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 결혼한 여자들의 페미니즘
엄마페미니즘탐구모임 부너미 지음 / 민들레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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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6.10.

인문책시렁 418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부너미

 민들레

 2019.2.28.



  ‘마누라’가 높임말이라 하더라도, 이 낱말을 쓰는 사람이 ‘사람답지 않은 마음’이라면, ‘마누라·마님’ 모두 낮춤말인 듯 깎아내리려는 자리에 함부로 씁니다. ‘계집·가시내’는 낮춤말이 아닌 높임말이라고 할 만한 말밑이요 말뿌리이지만, 정작 숱한 사내는 ‘계집·가시내’를 “한짝(함께 살아갈 짝)을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놀리려는 마음을 듬뿍 얹어서 마구마구 내뱉”기 일쑤였습니다. 워낙 높임말이라 할 말밑이요 말뿌리였어도, 우리 스스로 어떤 마음으로 낱말 하나를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낱말 하나는 엉겁결에 낮춤말 자리로 곤두박을 칩니다.


  ‘사내’를 가리키는 ‘머스마’는 ‘머슴’하고 같습니다. ‘머슴’이라 하면 낮은자리인 사람을 나타낸다고 여기지만, 정작 ‘머슴·머스마’가 같은말인 줄 알아채지 못 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사내는 ‘머슴·머스마’라는 낱말을 능구렁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마누라·마님·마나님’과 ‘계집·가시내’라는 낱말은 아무렇게나 밟거나 깔본 나날을 꽤 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얄궂고 멍청한 나라입니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아줌마’로 살아가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그저 마땅한 일인데, ‘들빛(페미니즘)’을 밝히는 사람이 짝을 안 맺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페미니즘)’을 외치는 사람이기에 꼭 짝을 맺어야 하지도 않습니다. ‘무지개(페미니즘)’을 바라건 안 바라건, 짝을 맺고 싶으니 짝을 맺어요. ‘너나우리(페미니즘)’를 바라건 안 바라건, 짝을 안 맺고 싶으니 짝을 안 맺습니다.


  가시내가 다 똑같을 수 없고, 사내가 다 마찬가지일 수 없습니다. 한 걸음씩 떼는 사람이랑, 한 걸음조차 안 떼는 사람은 달라요. 겉몸이 순이라서 다르거나 돌이라서 다르지 않아요. 스스로 살아가고 살림하는 매무새에 따라 다릅니다. 전라도에 살거나 경상도에 살기에 다를까요? 터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터는 핑계나 겉모습입니다. 어느 곳에 살든 ‘스스로 짓는 마음’에 따라서 삶과 살림이 다릅니다. 전라도에 살아도 꼰대이면서 닫힌 사람이 수두룩하고, 경상도에 살아도 밝고 열린 사람이 숱합니다.


  짝을 맺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짝을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살림을 짓는 보금자리를 이루려 할 적에 서로 아름답게 사랑이면서 서로 한꽃같이 사랑을 나눌는지 생각하고 얘기하고 나누면서 길을 새롭게 열 노릇입니다. 짝을 안 맺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나로서는 짝을 안 맺을 마음이되, 스스로 이 터전에서 어느 자리에 서서 어느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웃·동무하고 어떻게 어울리는 살림과 사랑을 지으려 하는지 생각하고 얘기하고 나누면서 길을 새롭게 틔울 노릇입니다.


  짝맺기를 하기에 아기를 낳아서 돌봅니다만, 모든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이지 않습니다. 짝맺기를 해서 아기를 낳더라도, 누구는 하나를 가까스로 낳고, 누구는 서넛이나 대여섯이나 열쯤 낳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기를 똑같이 낳아야 할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짝을 맺고도 아기를 안 낳으면서 보금자리를 일굴 수 있습니다.


  아름길(페미니즘)은 그저 아름빛을 심고 가꾸는 길입니다. 온길(페미니즘)은 내가 나부터 사랑하면서 너를 너로서 나와 마찬가지인 하늘빛으로 헤아리면서 오롯이 살리는 온숲하나요, 온숲노래입니다. 참길(페미니즘)은 나부터 스스로 착하고 참하게 삶을 일구면서, 나너없이 너나하나라는 꽃길을 아름답게 하나로 이루는 나날입니다. 한사랑(페미니즘)은 바로서기이기도 하되, 들빛으로 하나를 이루는 한꽃사랑이라고도 여길 만합니다. 우리는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낱말에 얽매일 까닭이 없습니다. 나답고, 너답고, 서로 하나이자 다 다른 하늘빛인 숨결과 넋인 줄 알아볼 노릇입니다.


  아기를 낳아서 딸아들 모두 푸른넋(페미니즘)을 품을 줄 알 적에 어깨동무(페미니즘)를 이룹니다. 온삶빛(페미니즘)을 바라보고 배우는 하루이기에 한꽃같이(페미니즘) 숲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빛길(페미니즘)을 여는 수수꽃(페미니즘)에 이르게 마련입니다. 낱말을 굴레처럼 붙잡지 않을 적에 스스로 싹틔웁니다. 낱말 하나는 낟알 하나와 같아요. 낱말도 말씨(말씨앗)입니다. 언제나 새롭게 스스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바다처럼 품으려는 눈길이기에 수수한꽃(페미니즘)을 피우고서 씨앗을 맺어서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꽃살림(페미니즘)을 바라보기에 너는 꽃순이요 나는 꽃돌이로서 함께 꽃사람으로 섭니다. 꽃이란, 스스로 곱게 피어날 줄 아는 빛이라는 뜻이면서, 스스럼없이 시들어서 씨앗을 맺고 열매로 무르익어서 뒷사람한테 자리를 내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시내도 꽃이고 사내도 꽃입니다. 그래서 암꽃과 수꽃인걸요. 암꽃과 수꽃이 나란하기에 온누리가 푸른별을 이루고, 암나무와 수나무가 어울리기에 이곳이 파란별로 반짝반짝 즐겁습니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여러 사람 여러 목소리를 다룹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니, 다 다르게 손을 잡습니다. 똑같이 손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다. 책이름을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결혼하나요?”라든지 “페미니스트가 결혼을 하면?”쯤으로 붙이면 훨씬 나았으리라 봅니다. ‘페미니스트’라는 길이 ‘끝장’을 바라지 않는다면, 짝을 맺을 적에 어떻게 아름살림을 바라보느냐 하고 풀어내면 될 노릇입니다.


  목소리만 내기보다는, 말소리를 서로 주고받을 적에 어느 집에서나 아름살이(페미니즘)를 이룹니다. 이제껏 멍청한 사내가 머저리 같은 웃사내질(가부장권력)을 해왔기에, 이제부터 가시내가 웃가시내질을 해야 할 까닭이 없어요. 위아래 없이 어깨를 겯는 길일 때에 비로소 온숲넋(페미니즘)입니다. 잘잘못을 가리고 따지면서도, 오늘부터 함께 살림을 짓는 참눈을 틔우려고 하기에 풀꽃하나(페미니즘)입니다.



‘마누라’가 배우자를 향한 존칭이라면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70쪽)


나는 “한국 남자는 다 똑같아. 비혼, 비출산이 답이야”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남자라고 다 똑같지 않다. 차려주는 밥만 먹는 남자와 요리하는 남자는 다르고, 돈 버는 유세를 떠는 남자와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는 남자는 많이 다르다. (87쪽)


드라마 속 여자는 책을 읽지 않는다 … 과연 책은 누가 더 많이 읽을까? (97쪽)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빠가 혼자 육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생가해 보면, 나 또한 서툴다는 이유로 남편의 육아 기회를 빼앗은 적이 있다. 나도 처음부터 육아를 잘했던 것은 아니라고 분노하면서도, 남편이 육아에 숙련될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독박이 더욱 견고해질 뿐이다. 놀랍게도 우리 아이를 가장 잘 돌보는 사람은 친정 아빠다. 어찌나 잘 놀아주는지 아이가 할아버지만 오면 온종일 생글생글 웃는다. (123쪽)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선택권을 넓히고 남성의 선택권을 줄여야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에게 젠더 경계를 넘나드는 더 넓은 선택지를 보여준다면, 여자아이들의 선택지도 자연스레 넓어질 것이다. (134쪽)


여자에게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한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남자아이에게만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면 충분할까? 남자아이도 자신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35쪽)


남편이 밤늦도록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애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육아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고, 그건 내가 집에서 그의 몫까지 아이를 돌봤기 때문이라고 정신승리를 해왔지만 ‘돈 버는 유세’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155쪽)


나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으로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때 나는 고마워했던가. 도시락을 싸는 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노력이라도 해봤던가. 그때의 나는, 우리 엄마의 수고와 고마움도 모르고 밥을 받아먹는 지금 내 남편과 다르지 않았다. (223쪽)


+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부너미, 민들레, 2019)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 종이쪽도 맞들면 낫다?

→ 종이도 맞들면 낫다?

22쪽


노선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각오나 실천이 수반되는 건 아니었다

→ 길이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다짐으로 뭘 해야 하지는 않는다

→ 갈피라고 해서 무슨 놀라운 뜻으로 뭘 펼쳐야 하지는 않는다

33


알림이 울린다. 조조할인을 받고

→ 울린다. 새벽에누리를 받고

→ 알려온다. 새벽마련을 하고

36


당연히 돕기 마련이다

→ 마땅히 돕는다

→ 으레 돕게 마련이다

63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고

→ 말은 생각을 다스린다고

→ 말에 따라 생각한다고

→ 말로 생각을 한다고

70


무언가가 변하면 그것을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 무엇이 바뀌면 이에 따라 바뀌곤 한다

→ 하나가 바뀌면 덩달아 바뀌기도 한다

101


누군가 엄마기라는 말을 꺼냈다

→ 누가 엄마날이라는 말을 한다

→ 누가 엄마철이라고 말한다

121


내가 경력단절여성이었어?

→ 내가 일멎이였어?

→ 내가 쉬는순이였어?

→ 내가 일끊긴 사람이었어?

146


그건 내가 집에서 그의 몫까지 아이를 돌봤기 때문이라고 정신승리를 해왔지만

→ 내가 집에서 그이 몫까지 아이를 돌봤기 때문이라고 내세워 왔지만

→ 내가 집에서 그이 몫까지 아이를 돌봤기 때문이라고 둘러대 왔지만

155


이틀 머물고 난 후에 시가로 향했다

→ 이틀 머물고서 버시집으로 갔다

→ 이틀 머문 뒤에 벗집으로 갔다

199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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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5 걸으면서 쓴다



  나는 이웃을 만날 적에 미리 옮겨적은 노래(시)를 건네곤 한다. 내가 건네는 노래종이(시를 적은 종이)를 받는 분은 곧잘 “글씨가 참 정갈하네요” 하고 말씀해 주시는데, 나는 자리맡에 앉아서 손글씨를 쓰는 일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 나는 자리맡에 앉을 적에는 ‘낱말책 새로쓰기’로 거의 온하루를 보낸다. 손글씨는 시골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저잣마실이나 나래터(우체국)를 다녀오는 길이라든지, 먼고을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시외버스를 타고서 다녀오는 길에 쓴다.


  ‘버스에서 책읽기’는 열일곱 살 때부터 했다. 열일곱 살 여름에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옮기는 바람에, 늘 걸어서 오가는 배움터를 이때부터 버스를 타야만 오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도 40분 남짓 걸렸는데, 처음 하루이틀은 길을 익히느라 오직 바깥만 바라보았다면, 길눈을 익힌 뒤에는 책을 읽었다. 1991년 인천 연수동은 이제 막 삽질을 하던 무렵이라 길이 어마어마하게 나빴고, “이런 길을 다니다가는 버스가 망가지겠구나” 싶도록 흔들리고 덜컹이는 흙길(비포장도로)을 오르내렸다. 동무들은 “야, 넌 어떻게 이런 버스에서 책을 읽어? 이런 버스에서 영단어를 어떻게 외워? 이런 버스에서 ‘수학 정석’을 푼다고?” 하면서 놀라지만, 나는 동무들한테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덜컹버스에서는 책을 안 읽거나 수학문제를 풀지 않거나 영단어를 외우지 않으면 오히려 멀미가 나. 책을 읽고 수학문제를 풀고 원서(영어책)를 읽어야 마음을 다스리면서 멀미가 안 나.”


  2008년에 큰아이를 낳으면서 ‘버스에서 책읽기’를 멈췄다. 아기가 있으니 아기를 보면서 아기랑 놀고, 아기한테 끝없이 노래를 들려주고 함께 춤을 추었다. 큰아이가 2009년부터 한글을 익히겠다며 아버지한테 달라붙느라 2009년부터 큰아이한테 읽힐 노래(시)를 썼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버스와 길에서 노래를 쓰고, 버스와 길에서 읽히고, 버스와 길에서 가락을 입혀서 읊었다.


  큰아이는 혼자 마음껏 걸을 수 있던 2010년 무렵부터 ‘걸으며 책읽기’를 했다. 나는 큰아이 곁에서 ‘걸으며 사진찍기’하고 ‘걸으며 책읽기’를 나란히 했다. 다만, 나는 1991년뿐 아니라 1982년부터 늘 큼지막하고 묵직한 등짐을 짊어진 채 걸었고,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책읽기를 했고, 걸으면서 책읽기를 했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꼭 하루 스쳤다. 1988∼2005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새로 한 사람 스쳤다. 2006∼2025년 사이를 사는 동안,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우리집 작은아이가 있다. 다만, 나보다 걸음이 빠른 세 사람은 등짐을 짊어지지 않은 맨몸일 뿐이다. 나는 맨몸으로 걸어다닌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늘 앞뒤로 잔뜩 짊어지며 걷는다.


  2006년 무렵이었지 싶은데, 어느 이웃님이 “최종규 씨가 얼마나 빨리 걷는지 궁금해서요, 등짐을 벗고서 같이 걷기를 겨루면 어떨까요?” 하고 여쭈었다. “네? 왜 겨뤄야 해요? 저는 그저 길에서 하루를 흘리기 싫어서 그저 신나게 걸을 뿐인데요.” “그래도, 등짐을 푼 맨몸으로 같이 걸어 봐요.” 열 해에 하루조차 거의 없을, 아니 쉰 해를 살며 등짐 없이 걸어 본 일이란 다섯손가락에 꼽을 만큼 없을 일을, 어느 날 겪어 보았다. 그런데 등짐이 없이 맨몸으로 걷자니, 너무 힘들더라. 이미 나는 무게를 잔뜩 이고 진 몸에 맞게 팔다리를 놀리는 매무새에 익숙한 터라, 아무 짐이 없이 빨리 걸어가기란 오히려 너무 어렵더라. 몇 걸음 떼다가 그만두었다.


  충북 음성 생극면 버스나루에서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까지 8킬로미터 즈음이다. 생극 버스나루에서 무너미마을까지는 오르막이다. 이 오르막을 2003∼2007년에 50분∼70분 사이로 걸었다. 늘 등짐차림이었다. 무너미마을에서 생극 버스나루는 내리막이다. 이 내리막을 두바퀴로 달릴 적에 4분∼7분 사이로 갈랐고, 거꾸로 오르막일 적에는 15분∼24분 걸렸다.


  인천 배다리(창영동)에서 서울 합정나루까지 32킬로미터 즈음 나오는 듯싶은데, 서울과 인천에서 살던 무렵에 이 길을 두바퀴로 50∼70분 사이로 달렸다. 걸으면 두 시간 반이 넘었다. 어떤 분은 말이 되느냐고도 묻지만, 왜 말이 안 될까? 예전에 이 길을 달리거나 걸을 적에는 언제나 때(시간)를 쟀다. 달리거나 걷고서 킬로미터도 쟀다. 이제는 구태여 이런 짓을 안 하지만, 한때 두바퀴에 때바늘(속도계)를 달고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두바퀴에 붙인 때바늘은 길에서 쇳덩이(자동차)가 나를 치고서 달아난 탓에 조각나서 사라졌다.


  요즈음 두바퀴를 달리면서 어림해 보니 24∼28킬로미터로 느릿느릿 밟는구나 싶다. 더구나 요새는 예전처럼 안 걷는다. 요새는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그렇지만 내가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더라도 둘레에 나란히 걷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더라. 서울·부산·인천으로 마실을 가면, 쇳길(전철)을 갈아탈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는데, 나는 으레 디딤돌(계단)로만 오르내린다. 디딤돌을 오르내릴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이미 이런 매무새는 1991년부터 붙인 터라, 등에 묵직하게 책짐을 짊어지고서도 꽤 빠르게 디딤돌을 오르내리면서 읽고 쓴다.


  모든 사람은 모름지기 ‘느리’지 않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을 뿐 아니라, 우리말글 밑동을 처음으로 닦은 주시경 님이 있는데, 주시경 님이 새길(신학문)을 배울 적에, 서울에서 인천 싸리재(중구 답동·경동)까지 날마다 걸어서 오갔다고 했다. 이오덕 님이 남긴 글을 보면, 경상북도 멧골마을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멧길을 네 시간 남짓 걸어서 오가기 일쑤였다. 우리는 구태여 빨리걷기를 해야 할 까닭이 없다만, 고작 쉰 해 앞서만 해도 “누구나 꽤 빨리 걸어서 길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늘 걷는 사람은 ‘걷기’가 그다지 느리지 않은 일인 줄 안다. 오히려 늘 걷고 오래 걷는 동안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가다듬고 몸을 북돋우는 줄 알게 마련이다.


  아기수레를 굳이 써야 할 까닭이 없다. 아기를 안고 업고 걸리면 된다. 이따금 짐을 쇠(자동차)한테 맡길 수 있되, 언제나 스스로 짊어지고서 걸어다니면, 우리 몸은 오래오래 한결같이 튼튼하면서 빛난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등짐으로 걸어다니면 이동안 책읽기와 글쓰기를 실컷 누린다. 등짐걷기를 하면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한다면, ‘껍데기 아닌 속읽기’에다가 ‘글치레 아닌 삶쓰기’를 스스럼없이 하게 마련이다. 반듯한 책마루(서재)가 있어야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않는다. 부엌에서 쓰고, 마당에서 쓰고, 길에서 쓰면 된다. 한 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달래되, 다른 손으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 걸으면서 읽고 쓰는 이웃이 한 사람씩 늘어난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별이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본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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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880 : -들 부족함


물소들은 부족함 없이 지냈어

→ 물소는 아쉽지 않게 지냈어

→ 물소는 근심없이 지냈어

→ 물소는 걱정없이 지냈어

《사자와 세 마리 물소》(몽세프 두이브·메 앙젤리/성미경 옮김, 분홍고래, 2014) 2쪽


어느 갈래나 쪽이나 자리를 따로 다룰 적에는 ‘새는’이나 ‘나무는’이나 ‘물소는’이나 ‘구름은’이나 ‘송사리는’처럼 씁니다. 이때에는 굳이 ‘-들’을 안 붙여요. “부족함 없이”는 옮김말씨예요. “안 모자라게”로 손볼 수 있고, “아쉽지 않게”나 ‘걱정없이’로 손볼 만합니다. ㅍㄹㄴ


부족(不足) : 필요한 양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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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881 : 다양 요구 충족시키기 역부족 것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 여러 가지를 채우기에는 힘이 모자라다

→ 이모저모 바라기에는 힘이 부친다

→ 온갖 목소리를 받아들일 힘은 달린다

《참 교육의 돛을 달고》(찌까즈 께이시/김성원 옮김, 가서원, 1990) 33쪽


여러 가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힘이 부치거나 모자라서 이모저모 못 바랄 만합니다. 아직 힘이 달리기에 온갖 목소리를 듣거나 받기에 버거울 수 있어요. 이때에는 하나씩 받아들이면 됩니다. 한꺼번에 몽땅 받으려 하지 않으면 되어요. 차근차근 맞이하고 추스르면서 북돋울 일입니다. ㅍㄹㄴ


다양하다(多樣-) : 모양, 빛깔, 형태, 양식 따위가 여러 가지로 많다

요구(要求) : 1. 받아야 할 것을 필요에 의하여 달라고 청함. 또는 그 청 2. [법률] 어떤 행위를 할 것을 청함 3. [심리] 유기체의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생활체의 내부 원인

충족(充足) : 1. 넉넉하여 모자람이 없음 2. 일정한 분량을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함

역부족(力不足) : 힘이나 기량 따위가 모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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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886 : 해안 지방 고난의 조짐 있었


해안 지방에 사는 모든 개들에게 고난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 바닷가에 사는 모든 개한테 가시밭길이 닥치려 한다

→ 바닷마을에 사는 모든 개는 곧 가싯길을 맞을 듯하다

→ 바닷마을 모든 개는 이윽고 바람서리를 맞을 듯하다

《야성의 부름》(잭 런던/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2015) 9쪽


바다하고 닿은 곳은 ‘바닷가’입니다. 바닷가에 이룬 마을은 ‘바닷마을’입니다. “고난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는 일본말씨예요. “가시밭길이 보인다”로 손볼 만하고, 앞말을 헤아려 “가시밭길이 닥치려 한다”로 더 손볼 만합니다. ㅍㄹㄴ


해안(海岸) :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부분 ≒ 연해안·해서(海?)

지방(地方) : 1. 어느 방면의 땅 2. 서울 이외의 지역 ≒ 주현(州縣) 3. 중앙의 지도를 받는 아래 단위의 기구나 조직을 중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고난(苦難) : 괴로움과 어려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 고초·난고

조짐(兆朕) : 좋거나 나쁜 일이 생길 기미가 보이는 현상 ≒ 조상(兆祥)·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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