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소중해요
국제앰네스티 지음, 김태희 옮김, 니키 달리 외 그림 / 사파리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한테 틀림없이 없는 책이기는 한데


- 글 : 국제엠네스티
- 그림 : 존 버닝햄을 비롯해 스물일곱 사람
- 옮긴이 : 김태희
- 펴낸곳 : 사파리 (2008.9.30.)
- 책값 : 12000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야 합니다. 밥과 옷과 집, 이 세 가지는 누구한테서도 빼앗을 수 없을 뿐더러 빼앗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움직이는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며 크고작은 사고로 살림살이가 힘겨운 사람들을 죽음 구덩이로 내몰고 있습니다. 오로지 경쟁, 남보다 앞서야 하는 경쟁, 남을 밟고 올라서도록 하는 경쟁만 나돕니다. 이러다 보니, 어른이 읽는 책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읽히는 책에서도 경쟁을 넘어 사랑과 믿음과 나눔이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줄거리를 제대로 못 담아내곤 합니다. 억지스런 가르침이나 우격다짐 같은 충효가 아니라, 살갑게 받아들일 아름다움과 고맙게 받아먹는 깨우침이어야 할 텐데, 자꾸만 ‘골든벨’이나 ‘우리 말 달인’과 같은 지식잔치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서른 가지 조항에 따라 그림 하나씩 넣어 엮은 책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는, 선언은 있으나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실천도 뒤따르지 않지만 한국땅에서는 거의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인권 문제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스물여덟에 이르는 그림책 작가들이 보여주는 재미나고 톡톡 튀는 그림결은 우리가 미처 못 보거나 못 느낄 ‘우리 둘레 이웃과 동무가 나와 함께 누릴 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그려낸 작가들이요, 아이들이 즐겁게 받아쥐는 그림책을 엮어낸 작가들이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들도 함께 즐겨보는 그림책을 펴낸 작가들입니다. 다 다른 나라에서 다 다른 삶을 꾸리는 동안 저마다 달리 부대끼거나 부딪힌 삶 한 자락들이, 그림책 한 권에서 골고루 섞이면서 무지개 빛깔로 새삼스레 피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고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나서는, 한숨이 푸우우욱 하고 나옵니다. 서른 가지 세계인권은 우리 삶하고 그다지 이어져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 도시로 쏠리며 무너지거나 고달프게 되는 시골 농사꾼 삶,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학력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사회 얼거리, 돈-힘-이름 세 가지를 움켜쥔 권력자와 기득권이 제 밥그릇을 튼튼히 지키려고 공직과 언론을 쥐고 흔드는 모습, 인권을 짓밟는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숨쉬는 정치 흐름, 교육이 아닌 입시밖에 없어서 아이들이 벼랑에 내몰린 교육 터전, 돈 없으면 못난쟁이로 여겨지는 경제판, 아이 밥상뿐 아니라 어른 밥상에 유전자조작을 하고 비료와 항생제로 찌든 먹을거리만 올리게 되는 형편, 남북이 아직까지 끝없이 군대를 크게 키우며 무기산업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보건복지는 뒷전인 나라,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 모든 문제를 바로보거나 고치도록 마음먹지 못하게 되고 만 얼거리, 값비싼 아파트만 새로 짓고 서민 살 골목집은 때려부수는 토건 왕국, 차 없으면 길거리에 나다닐 수 없게끔 짜여진 도시계획 …… 2000년대 세계인권선언이라면, 아니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권리’를 말하자면 이렇게 간지러운 곳을 긁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땅 우리 아이들한테 두루뭉술한 ‘명제’만 읽도록 할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옆집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고 그이는 어떤 일로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지를 꼼꼼이 짚어내고 밝혀내면서 아이 스스로 세상을 알아보면서 세상을 밝힐 작은 촛불 하나 켤 수 있게끔 이끌어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만, 허울뿐인 외침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인권선언이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라도 달랑 하나쯤은 우리 나라 책방과 도서관에 꽂히면서, ‘여보시오, 인권이란 게 있읍디다’ 하고 말건넴이라도 해야 하는 우리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한테 틀림없이 없는 소중한 그림책이지만 알맹이가 빠져 있어 아쉬운데, 그래도 이만한 책이라도 한 권 펴내 주니 고맙습니다. (4341.10.25.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왼손 빨래와 책읽기


 나흘 앞서부터 오른어깨가 전기라도 먹은듯 결리더니, 그제부터는 오른손목까지 결립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결릴까 궁금하지만, 지난날 자전거 타고 한창 다닐 때 뺑소니 차에 치여 오른어깨며 오른손목이며 오른팔꿈치며 망가지다시피 다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때 되면 아프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하여, 날마다 수북히 쌓이는 아기 천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애를 먹습니다. 옆지기가 아이를 낳은 지 일흔 날쯤 되는 만큼 몸은 어느덧 나아져서 혼자서 하루치 기저귀 빨래를 해내기도 하지만, 아무리 하루치 기저귀 빨래를 혼자서 해낸다고 하여도 옹글게 나아진 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루 힘을 빼면 이튿날은 곁에서 보기에 안쓰럽도록 몸이 축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아기를 어르고 달랠 때에도 고단해 보입니다. 멍해지지요. 서로서로 힘들고 지치는데, 큰식구가 아닌 작은식구로 아이를 돌보자니 힘들고 지칠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집식구는 큰식구가 아닌 작은식구들뿐입니다. 작은식구가 되어 아이를 낳으니, 집식구 가운데 하나는 바깥에 돈 벌러 나가야 하고, 한 사람이 남아서 오로지 혼자 애를 보아야 하는데, 지치디지쳐서 어디 시설에라도 맡기고 싶어지고, 돈을 주고라도 사람을 써서 돌보게 하고 싶겠구나 싶습니다. 아이 키우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작은식구가 아니랴 싶습니다.




 나흘 앞서는 어깨 결림을 느끼면서 왼손 빨래로 조금 하다가 거의 오른손 빨래로 했는데, 오른손목이 결리는 그제부터는 거의 왼손 빨래를 하다가 살짝 오른손 빨래를 합니다. 처음 왼손 빨래를 해 본 때는, 신문배달을 하다가 오른손가락이 다쳐서인데, 99년이었던가, 신문배달을 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뒤에서 자전거를 들이받은 뺑소니 사고로 오른손목이 맛이 갔습니다. 그때는 죽지 않고 오른손목만 망가져서 한숨을 돌렸다고 할 텐데, 이제 와서 그때 그 아픔을 떠올려보았자 다친 오른손목이 나아질 일이란 없고, 다만, 그때 그렇게 다치면서 한 달 남짓 오른손 빨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밥숟가락 들기도 어려웠는걸요. 그래, 처음 오른손가락이 다칠 때 조금씩 왼손 수저질을 익히고 왼글씨 쓰기를 해 보다가 그때 한 달 남짓 끙끙대며 왼손 빨래를 하고 왼손 젓가락질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른손목이 많이 나아진 뒤로는 오른손으로만 하는 일을 크게 줄이고, 왼손으로 일손을 나누었어요. 셈틀을 쓸 때 다람쥐를 왼쪽에 놓고 씁니다. 오른쪽에 몰려 있는 숫자 글쇠를 안 쓰고 자판 위쪽에 한 줄로 있는 숫자 글쇠를 씁니다. 이 모두 오른손 짐을 덜고 왼오른손이 고르게 쓰이도록 하는 일입니다.

 엊저녁 열 시쯤 잠이 들었습니다. 세 식구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힘들기도 했고, 옆지기가 많이 멍하다고 해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저도 일감이 잔뜩 밀려 있고 빨래감도 우리를 기다리지만 다 미루고 잠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찍 자니 아기도 잘 자 주어 고맙기도 했지만, 저는 새벽 한 시부터 잠에서 깨었습니다. 새벽에 깨어 아기 기저귀를 갈고 나서 ‘오늘은 이제부터 일어나서 일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가, ‘아니야, 그래도 한 시간은 더 자야지’ 하고 도로 누워서 두 시에 다시 깼다가 네 시에 벌떡 일어납니다.

 네 시 반쯤, 옆지기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더 자도 될 텐데, 일찍 잔 까닭에 일찍 일어나서 말똥말똥해지는구나 싶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집에서는 온 식구가 일찍 자고 아빠 엄마가 새벽녘에 일어나 밀린 일손을 조용히 하면 훨씬 수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가 깨어 같이 놀아 달라는 낮에는 집안일이고 뭐고 붙잡기 어렵거든요. 차라리 온 식구가 일찍 자자고 하면 아기도 잡니다. 그러나 일이 많아서 늦어진다고 늦게까지 안 자면 아기도 안 자요. 그런데 용하게도 아기는 새벽에는 안 일어나 줍니다. 아침까지 내처 잡니다. 이리 고마울 데가 없는데, 어쩌면, 아기가 우리 두 사람을 헤아려 주는지 모릅니다.

 밀린 일을 어느 만큼 마무리하고 나서, 씻는방으로 가서 빨래를 합니다. 기저귀 일곱 장과 배냇저고리 한 장과 수건 한 장. 아기 똥오줌이 묻은 옆지기 옷과 속싸개가 있는데, 남은 빨래는 아침에 해 뜨면 하려고 남겨 둡니다. 오늘은 모든 빨래를 왼손 빨래로만 합니다. 햇수를 따지면 벌써 열 해가 되는 왼손 빨래인데, 아직 오른손 빨래만큼 비빔질이 잘되지는 않습니다. 오른손이 다치거나 아플 때마다 하기는 했던 왼손 빨래고, 오른손 빨래를 하는 틈틈이 왼손 빨래를 하기는 했지만, 제가 오른손잡이라 잘 안 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아픈 오른팔을 더 쓰기 어려우니 왼손으로만 북북 빠는데, 조금씩 비빔질 힘이 잘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문득, 지난달께 우리 도서관에 취재를 왔던 어느 촬영기사가 묻던 말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래를 잘하세요?”

 혼자서 살림 다하고 살면 저절로 하게 되는 빨래인데. 세탁기를 비롯한 기계문명을 아예 안 쓰거나 되도록 덜 쓰려고 하면 마땅히 하게 되는 손빨래인데. 내가 남자라 그렇지, 내가 여자였다면 그렇게 물어 보지 않았을 텐데. 여자가 아닌 남자라 해도 집살림을 알뜰살뜰 할 수 있도록 매무새를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비빔질을 하면서 문득, 세상사람이 ‘한 사람 삶’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외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또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고등학교 때인데, 반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동무들한테 묻던 말. “야, 넌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 전교에서 1등을 홀로 차지하는 동무녀석은 이 물음을 꽤 자주 들었는데, 그 아이 지능지수는 저보다 한참 낮았고 반에서 그럭저럭 공부하는 동무들하고 엇비슷했지만, 시험성적은 꼭 높았습니다. 동무녀석은 늘 수줍게 웃으면서, “야, 내가 머리 안 좋은 건 너희들도 알잖아. 그냥 부지런히 하면 돼.”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동무녀석을 가만히 보면, 참 부지런히 공부에 파고들었고, 한번 파고들면 옆에서 떠들어도 떠드는 소리를 못 듣고 교과서나 참고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타고나기를 마음모으기 잘하는 매무새였는지 모르나, 그런 타고남이 어느 만큼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보다는 그 동무녀석 스스로 자기한테 무엇이 모자라는 줄 또렷이 깨달으면서 자기가 바라는 길로 나아가고자 날마다 무던히 힘쓴 보람이 그런 시험성적으로 빛을 보지 않았으랴 싶어요.





 오늘 새벽, 왼손 빨래를 하면서 동무녀석을 떠올리고, 또 사람들이 저한테 뻔질나게 물어 보는, “어떻게 헌책방에서 그런 드문 책을 잘 찾아내셔요?” 하는 말, “어떻게 좋은 책을 찾아내어 읽어요?” 하는 말을 곱씹습니다. 옛적 동무녀석이 다른 동무들한테 하던 말처럼, “부지런히 헌책방을 다니면 책이 저절로 보여요.”, “좋다 나쁘다 가리지 말고 이 책 저 책 골고루 부지런히 오래오래 읽다 보면 저절로 느껴요.” 하는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한 왼손 빨래가 아니라, 한 해 두 해 한다고 잘할 수 있는 왼손 빨래가 아니라, 다섯 해 열 해 스무 해씩 해야 비로소 익숙해지는 왼손 빨래이며(왼손잡이한테는 오론손 빨래), 막다른 골목까지 밀리고 또 밀리면서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면서 치러내어 몸에 배도록 하는 왼손 빨래입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스승들한테 배우기도 하지만,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모두 바치고 바쳐 열 해고 스무 해고 들이면서 스스로 눈을 뜨게 되는 책읽기입니다. 가난뱅이라서 못 찍는 사진이 아니라, 가난뱅이임에도 죽어라 알바 뛰고 뭐 뛰고 해서 필름값 벌고 사진기값 모아 애써 한 장 두 장 찍는 가운데 몸뚱이로 배우는 사진찍기입니다.

 추천도서목록에 적힌 책을 줄줄줄 찾아서 읽는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멋진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좋다는 책 몇 권 읽었다 하여도 괜찮은 사람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알려주는 책이라든지, 훌륭한 분이 건네주는 책이라든지, 아름다운 이가 선물해 주는 책 몇 가지를 읽는다고 하여 우리 삶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면서 우리 넋과 얼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피를 바치고 살을 들여야 합니다. 내 팔을 잘라서 바치듯, 내 다리를 베어서 드리듯, 온몸과 온마음을 쏟지 않고서야 ‘책 읽는 매무새’를, ‘책 알아내는 눈길’을, ‘책 보듬는 마음결’을, ‘책 꿰뚫는 가슴’을, ‘책 쥐어드는 손길’을, ‘책 짊어지는 등판’을 갈고닦을 수 없습니다. (4341.10.24.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지구온난화 시대에 도시와 시민이 해야 할 일
정혜진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도시에서 착하게 사는 길을 어떻게 찾을까
 [잠깐 읽기 16] 정혜진,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책이름 :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글쓴이 : 정혜진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07.11.7.)
- 책값 : 1만 원



 (1) 내가 찾는 길


 옆지기가 스탠 냄비를 장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노래하기에, 개수대 밑에 쟁여 놓기만 하고 안 쓰던 스탠 냄비를 꺼냅니다. 혼자 살던 예닐곱 해 앞서, 옛동무와 어머니한테서 받은 스탠 냄비인데, 혼자 먹고살면서 쓰기에는 크고 무겁다고 느껴서 고이 모셔 두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 냄비들을 꺼내니 옆지기가 깜짝 놀랍니다. 왜 이 좋은 스탠 냄비를 여태 쓰지 않고 그렇게 두었느냐고.

 뒷통수를 긁적입니다. 어떤 냄비를 써야 하는가를 잘 몰랐고, 냄비 하나가 우리 밥차림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왔습니다.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기도 했으나, 저 스스로 알아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선물해 주는 냄비는 으레 값비싼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늘 값싼 냄비를 쓰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저 비싼 녀석을 쓸 까닭이 없으리라 생각했고, 또 아깝다고 여겼으며, 선물 받은 모양새 그대로 모셔 두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쓰던 양은 냄비며 법랑 발린 지짐판이며 모두 개수대 밑으로 들어가고, 이제까지 개수대 밑에서 잠자던 네다섯 개나 되는 스탠 냄비가 밖으로 나옵니다. 전기밥솥도 그만 쓰기로 하고 냄비로 밥을 하고, 기름을 두르지 않고 달걀을 부치고 볶음밥을 합니다. 물을 안 넣고 감자와 고구마를 찝니다. 찐빵을 찌거나 구을 때에도 물을 붓지 않고 기름을 두르지 않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 스탠 냄비는 훨씬 빨리 달궈지고 더욱 오래 따뜻함이 이어갑니다. 끼니에 맞춤하게 짓는 밥은 여태까지 먹던 밥맛과는 견줄 수 없이 맛있습니다.


..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거나 절약하는 행위는 지역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 에너지를 덜 쓰려면 외곽에 있는 쇼핑몰보다 동네 슈퍼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혼자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이웃 혹은 직장 동료와 카풀을 하면 에너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쓰게 된다. 좀더 걷고 자동차를 덜 쓰면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 지역 상권이 활성화되고 지역사회 전체적으로는 공기가 더 맑아지며 교통 혼잡 비용이 줄어든다. 절약해서 남는 돈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면 지역사회 전체 문화 수준도 올라간다 … 거대 기업이 들어와서 단지 사업의 목적만을 위해 옥수수를 싹쓸이할 때에는 농산물값 폭등까지 이어지지만, 도시 공동체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함께 바뀔 때에는 노는 땅이 에너지 작물을 키우는 땅이 되고, 깨끗한 기름을 쓸 수 있고, 폐기름을 줄이게 되며, 공기도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  (6, 62쪽)


 곰곰이 돌아봅니다. 내가 바꾸지 못한 삶은 무엇이고 내가 바꾼 삶은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 마음을 기울이고 어디에는 마음을 못 기울이고 있는지. 내 스스로 바꾸지 못하겠다며 손을 흔드는 삶은 무엇이고, 미처 깨닫지 못할 뿐 바꾸려 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삶은 무엇인지.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라는 책에 ‘자동차 별거기’라고 해서 나이먹은 분으로서 자동차를 멀리하고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자전거 타기만큼은 좀더 찬찬히 생각하면서 이 하나는 바꾸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던 때, 신문배달로 먹고살며 짐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긴 했으나, 서울 시내 헌책방을 찾아나설 때에는 전철을 탔습니다. 이문동에서 안암동까지는 자전거로 갔어도, 혜화동이나 종로부터는 전철로 움직였습니다. 아직 서울이 낯설기만 한 시골도시 사람은 짐자전거로 멀다고 느껴지는 길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다섯 해쯤 서울에서 지내다가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출판사로 자리를 옮기니 자전거하고 멀어집니다. 집과 일터가 퍽 멀기도 했지만(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강서구 방화동) 자전거로 오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신문배달 하던 때에는 달삯이 아주 적기는 했어도 내 자전거가 있었기에 따로 자전거 장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니 내 자전거는 없으나 일삯은 예전과 견주면 일고여덟 갑절이라서, 살림돈 십만 얼마와 책값과 필름값 삼십만 원을 빼고 모두 은행에 맡겼고, 자전거 없이 보내던 삶은 오래지 않아 끝내고 처음으로 제 돈을 주고 제 자전거를 장만합니다.

 자전거를 장만하면서 서울시내 꼼꼼길그림도 함께 장만하면서 길을 눈에 익힙니다. 이제는 전철이 아닌 자전거를 몰며 헌책방 나들이를 다닙니다. 종로구 평동에서 신촌으로 오가는 길은, 전철은 빙 돌아서 가는데다가 버스 타는 곳은 집에서 너무 멀어서 으레 사십 분이나 걸리곤 했는데, 자전거로 움직이니 짧으면 8분, 길어도 12분이면 넉넉했습니다. 이제, 웬만한 곳은 모두 자전거로 움직이는 버릇이 붙고, 대중교통인 버스나 전철마저 가까이하고픈 마음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도, 옆지기와 함께 돌아다닐 일이 아니라면 혼자서 자전거를 몰고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갈 때에도 자전거를 타면 전철로 갈 때와 거의 같거나 좀더 빠릅니다(동인천에서 마포큰다리까지 50분, 광화문까지는 1시간 2분). 다만, 자전거를 타면 책을 못 읽을 뿐입니다.

 그래, 이 하나, 자전거 타기만큼은 아주 잘 바꾸었다고 느낍니다. 모르는 일인데, 신문배달을 자전거로 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가 많이 익숙해졌고, 신문배달 짐자전거로 웬만한 오르내리막을 두루 꿰다 보니 자전거로 서울 시내 돌아다니면서 아무런 어려움을 못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저탄소 도시’나 ‘친환경 에너지 도시’처럼 온실가스 배출 감축, 재생가능 에너지 보급 확대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 지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도시민은 지구 표면의 2%에서 자원의 75%를 소비한다 … 어떤 지자체에서는 화석연료의 안락에 길든 도시 생활을 바꾸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설치에만 열을 올린다. 그런 단체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는 한 건’을 원하고 있다 ..  (34∼35, 58쪽)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자전거 다음으로는 옷이 있을까. 신문배달 하던 때에는 늘 헌옷 모으는 통에서 옷을 주워서 입었지(예전에는 옷 모으는 통이 열려 있었습니다). 또, 가까운 대학교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나눠 주는 옷을 슬쩍 끼어서 얻어입기도 하고(우리 신문 독자인 학생들이니까). 형이 안 입는 옷을 치수가 많이 크지만 고맙게 물려입기도 하고. 길에서 2000원에 파는 반바지 몇 벌 사다가 입고, 청바지 두어 벌은 길에서 5000원에 파는 녀석으로 장만했고. 출판사 사장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당신 아들내미가 안 입는 옷을 한 보따리 안겨 주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는 가게에서 주는 비닐봉지를 안 받고 천가방을 챙기며 다니는 버릇. 한 번 쓰고 버리는 나무젓가락을 새것으로 안 쓰고, 다른 이가 쓰고 버린 것을 주워서 씻어 말린 다음 가방에 챙겨넣고 다니면서 쓰는 버릇. 길바닥에 널부러진 종이조각이나 광고명함 주워서 책갈피로 쓰는 버릇. 둘레에 많이 버려지는 이면지를 내 공책이나 편지지로 삼는 버릇. 그리고 ……, 음, 세탁기 안 쓰고 손빨래 하기? 텔레비전 안 모시고 살기? 운전면허증을 아예 안 따기? 값싸고 질긴 고무신 신고 다니기? 음식물쓰레기가 아예 나오지 않게끔 포도알 포도껍질 사과알 사과속까지 냠냠짭짭 먹으면서 먹을거리 다스리기? 손전화기는 마르고 닳도록 쓰고 쓰다가 망가져서 더는 못 쓰게 되어서야 바꾸어 주기? 밑 닦을 때 휴지는 한 칸이나 두 칸만 쓰기?


 .. 차를 타고 달릴 땐 사람들이 아닌 차만 보였던 걸까.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 사는 풍경이 마치 신기한 이국 풍경인 듯, 자가용을 타지 않는 나는 그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던 풍경을 새삼스레 즐겼다 … 질적으로 검소한 것은 소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지 않고 필요한 기술이나 서비스에 돈을 쓰는 것을 뜻한다. 무분별한 소비로 괜히 쓰레기만 만들지 말고, 창의적인 기술과 서비스에 제값을 지불하자는 것이다 ..  (38, 65쪽)


 다음으로, 무엇을 쓰고 사는가 손꼽아 봅니다. 무엇보다 첫째로는 책. 둘째로는 필름. 셋째로는 술. 넷째로는 ……, 넷째, 넷째가 있나. 모르겠네. 이밖에 돈 나가는 데라면 집삯과 전기삯과 물삯 따위인데. 몇 군데 시민단체에 보내는 돈 얼마, 길에서 만나는 동냥꾼한테 건네는 돈 얼마, 성당에 내는 돈 얼마.

 그렇군. 쓸 데가 많지 않으니 처음부터 많이 벌 생각도 안 하는 듯하군. 출판사에서 일하던 때에는 비앙키 자전거 하나 갖고픈 꿈을 키웠는데, 이제 이 꿈은 이루지 못할 물거품이나 뜬구름이지. 아이를 키우려면 돈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지만,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을 뿐, 아이를 어디 학원에 넣을 일 없지 아이를 연예인처럼 예쁘장하게 꾸밀 일 없지 하니, 딱히 무엇을 더 쓰거나 누려야 할까 싶고.

 그저 재개발이니 재생사업이니 하면서, 우리처럼 밑돈 없는 사람이 겨우 깃들어 사는 골목집을 밀어내는 정부정책이나 없으면 더 바랄 일이 없습니다.


.. 인도는 분명히 차를 위한 공간이 아닌데도 도시 곳곳의 인도들이 차들로 점령당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신경질만 내고 나면 그만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차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인도로 올라가면 되니까. 그런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전동휠체어를 모는 노인들, 그리고 큰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은 … 걷다가 인도에 주차된 차들을 만나면 자전거를 탈 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차를 이곳에 주차한 이 사람은 예의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일까 … 차를 몰든 안 몰든 똑같이 낸 세금으로 닦아 놓은 도로를 그들은 질주하면서, 역시 세금으로 만든 인도까지 그들이 점령한다. 똑같이 세금 내면서 차를 몰지 않는 이들은 도로에 세금 퍼주고, 차량으로 인한 대기오염은 공유하고, 인도까지 운전자들에게 점령당한다. 그런데도 인도를 점령한 운전자들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  (148∼149쪽)


 늘 골목마실을 하면서, 틈틈이 동네 이웃을 만나면서, 꾸준히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맛보는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느낍니다. 돈을 많이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더 많이 누릴 수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5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5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50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자전거 타는 기쁨은 매한가지입니다. 보증금 없이 10만원짜리 달삯집에 살든, 보증금 천만 원에 달삯 없는 집에 살든, 싯가 이십억짜리 아파트에 살든, 또 몇 억에 이르는 아파트에 살든,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를 바 없을 뿐더러 사람 사는 즐거움이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니 자꾸만 남 앞에서 우쭐거리고픈 옷을 입고 차를 몰고 집을 얻지 않으랴 싶습니다. 마음이 허거프니 자꾸자꾸 남 위에 올라서면서 이웃나눔과 어깨동무하고는 멀어지면서 살지 않으랴 싶습니다. 마음이 메마르니 숱한 물질문명을 누리는 일이 세상 사는 기쁨인 줄 잘못 알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 몸마저도 망가뜨리지 않으랴 싶어요.

 자가용 끌고 출퇴근하면서 ‘운동이 모자라’ 헬스클럽에 가는 일은 얼마나 자기 삶을 좀먹는 일인가요. 몸 갉아먹으면서 한 해에 억대 연봉을 받는 일을 한다지만, 이렇게 일하면서 갉아먹힌 몸을 추스르느라 적잖은 돈을 보양식에 쓰고 어디 물 좋고 공기 좋은데 놀러가서 쉬는데 쓰고 있으니, 고작 며칠은 쉴는지 모르지만 정작 훨씬 긴 자기 삶은 쉼없이 휘몰아치며 두 손에는 아무것도 안 남고 말지 않습니까.

 더 빨리든, 더 많이든, 더 크게든, 누군가 더 천천히 가야 하기에, 또 더 적게 가져야 하기에, 또 더 작게 웅크려들어야 하기에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눌러야 더 빨라집니다. 동무를 꺾어야 더 많아집니다. 살붙이를 멀리하거나 등쳐야 더 커집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이처럼 무언가 누리는 듯 보이는 삶이, 참으로 우리한테 도움이 되거나 웃음꽃이 피어나게 해 주고 있는지, 차분하게 돌아보거나 곱씹을 수 있어야지 싶은데.


.. 술값 몇 만 원 아끼는 것과 전기요금 몇 만 원 아끼는 것은 간접비용의 차원이 다르다. 술값에는 간접비용이 별로 없다. 과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전기요금의 뒤에는 원자력 발전소 뒤치다꺼리 비용, 송배전 인프라 비용 등이 있다. 숨어 있는 비용을 계산한다면 술값 몇 만 원과 전기요금 몇 만 원은 결코 같은 몇 만 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과 다른 단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몇 만 원을 같은 금액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두뇌회전을 즐기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당신의 계산이 필요하다 ..  (212∼213쪽)


 (2) 스스로 길찾기를 막고 만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몇 해 앞서 《태양도시》라는 책을 펴낸 정혜진 님은 대구에 있는 〈영남일보〉 기자입니다. 우리 나라 기자가 보여주는 여느 모습을 돌아볼 때, 정혜진 님처럼 생태와 환경에 눈길을 깊이 두면서 ‘우리가 지금 삶터에서 좀더 아름다운 쪽으로 나아지는 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몹시 남다르면서 훌륭하다고 느껴집니다.

 여러 달 앞서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사기는, 나오자마자 책방에 달려가서 샀는데, 책을 사서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무거웠습니다. 무거움은 자꾸만 더해 갔고, 나중에는 응어리까지 맺히면서 풀리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고 책꽂이 한쪽에 꽂아 놓습니다. 여러 달 잊고 지냅니다. 그리고 다시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정혜진 님 책을 두 권째 읽는 동안, 어딘가 아쉽다는, 아니 어딘가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어쩌면 귀로 듣고 눈으로 읽는 이야기로는 반갑거나 놀라울는지 모르나, 정작 우리 스스로 어떻게 길찾기를 하면서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꾸려가는 삶을 일구면 좋은가 하는 생각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그 실마리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펼칩니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과다한 온실가스 배출이다. 이건 너무 많은 안락을 추구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문제의 원인을 부시나 다른 사람에게 돌릴 일이 아니다. 당신이 편하게 살아온 만큼 당신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성’이 출발이다 ..  (199쪽)


 정혜진 님 말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한테 ‘지구온난화’는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는 왜 생겨났을까요. ‘온실가스 배출’ 때문일까요? 그러면 온실가스 배출이란 무엇일까요? “너무 많은 안락을 추구하다” 보니까 생겨났다고 할 만할까요? 그러면 우리가 여태까지 누려온 “너무 많은 안락”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안락’을 누리면서도 조금도 ‘안락을 누린다’고는 여기지 않으며 ‘더 많은 안락’을 좇게끔 길들여져 있을까요? 왜 우리 사회와 교육과 문화와 정치와 경제 모두 ‘더 많은 안락’으로만 나아가고 있을까요? 정혜진 님이 몸담은 언론사 〈영남일보〉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기사를 실어서 대구 사람들한테 읽히고 있을까요? 정치가 어디로 나아가도록, 경제가 어떻게 꾸려지도록, 문화가 어떻게 뿌리내리도록, 교육이 어떻게 펼쳐지도록 바라면서 기사를 풀어내고 있을까요?

 우리들은 틀림없이 ‘뉘우쳐야(반성)’ 합니다. 지금처럼 꾸리는 삶이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좀먹는지 뉘우쳐야 합니다. 지구를 무너뜨리거나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어서 뉘우친다기보다, 무엇보다 내 삶을 망가뜨리고 내 삶터를 엉망으로 흔들며 내 몸과 마음을 내 손으로 갉아먹고 있음을 못 느끼며 살고 있는 지금 흐름을 뉘우쳐야 합니다.


..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없어서 안 쓰고, 낭비할 수 없어 아끼던 그런 시대는 지났다. 기후변화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우리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몇몇 훌륭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시의 풍요를 ‘건전하게’ 누리는 수준일 것이다 ..  (마무리글 / 229쪽)


 그러나 뉘우침은 첫걸음이 아니지만, 마지막 걸음도 아닙니다. 뉘우침을 넘어서 ‘삶을 두루 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눈’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뉘우침’을 한다면 마땅히 ‘지금 누리는 것 가운데 꽤 많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와 고해성사는 있는데 달라지는 삶이 없다’면, 이러한 회개와 고해성사는 거짓 회개와 껍데기 고해성사일 뿐입니다. 회개를 못하고 고해성사 또한 할 용기가 없을지라도, 다문 한 가지나마 자기 삶을 바꾸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됩니다. 하루에 한 가지가 어려우면 한 달에 한 가지, 한 달에 한 가지조차 어려우면 한 해에 한 가지씩 자기 삶을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우리 삶에서 ‘놓아도 되는 대목’은 놓으면서 바꾸어야 비로소, 어떤 정책이나 대책이나 대안을 나라나 지자체에서 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서민 스스로 ‘문화도시’도 이루고 ‘착한 도시’도 이루며 ‘깨끗한 도시’도 이루는 가운데 ‘살기 좋은 도시’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정혜진 님 책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할 수 있는 길찾기를 처음부터 금을 그어 놓고서 “아끼는 삶 = 과거로 돌아가는 것”인 듯 풀이를 내려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곳곳에 밑줄을 긋기는 하지만 선뜻 가슴으로 스며들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전하게’ 누리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또렷하게 밝혀 보이지 않고 ‘건전’이라는 낱말을 섣불리 쓰고 마니까, 입에서 까끌까끌하게 맴돌기만 할 뿐, 제 몸으로 스며들지는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는 “예전 시대로 돌아갈” 까닭이 없습니다만, “예전 시대에서 훌륭한 대목은 기꺼이 배워야” 합니다. 예전 시대에서 잘하던 대목, 예전 시대에서 놀랍게 이루어 낸 대목은 앞으로도 고개숙여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대체에너지만이, 새로운 대안운동만이, 새로운 기술개발과 유럽 선진국 사례 모으기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닙니다. 나중에 세 번째 책을 엮어낼 꿈을 품으신다면, 모쪼록, 앞선 두 책을 넘어서 주기를, 아니 앞선 두 책을 정혜진 님 스스로 밑줄을 그어 가면서 물음표를 찍고 찬찬히 읽어 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4341.10.21.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문학의전당 시인선 32
김정희 지음 / 문학의전당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하나 83 ― 시로 가고, 사람으로 가다, 사랑으로 가는 길
 : 김정희 시,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책이름 :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시 : 김정희
- 펴낸곳 : 문학의전당 (2007.4.30.)
- 책값 : 7000원



 (1) 시로 가는 길


 시인 한 사람 알고 지내면서 틈틈이 만나게 되면, 만날 때마다 시집 한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인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시인한테 몇 마디 듣고 이야기를 들어도, 또 물끄러미 시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시집 한 권 읽는다고 느낍니다.

 그냥저냥 책만 읽고 살다가, 이냥저냥 책쟁이들만 만나고 살다가, 뜻하지 않게 시인과 어우러지는 자리에 끼게 되면,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말없이 찻잔이나 술잔을 들거나 말없이 사진기만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 거나해진 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앉히며 말했다
 기왕에 가는 거
 저놈에 달도 태우고 가자꾸나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대소쿠리만 한 달이 끼어 앉았다
 셋이서
 창영동 고갯마루 길을
 달려 올랐다  (보름달 속으로 난 길)



 지난 7월 26일, 동네 헌책방 아주머니가 손수 나무질을 하여 마련해 놓은 조촐한 ‘시 다락방’에서 시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제 목소리를 제 빠르기에 맞추어 읽어 나가는 자리였는데, 이런 시읽기를 마친 뒤에 퍽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옮겨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멀거니 떨어져서 사진만 찍었고, 어느 만큼 거리를 지키면서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여느 사람하고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고, 시인을 둘러싼 사람도 시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시를 쓰고, 다른 사람은 시를 즐길 뿐이었지요.


 고양이 한 마리
 사차선 도로를 횡단 중이다
 화적 떼처럼 달겨드는 불빛파도를 헤치며
 이리저리 발을 놓는
 아찔한 곡예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은 좀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놈은 흰 차선을 보루 삼아 가까스로 生을 지켜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이 한 線 위에서 흔들린다
 놈은
 목숨줄을 당겨 잡고 힘껏 뛴다 그러나
 어느 자동차 속도의 칼날에 가차 없이 끊어져버리는
 줄.

 순식간에 바닥이 되어버린 놈을
 上弦이 내려다본다
 끝내
 이르지 못한 길의
 광고탑에 내 걸린 교통상해보험 현수막이
 한 옥타브 높게 울어댄다
 초저녁이다  (닿지 못한 길)



 오늘 저녁,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손주 돌잔치를 하는데, 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옵니다. 그러마 하고, 얼마든지 찍어 드립지요, 하는데, 같이 잔치자리에 가자면서, ‘우리 아저씨 오늘은 (택시) 운전 안 하고 술 드신다고 했는데, 술 드시지 말고 운전하라고 해야겠다’고 하시기에, ‘오늘 같은 날은 (택시기사인 분도 다른 사람이 모는) 택시 타고 가야지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삯을 안 받고 찍어 주는 돌잔치 사진이요 혼례잔치 사진이며 시읽는잔치 사진입니다.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나간 7월 끝무렵 시인 한 사람을 만나 찍던 사진도, 그저 부탁을 받으면서 찍는, 그러나 부탁만으로는 찍지 않고 나 스스로 그 시인을 마음에 담고 또 사진으로도 담고 싶어서 찍는 사진이었기에 늘 마음이 벅찹니다. 부풀어오릅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읽는이는 시를 소리내어 읊고, 사진쟁이는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사진기 단추 소리와 시 읊는 소리가 하나로 엮이고, 시인이 또박또박 적어내려간 글줄이 사진 한 장 두 장 올올이 새겨집니다.


 반세기 동안이나 吳氏네 식구들을 품어온 집이
 포클레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기왓장들 밑에 엎드려 있던 침묵과
 거기 기대어 허공 바라기 하던 담쟁이덩굴
 담벼락의 소변금지와
 밤 청춘들의 입맞춤을 눈감아주던 능소화가
 일순 세상 바깥으로 쓸려나간다

 길은 희미하다
 먼지로 돌아가는 것들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어댄다
 ……  (다녀가다)



 시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문화란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시읽는잔치 사진은 이백 장 가까이 찍게 되고, 저녁나절 시디 한 장에 구워서 이튿날 우편으로 시인한테 부칩니다. 시인은 사진을 찍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며 당신이 손으로 이름을 적은 시집을 한 권 내어줍니다. 그러나 저는 벌써 제 주머니에서 돈 칠천 원을 꺼내어 당신 시집을 사서 미리 읽었는데.

 손때 타며 읽은 시집은 한쪽에 꽂고, 손때 안 탄 말끔한 시집은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2) 사람으로 가는 길


 제 일터인 도서관에 오늘 찾아온 손님은 둘. 한 분은 “도서관 맞지요? 그런데 여기가 책을 파는 곳입니까, 보러 오는 곳입니까?” 하고 묻기에, “네, 여기는 책을 보는 곳입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는 고개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갑니다. 처음 들어서면서 “도서관 맞지요?” 하고 물었으면서, 왜 “책을 파는 곳입니까?” 하고 물었는지 궁금하지만, 그분한테는 당신 주머니를 털어서 책을 사는 일만 즐겁고,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고 돌아가는 일은 즐겁지 않으신 듯합니다.

 마음에 담는 책이기에 내 물건으로 삼지 못한다고 해도, 찬찬히 책장을 넘겨 읽는 동안 가슴이 꽉 차 오른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제 섣부르면서 짧은 생각이었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윽고 다른 손님 한 분 찾아옵니다. 조용히 책을 둘러보고, 이곳저곳 쌓여 있기도 한 책을 살며시 집어서 웃음 띤 얼굴로 펼쳐봅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제 일을 하다가, 매실을 탄 찬물과 찐고구마 하나를 내어드립니다. 손님은 발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한 권씩 끄집어내어 읽은 다음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책을 그 모습 그대로 즐겨 주는 모습이 고마워, 그동안 찍어 놓았던 골목길 사진 묶음을 슬쩍 건네며, “마음에 드시는 사진 있으시면 한 장 가지셔도 돼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도서관 빨랫줄에 줄줄이 걸어 두어도 괜찮지만, 반가운 손님한테 한 장씩 나누어 주어도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서관 책들을 바깥으로 빌려 주지는 않아도, 애타게 찾거나 바라는 분이 있으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그 책을 찾아내어 선물해 드리기도 합니다. 때때로.


 三伏고개 무사히 넘긴
 똥개 한 마리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실려 십정동을 떠난다
 누렁이는
   미안허다 미안허다아
 중얼대며 손 흔드는 노파의 가슴에다
 눈빛을 박은 채
 철창바닥에 엎드려 간다
 매일 핥던 밥그릇과 잔등에 머물던 주인의 손길
 누비고 다니던 골목의 냄새와
 사나운 기억들을 끌고
 아구탕 집 아리랑모텔을 지나
 중국식품점 모퉁이를 돌아
 간다
 ……  (십정동―이별)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으로 살아가는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발자국입니다. 내 모습, 여기에 이웃 모습, 그리고 우리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 보고자 합니다. 잘나지 않았으나 못나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남다르지 않으며 저마다 제 깜냥과 그릇에 따라서 채워 가는 모습입니다. 어여쁘거나 아름답다고 추켜세우지 않는 모습이나 꾀죄죄하거나 지저분한 모습도 아닙니다. 낡은 옷을 입었어도 옷이요, 오래된 신을 신었어도 신이며, 나이먹은 사람도 사람입니다. 나이가 먹었으니 빨리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며, 오래된 책이라 해서 케케묵은 책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책은 책입니다. 사진 또한 예술 사진도 다큐 사진도 아닌 그저 사진입니다. 사람을 찍어도 사진, 자연을 찍어도 사진입니다.


 해가 서쪽 하늘에 누운 한여름날
 볼일 보고 돌아오는 골목길에
 거친 숨소리 흩어진다
 고개 돌려보니
 한 사내
 홀로
 황홀해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부끄럼도 없이
 노을보다
 붉은 얼굴로  (십정동―바바리맨)


 처음 사진을 찍던 때부터, 제 사진은 이웃들한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라는 사람마다 한 장씩, 또는 여러 장씩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느라 필름값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면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제 사진기에 찍히는 사람들은 자기한테 돌아오는 열매(사진)를 보면서, 하루이틀 지나는 동안 제가 사진기를 들고 앞에서 깝죽거려도 스스럼없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더군요.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렇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사람들이 시인하고 꼭 같은 매무새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시인이 제 삶과 살을 바쳐서 이루어 낸 열매인 시를 스스럼없이 누구한테나 나누어 주었기에, 시 하나 받아먹은 이웃사람들도 꼭 같은 시마음이 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시인한테 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곁지기가 되지 않느냐 싶어요.


 한길에서
 차에 치어죽은 쥐를 보았다
 죽음이란 저리도 납작한 것이던가

 광고지가 차 바람에 날려가
 놈의 허리께를 덮었다
 놈은 그 순간
 “싼 이자로 돈 빌려드립니다”가 되었다  (변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함께 쓰고 즐기는 시입니다. 함께 찍고 나누는 사진입니다. 그림그리기도, 글쓰기도,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도 서로 어깨동무를 겯으며 합니다. 망치를 들건 호미를 들건 우리들은 서로서로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땀꽃을 맺습니다.

 이야기꽃은 서로서로 마음으로 파고들며 일하는 고단함을 잊도록 합니다. 땀꽃은 땅으로 스며들며 우리한테 고마운 밥거리를 선물해 줍니다.





 (3) 사랑으로 가는 길


 시집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 석 달에 걸쳐 되읽고 새로 읽습니다. 금세 읽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시였고, 두고두고 또 읽을 만큼 가슴을 적시는 시입니다.

 시란 이렇구나, 이래서 시를 쓰네, 이러니 시집을 사서 품에 안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는 꿈을 꿀 테지,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집 끝자락에 붙은 어느 문학평론가 풀이말은 영 와닿지 않습니다. 시면 시지, 시를 도마에 올려놓은 물고기로 아나 싶은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문학을 배우거나 가르칠 때에 모두 이렇게 배우거나 가르치니까 다들 시를 재미없어 하겠다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시를 시 그대로 껴안도록 하지 못하고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니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도 사람들하고 금을 긋고서 고개가 빳빳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시를 시 모습으로 받아먹으면서 자기 몸을 시하고 맞추지 못하는 글로 시를 말하니, 시를 말하는 사람 스스로 참살길을 헤아리는 슬기가 아닌 밥벌이 노릇 하는 평단과 강단에만 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는
 365일 전경들의 경호를 받는다
 총부리 치켜들고 인천 항구를 밟은 뒤
 반세기가 넘도록
 제가 건너 온 바다만 바라보고 서있는 異國사내
 그의 발밑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지뢰밭이다
 충돌한다 충돌한다
 빨강과 파랑이, 꽃과 돌멩이가,
 그 틈에서
 조선의 아들들 고추바람 뚫고 밥을 먹는다
 거대한 제국의 채찍을 막느라
 더글라스 맥아더 저
 구리인간의 옆구리를 지키며
 엄동설한 한데 밥을 먹는다

 어디서 보았는가
 들었는가
 이런 광경을
 참으로 기이해서
 눈물이 다 나는  (작은 전설―자유공원의)



 히유, 한숨 짧게 내뱉고 옥상마당으로 올라가 기저귀 빨래를 걷습니다. 오늘은 옆지기가 2/3쯤을 빨고 저는 1/3만 빨았습니다. 그러나 빨고 나면 새 빨래가 나오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 개면 앞서 빨아 널은 빨래가 마릅니다. 하루 내 기저귀 스무 장 남짓이 돌고 돌아 아기 사타구니에 대여지고 대야에 담가지고 두 손에 빨려지고 햇볕에 말려지고 다시 두 손에 개어집니다.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다 걷고 나서 잠깐 뒤로 돌아서 지붕 낮은 골목집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고작 4층 옥상집이지만, 동네를 훤하게 내려다보게 됩니다. 4층만 해도 대단히 높은 층입니다. 2층만 되어도 이웃집을 건너다볼 수 있으니까요.

 나도 시를 쓸까, 내가 시를 쓰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내가 쓰는 시는 누구한테 즐겁게 읽힐 삶자락으로 다가갈까.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에 앞서, 내가 찍는 사진 하나가 바로 시요, 내가 좋아하면서 손에 살며시 집어드는 책 하나가 시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
 편지를 읽는 사이
 마음에 켜진 등불로 한껏 밝아진 나는
 종일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별들을 헤치고
 내 안으로 든 기린이
 나를
 詩의 門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을 축여주었다
 오랜만에 단잠 이뤘다  (나뭇잎 편지)



 옆지기는 옛동무한테 손으로 편지를 한 장 써서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옵니다. 저도 며칠 사이로 우리 아버지한테 편지를 한 장 써서 부쳐야겠습니다. 곧 아기 돌도 다가오니, 돌잔치를 할 때 놀러오시라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우리 아기 돌잔치에는 뷔페니 뭐니 하나도 안 하고, 동네 헌책방골목 ‘시 다락방’에서 우리 아기와 우리 두 가시버시가 이 땅에서 씩씩하고 꿋꿋하고 튼튼하고 싱그럽게 살아갈 힘을 내도록 이끌어 주는 시를 열 꼭지건 스무 꼭지건 골라서 나누어 읽는 자리로 마련하려 하니, 아버지도 시 하나 읽어 주어 우리를 축복해 주십사 하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4341.10.17.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로 살아가는 고등학교 적 국어 선생님
 ― 열일곱 해 동안 품어 온 물음 하나

 


 1991년 8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저는 갑작스런 조회가 생겼다면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부를 때 투덜거리면서 나갑니다. 그무렵, 월요일 아침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또 한 번, 온 학교 학생이 죄 운동장에 모여서서 군대사열을 하듯 아침모임(조회)을 해야 했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되고 지겹고 힘들기도 한 아침모임인데(겨울에는 잠바를 입고 나와도, 와이셔츠 안에 옷 한 벌을 끼어 입어도 복장불량이라면서 불러내어 두들겨패고 그랬습니다), 그런 아침모임을 불쑥 한다니까 입이 부루퉁 튀어나오지 않을 동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난데없는 아침모임은 장학사가 오니 청소를 하라느니 하는 아침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곧 모의고사를 보는데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대는 아침모임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성적 잘 나오는 몇몇 아이들 올려세워서 자랑해 주는 아침모임 또한 아니었습니다. 늙수그레한 국어교사 한 사람이 ‘이제 교사 일은 그만두고, 소설쓰기에만 온삶을 바치겠다’고 해서 마련해 주는 ‘퇴임식’이었습니다.


.. “10년 전 이런 한을 맺고 고향 인천에 왔는데 난 장편을 쓸 것이다. 너희들은 학력고사 공부를 해라. 너희들의 시험이 끝날 무렵 나도 결과를 받을 것이다. 우리 같이 한번 모든 걸 걸어 보자!” 제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매일 저녁 교실 뒷자리에서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정말 처절하게 썼다. 함께 니나노 집에서 술도 먹고 파친코에서 월급봉투도 다 날리기도 하며 어울리던 동료 선생들이 내가 장편을 쓴다며 피골이 상접한 채로 자기 일에만 매달리니까 냉대를 했다. 나를 몹시 신뢰했던 교감 선생님도 한두 번은 봐주었는데, 나중에는 “야, 이원규! 집에 가서 써.”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소설을 쓰기 위해선 결국 그런 걸 이겨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 자리에서 “교감 선생님, 절 내쫓으세요. 징계위원회 여세요.”했고, 동료 선생들에게도 “날 죽여라.” 하고 말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하고 야근에 걸리는 선생들은 아주 싫어했다.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순회지도를 안 하니까 혼자 힘들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밀고 나갔다. 교실 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 그때 내 반 아이들은 지금 나이 마흔이 넘어 같이 늙어 가는데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담임이 매일 뒷좌석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에 매달려 있으니 담배 피우러 나가지도 못하고 농땡이도 못치고 모든 걸 체념하고 공부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학 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57명 중 43명이 4년제 대학에 갔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처음엔 뭔 짓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가 싶었지만, 난데없는 아침모임 집합보다 더 난데없는 ‘퇴임식’이었기에 눈이 동그래집니다. 게다가, 몸이 아파서 그만두지도 않고, 다른 일이 있어서 그만두는 일도 아닌, ‘소설을 써야겠으니 그만두겠다’는 퇴임식이라니.

 지금은 교장선생이 된 또다른 국어교사 한 사람이 사회를 보면서, 떠나가는 국어교사를 소개하고, “이러저러하니까, 잘 들어 보도록!” 하면서 말을 마치니, 곧 떠나갈 국어교사인, 이원규 님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한테는 소설쓰기가 너희들 가르치는 일보다 더 큰 일이고,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면서 이 일을 그만두니, 우리들도 자기가 어떤 뜻을 하나 품으면 그 일을 제때 할 수 있도록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 열여섯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 머리에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궁금함은 풀어 주지 못합니다. ‘요즘(1991년) 세상에 소설만 써서 어떻게 먹고살 생각인지, 당신 마나님이 바깥에서 돈벌러 다녀야 하지는 않은지, 이 좁다란 인천바닥에서 소설을 쓴다고 해 봐야 누가 알아주고 누가 책을 사 주고 누가 거들떠보아 주기나 하는지’ 들을.





.. 당선작 〈훈장과 굴레〉는 아들 이름으로 당선공고가 났고 연재를 시작할 때는 내 이름으로 나갔다. 4백만 원짜리 파티였다던가. 서울의 최고급 호텔에서 열린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 부부는 무대 위에 앉았다. 당시 현대문학사 편집장이던 감태준 선생이 내 학교 교장 선생님을 대학의 은사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김동리ㆍ김춘수ㆍ조병화 선생님 등 문단 원로들 사이에 앉혔다. 그분이 누군가를 아시고 미당 선생님이 한  말씀 하셨다. “저녀석이 내 제자인데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우리 대학의 영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다른 원로 선생님들도 부탁을 했다. 교장선생님은 기분이 좋아서 다음날 직원조회 때 말씀하셨다. “이원규 선생을 새 학기에 도서관장으로 발령하겠습니다. 불만들 없으시지요?” 두 해 동안 주당 수업 14시간인 도서관장 자리로 가서 나는 생애에서 가장 좋은  단편 십여 편을 썼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 뒤 다시는 그 날 같은 행복한 몸 떨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내가 재작년과 작년에 써낸 책들이다. 소설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평전을 쓰며 지내는 오늘 그 시절의 처절한 글쓰기의 열정과 고난, 그리고 그 날의 몸 떨림이 그리워진다. 내가 여섯 번 최종심에서 떨어질 때 우리 모교에는 소설가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직계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에게 언제나 더 잘해 주고 싶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국어교사 이원규 님이 그만둔 학교는 인천 인항고등학교. 처음 학교를 세울 때 ‘나중에 교장 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고 하는 이원규 님은, 1회 졸업생인 우리 형한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회 졸업생인 사촌형도 이원규 님한테 국어를 배웠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4회 졸업생인 저는 이원규 님이 아닌 다른 분한테 국어를 배웠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소설 쓰는 국어 선생이 한 사람 있지.” 새로 생긴 학교에 1회로 들어간 형이, 4회로 들어가는 동생인 저한테 해 주던 말. “그렇지만, 소설 쓴다며 나가고 난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데 뭐.”

 그 뒤, 드문드문 인천 지역 일간신문에 나오는 이원규 님 기사를 보고, 서울에서 나오는 중앙일간지에도 짤막하게 나오는 이원규 님 새책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용케 굶어죽지 않으시고 소설 잘 쓰고 있으시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문학책깨나 읽는다’는 대학교 동무나 선후배들한테 ‘소설을 쓰는 이원규 님 압니까?’ 하고 물으면 어느 누구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향이 인천인 동무나 후배들 또한 아무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교지편집부 후배들한테, “야, 우리 학교에는 소설가 국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 하고 말하면, “네, 진짜요? 지금 뭐하세요? 우리도 그런 분한테 배워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 인천과 황해를 배경으로 잡은 것은 내 고향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이곳이 외세 침탈의 문호였고 분단이 고착되던 절망의 시기에 민중의 의지가 번번이 꺾이고만 비운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을 현대사의 한 의미 깊은 공간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을 참으로 오랜 시간 가져왔던 것이다. 오늘도 칙칙한 색으로 말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황해의 파도에는 슬프고 어두운 과거가 묻혀 있고 이 소설에서 다룬 사건들은 그런 한스런 현대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  (소설 《황해》(1992) 글쓴이 말)





 그리고 2005년, 소설을 쓰던 국어교사 이원규 님은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을 내놓고 이듬해에 《김산 평전》(실천문학사)을 내놓습니다. 소설이라면 소설로 다시 빚은 이야기이고, 소설이 아닌 평전이면 소설쟁이가 바라본 역사를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가지 책이 나올 때, 《약산 김원봉》과 《김산 평전》을 쓴 그 ‘이원규’가 내가 아는 이원규가 맞는가 하고 헷갈렸습니다. ‘이원규’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하는 분이 여럿 있고, 같은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원규 님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자리에 서 있었고,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열 몇 해에 걸쳐서 한길로 파고든 역사소설이 밑거름이 되어 약산이 새로 태어났고 김산이 거듭 태어났습니다. ‘그래, 비로소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소설쟁이라는 이름을 훨씬 굵직하게 받는구나. 그러나 평전은 소설이 아닌데, 우리 국어 선생님은 소설가라는 이름보다 평전 작가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들어 버리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약산과 김산에 이어서 죽산 이야기도 써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곧잘 들으시는 듯합니다. 약산과 김산은 곧은 뜻을 품고 독립과 혁명을 바란 이라면, 죽산은 당신한테도 고향인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며 독립과 혁명을 꿈꾸던 스승이요 선배이니까요.

 “작가니까 이렇게 살지요.”

 2008년 10월 18일 낮 네 시.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있는 〈시 다락방〉에서 인천작가회의가 ‘우리 시대 작가와의 만남’ 자리를 열었습니다. 열한 번째를 맞이한 이 자리에는 소설 쓰는 이원규 님이 이야기꽃을 피웠고,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꽃을 마무리하고 밥과 막걸리를 드는 자리에서 넌지시 여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겠다고 뛰쳐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렇게 뛰쳐나갈 때 당신 마나님은 선선히 받아들이셨는지’를, ‘그렇게 뛰쳐나오고 먹고사는 일과 아이들 가르치고 기르는 일은 잘할 수 있었는지’를.

 “(교사) 현직에 남아 있는 것보다 잘했어요.”

 열일곱 해 만에 다시 만나는 어제까지, 제 마음속에는 이 물음 한 가지, ‘교사로 있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뜻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처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고등학교라는 곳은 대학교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자리라, 국어교사라 한들, 시험 문제에 나올 지식만 가르쳐야지, 참다운 국어, 곧 참된 우리 말과 참된 우리 문학을 가르칠 만한 자리가 못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두동짐, 엇갈림, 어긋남 때문에 외려 고등학교 국어교사 자리는, 우리 말과 문학을 엉터리로 엉뚱하게 잘못 받아들여서 우리 말과 문학을 멀리하고 말지 모르는 아이들한테 참 가르침을 베풀거나 나누면서 곱새기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입시문제 때문에 말과 문학을 이렇게밖에 알려줄 수 없지만, 너희가 느끼고 가슴으로 껴안아야 할 말과 문학은 이런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문제가 아니다’ 하고서.

 “지금 나이(예순둘)에는 그렇게 못하겠지만, 그때(교사 퇴직 할 때가)는 마흔다섯이었는데, 내 자신(삶)을 걸 수 있었지.”

 막걸리잔이 돌고, 둘레에 앉은 문학 하는 어르신들은 문학창작과 평전쓰기와 역사소설과 여러 가지 말씀들을 묻고 듣고 여쭙고 받고 합니다. 이러는 동안 저는 오로지 하나, 문학한다는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매무새란 무엇인지를 더 느끼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어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기 칭얼거림을 한 귀로 느끼느라 한쪽 다리는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면서 들썩이는데, 한 귀는 “종규야, 문학을 ……” 하면서 자리에 붙잡아 놓는 소설 쓰는 옛 국어교사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가운데.





 “…… 그때(교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던 1990년대에) 소설만 쓰면서도 원고료나 인세는 지금보다 잘 들어왔어요. 그리고 대한생명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편당 30만 원으로 40회짜리 강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1991∼1992년), (대한생명 보험) 아줌마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했어요. 그래서 강의 솜씨가 많이 늘었지. 힘들었는데 끝까지 마쳤어. 그리고 사보에다 글을 썼고.”

 “마누라 야쿠르트 배달 안 시키고 소설 잘 썼어요.”

 “(무엇을 쓰든) 작가는 도전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4341.10.19.해.ㅎㄲㅅㄱ)


***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소설꾼 이원규 님이 엮어낸 작품으로는 : 《훈장과 굴레》,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 《황해》,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