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의 역습 - 당신이 몰랐던 우유에 관한 거짓말 그리고 선전
티에리 수카르 지음, 김성희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우유가 나쁜 줄 모르는 당신은 바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5] 티에리 수카르, 《우유의 역습》



 지난 2003년에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이지북,2003)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우리들한테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오래 안 살아도 먹고픈 대로 먹으며 살기를 바라’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읽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 책을 읽고도 우유 마시기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테고, 이 책을 안 읽었어도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유를 안 마시는 사람보다는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병이나 팩에 담긴 우유를 비롯해 가루를 낸 우유까지 먹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구르트를 마시고 숱한 유제품을 먹으며 우유를 넣은 빵과 과자를 먹습니다. 우리 둘레에 우유가 섞이지 않은 먹을거리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 어쨌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총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책임감 있고 똑똑한 정치인들이 어째서 유제품이 물, 과일, 채소만큼이나 건강에 필수적인 음식이라고 믿고 국민들까지 설득하게 된 것일까? ..  (34쪽)


 우리가 사서 마시는 우유에는 ‘성분 표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100% 원유로 되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100% 오로지 원유라 한다면,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우유를 빚어내도록 해 주는 젖소는 무엇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지, 어떤 물을 마시고 있는지. 어느 소우리나 들판에서 날마다 어떤 삶을 꾸리고 있는지. 젖소는 사료를 먹는지 풀을 먹는지. 젖소가 사료를 먹는다고 할 때에는 사료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젖소가 먹는 항생제는 얼마나 되며, 젖소가 짚이나 풀을 먹는다고 할 때에 이 짚과 풀은 어디에서 거두어들인 짚이나 풀인지. 이 짚과 풀에는 농약이나 풀약 들이 얼마나 묻어 있는지.

 우유보다 두유가 좋다고 하며 콩물을 사다 마시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유를 사서 마시든 두유를 사서 마시든 이와 같은 마실거리에 ‘어떤 첨가물’이 들어 있는지를 낱낱이 살피는 사람은 드뭅니다. 과일에서 짜낸 물을 담았다는 과일주스이든 콜라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만들어서 가게에서 파는 마실거리’가 어떠한 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서 어떻게 내놓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 나온다든지, 이렇게 책으로 나와 주어야 비로소 한 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들여다본 다음에 잊습니다. ‘맛있는걸’ ‘나는 좋은걸’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몸이 아프지 않은걸’ ‘나중에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걸’ …….

 생각줄기를 더 이어 본다면, 우유가 들어간 먹을거리라는 유제품은 어떤 우유를 어떻게 다루어 넣었는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빵집에서 파는 우유식빵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가게에 잔뜩 쌓여 있는 과자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초콜릿에는 어떤 우유를 쓸까요. 밥집에서 마련해 주는 밥에는, 술집에서 장만해 주는 안주에는 어떤 우유가 들어갈까요.


..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문을 열었다. 바로 아이들을 겨냥한 시장으로, 그 시작은 유아를 대상으로 했다. 당시 농산업계로서는 전략적인 공략이었는데, 어릴 때 얻은 식습관은 평생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 1920년대 말부터 영국의 우유 생산업자들은 ‘우유를 알리기 위해’ 학교에 저렴한 가격으로 우유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영양실조를 없애기 위해 애쓸 것’을 약속했다 ..  (37, 39쪽)


 좀더 따지면, 우유 하나만 헤아릴 노릇이 아닙니다. 우유보다 훨씬 많이 먹는 우리들 쌀밥을 곰곰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땅 논밭에서 농약이나 풀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땅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나라 농협은 농사꾼이 비료와 농약을 쓰라고 하는가요, 안 쓰라고 하는가요.

 겨울을 앞두고 김장을 하는데, 김장에 쓰는 배추는 또 어떠한 배추이겠습니까. 약과 비료와 항생제 없이 거두고 있는 배추입니까, 무입니까, 고추입니까. 시금치며 상추며 깻잎이며, 이와 같은 푸성귀에는 어떠한 약품이나 방부제나 항생제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을까요.

 곡식과 푸성귀 말고, 가공식품은 어떠한지를 따지기도 해야 합니다. 과자 한 봉지에, 또 커피 한 봉지에, 또 감기약 한 봉지에는 어떠한 화학성분이 깃들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한테 맞도록 하는 예방주사는 ‘생약’일까요, ‘화학약’일까요. 예방주사는 어떠한 성분을 어떻게 엮어서 만들고 있을까요.

 며칠 앞서 ‘빼빼로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빼빼로 날에 과자 빼빼로를 서로서로 주고받곤 하는데, 우리들은 과자 빼빼로를 주고받으면서 ‘빼빼로 하나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겠습니까. 성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나서도 기쁘게 선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우유 섭취량이 확인된 약 4만 명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사람들의 답변을 골다공증 골절의 위험과 연결지어 검토했다. 그런데 연구진을 놀라게 하는 결과가 나왔다. 골절 위험과 관련해서 우유 애호가들과 우유를 전혀 혹은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 아이들 대부분은 그(우유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제대로 소화하지만 일부는 주로 유전적인 이유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소화되지 못한 단백질 조각들은 혈액 속으로 유입되는데 면역계는 그것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파괴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단백질의 일부가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 세포와 닮아 있는 까닭에 면역계는 착각하여 췌장 세포까지 파괴해 버린다. 그 결과 아이는 인슐린을 분비할 수 없게 되어 제1형 당뇨병에 걸리는 것이다 ..  (111∼112쪽)


 누구나 알듯, 우유란 소젖입니다. 소젖이란 어미소가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내어주는 밥입니다. 사람은 사람젖이 나와서 아기를 먹여살립니다. 사람은 엄마젖으로 아기를 키웁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젖은 어린이가 자라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소젖에는 마땅하게도 송아지가 잘 자라도록 도움이 되는 영양이 골고루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천천히 자랍니다. 소는 빨리 자랍니다. 송아지는 어미소 배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곧바로 섭니다. 사람은 엄마 배에서 밖으로 나와도 곧바로 서지 못합니다. 거의 돌이 지나야 비로소 서며, 걸을 때까지 퍽 걸립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젖은 아기가 알맞게 자라도록 이끕니다. 하루아침에 선다든지 뛴다든지 하도록 영양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사람 삶에 걸맞게 영양을 내어줍니다. 이와 달리 소젖은 송아지한테 영양을 퍽 빨리 내어줍니다.

 《우유의 역습》이나 예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라는 책에서도 다루지만, ‘빨리빨리 우쑥우쑥 크도록 이끄는 우유’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유를 마시면 ‘사람도 송아지마냥 좀더 빨리 더 크게 자랄’ 수 있으나, 이렇게 빨리 더 크게 자라는 만큼, ‘사람한테 알맞춤한 흐름에 따라서 자라지 않는’ 탓에 뜻하지 않게 병치레를 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더디 자라며 더디 살기에 백 살 안팎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빨리 자라며 빨리 살아가는 우리들로 바뀐다면, 우리 앞날이 어찌 될는지는 뻔한 노릇입니다. “인구 집단별 연구들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바로 우유와 동물성 단백질을 적게 먹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더 건강한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유를 거의 마시지 않는 나이지리아의 경우, 식물성 단백질에 대한 동물성 단백질의 비율이 독일에서 조사된 비율보다 10배 더 적고 대퇴골 경우 골절 발생율은 99%나 낮다(100쪽)”는 이야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우유의 역습’이 아니라 ‘우유가 보여주는 결과’는 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아이들한테 우유를 마시도록 합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가 무척 가난하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 아이들은 우유를 마시면서 자라야 했습니다. 저 또한 국민학교 다닐 때에 학교에서 ‘거의 의무’처럼 우유값을 학교에 내고 날마다 받아서 마셔야 했습니다. 속에서 우유가 받지 않는 아이들마저 우유를 억지로 마시도록 했고, 우유를 마시고 속이 얹히거나 재채기가 끊이지 않아도 반드시 마시도록 했습니다. 이무렵 어느 누구도 ‘우유를 마셔야 키가 크고 튼튼해진다’고만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버이나 교사 또한 ‘우유를 안 마시면 안 된다. 적어도 우유라도 마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유제품을 먹으면 살이 빠진다고 계속해서 단언하고 있는 네슬레를 비롯한 유제품 기업 연합의 구성원들과 영양학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의사 단체가 왜 이제는 하나도 없는 것일까? 보건 당국과 소비자 보호 및 불공정 거래 감시국의 방관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204쪽)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가 몸에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식품첨가물이나 화학조미료나 화학성분이 들어간 마실거리라 하더라도 몸에 잘 받으며 맛있고 즐겁게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약을 쳤든 비료를 먹였든 ‘엄마가 해 주는 밥’이면 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아이들한테는 우유 한 잔보다 ‘자동차 배기가스’ 한 모금이나 ‘담배연기’ 두 모금이 몸에 훨씬 나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과 거짓을 제대로 따져 본다면, 우유를 비롯해 배기가스와 담배연기 모두 나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나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 ‘나쁜 것은 되도록 줄여’ 주어야지, ‘더 나쁜 것도 늘 마시는데 이거 하나 더 얹는다고 달라지거나 더욱 나빠지겠어?’ 하는 매무새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유는 우리 삶터에 ‘역습’하듯 불쑥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습니다. 처음 소젖을 사람한테 먹이려 했을 때부터 ‘부작용’이나 ‘반작용’은 어림할 수 있던 일입니다. 논밭을 밀고 아파트를 지을 때, 산을 깎고 고속도로나 공장을 세울 때, 갯벌을 메워 공항을 닦을 때, 우리 자연 삶터가 더러워지며 우리 사람 삶터 또한 나빠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이란 없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나 맹꽁이 한 마리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꼬리치레도룡뇽이 살 수 없는 만큼 우리들 또한 살 수 없는 터전이 됩니다. 맹꽁이 한 마리 뿌리내릴 수 없는 만큼 우리들이 마시는 바람과 물은 끔찍하게 더럽혀지고 매캐해집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분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장사를 하고 영업을 하고 무엇무엇을 하는데 자가용을 안 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가용을 몰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이름값을 얻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연 삶터를 망가뜨리거나 더럽히면서 시나브로 우리 사람 삶터를 나란히 더럽히거나 망가뜨립니다.

 우유 한 잔? 뭐, 마셔도 좋고 안 마신다면 더 좋습니다. 우유를 마셔야 하느냐 안 마셔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얼마나 속깊이 들여다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가다듬으며 우리 발걸음과 몸짓을 고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면 돈을 더 벌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버는 만큼, 더 아름답게 살지는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더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이웃하고 더 사랑을 나눈다든지 내 아끼는 고운 님하고 더 사랑스럽게 어울리고 싶다면, 이때에도 돈은 덜 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하지만 돈을 더 바란다면 내 아이와 옆지기하고 보내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내 동네를 살피거나 내 고향마을을 돌아보는 겨를은 마련하기 힘듭니다. 내 몸이나 마음을 살필 틈조차 줄어들고, 내 어버이나 스승을 찾아가 인사를 여쭙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느긋함마저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갈래로 가느냐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돈을 더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를 더 아끼며 살겠습니까? 우리 아이한테 입힐 옷과 먹을 밥과 지낼 집과 다닐 학교를 더 생각하며 살겠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에 따라서 ‘우유와 우리 삶’ 이음고리는 달라지고, 우유는 일찌감치 우리 삶을 파고들며 좀먹고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 식사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이다. 나는 포도주 한 잔에 신선한 핸드메이드 치즈를 곁들여 먹는 걸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유제품을 소화해 내고 면역계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루에 하나쯤 먹는다고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즐거움을 위해 먹는 거라면 괜찮지만 의무적으로 먹지는 말라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유제품을 먹도록 계속 권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본다 ..  (머리말)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유가 어떤 마실거리인지를 일찌감치 알고 있던 분한테는, 또 지난 2003년에 나온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를 읽은 분한테는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한, 예방접종이나 가공식품이나 화학조미료나 식품첨가물 문제를 일찍부터 헤아린 분한테는 조금도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우리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한국 형편’을 다루는 부록이 따로 실려 있지 않습니다.

 우유란 ‘완전한 마실거리나 식품’이 아니지만, 《우유의 역습》이라는 책 또한 ‘완전한 책’이 아닙니다. 그저, 우유가 어떠한 마실거리인지 제대로 모르는 분들한테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덧붙여, 우유가 어떻게 우리 삶터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렇게 널리 마시도록 하는지를 살피지 않았던 분들한테는 끔찍하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4342.11.18.물.ㅎㄲㅅㄱ)


 ┌ 《우유의 역습》(알마,2009)
 ├ 글 : 티에리 수카르 / 옮긴이 : 김성희
 └ 책값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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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02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수화로 말해요 - 농인 아내, 청인 남편이 살아가는 이야기
가메이 노부타카.아키야마 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삼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27 ― 사랑으로 말해요, 삶으로 말해요
 : 아키야마 나미+가메이 노부다카, 《수화로 말해요》



- 책이름 : 수화로 말해요
- 글ㆍ그림 : 아키야마 나미, 가메이 노부다카
- 옮긴이 : 서혜영
- 펴낸곳 : 삼인 (2009.8.14.)
- 책값 : 11000원



 (1) 사랑으로 말해요


 북미 대륙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에 알려진 ‘아미쉬 이야기’는 조각조각일 뿐, 이처럼 우리 눈썰미로 아미쉬 마을을 어깨동무하면서 풀어낸 이야기책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나라밖에서 나온 몇 가지 ‘아미쉬 이야기’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 두레마을 얼거리와 삶을 책 몇 권을 훑으며 돌아보면서, 좀더 낱낱이 알기가 쉽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을 찬찬히 읽으며, 이들 아미쉬 삶은 더없이 ‘오래된’ 틀을 지키고 있으면서 ‘잘잘못을 함께 껴안고’ 있음을 느낍니다. 문명을 거스른다기보다 ‘제 삶을 고스란히 지킨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들 아미쉬 마을에는 예배당이 없고 전기가 없으며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전화와 인터넷과 컴퓨터 모두 없습니다. 성경이나 사제나 전도사 또한 없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이 옳다고 여겨도 굳이 당신 이웃한테 당신들 믿음을 퍼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딸아들이 아미쉬 마을에 남지 않겠다고 하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냅니다. 그저, 다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탄소발자국으로 치자면, 아미쉬 마을은 놀랄 만큼 푸른빛입니다. 지하자원을 다른 데에서 캐내지 않으며, 지하자원을 얻으려고 전쟁무기를 갖추어 싸우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몰지 않으니 굳이 새로운 물건을 밖에서 사 오지 않습니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모두 손수 마련합니다. 가게에서 사는 옷이란 없고, 집 또한 손수 짓습니다. 기름을 쓰지 않으니 기름값이 치솟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인터넷을 열지 않으니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세상일에 얽혀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삶은 어느 모로 본다면 따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 ‘산에 가서 혼자 살아라’ 하는 그 말대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시골에서도 텔레비전과 전기와 자동차 없이 살겠다고 하면 ‘미친놈’이라 여기거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땅에서는 ‘혼자 살 만한 임자 없는 산’이 없고, 섣불리 산에 들어가 홀로 살려고 하면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예배당이며 성경이며 사제이며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집집마다 돌아가며 예배를 본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이웃이 다 함께 모여서 함께 예배를 볼 때에는 ‘마을에서 함께 보는 성경을 비로소 꺼내어 읽’고는 도로 제자리에 놓으며, 여럿이 모인 자리는 밥을 한 끼니 나누어 먹고 마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이들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깊고 믿음을 잘 지키며 믿음을 잘 나누고 있구나 싶습니다.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면 놀랄 만한데, 다른 모로 보면 놀랄 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매이지 않고 예배당에 매이지 않으며 사제 말씀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부터 내려온 ‘올바른 삶’을 붙잡으며 참다운 ‘하늘나라 삶’을 섬기고 따릅니다. 이리하여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자물쇠 없이 살아가고, 도둑이 물건이나 돈을 훔쳐도 신고하거나 앙갚음하지 않으며, 식구들이 몹쓸 사람한테 총에 맞아 죽어도 외려 몹쓸 사람을 용서합니다.

 모든 구석에서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만 여길 수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이들 마을 사람들이 꾸리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말하며 사랑으로 손 내미는’ 매무새는 더없이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옹근 믿음이란 스스로 옹근 삶일 때 비롯하니까요. 가없는 나눔이란 스스로 가없이 나누는 삶일 때 펼쳐지니까요. 열린 사랑이란 스스로 나와 이웃을 고르게 사랑하는 삶일 때 샘솟으니까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책을 읽으면, 여러모로 훌륭한 아미쉬 마을이지만 가부장제 문화라든지 가정폭력 문제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다. 좋은 모습과 나란히 있는 궂은 모습입니다. 모든 곳에서 빈틈없이 좋지 않고, 어느 구석에서나 얄궂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기에 좋고 나쁨을 나란히 안고 있겠지요. 그예 우리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우리들은 끝없는 경쟁과 학벌과 계급과 돈과 욕망과 물질문명과 편리주의와 부동산과 개인주의와 따돌림을 그치지 않으며 자질구레한 시시콜콜 이야기에 꽁꽁 옭매여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 이웃하고 나누는 삶을 꾸리지 않을 뿐더러, 내 밥그릇을 반으로 나눈다든지 1/3로 나눈다든지 하면서 이웃사랑을 함께하지 않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학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얼굴과 몸매 가꾸기, 더 크고 빠른 자가용 몰기, 비싸고 높은 집 장만하기에 소용돌이처럼 휘둘리며 대단히 바쁘게 살아갑니다. 숨돌릴 겨를이 없고 이웃을 들여다볼 틈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돌아보거나 가다듬을 새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할 짬이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을 건넬 생각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어깨동무하겠다는 매무새가 자리잡지 않습니다.


 (2) 삶으로 말해요


 지난달 저녁나절, 서울에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서, 제 옆에 선 할배 둘이 있었습니다. 할배 둘은 큰 몸짓을 하면서 자꾸 제 팔꿈치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책을 읽으며 성가시고 번거롭기에 뭐 하는 할배들인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두 할배는 손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손으로 나누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토록 사람 미어터지는 전철에서 손말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내 옆구리를 찌를 수밖에 없겠군.’

 지지난달 저녁나절, 이날도 하루일을 고단하게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이었습니다. 젊은 사내 둘이 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큰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사이에 낀 제가 뻘쭘하도록). 저야 책에 눈을 박으니 아무렇지 않기는 했는데, 목아지가 아파 잠깐 목을 쉬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제 옆에 선 두 사내가 손말을 주고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렇구나. 이 젊은이들이 입으로 나누는 속삭임이었다면 나란히 서서 갔을 테지만, 손으로 주고받는 말을 하자니 서로 두 걸음쯤 떨어져서 마주보며 이야기를 할밖에 없었군.’

 새로 짓는 지하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으레 합니다. 예전 전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새로 벌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승강기를 마련합니다. 장애인과 어르신을 생각하는 공사입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자동계단이나 승강기는 마련하면서 정작 ‘여느 길가 건널목’ 마련은 제대로 안 하기 일쑤입니다. 건널목은 너무 띄엄띄엄 놓기도 하고, 건널목으로 맞은편으로 가자면 빙 돌아야 하도록 마련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동차가 술술 지나가는 데에만 교통 얼거리를 짜맞추기 때문입니다. 제 고향마을 인천에서는 ‘지하상가 상권을 지켜 준다’면서, 한길가에 건널목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몰든 무거운 짐을 나르든 낑낑거리며 지하도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무단 횡단’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새벽 느즈막하게 지하도 문을 열고 저녁 열한 시 무렵에 지하도 문을 닫으니, 이때에는 ‘아주 마땅히’ 찻길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야 합니다.

 우리 옆지기는 몸하고 마음에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옆지기가 앓는 장애는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 옆지기와 같은 장애를 앓는 이웃이 꽤 많으나, 정부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이러한 장애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여느 사람들이 이러한 장애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무언가 옳고 알맞춤하게 ‘장애인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비장애인’일 때에 ‘장애인’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무요 이웃이요 한식구로 지내는지를 터무니없을 만큼 모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서 장애인권 교육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집에서 장애인권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애인권을 다루는 책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하지만, 거의 모두 ‘딱한 눈길’로 바라보는 책이요, 불쌍하게 여기려는 줄거리인데, 그나마 이런 책조차 잘 안 팔리고 거의 안 나옵니다. 눈물샘 쥐어짜내는 이야기책은 곧잘 대박을 터뜨린다든지, 《오체불만족》 같은 책은 아주 드물게 많이 팔리는데, 《다르게 보는 아이들》이나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같은 이야기책은, 또는 《도토리의 집(사랑의 집)》이나 《머나먼 갑자원》 같은 만화책은 읽히지도 팔리지도 이야기되지도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 삶으로 들여다보지 않아서라고 할까요. 우리 삶은 오로지 ‘비장애인 눈길’에만 맞춰져 있는 탓이라고 할까요. 우리 삶으로는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며 더 많이 자랑하다가 더 많이 쏟아내야 한다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꾸리는 삶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니, 내 이웃을 아름다이 바라보며 껴안기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니, 내 동무를 훌륭하게 여기며 서로 손 맞잡기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꿈꾸는 삶이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니, 내 식구를 꾸밈없이 받아들이기 벅차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1등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왜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왜 더 낫다는 대학교에 가야 하는가요. 우리는 왜 ‘내 집(이라기보다 아파트) 마련’을 꼭 해야 하나요.

 우리 마을은 나라안팎에서 1등 도시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수출 1위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국민소득이 세계에 첫손으로 꼽혀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 잇는 철길이 두 시간 만에 뚫려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을, 또 서울과 인천을 잇는 물길을 닦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건설비에 들여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삶터를 얼마나 아늑하게 지켜 주고 있습니까.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 둘레 농사꾼과 가난한 사람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골목동네 재개발과 재건축과 재생사업과 재정비는 골목동네 사람들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대학교 학문은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꾸는 데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무슨 길을 걷고 있습니까. 딸아들 키우는 우리 어버이는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 삶은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요. 우리 삶은 무슨 그림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3) 《수화로 말해요》라는 책 함께 읽기


 이야기책 《수화로 말해요》를 읽습니다. 손말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가씨와 입말을 하며 손말을 익힌 사내가 가시버시가 되면서 겪고 복닥이고 부대끼고 헤아리고 맞아들인 여러 삶자락을 담은 책입니다. ‘장애인권’을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장애인 아픔을 외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나도 없는 장애인권 정책을 꾸짖는 책 또한 아닙니다.

 《수화로 말해요》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사람임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장애인이기에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는 않으나, 장애인인 까닭에 한 번 더 사랑을 받을 만하고 더욱더 사랑스레 어울릴 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살며시 일러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생각했습니다. 저한테는 아무 힘이 없으나, 저한테는 꿈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이 나라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손말(수화)’이 정규과정으로 들어가는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이리하여 나중에는 중학교 과정에서 ‘영어와 같은 자리에서 외국어 한 가지’로 배울 수 있도록 교과목을 마련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꿈꾸었습니다. 또는, 고등학교 ‘제2외국어’ 과정으로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반드시 배우도록 하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교에서는 이를 더 깊이 헤아리며 ‘토익 토플 점수’를 반드시 받도록 하는 제도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통역사처럼 주고받을 만큼 익혀야 졸업장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회사에서 새 일꾼을 뽑을 때에, ‘손말’이나 ‘점글’ 한 가지를 하는 기본조건을 마련하고, 둘 모두를 할 수 있다면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홀로 품는 꿈이지만, 이 꿈을 사랑스레 껴안으면서 책을 다시 펼칩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새삼스레 거듭 읽어 내려갑니다. (4342.11.17.불.ㅎㄲㅅㄱ)


[33, 100쪽] 나는 부엌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농인의 언어는 수화이므로 시각적으로 확 열려 있는 편이 편리하고 쾌적할 것이다. 만약 농인이 사회의 지배자라면 세상의 건축물 구조는 아마도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하다는 사람도 제법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제삼자를 내세워 말하게 한다. 그러나 이건 상당히 무례한 태도다. 농인에게 “당신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어요.” 하는 거나 같다.

[41쪽] “아내는 청각장애인입니다.”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생활 감각으로는 ‘청각장애인’이란 말은 서류에서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본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관공서에서 어떤 절차를 밟는 등 정해진 상황에서 쓰는 말이지 평소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아내는 귀가 불편합니다.” “귀에 핸디캡을 갖고 있습니다.”라니,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에둘러 하는 애매한 표현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짜증의 원천이다. 게다가 농인의 핸디캡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수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언어 정책에서 생겨나는 정보적인 핸디캡이기 때문에 사실하고도 맞지 않는다 … 일본 과자점의 견본 앞에서 수화로 말장난을 하며 웃는 우리를 가게의 판매원은 어떻게 봤을까. 아마도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명을 해 줘도, ‘농’이라는 말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그리고 실감할 수 없다면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번역하기 힘든 웃음이다.

[56∼57, 89쪽] 편리한지 어떤지하고는 관계없이 우리는 늘 수화로 말하며 살고 있고, 그것이 창문 너머로는 계속되는 것일 뿐이다. 수화 특유의 대화 예절은 유리창 너머에서도 잘 지켜져야만 하며, 따라서 실은 그러한 장면에서의 적절한 행동 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사정이 드라마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수화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보통 때는 농인들이 큰 불편을 감수하도록 해 놓고는, 이런 데에서만 수화를 조금 보여주고 “수화는 편리하다”며 재미있어 하는 것도 농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 애당초 음성으로 얘기한다는 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가능한 것이다. 수화통역사에게서 “농인이 구화를 하는 건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 나라 통역사의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61, 86쪽] 한 친구가 “여기서는 집 밖에서 수화를 하면 빤히 쳐다봐.” 하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실제로 레스토랑에서 보통 때 하듯이 수화로 얘기하며 식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똑바로 바라보면 금방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학습해 온 내가 ‘무례하네요. 나는 구경거리가 아니라구요.’ 하는 기분을 담아 노려봤는데도, 그들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를 계속 힐끗힐끗 보면서 소곤거리는 데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이곳 사람들이 지닌 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 나는 청인인 만큼 주변의 청인들의 몰이해한 발언이 전부 내 귀에 직접 들려온다.

[85, 92, 127쪽] “수화는 고유의 문법을 가진 언어예요. 몸짓도 아니고 음성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수단도 아닙니다. 수화를 학습하는 건 일반 어학을 공부하는 것과 똑같이 힘들어요. 수화만을 사용하는 대학이나 학회도 있습니다. 만약 수화가 단순한 몸짓이라면 그런 건 불가능하죠.” … 그런대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까 100퍼센트 들리지 않는 핸디캡이라는 게 정말로 굉장했다. 특히 영어 수업은 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커리큘럼으로 되어 있고, 그런 만큼 압박감도 아주 크다 … 수화통역자를 양성해 필요할 때에 지원하는 대학은 없다. 지금까지 일본의 대학은 수화통역자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학생끼리 서로 돕는다’, ‘자원봉사 정신의 소중함’을 운운하며 통역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버렸다.

[96∼97쪽] 나는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장애인’이라는 종별에 속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거북이와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거북이의 가족이 크게 반대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결혼 상대인 내가 ‘장애인이니까’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을 그렇게 반대하는 부모님의 성을 잇는 것이 싫어졌다 …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경우보다 농인이기 때문에 차별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느끼므로 여권론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인간으로서 농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 급하다.

[103, 104, 112쪽] 태어난 아이가 청인이라 하더라도 물론 사랑스럽겠지만, 농인 부모에게는 청인인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어떻게 수화를 받아들이게 할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다 … 수화를 공부하는 사람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수화를 익혀 ‘봉사’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텔레비전 전화가 있다고 다양한 연락 사무를 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 전화로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120, 131쪽] 수화로 얘기한다고는 하지만 농인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주류 세계의 한 사람이다. 고양이는 그런 존재와 함께 살기로 선택한 거다. 어떤 의미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다. 칭찬해 주고 싶다 … 그렇게 남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미흡하나마 언어로서 수화를 배우고 수화 통역 업무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143, 146, 178쪽] 그렇게 수화를 우습게 여기는 세계로 꼭 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대학이란 세계는 그토록 청인만을 위한 세계란 말인가? … 매일같이 내일은 통역자가 있을까 걱정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농인 한 사람이 수강권 보장 문제로 괴로워하다 병들어 죽어도 누구 하나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 대학의 담당 부서 말은 “수화 통역은 비용이 들어서 붙여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영어-일어 통역은 있는데 어째서 수화 통역은 인정을 안 하는가. 일반 공개강좌인데 만약에 농인이 신청을 하면 어떻게 할 건가.

[156쪽] 연구자들은 참으로 난해한 말을 좋아한다. 좀더 알기 쉬운 말로 쓸 수는 없는 걸까.

[248쪽] 아무 지원도 없이 음성으로 하는 대화나 정보 전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농인에게 고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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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교수 책이 새로 나와서 참 잘 팔린다. 

고사명이라는 아저씨 책은 몇 해 앞서 나왔으나 거의 안 읽힌다. 

 

두 가지 책을 다 읽어 본 나로서는 

강상중 교수 책이 그리도 많이 팔리고 읽혀야 할 까닭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이 옳은 책에 좀더 손길과 눈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으니 

아주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일 테지. 

 

고사명이라는 아저씨가 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더없이 대단하고 훌륭해서, 

이 책을 다 읽고 덮은 지 한 해가 되어 가지만, 

섣불리 곰삭여 내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서 이야기가 터져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강상중 교수 책에서는 내 마음속을 건드리는 불꽃이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이 따위 글이라면 종이가 너무 아까웠다. 

 

세상이 참 슬프다. 

책이 참 슬프다. 

사람이 참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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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02 : 손빨래 하지 말라구?

 하루일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다가 주안역에서 빠른전철을 내립니다. 몇 분쯤 서서 기다리는데 타는곳 둘레로 라디오 목소리가 흐릅니다. “손빨래는 하지 말고 세탁기로 하며, 무거운 짐은 들지 않도록 하고, 마우스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쓰고 …….” ‘뭐야?’ 하면서, 읽던 책을 한동안 덮고 귀를 기울입니다. 라디오 목소리는 ‘셈틀 앞에서 오래도록 지내는 도시사람이 손목 안 아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젠장!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 손빨래가 손목에 안 좋다니, 그저 전기 먹는 기계를 끝없이 쓰고 또 쓰라는 소리인가? 걸레조차 빨지 말고, 걸레질조차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설거지는? 밥하기는? 자전거 타기는? 걷기는?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데, 이삿짐 나르는 일꾼이나 도매상 일꾼은 어쩌지? 책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이 키우는 엄마 아빠는? 아기를 안을 생각은 접고 아기수레에만 태우고 끌고 다니거나 자가용에 태우고 다니라고?

 제 귀에만 터무니없다고 들리는지 모르는 소리를 그만 듣고, 《하얀 능선에 서면》을 쓴 남난희 님이 2004년에 내놓은 《낮은 산이 낫다》를 다시 집어듭니다. 느린전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립니다. 밤골목 거닐며 사진 몇 장 찍다가, 배다리에 마련해 꾸리고 있는 동네도서관에 들러 이곳에 놓고 있던 스캐너를 떼어 가방에 넣고, 몇 가지 책을 챙깁니다. 다시 밤골목을 거닐며 집으로 갑니다. 김밥집에서 김밥 석 줄 삽니다. 제가 먼저 말하기 앞서 김밥집 일꾼이 까만 봉지에 착착 담아 버립니다. 빤히 어깨에 천가방을 걸어 놓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런 가방이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따로 묻지 않습니다. 집 앞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두 병을 삽니다. 젊은 일꾼이 까만 비닐 꺼내는 모습을 보며 얼른 손사래칩니다. 젊은 일꾼은 입맛을 다시며 까만 비닐을 구겨서 제자리에 쑤셔넣습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찬물로 씻고, 아침에 1권을 읽은 만화책 《크로스게임》(아다치 미치루 글ㆍ그림) 2권부터 7권까지 읽어내립니다.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곯아떨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8권부터 10권까지 읽어치웁니다. 뒤엣권은 오늘 저녁에 만화책방에 들러 장만할 생각입니다.

 아침에 서울로 일하는 가는 전철길에 다시금 《낮은 산이 낫다》를 집어들어 읽다가 빈자리에 끄적끄적 이 생각 저 얘기를 적바림합니다. 문득, 남난희 님 글책이나 아다치 미치루 님 만화책이나 꾹꾹 눌러 쓰고 눌러 그린 손글이요 손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손글과 손그림 아닌 셈틀글과 셈틀그림으로 바뀔는지 모르지만, 이이들은 셈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맛과 멋을 잃지 않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두 손으로 글이며 그림이며 사진이며 일구고,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쓸고닦으며 아이 돌보기까지 하는 가운데 김매기나 살림 갈무리를 하겠지요. 손으로 일하는 만큼 손힘 닿는 데까지 애쓰겠지요. 퍽 고되게 일하기도 할 테지만, 손품 팔 수 있는 테두리는 넘기지 않을 테고요. 우리한테는 오늘 하루만 있지 않고 늘 새로워질 기나긴 사람길과 사랑길이 있으니까요. (4342.10.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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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00 : 서울사람은 책을 읽어 무얼 하나?

 여러 달에 걸쳐 《탐라기행》(학고재,1998)이라는 책 하나를 읽어 냅니다. 책을 다 읽을 무렵, 이 책을 쓴 일본사람 시바 료타로 님 다른 책 《한나라 기행》이 함께 우리 말로 옮겨져 있음을 알아챕니다. 아침저녁 전철길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가운데 《탐라기행》과 더불어 《까마귀의 죽음》(소나무,1988)을 겹쳐서 읽었습니다.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아르고스,2005)하고 《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또한 겹쳐서 읽고 있습니다. 어느 책이든 한달음에 읽어치우기에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서른 쪽을 읽어도 ‘이런! 오늘 너무 많이 읽었잖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무 쪽 안팎만 조금조금 읽고 다음 책을 읽어 주고 싶은데, 사람들이 낑기고 찡기고 밟히고 밀리는 지옥철에서는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낼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쉰 쪽도 읽고 백 쪽도 읽습니다. 그러다가 읽기를 멈추고 책 앞뒤 빈자리에 글월 몇 줄을 짤막하게 적바림하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 쓰기를 즐겨하고 있다 보니, 이 책들 말고도 요 한 달 남짓 전철길에서 ‘읽어치운’ 책들이 살림집 책상맡에 잔뜩 쌓여 있습니다. 읽기는 끝없이 읽어댈 수 있는데, 느긋하게 책상맡에 앉아서 느낌글을 갈무리할 겨를이 없습니다. 옆사람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고단한 전철길에서는 책이라도 쥐고 있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책은 자꾸자꾸 읽는데, 어쩌면 이렇게 읽기만 되풀이하면서 외려 내 마음을 제대로 못 다스리지는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은 아침길에 모처럼 자리를 하나 얻어서 앉는데, 제 옆에 앉은 젊은 사내가 팔짱을 굳게 끼고 당신 옆으로 몸을 부풀리며 혼자만 넓게 가려고 합니다. 이런 불쌍한 사람한테 한 마디를 할까 하다가 괜히 짜증 묻은 말이 나올까 싶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갑니다. 그렇지만 옆사람을 들볶는 이 젊은 사내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어차피 서서 가더라도 말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일어서야 했구나’ 하고 뒤늦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아침저녁 출퇴근 또는 통학에 나서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 아닌 짐짝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시달리고 억눌리면서 사람사랑이나 사람믿음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악다구니 같은 도시에, 더구나 서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습니다. 한손에 ‘진보’를 들든 ‘보수’를 들든 ‘중도’를 들든(요사이는 거짓 ‘진보-보수-중도’를 드는 사람이 퍽 늘었습니다), 저마다 좋아하거나 바라는 옳은 생각을 따르자면 도시 아닌 시골에 살 노릇이요, 평화와 안정과 민주와 복지와 통일을 헤아린다면 이 또한 도시 아닌 시골일 텐데, 아니면 도시살림을 시골살림처럼 가꾸어야 할 텐데, 아니 도시이고 시골이고를 떠나 두레를 하는 매무새와 어깨동무를 하는 마음가짐이어야 할 텐데, 왼쪽에서고 오른쪽에서고 넉넉함이나 느긋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저부터 서울에 매인 주제에 이런 말을 늘어놓을 구실이 없다고 하겠는데, 고향 인천 골목동네에서 조용히 이웃과 어울리면서 살고플 뿐이지만 인천시는 2025년 도시계획을 새로 내놓으며 저처럼 아파트에서 안 살거나 못 살 사람은 다 내쫓으려 합니다. 이제는 아예 수도권에서 떠나 버릴 꿈을 꿈 아닌 삶으로 이루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년을 안심하고 산다는 아파트’가 아닌 ‘200년을 걱정없이 살 작은 집’이 그립습니다. (4342.9.2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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