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91 : 새로운 책과 새로워지는 책

 엊그제 새 자전거를 한 대 장만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타고다닌 자전거는 모두 닳고 망가졌기에 더 손질할 수조차 없었거든요. 자전거를 장만하면서 자전거집 일꾼한테서 ‘자전거 사용설명서’를 여러 권 얻습니다. ‘자전거를 새로 장만하는 사람치고 이러한 설명서를 챙기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잔뜩 쌓여 있다고 합니다. 설명서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찬찬히 훑으니, 이 설명서만 꼼꼼히 읽고 스스로 해 보아도 ‘웬만한 자전거 손질은 스스로 해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이달에 《자전거 홀릭》이라는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모임을 이끄는 분들 가운데 한 분이 쓴 책으로, 자전거를 처음 가까이하거나 이제 막 좋아하려는 사람한테 길잡이가 될 만하구나 싶습니다. 돈으로 사는 자전거가 아닌, 마음으로 껴안는 자전거가 얼마나 좋은 길벗인가를 보여줍니다.

 지난달에 《두 발 자전거 배우기》라는 그림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아이들한테 네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로 넘어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그림책인데, ‘자전거를 좋아하며 늘 타는’ 제 눈으로 보기에 자전거를 옳게 못 그리기도 했으며, 자전거가 마치 ‘남보다 빨리 달리려고’ 있다는 듯한 이야기를 슬며시 심어 주기에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왜 자전거를 사 주고 타도록 하고 가르치는가요? 아이들은 왜 자전거를 선물받고 타야 하는가요? 책에 담긴 그림은 예쁘장하지만 그예 예쁘다고만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네발에서 두발로 갈아타는 일이란 ‘홀로서기’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은 없이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는 기쁨’을 엉뚱한 쪽에서 받아들이도록 한다면, 청계천에 전기로 수도물 끌어들어 흐르게 하면서 시원하다 말하는 모습하고, 또한 서울과 부산에 물길을 내고 나라안 물 문제를 풀겠다는 생각하고 매한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지지난달에는 《고물자전거 날쌘돌이》라는 그림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버려진 자전거, 아니, 아이들이 처음에는 엄마 아빠한테 졸라서 ‘번쩍번쩍’하는  새 자전거를 비싼 값에 장만하고 난 뒤 마구잡이로 싱싱 달리다가 함부로 내던지고 내팽개치고 비오는 날에도 바깥에 두는 바람에 찌그러지고 다치고 구멍나고 빛바래고 슬어 버린 자전거가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저 스스로도 어린 날 겪어 보았지만, 짐자전거이든 세발자전거이든, 한 주에 한 번은 말끔히 닦아 주어야 오래도록 즐겁게 탄 다음 동생한테든 동무한테든 아이들한테든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아이들은 자전거를 닦을 줄 모르고 내처 달릴 뿐입니다. 자전거 사 주는 어버이 또한 자전거 닦기와 손질을 함께할 줄 모르며, 돈으로 값만 치를 뿐입니다.

 나날이 쏟아지는 새 물건이 많으니, 자전거 또한 새롭고 더 나아 보이는 녀석으로 갈아타기만 하면 되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수없이 많은 책이 쏟아지니, 겉보기에 그럴싸한 책을 쥐어들며 자꾸자꾸 새책만 찾으면 되는지 모릅니다. 가짓수는 꾸준히 늘고 새 이야기는 늘 넘치는데, 고이 스며들며 가슴으로 묻어나는 책은 어째 가물에 콩 나는 듯합니다. 새로운 책으로 새로워지는 마음결과 삶터는 찾아보기 어렵고, 새로운 책으로 새로운 돈만 벌겠다는 마음보와 세상물결은 어렵지 않게 찾아봅니다. (4342.6.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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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 때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39
레이먼드 브릭스 글, 그림 |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 / 199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차피 모두 타죽이게 할 전쟁이니까
 [그림책이 좋다 67] 레이먼드 브릭스, 《바람이 불 때에》



- 책이름 : 바람이 불 때에
- 글ㆍ그림 : 레이먼드 브릭스
- 옮긴이 : 김경미
- 펴낸곳 : 시공사 (1995.11.7.)
- 책값 : 7000원


 (1) 남녘나라에서 군대라는 곳


 군대에 갔다 온, 또는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어른들은 젊은이한테 이야기합니다. “군대에 갔다 오면 사람 된다.”

 어릴 적부터 익히 들은 이 말마디는 어린 제 생각과 삶을 온통 뒤흔들었고, 군대에 끌려갈 날을 앞둔 젊은이가 된 제 생각과 삶 또한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무렵, 저 같은 아이들 또는 젊은이들한테 이런 말마디를 읊은 어른들이 ‘모두 군대에 갔다 왔는지’는 여쭙지 못했고, 여쭐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어른들이 군대에 갔다 오신 다음에 “사람이 되셨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며, 내가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거나 돈이 아주 많거나 나라밖으로 떠나거나 하지 않으면 군대에 끌려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 “다녀왔소.” “다녀오셨어요? 오늘 아침은 좋았어요?” “응, 좋았어. 별 일은 없었지. 사는 게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 “퇴직했으니까 그렇죠, 제임스. 당신 좀 우울해 보이는데?” “응, 아침 내내 공립도서관에서 신문만 봐서 그렇지.” “흥, 그까짓 쓰레기 같은 것들! 난 절대로 신문은 안 봐요. 〈스타〉지만 빼고요.” “여보, 당신도 국제 정세를 좀 알아야 해. 결국엔 우리도 강대국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걸.” “신문엔 정치니 스포츠니 하는 것들만 잔뜩 실려 있잖아요.” ..  (1쪽)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도 어른들은 말합니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오지 않으면 사람이 안 된다.”

 군대에 갔다 온 저는 어른들한테 여쭙니다. “네, 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 어디 있었는데?”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 있었습니다.” “…….” 때때로 해병대 나온 분들이 있어 좀더 꼬치꼬치 물으실 때에는, “강원도 양구 도솔산에 있었습니다. 도솔산부대 들머리에 ‘해병대 전적비’ 있는 줄 아시지요? 해병대 나오셨으면 ‘도솔산의 노래’라는 노래 아시지요?” “…….”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들한테 “너는 군대에 가서 사회를 알아야 해.” 하고 틈틈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들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아버지도 강원도 양구에 있었다고 합니다. 딱 한 번,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천에서 양구까지 면회를 왔습니다. 일고여덟 시간도 넘게 걸려 겨우 부대 밑자락 검문소에 닿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대 들머리까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무렵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어떠한 차도 우리 부대 앞까지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안마을(펀치볼)로 넘어가는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도솔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쯤 해를 볼 수 있는 기막힌(?) 곳이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인들이 행군을 해서 한 시간 반 남짓 걸어내려와야 하는 산 밑자락에서 아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눈밭을 헤치고 겨우겨우 걸어내려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니 아버지는, “에이,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어? 어떻게 이런 데에서 사람이 살아?” 아버지 말씀마따나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마을 분들은 군부대 옆에 깃들며 살림을 꾸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대가 모시는 대대에는 해마다 10월 끝무렵이면 장갑차 한 대가 떨어져서, 눈이 오는 날이면 장갑차가 슥슥 밀어 주고, 다음으로는 제철차가 슥슥 민 다음, 우리들 땅개가 줄줄이 늘어서서 싸리비와 눈삽으로 눈을 치워내곤 했습니다. 눈이 오면 으레 m 단위로 왔으니까요. 아무튼,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면회를 오신 다음부터 아버지 입에서 “너는 군대에 갔다 와야 해.” 하는 말은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 “여보,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소. 그래, 곧 전쟁이 터질 거라네.” “글쎄요, 그래도 당신은 징집되지 않을 거예요, 제임스. 당신은 너무 늙었잖아요.” “고맙구려. 그래도 난 당신보다 두 살이나 적어.” “어쨌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승리의 그날까지 다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리띠를 동여매고 철모를 써야겠죠.” “이번엔 그럴 것 같지 않고. 이번 전쟁은 빅뱅이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그건 모드 똑똑한 과학자들이 생각해 낸 거요.” ..  (1∼2쪽)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올 무렵, 행보관은 전역하는 우리를 앞에 두고 “너희들 주제에 사회에 나간다고 뾰족한 벌이도 없을 테니 공사판에 나갈 텐데, 공사판에 나갈 때면 우리 부대 야상을 꼭 입고 가라. 그러면 오천 원은 더 준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거짓말이 아닌 소리였는데(1998년도), 우리들이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 있는 동안 배운 일이라면 삽질과 곡괭이질과 마대질과 산타기 따위였습니다. 이른바 막일은 실컷 배운 셈이었습니다. 아니, 한 달 일삯 8000∼1만 얼마에 실컷 막일을 해 온 셈이었습니다. 그무렵 사회에서는 막일을 하면 하루에 3만 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군인이기 때문에 군대 막일을 하루 일삯 300원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해 온 셈이더군요.

 이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배운다는 군부대에서, 우리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배운 것 없는 사람이 먹고사는 재주’만 신나게 배운 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동네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부대를 나오면서 제 앞가림은 막일터에 나가면서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이번엔 방공호도 없다니 왠지 이상해요. 그땐 우리 집 정원에 앤더슨 방공호가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나요. 우린 방공호 주위에 한련을 잔뜩 심고 입구를 초록색으로 칠했어요. 정말 예뻤는데, 옆집에서는 방공호 위에다가 양배추를 심었죠.” “맞아. 우리 집에선 모리슨 방공호를 설치했어. 난 그 안에서 잤어. 그 안에다 여자들 사진을 잔뜩 붙였지. 베티 그래블, 앤 셸턴, 패트리샤 록. 잠자리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천장을 까맣게 그을렸지.” “그래요. 2차대전 때에는 정말 좋았어요. 방공호, 등화 관제, 경보 해제 사이렌, 홍차, 공습 경보대, 피난민들. 런던의 아이들은 그때에 처음으로 소를 보았고, 라디오에선 처칠의 목소리. 아홉 시 뉴스, 베라 린의 노래, 노동자 큰잔치 프로그램을 방송했고. 옥수수밭 너머 푸른 하늘에선 스피트파이어와 허리케인이 몰려왔고, 도버 해협의 하얀 절벽으론 독일군이 밤바다 쳐들어왔죠. 그땐 좋았어요.” ..  (7쪽) 






 스무 살 젊은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스물셋을 앞두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한창 펄펄 끓는 나이에 군대에 있는 동안, 제 얼굴과 몸과 말결과 마음밭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군대에 가기 앞서 책을 즐겨읽기는 했어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스물여섯 달 있으면서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신문 한 장 읽은 적이 없습니다. 사회에 나오고 보니, 2005년 가을부터 2007년 겨울까지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아, 부대에 딱 두 가지 신문이 들어왔는데, 하나는 ‘스포츠○○’이었고, 하나는 ‘ㅈ일보’였습니다. 이 신문은 소대장과 중대장이 보았는데, 어쩌다가 슬쩍슬쩍 넘겨본다든지 철지난 신문을 차곡차곡 모아 태워 위장크림으로 만든다고 할 때에 살펴보기는 했으나, 이런 신문으로는 세상을 하나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는 고참이, 옆에서는 동기가, 아래에서는 후임이 읊조리는 온갖 상소리와 욕지꺼리를 듣고 따라하고 익숙해지면서 사회에서 제 말투는 ‘못난 건달깡패나 외는 말투’로 받아들여졌고, 여러 해 동안 반 벙어리처럼 되어 사람들 앞에서 말문을 열기 어려웠습니다. 툭하면 욕이 튀어나와 “너 왜 그렇게 바뀌었니?”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덧 예비군이 끝나고 민방위가 되었으나 군대 적 말투와 몸짓을 모두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짧은 스물여섯 달, 아니 짧지 않은 스물여섯 달에 걸쳐 젊은 넋한테 아로새겨진 숱한 삶자락은 제가 눈을 감는 날까지 길디길게 이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한창 푸르고 젊고 싱싱하던 때에 겪고 부대낀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또아리를 틀 테니까요.


.. “지금 페인트칠을 하려는 건 아니죠, 제임스?” “유리창을 하얗게 칠해야 해.” “왜요?” “방사능 때문인 것 같아. 햇빛을 막으려고 온실을 하얗게 칠하는 것처럼 말이지. 지침서에 나와 있어.” “정말 그렇게 더울까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히로시마에서는 해가 천 개나 떠 있는 것처럼 더웠대. 그러니 꽤 더울 거야. 게다가 지금 강대국들은 훨씬 더 성능이 좋은 걸 만들고 있어.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으니까.” “페인트가 커튼에 묻지 않게 조심해요! 먼저 커튼부터 떼냈어야죠. 정말 생각이 없군요.” ..  (8∼9쪽)


 대한민국에서 군대에 가지 않으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셈이라는 이야기를 곧잘 듣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분들치고 ‘땅개로 밑바닥에서 굴렀던 분’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하사관이든 장교이든 간부로 있던 분들, 또는 여느 보병이었으나 후방에 있던 분들, 또는 전방에 있었어도 행정병으로 있던 분들이 으레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여느 땅개로 군대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야 했던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말할 힘’이 거의 없는 밑바닥 일터에서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개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거나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거나 할 뿐,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책이든 인터넷이든, 이런저런 데에 당신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낼 만한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고 느낍니다.

 수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완전군장을 메고 소총을 메고 탄약상자를 들고, 또는 박격포를 셋으로 나누어 지고, 또는 무반동총을 홀로 낑낑거리며 군장 위에 얹고, 또는 부대 깃발과 무전기를 목아지에 얹고 하루 동안 쉼없이 걸어야 했던, 이러는 가운데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하사관 물통까지 덤으로 군장에 끼워들고 걸어야 했던 땅개 가운데에서는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에 가서 나라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섣불리 안 한다고 느낍니다. 고엽제 상자를 둘이 나누어 들고 군사분계선으로 날라 ‘시계청소’를 한다며 헬멧으로 퍼서 뿌리던 땅개들은, 진지구축을 한다며 시멘트와 돌과 모래와 물을 한 짐씩 이고는 네 시간 남짓 산길을 타고 올라 내려놓고 낮밥을 먹은 뒤 다시 네 시간 남짓을 걸어내려오며 하루 일을 마치던 땅개들은, 겨울철 보급로 눈길을 치울 싸리비를 만들어야 한다며 밤을 새워 몇날 며칠 수천 개에 이르는 싸리비를 만드느라 잠 못 자고 눈이 퉁퉁 붓던 땅개들은, 장마철에 보급로 무너지면 안 된다며 밤새워 삽자루 들고 온몸이 비에 흥건히 젖은 채 물골작업을 하던 땅개들은, 어설피 “남자인데 군대에 안 가?”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제가 상병일 때 병장이던 고참이 “종규야, 우리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 하자!” 하면서 웃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삼백 삽쯤 뜨고 허리를 펴려고 하니, “어, 아직 천 삽 되려면 멀었는데?” 하면서 삽자루로 후려패려고 높이 쳐들고 웃음 띠던 얼굴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2) 대포동미사일이 걱정된다면


 북녘에서는 대포동미사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수천 킬로미터뿐 아니라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갈 만한 미사일을 갖추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도 갖추고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일본에는 이런 미사일이 없겠지만, 미사일보다 무시무시한 이지스함이 있고,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꿈꿀 수 없는 엄청난 군무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남녘땅에 있던 핵미사일을 미국이 도로 가져갔는지 모릅니다만, 미국이 남녘땅 핵미사일을 미국땅으로 가져갔거나 일본 류우큐우(오키나와)로 가져갔든, 이 핵미사일은 언제든지 북녘땅쯤 송두리째 날릴 수 있습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 “화장실은요?” “요강 같은 걸 들여놔야지.” “제임스 블록스 씨, 미리 말해 두지만, 난 품위 있게 위층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여보, 돌아다녀선 안 돼. 국가적 비상 사태 열나흘 동안은 안 된다고.” “그럼, 좋아요! 요강은 어떻게 비울 거죠?” “저, 그냥 화장실에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방금 화장실에 가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  (9쪽)


 일본은 한국과 대만과 중국과 태평양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고, 유럽은 지구에 그려진 모든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가운데 쿠바와 중남미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베트남을 프랑스에 이어 식민지로 삼으려다가 쓴맛을 보았고, 쿠바라는 물좋은 식민지는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일당(?)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쿠바를 빼앗긴 좋은(?) 쓴맛을 발판 삼아 칠레 아옌데 정부가 들어설 때 숱한 미사일과 헬리콥터와 탱크로 대통령궁을 박살내고 민주인사 목아지를 베어 죽이면서 식민지 넓히기를 힘차게 이어나갔습니다.


.. “세상에! 그럼 이젠 누가 지휘를 하지?” “꼼푸터겠죠.” “‘국민연금증서와 의료보험카드와 출생증명서를 상자에 보관할 것.’” “여기 쓸 만한 게 있어요, 여보. 속을 비울게요.” “고맙소. 상자는 안전한 곳에 둬야겠소. 그런데, 안전한 곳이 어디지?” ..  (13쪽)


 우리 나라는 우리보다 힘여린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돈없는 나라에 공장을 세우고 있으며, 우리보다 돈적은 나라에서 싼 물건을 사들여 나라안 일꾼과 가게가 무너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싼 물건을 사서 쓰는 우리들은, 제값 받고 팔아야 할 물건을 만드는 우리 이웃이 굶어죽도록 내몹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기 앞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이 만든 ‘옳은 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지 않으면서, 이웃나라에서 ‘싸게 내다 파는 달콤한 맛’에 홀려 머저리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총칼 들고 밀어닥친 군부대 식민지는 아니지만, 뒤에서 돈다발 들고 킥킥거리는 부자들 놀음놀이 식민지라고 느낍니다.


.. (잠시 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겠습니다. 적의 미사일이 우리 나라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3분 뒤에 폭발합니다.) “맙소사! 여보! 3분밖에 안 남았어!” “어머, 얼른 세탁물 좀 들여놓을게요.” “이리 돌아와, 이 바보야, 대피소로 들어가!” (대피하십시오!) “어떻게 나한테 그 따위 말을 할 수 있어요!” “입닥치고 들어가란 말이야!” “전시라고 해서 품위까지 팽개쳐야 하나요?”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입닥쳐! 방송을 듣고 있잖아!” (집 안에 계십시오!) “이날 이때껏 그런 소린 못 들어 봤어요.”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제발 입 좀 닥쳐!” (엎드리세요!) “아, 여보! 오븐을 켜 놨어요.”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라니까!” ..  (17쪽)


 그나저나 북녘은 대포동미사일을 뭐하러 만들까요. 핵무기를 뭐하러 만들려고 할까요. 남이든 북이든 먼저 치고 들어가면 먼저 맞은편을 쑥대밭이 되도록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서로서로 먼저 쳐들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쳐들어간다면 누가 땅개가 되어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고, 누가 지도자나 사령관이 되어 가슴팍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게 될까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무엇이 새로 들어서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서로서로 무엇을 더 얻어려고 벌이는 주먹다짐 칼부림 총질이 될까요.
 





 (3)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가 말하는 이야기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힘센 나라들이 서로 악다구니처럼 싸움을 벌인 끝에 서로서로 핵무기를 쏘아대면서 모든 사람들이 가루가 되어 죽어 버린 일을 그림이야기로 담아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늙은 가시버시는 옛날 생각(제2차세계대전 때)을 하면서 ‘이번에도 어찌어찌 견디면 전쟁이란 바람은 지나가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번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목숨을 죽음으로 실어나르는 바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늙은 가시버시는 핵무기가 퍼뜨리는 병에 걸려서, 또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물과 밥이 다 떨어져 굶어죽었을 테지만,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대피소에 나란히 누워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70년에 영국 그림쟁이가 담아낸 《바람이 불 때에》인데, 1970년 그무렵에도 ‘핵전쟁’을 걱정해야 할 만큼 사람들은, 아니 숱한 나라 정부들은, 아니 유럽과 미국에다가 러시아 정부들은 서로 누구 힘이 더 센가를 겨루면서 제 밥그릇을 좀더 크게 차지하려는 데에 온힘을 쏟았습니다.

 자, 그러면, 1970년부터 마흔 해 가까이 지난 2009년 오늘날 우리 세상은 어떠할까요. 유럽 나라는, 미국은, 러시아는, 일본은, 또 중국은 어떠하지요? 힘있는 뭇나라들은 힘여린 뭇나라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티벳은 왜 중국한테 짓밟히면서 죽어나야 하는가요. 태평양 섬나라는 어이하여 다국적기업 관광지로 개발되어야 하는가요.


.. “너무 조용하지, 안 그래?” “그래요, 이상하네요. 기차도 안 지나가네. 자동차도 없어요.” “폭발 때문에 모두들 파업했나 봐요.” “탄내가 아주 지독해요.” “맞아. 하긴, 당연한 일이지.” “고기 굽는 냄새 같아요.” “그래, 고기파티를 하나 봐. 사람들이 이번 주엔 일요일이 되기도 전에 만찬을 하나 보군.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럴 거야.” “길이 아주 이상해졌어요. 좀 녹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유배달부가 늦나 보군. 길바닥 어디에 붙어 버렸나 봐. 전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걸까? 누가 이기고 있을까?” “걱정 말아요, 여보. 신문에 다 나올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신문도 늦는 것 같아.” “어제도 우리 집은 빠뜨리고 갔어요.” ..  (30∼31쪽)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라고 그린다고 하지만, 《바람이 불 때에》는 아이들이 보기에 썩 알맞지 않은 그림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가 끔찍해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끔찍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어려워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아이들 삶하고 동떨어져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아이들 삶하고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왜?

 아무래도 《바람이 불 때에》는 철이 없는 어른이 먼저 보도록 그려내지 않았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겪어 보았다고 하거나 전쟁을 안다고 하거나 나라사랑을 하자고 하거나 남북녘이 서로 맞서고 있다고 하거나 세계평화를 걱정한다고 하는 어른들이 바로 이 그림책을 찬찬히 받아들이거나 새기지 않는다면, 이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제대로 읽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 세상을 바꿀 테지만, 어른들은 바로 아이들이 자라나는 오늘날 이 세상을 흔들고 있거든요. 오늘날 이 세상을 흔드는 어른들이 우리 삶터를 어떻게 다스리거나 이끄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과 삶터가 뒤바뀔밖에 없거든요.


.. ‘그럴 필요도 없지. 어차피 케이크는 모두 탈 테니까.’ ..  (17쪽)


 모두를 타죽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핵무기를 앞세운 싸움이든, 재래식 무기를 앞세운 싸움이든, 모두를 타죽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어린이도 타죽이고 어른도 타죽입니다. 푸름이도 타죽이고 늙은이도 타죽입니다. 고양이도 타죽이고 강아지도 타죽이며, 염소와 송아지와 돼지와 닭을 가리지 않습니다. 진달래와 개나리와 장미와 튤립을 따지지 않으며, 소나무와 잣나무와 방울나무와 감나루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싸움이라고 하는 바람’이 한 번 불 때에는 이제 모두들 끝이라고 해야 합니다. 큰 싸움이든 작은 싸움이든, 모든 사람을 타죽이게 하는 불바람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아이들한테 읽히기 앞서 어른들이 먼저 찬찬히 읽고 새기고 받아들이며 어른들 삶을 스스로 고쳐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이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쥐어 주어야 아이들 또한 속속들이 살뜰히 받아먹습니다.

 그저 지식이나 정보로만 이 책을 쥐어 준다면, 그예 ‘세계 명작 그림책이니 아이들 인성발달에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쥐어 준다면, 우리 어른들은 또다른 뜻에서 ‘싸움에 한발 담그는 셈’입니다. 아이들한테 ‘싸움 솜씨’만을 물려주는 셈입니다. 우리 집 아이와 이웃집 아이한테 싸움을 붙이는 꼴입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를 밟고 올라서도록 내모는 짓이 되고 맙니다. (4342.7.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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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행 엑서더스 - 그들은 왜 '북송선'을 타야만 했는가?
테사 모리스-스즈키 지음, 한철호 옮김 / 책과함께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과 일본은 역사를 함께 일구어 왔다
 [잠깐 읽기 43] 테사 모리스-스즈키, 《북한행 엑서더스》



- 책이름 : 북한행 엑서더스
- 글 : 테사 모리스-스즈키
- 옮긴이 : 한철호
- 펴낸곳 : 책과함께 (2008.12.15.)
- 책값 : 18000원



 (1) 일본땅 한겨레붙이 삶과 책과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이 북녘으로 배를 타고 옮겨갔습니다. 재일조선인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다음부터 일본땅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로, 일제강점기 때에 징용으로 끌려왔거나 한국땅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한 다음 고향나라로 돌아간 이들이 많지만, 고향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많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이들도 있습니다. 잃었던 나라를 찾았다 할지라도 먹고살 길마저 함께 찾을 수 있지 않았을 뿐더러, 해방을 맞이하면서 남녘과 북녘으로 쪼개어졌고 이내 전쟁까지 터지는 바람에 그예 눌러앉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눌러앉은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에도 온갖 푸대접과 따돌림과 업신여김에 고달파야 했고,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난 다음에도 ‘천황을 모시는 신민’이 아닌 ‘해방된 나라 사람’이 되었어도 ‘일본 정부가 보듬어 주고 싶지 않은 외국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일자리 얻기도 힘들고 학교를 다니기도 힘들며 조선말 배우기도 힘들었습니다.


.. 한반도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냉전이 끝난 지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냉전은 한반도에서는 살아남았으며, 21세기 소위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기괴하고 무서운 긴장의 집합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 점령군 병사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본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조선인에 대한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병사는 더욱 적었다. 점령군은 조선인을 ‘해방 국민’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 장명수의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취지는 단순하고도 극단적인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귀국운동은 인도주의의 기수인 일본적십자사가 인종차별주의적인 일본 권력기구를 대신해서 실행한 ‘민족 정화’ 행위였다. 나의 입장과 장명수의 주장은 일치하지는 않지만, 일본적십자사 간부의 행동에 대한 장명수의 가설은 내가 제네바에서 본 정보와 몇 가지 부합되는 것 같다 …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는 단순 명쾌했다. 제국이 사라진 지금, 조선과 대만의 전 식민지 신민은 일본 국민으로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30∼31, 43∼44, 56, 97쪽)


 재일조선인 삶을 다룬 책은 곧잘 나왔습니다. 남녘사람이 쓴 책도 있고, 재일조선인 스스로 쓴 책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들은 하나같이 잘 안 팔리고 안 읽히면서 잊혀집니다. 우리한테 쓰라린 발자취이기에 돌아보고 싶지 않은지 모릅니다만, 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날이라 하여도 어김없는 우리 발자취요 삶이며 사람입니다. 예나 이제나 ‘한겨레붙이’로서 따스한 품에 안겨 본 적이 없는 우리 이웃이요 동무요 한식구입니다. 많이 팔리고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기보다, 우리 스스로 한겨레붙이라고 느끼거나 생각한다면 마땅히 찾아서 삭이고 헤아리고 보듬을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한겨레붙이를 따돌렸습니다. 그러면서 1965년 한일협정으로 뒷돈을 챙길 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시달리고 괴로웠던 사람들 아픔을 달래고 생채기를 보듬는 데에 그 돈이나마 쓰지 않았고, 일본에 남고 러시아에 남고 중국에 남고 중앙아시아에 남은 한겨레붙이를 널리 품어 안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를 사랑하고 싶던 재일조선인은 남녘은 남녘대로 씁쓸하게 바라보고 북녘은 북녘대로 쓸쓸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몇 만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이 1959년부터 ‘북녘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 1952년 4월 28일자로 재일조선인은 공영 주택 입주권을 포함해 주요 사회 복지를 향유할 권리를 잃었다. 전후 수십 년에 걸쳐 일본의 복지 제도가 발달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배제 규정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 때문에 더욱 엄격해졌다 … 안보조약 개정을 이루어낸 기시 내각은 국민연금제도도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외국인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부터 고도성장기로 돌입했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식민지의 ‘망령’은 안보조약 개정에 의해 일소되고,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새로운 복지제도도 만들어졌다. 도시 내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의 인구가 줄어들고 도시 재개발이 진행된 것도 이 시기였다 ..  (100, 323쪽)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ㆍ일본 이야기》(2005)라는 만화책을 보면, 남녘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엇갈린 눈길 때문에 재일조선인이 얼마나 마음앓이를 하는가를 살며시 부드럽게 다루어 줍니다.

 《재일조선인의 가슴속》(2003)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매한가지로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따돌려 왔고 얼마나 가슴앓이가 컸는가를 날카롭게 낱낱이 다루어 줍니다.

 《해협》(2003)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에서 학문을 파고드는 한 사람이 얼마나 거칠고 고단한 길을 걸어야 했으며, 이 거칠고 고단한 길은 당신한테뿐 아니라 당신 아이들한테까지 길디길게 이어지는가를 곰곰이 되새기도록 해 줍니다.

 《산다는 것의 의미》(2007) 같은 청소년책을 보면, 배울 수 없던 사람과 밑바닥에서 헤매야 한 사람은 무엇을 겪고 보고 듣고 돌아보아야 했는지를 눈물겹게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일본사람 카지무라 히데키 님은 《재일조선인운동》(1994) 같은 책을 쓰며(썼다기보다 강연한 이야기를 글로 옮겨적었습니다만), 일본 사회에서 일본 지식인 스스로 ‘재일조선인’을 너무 모르거나 등돌리고 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오다 나라찌라는 일본 목사는 일제 강점기 때에 맨몸으로 한국땅으로 건너와 하느님 목소리를 나누려 하면서, 일본에서 신학을 배울 때에는 조금도 알지 못했던 ‘식민지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삭이며 깨달았고, 해방이 된 뒤에도 죽는 날까지 한국땅에서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당신이라도 뉘우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지게꾼》(1980)이라는 책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 북한이 대량 귀국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은 결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기적으로 따져 본 결과였다. 김일성 정권이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것, 세계가 주목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룬다는 장대한 꿈, 일본ㆍ한국ㆍ미국의 삼자 관계에 훼방을 놓고픈 욕구,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의 무대에서 프로파간다의 승리에 대한 동경, 그러한 모든 것에서 귀국이 득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귀국사업을 방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한 이유는, 이 정권 자체가 정치범을 부당하게 다루고 있었고, 재일조선인의 남쪽 귀국을 지원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재일조선인을 일본과의 외교적 침체 상태를 타개할 협상의 재료로 이용하는 쪽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  (308∼309쪽)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재일 한국인 지문 거부 운동》(1987)이라는 책하고 《지문날인 거부자가 재판하는 일본》(1990)이라는 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두 가지 책은 처음 나왔을 때에도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을 뿐더러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판이 끊어지고 난 다음에도 헌책방에서 그리 손길을 타지 못하는 한편 두루 읽히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책은 ‘나라안에서 내로라하는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펴내지 않았습니다. ‘돈이 될 만하지 않아’ 안 냈는지, ‘처음부터 재일조선인 문제는 생각하지 않아’ 안 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받는 창피와 업신여김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보려는 한국 지식인 사회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옳다고 느낍니다.

 그나마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2005) 같은 책은 우리 말로 나온 적이 있으나, 1995년에 《조선인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올 때에는 다른 재일조선인 이야기책하고 마찬가지로 금세 파묻히고 사라졌습니다.

 강재언 님이 쓴 《한국근대사》(1990)라든지 《근대한국 사상사 연구》(1983)라든지 《조선의 서학사》(1995)라든지 《한국의 개화사상》(1989)이라든지 《한국근대 사회와 사상》(1989)이라든지 《한국 근대사 연구》(1986)라든지 《일제하 40년사》(1984) 같은 책이 수두룩하게 옮겨진 일은 퍽 놀랄 만합니다. 그렇지만 한국 역사와 문학에 눈길을 두는 대학생이나 지식인 가운데 ‘강재언’ 같은 이름을, ‘이진희’ 같은 이름을, ‘강덕상’ 같은 이름을, ‘김달수’ 같은 이름을, ‘김석범’ 같은 이름을 찬찬히 훑거나 꿰거나 살피기라도 한 사람은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없지는 않을 테고 드물지는 않을 테지만,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이 아니랴 싶습니다.

 《김석범 ‘화산도’ 읽기》(2001) 같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했어도, 정작 《화산도》라고 하는 책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김석범 님 다른 작품 《까마귀의 죽음》(1988)이 한 번 옮겨진 적이 있으나, 거의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은 채 먼지처럼 사라지기만 했습니다.


.. 21세기의 북한 난민은 1950∼1960년대의 귀국자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 차원의 정치라는 체스판에서 참으로 편리한 ‘말’이어서 큰 전략에 필요하면 사용되고 필요성이 없어지면 언제든 잊혀진다. 국제 정치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들의 작지만 각기 다른 인간적인 필요성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북한 정부에게 이들은 배신자이자 반역자다. 투옥시키고 때에 따라서는 고문을 가하거나 처형하기도 한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밀입국한 불법 노동자로, 김정일 정권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도해 주어야만 한다. 한편 미국의 정치적인 입장은 이들 전부를 일괄적으로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정치 망명자로 규정한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권 정책은 난민을 잠재적으로 유익한 ‘체제 변혁’분자로 보고 국경을 넘는 대규모 탈출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공포의 위험성에 노출시키는 행위다. 또한 중국 국경에서는 위기에 처한 난민들 속에서 영혼을 구할 가능성을 엿본 많은 기독교 단체가 열의와 금전을 퍼붓고 있다 ..  (397∼398쪽)


 따지고 보면, 우리들은 재일조선인 삶에 등돌리는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남녘땅 이웃 삶에도 등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재일조선인 이야기책에 등돌리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남녘땅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책에도 등돌리고 있어요.

 내 이웃 삶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가요? 내 동무들 삶자락이 어떠한가를 가슴 깊이 헤아려 보려고 하는가요? 내가 발디딘 동네에서는 어떠한 일이 얼마나 어찌어찌 벌어지고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기는 하는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에서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하고 가까운 이웃 또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러한 몸짓이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자리에서도 똑같이 이어간다고 느낍니다.


 (2) 《북한행 엑서더스》라고 하는 책


 《북한행 엑서더스》라고 하는 책을 읽습니다. 다른 수많은 ‘일제강점기 역사’와 ‘재일조선인 역사’를 다룬 책들이 으레 ‘일본사람 손으로 나오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재일조선인이 북녘으로 배 타고 간 일을 다루는 책 또한 일본사람이 쓰는 일은 하나도 얄딱구리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남녘나라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자취’를 돌아보는 역사학자 숫자도 몇 없지만, 머나먼 옛날이 아닌 ‘아직 얼마 안 된 요즈음 우리 발자취’를 돌아보는 역사학자 숫자도 그리 안 많다고 느낍니다.


.. 일본 측은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이 징용노동자로서 일본에 강제 연행되었다는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일에 특히 열성적이었다. 일본 정부는 7월 11일, 이 문제에 관해 특별한 신문 보도자료를 내놓았고, 그 사본을 당연히 제네바에도 보냈다. 이 발표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종결시 일본에 있던 200만 명의 조선인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해 징용된 노동자는 ‘작은 비율’에 지나지 않았고, “말할 것도 없이 이들에게도 표준 임금이 지불되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종전시에 귀국했다 … 재일조선인 역시 본질적으로 ‘메구미’ 양과 다를 바 없을 텐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배려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  (299, 413쪽)


 책을 넘기면서 마음 한 자리가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사람이 쓴 책이라 하여 나쁠 까닭이 없고, 일본사람이 쓴 책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료를 만질 수 있다 할 수 있으며, 한결 차분하게 우리 발자취를 더듬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더욱이, 마음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본 지식인은 우리가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꽤 많습니다.


.. 으르렁거리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발코니에 나가 보니, 눈 아래에는 아주 먼 청록색의 언덕까지 도시가 뻗어 있다.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 탓일 것이다. 평양의 공기는 이제까지 방문한 어느 나라 수도보다 맑았다. 평양 하면 곧 생각나는 버드나무가 양쪽 강가에 늘어서 있고, 깊은 청록색 물이 천천히 도시 중심부를 뚫고 흐른다 ..  (258쪽)


 그런데 2008년 12월에 나온 책을 2009년 7월이 되어서야 다 읽고 덮습니다. 틀림없이 제 눈길을 끄는 책이요, 1959년에 일본과 북녘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좀더 깊이 알도록 도와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만, 어인 까닭인지 책장이 잘 안 넘어갑니다.

 글쓴이 ‘테사 모리스-스즈키’ 님이 학술논문이 아닌 가벼운 수필처럼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 탓은 아니요, 역사를 바라보는 눈길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1959년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를 차근차근 헤아리며 그때 그 길을 곰곰이 밟아 나가는 흐름은 더없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흐려집니다. 일본과 북녘과 미국과 남녘 정부가 저마다 어떤 셈속과 꿍꿍이로 ‘일제 강점기 때에 고달팠던 사람들 아픔’을 더 고달프게 하고 아프게 했는가를 밝히는 이야기가 자꾸자꾸 흐려집니다.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이 벌이는 머리싸움과 힘싸움 때문에 누구 새우등이 터지고 있는지 하는 이야기가 흐려지고, 이러한 역사를 밝히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가 흐려지며, 이와 같은 발자취는 지난 한때로 그치지 않고 있음을 사람들이 안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흐려집니다.


.. (국제적십자위원회 파리 대표) 윌리엄 미셸은 상당히 놀라면서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드디어 분명해졌다고 적어 놓았다. 1. 일본에서 조선인 문제에는 전체적으로 봐서 인도적 배려는 없다. 2. 일본 정부는 생활이 곤궁하며 공산주의적인 데가 있는 조선인 수만 명을 배제함으로써, 안전 보장 문제와 (현재 빈궁한 조선인에게 거액의 돈이 지출되고 있다는 이유로) 예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어 하고 있다. 3. 이노우에 씨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필요하다면 북한에 가고 싶어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요구를 부채질해서라도 귀국사업을 실시할 결의를 갖고 있다 ..  (178쪽)


 책을 다 읽고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다 보니 178쪽에 나온 이야기가 이 책에서 글쓴이가 하고픈 말마디, 아니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 북송은 왜 이루어졌는가’를 밝히는 말마디 모두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래, 이 말마디를 1쪽부터 447쪽까지 되풀이 말하거나 거듭 되뇌었구나 싶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똑같이 꾸리고 있는 역사 한 자락을, 일본은 일본 정부 나름대로 제 배속만 차리려 한다는 정책이지만, 한국 또한 한국 정부 나름대로 제 배속만 채우려 한다는 정책일 뿐임을, 조금은 지루하게 살짝살짝 에돌며 이야기하고 있구나 싶어요. (4342.7.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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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혁명
존 맨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책표지는 엉뚱한 녀석이 뜨네? -_-;;;;;) 

 



 직지심경을 ‘혁명’으로 삼지 않았으니 대한뉴스 따위가
 [잠깐 읽기 42] 존 맨, 《구텐베르크 혁명》



- 책이름 : 구텐베르크 혁명
- 글 : 존 맨
- 옮긴이 : 남경태
- 펴낸곳 : 예지 (2003.2.5.)
- 책값 : 14500원


 (1) 우리한테는 어떤 책이 있는가


 헌책방을 다니면서 놀랄 때가 더러 있습니다. 1970∼80년대에 나온 책인데, 그때 그 책에 붙은 값이 그때 여느 노동자 여러 달 일삯이 될 만큼 비싼 녀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툼한 사전이라면 그럴 수 있다지만, 그리 두툼하지 않으며 사전 아닌 학술책임에도 대단히 높은 값을 붙인 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책은 요즈음에도 있습니다. 그만큼 값어치가 있고 뜻이 있다 하여 5만 원이니 7만 원이니 10만 원이니 15만 원이니 37만 원이니 하고 책값이 붙는데, 스무 해쯤 앞서인가 어느 분은 150만 원짜리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헌책방을 다니면서 새롭게 놀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손바닥책을 보면서 놀라는데, 자그마치 1000쪽이 넘는 손바닥책을 펴내는데, 무게도 가볍고 펼쳐 읽기에도 좋으며, 알맹이도 야무졌습니다. 글씨는 작지만 읽으면서 눈이 아프지 않았고, 게다가 이 1000쪽이 넘는 손바닥책은 ‘사진 문고’였습니다.


.. 그 전까지 성서는 수도사들이 양피지에 필사하고 온갖 화려한 장식을 붙여 만드는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게다가 양피지의 재료값과 보통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제작 공정을 감안하면 양피지본 성서는 일반인들이 구입하기 어려운 사치재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위클리프와 후스가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친들 제대로 먹혀들기 어려웠다. 최소한 서민들의 가정마다 성서가 비치되어 있어야 성서로 돌아가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따라서 민중은 여전히 교회가 해석하는(또는 곡해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쇄술로 인해 성서가 대량으로, 값싸게 출판된 것은 종교개혁의 필수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  (8쪽/옮긴이 말)


 범우사에서 ‘범우문고’를 1000원이나 2000원에 판 때는 그리 오래된 옛날이 아닙니다. 내로라하는 지식인마다 ‘삼중당문고’를 보며 자랐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삼중당문고가 아니었어도 뜻깊고 알차며 값싸고 야물딱진 손바닥책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얼마 앞서 빈센트 반 고흐 편지를 추려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박스,2009)가 새롭게 나왔는데, 800쪽짜리 26000원인 이 책을 보면서 지난날 정음사에서 ‘정음문고’로 낸 작고 가벼운 손바닥책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1970년대 정음문고에는 반 고흐 편지가 더 많이 실리지 않았습니다만, 1970년대 사람들은 이 작고 야무진 책을 단돈 몇 백 원으로 장만할 수 있었고, 나라안 헌책방에서도 2000년이 될 무렵까지 500원이나 1000원이면 ‘반 고흐를 만나고 새길 수 있었’습니다.

 《창가의 토토》 같은 책은 요즈음 새책 한 권 값이 8800원이니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펴낸 일본에서는 겉을 딱딱하고 두꺼운 판으로 댄 양장본도 있으나 훨씬 작고 조촐한 판으로 된 값싼 손바닥책을 함께 펴냈습니다. 일본에서는 웬만한 책들은 ‘작고 조촐하고 알차고 값싼’ 판으로 엮어내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이들 그림책은 으레 두꺼운 판을 대어 ‘접히거나 구겨지거나 찢어지지 않게끔’ 해 주고 있는데,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꼭 ‘두꺼운 판 대기’만을 하지 않습니다. ‘두꺼운 판이 아닌 여느 두꺼운 종이(여느 도화지보다 조금 두꺼운)를 쓴’ 가볍고 값싼 책도 곧잘 펴냅니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라는 그림책은 처음에 이렇게 ‘두꺼운 종이 하나로만 살짝 댄 판’으로 나왔다고 떠오릅니다.


.. 1400년경에는 현대적 개념의 과학적, 역사적 진리란 존재할 수 없었다. 문헌의 양이 사막의 꽃처럼 드물었을 뿐더러 설사 있다 해도 평생 동안 찾아다녀야 겨우 하나 건질까 말까 한 정도였기 대문이다. 유일하게 참된 진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교회는 마치 빅 브러더처럼 (문헌을 다루는) 필경사와 (구술을 다루는) 사제, 그리고 둘 다에 관련된 예술가를 이용하여 매체를 통제했다. 교회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부유해졌으나, 부와 특권에 부수되게 마련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  (61쪽)


 ‘공정여행 가이드북’이라는 작은이름이 붙은 《희망을 여행하라》(소나무,2009)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456쪽에 이르는 무지개빛 사진 가득 담긴 이 책은 16000원이 붙습니다. ‘안데스 음악을 찾아서’라는 작은이름이 붙은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천권의책,2009)도 읽고 있습니다. 339쪽에 이르고 판은 조금 작고 글도 얼마 안 실려 있으나 책값은 15000원이 붙습니다.

 책값이 싸다고 착하거나 좋은 책이 아닙니다. 책값이 비싸다고 나쁜 책이거나 못된 책이 아닙니다. 다만, 책 하나 만들면서 어떤 종이를 어떻게 쓰고, 글은 빈자리를 얼마나 두면서 엮어내어 보여주려 하느냐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종이 무게에 따라 종이값이 달라지고, 종이값이 달라지면 으레 책값이 달라집니다. 빛깔있는 사진을 넣으면 인쇄값이 높아집니다만, 부수를 적게 하면 인쇄단가가 높은 셈이라 책값을 낮게 매기기 어렵습니다. 1000권을 찍을 때하고 1만 권을 찍을 때하고 인쇄단가가 사뭇 다르기에, 책 하나에 붙는 값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책이 가볍고 예쁘장하며 값까지 싸다고 하여도, 속에 담은 알맹이가 여물지 못했으면 눈길이나 손길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꾸밈이 훌륭하다 하여도, 훌륭히 꾸민 겉싸개가 안고 있는 알맹이가 흐물흐물하거나 곪아터져 있다면, ‘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한낱 ‘종이뭉치’입니다.

 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찍혀 나오더라도 신문 노릇을 하지 않을 때에는 신문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교사라는 이름으로 학생들 앞에 서더라도 교사 노릇을 하지 않을 때에는 교사라 하기 어렵습니다. 책이 책 노릇을 할 때라야 비로소 책 값어치가 있습니다. 책으로서 값어치가 있을 때에는 조금 비싸더라도 즐겁게 장만할 수 있으며, 값어치가 있으면서 눅은 값이라 하면 한결 고맙게 마련할 수 있는 대목이 다릅니다.


.. 아르보가스트 수도원 근처에서 구텐베르크는 무슨 일을 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돈을 벌고 싶었고, 그것도 많이 벌고 싶었다 … 하지만 이제는 실질적인 최종 생산물, 즉 책이 있어야 한다. 그만한 경비와 노력을 기울이고 채무까지 떠안은 판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그는 베스트셀러가 필요했고, 그것도 가능한 한 여러 권이 있어야 했다. 아직 성서는 상업적 가능성이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교회와 성직자들을 감안하여 성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교리를 수호하는 역할을 통해 권위와 더불어 막대한 수입도 올렸다. 성서를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 품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특히 구텐베르크의 기본 시장이 되어 줄 학생과 교사들-은 성서가 없었으며, 필사본이든 인쇄본이든 성서를 구입할 만한 재정적 여유도 없었다 ..  (90, 194∼195쪽)


 그러면 우리 나라에는 어떤 책이 있을까요. 우리 나라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책마다 어떤 알맹이를 넣어 꾸미고 있을까요. 책을 만들고 팔아 번 돈은 책 만들기에 얼마나 다시 돌아가도록 얼거리를 짜 놓고 있는가요. 흔한 말로, 책 팔아 번 돈으로 땅 사고 빌딩 사고 있지는 않습니까. 책 팔아 거둔 돈으로 음료수 만들고 정수기와 비데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책 팔아 번 돈으로 교재 만들어 더 커다란 돈을 긁어모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책을 쓰는 사람들 땀방울, 책을 엮는 사람들 품, 책을 사읽는 사람들 주머니와 겨를을 온통 빼앗거나 내동댕이치는 쪽으로 흐르는 오늘날 우리 책문화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 1450년까지도 면죄부는 교회가 기금을 모집하는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209쪽)


 무엇보다도,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과서 아닌 책’을 들여다볼 틈을 내주지 않는 매무새와 흐름이 걱정스럽습니다.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과 키우는 어른이 당신 아이들한테 스스로 ‘교과서 아닌 책’을 읽도록 책을 베풀거나 말미를 마련해 줄 생각은 아예 없지 않느냐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가까스로 입시지옥에서 벗어났어도 ‘책다운 책’을 알아가도록 아이들을 풀어놓지 않고서 ‘새로운 돈벌이 굴레’에 허덕이도록 내몰면서 바보처럼 살도록 밀어내지는 않느냐 싶어 가슴이 저밉니다.


 (2) 직지심경은 ‘혁명’이 못 되었으나 구텐베르크는 ‘혁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고 하는 《직지심경(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이 우리 나라에서 1377년에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우리네 옛 역사가 얼마나 거룩하고 대단했는가를 들면서 《직지심경》이며 온갖 ‘옛 활자본’을 이야기하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서양에서는 《직지심경》을 그리 대단하게 높이거나 받들지 않는 듯 보입니다. 햇수로 치면 《직지심경》이 훨씬 앞서는 금속활자본이라 할 만하지만, ‘맨 처음’이라는 대목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벤베르크가 했던 성경 찍기는 서양에서 ‘종교개혁’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 뜯어고치기’를 이룬 발판이 되었지만, 우리 나라에서 나온 《직지심경》은 여느 사람들 삶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채 ‘조용히’ 이루어졌거든요.


.. 그런데 왜 동양에서는 그 인쇄술이 꽃을 피우지 못했을까? 왜 동양에서는 인쇄술을 바탕으로 ‘출판사’들이 곳곳에 세워지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민간 부문이 발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관에서 독점하던 동양 역사의 특유한 성격 때문이다. 지배층의 관점에서,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동양에서는 인쇄술이 개발되었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몇 부 찍어서 서고(사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지식은 생산의 측면에 못지않게 보급의 측면이 중요하다.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재생산과 업그레이드를 가능케 할 뿐더러, 지식을 독점하고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차단함으로써 권력을 누리는 지식 권력체가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  (10쪽/옮긴이 말)


 교과서에 몇 줄로 짤막하게 ‘종교개혁’을 했다는 사람으로 나와 있는 ‘루터’라는 사람은, “교황은 면죄부 판매상들의 탐욕과 부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성 베드로 대성당이 신도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355쪽)” 같은 말을 책으로 찍어서 사람들한테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루터가 이런 말을 했는지, 또 다른 어떤 말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계사 교과서로는 이러한 이야기를 알 수 없었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찾아낸 ‘루터 평전’이 두어 가지 있는데, 이런 책을 읽었을 때 비로소 이와 같은 대목을 헤아릴 수 있었으나, 학교 교과서 교육으로는 오직 한 마디 ‘종교개혁’이라는 말마디만 듣고 배웠을 뿐입니다.


.. 인쇄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확산시켰다. 예전에는 지배자들이 추종자들에게 말하거나, 법률가들이 법정에서 말하면 그들의 말은 문자 기록으로 남았다. 학자의 저작이나 성현의 가르침과는 달리 민간의 문학 작품이 글로 남게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거기에 단테의 《신곡》,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피콜로미니의 《두 연인의 이야기》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어디서나 라틴어가 아니라 자국어로 설득력 있게 말할 수만 있다면, 다른 어느 누구-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첵에서가 아니면) 그런 적이 없었다. 이제 새로운 양식이 발명되었다 … 인쇄술이 남긴 중요한 결과들 중 한 가지는 인간의 행위와 지식의 거의 모든 측면을 범주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점이다 ..  (339, 341쪽)


 우리 나라는 인터넷이 집집마다 들어서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셈틀 한 대쯤 없는 집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텔레비전 안 키우는 집이란 몹시 드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나라 사람이 낱낱이 꿰고 있지는 않으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날마다 떠도는 소식과 정보로 우리 머리와 눈과 귀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갖 소식과 정보를 듣고 얻을 문은 있되, 우리 스스로 온갖 소식과 정보를 일구어 나눌 자리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며칠 앞서 정부에서는 ‘극장판 대한뉴스’를 되살려 내었습니다. 극장에서 틀어 주는 대한뉴스란 지난날 독재정권이 일삼던 ‘땡전뉴스’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사람들한테 세금을 거두어들여 허튼 짓을 하면서 이 허튼 짓이 허튼 짓이 아닌 듯 보이도록 하려는 몸짓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제국주의자들이 천황한테 예의를 지키라 했고, 해방 뒤 독재정권이 나라님 앞에 예의를 지키라 했듯(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대한뉴스나 땡전뉴스는 이러한 소식과 정보를 내보이면서 ‘이런 이야기도 있으니 한번 들어 보라’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참이니까, 다른 데에 귀기울이지 말고 고스란히 믿고 따르기만 하라’는 억누름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우리 넋과 얼과 말과 몸짓을 옭죄는 이 나라는, 대한뉴스라고 하는 허수아비 시늉을 선보이면서 우리네 슬프고 안타까운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준다고 할까요. 자유롭고 너른 생각과 뜻을 나누려는 ‘개혁’을 꿈꾸며 책을 찍고 인쇄술을 발돋움시킨 한국이 아니었던 지난날 발자국처럼, 오늘날에 와서도 자유롭고 너른 생각과 뜻을 북돋우고 이끌어 내려고는 꿈꾸지 못하는 어줍잖고 어리숙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할까요.


.. 틴들의 《신약성서》는 최대한 가격을 낮게 책정했기 때문에 높은 수익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필사본 성서의 가격이 30파운드 이상이었을 때-당시 노동자의 연가 수입은 겨우 2파운드였다-, 틴들의 《신약성서》는 소매 가격이 4실링(20펜스)이었고, 때로는 더 낮았다 … 당시 가톨릭에서 신교로 향하는 고통스럽고 피비린내나는 이행을 겪고 있었던 잉글랜드에서 틴들은 결과적으로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그가 영어의 봇물을 터뜨린 덕분에 수십 년 뒤에는 셰익스피어와 흠정영역성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틴들은 일상어를 사용해서 성서를 번역했다는 점에서 잉글랜드의 루터였다. 그는 “소박한 모국어로 된 성서를 눈앞에 놓아 주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회의하는 어느 성직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나는 쟁기를 가는 소년을 가르쳐, 당신보다 성서에 관해 더 많이 알도록 만든 적도 있었소!” ..  (376, 378쪽)


 대한뉴스 이야기를 한 마디 보태 본다면, ㅈ일보 어느 기자는 “아직도 우리는 대한뉴스를 보면서 웃어줄 여유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대한뉴스가 자신의 사상을 지배하게 될까봐 그래서 두려운 것은 아닐까? 그렇게도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건가?”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대한뉴스를 옳게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뉴스란, ‘극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즐겁게 볼 권리를 빼앗’습니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느니 마느니에 앞서 우리들한테 ‘보여주어도 되느냐?’ 하고 묻지 않았으며, 보여준다고 할 때에도 어떤 이야기를 누가 엮고 짜서 보여주려고 하는가를 묻지 않았고, 열린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똑똑히 듣거나 살피지 않았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버젓이 이루어지는 ‘허울좋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하고 매한가지인 대한뉴스이고 국가보안법입니다. 자율로 이루어지지 않는 자율학습처럼, 대한민국 이야기라 할 수 없는 대한뉴스입니다. 보충을 하려고 하는 보충수업이 아니듯, 국가를 보안한다는 뜻이 아닌 국가보안법입니다. 예나 이제나 수없이 많은 일들이 ‘나라사랑(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여집니다. 날마다 숱한 일들이 ‘공익’이라는 이름을 걸고 펼쳐집니다.

 《구텐베르크 혁명》을 쓴 존 맨 님은 책을 마무리할 즈음, “금지된다는 것은 일종의 추천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흠을 잡기는 쉽다. 검열관은 원래 세계 어디서나 욕설과 조롱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3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나라 정부나 군대에서 아직까지 ‘불온도서-금지도서 목록’을 만들어 내놓는 일과 마찬가지로, 1400년대까지 서양 교회에서는 ‘불온하니 금지할 책이 이렇게 있다’고 알리곤 했고, 그 뒤로도 끝없이 알리고 있습니다.


.. 군주와 의회는 더 이상 글을 아는 사람에게 자신들의 통치 행위를 숨길 수 없었고, 자신들이나 후손들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  (344쪽)


 굳이 ㅈ일보 기자 말이 아니더라도 ‘대한뉴스를 수없이 틀어대어도 정부가 잘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잘하는 줄 깨닫고, 잘못하고 있으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웃으면서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ㅈㅈㄷ이라고 하는 신문들을 얼마든지 ‘웃으면서 너그러이 펼쳐들’ 수 있고, 경품권을 기쁘게 받아들면서 집에서 신문 한 부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이런 일은 ‘옳은’ 일인가요? 이런 일은 ‘바른’ 삶인가요? 대한뉴스를 보면서 웃어 주자고 하는 ㅈ일보 기자님은 ‘ㅈㅈㄷ이라는 신문을 꾸짖고 나무라는 사람들 목소리’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이거나 하하 웃으면서 보아넘기고 있으신지요?

 ㅈㅈㄷ이든 다른 신문이든, 또 인터넷이든 방송이든, 옳은 일은 옳게 해야 하고, 옳지 못한 일은 옳지 못한 일이었음을 느끼도록 꾸짖음을 듣고는 차근차근 고쳐 나가야 합니다. 《구텐베르크 혁명》이라는 책에도 이야기가 나오지만,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통치 행위를 숨길 수 없”으니까요. 나라에서는 사람들을 더 바보로 가는 길로 내몰고, 너른 터를 빼앗으며, 비정규직으로 몰아세우지만, 이렇게 내몰리고 빼앗기고 몰아세워진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바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박물관 유적이 되어 유리진열대 안에 놓이거나, 역사책에 적혀 시험문제 풀이로 외워야 하는 ‘직지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을 옳고 바른 쪽으로 고쳐 나가도록 돕는 ‘책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고 사랑을 쏟고 싶고 믿음을 함께하고 싶어할 테니까요. (4342.6.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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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 봉기하다 : 영화 감독 김기영 - 오마주아 총서 003
이효인 지음 / 하늘아래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나라안에 ‘드문’ 영화감독과 영화책이긴 한데
 [잠깐 읽기 41] 이효인,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


- 책이름 :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
- 글 : 이효인
- 펴낸곳 : 하늘아래 (2002.10.1.)
- 책값 : 1만 원


 (1) 영화와 삶


 아기와 함께 살기 앞서도 극장마실은 거의 못했다고 떠오릅니다. 딱히 극장까지 찾아가서 볼 만한 영화가 있었는가 싶기도 했고, 먹고살기에 바빠서가 아니라 동네 문화 지키는 일에 힘을 쏟느라 극장마실은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독립다큐영화인 〈어느 날 그 길에서〉(황윤 감독)를 마지막으로 극장마실은 해 보지 못했지 싶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저 사람들은 극장 한 번 안 가느냐?’ 할 텐데, 우리 사는 동네에 극장은 꼭 하나만 살아남은 가운데 이곳에 걸리는 영화는 온통 ‘흥행’과 ‘값싼 시간 죽이기’ 느낌이 짙기 때문에 굳이 극장마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뭉클뭉클 움직이거나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를 꾸준히 내거는 극장이 가까이 있었다면 열 일을 젖히지는 못했을 터라도 한두 일은 젖히고 극장마실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김기영)는 스스로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행복한 감독이었고, 영화 시장에서도 결코 운 나쁜 감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전무후무한 독창성으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길을 한국 영화사에 열어 놓았다 … 그는 ‘한국 영화다운’ 감독이었지만,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많이’ 한국 영화를 벗어던진 감독이기도 했다. 그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 한국 영화계는, 얼치기 장사치들이 도박하는 심정으로, 또 여배우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재미로 돈 보따리를 싸들고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다. 영화 기자재나 시설에 투자하는 제작자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일확척금을 노리는 투기꾼들로, “예술 같은 소리하네” 하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대중의 속류 취미에 영합하는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  (12∼13, 35쪽)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기 때문이라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아기를 함께 보고 있기에 함께 극장마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씩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올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하자면 몹시 힘이 들기는 들지만, 극장마실 못하란 법이 없습니다. 극장에 아기를 데리고 찾아가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만한 시설을 바라기란 꿈 같은 노릇이라 할는지 모르는데, 이 나라에 애 키우는 어버이가 한둘이 아님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바랄 수 있어야 하고, 또 바라야 하며, 또한 시설을 갖추어야 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덧붙여, 바퀴걸상을 타고도 극장을 드나들 수 있게끔 시설을 갖추어야 할 테고, 나무다리 짚고도 어려움 없이 극장을 찾아갈 수 있게끔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철역에만 ‘장애인 화장실 자리’를 마련할 일이 아니라, 극장에도 마련해야 하고 큰 건물뿐 아니라 작은 건물에도 바퀴걸상을 끌고 들어갈 만한 뒷간을 마련해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영화란 ‘있는’ 사람만 즐기는 문화나 예술이 아닐 테니까요. 책이란 ‘있는’ 사람만 즐기는 문화나 예술이 아닌 한편, ‘배운’ 사람만 누리거나 맛보는 문화나 예술이 아닙니다. 누구나 누리거나 맛볼 문화나 예술이며, 언제 어디서라도 함께할 만한 문화나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좀더 나아간다면, 팔다리가 없는 사람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터전이 닦여 있어야 할 테며, 영화찍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드나들 대학교 문턱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스크린쿼터제를 말하기 앞서, 우리가 영화를 영화답게 즐기면서 받아들일 터전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에도 극장 하나 들어서기를 바라기 앞서, 영화를 우리 삶으로 느낄 만한 터전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 그런 와중에 김기영이 〈이어도〉를 생각해 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주류였던 속류 리얼리즘 영화의 외풍 속에서 한국의 무속적 주술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을 참담할 정도로 끝까지 밀고 간 것이다. 또 곁들인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는 그때 이미 생태계 문제까지 거론했다. 김기영이 ‘김기영’일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역사적 문맥을 벗어난) 완벽성보다는 (당대의 미학적 문맥을 향하여) 먼저 미끄러지면서 속류 리얼리즘이라는 억압적 주류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  (81쪽)


 영화만이 아닙니다. 또, 책만이 아닙니다. 춤과 노래도 매한가지입니다. 연극과 공연도 한동아리입니다. 모든 문화와 온갖 예술은 우리 삶에 밑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자락을 함께 이루는 이웃들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네에서 즐길 수 있는 영화이면서 너른 공연장에서 즐길 수 있는 영화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책 하나이면서, 먼 뒷날 우리 뒷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책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 겨레가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춤과 노래이면서, 이웃 겨레가 손잡고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춤과 노래여야 합니다. 돈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이나 공연이 아니라, 돈이 없이도 넉넉히 즐기고 돈이 있으면 있는 만큼 푸지게 잔치판을 벌이는 연극과 공연이어야 합니다.

 계급이 아니니까요. 신분이 아니니까요. 내려다보기가 아니니까요. 올려다보기 또한 아니니까요.

 하늘나라에서 베풀어 주는 선물이 아닌, 바로 이 땅에서 우리 손으로 일구어 영글도록 하는 문화로서 영화입니다. 바깥나라에서 보내어 주는 선물이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땀흘리며 이루고 맺도록 하는 예술로서 영화입니다.


.. 산만하게, 마치 모래를 흩뿌리는 것처럼 김기영은 ‘…다’로 끝나는 각양각색의 삼류 잠언들을 영화 곳곳에 심어 놓는다. 그에게는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으며, 오로지 관객들을 ‘놀래킬 영화’만이 중요했는지 모른다 … 단순히 ‘비참한 현실을 봉합’만 한 것이 아니라, ‘하녀들’을 실컷 욕보이다가 우리들의 세상을 ‘욕보이는 것’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기영의 ‘하녀들’은 세상에 ‘능욕 당하면서도’ 세상을, 아니 우리들을 ‘능욕한’ 것이었다 ..  (95, 126쪽)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 터를 우리 손으로 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만남터를 우리 손으로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쉼터를 우리 손으로 짓뭉개고 있습니다. 우리 살림터를 우리 땀방울로 허물고 있어요.

 여럿이 어울릴 너른 터를 버리고 자가용 세워 놓는 터로 바꾸어 놓습니다. 옹기종기 어울리면서 살아갈 마을을 없애고 높다란 아파트로 부동산 노릇을 하도록 고쳐 놓습니다. 조그마한 골목길까지 자가용으로 밀고들어오며, 학교 운동장을 줄이고 교사들 자가용 세울 자리를 마련해 놓습니다. 운동기구나 놀이시설이 변변하게 없었어도 너른 운동장에서 갖가지 놀이를 즐기던 아이들은 하나둘 사라졌는데, 노는 아이들만 사라지지 않고 ‘서로 어울려 노는 어른들’ 또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으레 ‘골목길에 아이가 사라지고 시골에 아이가 사라진다’고만 말하지만, 아이들이 사라지기 앞서 ‘어른이 먼저 사라’졌습니다.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이름값과 더 많은 권력을 바라보면서 시멘트와 쇠붙이로 이루어진 사무실에 틀어박혀 버렸고, 이웃이 사촌이 되고 옆집 사람과 서로 동무를 맺던 흐름을 깨 버렸습니다. 깨어진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이 끼어들 자리란 없었고, 아이들은 놀이터도 운동장도 골목길도 고샅길도 빼앗긴 가운데 방구석으로 움츠러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내어주는 옷이며 밥이며 집이며 교육제도며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할지라도,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나누어 주는 사랑이며 믿음이며 따스함이며 넉넉함이며 송두리째 스러져 버렸어요.

 이리하여, 오늘날은 책은 책대로 넘치지만, 껍데기 책이 훨씬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날은 지난날처럼 온갖 가위질에 쩔쩔매는 영화가 거의 없다지만, 알맹이 영화는 외려 나오기 힘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삶이 망가진 자리에는 책 또한 망가지니까요. 삶이 망가진 자리에서 영화 또한 망가지고 마니까요.


 (2)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라는 이야기책


 영화이야기를 즐겨쓰는 이효인 님이 2002년에 펴낸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를 읽습니다. 벌써 일곱 해나 흘렀고, 이 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김기영 님은 저승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화뿐 아니라 모든 문화와 예술이 뒤처져 있는데다가 제대로 자료를 간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노릇이지만 김기영이라고 하는 영화감독 삶자락을 돌아보면서 갈무리하기로는 이효인 님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고, 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낱권책 하나로 영화감독 한 사람을 다루는 일로는.


.. 그는 이런 자신의 가족들의 관계와 이력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인텔리 집안 출신이며 예술적 재능을 지닌 혈족의 일원이라는 점이 김기영 자신에게는 평생 동안 남들과 구분 짓는 선민 의식의 뿌리였다. 그의 영화가 거의 언제나 대중들의 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가끔 ‘너희들은 몰랐지?’라는 발언을 하는 까닭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모른다 … 김수용과 유현목 (감독)은 대체로 예술 엘리트주의의 입장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서민의 고통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엘리트들의 연민으로 보이거나 그 묘사 방식에서도 엘리트적이다. 신상옥은 대중의 고통 따위는 영화적 소재에 불과할 뿐 진정한 문제제기나 해결책의 모색과는 전혀 거리가 먼, 보다 더 고압적인 엘리트의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이만희는 비교적 김기영과 비슷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만희는 통속적이기는 하되 통속  그 자체에 묻혀 버린 영화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반면 김기영 역시 통속적인 흥행성을 대단히 추구했지만, 그만의 독특한 감성은 대단히 매혹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영화의 매혹에 대해 아마도 성 묘사가 노골적이며 많았기 때문이며, 예술 작품이라고 하면 손님이 안 드니까 장르로 관객과 씨름한 데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  (23, 44쪽)


 저는 김기영 님 영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김ㆍ기ㆍ영’이라는 이름 석 자 또한 낯섭니다. 영화를 잘 몰라서도 그러할 테지만,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던 고등학생 때까지(1993년까지) 텔레비전에서 ‘김기영 영화’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잠깐 스쳐 보았을는지 모릅니다. 보고도 모를 수 있고, 보고도 못 느꼈을 수 있습니다. 널리 이름난 몇몇 영화감독이 아니고서는 여느 사람한테까지 두루 알려지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다 말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양성’과 ‘개성’이란 좀처럼 스며들기 어렵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양성이든 개성이든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삶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권력이, 제도권교육이, 월급쟁이 회사원 얼거리가,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 얼거리를 넘어 바로 우리들 삶부터.


.. 특히 박정희 군사 정권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강압적 통치는 한국 영화를 말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선 박 정권은 비현실적인 영화사 등록제를 시행하여 일정한 시설과 장비 그리고 인력을 갖추지 않은 영화사는 영화 제작조차 못하게 했다 … 이런 행정적인 규제보다 더 불리한 조건은 박 정권의 정치적 검열이었다. 가혹한 검열에 의해 많은 영화들이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거나 미미한 신체 노출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 빌미가 되어 ‘반공’과 ‘도덕’이라는 잣대로 가위질을 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의 어두운 면이란, 가난한 동네가 배경이 된다던가, 길거리에 연탄재가 나와 있다거나, 방안에 요강이 있다거나 하는 따위의, 실제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 당시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부 기관의 검열을 거친 뒤 허가가 나야만 제작에 착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뒤에도 제작자는 제작자대로 검열을 했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촬영장, 편집실, 시사실 등 모든 과정은 검열의 과정이었다 … 결과적으로 한국의 명망 있는 감독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밖에 없었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이순신 장군 영화’같이 국책에 부응하는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 그 하나였고, 무색무취하되 말초적인 흥행 감각만을 좇아 만드는 방법이 두 번째 방법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외화 수입 쿼터를 따낼 수 있는 ‘우수 영화’ 선정을 노리는 방법이 세 번째 방법이었다 … 그(김기영)는 영화 인생을 유지하고 빚을 갚기 위해 사십대와 오십대를 보냈고, 억압적인 정치 환경과 이율배반적인 검열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틀린 표현을 하느라 오십대와 육십대를 흘려보냈다 ..  (47∼49, 67쪽)


 영화감독 김기영 님은 ‘빚 갚기’와 ‘뒤틀린 골짜기에서 허덕이기’를 하면서, 당신 영화문화와 영화예술을 빛내도록 할 나날을 허투루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 와 돌이켜볼 때에 ‘김기영한테는 김기영 빛깔이 있다’는 영화를 빚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영화며 책이며 연극이며 춤이며 온갖 문화와 예술을 짓밟는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김기영 영화는 어떠한 쪽으로 흘렀을까요. 그때에는 한결 아름답고 훌륭하며 거룩한 길을 걸었을까요. 그때에도 오늘 우리한테 남겨진 영화와 마찬가지인 길을 걸었을까요. 그때에는 영화에는 아예 눈길 한 번 안 보내고 의사라는 길을 걸었을까요. 그때에는 더더욱 상업주의 영화로 깊이 파고들었을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화를 찍는 분들은 어떤 매무새로 영화를 만나고 있는가요. 오늘날 영화 감독들께서도 ‘빚 갚기’에 허덕이고 있으신가요. ‘뒤틀린 골짜기에서 허덕이기’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으신가요. 애써 만들었어도 걸어 놓을 극장을 얻지 못해 고달프신가요. 돈이 되는 영화를 빚어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으신가요. 돈에 앞서 사람마음을 건드릴 영화에 온 넋과 얼을 바치고 있으신가요.


.. 그는 모든 허례나 허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왜 영화 속에 비정상적인 체위가 나오느냐?”고 묻자 그는 “난 변태니까”라는 말로 그냥 받아넘길 정도였다. 그에게는 실질, 실속, 실익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는 상업적 코드가 대단히 많이 들어 있다. 그가 “어린이 같은 사람”이라는 견해를 수용한다면, 김기영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술 영화를 추구하는 감독으로 인식되면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그는 예술가다 ..  (152쪽)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를 덮습니다. 나라안에 드문 영화감독 김기영이었던 만큼, 이 책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 또한 나라안에 드문 ‘영화를 말하는 책’입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영화 이야기를 다루어 주었고, 여느 사람은 건드리기 힘든 영화 자료를 곳곳에 잘 자리잡아 놓으면서 ‘글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즐겁게’ 넘겨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펼치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뒤로 무언가 자꾸 까끌까끌하게 입안에 남습니다. 애써 책 하나로 ‘나라안에 드물었던’ 영화감독 한 사람 삶과 생각을 다루려 했는데, 이렇게밖에는 못하나 싶은 까끌까끌함입니다. 아직은 ‘책 하나로 영화감독 김기영을 속속들이 밝혀 말하기 어려웁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좀더 차분하게 발자취를 밟아 볼 수 없었나 싶어 아쉽습니다. ‘남다른 영화감독한테 바치는 꽃다발’로 엮은 책인지, ‘남달랐지만 아쉬운 영화감독을 바라보며 오늘날 영화감독은 거듭나기를 바라는 채찍질’로 엮은 책인지, ‘나는 김기영을 좀 아는데, 김기영은 이렇더라구’ 하는 수다떨기를 하려고 엮은 책인지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그리 길지 않은 책임에도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된 대목이 있고,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집어넣은 대목이 자주 보입니다. 이를테면 “그 특정 장르에 어울리는 도상圖像icon이 필요할 때마다”처럼 글을 쓴 대목입니다. ‘도상圖像icon’이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모쪼록, 그동안 일곱 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그사이 김기영 감독과 얽힌 새로운 자료가 더 나왔을는지 모르고, 여러 증언과 이야기와 필름이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글쓴이 스스로도 좀더 글매무새를 다독이는 세월이 되었을는지 모르고요.

 부디 이 책 《김기영, 하녀들 봉기하다》가 그저 ‘나라안에 드물었던 영화감독’을 다루는 ‘나라안에 드문 책’쯤으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영화에 온삶을 바친 영화감독 발자취와 삶자락이 좀더 깊고 너르게 드러나는 이야기꽃을 피워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지식’을 얻자고 들여다보지 않는 만큼, 영화감독과 영화작품을 다루는 자리에서도 ‘지식’이 아닌 ‘감동’이 있는, 그러니까 영화감독 ‘삶’이 물씬 묻어내는 이야기꽃을 펼쳐내 주면 고맙겠습니다. (4342.6.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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