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당신한테
 [사진은 삶이다 1] 사진을 너무 ‘가볍게’ 찍지 않는가?



 서른 해 넘도록 사진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ㅂ교수님을 만나뵌 자리에서 사진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 한켠으로 여러모로 씁쓸했습니다. ㅂ교수님은 당신이 몸담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힘껏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 학교 아이들은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살 속 깊숙이 파고들도록 헤아리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배우는’ 아이들이니, 한 해 두 해 익어가는 동안, 열 해 스무 해 무르익는 동안 차츰차츰 거듭나거나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다른 문화와 예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만, 사진은 햇수를 먹지 않고서는 펼칠 수 없습니다. 세월이라는 때를 먹어야만 빛이 나게 되는 사진입니다. 한두 장 반짝하고 빛나는 사진으로 뽐내기도 하고, 신문잡지 1쪽을 채울 사진을 만드느라 발이 닳도록 뛰기도 하고 만들기도 해야 할 터이나, 빈자리 메우기로는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빈자리 메우기도 이 나름대로 남다른 이야기가 되기는 할 터이나, 빈자리를 메우는 이야기로 스무 해나 서른 해를 꾸준히 엮어 나가려는 사진쟁이가 이 나라에는 거의 없음을 돌아본다면, 사진기를 앞세운 어르신이나 새내기는 많으나, 정작 ‘사진을 한다’고 할 만한 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어요.

 고향이지만 고향으로 여기지 않고 멀리멀리 떨어진 채 지내던 인천으로 돌아온 지 한 해하고 아홉 달이 지났습니다. 곧 이태가 됩니다. 이 이태라는 시간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동안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다니던 때까지 머물던 고향을 몸이며 마음으로 되찾는 때였습니다. 인천사람 스스로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고 서울바라기가 될 뿐더러, 인천 바깥에서도 인천이 고유하고 홀로서지 못하도록 막는 흐름이 보기 싫고 견디기 싫어서 인천을 떠났지만, 이런 못난쟁이 인천으로 돌아와 거의 이태를 지내는 사이, ‘못난쟁이는 못난쟁이이기 때문에 좋다’고 새삼 느낍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좋은 모습이 있을 텐데, 못난 사람도 못난 사람대로 좋은 모습이 있습니다. 부자는 돈이 많아서 좋을 테지요. 그러나 가난뱅이는 가난하기에 좋습니다. 돈이 많아서 즐거울 부자들은 바로 돈 때문에 걱정이 큽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인 가난뱅이는 바로 돈 때문에 홀가분하면서 즐겁습니다. 





 돌이켜보면, 고향을 오래도록 멀리하면서 떠돌이처럼 지내 온 세월이 좋은 스승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처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때는 또 그대로 좋았던 대목이 있었을 텐데, 고향에 머물지 않고 떠나 보냈던 삶은 또 그런 삶대로 제 마음과 몸을 살찌우거나 키워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가지 사진감만을 붙잡고 죽는 날까지 신나게 사진찍기를 하는’ 저 같은 사진쟁이로서는, 떠돌고 맴돌고 헤매던 나날이 고향땅에서 제대로 사진눈을 트게 해 주는 밑거름이 된다고 느낍니다.

 떠돌이로 지내다 보니, ‘떠돌이가 모이는 도시’인 인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고, 있는 그대로 동네사람과 만나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게 됩니다. 낮에는 썰렁하다고 할 만큼 고요하며, 저녁에는 일찌감치 길거리 불이 꺼지며 조용해지는 ‘서울하고 이렇게 가까우면서 참 도시 냄새가 안 나기도 하는’ 인천이란 어떤 데인가를 뼈속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골목길을 사진감으로 삼아서 멋진 작품을 일구어 낸 어르신(김기찬 님)이 계셨지만, 그분 앞으로나 뒤로나 ‘골목길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없는 까닭, 그러면서 ‘골목길 사진 어르신’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사진이 무엇인가 하는 앎, 요즈음 사진쟁이들이 골목 사진을 못 찍는 까닭, ‘골목길 출사’ 나가는 젊은 사진쟁이가 많지만 골목을 골목답게 담아내는 눈길이 보이지 않는 까닭을 하루하루 깨닫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골목 사진을 넘어, ‘한국땅에서 사진 하는 사람 매무새’에서 무엇이 잘못되거나 어긋나 있는가를 알아 갑니다. 여러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삶이 없습니다. 삶이 없으니 사진이 없습니다. 삶이 없으니 글이 없고 삶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으며, 삶이 없으니 사람을 만나도 냄새며 이야기며 자취며 없습니다. 오로지 눈요기가 판칩니다.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며, 눈속임이 넘칩니다.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사진밭에서 거의 따돌림만 받고 있는데, 이분들한테 아쉬움이 있기는 있어도, 이분들한테 배울 대목은 꽤 많습니다. 다른 대목도 참 많이 배워야겠으나, 상업사진 하는 분들은 ‘상업사진판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예인을 찍건 배우를 찍건, 이런 연예인이나 배우하고 형 동생 언니 오빠 누나처럼 지냅니다. 살가운 사이입니다. 살갑지 않고서 이런 사진을 찍어내지 못합니다. 말을 트고 지내지 않더라도 늘 지켜보고 가까이하고 들여다봅니다. 한 울타리에 있어요.

 그러나 다큐멘터리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몸담은 자리에서조차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한두 해 그 동네에서 머문다고 다큐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뜨내기이고 구경꾼이며 길손일 뿐입니다. 대여섯 해 머문다면 시늉은 낼 수 있을 테지요. 그렇지만 열 해나 스무 해쯤, 때로는 서른 해나 마흔 해쯤 ‘함께살기’를 하지 않고서야 다큐사진은 안 나옵니다. 함께살지 않고 찍은 다큐사진은 모두 거짓입니다. 눈가림이나 눈속임입니다. 누가 말해 주느냐? 사진이 말해 줍니다. 사진으로 찍힌 작품이 말해 줍니다. 





 늘 살아야 그곳이건 그이건 그 모습이건 찍을 수 있습니다. 야구장에서 살아야 야구 선수 사진을 찍고, 야구 이야기를 기사로 씁니다. 국회에서 살아야 정치꾼 사진을 찍고 정치 이야기를 기사로 씁니다. 축구장에서 사는 한편, 집에 있어도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축구 이야기를 기사로 쓸 수 있습니다. 축구와 혼인하지 않고서 축구 이야기를 우리 눈과 귀에 찰싹 달라붙도록 감칠맛나는 이야기를 엮어내겠습니까. 우리 눈에 짠한 눈물이 흐를 만한 축구 사진을 찍어내겠습니까. 전민조 님은 《이 한 장의 사진》이라는 사진책을 신문사 사진기자일 적에 펴낸 적이 있는데, ‘이 한 장의 사진’을 찍기까지는, ‘이 한 장 사진과 얽힌 곳에서 살아낸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 세월이 사진을 보여줍니다. 세월이 녹아나면서 사진으로 이야기가 엮입니다.

 다만, 사진은 즐겨야 찍을 수 있습니다. 즐기지 않는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괴로운 굴레입니다. 놀이가 되지 못하는 일은 일이 아니고, 일거리처럼 꾸준히 붙잡을 수 있지 않는 놀이는 놀이가 아닙니다. 일이든 놀이이든 즐겨야 하고, 즐기는 가운데 일은 일대로 놀이는 놀이대로 빛이 나고 우리 삶으로 녹아듭니다.

 즐길 수 있으니 늘 곁에 두고, 늘 곁에 두니 삶입니다. 저절로예요. 억지가 하나도 깃들지 않습니다. 스스럼이 없습니다. 샘솟아 납니다. 철철 솟아나며 흘러넘치는데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차피 철철 샘솟아 흘러넘쳐도 다시 땅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솟아나는 밑물이 될 뿐 아니라, 다시 흙을 거쳐 땅밑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더 싱그럽고 맑고 맛난 물로 거듭나거든요. 그래서 사진 한 장이란, 저절로 찍히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저절로 찍히자면 사진이 제 삶이어야 합니다. 늘 붙잡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리 보아도 사진이고 저리 보아도 사진이어야 합니다. 훌륭한 소설 하나 엮어낸 분이 이리 보아도 소설이고 저리 보아도 소설이듯, 사진쟁이는 이리 보건 저리 보건 사진이 되어야 합니다. 값비싼 장비를 어깨에 메고 있다고 사진쟁이입니까? 훌륭한 장비를 비싼 사진가방에 챙겨 놓고 으스댄다고 사진쟁이입디까? 지금으로서는 널리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로 우쭐거린다고 이이가 사진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 압니까? 지금은 돈도 벌고 이름도 얻고 사진판에서 힘도 낼 테지요. 그러나 이이 작품은 기껏 한 장조차도 사진 역사에 새겨지지 못합니다. 부스러기입지요. 끄나풀입지요. 알맹이 빼먹은 과자봉지와 같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두 손은 가볍게 봉투는 두툼하게’라고 말하는데, 그예 우스개이긴 하지만, 우스개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겉보기로는 으리으리 보일지 몰라도 속알맹이가 형편없다면 하나도 안 반갑거든요. 겉보기로는 수수하거나 초라하기까지 하더라도 속알맹이가 야무지거나 다부지다면 더없이 반가워요. 세상 어느 일이든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사진찍기에서도 그럴싸하게 보이는 작품을 애써 만들어 내려고 하면 지금 바로 보기에는 참 멋져 보일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서 자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럴싸한 사진을 못 찍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남들 다 찍을 수 있는 그럴싸한 사진을 자기도 한두 장 찍었다고, 내 이름값이 올라가기라도 할까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님처럼 ‘기막힌 모습 하나’를 찍어내는 사진을 수없이 모은들, 이런 사진이 사진으로 값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사진으로 살지 않으면 모두 부질없습니다. 헛것 헛일 헛품 헛사진입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밥하기를 삶으로 받아들이고 빨래하기를 삶으로 받아들이며 아이키우기를 삶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밥과 빨래와 아이가 새삼스럽습니다. 훌륭합니다. 우리한테 맛난 된장찌개 끓여 주는 어머님들 손맛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바로 삶을 모두 바친 밥하기에 있습니다. 그 비싼 세탁기로 보송보송 말린 빨래라 해도 어머님이 손으로 빨아서 말리고 개어 놓은 빨래만큼 느낌이 보드랍지 못합니다. 바로 삶을 모두 바친 빨래하기이기 때문입니다. 똑똑함을 넘어서 슬기롭고 해맑은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까닭은, 아이한테 온통 바친 아름다운 어버이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조기교육 때문에 죄다 갖다 바치는 삶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즐거울 어버이 삶을 깨달아 서로서로 돕고 나누는 삶으로 꾸리는 어버이이기에, 아이들이 슬기롭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찍는 사진 한 장이 아름다우려면, 또 우리가 나누려는 사진이 빛나려면, 그리고 우리가 보여주는 사진이 어설픈 자랑거리나 섣부른 돈지랄이 되지 않도록 하자면, 사진을 삶으로 곰삭여야 합니다. 사진을 삶으로 녹여내야 합니다. 곰삭이지 않는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녹여내지 않은 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흔한 말로 용두질입니다. 거친 말로 술주정입니다. 짜증 섞인 말로 미친 짓입니다. 한 마디로 웃기는 장난입니다.

 사진 한 장 찍어내는 손가락은 아주 가볍게 움직여 살짝살짝 눌러야 합니다. 그러나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만 가벼워야지, 손가락에 힘 살짝 주기까지는 무던히도 땀 빼고 용 쓰고 부대끼는 삶이 밑바닥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땀흘리지 않고 무슨 삶이 있겠으며, 내맡기거나 내던지지 않고 무슨 삶을 이루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귀고 껴안고 어깨동무할 때에도 제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야 뜻을 이루는데, 자기 스스로 흐뭇하고 이웃 모두한테도 흐뭇하도록 할 만한 사진을 이루어내고자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몸과 마음을 바치듯 사진한테도 바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치지 않고서 기계 장난만 하려고 한다면, 바치지 않고서 뻔한 틀거리로 시늉만 내려고 한다면, 모두모두 쓰레기로 그칩니다. 아니, 사진 쓰레기만 수두룩하게 쌓아 놓고서, 참되게 사진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맙니다. (4342.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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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창의.다양.여유를 배운다 양철북 청소년 교양 8
이하영 지음 / 양철북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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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86 ― “꿈만 꿔도 괜찮은” 스웨덴 아이
 : 이하영,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책이름 :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
- 글ㆍ사진 : 이하영
- 펴낸곳 : 양철북 (2008.10.27.)
- 책값 : 9800원



 (1) 한국이란 나라에서 학교라는 곳은


 카지노이든 도박장이든 가 본 일이 없습니다만,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런 곳에는 시계와 거울과 창문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얼 얼마 동안 하고 있는가’를 잊도록 해야 도박에 흠뻑 빠져들면서 자기 모든 것(돈이든 집이든 집식구이든)을 내버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나라 학교와 군대와 감옥을 헤아려 보면, 시계도 있고 거울도 있고 창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학교나 군대나 감옥, 여기에 회사와 관공서까지 더해 놓고 보면, 그 어느 곳에서도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얼 얼마 동안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끔 홀가분하게 풀어놓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창문은 있어도 바깥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거울이 있어도 제 얼굴이든 몸매이든 제 마음대로 가꾸거나 꾸밀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머리 길이조차 제 마음대로 간수하지 못하지요. 시계가 있으나 시간에 따라서 제 하고픈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없습니다. 있기는 있어도 시늉일 뿐이고, 외려 없을 때보다 답답하거나 꽉 막힌 데가 우리네 사회 얼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 비록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일등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돕지 않고 나 혼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면 때로는 교활한 방법을 써서 다른 사람이 열심히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법도 터득해야 했다 … 내가 일등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을 포기하고 나니 일은 훨씬 쉽게 풀렸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리고, 스웨덴어 때문에 여의치 않다면 다른 친구를 불러와 통역을 부탁했다 … ‘우리 모두 똑같이 잘하자’는 스웨덴 학교의 교육 방침은 한국 학생이나 부모님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일 것이다 ..  (52∼55쪽)


 텔레비전이 있는 옆지기 부모님 사는 일산집에 와 보면, 이곳 집식구들이 보는 텔레비전을 함께 보곤 합니다. 때때로 저 혼자서 텔레비전을 볼 때도 있습니다. 무슨무슨 케이블이다 해서 백 가지가 조금 못 되는 갖가지 풀그림이 스물네 시간 쉴새없이 흐릅니다. 텔레비전만 들여다보아도 하루 내내 지루하지는 않겠구나 싶으면서도, 1번부터 99번까지 한 칸씩 죽 움직여서 들여다보면, 어느 풀그림이든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연속극도 영화도 우스개도 노래도 다큐도 만화도 게임도 …… 비슷한 눈길과 어슷비슷한 줄거리와 겹치기 배우와 끝없이 다시 보여주는 풀그림입니다. 가짓수는 많지만 많은 가짓수만큼 다르다는 느낌이 없고, 수많은 풀그림을 볼 사람들도 모두 다른 사람들일 텐데 어떻게 모두들 똑같은 눈길로 똑같은 이야기를 즐기며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데에 그예 빠져들 수 있을까 놀랍다는 생각뿐입니다.

 어릴 적부터 길들기 때문일까요. 어릴 적부터 모두들 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한자를 익히고 영어동요를 부르고 영어책을 펼치면서 크다가, 초등학교에 들고부터는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수업에 똑같은 글짓기에 똑같은 시험에 똑같은 책걸상에 똑같은 음악 체육 미술에 똑같은 교과과정으로 똑같은 지식을 집어넣고 있으니, 생각도 마음도 넋도 얼도 매무새도 똑같이 맞춰져 버리고 말까요.

 제 어릴 적 국민학교에 다니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1987년 10월 어느 날, 한가위와 주말이 겹치며 아주 오래도록 쉬는 때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때 우리 담임 되는 분께서는 ‘산수 깜지 50장’이라는 엄청난 숙제를 내어주었습니다. 뭐, 산수 숙제만 이만큼이었고, 다른 과목은 그 과목대로 다른 숙제가 한가득이었습니다. 그때나 이제나 다르지 않지만, 명절이라고 우리가 마음껏 놀 수 있지도 않은데(어느 집에서나 부모님을 거들며 명절 준비를 해야 하니까), 앞뒤로 빽빽히 ‘산수 깜지 50장’을 32절지도 16절지도 아닌 8절지에다가 해 오라고 하는 일은 한 마디로 폭력이었습니다. 이 폭력은 산수 깜지를 해 온 아홉 아이를 뺀 쉰한 아이한테는 ‘끝까지 산수 깜지를 다 마칠 때’까지 ‘안 해 온 장수만큼 매질을 받는’ 또다른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담임 되는 분께서는 지치지도 않는지, 산수 깜지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 매질에다가, 일기를 안 쓴 아이들 매질에다가, 다른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 매질에다가, 아침에 학교에 늦은 아이들 매질에다가, 학교모자와 이름표를 안 차리고 온 아이들 매질에다가, 반장과 부반장이 적은 ‘떠든 아이 쪽지’에 적힌 아이들 매질에다가, 다달이 치르는 학력고사 점수 떨어진 아이들 ‘떨어진 점수만큼 휘두르는’ 매질에다가 …… 매질 매질 매질을 이어나갔습니다. 매질은 팔뚝이나 종아리에 때리는 회초리가 있지만, 엉덩이와 허벅지에 때리는 야구방망이가 있었고, 옆 반 교사한테 각목을 빌려 오기도 했고, 어느 반 교사한테 당구채를 빌려 오기도 했습니다. 교무실에 가 보면 출석부 있는 자리 옆으로 갖가지 몽둥이가 나란히 줄지워 서 있곤 했습니다.

 몽둥이 크기와 가짓수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도 달라지지 않았고, 대학교라는 곳에 잠깐 들어가서 보았을 때에는 몽둥이는 보이지 않았으나 선배 되는 분들께서는 후배 되는 우리들한테 얼차려나 주먹다짐으로 새로운 매질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 한국 학교에서는 예체능 수업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미술실이나 음악실이 따로 없었고, 피아노도 각 학년에 한 대밖에 없었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고 리코더도 곧잘 연주했지만 하모니카, 멜로디언, 리듬악기처럼 몇 번 쓰고 처박아둘 것들을 계속 사야 했다. 크레파스와 물감, 붓 같은 것을 들고 다녀야 하고(스웨덴은 학교에서 모든 학용품과 준비물을 챙겨 준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수수깡이며 지점토, 색종이를 계속 사들여야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미술 수업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내 침대 밑에는 언제나 쓰다 남은 미술 재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선생님들은 툭하면 ‘과학 상상화’를 그리게 했다. 공상을 하거나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몇 년 동안 똑같은 그림을 색깔과 구성만 조금씩 바꿔서 그려 왔다. 그러고도 교내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체육 수업 역시 즐겁지만은 않았다. 땡볕에 운동장에 나가서 하는 달리기는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게다가 체육이 다른 수업 중간에 끼어 있어서 모두가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나머지 수업을 듣는 것은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학생이라면 이런 불평불만은 쏙 들어갔을 것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체능 과목이 그리워질 만큼 공부에 시달려야 했을 테니 말이다 ..  (70∼71쪽)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얼마나 넓은 땅이 있어야 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 제도권 학교를 다니던 열두 해 세월은, 한 사람이 제도권 학교를 벗어날 때까지 얼마나 매질에 시달려야 하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두드려맞고 욕지꺼리를 듣고 선생들 잔심부름을 해야 하고 선물(또는 돈봉투)을 갖다 바쳐야 하고 방위성금과 공과금과 폐품과 평화의댐성금과 국군위문편지와 학교발전기금과 무어무어를 가지고 학교에 가야 ‘학생 딱지를 떼고 사회인이 될’ 수 있는지 까마득했습니다. 죄수가 아님에도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늘 달고 다니도록 하고, 북녘나라처럼 독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학교배지를 언제나 이름표 위에 달고 다니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다가, 학교가 끝난 뒤 운동장에서 놀면 불량학생 대접을 받아야 하고, 교내 시험을 치러 몇 손가락 등수에 들면 무슨 잘못을 저지르건 가볍게 풀려날 수 있으며, 골마루에서 선생한테 인사를 안 하면 뺨따귀나 주먹이 날아오는 일이 왜 ‘학교’라는 데에서 이루어지는지 알 노릇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느낍니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우리들을 묶어 놓고 푸릇푸릇할 때에조차 생각을 가두어 놓아야, 나라나 정치나 지역에서 뭔가 하나를 시키기에 좋을 뿐더러 정치와 행정을 붙잡은 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뒷돈을 챙겨도 우리 스스로 아뭇소리 안 하게 되는 사회 틀거리가 만들어지게 되더군요. 나날이 정치를 못미더워 하면서 우리 스스로 투표권을 버리도록 하는 가운데, ‘이 정치인이나 저 정치인이나 다 똑같지 뭐’ 하고 생각하도록 이끌어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밭을 살찌울 책을 찾아서 읽는 버릇을 익히지 못하게 했으니, 우리 스스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은 기르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가 겪은 그대로 우리 아이들이 똑같은 길을 걷도록 하고 맙니다.


.. 한국에 있을 때 동네 도서관은 지대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자주 가기 힘들었고, 미국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고는 갈 방법이 없어서 자주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웨덴 도서관은 아파트 세탁실 가는 것만큼 편한 위치에 있어서 좋았다 … 혹시나 싶어 아동ㆍ청소년 도서를 담당하는 사서에게 물어 보았다. “한국어 책도 볼 수 있을까요?” 사서는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10권에서 15권 정도를 들여놓고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다. 간단히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연락하면 될 것을 스웨덴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편으로 대부분의 업무를 해결한다. 한국 책을 가져오겠다고 너무 쉽게 말해서 믿기가 어려웠는데, 얼마 뒤 책을 들여놓았으니 가져가라는 편지를 받았다. 정말 감동이었다. 스웨덴의 도서관 시설과 운영은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을 만큼 훌륭했다 ..  (81∼82쪽)


 우리 나라가 유럽 어느 나라들처럼 복지가 넉넉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꼭 복지가 넉넉한 나라로 거듭나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학교는 학교 구실을, 사회는 사회 구실을 할 수만 있으면 하고 바랍니다. 학교는 한 사람이 차츰차츰 커 나가는 동안 몸과 마음에 익힐 힘과 깜냥과 슬기를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높은학교에 들어갈 시험지식을 외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햇볕 한 줄기 쬐지 못하도록 좁은 책걸상에 하루 내내 붙잡혀 지내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어릴 때나 풋풋할 때나 교과서 몇 가지와 참고서와 문제집 몇 가지로 우리 눈을 가득 채우게 하는 자리 또한 아닙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훌륭한 책이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 아이들이 그 수많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훌륭한 책이 아닌, 오로지 교과서 하나에만 매여서 자기 꿈과 뜻을 못 펼치게 가로막혀야 합니까.


.. 한국은 수업이 끝난 뒤에 그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면 선생님이 들어오지만, 여기서는 10분 동안 발에 땀이 나게 ‘교실 찾아 삼만리’를 해야 한다. 마치 대학처럼 자신이 들어야 하는 과목의 교실을 직접 찾아야 하는 것이다 … 스웨덴에서는 교과서를 학교에서 무료로 지급한다. 매년 새 교과서를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선배들이 쓰던 것을 물려받는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종이의 질이나 인쇄 상태가 상당히 좋기 때문이다(백과사전 같은 미국의 교과서보다 좋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쓰는 수학 교과서는 320쪽짜리 올 컬러인데, 종이가 매끌매끌하고 질이 좋은 편이다. 이런 책을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은 자원 낭비이기 때문에 공책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  (182∼183쪽)
 





 (2) 우리 스스로 만드는 학교


 지난밤, 아기도 잠들고 옆지기네 식구들도 모두 잠든 때, 옆지기하고 나란히 앉아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봅니다. 잘 만든 영화라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영화로 보기는 처음입니다. 보려고 본 영화는 아닌데, 용케 처음 흐를 때부터 보게 되어 내처 끝까지 봅니다.

 영화를 보며 줄거리를 헤아리는 동안, 이 영화는 그저 영화로만 담기는 이야기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 ‘요트’를 사고 싶어서 아이들을 꾀어 죽이고 돈을 뜯어냈다는 영어학원 강사 모습은, 오늘날 우리 나라 수많은 욕심쟁이 꾀쟁이 떼쟁이 심술쟁이 모습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영어학원 강사 혼자서 잘못되거나 비뚤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짓을 저질렀을까 생각해 보면,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모든 아이들을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영어학원 강사’ 마음이 되도록 길들이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무엇엔가 억눌리고 찌들리고 꽉 막혀서 고리타분하면서 바보짓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도록 하는.


.. 이제는 8시 30분에 등교해서 1시 30분에 하교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한국처럼 학교가 끝난 뒤에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달리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요즘에는 너무 바쁘게 사는 것보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쾌적한 도서관이나 햇볕이 좋은 공원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한국 친구들도 잠시 공부와 컴퓨터 게임을 잊고 경험해 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  (112쪽)


 영화에서 아이를 잃은 어버이들을 보면, 떵떵거리듯 잘살든 찢어지게 못살든, 당신들한테 소담스러운 한 가지는 당신들이 낳아서 기르던 아이들 ‘해맑게 웃던 싱그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당신 아이들이 지니고 있던 작은 물건 하나를 늘 간직하면서 떠나고 없는 아이를 떠올리고, 당신 아이를 죽인 영어학원 강사를 찢고 쑤시고 죽이기까지 했어도 아픔이 풀리지 않습니다. 풀릴 수 없었을 테지요. 누구라도 풀릴 수 없어요. 그러나, 그렇게 당신 아이들이 당신 품을 떠나기 앞서까지는, 당신들은, 아니 우리들은 깨닫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믿고 아끼면서 돌보는 길은 ‘영어학원 따위에나, 또는 수많은 학원 따위에나, 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잘난 대학교 따위에나 보내는 일’이 아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떠나고 없으니 비로소 ‘대학교에 못 가도 좋’고 ‘영어를 못해도 좋’으며 ‘돈 잘 버는 사람이 아니 되어’도 좋은 한편 ‘이름 날리는 사람이 안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곁에만 있으면 좋은 아이입니다. 마냥 우리 둘레에 함께할 수 있으면 좋은 집식구입니다.


.. 이번 현장학습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글만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스톡홀름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의 친구들도 자신이 사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역사와 지리를 배우는 기회를 자주 가지면 좋을 것 같다(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서울 테마’ 같은 것이 없었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다 ..  (138쪽)


 곰곰이 따지고 보면, 존 테일러 개토 님이나 이오덕 님처럼 깨인 분들이 말하듯, 나라나 정부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서 다스리기 좋도록 하고자 제도권 학교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나라나 정부만 ‘바보 만들기’를 하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 나라와 정부가 ‘바보 만들기’를 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스스로 나라와 정부가 ‘바보 만들기’를 해도 그저 따라가면서 낮은자리 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더 많은 돈과 힘과 이름을 누리고자 합니다.

 법과 제도가 뒤틀려 있기도 합니다만, 뒤틀려 있는 법과 제도를 고치지 않는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들이에요. 교육악법이 태어나고 방송악법이 태어나도록 한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해서 태어나려는 나쁜법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가 못난이라서 국가보안법을 안 없앨 뿐 아니라 더 끔찍한 법을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길들고 있으니, 우리 스스로 이 뒤틀린 틀거리에서 잇속을 챙기면서 제 밥그릇만 튼튼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으니, 더 나빠집니다. 참된 길을 걷고자 애쓰지 않으면서 사회와 나라와 문화와 경제와 교육이 참되게 나아가기를 꿈꿀 수 없어요. 






.. 나는 스웨덴에 온 이후로 또래 친구들보다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학생이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확실하다 … 스웨덴의 시험 문제나 교과서의 문제 중 특이한 점 하나는 하나같이 서술형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수학마저도 그렇다. ‘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다.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나는 여태까지 본 시험에서 객관식을 본 적이 없다). 교과 과정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생각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 숙제나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숙제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 억지로 끝내야 하는 지긋지긋한 골칫거리가 아니라, 나만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  (154∼159쪽)


 아직까지 우리 나라 구석구석 ‘새마을운동 깃발’이 펄럭입니다. 지난달이었나, 인천에서는 ‘전국 새마을운동 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독재자 박씨는 새마을운동으로 온나라를 휘어감으면서 ‘잘살아 보세’ 하는 노래를 퍼뜨렸지만, ‘잘살기’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 전통문화를 깡그리 짓밟고 없앴습니다. 새로 가르쳐야 한다면서 새마을연수원을 짓고 사람들한테 새마을교육을 시켰지만, 새로 배운 사람이 늘어날수록 ‘서로돕기’와 ‘어깨동무’는 나날이 자취를 감추고 ‘혼자하기’와 ‘홀로놀기’만 자꾸자꾸 퍼져나갔습니다. 영어를 더 많이 가르치고 영어마을을 큰돈 들여 짓고 모든 회사 모든 시험에 영어 지식을 따지며 가게와 관공서 간판과 서류에 영어가 함께 적히고 있으나, 이렇게 한다고 ‘세계화’가 이루어질까 궁금합니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숱한 장사가 판치고 있을 뿐임을 느끼면서 자기부터, 또 자기 아이들한테 껍데기 가르침이 아닌 알맹이 가르침을 베푸는 분이 몹시 드뭅니다. 한국에서 살아남자면 어쩔 수 없다지만, 어쩔 수 없다기보다 우리 삶터를 더 나은 길로 고쳐 나가고픈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 억지로 스웨덴의 교육 방식을 찬미할 생각은 없다. 또한 한국의 현실적인 교육 환경을 모조리 부정하며, 스웨덴의 교육 현실과 대입하여 우격다짐으로 트집 잡을 생각도 없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스웨덴의 교육 방식이 보다 인간적이고,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기에 오랫동안 건강한 복지국가가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 꿈이 무엇이든 나의 꿈을 존중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떵떵거릴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고 침 튀겨 가며 말리지도 않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날 도와주고, 친구들은 날 응원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2년 뒤 내 적성과 능력, 그리고 소질에 맞는 진로를 정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  (191쪽)


 한손에 평화를 든다면, 다른 한손에 전쟁을 들 수 없습니다. 한손에 군대를 두면서 다른 한손에 사랑이나 믿음을 둘 수 없습니다. 군대와 사랑은 다른 세상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전쟁무기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손에 제도권입시만 떠받치는 한국 교육이니, 다른 한손에는 매질과 끝없는 학원 교육이 올려집니다. 한손에 돈을 들면 다른 한손에는 이웃사랑이 아닌 이기주의가 올려집니다. 한손에 권력을 들면 다른 한손에는 이웃나눔이 아닌 소비물질만능이 올려집니다.
 





 (3)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를 읽으며


 아버지 일 때문에 스웨덴에 옮겨 살면서 학교를 다니는 열다섯 하영이가 쓴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를 읽습니다. 하영이는 스스로 바라면서 미국 학교도 다녀 보고 스웨덴 학교도 다녀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일터 때문에 ‘한 학교를 오래 못 다니고 여러 학교로 옮겨 다니는’ 이 땅 많은 아이들처럼, ‘한 나라 학교를 내처 다니지 못하고 여러 나라 학교를 옮겨 다니’게 되었어요.

 이렇게 세 나라 학교를 다니면서, 지식이 아닌 몸으로 저마다 다른 모습을 느낍니다. 꼭 어느 한쪽이 좋거나 훌륭하다기보다, 학교에서 무엇인가 배우며 무럭무럭 자라는 자기 삶을 돌아볼 때, 자기는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면 좋은가를 저절로 깨닫습니다.


..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서 불도 붙이고 음식도 만들어 먹는 일은 좋은 체험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위험하다고 손도 대지 못하게 할 불과 칼을 직접 다루게 하는 것은 학생들이 다쳐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신뢰감을 보여줌으로써 자립심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숲도 마찬가지다. 도심에 이런 숲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 같았으면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는 이런 숲 따위는 싹 밀어버리고 높은 건물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받을 때 상쾌한 곳에 와서 뒹굴다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  (35쪽)


 숲 하나 없이 아파트만 가득한 우리 나라입니다. 서울도 부산도 제주도 춘천도 대전도 익산도 매한가지입니다. 손바닥 만한 나무그늘 있는 쉼터란 없고, 길을 거닐다가 다리쉼을 할 걸상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기로는 어디를 가든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몸으로 자연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연을 다루는 책은 많아 책을 펼치면 자연이 넘실넘실 한다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마땅한 청소년책이 없어서 더는 자연을 느끼지도 문학을 느끼지도 따스한 사람품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중고등학생 때를 거치고 대학교를 다녀 회사원이 된다면, 먼 뒷날 제 어버이와 같이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는 어찌 될까요. 제 어버이가 했듯 책으로만 자연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되 초등학교 마치면 ‘이제부터는 대학입시만 바라봐!’ 하며 윽박지를는지요. ‘대학, 이 가운데 일류대학만 가면 그만이야!’ 하고 가르칠는지요. 세상 수많은 일거리와 놀이감을 아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즐기며 누릴 수 있게 하지 못하면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 되도록 할는지요.


.. [하영] 한국 경찰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지요?
[스웨덴 경찰 카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릅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길거리에서 언제든지 경찰들을 볼 수 있다면, 그런 멋진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기는 합니다. 각 국가의 정책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 나라의 범죄율이나 기타 많은 기준들이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경찰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을 꼭 좋다고만 말하기는 어렵군요. 스웨덴 사람이 한국에 가면 자칫 범죄가 많은 국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스웨덴의 방식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게씨만, 원칙적으로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으나, 경찰이 눈에 뜨이지 않아서 느끼는 불안감보다 내 주변에 항상 경찰들이 보이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영] 만약 한국 경찰에서 초청하면 한국 경찰을 보고 싶은지요?
[스웨덴 경찰 카레] 당연히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말 경찰에 전화를 걸면 어김없이 3분 이내에 도착하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웃음) 내가 가 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한국 경찰을 스웨덴으로 초청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군요. 한국 경찰들이 볼 때 스웨덴 경찰들은 전부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니까요. (웃음) ..  (241쪽)



 어쩌면 하영이는 어버이를 잘 만나서, 한국땅 얄궂은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면서 아름답고 멋진 스웨덴 교육을 받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스웨덴 교육이 훌륭하고 아이들 삶을 널리 헤아려 준다고 하더라도, 이런 교육을 받아먹는 아이 마음이 넉넉하면서 살가워야 고이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빈가슴한테는 제도권 교육이나 스웨덴 교육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열린가슴한테는 고단한 제도권 교육에서도 빛줄기를 찾으면서 살 길을 열고 이웃과 동무를 찾을 테지만, 닫힌가슴한테는 스웨덴 학교에서도 혼자살기만 하면서 엇나가기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우리 제도권 교육이 어떤 모습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이 모양 이 꼴로 우리 아이들을 억누르거나 괴롭혀야 하는지를 느껴야 합니다. 언제까지 ‘대학바라기’만 하면서 아이들을 들볶으려 하는지 되새겨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생각해야 하고,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는지 곱씹어야 하며, 아이들이 어떤 보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되뇌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쑥쑥 크는 이 땅 모든 아이들을 생각하며, 우리 아이를 비롯해 이웃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 배움터 삶터 쉼터 나눔터가 되도록 우리 터전을 가꾸어야 합니다.

 하영이가 스웨덴살이를 글로 적어 띄워 놓는 블로그 이름은 “꿈만 꿔도 괜찮아(http://blog.hani.co.kr/leehayoung)”입니다. 이 나라와 이웃나라 아이들 모두 “꿈만 꿔도 괜찮”을 수 있어야 합니다. (4341.12.31.물.ㅎㄲㅅㄱ)

http://blog.hani.co.kr/leehayoung (이하영 블로그 : 꿈만 꿔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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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한 해에 내 가슴에 새겨진 책
 ― 마음밥이 되고, 마음밭이 되며, 마음사랑이 되는 책



 올 2008년 1월 1일부터 마지막날 12월 31일까지 찬찬히 읽고 느낌글까지 쓴(또는 쓰려고 준비하는) 책들로 무엇이 있는가 헤아려 봅니다. 이 가운데에는 ‘돈도 버렸고 시간도 아까웠지만, 이 아까움이 무엇인가를 밝혀야겠다’는 책이 서른 권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이며 시간이며 고맙게 느껴져서, 이 고마움을 낱낱이 적어 보아야겠다’는 책이 훨씬 많았어요. 이 가운데 마음속에 깊은 기쁨을 선사한 반가운 책 이야기를 얼마쯤 썼는가 돌아봅니다.

 책이름을 갈래에 따라서 죽 적어 놓고 보니 모두 일흔세 권입니다. 이 가운데 일곱 권 이야기는 자료를 좀더 모으기도 하고 다시 읽기도 하면서 느낌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 일흔세 가지 책 가운데 ‘2008년 한 해에 처음 만나서 싱그러움과 즐거움을 듬뿍 선물받았던 책’을 꼽으라면 무엇이 있는가 헤아려 봅니다.

 음, 선뜻 하나를 뽑기란 어렵군요. 제가 좋아서 읽었고 좋아서 주머니를 털었으며 좋아서 기꺼이 이웃한테 선물하기도 한 책들이지만, 어느 하나만 뽑자니 힘듭니다. 먼저, 갈래에 따라서 한 가지씩 뽑아 봅니다.  





 첫째, 생태환경책에서는 《슬픈 미나마타》가 아주 좋았습니다. 읽으면서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라서 석 달쯤에 걸쳐서 아주 조금씩 읽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읽고 나서 다시 두 번을 더 읽었던 책입니다. 환경병인 ‘미나마타병’이 미나마타사람들한테 어떻게 생채기를 남겼고, 이 생채기를 일본 사회와 기업과 정부는 어떻게 감추려 했으며, 이 응어리는 오늘날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미나마타사람 눈높이에서 펼쳐낸 눈물겨운 작품입니다.

 둘째, 어린이책에서는 《눈물나무》와 《마지막 인디언》이 돋보이는데, 《마지막 인디언》은 판이 끊어져서 더는 찾아 읽기 어려운 대목을 헤아린다면 《눈물나무》를 뽑아야겠네요. 뜻과 생각이 있는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마지막 인디언》을 되살려 준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꿈을 꿉니다. 《눈물나무》는 미국이 휘두르는 경제식민지 정책 때문에 제3세계 나라들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미국으로 몰래 넘어가려고 하며, 이러는 동안 가난한 나라 아이들이 어떻게 바뀌고 아파하는지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셋째, 문학책에서는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뽑습니다. 삶을 삶결 그대로 적어내려간 시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시란 무엇인지를, 시란 어떻게 즐기는지를, 시란 어떤 마음일 때 속에서 터져나오면서 우리 마음으로 옮겨지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넷째, 종교책은 하나만 썼네요. 건너뜁니다.

 다섯째, 인문학책에서는 《일본군 군대위안부》를 뽑습니다. 나라안 학자도 훌륭하게 파헤친 책을 펴냈지만, 나라밖 일본에서 성노예 할머님 삶과 아픔을 꼼꼼히 좇으면서 밝혀낸 이 책은 두고두고 우리네 교과서처럼 여기면서 이 땅 아이들한테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배우는 이들을 비롯해서,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이 이런 책을 옆구리에 끼면서 고개숙여 익히면 우리 나라가 참 많이 달라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섯째, 예술책에서는 《놀라운 이야기》를 뽑아 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박정희 새마을 독재를 거치는 동안 한 아버지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았는가를 수수하게 엽서 한 장 만한 크기로 담아낸 이야기는 자못 눈물겹습니다. 우리 나라에 이런 ‘놀라운 아버지’가 드문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는데, 그예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일곱째, 그림책에서는 《청개구리》를 뽑습니다. 그림책을 엮은 재일조선인 두 분은 고향나라에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일본땅에서도 푸대접을 받으면서 컸으나, 이렇게 아름다움이 깊이 묻어난 그림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다니, 참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예술이란 그지없는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이겨낸 웃음에서 시나브로 태어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여, 제 나름대로, 제가 2008년 한 해에 만났던 반갑고 놀랍고 고마웠던 책을 여섯 권 추려 봅니다.

 (ㄱ) 슬픈 미나마타 / 달팽이,2007 - 이시무레 미치코
 (ㄴ) 눈물나무 / 양철북,2008 - 카롤린 필립스
 (ㄷ)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문학의전당,2007 - 김정희
 (ㄹ) 일본군 군대위안부 / 소화,1998 - 요시미 요시아키
 (ㅁ) 놀라운 이야기 / 새만화책,2008 - 조동환
 (ㅂ) 청개구리 / 보리,2007 - 박민의


 올해에 나온 책이 둘, 지난해에 나온 책이 셋, 1998년에 나온 책이 하나입니다. 1998년에 나온 책은 그무렵 알았다면 진작 읽고 일찌감치 좋은 마음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뒤늦게 알게 되어 뒤늦게 읽는 책이 있을 때에는 ‘세상에는 미처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책이 참 많네’ 하고 고개를 숙이는 한편, ‘왜 이런 책이 그무렵에 제대로 알려지면서 읽히기 어려웠을까’ 싶어서 안타깝습니다. 신문잡지 기자들이 눈밝게 알아차리지 못한 탓으로 돌리거나, 새책방 일꾼이 꼼꼼히 갖추어 널리 알려주지 못한 탓으로 돌릴 수 있을 테지만, 이보다는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으로서 저부터 두루 살피지 못한 탓이 가장 크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올해 나온 책을 올해에 반갑게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가슴을 적실 수 있을 때에는, ‘네가 이렇게 따끈따끈할 때 사랑을 받고 사랑을 돌려주고 또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으니 더없이 좋네’ 하고 생각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 제 자리맡에는 《북한행 엑서더스》(책과함께,2008)와 《숨어 있는 예수》(달팽이,2008)가 반쯤 읽힌 채 놓여 있습니다. 인천집으로 돌아가면 수많은 책이 덜 읽히거나 조금만 읽힌 채, 또는 한 번 읽혔으나 다시 한 번 읽히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천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책방에 잠깐 들러 아직 알아채지 못한 반가울 책을 살펴보기도 할 테고,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을 가만히 훑으면서 또 어떤 마음밥을 골라먹으면 좋을까 하고 알아보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이처럼 나이를 먹으며 새로 알아가는 책이 늘고, 기쁘게 마지막 쪽을 덮는 책이 늘어나는 즐거움이 새삼스럽습니다. 숨을 거두는 날까지 손에 쥘 수 있는 책은 기껏해야 몇 만 권 또는 몇 십만 권밖에 안 될 텐데, 이 가운데 얼마나 가리고 추리면서 제 가슴속에 또렷이 남아서 느낌글 하나를 부지런히 써내도록 이끌어 줄는지 설렙니다. 기다리게 되고 두근거립니다. 저무는 2008년을 아쉽게 떠나보내며, 다가오는 2009년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2008년 한 해에 제 깜냥껏 갈무리해 본 ‘제 눈에 걸러진 괜찮았던 책’을 하나하나 적어 봅니다. (4341.12.30.불.ㅎㄲㅅㄱ)

 



 ㄱ. 생태환경책
 《잘 먹겠습니다》(그물코,2007) 요시다 도시미찌
 《다시 야생으로》(지호,2004) 어니스트 톰슨 시튼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북센스,2006) 박경화
 《오카방고의 숲속학교》(갈라파고스,2005) 트래버스, 앵것, 메이지, 오클리
 《슬픈 미나마타》(달팽이,2007) 이시무레 미치코
 《지구 온난화를 생각한다》(소화,1997) 우자와 히로후미
 《곤충ㆍ책》(양문,2004)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2분 간의 녹색운동》(성바오로출판사,1991) M.램
 《즐거운 불편》(달팽이,2004) 후쿠오카 켄세이


 ㄴ. 어린이책
 《우리와 안녕하려면》(양철북,2007) 하이타니 겐지로
 《아빠의 만세발가락》(두레아이들,2007) 리타 페르스휘르
 《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1999) 권정생
 《바람 속에 서 있는 아이》(산하,2006) 고시미즈 리에코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민음사,1991) 모리스 드뤼옹
 《눈물나무》(양철북,2008) 카롤린 필립스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보물창고,2005) 구드룬 파우제방
 《마지막 인디언》(동서문화사,1982) 디오도러 크로버
 《곡쟁이 톨로키》(검둥소,2008) 자케스 음다
 《로빙화》(양철북,2003) 중자오정
 《하늘은 이어져 있다》(낮은산,2008) 일본아동문학자협회
 《지구를 구하는 경제학》(봄나무,2005) 강수돌
 《잃어버린 소년들》(현암사,2008) 벤슨 뎅, 알폰시온 뎅, 벤자민 아작
 《초딩, 자전거길을 만들다》(소나무,2008) 박남정
 《먼지야, 자니?》(산하,2006) 이상교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양철북,2008) 이하영


 ㄷ. 문학책 (소설,수필,수기,시)
 《부심이의 엄마 생각》(노나메기,2005) 백기완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열린책들,1998) 장 자끄 상뻬
 《거기, 내 마음의 산골마을》(그물코,2007) 박희병
 《마음의 조국, 한국》(범우사,2002) 다카노 마사오
 《금희의 여행》(민들레,2007) 최금희
 《이 여자, 이숙의》(삼인,2007) 이숙의
 《똥꽃》(그물코,2008) 전희식
 《그 골목이 말을 걸다》(넥서스,2008) 김대홍
 《사하라 이야기》(막내집게,2008) 싼마오
 《생각, 장정일 단상》(행복한책읽기,2005) 장정일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문학의전당,2007) 김정희


 ㄹ. 종교책
 《부처와 테러리스트》(달팽이,2005) 사티쉬 쿠마르


 ㅁ. 인문학 (지역,사회,역사,철학,교육)
 《황해에 부는 바람》(다인아트,2000) 최원식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사람들,2004)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소나무,2007) 편해문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 전진성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이후,2008) 마이클 예이츠
 《사라져 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삶이보이는창,2007) 박영희
 《이천동, 도시의 옛 고향》(이매진,2007) 최엄윤
 《오끼나와 이야기》(역사비평사,1998) 아라사끼 모리테루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1998) 요시미 요시아키
 《스핑크스의 코》(까치,1998) 리영희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후마니타스,2007) 송두율
 《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양철북,2008)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니사》(삼인,2008) 마저리 쇼스탁


 ㅂ. 예술책 (그림,사진,만화)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박정희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윌북,2006) 타샤 튜더
 《숲속 그늘 자리》(고인돌,2008) 이태수
 《무식하면 용감하다》(행복한만화가게,2006) 이두호
 《촬영금지》(눈빛,1990)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이란 무엇인가》(현문서가,2005) 최민식
 《도자기》(애니북스,2008) 호연
 《놀라운 이야기》(새만화책,2008) 조동환
 《ZERO》(애니북스,2008) 마츠모토 타이요
 《음주가무 연구소》(애니북스,2008) 니노미야 토모코
 《페르세폴리스 (2)》(새만화책,2008) 마르잔 사트라피


 ㅅ.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양철북,2008) 최혜영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동쪽나라,2003) 모니카 로베르트
 《시냇물 저쪽》(마루벌,1995) 엘즈비에타
 《방귀 만세》(아이세움,2001) 후쿠다 이와오
 《행복한 봉숭아》(천둥거인,2004) 박재철
 《연이네 설맞이》(책읽는곰,2007) 윤정주
 《하늘에서 달님이 뚝 떨어졌어요》(중앙출판사,2008) 제바스티안 베쉔모저
 《들꽃 아이》(길벗어린이,2008) 김동성
 《청개구리》(보리,2007) 박민의
 《우리가 바꿀 수 있어》(보림,2008) 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
 《세 엄마 이야기》(사계절,2008) 2008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미래M&B,2007) 마리 홀 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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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31 12:56   좋아요 0 | URL
좋은 추천 감사합니다.
 
아기물개를 바다로 보내주세요 미래그림책 55
마리 홀 에츠 글 그림, 이선오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좋은 사람, 좋은 책, 좋은 그림책
 [그림책이 좋다 55] 마리 홀 에츠,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 책이름 :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 글ㆍ그림 : 마리 홀 에츠
- 옮긴이 : 이선오
- 펴낸곳 : 미래M&B (2007.6.7.)
- 책값 : 9000원



 (1) 시와 글과 문예창작과 교수와 사람


 글을 쓰는 꽤 많은 분들이 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강사나 교사가 되곤 합니다. 대학교에 문예창작과가 그리도 많았는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이 퍽 많고, 적잖은 시인과 소설가가 ‘교수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학교에서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느끼고 있기에, 대학교 같은 데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친다고 할 때에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싶어 몹시 궁금하기도 하지만 슬프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삶이 없이 글을 쓸 수 없고,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서 글이 나오지 않으며, 자연 삶터 목숨을 내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글에 기운이 실리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글솜씨를 키우려는 생각으로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간다든지, 그냥 책이 좋아 간다든지, 아무 생각 없이 원서를 냈다든지 했다면 갈 수도 있는 노릇이겠습니다만, 참으로 책을 좋아한다면 문예창작과도 대학교도 마음에서 잊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면 책방과 도서관에 갈 노릇이고, 글을 쓰고 싶다면 수많은 책을 돌아보면서 ‘아직 쓰여지지 않은 가슴 저리는 이야기’로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가운데 ‘우리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이야기’는 얼마나 있는가를 몸소 찾아나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란 겉멋이 아니요, 글쓰기란 대중소설이 아니고, 글쓰기란 돈벌이가 아니며, 글쓰기란 이름값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어느 직업인으로 대학교수가 되기도 하고, 시인이 교수가 되기도 하며, 소설가가 교수가 되기도 합니다. 글이 아닌 ‘문예’가 되고 쓰기가 아닌 ‘창작’이 되는 이 나라에서는, 시중 새책방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면서 글삯을 두둑하게 챙기고 비평가들한테 좋은 소리 많이 들으며 이름을 날리게 되면 ‘글 잘 쓰는 사람’인 듯 대접을 받으니, 이러한 겉치레를 좇아 해마다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대학교에 바치는 젊은 넋이 꽤 많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슬픈 마음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엄마가 항구로 돌아와 보니 아기 물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기 물개를 찾아 온 바닷가를 헤매었어요. 이름을 부르고, 끽끽 소리도 질러 보았지만 아기 물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아기 물개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엄마가 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한 선원이 모래밭에 있는 아기 물개를 보게 되었어요. 선원은 아기 물개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선원은 아기 물개를 바닷가 마을에 가서 팔 생각이었어요 ..  (2∼3쪽)
 





 엊저녁, 퍽 이름난 시인이 들려주는 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곧바로 시디에 구워 건네드리고 나서 함께 막걸리잔을 들다가, 자꾸자꾸 샘솟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습니다. 시란 이러한가, 시를 누구 읽으라고 쓰는가, 시인이 젊은 넋한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무엇이고, 젊은 넋은 왜 시인한테 문예창작이라는 학문을 배우고 있는가 곱씹으면서 괴로웠습니다.

 그 시인도, 또 다른 시인들도, 당신들 삶이 있었기에 시를 썼습니다. 당신들 발자국 묻어난 고향마을이 있고 고향사람이 있었기에 시를 엮어냈습니다. 당신들을 일깨운 책이 있고, 당신들을 이끌어 온 어른이 있었기에 시한테 사랑을 바쳤습니다. 당신들을 북돋우고 아끼며 기꺼이 읽어 준 낮은자리 사람들이 있었기에 시 하나로 밥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밥벌이가 끝나고 나면, 밥벌이가 어느 만큼 느긋하게 자리잡고 나면, 시는 어디로 가지요? 시는 어떻게 흐르지요? 시는 어떻게 뻗어나가지요?


..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올레이(아기 물개)의 향수병은 깊어만 갔어요. 엄마가 보고 싶었고, 바닷가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도 그리웠습니다. 올레이는 자꾸 눈물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어요. 사육사 아저씨는 올레이를 달래 주려고 말을 걸기도 하고, 트럼펫으로 슬픈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  (7쪽)


 동화를 쓰는 어느 분은 자기 글에 빈틈이 없을 뿐더러, 자기가 아주 글을 잘 쓰는 사람인 듯 여기고 있습니다. 마흔이란 나이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글 하나에 담긴 빛줄기를 보거나 잡아챘기에 스스로 자기 글을 훌륭히 여기게 되었는지 모릅니다만, 농사짓기와 같은 글쓰기인지라, 잘 쓴 글이고 못 쓴 글이란 있지 않습니다. 밥이 되는 곡식과 같은 글인지, 쭉정이라 거름으로나 써야 하는 글인지가 갈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모내기를 할 만한 볍씨가 될 만한 글인지, 농약과 비료를 먹고 자란 글인지, 똥거름을 먹고 자란 글인지가 나뉠 뿐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어린이한테 읽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만한 마음그릇이라는 대목이 그지없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어린이 마음이 아니고서는 어린이한테 읽힐 글을 쓸 그릇이 안 되는데, 어린이 마음이란 ‘찬찬히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마음이고, ‘늘 새롭게 배우고 거듭 익히며 꾸준히 달라지는’ 마음인데, 둘레 사람 말을 듣지 못하고, 둘레 사람 삶을 몸뚱이와 머리 모두로 찾아나서지 못하면서 무슨 동화를 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이 읽는 글 또한 함부로 쓸 수 없지만, 어린이가 읽는 글은 훨씬 더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국가는 폭력이다》를 쓴 톨스토이와 같은 그릇이 되고 나서야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무하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만, 톨스토이 발가락만큼이라도 닮아 보려고 바둥거리면서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할 테고, 우리 땅에서 우리 나름대로 ‘또다른 톨스토이가 되려는’ 매무새로 시를 쓰든 동화를 쓰든 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알고 자연을 알아야 샘솟아 나오는 글이거든요. 나를 모르고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며 자연마저 모르는 채 글짓기를 억지로 억지로, 또 억지로, 순 억지로 써내어 무슨무슨 상을 타고 무슨무슨 대학에서 교수 일을 한다고 해 보아야, 이런 쭉정이들이 얼마나 밥이 되거나 힘이 되겠습니까. 거름이나마 될 수 있으려나요.
 





.. 홱! 올레이는 낚싯줄에 걸리고 말았어요! 작은 방울들이 딸랑거리자 사람들이 낚싯줄을 끌어당겼습니다. ‘이렇게 끝나다니!’ 올레이는 물속을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어요. 올레이가 얼마나 세게 몸부림을 쳤던지 낚싯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올레이는 다시 자유로워졌어요. 사람들은 거의 잡을 뻔하다 놓친 게 무엇인지 보려고 성냥불을 켰습니다. 하지만 올레이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쳐다보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어요. 그러고는 달아나 버렸지요. 사람들은 올레이와 놀아 주지도 않고, 친구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올레이는 등대 옆에 있는 바위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  (14∼15쪽)


 (우리 말로 옮겨진 책으로는) 《숲 속에서》와 《또다시 숲 속으로》와 《바로 나처럼》과 《나랑 같이 놀자》와 《크리스마스까지 아홉 밤》 같은 구슬처럼 아름다운 그림책을 엮어낸 ‘마리 홀 에츠’ 님이 1947년에 그려낸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두 번 세 번 넘기고 읽고 보고 눈물을 흘리다가는 빙긋 웃으면서 이 나라 글꾼들 삶과 모습과 말과 매무새를 돌아봅니다. 이 나라에서 그림 그린다는 분들과 사진 찍는다는 분들 삶과 모습과 말과 매무새도 함께 헤아립니다.

 처음부터 ‘명작’이나 ‘고전’이란 없고, 새내기나 풋내기를 거치지 않고 훌륭한 이나 깨우친 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모짜르트 같은 천재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한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천재들도, 천재가 아닌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땀을 흘립니다. 땀을 바칩니다. 사랑이 서린 땀을 흘립니다. 믿음이 배인 땀을 바칩니다. 한 해 두 해로는 어림도 없을 땀을 쏟고, 열 해 스무 해로도 모자란 땀을 들입니다.

 몇 해 앞서 세상을 떠난 어린이문학가 권정생 님이 《몽실 언니》를 어떻게 써냈을까 떠올려 봅니다. 《한티재 하늘》을 써낸 이야기를 아주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는데, 권정생 님은 젊은 날부터 몸이 아파서, 첫사랑이 막사랑이 되고 만 아픔과 슬픔이 있지만, 너무도 아픈데 빨리 죽지도 않아 더 괴로웠는데, 그러면서도 피를 한 움큼 쏟고 원고지 글 한 줄 쓰고, 또 피를 한 움큼 쏟고 원고지 글 한 줄을 쓰면서 겨우겨우 이야기책 하나를 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글꾼이건 그림꾼이건 사진꾼이건, 반드시 아무개 님들처럼 아파 보아야만 더 빛나는 열매를 얻어내지는 않아요. 아픔과 슬픔이 빛나는 열매를 이루는 디딤돌이지는 않고요. 그러나, 내 아픔과 슬픔을 떨쳐내지 않고 삭여낼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하고, 이웃 아픔과 슬픔을 등돌리지 않고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나한테 있는 모자람과 아쉬움을 볼 줄 알아야 이웃한테 있는 모자람과 아쉬움을 봅니다. 나한테 있는 사랑과 믿음을 느낄 줄 알아야 이웃이 우리한테 베풀려고 하는 사랑과 믿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림책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넘기면, 가없이 넓고 깊은 어머니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넘실넘실 느껴지는 한편으로, 어머니 사랑을 잃거나 버린 우리들 여느 사람들 삶이 슬프고 아프게 느껴집니다. 한 목숨 어머니한테 받은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우리들 스스로 어머니한테 이어받은 고마운 목숨을 기뻐하거나 반가워할 줄 모르는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이 옮겨진 때는 이제 고작 열 해가 조금 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을 보고 자라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진작부터 수많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깊은 사랑과 너른 믿음이 알알이 담긴 ‘마리 홀 에츠’를 어머니랑 함께 보아 왔어요. 한국사람이 우러러 마지않는 미국땅 어린이들도, 유럽나라 어린이들도 ‘마리 홀 에츠’ 그림책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다만, 무럭무럭 자라난 아이들 가운데 엇나가고 말아 전쟁 미치광이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 같은 그림책을 살뜰히 받아먹고 아름다운 마음결을 놓지 않고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사람이 아주 많아요.
 





.. 올레이는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천천히 헤엄쳐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호숫가 모래밭에서 들려왔어요. 올레이는 그 사람들이라면 자기와 놀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레이는 모래밭 쪽으로 헤엄쳐 갔어요. 그리고 얼굴을 물 위로 쏙 내밀고, 사람들이 봐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올레이를 보고도 웃지 않았어요. 자세히 보려고 몰려오지도 않았어요. 물고기로 가득한 건물에서 본 사람들하고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올레이와 놀려고도, 올레이를 구경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놀라서 정신을 잃거나,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호수 밖으로 달아나 버렸지요 ..  (19쪽)


 오늘도 새로운 아침해를 맞이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동화를 쓰든, 스스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면 땀을 흘릴 노릇인데, 자기 작품을 일구는 데에만 땀을 흘리지 말고, ‘마리 홀 에츠’처럼 고즈넉하게 사랑열매와 믿음열매를 맺은 분든 땀방울을 알아내고 느껴서 받아먹는 데에도 땀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작품을 써낸 괴테라지만, 괴테는 자기 삶 1/3을 말등에서 보냈다고 할 만큼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굳이 괴테처럼 살거나 괴테가 되어야 할 까닭은 없는데, 그렇기는 하나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우리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여미고 있는지, 우리들은 우리 고맙고 거룩한 삶을 어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아야지 싶어요. 이렇게 하지 않고서 쓰는 시나 소설이나 동화가 된다면, 한낱 종이쓰레기일 뿐입니다. 거름도 되지 못하는 종이부스러기일 뿐입니다. 자기가 ‘내 책은 명작이야!’ 하고 말하거나 ‘내 책은 고전이라고!’ 하면서 내세울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앞으로도 오래오래 ‘명작이 되고 고전으로 이어갈’ 만한 글그릇이 되도록 그림그릇이 되도록 사진그릇이 되도록, 좀더 갈고닦으면서 삶자락을 추슬러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2) 좋은 그림책이란


 1895년에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란 ‘마리 홀 에츠’ 님은, 1917년에 혼인했던 남편이 두 주 만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싸움터에서 죽자 남편 잃은 슬픔을 이겨내려고 어린이를 돌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일을 합니다. 1930년에 다시 혼인을 했으나, 둘째 남편도 열세 해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고, 끊임없이 닥치는 아픔과 슬픔을 꿋꿋이 이겨내려고, 또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따뜻함을 찾아서 나누려고 그림책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게 그렇게 애쓰고 힘쓰면서 살다가 1985년에 당신도 흙으로 돌아갑니다.


.. 엄마는 아기 물개의 코에 입을 부볐어요. 올레이와 엄마는 파도를 타고 헤엄쳐 바닷가 쪽으로 갔습니다. 물개 두 마리는 배로 기어서 천천히 밖으로 나왔어요. 점박이물개는 발이 지느러미 같아서 걸을 수가 없거든요. 올레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먼 길을 헤엄쳐 와 피곤했어요. 올레이는 엄마 옆에 누워 금방 잠이 들었어요. 바닷가 항구 모래밭에서 ..  (30쪽)
 





 ‘마리 홀 에츠’를 모르는 이웃집 헌책방 아주머니하고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라는 그림책을 함께 넘겨 봅니다. 책읽을 겨를이 없고, ‘누가 훌륭한 그림책 작가인가를 모르는’ 아주머니는, “그림 참 좋네, 가슴으로 느껴지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마리 홀 에츠’라는 이름을 보며 책을 끄집어냈지만, 아주머니는 이름이나 출판사는 보지 않고 그림부터 먼저 펼쳐 보았습니다.

 예순 해를 묵은 그림책이니, 1947년에 미국에서 이 그림책을 보던 아이들 가운데에는 세상을 뜬 사람도 꽤 많겠구나 싶습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서 ‘나도 이런 그림책을 그려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꿈을 키운 사람도 퍽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2007년에 겨우 옮겨지기는 했으나 그리 알려지지 못하고 읽히지도 못하는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인데, 요 알뜰한 사랑열매와 요 애틋한 믿음열매를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받아안거나 받아먹는지 궁금합니다.


.. 어느 바닷가 항구에 점박이 아기 물개가 태어났어요. 아기 물개는 너무 어려서 물속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모래밭에 엄마와 함께 누워 있었지요. 가끔 엄마는 고개를 돌려 아기 물개 쪽을 살폈어요. 그리고 아기 물개에게 뽀뽀를 해 주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  (1쪽)


 아무래도 우리들은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눈이 몹시 얕다고 느낍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만나지 못하니, 스스로 ‘좋은’ 책을 알아보는 눈을 기르지 못하고, 또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놓치지 않느냐 싶습니다. ‘좋다 나쁘다’란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고, ‘좋다 나쁘다’로 가르는 일이란 아무 뜻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몸에 좋은 밥처럼 마음에 좋은 책이란 틀림없이 있습니다. 씨눈이 살아 있는 누런쌀밥과 씨눈이 잘리고 없는 하얀쌀밥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새힘을 나게 할 때에도 틀림없이 다릅니다. 농약 먹은 감자와 농약 안 먹은 감자 또한 틀림없이 달라요. 합성착색료가 들어간 마실거리를 아이들한테 함부로 마시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어른들이라면, 아이들한테 쥐어 주거나 읽어 줄 그림책이나 어린이책도 ‘좋은’ 책으로 꼼꼼히 살피고 골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책을 가까이하는 매무새가 자리잡아야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되면서도 좋은 문학과 좋은 이야기책과 좋은 인문학 책을 가까이하거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그림책이란 어떠한 책을 가리킬까요. 그림책이니, 먼저 그림이 군더더기가 없고 어긋난 대목이 없으며 살가워야 합니다. 적잖은 한국 그림책 작가들은 자전거를 참 잘못 그릴 뿐더러, 출판사 편집자들마저 잘못 그린 자전거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림쟁이나 책쟁이나 자전거를 안 타면서 살아가니까 자전거를 잘못 그려도 느끼지 못하는 셈인데, 좋은 그림책이라면 그린이 스스로 자기 삶을 야무지게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버지니아 리 버튼’ 그림책에, 또 ‘베아트릭스 포터’ 그림책에 군더더기란 있지도 않으나 어긋난 그림 또한 한 군데도 없습니다. ‘나카가와 리에코’가 만화처럼 간추려 그린 책 어디에도 대충 그리거나 엉터리로 그린 대목이란 한 곳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본 데생’을 할 줄 모르면서 ‘좋은’ 그림책이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림책 작가로 경력이 쌓인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본 데생이 삭지 않도록 꾸준히 힘쓰는 모습이 그림책에 녹아나야 합니다.

 다음으로, 줄거리가 싱그러워야 합니다. 그림책은 한 번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적어도 100번은 다시 읽고 보는 책입니다. 100번이 아닌 1000번을 거듭 보아도 새로운 재미가 샘솟을 수 있는 줄거리를 짜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늘 신나고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가 ‘별나라 달나라에 있는’ 줄 잘못 아는 한국 그림책 작가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나라 창작 그림책은 나라밖 번역 그림책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우리가 명작이나 고전이라고 가리키는 그림책치고 ‘우리 삶 이야기’를 안 담은 그림책이 없을 뿐더러 ‘우리 가까이 이웃한 삶 이야기’를 안 다룬 그림책이 없습니다. 모든 명작과 고전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이 밑바탕입니다. 삶이 있어야 그림책이 있고, 삶이 싱그러워야 그림책이 싱그럽습니다. 《장갑》이나 《심심해서 그랬어》나 《재활용 아저씨 고마워요》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나 《할아버지는 수레를 타고》나 《오른발 왼발》이나 《이슬이의 첫 심부름》이나 《종이 인간》 같은 줄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찬찬히 돌아보셔요.

 그리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즐거워서 웃기도 해야 하지만, 슬퍼서 울기도 해야 합니다. 《팥죽 할멈과 호랑이》나 《아프리카여 안녕!》나 《따르릉 따르릉 비켜 나세요!》나 《캄펑의 개구쟁이》나 《나는 곰이란 말이에요》처럼 배꼽 잡도록 웃기는 아름다움도 있고, 《생쥐와 고래》라든지 《당나귀 실베스타와 요술 조약돌》이라든지 《까마귀 소년》이나 《우리 할머니》나 《아툭》이나 《꼬마 곡예사》처럼 눈물이 펑펑 나오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말없는 그림책 《떠돌이 개》나 《나무》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연필 한 자루만으로도 아름다운 《꼬마 인형》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톡톡 터지는 웃음이면서, 펑펑 터지는 울음입니다. 해맑게 웃고 가슴아프게 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는 그림책이라 한다면, 그림이 빈틈없고 줄거리가 탄탄하더라도 ‘좋은’ 그림책이 될 수 없어요. 





 어쩌면, ‘좋은’ 그림책에서 가장 크게 살필 대목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름다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고마움이 담긴 아름다움,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한 안타까움을 담아낸 아름다움,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아름다움 말입니다.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이 배어나고 아름다움에서 싱그러움이 샘솟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움에서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나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움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믿음이 자라는지 모릅니다.

 이리하여, 꾸며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살면서 녹여내는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배어나는 아름다움으로, 겉치레 아름다움이 아니라 알맹이가 단단히 여문 아름다움으로 그림책 하나 빚어내어야 우리 삶도 아름답게 껴안을 수 있지 않느냐 싶어요. 얼른 집 치우기를 마치고, 그림책 《아기 물개를 바다로 보내 주세요》를 들고서 아기와 옆지기가 있는 일산 처가집으로 가야겠습니다. (4341.12.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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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야, 자니? 산하작은아이들 39
이상교 지음 / 산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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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 하나 85 ― 사랑 잃고 돈 심은 자리에 시라는 씨앗 하나를
 : 이상교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 책이름 : 먼지야, 자니?
- 글ㆍ그림 : 이상교
- 펴낸곳 : 산하 (2006.5.12.)
- 책값 : 9500원



 (1) 어린이를 보는 어른 삶


 옆지기가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한테 젖을 물린 채 노래를 불러 줍니다. 또는 아기를 눕힌 채 가슴을 살살 토닥이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 얼굴에 잠이 가득한데 제대로 잠들지 못하면 저도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기가 잠에서 깨어 놀고 싶다고 할 때에도 아기를 어르거나 놀리거나 안으면서 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른 아기 어머니도, 또 아기 아버지도 이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아기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기보다는 노래테이프를 돌리거나 노래시디를 돌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머니 목소리나 아버지 목소리보다는 텔레비전 소리를, 또 셈틀 소리를, 또 손전화 소리를, 또 숱한 기계소리와 차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사〉

 “이거 너 줄까?”
 개울가에서 주운 거라며
 짝이 돌멩이 한 개를 내게 주었다.

 새알처럼 매끈매끈한
 돌멩이 한 개
 내 손에
 들어왔다.

 짝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쏙, 이사 들어왔다.


 지난날 국민학교에 다닐 적에 동시를 읽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동시 외우기 숙제가 꼭 있었고, 국어 시간에는 무서운 선생님이 시외우기를 한 사람씩 꼬박꼬박 시키곤 했습니다. 시 하나를 막힘없이 낱말 하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면 지나가지만, 낱말이나 토씨 하나라도 틀렸다가는 안경 낀 그 선생님 오른손에 들린 굵직한 몽둥이가 어느새 우리 머리통까지 날아와서 딱!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시를 싫어하지 않았고, 시 외우기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빈틈없이 외워서 읊지 못하면 무시무시하게 내리치는 몽둥이 때문에 시를 가까이하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습니다. 숙제로, 또 백일장 과제로 시를 깔짝깔짝 대기는 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나 꿈을 글 하나에 살뜰히 담아내는 일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동시를 외우던 날이 스물 몇 해가 훌쩍 지나간 옛날 일이 됩니다. 우리 아기를 생각하면서 동시모음 하나 쥐어 봅니다.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학교 갈 나이는 아직 멀었는데, 우리 아이도 학교에 다닐 무렵, 그 학교 교사는 우리 아이를 비롯해 숱한 아이들한테 시 외우기 숙제를 낼는지, 또 시 외우기를 못하는 아이한테 매질을 할는지, 시를 외우다가 토씨나 낱말 하나 틀리는 아이를 얼굴이 벌개지도록 나무라다고 손찌검을 할는지 궁금해집니다.


 〈책이 된 꽃〉

 꽃이 책이다.
 나비가 읽고 가는
 책.
 꽃내 스민 갈피 갈피를
 더듬이로 읽고 간다.

 꽃이 책이다.
 바람이 읽고 가는
 책.
 새로 돋은 침을 묻혀
 소슬랑소슬랑 넘겨 읽는다.

 꽃이 책이다.
 해님이 읽고 가는
 책.
 포시시 눈맞춤으로
 총총총 읽어 내린다.
 ……



 나이가 들어서 동시를 다시 읽고, 어린이시를 새로 읽습니다. 동시는 어른이 아이한테 베풀어 주는 선물이고, 어린이시는 어린이 스스로 즐기고자 쓰는 시이면서 어린이 동무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인 한편, 우리 어른한테도 건네주는 선물입니다. 동시는 처음부터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쓰는 시이기에, 어른들이 동시를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어린이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동시를 쓰는 어른들 마음결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마다 담긴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고, 어린이와 함게 기뻐할 수 있어요.

 마음을 맑게 해 주는 동시가 아니라, 마음 맑은 어린이가 앞으로도 마음 맑은 어른으로 크고, 언제까지나 마음 맑은 사람이 되어서, 어린이 스스로와 어린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자연 목숨붙이와 삶터를 맑게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비손이 담긴 동시입니다. 마음이 맑은 어린이가 쓰는 어린이시가 아니라, 어린이 눈높이에서 꾸밈없이 쓰는 어린이시요,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시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쓴 어린이시를 읽으면, 어린이 마음을 잃은 어른들이 미처 깨닫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잘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가운데, 어린이가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무슨 사랑을 나누는지를 곱씹을 수 있습니다.


 〈먼지〉

 책장 앞턱에
 보얀 먼지.

 “먼지야, 자니?”

 손가락으로
 등을 콕 찔러도 잔다.
 찌른 자국이 났는데도
 잘도 잔다.



 아기는 저한테 장난을 치는 어른을 알아차립니다. 아기는 저한테 사랑을 쏟는 어른을 느낍니다. 아기는 저를 괴롭히는 어른을 알아봅니다. 아기는 저를 어루만져 주는 어른 손길을 압니다.

 아기는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을 할 줄 모르기에, 어설픈 어른들은 아기가 어른들 마음이나 뜻을 모르려니 잘못 짚곤 합니다. 그러나 말마디에 담기는 기운이 있고, 눈빛과 몸짓에 배인 낌새가 있습니다. 몸으로 살피는 아기이고, 마음으로 얘기 나누는 아기입니다. 참되게 기울여 주는 마음씀을 아는 아기이고, 사랑으로 다가와 주는 매무새를 느끼는 아기이며, 믿음으로 껴안으려는 손길을 붙잡는 아기입니다.

 우리들 어른은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문화를 하고 교육을 하고 과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한다고들 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를 하는 동안 우리가 거쳐 왔던 어린 나날을 돌아보고, 지금 어린 나날을 보내는 아기를 둘러보며, 앞으로 태어나 자랄 아기를 톺아볼 수 있다면, 스스로 멈추어 고이는 일이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날을 못 보고 오늘날을 못 느끼며 앞날을 못 살피기에, 자꾸만 낡은 틀과 법과 테두리에 갇힌 채 얕은 셈속과 검은 돈과 먼지에 지나지 않는 끈만 부둥켜안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매듭〉

 엄마를 좇아
 바느질을 한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맨다.

 “매듭을 지어 놓아야
 실이 풀리지 않는단다.”
 ……


 옆지기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나들이를 가서 열흘 남짓 머물고 있습니다. 아기한테 이모가 되는 처제는 바깥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거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면서도 일산집에 머물고 있는 귀여운 아기가 생각이 나서 일찍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인천과 일산을 오가면서 일을 하느라 고달프지만, 아기 기저귀를 빨거나 안고 어르며 노래를 불러 주거나 함께 놀 때에는 시름이 가십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어른 된 우리들이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매무새만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아이든 이웃 아이이든 살붙이 아이이든’ 둘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며 껴안을 줄 아는데다가 돕고 함께할 줄 아는 몸짓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세상에는 따스함과 넉넉함이 좀더 넓고 깊이 자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배고파 칭얼대는 아기를 보면서 배고파 울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고, 졸려서 잠들려는 아기를 보면서 잠잘 곳이 없이 한데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며, 신나게 엄마젖을 빠는 아기를 보면서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고단한 비정규직과 장애인과 이주노동자와 농사꾼과 낮은자리 일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큰이모부〉

 큰이모부는 착하다.
 나를 혼내지도 않고
 일찍 자라고 하지도 않는다.

 옷을 벗길 때는
 코나 귀가 뒤집히지 않게
 조심조심 벗겨 준다.
 코를 풀게 할 때도
 휴지로 코 밑을 세게 닦지 않는다.
 ……



 오늘도 인천으로 일하러 돌아오면서, 전철간에서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을 수없이 부대낍니다. 수없이 부대끼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철간 한쪽 구석에 서서 사람들 물결에 휩쓸리거나 거슬리지 않고자 있어도, 어김없이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책을 펼쳐 밑줄을 그어 가며 읽고 있는데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미안하다 소리 한 마디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근 때라 미어터지는 전철 하나를 보내고 뒷차를 기다리며 맨 앞자리에 서 있는데, 어느새 제 앞으로 끼어들어 먼저 올라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그쪽을 쳐다보게 됩니다. 때때로 자기가 치고 지나간 사람 쪽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눈을 마주칩니다. 이때, 고개라도 살짝 숙여 준다면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가볍게나마 가라앉을 테지만, 똥씹은 얼굴이라든지 그예 메말라 비틀어진 얼굴로 콧방귀 뀌듯 잽싸게 돌려버리는 고갯짓을 볼 때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집니다.

 이 나라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아니된 지 오래되었고, ‘동방 예의지국’이란 웃기는 옛날이야기가 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낯모르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굴 수 있는 이 못나고 헐벗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언제부터 이렇게 골고루 퍼져나갔을까 궁금합니다. ‘이웃사촌’ 사라진 지 까마득하다고 하지만, ‘이웃경쟁자’나 ‘이웃도둑’처럼 여기는 마음은 참으로 언제부터 우리 마음밭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강아지풀〉

 무릎에 올려
 안아 주고 싶다.
 강아지풀.
 ……



 돈만 버느라 마음이 돈다발처럼 차가워지고 말았는가요. 시 한 줄 읊을 줄 모르고, 아기한테 또 어린이한테 또 푸름이한테 또 젊은이한테 살가이 시 한 줄 읽고 나눌 줄 모르면서, 오로지 돈만 움켜쥐려고 하는 동안 가슴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말았는가요.

 퀴즈대회에 나가서 ‘우리 말 달인’이나 ‘퀴즈 달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눌 아름다움은 하나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말았는지요. 대학 졸업장 없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슬기와 가르침은 한줌도 챙기지 않는 얼간이가 되고 말았는지요.


 〈귀뚜라미〉

 밤길을 걸어 돌아오는데
 컴컴한 구석빼기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귀뚤귀뚤 귀뚜르르르

 귀뚜라미가 울자
 컴컴하던 그 구석빼기가 환해졌다.



 아기한테 동시 하나 읽어 주면서 제 마음속으로도 동시라는 씨앗 하나를 심습니다. 아기와 나란히 누운 옆지기한테 동시 하나 읊어 주면서 제 가슴속으로도 동시라는 새싹 하나를 보듬어 봅니다.


 (2) 동시모음 《먼지야, 자니?》


 1949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예순 나이가 된 이상교 님이 쓴 동시를 모은 《먼지야, 자니?》를 읽습니다. 동시모음치고는 좀 두툼하고 책값이 센데, 시는 어렵지 않게, 또 금세 읽어 내립니다. 말끔하게 읽히고 깔끔하게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시와 함께 그림을 엮어 놓고 있어서, 시를 읽는 동안 말마디를 입에서 굴리고, 그림조각을 눈으로 담습니다.


 〈산새〉

 산새는
 노랫소리가 곱다.

 산에서 나는
 동그랗고
 예쁜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노래가 동글동글 곱다.

 산새는
 날개 빛깔이 곱다.

 산에서 나는
 가지가지 빛깔
 산열매를 따 먹고 살아
 날개가 알록달록 곱다.



 드문드문 군더더기가 있네 하는 대목이 보입니다. 한 줄 또는 석 줄쯤 슬쩍 덜어내면 한결 매끄러우면서 깊이가 더해질 텐데 싶은 대목이 보입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도무지 겪어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쓴 대목이 보입니다.

 냇물이 말라 버린 대한민국이지만, 냇물이 남아나게 하지 않는 이 나라요, 그나마 냇물이 남아서 흐르는 곳에서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주워 와 책상맡에 놓거나 동무한테 선물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겠습니까. 무시무시한 물길이 서울부터 부산까지, 또 서울에서 인천으로 난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품을 쓴다는데, 무슨 동시가 있고 어린이시가 있으며 어른시가 있을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산에는 산새가 아닌 부동산투기만 있고, 그나마 남은 산에는 케이블카를 놓느니 구멍을 뚫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내느니 하고 시끌벅적한 이 나라입니다. 그나마 도시에서 참새나 비둘기를 구경하기도 수월하지 않을 뿐더러, 참새와 비둘기는 새로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 되었는데, 그러면 ‘새’란 어떤 짐승을 가리키고, 새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는 좀처럼 생각해 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부모님 자가용으로 학교에 갔다가, 노란 학원차를 타고 학원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오늘날 아이들인데,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도 이와 똑같은 굴레를 뒤집어써야 할는지, 앞으로는 달라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두 다리로 걸어서 학교에 가거나 자전거를 몰고 학교에 가거나 버스를 잡아타고 학교에 갈 아이들이 늘어날 수 있을는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들하고 골목길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도 골목길은 차츰차츰 사라질 뿐더러, 골목길이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 우리 동네에서조차 아이들은 걷지를 않고 차를 탈 뿐입니다. 골목꽃과 골목빨래와 골목집과 골목사람 자취를 나누고 싶어도 학원에 매이고 시험교재와 학습지에 매이게 되는 아이들이니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섬돌 밑에 줄기를 밀어낸 길풀을 들여다보자고 할 수 없습니다.


 〈봄눈〉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씨.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꽃씨.

 흙에 발이 닿자마자
 풀씨, 풀꽃씨 내려놓고
 보풀보풀 봄눈 숨지고 만다.

 숨진 자리마다
 풀은 돋아 자라고
 눈송이만 한 풀꽃을 매단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굴리거나 눈싸움을 하거나 눈놀이를 즐기는 우리들이 아니라, 찻길에서 차가 못 다닐까 근심스러워 염화칼슘 뿌려대는 어른이 되고 만 우리들입니다. 고작 차유리에 내려앉은 얇은 눈더미를 긁어서 대충 뭉쳐서 던지고 끝납니다.

 사랑을 잃은 어른이라 사랑을 못 얻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사랑 잃거나 버린 자리에 돈을 끼워넣었으니, 돈은 넘치고 쎄서 모자람 없이 장난감을 사고 엠피쓰리를 들으며 알록달록 새옷을 차려입는 아이들이 되어 가는구나 싶습니다.

 동시가 박제가 되고, 어린이시가 논술지옥이 되는 때입니다. 《먼지야, 자니?》라는 동시모음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쓰다듬습니다. (4341.12.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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