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소박한 삶 - 아미쉬로부터 배운다 타산지석 12
임세근 지음 / 리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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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하나 129 ― 아름다운 삶을 찾아 ‘돈ㆍ이름ㆍ힘’ 버리기
 : 임세근, 《단순하고 소박한 삶》



- 책이름 : 단순하고 소박한 삶
- 글 : 임세근
- 펴낸곳 : 리수 (2009.9.28.)
- 책값 : 15900원



 (1) 내가 선 삶자리를 돌아보며


 날마다 되풀이하는 ‘아기 옷가지 빨래’는 더미더미입니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날마다 서른 장이 넘는 기저귀를 빨아야 했고, 이제는 기저귀 빨래가 반이 못 되게 줄었으나 다른 옷가지 빨래가 넘칩니다.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인 터라 아침부터 밤까지는 기저귀를 풀며 지내다 보니, 바지에 오줌을 싸든 마루나 방에 오줌을 지르든 하면서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기한테 젖떼기밥을 먹일 무렵이니 아이 키우기에 가는 손은 더없이 바쁩니다. 지난날 어머니들이 아이 키우고 집살림 도맡고 논일이며 밭일까지 함께 해낸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맡은 몫은 우습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어머니들한테는 당신 다른 삶이 아무것 없었습니다. 온통 일에 일뿐이었고 다른 자리에 눈둘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남자 어른만 세상일을 돌보도록 하려고 여자 어른한테는 끊임없고 끝없는 일을 지나치게 무겁도록 얹어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밥하기 옷짓기 빨래하기 집치우기 살림하기 아이보기 농사일 …… 이러한 일을 남자 어른이 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자 어른 가운데 이 모든 집일을 스스럼없이 떠맡거나 어려움없이 잘 해낼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집일은 우습게 여기고 바깥일은 높이 섬기는 오늘 우리 삶터입니다. 어려운 말로 ‘가사노동 인정’을 안 합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만 받아들입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버는 일이라고 수월하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집일에 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집살림 가운데 다문 한 가지라도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실을 잣고 물레를 돌려 천을 낸 다음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짓는 일을 오늘날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솜을 틀고 이불을 누비며 빨고 다리고 하는 일을 요즈음 어느 누가 치를 수 있겠습니까. 끼니때마다 절구를 빻고 키질을 한 다음 쌀을 일어 안치고 찬거리를 마련하는 일을 요사이 어느 누가 옳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수많은 기계가 나와 집일 짐을 많이 줄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빨래기계 밥기계 청소기계가 나온 뒤로 집일 부피는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그만큼 더 자주 빨래를 하고 더 자주 온갖 밥을 차리며 더 자주 집 안팎을 치워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만 있든 나물 한두 가지만 있든, 콩밥에 국 한 가지만 마련하든 더없이 수수한 밥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밥차림은 요리책을 보며 궁중음식을 배우느니 서양음식을 배우느니 하며 수없이 많은 반찬을 올리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접시며 밥그릇이 수북하고, 네 식구 살림만 하여도 설거지감이 가득합니다. 집 치우기란 날마다 해야 하는 노릇이라지만, 서로서로 더 넓은 평수 더 큰 집에서 살면서 청소 시간으로 퍽 오래 잡아먹습니다. 아이한테 옳은 삶 착한 마음 바른 몸가짐을 가르치는 어버이는 자취를 감추고, 학원에 보내는 어버이만 늘어납니다. 아이들한테 ‘좋다는 책’을 읽히는 일은 나쁘지 않으나, 아이들한테 ‘어버이로서 좋은 삶을 보여주는’ 일은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빠나 엄마 되는 분들 모두 집밖에서 돈을 벌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수수함을 잃으며 누리는 물질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버리며 즐기는 기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팽개치며 받아들이는 소비문명입니다. 수수함을 등돌리며 껴안는 자본주의 문명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지난 밤 사이 쌓인 기저귀와 아기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미지근한 물을 받으며 빨래를 하는 동안 ‘예전에 혼자 살 때에는 찬물로 빨래를 했잖아? 이제는 미지근한 물로 빨래를 하니 얼마나 나아진 삶이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사는 데에 바쁘고 힘들어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 삶을 생각할 수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거꾸로 잘 먹고 돈 많다는 사람들은 당신들 나름대로 돈굴리기와 집키우기나 다른 여러 가지로 바쁘고 힘들어 낮은자리에서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꼭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리리라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면서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지만, 돈 많은 이웃이 아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스스로 수수하고 낮게 고개숙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수하고 가난하면서 사랑스러운 이웃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거들먹거리며 이름값과 돈힘을 키우는 사람은 언제나 이름값과 돈힘이 대단한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려 하겠지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벗을 사귀고,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은 자전거를 즐기는 동무를 사귑니다. 땅장사 좋아하는 사람은 땅장사 좋아하는 이웃을 둘 테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가까이 지내겠지요.
 





 (2) 아미쉬 사람들 삶자리를 헤아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기 앞서 《Amish Country》(1988)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아미쉬 사람들 삶을 돌아보았고, 《Nicole visits an Amish farm》(1985)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나며 아미쉬 사람들 삶자락을 좀더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번역일 하는 선배가 알려주어 《Amish Country》를 일찍부터 읽을 수 있었는데, 선배는 제 짧은 영어라 할지라도 찬찬히 읽어 보라며 이 책을 건네주었고, 이 책을 살피면서 ‘다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생각하면서 당신(어른)들 스스로 좋은 삶을 꾸리려 하고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주려고 하는 아미쉬 삶자락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몇 해 뒤 헌책방에서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읽으며 아미쉬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저처럼 돈없는 사람한테는 헌책방마실을 하며 나라밖 책을 만나는 일이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 떠나는 일’과 같습니다. 몸소 아미쉬 마을을 찾아가 보지 못하지만, ‘니콜’이라는 흑인 여자아이가 아미쉬 마을에 사는 동무를 찾아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겪는 모습을 슬쩍 엿보면서 ‘이렇구나’ 하고 살짝이나마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 눈높이에서 다가서려는 이야기책이 좀더 또렷하면서 손쉽게 ‘아미쉬 사람 삶’을 한눈에 보여줄 테니까요.

 그러나, 나라안에서는 이처럼 나라밖 영어로 된 책 아니면 아미쉬 삶을 읽을 길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저야 헌책방마실을 하며 한두 가지 책을 만나서 읽는다지만, 아미쉬 삶을 좀더 많은 우리 이웃들이 읽고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돌아본다면 우리 터전을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새롭게 갈고닦을 수 있으리라 보았거든요.

 그나마 아미쉬 삶을 겉훑기로 아는 사람들은 “아미쉬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이웃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187쪽)”는 줄 제대로 모르는 일쑤입니다. 아주 외따로 떨어진 채 살아가는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기와 전화와 셈틀을 쓰지 않는 이들이 “‘과학의 발전’이 곧 ‘보다 좋은 삶의 질’을 의미하지 않는(208쪽)”고 여기기 때문임을 헤아리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미쉬 마을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는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는 품새와 매한가지입니다.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품새가 아닌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낮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보’나 ‘미친사람’쯤으로 하찮게 여기는 품새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어 땅 사고 집 사서 시골로 가는 삶이 아닌 마음과 땀방울과 삶으로 시골살이를 하려는 사람들 넋을 읽지 않는 품새하고 똑같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이 나누고 살겠다는 품새가 아닌, 조금밖에 못 버는 살림이더라도 늘 푼푼이 나누고 스스로 아끼면서 살겠다는 품새를 읽지 못하는 흐름하고 닮았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문명하고는 거의 담을 쌓은 채 지내지만 ‘문명과 아예 담을 쌓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좋은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하면서 당신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물려줄 수 있는 테두리를 지킵니다. 당신들이 아름답게 삶을 일굴 수 있는 자리에서 당신 아이들한테도 아름답게 새 삶터를 일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도록 어우러집니다. 좋으며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찾자고 하는 ‘믿음두레’가 아미쉬 사람들이 예부터 이어받고 물려주면서 가꾸는 마을입니다.
 





 (3) 거듭 읽는 마디마디


 반갑게 읽은 책을 덮고 옆지기한테 건네주었습니다. 끝까지 다 읽은 옆지기는 책 뒤쪽(4부)에 실린 ‘아마쉬 여러 계파 역사와 문화’가 지루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단순하고 소박한 삶》 뒤쪽에 실린 지식조각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는 낯선 아마쉬 마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지식조각을 실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좀더 단출하게 줄이거나 아예 ‘부록’으로 밀어넣었다면 더 좋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보다는 아미쉬 사람들 여느 삶을 다루는 데에 자리를 더 내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온몸을 사랑과 믿음에 바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잘난 척하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서, 책과 학교와 겉멋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더 낮추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와 옆지기가 함께 읽으면서 좋았다고 느낀 대목을 밑줄을 긋고 거듭 다시 읽어 봅니다. (4342.12.13.해.ㅎㄲㅅㄱ)
 







[26, 54쪽] 아마쉬 사람들은 거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용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는 일을 금하고 있기에 외모를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만의 거울이 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거울’이요, 일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비추고 가다듬는 일깨움의 거울이다 … 그때 나는 아미쉬 공동체에는 교회가 없고 돌아가며 교인들 집에서 예배를 보며, 예배당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들은 아미쉬 공동체의 학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교회가 없으니 십자가를 높이 올린 뾰족한 종탑이 있을 리 없고, 벽이나 천장, 창문 곳곳을 장식한 성화가 있을 리 없다. 은은히 들려오는 예배당의 종소리마저도 아미쉬 마을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성직자가 없고, 위엄을 갖춘 설교연단도 볼 수 없다. 오르간과 성가대도 없고, 화음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도 들리지 않는다. 헌금을 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위한 별도의 모임도 없다. 전도를 하지 않고 선교 활동도 지원하지 않기에 그들의 공동체에는 전도사도 없고 선교사도 없다.

[28, 56, 86쪽]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마약, 가정 파괴, 낙태와 동성애, 퇴폐 행락 등의 비도덕적 행각이 범람하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순수함을 해치는 사악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밖 이교도들을 경계하며 바깥세상을 향해 둘러친 울타리를 더욱 높이고 튼튼히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들은 그 어떠한 공격을 받더라도 폭력을 휘두르거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으며 보복도 하지 않는다. 군 징집에 응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용서’를 일깨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 나는 지금까지 아미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로부터 ‘내 종교가 무엇인지? 교회에 나가는지?’ 등의 질문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교회에 나가 구원을 받으라는 권유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메리 아줌마와 다니엘을 비롯한 아미쉬 사람들로부터 감응을 받고 있다.

[35, 76, 106∼108쪽] 그들은 온당한 주의 주장을 믿고 따를 뿐, 그 어떤 사람의 명예를 드높여 영웅으로 만들거나 신격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쳤다 …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녀들에게 아미쉬 교도로서의 삶의 가치와 율법을 보여주고 일깨울 뿐, 이를 평생의 삶의 길로 택하여 교회의 일원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본인(아이)들의 의사에 맡긴다 …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교회의 리더와 연장자를 존경하고 예우를 해 주고, 또한 교회 리더와 연장자는 평신도와 젊은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이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나 전문성을 가진 전담 조직 없이도 아미쉬 공동체가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는 결정적 이유임이 분명하다 … 통일된 복장의 엄격한 규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해 명문화된 규정집이 없고, 옷을 짓는 요령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한 지침서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옷을 지으면서 어린 딸아이들이 옆에 앉아 지켜보게 하고 말로 일러 주면서 격식에 맞추어 옷을 만드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게 하는 방식으로 전수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43∼45쪽] 그런 데다 인디언과의 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신대륙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이어져서 무저항 평화주의를 고집하며 참전을 거부하던 아미쉬 사람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 1930년대 시행된 고등학교 과정의 의무교육에 아미쉬 사람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공동체 삶을 영위하는 데 중학교 과정을 넘어선 고등교육은 해가 된다고 판단한 아미쉬 사람들은 자체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학교 운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1971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법적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주 정부로부터 피소를 당하고 벌금, 징역 등의 처벌을 감수했다 … 그들은 정부로부터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이로써 연방정부로부터 농지와 주택을 가압류당하고 밭을 갈고 있던 말과 농기구를 강제 경매 처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23, 154∼156, 164∼165, 166쪽] 아미쉬 사람들은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가 긴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은 아미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아미쉬 학교는 ‘지적인 삶보다는 미덕의 삶’, ‘전문적 지식보다는 필수적인 기본 지식’, ‘개별적 경쟁보다는 공동체의 번영’, ‘외부 속세와의 융합보다는 분리’를 추구하는 공동체 삶에 필요한 교육을 구현하는 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 전날보다 향상하는 것을 학습의 목표로 하되 학생들 간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우열을 가리는 방법으로 학습 효과를 꾀하지 않는다 … 아미쉬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지 않는다. 이는 방과 후에 집에 돌아가 갖가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 관계 당국이나 외부에서 교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할 수 있게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미쉬 학교에서 8학년까지 마치고 올바른 삶을 살며 바르게 전수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판단하여 외부의 교사 양성 과정 이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48쪽] 검소하게 사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농가나 달리는 마차에 강탈할 만한 값진 물건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좀도둑의 목표가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집에는 담이나 울타리가 없고 대문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는다. 나아가 감시카메라나 경보 장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216쪽] 자동차는 개인주의, 자율, 속도, 자유, 이동성을 불러왔으며, 이에 더하여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전통적 삶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위해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자동차를 허용할 경우 손쉽게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고, 빨리 움직이는 기동성의 매력에 빠져 생활의 속도가 빨라지고, 개인주의와 자기 과시욕에 들뜨는 등 교도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아가 분명 공동체의 겸손, 평등, 결속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될 것이었다.

[257쪽] 가족이 모두 모여 세 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가정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아미쉬 가정에서 가장이 도시락을 들고 나가 하루 종일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고, 텃밭을 일구는 어린 딸아이에게 호미를 쥐어 주어야 할 아빠와 엄마를 아미쉬 가정의 어린 자녀들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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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8호를 만들었다. 이번 잡지 8호에는 독립 이름을 붙여 <오래된 책은 아름답다>로 내놓았다. 책을 펴내 준 출판사에서는 책을 모조리 나한테 보내 주었기에, 아주 마땅하게도 '책방 신간 배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방에 신간 배본을 안 하는 책'이라니. 참 무식하고 무모하고 ... 바보스런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좋다. 굳이 신간 배본을 해야 하느냐? 뜻이 있으면 찾는 사람이 있을 테고, 천천히 기다리면서 내가 손수 봉투질을 해서 보내 주어도 되겠지. 

 

300권은 팔아야 9권을 찍을 돈이 마련될 텐데, 300권을 어떻게 언제 다 팔 수 있을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달 만에 팔든 석 달이 걸리든 한 해가 걸리든, 더딘 걸음일지라도 속깊은 책사랑을 나누려는 사람들을 믿으면서 기다려야지. 

 

잡지 주문을 바라는 이는 =>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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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참 따뜻하다
유선진 지음 / 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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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28 ― 할머니 삶자락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 유선진, 《사람, 참 따뜻하다》



- 책이름 : 사람, 참 따뜻하다
- 글 : 유선진
- 펴낸곳 : 지성사 (2009.10.26.)
- 책값 : 12000원



 (1) 제대로 닥친 추위를 느끼며


 새벽부터 깨어난 아기는 한낮까지 잠깐이나마 잠들지 않습니다. 다문 삼십 분이라도 아침잠을 자 준다면 아빠와 엄마는 숨을 돌리며 글을 쓴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할 텐데, 이렇게 숨돌릴 겨를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기한테는 마땅한 몸짓일 테니, 어버이 된 사람으로서 아기하고 옹글게 마주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나중에 아기가 크면 엄마 아빠가 아이보고 ‘엄마랑 아빠랑 함께 놀아 주렴’ 하고 노래를 불러도 밖에 나가서 동무들하고 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기는 ‘나중에 엄마 아빠 스스로 안타까워 하지 말고, 바로 이 자리에서 놀아 주셔요’ 하는 마음일는지 모릅니다.

 셈틀 앞에 앉았으나 글쓰기는 못하고 아기하고 놀던 아침나절, 무슨 냄새가 나는가 싶어 아기 기저귀를 만지니 젖어 있습니다. ‘쉬를 했구나’ 생각하며 기저귀를 벗기려는데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아기 엉덩이에 넓게 눌러붙은 똥이 보입니다. ‘언제 이렇게 똥을 누었지?’ 다시 기저귀를 엉덩이에 대고 아기를 덥석 안고 씻는방으로 갑니다. 씻는방 바닥에 똥기저귀를 내려놓고 따순 물을 받아 아기 아랫도리와 엉덩이를 씻습니다. 다 씻은 아기는 마루로 보내고 똥기저귀를 빱니다. 냄새가 빠지라고 창문을 열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이 우중충합니다. 비가 오려나? 올겨울에는 눈 구경이 어려울 듯한데.

 똥을 푸지게 눈 아기는 뱃속이 시원한지 눈자위가 벌거며 졸음이 가득한 데에도 잠잘 생각은 않고 더 놀자고 칭얼거립니다. 아빠는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인형놀이를 합니다. 벌써 두 시간 반을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데 아기는 지루해 하지 않고 팔팔합니다. 아홉 시 반이 조금 못 되어 옆지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빠는 아기한테 이길 수 없다며 잠자리에 듭니다. 이제부터 엄마하고 더 놀든지 잠들든지 하기를 바라면서.

 살짝 눈을 붙이지만 얼마 잠들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집을 찾아올 처가 식구를 헤아리며 기저귀 빨래를 해 놓습니다. 옆지기는 마루와 방을 쓸고 닦습니다. 밥을 한 솥 해 놓고 집살림을 조금 갈무리합니다. 그래 보았자 아기가 도로 어질러 놓겠지만.

 도서관 문을 열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문을 열고 골목을 내다봅니다. 싸락눈이 온 골목을 휘감습니다. ‘눈?’ 아침에 본 구름은 비구름이 아닌 눈구름이었을까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사진기를 챙기며 집을 나섭니다. 바깥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이런 날씨에 옆지기와 아기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장갑을 끼고 골목을 걷습니다. 온도가 퍽 떨어졌는지 손가락이 금세 얼어붙습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려 해도 손가락이 굳어 잘 안 움직입니다.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고 늘 푸념하고 있는 소리를 하늘이 들었을까요. 두 시간 반쯤 골목마실을 하며 겨울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데, 귀와 코와 입이 시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딱딱하게 굳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걸리적거리지 않으며 따뜻한 장갑 한 켤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혼자 살며 한겨울에도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달릴 때에는 ‘하루 열 시간을 자전거로 달려도 손가락이 얼지 않을 만한 장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꾸었습니다. 겨울날 열 시간쯤 쉬지 않고 자전거를 달리면 손가락도 얼고 발가락도 어는데, ‘발가락이 안 얼 만한 양말이 있으면’ 하는 꿈도 함께 꾸었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모진 추위를 견디게 해 줄 좋은 장갑과 양말이 더없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저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에 땀이 나니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손님을 기다리며 내내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분들 손과 발과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 한 벌이 참말 그립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늘 그 자리에서 동냥을 하는 사람을 볼 때에도 ‘값싼 장갑 한 켤레’를 건넬 수도 있지만, ‘그저 손에 끼는 장갑이 아닌 손이 따뜻할 장갑’을 건넬 수 있기를 꿈꿉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에 그저 배만 가득 채우는 싼 먹을거리도 나쁘지 않겠으나, 조금 더 돈을 치르면서 내 삶을 채우고 내가 얻은 곡식과 푸성귀를 길러 준 일꾼한테까지 이바지를 하는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옷 한 벌을 장만할 때에도 같은 마음입니다. 책 하나를 사들여 읽을 때에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더 싸게 싸게 또 싸게 싸게 해서 내 주머니가 조금이라도 덜 짐스럽다면 반가울 수 있습니다만, 나 혼자만 홀가분한 삶이기보다는 내 이웃과 함께 홀가분하며 기쁠 삶이고 싶습니다. 내가 얻는 대로는 아니나, 내가 얻은 기쁨을 내 이웃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보면, 지난날에는 이런 마음을 품지 못했습니다. 어리고 철부지일 때에는 그저 ‘돈을 적게 쓰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적게 쓰고 덜 쓰고’ 하면서 내 삶을 가꾸고 내 삶터를 일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적게 쓰는 삶과 덜 쓰는 삶이란 틀림없이 나와 내 둘레 터전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밑바탕을 튼튼하게 일구지는 못합니다. 겉훑기예요. 참으로 도움이 되려면 ‘쓸 곳에 알맞게 써야’ 하는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적게 쓰는 삶에서 알맞게 쓰는 삶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덜 쓰는 삶에서 올바로 쓰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적게 쓰거나 덜 쓰는 삶이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적다’는 테두리에서 머뭅니다. 알맞게 쓰거나 올바로 쓰는 삶이란 ‘아예 한푼조차 안 쓸 때가 있는 한편, 내 모두를 송두리째 바칠 때가 있’습니다. 써야 할 곳에는 아낌없이 쓰고, 쓸 까닭이 없는 데에는 조금도 안 씁니다. 이와 같은 삶이 알맞게 쓰는 삶이요 올바로 쓰는 삶입니다. 그렇지만 제 삶은 아직 알맞게 쓰는 삶이나 올바로 쓰는 삶에 가 닿지 못합니다. 시늉만 하고 있습니다. 시늉이나마 한다 말할 수 있는데, 하루아침에 탈바꿈하는 꿈이 아니라 나날이 차츰차츰 애쓰는 땀방울로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갑작스레 닥친 추위에 손가락이 얼어붙으며 사진을 찍는 동안 뼛속 깊이 느끼기도 합니다. 추운 겨울에 추위를 느끼며 찍는 사진에는 추위와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담아야 한다고. 사진기로 골목을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추위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히는 골목사람 삶터에 그동안 배어 온 추위를 함께 담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이 추위를 살며시 녹이는 따스한 손길을 놓치면 안 된다고.


 (2) 책에 담는 할머니 삶


 몇 해 앞서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2007)라는 책을 읽으며 참으로 기뻤습니다. 기쁘면서 반가웠고, 반가우면서 고마웠습니다. 이 책을 쓰신 할머니는 할머니이기 때문에 이렇게 받아들이고 곰삭이고 되새기면서 글 한 줄 우리한테 선물로 내어준다고 깨달으면서 기뻤습니다.

 요 한 달 사이에 《사람, 참 따뜻하다》라는 책을 읽으며 새롭게 즐거웠습니다. 즐거우면서 놀라웠고, 놀라우면서 흐뭇했습니다. 이 책을 쓰신 할머니는 할머니가 되었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알차고 푸진 말마디를 우리한테 선물로 내려주는구나 하고 깨달으며 즐겁습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를 쓴 문영이 할머님은 1935년에 태어났습니다. 《사람, 참 따뜻하다》를 쓴 유선진 할머님은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느새 일흔을 넘기고 여든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가는 두 분입니다. 생각을 곰곰이 가누며 당신들 또래 할아버지들은 어떠한 글을 쓸까 궁금해집니다. 아니, 일흔을 넘기고 여든이 되어 가는 ‘예부터 글을 써 온’ 할아버지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일본사람 ‘사하시 게이죠’라는 분은 《할아버지의 부엌》(여성신문사,1990)이라는 책을 쓰면서 ‘나이 들어 혼자 남는 할아버지들이 집일을 하나도 못하며 너무 힘없이 쓰러지며 무너지는 삶으로 끝장이 나는 모습이 안타까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앞서 집일을 익히며 늙은 삶을 아름다이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아름답게 늙는 지혜》(정우사,1985)라는 책을 쓰며 ‘늙음은 덧없음이나 못남이 아니라 새롭게 아름다움을 찾는 나이’라고 밝히며 스스로 늙어 가고 있음을 돌이킵니다. 나이가 들어 가기 때문에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즐겁다고 이야기합니다(사하시 게이죠 님 책은 《아버지의 부엌》(지향)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새로 나왔고, 소노 아야코 님 책은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리수)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새로 나왔습니다).

 모두들 어린 날은 어린 날이기에 아름다우며, 어린 날 철없이 구는 모든 짓거리는 철없이 굴 수 있는 기운이 있는데다가, 뒷날 스스로를 깨닫고 고쳐 나갈 수 있어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날은 철이 차츰차츰 들면서 어린 날부터 품어 온 꿈을 일구어 가는 땀방울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늙은 날은 기운이 없어 예전과 같지 않은 모습이 되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을 품에 안고 지내 온 삶이 아름답고 당신 꿈을 뒷사람한테 고이 물려줄 수 있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선진 님 책 《사람, 참 따뜻하다》는 수필문학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수필문학이라는 이름 없이 당신이 보내 온 삶을 적바림한 이야기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따로 어떤 문학 갈래로 나누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굳이 어떤 대단한 문학이 되어야 하는 글이 아니요, 반드시 어떤 높은 이름을 얻어야 하는 자귬이 아닙니다. 아픈 지난날을 아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 좋은 글이고, 외로움을 고스란히 즐기는 당신 삶을 속살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 좋은 글입니다. 꼭 마음 뭉클하게 읽지 않아도 좋은 글이요, 오래오래 간직하며 거듭 돌아보지 않으며 살포시 삭여내어도 좋은 글입니다.

 나이 든 사람으로서 내려놓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나이 들지 않은 사람들 또한 언제나 홀가분한 몸이 되어 사랑을 나누면 더욱 아름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조촐히 적바림한 글입니다. 할머니가 어린 딸아들한테 조곤조곤 들려주는 글이요, 할머니가 더 어린 손자와 손녀한테 조용조용 나누어 주는 글입니다.


 (3) 《사람, 참 따뜻하다》 곰곰이 되읽기


 앞으로 할머님들 책이 우리 앞에 얼마나 선보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크게 이름 높지 않은 할머님들 책들이, 이를테면 예순이 넘은 뒤 처음 붓을 잡고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수채그림을 즐기는 박정희 할머님 같은 분들 책이든 온삶에 걸쳐 집살림을 꾸려 온 여느 할머님들 책이 얼마나 나올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할머니 된 분들한테 ‘홀로 넉넉하고 느긋하게 당신 삶을 돌아보며 글 한 줄 적어 내려갈 틈’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나오기 어려운 만큼 더 고맙게 받아 읽은 《사람, 참 따뜻하다》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되읽어 봅니다. 저 스스로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 먹어 가기 때문이 아니라, 한 해 두 해 갈수록 할머님들 삶자락이 한결 따스하고 포근하다고 느낍니다. (4342.12.5.흙.ㅎㄲㅅㄱ)


[23, 65, 147쪽] 사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학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 삶의 내용이 학력이지요 … 쇠잔이란 얼마나 평화로운 체념인가. 젊음의 열정과 과욕이 씻기어 나간 평화. 그리고 쇠잔이란 또 얼마나 사람을 조그마하게 만드는가. 나는 아주 작아져서 엄지의 엄지가 되어 그의 등에 업혀 잠들고 싶다 …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고, 비로소 ‘신’이 바로 보이는 밝은 눈의 영토였다.

[39, 42∼43쪽] 나는 자라면서 내가 딸이어서 좋구나, 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연코 없다. 아들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지만, 딸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컸던 것이 내가 살았던 사회환경, 아니 우리 집의 가정환경이었다 … 짐을 풀면서 솜씨 좋은 어머니가 새로 만드신 분홍빛 아기 옷에 눈이 가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꼭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학교도 다녀 보고, 돈도 벌어 보고, 큰소리도 치면서 살고 싶다, 를 입에 달고 사셨던 어머니. 딸 다섯을 낳을 때마다 섭섭하고 섭섭하여 몽땅 도둑을 맞았다 해도 그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으리를 노상 읊어대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당신 딸이 낳을 넷째 아이는 “딸이기를……” 바라는 당신의 절박한 염원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64, 94∼95쪽] 고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관점에서 장점을 볼 줄 아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아니 장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세상은 새로웠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꼭 쓰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깨달았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약초이구나. 그래서 다른 이의 삶에 치유의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한다. 구태여 익명으로 나를 감추지도 않는다. 언제나 실명이다.

[79쪽] “조카, 아주 이쁘게 나이를 먹었네.” 내가 칭송하자 “아마 미국에서 살아서 그럴 거예요. 한국에서라면 사방의 적들이 견제하고, 자연히 조급증에 걸리고, 사회 전체가 무언지 불안하고 바쁘잖아요? 그 가운데서 나도 그런 표정으로 늙었겠지요?”

[86∼88쪽] 오빠는 다섯 가지 약을 열심히 먹었다. 그 약이 자기를 살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성으로 먹었다. 그것은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자기 목숨에 대한 최대의 성실이었다. 성한 몸이든, 병든 몸이든,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생명을 준 자에 대한 최고의 감사며 정의였다 … 소식을 듣고 모인 형제들에게 (오빠는) 미소를 지으며 “고마웠어요” 말을 하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모처럼 단잠에 잠기는 듯 편안하게. 그 모습은 맑고 고왔다. “어서 와서 영진의 이뻐진 얼굴을 보아라!” 용케 참고 계시던 아버지가 오열을 터뜨리셨다 …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고 한심하고 지루한 병상에서 오빠가 누렸을 자유!

[102, 133쪽] “아무 생각 마시고 그림만 보세요.” 동서가 가만가만 말을 합니다 … 교편을 잡고 있는 동서가 아이를 낳자, 병원에서 바로 제 집으로 데려와 키울 때나, 열세 식구 조석을 단풍잎만 한 손과 종이배 같은 발로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육신의 고달픔이 보기에 안쓰러워 “그러지 말고 약국을 하거라. 너는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람을 써서 살림을 맡기면 덜 고단하지 않겠니?” 내가 말하면 “언니, 우리 가족에게 젤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우. 형제 간에 사랑하고 화합하는 일이 문제인데 그 몫을 돈이 할 수 있나?”

[106쪽] 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날렵한 차를 몰고 가는 이웃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운전석 옆 유리창을 열고 정중하게 동승을 권한다. “역까지라도…….” 나는 한껏 상냥한 어조로 사양을 한다. 미끄러지듯 멀어지는 차를 보며 ‘당신은 오늘 그 귀찮은 물건을 끌고 다니느라 수고가 많겠구나’ 하고 가당찮게 오히려 동정을 한다. 그러면서 상대적인 자유를 느낀다.

[138쪽] 나는 다행히 나를 닮은 딸은 없고 아들만 있는데, 내 아들들에게 아버지가 내게 훈도하신 대로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고 일러 주며 길렀다. 아니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약점을 갖는다는 건 축복이야. 약점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 보거라.”

[280쪽] 사실 70년을 산 여인들에게 쌓여 있는 것이 지나온 삶의 이야기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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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짜게 점수를 붙이는 책치고 다른 사람들이 넉넉한 점수를 안 붙이는 책이 드물다.

 

 내가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이 드물다.

 

 내가 짜게 점수를 붙이는 책은 참 잘 팔리곤 하며,

 

 내가 넉넉히 점수를 붙이는 책은 참 안 팔리곤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책에는 외려 짠 섬수를 매기고,

 

 나는 내가 참으로 안타깝거나 불쌍하다고 여기는 모자라거나 어설픈 책에는 넉넉히 점수를 붙여야 할까.

 

 이 바보스러운 세상에서

 

 바보스러운 책이 판치는 흐름을

 

 나 같은 사람 하나가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나로서는 내가 별 다섯 만점에 둘이나 하나나 빵을 붙이는 책을

 

 둘레 사람들이 별 다섯을 붙이며 손뼉 치는 모습을 보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 올린 글에도 적바림했지만,

 

 길거리 나무에 전깃줄을 친친 감고

 

 예수님나신날을 맞이한다며 들볶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 하고 외마디소리를 내며 예쁘다고 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이 나라에서

 

 도무지 무슨 소리를 끄적일 수 있겠는가?

 

 젠장 된장이 아닌 환장 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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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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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글이 내 삶이 되어야 태어나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6] 곽아람,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12월 1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선 나무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가 싶어 발걸음을 늦추고 올려다보니,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조그마한 전구가 달린 줄을 나뭇가지에 촘촘하게 걸어 놓고 있습니다. 이날 저녁 다시금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다가 제 앞에서 걷던 몇몇 사람이 “이야, 예쁘다!” 하면서 ‘아직 불을 넣지 않고 전구만 달아 놓은 나무 모습’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12월 2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또 지나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광화문 둘레 나무들은 여느 때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사람들 담배 연기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십이월과 일월을 맞이할 때까지 ‘예수나신날 맞이 불밝히기’에 시달려야 합니다.


..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內界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은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이다. 삶이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요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씩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 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외계外界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강도로 압력을 가해 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그림이 되어 마음속 풍경으로 간직된다 ..  (머리말)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과 나무가 뒤집어쓴 전깃줄에서 눈을 뗍니다. 길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책에 눈을 박습니다. 많은 사람들한테는 서울에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곳일 텐데, 저로서는 서울에 쉴 곳과 마음 둘 곳과 사랑 나눌 곳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람한 건물과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 등불과 끝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이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흙에 뿌리내리는 나무가 없고 바람에 씨앗을 날리는 들풀과 들꽃이 내려앉을 땅이 없으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구름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입니다. 버스 택시 짐차 오토바이 자전거 모두 몰려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 다리로 느긋하게 오가면서 둘러볼 터전이 없는 서울입니다.

 서울마실을 다루는 책이 곧잘 나오고, 서울 시내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다니며 만난 예쁜 맛집과 멋집을 다루는 책이 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이 넓고 크며 사람 북적이는 서울에서 ‘책에 몇 군데 모아 놓아야’만 하도록 맛집과 멋집이 적은가요. 굳이 책에 담지 않아도 되도록, 아니 책에 담을 수 없도록, 어느 곳에 깃들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넉넉하고 알찬 서울은 될 수 없는지요.

 엊그제 혜화동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가 인천과 견주어 안주값이 두 곱이 비싼 차림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킨 안주가 나왔을 때에는, 이 안주값이 인천과 견주어 두 곱이나 되지만 부피는 반이 안 되고 맛은 더 떨어집니다. 다시금 크게 놀랍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습니다. 인천과 견주어 이곳 서울 혜화동 술집 자리값은 몇 곱이나 비쌉니다. 제가 드나드는 인천 술집은 가게를 꾸미는 데에 따로 돈을 들이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인테리어비로 몇 억이니 권리금으로 몇 천만 원이니 또 무엇무엇에 얼마니 하면서 들이붓습니다. 이렇게 들이부은 곳은 물건값도 높을 테지만 내어주는 밥상 부피도 작을밖에 없습니다.


.. 틈이 날 때마다 한 권씩 그 책(토지)들을 뽑아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권도 있고, 한 번 읽고 지나쳐 간 권도 있다. 계집아이다운 허영심이 강했던 어릴 때는 여주인공 최서희에 끌렸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미인에다 영리하고 자존심 강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머슴과 결혼하고 마는 여자 … 나는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휘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것이 페미니즘의 본령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실질적으로는 교묘하게 남자를 지배할 줄 아는 것이 대놓고 으르딱딱대어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  (20, 112쪽)


 인천은 제 고향마을입니다. 그러나 제 고향마을이라 해서 다른 데보다 더 낫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고향입니다. 예부터 인천사람은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았고, 으레 서울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인천에 머물거나 남는다든지, 저처럼 서울로 나아갔다가 거꾸로 인천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바보나 멍텅구리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어리보기로 여겨 버릇합니다. 한 번 서울로 나아갔으면 두 번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없어야 하고, 인천에서 무슨 일거리나 일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일을 인천에서 할 때와 서울에서 할 때에는 다릅니다. 받는 일삯이 서울에서 훨씬 높고, 받는 대접이 서울에서 훨씬 넉넉합니다.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인천에서는 아무 티가 나지 않을 뿐더러 작품을 그러모아 책을 내거나 전시마당을 마련하기는 벅찹니다. 그만큼 서울이 눈높이가 높다 할 텐데, 이렇게 서울만 홀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인천은 인천다움을 잃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천은 부천다움을 잃고 수원은 수원다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광명에서 광명다움을 찾기 어렵고, 안양에서 안양다움을 읽기 힘듭니다. 과천에는 어떤 과천다움이 있을까요? 성남에는 무슨 성남다움이 있을는지요? 고양은? 파주는? 남양주는? 군포는? 안산은? 시흥은? 구리는? 김포는?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답고 어여쁘며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하게 반갑고 멋지며 믿음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 흐름을 돌아보면 사람이 사람값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맛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가로막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험성적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학교이름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학교를 다 마치면 은행계좌 크기로 차례를 매깁니다. 이러는 동안 옷차림과 자가용 크기와 아파트 넓이를 놓고 차례를 매깁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 숫자가 되어 서로 치고박으며 죽도록 다툼질을 해야만 하는 터전입니다.

 이는 보수나 수구라는 쪽에서만 벌어지는 싸움질이 아닙니다. 진보나 개혁이라고 하는 쪽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툭탁질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알듯이 ‘같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가 서로 엇갈린 모임이 되었습니다. 공무원 숫자는 나날이 늘고, 교사 대접은 나날이 나아지는데, 공무원이 여느 사람 앞에서 온몸을 바친다든지,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참 가르침을 펼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늘 한결같이 들을 길이 없습니다.


..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溫氣도 느껴 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54쪽)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일컫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고 하는 일본 글쟁이를 뛰어넘는 글쟁이를 꿈으로 삼고 있는 서른한 살 젊은 넋입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쓴 곽아람 님은 당신 일터를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지만, 〈조선일보〉는 조금도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곽아람 님 당신이 〈조선일보〉에 다니기 때문에 이 신문이 나쁘다거나 못된 짓을 한다거나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일을 하고 무엇을 읽으며 어떻게 살든 세상 흐름은 옳고 바르고 알맞게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수구 기득권’ 신문입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아일랜드 망명자 코즈모폴리턴 조이스’하고 견주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누군가와 스스로를 견주는 일은 자유입니다만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견주기란 부질없는 말장난입니다. 뜬금없는 둘러대기입니다. 곽아람 님은 〈조선일보〉에 들어간 다음부터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림없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그림이 그녀에게》에 이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아람 님 당신은 부산과 경남 진주를 거쳐 서울에서 살면서 광화문 큰길을 거닐면서 기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 당시의 국어 시간에 우리는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소녀의 말에 밑줄을 쫙 긋고 선생님이 불러 주는 대로 “보랏빛 = 죽음을 상징하는 색, 소녀의 죽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보랏빛과 죽음과 복선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단골로 출제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오직 기계적으로 암기한 보랏빛에 대한 구절만 머리속에 남겨 놓은 채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읽고, 어렸던 중학생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 근 20년 만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나자 저절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악상惡喪’과 ‘잔망스럽다’의 뜻을 달달 외우며 읽었던 열네 살 때와는 판이한 감정이었다 …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강의를 빼먹어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도, 어떤 물리적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던 낯선 체제가 혼란스러웠던 우리 신입생들은 과방에 우루루 몰려 앉아 수군거렸다. “왜 이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지?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  (66, 68, 218쪽)


 곽아람 님 책은 저보다 우리 옆지기가 먼저 읽었습니다. 허먼 멜빌을 아주 좋아하는 옆지기는 멜빌이 쓴 책은 헌책방을 샅샅이 살펴 거의 모든 판본을 다 모아서 거듭 읽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1960년대에 나온 영화 대본(영화 ‘모비딕’ 번역판 대본)을 헌책방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선물로 사 주기도 했습니다. 곽아람 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도 허먼 멜빌 문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곽아람 님이 다룬 멜빌은, 또 박경리는 박완서는 황순원은 최인훈은 카프카는 레핀은 포크너는 호손은 조이스는 …… 곽아람 님 스스로 당신 길을 찾으려고 만난 책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지스레 읽거나 외워야 했던 시험공부였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보고서’를 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말로도 느끼고 저 스스로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그리고 곽아람 님 스스로도 밝힙니다.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 읽은 책은 ‘읽기’조차도 하지 않은 숫자와 글자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서야 뒤늦게 다시 읽으며 지난날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과 빛남과 사랑스러움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린다고.


.. 작가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가브리엘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을 쓴” 깐깐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을 처음 읽은 지 정확히 8년 반 만에 다시 책을 꺼내어 읽으면서, 그새 이른바 ‘보수 신문’ 기자가 된 나는 영국 보수 신문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부터 비난받는 가브리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도, 종교도, 가정도 섬기지 않겠다”면서 37년을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망명자로 떠돌았던 코즈모폴리턴 조이스도 참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00∼101쪽)


 곽아람 님은 짧으면 예닐곱 해, 길면 스무 해까지 거슬러 생각하면서 당신 책읽기가 이제서야 바른 자리로 접어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곽아람 님은 ‘책읽기’로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책훑기’로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읽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줄거리를 읊거나 주인공 이름을 들먹이는 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달라지고 우리 눈길이 새로워지며 우리 몸이 거듭나는 데로 이어집니다. 참되고 그릇된 책읽기가 아니라, 책읽기라면 ‘줄거리 새기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한 겉멋과 겉치레를 키우고자 책을 사들여서 집구석 한켠에 으리으리한 서재를 키워 놓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내 마음밭을 따뜻하게 하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마음바탕을 넉넉하게 일구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생각줄기를 알차게 갈고닦고자 책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한 사람 손때 묻은 책을 찾아서 읽든, 도서관에서 숱한 사람 손길을 탄 책을 빌려서 읽든, 새책방에서 주머니돈을 탈탈 털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장만하여 읽든,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삶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허전하거나 아쉬운가를 헤아리면서 어제와는 달리 살아가려는 매무새가 됩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책을 읽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어리고 푸른 넋이 똑같이 ‘시험지옥에 매인 채 아름다운 문학과 삶을 못 느끼고 바보 입시기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더 곽아람 님 당신이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는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나는 말했다.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 A+를 받아 완벽한 ‘학점 세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 리포트의 이면에는 소설의 주인공을 미화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었다 ..  (221, 223쪽)


 스스럼없이 내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된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내 삶을 가꾸려 하는 땀방울이 배이지 않는 글쓰기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끄적이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두질 같은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다면, 말 그대로 글‘쓰’기가 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읽’은 책을 어떻게 온몸과 온마음으로 ‘삭’이는 가운데 내 삶과 눈길과 매무새가 ‘새’ 길로 접어들고 있는가를 ‘당차’게 밝히는 뚜벅뚜벅 걸음걸이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림을 말하기 앞서 그림을 당신 삶으로 녹여내 주소서. 책을 이야기하기 앞서 책을 당신 삶으로 감싸안아 주소서. 삶이 묻어나지 않고서야, 곽아람 님 당신이 우러러보는 요네하라 마리 같은 사람들 머리끝에도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당신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대로 아름답고 곽아람 님 당신은 곽아람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황순원은 황순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헤세는 헤세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이 책 하나에서 ‘곽아람은 어떤 삶결’이라는 목소리와 몸짓과 빛깔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아직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독후감’과 대학교 ‘학점따기 보고서’ 둘레에서만 맴돌고 그칠 생각인지요? (4342.1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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