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 전민조 사진집
전민조 지음 / 평민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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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만들어 준 얼굴을 찍는 즐거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4] 전민조, 《농부》


- 책이름 : 農夫
- 사진 : 전민조
- 펴낸곳 : 평민사 (2009.8.30.)
- 책값 : 4만 원


 (1) 사람들이 만들어 주는 얼굴


 엊저녁 몹시 고단하고 지친 가운데에도 빨래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옆지기는 홀로 집에서 아기를 보면서 빨래를 한 점도 하지 못합니다. 아기 아빠는 돈을 벌려고 서울로 일을 나온다지만, 돈을 버는 일이라기보다 한글학회에서 우리 말과 글을 다루는 큰일 한 가지를 넘겨받느라 아기돌보기를 한동안 미룬 채 올 12월까지만 힘들게 살기로 했습니다. 살림돈이야 어떤 일을 하든 못 벌겠습니까. 우리 세 식구는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은 돈을 쓰며 꾸리는 삶보다, 우리한테 알맞춤하게만 돈을 벌어 쓸 만큼만 쓰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손길이 있어도 굳이 사무실에 나가는 일을 안 한 까닭은, 더 많은 돈을 벌다가는 우리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는 한편(그러나 이렇게 해서 흐트러지는 마음이라면 이렇게 안 해도 흐트러지리라 봅니다), 이보다는 아이를 엄마와 아빠가 곁에서 함께 돌보는 일이 몹시 아름답고 즐겁고 거룩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아기가 돌을 맞이할 때까지는 엄마와 아빠가 아기와 하루 내내 함께 붙어 지내면서 돌보았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적어도 서너 해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다른 식구들이 보기에는 ‘애 아빠가 한 해 동안 집에서 온갖 일 다하며 아기를 본 일’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기겠지요. 이리하여, 남들한테는 ‘회사 다니며 일하기’로서는 짧다는 넉 달일 테지만, 우리 식구한테는 아기 아빠가 넉 달이나 인천에서 서울로 일을 나가는 삶이 몹시 길고 고단합니다. 아기 아빠가 집에서 집 안팎 살림을 모두 치러낼 때에도 고단함이 가득했는데, 집 바깥으로 나가면서 집 안팎 살림을 모두 짊어지려 하니 몸뚱이 하나로는 남아나지 않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밥하고 빨래하고 짐 꾸려서 지옥철에 시달리며 서울로 간 다음, 눈코 뜰 사이 없이 일을 하다가 도시락 까먹고 쉴 틈 없이 일하고 나서, 다시 지옥철에 들볶이며 인천으로 와서는, 아기하고 밤마실을 하고 보리술 한두 병 마신 뒤에, 그 사이 늘어난 빨래를 마저 하고 아기 씻기고 잠들라치면 두 팔과 어깨와 다리에는 아무런 힘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그 좋아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아주 곯아떨어지듯 잠자리에 드는데, 그렇게 잠자리에 들면서도 한밤에 옆지기가 “여보, 기저귀 좀 갈아 줘요.” 하고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채고 벌떡 일어납니다. 기저귀를 갑니다. 그러고 다시 곯아떨어집니다.

 오늘 새벽과 아침에도 지난 한 달과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하며 지옥철에서 시달립니다. 제 왼쪽에는 양복쟁이 젊은 사내가 다리를 쩍 벌린 채 앉고, 제 오른쪽에는 이어폰 꽂고 다리 덜덜 떠는 젊은 사내가 또한 다리를 쯔억 벌린 채 앉습니다. 오늘은 이레 만에 자리를 겨우 얻어 앉아서 서울로 가는데, 겨우 한 번 앉아도 이 모양이니 괴롭습니다. 한참 꾹 참으며 가다가 부천역에 이르러, 두 팔을 뻗어 왼손으로는 왼쪽 자리 젊은 사내 허벅지를 꾹 잡고 오른손으로는 오른쪽 자리 젊은 사내 허벅지를 꽉 잡은 뒤 옆으로 쑤욱 밉니다. 두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미안해 하는 빛을 띱니다. 그나마 미안한 줄은 아나 보지? 두 사내가 들을 수 있도록 ‘에휴!’ 하고 크게 한숨을 쉽니다. 읽던 책을 마저 펼칩니다. 만화책 《빛의 바다》를 다 본 다음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고 하는 소노 아야코 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마침,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잘 맞지 않는 상대와는 무엇이든 무리할 필요가 없다. 어디라도 좋으니 의기 투합하는 회사를 찾아 그곳에서 일하면 그만이다(36쪽).”는 대목을 읽었지요. 다음으로는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추하다고 느끼거나, 때로는 업신여기고 싶은 마음으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38쪽).”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이 대목까지 이른 다음에, ‘이 볼썽사나운 녀석들한테 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데로 갈까?’ 하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내가 이 자리를 비운다 한들 이 녀석들은 똑같이 이렇게 살 테니까.’ 하고 생각하며, 전철에서 ‘옆에 남자가 앉든 여자가 앉든 다리 쩍 벌리는 짓’이 얼마나 버르장머리없는 노릇인가를 일깨워 주되, 아주 부드럽게 일깨워 주자고 다짐했습니다.

 ‘허벅지 콱 집어서 밀기’를 하고 나서는 자리가 널널해졌습니다. 널널해진 자리를 즐기며 신길역에서 갈아타고 서대문역에서 내리기까지, 사람과 사람한테 다시금 들볶이다가 문득, ‘웬만한 한국사람은 어릴 때부터 너무 바쁜 쳇바퀴에 갇혀 치이고 밀리고 들볶이고 시달리면서 제 삶을 잃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멀쩡한 두 다리를 놓고 자동계단이나 승강기만 타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사람들 스스로 이렇게 되어 가는 동안, 이 사람들한테서 어떤 다름(개성)을 찾을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검고 하얀 빛깔만 가득한 서양 차린옷을 갖춘 ‘남녀 회사원’ 매무새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나면, 똑같은 삶자락과 똑같은 밥버릇과 똑같은 공짜신문과 똑같은 텔레비전과 똑같은 은행계좌와 똑같은 여행계획과 똑같은 아파트+자가용 꿈에 매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손전화 사진기’이든 ‘디에스엘알’이든 ‘똑딱이’든, 갖가지 사진기가 많이 팔리고 널리 쓰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이 쏟아지는 우리 나라인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은 쏟아지나, 정작 ‘다름’을 느낄 사진은 없는 가운데, 한결같이 판에 박은 사진만 넘치는 까닭은 이런 도시내기 삶에서 비롯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저 또한 도시내기라 할 테지만, 도시 한복판이 아닌 변두리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죽 살아왔고, 옆지기하고도 골목동네에서 살림을 이루었고 아기도 골목동네에서 낳았습니다. 아기를 기뻐해 주고 반겨 주는 사람은 하나같이 골목동네 이웃입니다. 저잣거리를 마실하든 골목을 거닐든, 골목동네 이웃은 우리 아기와 세 식구를 따숩게 맞이해 줍니다. 이러는 동안 제 사진은 저절로 ‘골목길을 내 삶 그대로 느낀 모습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자’고 생각합니다. 꼭 얼굴사진을 환하게 웃는 빛으로든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빛으로든 담아야 ‘골목길 사람들 사진’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 얼굴이나 몸뚱이 하나 깃들지 않아도 얼마든지 ‘골목길 사람들 사진’이 된다고 깨닫습니다. 우리 둘레 어디에도 사람 손길이 타지 않은 자리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고 느껴야 하며 껴안아야 하고 널리 나누어야 할 모습이란 다름아닌 사람 냄새요 사람 목소리요 사람 빛깔이니까요.
 

















 (2) 사람을 보는 얼굴과 본 그대로 담는 손길


 지난 9월 10일부터 오는 9월 23일까지, 서울 중구 저동2가에 자리한 〈갤러리 M〉(02-2277-2436)이라는 곳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삶터’를 담은 사진잔치가 열립니다. 사진을 찍은 이는 사진기자로 정년퇴직을 한 전민조 님입니다. 전민조 님은 이제까지 숱한 사진책을 펴냈습니다.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던 때에는 《얼굴》(평민사,1985)과 《서울스케치》(눈빛,1992)와 《이 한 장의 사진》(행림출판,1994)과 《가짜사진 트릭사진》(행림출판,1999)과 《그때 그 사진 한 장》(눈빛,2001)을 펴냈습니다. 사진기자로서 이렇게 사진책을 많이 낸 분은 더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기자 일을 마치고 ‘사진작가’로 달라진 다음부터는, 《아무도 오지 않는 섬》(눈빛,2005)을 비롯해 《서울》(눈빛,2006)과 《한국인의 초상》(눈빛,2007)과 《사진이야기》(눈빛,2007)와 《기자가 본 기자》(대가,2008)를 해마다 잇달아 펴냈습니다.

 저는 2005년 ‘섬’ 사진잔치 때부터 전민조 님을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04년까지는 사진책으로만 전민조 님을 뵈었는데, 2006년과 2007년에도 사진잔치 자리에서 즐겁게 얼굴을 마주하며 사진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08년에는 우리 아기가 태어나던 무렵에 사진잔치를 하시는 바람에 미처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2009년 가을에는 조금 느긋해져서 저 혼자 사진잔치에 찾아갑니다. 전민조 님은 틀림없이 2010년에도 새로운 사진감으로 사진잔치를 벌이실 테니, 그때가 되면 우리 세 식구는 서로 손을 맞잡고 신나게 사진잔치 마실을 갈 수 있겠지요.


.. 농부와 소는 비에 젖지 않게 온통 비닐로 칭칭 감겨 있었다. 밀짚모자와 헤진 검은 잠바를 비닐로 덮고 소 잔등에까지 감기에 걸리지 않게 찢어진 비료 비닐이 감겨져 있었다. ‘자연의 농부’를 드디어 발견한 것 같았다. 빗물이 흥건하게 고인 논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쟁기가 거침없이 헤쳐 나갔다. 몇 번 무거운 쟁기질에 소는 이내 거친 숨을 내뿜고 농부의 발걸음도 비틀거렸다. 쟁기와 소 걸음이 철퍼덕거릴 때마다 흙탕물이 렌즈에까지 튕겨 왔다. 오직 퍼붓는 비에 카메라에 젖으면 낭패다 싶어 한 장을 찍으면 얼른 카메라를 재킷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서 찍는 등, 앉아 찍고 서서 찍고, 움직이는 농부를 쫓아 셔터를 누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농부는 흔한 쟁기질인데 촬영자가 비를 흠뻑 맞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스운지, 잠시 쟁기질을 멈추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소” 하며 빙그레 웃었다 ..  (찍은이 말/전민조)


 9월 10일 저녁 여섯 시, 〈갤러리 M〉에는 숱한 사진작가와 사진학과 교수가 모여들었습니다. 2005년부터 이어진 다섯째 사진잔치를 기리는 발길이 웅성웅성 모여들었습니다. 지난 2005년과 2006년에는 너무 초라하고 쓸쓸하게 사진잔치를 했던 일을 떠올리면 사뭇 다릅니다. 2005년과 2006년에는 ‘사진을 아주 좋아하는 몇몇 사람’만 알음알이로 찾아와서 당신한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말이에요, 이렇게 늘 사진기를 갖고 다녀야 해요. 자, 보세요, 저도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깨에 사진기를 메고 있지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해요. 언제든지 사진기가 내 몸 일부가 되어 붙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사진기를 늘 갖고 다니려고 이렇게 조그마한 녀석을 하나 들고 다니지요.” 하는 말씀을 알뜰히 들었습니다. 사진밭에서 이름 크게 나거나 이름 널리 날리는 이들이 찾아와 당신을 기리거나 기뻐해 주지 않았으나, 이 나라 곳곳에서 조용히 사진을 즐기는 낮은자리 사람들이 눈빛을 말똥말똥 빛내면서 ‘사진하는 매무새’를 깊이 새겨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잡은 사진 주제에 따라서 사진기를 다르게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저는 그때그때 스냅으로 사람들 삶을 찍기 때문에 이만한 작은 사진기 하나가 가장 좋아요.”

 2009년 9월 10일 자리는 전민조 님 당신 삶과 생각을 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당신 삶과 생각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 다섯 해 사이에 여러 가지 사진책을 펴낸 전민조 님이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당신 삶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냈으니 책을 스스로 펼쳐 읽으면 되거든요. 꼭 ‘입’으로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고 말을 해 주어야만 ‘전민조 사진밭은 이러하다!’ 하고 알아챌 수 있지 않습니다. 우리 두 눈으로 몸소 사진을 들여다보면 시나브로 ‘전민조 사진바탕은 이렇군요!’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전민조 님은 당신 사진잔치에서 당신 말씀을 아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한테 큰 어르신이라며 이명동 님한테 한 말씀을 여쭙니다. 그러고 사진작가 윤주영 님한테도 한 말씀을 여쭈지만 윤주영 님은 손사래를 칩니다. 강운구 님은 멀찌감치 물러서서 뒷짐을 지고 구경하다가 〈갤러리 M〉 관장한테 꾸지람 한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전민조 선생은 사진 아래쪽에 자기가 사진을 찍은 날짜와 찍은 곳을 손으로 적어 놓는데, 액자에 그 글씨가 가려진 데가 많으면 어떡해?”

 이명동 님 말씀이 끝난 다음에는, 이번 사진잔치 “농부”가 있도록 해 준, 전북 남원 대산면 풍촌리 농사꾼 모씨 할아버지네 아들들을 앞으로 모시고 한 말씀을 여쭙니다. 세 형제 모공식, 모정식, 모중식 님은 방명록에도 나란히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세 형제는 아버지 뒤를 이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사진잔치에는 따로 안 걸렸지만, 사진잔치와 함께 나온 사진책 《농부》에는 ‘농사꾼 모씨 할아버지 아들 부부’가 그곳에서 그대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자취가 하나하나 담겨 있습니다.


.. 나는 농부의 얼굴을 촬영할 때까지는 어떤 혹독한 대가도 달게 받으며 몸으로 찍는 놀랍고 뜨겁고 특별한 사진들을 항상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농부의 얼굴을 찍은 시간부터는 그런 특별한 사진들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인가를 알게 되었다. 오직 자연에만 몸을 맡기고 웃는 농부라는 직업에 무한한 존엄성을 느꼈다. 그러면서 힘든 일도 힘든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농부라는 직업은 수많은 직업 중에 최고의 직업이며 군자 같은 직업으로 여겨졌으며, 유순한 소 역시 인간과 운명을 함께하는 수많은 동물들 중에 최고의 군자 같은 동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찍은이 말)


 무슨무슨 교수님과 작가님 들이 한창 막걸리와 떡과 고기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모두들 사진밭 큰 어르신들인데 어깨나 손에 사진기를 쥐거나 안은 분은 거의 안 보입니다. 한결같이 양복을 차려입은 가운데, 저와 몇몇 사람은 어깨에 사진기를 메고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었던 이들도 떡과 고기와 술을 맛보기에 바쁘지만, 저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사람물결이 빠져나가는 흐름’을 지켜봅니다. 해가 아직 하늘에 걸려 있을 때 밖으로 나와 사진 한 장 찍고, 뉘엿뉘엿 기울 때 다시 한 장 찍으며, 아주 저문 뒤에 또 한 장 찍습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사진틀을 등이나 팔꿈치나 손으로 치거나 긁거나 미는 모습’을 쓰디쓰게 바라봅니다. 조그맣고 조촐한 잔치마당인데, 너무 많은 손님이 찾아왔구나 싶은 한편, 즐거움을 나누는 도르리 같다면 흐뭇하겠다 싶으면서도, 이래서는 사진을 사진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발디딜 틈이 없던 전시장에 사람이 하나둘 빠져나갑니다. 저마다 이런 약속 저런 일정이 있어 떠납니다. 조금씩 넓어지는 전시장을 여러 차례 되짚으며 사진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봅니다. 북적거릴 때에 보는 사진하고 조용할 때에 보는 사진이 퍽 다르구나 싶습니다. 어지러이 어수선할 때에는 훌렁훌렁 넘겨야 했던 사진이나,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는 몇 분 동안 사진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습니다.

 스무 점 안팎 걸린 사진을 몇 분씩 차근차근 돌아보는 사이, 이제는 전민조 님 식구와 가까운 벗을 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북새통은 사라지고 오붓한 이야기마당이 펼쳐집니다. 전시장에 들어올 때 32000원에 사들인 책(전시장에서는 20% 에누리해서 책을 팝니다)에도 실린 사진이라 하지만, 작은 크기로 볼 때하고 2미터짜리 큰 사진을 볼 때에는 같지 않습니다. 가장 크게 걸린 사진 앞에서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고개를 돌리면서 들여다보다가, ‘소한테 비닐을 씌워 비오는 날 쟁기질을 하는 농사꾼’ 뒤로 이 농사꾼하고 똑같이 ‘소한테 비닐 씌우고 스스로도 비닐 뒤집어쓰고 쟁기질하는 다른 농사꾼’이 여럿 보입니다. ‘아, 그렇구나!’

 다른 사진을 처음부터 다시 돌아봅니다. 이날 비를 맞으며 쟁기질을 하는 농사꾼은, 모씨 할아버지만이 아니라 꽤 많습니다. 그러나 전민조 님은 다른 농사꾼이 아닌 ‘모씨 할아버지와 일소’ 하나만을 알아보았고, 이 한 곳에서 한 시간 넘게 비를 맞으며 필름 석 통을 찍었다고 했습니다.

 다 찍을 까닭은 없었겠지요. 농사꾼은 어디에나 흔히(?) 있었겠지요. 지리산 가는 길이 아니더라도 있고 경기도에도 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일소를 부리며 쟁기질하는 농사꾼은 널려(?) 있었겠지요. 사진기자만이 아니라 사진작가도 많고, 이 나라 곳곳에 사진모임이 수두룩하게 있는 가운데 사진전람회나 사진공모전도 수없이 있었겠지요.

 아까, 사람들 북적이던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그림 좋게 거기 사진 주인공들하고 나란히 서서 사진 설명 좀 해 줘요.” 하고 부탁할 때 전민조 님은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 또 설명을 해?” 했고, 사진기자는 다시 “그래야 좋은 사진이 나오지요.” 했습니다. 전민조 님은 허허 웃다가 “이렇게 찍는다고 하니 다시 한 번 서 주셔야겠네요.” 하고 농사꾼 손님을 사진 앞에 세웁니다. 사진기자가 ‘서 달라는 대로 서 주며’ 이야기를 다시 들려줍니다. 늦게 온 사진기자는 기사에 써야 한다면서 ‘그림 만들기’를 바라는 판인데, 사진기자로 온삶을 보내다 정년퇴직한 전민조 님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자연이 만들어 준 얼굴을 찍는 즐거움, 저는 이것 때문에 농부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이게 제 사진이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님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나도 기자였지만, 기자들이 말야, 약속을 해도 약속을 안 지켜. 전시회 소식을 써 준다고 하면서도 다 잊어버리고 안 쓰지.” 하고 넌지시 한 마디를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빙그레 웃다가, 전민조 님한테 부탁 한 말씀을 드립니다. “전민조 선생님, 이제는 인천에서도 마흔 해 만에 사진잔치를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어릴 적에 살던 고향으로 사진이 한 번쯤 돌아올 때가 된 듯해요.”

 일본에서 태어나고 부산에서 어린 날을 보낸 다음 인천으로 와서 동산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나중에 서울로 살림집을 옮기기 앞서까지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했던 전민조 님은, 첫 번째 사진잔치를 1967년에 인천에서 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1985년, 2001년 모두 서울에서 사진잔치를 했고, 당신 성장기를 보낸 고향에서는 당신 사진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인천이라는 터전에서 문화와 예술을 하든, 교육과 행정을 하든, 정치와 과학을 하든, ‘자연이 스스로 빚어내는 얼굴’ 그대로 살아가는 분이 드문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이 스스로 빚어내는 얼굴을 애틋하게 부둥켜안거나 사랑스레 껴안는 몸짓이 너무 적은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삶 한자락을 고이 담는 전민조 님 사진은, 자연을 찍는 즐거움뿐 아니라 자연을 나누는 사랑스러움을 보여주는 한 방울 눈물입니다. (4342.9.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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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리뷰'에 안 걸치는 까닭은, '리뷰'에는 정식으로 다시 쓸 생각이기 때문이다) 

 





 전철길에서 눈물 흘리며 책읽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 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엄마가 사랑해》(숲속여우비) 



 열석 달을 넘기는 아기한테는 엄마가 나누어 주는 사랑에다가 아빠가 나누어 주는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훨씬 좋겠지요. 우리 삶터는 어느 결에 조각조각 쪼개지면서 어버이 따로 아이들 따로가 되어 버리고 있는데,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당신들 하고픈 일과 놀이를 즐기고 싶습니다. 아이들 또한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바라는 일과 놀이를 붙잡고 싶습니다. 함께 모이기 어렵고, 같이 손 잡기 힘듭니다. 외려 낯과 이름 선 사람들하고 모여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깁니다.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애 아빠는 아이가 깨어 있는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기저귀 빨래만 해 놓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부랴부랴 일어나 씻고 가방을 꾸리는데, 어젯밤 미처 해 놓지 못한 빨래는 건드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둡니다. 이 빨래는 오늘 늦게 집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고단한 몸으로 해야겠지요. 마땅한 노릇일 텐데, 애 아빠는 아침에도 ‘깨어 있는 아이 얼굴’은 보지 못하는 채 길을 나섭니다. 그나마 일터에 아홉 시까지 나가도록 맞추어 가장 늦게 집에서 나오려고 하니 일곱 시 이십사 분에 걸음을 재촉합니다.

 애 엄마는 홀로 하루 내내 아이하고 씨름을 하다가 느즈막하게 아빠를 마주하는데, 서로서로 다른 까닭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눈만 겨우 마주친 다음, 아빠가 먼저 쓰러지듯 잠들고,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합니다. 애 아빠가 서울로 일을 나온 지 한 달이 되는데, 이에 앞서는 엄마 아빠가 아이하고 언제나 하루 내내 있었지만, 언제 그렇게 지냈느냐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아빠는 바깥으로만 맴돌게 되고 엄마는 집에서만 머물게 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동네 마실을 즐기지 못해, 한참 신나게 걸어다니며 세상을 느끼고 싶은데 제대로 세상을 느낄 길이 없습니다.

 밀리고 눌리고 밟히는 전철길입니다. 자리를 얻지 못하고 서서 갑니다. 자리에 앉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전철칸 하나에 쉰 사람쯤만 앉습니다. 여기에 백을 곱한 오백 사람 남짓은 서로 오징어떡이 되면서 낑기고 찡긴 채 서울로 가야 합니다. 맨 끄트머리 전철역에서 타더라도 자리에 못 앉는 사람이 많습니다. 밀리고 차이고 얻어맞는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골을 내고 짜증을 부리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자리에 앉은 이 가운데에는 한둘쯤 책이나 신문을 들고, 거의 모두 모자란 잠을 이루려 눈을 붙입니다. 새벽에 길 나서고 밤에야 돌아오는데, 일터에서 낮잠이라도 삼십 분 달게 자기 어려운 이들 ‘인천 떨거지(또는 수원 떨거지)’는 아침저녁(또는 새벽밤)으로 스스로 사람 아닌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저마다 똑같은 노릇이요 똑같은 괴로움과 고달픔이라지만 ‘날마다 이런 골부림과 짜증내기를 저 혼자만 해야 하는’ 듯 느끼기 일쑤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한테 치이고 밀리다 보니, 서로를 나와 똑같이 아름답고 고운 목숨임을 잊기 일쑤입니다. 서로서로 똑같이 힘들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 우리는 밖에 나가면 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구멍가게에서 잡지를 사려고 했을 때, 가게 주인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에게 이 일에 보답을 해 주실 거예요.” 우리가 소원하던 아이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 아이는 참 운이 좋군요. 나중에 아이가 당신들에게 꼭 고맙다고 할 거예요.” 우리는 언제나 이런 유의 위로를 들어야 했다 ..  (83쪽)


 왼쪽오른쪽 앞뒤에서 밀어대는 사람들한테 밀리고 휩쓸리며 전철칸 창문 옆 벽에 몸이 쿵 하고 찧습니다. 저를 민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한테 밀렸을 테고, 그 사람은 또 그 옆에 있는 사람한테 밀렸겠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당신이 밀친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두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이 썅!’ 한 마디뿐(그러면 제 몸이 쿵 박은 전철 벽은 저한테 ‘아이 썅!’ 할는지?).

 밀리고 밟히고 팔꿈치로 얻어맞으면서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유혜자 옮김/숲속여우비,2009)라는 책을 붙잡습니다. 1988년에 처음 우리 말로 나온 책이 2009년에 스물한 해 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내다 버려서 외톨이가 된 아이를 스위스에 사는 글쓴이(도리스 클링엔베르그)가 열여덟 달을 기다린 끝에 맞아들인 이야기(1975년에)가 낱낱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예전에 한 번 읽었으나, 새로운 판으로 읽으면서도 가슴이 뻑적지근합니다. 책을 읽다 읽다 또 읽다가 눈물이 핑 도는데, 제 옆에서 저를 팔꿈치 뾰족한 데로 쑤시듯 밀치는 아가씨 때문에 아파서 핑 도는 눈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오징어떡이 되는 가운데에서도 가슴을 적시는 책을 읽을 수 있다니 놀랍고, 이렇게 책을 붙잡는 동안 허리가 아프고 옆구리가 결려도 고단하다고 느끼지 않으니 기쁩니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없이 그냥 서 있었다. 결국 아이의 손짓 발짓으로 우리는 아이가 그것들이 모두 자기 것이냐고 묻는 것을 알아챘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가 옷장에서 옷을 신나게 끌어내는 모습을 보는 일은 즐거웠다.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꺼내어 걸쳐입었다 ..  (38쪽)


 덜컹거리고 흔들리고 미어터지는 가운데 책을 읽자고 선뜻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고단한 전철길에서 겨우 자리 하나 얻었다면 몇 분이라도 눈을 붙이며 몸을 쉬고 싶다는 사람들 마음을 잡아끌기 어렵습니다. 저 또한 몹시 고단하면 책을 덮고 잠을 자니까요.

 언제나 고단함이 가득가득 쌓인 사람들한테 무슨 책을 쥐어 줄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스포츠와 연예 기사 가득한 공짜신문이 아니고는, 또 주식시세와 돈벌이 소식 담긴 경제신문이 아니고는, 어떤 읽을거리를 전철길 이웃사람한테 건넬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서대문역에서 내립니다. 밖으로 나오니 길에서 담배 피우며 걷는 양복쟁이가 둘 보입니다. 선 채로 담배를 피우든지, 걸을 때에는 담배를 끄든지, 저 혼자만 좋다고 담배를 피워서 쓰겠느냐 싶으나, 저이한테는 이렇게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머리와 마음에 가득한 골남과 짜증남을 털어내지 못할 테지요. 걸음을 재게 놀려 담배쟁이를 앞지르고 책을 펼칩니다. 일터에 닿기 앞서 몇 줄을 더 읽습니다. “내가 웅에게 ‘귀여운 오리’라는 노래를 열 번쯤 되풀이해서 불러 주었다. 웅은 환하게 웃으면서 내 노래를 열심히 들었다. 기름진 땅에 수많은 씨앗이 떨어지고 있다.(96쪽)” (4342.9.10.나무.ㅎㄲㅅㄱ)


 ┌ 《엄마가 사랑해》(도리스 클링엔베르그 씀,유혜자 옮김/숲속여우비,2009)
 └ 책값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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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98 : 책에 담는 땀방울, 책을 읽는 눈물방울

 얼결에 한글학회로 일을 나온 지 보름이 넘었습니다. 그 좋아하는 골목마실 헌책방마실 못하며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서 시달립니다. 그래도, 이 지옥철에서 비지땀 뻘뻘 흘리며, 그동안 못 읽고 미루어 둔 책을 하나하나 읽어치웁니다. 뒤늦게 마지막 쪽을 덮은 책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장만하던 몇 해 앞선 그때 다 읽었으면 내 삶과 생각과 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좋은 책을 일찌감치 읽었으니, 저는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또는, 이제서야 읽게 되었기에, 지난날에는 줄거리만 훑고 덮어놓았을 책을 곰곰이 되씹으며 새삼스레 붙잡을 수 있을까요.

 예나 이제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옥철에서도 책을 붙잡습니다. 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느긋하고 시원하고 따뜻한 곳에서도 안 읽습니다. 전철역 나들목에서 나누어 주는 공짜 신문을 조금 들여다보다가 멀뚱멀뚱 선 채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로서는 출퇴근길 세 시간이 몹시 아까워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발버둥이지만, 거의 모든 분들한테 출퇴근길은 지루하고 지겹고 고단해서 얼른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책 나온 소식과 인터넷책방 맛보기로는 퍽 눈에 뜨이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아침길에 1/3쯤 읽습니다. 읽다가 자꾸 짜증이 나지만 사람들한테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면서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내지 못합니다. 시베리아에 붙들린 서글픈 사람들 눈물방울을 담아내려고 한 책이라 하는데, 눈물방울은 그닥 보이지 않고 꽤 지루한 근현대 역사 이야기가 잔뜩 늘어집니다. 다른 책에 얼마든지 나와 있는 이야기를 굳이 덧붙여 실어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정작 해야 할 말이 이런 자질구레한 군말 때문에 묻히지 않느냐 싶어 안타깝습니다.

 저녁길에 어린이책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다가 코끝이 찡합니다. 눈물이 어립니다. 아침길에 느낀 아쉬움을 갚습니다. 하루 동안 쌓인 고단함을 풀어 줍니다. 밀리고 치이고 밟히는 가운데 눈물바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한동안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꽤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데, 글줄 하나마다 글쓴이 온힘과 넋이 담겨 있다고 느낍니다. “‘곧장 되돌아가!’ 나는 자신에게 명령했어요. 하지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이죠. 상쾌한 바람이 불고, 도라지꽃이 저 멀리까지 한없이 피어 있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그냥 돌아가다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어요.(9∼10쪽)” 지옥처럼 바뀌고 마는 전철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어서 벗어나고프다고만 생각하고, 나와 살을 비벼야 하고 코앞에 얼굴을 부벼야 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느끼기 어려울까요. 모든 회사원이 지옥철이 아닌 하늘나라 꽃길이나 구름길을 거닐면서 일터를 오갈 수 있다면, 모든 학생이 새벽길이나 밤길이 아닌 햇볕 따사롭고 바람 시원하며 싱그러운 나들이길을 거닐며 학교를 오갈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까 하고 생각에 젖습니다. 인천 서쪽 끄트머리에 가까워 오니 전철 손님이 많이 줄고, 다시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4342.9.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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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 삼천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19 ― 고단한 삶이라 아름답고, 끝낼 수 없는 노래
 : 조안 하라,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 책이름 :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 글 : 조안 하라
- 옮긴이 : 차미례
- 펴낸곳 : 삼천리 (2008.9.11.)
- 책값 : 18000원



 (1) 내가 발을 딛는 이곳에서


 5층짜리 한글회관은 1960년대에 온나라 사람들이 푼푼이 그러모은 돈으로 지은 집입니다. 한글학회는 이 집 5층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1970년대 첫머리에 지은 이 집은 그무렵 얼마나 높은 집이었는지 모르겠으나, 2010년을 앞둔 이즈음, 광화문 새문안길에서 한글회관은 아주 조그마할 뿐 아니라, 이웃 높다란 집에 막히거나 가려 잘 안 보입니다. 그예 파묻혀 있는 집이라 할 텐데, 어쩌면 이런 집은 허물고 높다랗게 다시 지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한글회관이 선 옆으로는 새집 하나 올릴 만한 땅이 비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비어 있었는지 모르는데, 빈땅 둘레로 높은 울타리를 쳐 놓아, 안쪽이 어떠한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한글회관 5층 뒷간에서 잠깐 바람을 쐬면서 내려다보면, 빈땅에는 곳곳에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뻗습니다. 제법 자란 나무가 있으니, 몇 해는 묵어 있는 땅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빈땅에서 무슨 지저귐소리가 들린다 싶어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참새가 떼를 지어 이리저리 노닐고 있습니다. 온통 아스팔트와 대리석과 시멘트로 덮인 광화문인데, 그 광화문 한복판이라 할 만한 자리에 빈땅이 남으면서, 이 빈땅에서 참새 같은 작은 목숨붙이가 숨을 쉬고 있다고 할까요. 이 조그마한 빈땅에서 새로 뿌리 내리고 씨앗 내리며 이룬 수풀이 살짝이나마 맑은 바람을 낸다고 할까요. 어느 나라 대사관 한 곳이 여기에 새집을 짓는다고 하던데, 부디 느즈막하게 미루고 늦추어 한참 나중에 삽질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삽질을 아예 안 하면 더 좋고) 하고 꿈을 꿉니다.
 





.. 빅토르는 가정에서 벌어진 이런 폭력 장면을 보면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조그만 어린애였지만 빅토르는 어머니를 부양하고 돕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심한 노동, 그 낙천주의, 그리고 온순함이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빅토르의 표현처럼 “어려운 일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빅토르는 밤마다 자리에 누운 채, 어머니가 죽도록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 집을 비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짐승같이 구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우곤 했다 … (어머니) 아만다는 이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노래를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는 집집마다 라디오가 있었고, 사람들이 주로 듣는 노래는 볼레로, 맘보, 탱고, 페루 왈츠, 멕시코 코리도 같은 직업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아직 미국으로부터 음악적인 침략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 직업가수 그룹들은 한두 개의 감상적인 칠레 민요들만을 프로그램 속에 끼워 넣은 채 끊임없이 노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지주들의 눈으로 본 농촌 풍경을 노래한 ‘관광객용 민요’였다. 푸른 하늘과 충직하고 멋진 목동들, 어여쁜 소녀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에서 지내는 태평세월 따위를 노래한 내용이었다 ..  (62, 70∼71, 99쪽)


 며칠 앞서, 하루일을 마친 다음 서울시청 앞에 잠깐 가 보았습니다. 마침 ‘돌아가신 대통령 일기’를 책으로 찍어 나누어 준다고 하기에 설렁설렁 나들이를 해 보았는데, 따로 일기책을 나누어 주는 곳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퍽 많은 사람들이 손전화로든 사진기로든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꽃을 바치는 줄은 길게 이어지고, ‘광장을 시민 품으로 돌려 주자’는 설문받기를 하며, 한쪽에는 큼직한 화면을 세워 놓고 옛 대통령을 기리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길 건너에서 바라볼 때에는 넓은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 소리에 막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온갖 모습으로 부대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딴 세상 딴 느낌이었습니다.

 서울시청 앞 너른터에서 빠져나와 전경숲을 살짝 지나 전철역으로 들어옵니다. 지옥철에 시달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전철 또한 참으로 딴 세상 딴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서로서로 악다구니처럼 짓눌리고 낑기는 채 시달리다 보면 사람과 사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매무새를 저절로 잃지 않으랴 싶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사람됨을 잃는 가운데 우리들 넋과 얼은 제자리를 놓치거나 쉽게 놓아 버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앞뒤옆으로 찡기는 가운데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지만, 신도림역부터 역곡역을 지나 부천역까지는 책을 펼치기 어렵습니다. 십 분쯤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나만 힘들겠나. 다들 힘들겠지. 그런데, 다들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려나.’ 






.. 1954년 말쯤 빅토르에게는 새로운 자각이 싹텄다. 어느 날 그는 일자리를 걷어치우고 얼마 안 되는 예금을 찾았다. 곧 합창단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칠레 북부 지방으로 민요를 조사하고 채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 아만다한테서 물려받은 음악적 유산을 재발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 그는 농사꾼을 우상화하는 일을 그만두고 농민들을 현실 속의 남녀들로 보게 되었다 … 불쌍한 빅토르, 그는 본의 아니게 지배계급의 경직되고 위선적인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던 것이다 …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빅토르는 같은 문제로 무척 근심이 많았고,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맥이 닿아 있는 노래를 여러 곡 작곡하게 되었다 ..  (79∼80, 92, 168∼169쪽)


 지난 8월 23일, 일민미술관에서 사진잔치 하나가 끝났습니다. 6월 19일부터 이어온 사진잔치에 저도 사진 열두 점을 내놓아 함께 걸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걸 때에는 인천에서 사진 여섯 점씩 두 손으로 나누어 들고 낑낑거리며 전철을 옮겨 타며 들고 갔습니다. 틀을 끼운데다가 테두리를 가늘게 해야 해서 뒷판을 두껍게 대다 보니 사진틀 하나만 들어도 무게가 만만하지 않았는데, 여섯 점씩 묶어서 들고 나를 때에는 팔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사진잔치가 끝난 뒤, 미술관에서 사진을 찾아가는 연락이 와서 가 보니, 택배나 뭘로 집으로 부쳐 주지 않고 손수 들고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녀석들을 또 어떻게 싸서 어찌 들고 가나 걱정을 하는데, 열두 점 가운데 석 점은 미술관에 기증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사진잔치를 앞두고 저를 생각해 주는 선배 한 사람이, “야, 미술관에서 사진을 팔거나 가지겠다고 하면 그냥 주면 안 돼. 네 마땅한 수고와 대가를 받아야 해.”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라 ‘미술관에서 사진을 사지 않고 기증을 바란다고요?’ 하고 물으려다가 그만둡니다. 열두 점을 도로 들고 돌아가기란 새삼스레 까마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석 점을 덜어(?) 주니 내 어깨와 팔뚝이 조금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삼십 분에 걸쳐 끈으로 친친 싸맵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광화문네거리 건널목을 건넙니다. 건널목을 건너는데 전화가 와서 사진은 오른손으로 모두어 들고 왼손으로 전화를 받습니다. 곧바로 집으로 들고 가기 무거워, 한글학회 한켠에 세워 두고 조금씩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나르는데, 길을 오가는 사람은 아주 많아도 어느 누구 도와줄 낌새는 없습니다. 아마, 제가 나서서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저기요, 이것 좀 같이 들어 주시겠어요?” 하고 말을 걸면 도와주었을까요. 한글학회 건물에 닿았을 때에도 건물을 지키는 아저씨는 그저 텔레비전 보는 데에만 바쁘고 손을 거들어 주지 않습니다. 

 




..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촌뜨기가 된 기분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경탄하면서 사방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런던의 명소들을 팔짱을 낀 채 섭렵했다. 칠레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고립된 생활에서, 부와 풍요의 절정에 서 있는 발달된 소비 사회의 한가운데로 밀쳐 넣어진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모든 뉴스를 생생하게 보도하는 컬러텔레비전과 상업광고의 일제 사격에 현기증이 났다(칠레에 관한 뉴스만 빠진 것 같았다) … “미국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것과 다른 몇 가지 결점을 빼고 본다면, 칠레는 아직 빵은 빵이고 흙은 흙일 수 있는 나라예요. 아직은 진짜 삶, 자연스러운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찾거나 다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결코 그들 식으로 ‘문명화’시키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지금 그대로의 칠레, 다듬어지지 않고 개방적이고 야성적인 칠레 쪽을 더 좋아합니다 ..  (212, 216쪽)


 그제는 집으로 가는 길에 신촌을 살짝 거쳤습니다. 맛이 간 렌즈를 고쳐 달라고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종로3가로 갈까 하다가, 인천 쪽으로 가는 길목이 한결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촌에 있는 ‘서비스센터’ 문을 들어설 때부터 이곳 일꾼들은 저를 뿔이 나게 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저처럼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살짝 얕보는 그런 말씨를 쓰는 일꾼이 아직 버티고 있는데다가(잘 차려입거나 비싸고 큰 장비를 어깨에 걸치고 있거나 양복을 입거나 한 사람한테는 깍듯이 구는), “저희 제품이 아니면 수리를 맡기실 수 없는데요?” 하고 내뱉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되쏩니다. “이봐, 고장난 렌즈를 달고 다니는 사진가가 어디 있어? 고장난 녀석은 가방에 넣고 다니지.” 되쏘는 말에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서비스센터라는 데를 찾아가면서도 렌즈 때문에 성이 바짝 나 있었습니다. 지난 열 해에 걸쳐 이 회사 장비를 쓰고 있는데, 어김없이 ‘제품보증기간 1년’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사진기며 렌즈며 말썽을 일으켜 왔습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하면서 삼만 원에서 오만 원이 들도록 다시 고쳐야 했습니다. 한두 번이었다면 그러려니 하지만, 사진기나 렌즈를 떨어뜨리지 않고 부딪히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말썽이 나면, 정작 제가 사진을 한창 찍고 있을 때 ‘찍어야 할 모습을 찍지 못하니’ 왈칵 짜증이 솟습니다. 사진기 회사에서는 ‘고장 수리’를 해주며 품값을 받을 생각일 테지만, 곰곰이 따지면 ‘사진기를 다루는 사람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손해를 입었’으니, 사진기 회사가 사진쟁이들한테 피해보상을 해 줄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얼마든지 다시 사거나 고칠 수 있지만, ‘사진쟁이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날 그때 찍어야 할 모습’은 그날 그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니까요.

 지난해까지는 제품 수리를 맡길 때 길어도 한 주였습니다. 이번에 맡기니 열흘쯤 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히유.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저보고는 열흘 가까이 사진을 찍지 말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나마 다른 렌즈 하나를 부랴부랴 장만해 놓아, 아쉬운 대로 사진찍기를 이을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제 사진길에서는 가슴시리고 고된 나날이 되고 맙니다. 




 (2) 내가 아이와 함께 사는 이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난 뒤로 늘 아기와 옆지기 세 식구가 함께 지내고 있는데, 보름쯤 앞서부터 아기 아빠는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몸이 됩니다. 되도록 아기가 잠든 채 조용히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처음 며칠 아기는 ‘아빠 아빠’ 하면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났다고 익숙해져서 안 찾을는지 모르지만, 또 하루하루 커 가면서 혼자서 노는 새로운 재미에 빠져 엄마까지 덜 찾는지 모르지만, 옆지기 혼자서 아이를 보는 일이란 퍽 고단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혼자서 아이 보고 집일 하기란 벅차고 고될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아기 엄마이든 아기 아빠이든 ‘무쇠로 만든 사람’이 아닌 터라, 아침에는 어느 만큼 기운을 차린다 해도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입니다.


.. 우리는 춤추는 방법만 배운 게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동작을 분석하여 춤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 첫 공연을 한 장소는 푸에르토몬트에 있는 어떤 체육관이었다. 그곳은 남극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마을 개떼들이 연습장에 드나드는 황량한 장소였다. 그러나 관중들은 다정했으며 열광적이었다. 어떤 종류의 무대 공연도 아주 희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공연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한 철저한 유럽식 레퍼토리는 누가 봐도 이런 환경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 여전히 우리들한테는 무용가들을 민중한테서 분리시키고 민중 스스로 춤에 참여하기를 꺼리도록 만드는 요소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현대무용은 더욱더 추상적인 표현으로 기울고 있었고, 동작을 위한 동작 자체의 연구에만 더 집착하는 경향이 지배하던 때였다 ..  (28, 43, 266쪽)


 사람들이 묻든 묻지 않든, 아빠나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삶이 고단합니다. 그러나 고단하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고단하면서 즐겁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스스로 좋아서 떠맡는 여러 가지 일거리는 제 살을 갉아먹고 제 목숨을 잡아먹습니다. 동네 도서관을 꾸리든, 혼자서 잡지를 하나 만들든, 책이야기를 쓰고 말 이야기를 쓰든, 골목 사진과 헌책방 사진을 찍든, 품과 땀과 시간과 돈을 바칩니다.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 한 번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기운이 쪽 빠집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드러누워 쉴 수 없습니다. 마실을 다닐 때에도 혼자 다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안거나 걸려 함께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하고 우리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를 먹이며, 아이가 누는 똥오줌을 치우고 걸레를 거듭 빱니다. 잠들 녘에는 모기를 잡느라 부산을 떨고,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려고 불을 다 끄고 드러눕다 보면, 아이가 잠든 뒤 이것저것 하려고 생각하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란히 잠듭니다. 이러다가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 새 하루를 열 채비를 하며, 다시 전철 타고 서울로 일하러 나가고, 또 같은 하루가 그예 되풀이되고.

 저로서는 퍽 여러 해, 여느 제도권 회사에 몸을 안 담고 지낸 나날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삶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여느 제도권 회사에 몸을 담고 돈 버는 일을 안 할 수 없도록 짜여 있습니다. 알바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침 일찍 일어나 제복을 갖춰 입고 대중교통이든 무어에든 시달리며 회사로 나아가, 저녁에 밤일까지 하느냐 마느냐로 갈팡질팡하다가 느즈막하게 다시금 대중교통이든 무어에든 들볶이며 집으로 돌아와 어수선한 집에서 가득 쌓인 살림거리를 돌봅니다. 이러는 쳇바퀴가 고단해 집밥을 해먹기보다 바깥밥 사먹기나 시켜먹기를 하게 되고, 자연스레 바깥일로 돈을 더 버는 데에 힘을 쏟을밖에 없습니다. 





 이런 쳇바퀴 나날은 어른이 되고 난 뒤에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은 유치원에 들거나 초등학교에 들 때부터 쳇바퀴가 됩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 무렵부터는 어김없이 학원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학교와 학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초등학생임에도 ‘해 보고 학교 가서 해 보고 집에 오는 삶’이 아닌 ‘별 보고 학교 가서 별 보고 집에 오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닐곱 살부터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거의 예순 해를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할까요. 하늘을 잊고 날씨를 모르며 이웃을 잃고 동네를 알지 못한다고 할까요.


.. 당시 기독교민주당 운동원들은 포블라시온에 들어와서 ‘마을 평의회’와 ‘어머니 센터’ 같은 것들을 결성시켰다. 내가 편견에 치우친 시선으로 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들은 예쁜 전등갓이나 장난감 인형 만들기를 배우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것 같다 … 빅토르는 그럴 때면 몹시 화를 내거나 친구의 부인들과 다투곤 했다. “자선 따위는 필요없어요! 여러분은 원래부터 사람이 살 만한 곳에 살 권리, 아플 때면 근처에서 쉽게 의사를 부를 권리,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권리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것을 넣어 둘 집조차 제대로 없는데, 전등갓 따위가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이에요?” ..  (172쪽)


 돌을 맞이하기 앞서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따라했습니다. 엄마가 몸이 안 좋아 게워내는 양을 따라하며 입에 넣은 먹을거리를 제가 손으로 꺼내기 일쑤였습니다. 엄마가 피리를 불면 옆에서 피리를 따라 붑니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제가 술병을 빼앗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해 보려고 합니다. 돌을 지난 뒤에도 따라하기는 이어집니다. 어설픈 시늉이지만, 기저귀를 저도 개고 싶어 하고, 지가 눈 오줌을 치우는 엄마아빠를 따라 지 스스로 마룻바닥 걸레질을 해 보고 싶어 합니다. 아빠가 일하느라 셈틀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길 때에는 저도 자판을 두들겨 보고 싶어 발버둥입니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엄마아빠가 밥먹는 모습만큼은 따라하지 않습니다.

 엄마아빠가 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하니, 아이는 틀림없이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하리라 봅니다. 엄마아빠가 고단한 일이 쌓여 짜증을 부르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게으름을 부린다면, 이 또한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할밖에 없다고 봅니다.

 뒷날, 아이가 제도권 학교에 가고 싶어하든 제도권 학교에는 안 가겠다고 하든 마찬가지입니다만, 아이는 학교에 갈 때에는 학교에서 어울리는 동무와 언니오빠와 교사들 매무새를 바라보거나 지켜보면서 제 매무새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를 배우기 마련입니다. 학교에 안 간다면 집이나 동네에서 부대끼는 어른과 또래 동무들 매무새를 살피면서 제 매무새를 추스를 테고요.

 학교에 간다고 더 낫다거나 학교에 안 간다고 좀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든, 스스로 갈피를 어찌 잡고 줏대를 어찌 세우며 주제를 어찌 마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이든 다른 집 아이이든, 제도권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굴 수 있습니다. 제도권 학교가 아닌 집배움을 하면서도 제 마음밭을 조금도 못 일굴 수 있습니다.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는 가운데 제 몸과 마음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며 제 둘레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살필 테고, 제가 디딘 터전을 곰곰이 헤아리겠지요. 마음밭을 조금도 못 일군다면 아무리 좋다는 책을 읽혀 지식을 많이 쌓았어도 제 몸과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제 이웃을 있는 그대로 못 살피며, 제가 디딘 이 나라 삶터를 꿰뚫어보는 눈길 또한 기르지 못하리라 봅니다. 






.. 아옌데 정부는 지나칠 만큼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고,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자유를 보장했다. 우익은 자기들이 탄압 속에 놓여 있으며 칠레의 언론 자유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허위 사실을 주장하며 국제적인 선전활동을 했다. 아옌데 정부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 사회주의 정부 때문에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가 굶주림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부인네들이 모두 나무숟가락으로 빈 냄비를 드럼 치듯 두들기면서 행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 행진은 완벽하게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바리오 알토에서 카드놀음이나 하던 게으른 야회복 차림의 여자들이 드디어 할 일을 발견했던 것이다 … 이들은 자기 집 냉장고 안에 값비싼 식료품을 가득 채워 놓고 살면서 평생 동안 냄비라고는 한 번도 제 손으로 건드려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주 잘 차려입고 살이 많이 찐 부인네도 이번에는 자기들의 특권인 안락한 생활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위험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영양실조로 충분히 자라지 못해서 왜소한 자기 자식들을 보거나, 진짜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아낙네들 눈에 그들의 모습은 구역질이 나고 모욕적으로까지 느껴졌다 … 이제 반대 세력들은 민주적인 절차로는 아옌데를 쫓아낼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316, 322∼323, 380쪽)


 아이는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월급쟁이 공무원이 될 수 있고, 훌륭한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농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농사꾼이 될 수 있고, 풀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농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을 보고 이름이 아닌 자연을 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고, 사람 아닌 돈을 보며 자연 아닌 이름만 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옆지기하고 저는 우리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 저 스스로 즐겁게 찾기를 바랍니다. 우리 몫은 아이가 튼튼하고 맑은 마음을 착하게 가꾸면서 제 몸마음과 이웃 몸마음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손길을 내미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어떠한 정치니 사회니 교육이니 종교니 문화니 예술이니 과학이니를 떠나, 아이가 나중에 대통령이나 시장을 누구를 뽑도록 이끌어야 하느니를 떠나,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앞일을 옳고 바르게 내다보는 삶을 붙잡아야 하며, 아이는 아이 깜냥껏 아이 앞일을 환하고 싱그럽게 내다보는 삶을 껴안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3)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 《빅토르 하라》로 






 1988년에 《끝나지 않은 노래》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뒤 스무 해가 지난 2008년에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가 나옵니다. 조안 하라 님이 쓴 《끝나지 않은 노래》는 제법 입소문을 탔다고는 하나,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든 애물단지처럼 잘 안 팔리는 책이었습니다. 읽는 사람이 드물었고, 읽고 즐겁게 삭여내는 사람은 훨씬 드물었습니다.


.. 그는 내가 마음의 긴장을 늦추고 서서히 녹아서, 과거에 대한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도록 도와주려고 애썼다 … “내 사랑이여, 너무 두려워 말아요.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서로가 깊이 이해할 수 없게 되거나, 서로의 소박한 마음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 나는 가슴으로 살아가지, 머리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  (113, 133쪽)


 돌이켜보면, 1988년에 처음 나온 《끝나지 않은 노래》는 아주 알맞춤하게 나온 책이었습니다. 1980년대를 국민학생과 중고등학생으로 보낸 저로서는, 1980년대 이때만큼 대중노래와 민중노래가 엄청나게 터져나오며 싱그럽고 아름다운 때는 다시금 없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 가수든 여자 가수든, 노래패를 이룬 사람들이든, 발라드든 트로트든 락이든 메탈이든 푸짐하게 넘쳐나던 노래가 아니었느냐 싶습니다. 군부독재 정권이 우리들을 세 가지 에스라는 허울로 쌈싸먹기하려고 노래 문화를 제법 풀어놓았는지 모르지만, 이러하든 저러하든 ‘제도권 안팎’으로 노래문화와 노래운동은 이때 비로소 봇물이 터지면서 우리 모두를 흐뭇하게 보듬어 주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래물결이 치는 가운데 《끝나지 않은 노래》 같은 책은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었고, 이 책에 담긴 목소리와 이야기는 노래판 사람들뿐 아니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픈 사람들한테 남다른 빛줄기로 스며들 수 있지 않았으랴 생각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노래는 노래대로 봇물이 터지고, 책은 또 책대로 봇물이 터졌습니다. 1970년대까지 꽁꽁 틀어막혀 있던 울타리를 어느 만큼 풀어 놓자, 노래뿐 아니라 갖가지 책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면서, 《끝나지 않은 노래》 같은 책한테까지 눈길을 뻗치고 손길을 내밀어 마음길로 받아먹는 분은 퍽 드물었습니다. 






.. 1965년, 칠레 북부 지방의 엘살바도르시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데 사용된 무기들이 ‘미국 원조’에 의해 제공되었던 것처럼, 시위 진압을 위해 훈련된 칠레의 특수경찰 부대 ‘그루포 모빌’ 역시 그 장비나 전술을 오로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파나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 훈련소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라틴에마리카 군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경찰들이 차출되어 와서 국내의 반란, 혁명, 또는 반체제 분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네 국민들과 맞서 싸우도록 교육을 받았고, ‘내부의 적’이라는 개념을 갖도록 세뇌되었다 … 대중매체들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선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신문 판매대에는 싸구려 미국 만화들이 판을 쳤다. 라디오에서는 온통 미국 팝송들이 쏟아져 나왔고, 텔레비전에는 미국의 삼류 멜로드라마들이 가득했다. 영화관들까지도 헐리우드의 3류 영화들만 상영하고 있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심하게 수탈당하는 사람들일수록 생활에서 라디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 칠레는 아직도 피노체트 집권 시기에 만들어진 헌법에 묶여 있다. 그 헌법에 따르면 상원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임명직 상원의원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들 중에는 군사쿠테타 당시에 피노체트의 ‘동지’였던 퇴역 장군들이 포함되어 있다 … 피노체트 정권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은 것은 피노체트의 소수 지지자 그룹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는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통해 이익을 거둬들였다 … 증오를 품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고 뉘우치는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는 마당에 그런 범죄를 용서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칠레는 아직도 극도로 양분된 나라이다 ..  (224, 226, 481∼482쪽)


 2000년대 오늘날은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 피노체트를 독재자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 나라 옛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정희 님이 일으킨 ‘5ㆍ16’은 달력에서 아예 기념일로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2000년대 오늘날 우리 삶터는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버젓이 외칠 수 있고, 꽤 많은 ‘박정희 지지자’들조차 “그래, 당신들 말마따나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먹고살게 이러쿵저러쿵” 하고 말할 만큼, 우리 말길은 아주 조금 트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2000년대 오늘날은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를 읽을 만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먹고살기 바쁜 짬을 내고, 돈벌기 고단한 하루하루를 덜어내며 만팔천 원짜리 두툼한 인문책 하나를 가슴에 꼭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콧물 질질 짤 마음밭이 마련되어 있을까요?


.. “힘들여서 개인의 영광을 쫓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한테서 이익을 얻는 가수들은, 노래란 자갈돌을 씻어내리는 물과 같으며 우리들을 깨끗하게 해 주는 바람과 같으며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더 나은 사람들로 변화되리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  (397쪽) 

 





 511쪽짜리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는 지난날과 견주면 꽤 많은 매체에서 소개글을 써 주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책이 새로 나온 지 어느덧 한 해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 1쇄가 다 팔리지 않았습니다. 2009년이 가기 앞서 2쇄를 찍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아리송합니다.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1쇄에는 오탈자가 꽤 많아, 이 잘잘못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삼백 군데가 넘는 곳을 짚어냈는데, 더 많이 짚어낸 분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이런저런 오탈자가 꽤 많기는 해도(좀 지나치게 많습니다), 빅토르 하라와 조안 하라 두 가시버시가 독재정권 칠레를 민주정권 칠레로 뜯어고치는 길에 어떻게 힘을 모두고 애썼는가 하는 줄거리를 톺아보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1쇄가 다 팔리고 2쇄를 찍는 기쁨을 맛보며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말마디를 바로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2.8.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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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생활하기
최광호 지음 / 소동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당신은 사진을 왜 찍습니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 최광호, 《사진으로 생활하기》


- 책이름 : 사진으로 생활하기
- 글ㆍ사진 : 최광호
- 펴낸곳 : 소동 (2008.5.15.)
- 책값 : 16000원



 (1) 사진기를 든 손과 사진기를 쥔 마음


 그동안 잘 쓰고 있던 렌즈가 지난 8월 15일에 망가졌습니다. 어디 떨어뜨리거나 부딪히지 않았으나 망가졌습니다. 이 렌즈는 지난해 6월 25일에 열 번째로 제 품을 떠난 사진기(도둑맞거나 잃거나)를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로 떠나보낸 다음 새로 장만한 녀석입니다. 꼭 한 해하고 한 달하고 열흘 만에 망가진 셈입니다. 그동안 이 렌즈로 이만 장 남짓 찍었는데, 값싼 렌즈치고 잘 버티어 준 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비바람이 몰아치건 춥건 덥건 언제나 제 땀을 먹으면서 지내던 사진기요 렌즈입니다. 어떤 이는 제 사진기와 렌즈를 보면서 ‘너무 막 다루고 있지 않으시나요?’ 하고 묻는데, 저는 사진기와 렌즈를 막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한쪽 어깨에 걸쳐 놓거나 한손으로 쥐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 자전거를 몰 때에도 목에 사진기를 걸고 언제나 찍을 수 있게끔 비옷 안쪽에 두고 있습니다. 몹시 추운 날 손가락이 얼어붙어도 맨손으로 사진기를 쥡니다. 장갑 낀 손으로 쥐는 느낌하고 장갑 낀 손으로 단추를 누르는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겨울철에 사진을 찍을 때에는 으레 사진기를 겉옷으로 감싸며 걷지만, 겨울에는 온몸과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는 채 사진을 찍으며 사진기도 함께 벌벌 떱니다. 손가락은 얼어붙더라도 사진기는 얼지 않기를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여름에는 웃옷 안쪽에 사진기를 모셔 놓으며 몸으로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사진기만은 젖지 말아 달라며 비손하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마구 눌러대는 사진은 싫어합니다. 꼭 찍어야 할 만큼만 찍고, 한 번 찍은 사진은 되도록 지우지 않으려 합니다. 고단하도록 돌아다닌다 해서 더 많이 찍어야 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고단하게 돌아다니면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디지털사진기를 쓰는 매무새는 필름사진기를 쓰는 매무새하고 같습니다. 사진 한 장 찍을 때마다 돈이 몇 백 원씩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허투루 사진을 날릴 수 없습니다. 또한, 허투루 찍었다가 날린다면, 이 사진을 지우느라 시간을 몇 초씩 버려야 하며, 이렇게 시간을 버리다 보면, 나중에는 잘못 찍은 사진을 지우느라 더 눈여겨보거나 들여다볼 ‘내 사진감’을 몇 초 동안 못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한 장을 찍건 열 장을 찍건 백 장을 찍건, 모두 ‘내 사진’이라 말할 수 있도록 빛과 셔터빠르기와 조리개값을 알맞고 올바르게 맞추어 찍어내려 합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까지 내 사진감이 내 눈길로 들어와 내 마음길을 거쳐 내 몸길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다스려 내려고 합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예쁜 햇살이 나를 반기기에 사진을 찍는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면 그 밥이 예쁘고 맛있어 또 찍는다 …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 사는 것이다. 사진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으로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나누는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꾸준히 고민했다. 그래서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사진 찍고 땀냄새와 생활이 배어 있는 사진을 찍자고 항상 주장해 왔다 … 나다운 방식으로 열심히 한다는 것은 작업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다운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산다, 사진으로 사는 삶, 살다 보니 내 것이 되어 있는 나다운 삶, 내가 나다운 바른 생각을 해야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아야 올바른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알게 되었다 ..  (4∼5, 148쪽)


 지난해에 사진기를 열 번째로 도둑맞고는 힘이 쪼옥 빠졌습니다. 그동안 쓰던 사진기는 영영 다시 쓸 수 없을 뿐더러, 내 꿈은 파노라마사진기 장만할 돈은 다시는 못 모으겠다고 생각하니 무엇하러 사진을 찍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시 허리띠 졸라매고 몇 해 동안 돈을 모으면 사진기며 렌즈며 알뜰히 되살 수 있겠지만, 그 몇 해 동안은 사진하고 헤어져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죽기’를 떠올리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돈 좀 있거나 힘깨나 씀직한 곳에 이래저래 편지를 띄워 ‘사진기를 빌릴 수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적금을 붓듯 다달이 조금씩 갚아 나갈 테니, 사진기를 ‘스물넉 달 갚기’로 팔 수 있는지, 렌즈를 ‘서른여섯 달 갚기’로 내어줄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름 안 난 사진쟁이라 그럴 수 있고, 저와 비슷한 까닭으로 사진기와 렌즈를 빌려 주십사 하는 분들이 많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때 옆지기는 ‘우리가 다른 일을 못해도 괜찮으니, 밥을 굶더라도 사진기부터 어떻게든 먼저 사자’고 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백팔십만 원짜리 캐논 엘렌즈에, 사십팔만 원짜리 니콘 에프엠 이번에, 또 디지털사진기까지 장만하랴 싶었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주머니가 후줄근하면 어찌할 길 없는 노릇입니다. 시무룩하니 며칠을 지내다가 목포에 사는 형한테 도와 달라는 아쉬운 이야기 담은 편지를 띄웁니다. 어려울 때마다 늘 도움을 받아 미안하지만, 또 도와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스스럼없이 또 도와줍니다. 외려 그만큼만 보태 주면 되느냐고 걱정해 줍니다. 우리 식구가 힘들 때마다 보태 주는 손길이 고맙고 미안해, 새 디지털사진기 하나(캐논 450디) 장만할 만큼 빌리고, 렌즈는 번들이 아닌 녀석 가운데 가장 값싼 녀석으로 장만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진을 다시 찍으니 ‘사진을 아예 못 찍던 때를 생각하면 숨통이 트이고 살맛이 납’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신나고 즐겁게 찍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이 렌즈로는 이만큼밖에 안 보이는구나. 예전 렌즈로는 훨씬 넓게 보였는데’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예전 렌즈로 찍었다면 한결 잘 나왔겠지’ 하는 생각마저 자주 품었습니다.


.. 그 인상을 기록하다가 보면, 그 기념사진을 모아 작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 꼭 이런 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며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내 생활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12, 47, 55∼56쪽)
 





 이렇게 한 달쯤 보내고 두 달째 접어들 무렵, 값싼 렌즈로 찍은 사진을 종이로 뽑아 보면서 ‘그럭저럭 잘 나왔네. 생각보다 꽤 잘 나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그동안 헌책방마실을 하며 찍은 숱한 사진을 하나씩 돌아보았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퍽 좋아하는 제 작품들(헌책방이나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다름아닌 바로 오늘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값싼 렌즈와 값싼 사진기로 찍었던 녀석이 아니었는가 하고 곱씹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사진기와 렌즈가 없더라도 내가 바로 이곳에 늘 있는 가운데 찍은 사진이기에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반가이 여기는 작품이 아니었느냐고 되씹습니다. 비록 파노라마로 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 사진에는 내 눈물과 땀방울과 웃음과 손길을 골고루 담아냈다 한다면,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껴안아 주고 사랑해 주지 않았느냐고 되돌아봅니다.

 1998년 1999년 2000년 무렵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춰내며 들여다봅니다. 나한테는 돈도 없었지만 사진기조차 없어서 후배한테 빌려서 찍었습니다. 신문사 지국에서 나와 출판사에 들어간 뒤에는, 두 번째로 일한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사진기를 한 대 선물해 주어 그 장비를 몹시 고맙게 여기며 다루었습니다. 그때에도 제 사진기에 달린 렌즈는 퍽 값싼 녀석이었고, 그 뒤 이태 동안 푼푼이 모아 다른 사진쟁이들 발가락만큼 따라가는 장비를 헌 것으로 겨우 하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값싼 장비를 남한테 빌려서 사진을 찍었든, 여러 해에 걸쳐 푼돈을 조금씩 모아 마련한 조금 괜찮은 장비로 사진을 찍었든, 제 사진은 늘 한결같았구나 싶습니다. 어떠한 장비를 쓴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진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또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 봅니다. 저한테 사진을 처음 가르쳐 준 분은 저나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장비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꽤 비싼 장비를 자랑하듯 만지작거리면서 수업을 들으면 당신이 미국에서 사진을 찍고 배우고 가르치던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라밖 사람들은 1회용 사진기로도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사진을 찍는데, 한국 사진기자들은 수천만 원짜리 사진기로도 기념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는다’고 말하며 나무랐습니다.

 우리들한테 저마다 제 사진감을 하나씩 붙잡고 이 사진감을 우리가 눈을 감는 날까지 놓지 말라는 말만 끝없이 되풀이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붙잡는 사진감에 따라 어떠한 사진기가 알맞거나 걸맞는지는 잠깐조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화각’이라든지 ‘광각-망원’ 렌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필름 인화와 현상이라든지, 잘라내기(트리밍)라든지 숱한 사진솜씨 이야기는 한 가지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여태까지도 이런저런 사진 잔솜씨는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 배울 때부터 갖출 까닭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사진솜씨 이야기는 ‘너희들이 집에 가서 시간 내어 책을 읽어 봐’ 하면서 끝냈습니다. 집에서 암실을 마련해 손수 만들어 보아도 좋지만, 그냥 사진관에 다 맡기고 길에서 사진기 부둥켜안고 너희들 사진감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까지 하곤 했습니다.
 





.. 기록이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찍는 사람도 대상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 한창기 사장은 그제야 껄껄 웃으며, ‘야, 최광호, 사진을 못 찍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를 볼 줄 모르는군’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자기에도 앞뒤가 있으니, 그것부터 공부하라며 집으로 데려가 도자기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건 이렇게 찍어라, 또 이런 건 저기서 이렇게 보아야 한다, 하는 식으로 사진을 찍는 방법 이전의 더 근본적인 관점과 생각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전통 한옥을 좋아했던 한창기 사장은 그 후에도,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시골마을에서 예쁜 한옥이나 초가를 지나치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집 대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집을 둘러보면서 건축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다 ..  (64, 75쪽)


 사진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스스로 사진감을 제대로 찾아내고 알아내면서 지치지 않고 사진길을 걷도록 이끌’ 구실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우리 스스로 하나씩 알아 가면서 마련하면 될 뿐이라는 생각이었을까요.

 열한 해 앞서 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봅니다. 그무렵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총장님께서 뒤에서 저지른 비리가 말썽이 되어 날이면 날마다 대자보가 춤을 추고 집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달에 걸친 집회와 싸움은 가끔 일간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끝내 말썽 많은 총장을 물러나게 하고, 당신이 저지른 잘못과 앞으로 이 대학교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들을 동판에 새겨 도서관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몇 해쯤 지나고 나니 모두들 이때 일을 잊어버렸고, 이때 학교에서 쫓겨난 분은 교육부장관 자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습니다. 도서관 앞에 세웠던 동판은 소리 소문 없이 어느 날 깨끗이 사라졌고, 후배들 어느 누구도 사라진 동판을 알지 못할 뿐더러, 열한 해 앞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한창 집회를 하고 수업거부까지 하며 강의실 걸상을 모조리 건물 밖이나 운동장에 쌓아 두고 있던 그때, 그 사진학과 강사(이제는 정교수가 됨)는 우리들한테 큰소리를 쳤습니다. ‘너희 대학교 총장 비리 문제는 잘 알고 있다. 나도 너희들 뜻하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회는 너희가 밖에서 알아서 하고, 내 수업은 내 수업이니까 내 수업을 안 듣겠다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두 시간짜리 수업이었는데 두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외치면서 수업을 하겠다고 버티었고, 그날 하루는 끝내 ‘해야 할 수업을 못했’습니다.

 이때 저는 강의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창문에 붙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아쉽게도 이때 찍은 필름은 잃어버렸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실랑이를 사진으로 담으며 조금 우쭐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실랑이나 이런 사진찍기는 오래도록 앙금으로 남아 뒷맛이 하나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일까. 왜 그날 그 수업을 굳이 꼭 하겠다던 그 시간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그때처럼은 안 하겠지요. 그무렵 우리한테 조금 더 넉넉하고 느긋한 마음이 있었다면,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학교 총장 비리 말썽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과 모든 수업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마지막 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수업을 안 듣기란 참 힘들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의실 수업이 아닌 길거리 수업이나 운동장 수업, 또는 다른 데에 가서 사람들이 안 보는 자리에서 우리 수업을 조용히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건네면서 타협을 볼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사진가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사진에 자신의 인생과 사진을 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사진 찍기 때문이다. 사진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사진으로 세상 이야기를 나누려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내가 있기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내가 보기에 한국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사진이 사람들의 삶과 생활과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따로, 작품 따로, 이런 식으로 겉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  (184, 186쪽)


 사진을 찍으며 늘 느끼고 배웁니다만,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델을 써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다 해서 우리 생각과 느낌을 환히 담아낼 사진을 얻지는 못합니다. 살아가는 흐름을 거슬러서는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찍히는 사람이나 건물이나 풍경 앞에서 우악스럽게 군다 해서 이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우리한테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늘 기다려야 하고, 뛰어들어야 하며, 어깨동무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흐름을 우리 스스로 고이 헤아리면서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사진을 찍는 바탕을 마련합니다. 이런 바탕을 마련한 다음 더 오랫동안 곰삭이고 껴안으면서 시나브로 좋은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잘 찍는 솜씨를 굳이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교실을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들을 때에도 사진 잘 찍는 이야기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다루는 우리 매무새를 배워야 합니다. 사진을 다루는 매무새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진기를 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학교나 강좌에서 듣고 배워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마음은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하고 같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마음은 내 사랑하는 사람 손을 어루만지는 마음하고 같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2) 사진이야기 《사진으로 생활하기》라는 책


 사진을 좋아하던 최광호 님은 어느새 사진을 배우려고 나라밖을 떠도는 사람으로 지냈고, 나라밖을 떠돌다 돌아온 한국땅에서 제 사진길을 꿋꿋이 가다가 젊은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습니다. 사진책 몇 권을 펴내기도 한 최광호 님은 ‘사진이 아닌 말’로 당신이 걸어온 사진길이 무엇이고 당신이 찍은 사진작품이란 무엇이며 당신이 붙잡은 사진기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조곤조곤 풀어 놓습니다.


.. 그 당시 여의도에서는 반공궐기대회가 자주 열렸다. 기독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모여 하느님과 예수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반공을 앞세우는가 하면, 군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여의도에서 마포 지나 종로로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나는 거기에 물들지 않을 나다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내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전국을 방황하기도 했다. 사진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나를 갈구했던 것이다 … 나는 일본에서의 생활이 사진가로서 최상의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멋있는 사람, 멋있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가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우리 나라에는 훌륭한 작품은 있는데 인생이 담긴 훌륭한 작가는 없다고. 그런데 일본에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사진가다운 삶의 방식이 드러나는 개성 있는 작가들이 많다고 ..  (23, 93∼94쪽)


 사진쟁이 최광호, 또는 사진학과 교수 최광호 님이 쓴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읽어 보면, 맨 마음으로 쓴 글과 함께 술 한잔 걸치며 쓴 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최광호 님은 맨 마음인 채로 사진을 찍는 날이 있을 테며 술을 걸친 채 사진을 찍는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맨 마음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날이 있었을 테며, 술기운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던 날이 있었겠지요.

 어느 때 어떻게 찍었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잘 찍었건 못 찍었건, 찍힌 모습 그대로 이야기를 남깁니다. 찍은 모양새 그대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이야기를 남기고,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이야기를 남깁니다.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은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랑을 사진에 담고,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으로 지내는 사람은 사랑이 메말라 쩍쩍 갈라진 가슴 그대로 사진에 제 느낌을 담습니다.

 감추려 한다면 얼핏설핏 감출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감추면서 내보이는 작품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농사꾼 밀레가 추운 겨울날 손이 덜덜 떨리고 얼어붙는 가운데 주린 배를 붙잡고 그린 그림에 밀레가 겪은 가난함이 안 배어 있을 수 없습니다. 외로움과 괴로움을 죽는 날까지 붙잡는 가운데 빛줄기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고흐 형제가 두 사람 힘으로 이루어 낸 그림에 둘이 겪은 외로움과 괴로움에다가 빛줄기가 안 담겨 있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 일구어 내어 목숨이 다해 세상을 떠난 최명희 님 작품 《혼불》에 최명희 님을 비롯한 둘레 사람들 넋과 삶결이 안 스며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생활하기》에는 사진하고 서른 해 남짓 살아가고 있는 최광호 님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도 담기고 믿음도 담기며 미움과 아픔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이 깃들고 아련함이 깃들며 애틋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이 돈벌 욕심에 돈, 돈, 돈, 하지 가난은 오히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든다 …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자신있게 살 때만이 이 모든 것은 가능하고, 부족하기에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돈이 부족하면 생활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돈 없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이 필요할 뿐이다 … 가끔 아마추어들이 촬영하는 장소에 가 보면 사진기를 보물 다루듯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진기 망가질 것이 겁나서 저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사진기에 사람이 눌려 있음을 느낄 때,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  (35, 245쪽)


 지난달에,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공씨책방〉에서 《환희와 우정》(조선일보사,1988)이라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틀림없이 예전에도 곧잘 만났을 사진책이 아닌가 싶은데 여태까지는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눈에 살며시 들어왔더라도 제 손은 가 닿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이런 겉치레 사진책이 무슨 사진책이라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꾀한 움직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 그늘진 자리를 감추는 이 같은 사진책은 더없이 씁쓸하고 안타깝다고 느끼면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사진책을 즐겁게 만지작거립니다. 무슨 꿍꿍이셈이 있든 없든, 사진은 사진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사진에 새겨 놓은 꿍꿍이셈은 이러한 셈속대로 읽어내면서, 나 스스로는 꿍꿍이셈이 아닌 참사랑과 참믿음을 보여주거나 나눌 수 있도록 참삶을 가꾸며 참사진을 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올봄, 서울 봉천동(올해부터인가 ‘낙성대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봉천동’이라는 이름은 가난하다는 느낌이 사람들한테 콱 박혀 있다고 하면서)에 있는 헌책방 〈흙서점〉에서 《박상원-a monologue》(에디션 뿔,2009)라고 하는 사진책을 하나 만났습니다. 연기를 하는 박상원 님이 사진책을 펴냈다고 하니 뜻밖이면서 놀랐습니다. 펴낸 곳은 ‘웅진출판사 임프린트’라고 하는 곳입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 보면서, ‘이분은 이런 사진을 좋아하며 찍는구나’ 하고 느끼는 가운데, ‘이와 같은 사진이 이렇게 좋은 꾸밈새로 세상에 또 하나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 하는 틀로 따져서 이 책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이만한 사진이 아니고서는 사진책으로 내 주기 어려운 우리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다 다름(다양성)’이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고, 우리 세상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왜 사진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은 사진을 왜 나누고 싶어서 사진을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 구경꾼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남을 통해 자기 삶을 느낄 수 있기는 하나, 자신의 외로움과 자신의 이야기는 표현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의 삶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자신의 외로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  (236쪽)


 올 1월에는 서울 동묘앞에 있는 헌책방 〈영광서점〉에서 1960년대 첫머리 국민학교 졸업사진책을 세 권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두 권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국민학교 것인데, 파주에 있던 국민학교는 1960년대에 ‘수학여행을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 자취가 졸업사진책 뒤쪽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50년대 끝무렵에 ‘각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공원으로 나들이를 하면서 멕아더동상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몇 해 뒤에는 수봉공원으로 옮겨갔지만 이맘때까지는 자유공원에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유공원에서 멕아더동상 앞에 서면서 묵념을 하고 놀이기구를 타면서 신나게 놀았다고 할까요. 그 다음에는 연안부두나 만석부두나 월미도 쪽으로 가서 배를 탑니다. 경기도 파주라면 뭍만 있는 땅이요 산과 들밖에 없을 테니, 인천 앞바다처럼 놀이기구에 ‘반공교육 하기 좋은 멕아더동상’에다가, 여기에 갯벌에 바다에 배까지 고루 있는 곳은 수학여행을 보내기에 딱 어울릴 만한 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이 졸업사진책을 뒤적이면서 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젊은 나날을 보내던 인천 한구석을 조용히 돌아보았습니다. 벌써 예닐곱 달이 된 이야기이지만, 이 졸업사진책을 만나던 그날은 헌책방 골마루 한쪽에 선 채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이 졸업사진책은 그날 장만한 뒤로 여태껏 제 책상맡에 놓고는 가끔 들추어 봅니다. 들추어 보고 다시 덮을 때마다 ‘사진은 뭘까? 내 사진은 뭘까?’ 하고 거듭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을 사진으로는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는 사진이 아닌 신선한 느낌이 살아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일상 생활에 대한 감동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변 현실을 보며 감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보던 사물을 새롭게 볼 줄 아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 좋은 앵글이란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가장 잘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시각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  (270쪽)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지난해 여름에 장만했습니다. 서울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장만하던 그날부터 즐겁게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조금조금 뜯어먹으며 읽던 지난 겨울날, 살림집 물이 얼어붙었다가 녹았는데, 물이 녹으면서 그만 수도꼭지가 터져 부엌이며 마루며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은 물바다에서 옴팡 젖어 버렸습니다. 물바다가 된 날 꽤 많은 책이 젖거나 퉁퉁 불어 못 쓰게 되었는데, 《사진으로 생활하기》는 그나마 아주 버리지는 않았고, 책장을 하나하나 닦아내고 며칠에 걸쳐 말리니 그럭저럭 넘길 만큼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바다를 치르며 적잖은 책을 버리게 되니, 젖었다가 살아난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넘기기 싫어졌습니다. 다른 다친 책들과 망가진 책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더군요.

 그렇게 반 해쯤 한쪽 구석에 팽개치듯 꽂아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지난달쯤, 도서관에 나들이를 온 어느 분이 이 ‘물 먹고 퉁퉁 불어터진 책’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두어 시간 동안 이 책 하나만 읽고 돌아가더군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말끔하고 깨끗하고 번듯한 책이 가득가득 있는데 어쩜 저 책 하나만 그리 알뜰하게 여기면서 들여다본담?’

 손님이 돌아가고 난 뒤 퍽 오랜만에 《사진으로 생활하기》를 끄집어 냅니다. 끄집어 내는 바로 이때, 지난겨울 물바다가 떠오르고, 그날 버리게 된 아까운 책들이 떠오릅니다.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할 책들을 눈물과 함께 떠나보낸 일이 새록새록 가슴을 쑤십니다. 그러나, 떠나간 책을 놓고 아파할 수만은 없습니다. 살아남은 이 책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등돌린 채 지낼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읽다가 만 대목을 찬찬히 훑습니다. 밑줄을 그었던 대목은 두 번씩 읽고, 밑줄을 안 그었던 몸글은 천천히 읽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전철길에 금세 다 읽어냅니다. 이제 책을 덮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을 차례입니다. 며칠쯤 더 책상맡에 올려놓고 있은 다음 책꽂이에 꽂아 놓을 생각인데, 아무래도 저한테는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그날 그렇게 물바다에서 반쯤 죽다가 살아나 주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곰곰이 되읽으면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난해에 다 읽었다면 더 좋았을는지 모르나, 이제 와서 다 끝마치니 한결 낫지 않느냐 싶습니다. 마침, 사진기며 렌즈며 여러모로 말썽을 부리는 요즈음, 값싼 장비를 붙잡고 사진길을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까를 놓고 걱정인 요즈음, 다른 어느 책보다 이 책 《사진으로 생활하기》가 저한테 좋은 길잡이나 이슬떨이, 아니 길동무나 사진동무가 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최광호 님은 “사진으로 생활하기”이고, 저는 “사진으로 살아가기”입니다. 사진쟁이자 사진학과 교수님으로서는 한자말 ‘생활’을 넣고, 우리 말 지킴이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토박이말 ‘살아가기’를 넣습니다. 아마 어느 분은 ‘life’나 ‘living’이라는 말마디를 넣어서 “사진 삶”을 가꿀 수 있겠지요. 어느 이름이든 우리가 걷는 길은 사진길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우리가 이루려는 삶은 사진삶입니다.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걸으며 어떤 모습 사진삶을 일구든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사진밭입니다. (4342.8.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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