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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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단한 사람한테 빛줄기 선사하는 책이 되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3] 김규항, 《예수전》


 이삿짐 나르기를 거들려고 인천에서 일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집을 나섰고, 밤 열두 시 반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옆지기는 아침부터 밤까지 홀로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지냈습니다. 요즈음은 바느질로 인형 만들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혼자 아이를 보자면 바느질하기란 만만하지 않으며 밥 차리기에다가 밥 먹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 둘이 함께 아이를 보아도 버겁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앞서도 언제나 집일을 많이 맡아서 하기는 했으나, 아이를 키우면서 맡는 집일이란 더없이 고단합니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오로지 고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무거워도 아이 볼따구를 쓰다듬고 궁둥이를 어루만지며 “우리 돼지야, 우리 돼지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즐겁습니다. 아이한테서 새 얼굴을 보고 아이와 함께 새 모습을 느낍니다. 고단하게 아이를 보기 때문에 얻는 보람은 아니나, 아이는 아이대로 늘 맑고 웃는 얼굴이 되면서 스스로 목숨을 지킬 수 있는 한편, 어른들이 잃기 쉬운 웃음과 느긋함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길동무가 아니랴 싶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어른이 된다는 말이란, 아이를 낳는 경험이 몹시 크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할 터이나, 이보다는 우리 스스로 더욱 고단한 새삶을 열면서 더욱 고단하기에 더욱 기쁘며 새삼스러울 수 있는 새길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우리들 목숨이기에, 이 목숨값이 얼마나 크며 거룩하고 아름다운가를 깨닫는 일은, 나 스스로 어버이가 되는 데에 있을 테니까요. 나를 낳은 어버이를 생각하고, 나 스스로 어버이가 된 뒤, 내 아이 또한 어버이가 될 앞날을 헤아리면서, 우리들은 저마다 우리 목숨이 얼마나 곱고 거룩하며 놀라운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민주화 정권’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온전한 부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참혹한 풍경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짓이라고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  (9, 160쪽)


 하루하루 쉬지 못하고 보내는 나날인 채 일요일 아침부터 이삿짐을 나른다며 먼길을 나선 다음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전철길에서 도무지 눈을 뜨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3호선 첫역 대화역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눈이라도 감기는 감았으나, 인천으로 돌아가자면 종로3가에서 갈아타야 하니 느긋하게 눈을 붙이지도 못합니다. 무릎에는 책 하나 올려놓고 잠깐 잠들었다 깼다를 되풀이합니다. 안국역에서 가까스로 깨어나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종로3가에서 인천 가는 전철을 겨우 잡아탑니다. 막차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철을 올라탑니다. 빈자리가 있으나 앉지 않습니다. 자칫 동인천역에서 못 내리고 인천역까지 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졸음을 멀리하면서 책을 붙잡습니다. 어떻게든 한 시간 이십 분을 책읽기로 버티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마침 오늘 들고 나온 책은 ‘읽다가 잠들기 좋은 지루한’ 책입니다. 그나마 마음에 쏙쏙 스며드는 이야기책이었다면 잠이 확 깰 수 있으련만, 더 고됩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무거운 몸으로 동인천역까지 잘 버티어 냅니다. 드디어 전철표를 끊고 밖으로 나옵니다. 자정을 훌쩍 넘고 한 시로 달려가는 때이니 술집을 빼놓고 문을 연 가게가 없습니다. 술 얹힌 사람들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 하며 고요한 골목을 걷습니다. 우리 집이며 이웃집이며 모두 불이 꺼져 있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습니다. 먼지 잔뜩 묻은 옷은 모두 벗어 담가 놓습니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는데 옆지기가 깼습니다. 오늘 있던 일을 짤막하게 들려주고 옆지기 다리를 조금 주무릅니다. 곧바로 곯아떨어져야 하지만, 오늘 하루치만큼 밀린 일이 있어서 셈틀을 켭니다. 한 시간 반쯤 다시금 졸린 눈을 비비며 일을 하고 나서야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제 깜냥으로는 곯아떨어진다고 곯아떨어지지만, 간밤에 아이가 오줌을 누어서 잠을 깰 때에 함께 깨고, 새벽 다섯 시에 아이가 똥을 눌 때에도 함께 깹니다. 어제도 새벽에 똥을 누더니 오늘도 새벽에 똥을 누는군요.

 아침 여덟 시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부시시 일어나서 조금 일손을 붙잡자니, 아이는 어느새 따라서 깨어 납니다. 함께 놀자며 엄마한테 붙고 아빠한테 붙습니다. 거의 아무런 일손을 붙잡지 못한 끝에 아침 열한 시 넘어갈 때에 아침밥을 마련합니다. 어제 새벽에 해 놓은 밥에다가 떡과 당근과 고구마를 썰어 넣은 볶음밥을 합니다. 아이는 어제처럼 밥은 안 먹겠다고 도리질을 하고, 두부만 낼름낼름 집어먹습니다. 죽을 줘도 밥을 줘도 왜 이렇게 안 먹는다고 떼를 부리는지 힘겹습니다. 그래도 용케 콩은 아주 좋아하고 두부나 묵은 신나게 잘 먹습니다.


..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 예수는 특이하게도 바느질, 술 담그기 등 여성이 전담한 노동의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성 노동을 부각함으로써,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들에게 집중하는가를 좀더 분명히 드러낸다 … 예수는 마음의 귀가 열려야 한다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새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  (32, 39, 52, 77, 98쪽)


 머리가 지끈지끈하다고 느끼며 낮나절에 다시금 일손을 붙잡습니다. 이웃 누리집 마실을 하다가 김규항 님 누리집에서 “《예수전》 읽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정중히 부탁합니다. 천천히 한 번 더 읽어 주시길.”이라는 짤막한 글월이 며칠 앞서 올라와 있습니다. 피식 웃고는 책상맡에서 노란 책 《예수전》을 다시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며 제 나름대로 밑줄을 그은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훑습니다. 이 책을 한 번 다 읽었던 지난 11월 25일에 적바림한 한 줄이 맨 마지막 쪽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 남아돌면 딱 한 번 슥 읽어 줘도 되는 책이란. 참 얕다.’

 김규항 님이 쓴 《예수전》을 놓고 섣불리 ‘얕다’느니 ‘깊다’느니 하고 따지는 일은 알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예수전》을 다 읽고 나서, 이 부피 자그마한 책을 이렇게 엮어내어 만삼천 원이나 붙여야 했는가 싶어 몹시 슬펐습니다. 글부피도 적은데 굳이 양장으로 꾸며야 했느냐 싶습니다. 이 책을 이렇게 엮거나 꾸민 뜻은 알겠으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믿음을 나눌 수 있어야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180쪽).”라는 꾸지람을 꾸지람 그대로 나눌 만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책을 한결 보기 좋게 꾸미거나 엮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하여 반드시 수수하거나 풋풋하거나 단출하게만 엮거나 꾸며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야기하거나 하느님을 돌아보는 책이라 할 때에 좀더 수수하거나 한결 풋풋하거나 더욱 단출하게 엮거나 꾸밀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아침에 일산으로 가는 길에 다 읽은 《양희은-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우석,1993)이라는 책에서, 양희은 님은 “왜 성당들은 번쩍이는 장식,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는 걸까? 엄청나게 꾸며진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이 새끼손가락만 하게 찌부러져서 초라해만진다. 그 엄청난 장식들이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오히려 두터운 벽을 쌓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많은 이들과 같이 계셨던 곳은 들판이나 언덕 위였을 텐데. 들꽃 내음이나 밀 내음이 은총처럼 퍼지는 야외였다는데(26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양희은 님은 “비싼 장식으로 화려한 교회를 지을 그 돈이면 많은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수도 있건마는(264쪽).” 하고 말을 잇습니다.

 저 또한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 하나 만들거나 내놓을 때에 늘 ‘책 하나에 드는 돈’과 ‘이 책 하나에 붙이는 값’을 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책값 500원이나 1000원을 더 붙이면 저한테 떨어지는 고물은 조금 더 커집니다. 반양장이 아닌 양장을 하고, 겉종이에 코팅을 입히거나 금박을 넣거나 누름글자를 넣으면 그만큼 인쇄ㆍ제작ㆍ편집ㆍ디자인에 돈이 더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값을 조금 더 올려붙여도 사람들은 덜 투정’합니다. 뭔가 ‘고급스러움’을 느끼고 ‘책꽂이에 꽂았을 때에 품위가 느껴진다’고 하니까요.

 책 줄거리를 놓고 따지는 말이 아니라, 책 만듦새를 놓고 따지는 말이란 부질없을 수 있습니다. 아니, 부질없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이나 개성을 건드린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 줄거리가 괜찮은 책이라 할 때에는 책 만듦새 또한 안 살필 수 없습니다. 더 너른 사람한테 더 낮은 삶자락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책이 껍데기를 더 들쓰고 있다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지요? 더 속깊은 사람한테 좀더 너른 마음씀을 바라는 이야기를 펼치려 하는 책이 겉치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요? 《예수전》 같은 글부피라면 만삼천 원짜리 책이 아닌 만 원짜리 책이나 팔천 원짜리 책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습니다. 책 줄거리에 앞서 책 만듦새를 돌아볼 때에, 이 책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느꼈습니다.


..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이해하고 느끼는 건 물론이려니와,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 껍데기를 벗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를 닫아 놓은 사람에게 매달려 내내 시간만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 ..  (69, 73, 96, 103쪽)


 옆지기와 함께 《예수전》을 읽었습니다. 나 혼자 외곬로 바라보는 눈길이 될까 걱정하면서 옆지기 이야기를 묻고, 내 생각을 들려주면서 우리 세상에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어떤 매무새와 눈길로 헤아리며 받아들이고 곰삭이는 삶이어야 좋을까를 돌아보았습니다. 옆지기는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마땅한 이야기를 아주 마땅하게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책을 애써 써냈어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옆지기와 책 이야기를 나누며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상은 참다운 길보다는 유행이라고 하는 물결에 쉽게 휩쓸립니다. 김규항 님은 ‘사람들이 성경읽기를 너무 못한다’고 느끼며 《예수전》을 썼는데, 김규항 님이든 미우라 아야코 님이든 우찌무라 간조 님이든 김교신 님이든 하는 사람들이 풀이한 ‘성경읽기 책’을 읽지 않고 ‘우리 스스로 성경을 옳게 읽으’면 되는 노릇입니다. 성경에는 온갖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만, 한결 쉽게 알려주고자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를 다루지, 무슨 꿍꿍이가 있다거나 무슨 속셈이 있어서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제가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성경말씀을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가슴이 따끔하도록 건드리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따끔하다고 느끼고, 눈물겨운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웃음이 터지는 대목에서는 웃으면 됩니다. 내 잘못을 뉘우쳐야겠다 싶은 대목에서는 내 잘못을 뉘우치면 됩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이나 제대로 못 느끼고 있었다면 ‘자랑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으로서 내가 잘하는 일을 흐뭇하게 섬기면 되며, 앞으로도 꾸준히 잘해 나가면 됩니다.

 성경뿐 아니라 교과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교과서에 이런저런 말썽거리가 있습니다만, 말썽거리가 있는 책이라 한달지라도 이 교과서를 다루는 사람이 슬기롭게 다루면서 올바르게 가르치는 도움이로 삼으면 됩니다. 우리한테는 빈틈과 모자람 하나 없이 옹근 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훌륭하거나 거룩한 길을 모르거나 지나치거나 등돌리지 않으니까요. 책을 책 그대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경은 성경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람은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하는 일이 있으면 잘한다고 북돋우면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잘못한다고 나무라면 됩니다. 잘한다고 북돋우되 눈먼 채 뒤따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한다고 나무라되 그이 마음밭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한겨레신문 홍세화 님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더 섬겨야 하지 않고, 누구를 마냥 깎아내려야 하지 않습니다. 왼날개이든 오른날개이든, 옳고 바르고 아름답게 잘한다면 손뼉칠 일이요, 그릇되고 엉터리에다가 어줍잖게 하고 있으면 따끔하게 꾸짖으며 바르게 접어들도록 도와줄 노릇입니다.


..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 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미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셈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 겪는 불편함에 더해 인간적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돈과 물질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수록 이상하게도 정작 자유는 점점 멀어져 간다 …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 간다 ..  (162∼165쪽)


 김규항 님은 《예수전》이라는 책을 비롯해 강연자리나 다른 책에서 빠짐없이 ‘우리 마음속에 깃든 이명박(또는 대운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저어기 노옾으신 자리에 궁뎅이 붙이고 있는 양반 한 사람한테 손가락질을 한다고 풀리는 우리 삶터 말썽거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옳게 가꾸며 아름답게 일구어야만 풀리는 우리 밝은 앞날이라고 힘주어 거듭 말합니다. 이는 권정생 님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을 비롯한 모든 책에 어김없이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님뿐 아니라 이오덕 님이나 이원수 님도 늘 펼치던 이야기요, 송건호 님 글이나 리영희 님 글이나 성내운 님 글에서도 한결같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게을러서 가난뱅이가 되었’으니 ‘내가 부지런해야 부자가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가난이든 넉넉한 살림이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으면 좋은 삶’이라는 소리이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몫을 다 하면서 아름다움을 이웃들과 꽃피우면 좋다’는 소리입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어 낸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늘 즐겁고 아름다이 붙잡는 바탕이 먼저 튼튼하게 서 있은 다음에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든 백 해나 즈믄 해에 걸쳐 세상을 바꾸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옳은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다음 혁명을 외치든 개혁을 말하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맑은 길을 찾고 밝은 꿈을 품으며 고운 넋을 건사하면서 정치를 하든 학문을 하든 운동을 하든 문학을 하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 구원은 가진 게 없는 사람, 가진 것을 스스로 모두 비운 사람들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 ..  (114쪽)


 《예수전》을 다시 덮으며 생각해 봅니다. 김규항 님은 사람들한테 당신 책을 다시금 천천히 읽어 주기를 바라지만, 천천히 다시 읽어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두 번째 예수전’과 ‘세 번째 예수전’을 더욱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네 번째 예수전’과 ‘다섯 번째 예수전’을 더더욱 낮은 매무새로 조곤조곤 들려주면 넉넉할 테고, ‘여섯 번째 예수전’과 ‘일곱 번째 예수전’은 훨씬 더 다소곳하면서 쉽고 부드러운 우리 말글을 한껏 빛내면서 수수하고 풋풋하게 나누는 길을 찾으면 되리라 봅니다. (4343.2.8.달.ㅎㄲㅅㄱ)


 ┌ 《예수전》(돌베개 펴냄)
 ├ 글 : 김규항
 └ 책값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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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너지 시장 - 새로운 에너지 사회의 모습
이이다 데쓰나리 지음, 푸른아시아 옮김 / 이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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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자원도 ‘돈이 되어야’ 하는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2] 이이다 데쓰나리 엮음, 《자연에너지 시장》


 저한테는 운전면허증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기도 하나, 저로서는 자가용을 누가 거저로 준다 하여도 운전면허증이 없기 때문에, 이 자가용을 몰 수 없습니다. 누가 자동차 한 대를 준다 한들 받고픈 마음이 없기도 합니다. 자가용을 몰아야 할 만한 일이 있다고 느끼지 않으며, 아이와 옆지기와 저 셋이 자가용을 타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닌다 해서 더 느긋하거나 즐거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고픈 곳이 있으면 두 다리로 걸어서 가면 됩니다.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얻어타고 움직이면 됩니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자전거에 태워 함께 달리면 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한테 자가용이란 거의 ‘생활필수품’처럼 여기는 한 가지입니다만, 제 눈길과 삶결로 바라볼 때에는 ‘사치품’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자가용을 꼭 타야 할 만한 사람들이 꼭 장만해서 탄다기보다, 남들이 타고 있으니 따라서 탄다든지, 내 몸을 즐겁게 움직이는 일하고 동떨어지면서 탄다든지,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얼굴 세우기로 탄다든지, 이냥저냥 세상물결에 휩쓸리면서 으레 타야 하거니 하고 바라보는구나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기름을 안 먹는 깨끗한 자동차’가 나온다면, 그때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아주 손쉽게 운전면허증을 딸 길이 있었으나 굳이 따지 않았습니다. 동무들은 면허시험 문제집을 사서 달달 외운 다음 필기에 붙고(잘 모르겠으면 3번 찍기를 하면서), 오토바이를 좀 몰아 본 손맛으로 실기에 붙곤 했습니다. 준비 한 번 없이 실기를 보고도 붙은 녀석들이 꽤 많았습니다. 나중에 실기시험이 까다로워진다면서 그무렵에 얼른 따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더욱 운전면허증을 따는 일이란 부질없다고 느꼈습니다.

 왜 차를 몰아야 하는가를 먼저 깊이 생각할 노릇이요, 차를 몰아야 한다면 어떤 차를 몰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따질 노릇입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때에 쓰고자 미리 면허증을 딴다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직 제대로 마음닦이가 안 된 사람들한테 차열쇠를 건네는 일은 대단히 근심스럽고 무시무시한 노릇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우리는 자동차 부속과 교통법을 다루는 지식뿐 아니라, 차와 사람이 올바로 어우러지는 흐름을 함께 익히고 읽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버젓이 ‘학교 앞 길’임에도 경적을 울리며 싱싱 달리는 버르장머리없는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걷는 길에 차를 올려놓고는 볼일을 보러 다니는 짓궂은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짐을 실어서 나를 일이 있지도 않은데 골목길까지 자동차 머리를 들이미는 괘씸한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몇 미터쯤 걷기 싫어 다른 자동차와 숱한 사람한테 피해를 끼치는 나쁜 운전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누리는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은 석유 등 화석에너지를 대량 소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78쪽)


 새로운 자동차와 함께 새로운 자전거가 쏟아져나옵니다. 요즈음은 자동차꾼 못지않게 자전거꾼이 제법 늘었습니다. 자전거로 살아간다는 분이 제법 느는 한편, 몸을 생각하고 기름값을 줄이며 ‘자전거 모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즐거움을 누리는 분이 퍽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즐기는 자전거꾼 가운데에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전거를 마련하면서 ‘나 혼자한테는 좋을는지 모르나 다른 이웃한테는 좋을 수 없는’ 매무새를 보여주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자전거이든 자동차이든, 이와 같은 탈거리를 내 손에 쥐기 앞서 ‘이러한 탈거리를 내가 왜 타야 하고, 탈 때에는 어떻게 타야 하는가’를 곰삭이는 마음그릇을 제대로 닦지 않은 탓입니다.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니, 우리네 학교는 아이들한테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없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곱고 애틋한 목숨 하나를 선물받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지 않고, 더 높은 점수를 얻어 더 이름값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도록 밀어붙이는 데에만 매달리는 학교 틀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됨을 갈고닦는 학문이 아닌, 시험점수 잘 따는 입시기계로 내모는 교과서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허접한 교과서라 할지라도 교사들이 슬기로우면 되는데, 교사 또한 스스로 쇠밥그릇 월급쟁이에 머물면서 신나게 자가용을 몰기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현재 대부분의 목질 연료는 임업과 임산업의 부산물로 생산되고 있고, 최대 공급량은 주산물의 생산량에 따라 결정된다. 목질 연료의 공급을 계속적으로 늘리는 유력한 방안은 성장이 빠른 에너지 수목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것이다 … 나무를 모으거나 마름질해 재목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계를 사용하려면 일정 정도의 작업 규모가 확보되어야 한다. 어떻게든 사람의 힘으로 처리했던 시대에는 규모에 따른 생산성의 차이가 적고 소규모 생산으로도 살아남을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기계화 시대에는 작업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소유자가 다른 산림을 몇 개의 지역으로 묶어서 솎아베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  (56, 73쪽)


 흔히들 자동차를 몰 때에 ‘쾌적하고 편리한 현대 생활’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빨래기계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며 큰 냉장고를 갖추는 한편, 갖가지 전기제품을 집안에 가득가득 갖추어야 비로소 ‘문명 혜택을 받고 즐거이 꾸리는 삶’을 펼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참말로 ‘신나고 즐겁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은 자동차를 비롯한 전기제품 들을 장만하는 데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빨래기계를 안 쓰고 손을 쓰면서 두 손에 온통 물집과 꾸덕살이 잡히던 예전 어르신들한테는 신나거나 즐겁거나 깨끗하거나 아름다울 모습이 하나도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그날그날 저잣거리로 찾아가 먹을거리를 장만한 다음 손수 손질하여 차리는 밥상에는 즐거움이 없고, 자가용 몰고 ㅇ마트 ㄹ마트로 내달려 짐칸 가득 비닐봉지로 꾸역꾸역 채워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냉장고를 꽉꽉 채워 아무 때나 꺼내어 차리는 밥상이 훨씬 즐거울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덜 써야 즐거운 삶일까요. 우리는 우리 돈을 더 써야 즐거운 삶인가요.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덜 써야 기쁜 삶일까요. 우리는 전기와 물과 자원을 더 써야 기쁜 삶인가요.

 제가 사는 집에서 걸어가 5분 안짝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을 사면 1700원입니다. 제가 사는 집에서 자가용을 몬다면 5분쯤 달려 ㅇ마트에 닿을 수 있고(저는 자가용이 없으나 차를 타면 이쯤 걸릴 듯합니다), 이곳에서 보리술 한 병에 1530원쯤만 치르고 살 수 있습니다. 구멍가게에서 보리술을 산다면 두어 병만 사는데, ㅇ마트에서는 ‘값이 퍽 싼’데다가 ‘다른 덤을 끼워 주’고 있으니 여러 병을 사고야 맙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가용을 모는 현대물질문명을 누리면서 170원을 아끼는 만큼 나한테 더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만한지요. 보리술 열 병을 사면 1700원을 아끼니 한 병을 더 사고도 170원이 남는다고 셈할 만한지요. 그러면, 자가용 한 대 값이며, 자가용을 10분 동안 굴리며 드는 기름값이며, 자가용이 다녀야 하는 길을 닦는 데 들이는 사회간접자본이며, 자가용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더럽힌 우리 삶터이며 ……는 어찌하지요.


.. 풍력발전은 특성상 송전선 등을 포함하여 아주 넓은 용지를 필요로 한다. 용지 확보 기간이 사업 기간에 맞는가, 사업 자산으로서 담보 설정이 가능한가, 토지 소유자의 수가 많은 경우에 원만한 합의 형성이 가능한가 등이 요점이다. 중요한 인프라의 하나인 송전선의 거리가 길다는 것은 경제성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 줄어드는 위험이 아니라 사업 성패의 근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한 조건을 계약에 명기해야 한다 … 소비자에게 전기란 ‘송전선을 통해 일률적으로 공급되는 것으로 그 발전 방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전력 공급이 오랫동안 지역 독점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전기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첫 번째 사명이 됐다. 이런 이유로 더욱 소비자에게 전력을 차별화하여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96, 128쪽)


 《자연에너지 시장》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석유도 자연에서 나오고 가스도 자연에서 나온다 하겠으나, 이들은 화석에너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똑같이 자연에서 얻는다 하지만, 자연에서 태어난 목숨이 수만 수십만 수천만 해에 걸쳐 썩고 삭아서 이루어진 자원이기에 자연에너지 아닌 화석에너지이고, 이러한 화석에너지를 쓸 때에는 아주 마땅하게도 공해 문제가 불거집니다. 자연에너지란 공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쓸 수 있는 자원을 일컫습니다.

 우리 삶터뿐 아니라 이웃나라 삶터 또한 화석에너지가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는 화석에너지를 접어 놓고 자연에너지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화석에너지가 나아가는 길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길임이 뻔히 보이는데, 미련스레 화석에너지만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쓰는 자원도 자연에너지가 되도록 고쳐야 하는 한편, 우리 스스로 ‘얼마나 더 많은 자원을 써야 하느냐’ 하고 생각하면서 내 삶을 바꿀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화석에너지에서 자연에너지로 돌아서는 모습 또한 우리 스스로 삶을 바꾸는 노릇이고, 화석에너지를 쓰는 부피를 고스란히 자연에너지로 돌리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 마음이 한결 아름답도록 가다듬고, 내 삶이 더욱 싱그럽도록 추스르며, 내 목숨이 사랑스레 빛나도록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니 어쩔 수 없이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써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과 삶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든 시골에서 지내든, 나와 내 이웃이 다 함께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즐겁게 찾고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나도 웃고 이웃 또한 웃는 삶을 찾고 싶습니다. 나부터 흐뭇하고 이웃 누구나 흐뭇할 곱고 빛나는 삶터를 일구고 싶습니다.


.. 사회적 관심이 국토 개발에만 쏠려 있던 시기에 자연보호를 외치기는 쉽지 않다 … 하지만 건강한 먹을거리처럼 자연보호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개념으로, 결코 유행 상품이 아니다 … 전문가라는 일부 사람들의 판단으로 에너지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비민주적인 정책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 원자력발전소의 입지 지역에는 원자력 정책을 정면에서 부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없다. 입지 시정촌의 다수가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교부금 등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해당 지자체의 주민은 같은 규모의 다른 지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공적인 혜택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원자력 에너지의 유효성에 대한 시비를 과학적ㆍ논리적으로 냉정하게 논의하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 독일은 자연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치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나가는 추진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에도 자연에너지가 단번에 정부 차원의 정책이 된 것은 아니다. 자치의 현장에서 작고 구체적인 방안의 실천이 자연에너지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최종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는 정책으로 성장하고 있다 ..  (263, 265∼266, 268쪽)


 《자연에너지 시장》이라는 책은 세계 자원시장에서 화석에너지 쓰임새를 줄이고 자연에너지 쓰임새를 늘리고자 하는 몸부림이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지를 통계와 표와 갖은 자료로 보여줍니다. 세계경제가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살림을 잘 지키면서 다 같이 살아남으려면 자연에너지 시장을 어떻게 새로 일구면서 키워야 하는가 하는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자연에너지를 넓히는 좋은 이야기와 자연에너지가 널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찬찬히 들려주고 있지만, ‘자원을 쓰는 우리 삶’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오늘과 똑같은 매무새로 앞으로도 ‘끝없는 성장’만을 한다는 바탕에서 자연에너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너지 시장》에서 말하는 자연에너지란,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는 삶으로 바뀌었’으니, 더 많은 사료를 더 빨리 먹여 더 크고 먹음직한 고기를 길러내는 공장이 되어 버린 축산업과 매한가지로, 에너지로 돌릴 수 있는 자연을 ‘사람 손을 써서’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흐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바꾸려는 몸짓이란 하나도 없이, ‘우리 수요’를 넉넉히 채워 줄 수 있는 자연에너지가 더 늘어야 한다는 쪽으로 마무리가 되고야 맙니다.

 올바르게 꾸리는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느냐는 이야기 하나가 빠진 《자연에너지 시장》입니다. 오늘날 우리 물질문명 터전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괜찮은가를 바라보는 눈썰미 이야기 하나가 담기지 않은 《자연에너지 시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어도 자연에너지를 말할 수야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환경사랑’이라는 옷을 걸치면서 끝없이 쓰고 또 쓰라고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이니까요. 그런데 되살림과 되쓰기가 빠진, 허울좋은 ‘환경사랑’ 제품이 참말 환경사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터무니없이 많이 쓰는 화석에너지 높이에 맞추어 자연에너지 시장을 새로 열면 이 지구는 버틸 수 있습니까. 하기는, 자연에너지를 놓고도 ‘시장 개척’을 생각하고 ‘시장 개척 대책’을 생각하는 우리들로서는 자연에너지를 말하는 마당에서도 돈 걱정이 맨 먼저가 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4343.2.7.해.ㅎㄲㅅㄱ)


 ┌ 《자연에너지 시장》(이후,2010)
 ├ 엮은이 : 이이다 데쓰나리
 ├ 옮긴이 : 푸른아시아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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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세월
윤주영 / 눈빛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기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2] 윤주영, 《어머니의 세월》


- 책이름 : 어머니의 세월
- 사진 : 윤주영
- 펴낸곳 : 눈빛 (1997.11.7.)
- 책값 : 2만 원 






 (1) 사진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천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있는 문화재단들은 저마다 제 고장을 빛낼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원사업이 있는 줄 안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알고 난 다음에는 지원서류 쓰기가 퍽 까다롭고 골치가 아파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골치가 아프더라도 한 번은 써 봐야 하지 않느냐 싶어, 인천골목길을 찍은 사진을 놓고 지원금을 신청해 보았습니다. 제가 인천골목길을 두루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책으로 엮은 다음, 제가 사진으로 담은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분들한테 하나씩 선물로 나누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골목이웃한테 당신들 삶자리 모습이 담긴 사진을 한두 장씩 드리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당신들이 가꾸는 이 보금자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하고 말씀을 건네지만,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들 ‘저 젊은이가 그냥 입발린 소리로 읊는 인사치레’로 여깁니다. 그래서 인천골목길을 통째로 들여다보는 사진책을 하나 마련해 한 집씩 찾아다니며 선물로 드리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꿈을 이루자니 돈이 없는 저로서는 꿈 같은 소리입니다. 그예 꿈입니다. 살림돈 한푼도 모자란 주제에 무슨 사진책을 내겠습니까. 찍은 사진은 더없이 많고, 오늘도 바지런히 찍으러 돌아다닐 테며, 앞으로도 찍겠지요. 사진 몇 장 만들어서 나누어 드리는 일이야 어느 만큼 한다 치더라도 책으로 드리기는 몹시 버겁습니다. 집삯과 도서관삯 내기에도 빠듯한 살림이니까요.

 지원사업 공모에 붙을는지 안 붙을는지 모르나, 붙든 안 붙든 내 보고 나서 생각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붙었는지 안 붙었는지 모르지만 인천문화재단에서 면보기 하러 오라고 연락이 와서 지난주에 찾아갔습니다. 면접관은 “제(면접관)가 인천사람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이런 지역 특성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면 전시하는 공간을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이런 물음은 도무지 걸맞지 않을 뿐더러, 면접관 스스로 ‘인천에서 인천골목길 사진을 전시하고 책으로 엮어서 나누는 뜻’을 읽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참말 모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저 스스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몸이지만,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어요. 골목동네가 고향이라고 밝히는 사진작가 가운데 골목동네를 가끔이나마 사진으로 담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삶터로 여기며 꾸밈없이 골목 사진을 즐기고 나누려는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다고 느낍니다. 아니, 적어도 인천에는 없습니다.

 저는 인천골목길을 굳이 제 사진감으로 삼을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자주 찍으니 괜히 저까지 인천골목길을 안 찍어도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인천골목길을 찍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른 데’에서 놀러오는 사람들이고, 인천이라고 하는 터전을 사랑하든 아끼든 들여다보든 헤아리든 하는 마음가짐이나 눈길이 아니었습니다. 골목동네 주민으로서 퍽 짜증스럽고 어이없는 사진이 많았습니다. ‘그 좋은 장비를 쓰면서 이 따위 엉망진창 사진을 찍느냐? 그러면 차라리 내가 찍어서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남주 시인이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에 실린 시를 읽다가 ‘이만한 시가 시라면 나도 시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시길’을 걸었는데, 제가 김남주 시인 같은 그릇은 못 됩니다만 이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제 값싼 장비로 골목 삶터가 왜 골목 삶터인지를 말하는 사진을 담아내어 조용히 동네 이웃하고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면접관이 저한테 한 마디 물은 뒤’ 이런저런 생각이 뒤죽박죽 엉켰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앉아만 있으면 안 되기에 헛기침을 하고 나서 몇 마디를 줄줄줄 풀어놓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떠할는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동네 골목길이 참 예쁘다고 느껴요. 그래서 골목길 사진을 찍는데, 이 사진을 찍은 다음에 그 집에 다시 찾아가서 우체통에 사진을 넣든 앞에서 인사하고 드리든 하면서 ‘집이 참 예쁘고 좋아서 찍었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골목길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는데, 이렇게 동네 주민으로서 골목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사진을 찍으며 다니다 보면 동네사람들이 ‘뭐 하러 사진 찍어요?’ 하면서 따져요. 인천시에서는 오래된 동네를 빨리 허물고 아파트로 재개발하려고 하는데, 이러면서 오래된 골목동네가 꾀죄죄하고 낡고 못났다는 생각을 심거든요. 그러면서 일부러 낡고 꾀죄죄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공무원들이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동네사람이 그렇게 물으면 ‘집이 예쁘잖아요’ 하고 말씀드리는데, 다들 웃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곳에 뿌리내리며 살아오는 분들이 집과 동네를 참 예쁘고 곱게 꾸미고 있는데, 당신들 스스로 이 동네가 얼마나 예쁘고 고운 줄을 모르셔요. 제가 괜히 집이 예쁘다고 말하는 줄 생각하셔요. 음, 이 같은 골목길 모습을 다른 지역에 보여주는 일도 틀림없이 뜻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분들 스스로 당신 보금자리가 얼마나 곱고 예쁜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난 다음에 서울이든 다른 지역이든 이 사진을 들고 가서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해요. 동네사람들한테 자부심을 느끼게 해 드리고 싶어요.”

 지난주에 여러 차례, 그제와 그끄제 잇달아 ‘골목마실 길잡이’가 되어 사람들한테 인천골목길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면서 오래오래 걷는 나들이를 합니다. 지난 2007년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뒤 홀로 조용히 골목마실을 해 오며 혼자서(또는 옆지기와 아기하고) 사진찍기를 해 왔는데 요 보름 사이에 갑자기 ‘골목마실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인천에 뿌리를 둔 가톨릭환경연대에서 해마다 벌이는 ‘청소년 환경기사단’ 강사 노릇까지 어쩌다 보니 덥석 맡아, 2010년 올해에 인천 중ㆍ동구 푸름이들하고 동네 골목길 나들이를 함께하면서 사진찍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요사이는 도서관에 가만히 있기 추워서, 사진을 좋아하는 손님이 찾아왔으면 “괜찮으시면, 구경해 보기 어려운 골목길 나들이 해 보시겠어요? 알려지지 않은 인천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하고 넌지시 말씀을 여쭈며 함께 길을 나서곤 합니다. 따로 길잡이가 되거나 탐방해설가나 그런 이름을 붙이는 나들이가 아닌, 조용히 몇몇 사람이 뚜벅뚜벅 골목을 거닐면서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도록 이끄는 일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골목마실이란 몇 해에 걸쳐 온 골목을 수없이 밟고 또 밟았기 때문에 이제서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될 테지요. 골목동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저 스스로 눈을 뜨고 생각을 열면서 골목마실을 해 온 여러 해가 밑거름이 되며 저절로 발걸음이 떨어지는 일일 테지요.

 제 사진감인 ‘헌책방’을 처음으로 찍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1999∼2000년에 헌책방 사진을 처음 찍으며 2001∼2002년에 바야흐로 손놀림을 익혔고, 이렇게 찍은 사진을 헌책방 일꾼들한테 드리면서 ‘이런 사진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런 사진은 썩 안 좋아하시네.’ 하고 느꼈습니다. 사진을 받으실 때에 얼굴빛이 다르기에, 반갑거나 좋게 여기는 사진을 눈여겨보고, 썩 달갑잖게 여기는 사진을 곱씹습니다. 헌책방 일꾼들 입맛과 눈맛에만 맞추는 사진이라기보다, 헌책방 일꾼들 스스로 흐뭇해 하고 반길 수 있으면서도 제 손길을 트고 눈길을 열 수 있는 사진찍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헌책방에서 사진찍기’가 열두 해째입니다. 열두 해째 되고 보니, 헌책방에서 책방 일꾼 얼굴 사진을 슬쩍 한두 장 찍는 일이 아무렇지 않습니다. 찍히는 사장님들이 허허 웃으면서 “그동안 그렇게 찍고 뭘 또 그렇게 찍어요?” 하고 손사래를 치시면, “예전에는 예전 모습이고 지금은 또 지금 모습이니까요. 찾아올 때마다 한 해 두 해 쌓이는 세월과 모습이 다른걸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참말, 저로서는 헌책방이든 골목길이든 한두 번 왕창 찍어내며 ‘일 끝내기(작업 종료)’를 할 수 없습니다. 저한테 목숨이 붙어 있고, 제 손아귀에 힘이 남아 있으며, 제 낡고 값싼 사진기가 마지막까지 움직여 주는 그날까지 찍어야 할 사진감이라고 여깁니다. 앞으로 예순 살까지 살 수 있다면, 스물네 해를 더 찍을 수 있는 헌책방이며 골목길입니다. 앞으로 일흔 살까지 살 수 있다면 헌책방을 놓고는 마흔 해 남짓 찍는 셈이고, 골목길을 놓고는 서른 몇 해를 찍는 셈입니다.

 지난 2008년 여름부터는 아이 사진도 찍습니다. 아이와 늘 지내고 있으니 아이 사진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2007년 여름부터는 옆지기 사진을 찍었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아이와 옆지기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는다고 하겠습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 나중에 어떤 사진책을 꾸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좋은 벗님들이요 길동무이니 사진기를 집어듭니다. 저한테 헌책방이라는 사진감은 저 멀리 동떨어진 세상사람들 터전이 아닌, 바로 내 삶터요 이웃 모습입니다. 저한테 골목길이라는 사진감은 남다르거나 애틋한 추억이 어린 곳이 아닌, 바로 내 보금자리요 이웃들 어우러진 삶자락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진쟁이들이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마침내 ‘삶을 담는 삶사진’에 이르고야 만다고 느낍니다. 우리들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그 훌륭하고 거룩한 사진쟁이들은 예술사진이었든 상업사진이었든 기록사진이었든 무슨 사진이었든 하나같이 ‘당신들 삶으로 녹여내고 받아들인 삶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도 삶사진이고, 김기찬도 삶사진입니다. 살가도나 쿠델카도 삶사진이며, 조선희나 한영수도 삶사진입니다. 한영수 님은 아예 《삶》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진책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사진길을 걷는 사람이 바야흐로 만나면서 당신들 사진 불꽃을 활활 불태우면서 곱디고운 사진꽃으로 피어나는 자리란 바로 ‘삶사진’이라고 느낍니다.
 











 (2) 삶을 담으려고 하는 사진으로


 옆지기도 한번 보라고 《어머니의 세월》이라는 사진책 하나를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함께 놀던 옆지기가 “아빠가 엄마 보라고 사진책을 가지고 왔네.” 하면서 주욱 펼치다가는 “뭐야, 이 사진은? 이 사진에서 할머니들은 찍히고 싶지 않은 얼굴이잖아.” 합니다. 무슨 사진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어 슬쩍 건너다보니, 장터에서 국수를 자시는 할머니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얼굴이며 손이며 온통 주름진 할머님들 매무새가 잘 드러난 사진입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할머님들은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밥먹는 자리에서 저 양반 뭐 하는 짓이여?’ 하는 눈빛입니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옆지기는 사진쟁이 이름을 모르고, 사진쟁이 발자국을 모릅니다. 이분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 모르며, 이 사진책에 어떠한 뜻이 담겨 있는가를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옆지기를 섬깁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가를 알아야만 그 사진쟁이 사진을 읽어낼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과 책쟁이 한 사람이 무슨 뜻으로 사진책 하나를 엮었는지를 알아야만, 이들이 묶어낸 사진책에 담긴 사진을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옆지기는 지아비가 쓴 글이나 사진을 놓고도 알차게 못 쓴 글이나 제대로 못 찍은 사진을 놓고 “뭐야, 이 글은? 뭔데, 이 사진은?” 하고 한 마디 톡 쏘거나 거듭니다. 당신하고 아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아닌, 당신 가슴으로 스며들 만한 글이냐 그림이냐 사진이냐를 헤아리는 눈썰미입니다. 더없이 고마운 옆지기입니다.

 사진쟁이 윤주영 님은 그동안 《어머니》(눈빛,2007), 《그 아이들의 평화》(생각의나무,2004), 《석정리역의 어머니들》(솔,2003), 《장날》(현암사,2001), 《행복한 아이들》(현암사,2001), 《중국》(눈빛,1999), 《안데스의 사람들》(눈빛,1999), 《일하는 부부들》(눈빛,1998), 《어머니의 세월》(눈빛,1997), 《베트남 전후 20년》(타임스페이스,1995), 《탄광촌 사람들》(사진예술사,1994), 《동토의 민들레》(호영출판사,1993),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조선일보사,1990), 《내가 만난 사람들》(열화당,1987) 같은 사진책을 펴냈습니다. 열네 권 가운데 아직 네 권은 사지 않았으나, 사지 않았을 뿐이지 책방에서 모두 보았습니다. 네 권은 따로 안 사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안 샀는데, 이제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모두 갖추어 놓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 윤주영 님은 1928년에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를 마치고 중앙대학교에서 일곱 해 동안 정치학 교수로 일했습니다. 1961년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어 이태 동안 신문을 만듭니다. 그 뒤 정계로 나아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열여섯 해 동안 민주공화당 대변인과 사무처장과 무임소장관과 칠레대사와 문화공보부장관과 국회의원을 두루 거쳤습니다. 1979년에 정치판을 떠난 다음 사진판으로 뛰어드셨는데, 중남미며 네팔이며 인도며 부탄이며 파키스탄이며 터어키이며 그리스이며 이집트이며 모로코이며 튀니지아이며 유럽이며를 골고루 다니며 사진찍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태껏 펴낸 사진책에서도 알 수 있듯, 윤주영 님은 1993년에 《동토의 민들레》라는 작품으로 러시아 사할린에서 고향나라를 그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발자취를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1994년에는 《탄광촌 사람들》이라는 작품으로 탄광마을 일꾼 발자국을 사진으로 여미었습니다. 《베트남 전후 20년》은 말 그대로 전쟁 피해자 뒷삶을 좇은 사진책입니다. 《행복한 아이들》은 입양되는 아이들 삶을 좇은 사진책입니다.

 윤주영 님은 무엇보다도 ‘어머니(할머니)’ 사진을 많이 자주 찍었습니다. 《어머니의 세월》이든 《일하는 부부들》이든 《장날》이든 하나같이 ‘어머니 되는 분’이 사진 주인공입니다. 다만, 윤주영 님한테는 ‘어머니’이지만, 저한테는 ‘할머니’입니다. 마땅한 소리이겠지만, 어느덧 여든 줄 나이로 접어든 할아버지 사진쟁이 윤주영 님한테는 ‘당신한테 어머니라 할 분은 그야말로 할머니’이겠지요. 윤주영 님 사진을 보면서 느끼지만, 윤주영 님이 가장 잘 잡아채며 담아내는 사진감은 바로 ‘나이 든 여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윤주영 님부터 흰머리 할아버지인 만큼, 할머니들 앞에서 서로 동무가 되기도 하고 누나로 삼기도 하며 동생으로 만나기도 할 테지요. 스스럼없이 사진기를 들 수 있고, 사진기를 들기 앞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저는 윤주영 님 ‘어머니 사진’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할아버지가 되면 아주 저절로 ‘나로서는 아버지이고 내 뒷사람한테는 할아버지로 보이는 아버지’ 사진을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러한 사진찍기는 퍽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새롭게 눈을 뜨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은 만큼 ‘젊은이가 다가서기에 아직 어려운 사진감을 담아내는 솜씨’를 보여주면서 뒷사람을 가르친다고 할까요.

 그런데 윤주영 님 사진책을 보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탄광촌 사람들》을 뒤적일 때마다 《김재영(글),김종성(사진)-검은 산 검은 하늘》(눈빛,1991)이 떠오르고, 《동토의 민들레》를 뒤적일 때마다 《이토 다카시-사할린 아리랑》(눈빛,1997)이 떠오르며, 《장날》을 들출 때마다 《양해남-우리 동네 사람들》(연장통,2003)이 떠오릅니다. 똑같이 탄광을 사진감으로 삼았지만 윤주영 님 사진책에서는 웃음과 눈물을 살피기 어렵구나 하고 느낍니다. 광부 삶을 담은 사진책으로 《신병태-광부, 그 묻혀진 얼굴》(호영,1999)이 또 있는데, 《광부, 그 묻혀진 얼굴》에서도 ‘광부라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얼굴’은 드러나지만 삶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는 윤주영 님 사진에서도 비슷합니다. 《장날》이나 《행복한 아이들》이나 《그 아이들의 평화》에서 ‘넉넉한 구도’와 ‘아름다운 화면’은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구도와 화면에 어떠한 이야기를 따스하게 담는지까지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눈물을 보여야 하는 사진에서 눈물을 보이기 힘들고, 저절로 ‘아!’ 하는 마음이 샘솟지 못합니다.

 사진길을 걸어가며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고 온갖 자리에서 온갖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골고루 만나고 있는 윤주영 님은 우리 세상 온갖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모습’을 담는 가운데 온갖 ‘이야기’까지 엮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다루는 사진감은 많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모습으로 그치고 이야기로 뻗어가지 못하는 사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삶자락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지는 못하는 사진이 아니랴 싶습니다. 삶결을 건드리지만 삶자리 깊숙하게 스며들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사진으로는 새로 태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일하는 부부들》과 《어머니의 세월》이라는 사진책을 여러 해 동안 사진밭 선배한테 빌려 준 적 있습니다. 선배는 《일하는 부부들》은 잃어버리고 《어머니의 세월》은 돌려주었습니다. 한 번 잃어버린 《일하는 부부들》은 헌책방에서도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선배한테 이 사진책을 빌려 줄 때에 선배한테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저보다 사진 솜씨가 좋고 사진 찍히는 사람들한테 스스럼없이 잘 다가서는 선배야말로 ‘이 땅에서 낮은자리에서 부둥키고 얼크러지는 이웃이자 바로 이러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일하는 부부들’하고 ‘어머니가 보낸 세월’을 사진으로 담아내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진일은 한두 해로 이룰 수 없고, 적어도 열 해나 스무 해에 걸쳐 해야 할 텐데, 이제부터 차근차근 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선배가 제 도움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지 잊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선배한테 도움말을 했듯 저는 저 스스로한테도 제 둘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서 사진으로 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저한테는 ‘일하는 사람들’이란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일 테지요. 그리고 저한테 ‘어머니가 보낸 세월’이란 바로 우리 아이를 키우는 옆지기가 젊음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 살아내는 발자취일 테고요.

 얼핏설핏 윤주영 님이 새 작품을 내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떠한 작품을 어떠한 빛깔로 내놓으실는지 궁금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윤주영 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 ‘여든이 되든 아흔이 되든 사진길을 걸어가며 새 사진감을 찾아 새 창작을 선보이는’ 좋은 이슬떨이가 되어 주고 있거든요. 윤주영 님은 한 해 두 해 사진길을 걸어가면서 당신 사진밭을 조금씩 갈고닦으며 가다듬고 있다고 느낍니다. 비록 윤주영 님 당신이 벗어나지 못하는 틀과 굴레가 있지만, 제아무리 틀과 굴레가 있다 하여도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은 사진으로 말하면 됩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세월》은 1997년 작품입니다. 2007년도 아닌 2010년이라면, 《어머니의 세월》에서 엿보인 아쉬움들을 말끔히 털어내었을 수 있겠지요. 또는, 2017년에도 사진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차근차근 가다듬거나 추스를 수 있을 테고요.

 구도와 화면으로도 얼마든지 곱고 멋진 사진을 일굴 수 있지만, 이야기와 삶을 담아낼 때에는 ‘흔들린 사진’이든 ‘빛이 모자라거나 넘치는 사진’이든 사람들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사진이 되거나 따뜻하게 감싸안는 사진이 됩니다. 사진이 사진으로 마무리되는 대목을 한결같이 되새겨 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4343.1.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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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커 토우마 1 - 안개 속
가나리 요자부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 도시에는 어떤 ‘숲 발자국’이 있을까
 [살가운 만화 52] 노마 로쿠, 《토우마》 1∼3권



- 책이름 : 토우마 1∼3
- 그림 : 노마 로쿠
- 글 : 카나리 요자부로
- 옮긴이 : 김은명
- 펴낸곳 : 서울문화사 (2009)
- 책값 : 한 권에 4200원씩


 (1) 오늘


 며칠 동안 뭇사람들하고 골목마실을 했습니다. 골목마실이란 다름아닌 ‘내가 살아가는 이 동네에 어떤 이웃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느끼거나 만나려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일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어슬렁 달릴 수 있으나 두 다리로 더욱 슬금슬금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골목 한켠에서 오래도록 둘러볼 수 있고, 동네이웃하고 만나는 자리에서는 한참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떠나면서 나라밖 사람하고 부대끼며 더 너른 세상을 만나고 배우듯, 골목마실을 할 때에도 내 삶터 가까이나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새롭게 부대끼면서 더 너른 세상을 만나고 배웁니다.

 저는 늘 다니는 골목마실이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고 철과 때와 날씨에 따라서 골목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새삼스럽지 않다 할 만한 모습이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모두 새삼스럽습니다. 어릴 적 태어나서 살던 골목을 만나든, 여태까지 한 번도 겪거나 본 적이 없는 골목을 거닐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손자국과 발자국을 만납니다.

 오래된 문패를 쓰다듬고, 굵직하게 박혀 있는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집니다. 오래된 골목동네에는 으레 나무전봇대가 남아 있습니다. 시멘트전봇대를 박으러 시설이나 차를 몰고 들어올 수 없어 이대로 잘 살아남아 있곤 합니다. 해마다 찾아오는지는 알 길이 없는 제비집을 올려다보고, 이제는 거의 안 쓰는 예전 유리문을 들여다봅니다. 올록볼록 무늬가 새겨진 유리문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마련한 유리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유리문에 붙인 판박이가 스무 해나 서른 해, 때로는 마흔 해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을 보기도 합니다.

 토박이가 없다는 인천이라 하지만, 외려 이제는 토박이가 많은 인천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웬만한 도시이든 시골이든 이렇게 세월 손때가 구석구석 남은 살림집과 골목집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쉰 살 먹은 살림집들로 온 골목이 가득가득한 동네가 우리 나라에 몇 곳이나 남아 있겠습니까. 부산쯤? 목포쯤?


.. “젠장, 이틀 동안이나 아무런 단서를 못 잡았잖아.” “당연하죠, 형사님. 이렇게 넓은 산에서 겨우 한 사람을 찾는 거니까요. 자연을 너무 쉽게 보면 안 됩니다.” … “내가 무섭지 않았나요?” “예.” “!!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나요?” “발자국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짜 당신은 자연을 사랑하는 착한 마음의 주인입니다.” … “영우라는 동물은 멋지게 왼발, 오른발을 나란히 걷거든. 그래서 발자국이 이렇게 한 줄로 난 거란다. 그래서 발자국이 이렇게 한 줄로 난 거란다. 어때 재미있지? 이 여우는 이쪽에서 이쪽을 보면서 걸어왔어. 신중하게 주위를 신경쓰면서, 아주 천천히 걸어왔어.” … “아무 소리가 없다. 너무 조용해서 귀가 아프다! 내 청력 때문인가?” “숲도 살아 있습니다.” ..  (1권 6쪽, 31, 50, 71쪽)


 추운 겨울날 온몸이 얼어붙으며 골목마실을 하다가 문득문득, ‘두껍게 껴입는 옷과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면 겨울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이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95%쯤 되는 정보를 눈으로 받아들이거나 느낀다고 하는데, 눈을 감고 코나 살갗이나 귀로 느낄 수 있는 겨울 살림살이와 매무새는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휘휘 둘러볼 때에, 골목동네라는 곳에서든 아파트숲이라는 곳에서든 얼마나 겨울다움을 남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흙 한 줌 느긋하게 길바닥에 엎어질 수 없는 도시입니다. 골목길이라고 해서 흙길이 아닙니다. 골목사람이 흙을 짊어지고 와서 조촐하게 골목밭을 일구고 골목꽃그릇을 가꾸니 흙내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을 뿐입니다. 흙내음을 싣고 흐르는 바람결이 없고, 꽃내음을 담아 오가는 바람물결이 없습니다.

 흙이 없으니 지렁이가 없습니다. 풍뎅이도 없습니다. 나비도 없고 벌도 없습니다. 골목밭을 알뜰살뜰 일구는 동네 외딴 구석에서는 가끔가끔 벌나비를 만나지만, 도심지에서 벌나비를 만날 길이란 없습니다. 벌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없고 사마귀와 메뚜기도 없습니다. 소금쟁이와 물방개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렁이나 조개를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인천 앞바다 드넓은 갯벌은 국제공항 닦는다며 모조리 덮고 메우는 바람에, 또 예부터 항구를 넓히고 공장을 세우며 아파트를 박는다면서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강을 타고 흘러드는 쓰레기물에다가 인천 앞바다를 빙 둘러 세운 숱한 중화학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쓰레기물이 겹치며 갯벌이 죄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참말로 이런 도심지 골목길에서 느끼는 봄이란, 여름이란, 가을이란, 겨울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이런 도심지 골목길에서 우리 삶을 이루는 자연을 어느 만큼 맛보거나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요.

 뭉게구름 없고 무지개 없는 이 땅인데. 소나기 없고 눈부시게 맑은 햇살 사라진 이 땅인데. 살랑바람도 꽃바람도 죽어 버린 이 땅인데. 이 땅에서 우리들은 어떠한 목숨붙이가 되어 서로 부대끼면서 복닥복닥하고 있는가요.


.. “도시의 규칙은 너무 복잡하죠. 때로는 단순한 규칙 따윈 보이지 않게 되죠. 일어서지 못할 정도까지 걷고 난 후에는,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쉬면 됩니다.” … “하지만 생물은 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활동하기 위해서, 더 생산해 내기 위해서. 그 사실은 오늘 숲에서 배웠습니다. 전 이제 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저를 해고하신다고 해도!” … “정말 찾을 수 없게 되는 건 그렇게 말하고 포기할 때입니다.” …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약자는 항상 강자의 그림자에 겁을 먹으며 살아가야 해. 하지만 그런 약자도, 가끔 목숨을 걸고 강자에게 도전할 때가 있단다. 자신이 소중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 승산이 없는 상대라 해도 말야! 넌 제비꽃을 피해서 걷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더구나.” ..  (1권 74, 78, 125, 156∼157쪽)


 골목마실을 함께하는 분들하고 동네 만두집에 들어갑니다. 지난날 오성극장이 있을 때에 극장 앞에서 만두를 굽거나 쪄서 팔던 길가 만두집입니다. 따뜻하게 구운 만두를 씹어먹는데, 만두집 라디오에서 ‘연봉 100억이 넘는 사람 …… 연봉 1억이 넘는 사람 ……’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식이 흘러나옵니다. 라디오이든 방송이든, 또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온누리에 퍼지는 소식은 하나같이 돈하고 얽혀 있습니다. 이 땅 우리들이 만들어 내는 소식과 정보는 온통 돈과 얽혀 있을 뿐 아니라, 돈을 다루기만 합니다.

 돈이 아닌 삶을 다루는 소식과 정보는 참으로 드뭅니다. 돈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 소식과 정보는 더없이 드뭅니다. 지식과 학식을 뽐내는 책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책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돈맛과 돈바람이 아닌 따순바람과 너른바람을 고이 담고 있는 책을 찾아 읽기도 어렵습니다. 나날이 수없이 쏟아지는 책인데, 이 책들 가운데 바람내음과 구름내음과 비내음과 눈내음과 바다내음과 땅내음을 고이 싣고 있는 책은 손가락 몇 개로 꼽아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는 이는 책을 읽는 이대로, 책 아닌 인터넷이나 방송에 기대는 이는 이들대로, 머리속을 꽉꽉 채우는 지식보따리만 큽니다. 사람다움과 목숨다움을 살리는 이야기는 거의 눈꼽만하다 싶을 만큼 초라하게 내동댕이치고 있습니다.


.. “이 자연은 우리 것이 아니니까요.” … “큰소리나 메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단다. 상대의 호흡, 체온의 온기, 심장의 박동.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건 말과 문자만이 아니란다.” ..  (1권 166, 211∼212쪽)


 오늘을 살아간다지만, 도무지 오늘 무얼 하며 살아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알 길이 없는 주제에 날마다 길을 나섭니다. 골목길을 나서고, 책길을 찾습니다.
 





 (2) 어제


 오늘은 사진기를 들고 골목길을 누빕니다. 오늘은 아기를 한손에 안은 몸으로 사진기를 목에 걸고 골목길을 누빕니다.

 어제는 자전거 짐바구니와 짐받이에 신문을 가득 싣고 골목길을 누볐습니다. 외딴 골목이나 다세대주택이나 아파트에서는 들머리나 어귀에 자전거를 세우고 겨드랑이에 신문뭉치를 낀 다음 후다닥 달리며 신문을 돌렸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실장갑 하나를 낀 채 신문딸배(신문배달)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형과 동생은 모두 오토바이를 탔지만 저는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자전거로 달리면서도 오토바이 딸배보다 먼저 일을 마쳤고, 맨 먼저 일을 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와서 형들하고 함께 먹을 아침을 차렸습니다.

 왼손으로는 무거운 자전거를 붙잡으며 달립니다. 짐바구니에는 쉰 부, 짐받이에는 백칠십 부를 실은 자전거입니다. 제가 돌린 ㅎ신문은 그나마 신문 두께가 얇았고, 다른 이들이 돌린 신문은 두께도 두껍고 부피도 많았습니다. ㄷ신문 딸배 아저씨는 단단하고 굶은 쇳가락을 용접해서 짐바구니를 둘 달고도 짐받이에는 머리 높이까지 올라오도록 신문을 싣고 달리곤 했습니다. 이웃 우유딸배 아주머니는 우유상자를 일곱 개 자전거에 붙이며 골목을 누볐습니다.

 신문딸배들은 누구나 왼손으로 손잡이를 버티고, 오른손으로는 바구니에서 신문 한 부를 슥 꺼냅니다. 이윽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놀려 신문을 꿴 다음 오른허벅지에 탁 치며 반으로 접고, 다시금 엄지와 검지를 놀려 신문을 꿰어 오른허벅지에 또 한 번 탁 치며 다시 반으로 접습니다. 그러고는 손아귀로 슥 움켜쥐고 손목힘으로 휙 날리면 골목집 대문 안쪽으로 종이비행기처럼 시잉 날아가서 골목집 신발 놓는 섬돌에 톡 하고 떨어집니다.

 골목집은 집 모양이 모두 다른 까닭에, 어느 집은 이렇게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탄 채로 ‘한손 접기(한손으로 신문을 그 자리에서 접기)’를 하며 넣지만, 대문에 걸치는 집이 있고 우유주머니에 넣는 집이 있으며 창문을 살짝 열고 끼워 놓는 집이 있습니다. 2층에 사는 분이라면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어깨와 팔뚝힘을 써서 휘익 하고 던져 넣고 지나갑니다. 자전거를 멈추고 신문을 넣으면 그만큼 시간을 잃기 때문에, 웬만하면 자전거에 탄 채로 한손으로 휙휙 넣고 다른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나중에 신문딸배 일이 익숙해진 뒤에 3층집에 신문을 넣을 때에도 자전거에 탄 채로 가끔 해 보았는데, 3층집까지 자전거에 탄 채로 넣자면 여느 내기로는 퍽 힘듭니다. 저도 두 번 가운데 한 번은 실패해서, 엉뚱한 데에 떨어진 신문을 다시 주워 넣느라 시간을 더 빼앗기기 일쑤였습니다. 좀더 익숙한 사람들은 4층집뿐 아니라 5층집까지 신문을 잘 접어서 던져 넣습니다. 접는 매무새가 여느 종이접기하고는 많이 다른데, 제대로 접지 않으면 잘 날아가지 않을 뿐더러, 갓 나온 신문이 구겨집니다. 날아갈 때에도 잘 날아가고, 독자네 문에 톡 부딪히며 바닥에 착 펼쳐질 때에 구김살이 사라지도록 옳게 접을 줄 알자면 신문딸배 다섯 해는 되어야 합니다.


.. “자신이 유괴되면서도 범인인 엄마의 마음을 배려했었으니까요. 그래요, 언제나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건 어른이고, 어린이는 그런 어른을 보면서 어른 이상으로 잘 자라는 겁니다.” … “왜 이렇게 모두들 열심히 수색하는 거죠?” “누구라도 한 번쯤은 미아가 된 경험이 있겠죠? 어디로 가야 할지 불안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무섭고, 누구라도 그런 힘든 생각을 하고 있다면, 빨리 구해 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숲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2권 54, 151쪽)


 신문딸배를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날씨읽기를 배웠습니다. 신문딸배들은 날씨읽기를 방송이나 신문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냥 길을 가면서 느끼고, 집안에서도 밥을 먹으며 느낍니다. 빨래를 하고 널면서 느끼고, 신문값 걷으러 다닐 때에 느낍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앞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끼고, 밤골목에 가만히 서서 밤바람을 살갗으로 맞으면서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유딸배한테는 비가 오더라도 우유가 젖어서 못 쓸 일이 없지만, 신문딸배한테는 비가 와 신문이 조금이라도 젖으면 죄다 못 씁니다. 여느 비 안 오는 날에도 뜻하지 않게 젖을 수 있고 찢어질 수 있습니다. 골목집에서 기르는 개가 쉬를 눈다든지 물어뜯을 수 있으니까요. 잠자리에 들기 앞서 이튿날 비가 올는지 안 올는지를 가늠하고, 비가 오면 언제쯤 얼마나 올까를 헤아립니다. 신문을 돌릴 무렵에 비가 올 때하고 신문을 다 돌리고 나서 비가 올 때에는 신문돌리기가 다릅니다. 비가 쏟아질 때와 질금질금 흩뿌릴 때에도 신문돌리기가 다릅니다. 신문딸배가 먹고사는 일인 사람은 날씨방송이나 날씨기사가 아닌 내 몸과 느낌으로 날씨를 알아채야 합니다.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느끼며 바람과 햇살에 실린 물기가 어떠한가를 느껴야 합니다.


.. “너무 피곤해요. 당신 질문에 대답하는 게 힘들 정도로.” “숲속에서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 일은 그 정도의 중노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아를 찾아도 표정을 지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 당신을 찾아 주셨던 분들도 똑같지 않았을까요? 어둡고 넓은 숲속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돌아다니면서 몇 시간씩이나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건 우리처럼 매일 그 일을 하는 사람들로도 힘든 작업인데, 갑자기 불려나온 익숙치 않은 자원봉사자들이면 더더욱 그렇죠.” ..  (2권 158쪽)


 신문딸배로 먹고살던 지난날은 벌이가 영 시원찮을 뿐더러, 신문값 떼어먹고 내빼는 사람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러나, 도심지에 살면서도 도시에서 어떻게 자연을 느끼는가를 배웠습니다.

 도심지에서도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길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나서 아파트 난간에 기대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든지, 달동네 오르막에서 홀로 자전거에 기댄 채 새벽 햇살을 느낀다든지 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술이 얹혀 꺽꺽대는 사람들까지 모두 잠든 깊은 새벽에 조용히 홀로 일어나 내 자전거 페달 소리와 골목길을 내닫는 발자국 소리를 가만가만 울리는 하루하루는 기뻤습니다. 언제나 잠들어 있는 도시 골목길에서, 늘 맑게 깨어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갓 찍어 잉크냄새 짙은 신문이 내 몸과 옷과 손에 짙게 배어드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3) 글피


 아기는 힘을 알맞게 맞추며 손놀림을 하기에 아직 이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잎사귀가 아야 해. 잎사귀는 살그머니 대면서 귀여워 해야지.” 하고 넌지시 일러 주면, 아기는 이 말귀를 잘 알아들으면서 꽃잎사귀를 살그머니 쓰다듬거나 아주 천천히 손끝으로 톡 갖다 댑니다.

 그런데 갓난쟁이가 아닌 다 큰 어른들은 “그렇게 마구 다루면 어떡해?” 하고 일러 주어도 한귀로 흘리거나 “내 맘이야!” 하면서 나무를 차고 밟고 꽃잎사귀를 후두둑 잡아당겨 뜯습니다. 갓난쟁이들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 삶터 목숨붙이들을 고이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곧잘 알아듣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연 삶터에서 태어난 또다른 목숨붙이이고 푸나무와 우리는 동무요 이웃이라고 일러 주면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머리통 굵은 우리 어른들은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알아들을 마음조차 없습니다. 흔히 일컫는 대로 우리 어른들은 돈한테 노예가 되어 끄달리고 휩쓸린 채 살아갑니다.


.. “거리에서의 난 너무나 무력하다. 범인의 낌새도 알아차릴 수 없는 상태다. 도시는 내가 살아가는 숲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연은 전부 아스팔트로 덮혀져 발자국도 남지 않는다. 이곳에 트래커인 내가 있을 곳은 없는가?” ..  (3권 68쪽)


 만화책 《토우마》 1권, 2권, 3권을 읽습니다. 《토우마》는 꼭 세 권으로 마무리된 짧은만화입니다. ‘토우마’는 《토우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이 토우마는 숲에서 사람들한테 숲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나들이길을 알려주는 길동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우마라는 사람은 ‘발자국사람(발자국을 좇으면서 정보를 얻는 사람. 영어로 하면 트래커)’입니다. 발자국사람이기 때문에 발자국을 살피면서 이 발자국을 남긴 목숨(사람과 사람 아닌 뭇목숨)들이 어디로 걸어가는지, 걸으면서 어떤 마음인지, 언제 걸어서 지나갔는지를 읽어냅니다.

 토우마는 처음부터 숲길동무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찰이었습니다. 경찰 가운데 발자국으로 범인을 찾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경찰로 당신 삶을 꾸리면서 오래오래 당신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경찰일을 하면서 겪은 큰 아픔 하나를 씻어내고자 숲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숲은 토우마 마음에 남겨진 생채기를 고이 얼싸안으며 쓰다듬었고, 토우마는 당신을 살려주고 보듬은 숲을 사람들한테 제대로 알려주면서 숲사랑이 바로 내 삶을 사랑하는 길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숲을 찾아온 사람들’은 토우마가 들려주거나 보여주려고 하는 숲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니,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느끼지 못합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숲사랑을 느끼려 하지 않으니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저 어쩌다 찾아온 숲이요, 공원이라고 마련한 숲이니 숲인가 보다 할 뿐입니다. 도시에서는 술이며 담배며 자가용이며 노래방이며 오락기이며 파친코이며 갖가지 재미난 놀거리와 즐길거리가 넘쳐나는데, 굳이 다리 아프게 숲을 거닐 까닭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세상은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권력을 좇으면서 달려가는데,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무어 그리 대수이느냐고 합니다.


.. “그보다도 과장님! 보셨어요? E포인트 지점요!” “어?” “역시 산위는 아래와 계절이 다른 느낌이더라구요. 벚꽃이 지금도 활짝 피어 있어 너무 멋져요. 못 보셨으면 꼭 한 번.” “필요없어.” ..  (3권 113쪽)


 만화책 《토우마》를 보려면 내 삶이 어디에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한결 아름답게 가꾸고픈 마음이 있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나부터 우리 식구와 동무와 이웃들하고 오순도순 어우러지고픈 뜻이 있는가를 곱씹어야 합니다. 내 주머니에 담기는 기쁨을 찾으려는 삶인지, 내 손과 발을 힘껏 움직여 나와 이웃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거울 길을 찾으려는 삶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발자국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다루는 지식 만화가 아닌 《토우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거나 잊은 자연을 찾자는 가르침 만화가 아닌 《토우마》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고단한 물질문명 현대 사회를 비판한다는 만화가 아닌 《토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으로 느낄 만화요, 가슴으로 받아들일 만화이며, 가슴으로 살아낼 이야기를 함께 찾자는 만화입니다.


.. “네? 감사장요? 수사에 협력해 줘서 표창한다고요. 저어, 어느 오오카미 토우마 씨에게 전화 거신 건가요? 우리 사무실의 오오카미 토우마는 자연을 사랑하는, 표창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런 가이드입니다.” ..  (3권 182쪽)


 만화책을 덮으며 돌아봅니다. 우리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우리 터전은 어떠한 삶터인가 하고.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되면, 우리 아이는 이 터전을 어떻게 일구거나 보듬으면서 살아갈까 하고.

 우리 아이가 살아갈 우리 나라 터전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터전인지 궁금합니다. 사람하고 다른 뭇목숨이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 다 함께 흐뭇할 만한 우리 나라 터전일는지 궁금합니다. (4343.1.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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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이제야 비로소 이 책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참 오래 걸렸다...) 

 


 이 책 하나 120 ― 백두 살 할머니한테서 읽는 삶
 : 오드리 설킬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책이름 :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글 : 오드리 설킬드
- 옮긴이 : 허진
- 펴낸곳 : 마티 (2006.5.25.)
- 책값 : 2만 원



 (1) 주부습진에 걸리며 읽는 삶


 아기는 엎드려 자기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아기는 한참 자다가 슬슬 몸을 돌리며 엄마아빠하고는 거꾸로 엎드려 있습니다. 자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합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아기를 눕히지 않으면 언제나 이 방 끝 저 방 끝까지 굴러가 있습니다. 저는 떠오르지 않으나, 아마 저도 우리 아기하고 똑같이 어렸을 때에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잠을 잤으리라 봅니다.

 지난주부터 제 두 손을 제대로 쓰기 어렵습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 접히는 자리가 쩍쩍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쥘 때마다 따끔하고 물잔이나 병을 손아귀로 쥐기 힘듭니다. 새끼손가락이 다칠 때에도 무슨 물건을 쥐기 어려웠는데, 이 자리가 갈라져도 참 힘듭니다. 그러나 집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픔을 견디면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엊그제 알아보니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갈라지는 일은 주부습진입니다.

 주부습진이라니. 주부습진인가. 주부습진이구나. 무언가 다른 데가 아파서 이러나 하고 걱정했는데, 주부습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을 놓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집일은 조금도 줄 턱이 없는데, 이제부터 주부습진이면 어찌 견디면서 살아가나 근심입니다.

 하기는, 날마다 두 시간 남짓 아기 옷가지 빨래를 하는 삶을 열아홉 달째 꾸리고 있으니 주부습진에 안 걸릴 수 있겠습니까. 안 걸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어떠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주부습진에 안 걸렸을까요.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아니, 우리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오래 물을 만지며 더 많은 집일을 했으니 저보다 더 어렸을 때에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신 데가 없었을 테며, 손이며 발이며 온통 주부습진으로 쩍쩍 갈라졌겠지요.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을 떠올려 봅니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던 날부터는 손빨래가 줄었다지만, 오로지 맨손으로 여름이며 겨울이며 이불과 옷가지를 주물러댄 나날이 어머니 손에 오롯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이 어떠한 손이었던가는, 저 스스로 우리 어머니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삶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딱히 빨래기계를 안 쓰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굳이 내 옷가지를 빨래기계를 써 가며 빨아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서, 스물한 살에 혼자 집을 나와서 살아갈 때부터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물예닐곱 살까지는 겨울에도 찬물로 손빨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꾸리는 살림살이에 빨래는 그리 안 많아, 주부습진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산 뒤에도 두 사람 몫 빨래는 얼마든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 이때에도 주부습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빨랫거리를 쉴새없이 쏟아내는 아기를 낳아 키우며 비로소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아이키우기는 빨래만이 아니니까요. 오줌을 싸거나 똥을 지리면 그때그때 치우고 씻기도 닦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먹이고 입 닦고 하면서 하루 내내 잠잘 때를 빼놓고는 손이 마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키우기를 온통 어머니한테만, 그러니까 여자한테만 맡기고 살고 있으니, 남자들이 주부습진에 걸려서 아파하고 힘겨워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나라 글쓰고 사진찍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으레 남자요, 예술이나 문화 한다는 여자들 또한 여느 남자와 매한가지로 집일은 돌보지 않거나 집일은 남한테 맡기며 예술하고 문화에만 모든 힘과 품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들한테서도 주부습진 때문에 ‘창작하며 힘들어요’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예술인 과학인 체육인 연예인 …… 들은 주부습진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이 주부습진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추거나 영화로 찍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주부습진뿐이겠습니까? 빨래하기를 시로 쓰고 소설로 쓰며 영화로 찍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아이키우기를 동화로 쓰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동시로 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인다거나 아기한테 죽을 먹인다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지요? 기껏(?) 나온다는 창작품은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아름답게 그리는 모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자리를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삶으로 받아들일 틈이 없으니까요.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을 할 때에 ‘집일 이야기’를 반드시 그려내거나 담아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네 창작밭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네 창작꾼들 삶과 눈길이 너무 한쪽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밥을 안 먹고는 못 살고 물을 안 마시고는 못 살며 바람을 들이쉬고 내뱉지 않고는 못 사는데, 사람이라는 목숨이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을 헤아리면서 그려내거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키운 삶과 손길을 못 보고, 또 내가 키우는 삶과 손길을 못 봅니다.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곧바로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지어낼 수도 있으나, 굳이 머리로 지어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보고 느끼고 담아내어 펼치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프랑스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멀리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에서도 우리 동네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얼마든지 ‘우주를 만나’거나 ‘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맙게 얻으면서 누리는 목숨인가를 느낄 수 있으면, 늘 즐겁고 신나게 일하며 놀 수 있습니다.


 (2)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읽기


 1902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레니 리펜슈탈은 2003년에 숨을 거둡니다. 백 살에다가 두 살을 더한 삶을 꾸린 이이는 처음에는 춤꾼이 되고자 했으나 다리를 다쳐 춤꾼이 되는 꿈을 접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감독이라는 또다른 길을 찾습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영화감독으로 걷던 길은 독일 정치권력을 붙잡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소용돌이를 거치며 송두리째 가로막힙니다. 유럽을 불태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당신이 찍은 영화 필름이며 집이며 사회활동이며 모조리 잃거나 빼앗깁니다. 전쟁통에 여러모로 아끼며 돌봐 주던 사람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이름에 얽히지 않겠다며 등을 돌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 빚과 소송에 시달리면서도 가느다란 삶줄기를 놓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하나만큼 다를 뿐이라 하는데, 날마다 죽고픈 마음이었을 텐데 갑갑하고 슬퍼서라도 죽을 수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마음속에는 뜨거움이 늘 솟구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촬영기를 붙잡을 수 없는 몸으로 사진기를 쥐어든 레니 리펜슈탈은 ‘촬영기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사진기로 풀어내는 응어리’로 이어갑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쥔 레니 리펜슈탈한테는 지난날과 똑같은 ‘짓궂은 뭇칼질로 범벅된 글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밑바닥에서도 짓밟히는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을 터이나, 이러한 ‘죽음보다 못한 삶’에서도 삶자락을 붙잡습니다. 이리하여, “90대가 된 지금(1990년대)도 레니는 다이빙을 즐긴다. 레니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최고령 다이버일 것이다. 무언가에 매혹되는 능력과 더 나은 사진을 향한 노력은 전혀 줄어들 줄을 몰랐다 … 그 엄청난 열정과 추진력, 길고 날씬한 다리를 보면 (아흔을 넘긴) 레니는 아직도 소녀 같다. 레니는 처음 다이빙을 한 이후로 수년간 해저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다. 또다시 사라져 가는 존재를 기록할 운명이 주어진 듯했다. 그래서 레니는 열렬한 환경보후주의자이자 자크 쿠스토의 지지자이며 그린피스의 회원이 되었다(530∼531쪽).”고 합니다.

 우리 이웃동네에 여든일곱 나이로 수채그림을 그리는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틈틈이 할머님 댁을 찾아뵈며 인사를 올리고 말씀을 귀담아듣곤 합니다. 할머님은 당신 딸아들한테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걱정 없이 마지막 삶을 이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할머님으로서는 ‘당신이 손을 놀리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도움 손길을 받을 까닭이 없다면서, 여든일곱 나이로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면서, 이 가르침삯으로 살림을 꾸립니다.

 예술쟁이로 한삶을 마감한 레니 리펜슈탈 님과 이웃동네 그림할머님을 나란히 견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뭇 다른 길을 걸었고, 서로 다른 넋으로 예술(영화나 사진하고 그림)을 붙잡기도 했지만, 한 분은 예술길에 어린 날부터 젊음과 늙음을 모두 바쳤다면 다른 한 분은 어머니로서 살림살이 꾸리기를 예순 넘어까지 한 끝에 비로소 느즈막하게 당신 예술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꿋꿋하게 당신들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고 지는 이름이 아닌, 당신들 뜻과 길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길로 돌아본다면,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당신이 세상살이와 세상흐름을 옳고 바르고 싱그럽고 곱게 보여주거나 이끌 만한 길동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쏟거나 바칠 만한 짝꿍은 있었으나, 이 짝꿍들 가운데 레니 리펜슈탈이 한창 뜨거운 젊음을 불사를 때에 슬기롭고 눈밝도록 거든 사람은 없었구나 싶습니다. 따끔하게든 부드럽게든, 히틀러가 움켜쥐던 그무렵 독일 삶터를 바르게 읽고 바르게 도와줄 벗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와주지 않고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잽싸게 얼굴과 몸짓을 바꾸면서 레니 리펜슈탈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새롭게 살아남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건 일을 하건 했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헤아리면, 다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사람 얼굴과 이름에 기댈 뿐, 레니 리펜슈탈 마음속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 삶터를 튼튼하고 씩씩하게 일구는 길로는 접어들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니 리펜슈탈도 나이 예순을 넘긴 다음 만나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아간 길동무가 있었기에, 늘그막에는 당신 젊은날 매무새에서 한껏 거듭나며 새로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끊이지 않는 뭇칼질에도 견디어 내는 힘이나, 끝없는 손가락질을 살며시 흘려보내면서 빙긋 웃을 수 있는 느긋함을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머나먼 나라 사람이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기에, 참말로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분이 늘그막에는 느긋하며 한결 즐겁게 마지막 삶을 꾸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650쪽이 넘는 두툼한 책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꽃이 아닌 우등불 같은 뜨거움을 늘 가슴속에 담으면서 활활 태운 레니 리펜슈탈이었다고 느낍니다. 이 뜨거움이 있기에 히틀러 나치당 정권에서는 ‘사회와 정치를 읽지 못한 바보’였으면서도 영화예술 새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쓴 오드리 설킬드 님은, 두툼한 책 마무리를 지으며,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577쪽)?” 하고 묻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세상을 못 읽고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있겠으나, 레니 리펜슈탈한테만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여느 세상사람들은 레니 리펜슈탈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조용히 뉘우치면서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새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저 영화예술 하나에만 온힘을 바친 레니 리펜슈탈이었기에, 당신이 일군 창작은 창작 그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한편, 이러한 창작은 훌륭하지만 이러한 창작 뒤켠에는 또다른 삶이 있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으시오 하고 일러 줄 수 있는 어르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이켜보면, 이처럼 넓고 푸근하게 껴안으면서 부드러이 일깨워 주는 어르신은 우리 사회에도 몇 사람 없습니다. 처음부터 착하기만 하거나 잘나기만 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터전이 아니라, 처음에는 얄궂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며 미웁기도 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깨닫고 배우면서 우리 터전을 일구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넌 잘못했어. 넌 나빠. 그러니까 넌 죽어야 해.’ 하는 말마디로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 이 일은 이렇게 되었구나. 다음 일은 다르게 해 보자.’ 하면서 부둥켜안으며 기다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고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 님을 감싼다거나, 마음씨는 짓궂고 눈썰미는 형편없으며 친일부역을 했지만 문학은 아름답다며 누군가를 우러르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 마음이 되자는 소리입니다.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일 때에, 농사꾼이 이 논밭을 그냥 내버려 둘까요? 그예 내팽개칠까요? 참 농사꾼은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을 기름진 논밭으로 돌려놓으려고 여러 해에 걸쳐 땀을 흘리고 흙을 갈고 풀을 심고 갈아엎기를 되풀이합니다. 짧으면 대여섯 해, 길면 열 몇 해에 걸쳐 바보밭이나 묵정밭을 기름지며 좋은 밭이 되도록 힘씁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따스한 사랑과 넉넉한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 가르고 저리 가르는 금긋기가 아닌, 모두 아름다우며 고운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일깨우며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야지 싶습니다.

 왜 초등 여섯 해, 중고등 여섯 해, 모두 열두 해에 걸쳐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겠습니까. 대학교에 보내려고 가르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목숨이 올바르고 싱그러우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고 차근차근 섬돌을 디디듯 가르치고 일깨웁니다. 이 열두 해 동안 한 아이는 엉뚱한 길로 빠지거나 샛길로 접어들기도 할 텐데, 이렇게 흔들리거나 떠돌 때에 우리 어른들은 지긋이 바라보며 포근히 감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손놓고 기다리지 말고, 손을 맞잡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지켜보며 팔짱낀 채 지켜보지 말며, 어깨동무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삶이란, 이이를 헐뜯는다든지 추켜세운다든지 깎아내린다든지 섬긴다든지 하자는 삶이 아닙니다. 이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받아들이고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삶은 어떤 모양 어떤 몸짓인가를 깨닫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우리들 가슴속에는 어떠한 뜨거움이 어떠한 크기로 어느 때에 있는지를 돌아보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 삶을 우리들부터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 사랑하자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지나온 발자취뿐 아니라 바로 오늘과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흐트러지거나 흐리멍덩하지 않도록 다스리며 다독이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발자국을 찬찬히 짚으며 내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는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춤사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몸짓을 가만히 헤아린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땀방울을 오롯이 살피며 내 땀방울은 어떠한가를 오롯이 살핀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간기를 살피니, 이 책은 1996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 나라에는 2006년에 옮겨졌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은 2003년에 죽었습니다. 당신이 아흔다섯 살일 때에 나온 책인데, 레니 리펜슈탈 할머님은 당신 삶을 낱낱이 파헤치고 되짚으면서 다룬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나서, 당신 마지막 일곱 해는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일구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을 다루는 평전이라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써서 함께 읽고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웃동네 사람들은 스콧 니어링 난날을 기리면서 ‘당신이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저는 스콧 니어링도 그렇고 레니 리펜슈탈도 그렇고 우리 이웃동네 그림할머님도 그러한데, 모두들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숱한 이야기를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당신들 모두가 고마운 이슬떨이요 스승이요 길동무입니다.


 (3) 길디긴 이야기 꾹꾹 눌러담기


 2006년에 읽은 책을 지난해에 다시 한 번 읽고 다섯 해 만에 느낌글을 적바림합니다. 2006년 무렵, 이 책을 펴낸 ‘마티’ 출판사에서 다른 책을 내놓았는데 오탈자가 다섯 군데 나오는 바람에 애써 찍은 책을 모조리 거두어들이고 다시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느낌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오탈자를 스물다섯 군데 찾았는데, 자그마치 650쪽이 넘는 책을 또다시 거두어들여 새로 찍는다면, 1인 출판을 하는 사장님이 알거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650쪽짜리 책에 오탈자 스물다섯 군데라면 퍽 적게 나온 셈입니다.

 드디어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쓰는구나 하고 지난 다섯 해를 돌아봅니다. 다섯 해 앞서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썼다면 아무래도 ‘다섯 해만큼 덜 배우고 덜 깨닫고 덜 생각한’ 채로 느낌글을 썼으리라 봅니다. 다섯 해가 지난 오늘이라 해서 더 배우고 더 깨닫고 더 생각하며 느낌글을 쓴다고 내세우기 힘들지만, 다섯 해를 곰삭일 수 있는 세월이 고맙습니다. 아마, 앞으로 다섯 해를 더 곰삭인 다음 이 책을 새로 돌아본다면, 그만큼 저 스스로 ‘오늘은 읽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그때에 읽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 맞이할 다섯 해를 생각하면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에서 제 가슴으로 살며시 파고든 대목을 하나하나 눌러담아 봅니다.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도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든 책입니다. 이 책을 마주하고 싶은 분이라면, 다른 책도 마찬가지인데, 며칠 만에 다 읽으려 하든지 한두 달 만에 끝내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천천히 새기고 돌아보면서 1900년대 첫무렵부터 1900년대 끝무렵까지 우리 세상 이야기를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은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낸 한 사람 발자취이자 20세기 인류문화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43.1.28.나무.ㅎㄲㅅㄱ)


[18∼20, 118, 129쪽] 여기서 리펜슈탈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장비와 최고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 있다 해도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리펜슈탈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곳에 배치함으로서 각 촬영기사들이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 레니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직접 그런 영화를 위한 발라드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졌다. 무용을 할 때처럼 말이다 … 레니는 마을 여관에 방을 잡고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머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이런 계획을 털어놓자 여관 주인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 하지만 레니는 겁먹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레니는 하루 종일 거리나 산허리에 띄엄띄엄 모여 있는 집들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했고, 특히 여자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주가 지나자 차가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고, 레니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돌려가며 보여주자 곧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보려고 애썼다.

[32∼35쪽] 리펜슈탈은 그동안 스포츠 고위 관리들 모두와 한 사람씩 모두 돌아가며 싸운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레니는 높이뛰기 경기장에는 구멍이 두 개, 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삼단뛰기 경기장과 100미터 트랙 결승선 끝에는 각 하나씩의 구덩이를 확보했더 … 레니 자신은 운동선수에게든 영화 관객에게든 운동과 영화의 관계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굳게 믿었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과 ‘구성에 대한 관심’이 바로 레니의 동력이었다. 물론 리펜슈탈은 개인의 의지로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개념도 좋아했지만, 이와 같은 경쟁의 중심에 있는 우정도 좋아했다 … 리펜슈탈은 또 “나는 매우 현실적인 것, 삶을 그대로 잘라낸 부분,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특이한 것, 특별한 것만이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아름다운 것, 강한 것, 건강한 것, 즉 살아 있는 것에 매료된다. 나는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가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고,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마음만 먹으면 리펜슈탈의 발언에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섬뜩한 울림이나 초월적인 질서에 대한 갈망을 읽어내기란 매우 쉽다. 하지만 제3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와 같은 의혹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삶을 양식화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전범재판이 연달아 열렸으나 레니는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어이 그녀의 작품 활동을 막았다. 레니는 결코 영화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반세기 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레니의 다큐멘터리를 부분적으로 인용했지만, 그녀의 영화가 공개적으로 상영되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무삭제로 방송된 적은 없었다. 영화사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심지어 여엉의 업적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리펜슈탈은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리펜슈탈은 거의 전 세계적인 공모에 의해 역사의 각주로 쫓겨났다. 프로파간다와 예술을 구분할 방법이나 구분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그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134∼135, 146, 286∼287, 349∼350쪽] 몽블랑의 방랑자 야보르스키는 리펜슈탈과 함께 영화를 만들던 힘든 나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 단 한 쇼트를 찍기 위해서 장비를 전부 등에 짊어지고 8시간 동안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케이블카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장비를 모두 등에 지고 다녔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사랑해야 하지요.” … 리펜슈탈은 할리우드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리펜슈탈은 스튜디어가 원하는 이름, 그것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 이름이었다. 그토록 고된 환경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찍을 능력이 있는 여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거절하면 할수록 영화사는 점점 더 높은 출연료를 제시했다. 리펜슈탈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결국 레니는 영화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지만, 돈 때문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레니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소중한 동료들과 다시 한 번, 어쩌면 마지막이 될 모험을 할 기회였기 때문이다(1932년 무렵) …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끌어내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려면 반드시 한 사람이 편집을 해야 한다며,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편집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 리펜슈탈은 직접 꼼꼼하게 정찰하여 최상의 카메라 위치를 찾아냈고, 또한 정확히 어떤 앵글을 원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으며, 심지어는 어떤 렌즈를 사용할지까지 직접 결정했다. (1936년 올림픽에서) 각기 다른 경기에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추구해야 했다 … 리펜슈탈은 각기 다른 경기를 모두 다르게 다루면서 각 경기에 알맞은 속도와 스타일을 적용했고, 능숙한 편집 솜씨로 이런 각 경기를 근사하게 하나로 엮어 전반적인 리듬감을 완성했다.

[149∼150, 452, 458∼459쪽] 레니는 〈푸른 빛〉 작업에 몰두하느라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다면, 독일 경제가 가라앉고 있으며 실업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니가 별 걱정을 하지 않는 사이, 아버지는 사업 규모를 줄이고 전 직원의 60퍼센트를 해고한 후 어머니와 함께 자그마한 아파트에 세를 얻어 이사해야 했다 … 레니가 전쟁에 활발하게 참여한 기간은 채 3주도 안 됐지만, 이 경험은 몇 십 년 동안이나 레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 레니는 전쟁 기간 내내 〈저지대〉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동료 촬영기사들과 조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레니가 야보르스키에게 말했다. “최대한 몸을 사려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요. 살아남는 데만 신경 쓰라고요.” 물론 레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151∼153, 233, 236, 277쪽] 레니는 히틀러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히틀러라는 존재 자체와 그가 청중을 사로잡는 방법에 매료되었다 … 레니는 강한 인상을 받으면 누구든 어느 때든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직성이 풀렸다 … 레니는 이렇게 직접 부딪히는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고 믿었다 … 민주주의는 죽었다. 리펜슈탈은 베르니나와 베른 알프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가끔만 독일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레니는 5월 10일 베를린 대학 맞은편 보리수 거리에서 ‘반독일적’인 사상을 담았다고 판단되는 저술은 모두 불태웠던 분서 사건도, 최초의 유대인 추방 사건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 리펜슈탈은 수많은 작가와 음악가, 화가뿐 아니라 연극과 영화계의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렸다 … 괴벨스의 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의 협력 관계가 멀어진 것은 레니의 주장보다 훨씬 뒤였다. 또한 괴벨스는 레니 리펜슈탈이 스위스 알프스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말하는 시기에 ‘똑똑한 여자’ 레니 리펜슈탈과 몇 번이나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서 사건이 있은 지 겨우 1주일 후인 5월 17일에 괴벨스는 리펜슈탈을 만나 영화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고 있다 … 히틀러가 히틀러유겐트 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부분에서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찍었다. 연단 주변에 설치해 둔 원형 트랙을 따라 히틀러의 주변을 ㅊ너천히 돌면서 밝은 조명 아래에 선 이 민중 선동가를 낮은 앵글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260, 263, 274∼275, 276쪽] 히틀러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국민계몽선전부는 계약을 최종 호가인해 주지 않았고, 정부 영화 부서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리펜슈탈에게 촬영기사나 필름을 제공할 권한이 없었다. 리펜슈탈이 공식적인 협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했으니 가장 쉬운 방법은 패배를 자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기는 리펜슈탈의 타고난 집요함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고, 리펜슈탈이 히틀러에게 느끼는 의무감에도 맞지 않았다 … 리펜슈탈의 회고에 따르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의 거물들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매우 만족한 듯했지만, 리펜슈탈 자신이 보기에는 제대로 된 플롯도 대본도 없는 미완성작에 지나지 않았다. 리펜슈탈은 “이미지를 조합해서 시각적인 리듬과 다양함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이후의 다큐멘터리에서 그토록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낸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괜찮은 연습이었던 셈이었다 … 전당대회가 끝난 후에 발행된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한 책을 보면, 전당대회 준비가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준비와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 리펜슈탈은 전당대회는 그녀가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았든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자신은 이 장대한 행사와 그 준비과정을 단순히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사진과 설명은 그녀의 주장과 달리 리펜슈탈이 실제 전당대회 연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로 종종 제시되었다 … 어느 쪽이 진실이든 리펜슈탈은 자신이 역사적인 행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며 기록 대상이 무슨 행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1933년 전당대회를 기록한 〈신념의 승리〉,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의지의 승리〉, 독일군에 대한 좀더 짧은 다큐멘터리 〈자유의 날〉을 만들기 전에도 전당대회를 기록한 뉴스 영화는 존재했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이렇게 예술적으로 연출된 나치당 전당대회에 바쳐진, 혹은 정말로 마침내 집권한 히틀러에게 바쳐진 ‘장편’이었을 뿐이다.

[309, 312, 314∼317쪽]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바로 환상적인 분위기다. 초창기에는 그녀의 연기에서 이런 요소를 엿볼 수 있으며, 나중에 연출을 하게 되면서 특징은 더욱 뚜렷해졌다. 리펜슈탈은 일상적인 관심사나 평범한 메커니즘에 안주하지 않고 양식화된 세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 그녀는 결코 프로파간다를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녀의 의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 히틀러는 전당대회 다큐멘터리를 왜 하필이면 리펜슈탈에게 맡기겠다고 그토록 고집했을까? … 그녀의 역할을 평가할 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정황을 접어두어야 하지만, 레니 리펜슈탈이 제6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거절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 것인가? … 리펜슈탈은 그 걸림돌로 인해 자신이 영영 영화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그녀는 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조각 자료들과 그토록 진부한 아이콘을 가지고 걸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 전후 비평가들은 리펜슈탈이 이 영화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 리펜슈탈은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독일인의 90퍼센트가 히틀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응수했다. 이 영화에서 나치 정당의 교조는 별로 드러나지 않으며 나치의 악질적인 인종차별적 교조나 정치적 박해를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당대회 자체가 그랬던 것이지 리펜슈탈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리펜슈탈은 최면과 같은 의식을 공들여서 훌륭하게 만들어 보여주었다.

[367, 369, 433∼434, 447쪽] 리펜슈탈은 확보한 필름 약 400킬로미터를 보는 데만도 10주가 걸렸다. 레니처럼 전설적인 질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 레니는 자신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마라톤 주자들의 내면적인 감정”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지독한 피로나 빨리 경기가 끝나기를 갈망하는 그러한 감정 말이다. 주자의 무거운 다리는 아스팔트에 들러붙는 것 같지만 의지력이 그를 이끌어 간다 … 지금 이 영화를 역사 다큐멘터리로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에서 엿보이는 나치당 지도자들의 모습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는지 모른 채 솔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준다 … 레니는 시와 영화가 비슷한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시와 영화는 언제나 ‘교류 전기’처럼 일종의 파동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또한 관객이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관객은 시퀸스의 표현력에 의해 절정에 이끌렸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상승하기를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473, 488∼489쪽]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부터 슈네베르거 부부(전쟁 때 레니는 슈네베르거 부부를 숱하게 도와서 목숨을 여러 차례 건져 주었다)는 레니 리펜슈탈을 멀리하려 했다. 그들은 그날 밤 칠레르탈 계곡 꼭대기의 작은 호텔에 레니를 버려둔 채 떠났다. 다음날 레니가 두 사람을 쫓아서 마을 위 언덕에 있는 한 가족 임대별장에 갔지만, 기젤라가 차갑게 레니를 쫓아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당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젤라가 소리쳤다. “이 나치 계집 같으니라고!” 한스 역시 따뜻한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눈벼룩은 몇 주 전만 해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또 원하는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레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리펜슈탈의 자산과 권리, 자유는 모두 강제된 채였다 … 리펜슈탈과 히틀러가 친밀한 관계였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총통의 측근들이 증언한 기록은 많았다 … 리펜슈탈은 또한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히틀러식 경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491, 492, 509쪽] 레니는 끝도 보이지 않는 빚과 소송에 시달렸다 … 법정은 레니의 전쟁범죄 혐의를 풀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적의는 1947년 출판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독일 영화 심리분석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와 같은 새로운 해설이나 리펜슈탈의 소송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더욱 부추김을 받았다 …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후 한 번도 제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의 진창’을 뒹구는 기분이었다. 감금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으며, 심문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인터뷰’의 탈을 썼을 뿐이었다.

[520∼521, 524쪽] 레니는 이들(메사킨 퀴사이르 누바족)의 순진함과 때 묻지 않은 관습을 사랑했다.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 레니 리펜슈탈은 아프리카에 열 달 간 머무르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여행을 했는데, 대부분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 레니는 차도 텐트도 없이 주로 바깥에서 잠을 잤다(1962년 무렵). 이제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친구로 완전히 받아들여졌고 뱀에 물려죽은 전사의 장례식에까지 초대받았다. 이곳에서 레니는 어디에든 갈 수 있었고 혼자 있을 때도 두렵지 않았으며 모욕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레니는 지난 몇 년 간 독일에서 악전고투를 하면서 모욕을 참아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친구들로부터 환영받자 짐심으로 행복했다 … 이번에는 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누바족의 영화를 찍으리라 … 레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바족에게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떨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벌집 같은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526, 569, 571∼573쪽] 이때쯤(1968년) 레니의 사진이 유명해졌다. 아프리카 사진을 모은 첫 사진집 《최후의 누바족》이 뉴욕에서 1974년에 출판되었고, 2년 후에는 《카후 사람들》이 나왔다. 레니가 수단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 1982년에는 《레니 리펜슈탈의 아르피카》가 출판되었고, 곧이어 《사라지는 아프리카》가 나왔다. 이제 사실상 레니가 알고 레니가 사랑했던 누바족은 사라지고 없었다. 레니의 표현대로 ‘문명의 파괴적인 손’은 누바족에게 누더기옷과 정체성의 위기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돈, 술 그리고 문을 잠글 자물쇠를 가져다주었다. 관광객들이 누바산으로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는 이국적인 정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춤과 싸움의 의식은 수많은 렌즈 앞에서 돈을 받고 치러졌다. 레니는 그녀의 사진이 이런 변화에 일부 책임이 있다든지, 그녀는 단지 ‘환상에 사로잡힌 백일’일 뿐이라는 비난에 반박했다. 누바족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예의 집착과 숭배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라는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레니는 깊이 절망했다. 레니가 사진을 찍기 전에 다른 사람들도 누바족의 사진을 찍어 발표해 왔다. 단지 그녀는 사라지는 순간의 목격자이자 기록자가 되는 특권을 누렸을 뿐이다. 레니는 부패해 가는 천국을 보았다 … 리펜슈탈의 사진은 가장 완벽한 인간 육체를 아무 부끄러움 없이 찬미한다. 수전 손택은 《우율한 열정》에서 리펜슈탈이 그려내는 “곧 멸종될 누바족은 리펜슈탈이 만든 나치 작품의 연장”이라고 비난했고 몇몇 비평가들 역시 손택을 따랐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리펜슈탈이 찍은 수단 사람들의 감각적인 초상에 굉장히 기뻐하며 리펜슈탈이 여행 허가를 요청할 때마다 점점 더 친절해졌다. 1975년 니메이리 대통령은 리펜슈탈의 공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수단 시민권을 수여했다. 리펜슈탈은 그런 영광을 누리는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 지적이고 정열적인 탐구로 유명한 손택은 “생각을 자라게” 하는 글로 유명했는데, 리펜슈탈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오히려 많은 독자들의 생각을 고정시켜 버렸고, 거의 30년 전의 크라카우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리펜슈탈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 어쩌면 제일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손택의 글이 전혀 다른 두 작품에 대한 평이라는 점이다. 손택은 짓궂게도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제목 하에 레니의 아프리카 사진집을 《SS 제복》이라는 책과 함께 묶어서 평한다 … 손택은 리펜슈탈이 누바족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이런 류의 사진에 대한 손택의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 손택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리펜슈탈에 대한 이미지가 사진을 보는 눈을 흐렸을 수도 있다. 다른 예술가들 또한, 리펜슈탈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슷한 사진을 찍었다. 리펜슈탈에게 영감을 준 조지 로저는 1948년과 1949년에 씨름을 하는 누바족 사진을 찍었다. 로저의 사진은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로저의 사진을 파시스트적이라고 해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손택은) 리펜슈탈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두 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나고” 어쩌면 “지금까지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중 가장 위대”할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야누스와 같은 관점이다! … 손택은 리펜슈탈에게 언어적인 공격을 퍼붓지만, 그 방식은 프로파간다라는 이론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 레니는 언제나 누바족을 관찰하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였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파시스트적이란 말인가?

[577, 594쪽]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 … 우리는 리펜슈탈을 비난하지만, 리펜슈탈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사회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 하지만 무엇을 믿든 간에, 사회가 리펜슈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의지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나치 현상과 나치 현상의 힘(신비화와 볼거리를 통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묶어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금만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이미 반세기나 지난 상황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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