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의 환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31
클레망 셰루 지음, 정승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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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기쁨 하나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 클레망 셰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앎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알아서는 안 되고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알고 있다면 앎을 머리에 가두지 말고 온몸으로 녹아내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며,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내 삶이 송두리째 드러나도록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다루는 글쓰기이고 그림그리기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노래부르기이고 춤추기입니다. 삶을 영글은 농사짓기이고 아이키우기입니다. 우리 둘레에서 맞아들이거나 부대끼는 일놀이 가운데 삶하고 이어지지 않는 일놀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애틋한 삶이고 모두 가멸찬 삶이며 모두 땀흘리는 삶입니다. 밥 한 그릇을 마련할 때에도 애틋한 삶이고, 밥그릇 하나를 설거지할 때에도 가멸찬 삶이며, 아이한테 노래 하나 들려주며 재울 때에도 땀흘리는 삶입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가운데 곰삭일 수 있으면 굳이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가 없어도 넉넉합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살피며 어루만지는 가운데 되뇌일 수 있으면 따로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로 나타낼 때에 눈물과 웃음이 절로 깃듭니다.

 어떤 잘난 사람을 따라하거나 흉내낼 글이 아니요 그림이 아니며 사진이 아닙니다. 대단한 노래꾼을 따라하며 노래를 불러야 맛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에 감겨드는 느낌을 살리고 사랑하며 부르는 노래가 제맛입니다. 엄청난 춤꾼을 흉내내며 춤을 추어야 멋이 아닙니다. 내 몸에 찾아드는 기쁨과 슬픔에 따라 움직이며 즐기는 춤이 제멋입니다. 스스로 제 결을 찾아야 할 삶이지, 스스로 제 결을 놓거나 버리며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고 다른 곳에 손길을 뻗을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겉치레로 내동댕이칠 수 없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삶이 아닙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속차림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속을 차리는 일놀이일 때라야 비로소 삶입니다. 속을 차리는 내 삶이란 바로 참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려 하는 우리들이라 할 때에는 바야흐로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볼 뿐 아니라 너그러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기 다루는 재주를 배워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장비를 갖추어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 교본을 챙겨 읽는다든지 사진 강좌를 찾아 듣는다든지 해서 사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면 내 삶을 잘 꾸려야 합니다. 사진을 신나게 즐기고 싶다면 내 삶을 신나게 즐기고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란다면 내 삶을 아름답게 여밀 노릇이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꿈꾼다면 내 삶을 사랑스레 가꿀 노릇입니다.

 나라 안팎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진쟁이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있습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금 분할 법칙에 충실한 그의 이미지 위에 구성 도식을 적용해 가며 이 사실을 설명하곤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마네킹, 인형, 매춘부, 눈 감은 사람, 잠자는 사람, 꿈을 꾸거나 무언가에 도취된 사람 등 초현실주의 신화의 좋은 구성 요소를 사진으로 담아냈다(38, 41쪽).”고 합니다. 이때에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갓 사진기를 손에 쥔 때요, 그러니까 새내기 사진쟁이 때 모습이라고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한층 성장하는 데는 전쟁의 경험, 수용소 생활, 지인들의 실종 같은 사건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전쟁 이후, 염려하던 마음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의 추상적 접근법’보다는 ‘인간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 이제 그는 선동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사진가가 아니라, 정보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진기자였다(58, 64쪽).”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픗내기나 새내기였을 적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사진을 할지 그림을 할지’ 망설이는 가운데 ‘돈 걱정을 따로 하지 않는 넉넉한 살림’에서 ‘사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을 뿐 아니라, ‘사진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담아서 보이고 나눌는지’는 살피지 못한 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사위를 넘기는 동안 비로소 당신한테 ‘사진이야말로 내 삶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으로 태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늘 좋은 이미지를 노렸다(45쪽).”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 언제나 좋은 사진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지, 어느 때에는 대충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어설피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이웃 아줌마가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사랑스러운 집식구가 찍어 주기를 바라며 찍든 늘 온힘과 온마음을 바쳐 나한테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진을 찍든 이제까지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나으며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사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사진을 선택하고 의미 있게 배열하는 작업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8쪽).”고 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사진을 잡지사에 팔고 신문사에 팔았을 텐데, 이렇게 돈을 받으며 사진을 내어줄 때에 편집자들은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는 한편, 당신이 사진으로 담아 나누려는 이야기하고 엇나갈 때가 있다고 밝힙니다.

 뭇사람들이 사진밭 큰사람으로 섬기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놓고 돌아볼 때에 이런 말마디는 퍽 얄궂습니다. 그러나 큰사람이든 작은사람이든 이런저런 다툼과 부딪힘과 아픔과 생채기를 겪거나 치르는 가운데 차츰차츰 당신 자리를 찾아 가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주문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부탁에 따르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바로 내 삶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되어야 시나브로 나를 비롯한 내 둘레 사람들 모두한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는 땀방울로 영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미국에서 당신 사진을 전시하던 이들이 처음 붙였던 이름이라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마디는, 우리 말로 쉽게 옮기면 “바로 이 사진 하나 얻는 때”를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내는 삶이었다는 당신 매무새는, 사진찍기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사진찍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고마운 이야기 하나라고 느낍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언제나 발생한 사건자 자체보다는 그 안의 진실을 다양하게 해석해 보여주는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96쪽).”고 하니까요. ‘순간을 기다리며 찍는 당신’이 아닌 ‘어느 한때에 깃든 삶을 누구보다 스스로 느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삶을 글로 함께 적바림하는 사람은 몹시 드문 가운데,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우리한테 남긴 사진 못지않게 우리한테 남긴 글이 제법 많습니다. 이리하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자그마한 책에는 당신이 걸어온 사진삶이 차곡차곡 담기는 한편, 당신이 밝히며 늘 거듭나고 있던 사진말이 알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은 꽤나 많으면서, 정작 당신 사진 작품을 찬찬히 챙겨 본다든지 당신 사진 이야기를 곰곰이 찾아 읽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브레송이 어떻고 저떻고 하고 입방아를 찧기 앞서, 브레송이니 부라자이니 어렁저렁 말밥을 삼기 앞서, 사진 하나에 온삶을 들여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을 펼쳐 온 삶자락을 들여다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떤 매무새로 껴안았는지 살필 노릇이고,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 돌아볼 노릇이며,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에 어떤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생각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는 “결정적 순간의 환희”라는 이름이 하나 덧붙습니다. 책을 두 번 내처 읽고 나서 이 덧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사람한테는 더도 덜도 아닌 “사진을 찍는 기쁨”일 뿐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찍힌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바로 이때”를 찍었다 할는지 모르고,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기막힌 모습을 짜릿하게” 찍었다 할는지 모르나,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으로서는 ‘찍어야 할 모습을 찍었’을 뿐이요, ‘담아야 할 삶을 담았’을 뿐 아니랴 싶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 담긴 당신 삶과 넋을 돌아보니 그저 이런 느낌이 듭니다. 떠들썩하니 무슨무슨 이름을 갖다 붙이며 떠받들 브레송이 아니라, 그예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된 삶이었던 브레송이라고 느끼며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될 길을 찾아나서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4343.6.5.흙.ㅎㄲㅅㄱ)


[책에서 그러모은 생각조각]
ㄱ. 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나 일화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거기 있었다.
ㄴ. 마그네슘 플래시는 빛이 전혀 없을 때라도 허용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만다.
ㄷ. 인간적 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위적인 면을 반드시 피하고 사진기와 사진 찍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ㄹ. 만일 좋은 사진을 조금이라도 잘라낸다면 결국 균형은 깨지게 된다.
ㅁ. 사진기는 작업의 도구이지 그저 예쁜 장난감 기계가 아니다. 이 기계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ㅂ. 나는 내 사진을 트리밍하거나 피사체를 재배치해서 좀더 나아 보이도록 시도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 사진이 그리 좋지 않았다면 프레임 안의 기하학적 비율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저기 변형하여 인화하더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ㅅ. 사진가는 자신을 잊고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꿰뚫어보며, 상대가 지금 그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으로까지 정교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한다.
ㅇ. 탐미주의에 앞서 현재의 삶이 드러나 보이는 이미지에 애착을 가진다.
ㅈ. 나는 보도기자이지 화실의 초상화가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외부세계(혹은 내적 세계)는 내 작품의 주제이자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 무대 배경이다.
ㅊ. 애호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고, 기술자들은 시험 중인 기계 속에 파묻혀 있다.
ㅋ. 사실 우리 모두는 모방자들로서, 무엇보다 ‘본질’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우리 자신을 부담 없이 표현해야 한다.
ㅌ. 나는 위대한 사진을 찍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진이다.
ㅍ. 나는 사진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다.
ㅎ. 나에게 보도사진은 눈과 손, 그리고 두 다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클레망 셰루 씀,정승원 옮김,시공사 펴냄,2010.5.2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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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25 : 길을 거닐며 새기는 책

 스물석 달째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아이가 낮잠을 다문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자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물석 달 동안 이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점을 먹고 살살 졸릴 무렵 그예 잠들어 주면 낮에 한결 기운차고 신나게 놀 수 있으며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밤에 깊이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금 싱그러우며 기운차게 놀 수 있고, 하루하루 이런 나날을 되풀이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우리 딸아이는 도무지 낮잠을 자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밤잠이 길지 않습니다. 새벽 여섯 시 무렵에 어김없이 깨어나려 하는데, 요사이 하루하루 낮이 길어지고 새벽이 일찍 찾아오니 벌써 다섯 시 무렵부터 깰려고 옴쭐옴쭐합니다. 바깥이 하얗게 밝아 오면 저도 잠에서 깨려고 부시럭거립니다. 애 아빠로서는 아이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이 조용히 일할 애틋한 때이기 때문에 으레 새벽 너덧 시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조각 하나 겨우 끄적일 무렵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아빠!” 하고 부르며 찾으면 “아이구!”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오늘도 우리 아이는 어김없이 낮잠을 건너뜁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를 데리고 바깥마실을 나옵니다. 졸릴락 말락 하니까 한 시간쯤 걸리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아이는 아빠 품에만 안기려 하고 걷지를 않습니다. 이 녀석 졸리기는 무척 졸린가 보네. 그러나 잠들지도 않습니다. 자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이렇게 두 시간 반쯤 낑낑거리며 땀 뻘뻘 흘리는 골목마실을 하노라니 비로소 곯아떨어집니다. 아이가 곯아떨어지고서야 집으로 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빠도 아빠 일을 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곯아떨어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힘들며 더딥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가까스로 집에 닿습니다. 애 아빠는 더없이 고단하여 찬물로 한 차례 씻은 다음 아이 옆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딱히 아빠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멍하니 앉아 책조차 못 펼칩니다.

 며칠 앞서 우리 친형이 산티아고로 떠났습니다. 쉰 날 남짓을 다니는 나들이길이라고 하며 떠났습니다. 떠나는 길에 우리 식구한테 살림돈을 두둑히 보태 주었습니다. 한 달 반치 달삯에 이르는 돈을 주었습니다. 요사이 ‘산티아고 순례자’가 많이 늘었고 ‘산티아고 순례기’ 책이 꽤 많이 나온다는데, 우리 형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먼 나들이길을 떠나는지 궁금합니다. 먼 나라에서 낯과 물이 선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거닐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받아먹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형은 형한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으며, 형한테 주어진 길을 어떤 매무새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형으로서는 곧 마흔 줄 나이에 접어듭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든지 《중년 이후》라는 책을 쓴 소노 아야코 님은 나이가 젊을 때에는 젊은 대로 좋고, 나이가 들 때에는 나이가 드는 대로 좋다고 밝힙니다. “사람도 물건도 살아 있는 생물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든가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그러한 존재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소중한 의무인 것이다(92쪽)” 하고 《중년 이후》에서 밝힙니다. 먼길을 땀흘려 걷노라면 형은 형대로 저는 저대로 우리 삶을 알뜰히 사랑할 몸짓 하나 익힐 수 있겠지요. (4343.6.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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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루공화국의 비극 - 자본주의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
뤽 폴리에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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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가 아름다운 나라를 망가뜨렸나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7] 뤽 폴리에, 《나우루공화국의 비극》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요, 공산주의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돈이 없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여기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국민소득이 꽤 높은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은 아니지만 국민소득이 제법 높은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국민소득은 높을지라도 복지와 문화와 교육은 꽤 뒤처진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번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를 들여다보면 적잖은 후보자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무상급식’은 정치 후보자가 공약으로 내세울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이런 마땅히 나라가 할 일을 나라가 마땅히 안 하면서 정치 후보자들이 선거철마다 공약으로 되풀이해서 내놓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이면서 공업국이요, 토목국입니다. 공장이 온 나라에 넘치는 한편, 숱한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너무 우악스러운 이름이라 여겼는지 사라진 ‘경부운하’와 ‘경인운하’ 토목공사는 저마다 ‘4대강 사업’과 ‘아라뱃길’이라는 새 이름으로 갈아타고 끝도 모르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농업국이 아닙니다. 농업을 북돋우지 않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환경을 살리는 유기농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아니, 유기농을 북돋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온통 도시에 바글바글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유기농’ 곡식으로 먹여살릴 수 없습니다. 흔한 말로 ‘남녘땅에서 쏟아지는 음식물쓰레기 부피’는 ‘북녘땅 사람들을 모두 먹여살리고 아주 많이 남을 만큼 되는 부피’라 할 만큼 남녘땅에서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버리는 먹을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훌륭한 유기농 곡식을 일군다 하더라도 버려지는 쓰레기가 잔뜩잔뜩 있으니 농사짓는 보람이 없을 뿐 아니라 참된 농사를 지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치꾼 공약으로 ‘무상급식’은 마땅히 이루어질 수 있으나, ‘친환경’ 무상급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19세기에 나우루는 여전히 야자나무로 뒤덮인 땅이었다 … 나우루인들은 대개 해변에서 하는 여러 가지 놀이와 즐겁게 낚시하기를 좋아했다. 저녁이 되면 나우루인들은 함께 음식을 먹고 불가에서 밤을 지새웠다 ..  (26, 33쪽)


 자본주의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면 어떤 ‘주의’를 섬기든 착하지 않고 참답지 않으며 곱지 않은 사람들이 나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섬기든 사회주의를 섬기든 공산주의를 섬기든 민주주의를 섬기든 독재정권을 섬기든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갈 수 있으면 나쁠 일이란 없다고 느낍니다. 우두머리란 사람이 백 살까지 살며 백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린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간다면 우두머리가 누구이건 말건 아랑곳할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일본 배우 미야자와 리에라는 분이 한창 젊고 사랑받으며 일하던 어느 날, 일본 총리가 마련한 잔치에 초대되어 가 있던 자리에서 “난 일본 총리가 누구인지 몰라요”라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는데, 대통령 이름을 모르든 시장이나 구청장 이름을 모르든 군수나 면장을 이름을 모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뿌리내린 동네에서 아름다이 살아가고 있으면 넉넉합니다. 좋은 정치꾼이 있건 몹쓸 정치꾼이 있건 우리 동네를 우리 힘과 슬기로 알뜰살뜰 가꾸고 있으면 넉넉합니다. 신동엽 님 시 〈산문시〉에 나오듯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너무 없어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꽂고 시인한테 찾아가 술 한잔 마시자고 굽신거릴 수 있도록 우리들은 ‘정치 생각’이 아닌 ‘삶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언제나 말썽거리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사람이 말썽거리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다 한들 이 제도를 다루는 사람이 말썽거리이니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엉망이 되며 교육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몹쓸 제도로 짓눌려 있다 한들 이 제도에 허덕이거나 휩쓸리지 않으면서 우리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레 살아가고 있으면 착하고 참된 훌륭한 일꾼이 태어납니다.


.. 인산염은 1907년에 채굴되기 시작했다 … 20세기 초 몇 해 동안 나우루는 노천 광산이나 다름없었고, 모두가 이익을 챙겼다. 영국인들은 채굴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인들은 여전히 섬을 지배하면서 채굴 이익에 대한 배당금을 받았다 … 인광석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농업 발전을 가져오지만, 전시에는 폭발물 제조에도 쓰였다. 태평양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의 전략지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1948년, 나우루인들은 인산염 채굴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그 총수입에서 고작 2퍼센트만을 받았다 ..  (31, 36, 41쪽)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유럽(서구)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평화로운 태평양 섬나라 삶을 보여주는 작은 책입니다. 평화로이 살아가는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은 ‘식민지를 넓히려는 꿈’을 키운 유럽사람 때문에 평화에 금이 갑니다. 그 뒤로는 ‘돈을 얻으려는 꿈’을 키우던 또다른 유럽사람과 일본사람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평화에 얼룩이 집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동안 당신들을 해코지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총칼과 술과 돈 때문에 스스로 평화를 허물고 맙니다.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이라는 책은 온누리 사람들이 나우루공화국에서 콩고물을 빼앗아 먹으면서 나우루공화국 몇 천 사람들을 엉망진창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은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줍니다. 자본주의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얼마나 끔찍한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가여우며, 나눔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슬픈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우루공화국 사람들은 흰둥이들이 가르쳐 준 대로 당신들 나라를 이룬 ‘인산염’을 캐면서 당신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렇게 당신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거머쥐었습니다. 고작 1만조차 안 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에서 1억이 넘는 사람들 나라보다 커다란 돈을 움켜쥐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 한 번 놀리지 않으며 놀고먹는 삶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 근심걱정 없이 ‘쓰고 버리는’ 삶을 서른 해 동안 넘실넘실 펼치다가 폭삭 주저앉습니다. 돈으로 뜨고 돈으로 내려앉습니다.


.. 자기 땅에서 나는 인산염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들판에 양분을 제공하는 동안, 나우루는 부서지고 구멍이 난 자국 땅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 나우루 지도자들의 행태는 유명 스타들의 변덕과 비슷했으며, 장관들은 때로 자기네 금고와 국고를 혼동하기도 했다 …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대해 비판할 수 없었는데, 어느 가족이건 정부에 한 발씩은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독립 이후 나우루가 이리저리 뒤얽힌 여러 건의 해외 투자와 결실을 맺지 못한 프로젝트 때문에 얼마나 손실을 입었는지 확인할 길은 거의 없다. 사실 돈은 결코 나우루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제대로 그런 손실을 계산해 본 적도 없었다. 일부 오스트레일리아 전문가들은 누적 손실액이 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섬에 사는 거주민이 7000명을 조금 넘는데 말이다 ..  (65, 69, 108쪽)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는 시장이 바뀝니다. 예전 시장님은 지난 여덟 해에 걸쳐 인천땅 모든 곳을 ‘재개발-재정비-도시정화’라는 이름을 붙여 갈아엎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갈아엎으며 2014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치른다 하고, 갯벌을 메운 땅에 151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있는 한편, 우리 나라에서 동대문운동장보다 역사가 깊던 가장 오래된 야구장(건물 나이는 동대문운동장이 더 많았으나 역사는 동대문운동장보다 깊던)을 손쉽게 허문 데다가, 앞으로는 더 큰 돈을 들여 아파트숲을 일구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시장이 되신 분이 유세를 하면서 우리한테 나누어 준 공약자료집을 들춥니다. 이분은 30조 원을 들여 참된 재개발을 하겠다고 밝힙니다(예전 시장님은 10조 원을 들여 당신이 밀어붙이던 재개발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새 시장님은 예전 시장님이 내세운 ‘뉴타운’은 모두 엉터리라 하면서 당신은 ‘웰타운’을 세우겠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2024년에 인천에서 올림픽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붙입니다.

 예전 시장님은 ‘문학월드컵축구장’ 하나만 갖고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이끌어 냈습니다. 다른 모든 경기장은 새로 짓는다고 하면서 2014년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른다고 밝혀 왔습니다. 다가오는 2014년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를 경기장이 다 만들어지면, 경기를 치른 뒤에는 이 경기장들이 쓰일 데 거의 없이 놀고 있을 테니까, 2024년에 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노릇이겠지요. 그러면 2024년 올림픽을 내다보며 인천과 부산이 서로 다툼질을 해야 할까 궁금하군요.


.. 나우루에서는 당뇨가 위험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으며, 이 병의 근원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돈이다. 인산염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었으며, 집에서 배달 음식만 시켜 먹고 차로만 움직이는 등 신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채 30년도 안 돼 나우루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 한 편 빌리면 그만인데, 굳이 다 같이 모여 전통 축제를 준비하는 데 누가 관심이나 있었겠어요?” ..  (143, 150∼151쪽)


 운동경기장 하나를 짓는 데에는 수천 억원이 듭니다. 운동경기장 몇 개를 짓고 큰 세계경기대회를 치르면 일자리라든지 홍보관광이라든지 무어무어니 하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바로 자본주의 이야기입니다.

 운동경기장 하나를 지을 돈이면 ‘무상급식’뿐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복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계경기대회를 치를 운동장을 짓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면 인천이라는 도시 하나뿐 아니라 나라를 통틀어 무상급식과 무상교육과 무상복지를 이루고 남습니다. 급식과 교육과 복지를 나라돈으로 아름다이 뒷배하는 동안 ‘좋은 일자리 만들기’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애써 돈을 들이지 않아도 좋은 일을 이루고 좋은 꿈을 이루며 좋은 삶을 이룹니다.

 우리 나라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반드시 돈으로만 모든 일을 꾸리려 한다든지, 더 커다란 돈을 쏟아부어 뭔가를 꾀한다든지 해야만 하지 않습니다. 돈에서 홀가분하면서 자본주의를 펼칠 수 있고,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이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으며, 돈벌이 아닌 일을 하면서 자본주의를 살찌울 수 있습니다.


.. 두바이는 겉으로 보기에 낙원이나 다름없다. 돈, 호화 관광, 그리고 거대한 규모 … 돈에 압도당한 나우루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보존할 줄 몰랐다 ..  (172∼173쪽)


 평화로운 섬나라 나우루는 대통령이 없던 지난날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사랑스러운 섬나라 나우루는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없던 지난날 더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살기 좋은 섬나라 나우루는 공장이고 회사이고 학교이고 없던 지난날 그지없이 살기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섬나라 나우루는 돈이 없던 지난날 해맑게 아름다웠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며 국회의원이 있으며 공장과 회사와 학교가 수두룩하고 돈 또한 넘치도록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얼마나 평화롭거나 사랑스럽거나 살기 좋거나 아름다운 나라일는지 궁금합니다. (4343.6.3.나무.ㅎㄲㅅㄱ)


 ┌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에코리브르,2010)
 ├ 글 : 뤽 폴리에
 ├ 옮긴이 : 안수연
 └ 책값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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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는 민주주의 맞나


 새벽 일찍 일어나 글 한 줄 쓴 다음 한 표 권리를 쓰러 다녀온다. 한 표 권리를 쓰고 나서 골목마실을 두 시간쯤 했고, 사람들이 하나둘 투표장에 모여들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와서 옆지기한테 한 표 권리를 쓰라 이야기한다. 애 아빠는 인천 동구, 애 엄마는 인천 중구에 주소가 되어 있어 서로 한 표 권리를 쓰는 데가 다르다. 애 아빠가 한 표 권리를 쓴 곳에는 그나마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후보가 나와 이모저모 더 살피며 한 표 권리를 쓸 수 있었는데, 애 엄마가 한 표 권리를 쓸 곳에는 모조리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람뿐이다. 이쪽 아니면 저쪽일 뿐이다.

 애 엄마가 한 표 권리를 쓸 지역구 후보자가 내놓은 공약을 살피고 재산을 살핀다. 구청장 후보 한 분은 재산이 60억 원이 넘고, 동네에서 꽤 큰 부동산을 꾸리고 있는 사장님이 구의원으로 나오기도 한다. 교육위원 후보이든 교육감 후보이든 인천 아이들이 일제고사 성적이 잘 나오도록 한다는 데에 눈길을 맞출 뿐 아니라 효 교육이니 영어 교육이니를 떠든다. 효를 가르치는 일이 잘못이란 소리가 아니다. 효란 마땅히 가르칠 밑바탕이지, 교육위원 후보나 교육감 후보가 떠벌일 공약이 될 수 없다. 이런 밑바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교육이라면 무슨 쓸모가 있는가. 그런데 이제까지 나온 모든 교육위원 후보와 교육감 후보들은 하나같이 효니 영어니를 외치고 있다. 공약일 수 없는 이야기를 공약이랍시고 내세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시장 후보나 구청장 후보 모두 매한가지이다. 공약이랄 수 없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런 후보들한테 한 표 권리를 쓰는 일은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운 후보가 정치를 이끌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참답거나 착하거나 아름답거나 한 후보는 얼마나 되는가. 돈을 더 벌어들이겠다고 하는 후보에다가, 지역 재개발을 외치는 후보에다가, 일제고사 성적을 높이겠다는 후보에다가, 어마어마한 재산을 자랑하는 후보들뿐인데, 무슨 한 표가 권리가 되는가. 선거가 어떻게 민주주의가 되는가.

 허울좋은 민주주의조차 아니다. 허울조차 나쁜 거짓 민주주의이다. 이런 거짓 민주주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는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삶과 올바른 이야기가 샘솟을 수 없다. 이런 겉치레 민주주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는 참다운 넋과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말이 뿌리내릴 수 없다. 진보나 개혁이나 보수나 수구란 이름은 모두 말놀이가 아닌가 싶다. 참말 진보라 할 만한 후보는 누구이고 참말 보수라 할 만한 후보는 누구인가. 진보가 무엇인 줄 아는가. 보수가 무엇인 줄 아는가. 진보 발가락만큼 따라가지 않으면서 진보를 외치는 후보들이 불쌍하다. 보수 머리털만큼 따르지 못하면서 보수를 들먹이는 후보들이 가엾다. 그러나, 진보 아닌 사람이 진보인 줄 잘못 아는 유권자가 더 딱하다. 보수 아닌 사람이 보수인 줄 믿고 마는 유권자가 더 슬프다.

 한 표 권리를 안 쓸 수는 없지만, 한 표 권리를 즐겁게 쓸 수 없는 삶은 하나도 민주주의일 수 없는데, 이런 엉터리 민주주의를 우리 딸아이한테 어떻게 가르치거나 물려줄 수 있는가. (4343.6.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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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지음 / 대가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0] 전민조, 《담배 피우는 사연》


- 책이름 : 담배 피우는 사연
- 글ㆍ사진 : 전민조
- 펴낸곳 : 대가 (2010.5.15.)
- 책값 : 2만 원



 (1) 사진기 드는 마음


 사진을 잘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들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 사람 또한 사진기를 들 수 있으며, 사진을 어설피 찍는 사람 누구나 사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사진을 훌륭히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든다면 우리 누리는 얼마나 슬프거나 메마르거나 치우쳐 있을까요.

 밥을 잘 하는 사람만 밥상을 차릴 수 있지 않습니다. 밥솜씨가 모자라더라도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밥상을 차릴 수 있고, 푸름이와 젊은이와 늙은이 누구나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함께 수저를 들며 배고픔을 달랠 사람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을 줄 안다면 모두모두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애보기를 잘 하는 사람만 아이를 보며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 애보기에 어설픈 사람도 아이를 보며 키워야 합니다. 애보기를 해 보지 않았다 한들 애보기를 손사래쳐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여자들은 아기를 배에 열 달 보듬고 있다고 낳기에 남자들과 견주어 아기한테 쏟는 사랑이 남다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내 배에서 보듬어 보지 못했다 하여 애보기를 안 한다든지 아이가 눈 똥오줌을 못 치운다든지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애보기를 할 노릇입니다.

 사진기를 들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사진기는 얼마나 싸구려 사진기인가 하고. 그렇지만 이 싸구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내가 ‘싸구려 기계를 쓰니까 싸구려 사진만 찍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싸구려일지라도 내가 내 손으로 이루는 사진에는 내 온 사랑과 믿음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어루만지며 일구려는 손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손에 들고 있을 이 사진기가 비싸구려 사진기일지라도 더 나은 사진이나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더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퍽 비싸구려 사진기를 어쩌다 한 번 손에 쥐어 보면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비싸구려 사진기로 이 사진기를 갖고 있는 분 모습을 찍어 드리다 보니, 이 비싸구려 사진기에 찍히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대단하더군요. 대충 찍는 사진이란 없겠습니다만, 대충 찍어도 작품처럼 보이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를 내려놓고 제 싸구려 사진기를 집어듭니다. 낡고 닳은 제 싸구려 사진기를 손에 듭니다. 내 살림살이가 푸지지 못해서 서운하느냐고 속으로 묻습니다. 내 사진기는 싸구려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거나 마주하는 사람들 삶자락을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하느냐고 혼잣말로 되뇝니다.

 틀림없이 그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면 오늘 제가 담아내어 나눌 사진은 한결 빛나거나 아름다이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들고 있는 사진기는 싸구려인 탓에 더 마음을 쏟고 더 손을 쓰며 더 몸을 부려서 사진 하나를 일구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대충 찍는 일이란 없지만, 대충 찍을 수 없는 사진임을 더 뼈저리게 깨달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살짝 어긋나기만 하여도 엉터리가 되는 싸구려 사진기이니 훨씬 힘을 내고 땀을 흘리며 다리품을 팝니다. 무엇보다도 사진기 눈으로 들여다볼 때하고 사진으로 찍힐 때하고 넓이가 달라 애를 먹으나, 이렇게 애를 먹으면 애를 먹는 대로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만큼’이 아닌 요모조모 어긋나게 나오는 푼수를 헤아리며 찍으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다른 분들보다 더 사진에 힘을 들여야 하고 마음을 바쳐야 하니까, 나는 나로서 한결 반갑고 고마운 사진을 얻는 셈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두 끼니나 세 끼니 밥을 해서 아이와 함께 먹습니다. 아빠가 아이한테 가장 맛나거나 좋을 밥을 해 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차려 준 밥을 늘 고맙게 받아먹지는 않고 고개를 요리조리 홱홱 돌리며 밥은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애 아빠는 아이가 밥을 안 먹으려 할 때마다 기운이 빠지고 섭섭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애 아빠가 더 밥을 잘 하지 못한 줄은 살피지 않고 그냥 기운이 빠집니다. 그래도 아이는 달리 아픈 데 거의 없이 용케 무럭무럭 큽니다. 참으로 씩씩하게 뛰어놉니다. 끝없이 수다를 떨고 끊임없이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기운이 좋아 펄펄 날듯 놀고, 아빠는 집살림이며 돈벌이이며 다른 일이며 치르느라 헉헉댑니다. 아이는 배고플 때에 차려 주니까 먹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먹어 주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애 아빠 스스로 아이 눈높이가 되어 아빠 된 사람이 이런 밥을 차려 주면 먹을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면, 저로서는 부끄럽게 여기며 더 마음을 쏟아야 할 텐데, 언제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한숨만 쉬고 맙니다. 더 애쓰고 더 용쓰며 더 힘쓸 노릇인데 자꾸 풀이 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밥거리를 좀더 살뜰히 마련해 주어야 할 노릇인데, 아이 입맛과 밥맛에 잘 못 맞추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애 아빠 입맛과 밥맛이 아닌 아이 입맛과 밥맛을 살피며 밥을 차리고 밥술을 떠 줄 노릇인데, 그저 배고픔 때울 끼니거리만 해 오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하루 내내 힘들여 찍은 사진을 셈틀로 옮기며 갈무리하며 생각합니다. 군더더기와 티끌 하나 없이 제대로 찍은 사진은 제가 찍은 제 사진이면서 스스로 웃고 스스로 웁니다. 군더더기가 한 군데라도 있으면 더없이 잘 찍은 괜찮은 사진이라 여기면서도 이 사진을 쓰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다시 가서 새로 찍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며 주눅이 듭니다. 필름사진기라든지 더 값나가는 좋은 장비였다면 다시 찍을 일은 거의 안 생겼을 테지요. 그래도 저 스스로 더 마음을 쏟지 못한 탓에 사진을 다시 찍을 일이 생기고 만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아니,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달삯 치를 돈조차 빠듯한데 무슨 사진 장비 타령을 합니까.

 그러니까 애 아빠가 차린 밥상을 아이가 그닥 달가와 하지 않는다면, 애 아빠는 ‘내가 오늘 밥을 제대로 못했나?’ 하고 뉘우치면서 밥을 아예 새로 차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따가 뭘 해야 하고, 낮이나 저녁에 누굴 만나야 하고 하면서 ‘이 녀석아, 얼른 좀 먹어!’ 하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먹을 만하지 않게 밥을 차려 놓고 억지로 쑤셔넣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이가 아직 많이 어려 어른이 알아들을 말을 못한다고 함부로 굴면 안 됩니다. 사진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진 꽤 괜찮은데 왜 버리셔요?’ 하고 묻는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 이 괜찮다는 사진에서 군더더기와 티끌을 한 군데에서라도 보거나 느낀다면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저한테 괜찮은 사진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빈틈도 군더더기도 티끌도 어설픔도 모자람도 없어야 하니까요. 그릇 빚는 이들이 옹근 그릇이 아니면 모두 깨부수듯, 사진찍는 이들 또한 옹근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필름은 불사르고 파일은 지울 노릇입니다. 다시, 새로, 거듭, 또다시, 새삼스레, 자꾸자꾸 찍고 또 찍어야 합니다.

 ‘바로 이 한 장’이라 할 만한 사진을 얻어야 합니다. ‘꽤 괜찮은’ 사진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내 마음을 넉넉히 채우는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앞으로 열 해와 스무 해를 보내는 동안에도 즐거이 마주할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숨을 거두어 딸아들한테 물려줄 때에도 기쁘게 웃으며 물려줄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사진밭은 그림밭하고 견주어 훨씬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사진을 찍어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하고 그림을 그려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는 엇비슷합니다. 제대로 사진을 찍고 올바로 사진을 찍으며 훌륭히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한삶을 걸쳐 이룰 아름다운 사진’ 숫자란 몇 안 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이 많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참 아름다운 사진 한 장’ 숫자는 아주 적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사진은 참 쉽게 찍을 수 있어요’ 하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모두 엉터리입니다.


 (2) 바보스럽게 찍은 《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님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2010년 새 사진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사진 작품을 내놓고 있는 전민조 님은 앞으로 2011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을 터이며, 2012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으리라 봅니다. 그야말로 꾸준하고 이야말로 한결같으며 더할 나위 없이 새롭습니다. 사진찍기란 ‘꾸준함’과 ‘한결같음’과 ‘새로움’ 세 가지 매무새를 갖추어 찍어야 함을 당신 스스로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조차 제대로 안 갖추거나 못 갖춘 채 어설프고 어줍잖으며 엉터리일밖에 없는 사진을 쏟아내는 ‘거짓 쟁이’가 넘치는 한국땅에서 전민조 님 사진밭은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1926∼2006) 장관은 당시 한ㆍ일회담을 성사시킬 때의 반대여론을 회고하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가 이내 방 안에 안개처럼 꽉 차서 그의 얼굴이 희미해 보였다. 사진은 미래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기가 찍은 인물은 순식간에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20쪽/1991.1.14.연희동 자택)

― 박 대통령 사망 후 정치인 김대중(1924∼2009)은 상도동 김영삼 자택을 찾아 환담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진기자들한테 보여준 도전적인 얼굴이 아닌 아주 편안한 얼굴로 비장의 파이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의 표정은 앞으로 어떻게 어두운 정국을 헤쳐 나가야 대권을 잡을지 라이벌 김영삼 앞에서 무엇인가 골똘하게 구상하는 듯했다. (28쪽/1979.12.29.상도동 김영삼 자택)


 여원사와 한국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한 다음 정년퇴직을 한 전민조 님은 지난 2005년부터 해마다 사진잔치를 열고 사진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2005년은 ‘섬’, 2006년은 ‘서울’, 2007년은 ‘한국인의 초상’, 2008년은 ‘기자가 바라본 기자’, 2009년은 ‘농부’이고, 2010년은 ‘담배 피우는 사연’입니다.

 이 나라에 사진기자는 수두룩하게 많으나 ‘한 해에 한 번씩’은 어렵다 하여도 ‘여러 해나 열 해에 한 번’쯤이라도 사진잔치를 열며 사진책을 펴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누구보다 사진을 많이 찍고 누구보다 더 많은 곳을 다니며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사진기자라 한다면, 누구보다 사진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잔치와 사진책을 신나게 선보이는 사람은 너무 적은 우리 나라입니다.

 일에 치여 바쁘기 때문일까요. 찍어 달라는 사진만 찍어도 속이 얹히거나 메스꺼워 도무지 ‘내 사진’을 일굴 수 없기 때문일까요. 나중에, 한참 나중에 선보이며 온누리를 크게 놀래키고 싶기 때문일까요.


―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맹희 씨는 기자들을 불러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이야기를 갑자기 쏟아냈다.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며 고뇌하는 얼굴을 보면서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겪는 재벌가의 암투와 갈등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이 카메라와 몸뚱이만 가지고 세상을 향해 사진만 찍고 있는 사진기자 직업이 정말 속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48쪽/1988.12.13.장충동 자택에서)

― 영업택시 운전기사가 달리면서 담뱃재를 도시를 향해 털고 있다. 꽁초와 담뱃재는 도시에 버리고 자신의 좁은 공간만 깨끗하게 하려는 이런 얄궂은 심리는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풍경은 윗목에 쓰레기를 모아 놓고 아랫목에서 코를 막고 누워 있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164쪽/2010.3.20.강남구 논현동)


 해마다 내놓는 전민조 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먼저, 당신이 올해 새로 선보이는 사진 가운데 2/3나 3/4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뛰었기 때문에 찍을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다음으로 1/3이나 1/4은 당신이 사진기자를 그만둔 뒤에 여느 사진쟁이와 다를 바 없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새롭게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 사진꾼’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런 사진을 얻는구나 싶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일 때에는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때때로 ‘내가 내 사진감을 만들어서’ 신문에 싣기도 하지만, 신문에 싣는 사진은 사진쟁이 한 사람 목소리로 선보일 사진일 수 없습니다.

 홀가분한 사진쟁이 한 사람으로 찍는 사진일 때에는 ‘나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내 사진을 바라보거나 들여다보거나 찾아보는 사람은 ‘이 사진쟁이는 뭘 그리 좋아해서 이런 사진을 다 찍나?’ 하는 궁금함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누구나 다 찍는 사진이 아닌 사진쟁이 한 사람 눈길로만 들여다보며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최종규면 최종규 사진을 찍고 전민조면 전민조 사진을 찍으며 강운구면 강운구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사진만 척 보아도 ‘어허라, 아무개 사진이네!’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와야 합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게 누구 사진이더라?’ 하고 있다면 이런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이런 사진은 흉내내기 사진이거나 짜깁기 사진입니다. 이런 사진은 너절한 사진이요, 무엇보다도 ‘사진’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는 종이조각입니다.

 전민조 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지난 1960년대 것부터 2010년대 것까지 두루 있습니다. 한 사람 작품을 이리 오랜 나날에 걸쳐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일이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노릇입니다. 사진삶을 쉰 해 아우르는 사진쟁이란 이 나라에 몇 없습니다. 더욱이 사진삶 쉰 해를 늘 새내기 마음으로 새내기 사진으로 일구려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 해서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오랜 나날 사진기를 붙잡고 필름 수십만 통을 썼다 할지라도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일구며 아름다운 손길이 서린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지, 무슨무슨 이름값이나 권력이나 얼굴값으로 사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느 대가 한 분 작품이 나왔소이다!’ 해서는 사진이 팔리지 않습니다. ‘이야, 이번에 이런 좋은 작품이 나왔습니다!’라든지 ‘우와, 이번에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습니다!’라 해야 사진이 팔립니다.


.. 실제 신문, 잡지의 사진 찍는 일은 인터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담배 피우는 사진은 재미있게 찍어 와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게재하지 않았다. 유명인사로 알려진 인물들의 그럴듯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모습은 담배 피우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사색하는 모습은 모두 고독해 보였다. 어제의 승리자에서 패배자로 전락한 기업가가 연신 뻐끔 담배로 울분을 토하는 표정, 담배가 꼭 남성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연기를 날리는 드라마작가 … 모든 흡연자는 자신들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  (6쪽)


 사진책이 사진책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나라입니다. 글을 쓰거나 글을 좋아한다는 분들은 어김없이 글책은 많이 사서 읽는데,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만화책은 참으로 멀리하고 있는 알쏭달쏭한 이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글 하나 엮는 일과 아름다운 그림 하나 그리는 일과 아름다운 사진 하나 일구는 일과 아름다운 만화 하나 낳는 일은 얼마나 다를까요. 어느 일이 더 힘들거나 어느 일이 더 값있을까요.

 아름다운 책이면 한결같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글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만화책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만화라고 하는 틀을 넘어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담아서 나누려는 책을 만나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피땀을 흘린 손자국을 글책에서 만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피땀을 쏟은 손자취를 그림책에서 만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피땀을 바친 사진책을 만나는 가운데, 만화를 빚는 사람이 피땀을 들인 만화책을 만날 노릇입니다.

 참말로 피땀이 깃든 책은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만화책이든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곱게 어루만집니다. 피땀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이거든요. 사랑과 믿음이란 다름아닌 글쟁이ㆍ그림쟁이ㆍ사진쟁이ㆍ만화쟁이가 눈물과 웃음으로 부대낀 좋은 삶이거든요. 좋은 삶이란 어디 먼 나라에 있는 삶이 아니라, 바로 우리 둘레에서 늘 마주하고 살을 섞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 삶이거든요.


.. 나는 그때 지옥에서 기어나와 천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신선한 공기를 맡는 것 같았다. 국내 산에 올라 그렇게 숲속을 걸어다녀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향기를 그때 처음 느껴 본 것이다. 나는 그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땅바닥에 발을 딛자 본능적으로 담배를 한 대 입에 가져가게 되었는데 담배연기를 마시자마자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왔던 가슴에서 담배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 강대국들의 담배회사는 지금까지 약소국의 젊은이들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망쳐 놓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담배를 끊고 소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담배 피우는 사람의 입에서는 향긋하지 못한 냄새가 풍겨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사람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  (8∼9쪽)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전민조 님은 똑같은 이름을 붙인 사진잔치를 2010년 5월 1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관훈동 토포하우스(02-734-7555)에서 엽니다. 사진책과 전시회 알림쪽지에 적힌 글월을 읽다 보면, “그래서 ‘담배는 일종의 마약이며 국민들을 병자로 만드는 독약’이라는 생각에서 요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항상 불안하게 쳐다보면서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사진집은 금연운동에 바치는 사진집이다” 하는 이야기로 끝마무리를 짓습니다. 이 나라에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함부로(?) 끄적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든 손가락질을 하든, 전민조 님 스스로 ‘담배 사랑이’였다가 ‘담배 끊은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게가다 전민조 님은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으로 말을 걸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당신 스스로 담배 태우는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에는 무슨 뜻이 한 가지 있기 마련입니다.

 담배란 무엇인가 살피고, 담배가 태어난 밑뿌리는 어떠하며, 사람들이 담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담배가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담배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마주해야 좋을까 하는 숱한 생각을 사진으로 풀어낼 전민조 님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들여다보고 사진책을 넘기면서 싱긋 웃음이 납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은 ‘담배 끊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담배 피우는 사연》을 내놓으셨지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은 당신 말씀마따나, 숲이 없고 물질만 넘치는 오늘날 우리 도시 삶터에서는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며 ‘어, 담배나 한 개비 물어야겠네’ 하는 분들이 훨씬 많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래도 ‘그래, 담배가 몸에 얼마나 나쁘고 우리 터전을 얼마나 무너뜨리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절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343.6.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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