니요, 예순다섯 살 나이에 그렸다고 훌륭한 그림책이 아닙니다. 내 삶에 담는 마음그릇에 따라 예쁘냐 예쁘지 않느냐가 갈리는 책 하나입니다. 내 삶에 바치는 땀과 눈물과 손길과 다리품에 따라 예쁜지 안 예쁜지가 나뉘는 책 하나입니다.









 


 (2) 예쁜 마음결로 노래하는 그림책


 그림책 《파도야 놀자》를 넘깁니다. 애 아빠는 설렁설렁 지나쳤으나 애 엄마는 그림이 예쁘고 시원하다면서 찬찬히 펼칩니다. 애 엄마 말에 애 아빠는 그림을 눈여겨봅니다. 애 아빠가 《파도야 놀자》를 사자고 말합니다. 애 엄마는 어느새 다른 그림책들을 구경하더니 똑같은 책값이라면 이 그림책 말고 다른 그림책을 사겠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합니다. 애 아빠는 이 그림책도 사고 다른 그림책도 사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파도야 놀자》를 여러 차례 되넘기고, 아이 앞에서 넘기며, 그린이 누리집에 들어가 이모저모 들여다봅니다.

 조용히 일렁이던 파란 물결이 차츰차츰 길어지거나 커지면서 아이하고 술래잡기를 하는 듯 오락가락합니다. 괭이갈매기 다섯 마리는 어린 계집아이 뒤와 둘레에서 걷다가 날다가 하면서 아이와 나란히 파란 물결하고 놉니다. 괭이갈매기는 갑자기 불어난 파란 물결을 깨닫고는 높이높이 날고, 어린 계집아이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다가는 와락 물벼락을 맞습니다. 그런데 물벼락을 맞고 보니 어지러이 핑핑 돌기는 하면서도 아이 둘레에 쏟아진 불가사리며 조개이며 갖가지 바닷것이 널립니다. 물결에 휩쓸려 아이한테 다가온 바닷내음입니다.

 《파도야 놀자》를 그린 이수지 님은 당신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바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나의 아기, 산에게”라 적어 놓습니다. “우리 아기, 산한테”나 “아기, 산한테”라 적지 못하는군요.

 군말이 없이 예쁘장하게 그리고 꾸민 책은 하양과 파랑과 검정이 알맞게 어우러지면서 시원한 맛과 넉넉한 멋을 풍깁니다. 온갖 군더더기가 많은 창작 그림책이 판치고, 지나친 지식과 정보에 허덕이는 자연생태 그림책이 넘치는 오늘 우리네 어린이책 터전을 돌아보노라면 《파도야 놀자》는 더없이 깔끔하고 홀가분한 그림책입니다. 옐라 마리 님이 빚은 《나무》처럼, 가브리엘 벵상 님이 이룬 《꼬마 인형》이나 《어느 개 이야기(떠돌이개)》처럼, 《파도야 놀자》는 그림책 하나로 사람들 가슴에 얼마나 짙고 넉넉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가를 알뜰히 보여줍니다.

 좋은 그림책이란 한 번 보며 좋다고 느낄 책이 아닙니다. 좋은 그림책이란 수백 번 볼 만한 그림책 또한 아닙니다. 좋은 그림책이라고 할 만한 책이라면 수백 수천 번을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좋고 새롭도록 반가운 책입니다. 《파도야 놀자》는 여러 차례 되넘기며 들여다볼 만한 그림책입니다. 군더더기없는 그림책임에도 여러 차례 되넘길 때마다 곳곳에 조용히 깃든 또다른 모습에 눈길이 머무는 그림책입니다. 다만, 이 그림책을 백 번쯤 넘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천 번쯤 되넘길 수 있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쎄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이수지 님은 당신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바친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나라 안팎 좋은 그림책을 일군 숱한 분들은 하나같이 ‘당신 아이’ 또는 ‘마을 아이’ 또는 ‘이웃 아이’한테 바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곤 합니다. 글책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이한테 바친다고 밝힌다든지, 참으로 아이한테 바치는 책이라 할지라도 늘 곱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그림책 하나가 좋으면서 곱고 아름다운 가운데 훌륭하려면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샘솟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날마다 먹는 밥과 같은 이야기로 엮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먹지만 물리거나 질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 밥처럼, 날마다 새로 지은 밥이 날마다 새로운 맛이요 날마다 군침도는 맛이요 날마다 싱그러운 맛이듯, 좋은 그림책 하나로 자리잡자면 날마다 되넘기면서 날마다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지난 삶을 돌아보았을 때, 아이를 키우지 않던 나날이었다면, 또는 혼인을 해서 옆지기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이 아니었다면, 이때에는 《파도야 놀자》를 넘기면서 이처럼 어여쁘고 멋지고 시원시원한 그림책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으리라 봅니다. 아무래도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얕고 좁을 때에는 책을 바라보는 눈길 또한 더 깊거나 넓기란 어렵습니다. 누구나 제 삶에 따라 온누리를 살피고 사람을 마주하며 책을 쥐어듭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지 않고서는 훌륭한 책에 깃든 훌륭한 얼을 읽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훌륭한 얼을 받아들여 스스로 훌륭한 삶으로 거듭나고자 힘쓰지 못합니다. 어줍잖은 쥐대기인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늘 어줍잖음을 느끼면서 책 하나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는가를 돌아봅니다. 책 하나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는가를 돌아보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얼마나 제대로 꾸리는가를 돌아봅니다.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하루를 보내는 동안 아이한테 같은 책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다 다른 목소리와 모습’으로 읽어 주기 마련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일 때에는 수백 번이 아닌 수천 번을 소리내어 읽어 주고 어버이가 아이와 함께 책에 젖어들기 마련입니다. 같은 책 하나를 수십 번이 아닌 수백 수천 번을 함께 읽다 보면, 이 책 하나를 어떤 마음결과 품과 뜻으로 이루어 냈는가를 저절로 깨닫습니다. 그림이 예쁘장하다 하여도 ‘앞으로 더 보여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느낀다든지, 줄거리가 재미있거나 괜찮다 하여도 ‘이 책에 담긴 삶이 영 올바르지 않네’ 하고 느낍니다. 1986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나오지 못하는 《리타와 자전거》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애 아빠가 몹시 좋아하는 책이면서 아이 또한 퍽 좋아하는 책이라 거의 날마다 이 그림책을 다시 펼치고 또 펼치곤 하는데, 벌써 몇 백 번을 넘기지만 질리는 날이 없고 지루한 날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저희 또래 동무나 손위 손아래 동무하고 어울리는 나날을 살가이 보듬는 한편,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 삶자락이 곱게 엮이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 아빠는 《리타와 자전거》를 자꾸자꾸 되읽으면서 아름다운 책 하나를 돌아봅니다. 애 엄마는 두툼한 《모비딕》을 여러 번 되읽으면서 좋은 책 하나를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란 어디에 어떻게 나 있는가를 살펴보고,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이란 누구와 어떻게 어깨동무하거나 손잡고 걷는가를 살핍니다.

 《파도야 놀자》는 틀림없이 예쁘장한 그림책입니다. 시원시원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책입니다. 앙증맞기도 한 그림책이요, 재미난 그림책입니다. 상큼하고 밝은 그림책입니다. 보기에 괜찮고 귀여운 그림책입니다. 다만 ‘좋은’이라는 꾸밈말을 붙여 ‘좋은 그림책’이라고는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흐뭇한 그림책이거나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나는 그림책이요 즐거운 그림책입니다만, 고운 그림책이라는 말은 삼가렵니다.

 그러나, 그림책 이루어 낸 분은 이제 서른일곱 나이인 만큼, 앞으로 마흔일곱이 되고 쉰일곱이 되면 그동안 못 보고 못 느끼고 못 생각하고 못 살고 못 어루만지고 못 부대끼고 못 받아들이고 못 찾았던 이야기와 삶을 새록새록 찾아내면서 알뜰살뜰 푸근하게 여밀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그림책 하나가 그린이 한 사람 모든 땀방울을 못박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모든 책은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책 하나로 이 책을 쓰거나 낸 사람 눈높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책 하나를 마무르는 동안 이만큼 이이 삶이 다시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책 하나를 이쯤에서 마무르고 이제부터 또다른 삶을 일구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배워 나간 다음, 앞으로는 또다시 새로 태어나는 삶을 새로운 책에 담는다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책을 덮고 책꽂이로 옮겨 놓습니다. 제가 장만한 책은 2009년 12월에 3쇄를 찍은 판입니다. 2009년 5월에 1쇄를 찍었으니 제법 사랑받는 그림책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제본이 영 잘못되었습니다. 애써 시원시원 그린 그림을 잘못된 제본이 잡아먹어 버립니다. 1쇄가 이렇다면 미처 못 보고 지나쳐서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만, 2쇄도 아닌 3쇄 책이 이렇게 제본이 잘못되었다니요. 이수지 님 그림책 《파도야 놀자》는 가운데가 잡아먹히지 않게끔 실묶음을 제대로 하여 좍 펼쳐지도록 하든지, 아니면 그림을 통으로 더 길게 한쪽으로 오롯이 드러나도록 만들든지 해야 제맛과 제멋을 살립니다. 예쁜 그림책 하나를 어설픈 제본 때문에 망가뜨리는 끔찍한 잘못을 비룡소 같은 이름있고 큰 출판사에서 저지르지 않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쇄와 5쇄에서는 반드시 제본을 바로잡아야 할 터이며, 이 책을 장만한 사람들한테 고개숙여 뉘우치면서 앞으로는 그림책 제본에 더욱 깊이 마음을 쏟아야 할 줄 압니다. (4343.4.6.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하는 글쓰기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최종규 지음 / 호미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쓴 책을 나 스스로 말하기. 내 이름을 박아서 내놓은 책이지만, 이 책에 담은 알맹이와 땀방울은 나한테 고마운 분들 넋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가 쓴 책을 내가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내 둘레 아름다운 사람들 삶과 넋이 책 하나로 어떻게 갈무리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글을 적바림한다고 하겠다. 야옹야옹~) 


 이 책 하나 146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 최종규, 《생각하는 글쓰기》


- 책이름 : 생각하는 글쓰기
- 글 : 최종규
- 펴낸곳 : 호미 (2009.11.30.)
- 책값 : 1만 원


 (1) 나는 왜 책을 쓰는가


 글 한 줄을 적바림하면서 우리 누리를 바로세우거나 알차게 가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 한 줄을 적바림할 때에는 오늘 하루 제가 꾸리는 삶을 옮길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둘레 사람들이 우리 누리를 올바르고 어여쁘게 일구어 나가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땀흘리고 애쓰는 분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돈값 이름값 힘값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또 이렇게 하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저 제 둘레 사람들이 모두 올곧게 애쓰든 몇 사람만 올바르게 힘쓰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길을 저버리든, 저는 저대로 저한테 가장 알맞으면서 올바른 길을 찾고 꿋꿋하게 걸어갈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적바림하는 글쪼가리 하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저 스스로 제 삶을 얼마나 제 마음에 흐뭇하도록 일구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야기 한 자락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쓴 글 한 줄이 많은 사람한테 읽힐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 한 줄을 많은 사람한테 읽혀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아 주면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안 읽어 준다 하여도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제 글을 꾸준히 되읽으면서 어제와 오늘과 이듬날이 한결같이 곧고 고우며 맑을 수 있도록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남을 일깨우는 글이 될 수 있습니다만, 남을 일깨우기 앞서 저 스스로를 일깨우는 글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책을 수없이 찾아 읽든,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스승을 수없이 찾아가서 말씀을 여쭈든,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일거리를 찾아 바지런히 땀흘리며 일하든,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하고 어울리더라도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글 한 꼭지에 차곡차곡 담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담는 글이고,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저 스스로 잊지 않고 되새기고자 읽는 글이라고 느낍니다.

 날마다 차근차근 새로워지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글 한 꼭지이든 두 꼭지이든 갈무리하면서 날마다 제 삶을 가다듬는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좋은 생각을 맺으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어 주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꾸준하게 새로워지고 고우며 맑게 거듭날 수 있으면 저는 제 삶을 곱고 맑게 꾸리는 셈입니다. 제가 제 삶을 곱고 맑게 꾸릴 수 있다면, 제가 터잡고 있는 마을에서 곱고 맑은 넋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제가 터잡고 있는 마을에서 곱고 맑은 넋을 나눌 수 있으면, 제 둘레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곱고 맑은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고, 제 삶자락과 삶터부터 좋은 이야기가 어우러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혁명이나 개혁을 이룰 수 있기도 할 터이나, 저한테는 열 해나 스무 해나 쉰 해나 예순 해에 걸쳐 아주 더디게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제 삶부터 혁명이나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땀을 흘리고 싶습니다. 제 글쓰기란 갑작스레 크게 뜨거나 널리 읽히는 글을 낳는 일이 아니라, 짧으면 열 해이고 으레 서른 해이며 길면 예순 해 남짓에 걸쳐 좋은 뜻 하나를 이루고 싶은 긴 걸음걸이입니다.

 지난 2004년에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처음으로 내놓은 다음 2006년에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내놓았습니다. 올여름부터는 세 번째 헌책방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너 해 또는 대여섯 해가 지난 다음에는 네 번째 헌책방 이야기를 쓰고자 새 마음을 가다듬고 싶습니다.

 지난 2009년 봄에 《자전거와 함께 살기》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을 내기 앞서인 2008년 여름에 딸아이를 낳아 기르는 터라 두 번째 자전거 이야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워야 할 뿐 아니라, 아이와 다닐 때에는 자전거를 탈 수 없는 탓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자전거수레에 아이를 태울 수 있다면, 또 아이 스스로 자전거를 탈 무렵이 되면 시나브로 두 번째 자전거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겠지요.

 지난 2009년 가을에 《책 홀림길에서》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 실은 글은 다른 어디에 한 번도 내놓지 않은 글을 묶었는데, 앞으로 우리 살림집을 느긋한 곳으로 옮긴 다음에 두 번째 책 이야기 책을 새롭게 내놓고픈 꿈을 꿉니다. 서른다섯 나이에 돌아본 책 이야기가 있으면 마흔이나 마흔다섯에 돌아보는 책 이야기가 있고, 쉰이나 예순이나 일흔에 돌아보는 책 이야기가 있어요. 저마다 깊이와 너비가 다릅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겨울 들머리에 《생각하는 글쓰기》를 내놓았습니다. 제가 가장 깊이 마음을 쏟으며 하는 일이 ‘우리 말 이야기’ 쓰기임을 헤아린다면, 제가 내놓은 책 가운데 가장 늦게 나온 책입니다. 책이 나온 이제야 밝히면, 이 책은 2005년에 진작에 내기로 했으나 다섯 해를 미루고 늦춘 끝에 겨우 나왔습니다. 아마 2005년에 번쩍 하고 내놓았으면 좀더 많이 읽히거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2005년이 아닌 2009년 겨울에 내놓았기에 글을 더 손질하고 매만질 수 있었고, 다섯 해 사이에 새롭게 배우거나 뒤늦게 깨달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앞으로 두 번째 ‘우리 말 이야기’를 내놓을 때에는 그동안 새로 깨닫거나 배우는 이야기에 따라 제 어설프고 어리석은 생각밭을 다시금 가누어서 내놓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책 하나를 내놓을 때마다 저로서는 지나온 삶을 갈무리하는 한편, 제가 걷는 오늘을 곰곰이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좀더 슬기롭게 다스리는 눈길을 닦는다고 하겠습니다. 








 (2) 나는 왜 책을 선물하는가


 지난 《모든 책은 헌책이다》부터 《생각하는 글쓰기》까지 다섯 가지 낱권책을 내놓았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개인잡지는 여덟 권을 내놓았습니다. 모두 열세 권이며, 책방에 넣지 않은 비매품 책으로 《사진은 삶이다》와 《말은 삶이다》를 내놓은 적 있습니다. 이리하여 서른여섯 나이에 모두 열다섯 권이 되는 책을 쓴 셈인데, 열다섯 권에 이르는 책을 내놓는 동안 출판사에서 받은 글삯은 한 푼도 없습니다. 때로는 출판사에 책 찍을 돈을 보태어 주었습니다. 이러면서 우리 누리에 내놓은 책 열다섯 가지를 줄잡아 200권 남짓 둘레에 선물했습니다. 맨 먼저 헌책방 일꾼한테 선물했고, 저한테 고마운 분들한테 하나하나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제 책을 3000권 넘게 선물해 온 셈입니다.

 지난날에는 책 만드는 일을 하며 일삯을 벌었으니 제 책을 제 돈으로 만들어 둘레에 선물하고 나면 빈털털이가 됩니다. 그런데 빈털털이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글을 잇달아 쓸 수 있고 새삼스러운 책을 꾸준히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쉬움을 남기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쓰는 글이기에 다른 곳에서 돈벌이를 하여 푼푼이 모은 돈 얼마를 책한테 송두리째 바쳐 이 책들을 둘레에 선물할 때 그지없이 보람있다고 느낍니다.


.. 지식으로 다루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보여주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쌓자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참다이 사랑하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지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깨닫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지식이란 다름아닌 내 삶임을 옳게 느껴 넉넉하게 껴안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  (머리말)


 누구는 자가용을 몰고 누구는 아파트를 장만하며 누구는 맛난 밥 좋은 옷을 입는 데에서 보람을 느끼겠으나, 저로서는 자가용 안 몰고 아파트 장만 안 하며 맛난 밥 안 먹고 좋은 옷 안 입는 자리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데에 들어갈 돈을 옹글게 그러모아서 책 하나를 여미는 일만큼 저한테 기쁜 일은 다시 없으니까요. 제가 고운 목숨 하나 선물받아 이 땅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으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란 글 하나 쓰고 책 하나 묶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올봄 5월이 되면 지난 몇 해 동안 조용히 일구어 놓고 있던 글을 여미어 두 가지 책을 함께 내놓습니다. 하나는 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은 책입니다. 낱권책으로 치니 여섯째 책과 일곱째 책이 됩니다. 이 책들이 어여쁘게 태어나면 이 책들도 ‘글삯에 맞먹는’ 만큼 책으로 받아서 둘레에 하나둘 선물하고 다니겠지요. 인천골목길을 담은 사진책은 따로 더 장만해서 좋은 사진이 태어나도록 도와준 골목이웃을 찾아다니며 한 권씩 선물하고 다닐 테고요.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힘들어 책을 읽을 겨를을 못 낸다고 하는데, 책을 읽을 겨를을 못 낼 뿐 아니라, 바쁘고 힘든 가운데 즐겁고 손쉽고 재미나게 읽을 책이 없기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제 글이 썩 재미나거나 신나는 글은 못 된다고 느끼지만, 바쁘고 힘든 가운데 손쉽게 읽으며 생각 한 줌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이 되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새로운 책을 내놓을 때마다 생각하는데, 이번 책은 지난 책과 견주어 좀더 손쉬우며 살가울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사람이 되고자 꿈꾸고, 차츰차츰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비손합니다. 이 마음을 책 하나에 살며시 담아 이웃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입으로는 잘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을 책 하나로 쑥스러이 나누고 싶습니다.
 







 (3) 내가 쓴 글을 내가 눈물겹게 읽기


 제가 쓴 글은 제 이름을 걸고 나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롯이 제 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둘레 곱고 맑은 사람들 넋을 고맙게 물려받고 선물받으면서 쓸 수 있는 글인 까닭입니다. 제가 잘나서 쓰는 글이 아니라 제 둘레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쓰는 글입니다. 제 둘레 좋은 사람들이 좋은 말과 삶을 보여주고 베푼 까닭에 이 말과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낸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제가 쓴 글을 즐겨읽습니다. 거듭 읽고 새겨서 읽습니다. 제 이웃들이 저한테 어떤 사랑을 나누어 주었는가를 제 글을 읽으면서 되돌아보고, 제 이웃들이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얼마나 온몸 바쳐 일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싶어 제 글을 곰삭입니다. 제가 읽는 제 글이지만, 제 글을 읽으며 더없이 기쁘고 즐겁고 반가우며 고맙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읽는 글이요 웃음을 터뜨리며 읽는 글입니다. (4343.4.3.흙.ㅎㄲㅅㄱ)


[19쪽]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을 때 삶터가 삶터다웁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나라가 엉망이어도 조그마한 마을 하나는 홀로 튼튼히 우뚝 설 수 있을 테지만, 이제는 작은 마을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벌이는 숱한 막개발에 쫓기고 밀리고 무너집니다. 큰뜻에 따라 작은뜻은 묻어야 한다면서 용역 철거꾼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밀어냅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 삶다움을 지킬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고, 우리다움을 추스를 일과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자리라면, 우리가 하는 일과 쓰는 글이 말답고 글답기 어렵습니다. 뒤틀리고 맙니다.

[30쪽] 무엇보다도 ‘기피 옥수수’라는 이름에서는 혀를 내두릅니다. 낱말책에도 없는 한자말 ‘기피’인데, 이런 이름을 어디에서 찾아내거나 알아내어 쓰는지 더없이 궁금합니다. 모양새 그대로 “껍질 벗긴 옥수수”라 하면 될 텐데, 왜 ‘기피 옥수수’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써야 할까요. 글자수가 둘 늘어서 “두 글자짜리 짧은” 이름을 쓰려는 마음이었을까요. 길이는 짧더라도 알아듣기에 좋지 않으면, 짧으나 마나임을 몰라서일까요. 농협에서 이와 같은 한자 이름을 즐겨쓰기 때문인가요. 농사짓는 분들 모두 이러한 이름만으로 곡식을 가리키기 때문인가요.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며 깨는 ‘깨’입니다. 이런 곡식한테 얼토당토않을 뿐 아니라, 우리 삶하고 아주 동떨어진 이름을 붙이는 일은 농사짓는 분들한테나, 생협 운동 하는 분들한테나, 또 우리한테나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 땅을 살리는 농사와 생협뿐 아니라, 우리 말과 글을 함께 살리는 농사와 생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34∼35쪽] 밥상에 차린다고 아무 먹을거리나 집어먹을 수 없습니다. 먹고살기 팍팍하다고 군인이 되어 싸움터에 나가 사람 죽이는 짓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또는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환경을 더럽히는 공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제대로 몸과 마음에 피와 살이 되는 밥을 먹을 노릇입니다. 돈 한 푼을 벌어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돈을 벌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를 쓰더라도 우리 넋과 마음과 삶을 일으키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만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 마음과 생각과 넋이, 삶과 일과 놀이가, 그리고 말과 글과 이야기가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38∼39쪽]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으며, 세상이 세상다울 수 없는 이 땅에서는 책이 책다울 수 없는데다가 말이 말답지 못합니다. 우리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거나 나눌 자유가 없이 국가보안법에 짓눌리고, 우리 마음을 스스럼없이 펼치거나 함께할 권리가 없이 통신검열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자리에 학문이 학문답게 뿌리를 내립니다. 세상이 세상다울 수 있는 터전에 말이 말답게 줄기를 뻗습니다. 얼과 넋이 얼과 넋다이 아름다울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 일과 놀이는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이 가득한 일과 놀이로 새로워지거나 새삼스러워집니다.

[45. 46쪽] 길을 가니 길손이요, 함께 길을 가서 길동무이며, 길에서 먹으니 길밥이고, 길을 그려 놓으니 길그림입니다. 길에서 살듯 일을 하거나 길을 좋아하니 길사람이고, 어디로 나아갈까 헤아리면서 길머리를 찾고, 반가운 이를 맞이하고자 길마중을 나갑니다 …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빈다”고 흔히 말합니다. “죽은 이가 저승에서도 잘살기를 빈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예부터 써 왔으니 오늘날에도 쓴다고 할 테고, 앞으로도 꾸준히 써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문이 아닌 한글을 쓰는 우리요, 우리 나름대로 우리 말투를 하나둘 꾸려 나갈 때가 한결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돌아가신 이를 기립니다”라든지 “떠나가신 넋이 걱정없이 잠드시기를 빕니다”라든지 “고이 잠드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50, 69쪽] 예전에는 저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래서 참 좋구나 싶은 말을 보든, 참 얄궂구나 싶은 글을 읽든,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저뿐 아니라 누구나 우리 말과 글을 놓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 좋은 말이 좋은 말인 줄 느끼지 못하고, 얄궂은 글이 얄궂은 줄 느끼지 못하지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좋은 버릇은 들이지 못하고, 얄궂은 물이 자꾸 들면서, 당신 스스로도 안타깝고, 우리 나라나 문화로 보아도 안쓰러운 쪽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 누구나 조금씩 생각을 기울여 보면 얼마든지 한결 걸맞고 알맞고 살갑게 낱말 하나 엮어 낼 수 있습니다. 말투나 말씨도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이 여밀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니 좀더 낫다고 여길 만한 낱말이나 말투나 말씨를 못 찾고 못 느끼고 못 쓰고 있을 뿐입니다.

[57, 59쪽] 한자말을 쓰는 일이 잘못은 아닙니다. 어느 말을 쓰든 올바르게 쓰지 못하는 일이 잘못입니다. 알맞게 써야 할 자리에 알맞지 못하게 쓰니 잘못입니다 … 퍽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가난뱅이’는 토박이말로 있는데, ‘부자富者’는 왜 한자말로 있을까 하고. 돈이 없거나 적은 살림을 가리키는 말은 토박이말로 ‘가난’이면서,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을 가리키는 말은 왜 한자말로 ‘부유富裕’일까 하고. 머리통이 굵어지고 여러 낱말책을 찾아보던 어느 날, 우리 토박이말로도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음을 뒤늦게 배웁니다. 토박이말로는 ‘가멸다’입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살림을 ‘가멸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느 ‘부자’라면 ‘가면이’이고, ‘억만장자’라면 ‘가멸찬이’입니다.

[63쪽] 말을 살리는 일은 제 삶을 살리고 제 넋과 얼 또한 살리는 일입니다. 말 한 마디를 살리면서 우리 삶 한 자리를 차근차근 살립니다. 우리 삶 한 자리를 차근차근 살리는 가운데 우리 넋과 얼이 새로워집니다. 아름답게 빛나든 그리 밝지 않게 빛나든 나날이 싱그러움을 더해 갑니다. 작은 한 가지를 들여다보는 마음이기에, 내 둘레에서 내 자그마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좀더 찬찬히 둘러봅니다. 천리길을 왜 한 걸음부터 걸어야 하는지, 티끌을 모으면 왜 큰산이 되는지, 첫 술에 어이하여 배부를 수 없는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달으며 가슴으로 새깁니다.

[64, 66쪽] 말을 살리지 못하면 내 삶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 손과 입을 거쳐서 들어온 말투가 사그라들기는커녕 되살아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영어 말투가 또다른 뿌리를 내리면서 속속들이 퍼집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한테 고유한 말과 글을 가꾸면서 보듬기란 참 어렵습니다. 말과 글에 앞서 삶이 뿌리뽑히고 문화가 내동댕이쳐지며 넋과 얼이 짓밟힙니다. 말만 살릴 수 없고 글만 북돋울 수 없기에, 삶을 함께 살리고 문화를 같이 북돋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87, 90쪽] 말이란, 말하는 사람 스스로 가꿔야 합니다. 글이란, 글 쓰는 사람 스스로 가꿔야 합니다. 얼도 넋도 맟나가지이며, 생각과 슬기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꿀 때 비로소 싱그러운 새싹을 돋우어 내고 줄기를 올립니다. 우리 말을 가꾸고자 우리 머리를 쓸 때 바야흐로 튼튼한 가지가 뻗어나고, 가지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자꾸 바깥에 눈을 돌리며 바깥에서 거저 얻으려 한다면, 꿍꿍이속을 키우는 바깥에 있는 빚쟁이들이 어느 한때 갑자기 들이닥치며 우리 말살림을 죄 거덜나게 하리라 봅니다 … 같은 서울에서도 서로를 돈과 힘과 이름으로 나누는 짓을 그만두지 않고서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서울 안과 서울 밖을 나누는 못남을 떨쳐내지 않고서야, 사람과 뭇목숨 모두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고서야, 입으로만이 아닌 몸으로 콩 한 알도 나누는 매무새로 살아가지 않고서야, 옹글게 쓰는 우리 말이란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봅니다.

[103, 132쪽] 좋은 사람들한테 마음을 쓰듯, 우리가 날마다 쓰는 우리 말에도 마음 한 번 써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좀더 살가운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좀더 쉽고 깨끗하게 쓸 수 있도록, 좀더 알맞고 넉넉하게 쓸 수 있도록, 좀더 우리 삶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우리 생각도 알뜰히 담아낼 수 있도록 마음을 쓰면 좋겠습니다 … 바라는 대로 살게 되고, 살아가는 대로 말이 됩니다. 꾸미는 대로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대로 글이 바뀝니다. 우리가 옳게 살고자 애쓰면 옳은 말을 저절로 쓰게 되고, 우리가 그릇되게 사는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 글은 그릇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고히야마 하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얼미디어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32 ― 아름다운 책 하나 찾는 길
 : 고히야마 하쿠,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 책이름 :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 글 : 고히야마 하쿠
- 옮긴이 : 양억관
- 펴낸곳 : 한얼미디어 (2006.2.13.)
- 책값 : 1만 원


 (1) 책을 어떻게 맞아들여 읽는가


 나라밖으로 옮겨지는 우리 나라 책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나라안에서 널리 사랑받는 책이 아니라 나라안에서 무척 아름답다고 여기는 책 가운데에는 어떠한 책이 나라밖으로 옮겨지는지 궁금합니다.

 나라안에 옮겨지는 책들을 살피면 으레 나라밖에서 무척 사랑받고 있는 책이기 일쑤입니다. 나라밖에서 널리 사랑받지 않을지라도 나라밖에서 깊이 아끼거나 보듬는 조그마한 책을 나라안으로 옮기는 일이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훌륭한 나라안 책이라 할지라도 ‘사서 읽을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할 때에는 출판사에서 망설이거나 손사래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맹이가 훌륭한 책일지라도 출판사에서는 팔림새를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고를 때에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한테 가장 사랑스럽다고 느낄 책을 고르는 책방마실이지만, 오늘 책방마실에서 고르는 책 하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부대끼는 동안 깨달은 ‘나한테 사랑스러울 느낌’입니다. 오늘까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인 만큼 앞으로는 달라지거나 새로워지거나 거듭날 수 있는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못 알아본 책을 오늘 알아볼 수 있고, 오늘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책을 이듬날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반가이 집어드는 책 바로 옆에 꽂혀 있을 더없이 반가울 책을 오늘까지 못 알아본 채 지나칠 수 있습니다.

 1995년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2000년에 비로소 알아보는 책이 있습니다만, 고작 다섯 해 만에 판이 끊기는 수가 있습니다. 2002년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2005년에 바야흐로 알아보는 책이 있는데, 겨우 세 해 만에 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2008년에는 알아볼 눈이 얕았으나 2010년에 드디어 알아보는 책이 있어도, 기껏 두 해밖에 안 지났어도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지난날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 책눈이 얕아서 책을 따스히 껴안지 못하기 일쑤이고, 오늘날뿐 아니라 앞날까지 제 책눈이 어설픔을 뒤늦게 깨달으며 책 하나 더욱 넉넉히 보듬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책방마실을 할 때에 ‘내가 오늘 꼭 읽지 않더라도 앞으로 읽을 만한 책일 수 있다’고 여기는 책을 조금씩 장만하곤 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오늘 다 읽어치울 책’만 빠듯하게 장만했으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두어 해 뒤에는 ‘이듬날 읽을 책을 몇 가지’ 장만합니다.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고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는 이동안 사라지는 책이 있으며 이동안 무슨 책이 나왔는가를 하나도 알 길이 없던 탓에 ‘언제 어느 책이 내 눈에 한 번도 스치지 못하고 사라질는지 모른다’고 헤아리며 이듬이듬날 읽을 책을 차곡차곡 장만합니다. 사랑스러운 님을 만나거나 사귈 때에는 나로서는 아직 내키지 않으나 둘이 서로 나눌 책을 곰곰이 살피는 눈길을 기르고,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는 나로서는 마음이 들지 않아도 아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넓고 깊게 책밭을 둘러보면서 책을 장만합니다. 2010년 오늘은 그지없이 사랑받으며 잘 팔리는 책이라 하여도 고작 서너 해 뒤에는 갑작스레 미움을 받으며 스러지는 책이 있을 수 있어요. 한 번 자취를 감추는 책을 나중에 찾아보고자 한다면 대여섯 해는 아무것 아니고 일고여덟 해나 열 몇 해쯤은 넉넉히 잡아먹습니다.

 있을 때 사고, 샀으면 잘 간수하며, 간수했으면 마음으로 고이 삭인 다음, 삭였으면 즐거이 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서 지난 열 해에 걸쳐 가장 훌륭하다고 느끼는 책이 무엇인가를 뽑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걷는 책길에 따라 만화책 하나와 글책 하나와 사진책 하나를 뽑았습니다. 지난 열 해(2000∼2009) 동안 제 손을 거친 책은 여러 만 권이 될 테고 우리 집 책꽂이에 남은 책은 이만 권이 조금 안 됩니다. 좋으면 다 좋은 책이지, 어느 책이 더 좋고 덜 좋고를 가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이때에 제 마음을 덥혔고, 저 책은 저때에 제 생각을 일깨웠습니다. 한 줄로 사로잡는 책이 있고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아리따운 책이 있습니다. 읽는 기쁨이 있는 책이 있고, 나누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 있으며, 내 삶으로 곰삭이는 멋이 있는 책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올 한 해(지난 열 해) 나한테 가장 아름다운 책’ 한두 가지를 뽑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만 사람한테는 만 가지 좋은 책이 있는데, 이러한 만 가지를 몇 가지로 뭉뚱그린다는 일은, 고작 몇 가지 책을 드높일는지 몰라도 만 가지로 다 다르게 아름다운 책을 저버리거나 등지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등수나 차례를 밝힌다 하여도, 어렵사리 추천을 한 모든 책들이 어떤 책인지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어도 ‘다 다른 아름다움과 멋’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래도 일은 일인 탓에 저 또한 제 깜냥껏 세 권을 가까스로 추렸고, 세 권 이름을 들면 《도자기》(만화책), 《이 여자 이숙의》(글책), 《역전 풍경》(사진책)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본 사람이 있을는지 궁금한데, 아마 세 가지를 모두 본 사람은 아주 드물지 않으랴 싶습니다. 온 나라에 걸쳐 다섯 사람이나마 있을까 말까 한 노릇이라고 봅니다. 만화책 《도자기》는 제법 사랑받고 있어도 《이 여자 이숙의》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천 사람이 안 되고, 《역전 풍경》을 알아보는 사람은 몇 백 사람이 안 되는데, 그나마 《역전 풍경》은 몇 해 앞서 ‘더는 안 찍어 살 수 없는’ 책이 된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만화책을 즐겨읽으며 글책을 즐겨읽는다든지 글책을 즐겨읽으며 사진책을 즐겨읽는다든지, 사진책을 즐겨읽으며 글책이나 만화책을 즐겨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기는. 《역전 풍경》은 김기찬 님 사진책인데, 김기찬 님이 《골목 안 풍경》이나 《잃어버린 풍경》 같은 사진책을 냈어도 새책으로 반가이 사들인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모두들 헌책방에서만 (좀더 값싸게) 찾아보려고 할 뿐입니다.

 사진 하나를 놓고 생각할 때에, 오늘날 사진쟁이 이름을 내거는 사람이 제법 많고 사진쟁이 이름을 내걸지 않더라도 사진을 즐겨찍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잘나가는 젊은 사진쟁이 누구누구 이름을 들먹이는 사진밭이며, 아무개저무개가 우리 사진문화를 새로 일군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진비평이든 사진평론이든 김기찬 님이 살아 있을 적이나 돌아가신 뒤로나 ‘김기찬 골목사진 이야기’를 깊고 넓게 읽어내며 풀어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이분 사진책이 하나둘 ‘절판 길’을 걷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분 사진책 이야기는 더 나오기 힘들 테지요. 골목길이라는 사진감이든 서울역이라는 사진감이든, 사람들은 으레 그 사진은 그렇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김기찬 님 사진을 김기찬 님 눈길을 따라가며 느끼기는 어려울 테지요.

 책을 책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보듬지 못하는 흐름은 《역전 풍경》이라는 책 하나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책에서도 어슷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요츠바랑!》이라는 만화책을 우리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빙점》이라는 문학책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윤미네 집》이라는 사진책을 우리들은 어떻게 보듬고 있을까요. 틀에 박히거나 판에 박힌 눈썰미와 생각밭은 아니온지요. 차갑거나 딱딱한 마음결이나 손길은 아니온지요.

 누구나 삶을 꾸리는 모양새대로 책을 마주합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책을 붙잡습니다. 누구나 살림살이 일구는 결에 따라 책을 찾아 읽습니다.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포근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포근한 책입니다. 즐겁게 고운 삶을 가꾸는 사람들한테는 즐겁고 고운 책입니다. 땀흘려 일하고 신나게 어깨동무하는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한테는 땀과 신이 담긴 책입니다.
 





 (2)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라는 책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쓴 일본사람 고히야마 하쿠란 분이 있습니다. 고히야마 하쿠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라 하는데, 나라안에는 이분 소설책이 한 가지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책 하나, 수필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하나 옮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그 대신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 전후 일본인이 잃어버렸던 가장 큰 미덕은 남에게 밥 먹었느냐고 걱정해 주는 말이다(212쪽).” 같은 이야기를 사이사이 곁들이며 ‘일본사람이 일본땅에서 이웃 일본사람하고 내 삶터 일본땅에서 가장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수필책 하나만 옮겨져 있습니다.

 나라안에 옮겨진 일본책을 읽다 보면 ‘일본사람은 오늘날 이렇게 뒤틀린 채 살아간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일본사람은 지난날 돈에 미쳐서 오늘날까지 바보스레 살아간다’고 하는 대목을 곧잘 만납니다. 이 책에서도 “도쿄에서 지하철을 타면 사람을 밀치면서 자리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까지 남을 밀치고 자리를 잡으려 한다(215쪽).”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학생이나 초등학생도 마찬가지요, 초중고등학생을 키웠거나 키우는 어버이라 하는 아줌마와 아저씨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거나 다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 밥그릇 챙기는 데에 바쁘고, 저마다 제 배속 채우는 데에 홀려 있습니다.

 고히야마 하쿠 님은 당신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한테 ‘우리 모두한테 꼭 한 번 주어진 고마운 선물인 삶을 왜 아름답고 즐겁게 꾸리면서 신나고 보람있게 나누다가 아쉬움과 미움 하나 없이 살가이 마무리하지 못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짤막한 글을 씁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억지스런 가르침이나 꾸짖음이 아닌, 당신 어버이가 당신한테 베푼 속깊은 사랑이 무엇이었는가를 톺아보는 글로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따분한 수다가 아닌, 당신 둘레 수수한 사람들이 당신한테 선사한 넓디넓은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글로 들려줍니다.

 작으면서 고운 책이요,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책이며, 조용하면서 산뜻한 책입니다. 이러한 책일 때에는 출판사에서 굳이 양장으로 꾸미지 않으면 한결 낫고, 더 값싸고 더 조촐하며 더 조그마한 판으로 묶어서 사람들 앞에 내보이면 훨씬 낫습니다. 새책방에 꽂히든 헌책방에 꽂히든 도서관에 꽂히든 사람들이 쉬 알아보지 못하는 크기와 짜임새가 될 수 있을지라도, 더욱 작고 수수하고 값싼 책으로 여미었다면 좀더 낫습니다. 글쓴이부터 스스로 돋보이고자 쓴 글이 아니었으니까요. 읽는이한테 반드시 이 글들을 읽히고 깨우치려고 소매를 잡아끌지 않으니까요.

 때가 되면 알아볼 책입니다. 마음이 닿으면 스스럼없이 집을 책입니다. 생각이 있으면 찬찬히 헤아리며 찾아볼 책입니다. 이쁘장해야 할 곳은 책껍데기가 아닌 종이에 박힌 글월입니다. 눈에 띄어야 할 곳은 책꾸밈새가 아닌 종이에 찍힌 글월입니다. 가난하기에 아름답고 가난하기에 사랑하며 가난하기에 두레를 합니다. 가난하기에 착하고 가난하기에 믿음직하며 가난하기에 손을 잡습니다.

 돈있는 사람이 되며 넉없는 사람으로 바뀌고, 돈있는 나라가 되며 얼빠진 나라로 굴러떨어지며, 돈있는 마을이 되며 멋없는 마을로 달라지는 우리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라는 책 하나는 삶을 알차고 아름답고 애틋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은 바로 나부터 비롯하면서 씨앗이 퍼져 나갈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이 《계로록》 또는 《아름답게 늙는 지혜》 같은 책을 써냈듯이,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젊음과 아름다운 늙음을 마음껏 뽐내며 책 하나 이루어 냅니다. 남 앞에서 으스대는 젊음과 늙음이 아니라, 스스로 기쁨에 겨워 기쁨을 온누리에 솔솔 뿌리는 젊음과 늙음입니다. 또다른 일본사람 사하시 게이죠 님은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을 써내며 늙음을 마주하거나 맞이하는 젊음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따지고 보면 리영희 님이 쓴 《스핑크스의 코》 같은 책 또한, 늙음으로 달려가는 마당을 돌아보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음을 마음껏 드러내는 나이부터 우리 삶을 어떤 넋으로 가다듬으며 살아야 아름다울까를 일러 주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고운 삶에서 고운 말이 나오고, 고운 말을 들려주는 가운데 고운 책이 태어납니다. 따순 삶에서 따순 말이 나오고, 따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따순 책이 태어납니다. 좋은 삶에서 좋은 말이 나오고, 좋은 말을 펼쳐 보이는 가운데 좋은 책이 태어납니다.
 





 (3)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거듭 읽는 맛


 그리 두껍지 않아 금세 한 번 읽어내릴 수 있는 책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은 퍽 더디더디 읽어야 제맛입니다. 눈에 뜨이는 글 꼭지부터 차곡차곡 읽으며 마무리를 지어도 제맛이요, 마음에 와닿는 글을 여러 차례 되읽어도 제맛입니다.

 눈물이나 웃음 묻어나는 글을 식구들 앞에서 소리내어 읽어도 제맛입니다. 혼자 있는 방에서 홀로 소리내어 읽어도 제맛입니다. 찻집에서 말없이 읽어도 제맛이요, 전철이나 버스나 기차나 배나 비행기에서 한 꼭지 두 꼭지 읽어 보아도 제맛입니다.

 단락 하나 통째로 수첩에 옮겨 적은 다음, 수첩을 북 뜯어서 살가운 벗님한테 선물해 주어도 제맛입니다. 저마다 다 달리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는 책이로구나 싶습니다. 저는 제 가슴으로 촉촉히 젖어든 대목을 밑줄을 그으며 읽고 나서, 천천히 한 줄 두 줄 옮겨 적어 봅니다. (4343.4.1.나무.ㅎㄲㅅㄱ)


[14, 15, 83쪽] 집이 좁고 이불이 없어서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도 아버지와 한 이불에서 잤다. 그래서 나는 평소 아버지와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아버지 또한 내 마음을 잘 알았을 것이다 … 나는 50세가 되어서야, 훗카이도에 온 후로 낳은 다섯 자식을 아버지가 모두 손수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산파를 부를 형편이 못 돼 산기를 보이는 어머니를 봉당에 깐 멍석 위에 눕히고, 아버지가 손수 어머니의 가랑이 사이로 자식을 받았다고 한다. 산탕을 끓이고 산후 정리도 손수 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알았다. 행복이란 지위도 명예도 돈도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임을 … 내가 훗카이도 신문사에 취직이 결정되던 그날, 산골마을에 살고 있던 아버지는 밭일도 나가지 않고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우리 아들이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훗카이도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온 마을을 자랑하며 다녔다 한다.

[14쪽] 나는 늘 어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했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서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상인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바보 취급 했고, 책을 많이 읽은 탓에 교묘한 논리로 아버지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질투심도 많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의심하고 닦달했다.

[31∼33, 75∼76쪽] ‘고쿠코’라는 회사에서 만든 원고용지였다. 더 살 수도 있었지만 다 쓴 다음에 다시 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 참았다. 두 달 후에 다시 사러 가서 서른 묶음을 사는데, 가게를 지키는 중년 여성이 물었다. “이렇게 많이 사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세요?” 아직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설을 쓰거든요.” 도무지 폼이 나지 않았다. “어머, 그러세요. 정말 대단하네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산대의 직원에게 20% 할인해 주라고 특별히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내 몸속의 중심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원고용지의 가격을 깎아 준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또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가게에 갔더니 이사를 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 20여 년 동안 나와 면식을 가졌던 그 전무는 여전히 원고용지를 싸게 해 주었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 “난바 상점입니다.” 나는 “앗!” 하고 소리쳤다. 32년 간 내게 원고용지를 싸게 주었던 난바상점의 전무 난바 나츠코 씨의 목소리였다. 나는 건강하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에 밀려 도산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밝았다. 나는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달리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 “60년 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게를 이렇게 만들어 버리고는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쓴 글을 읽고 어깨의 짐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내가 그 문방구점을 하는 동안 유능한 작가를 하나 길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글 하나만으로도 내가 60년 간 그 가게를 경영한 보람이 있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36쪽]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처럼 거실 난로 곁에서 고향 이야기를 했었다. 아이즈 시절의 친구, 학교, 집 주변의 산이며 강이며 전답에 대해 그리고 부모형제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43, 45, 86∼87쪽] 나는 소설을 쓸 때 가능한 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을 배제하고, 설명조의 문장을 안 쓰도록 노력한다.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 모든 현상을 표현과 묘사만으로 제시하자고 늘 다짐한다. 가능하다면 읽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어떤 풍경이나 상황이 떠오르는 듯한 그런 문장을 만들어 내고 싶은데,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버지는 반론을 펼쳤다. “고등학교나 다닌다는 놈이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 나는 정달 (지구는) 둥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따지고 들었다. “너, 본 적 있어?”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봐.” 내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현기증이 일었다. 아버지는 간발의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보지도 못한 걸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 아냐.” … 나는 영화 각본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다른 소설을 집필 중이라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편지를 다섯 번이나 읽었다. 왜냐하면 기계로 친 글자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글씨였기 때문이다. 읽을수록 글자 한 자 한 자가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다이치 씨의 열의가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직접 손으로 쓴 글씨의 힘일 것이다. 다이치 씨가 전화가 아니라 손수 쓴 편지로 나에게 의논했다는 데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이것은 간단히 거절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설령 그것이 3천 엔밖에 안 되는 돈을 빌릴 때라 하더라도 직접 상대를 만나 부탁하는 것이 예의다. 상대가 규슈에 있건 미국에 있건, 거기까지 찾아가서 얼굴을 보이고 육성으로 부탁하는 것이 도리다 … 상대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무작정 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해 버릴 정도로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62∼63쪽] 어느 날, 갑자기 도쿄에서 편집자가 찾아오는 바람에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년필을 전당포로 가지고 갔다. 그 당시 월급이 5만 엔이었는데, 제대로 된 소설도 못 쓰는 주제에 만년필만은 10만 엔이나 하는 펠리칸, 쉐퍼, 몽블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연장으로 자신의 무능을 슬쩍 가려 보려 했던 것 같다. 세 개의 만년필 가운데 펠리칸과 몽블랑은 벌써 전당포로 들어가 있었기에 남은 쉐퍼를 맡겼다. 그 돈으로 원고를 의뢰하러 온 편집자와 술을 퍼마시고 밤중에는 집으로 갈 택시비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월급날, 먼저 맡긴 만년필의 이자를 들고 전당포로 갔다. 평소에는 웃음 한 번 보이지 않던 전당포 아주머니가 이자를 갚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부탁이 있는데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 하고 나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순간, 혹시 이자가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 아주머니가 창구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사흘 전에 서점에 깔린 나의 첫 저서 《데바》였다. “여기 사인 좀 해 주세요.”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숨이 딱 막혔다.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책에 사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필이면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전당포에서 사인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기뻤다.

[120∼121쪽] 어느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내가 사는 공단주택으로 돌아왔더니 아내가 웃으면서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 권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 안을 엿보았더니 《데바》가 댓 권이나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 보니, 아내는 매일 책을 팔러 다녔다고 한다. 이웃 동의 1층에서 4층까지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려고 남편이 쓴 소설인데 어떠냐고 하면서 행상을 했던 것이다. 강매라고 생각한 어떤 주부는 화를 내기도 했고, 신흥종교의 포교자라고 여겨 문도 안 열어 주는 사람도 있었따. 책을 들고 요모조모 뜯어보는 사람에게 가격을 말하자, 그냥 주는 게 아니냐고 하면서 책을 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닷새 만에 여섯 권이나 팔았어.” 아내는 밝게 웃었다.

[169쪽]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을 부동산업자에게 내놓으면 토지와 집을 합하여 1천 5백만 엔이라도 살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웃을 것이다. 토지에도 집에도 정신이란 것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물질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형성한다.

[195쪽] 꽤 오래전에 모유보다 분유가 좋다는 이상한 말이 퍼져 분유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얼마 후 역시 모유가 좋다는 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장사치들이 분유를 팔아먹으려고 정보를 조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기의 입과 어머니의 피부가 만나면서 오가는 마음이다.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207∼208쪽] 그로부터 49년이 지나 〈서리〉라는 글을 썼는데, 그 1년 후에 그 글을 읽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 기숙사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농가에서 자랐는데, 지금은 63세지만 당시에는 13세의 중학생이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그즈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는 매년 공고 기숙사 학생들이 서리를 한다는 걸 알고, 교장과 사감에게 항의하러 가려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어린 학생들이 서리 좀 하면 어떠냐고, 좀더 심으면 될 텐데 뭘 그러냐고, 애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러겠냐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리고 다음해부터 아버지는 기숙사 학생들을 위해 캐비지, 감자, 호박을 더 많이 심었어요.” … 17세 때의 나는 오로지 내 배 고픈 것만 생각했다. 농가야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정말 바보였다. 그런데 그 농가는 우리가 서리를 하리란 예상을 하고 더 많이 씨를 뿌리고 가꾸었다. 나는 숨이 막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