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인간 (특별보급판) - 1957-2006 최민식 사진 50년 대표선집 최민식 사진집 휴먼(Human)
최민식 지음 / 눈빛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예식장 비싼 밥이 아닌 사진책을 선물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 최민식, 《HUMAN 1957∼2006》



- 책이름 : HUMAN 1957∼2006
- 사진 : 최민식
- 펴낸곳 : 눈빛 (2006.12.7.)
- 책값 : 6만 원


 (1) 사진에 담는 삶


 너른 터가 생긴 광화문 앞길을 가로질러 보았습니다. 한글회관에서 나와 문화체육관광부로 건너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땅밑길로 지나다녔다 하고, 몇 해 앞서 비로소 건널목이 생겼으며, 이제는 너른 터가 생겨 자동차 흐름은 조금 줄면서 걸어다니기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와 서울 시내 이런저런 모습을 찍는 사람이 제법 있고, 남녀 짝을 지어 오붓하게 하루를 즐기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다리쉼을 하는 공공근로 할매와 할배가 보이고, 개인옷을 입은 경찰과 제복을 입은 경찰이 곳곳에 많이 보입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대리석으로 보이는 돌을 새로 깔았습니다. 너른 터가 되었으나 아스팔트 밑에 있던 흙바닥을 밟을 수 있지는 못하며, 사람들이 집회나 시위를 하지 못하게끔 꽃밭을 가꾸어 놓았습니다. 시청 앞 너른 터에는 잔디를 심고 광화문 앞 너른 터에는 꽃밭입니다.

 이나마 너른 터 한 곳이 늘어나니 반갑다고 해야 할까 싶지만, 돈을 지나치게 많이 들인 너른 터요, 꼭 무엇무엇을 세우고 놓고 마련해야만 하는 너른 터입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어 억지로 무엇인가를 만들지 않으면 땡볕에 그예 드러나야 하고, 비라도 올라치면 고스란히 맞아야만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밟으면 흙땅은 딱딱해진다지만, 우리한테는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대리석이 아닌 맨흙을 풀기운과 나무그늘을 함께 느끼면서 밟을 수는 없는가 궁금합니다. 도시 한복판에는 숲길을 마련할 수 없고, 조그맣게라도 나무숲을 이룰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문득 오늘날 사진이 자꾸자꾸 날카롭거나 차갑거나 딱딱한 채 겉멋과 겉치레와 겉꾸밈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사진만 판치거나 넘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운 멋도, 자연스러운 움직임도, 자연스러운 손길도, 자연스러운 눈길도 찾아보지 못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푸나무와 흙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이렇게 사람만 오갈 수 있으며, 참새나 비둘기 한 마리 깃들 틈조차 없으니까요. 이렇게 차 소리 가득한 가운데 귀가 멍멍해지는 터전에서 돈만 버는 일을 해야 하고, 돈만 쓰는 문화를 누려야 하고, 돈만 들이는 집을 얻어서 살아야 하니까요.


.. 내 앞선 세대에 그토록 불멸의 사진을 찍었던 작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보며 나도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 깊은 울림이 있고, 몸을 조이는 긴장감을 주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  (책 끝에 붙인 말 / 최민식 - 나의 사진 인생 50년)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지옥철에 시달리며 인천에서 서울로 옵니다. 새벽에 아빠가 일을 나갈 때면 어김없이 깨어나 ‘아빠 가지 말라’며 울면서 종아리에 달라붙는 아기를 달래며 홀로 떨어져 나와 하루 절반 남짓을 집 밖에서 보냅니다. 쇠와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 놓은 책상 앞에 앉아 셈틀을 또닥거립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를 듣고, 모임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으며,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다시 찻길에서 차 소리며 사람들 수다 소리며 가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들에 휘감긴 채 전철역으로 걸어갑니다. 전철은 쇠를 긁는 소리를 내고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에어컨 소리와 방송 소리를 냅니다. 이어폰을 끼고 있다 해도 옆에까지 들리는 디엠비 소리를 듣고, 전철에서 울리는 소리보다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나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걸쳐 놓고 있지만, 새벽에 집을 나서며 전철에 올라 서울에 닿은 뒤 일터에서 아홉 시간쯤 보내고 나서 다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진기 단추를 누를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이 쳇바퀴 같은 하루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쳇바퀴 삶’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대끼거나 스치는 아가씨들 반바지와 치마를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길과 전철에서 부딪히거나 뒤엉키는 아저씨들 담배 꼬나문 모습이나 침 뱉는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에서 잠든 사람들 모습을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전철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모습만 사진감으로 삼을 수 있으며, 사람들 다리께만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틈틈이 바뀌는 전철 광고판만 찍어도 재미있는 사진감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건물 들머리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건물 10층이나 20층에서 길거리를 내려다보면서 하루 스물네 시간 흐름을 담을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무엇을 사진감으로 하느냐도 크게 돌아볼 대목일 터이나, 무엇을 사진감으로 삼든 사진쟁이 스스로 무슨 생각과 마음과 뜻과 넋을 담느냐가 훨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민식 님 사진책 《인간》 또는 《HUMAN》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데, 최민식 님 사진감은 늘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쟁이들은 최민식 님이 사람을 찍든 말든 ‘당신들 깜냥껏 바라보거나 느끼는 사람’을 찍습니다. 모델을 찍든 알몸을 찍든 만듦사진으로 꾸미든 다큐로 찍든,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누구나 으레 사람을 사진감으로 삼습니다.


.. 진정한 사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체험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은 그 현실 자체에 이미 예술이 추구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책 끝에 붙인 말)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 사진감을 얻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어울리는 마을이나 도시가 사진감을 찾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나 사람한테 바람과 물과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자연이 사진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을 마주 바라보며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사람이 아닌 길이나 건물을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길이건 건물이건 사람이 짓기 때문입니다.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뒷골목이든 앞골목이든 사람 사는 터전이라, 골목을 어떻게 담더라도 사람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그런데, 사람을 찍은 사진 가운데 사람맛이나 사람멋이 나지 않는 작품이 있습니다. 섬뜩하거나 밋밋한 사진이 있습니다. 지루하거나 눈 버리는 사진이 있습니다. 빼어난 솜씨를 선보인다 하지만 손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눈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손놀림 말고는 무엇도 스미지 않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 사진은 나를 찾아 주었다. 나는 사진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진기에 나를 송두리째 맡겨 버렸고, 내 인생을 사진으로 가득 채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  (책 끝에 붙인 말)


 나 스스로 우리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때에는 내가 담는 사진에 힘찬 넋이 서립니다. 나 스스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거나 껴안으며 살아갈 때에는 내가 찍는 사진에 사랑스러운 얼이 스밉니다. 나 스스로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삶일 때에는 내가 이루는 사진에 따스한 기운이 녹아듭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도시문명에 젖어든 삶이라 할 때에는 자본주의 도시문명을 깊이 느끼는 사진이 됩니다.
 





 (2) 사진책 《HUMAN》을 이룬 최민식 님 삶이란


 1928년에 태어나 1950년대 끄트머리부터 사진을 찍어 온 최민식 님 《HUMAN 1957∼2006》은 당신 사진길 쉰 해를 그러모읍니다. 사진길 쉰 해를 기리는 뜻에서 새롭게 사진책이 하나 나오기도 했고, 이무렵 《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예문,2006)과 《뭘 그렇게 찍으세요, 사진 작가 최민식》(우리교육,2006)과 《소망, 그 아름다운 힘》(샘터사,2006)이 잇달아 나왔습니다.

 사진찍기 한길을 쉰 해나 이었다는 대목은 무척 놀랍고 대단하며 기릴 만한 일입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을 기리는 책이 한꺼번에 네 가지 나오는 일이란 마땅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예전에 나오고 다시 못 나오는 책을 새로 펴낼 수 있으며, ‘최민식 사진전집’을 묶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2006년 사진길 쉰 해를 맞이하기 앞서인 2005년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사진쟁이 최민식이 생각하는 사진’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좀더 앞서인 1996년에는 사진길 마흔 해를 돌아보는 가운데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한양출판)이 나오기도 했고, 이 책은 2004년에 고침판으로 다시 나옵니다.


..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내 사진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체험이 있었기에 일관되게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삶의 진실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나는 사진을 통해 사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휴머니즘의 정의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  (책 끝에 붙인 말)
 





 그런데 궁금합니다. 사진길 쉰 해를 걸은 최민식 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최민식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샅샅이 살피거나 생각하거나 들여다보거나 만나거나 껴안거나 부대끼거나 감싸안으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을까요. 곧게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최민식 님처럼 당신 스스로들 남다른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길동무 최민식’을 바라보는지, ‘넘볼 수 없는 위인전 주인공’으로 바라보는지, ‘눈물 콧물 웃음 쏟아내는 사진을 선사한 고마운 이’로 바라보는지, ‘꾀죄죄한 사람들 꾀죄죄한 삶 꾀죄죄한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가난한 사람을 찍어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사진’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에 몇 마디 말이나 시나 글을 붙이는 분들은 얼마나 최민식 사진을 당신 마음속 깊이 부둥켜안으면서 말마디나 글줄을 뱉어내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 사진을 놓고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부터 군부가 등장한 1960년대, 그리고 민주화 투쟁이 가열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으로 포착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최민식 님을 놓고 “최민식은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진이란 찍는 사람 삶이 그대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사진이란 보는 사람 삶결 그대로 느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사진을 보는 사람이든, 제 깜냥에 따라서 사진을 이루거나 즐깁니다. 내 눈길뿐 아니라 손길과 마음길과 몸길에 따라서 내 손으로 빚어내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진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떤 이로서는 최민식 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모습’이라고 느낄는지 모르나, 최민식 님은 당신 사진에 담긴 사람들을 바라보며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고 느낄는지 모르며, 사진에 담긴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을 ‘비참한 현실’인 적이 없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흔히들, 골목동네를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고 어둡고 퀘퀘하다고 여기지만, 골목동네 바깥에서 겉스치는 눈으로 잘못 바라보거나 대충 바라보니 이렇게 여길 뿐입니다.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가난 또한 어느 만큼 영향을 끼치겠지만, 가난보다도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훨씬 영향을 끼칩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밥 한 그릇에 흐뭇할 수 있으면, 가난하면서도 웃습니다. 돈이 없이도 즐거운 삶이요, 기쁜 삶이며, 보람찬 삶입니다. 큰도시 큰 아파트에서 깊은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 놓고 있어야 ‘구질구질하지 않고 어둡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청소부들이 바지런히 손을 놀려 쓰레기를 치워 놓는다고 ‘퀘퀘하지 않고 지저분하지 않’은 삶이겠습니까. 우리 눈앞에 안 보인다고 ‘없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최민식 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를 당신 사진에 담았을 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었을 때에는 가난한 그대로를 담습니다.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일 때에는 멋부리고 어여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그대로를 담습니다. 싱그러운 웃음은 싱그러운 웃음 그대로, 하품하는 졸린 낯빛은 하품하는 졸린 낯빛으로 찍습니다.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은 아이 키우며 고단한 주름살 그대로 찍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 그대로 찍습니다.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아이는 힘겹게 얻은 국수 한 그릇 허둥지둥 먹는 그대로 담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다 다른 느낌 그대로 살리면서 다 다른 삶임을 느끼도록 보여줍니다.


.. 사진작품 속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이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소중한 친구가 된다 ..  (책 끝에 붙인 말)
 





 최민식 님을 놓고 “한국 사진예술의 1세대로서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추켜세우는 말마디는 어쩐지 몹시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먼저, 최민식 님은 사진예술 1세대가 아닙니다. 우리네 사진예술 1세대는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입니다. 또는, 이 나라에 사진을 처음 들여온 지운영 님 같은 이름을 들어야 합니다. 지운영 님 또래를 사진예술 1세대라 한다면, 임응식 님이나 이해문 님은 2세대가 될 테지요. 그러고 나서 최민식 님이나 이해문 님 같은 분들은 3세대라 할 테고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발자취가 어떠한가를 참으로 잘 모릅니다. 참으로 잘 모를 뿐 아니라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참으로 안 알아봅니다. 참으로 안 알아볼 뿐 아니라 참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참으로 깊이 곰삭여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최민식 님 사진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최민식 님 사진을 ‘넘어서’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사뭇 다른 길에서 사뭇 다른 아름다움을 꽃피우’거나 하는 우리들 사진동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사진길 쉰 해를 기리면서 이 책 저 책 나오기는 했으나, 무엇보다도 최민식 님 사진열매 가운데 가장 눈여겨보면서 아끼고 사랑해야 할 《HUMAN 1957∼2006》은 판이 끊어졌습니다. 안타까운 노릇인데, 우리네 얕은 사진문화로서는 어찌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2008년 3월에 ‘특별보급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와 주었습니다. 2006년판은 6만 원이었고, 특별보급 2008년판은 3만5천 원입니다(저는 2006년판 6만 원짜리 책을 장만해서 보았습니다).

 ‘삼청각’ 같은 곳에서 혼인잔치를 하면 밥값이 5만5천∼10만 원이라고 합니다. 여느 예식장에서 혼인잔치를 해도 밥값이 몇 만 원쯤 합니다. 돌잔치를 해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식구는 혼인잔치도 안 하고 돌잔치도 안 했습니다. 문득문득 새로운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데, 우리 식구가 나중에 어느 만큼 살림이 펴서 ‘늦깎이 혼인잔치 또는 돌잔치’를 하는 날을 맞이한다면, 최민식 님 사진책을 500권쯤 한꺼번에 장만해서 손님들한테 ‘밥은 안 주고 책을 한 권씩 드리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돈은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꿈만 꾼다고, 새로 꿈 하나 꾼 만큼 이 꿈을 이루도록 돈을 신나게 벌어 볼까 합니다. (4342.8.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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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오늘 신촌 숨책에 갔더니 여자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요사이 책들을 안 읽어선지 책들도 잘 안들어 온다고요.
아이고 어른이고 책들 잘 안 읽는 상황에서 결혼식에 밥 대신 책을 돌리면 아마 신문 기사에 나던지,다시는 그 집안 결혼식에 안갈지 아마 둘중의 하나일걸요 ㅜ.ㅜ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금지'와 '허용' 사이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1
마르크 캉탱 지음, 브뤼노 살라몬 그림, 신성림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ㆍ인권ㆍ평화ㆍ믿음ㆍ즐거움 모두 없는 한국
 [잠깐 읽기 53] 마르크 캉탱,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책이름 : 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글 : 마르크 캉탱
- 그림 : 브뤼노 살라몬
- 옮긴이 : 신성림
- 펴낸곳 : 개마고원 (2009.7.30.)
- 책값 : 1만 원


 (1) 어른한테도 없고 어린이한테도 없는 인권


 청소년한테는 ‘청소년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들한테는 ‘아기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여성한테 ‘여성 인권’이 있고, 장애인한테 ‘장애인 인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인권 가운데 제대로 보듬거나 지키도록 하는 인권은 거의 없는 우리 나라가 아닌가 하고 느끼곤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무슨무슨 인권’이라 할 때 ‘무슨무슨’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목숨들은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된 권리를 못 누리는 사람들이거나 목숨들이곤 합니다. 길에서 차여 치여 죽는 들짐승 권리를 말한다 할 때에, 자가용을 모는 이들을 비롯해 도로공사 공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들 목숨한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좋아 ‘청소년 인권’이고 ‘청소년 최저임금’이지만,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청소년한테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도록 돕거나 이끄는 어른이란 몹시 드뭅니다. ‘청소년 알바 최저임금’은 거의 언제나 ‘청소년 알바 최고임금’으로 머물곤 합니다.


.. 미국에서는 열여섯 살이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조수석에 어른을 태우고 운전하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운전을 하지요 … 얼마 전 미국 어느 주에서는 열두 살 된 어린애가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대요. 게다가 가석방될 여지도 남겨 두지 않았다나요 ..  (16쪽)


 조금 더 헤아려 봅니다. ‘남성 인권’이나 ‘재벌총수 인권’이나 ‘경찰 인권’이나 ‘기무사 요원 인권’ 같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저 또한 남성입니다만, 남성들이 ‘인권을 짓밟히거나 빼앗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재벌총수가 아주 드물게 법정에 서는 일은 있지만, 죄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몰래 끌어들인 검은돈을 송두리째 빼앗기거나 그동안 노동자한테 제대로 안 준 일삯을 모조리 뱉어내도록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경찰한테도 마땅히 인권이 있어야 합니다만, 경찰한테는 인권보다 ‘특권’이나 ‘법을 넘어서는 권력’이 있어, 우리들 여느 사람들을 함부로 두들겨패거나 붙잡기도 합니다. 경찰들이 시민들 집회를 아예 ‘집회금지’로 못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집회금지’를 법원에서는 ‘경찰이 집회금지를 못박는 일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지만, 경찰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받아도 끝없이 ‘집회금지’를 밀어붙입니다. 헌법으로 집회며 결사며 언론이며 자유라고 적혀 있어도, 우리 나라 경찰은 이러한 헌법 자유를 손쉽게 깔아뭉갭니다.

 요사이 떠도는 ‘기무사 요원 사찰’을 생각해 보아도, 국가권력에 기대거나 빌붙는 이들이 이 땅 여느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힘이란, 또 내리누르면서 얻는 콩고물이란 참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 프랑스에서는 만 6세에서 16세까지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받을 ‘권리’라고 하지 않고 ‘의무’라고 말하지요. 최소한 10년 동안, 모두 합해 대략 1500일 동안 학교에 다닐 의무가 있어요 ..  (20쪽)


 중학교를 다니던 때 학교에서 했던 일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무렵(1988∼1990년) ‘어린이 인권선언’이 우리 나라에도 나왔다고 떠오르는데, 중학생이면 ‘청소년’이지 어린이는 아니지만, ‘어린이 청소년 인권선언’으로 삼아 우리들(중학생)한테도 권리가 있음을 학교 교사들이 깨닫기를 바라면서, 이 인권선언글을 어디에선가 얻어서 전지에 펜으로 또박또박 적어서 학교장한테 겨우 허락을 받아 한 주 동안 건물 들머리에 세워 놓은 적이 있습니다.

 기껏 종이 한 장짜리 인권선언이요, 이런 글을 애써 전지에 적어서 세워 놓아도 교사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외려 히죽히죽 웃으면서 “인권? 웃기지 말아? 니들한테 무슨 인권이 있어?” 하던 교사가 참 많았습니다. 이들은 우리한테 뺨따귀질이나 주먹질이나 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교사들 나이는 오늘날 제 나이보다 몇 살 어린 나이인데, 고작 서른 안팎인 젊은 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뿔이 났다고 “오늘 나한테 걸리면 한 놈은 내 손에 죽는다”고 을러대면서, 교단에서 동무녀석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곤 했습니다. 밀걸레자루가 여럿 부러지고 동무녀석이 교단에서 고꾸라졌어도 등짝에다가 부러진 밀걸레자루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곤 했습니다. 코앞에서 이런 모습을 거의 날마다 지켜보면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헌병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때리고 괴롭혔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벌써 그때 일이 스무 해나 지난 일이라니 까마득하다고 느끼는 한편, 그 뒤로 스무 해가 지난 2009년이라 하여도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그치지 않는 굴레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같은 주먹다짐이나 욕부림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이들끼리 서로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새로운 짓거리는 끊임없이 살아나고, 또다른 교실폭력과 학교폭력이 되풀이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차를 운전하고 있는 성인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그는 몹시 바빠서 다른 운전자들에게 화를 냅니다. 그가 볼 때, 다른 운전자들이 더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빨리 운전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는 마치 자기 약속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듯 자기를 지체하게 만드는 느림보를 마구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느림보는 단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제한속도를 준수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들 똑같은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요! ..  (60쪽)


 몇몇 교사가 말썽쟁이이기 때문일까요? 몇몇 교사들은 교대에 다닐 때부터 당신 스승한테서 ‘애들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면 말을 잘 듣는다’고 배웠기 때문일까요? 우리 사회에 민주가 튼튼히 뿌리내리고 평화가 아름다이 자리잡으면 이와 같은 주먹다짐은 사라질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주먹다짐이 살아숨쉴 뿐 아니라 영화나 연속극 따위에 자꾸만 그려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우리 정치판과 사회판과 경제판과 문화판 모두 끝없는 싸움박질과 밥그릇싸움이 피튀기듯 이루어지기 때문일까요?

 예전 같은 부정선거는 없다지만, 정치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로 이루어졌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한 표 권리가 있다지만, 사회가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는 느끼기 힘듭니다.

 ‘함께 하자’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하지 말라’는 목소리만 들립니다. 너른 터는 하나둘 사라지면서 주차장과 쇼핑몰이 되어 갑니다(또는 ‘허울좋은 광장’으로 바뀝니다). 아이들이 뛰어놀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는 한편, 어른들 또한 마음껏 어우러지거나 얼싸안을 골목길이나 운동장이나 마당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쉴 자리가 없고 어른들 또한 쉴 자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세상을 하나하나 배우고 어른들 일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배우거나 따라할 틈이 없습니다. 돈벌이 일은 조각조각 갈리고, 돈벌이 일을 하느라 식구들은 서로서로 쪼개집니다.


.. 속임수를 쓰는 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짓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특별한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도 없지요 ..  (98쪽)


 요 며칠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오가면서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서로서로 괴롭겠지만,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옆사람이 짜부가 되건 오징어떡이 되건 몸이 눌리건 발을 밟히건 ‘나까지 전철에 더 타야’ 하고 ‘내가 더 타면 그때부터는 그만’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처음부터 서로를 미워하거나 괴롭힐 마음은 아니었을지라도 하루하루 지옥철에 시달리고 길들면서 시나브로 사랑과 믿음이 옅어지거나 스러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서로서로 더 많은 돈을 벌면 그만이요, 더 널리 사랑을 나누거나 더 깊이 믿음을 함께하려는 생각은 못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2) 프랑스사람이 말하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프랑스 어른이 프랑스 어린이한테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들려주려고 쓴 책 《왜 하지 말라는 거야?》를 읽습니다. 나라안에서도 나라안 어린이한테 우리네 사람 권리란 무엇인가를 들려주고자 이와 비슷한 책을 더러더러 쓰곤 합니다. 다만, 아직가지 나라안 사람들이 쓰는 ‘제대로 누릴 사람 권리’ 이야기는 겉핥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속깊이 파고들지 못하며, 간지러운 구석을 긁지 못합니다. 골고루 들여다보지 못하며, 아픈 생채기를 보듬지 못합니다. 이와 견주어 《왜 하지 말라는 거야?》는 간지럽고 아픈 자리를 살며시 건드리면서 퍽 쉽고 슬기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 사람들이 어떤 일을 열심히 금지해 놓고 정작 자기 자신에겐 허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간혹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전직 장관이 범법행위로 유죄선거를 받았다는 뉴스를 곧잘 접할 거예요. 결국, 금지조항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 자신이 정작 금지조항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거죠 ..  (111∼112쪽)


 오늘날 우리 세상에는 사랑도 자유도 평화도 통일도 믿음도 즐거움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인권 또한 저절로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너도 나도 외는 말마디, ‘먹고살기 힘들다’와 ‘먹고살기 바쁘다’에 눌리고 밟힙니다. ‘살아남아야 한다’와 ‘살려면 어찌할 수 없다’에 뭉개지고 차입니다.

 우리 어른들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평화로이 어깨동무하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통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서로서로 믿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즐거운 일과 놀이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이런 판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이런 가운데 아이들은 어른들이 읊는 말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어른들이 몸으로 보여주기로는 형편없거나 보잘것없거나 얄딱구리한데,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이들한테는 영어 동화책이나 영어 교재가 아닌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쥐어 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이 책을 쥐어 주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책을 곰곰이 읽고 되새기고 톺아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책을 쥐어 주고픈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먼저 좋은 책을 찾아 읽고 삭이고 받아들이면서 좋은 삶을 일구어야지 싶습니다.


.. 안타깝게도 어떤 것이 금지인지 검열인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검열관들 쪽에서, 그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거라고 주장하면서 일부러 경계를 흐려 놓는 경우도 많지요 ..  (137쪽)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책은 퍽 아쉽습니다. 틀림없이 간지러운 곳을 긁는 책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간지러움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김없이 생채기를 달래는 책이요 아픈 구석을 찌르는 책이지만, 제 생채기에서는 고름이 철철 흐르고 제 아픈 구석에는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프랑스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벌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한국에서는 프랑스에서 이루어지는 ‘인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왜 하지 말라는 거야?》 같은 프랑스 책은 퍽 높은 눈높이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아주 밑바닥에서 끝없이 뒹굴고만 있기 때문일까요.

 애써 좋은 책 하나를 우리 말로 옮겨내어 이 땅 아이들한테 좋은 마음밥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은 왜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헤아리면서 아이들한테 참다이 마음밥이 되고 슬기롭고 따숩게 마음동무가 될 책을 우리 땀을 흘리면서 빚어내지 못할까요? 왜 이런 일에는 깊이 힘을 쏟지 못할까요? 이러한 책이 돈이 되든 안 되든, 이러한 책을 펴내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참말 한국땅에 꼭 하나쯤 있어야 할 ‘맑고 밝고 환하고 고운 권리 이야기’를 신나게 펼칠 어른들이란 도무지 찾아보아서는 안 될 노릇인가요?

 우리가 우리 자유를 지키자면 우리 자유를 있는 힘껏 부리며 자유로운 이야기를 담는 책을 빚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람된 권리를 누리자면 우리 사람된 권리를 용쓰며 뽑아내어 사람된 권리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일구어야 합니다. 바라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를 이어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으며, 참되게 바라는 매무새대로 우리 삶을 단단히 붙잡고 부둥켜안도 부대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4342.8.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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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독 김기덕 -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마르타 쿠를랏 지음, 조영학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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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감독’ 김기덕 이야기를 아르헨티나 작가가 썼네
 [잠깐 읽기 52] 마르타 쿠를랏, 《나쁜 감독》



- 책이름 :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 글 : 마르타 쿠를랏
- 옮긴이 : 조영학
- 펴낸곳 : 가쎄 (2009.6.29.)
- 책값 : 9000원



 (1) ‘거북하게’ 이끄는 영화들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에서 죽는 짐승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다니면서 담아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앞서도 길에서 죽는 짐승을 숱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있었으며,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길에서 죽는 짐승을 바라보는 이웃사람 눈길을 새삼스레 느끼거나 깨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 삶을 바꾸었는지 모르나, 도심지이든 시골길이든 고속도로이든 자동차 빠르기를 5킬로미터나마 줄이려고 애쓴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예 자동차를 버리겠다고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지는 못합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한테 ‘자동차를 멀리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길에서 짐승을 치여 죽이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길에서 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놓고 마냥 ‘불쌍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죽음을 보여주고 죽임을 보여줍니다. 그예 앞으로도 죽음과 죽임이 끝없이 이어지도록 하려는 이 나라 공무원들 매무새를 보여줍니다. 이 나라 공무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여느 사람들 모습’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 하나의 이미지가 수천 개의 단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서 〈악어〉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그와 관련된 피상적인 플롯만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윗글에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폭력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이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여성들은 실제로 그 저변에 깔린 개인적, 사회적 메타포들을 읽지 못했다. 그저 스크린 밖의 그들을 노려보는 야만성과 타락상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 다른 한편, 침묵도 언어라는 개념은 보수적인 언어학자들을 펄쩍 뛰게 만들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실 중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은 빈칸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화자에게 허용된 의미 모두를 함축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의미를 선택하는 건 온전히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몫이 되며,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를 공유할 경우에만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소통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 언어는 오해 또는 소통의 부재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시간〉의 일부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 침대에 누운 두 연인의 대화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들이 마침내 (언어의 한계 밖에서) 소통을 이루게 된 건 바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였다 ..  (39, 47쪽)


 여러 해 앞서 〈고추 말리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았거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 영화를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문을 닫고 사라진다는 ‘아트큐브’인가요? 이곳에 조용히 걸리고 그야말로 조용히 보여진 영화 〈고추 말리기〉는 아파트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려는 어머니 심부름을 따르는 ‘시집 안 가고 영화 찍는다며 깝죽댄다는 딸내미(감독 스스로)’ 이야기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영화이름 그대로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나오고, 주인공 딸내미가 식구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목소리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주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삶을 꾸리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수수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에서〉나 〈고추 말리기〉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번거롭게’ 하거나 ‘거북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꾸자꾸 무엇인가 생각하도록 하고 돌아보도록 하며 곱씹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달갑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계몽’이니 ‘교훈’이니 또 무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 여성 비평가들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 평론가들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 이런 식의 잔혹함은 관객들을 괴롭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 디즈니월드와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의 거짓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크린의 장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라면 아무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고문하거나 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화면에 대해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다른 한편, 구타와 강간 등 일상적인 형식의 폭력과 가슴을 찢어내는 미묘한 심리적 고문은 관용의 수준을 현저하게 끌어내리게 된다. 직접 이런 식의 폭력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약간의 상황변화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이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신의 자아가 행사하거나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대한 잠재의식적 공포는 리얼리티에 가까운 폭력형태에 대해 절대적인 반감을 유발하게 된다 … 물론 일반적으로 영화팬들은 여가를 즐기고 고민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때문에 쓰라린 심장과 잔뜩 꼬인 머리로 영화관을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관객들은 수저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김기덕은 깊은 사고를 자극하는 노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  (42, 68, 69쪽)


 저한테는 비디오가 없고 텔레비전 또한 없어 다시 보기 쉽지 않지만, 제가 퍽 여러 차례 본 영화로 〈안드레아스 라인〉이라는 네덜란드 영화가 있습니다. 네 번쯤 보았다고 떠올리는데, 볼 때마다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습니다. 언제나 무슨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드레아스 라인〉을 ‘안 잘린 판’으로도 보았고 ‘잘린 판’으로도 보았습니다만, 여러 차례 보아도 질리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보고프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고 내 삶이 다른 자리에 들어섰을 때 새롭게 보고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아이를 키우는 애 아빠 자리에 있는 만큼 요즈음 다시 〈안드레아스 라인〉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같이 보던 적잖은 사람들은 졸거나 자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나가 버리거나 하기 일쑤였는데, 저는 한결같이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한 대목 두 대목 찬찬히 곱씹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숱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학자 같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고 싶어 계집아이가 일부러 그네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쿵 떨어지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고, 차츰 크기가 커지는 공동체 식구들 밥차림과 왁자지껄 수다 떠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를 받으려고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싱긋 나오고, 화면을 넷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사랑을 불태우는 대목에서도 웃음이 히죽 나왔습니다.


.. 어쩌면 그도 시나리오, 촬영, 편집이 모두 끝난 후에야 겨우 해답을 얻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그의 개인적 해답이고, 그걸 관중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관객들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 내거나 아니면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다 … 더 좋은 선택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스크린에 펼쳐진 계절의 변화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주변 환경에 대한 김기덕의 관심은 빈틈없는 관찰력과 더불어, 감수성보다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 그는 다른 감독들이 모교의 배지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영화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때문에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  (49, 64, 88, 91쪽)


 영화 〈집으로〉를 볼 때처럼,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볼 때에도 ‘영화에 그려지는 마을 모습’에 오래도록 눈이 멎었습니다. 〈선생 김봉두〉가 그리 잘 찍은 영화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저로서는 강원도 동강 둘레에 문닫은 작은 학교를 바탕으로 찍어 놓아 ‘작은 학교 삶터와 삶매무새’가 고스란히 사라지거나 잊혀지기 앞서 이렇게 하나 남겨 놓은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2010년이나 2020년에도 〈선생 김봉두〉 같은 영화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강원도 동강 둘레 맑고 파란 하늘빛과 물빛’은 이 영화를 찍던 지난날만큼 싱그러이 되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든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드넓은 산마을과 자연을 보면서 속울음을 삼켰고, 우리 집 아이한테는 이제 더 보여줄 수 없는 깨끔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자꾸만 삭여야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나라 자연 터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끔찍한 물질소비문명이 언제쯤 끝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나마 이 모습이 살아남아 준다면, 우리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 이 영화에 나오는 저 하늘빛은 뻥 아냐? 거짓말 아냐? 꾸민 그림 아냐? 뽀샵질로 만들지 않았어?’ 하고 물을는지 모르겠지만, …….


.. 서구 사회에서라면 계급이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엄격한 계급체계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국 감옥이나 시체실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식의 악순환의 저주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  (50쪽)


 홀로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옆지기와 나란히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이제는 아기를 안거나 이끌고 골목마실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마음속으로 숱하게 되뇝니다. 저는 제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동네를 이 모습 그대로 담아낼 뿐이라고. 더 잘난 모습도 아니요 더 못난 모습도 아닌, 그저 이 모습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라고.

 꽃그릇을 마련해 꽃씨를 심었으니, 이제 막 움이 틀 때부터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씨가 떨어질 때까지 한 해 내내 끊임없이 담아냅니다. 볕 좋은 날 빨래가 나부끼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따로 동네 할매 할배를 불러 앉히고 얼굴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골목마다 놓인 걸상과 평상을 담으면서 할매 할배 손길과 손끝을 느끼도록 합니다. 나무문패를 쓰다듬으면서,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지면서, 나무로 짠 대문을 쓸어 보면서, 한 동네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린 사람들 발자취를 더듬습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이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또 뒷날 우리 아이가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할는지 모르지만, 아비 된 사람으로서 할 몫이라면 이 동네가 더는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힘쓰면서 오늘 모습을 차근차근 담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2) 김기덕 감독 영화를 생각한다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라는 긴 이름으로, 줄여서 《나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김기독 감독 한삶을 다룬 책 하나가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책은 그야말로 조그맣습니다. 2/3쯤이 몸글이고 1/3쯤은 글쓴이 ‘마르타 쿠를랏’ 님이 김기덕 감독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김기덕은 인간의 조건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82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마르타 쿠를랏 님은 아르헨티나사람입니다. 아르헨티나에 김기덕 감독 영화가 걸리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이는 김기덕 감독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서 보고 생각하고 곱씹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주 많은 한국 ‘영화관 손님’은 못마땅해 하거나 거북해 하거나 몸둘 바를 몰라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등을 돌리지만, 한국 아닌 나라에서는 여러모로 섬기고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파헤치기까지 하는 김기덕 감독 영화가 참말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나누려고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교수인 마르타 쿠를랏 님은 조곤조곤 생각주머니를 펼칩니다.


.. (김기덕) “프랑스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을 다 다녔고, 많은 그림과 조각 사진을 보았고, 그 모든 게 저의 영화 작업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술관의 작품보다는 거리의 동상이나 과거의 흔적들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영화로 철학자나 권력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며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결국 초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시간 동안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프며 행복합니다.” ..  (30, 44쪽)


 책을 읽으며 헤아려 보니, 제가 본 김기덕 감독 영화는 몇 가지 없습니다. 〈수취인불명〉하고 〈파란 대문〉쯤? 둘 모두 누구 작품인지 모르면서 보았고, 〈파란 대문〉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잘 찍은 영화를 잘 읽어낼 사람은 거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영화관 손님’뿐 아니라 ‘책읽는 사람’들도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꺼립니다.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놓고 ‘교훈적’이라느니 ‘계몽적’이라느니 하는 꼬리말을 달아 놓으면서 깎아내리기 일쑤입니다. 재미가 있으면 재미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고, 나를 가르쳐 주면 넉넉히 배우면 될 텐데, 재미를 재미 그대로 못 느끼는 가운데 가르침은 가르침 그대로 못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느 하루 어느 누구한테고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 일이 없건만, 영화와 책에서만큼은 ‘저눔이 날 가르치려 들어? 건방지게?’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 (김기덕) “가족들은 생계비를 벌지 못할까 봐 내가 시나리오 쓰는 것을 반대했고, 저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거리에서 타자기를 안고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대학 나온 사람들도 못하는 것을 한다고 포기하라고 한 적도 많습니다.” … “이제 저는 다수가 행복한 것보다, 한 나라가 행복한 것보다, 어떤 집단이 행복한 것보다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행복은 물질적 만족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인정받지 못했다고 제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하게 제 생각을 고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34∼35, 79, 97쪽)


 《나쁜 감독》을 읽다 보니, 김기덕이라고 하는 영화감독은 고작 ‘국졸’이고, 영화판에 따로 선후배나 스승이라 할 만한 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찬밥이나 미운털이지는 않을 테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많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있느’라 영화이고 책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스스럼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매무새를 스스로 놓쳐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머리속에 어떤 지식으로 가득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지식이 들어서지 못합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있어도 아무런 지식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에 자질구레한 지식을 꽉 채워 놓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살갑고 넉넉하게 껴안지 못합니다. 또는, 우리 머리에 아무런 생각을 담아 놓지 않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깊고 너르게 살펴보거나 헤아리는 품이 없습니다.

 꽉 차서 야무진 듯 보이지만 갑갑하게 꽉 막혀 있는 셈이고, 확 트이거나 열린 듯 보이지만 썰렁하게 메말라 있는 셈입니다.


.. (김기덕) “저는 제 영화에 꼭 맞는 배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제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시간이 맞는다면 가능합니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해서 영화가 잘되는 것보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 모르고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는 게 저는 더 중요합니다.” … “저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지루하게 유럽 영화사를 외웠다면 다른 감독들과 다름없거나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그냥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게 참 행복합니다.” ..  (54, 87쪽)


 다만, 김기덕 감독 영화가 빈틈없이 잘 짜이거나 훌륭하게 잘 엮이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짜이거나 엮였다 할지라도 앞으로도 잘 짜거나 엮을지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저,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대로 온힘을 다해 당신 영화를 알뜰살뜰 일구어 선보이면 될 뿐입니다. ‘영화관 손님’은 영화관 손님대로, 영화관에 가는 까닭이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 때우기를 하러 가는 영화관입니까. 사랑놀이를 하려고 가는 영화관입니까.

 뭐, 사람에 따라, 또 때에 따라 시간을 때우거나 사랑놀이를 하려고 영화관에 마실을 갈 수 있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이 시간만 때우러 가는 곳은 아니요, 책방이나 도서관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러만 가는 곳은 아닙니다. 책을 보러 가면서 책 하나로 마음밥을 얻도록 하자는 책방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영화 하나로 내 삶밥을 곱씹도록 하자는 영화관입니다. (4342.8.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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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진가선 이해문 - 1950~70년대 사진들
박평종 글, 이해문 사진 / 포토넷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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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고 즐기며 껴안다가 살포시 찍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 이해문 사진,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



- 책이름 :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
- 사진 : 이해문
- 엮은이 : (사)민족사진가협회
- 펴낸곳 : 포토넷 (2008.12.30.)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보는 눈


 사진기는 우리가 단추를 누르는 대로 찰칵찰칵 찍어 줍니다. 사진기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얼마든지 담아내 줍니다. 우리가 곱다고 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진기를 들이민다면, 사진기는 어김없이 곱다고 느끼는 대로 담아내 줍니다. 다만, 빛과 빠르기와 그늘을 잘 맞추어 준다면. 아무리 있는 그대로 담아내 준다는 사진기라 할지라도 기계 다루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초점이 어긋나거나 흔들리거나 뿌옇거나 날아가거나 합니다.

 사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온갖 모습을 골고루 찍어 줍니다. 우리가 반갑게 맞이하려는 모습이든, 우리가 숨기고 싶어하는 모습이든, 우리가 돋보이도록 하고픈 모습이든, 우리가 내리누르려 하는 모습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높이에서 어디를 보고 어느 쪽에 중심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모습을 찍는다 하여도, 마음속에 품은 생각에 따라 사뭇 다르게 느낄 사진을 찍기 마련입니다.

 또한, 사진은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가운데, 찍는 사람 느낌과 생각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몸싸움하는 두 사람이 치고박고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지만, 사진쟁이가 ‘어느 한쪽이 아흔아홉 대를 몹시 아프게 흠씬 얻어맞는 모습’은 멀뚱멀뚱 구경만 하다가 ‘딱 한 번 어쩌다 뻗은 손이 다른 편 얼굴에 가닿은 모습’을 잽싸게 찍어냈다 했을 때,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이때가 어떤 흐름이었는가를 깊이 따지면서 사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맙니다. 게다가, 사진쟁이가 사진 밑에 사진말을 어떻게 달아 놓느냐에 따라서 사진은 대단히 다르게 받아들여질밖에 없습니다.

 이는 시위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시위 현장이 아닌 우리 삶터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파트를 찍을 때에도 찍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루빨리 ‘재건축허가’가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파트를 찍을 때, 수십억에 이르는 집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을 때, 아파트 문화를 비판하고 싶을 때, 외딴 시골에서 살다가 처음 아파트를 보는 사람 눈으로 바라볼 때, 나라밖 사람들이 한국에 나들이를 와서 아파트를 찍을 때, 언제나 다 다르게 찍을밖에 없습니다.

 골목길을 찍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골목길 삶터가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살아가는 터전’일 때 담는 사진하고, ‘구경꾼으로 잠깐 찾아와서’ 담는 사진에다가, ‘어릴 적에 살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나가는 길에’ 담는 사진은 모두 다릅니다. 여기에, 도시재정비를 하려는 공무원 눈길로 골목길을 바라본다면 어떠한 사진이 될까요. 가난한 살림집이라고 하나 가난만 있는 골목집이 아니고, 어느 만큼 변두리라고 하나 삶과 마음과 넋이 변두리이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데까지 찬찬히 헤아리거나 짚는 가운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분은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진을 처음 배우던 1998년에 저를 가르친 분도 말씀하셨고, 저 스스로도 사진을 찍는 동안 뼛속 깊이 느끼는 이야기인데, 어느 누구라도 사진을 이제 막 배워서 찍겠다고 한다면 다른 머나먼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떠나서 찍을 생각을 하지 말고, 바로 내가 사는 집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식구부터 찍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터를 먼저 찍고 내 식구를 먼저 찍은 다음, 내가 사는 동네를 찍으면서 나와 이웃한 동무를 찍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차츰 테두리를 넓혀 ‘내가 내 깜냥껏 나 스스로 즐길 사진감은 무엇으로 잡을까’를 찾아나서야 비로소 옳고 바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한편, 첫마음을 끝마음이 되도록 곱게 붙잡으면서 사진길을 걸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내 사진감은 내가 사랑하는 사진감일 테니까요. 내 사진기에 담으려는 모습은 내 일거리일 뿐 아니라 내 삶이요 내 생각일 테니까요. 내 눈길이고 내 몸짓이며 내 넋이요 내 마음일 테니까요. 내 다리품이고 내 땀방울이며 내 손자국과 손때일 테니까요.

 사랑하는 만큼 내 집과 식구를 껴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내 동네와 이웃과 동무를 부둥켜안습니다. 사진은 내 마음그릇만큼, 또는 내 사랑그릇만큼, 아니면 내 믿음그릇만큼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단추를 꾸욱꾸욱 누르는 춤사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날갯짓을 하듯이, 신나거나 구슬픈 노래를 부르듯이, 무더운 날 부채질을 하다가 까무룩 단잠에 빠져들듯이 단추를 살몃살몃 누르는 손놀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껴서 그렇지, 우리가 높이 사거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숱한 사진 작품은 ‘내 삶’ 아니면 ‘네 삶’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나 스스로 담아내지 못했을지라도 누군가 나한테 찾아와서 내 삶을 ‘꾸밈없이 꾸준히 알알이’ 담아낸다면 훌륭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과 자취를 내가 가까이 다가서면서 지긋이 바라보고 껴안고 보듬고 어깨동무하면서 차근차근 사진으로 담아낸다면, 나는 ‘내 이웃 삶’ 그러니까 ‘네 삶’을 사진작품으로 아름답게 새로 태어나도록 이끌어 낸 셈입니다. 브레송이 담은 한때이든, 살가도가 담은 한동안이든, 모두모두 ‘내 삶’ 아니면 ‘네 삶’입니다. 다만, 이 모습들이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못 느끼거나 못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라고 다르겠습니까. 연극은 어떠하지요. 춤이나 노래라고 아주 새로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문화와 예술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얼우고 사귀고 고꾸라지고 일어서고 스러지는 이 땅에서 샘솟습니다. 이 땅에서 샘솟지 않는 문화란 없고, 이 땅에서 비롯하지 않는 예술이란 없습니다. 여느 한국사람이 부러워해 마지 않는 서양 문화라 해 보았자, 하나같이 ‘서양사람 여느 삶’입니다. 스티글리츠 눈에 담긴 사진은 ‘스티글리츠 삶’이거나 ‘스티글리츠 이웃이 꾸리던 삶’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가 담은 1960년대 청계천은 ‘구와바라 시세이가 이웃으로 여기던 사람들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바로 ‘우리 삶’입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사진으로 안 담았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나라 안팎 모든 거룩하거나 훌륭하다는 사진쟁이는 ‘내 삶’을 찍는 사람입니다. 또는 ‘네 삶이지만 내가 꾸리는 삶으로 곰삭이고 받아들여서’ 찍는 사람입니다. ‘네 삶이라 할지라도 내 삶처럼 녹여내고 껴안으며’ 찍는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내 삶’을 담고, 내가 살아가는 대로 ‘네 삶을 내 삶과 같이 바라보며’ 찍는 사람입니다. 












 (2)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에 담긴 사진


 1922년에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나 1956년에 ‘신선회’라는 사진모임을 함께 열어서 꾸린 뒤, 1981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리얼리즘’ 사진 하나를 붙잡았다는 이해문 님 사진책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을 봅니다. 나라안 사진밭에 그다지 이름이 나지 않은 분이요,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 사진책이 나온 일은 없지 않느냐 싶은 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취를 사진으로 담던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던 1981년부터 스물일곱 해가 지난 뒤 비로소 당신 이름을 걸고 사진책이 하나 나와 주었습니다.

 지난 2008년 12월에 나온 사진책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에 비평글을 실은 박평종 님은 이해문 님 사진을 놓고, “이해문의 사진이 50∼60년대 생활상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지니는 가치는 점차 커져나갈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그 시대 다른 사진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염두에 둘 점은 리얼리즘 사진이 지니는 사진사적 맥락에서의 문제이다. 리얼리즘 사진의 흐름 속에서 활동했던 사진가들의 차별성을 말해 주는 개인적 시각은 50∼60년대 작가들에게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덧붙여, “1950년대부터 이해문이 기록해 온 한국의 생활상은 크게 몇 가지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작가 주변의 가족, 친척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진 활동을 했던 작가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피사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가족들의 일상을 일반적인 기념사진의 형식이 아니라 리얼리즘적인 기록의 형식을 빌려 촬영함으로써 그것을 동시대의 보편적인 생활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1950년대 사람들이 1950년대를 그때에 찍었을 때 그때 값어치는 어떠했느냐 궁금하고, 2000년대 오늘날 바로 오늘 모습을 담는 사진을 오늘날에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해문 님 사진들이 값어치가 있다는 셈인지, 세월이 흐르지 않았어도 이해문 님 사진이 값어치가 있다는 셈인지, 또렷하게 갈라서 밝혀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사진이라면, 사진쟁이 스스로 먼 앞날만 바라본 사진이었다는 소리인지, 아니면 그때그때 사람들과 숨결을 같이할 만한 사진작품으로까지 빚어내지 못했다는 소리인지를, 제대로 나누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과 연구만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1950년대’이니 ‘1960년대’이니 읊지만, 참 역사에는 1950년대나 1960년대란 없습니다. ‘1958년 4월 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몇 번지, 그날 몇 시 몇 분, 아무개하고 어디에서’라고 하나하나 밝히는 가운데 비로소 참 역사가 있습니다. 좁다란 양철통에 누나랑 동생이랑 멱을 감는 사진이든, 추운 겨울날 동네 꼬마가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진이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가운데 엄마 따라 나온 아이가 멍석을 깔고 낮잠에 빠져 있는 사진이든, 그 모습 하나하나가 ‘몇 년대 어찌어찌한 역사’가 아니라,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곳 누구네 어찌어찌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역사는 세월이 지난 뒤에만 값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진이 한낱 ‘기념사진’이라 할지라도, 이 사진을 찍은 바로 그날 그때부터 값어치가 있습니다. 찍힌 사람과 찍은 사람 모두한테 값이 있는 가운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때 그런 사진을 기막히게 하나 찍었단 말이야!’ 하면서 더욱더 높은 값이 쌓입니다. 찍힌 사람부터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사진을 들여다보고, 찍은 사람 또한 눈물겨운 웃음으로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이해문 님 사진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이무렵 사진쟁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했을 텐데, 사진찍기로는 먹고살 수 없을 뿐더러 필름값 대기에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진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을 터이며, 부지런히 집 바깥으로 짬을 내어 사진찍기를 나섰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문 님은 바깥에서도 사진을 부지런히 찍는 가운데 집 안쪽에서도 사진을 신나게 찍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대목이 ‘이해문 님 리얼리즘 사진’을 그무렵 다른 사진쟁이하고 갈라 놓을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식구들한테 ‘사진을 좋아하는 남편’이자 ‘사진을 좋아하는 아빠’로서 바깥에서 맴돌이만 하지 않고, 집에서 식구들하고 오붓하게 지내는 가운데 사진을 담았거든요. 이러는 가운데,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이 붙는 사진은, 사람들 삶을 꾸밈없이 담는 사진이어야 할 테지만, 바로 이 리얼리즘은 남들을 구경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부터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고, 이런 눈과 몸짓을 바탕으로 내 이웃을 껴안는 데에 있지 않겠느냐’는 깨달음까지 간다고 생각합니다.

 숱한 사진쟁이들이 집식구 사진을 곧잘 찍지만,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에 담긴 사진처럼 싱그럽거나 짠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이해문 님 ‘삶 사진’은 억지스럽거나 어설프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살아가는 집과 동네를 ‘부끄러움 없이’ 보여줍니다. 딱히 숨기지 않으며, 굳이 내세우지 않습니다. 감출 구석 없고 자랑할 구석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사진쟁이 스스로 삶이 사진이 되고 사진이 삶이 되었습니다.

 〈팽이〉나 〈꼬마도서관〉 같은 작품이 퍽 돋보인다 하지만, 이런 돋보이는 사진이 있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멀리 나가서 여느 사람 수수한 모습’을 찾으려 아둥바둥하기보다, ‘바로 내 집에서 내가 바로 여느 수수한 사람임을 깨달아 나와 내 식구부터’ 찍는 길을 걷고 나서 사진을 넓게 바라보아야겠다고 느끼는 매무새가 고스란히 사진에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제 삶마디에 따라서 헌책방을 찍고 골목길을 찍고 자전거를 찍으며 우리 아기를 찍습니다. 아기를 돌보고 집 안팎 살림을 꾸리느라 집은 온통 어질러져 있는데, 이런 어질러진 모습을 사진눈에서 슬쩍 빼놓을 수 있는 가운데 더 잘 들어오도록 찍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따로 빼지 않고 굳이 더 넣지 않습니다. 꼭 그만큼, 제가 찍어야 하는 만큼만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어떤 ‘적바림(기록)’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좋아서 찍습니다. 좋아서 찍은 사진을 좋아서 두 장씩 찾은 다음, 음성에 살고 있는 부모님한테 한 장씩 모은 꾸러미를 띄우고, 저는 저대로 집에 차곡차곡 한 장씩 갈무리해 놓습니다.

 오늘도 집에서 몇 장 담았고, 골목길마실을 하면서 몇 장 찍었습니다. 다음날도 그 이듬날도 매한가지로 사진과 함께 살아갈 생각입니다. 이해문 님은 이해문 님이 살던 그무렵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사진을 즐겼듯, 저는 저대로 제가 발딛고 있는 터전에서 제 둘레 사람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제 사진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당신 첫 사진책 《한국현대사진가선 : 이해문》 같은 작품을 하나하나 장만해서 제 도서관 책시렁에 고맙게 꽂아 놓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4342.8.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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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람의 말 - 6·9 작가선언
작가선언 6·9 지음 / 이매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미친이는 미친소와 함께 물러나라고 외치려면
 [잠깐 읽기 51] 작가선언 6ㆍ9, 《“이것은 사람의 말”》



- 책이름 : “이것은 사람의 말”, 6ㆍ9작가선언
- 글 : 작가선언 6ㆍ9, 192 사람
- 펴낸곳 : 이매진 (2009.6.29.)
- 책값 : 5000원



 (1) 오늘 우리가 하는 일과 읊는 말


 아침에 일본 만화쟁이 ‘나가이 고’ 님 작품인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와 《Z 마징가》 아홉 권을 금세 읽어냅니다. 그러께에도 한 번 보았고 지난해에도 한 번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스캐너로 겉그림을 긁다가 문득 한 번 다시 넘겨 보는데, 한 번 이야기에 빠져드니까, 아홉 권을 내리 다 읽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첫머리에 그렸고, 우리 나라에도 곧이어 들어온 ‘마징가 제트’가 일본 로봇이었음을 어릴 때부터 찬찬히 알았던 사람은 드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어릴 때에는 알지 못했으며, 어른들은 옳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본이라 해서 굳이 꺼려야 할 까닭이 없으며,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아름답게 일구는 문화와 문학이라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즐길 노릇입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들은 이웃나라 훌륭한 문화와 예술을 꾸밈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일구는 문화와 예술 또한 꾸밈없이 바라보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반성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말은 오물이 되고, 민주주의가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삶은 허깨비가 된다. (고나리)
― 국민을 잠재적 폭도로 여기는 정권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고인환)
―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아서, 숨쉴 수 없게 된 후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권혁웅)



 모처럼 되넘기며 읽는데, 지난해와 그러께 책장을 넘길 때에는 눈여겨보지 못하던 대목 몇 군데가 새삼스레 눈에 박힙니다. 1권 첫머리에서는 “이 녀석의 악마와 같은 파괴력을 써서, 신과 같은 온화한 마음으로, 내가 세계를 구한다!” 하고 외치는 대목이 눈에 뜨이고, 4권 첫머리에서는 “올림푸스의 별들도 예전엔 괴수신이 아니라 지구와 똑같은 생물의 사람들로 가득했었지. 지구인보다 훨씬 거인이긴 했지만 지구인과 다름없는 생활이 있고,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어!” 하고 외는 대목이 눈에 뜨입니다.

 마징가 로봇 이야기를 살피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로봇들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죽고’ 하면서 지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싸움판이 나옵니다. 그저 싸우고 또 싸웁니다. 그예 죽이고 또 죽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죽이고 착한 마음으로 죽입니다. 나쁜 이도 착한 이도 맞은편보다 더 힘이 세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왜 싸우려 하는지, 왜 서로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괴롭히고 들볶으며 ‘세계 정복’을 하려고 드는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오로지 ‘세계 정복’이 꿈일 뿐입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이들은 어디에서 돈이 철철 흘러넘쳐 그 숱한 무기와 로봇을 만드는지, 또 지구를 지키는 쪽 또한 어느 메에서 돈이 콸콸 솟아나서 그 대단한 무기와 로봇을 만드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나쁜 쪽이든 착한 쪽이든 온통 전쟁무기 만드는 데에 돈과 땀과 힘을 바칠 뿐이요, 싸움로봇이 휩쓸면 그 어떤 문명이든 문화이든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됩니다. 주먹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아닌, 주먹 앞에 역사가 없고 문화가 없으며 교육이 없습니다. 오직 주먹힘 하나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납니다.


―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경제발전 운운하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 아래 억압된 정직한 욕망이다. (김남혁)
― 이제 더는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억울한 사람들을 때리지 마라. (김연수)
― 술 마시고 깨어 보니 역사를 몽땅 훔쳐가 버렸네. 일어나자, 친구야. 도둑 잡으러 가야지. (신용목)



 어제부터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죽 읽다 보니, 자연 삶터에서 모든 목숨붙이는 ‘텃세, 제거, 경쟁, 분산’에 따라 서로서로 살아남기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경쟁’이라는 말마디에 오래도록 눈길이 멎습니다. 말 그대로 좀더 힘세고 좀더 슬기로우며 좀더 튼튼한 녀석들이 살아남습니다. 좀더 여리고 좀더 어리숙하며 좀더 가냘픈 녀석들은 밀려나다가 죽어납니다.

 그런데 이 ‘겨루기’란 푸나무와 짐승한테서만 볼 수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사람 또한 아주 예전부터 겨루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겨루기가 아닌 텃세인지 모르며 ‘없애기(죽이기, 제거)’라 할 수도 있고, ‘나누어 모여 살기(공동체, 분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겨루기를 하지 않고 ‘어깨동무’나 ‘품앗이’를 하기도 할 테며, ‘사랑’과 ‘나눔’으로 서로 함께 살아나기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푸나무이든 짐승이든 서로서로 기대어 살아가기도 하니까요.

 그나저나 이 ‘겨루기’라는 대목을 오래도록 곱씹어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터는 어찌 된 노릇인지 그렇게 ‘경제성장’을 높디높이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겨루기는 나날이 거세고 거칠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터는 국민소득도 오르고 물질문명도 거의 마음껏 누리는 데다가 자가용 끌면 못 가는 데가 없는 판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잘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더욱 불꽃 튀도록 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더욱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다. 남보다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남보다 더 누리려 하며, 남보다 더 가지려 합니다. 나한테 없으면 빼앗든지 못 쓰게 하든지 들볶든지 깔보든지 깎아내리든지 합니다.


― 사람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지나갑니까? (우대식)
― 사랑이나 꿈 때문에 절망해 볼 권리를 달라. 돈 때문이 아니라. (윤이형)
― 내 이웃이 헌법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기고 도멸을 삼키며 죽어갈 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이안)


 아주 많은 어버이와 교사 들은, 아이들한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한글을 떼도록 하고 무슨무슨 책을 읽히며 ‘영재교육-재능교육’ 따위를 ‘조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킵니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아이한테 더 많은 지식을 더 어릴 때부터 머리속에 집어넣도록 하는 데에 힘쏟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이 집 바깥으로 나와 신나게 뛰어놀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 골목이나 놀이터를 깡그리 없앤 데다가 너른터(광장)마저 꽁꽁 틀어막았는데, 이렇게 없애고 틀어막고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유익한 교육방송’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이야기도 체험학습’이요, ‘동네 문화와 역사도 체험학습’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에서 땅을 딛고 놀고 넘어지고 어울리는 길은 뿌리뽑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을 보면서 역사와 문화를 몸과 몸으로 배우도록 하는 길은 내팽개칩니다.

 그러고 나서 지식인들은 한 마디씩 합니다. ‘시골에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도시에는 아이들이 많지만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권력을 움켜쥐었다는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이 아이들을 이처럼 못살게 군다지만,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을 누가 뽑았겠습니까. 제도권 공무원과 정치꾼이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어른들이 뽑은 공무원과 정치꾼입니다. 바로 우리 어버이들 스스로 공무원이 되어 일을 해서 아이들을 먹여살리고, 정치꾼이 되어 집식구를 거느립니다.


― 이성은 행동하지 않는다. 너의 울고 있는 말들을 보여줘. (정은경)
― 자유와 사랑을 원합니다. (허윤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먼저 바꾸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은 바꾸지 않는 가운데 화살만 남들한테 돌리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먼저 들여다보고 느껴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은 거들떠보지 않거나 지나치는 가운데 남 탓과 남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 아이들은 바로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남김없이 받아들이면서 크고 있는데, 정작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 앞에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싱그럽게 살아가지 않고 있다고 할까요. 우리는 우리 모습과 삶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마련이지만, 우리 참모습은 숨기거나 감추거나 내버린 채 나라밖 그럴싸한 껍데기만 아이들한테 들씌우려고 한달까요.


 (2) 《“이것은 사람의 말”》에 담긴 글쟁이들 말


 ‘작가선언 6ㆍ9’라는 이름으로 글쟁이 백아흔두 사람이 한 마디씩 외친 목소리를 그러모은 책 《“이것은 사람의 말”》을 읽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은 책상맡에서 머리만 굴리며 펜놀림으로 뽑아낸 글모음이 아닙니다. 보름이라는 짧은 동안에 엮어낸 글모음이기는 하나, 너른터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든 돌멩이를 들든 빈손으로 말없이 선 채로 자리를 지키든 하던 글쟁이들이 온몸으로 부대끼며 헤아리던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글쟁이 백아흔두 사람 목소리는 꼭 한 사람한테 가 닿습니다. 아니, 꼭 한 사람한테 보내려고 쏘아붙이는 말화살이요 말칼입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 한 사람한테.

 그렇지만 이 책을 쥐어들어 읽는 저는, 백아흔두 사람 외마디소리를 읽는 저로서는, ‘틀림없이 이명박 대통령한테 하고픈 말’을 외쳤다는 백아흔두 사람이었을 터이나, 어쩐지 제대로 화살을 쏘는 말을 꺼낸 사람은 꼭 두 사람만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퍽 부질없는 말잔치, 꽤 달콤한 말사탕, 제법 날카로운 듯한 말채찍, 썩 힘알이없는 옹알이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 이명박 정권은 문화와 민주를 파괴하는 광기의 야만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물러가라. (박민규)


 아무래도 이명박 대통령 탓만 할 수는 없으리라 봅니다. 대통령 한 사람만 잘못했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좀더 옳고 바르게 살아내지 못한 탓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나 스스로한테 외치는 말마디’조차, 나한테서 무엇이 잘못되거나 어긋나거나 뒤틀렸다고 느끼는가 하는 대목에서 엉성궂습니다. 흐리멍덩합니다. 모두들 글쟁이라서 글솜씨가 빼어나서 ‘은유와 비유’로 이야기를 펼치시는지 궁금합니다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작가선언 6ㆍ9”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청계천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살아 있는 물이 아니다. 이대로 모두가 유령이 될 순 없다. (정주아)


 《“이것은 사람의 말”》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오늘날 정권이 엉뚱한 길로 마구 내달리는 모습을 꾸짖으려는 마음으로 책을 펴냈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몹쓸 정권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값을 퍽 값싸게(5000원) 붙여서 내놓았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을 했다고 느끼는 한편, ‘작가선언 6ㆍ9’를 더욱 힘차고 또렷하고 널리 나누려 하던 마음결이라면 한 쪽에 한 줄씩 넣는 책짜임이 아닌, 백아흔두 줄에 이르는 외침을 더 작은 판으로 더 수수하게 묶고 책값은 아예 1000원쯤 붙일 수 있도록 엮어내어 수만 권을 찍어서 뿌려야 알맞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백아흔두 줄을 열 몇 쪽짜리 더 작은 책자로 꾸며 한 권에 500원씩만 받으면서 수십만 권을 찍어서 뿌려야 한결 알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뭇소리 없이 입다물고 있는 우리들이 아님을 느끼니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이만한 몸부림이라도 보여주는 글쟁이들이니, 이와 같은 발버둥으로라도 치면서 우리 삶터를 새롭게 바라보고 부둥켜안고자 하니 반갑습니다. (4342.8.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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