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글쓰기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최종규 지음 / 호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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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책을 나 스스로 말하기. 내 이름을 박아서 내놓은 책이지만, 이 책에 담은 알맹이와 땀방울은 나한테 고마운 분들 넋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가 쓴 책을 내가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내 둘레 아름다운 사람들 삶과 넋이 책 하나로 어떻게 갈무리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글을 적바림한다고 하겠다. 야옹야옹~) 


 이 책 하나 146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 최종규, 《생각하는 글쓰기》


- 책이름 : 생각하는 글쓰기
- 글 : 최종규
- 펴낸곳 : 호미 (2009.11.30.)
- 책값 : 1만 원


 (1) 나는 왜 책을 쓰는가


 글 한 줄을 적바림하면서 우리 누리를 바로세우거나 알차게 가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 한 줄을 적바림할 때에는 오늘 하루 제가 꾸리는 삶을 옮길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둘레 사람들이 우리 누리를 올바르고 어여쁘게 일구어 나가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땀흘리고 애쓰는 분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돈값 이름값 힘값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또 이렇게 하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저 제 둘레 사람들이 모두 올곧게 애쓰든 몇 사람만 올바르게 힘쓰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길을 저버리든, 저는 저대로 저한테 가장 알맞으면서 올바른 길을 찾고 꿋꿋하게 걸어갈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적바림하는 글쪼가리 하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저 스스로 제 삶을 얼마나 제 마음에 흐뭇하도록 일구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야기 한 자락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쓴 글 한 줄이 많은 사람한테 읽힐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 한 줄을 많은 사람한테 읽혀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아 주면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안 읽어 준다 하여도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제 글을 꾸준히 되읽으면서 어제와 오늘과 이듬날이 한결같이 곧고 고우며 맑을 수 있도록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남을 일깨우는 글이 될 수 있습니다만, 남을 일깨우기 앞서 저 스스로를 일깨우는 글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책을 수없이 찾아 읽든,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스승을 수없이 찾아가서 말씀을 여쭈든,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일거리를 찾아 바지런히 땀흘리며 일하든,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하고 어울리더라도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글 한 꼭지에 차곡차곡 담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담는 글이고,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저 스스로 잊지 않고 되새기고자 읽는 글이라고 느낍니다.

 날마다 차근차근 새로워지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글 한 꼭지이든 두 꼭지이든 갈무리하면서 날마다 제 삶을 가다듬는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좋은 생각을 맺으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어 주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꾸준하게 새로워지고 고우며 맑게 거듭날 수 있으면 저는 제 삶을 곱고 맑게 꾸리는 셈입니다. 제가 제 삶을 곱고 맑게 꾸릴 수 있다면, 제가 터잡고 있는 마을에서 곱고 맑은 넋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제가 터잡고 있는 마을에서 곱고 맑은 넋을 나눌 수 있으면, 제 둘레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곱고 맑은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고, 제 삶자락과 삶터부터 좋은 이야기가 어우러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혁명이나 개혁을 이룰 수 있기도 할 터이나, 저한테는 열 해나 스무 해나 쉰 해나 예순 해에 걸쳐 아주 더디게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제 삶부터 혁명이나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땀을 흘리고 싶습니다. 제 글쓰기란 갑작스레 크게 뜨거나 널리 읽히는 글을 낳는 일이 아니라, 짧으면 열 해이고 으레 서른 해이며 길면 예순 해 남짓에 걸쳐 좋은 뜻 하나를 이루고 싶은 긴 걸음걸이입니다.

 지난 2004년에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처음으로 내놓은 다음 2006년에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내놓았습니다. 올여름부터는 세 번째 헌책방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너 해 또는 대여섯 해가 지난 다음에는 네 번째 헌책방 이야기를 쓰고자 새 마음을 가다듬고 싶습니다.

 지난 2009년 봄에 《자전거와 함께 살기》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을 내기 앞서인 2008년 여름에 딸아이를 낳아 기르는 터라 두 번째 자전거 이야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워야 할 뿐 아니라, 아이와 다닐 때에는 자전거를 탈 수 없는 탓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자전거수레에 아이를 태울 수 있다면, 또 아이 스스로 자전거를 탈 무렵이 되면 시나브로 두 번째 자전거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겠지요.

 지난 2009년 가을에 《책 홀림길에서》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 실은 글은 다른 어디에 한 번도 내놓지 않은 글을 묶었는데, 앞으로 우리 살림집을 느긋한 곳으로 옮긴 다음에 두 번째 책 이야기 책을 새롭게 내놓고픈 꿈을 꿉니다. 서른다섯 나이에 돌아본 책 이야기가 있으면 마흔이나 마흔다섯에 돌아보는 책 이야기가 있고, 쉰이나 예순이나 일흔에 돌아보는 책 이야기가 있어요. 저마다 깊이와 너비가 다릅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겨울 들머리에 《생각하는 글쓰기》를 내놓았습니다. 제가 가장 깊이 마음을 쏟으며 하는 일이 ‘우리 말 이야기’ 쓰기임을 헤아린다면, 제가 내놓은 책 가운데 가장 늦게 나온 책입니다. 책이 나온 이제야 밝히면, 이 책은 2005년에 진작에 내기로 했으나 다섯 해를 미루고 늦춘 끝에 겨우 나왔습니다. 아마 2005년에 번쩍 하고 내놓았으면 좀더 많이 읽히거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2005년이 아닌 2009년 겨울에 내놓았기에 글을 더 손질하고 매만질 수 있었고, 다섯 해 사이에 새롭게 배우거나 뒤늦게 깨달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앞으로 두 번째 ‘우리 말 이야기’를 내놓을 때에는 그동안 새로 깨닫거나 배우는 이야기에 따라 제 어설프고 어리석은 생각밭을 다시금 가누어서 내놓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책 하나를 내놓을 때마다 저로서는 지나온 삶을 갈무리하는 한편, 제가 걷는 오늘을 곰곰이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좀더 슬기롭게 다스리는 눈길을 닦는다고 하겠습니다. 








 (2) 나는 왜 책을 선물하는가


 지난 《모든 책은 헌책이다》부터 《생각하는 글쓰기》까지 다섯 가지 낱권책을 내놓았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개인잡지는 여덟 권을 내놓았습니다. 모두 열세 권이며, 책방에 넣지 않은 비매품 책으로 《사진은 삶이다》와 《말은 삶이다》를 내놓은 적 있습니다. 이리하여 서른여섯 나이에 모두 열다섯 권이 되는 책을 쓴 셈인데, 열다섯 권에 이르는 책을 내놓는 동안 출판사에서 받은 글삯은 한 푼도 없습니다. 때로는 출판사에 책 찍을 돈을 보태어 주었습니다. 이러면서 우리 누리에 내놓은 책 열다섯 가지를 줄잡아 200권 남짓 둘레에 선물했습니다. 맨 먼저 헌책방 일꾼한테 선물했고, 저한테 고마운 분들한테 하나하나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제 책을 3000권 넘게 선물해 온 셈입니다.

 지난날에는 책 만드는 일을 하며 일삯을 벌었으니 제 책을 제 돈으로 만들어 둘레에 선물하고 나면 빈털털이가 됩니다. 그런데 빈털털이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글을 잇달아 쓸 수 있고 새삼스러운 책을 꾸준히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쉬움을 남기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쓰는 글이기에 다른 곳에서 돈벌이를 하여 푼푼이 모은 돈 얼마를 책한테 송두리째 바쳐 이 책들을 둘레에 선물할 때 그지없이 보람있다고 느낍니다.


.. 지식으로 다루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보여주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쌓자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참다이 사랑하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지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깨닫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지식이란 다름아닌 내 삶임을 옳게 느껴 넉넉하게 껴안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  (머리말)


 누구는 자가용을 몰고 누구는 아파트를 장만하며 누구는 맛난 밥 좋은 옷을 입는 데에서 보람을 느끼겠으나, 저로서는 자가용 안 몰고 아파트 장만 안 하며 맛난 밥 안 먹고 좋은 옷 안 입는 자리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데에 들어갈 돈을 옹글게 그러모아서 책 하나를 여미는 일만큼 저한테 기쁜 일은 다시 없으니까요. 제가 고운 목숨 하나 선물받아 이 땅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으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란 글 하나 쓰고 책 하나 묶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올봄 5월이 되면 지난 몇 해 동안 조용히 일구어 놓고 있던 글을 여미어 두 가지 책을 함께 내놓습니다. 하나는 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은 책입니다. 낱권책으로 치니 여섯째 책과 일곱째 책이 됩니다. 이 책들이 어여쁘게 태어나면 이 책들도 ‘글삯에 맞먹는’ 만큼 책으로 받아서 둘레에 하나둘 선물하고 다니겠지요. 인천골목길을 담은 사진책은 따로 더 장만해서 좋은 사진이 태어나도록 도와준 골목이웃을 찾아다니며 한 권씩 선물하고 다닐 테고요.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힘들어 책을 읽을 겨를을 못 낸다고 하는데, 책을 읽을 겨를을 못 낼 뿐 아니라, 바쁘고 힘든 가운데 즐겁고 손쉽고 재미나게 읽을 책이 없기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제 글이 썩 재미나거나 신나는 글은 못 된다고 느끼지만, 바쁘고 힘든 가운데 손쉽게 읽으며 생각 한 줌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이 되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새로운 책을 내놓을 때마다 생각하는데, 이번 책은 지난 책과 견주어 좀더 손쉬우며 살가울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사람이 되고자 꿈꾸고, 차츰차츰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비손합니다. 이 마음을 책 하나에 살며시 담아 이웃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입으로는 잘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을 책 하나로 쑥스러이 나누고 싶습니다.
 







 (3) 내가 쓴 글을 내가 눈물겹게 읽기


 제가 쓴 글은 제 이름을 걸고 나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롯이 제 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둘레 곱고 맑은 사람들 넋을 고맙게 물려받고 선물받으면서 쓸 수 있는 글인 까닭입니다. 제가 잘나서 쓰는 글이 아니라 제 둘레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쓰는 글입니다. 제 둘레 좋은 사람들이 좋은 말과 삶을 보여주고 베푼 까닭에 이 말과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낸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제가 쓴 글을 즐겨읽습니다. 거듭 읽고 새겨서 읽습니다. 제 이웃들이 저한테 어떤 사랑을 나누어 주었는가를 제 글을 읽으면서 되돌아보고, 제 이웃들이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얼마나 온몸 바쳐 일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싶어 제 글을 곰삭입니다. 제가 읽는 제 글이지만, 제 글을 읽으며 더없이 기쁘고 즐겁고 반가우며 고맙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읽는 글이요 웃음을 터뜨리며 읽는 글입니다. (4343.4.3.흙.ㅎㄲㅅㄱ)


[19쪽]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을 때 삶터가 삶터다웁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나라가 엉망이어도 조그마한 마을 하나는 홀로 튼튼히 우뚝 설 수 있을 테지만, 이제는 작은 마을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벌이는 숱한 막개발에 쫓기고 밀리고 무너집니다. 큰뜻에 따라 작은뜻은 묻어야 한다면서 용역 철거꾼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밀어냅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 삶다움을 지킬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고, 우리다움을 추스를 일과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자리라면, 우리가 하는 일과 쓰는 글이 말답고 글답기 어렵습니다. 뒤틀리고 맙니다.

[30쪽] 무엇보다도 ‘기피 옥수수’라는 이름에서는 혀를 내두릅니다. 낱말책에도 없는 한자말 ‘기피’인데, 이런 이름을 어디에서 찾아내거나 알아내어 쓰는지 더없이 궁금합니다. 모양새 그대로 “껍질 벗긴 옥수수”라 하면 될 텐데, 왜 ‘기피 옥수수’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써야 할까요. 글자수가 둘 늘어서 “두 글자짜리 짧은” 이름을 쓰려는 마음이었을까요. 길이는 짧더라도 알아듣기에 좋지 않으면, 짧으나 마나임을 몰라서일까요. 농협에서 이와 같은 한자 이름을 즐겨쓰기 때문인가요. 농사짓는 분들 모두 이러한 이름만으로 곡식을 가리키기 때문인가요.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며 깨는 ‘깨’입니다. 이런 곡식한테 얼토당토않을 뿐 아니라, 우리 삶하고 아주 동떨어진 이름을 붙이는 일은 농사짓는 분들한테나, 생협 운동 하는 분들한테나, 또 우리한테나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 땅을 살리는 농사와 생협뿐 아니라, 우리 말과 글을 함께 살리는 농사와 생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34∼35쪽] 밥상에 차린다고 아무 먹을거리나 집어먹을 수 없습니다. 먹고살기 팍팍하다고 군인이 되어 싸움터에 나가 사람 죽이는 짓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또는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환경을 더럽히는 공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제대로 몸과 마음에 피와 살이 되는 밥을 먹을 노릇입니다. 돈 한 푼을 벌어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돈을 벌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를 쓰더라도 우리 넋과 마음과 삶을 일으키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만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 마음과 생각과 넋이, 삶과 일과 놀이가, 그리고 말과 글과 이야기가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38∼39쪽]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으며, 세상이 세상다울 수 없는 이 땅에서는 책이 책다울 수 없는데다가 말이 말답지 못합니다. 우리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거나 나눌 자유가 없이 국가보안법에 짓눌리고, 우리 마음을 스스럼없이 펼치거나 함께할 권리가 없이 통신검열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자리에 학문이 학문답게 뿌리를 내립니다. 세상이 세상다울 수 있는 터전에 말이 말답게 줄기를 뻗습니다. 얼과 넋이 얼과 넋다이 아름다울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 일과 놀이는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이 가득한 일과 놀이로 새로워지거나 새삼스러워집니다.

[45. 46쪽] 길을 가니 길손이요, 함께 길을 가서 길동무이며, 길에서 먹으니 길밥이고, 길을 그려 놓으니 길그림입니다. 길에서 살듯 일을 하거나 길을 좋아하니 길사람이고, 어디로 나아갈까 헤아리면서 길머리를 찾고, 반가운 이를 맞이하고자 길마중을 나갑니다 …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빈다”고 흔히 말합니다. “죽은 이가 저승에서도 잘살기를 빈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예부터 써 왔으니 오늘날에도 쓴다고 할 테고, 앞으로도 꾸준히 써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문이 아닌 한글을 쓰는 우리요, 우리 나름대로 우리 말투를 하나둘 꾸려 나갈 때가 한결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돌아가신 이를 기립니다”라든지 “떠나가신 넋이 걱정없이 잠드시기를 빕니다”라든지 “고이 잠드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50, 69쪽] 예전에는 저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래서 참 좋구나 싶은 말을 보든, 참 얄궂구나 싶은 글을 읽든,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저뿐 아니라 누구나 우리 말과 글을 놓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 좋은 말이 좋은 말인 줄 느끼지 못하고, 얄궂은 글이 얄궂은 줄 느끼지 못하지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좋은 버릇은 들이지 못하고, 얄궂은 물이 자꾸 들면서, 당신 스스로도 안타깝고, 우리 나라나 문화로 보아도 안쓰러운 쪽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 누구나 조금씩 생각을 기울여 보면 얼마든지 한결 걸맞고 알맞고 살갑게 낱말 하나 엮어 낼 수 있습니다. 말투나 말씨도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이 여밀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니 좀더 낫다고 여길 만한 낱말이나 말투나 말씨를 못 찾고 못 느끼고 못 쓰고 있을 뿐입니다.

[57, 59쪽] 한자말을 쓰는 일이 잘못은 아닙니다. 어느 말을 쓰든 올바르게 쓰지 못하는 일이 잘못입니다. 알맞게 써야 할 자리에 알맞지 못하게 쓰니 잘못입니다 … 퍽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가난뱅이’는 토박이말로 있는데, ‘부자富者’는 왜 한자말로 있을까 하고. 돈이 없거나 적은 살림을 가리키는 말은 토박이말로 ‘가난’이면서,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을 가리키는 말은 왜 한자말로 ‘부유富裕’일까 하고. 머리통이 굵어지고 여러 낱말책을 찾아보던 어느 날, 우리 토박이말로도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음을 뒤늦게 배웁니다. 토박이말로는 ‘가멸다’입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살림을 ‘가멸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느 ‘부자’라면 ‘가면이’이고, ‘억만장자’라면 ‘가멸찬이’입니다.

[63쪽] 말을 살리는 일은 제 삶을 살리고 제 넋과 얼 또한 살리는 일입니다. 말 한 마디를 살리면서 우리 삶 한 자리를 차근차근 살립니다. 우리 삶 한 자리를 차근차근 살리는 가운데 우리 넋과 얼이 새로워집니다. 아름답게 빛나든 그리 밝지 않게 빛나든 나날이 싱그러움을 더해 갑니다. 작은 한 가지를 들여다보는 마음이기에, 내 둘레에서 내 자그마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좀더 찬찬히 둘러봅니다. 천리길을 왜 한 걸음부터 걸어야 하는지, 티끌을 모으면 왜 큰산이 되는지, 첫 술에 어이하여 배부를 수 없는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달으며 가슴으로 새깁니다.

[64, 66쪽] 말을 살리지 못하면 내 삶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 손과 입을 거쳐서 들어온 말투가 사그라들기는커녕 되살아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영어 말투가 또다른 뿌리를 내리면서 속속들이 퍼집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한테 고유한 말과 글을 가꾸면서 보듬기란 참 어렵습니다. 말과 글에 앞서 삶이 뿌리뽑히고 문화가 내동댕이쳐지며 넋과 얼이 짓밟힙니다. 말만 살릴 수 없고 글만 북돋울 수 없기에, 삶을 함께 살리고 문화를 같이 북돋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87, 90쪽] 말이란, 말하는 사람 스스로 가꿔야 합니다. 글이란, 글 쓰는 사람 스스로 가꿔야 합니다. 얼도 넋도 맟나가지이며, 생각과 슬기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꿀 때 비로소 싱그러운 새싹을 돋우어 내고 줄기를 올립니다. 우리 말을 가꾸고자 우리 머리를 쓸 때 바야흐로 튼튼한 가지가 뻗어나고, 가지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자꾸 바깥에 눈을 돌리며 바깥에서 거저 얻으려 한다면, 꿍꿍이속을 키우는 바깥에 있는 빚쟁이들이 어느 한때 갑자기 들이닥치며 우리 말살림을 죄 거덜나게 하리라 봅니다 … 같은 서울에서도 서로를 돈과 힘과 이름으로 나누는 짓을 그만두지 않고서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서울 안과 서울 밖을 나누는 못남을 떨쳐내지 않고서야, 사람과 뭇목숨 모두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고서야, 입으로만이 아닌 몸으로 콩 한 알도 나누는 매무새로 살아가지 않고서야, 옹글게 쓰는 우리 말이란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봅니다.

[103, 132쪽] 좋은 사람들한테 마음을 쓰듯, 우리가 날마다 쓰는 우리 말에도 마음 한 번 써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좀더 살가운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좀더 쉽고 깨끗하게 쓸 수 있도록, 좀더 알맞고 넉넉하게 쓸 수 있도록, 좀더 우리 삶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우리 생각도 알뜰히 담아낼 수 있도록 마음을 쓰면 좋겠습니다 … 바라는 대로 살게 되고, 살아가는 대로 말이 됩니다. 꾸미는 대로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대로 글이 바뀝니다. 우리가 옳게 살고자 애쓰면 옳은 말을 저절로 쓰게 되고, 우리가 그릇되게 사는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 글은 그릇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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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고히야마 하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얼미디어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32 ― 아름다운 책 하나 찾는 길
 : 고히야마 하쿠,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 책이름 :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 글 : 고히야마 하쿠
- 옮긴이 : 양억관
- 펴낸곳 : 한얼미디어 (2006.2.13.)
- 책값 : 1만 원


 (1) 책을 어떻게 맞아들여 읽는가


 나라밖으로 옮겨지는 우리 나라 책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나라안에서 널리 사랑받는 책이 아니라 나라안에서 무척 아름답다고 여기는 책 가운데에는 어떠한 책이 나라밖으로 옮겨지는지 궁금합니다.

 나라안에 옮겨지는 책들을 살피면 으레 나라밖에서 무척 사랑받고 있는 책이기 일쑤입니다. 나라밖에서 널리 사랑받지 않을지라도 나라밖에서 깊이 아끼거나 보듬는 조그마한 책을 나라안으로 옮기는 일이 있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훌륭한 나라안 책이라 할지라도 ‘사서 읽을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할 때에는 출판사에서 망설이거나 손사래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맹이가 훌륭한 책일지라도 출판사에서는 팔림새를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고를 때에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한테 가장 사랑스럽다고 느낄 책을 고르는 책방마실이지만, 오늘 책방마실에서 고르는 책 하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부대끼는 동안 깨달은 ‘나한테 사랑스러울 느낌’입니다. 오늘까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인 만큼 앞으로는 달라지거나 새로워지거나 거듭날 수 있는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못 알아본 책을 오늘 알아볼 수 있고, 오늘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책을 이듬날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반가이 집어드는 책 바로 옆에 꽂혀 있을 더없이 반가울 책을 오늘까지 못 알아본 채 지나칠 수 있습니다.

 1995년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2000년에 비로소 알아보는 책이 있습니다만, 고작 다섯 해 만에 판이 끊기는 수가 있습니다. 2002년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2005년에 바야흐로 알아보는 책이 있는데, 겨우 세 해 만에 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2008년에는 알아볼 눈이 얕았으나 2010년에 드디어 알아보는 책이 있어도, 기껏 두 해밖에 안 지났어도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지난날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 책눈이 얕아서 책을 따스히 껴안지 못하기 일쑤이고, 오늘날뿐 아니라 앞날까지 제 책눈이 어설픔을 뒤늦게 깨달으며 책 하나 더욱 넉넉히 보듬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책방마실을 할 때에 ‘내가 오늘 꼭 읽지 않더라도 앞으로 읽을 만한 책일 수 있다’고 여기는 책을 조금씩 장만하곤 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오늘 다 읽어치울 책’만 빠듯하게 장만했으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두어 해 뒤에는 ‘이듬날 읽을 책을 몇 가지’ 장만합니다.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고 사회로 돌아오고 나서는 이동안 사라지는 책이 있으며 이동안 무슨 책이 나왔는가를 하나도 알 길이 없던 탓에 ‘언제 어느 책이 내 눈에 한 번도 스치지 못하고 사라질는지 모른다’고 헤아리며 이듬이듬날 읽을 책을 차곡차곡 장만합니다. 사랑스러운 님을 만나거나 사귈 때에는 나로서는 아직 내키지 않으나 둘이 서로 나눌 책을 곰곰이 살피는 눈길을 기르고,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는 나로서는 마음이 들지 않아도 아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넓고 깊게 책밭을 둘러보면서 책을 장만합니다. 2010년 오늘은 그지없이 사랑받으며 잘 팔리는 책이라 하여도 고작 서너 해 뒤에는 갑작스레 미움을 받으며 스러지는 책이 있을 수 있어요. 한 번 자취를 감추는 책을 나중에 찾아보고자 한다면 대여섯 해는 아무것 아니고 일고여덟 해나 열 몇 해쯤은 넉넉히 잡아먹습니다.

 있을 때 사고, 샀으면 잘 간수하며, 간수했으면 마음으로 고이 삭인 다음, 삭였으면 즐거이 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서 지난 열 해에 걸쳐 가장 훌륭하다고 느끼는 책이 무엇인가를 뽑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걷는 책길에 따라 만화책 하나와 글책 하나와 사진책 하나를 뽑았습니다. 지난 열 해(2000∼2009) 동안 제 손을 거친 책은 여러 만 권이 될 테고 우리 집 책꽂이에 남은 책은 이만 권이 조금 안 됩니다. 좋으면 다 좋은 책이지, 어느 책이 더 좋고 덜 좋고를 가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이때에 제 마음을 덥혔고, 저 책은 저때에 제 생각을 일깨웠습니다. 한 줄로 사로잡는 책이 있고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아리따운 책이 있습니다. 읽는 기쁨이 있는 책이 있고, 나누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 있으며, 내 삶으로 곰삭이는 멋이 있는 책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올 한 해(지난 열 해) 나한테 가장 아름다운 책’ 한두 가지를 뽑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만 사람한테는 만 가지 좋은 책이 있는데, 이러한 만 가지를 몇 가지로 뭉뚱그린다는 일은, 고작 몇 가지 책을 드높일는지 몰라도 만 가지로 다 다르게 아름다운 책을 저버리거나 등지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등수나 차례를 밝힌다 하여도, 어렵사리 추천을 한 모든 책들이 어떤 책인지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어도 ‘다 다른 아름다움과 멋’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래도 일은 일인 탓에 저 또한 제 깜냥껏 세 권을 가까스로 추렸고, 세 권 이름을 들면 《도자기》(만화책), 《이 여자 이숙의》(글책), 《역전 풍경》(사진책)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본 사람이 있을는지 궁금한데, 아마 세 가지를 모두 본 사람은 아주 드물지 않으랴 싶습니다. 온 나라에 걸쳐 다섯 사람이나마 있을까 말까 한 노릇이라고 봅니다. 만화책 《도자기》는 제법 사랑받고 있어도 《이 여자 이숙의》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천 사람이 안 되고, 《역전 풍경》을 알아보는 사람은 몇 백 사람이 안 되는데, 그나마 《역전 풍경》은 몇 해 앞서 ‘더는 안 찍어 살 수 없는’ 책이 된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만화책을 즐겨읽으며 글책을 즐겨읽는다든지 글책을 즐겨읽으며 사진책을 즐겨읽는다든지, 사진책을 즐겨읽으며 글책이나 만화책을 즐겨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기는. 《역전 풍경》은 김기찬 님 사진책인데, 김기찬 님이 《골목 안 풍경》이나 《잃어버린 풍경》 같은 사진책을 냈어도 새책으로 반가이 사들인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모두들 헌책방에서만 (좀더 값싸게) 찾아보려고 할 뿐입니다.

 사진 하나를 놓고 생각할 때에, 오늘날 사진쟁이 이름을 내거는 사람이 제법 많고 사진쟁이 이름을 내걸지 않더라도 사진을 즐겨찍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잘나가는 젊은 사진쟁이 누구누구 이름을 들먹이는 사진밭이며, 아무개저무개가 우리 사진문화를 새로 일군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진비평이든 사진평론이든 김기찬 님이 살아 있을 적이나 돌아가신 뒤로나 ‘김기찬 골목사진 이야기’를 깊고 넓게 읽어내며 풀어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이분 사진책이 하나둘 ‘절판 길’을 걷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분 사진책 이야기는 더 나오기 힘들 테지요. 골목길이라는 사진감이든 서울역이라는 사진감이든, 사람들은 으레 그 사진은 그렇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김기찬 님 사진을 김기찬 님 눈길을 따라가며 느끼기는 어려울 테지요.

 책을 책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보듬지 못하는 흐름은 《역전 풍경》이라는 책 하나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책에서도 어슷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요츠바랑!》이라는 만화책을 우리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빙점》이라는 문학책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윤미네 집》이라는 사진책을 우리들은 어떻게 보듬고 있을까요. 틀에 박히거나 판에 박힌 눈썰미와 생각밭은 아니온지요. 차갑거나 딱딱한 마음결이나 손길은 아니온지요.

 누구나 삶을 꾸리는 모양새대로 책을 마주합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책을 붙잡습니다. 누구나 살림살이 일구는 결에 따라 책을 찾아 읽습니다.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포근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포근한 책입니다. 즐겁게 고운 삶을 가꾸는 사람들한테는 즐겁고 고운 책입니다. 땀흘려 일하고 신나게 어깨동무하는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한테는 땀과 신이 담긴 책입니다.
 





 (2)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라는 책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쓴 일본사람 고히야마 하쿠란 분이 있습니다. 고히야마 하쿠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라 하는데, 나라안에는 이분 소설책이 한 가지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책 하나, 수필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 하나 옮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그 대신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 전후 일본인이 잃어버렸던 가장 큰 미덕은 남에게 밥 먹었느냐고 걱정해 주는 말이다(212쪽).” 같은 이야기를 사이사이 곁들이며 ‘일본사람이 일본땅에서 이웃 일본사람하고 내 삶터 일본땅에서 가장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수필책 하나만 옮겨져 있습니다.

 나라안에 옮겨진 일본책을 읽다 보면 ‘일본사람은 오늘날 이렇게 뒤틀린 채 살아간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일본사람은 지난날 돈에 미쳐서 오늘날까지 바보스레 살아간다’고 하는 대목을 곧잘 만납니다. 이 책에서도 “도쿄에서 지하철을 타면 사람을 밀치면서 자리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까지 남을 밀치고 자리를 잡으려 한다(215쪽).”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학생이나 초등학생도 마찬가지요, 초중고등학생을 키웠거나 키우는 어버이라 하는 아줌마와 아저씨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거나 다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 밥그릇 챙기는 데에 바쁘고, 저마다 제 배속 채우는 데에 홀려 있습니다.

 고히야마 하쿠 님은 당신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한테 ‘우리 모두한테 꼭 한 번 주어진 고마운 선물인 삶을 왜 아름답고 즐겁게 꾸리면서 신나고 보람있게 나누다가 아쉬움과 미움 하나 없이 살가이 마무리하지 못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짤막한 글을 씁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억지스런 가르침이나 꾸짖음이 아닌, 당신 어버이가 당신한테 베푼 속깊은 사랑이 무엇이었는가를 톺아보는 글로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따분한 수다가 아닌, 당신 둘레 수수한 사람들이 당신한테 선사한 넓디넓은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글로 들려줍니다.

 작으면서 고운 책이요,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책이며, 조용하면서 산뜻한 책입니다. 이러한 책일 때에는 출판사에서 굳이 양장으로 꾸미지 않으면 한결 낫고, 더 값싸고 더 조촐하며 더 조그마한 판으로 묶어서 사람들 앞에 내보이면 훨씬 낫습니다. 새책방에 꽂히든 헌책방에 꽂히든 도서관에 꽂히든 사람들이 쉬 알아보지 못하는 크기와 짜임새가 될 수 있을지라도, 더욱 작고 수수하고 값싼 책으로 여미었다면 좀더 낫습니다. 글쓴이부터 스스로 돋보이고자 쓴 글이 아니었으니까요. 읽는이한테 반드시 이 글들을 읽히고 깨우치려고 소매를 잡아끌지 않으니까요.

 때가 되면 알아볼 책입니다. 마음이 닿으면 스스럼없이 집을 책입니다. 생각이 있으면 찬찬히 헤아리며 찾아볼 책입니다. 이쁘장해야 할 곳은 책껍데기가 아닌 종이에 박힌 글월입니다. 눈에 띄어야 할 곳은 책꾸밈새가 아닌 종이에 찍힌 글월입니다. 가난하기에 아름답고 가난하기에 사랑하며 가난하기에 두레를 합니다. 가난하기에 착하고 가난하기에 믿음직하며 가난하기에 손을 잡습니다.

 돈있는 사람이 되며 넉없는 사람으로 바뀌고, 돈있는 나라가 되며 얼빠진 나라로 굴러떨어지며, 돈있는 마을이 되며 멋없는 마을로 달라지는 우리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이라는 책 하나는 삶을 알차고 아름답고 애틋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은 바로 나부터 비롯하면서 씨앗이 퍼져 나갈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이 《계로록》 또는 《아름답게 늙는 지혜》 같은 책을 써냈듯이,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젊음과 아름다운 늙음을 마음껏 뽐내며 책 하나 이루어 냅니다. 남 앞에서 으스대는 젊음과 늙음이 아니라, 스스로 기쁨에 겨워 기쁨을 온누리에 솔솔 뿌리는 젊음과 늙음입니다. 또다른 일본사람 사하시 게이죠 님은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을 써내며 늙음을 마주하거나 맞이하는 젊음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따지고 보면 리영희 님이 쓴 《스핑크스의 코》 같은 책 또한, 늙음으로 달려가는 마당을 돌아보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음을 마음껏 드러내는 나이부터 우리 삶을 어떤 넋으로 가다듬으며 살아야 아름다울까를 일러 주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고운 삶에서 고운 말이 나오고, 고운 말을 들려주는 가운데 고운 책이 태어납니다. 따순 삶에서 따순 말이 나오고, 따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따순 책이 태어납니다. 좋은 삶에서 좋은 말이 나오고, 좋은 말을 펼쳐 보이는 가운데 좋은 책이 태어납니다.
 





 (3)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거듭 읽는 맛


 그리 두껍지 않아 금세 한 번 읽어내릴 수 있는 책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은 퍽 더디더디 읽어야 제맛입니다. 눈에 뜨이는 글 꼭지부터 차곡차곡 읽으며 마무리를 지어도 제맛이요, 마음에 와닿는 글을 여러 차례 되읽어도 제맛입니다.

 눈물이나 웃음 묻어나는 글을 식구들 앞에서 소리내어 읽어도 제맛입니다. 혼자 있는 방에서 홀로 소리내어 읽어도 제맛입니다. 찻집에서 말없이 읽어도 제맛이요, 전철이나 버스나 기차나 배나 비행기에서 한 꼭지 두 꼭지 읽어 보아도 제맛입니다.

 단락 하나 통째로 수첩에 옮겨 적은 다음, 수첩을 북 뜯어서 살가운 벗님한테 선물해 주어도 제맛입니다. 저마다 다 달리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는 책이로구나 싶습니다. 저는 제 가슴으로 촉촉히 젖어든 대목을 밑줄을 그으며 읽고 나서, 천천히 한 줄 두 줄 옮겨 적어 봅니다. (4343.4.1.나무.ㅎㄲㅅㄱ)


[14, 15, 83쪽] 집이 좁고 이불이 없어서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도 아버지와 한 이불에서 잤다. 그래서 나는 평소 아버지와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아버지 또한 내 마음을 잘 알았을 것이다 … 나는 50세가 되어서야, 훗카이도에 온 후로 낳은 다섯 자식을 아버지가 모두 손수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산파를 부를 형편이 못 돼 산기를 보이는 어머니를 봉당에 깐 멍석 위에 눕히고, 아버지가 손수 어머니의 가랑이 사이로 자식을 받았다고 한다. 산탕을 끓이고 산후 정리도 손수 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알았다. 행복이란 지위도 명예도 돈도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임을 … 내가 훗카이도 신문사에 취직이 결정되던 그날, 산골마을에 살고 있던 아버지는 밭일도 나가지 않고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우리 아들이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훗카이도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온 마을을 자랑하며 다녔다 한다.

[14쪽] 나는 늘 어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했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서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상인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바보 취급 했고, 책을 많이 읽은 탓에 교묘한 논리로 아버지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질투심도 많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의심하고 닦달했다.

[31∼33, 75∼76쪽] ‘고쿠코’라는 회사에서 만든 원고용지였다. 더 살 수도 있었지만 다 쓴 다음에 다시 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 참았다. 두 달 후에 다시 사러 가서 서른 묶음을 사는데, 가게를 지키는 중년 여성이 물었다. “이렇게 많이 사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세요?” 아직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설을 쓰거든요.” 도무지 폼이 나지 않았다. “어머, 그러세요. 정말 대단하네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산대의 직원에게 20% 할인해 주라고 특별히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내 몸속의 중심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원고용지의 가격을 깎아 준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또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가게에 갔더니 이사를 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 20여 년 동안 나와 면식을 가졌던 그 전무는 여전히 원고용지를 싸게 해 주었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 “난바 상점입니다.” 나는 “앗!” 하고 소리쳤다. 32년 간 내게 원고용지를 싸게 주었던 난바상점의 전무 난바 나츠코 씨의 목소리였다. 나는 건강하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에 밀려 도산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밝았다. 나는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달리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 “60년 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게를 이렇게 만들어 버리고는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쓴 글을 읽고 어깨의 짐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내가 그 문방구점을 하는 동안 유능한 작가를 하나 길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글 하나만으로도 내가 60년 간 그 가게를 경영한 보람이 있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36쪽]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처럼 거실 난로 곁에서 고향 이야기를 했었다. 아이즈 시절의 친구, 학교, 집 주변의 산이며 강이며 전답에 대해 그리고 부모형제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43, 45, 86∼87쪽] 나는 소설을 쓸 때 가능한 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을 배제하고, 설명조의 문장을 안 쓰도록 노력한다.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 모든 현상을 표현과 묘사만으로 제시하자고 늘 다짐한다. 가능하다면 읽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어떤 풍경이나 상황이 떠오르는 듯한 그런 문장을 만들어 내고 싶은데,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버지는 반론을 펼쳤다. “고등학교나 다닌다는 놈이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 나는 정달 (지구는) 둥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따지고 들었다. “너, 본 적 있어?”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봐.” 내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현기증이 일었다. 아버지는 간발의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보지도 못한 걸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 아냐.” … 나는 영화 각본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다른 소설을 집필 중이라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편지를 다섯 번이나 읽었다. 왜냐하면 기계로 친 글자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글씨였기 때문이다. 읽을수록 글자 한 자 한 자가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다이치 씨의 열의가 나에게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직접 손으로 쓴 글씨의 힘일 것이다. 다이치 씨가 전화가 아니라 손수 쓴 편지로 나에게 의논했다는 데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이것은 간단히 거절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설령 그것이 3천 엔밖에 안 되는 돈을 빌릴 때라 하더라도 직접 상대를 만나 부탁하는 것이 예의다. 상대가 규슈에 있건 미국에 있건, 거기까지 찾아가서 얼굴을 보이고 육성으로 부탁하는 것이 도리다 … 상대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무작정 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해 버릴 정도로 비상식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62∼63쪽] 어느 날, 갑자기 도쿄에서 편집자가 찾아오는 바람에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년필을 전당포로 가지고 갔다. 그 당시 월급이 5만 엔이었는데, 제대로 된 소설도 못 쓰는 주제에 만년필만은 10만 엔이나 하는 펠리칸, 쉐퍼, 몽블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연장으로 자신의 무능을 슬쩍 가려 보려 했던 것 같다. 세 개의 만년필 가운데 펠리칸과 몽블랑은 벌써 전당포로 들어가 있었기에 남은 쉐퍼를 맡겼다. 그 돈으로 원고를 의뢰하러 온 편집자와 술을 퍼마시고 밤중에는 집으로 갈 택시비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월급날, 먼저 맡긴 만년필의 이자를 들고 전당포로 갔다. 평소에는 웃음 한 번 보이지 않던 전당포 아주머니가 이자를 갚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부탁이 있는데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 하고 나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순간, 혹시 이자가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 아주머니가 창구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사흘 전에 서점에 깔린 나의 첫 저서 《데바》였다. “여기 사인 좀 해 주세요.”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숨이 딱 막혔다.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책에 사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필이면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전당포에서 사인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기뻤다.

[120∼121쪽] 어느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내가 사는 공단주택으로 돌아왔더니 아내가 웃으면서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 권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 안을 엿보았더니 《데바》가 댓 권이나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 보니, 아내는 매일 책을 팔러 다녔다고 한다. 이웃 동의 1층에서 4층까지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려고 남편이 쓴 소설인데 어떠냐고 하면서 행상을 했던 것이다. 강매라고 생각한 어떤 주부는 화를 내기도 했고, 신흥종교의 포교자라고 여겨 문도 안 열어 주는 사람도 있었따. 책을 들고 요모조모 뜯어보는 사람에게 가격을 말하자, 그냥 주는 게 아니냐고 하면서 책을 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닷새 만에 여섯 권이나 팔았어.” 아내는 밝게 웃었다.

[169쪽]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을 부동산업자에게 내놓으면 토지와 집을 합하여 1천 5백만 엔이라도 살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웃을 것이다. 토지에도 집에도 정신이란 것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물질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형성한다.

[195쪽] 꽤 오래전에 모유보다 분유가 좋다는 이상한 말이 퍼져 분유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얼마 후 역시 모유가 좋다는 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장사치들이 분유를 팔아먹으려고 정보를 조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기의 입과 어머니의 피부가 만나면서 오가는 마음이다.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207∼208쪽] 그로부터 49년이 지나 〈서리〉라는 글을 썼는데, 그 1년 후에 그 글을 읽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 기숙사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농가에서 자랐는데, 지금은 63세지만 당시에는 13세의 중학생이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그즈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는 매년 공고 기숙사 학생들이 서리를 한다는 걸 알고, 교장과 사감에게 항의하러 가려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어린 학생들이 서리 좀 하면 어떠냐고, 좀더 심으면 될 텐데 뭘 그러냐고, 애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러겠냐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리고 다음해부터 아버지는 기숙사 학생들을 위해 캐비지, 감자, 호박을 더 많이 심었어요.” … 17세 때의 나는 오로지 내 배 고픈 것만 생각했다. 농가야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정말 바보였다. 그런데 그 농가는 우리가 서리를 하리란 예상을 하고 더 많이 씨를 뿌리고 가꾸었다. 나는 숨이 막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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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
은종복 지음 / 이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45 ― 맑고 밝게 일하며 살고픈 풀벌레 한 마리
 : 은종복,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이름 :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글 : 은종복
- 펴낸곳 : 이후 (2010.4.1.)
- 책값 : 12000원



 (1)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를 생각하기란


 날이 포근하기에 아이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나왔습니다. 아이는 조금 걷다가 자꾸 넘어집니다. 걸음이 차츰 더디어집니다. 아이가 졸립다는 뜻이로군요. 아이를 품에 안습니다. 아이가 앞쪽을 보도록 안고 걷습니다.

 아이를 안고 걸어가면 참 힘듭니다. 팔과 등허리가 몹시 저립니다. 그러나 아이로서는 뒤쪽이 아닌 앞쪽을 보면서 안기고 싶겠지요. 아기수레를 안 쓰는 우리 식구는 아이를 걸리거나 안고 다녀야 합니다. 둘레에서 아기수레를 선물해 주거나 물려주겠다는 분이 여럿 있었으나 우리는 안 받았습니다. 아기수레를 밀며 다닐 때에는 아이가 더 다니고 싶지 않아도 어른 마음대로 다니려는 뜻이 있고, 아이가 다리힘을 기르기보다 쉽게 가기를 더 좋아해 버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아이를 안고 다니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터전 길은 고르지 않아 아기수레를 밀면 아이 몸에 더없이 나쁩니다. 아이는 제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야 하며, 아이 다리힘으로는 아직 힘들 때에는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 따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가 잠들 무렵 옆지기가 아이를 업습니다. 일찍 돌아가야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는 동안 어린아이 하나를 아기수레에 태우고 어린 두 아이를 걸리고 있는 엄마를 마주 바라봅니다. “진짜 힘들겠네.” 옆지기 입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목소리입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움직인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요. 천기저귀를 쓰고자 하여도 쓰기 아주 힘들겠지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기저귀를 쓸 때에도 만만하지 않을 테고요. 조금 큰 두 아이가 쫑알거리다가 저희 가고픈 대로 엇갈려 달리면 애 엄마로서는 죽을 노릇입니다. 아이 하나가 저 가고픈 대로 신나게 내달릴 때에도 붙잡기 얼마나 힘든데요.

 아이를 업고 안고 하며 집에 닿을 무렵 아이가 갑자기 깹니다. 낮잠을 잘 때이기에 두어 시간은 자야 하는데 어떻게 깨어납니다. 집으로 오니 말똥말똥 뛰어다니며 놉니다. 얼마 뒤 똥 한 번 푸지게 누고는 다시 신나게 놉니다. 엄마가 아이 똥을 치우는 동안 아빠는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마실을 마치고 금방 돌아온 탓인지 손빨래 비빔질을 하는데 팔뚝이 저려 힘겹습니다. 애벌 두벌 세벌 헹구며 물을 짜는데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따라 빨래를 그만두고 싶으나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 빨래를 이 자리에서 마치지 않으면 저녁나절 아이가 잠들 무렵까지 나올 빨래거리는 더 늘어날 테고 이튿날에는 또 생길 테니까요.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빨래를 하고 있자니, 다 마친 빨래를 옆지기가 들고 가서 빨래대에 널어 놓습니다. 모처럼 옆지기 몸이 괜찮아져서 집일을 도와주는구나 싶어 고맙습니다. 힘든 가운데 조금이나마 기운이 납니다. 양말과 아기 웃도리 둘을 마저 빨고 씻는방에서 나옵니다.

 아이는 아침에 치우고 낮에 치운 방을 새삼스레 어지르며 놉니다. 엄마도 아빠도 어질러진 방을 치울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그냥 그대로 둡니다. 모르는 누군가 본다면 참 게으른 사람들이라 여길 만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일 때부터 아이키우기를 해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집일이 얼마나 많고, 많디많은 집일은 그칠 틈이 없는 가운데, 날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나마 우리 아이는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 더 크면 종알종알 재잘재잘 말을 신나게 해대며 아빠나 엄마가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뜨개질을 한다든지 하면 이런저런 일 하지 말고 저랑 놀자며 팔뚝을 잡고 허리춤을 끌어안으리라 봅니다.

 다가오는 4월 1일,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에 나들이를 갈 생각입니다. 저랑 옆지기랑 아이랑 셋이 나란히 나들이를 갑니다. 이날 책방 〈풀무질〉에서는 책방 일꾼 은종복 님이 써낸 책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를 놓고 기림잔치를 벌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기림잔치에 함께한다면 다른 사람한테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데, 여태껏 책방 〈풀무질〉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잔치마당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 때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아 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른들은 모두 이 아이처럼 어린 나날을 보냈고, 어린 나날을 보낼 때에 ‘풀무질 책방 기림잔치’ 같은 잔치마당에 어버이와 함께 찾아가서 또래 아이들을 보거나 다른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누리를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면서 무럭무럭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은 당신 아이를 대안 초등학교에 보냈고 대안 중학교에 넣었습니다. 은종복 님은 아이가 학교를 안 다니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지만 아이는 또래 동무들하고 놀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무래도, 은종복 님이나 옆지기 님이나 집에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면서 즐겁게 놀아 줄 수 있는 터전이었다면 아이로서는 따로 (대안)학교에 가서 동무들과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안 품을 수 있습니다. 높은 뜻이든 낮은 뜻이든 진보 넋이든 보수 넋이든, 모두들 어른들 생각과 삶에 따라 꾸리는 하루하루이다 보니,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이 저희들 나름대로 좋다고 여기는 삶’을 아이한테 곧바로 물려주거나 함께하기보다는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기어 아이들이 보내는 여느 나날과 고운 삶을 따사로이 껴안지 못한다고 할까요. 제아무리 환경운동을 하고 무슨무슨 진보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가용을 못 버리듯, 아이를 옳고 바르게 키우는 자리에서도 돈을 더 벌지 않고서는 뜻있는 배움마당을 열지 못한다는 어려움 때문에 그만 아이들을 우리 어버이가 스스로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맙니다.

 ‘손그림 찍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민등록증을 거스르는 넋을 지키고 ‘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워야 하는 군인이 되지 않겠다는 얼을 가꾸는 우리 삶일 때에, 비로소 경부운하이니 4대강이니 하는 끝장 막개발을 비롯하여 국가보안법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주한미군 들을 거스를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맑고 밝은 이야기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이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되도록 책으로 내지 않고 쪽글로만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으나, 당신이 품으려는 맑고 밝은 넋을 더 너른 이웃하고 나누려는 뜻으로 책을 하나 여미기로 했다고 합니다.

 “책방 일을 하느라 돈에 눈먼 어른들이 벌이는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4쪽).”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돈에 눈먼 어른들한테 돈이 아닌 사랑에 흠뻑 빠져들자는 이야기를 건네고자 바지런히 쪽글을 쓴 〈풀무질〉 은종복 님입니다.

 은종복 님은 당신이 몸담은 환경지킴 모임에서 ‘풀벌레’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흔하디흔한 풀벌레이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 버린 풀벌레입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느긋하게 자랄 땅이 없거든요. 시멘트땅이요 아스팔트땅이니 풀이 자라지 못하고, 풀이 조그맣게라도 풀숲을 이루어야 풀벌레가 깃들 수 있는데, 풀벌레 하나 깃들 땅뙈기는 내버려 두지 않거든요. 건물을 세우고 가게를 들여 돈을 벌든지 아스팔트를 죽 깔아서 자동차 씽씽 달리도록 해야 한다는 도시이거든요.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살려 쓰면 내 마음도 아름다워지고 세상도 아름다워진다(6쪽).”는 생각을 품으며 쪽글을 꾸준히 가다듬기도 하는 풀벌레 은종복 님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우리 말’이 아니라 ‘쉬운 우리 말’이요, 동네 할머니들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수수한 우리 말’이며, 초등학교를 다니든 어린이집을 다니든 어린이들 누구나 알아차릴 만한 ‘가장 낮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부드러운 말’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말입니다.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하는 말이 아닙니다. 학교 좀 오래 다녀 가방끈 길다고 으스대지 않는 말입니다. 나라밖으로 다녀 본 티를 내겠다는 어설픈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따스하고 넉넉하고 어깨동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작은 책방 〈풀무질〉이라는 곳부터 ‘잘난’ 책방이 아닙니다. 〈풀무질〉은 참으로 못난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더없이 모자란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지없이 어설픈 책방입니다. 〈풀무질〉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책방입니다. 공안경찰이 〈풀무질〉 일꾼을 붙잡았을 때에 당신한테 들려준 말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42쪽).”처럼, 인문사회과학 책방 일이란 ‘돈 안 되는’ 일이니 몹시 바보스러운 책방 일입니다. 따로 인터넷으로 책을 살 수 있지 않으니 번거롭기까지 한 책방입니다. 무슨 경품이나 마일리지를 잔뜩 내붙이고 있지도 않으니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책방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못나고 모자라고 어설프고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번거롭고 멍청한 작은 책방 〈풀무질〉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못나기 때문에 따뜻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넉넉하며, 어설프기 때문에 착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푸근하고, 바보스럽기 때문에 믿음직하며, 번거롭기 때문에 싱그러운데다가, 멍청하기 때문에 꿋꿋합니다.

 책방 일꾼과 책손 사이에 높고 낮은 자리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같은 목숨과 또다른 목숨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랑과 고운 믿음으로 손을 맞잡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건전한 일”이라고 하는 “장사 잘될 술집” 아닌 “장사 힘든 책방”을 동네 한켠에서 자그맣게 하는 〈풀무질〉 일꾼들은, 다름아닌 작고 가난하고 모자라고 어설픈 가운데 착하고 살갑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마음을 땀흘려 일구자고 하는 뜻을 나눕니다.

 수험서를 사 가든 교재를 장만하든 잡지 하나 챙기든, 모두 어여쁜 빛줄기를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젊은 넋임을 돌아보면서 쪽글 하나 건네어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비추며 즐거이 살자는 뜻을 키우고픈 〈풀무질〉 일꾼들입니다. 무엇입네 뭐입네 하고 외치는 분들 목소리마냥 〈풀무질〉 일꾼 목소리는 신문 1쪽을 채우는 일이 없습니다. 풀벌레 한 마리가 우짖는 소리는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파묻히니까요. 아니,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에도 스러집니다. 그러나 풀벌레는 꾸준하게 노래를 합니다. 풀벌레 한 마리는 어마어마한 도시 한복판에서 자그마한 풀숲을 보듬으면서 햇살 한 줌 받아안는 마음결을 다부지게 일굽니다.
 















 (3) 되새겨 읽으며 아쉬운 글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은 〈풀무질〉 일꾼 은종복 님이 쓴 쪽글들을 갈래에 따라 새로 엮어서 나왔습니다. 은종복 님은 사람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게끔 짤막한 글을 써 왔지만, 책에서는 두어 꼭지를 하나로 묶으며 제법 길어진 글이 많습니다. 이에 따라 쪽글로 사람들하고 나눌 때에는 단출하면서 옹글던 글이 여러모로 헝클어지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은종복 님이 쪽글을 쓸 때에 마음을 깊이 쓰던 ‘우리 말 바르게 쓰기’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가운데 ‘것’이라는 말투는 346쪽짜리 책에서 자그마치 1000번이 넘게 나오고, ‘하지만’이라는 말투 또한 100번 가까이 나옵니다(‘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하지만’이라 적어야 할 말을 잘못 적는 말투입니다). ‘고통, 불안, 시작, 필요, 원망, 후회, 전체, 강제, 만족, 고민, 열심, 생활, 방향, 결국, 진정한, 통하다, 별, 단, 전혀, 대부분’ 같은 말투도 지나치게 자주 나옵니다.

 ┌ 내가 붙잡혀 간 것은 → 내가 붙잡혀 간 데에는
 ├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 이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다
 ├ 군대를 보내는 것을 보고 → 군대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 정작 팔리는 것은 → 정작 팔리는 책은


 다만, 은종복 님이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쓰고자 애쓴다 하여도, 쪽글마다 몇 군데씩 아쉬운 대목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책 한 권에 만 군데가 넘도록 얄궂은 말투가 깃들도록 흐트러지거나 엉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풀무질〉을 기리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을 때에도 ‘쉽게 쓴 낱말을 굳이 어려운 한자말로 고쳐 놓아’서 어이없다고 느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이든 이곳 일꾼 은종복 님이든 ‘그냥저냥 흔한 책을 팔’거나 ‘이냥저냥 흔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흔하지 않은 넋’을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안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왜 일부러 더 힘들게 글을 가다듬고 짤막한 쪽글을 써 왔는지, 왜 이 짤막한 쪽글을 쓸 때마다 은종복 님은 더더욱 뼈를 깎듯 애쓰면서 글다듬기를 하고 새롭게 말을 배우려고 했는지를 못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좀 어줍잖은 글이라 할지라도 좋은 넋과 훌륭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풀벌레 은종복 님이 굳이 더 마음써서 곱고 맑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종복 님 스스로 또이름을 ‘풀벌레’라고 붙이는 마음처럼, 쪽글 하나마다 풀벌레다운 얼과 기운을 실어서 이웃하고 함께하려는 사랑이 있습니다. 책을 엮는 일꾼들은, 또 풀벌레 은종복 님 글을 다루며 싣는 매체 일꾼들은, 글 하나가 그냥 나오는 글이 아니요 글 하나에 머리로만 굴린 이야기가 아닌 몸으로 부대끼며 삭여낸 이야기가 담기는 흐름을 짚어 줄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라는 책을 반갑고 기쁘게 집어들어서 널리 나누는 참뜻을 깨달으면서 지식쌓기 책이 아닌 삶 다스리기 길동무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4343.3.30.불.ㅎㄲㅅㄱ)


[8, 53쪽]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돈에 눈먼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연을 더럽히고, 아이들 목숨줄을 조이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강을 파헤치고, 핵무기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이럴수록 가난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작은 동네 책방을 살려야 한다. 스스로 마음밭을 맑고 밝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 “큰 기업에서 일억 원을 내는 것보다 나같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만 사람이 만 원씩 내는 게 훨씬 나아요. 큰 기업에서는 한꺼번에 돈을 내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품삯을 조금 올려 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지요. 그런 기업들이 돈을 내는 것은 이름값을 높여서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생각도 들어 있지요.”

[17, 19, 41∼42쪽] 헌법에 쓰여 있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 땅에서 인문사회과학 책방도 다른 많은 진보 모임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이 휘두르는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큰 책방이나 인터넷서점은 단지 돈을 받고 파는 사이로 머물지만,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며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려는 진보 공동체다 … 그때 나를 조사하던 수사관에게 내가 물었다. “이런 책들은 일반 큰 책방에도 모두 팔고 있던는데, 그곳 대표는 왜 조사하지 않는 거죠?” “그들은 단지 돈을 벌려고 책을 파는 것이고, 당신들은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거칠었고, 억지로 높임말을 썼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또 학생들한테 그 내용을 전할지 안 전할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은 학교 다닐 때 시위 전력도 있고 지금도 학교 앞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벌받고 여기서 나가면 그런 돈도 안 되는 사회과학 서점은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 봐요. 좀 건전한 거 있잖아요. 요즘 학생들 술 많이 마시던데 술집 하면 좋겠네요.”

[24, 54쪽] 햇살 한 줌, 빗물 한 방울, 눈송이 하나 볼 수 없는 땅속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책방 한 귀퉁이에 앉아 늦가을, 책방 밖으로 눈발 날리듯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펐다 … 나는 사람이 사람을 못살게 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을 더럽히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27, 44, 68쪽] 자본가들은 자기가 만든 물건을 팔려고 약한 나라를 끊임없이 쳐들어간다. 미국은 동북아시아 패권을 누리거나,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을 만들려고 한반도 북녘을 쳐들어가려고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 나 같은 책방 일꾼이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가. 아니다. 대운하를 만들어 자연과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고, 백성들이 먹고 죽을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미국 소를 자기들 마음대로 들여오는 이명박 정권이 이 나라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 어느 날 열한 살 난 내 아이가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물었다. “아빠, 강남에 있는 땅들은 강북에 있는 땅보다 비싸? 맨날 땅값이 올랐다는 글만 나와?”

[37, 39, 66, 128쪽] 아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은 모두 어른들 때문이다. 나 같은 어른들이 좀더 편하게 살려고 자동차를 수없이 만들어 공기를 더럽히고, 온갖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물을 썩게 하고 땅을 더럽혀서 그렇다 … 나는 돈에 눈먼 사람들이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볼 때까지 이렇게 해마다 하나씩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끊으려 한다. 이것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며 … 아이들이 학교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 수는 없나. 학교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배우는 놀이터가 될 수는 없나 … 일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 이곳저곳 다른 배움터를 다니다가 밤 아홉 시 넘어 들어오고 밤 열두 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든다.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또 좋은 직장을 찾으러 공부해야 하고, 일자리를 얻은 뒤에는 또 쫓겨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이 행복할 것인가. 끝없이 행복을 뒤로 미루며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고 내 아이에게 강요하기는 싫었다.

[51, 55, 71쪽] 내 아이를 살리자고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죽이러 군대를 보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 권정생 할아버지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맑고 밝은 부자였지요. 다시 태어나면 몸이 튼튼한 젊은이로 나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아이를 낳고 작은 텃밭을 일구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진짜 부자는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가난하게 살아야 세상이 맑고 밝아진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살맛나는 마을을 만들 수 있다.

[58, 93, 106, 112쪽]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랑 걸으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종복아, 엄마는 종복이랑 이렇게 걸어가면 참 기쁘다. 이렇게 멋지고 듬직한 아이가 정말 내 배속에서 나온 건지 믿어지지 않아. 그냥 종복이란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 … “또 어디 갈 데 없냐?”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갈 곳을 미리 물어 오신다. 아버지는 책방에 도움이 되려고 당신 몸을 아끼지 않는다. 당신 몸 아끼지 않고 아들이 잘사는 것을 바라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 “내 머리엔 10원도 안 들어갔다.” 학교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을 할 때 어머니는 꼭 이런 표현을 쓴다 … 어릴 때 가정통신문에 어머니 학력 쓰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무학’이라고 쓰면서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배웠다.

[114, 125, 131, 132, 134, 136쪽] 조금 배고프게 살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아이에게 찾아 주고 싶었다 … 내 아이가 6학년이었을 때도 구구단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별 걱정하지 않았다. 구구단은 잘 못 외우지만 생각이 참 깊다 … 아이들을 공부 잘하는 기계로 만들려 하니, 지금 일반 학교는 수용소가 되고 선생은 수용소장이 되고 있다 …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떠받드는 세상에선 아이들이 미칠 수밖에 없다 … 어른들이 돈에 눈먼 삶을 사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 아이들이 올곧게 잘 배우려면 아름답고 살맛나는 마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140, 144, 162쪽] 모두들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정말 살려야 할 것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마을이다 …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자연에서 마음껏 놀 수 있을까. 어른들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 함께 공차기를 하고 연을 날리고 썰매를 타고 구슬치기를 하자 … 아이들이 좋은 생각을 하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좋은 생각을 해야 하고, 아이들이 좋은 책을 읽기 바란다면 어른들이 먼저 좋은 책을 손에 들어야 한다.

[200, 206, 214쪽] 군비 증강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줄까. 군비 증강은 결국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 우리 나라도 이것을 본떠 우리보다 더 작은 나라들을 괴롭힌다.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꼬마 제국주의 나라가 되고 있다 … 더 무서운 것은 살인무기는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평화는 무기를 버리고, 없애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지난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사람들 마음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지 의문이 들면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들을 떠올렸다.

[266, 270쪽] “파리야! 네가 내 밥에 앉아 밥을 먹으니 내가 싫구나. 여기에 네 밥이 있으니 내 것 말고 네 것을 먹으면 좋겠다.” …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소로우의 생각을 싫어했다. 사람 하나하나가 나라가 하는 일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소로우의 생각은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세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을 먼저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276, 310, 323쪽] 지율 스님은 이 세상에 난 모든 목숨붙이를 아끼고 보듬고 섬기는 마음을 지녔다 … 황우석을 떠받들고 지율을 내치려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오로지 1등을 하려는 마음,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면 남이야 어떻든 생각하지 않는 마음,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마음은 아닐까 …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들 싸움으로 맑고 밝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아파하고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민중의 세계사》를 꺼내 읽는다 … 미국도 인디언을 총칼로 죽인 뒤에야 자신의 나라를, 야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또다른 자본을 수출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힘이 없거나 임금이 싼 사람들을 고용하여 착취하고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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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쓸 때에


 글을 쓸 때에 나는 꼭 한 가지를 생각한다. 이 글을 쓴 나부터 내 글을 읽고 활짝 웃거나 꺼이꺼이 울 만하지 않다면 굳이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때로는 빙그레 웃을 글을 쓰고, 어느 날에는 조용히 눈물지을 글을 쓸 테지. 그러니까, 나부터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이 되어 내 글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느껴야 비로소 글다운 글이라는 이야기이다.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마음쓸 까닭이 없다. 내가 알아줄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어야 한다. 내가 알아주는 아름다운 글일 때에는 나는 웃음어린 목소리나 눈물젖은 목소리로 내 삶을 내가 왜 글로 담아내어 읽히려 하는지를 들려줄 수 있다. (4343.3.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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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소년한길 유년동화 6
도이 카야 글 그림, 김정화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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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그림책에는 참사랑을 담습니다
 [그림책이 좋다 76] 도이 카야,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책이름 :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글ㆍ그림 : 도이 카야
- 옮긴이 : 김정화
- 펴낸곳 : 소년한길 (2002.6.10.)
- 책값 : 6500원



 (1)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


 온누리에 나오는 모든 책이 모두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만든 책이 있다고 느끼고, 나날이 돈을 바라보는 책이 차츰 늘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돈바라기 책이라 하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다만 책다운 책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엠에스지를 넣었느냐 안 넣었느냐를 놓고 아웅다웅이지만, 이에 앞서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얼마나 먹고 자란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깃들었느냐를 돌아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사다 먹는 밥거리 가운데 밥거리다운 밥거리란 없다고 할 만하다는 흐름하고 맞닿습니다.

 아주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가 있습니다. 며칠 앞서 우리 세 식구가 서울에서 인천까지 자동차를 얻어타고 돌아온 적 있습니다. 생태와 진보를 바라는 분들 자그마한 모임자리에서 우리 옆지기가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해서 찾아갔다가 전철이 끊길 무렵이 된 탓에, 인천(부개동)에서 자동차를 몰고 온 분이 우리 식구를 집 언저리까지 자동차로 태워 주었습니다.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세 식구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찻길에서 배탈이 났습니다. 전철을 탈 때에는 사람들한테 찡기고 낑기며 힘들기는 하여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는데,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숨조차 쉬기 어려워 어지러웠습니다. 아이는 집에 닿고 보니 차에서 똥을 싸서 기저귀를 적셨고, 옆지기는 이튿날까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지냈습니다. 저라고 몸이 나을 구석이 없으나, 집살림을 하느니 바깥일을 하느니 하면서 아픈 몸을 겨우 붙들어 세웠습니다.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마다 고맙다는 마음이지만, 고마운 한편 제발 10분 넘게 달리지 않는 얻어타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쩐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면 몸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날 사람들치고 자동차를 타며 멀미를 하거나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어지러울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고속버스를 타지 못했고, 이제는 고속버스를 타지만 한 번 타고 나면 며칠 몸앓이를 할 뿐더러, 택시이든 고급자가용이든 작은자가용이든 자동차라는 탈거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꽤 많은 짐을 한꺼번에 멀리까지 제법 빨리 옮겨 주는 자동차라 하지만, 제 몸과 삶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제 몸에 잘 안 맞기 때문에 되도록 바깥에서는 밥을 사먹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몸에 거의 안 맞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어타기조차 싫고 자가용을 장만하기는 죽기보다 싫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빨래기계를 쓰면 손일을 덜고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넉넉히 낸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손빨래를 하는 기쁨과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더러 손빨래를 하는 동안 옷을 한결 아끼면서 나중에 ‘빨래기계가 낡아서 버려야 할 때에 쓰레기를 만드는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빨래기계를 쓰면 전기와 물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는데요. 전기를 아예 안 쓰고 물은 훨씬 적게 쓰면서 우리 식구 옷가지를 좀더 사랑하고 아끼는 손빨래는 제가 두 눈을 감고 죽는 날까지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이런 삶이 고스란히 제 책읽기로 이어집니다. 손을 쓰고 몸을 놀리며 땅하고 가까이 맞닿고픈 삶이 제가 좋아하는 책을 찾는 눈길로 옮아갑니다. 몸이 제아무리 도시에 깃들어 있다 할지라도 땅을 사랑하는 넋이 스민 책이 좋습니다. 산골마을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하는 얼이 깃든 책이 좋았고, 골목동네 자그마한 가난뱅이 집에 살면서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에다가 꽃과 나무와 풀을 사랑하고 아끼는 책이 반갑습니다.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키우면서 옆지기나 저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책’을 따로 읽을 틈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든 보육원에든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기 때문에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붙어 지내야 하니까요. 우리는 돈을 내고 아이를 또래 동무하고 억지로 사귀도록 내몰지 못합니다. 돈이 없는 탓도 있다지만, 돈이 있었다고 해도 아이를 굳이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안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키우기란 얼마나 즐겁고 신나고 아름답고 멋진데요. 다만, 참말 힘들고 고되고 괴롭고 벅찹니다. 즐거우면서 힘들고, 신나면서 고되며, 아름다우며 괴롭고, 멋지며 벅찹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옆지기는 퍽 자주 “아주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따로 말로 나타낼 줄을 모르지만 “아이가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아빠가 좋아한다는 책이라 하지만, 정작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 아이 바로 너를 돌보면 다 알 수 있는 지식과 생각이 담긴 책이니, 굳이 이런저런 책을 읽기보다 바로 너하고 어울리면 아빠가 몸으로 깨우치고 받아들이고 곰삭일 수 있음’을 배우곤 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팔이 빠지거나 허리가 쑤시는 가운데, 날마다 치워도 끝이 없을 뿐더러 나날이 아이 옷가지 빨래가 넘쳐나는 이 모든 고단함이 곧바로 아이키우기에서 얻는 보람이 됩니다.

 예전에 혼자 살 때에도 아이들 그림책을 참으로 신나게 사들이며 혼자서 즐겁게 보았고, 오늘날 세 식구 살아가며 아이들 그림책을 그지없이 반가이 장만하며 세 식구 나란히 봅니다. 지난날에 아이들 그림책을 신나게 사들이던 때에는 아이들 그림책이란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부터 보고 어른들이 ‘꼭’ 함께 보면서 ‘아이보다 더 깊고 넓게’ 배우고 익히고 사랑할 책이라고 느꼈고, 오늘날 세 식구 복닥이며 아이들 그림책을 펼칠 때에는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책과 아이가 쳐다보지 않는 책이 갈리는구나. 왜 갈릴까?’ 하고 돌아보면서, 아이가 콧방귀조차 잘 안 뀌는 책에는 아이가 이렇게 고개를 돌릴 만한 까닭이 있음을 차츰차츰 깨닫습니다. 그림만 이쁘장하다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으며, 그림이 엉성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림 하나하나에 너른 사랑이 담겼을 때에는 아이는 어김없이 알아챕니다. 그림이 알록달록하더라도 아이가 달가이 받아들이지만 않으며, 그림이 수수하다 할지라도 그림마다 깊은 마음이 스몄을 때에는 아이는 아주 좋아하고 자주 펼쳐 봅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중에는 앙증맞은 손으로 그림책을 끄집어 내서 아빠나 엄마 앞에 집어던졌고, 조금 더 큰 뒤에는 아빠나 엄마 무릎에 그림책을 들고 털썩 주저앉아 얼른 펼쳐 달라고 옹알거리고, 이제는 혼자 책을 펼쳐서 한참 들여다보곤 하며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되풀이 넘기곤 합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며 아이한테 참으로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그동안 제가 장만한 그림책들은 거의 다 우리 아이 또한 퍽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소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다른 아이를 바라볼 때’보다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길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몸소 아이를 낳아 길렀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루 내내 벌써 스무 달째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아니, 스무 달째 아이와 하루 내내 붙어 지냈다기보다 스무 달째 아이하고 얽힌 모든 일을 엄마랑 아빠랑 모두 손으로 보듬고 몸으로 부대끼면서 마음으로 사귀어 온 나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린이책을 어린이만 보도록 하는 책이 아니라 엄마 아빠 된 사람을 비롯하여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뿐 아니라 모든 어른이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날 이원수 님과 이오덕 님부터 줄곧 외친 까닭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이란 책 하나로 어린이와 어른을 잇는 좋은 다리이거든요. 아름다운 고리이거든요. 멋진 놀잇감이거든요. 훌륭한 배움터이거든요. 넉넉한 보금자리이거든요. 재미난 이야기보따리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손길이거든요.

 어른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이책을 돈바라기 눈길과 몸짓으로 만드는 어른들을 마주할 때에는 몹시 싫습니다. 몹시 딱합니다. 몹시 슬픕니다. 어린이책이란 돈이 아닌 사랑으로 빚을 책이고, 어린이책부터 사랑으로 빚는 매무새를 갈고닦아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크면서 어른이 되어 어른책을 빚을 때에도 돈바라기 어른책이 아닌 사랑바라기 어른책을 일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림과 뜻만 좋은 어린이책을 넘어


 그림책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는 어린 오누이가 목도리를 놓고 다툼질을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오누이한테 뜨개 목도리를 선물해 준 할머니가 슬기로운 생각을 짜내어 서로를 더욱 애틋하게 묶어 준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고운 그림결에 따라 재미나고 살가운 이야기를 펼치는 좋은 어린이책입니다. 노란빛 목도리는 노란빛대로 어여쁘고 빨간빛 목도리는 빨간빛대로 어여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코앞에 마주하는 좀더 나아 보이는 빛깔에 끌리면서 시샘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시샘을 다스리며 한결 사랑스러운 길로 나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차근차근 풀어 보입니다.


.. 치프와 초코는 강아지 오누이입니다. 오늘 할머니께서 선물을 보내 주셨어요. 오빠 치프에게는 노란 목도리를, 여동생 초코에게는 빨간 목도리를 보내셨습니다. 치프는 노란 목도리를 보고 좋아하며 말했어요. “이 목도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말이 색깔이야. 치프는 목도리를 목에 둘렀습니다. 초코는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가 더 멋져 보였어요. “나도 달걀말이 색깔 목도리가 좋아. 바꿔 줘, 바꿔 줘.” 엄마가 말했어요. “어머, 초코의 목도리는 빨갛고 귀여운 딸기 색인걸.” ..  (2∼4쪽)


 그림책이 되든 어린이책이 되든 어른문학책이 되든 마찬가지인데, 기나긴 말을 줄줄줄 늘어뜨리면서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을 들 수 없습니다. 짤막한 한두 줄로 느낌과 생각과 삶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에서도 할머니가 뜨개 목도리를 선물한 이야기를 짤막히 보여주고, 동생이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를 더 좋아하지만, 엄마가 잘 달래 주는 모습을 단출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첫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한테나 엄마한테나(또 이 그림책에는 나오지 않는 아빠한테나) 큰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누이한테 선물한 목도리는 할머니가 한 땀 두 땀 애써 뜨개질을 해서 일군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몇 푼으로 치른 목도리가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넋으로 애틋하게 뜬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해요. 엄마도 아이도 “할머니 고맙습니다.”라든지 “우와, 이 목도리를 손으로 떴다구요?”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비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첫 대목에서 이런 대목이 비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두 오누이가 노란빛과 빨간빛을 보고 다툼질을 하겠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시샘하며 다툼질을 하더라도 ‘할머니 사랑 손길’을 돌아보는 매무새를 한 줄쯤 살며시 밝힐 수 있었다면, 이 그림책은 더없이 따스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책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초코는 다시 노란색 목도리가 갖고 싶어졌어요. “바꿔 줘, 바꿔 줘.” “싫어. 나도 노란색이 좋단 말이야.” 초코가 울기 시작했어요. 치프는 하는 수 없이 목도리를 바꿔 주었어요.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  (10∼11쪽)


 아이들은 둘이 저마다 받은 목도리에 얼마나 깊고 짙고 너른 사랑이 담겼는지를 먼저 찬찬히 살피면서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려’ 했기 때문에, 할머니 댁으로 찾아가면서도 끝없이 다툼질을 합니다. 더 좋아 보이는, 또는 더 좋은 물건을 오빠한테 주거나 동생한테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오누이가 아니라,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겠어!’ 하는 마음만 부글거립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라지만, 왜 오누이이든 형제이든 자매이든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되기 어려울까요. 아이들이 이런 마음을 타고났기 때문인가요. 우리 어른이 잘못 가르친 탓인가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른들 스스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은 것’을 스스럼없이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없는 탓인가요.


.. 할머니네 집이 바로 눈앞이에요. 꽃밭에는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예뻤습니다. 하지만 노란 꽃밭을 보니 치프는 걱정스러웠어요 ..  (16∼17쪽)


 오누이는 할머니 댁에 와서도 “할머니, 선물 고마웠어요!” 하는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오누이가 좋아한다는 땅콩빵을 먹으면서도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기에 바쁩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도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며 열어 보기 바빴을 뿐이듯, 밥상머리에서도 “할머니도 와서 함께 먹어요!” 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두 오누이 목도리 실을 끌러 새로 뜰 때까지도 할머니를 부르지 않고 저희끼리만 놀았습니다.

 그림책 줄거리와 흐름과 끝맺음을 돌아보건대, 이렇게 철없는 오누이들 다툼질을 할머니가 잘 마무리지어서 다시금 사이좋은 오누이가 되었다고 ‘가르침’을 베푸는 얼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오누이부터 오누이를 기르는 아빠엄마 모두 옳게 살아간다고 하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밝게 뛰노는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사랑이나 믿음이나 나눔이란 귀퉁이 한 자락에도 깃들어 있지 않아요.

 내 밥그릇에만 눈길이 머뭅니다. 내 손아귀에만 눈썰미를 둡니다. 내 몸치레에만 눈높이를 맞춥니다. 슬픈 우리 삶이 어여쁜 그림책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 치프와 초코는 할머니가 만든 땅콩 빵을 아주 좋아해요. 목도리 일은 까맣게 잊고 산처럼 쌓인 땅콩 빵을 먹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아까 둘이 왜 울었는지 듣고는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할머니는 둘의 목도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  (20∼21쪽)


 문학책에서야 어찌어찌 다루어도 된다고 하지만, 뜨개질을 아무리 잘하는 분이라 하여도 목도리 둘을 후딱 뜰 수는 없는 노릇인데, 어찌 되었든 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땅콩빵을 먹는 짧은 동안에 할머니가 목도리 둘을 ‘짠!’ 하고 만들어 냅니다. 아이들은 노랑과 빨강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목도리를 새로 받아들고는 기뻐합니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목도리요, 그냥 후딱 뜰 수 있는 목도리인 듯 여깁니다.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그림결이며 오누이가 이래저래 시샘하고 다툼질을 하다가도 잘 끝난다는 줄거리라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림책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두 오누이를 불러 “얘들아, 이 목도리란 말이지, 할머니가 너희 오누이를 사랑하면서 한 땀 한 땀 떴단다. 노란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뜻과 사랑을 담고, 빨간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넋과 믿음을 담았지.” 하면서 노란 목도리는 얼마나 노랗게 아름답고 빨간 목도리는 얼마나 빨갛게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나 싶어 아쉽기도 합니다. 또한, “할머니가 너희한테 노란 목도리와 빨간 목도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말도 안 하고 주어서 다투었구나. 할머니가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구나.” 하면서 할머니가 참다운 슬기를 뽐내는 얼거리로 뻗어나가지 못해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만큼으로 마무리짓는 그림책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만큼으로 이루어 낸 그림책이어도 반갑습니다. 이만큼이나마 했어도 고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이만큼이나 돌아보거나 살필 겨를이 없이, 몹시 바빠맞도록 돈벌이에 매여 있는 탓입니다.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는 할머니를 기쁘게 맞이할 딸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아쉬운 우리 삶에 걸맞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그림책이라 할 터이나, 아쉬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예쁘고 곱고 재미나고 뜻있기까지 한 그림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겠다고 봅니다.

 이 그림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으며 더 너른 따스함을 꽃피울 수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이야기감을 더 좋은 그림틀에 실어내면서 더 따사롭고 넉넉한 품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를 껴안고 어루만지는 훌륭한 그림책을 새삼 기다리고 손꼽아 봅니다. (4343.3.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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