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에게 고한다 세트 - 전5권 (일반판)
데즈카 오사무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전쟁으로 모두 빼앗겨도 다시 사랑을 꿈꾸는 사람
 [살가운 만화 51] 데즈카 오사무, 《아돌프에게 고한다 1∼5》



- 책이름 : 아돌프에게 고한다
- 글ㆍ그림 : 데즈카 오사무
- 옮긴이 : 장성주
- 펴낸곳 : 세미콜론 (2009.9.28.)
- 책값 : 한 권에 9000원씩



 (1) 명품이 떠도는 나라에서


 요즈음, 그러니까 2010년을 코앞에 둔 요 몇 해 사이에 새로 문을 연 가게가 많은 골목을 거닐 때에는 ‘걷는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1990년대부터 문을 연 가게가 많은 골목을 거닐 때에도 ‘걷는 맛’은 잘 못 느낍니다. 1980년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간 가게가 깃든 골목에서는 어느 만큼 ‘걷는 맛’을 느낍니다. 1970년대나 1960년대에 이루어진 가게와 집이 깃든 골목에서는 발걸음을 아주 늦추면서 ‘걷는 맛’을 그지없이 느낍니다.

 1950년대나 이에 앞선 일제강점기부터 이루어진 골목을 거닐 때에는 오래도록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걷는 맛’이 아닌 ‘사는 맛’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들 땀내음과 손자국이 깊이 배인 터전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고작 쉰 해나 서른 해밖에 안 된 길과 집을 만나면서도 가슴이 뿌듯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무를 바라볼 때에도 스무 해나 서른 해쯤 키가 자란 나무를 보면 가슴이 뿌듯한데, 우리는 숱한 전쟁과 식민지와 봉건제도 탓에 백 해뿐 아니라 즈믄 해나 두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껴안기 몹시 힘듭니다. 기껏 만난다고 해 보아야 천연기념물이라 하여 줄기를 만질 수 없는 나무뿐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받아들일 오래된 나무가 없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요, 온삶이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동네가 없는 이 나라 한국입니다.


..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은 비천한 민족이라며 박해당한다던데, 일본도 똑같아요. 전 일본인이 되려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싸워야 해, 아돌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단다. 울상 짓고 멈춰 있으면 안 돼. 차별과 탄압에 맞서서 싸워야 해.” ..  (1권 146쪽)


 제가 태어나고 어린 나날을 보냈으며 오늘 하루도 옆지기와 아이하고 살림을 꾸리는 인천이라는 곳은 ‘명품도시’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품도시’라는 이름은 인천만 내걸고 있지 않더군요. 창원, 구미, 아산, 수원도 내거는 한편, 서울 서초구와 새만금명품복합도시까지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는 구청임에도 스스로 명품도시라고 내세우는 모습이 남다르다고까지 할 텐데, 그만큼 쓸 돈과 쓰는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나라 곳곳에서 내세우고 있는 명품도시란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어떠한 곳을 두고 명품이라 할 수 있을까요. 도시는 명품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어떠한 도시가 되어야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 가운데 명품이라는 이름이 붙는 곳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에서 명품이라고 내거는 곳치고 예부터 이어온 문화나 역사나 예술이 조금이라도 깃들어 있는 곳은 없다 할 만합니다. 아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높직한 주상복합 아파트나 건물을 올려세우는 도심지가 있는 곳이 명품도시인 듯 여깁니다. 돈으로 올려세우면 명품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며, 돈을 발라 놓으면 명품도시가 이룩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가꾸는 명품이란 없다고 여기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일구는 명품도시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명품’이라고 할 때에는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살아숨쉬는 아름다움이 아닌 돈을 많이 들인 값어치에 치우쳐 있으니, ‘도시를 가리켜 명품이라 하는 자리’에서도 똑같을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다부진 속알을 살피지 않는 우리 삶인데, 공무원과 개발업자들이 겉치레로 명품을 외치는 일은 나올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 “여긴 부랑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오래 계실 필요 없습니다.” “잠깐 멈춰요. 좀 걷고 싶은데, 안 될까요?” “무슨 말씀을, 여긴 극히 위험한 곳입니다! 부랑자들이 우글거립니다!” ..  (2권 116쪽)


 그렇지만 나라밖 마실을 나가는 사람들은 유럽땅을 비행기로 밟으면서 ‘역사 깊은 모습’에 입을 쩍 벌립니다. ‘역사 깊은 골목’과 ‘역사 깊은 집’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합니다. 수없이 사진으로 찍고 글을 쓰며 서로서로 느낌을 나눕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어느 도시이건 시골이건 이 땅에 걸맞게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에는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는 이들이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ㅅㄱㅇ대학을 나왔다손치더라도 옳은 길을 가지 못한다고 나무라는 우리 스스로, 수수하고 투박할지라도 옳은 길을 가고자 힘을 모두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 모습을 사진으로 꾸밈없이 담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 이 땅 삶과 사람을 꾸밈없이 글로 담아내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외치지만 우리 스스로 작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적게 벌고 적게 쓴느 작은 사람으로는, 아니 굳이 많이 쓰고 자시고 할 까닭 없이 알맞게 벌고 알맞게 쓰며 알맞게 나누는 사람으로는 살아내지 못합니다.


..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그 정도로 철저하게 교육하면 좋겠어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을 한 명도 남김없이 쫓아내려면, 아이들한테도 유대인을 죽이는 것 정도는 가르쳐야 해요.” “흥, 그런 식으로 교육했으니까 나처럼 형편없는 살인자가 나온 거야!” “당신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죠? 그놈들은 냉혹하게 부녀자들을 살해했어요, 수백 명이나. 유대인을 죽이는 건 올바른 일이에요.” ..  (5권 220쪽)
 





 (2) 경쟁이 떠도는 나라에서


 두 살이 된 아기는 곧 세 살이 됩니다. 세 살이 되면 네 살이 다가오고 머잖아 다섯 살이 될 테며, 여섯 살과 일곱 살도 금세 찾아오리라 봅니다. 벌써부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다음을 걱정할 일은 없다 할 만하지만, 걱정할 일은 없어도 생각할 일은 많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기 앞서까지 우리 식구는 예방주사를 맞히지 않을 생각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맞힐 텐데 어떡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앞서 제도권학교를 보내느냐 마느냐를 생각해야 하며, 아이한테 어떤 말을 가르쳐야 하는지와 아이한테 영어를 언제 어느 만큼 가르칠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 또래는 죄 학원에 가고 없을 텐데 또래를 어떻게 사귀거나 어울리도록 할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대안학교에 넣을 생각이라면, 마땅하고 알맞춤한 대안학교가 있는 동네로 우리 살림을 아예 옮겨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해야 합니다.


.. “잘 들어라, 아돌프. 히틀러 소년단에선 유대인이 세상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 쓰레기인지 낱낱이 가르쳐 준단다.” “우리들의 우정을 갈라 놓지 마세요, 제발!” “……” “교장 선생님, 아돌프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아돌프 아버지는 이미 저 아이의 아돌프 히틀러 슐레 입학 수속을 끝냈습니다. 일단 입학하고 나면 유대인 친구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 겁니다.” ..  (1권 204∼205쪽)


 나중에 아이 스스로 바란다면 제도권학교라도 얼마든지 보낼 생각입니다. 아이 스스로 아무런 학교를 바라지 않는다면 아무런 학교로도 보내지 않을 생각이며, 다만 대안학교를 알아보고 한번 겪어 보도록 한 다음 그만두더라도 그만두라고 할 생각입니다.

 대안학교라 할지라도 경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도권학교라 할지라도 경쟁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한번 보낼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나 옆지기가 나온 예전 학교를 비롯하여 앞으로 우리 아이가 다닐 학교라 한다면 ‘배우는 곳’, 이른바 ‘배움터’여야지, 싸우는 곳인 ‘싸움터’나 ‘겨룸터’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이야기는 서로 겨루라는 지식이 아닌 서로 도우라는 앎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깨동무를 하라는 배움터여야지, 나 홀로 잘되거나 이름을 높이라는 겨룸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왼손은 죽을 때까지 마음대로 못 쓴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럼, 앞으로도 쭉 전쟁터에 안 나가도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에코 씨1 손을 못 쓴다는데 기뻐하란 말입니까?” “죄송해요. 그치만 전쟁터에 끌려가면 왼손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목숨을 건진 셈이잖아요. 도게 씨, 아버지처럼 덧없이 목숨을 버리시면 안돼요.” ..  (3권 75쪽)


 그러나 우리 세 식구 살아가는 오늘 하루에도 숱한 겨룸과 다툼이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집에서 서로 복닥복닥 지내고 있으니 바깥일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할 만하지만, 오늘도 새벽부터 지옥철은 끝없는 사람물결로 악다구니판이 이루어졌을 테며, 서울을 한복판에 놓고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여느 노동자는 여느 노동자대로 온몸이 지치도록 시달리고 있겠지요.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시험점수로 시달리며, 대입 턱걸이인지 미끄러짐인지를 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테고, 새로 입시지옥에 뛰어들 아이들은 다가올 겨울방학이 방학 같을 수 없습니다.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닌, 더 돈을 버는 삶을 바라고 있거든요. 더 사랑스러운 삶이 아닌, 더 이름값을 높이는 삶을 바라고 있거든요. 더 빛나는 삶이 아닌 더 큰 힘(권력)을 바라고 있거든요.


.. “애국심이 왜 싫어요?” “아니, 그건 오로지 전쟁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개념에 불과해. 일본인이 함부로 떠드는 ‘야마토다마시’란 말을 듣고 만주인들이 얼마나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난 몇 번이나 목격했어. 남들한테 경멸당하고 미움받는 애국심 따윈 질색이야!” ..  (4권 44쪽)


 곰곰이 따지면, 명품이 있기에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기에 전쟁이 터집니다. 전쟁을 부르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치고박고 겨루면서 제 밥그릇을 더 키우려는 움직임이 있고, 제 밥그릇을 더 키우려는 곳 어디에서나 명품 가꾸기에 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가용을 버릴 수 있는 삶을 꾸려야 이라크파병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우리 스스로 자가용을 버릴 수 있는 삶이란 내 몫이 적거나 거의 없어도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내 앞가림에 앞서 어깨동무를 생각하는 삶이며, 나 혼자 잘 되자는 삶이 아니라 다 함께 잘 되자는 삶입니다. 석유뿐 아니라 전기를 덜 써야 하는 삶이라기보다 석유를 비롯한 지구자원을 쓰기는 쓰되 알맞게 쓸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소리이고, 자가용을 아예 안 타야 한다는 소리라기보다 자가용을 타려면 타되 알맞게만 타고 넘치게 타거나 쓸데없이 타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을 뽐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지 않으면서 내 마음밭을 가꾸려는 삶이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내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고 다른 이 터전인 골목동네를 밀어붙이지 말며, 내 일자리가 정규직이기를 바라면서 다른 이들은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에 얽매인 채 고달프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목숨을 받아먹으며 내 목숨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 땀방울이 있기에 내 삶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 터전이 있기에 이곳에서 먹을거리 입을거리 쓸거리를 고맙게 얻습니다.
 





 (3) ‘데즈카 오사무’가 남긴 만화


 만화책 《아돌프에게 고한다》 다섯 권을 읽었습니다. 한 권에 9000원짜리로 나온 판이기에 다섯 권이면 퍽 비싸다 할 값입니다. 그러나 데즈카 오사무 님이 이 만화책에 담은 넋과 뜻이 있기에 사만오천 원이라는 책값을 기쁘게 치르며 장만합니다. 또한, 인터넷책방에서 십 퍼센트 눅은 값으로 장만하지 않고 동네책방에서 온돈을 다 치르고 장만합니다.


.. “하지만 당신은 변했어요.” “변하다니, 어떻게?” “나치당에 들어간 다음부터 예전하고는 달라졌어요.” ..  (1권 211쪽)


 1989년에 세상을 떠나기 앞서 몇몇 작품은 미처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다고 하는 데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그래서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당신이 당신 손으로 마무리를 지은 마지막 작품이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이루어 낸 목소리라 할 만합니다. 이 작품으로 만화상을 받을 때는 1986년이고 이무렵 당신은 쉰일곱 나이입니다. 1928년에 태어나 갓 철이 들 무렵 일본이 일으킨 숱한 전쟁을 몸소 지켜보거나 겪었으며, 그 뒤로 일본이 경제대국이라는 이름을 떨칠 때에도 부지런히 만화를 그렸습니다.


.. “기죽지 마라, 당연한 거야. 나도 내가 처음으로 죽인 시체를 보고 토했단다. 지난번 전쟁 때, 난 지원병으로 전선에 나갔지. 열여덟 살 때였어. 그러고는 곧바로 프랑스 병사를 죽였단다. 태연하게 적을 죽일 수 있게 되기까지 1년도 안 걸렸어. 너도 곧 익숙해질 거다.” ..  (3권 148∼149쪽)


 다섯 권에 이르는 만화를 읽으며 ‘나는 이런 생채기가 늘 되풀이되기 때문에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았’고 ‘내 둘레 젊은 넋이 이런 생채기에 휘둘리기 쉬운 이 나라 흐름이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말라’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군대란 사람이 사람을 죽이도록 가르치는 곳이거든요. 아니, 군대란 사람이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도록 내모는 곳이거든요. 아니, 군대란 계급 높은 이들이 어디에선가 무전으로 명령을 내리면 내 목숨을 걸고 다른 이 목숨을 빼앗든지 내 목숨을 내버리도록 짓밟는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군대란 곳은 남을 죽이고 나도 죽는 곳입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죽이고 다른 이 마음을 죽이는 곳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어버이와 식구와 동무 모두 슬퍼할 텐데, 다른 이가 죽을 때에도 다른 이 어버이와 식구와 동무 모두 슬퍼합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에서는 어느 누가 죽어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한 마디를 외칩니다. ‘나라사랑’.


.. “이 집이고 저 집이고 온 나라 사람들이 전쟁통에 소중한 걸 잃어버렸어요. 그런데도 무언가를 기대하며 열심히 살아가죠. 인간이란 참 멋져요.” ..  (5권 201쪽)


 이제 와 돌아보면, 군대에 끌려가서 강원도 양구 민통선 안쪽에서 이태 넘게 지내야 했을 때 ‘왜 나는 아무개처럼 총을 안 들겠다고 다짐하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보다 조금 더 오래 영창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세월이 더 아깝다고 느꼈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은 더러워지고 나빠졌으니까요. 거꾸로 보면 여러모로 배우기도 많이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에서 군대를 겪어냈기에 군대에서 얼마나 많은 젊고 푸른 넋이 주눅들고 짓밟히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나중에는 누구나 그동안 받은 만큼 ‘고참’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새내기를 주눅들게 하고 짓밟는지 느꼈습니다. 이뿐 아니라, 군대를 마친 뒤에는 사회에서 선후배 사이를 깍듯이 지킵니다. 내 밑사람한테는 빈틈없이 반말이요 주먹이 오가고, 내 웃사람한테는 어김없이 높임말이요 굽신굽신입니다. 더욱이, 입시지옥뿐 아니라 취업지옥인 이 나라에서 내 이웃이건 동무이건 더 밟고 더 높이 올라서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야 맙니다. 아니, 아주 마땅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눔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사랑이란 처음부터 깃들지 못합니다. 믿음이란 처음부터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군대란 평화를 지키는 모둠이 아니라, 평화를 꺾는 모둠입니다. 다른 이한테서 무언가 빼앗을 건덕지가 있기에 무기를 갖추어 으르렁거리는 모둠입니다. 군대에 끌려가거나 스스로 들어가거나 이곳에서는 바보가 되고야 마는데, 우리는 스스로 바보가 된 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한, 군대를 떠나고 난 다음에도 우리 마음이 어떻게 바보가 되고 우리 몸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바뀌었는지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군대를 겪었어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드물게 있습니다. 이 같은 군대를 겪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살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납니다.

 꽃보다 아름다울 수 없고 꽃처럼 아름답고자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만, 이 못난 사람으로서 못난쟁이한테도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이 아예 없지는 않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어요.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마무리지은 데즈카 오사무 님이 5권이 끝날 무렵 넌지시 들려주는 말마디, “인간이란 참 멋져요.”처럼 우리 사람들은 참으로 멋없고 못난 길로만 빠져들거나 굴러떨어지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조그맣게 다시 키우기에 “멋져요”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삶자락이지만 믿음을 자그맣게 새로이 가꿉니다. 멀디먼 길이지만 사랑할 노릇이요, 아득하디아득한 길이지만 믿을 노릇입니다. 사람은 참 멋지다고. 전쟁통에 모두 잃거나 빼앗겼어도 다시금 사랑하고 믿는 목숨붙이가 바로 사람이라고. (4342.12.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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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소박한 삶 - 아미쉬로부터 배운다 타산지석 12
임세근 지음 / 리수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29 ―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ㆍ이름ㆍ힘’ 버리기
 : 임세근, 《단순하고 소박한 삶》



- 책이름 : 단순하고 소박한 삶
- 글 : 임세근
- 펴낸곳 : 리수 (2009.9.28.)
- 책값 : 15900원



 (1) 내가 선 삶자리를 돌아보며


 날마다 되풀이하는 ‘아기 옷가지 빨래’는 더미더미입니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날마다 서른 장이 넘는 기저귀를 빨아야 했고, 이제는 기저귀 빨래가 반이 못 되게 줄었으나 다른 옷가지 빨래가 넘칩니다.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인 터라 아침부터 밤까지는 기저귀를 풀며 지내다 보니, 바지에 오줌을 싸든 마루나 방에 오줌을 지르든 하면서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기한테 젖떼기밥을 먹일 무렵이니 아이 키우기에 가는 손은 더없이 바쁩니다. 지난날 어머니들이 아이 키우고 집살림 도맡고 논일이며 밭일까지 함께 해낸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맡은 몫은 우습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어머니들한테는 당신 다른 삶이 아무것 없었습니다. 온통 일에 일뿐이었고 다른 자리에 눈둘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자 어른만 세상일을 돌보도록 하려고 여자 어른한테는 끊임없고 끝없는 일을 지나치게 무겁도록 얹어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밥하기 옷짓기 빨래하기 집치우기 살림하기 아이보기 농사일 …… 이러한 일을 남자 어른이 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자 어른 가운데 이 모든 집일을 스스럼없이 떠맡거나 어려움없이 잘 해낼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집일은 우습게 여기고 바깥일은 높이 섬기는 오늘 우리 삶터입니다. 어려운 말로 ‘가사노동 인정’을 안 합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만 받아들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이라고 수월하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집일에 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집살림 가운데 다문 한 가지라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실을 잣고 물레를 돌려 천을 낸 다음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짓는 일을 오늘날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솜을 틀고 이불을 누비며 빨고 다리고 하는 일을 요즈음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끼니때마다 절구를 빻고 키질을 한 다음 쌀을 일어 안치고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을 요사이 어느 누가 옳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수많은 기계가 나와 집일 짐을 많이 줄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빨래기계 밥기계 청소기계가 나온 뒤로 집일 부피는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그만큼 더 자주 빨래를 하고 더 자주 온갖 밥을 차리며 더 자주 집 안팎을 치워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만 있든 나물 한두 가지만 있든, 콩밥에 국 한 가지만 마련하든 더없이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밥차림은 요리책을 보며 궁중음식을 배우느니 서양음식을 배우느니 하며 수없이 많은 반찬을 올리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접시며 밥그릇이 수북하고, 네 식구 살림만 하여도 설거지감이 가득합니다. 집 치우기란 날마다 해야 하는 노릇이라지만, 서로서로 더 넓은 평수 더 큰 집에서 살면서 청소 시간으로 퍽 오래 잡아먹습니다. 아이한테 옳은 삶 착한 마음 바른 몸가짐을 가르치는 어버이는 자취를 감추고,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만 늘어납니다. 아이들한테 ‘좋다는 책’을 읽히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아이들한테 ‘어버이로서 좋은 삶을 보여주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빠나 엄마 되는 분들 모두 집밖에서 돈을 벌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수수함을 잃으며 누리는 물질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버리며 즐기는 기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팽개치며 받아들이는 소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등돌리며 껴안는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지난 밤 사이 쌓인 기저귀와 아기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미지근한 물을 받으며 빨래를 하는 동안 ‘예전에 혼자 살 때에는 찬물로 빨래를 했잖아? 이제는 미지근한 물로 빨래를 하니 얼마나 나아진 삶이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사는 데에 바쁘고 힘들어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 삶을 생각할 수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꾸로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은 당신들 나름대로 돈굴리기와 집키우기나 다른 여러 가지로 바쁘고 힘들어 낮은자리에서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꼭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리리라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면서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지만, 돈 많은 이웃이 아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스스로 수수하고 낮게 고개숙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수하고 가난하면서 사랑스러운 이웃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거들먹거리며 이름값과 돈힘을 키우는 사람은 언제나 이름값과 돈힘이 대단한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려 하겠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벗을 사귀고,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은 자전거를 즐기는 동무를 사귑니다. 땅장사 좋아하는 사람은 땅장사 좋아하는 이웃을 둘 테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겠지요.
 





 (2) 아미쉬 사람들 삶자리를 헤아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기 앞서 《Amish Country》(1988)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아미쉬 사람들 삶을 돌아보았고, 《Nicole visits an Amish farm》(1985)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나며 아미쉬 사람들 삶자락을 좀더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번역일 하는 선배가 알려주어 《Amish Country》를 일찍부터 읽을 수 있었는데, 선배는 제 짧은 영어라 할지라도 찬찬히 읽어 보라며 이 책을 건네주었고, 이 책을 살피면서 ‘다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당신(어른)들 스스로 좋은 삶을 꾸리려 하고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주려고 하는 아미쉬 삶자락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몇 해 뒤 헌책방에서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읽으며 아미쉬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저처럼 돈없는 사람한테는 헌책방마실을 하며 나라밖 책을 만나는 일이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 떠나는 일’과 같습니다. 몸소 아미쉬 마을을 찾아가 보지 못하지만, ‘니콜’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아미쉬 마을에 사는 동무를 찾아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겪는 모습을 슬쩍 엿보면서 ‘이렇구나’ 하고 살짝이나마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 눈높이에서 다가서려는 이야기책이 좀더 또렷하면서 손쉽게 ‘아미쉬 사람 삶’을 한눈에 보여줄 테니까요.

 그러나, 나라안에서는 이처럼 나라밖 영어로 된 책 아니면 아미쉬 삶을 읽을 길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저야 헌책방마실을 하며 한두 가지 책을 만나서 읽는다지만, 아미쉬 삶을 좀더 많은 우리 이웃들이 읽고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 터전을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새롭게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보았거든요.

 그나마 아미쉬 삶을 겉훑기로 아는 사람들은 “아미쉬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이웃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187쪽)”는 줄 제대로 모르는 일쑤입니다. 아주 외따로 떨어진 채 살아가는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기와 전화와 셈틀을 쓰지 않는 이들이 “‘과학의 발전’이 곧 ‘보다 좋은 삶의 질’을 의미하지 않는(208쪽)”고 여기기 때문임을 헤아리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미쉬 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는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와 매한가지입니다.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품새가 아닌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낮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보’나 ‘미친사람’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품새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어 땅 사고 집 사서 시골로 가는 삶이 아닌 마음과 땀방울과 삶으로 시골살이를 하려는 사람들 넋을 읽지 않는 품새하고 똑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이 나누고 살겠다는 품새가 아닌, 조금밖에 못 버는 살림이더라도 늘 푼푼이 나누고 스스로 아끼면서 살겠다는 품새를 읽지 못하는 흐름하고 닮았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문명하고는 거의 담을 쌓은 채 지내지만 ‘문명과 아예 담을 쌓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좋은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하면서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줄 수 있는 테두리를 지킵니다. 당신들이 아름답게 삶을 일굴 수 있는 자리에서 당신 아이들한테도 아름답게 새 삶터를 일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도록 어우러집니다. 좋으며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찾자고 하는 ‘믿음두레’가 아미쉬 사람들이 예부터 이어받고 물려주면서 가꾸는 마을입니다.
 





 (3) 거듭 읽는 마디마디


 반갑게 읽은 책을 덮고 옆지기한테 건네주었습니다. 끝까지 다 읽은 옆지기는 책 뒤쪽(4부)에 실린 ‘아마쉬 여러 계파 역사와 문화’가 지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뒤쪽에 실린 지식조각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는 낯선 아마쉬 마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식조각을 실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좀더 단출하게 줄이거나 아예 ‘부록’으로 밀어넣었다면 더 좋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보다는 아미쉬 사람들 여느 삶을 다루는 데에 자리를 더 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온몸을 사랑과 믿음에 바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잘난 척하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책과 학교와 겉멋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더 낮추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와 옆지기가 함께 읽으면서 좋았다고 느낀 대목을 밑줄을 긋고 거듭 다시 읽어 봅니다. (4342.12.13.해.ㅎㄲㅅㄱ)
 







[26, 54쪽] 아마쉬 사람들은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용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는 일을 금하고 있기에 외모를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만의 거울이 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거울’이요, 일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비추고 가다듬는 일깨움의 거울이다 … 그때 나는 아미쉬 공동체에는 교회가 없고 돌아가며 교인들 집에서 예배를 보며, 예배당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들은 아미쉬 공동체의 학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교회가 없으니 십자가를 높이 올린 뾰족한 종탑이 있을 리 없고, 벽이나 천장, 창문 곳곳을 장식한 성화가 있을 리 없다. 은은히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마저도 아미쉬 마을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성직자가 없고, 위엄을 갖춘 설교연단도 볼 수 없다. 오르간과 성가대도 없고, 화음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도 들리지 않는다. 헌금을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위한 별도의 모임도 없다. 전도를 하지 않고 선교 활동도 지원하지 않기에 그들의 공동체에는 전도사도 없고 선교사도 없다.

[28, 56, 86쪽]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마약, 가정 파괴, 낙태와 동성애, 퇴폐 행락 등의 비도덕적 행각이 범람하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순수함을 해치는 사악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밖 이교도들을 경계하며 바깥세상을 향해 둘러친 울타리를 더욱 높이고 튼튼히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들은 그 어떠한 공격을 받더라도 폭력을 휘두르거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으며 보복도 하지 않는다. 군 징집에 응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용서’를 일깨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 나는 지금까지 아미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로부터 ‘내 종교가 무엇인지? 교회에 나가는지?’ 등의 질문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교회에 나가 구원을 받으라는 권유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메리 아줌마와 다니엘을 비롯한 아미쉬 사람들로부터 감응을 받고 있다.

[35, 76, 106∼108쪽] 그들은 온당한 주의 주장을 믿고 따를 뿐, 그 어떤 사람의 명예를 드높여 영웅으로 만들거나 신격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쳤다 …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서의 삶의 가치와 율법을 보여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아이)들의 의사에 맡긴다 …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교회의 리더와 연장자를 존경하고 예우를 해 주고, 또한 교회 리더와 연장자는 평신도와 젊은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이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나 전문성을 가진 전담 조직 없이도 아미쉬 공동체가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는 결정적 이유임이 분명하다 … 통일된 복장의 엄격한 규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해 명문화된 규정집이 없고, 옷을 짓는 요령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한 지침서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옷을 지으면서 어린 딸아이들이 옆에 앉아 지켜보게 하고 말로 일러 주면서 격식에 맞추어 옷을 만드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게 하는 방식으로 전수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43∼45쪽] 그런 데다 인디언과의 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신대륙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이어져서 무저항 평화주의를 고집하며 참전을 거부하던 아미쉬 사람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 1930년대 시행된 고등학교 과정의 의무교육에 아미쉬 사람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데 중학교 과정을 넘어선 고등교육은 해가 된다고 판단한 아미쉬 사람들은 자체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학교 운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했다 … 그들은 정부로부터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와 주택을 가압류당하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강제 경매 처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23, 154∼156, 164∼165, 166쪽] 아미쉬 사람들은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가 긴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은 아미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아미쉬 학교는 ‘지적인 삶보다는 미덕의 삶’, ‘전문적 지식보다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 ‘개별적 경쟁보다는 공동체의 번영’, ‘외부 속세와의 융합보다는 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 삶에 필요한 교육을 구현하는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전날보다 향상하는 것을 학습의 목표로 하되 학생들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우열을 가리는 방법으로 학습 효과를 꾀하지 않는다 … 아미쉬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지 않는다. 이는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 갖가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 관계 당국이나 외부에서 교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할 수 있게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미쉬 학교에서 8학년까지 마치고 올바른 삶을 살며 바르게 전수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판단하여 외부의 교사 양성 과정 이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48쪽] 검소하게 사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농가나 달리는 마차에 강탈할 만한 값진 물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좀도둑의 목표가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집에는 담이나 울타리가 없고 대문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는다. 나아가 감시카메라나 경보 장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216쪽] 자동차는 개인주의, 자율, 속도, 자유, 이동성을 불러왔으며, 이에 더하여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삶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위해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자동차를 허용할 경우 손쉽게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고, 빨리 움직이는 기동성의 매력에 빠져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고, 개인주의와 자기 과시욕에 들뜨는 등 교도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아가 분명 공동체의 겸손, 평등, 결속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될 것이었다.

[257쪽] 가족이 모두 모여 세 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가정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아미쉬 가정에서 가장이 도시락을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고, 텃밭을 일구는 어린 딸아이에게 호미를 쥐어 주어야 할 아빠와 엄마를 아미쉬 가정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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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8호를 만들었다. 이번 잡지 8호에는 독립 이름을 붙여 <오래된 책은 아름답다>로 내놓았다. 책을 펴내 준 출판사에서는 책을 모조리 나한테 보내 주었기에, 아주 마땅하게도 '책방 신간 배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방에 신간 배본을 안 하는 책'이라니. 참 무식하고 무모하고 ... 바보스런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좋다. 굳이 신간 배본을 해야 하느냐? 뜻이 있으면 찾는 사람이 있을 테고, 천천히 기다리면서 내가 손수 봉투질을 해서 보내 주어도 되겠지. 

 

300권은 팔아야 9권을 찍을 돈이 마련될 텐데, 300권을 어떻게 언제 다 팔 수 있을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달 만에 팔든 석 달이 걸리든 한 해가 걸리든, 더딘 걸음일지라도 속깊은 책사랑을 나누려는 사람들을 믿으면서 기다려야지. 

 

잡지 주문을 바라는 이는 =>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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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참 따뜻하다
유선진 지음 / 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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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8 ― 할머니 삶자락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 유선진, 《사람, 참 따뜻하다》



- 책이름 : 사람, 참 따뜻하다
- 글 : 유선진
- 펴낸곳 : 지성사 (2009.10.26.)
- 책값 : 12000원



 (1) 제대로 닥친 추위를 느끼며


 새벽부터 깨어난 아기는 한낮까지 잠깐이나마 잠들지 않습니다. 다문 삼십 분이라도 아침잠을 자 준다면 아빠와 엄마는 숨을 돌리며 글을 쓴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할 텐데, 이렇게 숨돌릴 겨를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한테는 마땅한 몸짓일 테니,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아기하고 옹글게 마주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나중에 아기가 크면 엄마 아빠가 아이보고 ‘엄마랑 아빠랑 함께 놀아 주렴’ 하고 노래를 불러도 밖에 나가서 동무들하고 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기는 ‘나중에 엄마 아빠 스스로 안타까워 하지 말고, 바로 이 자리에서 놀아 주셔요’ 하는 마음일는지 모릅니다.

 셈틀 앞에 앉았으나 글쓰기는 못하고 아기하고 놀던 아침나절, 무슨 냄새가 나는가 싶어 아기 기저귀를 만지니 젖어 있습니다. ‘쉬를 했구나’ 생각하며 기저귀를 벗기려는데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아기 엉덩이에 넓게 눌러붙은 똥이 보입니다. ‘언제 이렇게 똥을 누었지?’ 다시 기저귀를 엉덩이에 대고 아기를 덥석 안고 씻는방으로 갑니다. 씻는방 바닥에 똥기저귀를 내려놓고 따순 물을 받아 아기 아랫도리와 엉덩이를 씻습니다. 다 씻은 아기는 마루로 보내고 똥기저귀를 빱니다. 냄새가 빠지라고 창문을 열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이 우중충합니다. 비가 오려나? 올겨울에는 눈 구경이 어려울 듯한데.

 똥을 푸지게 눈 아기는 뱃속이 시원한지 눈자위가 벌거며 졸음이 가득한 데에도 잠잘 생각은 않고 더 놀자고 칭얼거립니다. 아빠는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인형놀이를 합니다. 벌써 두 시간 반을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데 아기는 지루해 하지 않고 팔팔합니다. 아홉 시 반이 조금 못 되어 옆지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빠는 아기한테 이길 수 없다며 잠자리에 듭니다. 이제부터 엄마하고 더 놀든지 잠들든지 하기를 바라면서.

 살짝 눈을 붙이지만 얼마 잠들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집을 찾아올 처가 식구를 헤아리며 기저귀 빨래를 해 놓습니다. 옆지기는 마루와 방을 쓸고 닦습니다. 밥을 한 솥 해 놓고 집살림을 조금 갈무리합니다. 그래 보았자 아기가 도로 어질러 놓겠지만.

 도서관 문을 열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문을 열고 골목을 내다봅니다. 싸락눈이 온 골목을 휘감습니다. ‘눈?’ 아침에 본 구름은 비구름이 아닌 눈구름이었을까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사진기를 챙기며 집을 나섭니다. 바깥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이런 날씨에 옆지기와 아기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장갑을 끼고 골목을 걷습니다. 온도가 퍽 떨어졌는지 손가락이 금세 얼어붙습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려 해도 손가락이 굳어 잘 안 움직입니다.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고 늘 푸념하고 있는 소리를 하늘이 들었을까요. 두 시간 반쯤 골목마실을 하며 겨울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데, 귀와 코와 입이 시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딱딱하게 굳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걸리적거리지 않으며 따뜻한 장갑 한 켤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혼자 살며 한겨울에도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달릴 때에는 ‘하루 열 시간을 자전거로 달려도 손가락이 얼지 않을 만한 장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꾸었습니다. 겨울날 열 시간쯤 쉬지 않고 자전거를 달리면 손가락도 얼고 발가락도 어는데, ‘발가락이 안 얼 만한 양말이 있으면’ 하는 꿈도 함께 꾸었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모진 추위를 견디게 해 줄 좋은 장갑과 양말이 더없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저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에 땀이 나니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내내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분들 손과 발과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 한 벌이 참말 그립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늘 그 자리에서 동냥을 하는 사람을 볼 때에도 ‘값싼 장갑 한 켤레’를 건넬 수도 있지만, ‘그저 손에 끼는 장갑이 아닌 손이 따뜻할 장갑’을 건넬 수 있기를 꿈꿉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 그저 배만 가득 채우는 싼 먹을거리도 나쁘지 않겠으나, 조금 더 돈을 치르면서 내 삶을 채우고 내가 얻은 곡식과 푸성귀를 길러 준 일꾼한테까지 이바지를 하는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옷 한 벌을 장만할 때에도 같은 마음입니다. 책 하나를 사들여 읽을 때에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더 싸게 싸게 또 싸게 싸게 해서 내 주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짐스럽다면 반가울 수 있습니다만, 나 혼자만 홀가분한 삶이기보다는 내 이웃과 함께 홀가분하며 기쁠 삶이고 싶습니다. 내가 얻는 대로는 아니나, 내가 얻은 기쁨을 내 이웃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보면, 지난날에는 이런 마음을 품지 못했습니다. 어리고 철부지일 때에는 그저 ‘돈을 적게 쓰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적게 쓰고 덜 쓰고’ 하면서 내 삶을 가꾸고 내 삶터를 일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적게 쓰는 삶과 덜 쓰는 삶이란 틀림없이 나와 내 둘레 터전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밑바탕을 튼튼하게 일구지는 못합니다. 겉훑기예요. 참으로 도움이 되려면 ‘쓸 곳에 알맞게 써야’ 하는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적게 쓰는 삶에서 알맞게 쓰는 삶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덜 쓰는 삶에서 올바로 쓰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적게 쓰거나 덜 쓰는 삶이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적다’는 테두리에서 머뭅니다. 알맞게 쓰거나 올바로 쓰는 삶이란 ‘아예 한푼조차 안 쓸 때가 있는 한편, 내 모두를 송두리째 바칠 때가 있’습니다. 써야 할 곳에는 아낌없이 쓰고, 쓸 까닭이 없는 데에는 조금도 안 씁니다. 이와 같은 삶이 알맞게 쓰는 삶이요 올바로 쓰는 삶입니다. 그렇지만 제 삶은 아직 알맞게 쓰는 삶이나 올바로 쓰는 삶에 가 닿지 못합니다. 시늉만 하고 있습니다. 시늉이나마 한다 말할 수 있는데, 하루아침에 탈바꿈하는 꿈이 아니라 나날이 차츰차츰 애쓰는 땀방울로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갑작스레 닥친 추위에 손가락이 얼어붙으며 사진을 찍는 동안 뼛속 깊이 느끼기도 합니다. 추운 겨울에 추위를 느끼며 찍는 사진에는 추위와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담아야 한다고. 사진기로 골목을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추위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히는 골목사람 삶터에 그동안 배어 온 추위를 함께 담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이 추위를 살며시 녹이는 따스한 손길을 놓치면 안 된다고.


 (2) 책에 담는 할머니 삶


 몇 해 앞서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2007)라는 책을 읽으며 참으로 기뻤습니다. 기쁘면서 반가웠고, 반가우면서 고마웠습니다. 이 책을 쓰신 할머니는 할머니이기 때문에 이렇게 받아들이고 곰삭이고 되새기면서 글 한 줄 우리한테 선물로 내어준다고 깨달으면서 기뻤습니다.

 요 한 달 사이에 《사람, 참 따뜻하다》라는 책을 읽으며 새롭게 즐거웠습니다. 즐거우면서 놀라웠고, 놀라우면서 흐뭇했습니다. 이 책을 쓰신 할머니는 할머니가 되었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알차고 푸진 말마디를 우리한테 선물로 내려주는구나 하고 깨달으며 즐겁습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쓴 문영이 할머님은 1935년에 태어났습니다. 《사람, 참 따뜻하다》를 쓴 유선진 할머님은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느새 일흔을 넘기고 여든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가는 두 분입니다. 생각을 곰곰이 가누며 당신들 또래 할아버지들은 어떠한 글을 쓸까 궁금해집니다. 아니, 일흔을 넘기고 여든이 되어 가는 ‘예부터 글을 써 온’ 할아버지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일본사람 ‘사하시 게이죠’라는 분은 《할아버지의 부엌》(여성신문사,1990)이라는 책을 쓰면서 ‘나이 들어 혼자 남는 할아버지들이 집일을 하나도 못하며 너무 힘없이 쓰러지며 무너지는 삶으로 끝장이 나는 모습이 안타까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앞서 집일을 익히며 늙은 삶을 아름다이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아름답게 늙는 지혜》(정우사,1985)라는 책을 쓰며 ‘늙음은 덧없음이나 못남이 아니라 새롭게 아름다움을 찾는 나이’라고 밝히며 스스로 늙어 가고 있음을 돌이킵니다. 나이가 들어 가기 때문에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즐겁다고 이야기합니다(사하시 게이죠 님 책은 《아버지의 부엌》(지향)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새로 나왔고, 소노 아야코 님 책은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리수)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새로 나왔습니다).

 모두들 어린 날은 어린 날이기에 아름다우며, 어린 날 철없이 구는 모든 짓거리는 철없이 굴 수 있는 기운이 있는데다가, 뒷날 스스로를 깨닫고 고쳐 나갈 수 있어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날은 철이 차츰차츰 들면서 어린 날부터 품어 온 꿈을 일구어 가는 땀방울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늙은 날은 기운이 없어 예전과 같지 않은 모습이 되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을 품에 안고 지내 온 삶이 아름답고 당신 꿈을 뒷사람한테 고이 물려줄 수 있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선진 님 책 《사람, 참 따뜻하다》는 수필문학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수필문학이라는 이름 없이 당신이 보내 온 삶을 적바림한 이야기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따로 어떤 문학 갈래로 나누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굳이 어떤 대단한 문학이 되어야 하는 글이 아니요, 반드시 어떤 높은 이름을 얻어야 하는 자귬이 아닙니다. 아픈 지난날을 아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 좋은 글이고, 외로움을 고스란히 즐기는 당신 삶을 속살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 좋은 글입니다. 꼭 마음 뭉클하게 읽지 않아도 좋은 글이요, 오래오래 간직하며 거듭 돌아보지 않으며 살포시 삭여내어도 좋은 글입니다.

 나이 든 사람으로서 내려놓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나이 들지 않은 사람들 또한 언제나 홀가분한 몸이 되어 사랑을 나누면 더욱 아름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조촐히 적바림한 글입니다. 할머니가 어린 딸아들한테 조곤조곤 들려주는 글이요, 할머니가 더 어린 손자와 손녀한테 조용조용 나누어 주는 글입니다.


 (3) 《사람, 참 따뜻하다》 곰곰이 되읽기


 앞으로 할머님들 책이 우리 앞에 얼마나 선보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크게 이름 높지 않은 할머님들 책들이, 이를테면 예순이 넘은 뒤 처음 붓을 잡고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수채그림을 즐기는 박정희 할머님 같은 분들 책이든 온삶에 걸쳐 집살림을 꾸려 온 여느 할머님들 책이 얼마나 나올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할머니 된 분들한테 ‘홀로 넉넉하고 느긋하게 당신 삶을 돌아보며 글 한 줄 적어 내려갈 틈’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나오기 어려운 만큼 더 고맙게 받아 읽은 《사람, 참 따뜻하다》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되읽어 봅니다. 저 스스로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 먹어 가기 때문이 아니라, 한 해 두 해 갈수록 할머님들 삶자락이 한결 따스하고 포근하다고 느낍니다. (4342.12.5.흙.ㅎㄲㅅㄱ)


[23, 65, 147쪽] 사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학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 삶의 내용이 학력이지요 … 쇠잔이란 얼마나 평화로운 체념인가. 젊음의 열정과 과욕이 씻기어 나간 평화. 그리고 쇠잔이란 또 얼마나 사람을 조그마하게 만드는가. 나는 아주 작아져서 엄지의 엄지가 되어 그의 등에 업혀 잠들고 싶다 …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고, 비로소 ‘신’이 바로 보이는 밝은 눈의 영토였다.

[39, 42∼43쪽] 나는 자라면서 내가 딸이어서 좋구나, 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연코 없다. 아들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지만, 딸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컸던 것이 내가 살았던 사회환경, 아니 우리 집의 가정환경이었다 … 짐을 풀면서 솜씨 좋은 어머니가 새로 만드신 분홍빛 아기 옷에 눈이 가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꼭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학교도 다녀 보고, 돈도 벌어 보고, 큰소리도 치면서 살고 싶다, 를 입에 달고 사셨던 어머니. 딸 다섯을 낳을 때마다 섭섭하고 섭섭하여 몽땅 도둑을 맞았다 해도 그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으리를 노상 읊어대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당신 딸이 낳을 넷째 아이는 “딸이기를……” 바라는 당신의 절박한 염원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64, 94∼95쪽] 고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관점에서 장점을 볼 줄 아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아니 장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세상은 새로웠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꼭 쓰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깨달았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약초이구나. 그래서 다른 이의 삶에 치유의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한다. 구태여 익명으로 나를 감추지도 않는다. 언제나 실명이다.

[79쪽] “조카, 아주 이쁘게 나이를 먹었네.” 내가 칭송하자 “아마 미국에서 살아서 그럴 거예요. 한국에서라면 사방의 적들이 견제하고, 자연히 조급증에 걸리고, 사회 전체가 무언지 불안하고 바쁘잖아요? 그 가운데서 나도 그런 표정으로 늙었겠지요?”

[86∼88쪽] 오빠는 다섯 가지 약을 열심히 먹었다. 그 약이 자기를 살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성으로 먹었다. 그것은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자기 목숨에 대한 최대의 성실이었다. 성한 몸이든, 병든 몸이든,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생명을 준 자에 대한 최고의 감사며 정의였다 … 소식을 듣고 모인 형제들에게 (오빠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웠어요” 말을 하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모처럼 단잠에 잠기는 듯 편안하게. 그 모습은 맑고 고왔다. “어서 와서 영진의 이뻐진 얼굴을 보아라!” 용케 참고 계시던 아버지가 오열을 터뜨리셨다 …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고 한심하고 지루한 병상에서 오빠가 누렸을 자유!

[102, 133쪽] “아무 생각 마시고 그림만 보세요.” 동서가 가만가만 말을 합니다 … 교편을 잡고 있는 동서가 아이를 낳자, 병원에서 바로 제 집으로 데려와 키울 때나, 열세 식구 조석을 단풍잎만 한 손과 종이배 같은 발로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육신의 고달픔이 보기에 안쓰러워 “그러지 말고 약국을 하거라. 너는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람을 써서 살림을 맡기면 덜 고단하지 않겠니?” 내가 말하면 “언니, 우리 가족에게 젤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우. 형제 간에 사랑하고 화합하는 일이 문제인데 그 몫을 돈이 할 수 있나?”

[106쪽] 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날렵한 차를 몰고 가는 이웃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운전석 옆 유리창을 열고 정중하게 동승을 권한다. “역까지라도…….” 나는 한껏 상냥한 어조로 사양을 한다. 미끄러지듯 멀어지는 차를 보며 ‘당신은 오늘 그 귀찮은 물건을 끌고 다니느라 수고가 많겠구나’ 하고 가당찮게 오히려 동정을 한다. 그러면서 상대적인 자유를 느낀다.

[138쪽] 나는 다행히 나를 닮은 딸은 없고 아들만 있는데, 내 아들들에게 아버지가 내게 훈도하신 대로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고 일러 주며 길렀다. 아니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약점을 갖는다는 건 축복이야. 약점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 보거라.”

[280쪽] 사실 70년을 산 여인들에게 쌓여 있는 것이 지나온 삶의 이야기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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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짜게 점수를 붙이는 책치고 다른 사람들이 넉넉한 점수를 안 붙이는 책이 드물다.

 

 내가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이 드물다.

 

 내가 짜게 점수를 붙이는 책은 참 잘 팔리곤 하며,

 

 내가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은 참 안 팔리곤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책에는 외려 짠 섬수를 매기고,

 

 나는 내가 참으로 안타깝거나 불쌍하다고 여기는 모자라거나 어설픈 책에는 넉넉히 점수를 붙여야 할까.

 

 이 바보스러운 세상에서

 

 바보스러운 책이 판치는 흐름을

 

 나 같은 사람 하나가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나로서는 내가 별 다섯 만점에 둘이나 하나나 빵을 붙이는 책을

 

 둘레 사람들이 별 다섯을 붙이며 손뼉 치는 모습을 보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 올린 글에도 적바림했지만,

 

 길거리 나무에 전깃줄을 친친 감고

 

 예수님나신날을 맞이한다며 들볶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 하고 외마디소리를 내며 예쁘다고 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이 나라에서

 

 도무지 무슨 소리를 끄적일 수 있겠는가?

 

 젠장 된장이 아닌 환장 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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