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네 집 -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전몽각 지음 / 포토넷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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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만 해도 안 뜨더니, 용케(?) 오늘은 뜬다. 나처럼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아픈 삶과 웃는 삶 모두 좋아 사진을 찍는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0] 전몽각, 《윤미네 집》



- 책이름 : 윤미네 집
- 사진 : 전몽각
- 펴낸곳 : 포토넷 (2010.1.1.)
- 책값 : 28000원

(전몽각 님 누리집 www.jmong.net)




 (1) 아프게 살아가고 고맙게 사진찍고


 지난해 팔월부터 십이월 첫머리까지 한 주에 닷새씩 인천에서 서울로 오가면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집식구가 몹시 힘들어 해서 때때로 한 주에 한 번씩 쉬거나 조금 늦게 나가기도 했으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바람으로 밥해 놓고 빨래해 놓고 집일 얼추 하고 일을 나간 다음 파김치가 되어 저녁이나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어지러운 집을 대충이나마 돌보든 그대로 내팽개치고 곯아떨어지든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니 도무지 사람 사는 모양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러면서 몸마음 모두 아픈 옆지기는 더 아픕니다. 저는 저대로 더 힘듭니다. 하소연을 할 까닭이 없으나 우리 식구가 하소연할 구멍은 없습니다. 저는 저대로 옆지기한테 푸념하지 못하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당신 아픈 몸마음을 풀어내지 못하면서 옆지기 부모님네 걱정을 하느라 더 고단해 하고 슬퍼 합니다.

 이렇게 죽어나듯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12월 2일부터 더는 출퇴근 일을 안 해도 되었고, 요사이는 한 주에 이틀을 서울로 일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한 주에 닷새이든 이틀이든, 이렇게 애 아빠 된 몸으로서 집을 오래도록 비워 놓고 있자니, 집을 비우든 동안 집안에 쌓일 일을 미리 해놓느라 바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쉴 겨를이 없이 다시 밀린 일을 하느라 허둥지둥입니다. 이러면서 옆지기하고 오붓하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짬을 못 냅니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이렇게 일할 마음이 아닌데, 세상 흐름에 맞추자면 나 스스로 바보가 된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을 이 땅에서 하고자 한다지만, 식구들 몸과 아이키우기를 내버리면서까지 해야 하느냐 싶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딱히 어디에 내놓으려고 찍었던 사진이 아닌 제 사진감인 ‘헌책방’은, 저 혼자서 필름을 맡기고 찾고 스캔질하는 동안 즐겁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굳이 어디에 내세우려고 찍는 사진이 아닌 제 둘째 사진감인 ‘인천골목길’ 또한, 저 스스로 제 사진을 돌아보면서 웃고 울고 기쁘며 슬픕니다. 누구한테 내보일 마음이 아니요, 나중에 아이한테 큰선물이라도 되는 양 던져 줄 마음이 아닌 가운데 붙잡는 셋째 사진감인 ‘딸아이 사름벼리’도, 나와 옆지기와 아이 모두 신나게 예전 자취를 더듬으며 즐기고 있습니다. 올해로 세 살을 맞이한 아이는 때때로 ‘제 모습 찍힌 사진 담은 꾸러미’를 펼치면서 한 장 한 장 넘기곤 합니다. 아이가 사진을 알아서 스스로 넘겨보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보름쯤 앞서부터는 아이가 제 디지털사진기를 즐겨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아빠가 제(딸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찰칵’ 하는 소리에 아빠를 쳐다보며 얼굴에 시익 웃음을 머금고 후다다닥 달려듭니다. 그러면서 두 팔을 뼏쳐 사진기를 움켜쥡니다. 한 주쯤은 제가 단추를 하나씩 눌러 주어야 했고, 이제는 아이 스스로 어느 단추를 눌러야 사진을 넘길 수 있는지, 크고작게 보려면 무엇을 눌러야 하는지까지 알아챕니다. 오늘은 드디어 혼자서 켜고 끄기까지 해냅니다.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놓는 일도 ‘적바림(기록)’이라면 적바림입니다. 몸마음 아픈 옆지기는 엊그제뿐 아니라 아침 일마저 떠올리지 못할 만큼 매우 힘들어 합니다. 애 아빠가 찍은 사진을 셈틀 화면으로 넘겨보면서 ‘언제 적 모습’이었는지를 가늠하지 못하곤 합니다. 배앓이를 하며 낳은 딸아이가 어떠한 나날을 거쳐 뒤집고 기고 서고 앉고 걷고 뛰고 하며 이렇게 자랐는지를 하나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예전 사진을 보며 마치 ‘우리 아이가 아닌 듯’ 느끼기도 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사진이라도 담아 놓지 않았으면 아무리 말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옆지기가 머리로 떠올려 내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딸아이 지난날 모습을 꼭 떠올려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옆지기가 저하고 함께 살던 처음 모습을 구태여 되돌아보아야 하지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이 더 아름답거나 못났을 까닭이 없고, 오늘이 더 아름답거나 모자랄 까닭이 없으며, 앞날이 더 아름답거나 아쉬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삶과 목숨대로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고맙습니다. 때때로 ‘우리 옆지기가 이렇게 아픈 사람이 아닌, 튼튼한 사람이라면 내 삶과 우리 아기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데, 튼튼한 옆지기였다면 저는 저대로 바깥일을 훨씬 많이 했을 테고 글을 더욱 엄청나게 써댔을 테며 방송취재라든지 책 펴내기도 아주 신나게 해댔을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연예인 못지않게 잘나갔을는지 모르고, 어쩌면 지난 1995년부터 가난하고 벗삼은 삶자락을 떨쳐냈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잘나가는 제 모습이나 가멸찬 살림이 된 제 모양새는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겠습니다. 외려 두렵습니다. 잘나가는 만큼 다소곳함을 잃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가멸찬 살림인 만큼 돈 한푼을 알뜰히 간수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까 무섭습니다. 





 옆지기라서 아픈 사람이라서 더 좋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픈 옆지기가 싫거나 밉지 않습니다. 아픈 옆지기 때문에 저 스스로 더 아픈 자리를 견디어야 하고 알아야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단한 나날이지만 옆지기처럼 아픈 이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다듬습니다. 지치는 삶이지만 옆지기보다 더 아플 이웃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립니다. 예전이라고 머리통만 굴리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몸마음 다 아픈(심신장애)’ 사람이 한식구요 옆지기요 애 엄마인 가운데 갖은 집안일과 바깥일을 도맡으면서 더 마음을 쏟고 힘을 내야 하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겨우 붙잡습니다. 어설픕니다만, 우리 어머니가 할아버지 똥오줌을 치우고 밥을 먹이면서 우리 형제를 키우는 한편 부업을 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하는 삶을 견디고 살아낸 하루하루를 살갗으로 살짝살짝 느낍니다. 어머니는 홀몸으로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하면서 당신 젊음을 다 바칠 수 있었을까요? 저한테는 우리 어머니이지만, 제 둘레에는 수많은 ‘또다른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들이 당신들 식구나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한테 이렇게 ‘몸마음 다 바치는 삶’을 견디거나 살아냈겠지요.

 이 같은 삶이 사진으로 적바림된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는 줄 압니다만,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 적바림하고자 하는 사람을 저로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 삶을 고맙고 사랑스러운 삶으로 받아들여 사진으로 적바림하는 눈물콧물땀방울을 영그는 사람을 저로서는 여태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합니다만, 삶이 참 사진이고 사진이 참 삶이라고 느낍니다.

 눈물이 없는 글이 글이라 하겠습니까? 콧물이 없는 그림이 그림이라 하겠습니까? 땀방울이 없는 사진이 사진이라 하겠습니까?

 저는 어느새 손빨래로 보내온 삶이 열여섯 해째 접어듭니다. 홀살이를 하건 함께살기를 하건 군대살이를 했건 늘 손빨래 삶입니다. 서른여섯 줄 나이로는 찬물 빨래가 어려워 보일러를 돌려 손빨래를 하는데, 졸음을 이기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빨래를 하는 동안 기쁘고 고맙다고 느낍니다.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이야기라고 느끼는데, 옆지기는 ‘당신이 너무 힘드니까 내가 빨래할 테니 그냥 두어요’ 하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습니다. 그만큼 옆지기가 힘들다는 소리입니다. 옆지기도 아픈 몸으로 빨래를 하자면 더 힘들기는 할 테지만, 옆지기나 저나 손빨래를 하면서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고되다고 느끼거나 귀찮다고 느낀 적 또한 없습니다. 손빨래를 하면서 늘 ‘좋았’습니다. 손빨래를 하고 나면 언제나 ‘흐뭇’했습니다. 빨래하는 동안 아이를 안 봐도 되니까 그러할 수도 있지만, 비비고 헹구고 털고 널고 하면서 옷가지만이 아니라 마음가지까지 말끔하게 빨아 놓거든요. 옷가지를 맑게 다스리면서 마음가지 또한 맑게 다스리거든요.

 저는 옆지기를 사진으로 담거나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노상 손빨래하는 마음입니다. 손빨래를 하며 우리 집식구 몸을 돌아보고 마음을 곱씹듯, 사진기 단추를 한 번 누르고 두 번 누를 때마다 우리 집식구 오늘 하루 삶이 이렇게 고맙고 반갑고 흐뭇하고 멋지고 고와 참 아름답구나 하는 느낌을 담으려 합니다. 앞으로 우리 식구가 얼마나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는지는 하늘님과 땅님 뜻일 텐데, 오래 살든 짧게 살든 이 하루 서로서로 복닥이고 아파하고 힘겨우면서도 어찌어찌 한 해 두 해 달력을 넘기는 삶임을 깨닫고 기쁘구나 하는 느낌을 사진 한 장이나 글 한 줄에 실으려 합니다. 이리하여, 이렇게 해서 찍은 우리 식구 사진은 바깥에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따로 바깥에 내보이려고 찍는 사진은 아니지만 옷장 깊은 곳에 꽁꽁 감추려고 하는 사진 또한 아닙니다. 그예 우리 삶입니다. 그저 우리 사진입니다. 그대로 우리 사람입니다. 꾸밈없이 우리 사랑입니다.
 





 (2) 다시 태어난 《윤미네 집》


 사진책 《윤미네 집》이 2010년 1월 1일을 맞이해서 새옷을 입고 우리 앞에 다시 선보입니다. 1990년 11월에 처음 나온 이 사진책은 스무 해라는 세월을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깊은 잠을 기지개 켜고 깨어나 우리 앞에서 슬그머니 웃습니다. 1990년에는 ‘시각’ 출판사이고, 2010년에는 ‘포토넷’ 출판사입니다. ‘시각’은 사진문화를 깊이 사랑한 주명덕 님이 꾸리던 곳이고, ‘포토넷’은 다달이 사진잡지를 펴내는 곳입니다.

 디지털사진기가 나오기 앞서도 한국에서 사진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사진책이나 사진잡지가 사랑받기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디지털사진기가 널리 팔리며 웬만한 사람들 누구나 괜찮은 디지털사진기를 갖추고 있는 오늘날 또한 사진책이나 사진잡지는 사랑받기 만만하지 않습니다. 꿋꿋하게 사진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있습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이 사진책들이 품절이나 절판이라는 길을 걸을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새옷을 입고 나온 《윤미네 집》은 사진잡지 길을 꿋꿋하게 걷는 곳에서 애써 펴내 주니, 여느 사진책보다는 좀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만, 앞으로 두고보아야겠지요. 새옷을 입기 앞서 《윤미네 집》을 헌책방에서 찾아내려고 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고, 제가 갖고 있는 예전 판 이 책을 10만 원 줄 테니 팔라던 사람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새로 나오는 책’을 널리 사랑하면서 즐거이 마주해 주실 수 있는지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 그저 낳은 이후로 안고 업고, 뒹굴었고 비비대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어 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를 나무우리(아기침대)에 넣어 두고 시간 맞춰 우유병을 물려 주는 미국이나 유럽의 그런 식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 것을 너무나 한국적이라 해야 할지 혹은 원시적이라는 비평거리가 될는지는 모를 일이나, 나와 아내는 하여간에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만 키운 것이다. 앞으로의 젊은 세대들은 요즘같이 냉철하고 이성적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서양의 그네들처럼 그렇게 닮아 갈 것이란 미래 예상은 어렵지 않지만, 그 방식이 나로서는 안타깝고 두렵기까지 하다. 아이들이 자라던 그때에는 나의 공부방에 있다 보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사람 사는 집 같았다 … 아이들의 일상생활은 보기에 따라서는 비슷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새롭고 독특하여 아무리 섬세한 예술가일지라도 연출로는 불가능한 그런 자체 표현을 수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손에 든 내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집에만 들어오면 카메라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어쩌다 귀가 시간이 늦어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 있을 때라도 한참 들여다보면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카메라를 또 들이대고, 아이 깨운다고 아내에게 야단맞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들이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할 때, 더듬더듬 말을 하는 등의 변화가 보이면 공연히 나 혼자 흥분하여 필름만 더 축내곤 했으니 말이다 ..  (책머리에/전몽각)
 





 사진책 《윤미네 집》은 조금도 ‘전문성과 예술성’이 담기지 않은 사진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은 전몽각 님한테 ‘사진을 찍는 전문성과 사진을 보여주는 예술성’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라는 소리입니다. 누구나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듯(아이를 못 낳으면 데려다 키울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이를 키우면서 바라보고 느끼고 겪는 모습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소리입니다.

 다만, 《윤미네 집》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쉬운 사진을 담은 책이지만, 누구도 찍지 않은 쉬운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 둘레에 넘치는 ‘전문성과 예술성’이 담긴 사진들은 ‘누구나 찍을 수 없는 어려운 사진이지만, 누구나 찍고 있는 어려운 사진’이라는 소리입니다.

 전몽각 님이 담아낸 《윤미네 집》은 누구나 알고 느꼈고 부대끼며 받아들이는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진작가와 사진예술가들이 담아내는 사진작품은 누구나 잘 모르고 못 느끼고 동떨어져 있는 꿈나라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듦사진이 되어야 ‘작품’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살아가며 늘 보고 겪는 모습을 담는다고 ‘작품’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지 않습니다. 사진관이든 스튜디오이든 장비를 잘 갖추어 놓은 골방에서 빛을 맞추고 모델을 움직여 가며 담아내야 ‘예술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살림집 한켠에서 아이들과 옆지기를 35밀리 사진기나 값싼 디지털사진기로 담아낼 때 ‘예술작품’이 안 되란 법은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사람이나 제3세계라는 곳 사람이나 전쟁터에서 시달리는 사람이나 아프리카라든지 인도라든지 티벳이라든지 하는 곳 사람을 만나서 사진으로 담아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설레는 가슴으로 만나다가 뜨거운 사랑으로 얼우고 풋풋한 믿음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는데 이 사진들이 ‘다큐사진’이란 이름을 못 얻을 까닭이 없습니다.
 





.. “《윤미네 집》에 제 사진이 많지만 저와 남동생 둘,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모두 이 사진집의 주인공입니다. ‘윤미네 집’으로 불리던 우리 가족 모두의 다정하고 따뜻했던 시간들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 《윤미네 집》은 언제 보아도 그리운 시간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제게 소중합니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 사진들을 보면서 제가 받은 사랑과 행복했던 그 시간들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곤 했어요 … 외로운 외국에서 그 사진집을 받고서 부모님께 감사하며 많은 힘을 얻었지만 사진을 찍으시고 또 사진집으로 엮으신 그 절절한 부모님의 마음까지는 깊이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사진 속 어머니와 렌즈 너머에 계셨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사랑 하나하나를 너무나 또렷하게 느낍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셨던 가족의 순간순간을 일기 쓰듯 기록하신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이제는 잘 알 것 같아요.” ..  (딸 전윤미 씨 인터뷰/162∼163쪽)


 지난 1월 6일부터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에서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살가도 님은 나라 안팎에 이름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아픈 삶과 힘겨운 삶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훌륭한 분입니다. 저로서는 인천에서 고양시까지 가기는 너무 벅찰 뿐더러, 옆지기와 아기를 놓고 혼자 갈 수 없어, 일산에 사는 처남한테 용돈을 쥐어 주고 동무들하고 구경하러 가 보라고 했습니다. 책이라면 언제라도 장만할 수 있고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든 책장을 펼칠 수 있지만, 책으로 묶이지 않은 사진이라면 전시장에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5년에 서울에서 열린 사진잔치에 찾아가서 8000원을 치르고 사진을 돌아보고 난 다음에, 이분 사진책 《Workers》와 《Children》을 서울 혜화동 〈이음책방〉에서 장만했습니다. 사진잔치를 연 전시장에서는 전시장 느낌대로 좋은 느낌이었고, 언제나 다시 들출 수 있는 두툼한 사진책은 언제나 새롭게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이끕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을 《Workers》와 《Children》하고 견주는 일은 어울리지 않을는지 모르는데, 전몽각 님 사진책과 살가도 님 사진책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찬찬히 다시 돌아보아도 반가운 대목에서 비슷합니다. 다루는 사진감이 다르고 다루는 사진감만큼 사진에 담으려는 이야기도 다를 테지만, 사진기를 든 사람과 사진기 앞에 선 사람이 놓인 거리가 멀지 않다는 대목에서도 비슷합니다.

 ‘큰 이야기’를 다루거나 담아야만 훌륭한 사진이겠습니까. ‘큰 이야기’를 짚거나 찍어야만 다큐사진이 되겠습니까. ‘작은 이야기’를 다루어도 훌륭한 사진이며 다큐사진입니다. ‘작은 이야기’라 하여도 좋은 사진이 될 수 있고, ‘큰 이야기’라 하지만 좋지 못한 사진에 머물 수 있습니다.

 저는 살가도 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분 사진은 흔히 말하는 ‘다큐’라는 이름만으로는 걸맞지 않다고 느껴, ‘삶사진’이라는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전몽각 님이 당신 식구들 삶자락을 담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도 숱한 다른 이름들은 들어맞지 않다고 느껴, 이때에도 ‘삶사진’ 같은 이름을 붙여야 알맞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두 분 모두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테두리에서 온누리 사람들 눈물과 웃음을 보여주는 살가도 님 사진이라면, 작은 테두리에서 집식구들 눈물과 웃음을 보여주는 전몽각 님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테두리에서 온누리를 두루 찾아다니며 사람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헤아리는 사진을 찍은 살가도 님이라면, 작은 테두리에서 내 집식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껴안으면서 사람 삶이란 어떠한가 하고 살피는 사진을 찍은 전몽각 님이라고 생각합니다.
 





.. 남편이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기록하다 보니 쌓이게 되었고, 그래서 전시회도 하고 책도 만들게 되었다. 가족사진으로 첫 전시회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그 당혹감은 말할 수 없었다. 아무 때나 카메라를 들이댈 때도 저러다 말겠지 하고 근근이 참았는데, 이제는 만천하에 공개하겠다고 하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첫 출판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평범한 우리 가정의 일상사가 여과 없이 공개되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다시 책을 내는 데 동의하게 되었을까? ..  (사랑하는 남편과 지난날을 추억하며/이문강,200쪽)


 언제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고 누구라도 엮을 수 있는 사진인 《윤미네 집》입니다. 전몽각 님한테는 ‘윤미네 집’입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사름벼리네 집’입니다. 이웃집에서는 숱한 ‘아무개네 집’이 이루어집니다.

 ‘아무개네 집’ 이야기는 사진으로 엮일 수 있고 글이나 그림으로 엮일 수 있습니다. 엮는 사람 나름이고, 엮는 사람 생각에 따라 다릅니다. 따로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이 아닌 ‘마음에 담아 놓는 이야기와 느낌’으로 우리 삶을 저마다 다르게 이루어 놓을 수 있습니다. 





 《윤미네 집》이든 《Workers》이든 《Children》이든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좋거나 사랑스럽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사진기를 든 사람이 사진기 앞에 선 사람하고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언제나 곁에서 지켜보는 한편, 한결같이 손길을 내밀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지키고 가꾸고 돌보아야 하느냐는 마음을 튼튼하게 가다듬고 있기 때문에 ‘좋은’ 사진 하나 얻는다고 봅니다.

 ‘좋은’ 사진뿐 아니라, ‘좋은’ 글이나 ‘좋은’ 그림이나 ‘좋은’ 책이나 ‘좋은’ 노래는 따로 없다고 하지만, ‘좋은’ 무엇이란 어김없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 또한 틀림없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옆에 있습니다. 우리 옆지기가 좋은 사람이고, 우리 옆에 있어 주는 동무가 좋은 동무이며, 우리 옆에서 믿고 사랑하는 이웃이 좋은 이웃입니다. 돋보이고 아니고가 아니라, 내보이고 아니고가 아니라, 돈벌이가 되고 아니고를 떠나, 예술이 되고 아니고를 떠나,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이야기가 될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우리 가슴에 곱다시 내려앉는다고 봅니다. (4343.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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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1-1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가지고 싶던 사진집이라 땡투하고 구매합니다 ^^
 

 

알라딘에는 <윤미네 집>이 안 들어오나? 

이 사진책을 소개하는 글을 띄우려 했건만 

알라딘에는 이 책이 뜨지 않는다. 

 

<윤미네 집>을 다루지 못하는 알라딘이라 한다면, 

무슨 '인터넷책방'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을까? 

하는 수 없이, 블로그에 붙인 글을  

주소붙이기를 할밖에. 

http://blog.naver.com/hbooklove/60098998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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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로 이야기 1 - 세 어머니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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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4 ― 한 해를 통틀며 가슴으로 껴안는 책
 : 시모무라 고진, 《지로 이야기 1》



- 책이름 : 지로 이야기 1
- 글 : 시모무라 고진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09.4.24.)
- 책값 : 14000원



 (1) 올 한 해 나한테 가장 돋보이는


 한 해에 책을 한 권만 읽은 분들한테 ‘올 한 해 당신한테 가장 돋보이는 책’을 꼽으라고 여쭙기는 머쓱합니다. 그러나, 한 권을 읽든 열 권을 읽든 백 권을 읽든, 그 책 가운데 하나라도 마음을 움직였다면 우리한테는 아름답고 반갑고 훌륭한 책이라고 느낍니다.

 저한테는 어떤 책들이 지난 2000년부터 가슴을 파고들었는가를 곱씹어 봅니다. 지난 2008년에 나온 책 가운데에는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톨스토이 씀,달팽이 펴냄), 《니사》(마저리 쇼스탁 씀,삼인 펴냄),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폴 콜먼 씀,그물코 펴냄), 《도자기》(호연 그림,애니북스 펴냄), 《페르세폴리스 2》(마르잔 사트라피 그림,새만화책 펴냄), 《눈물나무》(카롤린 필립스 씀,양철북 펴냄), 《음주가무연구소》(니노미야 토모코 그림,애니북스 펴냄) 들을 꼽습니다.

 지난 2007년에 나온 책 가운데 한 가지 책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 씀,달팽이 펴냄)와 《이 여자, 이숙의》(이숙의 씀,삼인 펴냄)를 꼽습니다(한 권이 아니고 두 권이군요). 2007년에 나온 그 어떠한 책도 이 두 권보다 제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지 못했습니다. 2006년에 나온 책 가운데에는 《장미마을의 초승달 빵집》(모이치 구미코 씀,한림출판사 펴냄)과 《낫짱이 간다》(김송이 씀,보리 펴냄)를 꼽습니다. 2005년에 나온 책에서는 어린이문학 《두 친구 이야기》(안케 드브리스 씀,양철북 펴냄)와 사진책 《섬》(전민조 사진,눈빛 펴냄)을 꼽는데, 이와 함께 만화책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씀,야간비행 펴냄)가 참 좋았습니다. 2004년에 나온 책에서는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 로이 씀,녹색평론사 펴냄)를 오래도록 곱씹었습니다. 2003년에 나온 책에서는 《말해요 찬드라》(이란주 씀,삶이보이는창 펴냄)와 그림책 《꼬마 인형》(가브리엘 벵상 그림,열린책들 펴냄)이 한 해 내내 가슴을 채웠고, 2002년에 나온 책에서는 사진책 《역전 풍경》(김기찬 사진,눈빛 펴냄)과 환경문학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 씀,그물코 펴냄)을 손꼽습니다. 2001년에 나온 책을 돌아볼 때에는 1999년부터 나와서 모두 23권으로 마무리가 된 만화책 《당신의 손이 따뜻할 때》(준코 카루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열 권과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열세 권이 아름다웠다고 느끼는데, 2001년은 《내 마음속의 자전거》(미야오 가쿠 그림,서울문화사 펴냄) 1권이 막 나오면서 자전거 사랑과 자전거 삶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들한테 보여주던 해입니다. 2000년에 나온 책에서는 어린이문학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야누스 코르착 씀,내일을여는책 펴냄)과 환경문학 《블루백》(팀 윈튼 씀,눌와 펴냄)만한 책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올 2009년을 놓고 돌아볼 때에는 《우애의 경제학》(가가와 도요히코 씀,그물코 펴냄)이나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숲속여우비 펴냄)나 《흐느끼는 낙타》(싼마오 씀,막내집게 펴냄)나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필립 퍼키스 말,안목 펴냄)가 돋보인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가운데 《아돌프에게 고한다 1∼5》(데즈카 오사무 그림,세미콜론 펴냄)과 《리틀 포레스트 2》(이가라시 다이스케 그림,세미콜론 펴냄)과 《현미선생의 도시락 1》(오사무 우오토 그림,대원씨아이 펴냄)가 퍽 좋았습니다. 《민들레솜털》(오자와 마리 그림,북박스 펴냄)이 올해에 3권과 4권이 번역되어야 했을 텐데 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무척 안타깝습니다. 가만히 보면, 《내 마음속의 자전거》 또한 13권까지만 번역이 되고 14권부터는 나오지 못합니다.

 2009년에 제 마음속에 파고든 좋은 책을 더 든다면, 여기에 《지로 이야기》 1ㆍ2ㆍ3권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빈센트 반 고흐 글,아트북스 펴냄)를 들고 있는데, 누군가 이 가운데 한 권을 다시 추린다면 어느 책이냐고 여쭐 때에는 《지로 이야기》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628쪽(1권) + 564쪽(2권) + 372쪽(3권)으로 이루어진 긴 소설인 《지로 이야기》는 자그마치 1564쪽이나 되는 두툼한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이 책은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이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바람에 이만한 부피로 끝났지, 글쓴이가 조금 더 오래 살면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면 훨씬 길었겠지요.

 무척 긴 이야기라 할 만하지만, 저는 아기 기저귀를 빨고 어르고 달래면서 《지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기를 겨우 잠재운 깊은 밤에 조용히 일어나서 읽고, 새벽나절 빨래를 하고 나서 읽으며, 아기 죽을 끓이는 부엌에서 읽었습니다. 아기를 안고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하고, 전철간에서도 이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밖에 《잊혀진 미래》(팔리 모왓 글,달팽이 펴냄)와 《희망을 여행하라》(이혜영과 임영신 글,소나무 펴냄)와 《시타델의 소년》(제임스 램지 울만 글,양철북 펴냄)을 아기를 안고 어르면서 바지런히 읽는 동안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느꼈습니다. 제 손이 짧고 머리가 짧으며 생각이 짧은 탓에 더 많은 좋은 책을 더 널리 제 가슴으로 껴안지 못했습니다. 읽거나 훑거나 살핀 책은 천 권이 넘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다문 한 권이라도 금세 떠올릴 수 있는 책이 있던 해라고 생각하니, 2009년 한 해 책읽기 또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즐거웠습니다. 지난 열 해를 거슬러 보면서 기쁩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읽은 책들을 앞으로 우리 딸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 식구한테 돈은 없으나 좋은 마음밥이 있는 셈이니 괜찮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돈벌이가 시원치 못하나 마음나눔은 흐뭇하게 한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지 않고 책만 들여놓고 있는 이 터전을 언제까지나 고이 이어가고 싶습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하느라 말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을 늘리지 못했는데, 새해에는 옆지기와 아이한테 좀더 말을 걸고 좀더 깊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작은 조각틈을 내어 책 하나하나 알뜰살뜰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2) 《지로 이야기》라는 푸름이문학


 2009년 봄에 모두 세 권으로 옮겨 나온 《지로 이야기》는 일본에서는 1부부터 5부까지 따로따로 나온 판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다섯 권으로 나온 책이요, 이번에 우리 나라에서는 세 권으로 나온 셈입니다.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몸이 아파 자리에 드러누운 탓에 뒷이야기를 꾸준히 이어쓰지 못했으며, 모두 7부로 마무리를 짓고자 했던 《지로 이야기》는 그만 5부를 끝으로 더는 쓰지 못했습니다. 5부를 마치고 나서 글쓴이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선뜻 이 책을 집어들기 어렵다 말할 수 있지만, 《지로 이야기》는 1부부터 5부까지 모두 ‘독립되어’ 있습니다. 세 권짜리로 나온 우리 나라 판 또한 1권과 2권과 3권이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지로’라고 하는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조금씩 철이 들고 세상을 읽는 눈썰미를 키우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모습이 권마다 달리 펼쳐집니다. 1권만 읽든 3권만 읽든,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뜻과 얼’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1부와 2부를 하나로 묶은 《지로 이야기 1》인데,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1942년 5월 5일, 2부를 마무리짓고 낱권책으로 펴내면서, “첫 권에서 나는 운명의 아들인 지로의 성장을 그리면서 주로 ‘교육과 모성애’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주제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의 생활 대부분은 오히려 세상의 부모들에게 그같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다뤄졌다. 그러나 제 2부에서 지로는 독립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지로는 여전히 모성애를 갈망하는 운명의 자식으로서 세상 부모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문제의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지로 자신이다. ‘자기 개척자로서의 소년 지로’,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인 셈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이 글은 번역책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책에만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로 이야기 1》에서는 ‘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어머니 마음이란 무엇인가’와 ‘나를 낳아 키운 어머니와 둘레 사람과 터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을 푸름이한테는 ‘우리 엄마 아빠란 분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거나 아끼는가?’ 하는 궁금함과 ‘나는 내 어버이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꾸려야 하는가?’ 하는 걱정을 돌아보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을 어버이한테는 ‘나는 얼마나 어버이다운 매무새로 우리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는가?’ 하는 돌아봄과 ‘나는 내 아이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자라서 아이를 낳기까지 나를 돌보고 키운 내 어버이를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 하는 되새김으로 지나온 발걸음을 생각하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 갈래로 나눈다면 ‘푸름이 문학(청소년 문학)’이 될 《지로 이야기》인데, 갈래는 문학이지만 속에 담은 이야기와 줄거리와 넋은 문학이 아닌 삶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살아낸 이야기요, 지은 이야기가 아닌 살아갈 이야기입니다.

 그저 재미 삼아 뒤적거리는 읽을거리가 아니며, 한낱 시간 죽이기로 훑을 읽을거리가 아닙니다. 성장소설이라든지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책입니다. 따로 추천도서나 권장도서로 묶을 만한 책 또한 아닙니다. 글쓴이 시모무라 고진 님은 “자네는 그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같은 꾸지람까지 들으며 이 책을 써냈는데, ‘내 삶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일 때에 쥐어들 《지로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 ‘내 삶이 아이 앞에서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되새기고자 할 때에 읽을 《지로 이야기》입니다. 내 가슴에 따순 사랑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생각하고 싶을 때에, 내 가슴에 깃든 따사로운 사랑으로 내 이웃과 동무를 따사롭게 껴안고 싶을 때에 읽는 《지로 이야기》입니다. 내가 걷는 이 한길이 얼마나 나와 내 식구와 이웃을 옳게 북돋우며 곱고 맑은 빛을 비추는가를 살피고 싶을 때에, 내가 걷는 이 한길이 내 밥그릇만 챙기려는 노릇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싶을 때에 펼칠 《지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로 이야기》는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길동무와 같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지로 이야기》는 이 책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한테 마음동무와 같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생각동무, 슬기동무, 넋동무, 삶동무로 곁에 놓을 책이라 하겠어요.

 “너희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대로 앙갚음하겠다는 거냐.”

 시모무라 고진 님은 당신 삶을 비춘 좋은 사람으로 세 사람을 꼽고, 이 가운데 다자와 요시하루라는 분이 첫손이라고 꼽습니다. 젊은 날, 다자와 요시하루라는 분이 학교식당에서 ‘혼자 밥을 왕창 먹어 다른 사람이 굶게 되었을 때에, 혼자 밥을 왕창 먹은 동무를 골탕 먹이겠다고 하는 동무들 앞에서 읊은 한 마디’가 시모무라 고진 님한테 오래도록 남았다는데, 앙갚음이란 사람이 걸을 길이 아니겠지요. 사람이 걸을 길이란 앙갚음도 아니지만 미움도 아닐 테며, 내 밥그릇을 홀로 단단히 움켜쥐는 일도 아니리라 봅니다. 사람이 걸을 길이란 내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거나 훌훌 놓는 일이며, 콩 한 알을 두 쪽 세 쪽으로 나누는 일입니다. 돈이 넘쳐나게 있어야 이웃나눔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없는 빈털털이라고 이웃나눔을 할 수 없겠습니까. 내 몸이 튼튼하다고 이웃사랑을 널리 펼치겠습니까. 내 몸이 여리고 아프다고 이웃사랑을 하나도 못 펼치겠습니까. 내가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여 내가 똑똑하고 슬기로와서 내 이웃한테 기쁨과 보람을 두루 나누겠습니까. 내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거나 몇 권 안 된다고 내가 어리석고 철딱서니없어서 내 이웃한테 아무런 기쁨과 보람을 골고루 나누지 못하겠습니까.

 모든 문학은 이 문학을 일구는 사람 넋이요 얼이며 삶입니다. 늦깎이에 소설을 쓴다고 못난쟁이일 수 없으며 이들을 못난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슬픈 못난쟁이입니다. 시를 쓰든 수필을 쓰든 소설을 쓰든 한동아리입니다. 글을 쓰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연기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한 흐름입니다. 문학을 하건 예술을 하건 농사를 짓건 노동을 하건 한 갈래 길입니다. 대통령이건 기자이건 운동선수이건 고기잡이이건 교수이건 애 엄마이건 한 삶입니다. 높고 낮음이 아닌 곱고 미움으로 들여다볼 삶매무새입니다. 있고 없음이 아닌 맑고 더러움으로 살펴볼 삶자락입니다. 곱고 맑게 살아가는 흐름이라면 세상에 이름 안 난 애 엄마이건 애 아빠이건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밉고 더럽게 살아가는 흐름이라면 세상에 이름 크게 난 대통령이나 운동선수이건 하잘것없을 뿐 아니라 부질없는 사람입니다.

 우리한테는 사람다운 사람인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내 이웃 앞에서 사람다운 사람인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곱고 맑은 이웃을 찾을 노릇이고, 나 스스로 곱고 맑은 사람으로 늘 새로워지도록 삶을 추슬러야 합니다. 《지로 이야기》는 내가 더욱 나다우면서 사람된 길을 잘 갈무리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손을 내미는 반갑고 살가운 이슬떨이가 되어 줍니다.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내 삶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나 스스로 놓지 말라고 다독이고 말을 걸며 웃음지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고맙고 믿음직한 스승이 되어 줍니다.


 (3) 한 줄 두 줄 곱씹어 되읽기


 628쪽에 이르는 《지로 이야기 1》를 여러 번 곱씹어 되읽습니다. 밑줄을 긋고 찬찬히 거듭 읽은 이야기를 다시금 하나하나 옮겨 적어 봅니다. 눈으로 읽을 때하고 소리내어 읽을 때하고 다르며, 밑줄을 그으며 읽을 때하고 손으로 종이에 옮겨 적거나 타자로 옮겨 적을 때하고 다릅니다. 읽으며 가슴에 무언가 울린 책이라 한다면, 이렇게 타자나 손글씨로 옮겨 적습니다. (4342.12.31.나무.ㅎㄲㅅㄱ)


[13, 49쪽] 하지만 좋은 시간에 태어났다고 해서 지로가 행복하게 산 것만은 아니었다 … 다다미방 문턱을 막 넘어서려는데 누군가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오타미(지로 엄마)였다. “너, 정말 …….” 오타미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 뒤 지로는 밥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타미가 늘어놓는 끝없는 설교를 또 들어야만 했다. “여긴 네가 태어난 집이란 말이다.” 오타미는 지로가 어제 밤새도록 들었던 내용과 똑같은 설교를 했다. “우린 비록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어엿한 무사 가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 이 말도 어제 귀가 따갑게 들었다. 지로는 도대체 무사 집안이 어떻다고 오타미가 입만 열면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63쪽] “끈적끈적한 이 녀석 몸이 갑자기 내 몸에 닿아서 깜짝 놀랐어.” 슌스케(지로 아빠)는 지로가 기댔던 자기 옆구리를 부채 끝으로 훑어내렸다. 지로는 이상하게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로는 누워서 지그시 아빠를 쳐다보았다. 오타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에요.” “뭐가?” “세상에 자기 자식보고 더럽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그러면서도 아버지로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것과 이것은 다르잖아? 바보 같은 소리하네.” “아빠들은 그게 문제예요. 자기 혼자 아이를 귀여워하는 척하다가도 금방 아이한테 상처를 입힌다니까.” “그런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 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억지 이론만 늘어놓고 있는 거 아녜요?”

[108, 120쪽] 새해가 밝았다. 사랑받는 자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에게도 시간만은 공평하게 찾아왔다 … 친구들 사이에서 지로는 나무를 가장 잘 타는 아이로 이름났다. 돌팔매질도 잘했고, 수영도 물고기처럼 빨랐다. 잠자리 잡는 것과 붕어 낚시, 미꾸라지 낚시도 따라올 아이가 없었다. 동네에서는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만 빼고 언제나 맨발로 돌아다녔다. 지로는 학교에 다니면서 문명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야생의 자연인이 되는 것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118∼119쪽] “하나만 물어 보지. 지로가 자네 아들이 (이빨로) 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어떻게 되다니요? 뭐가요?” “지로 말일세. 지로가 오늘 기타로를 물지 않았다면 지로는 일 년 내내 기타로에게 시달릴 거야. 한번 생각해 보게. 무릎을 물리는 것과 어린 시절의 비겁한 추억을 갖고 평생을 사는 것 가운데 어떤 쪽이 더 큰 상처라고 생각하나? 자네도 두목 소리를 듣고 있는 사나이인데 내가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른다고는 못할 걸세.” … “매실장아찌만 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고 어느 부모가 참을 수 있겠나. 나도 지로가 개처럼 사람을 물어뜯었다는 얘기를 듣고 잘못 가르친 것 같아 부끄러웠네.” 슌스케는 또 개라고 표현했다. 지로는 자기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한 번 훑었다. “사실은 나도 기타로가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자네에게 사과할 생각이었어. 그리고 치료비도 물어 줄 작정이었다네. 그런데 자네 태도가 틀렸어. 우리 집사람한테 돈을 안 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것도 좋아.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다고 치지. 화가 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돈을 준 것을 기타로가 알아보게. 또 지로가 그 얘길 들어 보게.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여보게 쇼하치. 자네나 나나 자식들만큼은 돈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는 떳떳한 사람으로 키우세.”

[130쪽] ‘앞으로 엄마나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지 무조건 무시할 거야. 형에게 덤비는 게 나쁘다면서 슌조가 나한테 덤빌 땐 왜 야단치지 않지? 동생에게 져주는 게 형이라면서 교이치가 나를 때리는 것은 왜 말리지 않지? 엄마랑 할머니는 틀렸어. 엄마랑 할머니는 내가 맞는 것을 봐야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엄마나 할머니가 같이 기뻐해 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고.’

[149, 157쪽] 그 뒤 지로의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물론 지로가 십자가를 짊어질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로는 아직도 슌조를 사랑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슌조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이 연민은 지금까지 적대적이었던 슌조를 자기보다 한 단계 낮추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지로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 그러나 단 한 가지, 차별만큼은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차별을 받으면 받을수록 겉으로는 냉정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는 엄청난 분노가 회오리치게 된다.

[203쪽] “지로, 부탁이야. 이제부터 착한 아이가 되는 거야. 알았지?” 하루코의 뺨이 지로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지로는 따스한 기운에 휩싸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눈물이 방울방울 무릎 위에 떨어졌다. “오하마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228, 233쪽] 외할아버지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너희 집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게 될지 모른단다.” 외할아버지의 말은 지로의 가슴을 쿡 찔렀다. 움직이지 않는 별과 타닥거리는 짚신 소리가 자신의 처지를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로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람이란 마음이 가장 중요하단다. 마음만 올바르면 집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단다.” … 외할아버지는 마을 앞에 다다르자 다시 말을 꺼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네 아빠처럼 누구라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란다. 아빠가 오늘 집안에 보관해 두었던 귀한 물건들을 내다판 것도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느라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너도 아빠처럼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니? 네 마음속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다음에 커서도 아빠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314∼315쪽]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 게 불편하시면 진작부터 병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은 하시지 말았어야죠.” 마사키 외할머니가 일부러 빈정거려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혼다 할머니의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는 말이었다 …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할머니는 서둘러 마사키 가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싸늘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 “그래도 지로만은 언제나 엄마 곁에 있어 주는구나.” 대여섯 살 때부터 보아 온 엄마의 얼굴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로는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엄마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의 두 눈은 오하마나 하루코, 마사키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연못에 잠긴 달빛처럼 조용히 지로를 보고 있었다.

[322쪽] “지로 많이 컸지요?” “예,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내가 이 아이하고 유모한테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지요. 나도 다 알아요.” “에그, 무슨 그런 말씀을 …….” “어렸을 땐 그저 귀여워해 주면 되는데 …….” 오하마는 오타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오타미의 심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이제야 겨우 알았어요. 헤어질 때가 돼서야 알았으니 …….” “작은 마님, 무슨 말씀을 …….” “죽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다만 지로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해요. 이대로 죽으면 지로에게 …….” “그만 하시래도요!” “날마다 지로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에구머니나 …….” 지로도 이때쯤에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407, 421쪽] “지로는 아껴 주는 사람이 많아서 행복하겠구나.” ‘행복’이라는 낱말이 지로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로는 늘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고, 둘레 사람들도 자기를 그렇게 여기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하루 무사히 버틴다는 심정으로 순탄하지 않은 환경을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날들이 모두 그랬다. 지로는 곤다와라 선생님이 말하는 지로는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 “나만 귀여워해 주고 넌 귀여워해 주지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할머니가 너한테 하는 걸 보면 더 참을 수가 없어.” 하지만 지로는 교이치(지로 형)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교이치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지로는 교이치가 자신을 동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공평한 것이 형제 간의 우애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바람직한 일인지는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이 찾아헤매는 정의와 배부른 사람이 말하는 정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의 괴리는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보지 않는 한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556쪽] 지로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크게 실망한 사람들은 그런 친구들보다 선생님들이었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 가운데 곤다와라 선생님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지켜보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선생님들은 소학교 선생님들보다 자기 과목에 대한 전문 지식이 좀더 많을 뿐, 인간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래전에 배운 지식을 오늘날까지 교실에서 쥐어짜 내야 하는 선생님들이 안쓰러울 때도 많았다. 더구나 점수와 처벌로 학생들을 위협하는 것이 교사의 권위라고 착각하는 선생님들을 볼 때면, 안쓰러움을 넘어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였다. 학교에 볼모로 붙잡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루한 표정을 하고 복도를 서성이는 인간들, 지로는 그것이 중학교 선생님들이라고 생각했다.

[606쪽]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규정한다고 믿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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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01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글을 올려주시네요.
된장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바람드리의 라무 높새바람 22
류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2] 류은, 《바람드리의 라무》



 우리 나라만큼 말과 탈이 많은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궁금하다고 느끼는 하루하루입니다. 나라를 이끈다는 분들이나 수십 수백 조를 벌어들인다는 큰 회사를 이끈다는 분들이나 여느 어른들이나 한결같이 ‘세계 시대’와 ‘지구 시대’와 ‘우주 시대’를 들먹이지만, 2010년을 코앞에 둔 오늘까지도 이 나라 어른들은 아직도 ‘중고등학생 머리길이와 치마길이’에 목매달고 있거든요. 세계 어느 나라에서 아이들 머리길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겠습니까. 지구 어디에서 아이들 치마길이나 옷매무새를 놓고 시끌벅적 말이 많겠습니까. 아이들한테 술담배를 하지 말라지만 어른들은 술담배를 즐깁니다. 아이들이 멋모르고 사랑놀이를 하다가 아기를 배는 일이 나쁘다고 하면서, 어른들은 으레 바람을 피우고 두다리나 세다리를 걸치는 한편 성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바로 청소년이 아닌 어른입니다. 우리가 일컫는 청소년범죄란 하나같이 어른범죄를 시늉하는 꼴인데, 어른범죄 푼수와 견주면 얼마 안 됩니다. 어른 스스로 푸름이 앞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지 않으니, 푸름이가 보고 배우는 모습이란 범죄요 성폭력이요 욕지꺼리요 돈과 이름값과 주먹힘에 목매다는 꼴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공자님 말씀을 읊든 하느님 말씀을 읊든, 말로 읊는 매무새가 아닌 몸가짐으로 바르게 서며 살림을 꾸리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옛말에 맹자 엄마가 집을 세 번 옮긴다고 했는데, 맹자 엄마가 집을 옮겨다닌 까닭은 ‘아이들이 엉터리’라서 아니라, 마을 터전을 이루는 ‘어른들이 엉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아랫마을이 어떻고 어디는 또 어떠하고 같은 이야기는 한결같이 어른들이 빚어냅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고스란히 아이들한테 옮아갑니다. 우리 삶터는 어른들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고, 맑은 물과 깨끗한 바람이 사라진 우리 터전 또한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릴 적에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어떠했다고 추억어린 이야기를 들추지만, 우리 아이들한테도 시냇물을 손으로 떠 마실 수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추억만 떠듭니다. 아이들한테 자연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우리 자연을 깨끗하고 싱그럽게 가다듬는 데에는 조금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더 큰 자가용을 뽑고, 가까운 길도 자가용을 끌며, 갖가지 전기제품과 물질문명을 마음껏 누립니다.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 누립니다.


.. “…… 놓아 줄까요?” “허허허! 네가 잡았으니 결정도 네 몫이지.” 카알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거야. 먼저 토끼는 내가 잡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라무의 얼굴이 붉어졌다 ..  (18쪽)


 어린이문학이나 청소년문학이나 어른문학이나, 모두 어른이 빚어내는 문학입니다. 어린이노래나 청소년노래나 어른노래나 매한가지입니다. 어린이가 보는 영화나 연극이나 춤은 어떠합니까? 텔레비전에 나와 어른들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춤노래가 귀엽거나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데, 아이들이 어른들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는 ‘말잘못 하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어렵거나 딱딱한 말을 써서도 안 됨’을 살갗으로 느끼며 다소곳하게 제 몸가짐을 갈무리하는 어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코앞에 있어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는 어른이 많고, 아이들이 눈앞에 안 보이면 아주 망나니처럼 막 나가는 어른이 많습니다.

 옳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어른도 꽤 있습니다. 그렇지만, 옳고 바르게 삶을 꾸리고 생각을 가누며 말글을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는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청소년문학이나 어른문학을 하는 어른들은 삶과 넋과 말이 어떠합니까?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어른이라서가 아니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어른이나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일하는 어른은 어떠하지요? 인터넷에서 ‘어린이 청와대 누리집’은 쉽고 바르고 알맞게 말글을 가다듬으려 한다면, ‘어른이 보는 청와대 누리집’은 어떠합니까? 아이들 앞에서 ‘문자 쓰기’를 하는 어른이 있겠습니까? 문자 쓰기를 하는 어른을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아이들 밥상에 얄딱구리하거나 화학약품으로 찌든 찬거리를 올릴 수 있습니까? ‘어른은 먹어도 돼’ 하는 마음을 ‘아이들도 한두 번 먹을 때에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지는 않습니까?

 말만 예쁘장하다든지, 이야기만 놀랍다든지, 짜임새는 판타지로 꾸민다든지, 줄거리는 웃음이나 눈물이 묻어나는 재미난 글감이라든지 한다고 해서 어린이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가르침이 있느냐 없느냐로 어린이문학을 가르지 못합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우리 어른이 아이들한테 물려줄 삶입니다. 우리 어른이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삶을 물려주고 싶은가 하는 꿈입니다. 우리 어른이 잘 살건 잘못 살건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뉘우치거나 되씹는 가운데, 우리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빛줄기입니다.


.. 유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진 (괴물) 로스를 막다가 돌아가셨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로스를 조종한 검은 복면이 다시 온다고 했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내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  (145쪽)


 밤새 밀린 일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마무리를 지을 무렵 아기가 깨어납니다. 아기는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빨래를 하는 아빠 곁을 종종걸음으로 따라 다닙니다. 말이 늦은 아기는 아빠 곁에서 놀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아빠는 빨래를 할 때에 아기보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몇 번이나 다그칩니다. 겨울철이라 빨래하는 씻는방이 춥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춥건 말건 곁에서 빨래하기를 지켜보며 물놀이를 하고파 하는데 못내 서운해 합니다. 아빠 눈에 걱정스러운 모습이 아이 눈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빨래를 마칠 무렵 아기는 잠이 듭니다. 새벽 여섯 시부터 깨어 있던 아기이니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잠들 만합니다. 또한, 우리 아기는 낮잠을 살짝 자거나 안 자고 넘긴 다음 저녁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엄마 아빠하고 놀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아기하고 어울리고 있다 하여도 날마다 지칠밖에 없습니다. 귀엽고 예쁜 아기이지만, 늘 곁에서 돌보고 보듬어야 하니 고단할밖에 없습니다.

 옆지기는 때때로 말합니다. 아기가 이 나이에는 우리 곁에서 잠깐도 안 떨어지려고 하지만, 기껏 열 살까지 이런 삶이 이어가겠느냐고. 어른들이 아기는 열 살까지만 효도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아기(아이)가 효도한다는 일이란, 엄마 아빠 곁에서 안 떨어지면서 지낸다는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잠든 아기와 옆지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빠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바깥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낮과 저녁은 엄마 혼자 아기와 씨름을 하며 듬뿍듬뿍 ‘효도를 받’아야 합니다.

 얼마 앞서 읽어낸 어린이문학 《바람드리의 라무》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바람드리에 사는 라무라고 하는 아이는 둘레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둘레 어른들한테서 좋은 모습도 보고 얄궂은 모습도 보면서 컸습니다. 좋은 모습을 보며 좋은 뜻을 품다가는, 얄궂은 모습을 보며 저 스스로도 얄궂은 쪽으로 기울듯 말듯 갈팡질팡하기도 합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어른들 곁에서 지내며 라무 스스로 착하고 아름다운 목숨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도 하지만, 못나고 뒤틀린 어른들 곁에서 시달리고 들볶이면서 자칫 마음이 다치거나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라무 앞에 좋은 동무가 나타나 주었습니다. 또래동무로 좋은 동무이든, 나이가 많은 어른동무로서 길동무이든.


.. 수야는 하르진에게 밥이 든 큰 그릇을 건네고 하르진의 손을 잡았다. 수야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이렇게 손이 따뜻한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  (213쪽)


 좋은 어린이문학이란 어떤 작품을 가리킬까 헤아려 봅니다. 널리 사랑받는 어린이문학이란 어떤 작품을 두고 이야기할까 생각해 봅니다. 적어도, 어른이 아이한테 혼자 읽으라고 건넬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할 테고, 어른이 아이한테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즐겁게 읽어 줄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할 테지요.

 그러나, 읽는 재미나 즐거움에 앞서, 작품에 깃든 어른들 삶자락이 아름다워야 좋은 어린이문학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읽히는 기쁨과 보람에 앞서, 작품에 서린 어린들 넋과 얼이 싱그럽고 맑고 착해야 비로소 훌륭한 어린이문학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예부터 이원수 어린이문학이나 임길택 어린이문학이나 권정생 어린이문학을 높이 여긴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오덕 어린이문학 평론을 알뜰히 여기며 고맙게 돌아보는 까닭 또한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을 창작하거나 비평을 하는 어른은, 말재주와 논리와 줄거리에 앞서 말과 넋과 삶이 살갑고 튼튼하며 고운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바람드리의 라무》를 써낸 분께서는 이 대목을 조금 더 깊이 살피고 널리 감싸안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2.12.29.불.ㅎㄲㅅㄱ)


 ┌ 《바람드리의 라무》(바람의아이들,2009)
 ├ 글쓴이 : 류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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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의 땅 - The Unrooted - 1991-2005, 성남훈 사진집
성남훈 지음 / 눈빛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필터 하나 값과 사진책 한 권 값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9] 성남훈, 《유민의 땅》



- 책이름 : The unrooted 1991-2005, 유민의 땅
- 사진 : 성남훈
- 펴낸곳 : 눈빛 (2005.12.29.)
- 책값 : 5만 원



 (1) 필터 하나 값과 사진책 한 권 값


 2005년 12월에 1쇄를 찍은 사진책 《유민의 땅》은 2007년 11월에 2쇄를 찍습니다. 나라안 사진책이 2쇄를 찍는 일이 드문데, 《유민의 땅》은 고작 이태 만에 2쇄를 찍었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추켜세울 뿐 아니라, 이름이 제법 높은 분 사진책임을 헤아린다면, 흔한 말로 ‘필터 하나 값’밖에 안 되는 5만 원짜리 사진책 《유민의 땅》이 2쇄밖에 못 찍은 일은 슬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만한 필터는 5만 원뿐 아니라 7만 원도 하고 10만 원이 넘기도 합니다. 필터 아닌 다른 부속이나 장식품은 훨씬 비싸곤 합니다. 저로서는 사진기하고 필름 두 가지만 사지 다른 어떠한 부속이나 장식을 더 사지 않으니 잘 모릅니다만, 곁따르는 물건이 제법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을 살핀다면, 사진책이 참 안 팔리는 모습이 슬픕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장비를 사고파는 누리집하고 가게만 있지, 사진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책방이 없는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진책이라 한다면 ㄱ문고나 ㅇ문고 같은 책꽂이뿐 아니라 웬만큼 큰 사진관 한켠에 책시렁을 마련해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을 보아야 사진 찍는 눈썰미’를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만, 사진 한 장으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사진 한 장으로 우리 마음을 따뜻히 감싸안을 수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사진을 더 즐겁고 알차게 가꿀 수 있거든요.


.. 앞으로 5년 정도 저널리즘에 천착하고자 한다면 분명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진집 《유민의 땅》이 출간되는 시기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5년 간 단 한 순간도 인간과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앞으로 최소한 5년 간 분명한 사진의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책 《유민의 땅》은 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90쪽)


 택시 탈 일이 거의 없는 제 삶인데, 어찌하다 보니 서울에서 인천으로 몇 번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만 돌아다니면 지하철이 늦게까지 있으나 인천으로 돌아가는 사람한테는 참 일찍 끊깁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인천으로 달리니 4만 1천 원 안팎이 나옵니다. 택시삯을 치르며 ‘이 돈이면 책이 몇 권인가?’ 하고 되뇌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데, 돈을 조금 더 보태면 《유민의 땅》 같은 사진책을 한 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헌책방마실을 하며 ‘世界の文化史蹟’ 가운데 하나로 나온 《マヤの神殿》(講談社,1968) 하나를 장만했습니다. 1968년에 나온 책값으로 2500엔인데, 헌책방에서는 고작 1만 5천 원에 팔았습니다. 자그마치 마흔 해가 묵은 사진책입니다만 인쇄 품질이나 사진결이나 얼마나 대단한지, 1만 5천 원이든 2500엔이든(예전 값이지만) 더없이 값싼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진책이 헌책방에 자주 들어오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장만해 놓고 있는데, 택시삯 4만 원이면 몇 푼 얹으면 이만한 놀라운 사진책을 세 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서울 혜화동에는 〈이음책방〉이라고 하는 인문예술책방이 있습니다. 이곳을 찾아가면 ‘PHAIDON’에서 펴낸 손바닥 사진책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습니다. 자그마한 판으로 퍽 값싸게 묶은 이 사진책들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달린 택시삯으로 네 권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타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꽤 괜찮은 필터 하나 사는 데에 들이는 값이면 좋은 사진책 하나를 살 수 있기도 하지만, 필터를 사지 말자는 소리 또한 아닙니다. 요사이는 필름값이 무척 올라서, 제가 쓰는 필름(일포트 델타 프로페셔날 400)은 한 통에 7500원씩 합니다. 제가 쓰는 필름으로 치자면, 이 필름 여섯 통 값이면 《유민의 땅》 한 권이 나옵니다. 필름 여섯 통을 덜 사면 좋은 사진책 한 권을 마련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한 해가 끝나는 요즈음 크고작은 갖가지 술자리가 많다는데, 웬만한 술자리 한 번 치르며 나가는 돈은 몇 만 원씩 됩니다. 예부터 익히 떠도는 말인데, 술자리 한 번 줄이는 값이면 《유민의 땅》에다가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 한 권을 더 장만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이래저래 나가는 돈을 줄여서 사진책을 하나 더 장만하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이래저래 나가는 대로 돈을 쓰면서도 사진책을 하나 더 장만하려고 용쓰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그 어느 데에도 돈을 안 쓰면서 사진책만 장만하는 일이 좋을까요, 사진책은 꿈같은 소리로 여기며 눈을 감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집하고 가까운 도서관에 사진책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면서 도서관마실을 하며 사진책을 읽는 일이 좋을까요.


.. 다른 사람들도 제 사진에 ‘변화’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앵글의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요즘 제 사진에 대한 문제점과 그 원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가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작업 과정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저도 제가 가는 길과 제가 얻으려 하는 사진에 대해서 많은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좀더 저널리즘 쪽으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  (290쪽)


 보름쯤 앞서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눈빛,2007)을 장만했습니다. 2007년에 2만 원 값으로 나온 책인데 2009년 눈높이로 돌아보자니 책값 2만 원은 퍽 싸다고 느꼈습니다. 2005년에 나온 전민조 님 사진책 《섬》(눈빛,2005)은 책값이 1만 5천 원입니다. 2005년에 이 사진책을 살 때에도 그리 비싸다고는 느끼지 않았으나 이무렵 1만 5천 원에 나온 사진책이 요즈음에는 3만 원을 달고 있습니다. 더욱이 《섬》은 156쪽인데 《낙동강》은 110쪽입니다.

 사진책을 ‘어떠한 사진이 어떻게 담겨 내 마음을 건드리느냐’가 아닌 돈값과 쪽수와 크기로만 따지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사진책도 똑같은 책인 만큼 이런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사진책 값이 퍽 비싸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이 사진책들이 참으로 비싼지, 비싸다면 얼마나 비싼지를 곰곰이 따져 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책은 한 번 슥 훑고 그치는 책이 아닙니다. 내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한다는 사진책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100번은 다시 넘기는 책입니다. 참 좋았던 사진책이라면 1000번을 되읽습니다.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책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종이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추다가는 나중에 ‘깨끗하게 간수할 판’으로 하나 더 사 놓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섬》 사진책이 두 권 있습니다. 전몽각 님이 담은 《윤미네 집》도 두 권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포토넷’ 출판사에서 새로 찍는 《윤미네 집》까지 주문해 놓았습니다. 이들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주머니가 한꺼번에 아주 얇아진다고 느끼지만, 주머니가 얇아져 살림돈이 바닥나 버리더라도 제 가슴에는 뭉클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가득 넘치기 때문에 기꺼이 거듭거듭 장만해서 새로 보고 새삼 보며 새록새록 되새기며 봅니다.


 (2) 성남훈 님이 사진으로 담은 삶


 2005년에 《유민의 땅》을 내놓은 성남훈 님은 1993년에 《꿈꾸는 들녘》을 내놓았고, 1996년에 《소록도》를 내놓았으며, 2000년에 이상엽 님과 함께 《No War No Cry》를 내놓은 다음,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을 내놓습니다. 2005년에 내놓은 《유민의 땅》은 그동안 일군 사진 열매를 한 자리에 그러모은 작품이라 할 수 있어, 예전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많이 다시 실었습니다. 다만, 《유민의 땅》에 실린 ‘달동네 아이들’ 모습은 따로 묶어 놓은 작품들이 아닌데, 성남훈 님이 당신 나름대로 바라본 낮은자리 달동네 사람들 삶자락을 앞으로도 좀더 꾸준히 담아서 한 자리에 그러모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요즈음에는 ‘연화지정’이라는 사진감을 잡아서 동티베트땅에서 불교를 배우는 비구니를 사진으로 담고 있습니다.


.. 파리로 곧장 가지 못하고, 파리 근교의 지방도시에서 어학원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어학 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특히 이국적인 풍경을 접하면서 순수풍경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루빨리 파리로 들어가 사진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더군요. 점점 마음에서 패션 사진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파리로 가서는 브레송, 드와노의 사진 같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도회지풍의 전형적인 프랑스 사진이 마음에 자리잡았습니다 ..  (287쪽)


 사진책 《꿈꾸는 들녘》부터 《유민의 땅》까지 두루 살피면, 《소록도》 한 권과 《유민의 땅》에 실린 이 땅에서 떠돌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삶 몇 칸을 빼놓고, 성남훈 님은 늘 나라밖 떠돌이에 조금 더 눈길을 맞추고 있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나라안 떠돌이보다 나라밖 떠돌이가 더 많습니다. 세계가 한울타리라고 하는 물결에서 나라안팎을 굳이 따지는 일은 덧없습니다. 성남훈 님은 나라밖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아내지만, 이들 떠돌이 발자취는 ‘우리 나라하고는 아무 끈이 안 닿는’ 사람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 삶이 오늘날 나라밖 떠돌이와 다를 바 없었고, 오늘날 나라밖 떠돌이가 이렇게 살아가게 된 까닭에는 우리 나라 흐름도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스스로 못나거나 게으르거나 잘못했기에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겠습니까. 이리 휩쓸리고 저리 쫓겨나는 까닭이 당신들 스스로 애쓰지 않은 탓이겠습니까. 프랑스 파리 변두리 루마니아 난민은 어쩌다가 제 고향마을이 아닌 파리 변두리에서 목숨줄을 잇고 있습니까. 아프가니스탄과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은 왜 제 집자리를 잃거나 빼앗기며 서로 총을 들고 싸워야 하겠습니까. 이들이 손에 쥔 무기는 누가 만들었고, 이들이 조용하게 살던 터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고, 아프가니스탄에 또다시 군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무엇을 노리고 나라밖으로 군대를 보내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나라가 나라밖에 군대를 보내는 일에 얼마나 눈을 두거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 나라 안에는 수없이 많은 전투경찰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무기를 갖추어 든 채 한길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전투경찰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남녘과 북녘은 수십만 군인을 서로 총부리를 겨눈 채 다툼질을 하도록 부추기는데, 남북녘 젊은이들은 왜 낯모르고 이름모르는 한겨레한테 총부리를 겨누면서 서로를 윽박질러야 하겠습니까.


.. 제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나 깊은 성찰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어떤 사진가의 사진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그 사진가가 암병동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진도 연극이나 영화처럼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  (288쪽)


 성남훈 님 《유민의 땅》은 제 삶터를 잃거나 앗긴 사람들이 어느 땅에 어떻게 서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꾸밈없이 보여주지는 않고 ‘꾸며진’ 대로 보여줍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억지스레 꾸미는 삶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내쫓거나 들볶으면서 이들한테 ‘꾸며진’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 땅을 잃거나 앗겨야 하는 사람들이 낯설고 물선 땅에서 무엇을 꿈으로 삼으며 목숨줄을 이어야 하는가를 갈피 잡기 어려운 삶을 성남훈 님 눈길이 넌지시 곁눈질을 하면서 담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떠돌이가 아닌 ‘떠돌이를 찾아다니는 성남훈’ 님입니다. 그래서 성남훈 님 눈길은 곁눈입니다. 그러나, 곁눈이라고 하여 어설피 스쳐 지나가는 눈길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서 떠돌이하고 똑같은 눈길로 바라보는 눈길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떠돌이하고 똑같은 눈길일 수 없는 성남훈 님 눈길입니다. 성남훈 님 눈길은 곁눈으로 떠돌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왜 이들은 떠돌이가 되어 제 터전이 아닌 자리에서 이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제 삶터가 아닌 데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을 깨닫습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들한테 눈물도 많으나 웃음도 많고, 고단함과 아픔도 많으나 즐거움과 사랑스러움도 깊음을 배웁니다.

 사진기를 들고 단추를 누르는 사람이 더 즐거운 삶일까요? 사진기 앞에 서며 찍히는 사람이 더 즐거운 삶일까요?

 어느 쪽이 더 즐거운 삶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고단한 삶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둘 모두 아름다운 삶이고, 두 쪽 모두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틀에 넣는다면 성남훈 님 사진은 틀림없이 다큐사진이라 일컬을 수 있을 텐데, 다큐사진에 이르는 힘은 ‘가난한 사람들’을 다루었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살펴보았거나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찾아나섰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제프 쿠델카나 세바스티앙 살가도를 다큐사진작가라고 하는데, 이들 또한 다큐사진을 한다고 일컬을 수 있으나, 이들 사진은 다큐사진이라는 틀에 굳이 집어넣어야 할 까닭이 없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사진은 그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맡은 몫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기 좋게 다큐사진이니 상업사진이니 패션사진이니 보도사진이니 예술사진이니 가르지만, 어느 갈래 어떤 사진이라 하더라도 우리 삶을 내 눈길과 눈높이에 따라서 얼마나 살뜰히 담아서 보여주느냐로 이야기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사진기를 들기 앞서 내가 생각하는 사진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흐름이어야 하고,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 앞서 내가 함께 살아가는 님들과 나란히 서 있는 넋이어야 하며, 사진을 종이에 옮길 때에는 누구보다도 내 가슴을 철렁 울리는 발자국이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우연히 파리 근교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루마니아 집시들을 보게 되었고, 집시 사진을 찍게 되었죠. 그러면서 주제뿐만 아니라 그런 사진들이 나의 정서와도 일치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사회의 주류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작업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생각을 키우기는 했어도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집시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보다는 프랑스 안에서의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정도였습니다 ..  (288쪽)


 사진쟁이 성남훈 님은 오늘 어느 자리에 어떻게 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우리 둘레에서 누가 떠돌이가 되고 있는지를 얼마나 읽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이 모습으로 내몬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떠돌이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당신 삶은 어떠한 빛깔과 모습으로 일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사진학과 교수님이 된 성남훈 님은 당신이 처음 사진을 배울 때에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사진을 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 궁금하고,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당신 제자한테 ‘사진하는 마음’을 어떤 눈썰미로 들려주는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열일곱 해를 이어온 사진 한길을 앞으로도 꿋꿋하게 걸어가시겠지요. 이 사진 한길에서 좀더 많이 흔들리고 더욱 크게 소용돌이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쟁이 성남훈 님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성남훈’이니, 성남훈 사진을 힘차고 다부지게 이어나가면 좋겠습니다. 다큐사진이든 그냥 ‘사진’이든 어떤 사진감을 잡느냐보다도 사진으로 무엇을 하느냐를 더 속깊이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하는 맛과 멋을 차분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내가 일구고 있는 삶 그대로입니다. (4342.12.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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