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02 : 손빨래 하지 말라구?

 하루일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다가 주안역에서 빠른전철을 내립니다. 몇 분쯤 서서 기다리는데 타는곳 둘레로 라디오 목소리가 흐릅니다. “손빨래는 하지 말고 세탁기로 하며, 무거운 짐은 들지 않도록 하고, 마우스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쓰고 …….” ‘뭐야?’ 하면서, 읽던 책을 한동안 덮고 귀를 기울입니다. 라디오 목소리는 ‘셈틀 앞에서 오래도록 지내는 도시사람이 손목 안 아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젠장!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 손빨래가 손목에 안 좋다니, 그저 전기 먹는 기계를 끝없이 쓰고 또 쓰라는 소리인가? 걸레조차 빨지 말고, 걸레질조차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설거지는? 밥하기는? 자전거 타기는? 걷기는?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데, 이삿짐 나르는 일꾼이나 도매상 일꾼은 어쩌지? 책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이 키우는 엄마 아빠는? 아기를 안을 생각은 접고 아기수레에만 태우고 끌고 다니거나 자가용에 태우고 다니라고?

 제 귀에만 터무니없다고 들리는지 모르는 소리를 그만 듣고, 《하얀 능선에 서면》을 쓴 남난희 님이 2004년에 내놓은 《낮은 산이 낫다》를 다시 집어듭니다. 느린전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립니다. 밤골목 거닐며 사진 몇 장 찍다가, 배다리에 마련해 꾸리고 있는 동네도서관에 들러 이곳에 놓고 있던 스캐너를 떼어 가방에 넣고, 몇 가지 책을 챙깁니다. 다시 밤골목을 거닐며 집으로 갑니다. 김밥집에서 김밥 석 줄 삽니다. 제가 먼저 말하기 앞서 김밥집 일꾼이 까만 봉지에 착착 담아 버립니다. 빤히 어깨에 천가방을 걸어 놓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런 가방이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따로 묻지 않습니다. 집 앞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두 병을 삽니다. 젊은 일꾼이 까만 비닐 꺼내는 모습을 보며 얼른 손사래칩니다. 젊은 일꾼은 입맛을 다시며 까만 비닐을 구겨서 제자리에 쑤셔넣습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찬물로 씻고, 아침에 1권을 읽은 만화책 《크로스게임》(아다치 미치루 글ㆍ그림) 2권부터 7권까지 읽어내립니다.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곯아떨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8권부터 10권까지 읽어치웁니다. 뒤엣권은 오늘 저녁에 만화책방에 들러 장만할 생각입니다.

 아침에 서울로 일하는 가는 전철길에 다시금 《낮은 산이 낫다》를 집어들어 읽다가 빈자리에 끄적끄적 이 생각 저 얘기를 적바림합니다. 문득, 남난희 님 글책이나 아다치 미치루 님 만화책이나 꾹꾹 눌러 쓰고 눌러 그린 손글이요 손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손글과 손그림 아닌 셈틀글과 셈틀그림으로 바뀔는지 모르지만, 이이들은 셈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맛과 멋을 잃지 않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두 손으로 글이며 그림이며 사진이며 일구고,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쓸고닦으며 아이 돌보기까지 하는 가운데 김매기나 살림 갈무리를 하겠지요. 손으로 일하는 만큼 손힘 닿는 데까지 애쓰겠지요. 퍽 고되게 일하기도 할 테지만, 손품 팔 수 있는 테두리는 넘기지 않을 테고요. 우리한테는 오늘 하루만 있지 않고 늘 새로워질 기나긴 사람길과 사랑길이 있으니까요. (4342.10.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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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00 : 서울사람은 책을 읽어 무얼 하나?

 여러 달에 걸쳐 《탐라기행》(학고재,1998)이라는 책 하나를 읽어 냅니다. 책을 다 읽을 무렵, 이 책을 쓴 일본사람 시바 료타로 님 다른 책 《한나라 기행》이 함께 우리 말로 옮겨져 있음을 알아챕니다. 아침저녁 전철길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가운데 《탐라기행》과 더불어 《까마귀의 죽음》(소나무,1988)을 겹쳐서 읽었습니다.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아르고스,2005)하고 《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또한 겹쳐서 읽고 있습니다. 어느 책이든 한달음에 읽어치우기에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서른 쪽을 읽어도 ‘이런! 오늘 너무 많이 읽었잖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무 쪽 안팎만 조금조금 읽고 다음 책을 읽어 주고 싶은데, 사람들이 낑기고 찡기고 밟히고 밀리는 지옥철에서는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낼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쉰 쪽도 읽고 백 쪽도 읽습니다. 그러다가 읽기를 멈추고 책 앞뒤 빈자리에 글월 몇 줄을 짤막하게 적바림하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 쓰기를 즐겨하고 있다 보니, 이 책들 말고도 요 한 달 남짓 전철길에서 ‘읽어치운’ 책들이 살림집 책상맡에 잔뜩 쌓여 있습니다. 읽기는 끝없이 읽어댈 수 있는데, 느긋하게 책상맡에 앉아서 느낌글을 갈무리할 겨를이 없습니다. 옆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고단한 전철길에서는 책이라도 쥐고 있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책은 자꾸자꾸 읽는데, 어쩌면 이렇게 읽기만 되풀이하면서 외려 내 마음을 제대로 못 다스리지는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은 아침길에 모처럼 자리를 하나 얻어서 앉는데, 제 옆에 앉은 젊은 사내가 팔짱을 굳게 끼고 당신 옆으로 몸을 부풀리며 혼자만 넓게 가려고 합니다. 이런 불쌍한 사람한테 한 마디를 할까 하다가 괜히 짜증 묻은 말이 나올까 싶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갑니다. 그렇지만 옆사람을 들볶는 이 젊은 사내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어차피 서서 가더라도 말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일어서야 했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아침저녁 출퇴근 또는 통학에 나서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 아닌 짐짝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시달리고 억눌리면서 사람사랑이나 사람믿음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악다구니 같은 도시에, 더구나 서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습니다. 한손에 ‘진보’를 들든 ‘보수’를 들든 ‘중도’를 들든(요사이는 거짓 ‘진보-보수-중도’를 드는 사람이 퍽 늘었습니다), 저마다 좋아하거나 바라는 옳은 생각을 따르자면 도시 아닌 시골에 살 노릇이요, 평화와 안정과 민주와 복지와 통일을 헤아린다면 이 또한 도시 아닌 시골일 텐데, 아니면 도시살림을 시골살림처럼 가꾸어야 할 텐데, 아니 도시이고 시골이고를 떠나 두레를 하는 매무새와 어깨동무를 하는 마음가짐이어야 할 텐데, 왼쪽에서고 오른쪽에서고 넉넉함이나 느긋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저부터 서울에 매인 주제에 이런 말을 늘어놓을 구실이 없다고 하겠는데, 고향 인천 골목동네에서 조용히 이웃과 어울리면서 살고플 뿐이지만 인천시는 2025년 도시계획을 새로 내놓으며 저처럼 아파트에서 안 살거나 못 살 사람은 다 내쫓으려 합니다. 이제는 아예 수도권에서 떠나 버릴 꿈을 꿈 아닌 삶으로 이루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년을 안심하고 산다는 아파트’가 아닌 ‘200년을 걱정없이 살 작은 집’이 그립습니다. (4342.9.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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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04 : 서울 이대 앞에 헌책방이 생긴 기적

 《예수전》을 쓴 김규항 님은 천주교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 《예수전》에는 ‘하느님’이라고만 적고, 《200주년 신약성서》를 판본으로 삼습니다. 김규항 님은 책 머리말에서 《200주년 신약성서》를 판본으로 삼은 까닭은 “이 성서에서만 예수가 반말을 하지 않기 때문(13쪽)”이라고 밝힙니다. 우리 나라에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온갖 성경이 많이 나와 있는데, 참말로 이 가운데 ‘반말 안 쓰는’ 성경은 ‘한국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이백 해를 기리는 해에 맞추어 새롭게 옮겨낸’ 성경 하나뿐입니다(몇 해 앞서 한 가지 성경이 새로 나왔답니다. 반말을 안 쓰는 성경이). 그런데 천주교 쪽에서도 이 책은 거의 안 쓰고 안 읽습니다. ‘새로 옮긴’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새로 옮긴 성경으로만 다루고 말하고 읽고 하지, ‘제대로 잘 옮긴’ 성경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책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는 동네에서 지난해까지 주임신부를 맡은 ㅂ신부님은 ‘다른 신부님들은 아무도 안 쓰는’ 판본이었으나 바로 이 《200주년 신약성서》로 미사를 올리고 강론을 하고 성경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 큰길가에 아주 조그마한 헌책방이 하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꼭 두 달이 되었습니다. 간판에는 책방이름이 따로 적혀 있지 않으나 책방이름은 〈유빈이네 책방〉입니다. 좁은 자리에 마련한 헌책방인데 책꽂이를 ‘바퀴 달린 세 겹’으로 장만했습니다. 그야말로 마지막 빈틈까지 책꽂이이자 창고처럼 마련했다고 할까요. 이 놀라운 헌책방을 염리동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누구보다 염리동에서 가장 가까운, 그러니까 이 헌책방 옆으로 고작 40미터쯤에 있는 전철역하고 가장 가까운 대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몇이나 이곳을 알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인문학을 하는 학생이거나 이 대학교 교수라 하는 분들은 이곳을 알아보고 찾아간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화요일, 몸살 기운이 가득하여 걷기도 어렵던 날 낮에 엉금엉금 기듯 〈유빈이네 책방〉을 찾아갑니다. 몸이 아프니 눈도 흐릿하여 책을 보기 어려웠지만, 서울 이화여대 앞쪽에 새로 생긴 놀라운 헌책방에 찾아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시간 반 남짓 찬찬히 둘러보며 이 책 저 책 구경합니다. 여러모로 쏠쏠하다 싶은 책과 함께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나무와숲,2004)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데이비드 스즈키와 오이와 게이보 두 사람이 쓴 책인데, 데이비드 스즈키는 캐나다사람이지만 핏줄기는 일본사람이고, 오이와 게이보는 일본사람이지만 핏줄기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어느 나라 어느 겨레’붙이임을 떠나 옹근 마음결과 생각밭으로 당신들 삶을 꾸리며 이 땅과 사람을 사랑하고 믿습니다.

 “비인간적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다 … 근대성이란 새것이 최고라고 믿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옛것은 좋지 않다는 뜻이 된다.”(103, 109쪽)

 동네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며, 좋다는 학교 옆으로 집을 옮기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누구나 ‘사람 아닌 사람’ 길을 걷습니다. ‘사람한테서 벗어난 사람’ 자리에 뿌리를 내립니다. ‘사람을 잊는 사람’이 되고, ‘사람을 버리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4342.1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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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16 19:38   좋아요 0 | URL
가보고 싶은데 좀더 자세하게 약도 설명좀 해주세요^^

파란놀 2009-11-16 20:35   좋아요 0 | URL
http://blog.naver.com/hbooklove/60094562166

이곳에 들러서 사진을 보시면 가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청춘을 읽는다 -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강상중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을 왜 '별 둘'만 붙였어요?" 하고 묻는다면, 

"별 하나만 붙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꾸하리라.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이 어째서 '별 둘'밖에 안 되나요?" 하고 묻는다면, 

"네, 별 셋을 붙이는 대신 '시간도 돈도 아까운 책'에 넣어 드리지요." 하고 대꾸하리라.

 


 책읽는 일본사람, 책 안 읽는 한국사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4] 강상중, 《청춘을 읽는다》


.. 나는 도쿄 역시 ‘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이 상태로 가다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다 ..  (61쪽)


 저는 서울 또한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대로 가다가는 깡그리 무너지고 조각조각 부서지고 끝없이 망가지며 갈가리 쪼개지다가는 폭삭 주저앉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서로 이름값 높이고 이름값 지키며 이름값 부풀리는 데로 치닫는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같이 돈벌이 힘쓰고 돈벌이 매달리며 돈벌이 생각에 가득하다면 부서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도나도 겉치레 밝히고 겉치레 키우고 겉치레 사로잡히다가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가방끈 붙잡고 가방끈 늘리며 가방끈 내세우다가는 쪼개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쇠밥그릇 살찌우고 쇠밥그릇 홀로 차지하며 쇠밥그릇 빼앗으려고 싸우다가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산시로 같은 느긋한 성격의 청년은 멸종되고, 반쯤은 여가를 즐기는 기분으로 모라토리엄을 만끽하는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 《산시로》를 읽고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이 청년에게는 땅에 배어 있는 피와 땀의 기억과 같은 것을 거의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  (41, 49쪽)


 해 떨어지고 늦은 저녁,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단단하고 억센 쇠밥그릇을 붙잡고 있는 공무원하고 마주해야 하는 자리가 몹시 낯간지럽고 벅차서, 저녁을 나누는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 밥집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민간인’하고 어울리는 자리에서까지 그 티를 버리지 못해야 할까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겉치레만을 살피는 매무새로 넉넉히 일삯을 받고 연금을 챙기면 세상 부러울 구석이 없다고 여기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 공무원들은 책을 읽을까요? 이 공무원들도 아이들한테 ‘훌륭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좋은’ 책을 사다 주어 읽힐까요? 이 공무원들은 당신 딸아들한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이 공무원들한테 믿음이 있다면 성경이나 불경을 읽을까요? 성경이나 불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요? 나라안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원수 어린이문학과 권정생 어린이문학을 당신들 딸아들한테 읽힌 적이 있겠지요? 공무원 당신들은 이원수 권정생 책을 한 권쯤 읽어 보았을까요?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 처음 상경했을 때는 그저 ‘도쿄는 대따 크구나’하고 감탄하기만 했는데, ‘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까’ 하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해 보면, 모두들 얼굴은 있어도 아침 출근길의 러시아워 때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언짢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돌변해서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교성이 난무하고, 그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 사람들이 부산스레 오가고, 그 뒤로 빌딩들이 들어서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맹렬한 기세로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몸부림치는 그런 세계 속에서는, 잠시 멈춰 서서 영원불멸한 것을 생각하려 해도 그런 것은 허황된 거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  (81, 83쪽)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재개발 사업에만 눈이 먼 공무원하고 날마다 마주해야 합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성과 내는 사업에만 몸바치는 공무원하고 늘 부딪혀야 합니다. 어쩌다가 이런 삶이 되었는지 저 스스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한테 이런 삶이 주어졌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다만, 숱한 공무원하고 부대끼는 동안, 이 공무원이든 저 공무원이든 책을 읽지 않음을 낱낱이 깨닫습니다. 이 공무원이든 저 공무원이든 저마다 붙잡는 책에 담긴 속살이나 알맹이를 옳게 붙잡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훌륭한 줄거리 담은 책을 훑으면서 훌륭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훌륭한 삶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재미난 얘기 넘치는 책을 읽으면서 참된 재미를 곰삭이지 못하고, 스스로 재미난 사람이 되어 재미나게 일하는 매무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책은 그저 시간 때우기일까요? 책은 한낱 시간 죽이기일까요? 책은 그냥 책일 뿐이니, 읽는 이하고 쓴 이하고는 동떨어진 삶일까요? 줄거리만 욀 수 있으면 책읽기가 끝일까요? 줄거리를 읊을 수 있으면 책을 잘 읽은 셈일까요? 독후감 숙제를 낼 수 있고, 이 숙제가 100점을 받으면 책을 가장 잘 읽은 셈일까요?


.. 어째서 내 부모의 나라는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렇듯 비참한 기분에 젖어야 하는 것일까? 왜 … 그러나 보들레르의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무리를 지어 스스로 전위임을 내세우며 거들먹거리고, 음모를 꾸미듯 정치에 정신이 빠져 있었더라면 아마 이런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 전위가 되려다 결국 피에로로 끝났을 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전향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 … 좋고 나쁘고를 떠나 결국 그들은 소시민적인 안일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근거지를 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  (100, 104, 107, 108쪽)


 책이란 모두 같은 책입니다. 헌책방 헌책과 새책방 새책과 도서관 장서는 이름이 다를지라도 모두 같은 ‘책’입니다. 겉이 좀 헐어도 책이요 갓 찍어 따끈따끈해도 책이며 도서관 딱지가 붙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책입니다. 오늘 읽혀도 책이요 내일 읽혀도 책이며 글피에 읽혀도 책입니다. 부자가 읽어도 책이고 가난방이가 읽어도 책입니다. 대학교수가 읽어도 책이고 구멍가게 할배가 읽어도 책입니다. 가정주부로 일하는 연변조선족 아줌마가 읽어도 책이며 까맣고 큰 차를 끌고다니는 아줌마가 읽어도 책입니다.

 책이란 모두 다른 책입니다. 내가 읽는 책과 네가 읽는 책이 다릅니다. 똑같다고 하는 책을 읽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책입니다. 지난해에 읽을 때와 올해 읽을 때 깨닫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책입니다. 우리들 하는 일이 모두 다르며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생각과 느낌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는다 하여도 마음을 사로잡는 대목이 다르고 눈길을 끄는 글월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책을 다 다르게 읽을 뿐 아니라, 다 다른 책을 또한 사뭇 다르게 읽습니다.


.. 1968년에 착공해 1970년 초여름에 완공된 4차선 경부고속도로는 총 길이 425킬로미터, 폭 22.4미터의 대동맥으로, 이 도로에 의해 서울과 부산은 1일생활권이 되었다. 이 대동맥의 완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은 농어촌 근대화와 소득증대를 내걸고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그것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을 슬로건으로 하여 위로부터의 힘으로 유교적 가족주의와 공동체의식을 파괴하고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국민을 양성하려 한 것이었다 … 너무나 무더운 날씨에 어느 마을 사거리에 차를 세우고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작은아버지가 마을 사람 하나와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 곁에 앉아 꿈쩍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자넨 일본서 왔는가보이. 여기선 다들 입이 무거워 아무 말도 안 하지만, 파쇼야, 이 나란. 일본인들 있을 때보다 더 심해. 그러니 자네도 경솔한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말게나.” 더듬더듬, 그러나 똑똑히 들려오는 일본어에 깜짝 놀라 절로 몸이 젖혀졌다. 게다가 ‘파쇼’라는 단어가 너무도 뜻밖이어서 얼토당토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 노인이 나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오자 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언론통제와 상호감시가 궁벽한 시골 구석구석까지 눈을 번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 땅바닥을 기는 듯한 하층노동자의 빈곤과, 그들의 머리 위를 달리는 고속도로. 이 두드러진 대조는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  (143∼145, 156쪽)


 사람 숫자만큼 책이 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책이 골고루 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다 다른 삶이 밴 다 다른 이야기가 어우러진 다 다른 책이 있습니다.

 저는 새책방보다 헌책방을 즐겨찾지만, 새책방 또한 곧잘 찾습니다. 새책방에서는 새로 나온 책을 흔히 찾아 읽으려 하지만, 갓 나온 책보다는 제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거나 촉촉하게 적시는 책을 찾으려 합니다. 헌책방에서는 판이 끊어진 안타까우면서 아름다운 책을 찾아 읽으려 하지만, 굳이 지난날 책을 찾는다기보다는 제 넋을 올바르게 이끌거나 제 얼을 알차게 일굴 수 있는 책을 찾으려 합니다.

 새책방에서 책을 살 때에는 ‘내가 이 책 하나를 사면서 이 좋은 책을 힘껏 펴내 준 출판사한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기쁩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살 때에는 ‘내가 이 책을 사면서 이 반가운 책을 애써 캐내고 건져내어 새로 읽힐 수 있도록 손질한 일꾼들한테 작게나마 도움이 되는구나’ 떠올리면서 즐겁습니다.

 출판사 눈으로 보자면 도서관에서 책을 갖추는 일이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서관 책은 ‘한 권으로 수십 사람이 읽거나 수백 사람이 읽기’까지 하니까요. 그런데 어떠한 출판사 일꾼도 ‘도서관에서 책을 사들이는 일’을 꺼리지 않으며 싫어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출판사 일꾼은 헌책방에서 사람들이 책을 사는 일을 몹시 꺼리고 싫어합니다. ‘헌책방에서 사람들이 책을 사기 때문에 새책이 하나 덜 팔린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헌책방에서 팔린 책은 한 권이요 고작 한 사람이 읽을 뿐이고, 도서관에서 사들인 책은 하나 갖고 수많은 사람이 읽으니, 도서관에서 책을 사들일 때야말로 ‘출판사 매출에 손해’일 테지만, 이렇게 낱낱이 따지고 살피는 출판사 일꾼은 아직까지 없는 줄 압니다.


..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절제와 근면과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아무리 땀을 흘리며 일한다 해도 돈을 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돈벌이가 뭐가 나쁘냐’라는 탐욕이 당당하게 행세하게 된다 … 이치로나 마쓰이 히데키 선수는 야구 배트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100만 엔을 벌어들이지만, 나는 1년 동안 일해도 200만 엔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으면 지역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해 준다. 나는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  (226, 230∼231쪽)


 재일조선인이요 재일지식인인 강상중 님이 쓴 《청춘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당신이 젊은 날 읽으며 가슴에 알알이 맺히거나 새겨진 책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이 책만큼은 읽어 주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담은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강상중 님은 일본에서 일본말을 쓰면서 살기에 마땅히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을 쓸 텐데, 《청춘을 읽는다》라는 책에서도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턱턱 막힙니다. 지난 2004년에 나온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에서도 ‘자이니치’라는 일본말은 몹시 껄끄러웠습니다. 일본에서 일본말을 하며 살아갈 때에는 마땅히 ‘자이니치’일 테지만,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며 살아가고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눌 때에는 마땅히 ‘재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 이름은 ‘한국’이지 ‘코리아’가 아니며, 나라밖 사람이야 우리를 가리켜 ‘코리아’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리켜 ‘코리아’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청춘을 읽는다》를 펴낸 출판사와 옮긴이는 굳이 ‘자이니치’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이 낱말 하나 때문에 책을 못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낱말 하나쯤이야 살며시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얼마든지 지나쳐도 됩니다. 또한, ‘자이니치’란 일본말을 곰곰이 곱씹으면서 우리 터전을 돌이켜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에는 아쉬움이 여러 가득입니다. 한 가득이나 두 가득조차 아닌 여러 가득입니다. 강상중 님 당신한테 젊음을 빛내 준 책 몇 가지라고 하나, 우리가 굳이 이 책들을 같이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터전에 따라 우리 마음을 빛낼 책을 찾아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다 다른 우리들은 다 다른 책으로 우리 젊음을 뽐내고 즐기고 누리고 나누며 어깨동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강상중 님이나 《청춘을 읽는다》를 펴낸 출판사나 ‘꼭 이 몇 가지 책을 읽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 《청춘을 읽는다》는 이 나라 젊은이가 또다른 새로운 책으로 저마다 다른 젊음을 다 다른 모양새로 가꾸고 일구라는 쪽으로는 줄거리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강상중 님 젊음을 흔든 책 몇 가지에만 눈길을 맞추면서 이 책이야말로 ‘젊음을 흔드는 책’이라는 목소리를 한결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얼마 앞서 유시민 님도 《청춘의 독서》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청소년책이 몹시 드물며, 청소년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아주 적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열 때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청소년책을 내는 외곬로 내는 출판사로는 ㅇ 한 곳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ㅇ이라는 출판사는 아직 ‘청소년이든 젊은이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책’은 한 번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푸름이나 젊은이한테는 ‘이 책을 읽자’고 하는 말보다 ‘이런 책이 있고 저런 책이 있으니, 저마다 눈길과 입맛과 마음에 맞는 책을 하나쯤 살피면서 저마다 다 다른 우리 삶을 생각하고 붙잡자’고 하는 몸짓으로 숱한 이야기책을 내놓을 뿐입니다.


.. 우리는 햇살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건전한 청춘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남녀는 병적일 만큼 수척하고 뒤틀리고 문드러진 나체의 소유자들뿐이다 ..  (96쪽)


 강상중 님 책이나 유시민 님 책이나 똑같이 ‘젊음을 빛내고 일깨운 책은 이러저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분이 손꼽은 책들은 모두 ‘고전’이라 일컬을 만한 책입니다. 가벼운 책이 없습니다. 가볍게 손에 쥐고 읽을 책이 없습니다. 무거운 책입니다. 무거워 손이 덜덜 떨리는 책만 들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상중 님이나 유시민 님 삶이나 눈높이에서 젊은이한테 《원피스》를 읽으라 하거나 《꽃보다 남자》를 들추라 하지는 못하겠지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나 《현시연》을 펼치라 하지도 못할 테고요.

 다시 한 번 책을 펼쳐서 읽어 봅니다. 책을 살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 말고는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도 한 번 더 돌아볼 만할 뿐, 가슴을 콩쾅쿵쾅 뛰도록 하지 않습니다.

 거듭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이한테 ‘자, 젊은이들아 책을 읽자!’ 하고 이야기를 하겠다면, 젊은이들 가슴을 쾅쾅 울리거나 소복소복 적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이들한테 ‘이 책만큼은 젊을 때 반드시 읽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내 젊을 때 이 책들로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오늘을 사는 젊은이한테는 어떤 책이 가슴이 울렁거릴까요? 저마다 다 달리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책을 다 다른 삶자리에서 찾아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하는 이야기로는 말문을 열 수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책읽기는 경력이나 권위나 학력이나 자랑이 아니거든요. 어떤 책을 먼저 빨리 읽었다고 더 빼어나거나 훌륭하지 않거든요. 어느 책을 못 읽었다 해서 바보이거나 멍텅구리가 아닙니다. 어떠한 책을 수없이 되풀이 읽었다 해서 슬기롭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이야기하려면, 책에 앞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내놓으려면, 책과 함께 삶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책을 말하는 책을 내밀겠다 하면, 책 둘레에 얽힌 발자국과 손자국을 나란히 읽어야 합니다. (4342.11.14.흙.ㅎㄲㅅㄱ)


 ┌ 《청춘을 읽는다》(돌베개,2009)
 ├ 글 : 강상중 / 옮긴이 : 이목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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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09-11-16 16:56   좋아요 0 | URL
(돌베개 편집자께서 댓글을 두 가지 더 달다가 지우셨군요. 제 편지에 몇 조각이 남아 옮겨붙어 본다면)

제 생각이 너무 짧아 그런지, 된장 님이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저는 전혀 모르겠네요.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은 그야말로 읽을 값어치가 없구나" 생각하셨다니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좋다, 싫다 단정을 할 때는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책'에서 배웠습니다. 친절하게는 아니더라도 왜 제 생각이 너무 짧은지, 이 책에 5점이라는…

"제가 이런 글을 왜 썼는지, 편집자님께서는 하나도 알아채고 있지 않으십니다." 네, 전혀 모르겠습니다. "편집자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 죄송하실 것은 없습니다만, 좀 무책임하신 듯합니다. 저는 편집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된장 님께서 이 책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듯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물론, 이 책이…

파란놀 2009-11-16 17:03   좋아요 0 | URL
편집자께서는

(1) '돌베개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2) '돌베개 책만 읽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3) '출판노동자'라는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4) '모든 책을 고루 사랑하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겸연'하게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달아 놓는 일은 '제가 알음알이로 아는 출판사 책이라고 별 다섯을 붙이는 일 없이, 모든 책에 모두 공정하게 평가를 하며 별과 비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짜증스럽고 딱합니다. 책을 그런 매무새로 만듭니까? 당신이 만든 책에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쁩니까?

어떤 작가는 제가 별 둘을 붙이고 비평도 몹시 안 좋게 했지만, 옳게 읽어내 주었다면서 고마워 했습니다. 그 작가 스스로도 책이 나온 뒤로 좀더 야무지게 글을 여미지 못했음을 느꼈다며 부끄러워 했고, 앞으로 새 책을 쓸 때에는 모두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모든 책에서 모든 알맹이를 다 집어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거짓말을 하는 책에서는 거짓말을 느낍니다. 돈맛에 들린 책에서는 돈맛을 읽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책에서는 사랑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선물로 받습니다.

강상중 님 책에서는, 아쉽게도, 겉치레와 조금 우쭐해 하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되었던 줄거리였으며, 재일조선임임을 들먹이려 했다면, 아직 제가 소개글은 안 썼지만, '고사명'이라는 분이 쓴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아주 놀라운 책이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젊은이한테든 일본 젊은이한테든 한국 젊은이한테든 '젊음을 불태우는 삶과 책'을 말하려 한다면,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글에 온힘을 바치고 불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100점 만점에 5점조차도 섣불리 붙일 수 없습니다. 그나마 강상중 님 책에서는 '참된 마음'이 어느 만큼 드러났다고 느껴서 0점이 아닌 5점입니다.

부디, 돌베개라는 출판사 편집자인 당신께서, 이 책 <청춘을 읽는다>가 얼마나 "청춘을 못 읽고 안 읽고 엉뚱하게 읽은" 책인지를 깨닫고, 앞으로 '돌베개' 이름을 내걸고 나오는 책이 뜬금없거나 쓸개빠진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돌베개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붙인 댓글은 그동안 '돌베개'에서 나온 숱한 아름다운 책에 먹을 바르는 슬픈 몸짓입니다.

지나가다 2009-11-24 10:0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건 뭐 시비를 걸자고 작정하고 비뚤어지게 자기 주관을 마구 읊어대는 전형적인 글이군요. 꼬인 마음과 잘난척하는 유치함, 무조건 소수 의견으로 강요해대는 관성 같은 것들이 글에 지독하게 배어 있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직원분이 호의로서 좋은 댓글을 달았으나 악바친 시비걸기 글에 그 의미가 사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가 책에 대해 평하는 것이야 자유겠으나 이 글은 자유로운 서평보다는 흠집내기를 즐기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파란놀 2009-11-24 14:25   좋아요 0 | URL
시비걸기로만 읽으셨다니 죄송합니다.

그러나, 시비걸기로만 읽으신 지나가다 님 마음씀이 슬픕니다.

저 또한 이러한 책을 '좋은 뜻'에서 비평을 하고 비판을 하지,
아예 쓰레기 같은 책이라면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지나가다 2인 2009-11-29 00: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책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니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기에 된장 님께서 위에 쓰신 그야말로 '책이란 다 다른 책'인 거겠죠.

허나...님께서 이 책에 대해 비판하신 부분에 대해 제가 '전혀' 공감할 수 없음은 단순히 다 다른 책이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오히려 이 책의 편집자님께서 조목조목 달아주신 답변들에 대해 죄송하게도 거의 100% 공감하게 됨은 또 왜일꺄요.

저는 책을 복잡하게 읽지도 못하며 또 복잡한 책은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갔는지는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게 흔히 얘기하는 소통의 일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된장 님께서도 댓글에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이 책 '청춘을 읽는다'는 방금 막 완독했구요, 책을 읽고 나서 강상중 님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서핑을 하다 우연히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은...'꽤 괜찮다'입니다. 예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 대목을 저자께서 다시금 되새겨주셔서 반갑기도 했고 제가 잘 몰랐던 일본에 대해서 아주 작게 나마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편집자 님께서 올려주셨던 것처럼 저자가 읽었던 책 중에 어떤 건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이건...흠...별로겠어...라고 쉽게 넘겨버렸습니다. 전혀 '이 책이야말로'라는 강제성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건가요?

그리고...된장 님께서 답해주신 내용 가운데

'제가 이런 글을 왜 썼는지, 편집자님께서는 하나도 알아채고 있지 않으십니다.

편집자님 글을 읽은 느낌은, "이 책은 그야말로 읽을 값어치가 없구나"일 뿐입니다. 아쉽지만, 편집자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말입니다. 솔직히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한 번 꼬인 걸 놓고 상대방이 마음 터놓고 풀어보려했는데 너무도 처참하게 무안주며 "야~ 너 진짜 못 알아듣는구나 너 그 수준밖에 안되니 우리 서로 말 섞지 말자"라고 하는 걸로 밖에 안보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또 뭔가요?

(1) '돌베개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2) '돌베개 책만 읽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3) '출판노동자'라는 편집자로 이 책을 생각하는지
(4) '모든 책을 고루 사랑하는' 독자로 이 책을 바라보는지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 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된장 님께서는 (4)번의 입장에서 편집자 님이 댓글을 다시길 원했던 건가요. 글쎄요. 저는 위의 어느 입장이든 상관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자신의 위치에서 진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거 계속 얘기가 길어지는데요. 안하고 지나가면 안될 것 같아 이어봅니다.

'그렇게도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댓글을 달아 놓는 일은 '제가 알음알이로 아는 출판사 책이라고 별 다섯을 붙이는 일 없이, 모든 책에 모두 공정하게 평가를 하며 별과 비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짜증스럽고 딱합니다. 책을 그런 매무새로 만듭니까? 당신이 만든 책에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쁩니까?'

왜 함부로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왜 함부로 평점이 낮아 기분이 나빴냐고 지래짐작하십니까? 이상하죠. 오히려 '제대로 읽지 않은 분'은 된장 님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된장 님의 글에 대한 반박(?)은 이미 편집자 님께서 충분히, 그리고 속시원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사족일 수 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아, 끝으로... 지나가다 님께서 써주셨듯이 '시비걸기'로 읽혀지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않으셨으면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한 번은 우연일지라도 두 세번 반복되면 그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파란놀 2009-11-29 08:44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이든 그 사람이 지내온 삶에 따라 '읽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 삶에 따라 '좋게' 받아들일 수 있고 '아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강상중 님은 겉멋이나 겉치레로 살아온 분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강상중 님 책이 더없이 부질없거나 안타깝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어느 만큼 '독자를 얻을' 수 있겠으나 더 깊은 골을 찬찬히 짚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라든지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쓴 <슬픈 미나마타>라든지 얼마 앞서 유선진 할머니가 쓴 <사람 참 따뜻하다>라든지, 또는 팔리 모왓 님이 쓴 <잊혀진 미래>라든지 시모무라 고진 님이 쓴 <지로 이야기> 같은 책을 '가슴으로 새기며' 읽을 수 있으면 <청춘을 읽는다>에서 "청춘"과 "읽는다"가 제대로 삭여지지 못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을 '시비걸기'로 느끼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시비걸기로 느끼는 분은 언제까지나 시비걸기로만 여기며 그 테두리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글에 '시비 거는' 사람이 '시비만 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뜻으로든 궂은 뜻으로든 '이야기 걸기'일 테니까요. 제가 보지 못한 대목을 짚으며 시비를 건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눈길로 그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면 웃습니다 :)

지나가다 2인 2009-11-29 00: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리고 된장 님께서 추천해주신 '산다는 것의 의미'는 앞으로 읽을 책 목록에 넣어놓겠습니다.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란놀 2009-11-29 08:4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을 읽는 분들이 '사람 삶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땀흘린 책을 알아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저는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같은 만화책 또한 퍽 좋아하는데, 우리 옆지기는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이나 아다치 미츠루 만화는 좀 시큰둥하게 보더군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 같은 책은 4/5까지는 괜찮았는데 끄트머리 1/5에서 영... 어긋나 버려서...

지나가다3인 2009-12-02 17: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타깝습니다. '슬픈 미나마타'의 리뷰를 보고 된장님 블로그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요. 윗분도 지적해주셨다시피 모든 일이 한 번은 우연일지라도 두 세번 반복되면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편집자분이 지나가다가 몇 가지 정중하게 의문을 표한 글에 된장님이 다신 댓글은 근거와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적어도 정성스럽게 책을 편집한 사람이 직접 남긴 댓글이니만큼, '편집자님의 생각이 너무 짧구나 싶습니다'라는 말로 그 글을 깔아뭉개는 것만은 하지 않으셨다면 좋았을텐데요. 물론 솔직한 생각을 표시하는 것이 나쁜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만큼 상대방 입장도 고려했으면 더 나았을뻔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 세상은 뒤틀리고 비틀리며 엉터리로 가고만 있습니다'라는 말도, 편집자의 댓글 몇 개만으로 결론 내리기엔 무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파란놀 2009-12-02 20:45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저는 제가 늘 가장 바르고 곧은 눈길로 사람과 세상과 삶을 들여다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그날그날 살아가는 대로 적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요즈음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출퇴근하는 고달픈 고리'에 매여 있다 보니, 이런 댓글을 좀더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이번 <청춘을 읽는다> 같은 책은 굳이 서평을 달 만한 무게나 값이 없었다고 느낀 그대로 아예 글을 안 썼다면 더 나았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아주 나쁜 책'이 아니라 '무언가 놓친 지점이 많은 책'이기에 그 대목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띄운 곽아람 님 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와 같은 책이 '문제라거나 못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글쓴이와 편집자 모두 느끼거나 잡아채지 못하는 아쉬운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이 무엇인가를 나중에라도 깨우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님 말씀처럼 세상 모든 말과 생각은 '댓글 몇 개만으로 결론 내리기' 어렵습니다. 또한 결론은 함부로 내려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는 웬만한 댓글에는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지나가다2인 2009-12-03 01: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위에 글을 올렸던 지나가다2인입니다.^^;;

제가 달았던 글에 된장 님께서 어떤 답변을 다셨는지 궁금해서 들어와봤는데 얘기들이 좀 엉뚱하게('당신'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말 논쟁) 흘러가고 있었네요.

다른 건 그냥 그렇다 치고, 일단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된장 님께서 '당신'의 용도가 다양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당신'은 3인칭 극존칭으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거 '3인칭'입니다. 1인칭이나 2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쓸 때 극존칭이 되는 것이죠. 된장님의 예문도 3인칭인 경우의 문장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신'이 2인칭이 될 때는 부부끼리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곤 존칭보다는 상대를 낮잡아 부르거나 편하게 부르는 용도가 되는 게 상식입니다. 된장 님께서 엠제이비 님을 호칭하실 때는 2인칭으로 '당신'을 사용하셨을테니 답은 어느정도 나온 것 같군요. 설령 된장 님께서 상대방을 높이는 용도로 '당신'을 사용하셨다고 해도 그건 전혀 일반적인 용법이 아닙니다. 백이면 백, 상대방이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죠.

그리고...쓰다만 글을 상대방 동의 없이 올린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엠제이비 님께서 사과를 요구하셨으나 무시하신 거 맞죠? 흠...

끝으로 '앞으로 웬만한 댓글에는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느낍니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악플을 단 것도 아니고 상식적인 수준의 댓글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시면 블로그는 왜 하시는 건지 모르겟네요. 그냥 자기 컴퓨터 하드에 일기쓰듯 기록하시고 혼자 보고 싶으실 때 보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인터넷은 공공의 공간입니다. 검색하면 된장 님께서 쓰신 글들이 쫙 뜨는 거 아시잖아요. 그 공공의 공간에 글을 쓴다면 그 글을 통해 영향받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임감은 다양한 비판에 대한 겸허한 반응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된장 님께는 그런 면이 안보입니다. 아쉽네요.

파란놀 2009-12-03 05:59   좋아요 0 | URL
오늘날 우리들이 '당신'을 엉터리로 쓰고 있는데, 국어사전에서 이 흐름을 받아들여 '당신'을 '낮춤말'처럼 다루고 있습니다만, '너'나 '자네'나 낮춤말처럼 쓰는 낱말이고 '당신'은 예의를 갖추어 하는 말입니다. 또는 '싸움을 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엉터리로 쓰기 때문에 때때로 '님'이라는 낱말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쓰는 말을 옳고 알맞게 가누려는 마음이 없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자면 '님'이라는 낱말을 쓰는 일이 나을는지 모릅니다.

..

엠제이군 님은 '쓰다 만 글'이 아니라, 일부러 제 마음을 들쑤시려고 저만 보도록 해 놓은 악플을 그렇게 해 놓은 뒤 지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악플은 저한테 돌아오는 화살이 아닌, 바로 그런 악플을 쓰는 님한테 고스란히 돌아가는 글임을 알려드리려고 달아 놓았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다면 이렇게 붙여놓는 일은 잘못입니다. 법에 따라서 사과하라고 한다면 잘못한 일이므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삶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그분이 느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왜 싸워야 하는가요?

책 하나를 놓고 어떤 이는 이런 마음을 느껴서 이런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데, 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가요? '느낌글' 하나를 놓고는 '동의나 반대'가 아닌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가 있을 뿐입니다.

..

말 그대로 웬만한 댓글에는 대꾸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글에는 댓글이 안 달려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댓글을 안 달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댓글을 다는 분들 스스로 '이야기(소통)'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면, 서로한테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말이 좋아 인터넷이 '공공 공간'이지, 제대로 '공공 공간' 노릇을 안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저라고 하는 사람은 '공공인'이 아니라, 알라딘 서재에 글을 쓰는 한 사람이지만, 저는 제 모습이 다 드러나도록 되어 있고, 다른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댓글을 남깁니다.

님 말씀처럼 '다양한 비판'에는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양함'이라는 옷을 입고 '다양하지 않게 헐뜯는' 말에는 그리 달가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헐뜯기라 하여도 저한테는 밥이 되는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첫 수업
박원순, 홍세화 지음 / 두리미디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배움터가 못 되는 학교에 갇힌 사람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3] 박원순과 52명, 《내 인생의 첫 수업》



 열여섯 달이 되어 가는 아기는 ‘엄마’와 ‘아빠’와 ‘아기’라는 말 다음으로 ‘아, 됐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말로 이 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쏭달쏭이지만, 우리 귀에는 ‘아, 됐다’로 들립니다. 아기가 무언가 집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떼를 쓸 때에 모른 척하고 있는데, 아기가 집어 달라는 무언가를 집어서 슬그머니 건네면, 아기는 한숨을 쉬듯 ‘아, 됐다’ 하고 내뱉습니다.

 엄마가 문득 읊는 소리를 듣고는 따라하는지, 그냥저냥 내는 소리가 ‘아, 됐다’처럼 들리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은 키로 발돋움을 하며 무언가 집으려고 용쓰는 아기가 드디어 제 손에 무언가를 집고 나서 내뱉는 그 짧은 소리마디는 더없이 잘 어울리면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 내가 다닌 학교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1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했다. 프랑스의 학교마다 그들의 국가 이념인 ‘자유ㆍ평등ㆍ박애’가 강조되듯이. 그러나 내가 다닌 학교에서 강조된 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반공ㆍ방첩’이었다 … 젊은 세대들은 거의 이 사건을 모른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과 6ㆍ10민주항쟁조차도 모르는데, 하물며 보도지침사건을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도지침사건은 한국 언론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  (16∼17쪽/홍세화, 97쪽/김주언)


 아기는 날마다 새롭게 배웁니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집과 똑같은 동네를 보면서도 배우고, 때때로 조금 먼 동네로 마실을 가며 부대끼는 모습과 사람들을 보면서도 배웁니다. 낯선 바람을 쐬면서 배우고, 낯익은 바람을 쐬면서 배웁니다. 어느 하나 배움 아닌 이야기가 없는 우리 터전입니다. 좋은 모습을 배우는 한편, 궂은 모습을 배웁니다. 좋은 사람한테서 좋은 내음과 목소리와 생각과 삶을 살며시 배울 수 있을 테고, 궂은 사람한테서 궂은 내음과 목소리와 생각과 삶을 안타깝게도 어느 결엔가 배울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꼭 아이를 키우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제 둘레 터전을 더 깊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이가 없이 어른끼리 살아가는 터전이라 하여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맑은 숨과 따뜻한 햇볕을 쬘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부터 내 이웃한테 따사로운 사람이어야 하며, 내 이웃은 둘레 사람들한테 넉넉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살 만합니다. 동네는 돈에 눈먼 이들이 함부로 짓밟거나 까부수는 재개발구역이면 안 됩니다. 한 동네에 뿌리내린 채 서른 해이고 쉰 해이고 백 해이고 걱정없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시끄럽거나 지저분한 장사꾼이 들이닥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좀처럼 살 만한 터전을 찾기 어렵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대로,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은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 대로, 마땅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힘이 듭니다.

 참말 왜 우리는 이렇게 온누리를 들쑤시면서 끝없이 재개발을 되풀이해야 할까요. 갯벌을 갯벌답게 살리고, 바다와 냇물을 바다와 냇물 그대로 살리면 안 되는가요. 논밭과 산들에 그렇게 비료와 농약을 쳐대야만 하는가요. 좀 못생기고 자그마한 능금과 배와 복숭아와 포도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요. 더 빨리 달리는 고속철도보다, 더 둘레 터전을 아늑하게 보듬으며 환경사랑을 함께하는 철도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요.

 이 나라를 지키는 길에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몹시 안쓰러운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법 없이 느긋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힘차고 슬기로운 삶터를 일굴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 많은 돈이 없이도 얼마든지 나라를 북돋우고 살림을 북돋우며 교육과 문화와 과학을 북돋울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 당시에 대한 기억들은 온통 선생님들께 ‘개기고 기어오른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내심으로 선생님들을 깔보고 무시했다. 학생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대접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세상 물정에 어둡던 나는 쉬는 시간이면 맨 뒷자리에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교련반대시위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나는 그냥 멀리 피해 다녔다. 행여 그쪽 가까이 지나가다가 잘못될까 두려웠고, 혹시 졸업 이후에 공무원 등으로 취직하는 데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20쪽/오창익, 112쪽/이학영)


 《내 인생의 첫 수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덜컹거리는 지옥철에서 이 사람한테 밀리고 저 사람한테 발을 밟히며 읽습니다. 밀어붙이는 사람이나 발을 밟는 사람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빛조차 없는 메마른 낯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밀치고 발을 밟을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내 옆과 뒤에서 똑같이 하는데 내가 밀치거나 밟을 밟았대서 내가 뭔 잘못인데?’ 하는 뚱한 모습입니다.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힘겹게 책을 손에 쥐어듭니다. 모두 쉰세 사람이 저마다 당신 삶을 오늘과 같은 흐름으로 이끌어 준 ‘고마운 스승’이 누구였는가를 떠올리면서 다 다른 삶을 다 다른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쉰세 사람은 모두 우리 세상을 좀더 낫고 알차고 아름다운 쪽으로 이끌고 싶어하는 분들로, 저마다 시민사회 모임에 몸을 담고 온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사회 디자이너’라고 일컬으면서 우리 사회가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치지 않게끔 애쓰고 있음을 여러모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쉰세 사람이 되는 다 다른 삶이지만, 다 다른 사람들 삶이 어쩐지 몹시 닮았구나 싶습니다. 하나같이 초중고등학교 적을 ‘즐겁게’ 떠올리지 않습니다. 입시에 매이는 학생 때는 스스로를 사람답게 살지 못한 때로 떠올립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취업이라는 벽에 부딪쳐 제 밥그릇을 챙기는 쪽에 좀더 기울어져 있거나, 공장이나 시위판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처음 보고 느끼며 배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금세 끝까지 읽어치웁니다. 다 읽어치운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글쓴이는 모두 쉰셋이지만, 왜 한 사람이 쓴 이야기라는 느낌만 드는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어이하여 쉰세 사람이 지내온 발자국이 마치 한 사람이 지내온 발자국처럼 보이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 비판이라는 미명으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험담해야 자신의 존재가 살아남는 우리 나라 운동권 문화에 익숙하던 나에게,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적절한 유머로 만들어 가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강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 그 과정에서 강압적이며 불합리한 결정의 뒤에 돈과 권력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그래서 과학은 가치중립이라고 믿던 ‘이공계’는 인문학을 더 공부해야만 한다는 걸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  (71쪽/나효우, 149쪽/박병상)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인천역에서 내려 어두움 깔린 길을 걷습니다. 코앞에 걷고 있는 젊은 짝꿍이 “씨발, 추워.”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음직한 새파란 이들이 그리 춥다고 하기 어려운 이 날씨에 춥다고 하면서 “씨발”을 입에 붙입니다. 영 도 밑으로 뚝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춥다고 느끼면 춥겠지요.

 아침에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스치는 고등학교 아이들 또한 어느 누구한테나 입에 “씨발”이 붙어 있습니다. “씨발, 아침부터 …….”, “씨발, 오늘도 …….” 저녁나절 동인천역 둘레 술집거리에서 노닥거리거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고등학교 아이들 입에도 언제나 “씨발”이 매달려 있습니다. 단골로 가던 창영초등학교 앞 분식집은 이제 문을 닫고 말았는데, 이 분식집에 들어앉아 떡볶이를 먹으며 한 시간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곳을 드나드는 초등학생과 여고생을 살펴볼 때에는 “씨발”을 입에 달던 아이는 못 보았습니다.

 동네 탓일는지, 가게 탓일는지, 또래동무 탓일는지, 둘레에 어떤 어른이 있는가에 따라 다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창영초등학교 앞에 있던(이 학교 바로 옆에는 여상이 있습니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어린 학생이 함부로 “씨발”을 입에 올렸을 때에 가만히 있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넌지시 타이르며 이런 말을 쓰지 않도록 이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때때로 떡볶이를 사는 곳이 있습니다. 대한서림과 동인서관 옆에 나란히 세 곳 붙어 있는 분식집 가운데 한 집에서 사는데, 이 분식집들을 드나드는 어린 학생이나 나이 좀 먹은 아저씨들이나, 분식집 할매한테 으레 반말을 늘어놓습니다. “할머니, 빨리 줘.”라든지 “할머니, 얼마야?” 하고. 어떤 이는 ‘할머니’라고도 안 붙이고 그냥 반말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런 반말지꺼리에 딱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으레 높임말을 씁니다.

 할머니 분식집은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도 보았고, 옆지기와 함께 살며 딸아이를 낳은 요즈음도 봅니다. 할머니는 더 늙고 힘이 없어질 때에도 가게를 열어 놓으실 텐데, 앞으로 열 해쯤 더 이곳에서 장사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림해 봅니다. 그러니까, 이 할매 분식집을 찾아오는 나이 좀 먹은 이들은 당신이 학생 때부터 온 손님이요, 이제는 초등학생 아이를 데려오며 이곳을 들를 만한 때라 하겠습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이이들 나이 좀 먹은 이들은 학생 때부터 할매한테 말을 까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학교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은 앞으로 나이를 좀더 먹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 이곳을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에도 어김없이 말을 깔 테지요.


.. 그렇지만 중대장의 공명선거 의지는 상급자의 압력에 의해 바로 제동이 걸렸다. 거기에다 기무대 소식 보안반장까지 직접 찾아와서 “상급 라인에서는 발벗고 열심히 뛰고 있지만, 하급 라인에선 많이 ‘민주화’되어 여당표가 70퍼센트도 힘들 것이다. 너무 강압적으로 하지 말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해 줘라. 서신검열기로 표본조사를 하여 여당득표율이 저조할 때는 해당 중대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라고 엄포를 놨다 … 그 대학이란 것이 이렇게 비싼 것이었구나! 대학생이란 것이 그저 합격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돈을 풍덩풍덩 바쳐야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구나! 나는 당시 이런 바보 같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  (87쪽/이지문, 159쪽/김언경)


 집에 닿아 가방을 내려놓고 씻고 아기를 안습니다. 하루 내내 아기와 함께하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만 함께해야 하는 삶이 퍽 고단합니다. 더욱이 바깥일을 한다며 서울을 오가는 길에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사람들이 그리 따사롭거나 넉넉하지 못해, 이런 바깥물이 제 몸에 배어들어 아기한테 옮아갈까 걱정스럽습니다. 제아무리 바깥물이 어지럽고 어수선하더라도 저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을 알뜰히 간수한다면 근심될 일이 없다 할 테지만, 한 사람한테 따스함과 넉넉함보다는 성과와 돈과 이름값을 바라는 이 삶터에서 제자리와 제길을 건사하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싸우고 싶지 않은데 싸우도록 내몰고, 어깨동무하고 싶은데 어깨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다투고 싶지 않은데 당신들과 같은 옷을 입지 않으면 편을 가릅니다. 따돌리기도 싫고 따돌림받기도 싫은데 당신들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하거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합니다.

 오늘 우리 삶터에는 학교라 할 만한 학교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 우리 삶터는 학교 울타리 안쪽에서만 가르치고 배우는데, 울타리 안이나 밖이나 매한가지로 어지럽고 어수선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권을 박차고 나와도 제도권 틀거리요, 제도권 바깥에서 힘내어 싸운다 할지라도 제도권 테두리로구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도권을 비판하면서 제도권을 바로잡자고 애쓰는 쉰세 분이 쓴 토막글을 모은 《내 인생의 첫 수업》은 어쩔 수 없이 제도권 이야기에 파묻힐밖에 없고, 이리하여 쉰세 사람 쉰세 가지 삶이라고는 하나, 속살은 하나같이 어슷비슷하거나 도토리 키재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같은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움터가 못 되는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면, 살림터가 되기 힘든 울타리에 매이는가 봅니다. 배움터가 되는 학교를 스스로 찾아나서지 못하면, 살림터가 될 우리 세상을 일구지 못하는가 봅니다. (4342.11.12.나무.ㅎㄲㅅㄱ)


 ┌ 《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 글 : 박원순을 비롯해 쉰두 사람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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