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어린이날 문지아이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서정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즐겁고 신나게 꾸리는 삶은 어디에
 [그림책이 좋다 7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일론 비클란드, 《행복한 어린이날》



- 책이름 : 행복한 어린이날
- 글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그림 : 일론 비클란드
- 옮긴이 : 김서정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2009.3.26.)
- 책값 : 8000원


 (1)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 곁에


 옆지기와 아이하고 헌책방마실을 다녀왔습니다. 아주 오랜만입니다. 옆지기 몸이 많이 아픈 까닭에 여러 달째 함께 헌책방마실을 다니지 못했고, 올해 들어는 처음이었습니다. 눈이 소복히 내렸다가 말끔히 녹아 버린 길을 아이를 안거나 걸리면서 지나갑니다. 동인천역에 닿아 전철을 탑니다. 아이한테 낮잠을 재우고 길을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나서 바로 바깥마실을 나왔습니다. 전철에서 고이 잠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아이는 몇 정류장 지나지 않았을 때에 벌겋게 부은 눈이 스륵스륵 감기더니 이내 잠듭니다. 아빠와 엄마가 곁에서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빠 쪽으로 몸을 기대도록 합니다.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잘 듭니다. 그런데 낮부터 술에 전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우리 앞에 서서 고약한 술냄새를 잔뜩 풍기며 무어라무어라 쑹얼쑹얼거립니다. 아이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모습이 못마땅한가 봅니다. 세 식구가 전철마실을 하다 보면 이런 아저씨들이 꼭 나타나는데, 아이는 엄마가 무릎에 앉히고 빈자리 하나 마련하여 당신이 앉아야 한다고 하는 분들입니다. 자리에 앉기를 바란다면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에 가실 노릇입니다. 여느 자리를 넘보지 않을 일입니다. 아이를 키우고 돌본 분들은 누구나 알 텐데,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가는 일도 한동안이지, 아이도 힘들고 어버이도 힘듭니다. 그리고,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라는 길디긴 이름이 붙었듯, 모든 자리는 ‘장애인과 노약자와 영유아와 아이 부모’ 모두한테 앉을 권리가 있답니다.

 아기가 꽤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를 반듯하게 누입니다. 처음에는 엄마 무릎에 머리를 놓았고, 이십 분쯤 뒤에는 아빠 무릎으로 머리를 놓습니다. 깊이 잠든 아이는 참으로 꽤 무겁습니다. 이 느낌은 퍽 좋은 무게입니다. 무릎이 힘들어도 새근새근 아이를 포근하게 보듬으며 지켜 줄 수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아이키우기가 제아무리 힘들거나 고되다 할지라도 이런 사랑스러운 느낌 때문에 둘째를 생각하고 셋째를 헤아리며 넷째를 살필 테지요. 우리는 옆지기 몸이 많이 안 좋기 때문에 둘째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째가 있으면 첫째인 사름벼리한테 참 반가울 텐데, 동생이 없더라도 우리 삶터에서 함께 크고 있는 살가운 동무를 기쁘게 사귈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용산역에 닿을 무렵입니다.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천천히 등에 짊어지고, 아이는 아빠가 살살 들어서 가슴으로 안습니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느릿느릿 걷는데, 아이는 금세 깨고 맙니다. 날이 차기에 아이가 깬 김에 조금 걸리는데 잘 못 걷습니다. 잠이 덜 깨었군요. 아니, 살짝 깼다가 다시 자야 하는데, 잠자리가 좋지 못했습니다.

 다시 아이를 안고 걷습니다. 용산역 앞 너른터를 가로질러 샛골목으로 접어듭니다. 오늘 따라 샛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많고 오토바이마저 지나갑니다. 우리 앞에 퍽 빨리 걷는 사람 손에 담배가 쥐여져 있습니다. 콜록콜록 재채기가 납니다. 길을 걸으며 담배 태우는 사람을 볼 때면 뒷통수를 한 대 갈겨 주고 싶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다른 사람과 아이한테 얼마나 피해를 끼치는지 조금도 살피지 않으니까요.


.. 왼쪽부터 라쎄, 보쎄, 나, 브리타, 잉가, 올레예요. 우리는 불러뷔 마을에 살아요. 물론 케르스틴도요. 이 꼬마는 올레 동생이랍니다. 지금 두 살 반인데, 반쪽 사람이래요. 라쎄가 그랬어요 ..  (3쪽)


 서울 용산에 자리한 헌책방 〈뿌리서점〉에 닿습니다. 오늘 헌책방마실을 하자고 말한 엄마보고 먼저 들어가라 하고, 아빠는 뒷간으로 가서 아이 오줌을 누입니다. 꽤 많이 눕니다. 집에서 누이고 나왔는데, 그동안 꾹 참고 있은 듯합니다. “참 착하지. 오줌을 많이 참고 있었구나.” 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니, 아이는 “응, 응.” 합니다. 달 숫자로 치면, 세상에 나온 지 아직 스물넉 달이 안 되었으나 나이로는 세 살인 아이는 아직 몇 마디 할 줄 모릅니다만, 우리가 하는 말을 제법 잘 알아듣고 있습니다. 바지를 입으라 하면 못 입으면서도 혼자서 입어 보려고 낑낑거리고, 앉으라 하면 앉고 밥 먹자 하면 쪼르르 오고, 엄마한테 안기라고 하면 엄마를 휙 바라보고는 달려가고 합니다.

 아빠도 책방으로 들어섭니다. 아이를 골마루에 내려놓으려 하는데, 아이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용을 씁니다. 여느 날이라면 안으면 싫어하고 혼자 여기저기 쏘다니며 놀겠다 할 텐데, 오랜만에 헌책방마실을 해서 낯이 선지, 아직 졸려서 그런지, 내내 아빠 품에 안긴 채 돌아다니겠답니다. 품에 안긴 채 손을 들어 “넌, 넌.” 하면서 이곳저곳을 가리키고 책꽂이며 책이며 아이 손으로 만지겠다고 뻗습니다.

 “그래, 오늘은 엄마 볼 책을 사러 나왔으니 엄마가 느긋하게 책 보라 하고, 아빠는 널 안고 다녀야겠구나.” 하면서 눈으로만 이 책시렁 저 책시렁을 휘휘 둘러보며, 살 책을 하나하나 고릅니다. 좀더 깊이 들여다볼 겨를은 내지 못하고, 집에 가서 들여다보기로 하고 하나둘 살핍니다.

 “자, 아빠도 조금 쉬자.” 하면서 아이를 내려놓고 어깨를 펴고 기지개를 켠 다음 사진 몇 장을 찍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를 안습니다. 이렇게 먼저 말을 한 다음 내려놓으면 한동안 아빠 다리에 찰싹 붙어서 기다려 줍니다. 그동안 아이를 안고 사진찍기를 꽤 많이 한 까닭인지, 아빠가 사진을 찍을 때에 숨을 참고 움직임을 없앤 채 살며시 찍는 줄 알고 있습니다.


.. 언젠가 라쎄가 신문을 보더니, 스톡홀름에서는 어린이날 잔치를 연다고 말했어요. “불러뷔에서도 어린이날 잔치를 열어야 해. 케르스틴한테 어린이날 잔치를 해 주자.” “어떻게? 어린이날에는 뭐 하는 건데?” 올레가 물었어요.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하는 거지. 어린이날 하루 종일 케리스틴을 재미있게 해 주면 다른 날에는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을 거야. 우리끼리 놀고 싶을 때 귀찮게 안 할 거라고.” 라쎄가 말했어요 ..  (6쪽)


 아이 엄마하고 두 시간 반 남짓 책을 돌아봅니다. 아이 엄마는 우리가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책을 고릅니다. 아이 없이 두 사람만 나들이를 왔다면 아빠 혼자 퍽 낑낑대면서 들고 갈 만한 부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를 안고 가야 하는 만큼 도무지 다 들 수 없습니다. 무게로 치면 30킬로그램쯤 되는 책은 택배로 받기로 하고 헌책방 아저씨한테 택배값을 미리 드립니다. 헌책방마실을 나오며 집에서 싸들고 온 선물꾸러미를 셈대에 슬쩍 올려놓고는 헌책방 아주머니한테 드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인사를 꾸벅 하고는 돌아나옵니다. 아저씨 앞으로 선물을 드리면, 아저씨는 선물을 책방에서 끌러 다른 손님하고 나누시기 때문에, 댁에서 식구들하고 조촐하게 나누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아주머니 앞으로 선물을 드립니다. 딱히 무슨 날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웃한테서 받은 선물을 조금조금 덜어 늦은 새해 인사이자 언제나 좋은 책 만나도록 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 “스톡홀름 아이들은 어린이날에 회전목마를 탄대.” 라쎄가 말했어요. “여기는 회전목마가 없잖아.” 잉가가 말했어요. “방법이 있을 거야. 중요한 건, 어지러워진다는 점이야. 회전목마를 타면 그렇게 돼.” 라쎄가 말했어요. “그네로 해 보면 어떨까?” 보쎄가 물었어요. 라쎄가 그네에 앉혀 주자 케르스틴이 소리쳤어요. “하이디, 하이다.” 하지만 그네를 밀기 시작하자 비명을 질렀지요. “시여, 시여!” 라쎄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힘껏 밀었어요. 재미있으라고 그런 거였죠 ..  (9쪽)


 많이 몰리는 퇴근 시간을 살짝 지난 저녁 일곱 시 무렵에 전철을 탑니다. 많이 몰리는 퇴근 시간처럼 어마어마하게 밀리지는 않으나 손님들이 꽤 많습니다. 고맙게도 우리한테 두 자리가 났는데, 아이는 빈자리에 앉지 않으려 합니다. 다른 서 있는 사람들처럼 아이도 서서 가겠답니다. 엄마가 앉히려 하면 빽빽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칩니다. 하는 수 없이 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으라고 이릅니다. 우리 옆에 앉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빈자리를 한 손바닥으로 톡톡 두들기며 “착하지 아기야, 착하지 아기야, 이리 온, 이리 온.” 하는 말을 나즈막하게 열 번쯤 되풀이해 줍니다. 아이는 부드러운 말씨를 듣고는 고개를 그리로 돌리더니 한참 있다가 스스로 걸상에 올라타겠다며 매달립니다. 엄마가 아이를 들어서 자리에 앉힙니다.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아이를 자리에 앉힐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앉히면서 헤아립니다. 우리가 아이를 좀더 부드러이 타이르면서 불러들이는 마음을 놓쳤구나 싶습니다. 아이가 오지게 떼를 써도 한결 부드러운 마음을 건사해야 할 텐데, 때때로 이런 마음을 놓치곤 합니다. 아직 아이는 아이요, 우리 말을 모조리 알아듣지는 못하는 줄 잊곤 합니다. 찬찬히 지켜보고 가만히 거드는 어른이 곁에 있으면 더없이 든든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 지내는 삶이란 나부터 스스로 든든한 어른이 되어 가는 길이겠구나 싶습니다.


.. 라쎄랑 보쎄가 케르스틴을 창밖으로 늘어뜨린 뒤 밧줄을 당겼다 내렸다 하기 시작하자 비명을 질러댔어요. “시여, 시여!” 불러뷔 마을 전체에 들릴 정도로 요란스럽게 말이에요. 리사 아줌마가 나오더니,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 번만 더 하면 혼날 줄 알라고 야단을 쳤어요. 우리는 케르스틴에게 어린이날 잔치를 해 주려고 그런다고 설명했지요. 리사 아줌마는 어린이날 잔치는 불러뷔 식으로 하라고 말했어요. “어떻게 하는 건데요?” 브리타가 물었어요. “좀더 얌전하게 하는 거야. 예를 들면 닭이랑 돼지를 보여준다든지.” 리사 아줌마가 말했어요. 하지만 라쎄랑 보쎄랑 올레는 이제 빠지겠대요. “어린이날 잔치를 돼지 보여주는 걸로 해? 그런 걸 뭐 하러 해?” ..  (11쪽)


 아주머니는 먼저 내리고, 빈자리에 할아버지 두 분이 앉습니다. 아이는 이제부터 끝까지 서서 가겠답니다. 그래, 그러면 서서 가라 하고는 엄마가 종이배를 접어 아이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아이는 선 채로 한손으로 손잡이를 붙들고 한손 손가락에는 종이배를 끼우고 놉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아이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어 줍니다.

 내가 할아버지 나이가 되면 이렇게 낯선 아이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어 주면서, 애 엄마나 애 아빠 품을 덜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할아버지가 된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내 이웃들한테 할아버지가 되기까지 걸어온 길에 얻은 슬기와 넉넉함과 사랑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낮부터 술에 찌든 늙수그레 아저씨처럼 밥그릇 자랑을 하면서 어깃장 놓으며 못난 꼴을 보이는 사람이 될는지, 나이값을 곱게 먹으면서 아름다운 늙음으로 새로 태어날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사람들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궂은 사람들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좋은 사람이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궂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늘 나를 돌아보고, 언제나 내 마음밭을 곱씹으며, 노상 내 삶터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며,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보람과 사랑을 나눌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한테는 더 많은 책과 더 큰 돈과 더 으리으리한 집과 더 아늑한 자가용과 더 잘난 어버이가 아닌, 꼭 아이한테 걸맞을 사랑 한 손이면 넉넉하고 즐겁습니다.


 (2) 작은 이야기에 담는 너른 사랑과 고운 넋


 그림책 《행복한 어린이날》을 읽습니다. 스웨덴 이야기 할머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1907∼2002)이 예순 살 나이인 1966년에 내놓은 작품입니다. 그림결 또한 1966년대 스웨덴 그림결입니다. 2009년에 우리 말로 옮겨졌으니 마흔세 해나 묵은 나라밖 그림책입니다. 마흔세 해라는 햇수는 어찌할 수 없어, 책에 실린 그림 빛느낌은 좀 붕 떴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을 예순 살 할머니가 열 살 손자 손녀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펼친다면, 내가 1966년에 열 살 어린이라고 생각하면서 넘긴다면, 더없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그림책입니다.


.. 하지만 브리타랑 잉가랑 나는 케르스틴을 닭장으로 데려갔어요. 그랬더니, 이것 보세요. 케르스틴이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시여, 소리는 한 번도 안 했어요. 우리는 케르스틴에게 닭 모이를 뿌리게 해 주었어요. 닭들이 몰려와 에워싸자, 케르스틴은 까르르 웃었어요 ..  (14쪽)


 그림책 《행복한 어린이날》은 스웨덴에서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여섯이 주인공입니다. 사내아이 셋 계집아이 셋인데, 여섯 아이는 저희보다 훨씬 어린 동생한테 재미있는 놀이를 베풀어 주고자 머리를 맞댑니다. 스웨덴 서울인 스톡홀름에서 어린이날이면 큰잔치를 베풀어 준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는, 저희 마을 꼬맹이한테 ‘큰도시 서울에서 하듯이 큰잔치 베풀어 주’면 여섯 아이가 끼리끼리 재미나게 놀 때에 헤살꾼이 없이 신나게 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섯 아이가 저희 동생을 바라보는 눈길은 여느 어른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여섯 아이 모두 동생과 같은 ‘두 살하고 반토막’ 나이를 거쳤을 텐데, ‘두 살하고 반토막’ 아이한테 즐겁고 신나는 놀이가 무엇일는지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열 살짜리(또는 아홉 살이나 여덟 살짜리) 아이 눈높이에서만 헤아립니다. 저희한테 재미있으면 동생한테도 재미있을 줄 압니다. 저희한테는 재미있는데 동생은 재미있어 하지 않으니 지루해 하거나 성가셔 합니다.

 동생 케르스틴네 어머니인 리사 아주머니가 ‘우리 시골마을에서 큰도시 사람들이 그네들 삶터에서 하듯 즐기는 놀이가 아닌, 우리 작은 시골마을에서 우리 어린아이한테 걸맞는 놀이를 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을 때, 사내아이 셋은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계집아이 셋만 귀담아듣습니다. 계집아이 셋은 리사 아주머니 말씀대로 아이한테 ‘작은 시골마을에서 걸맞을 놀이를 두 살하고 반토막 어린 동생한테 베풀어’ 주니 어린 동생이 대단히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계집아이 셋은 어린 동생을 살뜰히 보살피면서 애틋한 사랑을 함께 나누는 길을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사내아이들은 저희끼리 다른 데에 가서 놀다가 ‘사람이 손으로 끄는 수레’를 가지고 와서 어린 동생을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어린 동생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하고 기쁨에 겨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다가는 이내 졸음이 찾아와 하품을 길게 하고는 새근새근 잠듭니다.


.. 우리는 송아지한테도 갔어요. “불러뷔 마을에 있는 거 케르스틴한테 모두 보여주자. 그래야 어린이날 잔치를 제대로 하는 거지.” 브리타가 말했어요. “토끼도 있어! 케르스틴한테 토끼 먹이 주라고 해 볼까?” 내가 말했어요 ..  (18∼19쪽)


 참으로 수수한 그림책이자 이야기책인 《행복한 어린이날》입니다. 아이들한테나 어른들한테나 어린이날을 즐겁게 보내는 길이란 멀디먼 데에 있지 않음을 넌지시 보여주는 좋은 그림책입니다. 어린이날뿐 아니라 여느 날을 신나고 기쁘게 맞이하는 삶자리란 다름아닌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울리는 고향마을임을 조용히 밝혀 주는 살가운 이야기책입니다.

 우리한테 고향마을이란 시골이 될 수 있고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큰도시가 될 수 있으며 작은도시가 될 수 있어요. 어디이든 우리한테 좋은 곳입니다. 어디라 한들 우리한테 반가운 터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기 나름이요, 우리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며, 우리가 부대끼기 나름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착한 마음결을 고이 건사한다면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어디에서 누구하고 복닥이더라도 우리 스스로 맑은 마음밭을 간직한다면 사랑스레 살아갑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더라도 우리 스스로 따순 마음씨를 보듬는다면 즐겁게 살아갑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버스를 몰면서, 자판을 두들기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한테 젖을 물리면서, 붓을 휘두르면서 너른 넋과 고운 얼을 알뜰살뜰 펼칠 수 있습니다.


.. 케르스틴이 몹시 피곤했는지 연달아 하품을 해댔어요. 우리는 마차를 끌고 리사 아줌마에게 갔어요. 케르스틴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어요. 하지만 라쎄랑 보쎄랑 나랑 브리타랑 잉가랑 올레는 마을에서 가장 큰 벚나무에 올라가서 저녁 내내 버찌를 따먹었어요. 그것도 정말 신나는 어린이날 잔치였답니다 ..  (23∼24쪽)


 작은 이야기책 하나에 너른 넋과 얼을 담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님입니다. 이러한 너른 넋과 얼을 두루 펼치기 때문에 스웨덴을 비롯한 온누리 어린이와 어버이들이 린드그렌 할머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기리는구나 싶습니다. 길디긴 작품일 때에는 길디긴 작품대로 사랑스러운 넋과 얼을 담으며, 짤막한 작품일 때에는 짤막한 작품대로 푸근한 넋과 얼을 담으니까요.

 그런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은 당신이 써내는 알뜰하고 알찬 이야기감을 바로 당신 곁에서 찾습니다. 당신 곁에 널려 있는 숱한 수수한 삶자락이 곧바로 당신한테 가장 사랑스럽고 고운 이야기거리가 됩니다. 생활동화가 되든 판타지가 되든, 짧은동화이든 긴동화가 되든, 그림책이 되든 동화책이 되든, 당신은 다름아닌 당신이 걸어온 삶과 이웃이 걸어온 삶에서 눈물겹고 웃음나는 이야기보따리를 일구고 엮어서 풀어냅니다.

 이와 달리 우리 나라 숱한 손꼽히는 어린이책 작가들은 우리 곁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찾지 않으며 느끼지 못하다가는 일구지 않습니다. 모두들 머나먼 나라를 바라보며 구름 위 나라를 생각합니다. 내 곁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피지 못합니다. 내 둘레 동무가 어찌어찌 지내는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론은 빠삭하고 지식은 넘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이 얕고 믿음이 얕습니다. 글 만지는 재주는 빼어나고 줄거리 엮는 솜씨는 뛰어나지만, 글에 담는 푸근함과 이야기에 깃들이는 넉넉함은 모자랍니다.

 글을 왜 쓰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구한테 즐거울는지를 차근차근 헤아려야 합니다. 내가 쓴 글로 누구와 함께 웃고 울려 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를 비롯해, 우리네 작가들께서 그림책 《행복한 어린이날》을 곰곰이 되새겨 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은 그림책 하나에 어떤 넋과 얼이 스며 있는지 곰삭여 주실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책을 덮으며 한 가지 대목에서 아쉽습니다. 이 책은 모두 스물네 쪽으로 이루어진 판 작은 그림책인데 책값이 8000원입니다. 책값이 지나치게 비쌉니다. 이만한 크기와 부피와 짜임새라 한다면 6500원이나 7000원이 알맞으리라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책이라 할지라도, 책에 매기는 값이 알맞지 않으면 사람들이 제대로 다가서거나 사랑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을 좋은 값을 치르며 기쁘게 받아들어 고이고이 간직할 여느 사람들을 헤아릴 줄 아는 책마을 일꾼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4343.3.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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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의 사상
나카노 고지 / 자유문학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34 ― 좋은 삶, 좋은 사람, 좋은 말
 : 나카노 고지, 《청빈의 사상》



- 책이름 : 청빈의 사상
- 글 : 나카노 고지
- 옮긴이 : 서석연
- 펴낸곳 : 자유문학사 (1993.5.15.)
- 판이 끊어짐

 





 (1) 좋은 삶을 찾는 길


 엊저녁 날씨가 차츰 쌀쌀해지더니 그예 얼음비가 내렸고, 밤에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개나리며 봄꽃이며 가득가득 피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온 동네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사월에도 눈이 내렸고,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살이를 할 적에는 부처님오신날까지 눈이 내렸습니다. 남녘땅에서는 삼월에 찾아오는 눈이란 드물지 않은 손님이요, 북녘땅에서는 더 늦게까지 눈손님이 찾아올 테지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를 집에만 둘 수 없기에 바깥마실을 나왔으나 얼음비나 눈이 내리기 때문에 걸리지는 못합니다. 우산을 받고 아이를 안으며 걷습니다. 아이는 비나 눈이 올 때에는 걸리지 않는 줄 아는지 찰싹 안긴 채 우산대를 한손으로 잡으면서 놉니다. 어스름이 깔리는 골목을 함께 거닐며 사진 몇 장 찍어 보고자 하는데, 날도 저물고 한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볍지 않은 사진기를 들고 숨을 참으며 아이가 가만히 있는 때를 살펴 찍기란 참 팔 떨어질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어스름 골목은 어스름 골목대로 멋이 있고,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은 눈발 흩날리는 어스름 골목대로 삶이 있습니다. 누구나 달콤한 삶과 함께 쓰디쓴 삶이 찾아올 터이며, 고단한 삶과 맞물려 홀가분한 삶을 마주할 터이고, 얄궂은 삶에 뒤잇는 반가운 삶을 즐길 테지요.

 골목마실을 하노라면 골목동네에서도 온갖 갈래 집을 만납니다. 넓은 마당이나 뜰을 마련한 부잣집을 만납니다. 손바닥만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꽃밭이나 텃밭을 일구고 감나무나 대추나무나 고욤나무나 포도나무나 오동나무 들을 심은 조금은 넉넉한 살림집을 만납니다. 옛 기와를 고스란히 살린 살림집이나 개량 기와를 얹은 살림집을 만납니다. 골목 담벼락을 따라 꽃그릇을 주욱 마련한 집을 만나고, 담벼락 한켠에 시멘트를 섞어 삼십 센티미터나 오십 센티미터 너비로 죽 만들어 놓은 텃밭이나 꽃밭이 딸린 집을 만납니다. 꽃그릇 하나 놓을 수 없도록 비좁은 샛골목으로 이어진 데에서 다닥다닥 붙은 채 살아가는 한칸집을 만납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한칸집이라 할지라도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골목을 따라 빨랫줄을 드리우기 마련입니다. 전봇대와 전봇대를 잇고, 옥상 작은 틈에 어떻게든 빨랫대를 세워 서로 조금씩 자리를 나누어 해바라기 빨래를 넣어 놓습니다. 겨우 한 사람 올라갈 만한 구멍을 뚫고 사다리를 놓아 옥상으로 올라가고, 지붕 한 끝과 다른 끝에 장대를 박아 놓습니다. 더욱이 이런 좁은 옥상에 꽃그릇 한둘쯤은 으레 올려놓습니다.

 하루이틀 사흘나흘 동네를 돌고 다시 돌고 거듭 도는 동안, 지난번에 보거나 마주한 모습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새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뭉클함을 느낍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모습에 반가움을 느낍니다. 동네마다 고추말리기를 하느라 빠알갛게 물들던 2008년 팔월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창 찍을 모습이 많을 때에 아이와 옆지기 곁에 붙어 지내느라 사진찍기 좋은 때를 가슴으로 삭이며 보냈습니다. 이듬해에도 아이 돌보는 데에 바빠 고추말리기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습니다. 아마 올해 여름에도 고추말리기 사진을 담기란 퍽 어려운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나 혼자 좋다고 나 혼자 좋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내 일을 챙긴다면서 식구들 일을 뒷전으로 미룰 수 없으니까요.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라 한다면 함께 웃고 울 만한 일거리와 놀거리를 찾아야 알맞고, 함께 느끼고 함께 보고 함께 헤아리며 함께 부대끼는 삶이어야 조촐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혼인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에는 혼자서 신나게 골목마실을 하고 책방마실을 했겠지요. 사진은 더 많이 찍고 책은 훨씬 많이 읽으며 살아가겠지요.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대단히 많이 일구어 놓았을 테고, 아름답다 싶은 책을 꽤나 많이 머리속에 담고 있었을 테지요. 틀림없이 이와 같이 꾸리는 삶은 이와 같이 꾸리는 삶대로 뜻이 있고 값이 있습니다. 내 꿈을 한껏 펼치면서 내 마음을 그지없이 드높일 수 있으니 알차고 빛나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알차고 빛나는 삶은 누구와 함께 알차거나 빛날 삶이 될는지요. 내 이웃과 동무 앞에서 어떻게 알차거나 빛날 삶으로 아로새길 수 있을는지요.

 아름다운 사진은 참말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멋진 사진은 더없이 멋진 사진입니다. 훌륭한 사진은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멋이란 무엇이며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 사랑할 삶에서 우리가 곱다시 껴안으면서 즐기고 나눌 아름다움과 멋과 훌륭함이란 무엇인가요.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우리 바깥에 있을는지요. 멋이란 노상 머나먼 곳에 닿아 있을는지요. 훌륭함이란 홀로 거룩하게 이루어 내는 일인지요.

 요사이 우리 옆지기가 뜨개질을 익히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는 바느질로 아이 인형을 셋이나 만들더니, 이제는 뜨개질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옆지기가 바느질을 하든 뜨개질을 하든, 한 번 손에 붙잡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이 일에 꼬박 매달립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 밥때이든 무엇이든 하나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밥차림이나 다른 집살림은 아빠 몫이었지만, 아주 깊이 빠져들며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합니다. 처음에는 엄마한테 막 달라붙던 아이도 이제는 어느새 받아들였는지, 엄마가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면 옆에서 꽤 오랫동안 혼자서 책을 보고 쌓기놀이 들을 합니다. 어제는 새벽 세 시 반까지 뜨개질을 하던데, 한창 뜨개질 맛을 들이고 익힐 때이니 늦도록 마음이 끌리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또한 글쓰기에 폭 빠지는 때라면 새벽 세 시이든 네 시이든 오래오래 글 하나를 붙잡으며 갈고 다듬고 깎고 여미곤 합니다. 누가 읽어 주건 말건 저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손질하고 손보고 고쳐씁니다. 한 사람이 읽어 주든 백 사람이 읽어 주든 그다지 마음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흐뭇할 만한 글이어야 하고, 저 스스로 열 해 뒤에도 스스럼없이 사람들 앞에 내보일 만한 글일 뿐 아니라, 제가 읽어서 참 좋다고 느낄 글이 될 때까지 내처 붙잡습니다.

 지난 1998년부터 사진을 찍어 오면서, 제 사진감 몇 가지를 놓고 새로 찍고 거듭 찍고 또다시 찍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큼 꽤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은 수두룩하게 있으리라고. 그러나 저로서는 사진책 몇 권을 묶을 만한 대단하거나 멋진 사진을 찍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철철 흘러넘쳐서 마구잡이로 찍지는 않습니다. 제가 찾아다니는 헌책방이 좋고, 제가 살고 있는 골목길이 좋으며, 제가 타고다니는 자전거가 좋은 한편, 옆지기와 함께 키우는 아이가 좋으니까 사진을 찍습니다. 그저 또 찍고 거듭 찍고 새로 찍습니다. 좋기 때문입니다. 늘 마주하면서 좋은 느낌이기에 ‘오늘은 이런 좋은 느낌이 있네’ 하면서 새삼 찍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언제나 곁에 있는 이웃인 헌책방이고 골목길이고 자전거인 까닭에 ‘이날은 이날대로 이런 느낌이 반갑네’ 하면서 신나게 찍습니다. 웃는 아이이든 자는 아이이든 땡깡 부리는 아이이든 밥 먹는 아이이든 조용히 책읽는 아이이든, 어느 모습이든 좋은 우리 아이 삶이기에 줄기차게 사진을 찍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느끼니까 오래오래 읽습니다. 나와 옆지기한테 좋고, 나중에는 아이한테도 좋으리라는 느낌을 받으니 차곡차곡 갈무리를 해 놓습니다. 서른여섯 해 삶에서 열여덟 해 삶을 책사랑으로 걸어온 길이었기에 저한테 참 좋은 이 책을 혼자 간직하기에 아쉬워 동네 도서관을 열어 놓습니다.

 좋은 느낌을 담아 좋은 말을 나누고,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뜻을 북돋웁니다. 좋은 뜻은 좋은 길로 이어지며, 좋은 길은 좋은 삶으로 마무리됩니다.


 (2) 좋은 책 하나란


 《청빈의 사상》이라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판이 끊어진 지 꽤 오래된 책이라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해 만에 겨우 다시 한 권 만났을 때에 기쁘게 장만한 다음 이웃집에 선물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헌책방마실에서 이 책이 다시 눈에 뜨이면 기쁜 마음으로 장만해서 제 둘레 고운 이웃한테 선물해 줄 생각입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해 주는 책이란,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는 책이어야 합니다. 아니, 저 스스로 대단히 좋은 책이라고 느끼지 않고서는 책 선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맛을 보거나 맛을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술이든 떡이든 밥이든 선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기쁘게 읽거나 줄거리를 어느 만큼 알지 않고서는 책을 선물할 수 없습니다.

 《청빈의 사상》은 일본사람 나카노 코지 님이 쓴 책입니다. 일본 문화와 역사와 철학에 눈길을 두는 외국사람한테 ‘일본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이러한 넋과 얼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레 지키고 보듬으면서 이어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마련했던 강연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일본사람 넋’을 다루는 책 《청빈의 사상》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는 역사를 억지로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자그마한 아름다움 하나를 고맙게 건사하면서 알뜰히 빛내는 나라’라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일본과 이웃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싸움을 벌여 땅뺏기를 해 온 발자취가 역사인 줄 잘못 알고 가르치며 이야기하는’ 어설픈 나라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적을 돌아보면, 또 이 나라 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쓰는 교재를 살피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임금님 이름이나 무슨무슨 굵직한 사건사고를 가르칠 뿐입니다. 궁중음식 역사는 있어도 서민음식 역사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궁궐 안쪽에서 오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숱한 연속극을 찍지만, 궁궐 바깥쪽에서 살아가던 이야기를 놓고는 아무런 연속극이 없습니다. 지난날 이 나라에 농사꾼이 95%가 넘었고 고작 5%가 안 되는 이들이 양반이요 신하요 뭐요 하고 했다지만, 우리들은 95%가 넘는 여느 사람들 발자취란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95%가 넘는 농사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고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를 아우르는 역사책 가운데 임금과 신하와 궁궐 둘레 이야기 아닌 이야기를 몇 가지나 적바림해 놓았습니까.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고, 아무런 역사가 없다 여기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무 배울거리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음고리는 2010년에 돌아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문이며 방송이며 책이며 온통 ‘있는 사람’ 이야기일 뿐입니다. ‘없는 사람’이나 ‘앗긴 사람’이나 ‘눌린 사람’이나 ‘밀린 사람’들, 그러니까, 이 나라를 맨 밑바닥에서 받치면서 꾸려 나가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끝없는 경쟁과 싸움과 순위와 등수와 서열과 연고와 학연과 씨줄과 학벌과 재산과 주식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만 있는 듯 시끄럽습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살림과 여느 골목동네 여느 웃음꽃 눈물꽃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청빈의 사상》을 쓴 나카노 고지 님은 일본 옛사람 입을 빌어 이야기합니다. “죽은 뒤에 누구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 생전에 주는 것이 좋다(33쪽).”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 일본사람들이 너무 바보스레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들한테 일본 옛사람 손을 빌어 글을 적바림합니다. “저축하고 착취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누어 갖는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린다(204쪽).”

 자가용을 몰지 않는 사람들만이 서민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차가 아닌 작은차를 몰고 있다 해서 서민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서민, 곧 ‘낮은자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은 자가용이 아닌 두 다리를 믿습니다. 기계가 아닌 두 손을 믿습니다. 컴퓨터나 책이나 신문 같은 매체가 아닌 내 머리를 믿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체육이 아닌 내 가슴을 믿습니다.

 일본 옛사람들만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한국 옛사람들 또한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왔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옛사람 가운데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무슨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나누어 오고 있었는지를 읽어낼 만한 눈길과 눈썰미와 눈결과 눈매와 눈높이를 추스르는 오늘날 한국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똑똑하고 엄청난 생각이라고 나쁘지 않습니다. 잘나고 멋스러운 생각이라고 못마땅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로서는 똑똑한 생각보다는 티없는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난 생각보다는 어여쁜 생각이 반갑습니다. 돈 잘 버는 생각보다는 착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잘 알려진 이름값 높은 생각보다는 수수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진보와 개혁과 보수라는 금을 긋는 생각보다는 맑은 생각이 반갑습니다. 부자 생각보다는 가난한 생각이 반갑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가난한 생각을 고이 섬기며 내 삶으로 삭이면서 즐기고자, 우리 집 살림은 늘 가난뱅이 살림입니다.


 (3)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란


 책상맡에 놓고 늘 들추는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쯤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수선할 때에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벗님으로 삼을 만한 책이라 한다면 《청빈의 사상》 눈높이는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책이 목숨을 얼마 잇지 못하고 판이 끊어진 대목이 몹시 안타깝습니다만, 찬찬히 헤아리면 우리 나라에서 이 같은 맑고 아름다운 책이 널리 잘 팔리기란 아주 힘들구나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아주 마땅하게도 판이 끊어질 만한 책입니다. 한국땅에서 이 책은 매우 마땅하게도 쉽게 잊혀지고 제대로 안 읽히며 깊이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조차 나오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도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기도 하는 한국땅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사람 손으로는 아직 《청빈의 사상》이나 《즐거운 불편》이나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같은 책을 써내지 못합니다. 우리한테는 아직까지 맑고 아름다운 생각이란 멀디먼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물을 삼키고 콧물을 훌쩍이면서 《청빈의 사상》을 되읽고 곱씹습니다. (4343.3.10.물.ㅎㄲㅅㄱ)


[25, 26, 32, 33쪽] 묘슈는 간탐하여 부귀한 자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다. 간탐을 미워한 나머지, 그녀는 부귀한 자는 반드시 어딘가 간탐한 점이 있지 않는가를 의심하고, 가난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바귀하다는 그 자체를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 묘슈는 빈곤 때문에 생기는 불행보다도 부귀가 사람의 마음에 끼치는 해독을 중시하고, 사이비 인간이 되어 부귀한 것보다는 가난하지만 인간다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저택을 지니면 그 유지ㆍ관리에 많은 사람을 쓰게 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종일 마음을 괴롭혀야 한다 … 사람은 소유가 많을수록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하여 그 마음은 재물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37, 42, 43, 84쪽] 중요한 것은 돈벌이가 아니다. 칼의 감정에 관한 한 자기들이야말로 으뜸가는 권위자라는 긍지와 자부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으며, 돈에 눈이 멀어서 그 긍지와 자부를 손상시키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내재하는 규율이다 … 일본인은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들도 남들 앞에서 금전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주 멸시하고, 무엇보다도 명예를 존중하며, 고결하게 행동하는 것을 존중했다 …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은, 이 나라가 경제 대국이 되었다거나 수출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것, 즉 ‘무형의 인격’에 관한 사항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 료칸은 남들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마음쓰지 않았다. 바로 그 안에 삶의 충족이 있었으므로, 그것이 선경이었는지도 모른다.

[59, 176쪽] 먹을 것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포식의 시대에는 먹을 게 있다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굶어죽기 직전의 상태, 즉 끼니를 거르기 일쑤일 때 쌀 석 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 그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것뿐이라면 아무도 그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지는 않는다 … 일단 소유욕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소유의 증대에만 관심을 빼앗기고 금전의 노예가 되어, 그밖의 인간의 중요한 일들에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75, 83, 88∼89쪽] 고독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며,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자기 혼자만의 삶을 보낸 것이다 … 료칸에게는 시와 와카를 짓고 좌선을 하고 불경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속세를 떠난 세계에서 노는 방도였다 …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료칸)는, 지나치게 자신을 책망하는 이에게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입을 다물며, 알려고 하는 이에게는 ‘공을 쳐 보려 무나’라고 다정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 료칸은 결코 설교 따위를 하지 않고, ‘오로지 도의로 중생을 감화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92, 102, 105, 108쪽] 요즘 쏟아져나오는 하찮은 소설을 읽기보다는 옛날의 그러한 일화집을 읽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 문인화는 정신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교가 제아무리 능한 자일지라도 속된 마음이 있으면 그림에 그것이 나타났다 … 예술에 정진하는 자에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이 있는 한, 참된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결국 시기, 즉 장삿속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다른 높은 경지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스스로 미(美)라고 믿는 바를 추구해서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요즘 그림은 옛것에 미치지 못한다 … 옛 학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요즘 학자는 남을 위해서 한다.

[119, 132, 145쪽] 단순히 글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에 이어지는 것이다 … 아케미는 이러한 참된 즐거움은 벼슬살이하면서는 이루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 가난한 독립독보 생활에만 있음을 익히 터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풍아는 그런 곳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진실의 인식에는 시대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 것이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다 … 그러나 좌절한 체험이 없는 자는 평생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137, 139, 142, 224쪽] 죽음을 미워한다면 그 기쁨을 하루하루 확인하고 살아 있음을 즐겨야만 한다 …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지금이 즐겁지 않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세상일에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일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솢우한 것을 망각한 점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 평균 수명이 얼마라는 식으로 자랑스럽게 늘어놓고는 하는데, 그것이 다만 육체적 생명의 연장만을 의미한다면 도대체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 사이교도, 바쇼도,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언어를 통해 생에 대한 감각을 잘 표현하였지만,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기술에 능숙했던 것만은 아니다. 언어 이전에 이 세상에는 자기 및 타인, 다른 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평소부터 가슴깊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로, 그 깨달음의 깊이가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147, 148, 152, 156쪽]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그 길을 걸어다닐 때 느낀 그의 행복감은, 이것이 마지막 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문예 작품은 대부분 생애의 마지막을 보는 눈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있다 … 자못 바쇼다운 말이며, 그는 평상시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든 힘을 기울여서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어 왔다는 사실의 표명이었으리라 … 마음의 빛깔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표현으로 잔재주를 부리려 한다 … 나중에 반복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ㄷ르을 때와 단 한 번뿐이라는 각오로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의 주의력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163, 189, 215, 226쪽]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새로 돋은 푸른 잎 어린 잎 등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며 바라보는 바이지만, 그것을 ‘고귀하게 느꼈다’는 말로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시가를 읊조리기 위해 여기저기 명승을 찾아다니는 어설픈 풍류인의 마음가짐으로는 도저히 이런 식으로 순수하게 조화된 마음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 이제는 오히려 ‘자연 보호’라든가 ‘환경 보존’이라는 것을 부르짖게 되었는데, 자연을 친구로 대해 왔던 선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애당초 근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이야기는 작은 새들에게의 설교라고 하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성 프란체스코가 평소에도 언제나 그와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 아마추어는 노래나 시구가 ‘말을 꾸며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시가란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풍류를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 상태야말로 시가의 전부이다, 라고 사이교나 바쇼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236, 238∼239쪽] 지금도 서민이 모여 사는 도쿄의 어느 지역에 가 보면 뜰이 없는 집에도 화분이나 재배판에 작은 나무와 꽃을 심어 처마 끝에 놓아 두고 조석으로 물을 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환경보호라든가 사회 생태학 운동마저도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솔선하여 그것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 청빈이란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같이하고 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240, 249, 256, 264쪽]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하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단순히 금전으로 살 수 있는 상품으로만 간주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야말로 문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 그렇게 터무니없이 쓰다 버리는 낭비 사회가 출현하고 있어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풍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라는 실감이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지금 일본은 웬일인지 도처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정이 만들어져 있어 생활, 교제, 복장, 행동에 틀이 형성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결혼식에서 사회자가 재촉하는 대로 손뼉도 치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고, 사진찍는 것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그에 따르지 않으면 소외당한다는 규정이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 … 자동차 따위를 제아무리 많이 수출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조금도 일본의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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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여행
신혜 글.그림 / 샨티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2 ― 힘든 앎, 힘든 사람, 힘든 뜻
 : 신혜, 《먼지의 여행》


- 책이름 : 먼지의 여행
- 글ㆍ그림ㆍ손글씨 : 신혜
- 펴낸곳 : 샨티 (2010.2.16.)
- 책값 : 12000원



 (1) 아이하고 보내는 하루란


 아이와 함께 바깥마실을 나오려고 했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아직 아이 비옷을 마련해 주지 못한 까닭에 아이를 걸릴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애 아빠가 아이를 한팔로 안고 우산을 받으며 걷습니다. 아이도 비 때문에 걸리지 못함을 알고 있는지 아빠한테 안겨 가면서도 내리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느 때라면 바둥바둥하면서 얼른 내려 달라 했을 테지만 아빠 품에 꼬옥 안긴 채 한손으로 우산대를 잡습니다. 아이는 품에 안겨 우산을 함께 잡으며 다니고 싶은가 봅니다.

 아이를 안고 우산을 받아 본 분은 알 텐데, 이러한 몸으로 몇 분 걸어도 팔이 저리고 힘듭니다만 한두 시간쯤을 이렇게 걷는다 한다면 내 팔은 내 팔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팔이 저리더라도 이렇게 걸을밖에 없고, 이렇게 걷는다고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팔은 저리지만 세 식구가 함께 바깥마실을 할 수 있으니 기쁩니다.

 생각해 보면 여느 식구들은 으레 자가용을 몰고 있으니,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날이 맑건 흐리건 이냥저냥 자동차에 타고 움직입니다. 추운 날에 추위를 느끼며 걸을 일이 없을 테고, 더운 날에 더위를 느끼며 걸을 일이 없겠지요. 눈이 오는 날 눈을 느끼며 걷는 요즘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비가 오는 날 비를 느끼며 걷는 오늘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워낙 아기수레 없이 아이를 키웠고, 자가용 또한 없이 아이와 살고 있습니다. 아이랑 바깥마실을 다닐라치면 아이 기저귀며 옷가지며 잔뜩 짊어지고 다닙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느 식구라 한다면 자가용에 아기수레며 갖가지 물건이며 잔뜩 챙기고 다닐 테지만, 우리 식구는 아기 옷가지에 천가방을 여럿 챙기고 다닙니다. 걸어서 저잣거리를 찾아가고, 한참 둘러본 다음 물건을 장만하며, 장만한 물건은 등에 메는 가방과 어깨에 걸치는 천가방에 담아 집으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라면 아이까지 품에 안고 우산을 받는 몸으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제 어린 날을 더듬어 봅니다. 더 어린 날은 떠오르지 않으나 일고여덟 살 적부터 떠오르는데, 어머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물건을 장만했습니다. 어머니가 물건 사러 나갈 때에 따라나서면 시내 구경도 하지만 길에서 무언가 얻어먹을 수 있고, 어머니랑 함께 어울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버스 타기 또한 신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가 장만한 물건을 함께 나누어 들고 오는 일쯤이야 아무것 아닙니다. 시내 구경에 버스를 타고 주전부리를 할 수 있다면 무슨 심부름인들 못하겠습니까. 어린이일 때 어머니와 저잣거리 마실을 다닌 일이 몸과 마음에 생생히 아로새겨졌기 때문이라 할 수 없으나, 우리 아이하고 저잣거리 마실을 다닐 때에는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바깥바람을 함께 쐬고 돌아오는 길이 즐겁습니다. 이래저래 몸이 고단하고 힘들어, 집으로 돌아온 뒤 그대로 나가떨어지거나 곯아떨어지더라도 저녁나절에 깨어나고 보면 개운하고 후련합니다.

 저잣거리에 나간다 한들 따로 무언가 가르치거나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아이 스스로 이리 촐랑 저리 촐랑 들여다보고 구경하는 양을 지켜봅니다. 아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면서 사람들한테 알은체를 하고 웃음을 띄우며 때때로 손을 들어 가리키며 “넌!” 하는 한 마디를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른들은 사탕이나 만두나 국화빵이나 떡을 한 점 집어 주곤 합니다.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할 줄 몰라 아이보고 “자,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하고 꼬박꼬박 말을 걸지만 두 번 가운데 한 번만 고개를 까딱까딱 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어린 날을 되새기노라면, 어머니를 따라나선 저잣거리 마실도 즐거웠고 홀로 심부름을 하던 일도 즐거웠습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리고 달음박질을 하며 가게로 갑니다. 어머니가 내어준 돈은 한손에 꼭 움켜쥐고 달립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으나, 주머니에 넣고 달리다가 빠진 적이 있습니다. 가게에 닿고 보니 돈이 없어 화들짝 놀라 오던 길을 헐레벌떡 돌아가 돈을 주워 다시 달린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가게에 들어서기 앞서 후욱 하고 큰숨을 들이쉬며 숨을 고릅니다. 가게 이곳저곳을 잽싸게 둘러보고서는 사야 할 물건을 얼른 골라 셈대에 올려놓습니다. 셈을 치를 때면 으레 가게 아주머니가 “심부름을 왔구나. 착하지.” 하면서 50원쯤 에누리를 해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에누리를 해 주시면 10원이든 50원이든 몰래 감추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 나중에 오락실에 가거나 군것질을 합니다. 때로는 만화책을 사고 어느 때에는 우표를 삽니다.

 퍽 이르다고 할는지 모르나, 집에서 스무 달짜리 우리 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밥을 하며 먹을거리 한 점을 포크에 찍어 “자, 아빠 드시라고 해.” 할 때가 있고, 페트병에 담긴 물병을 아이한테 안기며 “자, 엄마한테 갖다 드리렴.”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걸상을 끌어 개수대 앞에 착 갖다 붙이고는 부엌살림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만지며 놀기를 좋아합니다. 방에 창문을 열어 놓으며 공기갈이를 할라치면 방까지 걸상을 들고 올 수 없으니 낑낑대면서 창가에 걸상을 대 달라고 합니다. 걸상을 번쩍 들어 창가에 대 놓으면 아이는 영차영차 기어올라가서는 창가에 착 붙고는 바깥바람을 쐬며 골목길을 내려다봅니다.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며 지켜보면, 아이는 쉴새없이 뛰고 걷고 말하고 놀고 달려듭니다. 아직 스스로 오줌을 가리지 못하니 때 맞춰 쉬를 시킵니다. 배고파 할 즈음 밥을 차려서 먹이고, 하루에 두 번쯤 똥을 눌 때에 잘 받아서 치우고 닦입니다. 엊그제 아이가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요 며칠 못 씻기지만, 날마다 아침빨래를 하면서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깁니다. 그러고는 낮에는 낮잠을 한 번 재웁니다. 낮잠을 안 자고 놀 때가 있으나, 이렇게 낮잠 없이 놀면 저녁에는 아이가 부리는 짜증이 대단하며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데다가 새벽에 자꾸 깨며 칭얼거립니다. 어제 한 빨래가 다 말라서 갤 때쯤 아이는 어느새 다시 배가 고파 저녁을 차려야 하고, 저녁을 차리고 함께 먹고 치우고 하노라면 그만 하루해가 저뭅니다.

 이 나라 숱한 남자들이 몸소 ‘전업주부’ 노릇을 해 본 적이 없는 까닭에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빠듯하게 하루를 보내며 날짜를 모르는지’를 살피지 못합니다. 밥때는 왜 이리 금세 돌아오고, 빨래는 왜 날마다 수없이 쌓이며, 날마다 치우고 쓸고 닦아도 이튿날이 되면 어인 먼지가 이리 다시 쌓이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아이한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히고 바깥마실을 시킵니다. 혼잣몸으로 아이를 훌륭히 잘 돌보면서 돈벌이까지 척척 해내는 분이 있다지만, 이렇게 척척 해내는 분들은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기에 당신한테 쏟는 시간이 하나 없고,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면 갑작스레 몸이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오늘도 아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안기고 하다가는 두 시간 만에 비로소 ‘혼자 놀기’를 합니다. 혼자 놀기란 온갖 인형과 놀잇감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어른이 보기에는 ‘아무렇게나’이고 아이한테는 아이 ‘나름대로’) 늘어놓는 놀이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늘어놓기만 하다가 요사이는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도 하지만, 이렇게 돌려놓는 일은 드뭅니다. 인형을 통에서 다 끄집어 낸 다음 인형 담던 통에 아이가 들어가 쭈그려앉으며, 머리띠를 둘이나 셋이나 넷을 한꺼번에 머리에 씌우고 헤헤거리며 웃습니다. 아빠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 아이는 인형통에 들어가 쭈그려앉다가는 아빠 사진기를 끙끙대며 잡아당겨서는 켭니다. 그런데 또 끙끙대기에 “왜?” 하고 물으며 바라보니, 사진기에 사진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앞서 메모리카드를 비웠거든요. “미안해. 곧 사진 만들어 줄게. 엄마 사진 찍자.” 하면서 엄마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아이한테 사진기를 건넵니다. 지난주쯤 엄마가 팔찌 놀잇감을 아이한테 보여주었더니 아이는 길쭉한 종이를 팔찌처럼 팔에 감으며 놉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하나를 들고 아빠한테 다가옵니다. 이 그림책을 펼쳐서 보여주고 읽어 달라며 “빠빠! 빠빠!” 합니다. 그림책을 두 번 읽어 주고, 길쭉한 종이를 아이 왼팔에 감싸 줍니다. 종이 팔찌를 아이가 벗기더니 끙끙거리기에 다시 팔찌를 만들어 주니 팔찌가 벗겨질세라 한쪽 팔을 가만히 든 채 사진기로 다가가 한 번 들여다보고는 엄마 무릎에 앉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옹알옹알거리면서 온 방을 돌아다닙니다. 이제 곧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테니까 밥상을 차려야겠지요. 오늘 하루도 참으로 빠르게 한 시간 두 시간 지나갑니다. 어버이한테는 참으로 빠른 나날인데 아이한테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아이한테는 더없이 더딘 나날일까요. 어버이한테는 그지없이 고단하고 바쁘니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더 짧다고 느끼는 셈이고, 아이한테는 더 오래 많이 놀고픈데 엄마 아빠가 오래오래 저하고만 놀아 주지 않으니 지루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면서 길디긴 하루라고 느낄까요.


 (2) 힘들게 살며 힘들게 얻은 《먼지의 여행》


 1984년에 태어나 ‘여느’ 아이와 같이 여느 제도권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다음 대학교까지 마친 분이 어느 날 문득 ‘남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비슷하거나 똑같이 살아야 하는 나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조용히 부모님 집을 떠납니다. 부모님 곁에서 떠나 홀로 돈 없이 나라밖을 돌아다닌 젊은 넋은 한 해 동안 일본과 인도와 네팔과 태국과 중국을 거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짧지 않은 나날을 나라밖에서 돈 없이 돌아다니며 마주한 사람과 삶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든 젊은 넋은 도무지 ‘제도권 틀 그대로’ 살아갈 재주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목숨 하나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면서, 이렇게 먼지와 같은 목숨이기에 참 좋고 가볍고 밝으며, 나한테도 남한테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아님을 새삼 느낍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갈피잡지 못하고 있으나, “괜찮아. 다음 길은 다음 걸음에 보일 거야.” 하는 생각을 고이 품습니다.

 젊은 넋은 스스로 제도권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던 나날과 굳이 용을 쓰지 않으면서 제 삶고리를 느끼며 보내던 나날을 글과 그림으로 남겨 놓습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제도권 울타리에서 하루하루 보냈을 때에는 구태여 제 삶을 글이든 그림이든 남길 까닭이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내 삶이든 네 삶이든 다 비슷비슷하니까요. 내 어버이 삶이든 동무 어버이 삶이든 거의 같거나 닮았으니까요. 이리 보거나 저리 보거나 엇비슷한 옷에 차림에 얼굴에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니까요.

 내 길이 아닌 제도권 길을 걷기에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슬픔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아니, 알아야 할 까닭이 없고, 알지 않아도 되며, 알지 않더라도 잘못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애써 눈을 두어 살피라고 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남들이, 아니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바라거나 시키는 대로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나다운 삶을 나답게 찾거나 즐길 까닭이 없는 한편, 나다운 삶을 나답게 찾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좀더 높다 하는 대학교 졸업장을 움켜쥐면 되고, 이 졸업장으로 연봉을 한푼이라도 더 주는 큰 일터를 찾아서 들어가면 되며, 정 안 되면 집식구들이 꽤 잘사는 짝꿍을 찾아서 시집장가를 가면 되는 세상 얼거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맞는 좋은 짝꿍을 찾아 빛나는 사랑을 꽃피우는 젊은 넋이 있습니다만, 이 나라 젊은 넋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빛나는 사랑’을 스스로 하도록 배운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이 나라 젊은 넋이나 푸른 넋이나 어린 넋 가운데, 제 둘레에 빛나는 사랑을 곱게 꽃피우는 어른을 마주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늘 보느니 돈바라기 어른이요, 으레 보느니 이름바라기 어른이며, 노상 보느니 힘바라기 어른입니다. 국가경쟁력이니 세계경쟁력이니 무한경쟁이니 하면서 나다운 내 삶을 찾는 길은 경쟁력이 하나도 없는 못난쟁이 헛놀음이라는 생각만 키울 뿐입니다. 주식이니 펀드이니 아파트이니 투자이니 처세이니 경영이니 자기계발이니 하면서 옳은 삶이나 바른 삶이나 예쁜 삶이나 멋진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살도록 내몰리고 있을 뿐입니다.

 힘겹게 떠돈 삶을 《먼지의 여행》이라는 책에 조촐히 담은 앳된 넋은, 여태껏 보낸 스물 몇 해를 훌훌 털어 보내면서 아무것도 또렷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가고자 다짐합니다. 아무래도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을 키워 온 어버이한테는 가시밭길일 테지만, 이 책을 쓴 젊은 넋으로서는 풀숲길이리라 봅니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으며 한 해 두 해 온갖 풀이 돋아나고 자라난 길 없는 길이리라 봅니다. 왜, 사람들 떠난 자리이면 시골이든 도시이든 풀이 돋아나잖아요. 서너 해쯤 지나면 제법 큰 나무가 자라나 있고, 사람손을 하나도 안 탄 채 열 해쯤 되면 어느새 집 모양은 찾아볼 길이 없이 숲으로 바뀝니다.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은 바로 이러한 풀숲길을 찾아서 걷고 있습니다. 때로는 풀숲길에 발자국을 남겨 젊은 넋 뒤로 누구나 따라올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때로는 젊은 넋 발자국 하나 안 남기면서 풀숲에 조용히 녹아들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몇 사람쯤 밟는다고 해서 풀숲은 꺾이거나 시들거나 사라지지 않거든요.

 곰곰이 헤아려 보면, 《먼지의 여행》을 쓴 젊은 넋은 이녁대로 반가운 풀숲에 들어가 풀빛을 온몸 가득 받으면서 푸른빛을 받아들인다고 하겠습니다. 전업주부이자 밥벌이하는 아빠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저대로 살가운 풀숲에 들어가 제가 좋아하는 풀빛을 온마음 가득 껴안으면서 푸른결을 곰삭인다고 하겠습니다. 남이 걷는 길을 괜히 따라 걸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좋고 반가우며 살갑다면 남이 걷는 길을 따라 걷는 노릇이 아니라, 남이 걸었든 안 걸었든 내 깜냥껏 신나게 걷는 셈입니다. 내가 걷는 길이기에 가시밭길이어도 좋고 풀숲길이어도 좋으며 한길이어도 좋고 골목길이어도 좋습니다. 내가 바라는 삶이기에 혼자 살아도 좋고 옆지기를 만나 살을 섞어도 좋으며 아이를 낳아 복닥이며 살아도 좋습니다.

 안 힘들게 살아가면 안 힘들게 살아가는 대로 세상을 보면서 내 삶을 다스립니다. 힘들게 살아가면 힘들게 살아가는 대로 세상을 부대끼면서 내 삶을 추스릅니다. 주머니 넉넉한 채 살아가면 주머니 넉넉한 눈높이로 세상을 헤아리면서 내 삶을 보듬습니다. 가난한 몸뚱이로 살아가면 가난한 몸뚱이로 세상을 살피면서 내 삶을 어루만집니다.

 손글씨와 손그림이 정갈한 책 《먼지의 여행》을 덮으면서, 이 책을 일구어 낸 젊은 넋 ‘신혜’ 님이 앞으로 서른 살을 맞이할 때까지는 어떤 길을 얼마나 더 힘겹고 벅차게 부딪히고 뒹굴면서 새로운 얼굴과 몸빛으로 거듭날는지 궁금합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즐겁게 잘 싸우겠지요. 즐겁게 잘 싸우고 즐겁게 잘 어깨동무하며 즐겁게 잘 울고 잘 웃으며 하루하루를 뜻있게 되새길 테지요.


 (3) 힘들이지 않고 다시 읽는 글월


 유행처럼 나도는 손글씨나 손그림이 아니라, 젊은 넋 스스로 반가이 맞이했던 삶을 꾸밈없이 담아낸 손글씨와 손그림으로 이루어진 책 《먼지의 여행》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던 대목을 되읽습니다. 가슴에 아로새기는 책은 두 번 되읽고 세 번 곱읽을 때마다 새록새록 스며듭니다. 성경을 수없이 되읽고 곱읽는 분들은 어떤 교리나 주의주장이 아닌 당신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픈 마음으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수없이 되읽고 곱읽겠지요. 저는 저한테 반갑고 기쁘며 고마운 책을 하느님 말씀으로 삼으며 차근차근 되읽고 곱읽습니다. (4343.3.5.쇠.ㅎㄲㅅㄱ)


[11∼13, 18, 44∼45쪽] 이 느낌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자라며 고생도 해 보고 사람들과 정도 나누며 살아온 부모님은 이미 알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도시에 살면서 시키는 공부만 하고 거래와 경쟁을 당연히 여기며 자란 나에게는 특별했습니다 … 대학을 졸업할 때쯤 사회와 부딪치며 다행히도, 내가 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6년 동안 책상에 앉아 공부했지만, 비싼 돈 들여 입시 교육을 받았지만,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건 배운 게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학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밖에 얻은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 아, 이렇게 길들여져 있었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낯설 정도로 하라는 것만 하고 배우라는 것만 배우도록. 권위자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13, 28∼29, 32쪽] 돈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돈이 먼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먼저가 되더군요 …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순수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느낌은 정말 뿌듯하고 기쁜 거였다 … 내 주변 친구들은 모두 바빠서 한 달에 한 번이나 겨우 만났다. 만나도 각자 고민거리가 많아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했다. 부모님과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의견 차이 때문에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 가진 게 없어서 오히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돈이 있으면 자기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면 되니까 그 이상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을 필요가 없었지만 돈이 없을 때는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야 필요한 걸 얻을 수 있었다.

[50, 51, 136, 161쪽]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제일 바라는 건 그저 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사는 건데, 그분들이 정해 놓은 길이 내 행복과 건강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부모님이 가장 바라는 것을 위해서라도 지금 갈등을 각오하는 게 낫지 않을까? … 난 부모님과 대화할 줄 몰랐다. 부모님도 나와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 아름다운 일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은 거라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 콜카타에 있을 때 한 한국인 여행자가 말했다. “당신이 배우고 느낀 사랑을, 당신의 변화를, 부모님께도 느끼게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람살라에서 만난 여행자가 말했다. “네가 진실한 삶을 위해 사는 이상, 너의 부모님도 그런 삶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어.”

[80쪽]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 없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면, 머리속이 점점 단순해졌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지금 내 마음을 사랑에 열어 두는 것에 집중하게 됐다 … 돈 가지고 여행하며 돈 계산, 여행 예산 짤 시간에 우리는 만족한 마음으로 많은 친구를 사귀며 멍하니 떠가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95, 124, 178쪽] 다행히, 길에서 순례자들에게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약을 나눠 주었다. 나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으로 느끼고 도와준 그들이 고마웠다 …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홀로일 때,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내 마음을 따라 여행하면서, 없이 사는 것이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다.

[133∼134쪽] 사진 찍기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색연필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 카메라로 찰칵 찍고 말 순간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리며,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나를 오래 쳐다보고, 나도 아이들을 오래 바라봤다.

[189, 207쪽] 천국은 죽어서, 예수를 믿어야만 가는 게 아니었다. 예수가 말한 사랑을 실천하면, 살아 있는 그 순간이 천국이 되는 거였다 … 나를 둘러싼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 나아가는 것, 이게 진짜 예술이 아닐까? 이렇게 나의 삶이 예술이 되었을 때 내가 일상에서 표현하는 모든 것들도 예술이 될 거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건 글 그림 음악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이 분열하지 않는 일, 하나가 되는 일, 그 길을 찾는 일이다.

[220쪽] 나에게 여행은 유명한 곳을 구경하려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 익숙한 영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필요한 걸 배우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색다른 쇼핑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쇼핑은 어디를 가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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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웅진책마을 52
오카 슈조 지음, 김정화 옮김, 이윤엽 그림 / 웅진주니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사람만 사는 아파트숲에서 생각하는 자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6] 오카 슈조,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도시 물질문명, 환경파괴, 입시지옥, 공장과 기계, 자동차와 아파트, 이기주의와 무관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 들이 얼크러져 자꾸자꾸 뒤틀리는 사람들 삶을 ‘동물 우화’ 틀로 담아낸 어린이문학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읽었습니다. 어린이문학에서 이 같이 무겁고 큰 이야기를 다룰 수 있구나 싶어 놀라운 한편, 곰곰이 헤아리면 오늘날은 어린이문학에서고 어른문학에서고 이와 같은 이야기는 잘 안 다루고 있으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이라고 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즐겨 다룬 문학작품이 많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다룬 인문책이라고 얼마나 되겠습니까. 곧잘 나오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히는 일은 드물고, 더러 나오기는 하여도 밑바탕까지 샅샅이 살피며 다루어 내지는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우리 삶터를 좀더 낱낱이 깨달으며 하나하나 바로세우거나 아름다이 가꾸고자 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를 꾸준히 다루면서 가다듬으리라 봅니다. 아쉬운 대목은 아쉬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바로잡을 테고, 반가운 대목은 반가운 그대로 껴안으면서 널리 나눌 테지요. 그러나 모두들 더없이 바쁜 나머지, 내 삶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다들 그지없이 힘들고 돈벌이에 매인 탓에, 나와 내 이웃 삶이 어떻게 엮이어 있는지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 “아휴, 어떡해.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하지? 다음주부터 학원에서 중학교 입시 수업이 시작되는데…….” 요시코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 학원 걱정을 하다니, 난 기가 막혀서 요시코를 보았다. “중학교 입시? 아직 5학년인데?” “유명한 사립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지금도 좀 늦은 편이야. 넌 걱정 안 돼? 공부 뒤처질 텐데.” ..  (60쪽)


 우리는 어린이였을 때부터 신나게 뛰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어린이였을 때 골목이든 들판이든 갯벌이든 바다이든 산이든 어디이든 마음껏 쏘다니며 신나게 뛰어놀았다고 떠올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나이가 제법 든 분들뿐입니다. 1980년대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나 1990년대 뒤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재미있고 거리낌없이 뛰놀던 어린 나날’을 되새길 만한 분이 얼마나 될는지요. 1970년대로 살짝 거슬러 올라가 헤아리면 또 얼마나 될는지요. 날짜를 앞당겨 2000년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얼마나 되지요? 2010년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랄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마땅히 있다고 할 만한지요?

 아파트숲에 꽁꽁 갇힌 조막만한 놀이터에 햇볕과 바람과 무지개와 빗줄기와 눈발이 얼마나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쉴새없이 오가는 자동차들이 뿜는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가 어린이한테 얼마나 좋은 동무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한테 흙 한 줌이나 돌멩이 하나를 쥐어 보도록 할 만한 터가 어느 만큼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물수제비를 뜰 만한 물가나 바닷가가 아이들 보금자리 가까이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롯하여 우리 아이들 모두한테 ‘좋은 어린 날’이 아닌 ‘더 이른 나이부터 공부에 매달려야 더 좋은 대학교에 남을 누르고 들어갈 수 있고, 대학교에서도 더 공부만 붙잡아야 더 크고 돈벌이 잘 되는 회사에 들어가 남을 내려다보며 값진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길들이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 아빠는 산에 오를 때는 늘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라면서 옷과 스웨터, 비상 간식과 라이터를 반드시 배낭에 챙기게 했다. 솔직히 나는 그걸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빠가 옳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건빵과 초콜릿으로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도 조금 덜하고 추위가 사라지자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 산포도는 시었다. 으름은 달았지만 씨가 너무 많았다. 처음으로 날밤을 먹었다. 하지만 버섯은 날로 먹을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지만 배는 조금도 부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동물들은 이런 것만 먹고도 참 팔팔하게 잘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  (14, 37쪽)


 빨래를 할 때면 늘 곁에 붙어서 아빠가 빨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따라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빗자루를 들면 저도 빗자루질을 하고파 하고, 걸레질을 하면 저 또한 걸레질을 하고파 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이제는 키가 제법 자라 걸상에 혼자 낑낑거리고 올라서서는 엄마 아빠가 도마질을 하고 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곤 합니다. 젓가락질이며 책읽기이며 볼펜 쥐기이며 옆에서 늘 바라보는 대로 배우고 따라하는 우리 아이입니다.

 백 마디 말로 가르칠 수도 있으나, 한 가지 몸짓보다 더 깊이 가르칠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몸짓이란 가르침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살아가는 매무새는 고스란히 아이한테 이어집니다. 대물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 어버이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를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 저희들 삶을 새롭게 꾸린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께서는 당신 삶을 어떻게 꾸리고 있으온지요. 바삐바삐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은 우리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며 어떤 몸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으온지요.

 스무 달짜리 우리 아이는 사진기를 제법 잘 다룹니다. 가끔 고 자그마한 손으로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는 찰칵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셈틀을 켤 줄을 알고, 자판을 두들길 줄 압니다. 여느 집 아이였다면 텔레비전을 켤 줄을 알 테며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돌릴 줄 알겠지요. 어버이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아이들이 귀로 가만히 들으면서 흥얼흥얼 따라하며 익힐 테고요.

 ‘신동’이라는 아이도 있겠으나, 아이일 때 곁에서 바라보는 그대로 쏙쏙 받아들이면서 배우고 커 가는 아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어버이들이 남녀평등을 잘 헤아리면서 살아간다든지, 이웃사랑을 즐거이 나누면서 살아간다든지, 잘못된 사회 얼거리를 바로잡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든지, 동네를 곱게 여미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든지 한다면, 아이들은 이러한 어버이 매무새를 스스럼없이 바라보고 배우며 제 몸으로 삭여낸다고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버이가 보여주는 온갖 얄궂거나 짓궂거나 씁쓸한 모습 또한 아무렇지 않게 배우고 따르고 길들어 간다고 느낍니다.


.. 순간, 손 안에서 버둥거리던 새끼 토끼가 천이 찢어진 틈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빨갛고 동그란 토끼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토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을 본 순간 도끼로 내리칠 기력이 푹 꺾여 버렸다. 하지만 이 토끼를 놓치면 나는 굶어서 꼼짝도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것은 죽음을 뜻했다. 가엾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토끼의 목숨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 난생처음 내 손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 먹으려고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무서운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156∼157쪽)


 어린이문학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은 이 땅 어버이들이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라고 일깨우고자 애씁니다. 아이들한테는 어버이들이 보여주는 얄딱구리한 모습을 고스란히 배우거나 물려받지는 말도록 깨우치려고 힘씁니다.

 ‘숲속 짐승들이 사람들을 잡아서 사람이 저지른 죄값을 따지는 대목’을 보면 멧돼지 검사는 “너는 마음에 걸렸고, 마땅찮았다고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적은 없었어. 생각은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하나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어. 연구실에서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고. 당신 연구는 대체 무엇을 위한 연구였지? 그저 당신은 자기가 좋은 일만 하면서 만족하고 살았지(98∼99쪽).” 하고 외칩니다. 멧돼지 검사는 농사꾼부터 학자와 도시사람과 어린이까지 무슨무슨 잘못을 저질러 숲을 망가뜨리거나 자연을 어지럽히거나 짐승들을 괴롭혔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지청구를 마무리하며 ‘자연 목장’에서 ‘원시 사람’으로 돌아가 살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자연 목장에서 목숨이란 무엇인가를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니다. 엉엉 울면서 자연 목장으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한 해 두 해 세 해 흐르는 동안 옳은 길을 깨달아 풀려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끝까지 옳은 길을 깨닫지 않으며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외치다가 죽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은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가장 깊이 들여다보거나 돋보아야 할 대목이라면 바로 ‘자연’이요 ‘자연다운 삶’이요 ‘자연스러운 사람’이라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책을 덮으면서 《금수회의록》(안국선,1908)과 《동물농장》(조지 오웰,1945)이라는 작품이 떠오릅니다. 한국사람이 쓴 《금수회의록》과 영국사람이 쓴 《동물농장》과 일본사람이 쓴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어슷비슷한 글감과 주제를 다룬다고 느낍니다. 영어권 사람들로서는 《금수회의록》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읽을 일이 없겠지요. 일본사람들로서는 《금수회의록》이라는 작품을 볼 일이 없을 테고, 영어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사람이 빚은 작품 《금수회의록》부터 《동물농장》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를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함께 읽은 사람으로서, 세 작품은 저마다 다른 눈높이와 눈썰미로 우리 삶을 걱정하고 우리 앞날을 밝게 일구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었다고 느낍니다. 다만, 2010년에 번역된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그릇이 살짝 모자라고 번역 또한 조금 어설프구나 싶습니다.


.. 한여름 멱을 감으며 신나게 놀던 강도 이제 더러워져서 아이들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요.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었지만 오히려 개발로 인해서 사람들은 소중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잃고 말았어요. 이런 개발을 계속해서 밀어붙여도 괜찮을까요?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거라 할 수 있을까요? ..  (글쓴이 말)


 우리 집은 신문을 안 보고 텔레비전이 없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고는 꽤 동떨어져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이라든지, 이름을 바꾸어 네 줄기 큰강을 손질한다는 일이라든지, 다가온다는 선거라든지, 겨울올림픽이라든지 거의 어느 일에도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아니, 눈길을 못 둔다고 할는지 눈길을 둘 값어치를 못 느낀달는지 그렇습니다. 밖에서 만나거나 어울리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곤 하는데, 이런 소식 저런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 나라는 참으로 갈 길이 멀다고 느낍니다. 아니, 이런저런 소식이 아니더라도 동사무소에 가 보고 무슨무슨 공공기관에 가 보면 이 나라는 참 아찔하다고 느낍니다. 아니, 저잣거리 마실을 다니고 큰길로 한 발자국 나서고 보면 이 나라는 참 무시무시하다고 느낍니다.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정치판에서만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자락 구석구석에는 ‘또다른 이름으로’ 경부운하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얽어매는 국가보안법은 언제나 ‘또다른 이름으로’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곤 합니다. 과자봉지를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아이들을 볼 때에도, 좁은 골목을 무섭게 내달리는 오토바이와 자가용을 볼 때에도, 번쩍번쩍하는 옷가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을 볼 때에도, 커다란 할인매장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수없이 새로 짓는 아파트더미를 볼 때에도, 전철에서 먼저 타고 먼저 내리려는 사람들한테 밟히고 밀리면서도 늘 느낍니다. 우리 나라는 참 모질고 팍팍한 나라임에 틀림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모질고 팍팍한 나라인 까닭에 1908년에 일찌감치 《금수회의록》이라는 작품이 나왔고, 2010년에는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이 번역됩니다. 뒤틀리는 우리 삶터가 더는 뒤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어김없이 있어, 우리 모습을 우리 스스로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올바로 일구자고 용쓰는 사람들 땀방울이 하나둘 모입니다. 우리는 어영부영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인 한편으로, 아름답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한테는 바쁘고 힘든 삶 그냥저냥 맞추어 살자는 몸가짐 하나와, 바쁘고 힘들기에 더 즐겁고 알차게 살자는 매무새 하나가 함께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쪽 길을 고를지는 우리한테 달렸습니다. 내 삶을 어떻게 즐기면서 나눌지는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우리는 한결 곱고 맑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더욱 못나고 꾀죄죄한 사람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습니다. 한 달 벌이 다문 백만 원으로 기쁘고 벅찬 나날일 수 있고, 한 달 벌이 천만 원으로도 모자라고 어두운 나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도 있고 숲속에도 있으며 우리 마음과 몸 속에도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4343.3.4.나무.ㅎㄲㅅㄱ)


 ┌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웅진주니어 펴냄,2010)
 ├ 글 : 오카 슈조
 ├ 옮긴이 : 김정화
 ├ 그림 : 이윤엽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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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자, 빠작
심조원 지음, 원혜영 그림 / 호박꽃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큰보름날 맞이하는 애 아빠 마음
 [그림책이 좋다 73] 심조원(글)+원혜영(그림), 《까먹자, 빠작》



- 책이름 : 까먹자, 빠작
- 글 : 심조원
- 그림 : 원혜영
- 펴낸곳 : 호박꽃 (2010.2.16.)
- 책값 : 8500원


 (1) 애 아빠가 맞이하는 큰보름


 저녁나절, 천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신포시장으로 마실을 나옵니다. 한 시간 남짓 드러누워 골골대던 몸을 일으켜 무언가 먹을거리를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섭니다. 때는 아홉 시를 훌쩍 넘겼습니다. 저잣거리 사람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들어갈 무렵입니다. 늦은 때에 저잣거리를 찾아온들 달리 무슨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으랴 싶지만, 한 번 슥 돌아보고자 합니다. 저잣거리 들머리에서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바닥에 땅콩을 깔아 놓고 됫박으로 팔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낮나절에 이웃사람이 “부럼 나물 드셨어요?” 하고 안부인사를 하기에 “네? 그럴 겨를이 없어요.”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정월대보름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언제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설날에는 그때가 설이라고 알기는 했으나 설을 쇠고 나서 큰보름이 찾아오는지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저녁 느즈막한 때에 저잣거리 길바닥장사를 보고서야 ‘큰보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땅콩 됫박 가져가세요. 사천 원인데 삼천 원에 많이 드릴게요.” 하는 말씀에 “네, 됫박 하나 주셔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에누리를 안 해 주셔도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늦은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가시고 남은 물건 펼쳐 놓은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밤부터 다시금 몹시 아파하는 옆지기는 한낮이 되도록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이른아침에 빨래를 하며 아이한테 물놀이를 시키고, 물놀이를 시킨 다음 씻기며, 씻긴 다음 밥을 해서 먹입니다. 옆지기는 한낮이 되어 겨우 일어났으나 관장을 두 번 하고 속을 비운 뒤에야 겨우 말문을 엽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쓰러질 판입니다. 아이한테 겨우 밥을 다 먹이고 오줌을 누인 뒤에는 그대로 벌렁 드러눕습니다. 그렇다고 오래 눕지 못하고 몇 분 만에 다시 일어납니다. 도서관이며 생협이며 들러야 한다는 옆지기 말을 들으며, 나도 일어나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옷을 입히고 걸음을 걸립니다. 차가 많이 오가는 길가를 걸을 때에는 품에 안습니다. 조금씩 키가 크고 뼈가 단단해지는 아이를 안고 걷다 보면 팔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이가 스스로 걸을 줄 아니까 아주 갓난쟁이였을 적하고 견줄 수 없이 수월해진 셈 아닌가 싶으면서도, 외려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한결 고단하고 벅차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쩌면 지난날보다 오늘이 힘겹고, 오늘보다 앞날이 힘들지 모릅니다. 이듬달이나 이듬해를 맞이하며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면 오늘 하루란 그리 힘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첫 세이레를 하던 때에는 잠 한 숨 잘 수 없었고, 백일 때까지는 하루 두 시간쯤 잤는가 싶으며, 돌 때까지는 길게 자야 삼십 분인 나날이었습니다. 아이가 열넉 달쯤 될 무렵까지는 밤이면 시간마다 깨어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빨래와 밥하기와 씻기기로 온 하루를 보내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젖떼기를 하는 요즈음처럼 고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느새 훌쩍 지나고 만 나날이기에 지난날은 그럭저럭 보냈고 바로 눈앞에 닥친 오늘 하루가 가장 힘겹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땅콩 한 됫박과 얼음과자 둘과 보리술 두 병과 먹는샘물 여섯 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헤아립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설이든 한가위이든 큰보름이든 삼짓날이든 동짓날이든 단오날이든 챙길 겨를이 없다고. 내 몸이 어떠한지 살필 틈이란 배부른 소리이고, 아이키우기를 하는 가운데 옆지기 보살피기를 알뜰히 하기에도 허리가 휜다고. 그러나 아이키우기와 옆지기 보살피기와 집살림 꾸리기 어느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나한테 명절이란 없고, 나한테 생일이란 없었으며, 나한테 무슨 기림날이란 없다고.

 젖을 안 준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애 엄마가 겨우 달래고 토닥이며 재워 조용해진 새벽녘, 아이가 몇 시간쯤 칭얼거렸나 어림하니 세 시간쯤입니다. 우는 소리가 그치니 참으로 조용하구나 하고 새삼 느끼면서, 이렇게 흐르는 삶일 줄 모르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지를 곱씹습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흐르는 삶일 줄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니, 살피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과 함께 궂은 일이 찾아올 테고, 반가운 일과 맞물려 얄궂은 일이 찾아오는 삶이니까요. 좋으면 좋은 대로 내 삶이고, 궂으면 궂은 대로 내 삶입니다. 더 낫거나 더 못한 삶이란 없습니다. 옆지기와 아이를 함께 낳고 기르는 길에서도 더 잘 키우거나 더 못 키우는 매무새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결대로 사는 동안 아이가 제 결을 잘 느끼고 찾으면서 클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손을 잡는 길벗이라고 느낍니다. 아이가 많이 어려 이닦기를 홀로 못하니 아빠가 칫솔을 들고 살살 닦아 주고 젓가락질도 맡아서 해 주지만, 이렇게 돌본다고 하여 아이가 어버이 뜻대로 살아가는 목숨이지는 않습니다.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고 잠을 더 달게 잤다거나 살림이 더 알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옆지기를 만나지 않고 홀로 살림을 꾸렸다고 더 넉넉하거나 즐겁게 제 삶을 꾸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주는 만큼 받는 삶이 아니요, 받은 만큼 주는 삶 또한 아니라고 느낍니다. 곱다시 흐르는 삶이요, 살며시 보듬는 삶이며, 나란히 붙잡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아플 때에는 아프고, 쉴 때에는 쉬며,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고, 배고플 때에는 먹으며, 웃을 때에는 웃고, 울 때에는 우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날짜도 시간도 햇수도 나이도 또 뭣뭣도 제대로 가눌 새 없이 지나는 삶이니, 명절이고 생일이고 기림날이고 챙긴다든지 생각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편으로 곱씹으면 무엇 하나 챙기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벅차고 고단한 삶이기에 명절이든 생일이든 기림날이든 마련하면서 아주 살짝이라도 돌이켜보면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들여다보도록 하자는 뜻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우리 세 식구가 함께 맞이하는 두 번째 큰보름이 되었습니다. 






















 (2) 큰보름이 아니어도 즐거운 책읽기


 땅콩이다,
 까먹자.
 빠작!
 부스럭부스럭 비벼서
 오독오독 씹어 먹자.
 아, 고소해.


 큰보름을 맞이하면 어떻게 부럼을 먹는지 보여주는 그림책 《까먹자, 빠작》을 봅니다. 방바닥에 깔아 놓고는 아이가 집어서 보도록 하고, 아이를 아빠가 무릎에 앉히고 읽어 주다가는, 아이 옆에 앉은 엄마가 그림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읽어 줍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글이 짧고 그림 장수가 적어 금세 한 번 읽고 또 읽는다지만, 참말 하루에도 여러 차례 되읽고 다시 보곤 합니다. 아이는 장난이나 재미 삼으며 책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 내어 방바닥에 펼쳐 놓고 넘길는지 모르는데, 어른 눈길로는 책읽기가 아닐 수 있어도 아이한테는 어김없는 책읽기입니다. 서로 바라보는 자리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며, 새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잣이다,
 까먹자.
 탁!
 갉작갉작 갉아서
 오물오물 냠냠.
 아, 향긋해.


 그림책 《까먹자, 빠작》(2010년 2월 16일)에 앞서 《옹기종기 냠냠》(2010년 1월 15일)이 나왔으며, 이에 앞서 《투둑 떨어진다》(2009년 10월 16일)가 나왔습니다. 퍽 어린 아이가 보는 그림책인 만큼 두툼한 종이로 되어 있는데, 두께가 있어 방바닥에 세워 놓아도 보기가 꽤 좋습니다. 이냥저냥 허술한 그림책이라면 이 그림책을 방바닥에 세워 놓지 않습니다. 그림이 퍽 고와 책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 손을 많이 타면서 책이 좀 찢어지거나 구겨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며, 이 책으로서는 싫지 않은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보는 책은 숱하게 넘긴 손자국이 아주 곱게 책등 한켠에 묻기 마련이고, 아이들이 보는 책은 숱하게 쥐어든 손때가 꼬깃꼬깃 책 곳곳에 깃들어 낡고 닳기 마련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들며 살던 지난날에는 그저 ‘좋다고 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이 좋다고 하는 책을 어떻게 즐기는가까지는 제대로 몰랐습니다. 아마, 아이를 안 낳고 어린이책 출판사에 그대로 남아 편집장 자리까지 눌러앉았으면 ‘좋다고 하는 책 만들기’에만 머물고 ‘좋다고 하는 책 즐기기’를 깨닫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내 짬을 더 낼 수 있으니, 더 많은 책을 보고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말을 뇌까리기만 하며 살았겠지요.

 저로서는 옆지기를 만나고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안 새로운 책읽기와 새로운 책삶을 날마다 새삼스레 깨우치고 있습니다. 예전에, ‘좋다고 하는 책’을 아이가 100번 넘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어머니한테서 들으며 홀로 속으로는 ‘그 책 말고도 좋은 책이 많은데 그 책만 100번을 읽었구나’ 하고 생각한 적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 어린이책은 꽤 좋은 책이었으며, 저 또한 100번 넘게 보기도 한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읽을 때에는 혼자서 눈으로 읽기만 하지, 소리를 내어 여럿이 함께 읽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이 앞에서 글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읽으며, 때로는 책에 적힌 글을 요모조모 바꾸어 가며 읽으며, 때로는 그림만 짚고 슬쩍슬쩍 넘어 가며 함께 보면서, ‘아이가 같은 책을 100번 읽었다’고 할 때에는 사뭇 다른 느낌이요 배움임을 헤아립니다. 애 아빠로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같은 책을 수없이 다시 읽고 또 읽을 때면, 새로 들출 때마다 다른 느낌이요 새 느낌입니다. 어제는 열아홉 달하고 열흘이 된 아이한테 읽힌 책이라면 오늘은 열아홉 달하고 열하루가 된 아이한테 읽히는 책입니다. 오늘 하루로만 보아도 아침 다르고 낮 다르며 저녁 다릅니다. 그리고, 아이가 혼자서 책을 넘기다가 손길과 눈길을 멈추고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림이 있으면 ‘응? 뭔 그림인데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지?’ 하면서 함께 들여다봅니다. 아빠나 엄마가 “뭘 보는데?” 하고 물으면, 아이는 “눈!”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림 무언가를 짚습니다. 아이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골목강아지 또는 골목고양이 그림이 있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멍멍!” 하면 아이는 가녀린 목소리로 “머머!”를 되풀이합니다.


 밤이다,
 까먹자.
 아닥!
 아드득아드득 깨물어서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자.
 아, 달콤해.


 토끼가 밤을 ‘아닥’ 하고 깨먹는 그림을 보면서 ‘토끼가 밤을 먹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토끼가 무얼 먹는지 낱낱이 들여다본 적은 없지 않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산에서 풀과 잎을 뜯어먹는 토끼라 한다면 나무열매인 밤이나 도토리도 먹을 터이고, 나무껍질이나 나무뿌리 또한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겨울에는 흰눈처럼 하얗게 털빛이 바뀌는 멧토끼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정작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흰털멧토끼를 보기란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멧토끼는 겨울에도 잿빛 털이 바뀌지 않는다는데, 잿빛이든 흰빛이든 토끼가 토끼답게 산과 들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먹이가 넉넉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큰보름을 맞이하여 먹는 부럼 나물을 보면, 우리가 손수 거두거나 기르거나 캐서 마련하는 부럼 나물이 아니라, 저잣거리나 마트에서 돈을 치르고 장만하여 먹는 부럼 나물입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님, 달님!” 하며 찾고 싶어도 달보다 환한 불빛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달만 환하게 잘 보이는 곳을 찾아나서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구름 없이 맑은 밤이면 어디에서고 올려다보며 두 손 모아 비손하는 달이 아니라, 애써 도심지를 벗어나야 올려다볼 수 있는 달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뒤져야 만나는 달일 테고요. 스스로 누리고 즐기면서 스스럼없이 깨닫고 살갗으로 받아들이는 큰보름 삶자락이라기보다, 달력에 아로새겨진 행사거리 큰보름이라고 할까요.


 달님 달님
 이빨 튼튼하게
 해 주세요.
 달님 달님 부스럼 안 나게
 해 주세요.
 모두 모두
 달님 보고 빌자.



 오늘 저녁, 구름이 걷히고 달님이 환하게 얼굴을 드러내면, 아이를 데리고 아픈 옆지기와 함께 달맞이를 할 만한 언덕받이를 찾아가고 싶습니다. 또는, 우리 집 앞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님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니, 굳이 먼 데를 찾아가기보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조용히 달님을 올려다보며 비손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픈 사람은 아픔 때문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새 기운을 북돋아 주소서 하고. 자라는 사람은 자라는 하루하루를 늘 싱그럽고 씩씩하게 받아들여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고 아끼는 착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고.

 새근새근 잠든 아이가 오늘은 언제 다시 깨어나 함께 놀자고 방방 뛸까를 헤아리며, 아이맡에 그림책 세 가지를 살며시 세워 놓습니다. 먼저 큰보름 이야기 그림책 《까먹자, 빠작》을 세워 놓습니다. 다음으로 가을날 떨어지는 열매 이야기 그림책 《투둑 떨어진다》를 세워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모락모락 나는 먹을거리 이야기 그림책 《옹기종기 냠냠》을 세워 놓습니다. 이제 애 아빠도 다시 잠자리에 누워 등허리를 펴야겠습니다. 기나긴 새벽이었습니다. (4343.2.2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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