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점의 문화사
이중연 지음 / 혜안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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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 없애면 책이 책다울 수 있을까
 [잠깐 읽기 48] 이중연, 《고서점의 문화사》


- 책이름 : 고서점의 문화사
- 글 : 이중연
- 펴낸곳 : 혜안 (2007.3.15.)
- 책값 : 14000원


 (1) 우리 나라에서 ‘책’과 ‘헌책방’이란?


 출판사 ㅌ 일꾼 두 분하고 헌책방 마실을 합니다. ㅌ이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하나 내기로 하고 용산 어느 밥집에서 만난 다음 이야기를 조금 하고 나서 헌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오늘날 서울 용산은 아이파크몰이니 무어니 하면서 아주 복닥복닥 시끄럽습니다. 제가 모르던 지난날에 용산 앞터에 커다란 저잣거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무렵에는 용산에도 헌책방이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곳 용산에서 1975년부터 터를 내린 헌책방 〈뿌리서점〉 아저씨 말씀을 들으면, 원효로 쪽에 헌책방이 제법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도 원효로에서 한 해쯤 있다가 지금 자리 둘레로 왔고, 그곳에서 스무 해 남짓 책방살림을 꾸렸으나, 건물임자가 더 높은 임대삯을 받으려고 내쫓는 바람에 지금 자리로 옮겼습니다.


.. 지하철공사가 진행되자 동대문 고서점들은 문을 닫거나 활동무대를 옮겼다. 40∼50곳에 이르던 책방은 1974년에 불과 세 곳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지하철이 개통되자 모두 없어졌다. 보문사ㆍ교문사ㆍ희문사ㆍ경안서점 등은 청계천으로 옮겼다. 1970년대에 그렇게 고서점의 동대문 시대는 저물어 갔다 … 《샛강》의 설명은 자세하다. 시장에 건물이 새로 세워지자 연고권을 가지고 다시 샀지만 빚이 불어난다. 그런데 앞뒤의 가게가 모두 책과는 거리가 먼 가게들이었다. 당연히 책방은 장사가 안 된다. 결국 시내로 들어갔지만 6개월도 안 돼 주인의 횡포로 쫓겨나고 급기야 어느 집 처마 밑에 차양을 달고 책방을 꾸민다. 하지만 근처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책방이 도로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3대 헌책방의 전주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다 ..  (246, 324쪽)


 헌책방에 함께 찾아온 두 분은 바쁜 틈을 쪼개어 책 구경을 즐깁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에 살짝 맛보기만 합니다. 저와 옆지기는 번갈아 아기를 안고 어르고 재우면서 책을 살핍니다. 아기도 힘들고 옆지기도 힘들어 하기에 책 구경은 얼마 못합니다. 살짝 책 구경을 하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열 권 남짓 골랐습니다.

 책값을 셈하고 나오려는데, 〈뿌리서점〉 오랜 단골 아저씨가 들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단골 아저씨는 이곳 〈뿌리서점〉을 서른 해 가까이 다니신 분입니다. 모르지만 서른 해가 넘었을는지 모릅니다. 열일곱 해 앞서 제가 이 헌책방에 처음 찾아왔을 때에도 아저씨는 열 몇 해째 이곳을 드나들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세 해 뒤면 헌책방 〈뿌리서점〉 스무 해째가 되어, 드디어 이 헌책방에서 “저도 이곳 단골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는데, 단골 아저씨는 몇 해 뒤에 ‘마흔 해 단골’이 될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이곳 〈뿌리서점〉에 처음 드나들 무렵에 열 몇 해째 드나들던 할아버지가 꽤 있었는데 요즈음은 거의 만나뵙지 못합니다. 제가 스물을 갓 넘기던 때에 나이 일흔이나 여든쯤 되면서 당신이 제 나이였을 때부터 책방을 드나들었다고 하셨는데, 살아 계시다면 아흔이나 백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그 긴 세월을 걸쳐 읽고 갈무리한 책을 집안에 고스란히 남기고 흙으로 돌아가셨겠지요.


.. (1700년대 조선) 정부가 처벌한 대상은 세 갈래였다. 첫째 책을 소지한 사람, 둘째 책을 전파한 책쾌, 셋째 중국에서 책을 들여온 역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측은 책쾌였다. 책을 보거나 지녔던 모든 사람과 역관 일반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책쾌는 모두 체포되어 벌을 받도록 조처되었다 … 책쾌에 대한 조처는 극단적이었다. 곧 도성 안에 책쾌가 보이지 않도록 지시하고, 만일 책을 가지고 왕래하는 자가 있으면 포도청에서 수사하도록 명했다. 책쾌는 범죄집단처럼 다루어졌다 … 책쾌 9명이 모두 문제서적을 거래하지는 않았는데, 앞서 보았듯이 모두 효시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책 소지자보다 유통인을 더 문제 삼은 것이다 … 박인환의 선택은 서점의 활로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사상의 정치적 대립이 출판ㆍ문화계에도 영향을 주면서 금서조처, 압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 1947년 말에 서울에서 대대적인 금서 압수 수색이 진행되었다. 종로에 있던 갑문당 서점에서는 75종이 압수되었다 ..  (60∼64, 196∼197쪽)


 헌책방을 처음 알아차리며 다니던 고등학생 때에는 돈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아예 없지 않았습니다. 제 둘레에 돈을 펑펑 쓰던 동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으레 돈이 얼마 없기 마련’이라고 느꼈으며, 책은 한 권이나 두 권씩 사서 읽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저는 고등학생 때에도 신문배달이나 과외 같은 알바를 학교 몰래 조금씩 하며 푼푼이 돈을 모으곤 했기 때문에, 책을 여러 권씩 사읽는 주머니는 그리 빠듯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생이던 1990년대에 제가 즐겨 사읽던 책은 ‘헌책방에서 500원 하던 손바닥책’입니다. 때때로 700원짜리 시모음을 사서 읽고, 더러더러 1500원이나 2000원짜리 인문책과 소설책을 장만했습니다.

 2009년에 접어든 오늘에는 손바닥책 한 권 값을 1500원쯤 칩니다. 푼수로 치면 세 곱일는지 모르나, 부피로 치면 거의 안 오른 셈입니다. 더구나 우리 세상은 온통 ‘더 값싼 물건을 더 많이 사서 쓰기’에 물들어 있는 만큼, 새책이라 할지라도 인터넷책방에서는 40퍼센트까지 깎아서 팔기도 하고, 마일리지까지 치면 60%나 깎아서 파는 책이 있기도 합니다. 하기는, 텔레비전 홈쇼핑에서는 60∼70% 깎아팔기가 으레 이루어지고 있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한국땅에서 책은 책이라는 구실을 잃어버리고 소비재가 되었다고 할까요. 더 값싸게 많이 장만해서 책꽂이 그득그득 꽂아 놓은 다음 곶감 빼어먹듯 읽는 지식덩어리가 되었다고 할까요.

 새책이란, 겉에 찍힌 책값에 따라 사고팔려야 올바를 텐데, 1만 원이 찍힌 책을 1만 원을 온돈으로 치르고 사면 “난 꼭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야!” 하고 말하는 판입니다. 이런 가운데 헌책방 헌책 또한 제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뭐가 새책이고 뭐가 헌책인지 가누기 어렵습니다.

 깊이 파고들면, 아무리 새책이라 할지라도 ‘지난날 쓴 글이 오늘날 새 종이에 새 잉크로 찍혀 나왔을’ 뿐이긴 합니다만, 이리하여 새로 나오는 책에 담기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때로는 100 해 앞선 때 이야기이거나 500 해 앞선 때 이야기이기도 해요.


.. 일제강점은 위생담론과 함께 조선의 상점 모습을 해체시키는 형태로 다가왔고, 고서점의 서적유통 모습도 일본인에 의해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쿠랑도 서울ㆍ시골의 골목길이 좁고 지저분하다거나 장터가 먼지투성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책 유통과 관련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특히 고서점의 경우 가게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불결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위생담론을 펼치지 않았다 … 일반적 상점 이야기지만, 고서점의 경우에도 일본인의 위생담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를테면 노점 헌책방과 잡화점식 고서점을 주로 다녔던 어떤 일본인은 사본ㆍ활자본이 가끔 나오는 한 가게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곧, 주인이 “여름 더울 때에는 파리가 입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낮잠”을 잔다거나 주인 옆의 ‘변기항아리’를 열면 ‘이상한 훈풍’이 와서 도망을 가야 한다는 따위다. 그는 이 가게를 ‘조선답다’고 했고 ‘사랑할 만한 가게’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싸게 사기 때문이지, 조선답다는 수식은 비상시와 떨어진 가게를 남겨둘 필요가 없다는 말에 의해 무색해진다 … 쿠랑은 그 모습보다 가게에서 다루는 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가 청결ㆍ불결, 입구의 높낮이, 하수덮개 따위를 잣대로 삼을 때, 다루는 책의 질과 관계없이 작은 초가집의 고서점은 점차 자본과 개발에 밀려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  (106∼108쪽)


 저 스스로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이름으로 책 하나를 쓰기도 했지만, 모든 책은 틀림없이 헌책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책은 새책입니다. 그저 모든 책은 책일 뿐입니다.

 한 사람을 놓고 헌 사람과 새 사람으로 가를 수 없고, 할매 할배라고 헌 사람이 아닌 만큼, 책은 그저 책일 뿐입니다. 겉보기로 늙어서 늙은이일 뿐이요, 겉보기로 낡아서 헌책일 뿐입니다. 한자말로 ‘고서’라 적는 ‘옛책’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한테는 얼마나 읽을 값이 있느냐를 살펴서 ‘나한테 좋은 책’인가 아닌가를 느끼면 됩니다. 우리한테는 얼마나 갈무리해 놓을 뜻이 있느냐를 헤아려서 ‘나한테 알맞는 책’인가 아닌가를 돌아보면 넉넉합니다.

 대통령이든 청소부이든 똑같은 사람이고, 경찰이든 시위대이든 똑같은 사람입니다. 교사이든 학생이든 똑같은 사람이며,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똑같은 사람입니다. 높은 사람이 없고 낮은 사람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 없고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빚어내어 즐기거나 나누는 책도 매한가지라, 나한테 걸맞는 책이냐 아니냐가 갈릴 뿐입니다.

 다만, 돈을 밝히는 사람이 있듯이 돈을 밝히는 책이 있습니다. 이름값 높이려는 사람이 있든 이름값 앞세우는 책이 있습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듯이 권력을 움켜쥐려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옳게 살아가려 한다면 옳은 목소리 담은 책에 눈길이 갑니다. 우리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려 한다면 착한 삶 담은 책에 손길이 갑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려 한다면 아름다운 꿈 깃든 책에 마음길이 갑니다.

 요즈음 잘 팔리는 책을 돌아본다면, 우리들은 아무래도 돈을 밝히고 이름값을 높이고 싶으며 권력을 얻어서 내 밥그릇을 꾹꾹 눌러 채우면 될 뿐이라고 여기지 않느냐 싶습니다.


.. 한글책을 다루는 고서점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때문에 일경의 주목을 더 받게 되었다. 금서목록을 고서점에 통보하는 이면에서 일제는 고서 거래가격까지 정해 유통을 통제하려 했다 … 일제는 고서점에서 불온서적이 거래되는 것을 통제했지만, 고서점은 그에 상관없이 그들 책을 매매했다. 단지 수요를 따르려는 뜻 말고도 고서점 주인이 한 권의 책에 담긴 저항의 전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시파쇼체제 하의 조선에서 판금서적은 급증했지만 고서점은 금서의 유통경로로 자리를 잡았다. 구하기 힘든 금서는 고서점에서 찾는 게 독서인의 상식이었다 … 한글책만 다루는 서점에 대한 일경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일본책을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노선변경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한글책을 계속 유통시키기 위함이었다 … 역사책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고양해쓴데, 그 구입 경로는 고서점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역사라는 표현을 볼 때 그 책은 금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읽기는, 일제에 대한 독서의 저항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  (84, 87, 89, 90, 98쪽)


 더위를 식히려고 부채질을 하며 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이야기책 《고서점의 문화사》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경찰이 벌인 ‘불온도서 빼앗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일 ‘불온도서 빼앗기’는 해방 뒤에도 있었고, 이승만 때와 박정희 때와 전두환 때와 노태우 때와 김영삼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 때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이명박 때에도 되풀이됩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압니다. 우리 나라에 ‘국가보안법’이 일본제국주의자 총칼로 들어선 다음부터 어느 한 해이고 보안경찰들이 ‘헌책방마실을 하며 불온도서 찾기’를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판이 끊어져 버린 책이라 할지라도 이삿짐에서든 도서관에서 내다버린 책에서든 ‘혁명과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좀더 거세게 외치는 줄거리’ 담긴 책은 헌책방에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이든 독재정권 때이든, 인문사회과학책방 일꾼뿐 아니라 헌책방 일꾼들은 이러한 책들한테 ‘제 임자 찾아 주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헌책방 일꾼들은 이런 책에 어떤 줄거리가 담겼는지 모른다 할지라도, ‘책을 불사르’거나 ‘책을 찢어버리’는 끔찍한 우격다짐만큼 잘못된 생각과 몸짓은 없다고 느낍니다. 왼쪽이라고 더 낫지 않으나 오른쪽이라고 덜 낫지 않으며, 왼쪽이라고 나쁜놈이 아닌 가운데 오른쪽이라고 좋은놈이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고, 책은 모두 같은 책입니다.

 언제나 ‘책을 받아먹는 사람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고자 한다면, 아무리 엇나가는 줄거리 담긴 책을 읽더라도 바르게 꾸리는 삶을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뚤어지게 살고자 한다면, 아무리 올바른 줄거리 담긴 책을 읽더라도 비뚤어지고야 맙니다. 우리 나라에서 책이 책답게 뿌리내리며 이어오기 힘들고 헌책방이 헌책방답게 자리잡으며 대물림하기 힘든 탓은,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옳은 삶을 붙잡거나 즐거운 삶을 함께 나누려 하는 뜻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2) 몹시 아쉬운 책 《고서점의 문화사》


 2007년에 이중연 님이 펴낸 《고서점의 문화사》는 책이름 그대로 ‘고서점’이라는 곳이 한국땅에서 어떤 문화 노릇을 하면서 어떠한 발자취를 남겼는가를 톺아보려고 하는 책입니다. 이중연 님은 《책, 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2005)라든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2001) 같은 책을 꾸준히 펴내면서, 우리네 ‘책 문화 역사’를 밝히고자 하는 분입니다. 이참에 낸, 아니 이태 앞서 낸 《고서점의 문화사》는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책방’ 발자취를 다룬 책입니다. 더욱이, 책방 가운데에서도 여느 새책방이 아닌 ‘헌책방’을 다룬 책입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무렵, 온갖 매체에서 이 책을 여러모로 칭찬하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 또한 책이 갓 나왔을 때에 장만해 놓았습니다. 다만,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지루하다고 느껴 덮어 놓기 일쑤였고, 덮어 놓았다가도 ‘고서점’을 다루는 책이라서 섣불리 집어치우거나 책꽂이에 쑤셔박지 못한 채 이태를 보냈습니다.


.. 신간 서적이 많이 간행되지 않았던 해방 직후에는 헌책방에 조선에 대한 문화 수요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경로가 되었다 ..  (290쪽)


 인천에서 개인 도서관을 열어 놓고 이럭저럭 자리를 잡는 가운데 우리네 도서관 문화와 흐름을 함께 돌아보는 동안, 이 책 《고서점의 문화사》도 새롭게 생각해 보려고, 지루함을 무릅쓰고 새삼스레 집어들어 끝까지 읽어 봅니다. 제가 개인 도서관을 연 2007년부터 ‘도서관진흥법’이 바뀌어, 저처럼 책만 많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개인도서관을 열지 못하도록’ 바뀐 한편, ‘도서관’이라는 이름조차 못 쓰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대학교에서 도서관학과를 나와 사서자격증을 손수 따거나 사서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쓰지 않으면 도서관을 열 수 없다는 조항까지 생겼습니다. 도서관위원회라든지 무슨무슨 시설과 설비라든지 하는 숱한 조항을 들여다보면, 개인힘으로 도서관을 열자면 수억을 들여 새 건물을 짓지 않고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데, 이 나라에 ‘돈과 책을 함께 넉넉히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푸념을 좀 늘어놓았습니다만, 이런 푸념을 늘어놓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는 그만큼 책 문화가 없고, 책을 보는 문화가 없으며, 책을 생각하는 문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책방과 인문학책방과 만화책방을 즐겨찾는데, 우리 나라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동네에서 가깝게 찾아가서 즐길 만한 ‘새책방’이 몇 군데 안 남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서관은 더욱 꿈도 못 꿉니다. 기적의 도서관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큰돈 들여 전국 몇 군데에 새로 지어 주기는 하는데, 우리한테 ‘건물이 없’어 도서관을 못 갖추겠습니까. 전국 곳곳에 빈 건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시에는 번듯번듯한 새 건물도 많으며, 시골에는 문닫은 학교도 많습니다. 고갱이는 무엇인가 하면, ‘널린 건물을 가득 채울 만한 책이 모자라다’입니다. ‘널린 건물에 한 번쯤 책을 채운다’ 할지라도 새롭게 나오는 책들을 꾸준하게 장만해서 갖출 ‘책 사들이는 돈이 모자라다’입니다. 그리고, 새책이라 하여도 쉽게 판이 끊어지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판 끊어진 책을 찾아야 할 텐데, 도서관 사서 가운데 헌책방마실을 힘껏 하면서 ‘사람들한테 빛과 소금과 웃음과 눈물이 될 책’을 찾아 주려고 팔벗고 나설 분이 드물다는 아쉬움입니다.


.. 그(민병산)는 마음 놓고 책을 살 정도로 돈이 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만일 주머니가 무거웠다면 동대문에서 헌책을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전기 수집에 나서게 되었다. 희귀한 고서, 국학 관련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고, 한 권 값이면 다섯 권 여섯 권을 구할 수 있는 싼 전기 책을 수집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  (230쪽)


 이와 같은 세상 흐름을 돌아볼 때, 우리한테는 “고서점 문화사”뿐 아니라 “새책방 문화사”와 “동네책방 문화사”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책이 갈래마다 하나씩 있으면서, 우리네 ‘문화관광위 소속 국회의원’ 나으리께서 읽어 주셔야 할 터이며, 전국 공무원과 교사들이 이러한 책을 읽으며, 마을과 학교마다 ‘작은 도서관과 책방’ 마련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헌책방 문화사”를 하나 다룰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우랴 싶습니다. 가난한 책벌레한테든, 이냥저냥 싼 잡지 찾는 뜨내기한테든,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한테든, 세월과 세계를 넘나드는 온갖 책을 골고루 갖추면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헌책방이라는 문화쉼터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생각합니다.


.. 조선학 연구ㆍ확산은 고서의 발견ㆍ수집ㆍ확산과 함께했다. 한 권 책의 보존ㆍ발전에서 조선학이 전망되었다 … 최남선, 양주동, 방종현, 이희승, 이병기, 조윤제, 김태준, 이병도, 황의돈, 이인영, 김양선 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 국문학자ㆍ국어학자ㆍ국사학자ㆍ기독교사가를 아우른 공동 기반은 고서 수집이다 … 경성제대에서 가장 먼저 조선어문학을 전공했고 조선어문학회의 좌장이라 할 조윤제는 언론에 〈고서왕래〉를 연재할 정도로 전문적인 고서 수집가였다 ..  (204, 207, 216쪽)


 인문학 연구책인 《고서점의 문화사》는 ‘읽는 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우리네 ‘옛책(고서) 다루는 가게’ 가운데 몇 군데를 살포시 짚어 보는 가운데, 소설책 한 권에 나타나는 ‘3대 헌책방 발자취’를 아주 살짝 ‘독후감 쓰듯’ 짚으면서 끝맺습니다. 처음부터 “헌책방 문화사”까지 아닌 “고서점 문화사”로만 못을 박은 탓인지 모르나, 우리 둘레에는 짧으면 서너 해, 길면 예순 해 가까이 헌책방 살림을 꾸린 분들이 아직 많이 살아 있고, 현장에서 땀흘리고 있습니다.

 대구에는 1951년부터 헌책방을 꾸린 할아버지가 오늘도 부지런히 땀을 흘리고 있고, 인천에도 1951∼52년에 ‘길바닥 헌책방’부터 해서 이제는 번듯한 가게를 꾸린 할아버지가 여러 분 살아 있으면서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산 보수동 1세대로서 오래도록 그 골목을 지켜 오던 할아버지 한 분은 지난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 《고서점의 문화사》는 얼마든지 이러저러한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더 살피고 더 헤아렸다면, 테두리를 ‘고서점’으로만 맞추어 놓았다고 해도, 딱딱한 논문을 넘어설 책으로 꽃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딱딱한 논문이라 할지라도 줄거리가 한결 넉넉한 열매를 맺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듭니다. 그리고, ‘책 수집가 이야기’에서도 몇몇 이름난 분들에서 머물기보다, 또 일제강점기 무렵 지식인한테만 머물기보다, 우리 둘레 가까운 곳을 좀더 차근차근 바라보거나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이 책 《고서점의 문화사》는 한결 넉넉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고서점’이든 ‘헌책방’이든 ‘사라진 옛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서점이 되든 헌책방이 되든 오늘날에도 어엿하게 있는 곳이며, 어제도 오늘도 앞날도 바삐 땀흘려 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도 뻘뻘 땀을 흘리며 애쓰는 사람들 발자취와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라 한다면, 이 무더운 여름날까지 기나긴 세월을 땀흘려 온 사람들 숨결과 손길을 담아낼 수 없는 문화라 한다면, 우리는 책을 왜 읽고 쓰고 나누어야 할까요. (4342.7.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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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와 언어 - 대만.인도.한국에서의 동화와 저항
손준식.이옥순.김권정 지음 / 아름나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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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14 ― ‘식민지 한국’에서 못 벗어나는 우리들 말글
 : 손준식ㆍ이옥순ㆍ김권정, 《식민주의와 언어》


- 책이름 : 식민주의와 언어
- 글 : 손준식, 이옥순, 김권정
- 펴낸곳 : 아름나무 (2007.8.20.)
- 책값 : 12000원



 (1) 말글과 우리 삶


 날마다 ‘우리 말 이야기’를 꾸준하게 쓰고 있습니다. 날마다 살림을 꾸리고 아기를 함께 보고 책도 읽고 도서관도 추스르고 다른 여러 일을 보느라 눈썹이 휘날릴 판인데, 그렇다 해도 언제나 몇 꼭지나마 우리 말 이야기를 쓰면서 살아갑니다.

 저한테 밥벌이일 수 있으나, 밥벌이라기보다 일거리이고, 또 일거리라기보다는 제 삶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말과 글을 생각하면서 살자고 마음먹지는 않았습니다만, 처음부터 우리 말 이야기 쓰는 삶에 제 모두를 맞추지 않았습니다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운데 좀더 단단하고 튼튼하게 이 한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만나면서, 여러 일을 하면서, 다른 누구보다 저 스스로 늘 쓰는 말과 글을 얼마나 제대로 안 살피고 있었는가를 깊이 느꼈습니다. 둘레에서 말글과 얽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들 말글을 하나도 안 돌보거나 내팽개치는지를 뚜렷이 느꼈습니다.

 국어학자만이 아니라, 국어교사만이 아니라, 기자만이 아니라, 작가만이 아니라, 책쟁이만이 아니라, 또 지식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매한가지입니다. 연예인이나 노래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한결같이 말글로 우리 뜻을 펼치고 나누고 일을 벌입니다. 막일을 하는 공사판 일꾼이라 하여 말글 하나 없이 일을 하겠습니까. 막일판에는 막일판 말이 있습니다. 학자님들이 좋아하는 ‘어려운 말’로 하자면 ‘건축 전문 용어’라 하는.


.. 학부모들은 ‘식민지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영어를 선호했고, 그런 수요자의 요청으로 지역어로 가르치는 지방 초등학교에서조차 영어를 학과목에 포함했으며, 때로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로 개편되기도 했다 … 1930년대 간디가 제창하여 도입된 실생활에 근거한 ‘기초교육’은 소득과 사회적 상승이동이 전제되는 성공의 언어-영어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다 ..  (88, 93쪽)


 출판사에서 일할 때, 또 출판사 바깥에서 출판사 사람들을 만날 때, 예나 이제나 까마득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모두들 당신들 일터에서 너무 많은 일에 얽매인 나머지 당신 삶이며 말글이며 옳게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어느 곳이 안 그러겠습니까만, 책마을에도 숱한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편집을 하든 디자인을 하든 제본을 하든 인쇄를 하든 무얼 하든, 하나같이 일본말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늘 일본말로 일을 하면서 일본말로 생각하고 일하는 당신들 모습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책 하나가 날마다 수없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제가 몸담았던 곳은 퍽 생각깊고 괜찮다는 소리를 듣는 출판사였습니다. 그러나 이곳 또한 다른 출판사와 매한가지로, 사장님부터 관리영업 하는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일본말 버릇을 떼어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길든 탓이 있는 한편, 남 앞에서 꿀리기 싫고(일본말을 전문용어인 듯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말을 안 쓰면 꿀린다고 느낍니다), 괜히 ‘새로운 말(일본말을 털어낸 우리 말)’을 배우는 데에 품과 짬을 바치기 싫은 가운데, 처음부터 이런 데에는 아무런 마음이 없습니다.

 한낱 월급쟁이일 뿐이라고 할까요. 그저 다달이 회사일 알맞게 해 주고 다달이 빠짐없이 일삯 받아 가면 그만이라고 여긴다고 할까요.


.. 실제 신식교육을 받은 자제들 중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식민통치의 유력한 협력자가 되었다 …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타이완의 아동과 청소년들은 학교생활 적응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성인들은 취업과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일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일어는 사회적 신분상승과 입신양명의 필수능력이 되었으며, 일어교육을 받은 타이완인 가운데 일어로 쓴 문학작품이 출판되거나 일본 유명 잡지의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도 생겨났다 … 식민지인을 지배국의 언어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매콜리가 영어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머지않아 신심이 가득한 ‘갈색 피부의 기독교인’, ‘갈색 피부의 영국인’이 될 것을 굳게 믿은 데서 드러난다. 그의 말은 영어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피와 피부는 인도인이지만, 견해와 감각 그리고 도덕과 지성은 영국인’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신뢰에 근거했다. 그는 영어교육을 통한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이용의 추구가 용이할 것이라고 믿었다. 통치를 받는 ‘갈색 피부의 영국인’은 자연스럽게 영국산 상품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30, 34∼35, 80쪽)


 바쁘고 힘드니까 어쩔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쁘고 힘드니까 아무 말이든 함부로 해도 되는가 궁금합니다. 바쁘고 힘드니까 아이들을 대충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가르쳐도 되는가 궁금합니다. 바쁘고 힘드니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충 몽둥이찜질을 하고 교칙으로 옭아매면서 성적만 잘 나오게 길들이면 되는가 궁금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느라 바쁠까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기에 그리도 힘이 드는가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뜻은 어디에 있고, 우리한테 목숨 하나 내려진 값은 어디에서 찾는가요.

 오늘 아침에는 ‘聖스럽다’와 ‘거룩하다’ 두 마디를 헤아리는 가운데, ‘屈하다’와 ‘굽히다’ 두 마디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네 마디를 낱낱이 돌아보는 데에만 해도 여러 시간이 걸렸습니다. 온갖 국어사전을 뒤적이고, 사람들 말씀씀이를 살피며, 제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마디를 되짚으면서, 우리가 오늘과 앞날에 걸쳐 가장 알맞고 즐겁게 쓸 말투와 말결을 찾느라 어느새 새벽이 밝고 아침해가 뜨고 골목길이 시끄럽습니다. 이제 아기가 깨어날 때가 다가오고, 아기한테 아침을 어떻게 먹일까 걱정해야 하며, 오늘 하루는 또 무슨 일을 하면서 보낼까 하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허울좋게 ‘우리 말 다듬기’를 한다는 저부터, 말마디 한둘을 붙잡는 데에 온 하루가 꼬박 들어갑니다. 그러니, 따로 우리 말글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우리 말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분들로서는 쉽게 엄두를 못 낼 만하다 싶습니다. 신문기자 가운데 당신 기사를 쓰면서 국어사전을 열 번쯤 뒤적이는 사람이 있기는 있겠습니까. 책 열 권 읽어 보고 쓰는 사람이 있기는 있겠습니까. 열 사람쯤 만나 보고 쓰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요.


.. 일제 때 학교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타이완인은 대화시 많은 일어 어휘를 섞어야만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 영국은 영어교육과 영문서적을 통한 인도인의 동화에 만족하지 않고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연구하여 식민주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인도의 제도와 전통을 평가절하하는 정치작업도 병행하였다 … 영어와 서구를 가르치는 중등학교와 대학의 설립이 줄을 이었다. 기존의 교육기관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개편되었고, 유럽과 영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서양 정치이론을 소개했다. 영어교육은 식민통치를 이해하고 충성을 바칠 인재들을 창출하기 위해 물질적 진보와 정치적 진보, 도덕적 진보를 칭송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대학에 들어간 인도 젊은이들은 점차 영국에 동화하였다. 영어와 서구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1857년 세포이항쟁에 가담하지 안고 식민정부를 편들었다. 영어를 배운 그들은 기득권이 걸린 식민체제를 지지하였다 ..  (43, 83, 84쪽)


 대여섯 살 아이들이 쓰는 말마디는 500∼700 낱말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여덟아홉 살 무렵이면 1200∼2500 낱말쯤을 쓴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면 5000 낱말을 넘어서고, 초등학교 5∼6년에 이르면 1만∼2만 낱말을 아우른다고 합니다. 중학생이라 할 열넷∼열여섯일 때에는 5만을 넘어갈 테고, 고등학생이라 할 열일곱부터는 10만쯤 될 테지요. 여느 어른은 20만 낱말쯤을 ‘알아듣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말풀이를 줄줄 읊을 만큼 ‘안다’가 아니라, 이런 낱말 저런 낱말을 들려주었을 때 ‘어렴풋이 뜻이나 느낌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을 조금이나마 짚을 줄 안다면, 어른문학을 하는 이들이 섣불리 어린이문학을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20만 낱말을 아는 머리와 가슴으로 500 낱말이나 1000 낱말을 아는 아이들 눈높이에 알맞춤하게 문학을 한다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을 뿐더러, 알맞지 않습니다. 어린이 눈높이라 한다면, 500 낱말만 가지고도 우리 삶터와 사람과 세상을 두루 읽어내고 헤아리고 꿰뚫고 나눌 수 있도록 내 매무새와 눈길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지식인 가운데, 우리 문학쟁이 가운데, 우리 교사 가운데, 우리 부모 가운데, 이와 같이 아이들 눈높이에 따라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괜히 ‘쉬운 말’을 쓰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가 모두 아이큐가 아주 높거나 똑똑하지는 않으니까요. 더구나 모든 사람이 대학생입니까? 모든 사람이 대학원까지 다녀야 합니까? 초등학교만 나오고 사회살이를 하면 안 됩니까? 아예 아무 학교도 안 다니면서 우리 세상을 슬기롭고 씩씩하게 살아가면 안 됩니까?

 말이란, ‘말하는 사람 자리’가 아닌 ‘듣는 사람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글이란, ‘글쓰는 사람 자리’가 아닌 ‘읽는 사람 자리’에서 써야 합니다.

 나 혼자 아는 이야기를 용두질을 하듯 주절거리는 말이나 글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알아챈 이야기를 어깨동무를 하듯 살갑고 구수하게 나누는 말이나 글이 되어야 합니다.


.. 정신적 측면의 중요성을 간파한 일본은 일본어를 식민사회의 동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식민사회에서 언어는 식민통치 권력과 차별의 정치와 연계된 정신적 지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사회에서 언어문제와 관련된 정책은 늘 가시적인 억압인 물리력을 동원하기보다 비가시적인 장치로, 이른바 ‘문명화’라는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사회 통제의 틀을 조성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된다 … (식민지 정부는) 일본어는 근대사회의 무지몽매한 야만에서 깨어나 근대적 지식을 학습하고 계몽하는 문명화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문명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고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수단임을 역설했다. 일제는 강점 말기까지 시종일관 이런 논리를 주장했다 … 일제는 3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조선민족이란 명확한 자각심을 갖고 있는 조선인을 어떻게 일본 천황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일본국민으로 동화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장기적으로 일본어야말로 그러한 세계관과 이념을 전달하고 내면화시킬 최적의 수단임을 확신하며 일본어 동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  (131, 136, 138쪽)


 머리를 식히거나 몸을 쉬려고 보리술을 사다 마십니다. 나라안에서 빚은 보리술을 마신답시고 가게에 들르는데, 가게마다 놓고 있는 어느 보리술이건, 한글 이름이란 없습니다. 모조리 알파벳을 드러내어 적습니다. 나라밖으로 내다 파는 보리술 같지는 않지만, 나라밖으로 내다 판다는 보리술이라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 글을 좋아하거나 섬기는 모습이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은 마땅히 알파벳으로 영어 이름을 적습니다. 독일사람은 독일글을 붙이고 프랑스사람은 프랑스글을 붙이며 벨기에사람은 벨기에글을 붙입니다. 중국사람 또한 중국글로 딱지를 붙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은 한국글과 일본글을 좀처럼 안 붙입니다. 그나마 일본사람은 일본말로라도 이름을 짓는데, 한국사람은 한국말로조차 이름 지을 생각을 안 합니다.

 이런 매무새는 자동차 앞에서도 똑같고, 가전제품 앞에서도 거의 같으며, 과자 이름 앞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옷이름이나 신발이름은 어떻습니까. 손전화에 붙이는 이름이나 아파트에 붙이는 이름은 어떠하지요? 관공서와 학교에서는 어떤 말마디로 우리 삶을 다스리려고 합니까?


 (2) 힘있는 사람 말과 힘여린 사람 말


 제가 하는 ‘우리 말 다듬기’에서는 웬만한 ‘한자말’은 다 덜어내려고 합니다. 작은따옴표를 ‘한자말’에 달았습니다만, 곰곰이 따지면 한자말이라고 덜어내야 하는 말이 아닙니다. ‘웬만한’ 한자말일 때에 덜어내야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한자말이든 일본말이든 미국말이든 서양말이든 중국말이든, 우리가 ‘꼭 써야 할’ 말이라면 어김없이 받아들일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살살이꽃’이라는 우리 이름이 있습니다만, ‘코스모스’ 같은 꽃이름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렇게까지 얄궂지는 않습니다. 저는 ‘셈틀’로 다듬어 쓰지만 ‘컴퓨터’를 영어라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냥 써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찾기’를 굳이 ‘검색(檢索)’으로 적어야 하겠습니까? ‘고침/고치기’를 구태여 ‘수정(修正)’으로 적어야 합니까? “버스에 타다”면 되지 “버스에 승차(乘車)하다”라 해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다”면 넉넉하지 “자전거를 이용(利用)하다”라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한’ 한자말을 덜어내려고 합니다. 털어내려고 합니다. 씻어내려고 합니다. 벗어던지려고 합니다. 솎아내려고 합니다. 몰아내려고 합니다.


.. 타이완총독부의 교육정책은 타이완인 자체를 진심으로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타이완인들이 일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데 최종 목적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문 교육은 단지 타이완인 학부모가 자녀를 공학교에 보내도록 유혹하는 일종의 미끼에 불과했다 … 식민당국은 타이완인을 ‘충량(忠良)’한 일본신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일어 보급을 시정의 최대 목표로 삼고, 한문화의 생장 기회를 제거하고자 … 타이완 각지에서 올라와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모인 도시 학교에서 일어는 수업시간만이 아니라, 아이들 간의 놀이와 교제에 필요한 공동 언어였다 ..  (19, 21, 26∼27쪽)


 우리는 ‘어느 만큼 쓸 만해서’ 쓰는 바깥말을 들여와서는 안 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참으로 쓸 만할’ 때 비로소 들여와야 한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쓸 만하’고 ‘더없이 쓸 만하’지 않고서야 들여와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시니컬’이니 ‘아우라’니 ‘태스크 포스’니 하는 말을 왜 써야 할까요? ‘에너지’야 이제는 영어로 느끼기 어려운 들온말이 되었습니다만, ‘태양에너지(太陽energy)’ 같은 말마디는 얼마든지 ‘햇볕힘’으로 걸러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들은 사진을 놓고 ‘사진’이 아닌 ‘포토’라 하고, 스스로를 가리켜 ‘사진가’나 ‘사진작가’가 아닌 ‘포토그래퍼’라 할 뿐더러, 아예 알파벳으로 끄적이기까지 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한테는 ‘사진기-필름사진기-디지털사진기’입니다. ‘카메라-필름카메라-디지털카메라’가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 삶으로 받아들여야 할 낱말이 아니라면 한자로 된 말이든 알파벳으로 된 말이든 물리칠 노릇입니다. ‘사진기’라는 낱말 하나 들여왔으면 이 낱말로 넉넉하지, 다시금 ‘카메라’로 고쳐서 두 가지를 뒤섞어 쓸 까닭이란 없습니다. 이럴 바에는 우리 깜냥껏 우리 말로 ‘사진기’를 풀어내는 데에 힘을 쏟고 땀을 바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식민지배자의 언어를 가르침으로써 식민지인을 그들의 사회와 전통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식민지배의 문화구조로 흡수하고 동화하려면 목표는 “일단 전함과 외교관을 보낸 뒤에 영어교사를 보낸다.”라는 익명의 영국인 국제기관 책임자의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 고조된 배일감정과 달리 상당수의 조선인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에 편승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성립한 강습소ㆍ야학에 대한 호응이 당시 이러한 상황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 1910년 이전의 일본어 보급은 친일세력의 육성을 통한 침략의 일환에서 추진이 이뤄지고 있었다 ..  (73, 140쪽)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슬기를 빛내어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는 모래 한 줌만큼이나마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사회가 그렇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그렇습니다. 문화와 예술이 그러하고, 교육이 그렇습니다. 서울 강남까지 가지 않더라도, 시골마을이나 도시골목이나 마찬가지인데, 집집마다 아이들한테 영어를 얼마나 일찍 더 많이 가르치느냐에 마음쏟지, 아이들한테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연을 선사하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바르고 훌륭하고 튼튼하고 씩씩하게 크느냐에는 마음쓰지 않습니다.

 그나마 저는 어릴 때 ‘밥을 가려먹어’ 몸이 안 좋은 탓에 공부보다는 ‘씩씩하고 튼튼하게 커 다오’ 같은 말을 더 자주 들었고, 틈만 나면 골목길이나 동네 놀이터에서 뛰놀았습니다. 이제는 허물리고 없는 인천공설운동장 안쪽 빈터에서 동무들하고 야구놀이를 했고, 대나무 낚시대를 500원에 사서 바닷가 갯벌로 망둥이 낚시를 다니곤 했습니다.

 집에 전집책이 몇 가지 있기는 했으나, 이 책을 읽기보다는 바깥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했고, 해질 무렵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동무들하고 놀다가 선생들한테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이리하여 제가 쓰는 말은, 또 제가 ‘우리 말 다듬기’를 하는 바탕으로 삼는 말은, 이렇게 신나게 뛰놀던 어릴 적 제 삶에 따라서 살피고 헤아리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동무들하고 나누던 말마디와,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던 말마디 가운데 가장 싱그럽고 살갑다고 느끼는 말마디를 곱씹습니다.

 가장 어린 사람들 말마디를 아끼려 하고, 가장 적게 배운 사람들 말마디를 돌보려 하며, 가장 힘이 여린 사람들 말마디를 보듬으려 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자말이든 미국말이든 또 무슨 다른 바깥말이든, 한결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가방끈으로 힘이 있든 돈으로 힘이 있든 권력자리에서 힘이 있든 하는 사람들은, 여느 사람들 말마디를 쓰지 않습니다. 어린이들 말마디를 쓰지 않고, 늙은이들 말마디나 달동네 사람들 말마디를 쓰지 않아요. 이를테면 반지하나 옥탑방을 모르면서 ‘서민 집 정책’ 읊는 정치꾼들은 ‘서민’이라 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살림집을 돌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제대로 모르면서 정책을 꾸리는 셈인데, 많이 배워서 안다는 분들(지식인이나 공무원) 또한 여느 사람 삶자리를 거의 모르는 가운데 당신들 눈높이에서만 말마디를 내놓습니다.


.. 우선 조선총독부는 일본어의 명칭을 ‘국어’로 변경하고, 조선인의 언어를 ‘조선어’로 낮추는 동시에, 이를 하나의 ‘지방어’ 내지 ‘주변어’로 규정했다 … 당시 일본어 습득에 필요한 교재 확보가 쉽지 않았던 반면, 신문 구독은 지방관에 의해 마을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널리 이루어졌다. 신문 보급은 식민정책을 선전ㆍ홍보할 뿐만 아니라 일본어 보급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  (140, 142쪽)


 우리는 지난날 오래도록 중국한테 식민지처럼 눌려 왔습니다. 이른바 ‘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삶과 문화와 살림살이 죄다. 그 기나긴 사대주의를 거친 다음 일본제국제의한테 짓눌리며 식민지로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미국한테 정치권력을 내어주면서 경제며 사회며 정치며 문화며 교육이며 예술이며 과학이며 기술이며 송두리째 얽매인 삶을 꾸립니다.

 이 세 가지 식민지 가운데 일제강점기만 ‘대놓고 식민지’였고, 대놓고 식민지였던 그무렵 쓰던 말을 놓고만 ‘일본말 찌꺼기 털어내기’를 말할 뿐입니다. 오래도록 사대주의였던 중국에서 들여온 말과 글을 털어내어 우리 말과 글을 찾는 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또한, 모든 곳에서 미국말이 스며들고 미국 문화가 배어드는 모습을 느끼지 않거나 좋게만 느끼며 조금도 씻어낼 마음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 찾는 데에는 눈을 두지 않고 생각을 쏟지 않으며 뜻을 새기지 못합니다.


 (3) 《식민주의와 언어》라고 하는 책은


 군대힘으로 다른 나라를 억누르면서 돈-땅-사람-자연을 어질러 놓고 울궈간 힘센 나라들이 어떻게 ‘식민지로 삼은 나라를 옭죄려 했는가’를 말글 테두리에서 살핀 책 《식민주의와 언어》를 읽습니다. 이 책은 세 갈래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먼저,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 다음은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 그리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

 대만과 인도와 한국은 퍽 긴 나날에 걸쳐 식민지로 눌려 있었고, 식민지로 눌려 있는 동안, 지식인이건 여느 사람이건 ‘식민지 나라에 마주하는 매무새’가 꼭 닮았다고 합니다. 군대힘이 없어 식민지가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다시 홀로설 날을 맞이하기 힘들다고 여기며 ‘권력자(식민주의자)’한테 빌붙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힘과 돈과 이름을 누리는 사람들은 굳이 ‘해방-독립’을 꿈꾸지 않을 뿐 아니라, 힘과 돈과 이름이 없는 사람들조차 해방이나 독립을 꿈꾸지 못하는 가운데, 낮은자리에서 솟구쳐오르는 저항이 있기는 해도 높은자리 사람들은 이 흐름에 어깨동무하지 못하곤 했답니다.

 그나저나 이 책 《식민주의와 언어》를 읽는 마음이 썩 가볍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쓰인 온갖 말글은 다름아닌 우리가 지난날 일본제국의자한테 억눌려 있을 때 그네들이 쓰던 낱말이요 말투이거든요.


.. 당초 일어 학습에 부정적이었던 타이완인들이 유창한 표준 일어 사용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채 50년도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영어를 배운 인도인은 지배자의 문화와 가치를 우수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미래와 실용성ㆍ우월성과 연계되지 않는 자신들의 과거와 언어를 가치없는 것으로 폄하하였다 … 영어로 서구의 근대를 배운 그들은 모국어에서 소외되고 식민지배자가 소지한 개화와 진보, 근대성을 선망했다 ..  (35, 98∼99쪽)


 이 책을 쓰신 분들만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에 길들여 있지 않습니다. ‘식민주의와 말’을 다루는 분들이라고 해서 말마디를 남달리 추스르거나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여느 학자와 마찬가지이고 여느 교수와 마찬가지이며 여느 지식인하고 똑같습니다. 우리 삶터는 이와 같은 말마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생각은 이와 같은 말마디로 주고받습니다. 우리 넋과 얼은 이와 같은 말마디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이들이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자리잡아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그들에게 내면화된 식민지 의식들이 각종 문화적 담론 및 매체들을 통해 재생산 및 복제되고 있는 점을 보면, 일제의 언어 동화 정책은 장기적으로 성공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174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어느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책 끄트머리에서 말하듯 “식민지 일본 언어 동화 정책은 멀리 내다보았을 때 성공”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흐름을 헤아리는 사람이 몹시 드물고, 이런 흐름을 헤아렸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과 삶과 말을 고치려 하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학문으로 다루는 책’은 나올지온정, 하나하나 낱낱이 삭이고 가다듬고 갈고닦으면서 우리 스스로 달라지거나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예 책으로 그칩니다. 그저 지식이나 교양으로 머뭅니다. 한낱 학문에서 맴돕니다. 책도 좋고 지식과 교양도 좋으며 학문도 좋습니다만,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우리 온몸과 온마음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앞으로 쉰 해나 백 해쯤 흐른 다음에는, 《식민주의와 언어》에서 다룬 ‘인도와 영국’ 이야기가 ‘한국과 일본’ 또는 ‘한국과 미국’ 이야기하고 한동아리처럼 다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겉으로는 독립된 나라 한국이지만, 속으로는 홀로서기까지 한참 먼 한겨레입니다. (4342.7.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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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
윤준호 외 지음 / 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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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사람은 왜 자전거를 안 탈까?
 [잠깐 읽기 47]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



- 책이름 :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
- 글 : 윤준호, 반이정, 지음, 차우진, 임익종, 박지훈, 서도은, 조약골, 김하림
- 펴낸곳 : 지성사 (2009.7.30.)
- 책값 : 13800원



 (1) 서울에서 자전거 타는 일이란


 두어 달쯤 앞서, 서울 홍제동에 있는 헌책방 일꾼 자가용을 얻어타고 마실을 한 적 있습니다. 늘 걷거나 자전거로 다니던 길을 자가용으로 움직이니 몹시 새삼스러웠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아홉 해를 지내는 동안 자전거 다음으로 지하철을 가장 많이 탔고, 버스는 아주 드물게 탔으며, 택시는 훨씬 드물게 탔는데, 자가용은 더더욱 드물게 탔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몸에 땀을 줄줄 흘리지 않고 자가용을 타니까,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 무게를 느끼지 않고 언덕길을 사뿐히 올라가니까,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데에도 시원하게 앉아서 다리쉼을 할 수 있으니까,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좋았습니다. 힘이 안 든 대목에서는.

 그렇지만 힘이 안 들기 때문에 ‘힘을 덜 쓴 대목에서 좋다’뿐이지, 이렇게 힘 안 빼고 다니는 일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한 권 사서 읽어도 그 책에 걸맞게 값을 치르면서 장만하여 읽어야 제맛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책을 읽으려고, 아기 돌보고 빨래하고 집살림 꾸리는 틈틈이 졸린 눈 비벼 가며 읽어야 참맛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 보리술 한 잔을 거저로 얻어마셔도 짜릿하겠으나, 저 스스로 땀흘려 일해 번 돈을 치르며 사마시는 보리술 한 잔 맛에는 견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자가용 마실은 자가용 마실대로 맛과 멋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자가용 마실도 재미있습니다. 부산 광안다리는 자전거로 건널 수 없는 한편, 걸어서도 건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길은 차를 얻어타고 지나면 새삼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다만, 저는 자전거가 갈 수 없는 길에서 보는 모습이라든지,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닐 수 없는 데에서만 보는 모습은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 결국 나 혼자 조심하고 나 혼자 열심히 자전거를 탄다고 이 세상이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을 듯 보였다. 인터넷의 자전거 동호회는 그렇게 인기가 높건만 한 발짝만 바깥으로 나가면 일반인들은 자전거에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자전거를 안전하고 즐겁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동호인이 아닌 일반인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28쪽/윤준호)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던 지난날, 처음 몇 해는 지하철을 곧잘 탔지만, 지하철을 타면서 흐뭇하거나 기뻤던 일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거운 책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제법 먼길을 천 원 안팎이면 실어다 주니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처음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던 1995년에는, 이때 제 일터이자 살림집이었던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배달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1998년과 1999년에도 웬만하면 신문배달 자전거로 움직였습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독립문이나 종로까지는 으레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이문동에서 미아리로 가든 상계동에 가든 언제나 자전거와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립문이며 종로며 신촌이며 미아리며 상계동이며 하는 헌책방을 다녀올 때에는, 신문배달 자전거 짐받이에 ‘헌책방에서 장만한 책’을 친친 묶어서 신나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8월 8일부터 신문배달 일을 그만두고 출판사에 들어가던 때부터는 자전거하고 멀어졌습니다. 주머니가 가난하여 자전거를 살 돈이 없기도 했고, 일터에 ‘출판사에서 쓰는 자전거’가 있지도 않았으니 타고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 출판사에 자전거 한 대 있었다면, 이문동에서 서교동으로 자전거로 오갔으리라 생각합니다. 2000년에는 일터하고 가까운 종로구 평동으로 살림집을 옮겼는데, 얄궂게도 이때부터 다닌 출판사는 김포공항 쪽에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걸어서 일터를 다니려던 꿈(종로구 평동에서 서교동으로)을 접고 지하철을 탔는데, 일터에서 일을 마치고 신촌이나 외대 앞이나 청구동이나 용산 쪽 헌책방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으레 걸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가방에 책을 잔뜩 채우고 두 손에는 끈으로 질끈 동여맨 책꾸러미를 영차영차 땀 뻘뻘 흘리면서 신나게 걸었습니다. 가방에 채우고 두 손에 든 책짐은 사십 킬로그램 남짓이 되기 일쑤였지만, 한 시간 남짓 걷는 밤길이 고단해 쉬엄쉬엄 쉬면서 돌아오곤 했지만, 왠지 지하철을 타기보다는 팔힘이 쪽 빠지더라도 걷는 길이 좋았습니다.

 때로는 노량진부터 한강다리를 넘는 길을 걷기도 했는데, 이렇게 길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낮에도 그렇고 밤에도 그렇습니다. 길을 거닐며 늘 느꼈지만, 이 길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걷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거님길은 언제나 들쑥날쑥이거나 전봇대나 거리나무가 걸리적거리도록 놓여 있거나, 으레 공사중 간판이 붙으면서 어지럽혀져 있거나 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보도블럭 까뒤집기’는 숱하게 보았어도, ‘울퉁불퉁하고 깨진 거님길 손질하기’는 거의 못 보았습니다.


.. 자동차 운전자는 밀폐된 공간에 갇혀서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 화면 같은 세상만을 보며 계절과 날씨와 공기의 변화를 에어컨과 히터와 공기청정기로 막아 보려 한다. 하지만 바로 그 행위 때문에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은 더욱더 가속화되고, 운전자 스스로는 둔감하고 허약하고 재미없어져 버릴 뿐이다 … (자동차로) 시속 60킬로미터로 시내를 관통하며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와 그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내게 서울은 언제나 최고로 빠른 도시였다. 거리의 옷차림들, 건물에 도배된 최신 광고들,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유행들, 지하철 창밖으로 휙휙 달려가는 건물들, 그리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확 시야를 막아서는 빌딩들, 주상복합 건물들, 아파트 단지들, 서울은 필요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도시다 ..  (109쪽/지음), (153쪽/차우진)


 일터를 쉬는 주말에는 으레 처음부터 ‘전철도 버스도 안 탄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길을 나섰습니다. 아침 열 시쯤 길을 나선 다음 일고여덟 시간쯤은 넉넉히 거닐며 서울 시내를 두루 쏘다녔습니다. 어느 골목 안쪽에 ‘아직 내가 모르는 헌책방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온몸이 땀범벅이 되곤 했는데, 점과 점으로 집하고 책방만 오가는 움직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부터 책방 사이에서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써 찾아간 책방이 쉬는 날이었든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든 마음이 허전하거나 아프지 않았습니다. 나고 지고 하는 흐름은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두 다리로만 걸어다니다가 2002년에 비로소 푼푼이 모아 놓은 돈으로 제 자전거를 한 대 마련했고, 이때부터는 두 다리로도 다니고, 때로는 자전거로도 다니면서 더 멀리 서울 시내 골목을 쏘다닙니다. 다리쉼을 할 때면, ‘사진쟁이 김기찬 님도 이 골목을 거닐며 이쯤에서 다리쉼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리에 날개를 달고 보니, 저로서는 딱히 좋아하지 않는 서울이기는 해도 골골샅샅 살갑고 애틋한 곳이 참으로 많다고 느꼈습니다. 이제는 재개발되어 사라진 숱한 골목길 아름다운 모습을 두 눈으로 담았고 두 다리로 느꼈으며 두 팔로 껴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이태 뒤에는 서울을 떠나 충주 산골마을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울 시내를 타고다니던 자전거는 선배한테 물려주고, 저는 반으로 접는 자전거를 장만해서 고속버스에 싣고 다닙니다. 첫 한 해는 고속버스 짐칸 신세인 자전거였으나, 그 이듬해부터는 ‘고속버스로만 다닐 노릇이 아니라 국도를 자전거로 다녀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이태째 되는 해부터 자전거로 한 번 길을 뚫었고, 이제부터는 충주와 서울을 자전거로 오가는 삶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퍽 먼길을 한 주에 한 차례씩 자전거 나들이를 하고 보니, 서울 시내를 자전거로 달리는 일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뭐, 하루에 너덧 시간을 달려 충주에서 서울을 오가는데, 서울 시내 한두 시간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곰곰이 헤아려 보면, 먼길을 달리고 나서 서울 시내 달리기는 쉬운 달리기임을 느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러 해에 걸쳐 신문배달을 자전거로 했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많이 붙어서 한결 손쉽고 즐겁게 자전거 나들이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바탕이 있으니, 충주부터 서울까지 자전거로 달릴 생각을 품을 수 있었겠지요.


.. 나도 자전거를 좋아하긴 하지만, 자전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까이하기 좀 꺼림칙하다. 깃발 꽂은 비싼 새 자전거를 타고 떼로 몰려다니며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아저씨들과 그들이 여기저기 뱉어 놓은 이야기들이 불편하다. 물론 좋은 자전거는 좋은 자전거다. 동어반복이니 틀릴 수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오래 듣는 것은 좀 피곤하다. 결국 비싸니까 좋더라는 이야기에 불과하잖은가. 그건 당연한 건데 왜 따로 말이 필요한지 난 모르겠다. 단지 돈을 좀 썼다는 말에 불과하다 ..  (212쪽/박지훈)


 그러나, ‘한국에서 서울처럼 자전거를 달리기 좋은 곳은 더 없음’을 느낀 때는, 충주부터 서울까지 먼길을 달리던 때부터입니다. 자전거마을 상주도 있고, 땅이 제법 판판한 영동 같은 곳도 있으며, ‘발바리 떼잔치질’ 역사가 깊은 수원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한국땅에서 자전거를 타기 가장 좋은 곳은 서울입니다. 그리고, 한국땅에서 자전거를 가장 안 타는 곳 또한 서울입니다.

 웬만한 여느 도시나 시골에서는, 웬만한 볼일을 보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가도 됩니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걷는 일은 ‘시간 버리기’가 아니라 ‘길 즐기기’이며 삶입니다. 흔히들 ‘그 길을 뭐 하러 두 시간이나 걸어가며 시간을 버리느냐’고 합니다만, ‘두 시간 거닐 길을 자가용으로 십 분 만에 씽 달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가용을 장만하느라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바쳐야 할 뿐더러, 자동차를 굴릴 기름값을 버느라 더욱 많은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매한가지가 됩니다. 애써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내가 하고프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돈벌이에 시간을 바치느’냐, 아니면, 나 스스로 내가 하고픈 일을 골라서 하면서 즐겁게 길나섬을 하느냐로 갈립니다.

 서울이라는 곳은 길이 곳곳으로 잘 뚫려 있고, 어디로든 손쉽게 뻗어 나갈 수 있습니다. 시골과 서울이 다른 대목은, 시골길은 걷기에 알맞고, 서울길은 자동차한테 알맞습니다. 그런데 길이 곳곳으로 잘 뚫린 서울에는 자동차가 너무 많아, 자동차가 제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자동차 계기판에 200킬로미터까지 달릴 수 있다고 새겨져 있어도 시내에서 100킬로미터 넘게 달릴 일이란 없습니다. 시내에서 30킬로미터로만 달릴 수 있어도 잘 달리는 셈입니다. 이제 서울은 버스길을 따로 뚫어서 버스는 좀더 빨라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여느 자전거로 설렁설렁 달릴 때하고 견주어도 그리 빠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치솟는 찻삯을 헤아리면, 버스도 지하철도 하나도 안 빠르고 하나도 안 값싼 차편인 셈입니다.

 더구나 맛집이니 멋집이니 찻집이니 술집이니 책집이니 극장이니 공연장이니 옷집이니 뭐니뭐니 하는 곳은 모두 길가에 있거나 골목에 있습니다. 차 댈 곳이 넉넉한 데가 드문드문 있을 터이나 차를 대느라 보내야 하는 시간과 품이 얼마나 많으며, 차 대며 치르는 삯은 얼마나 많습니까. 자전거로 움직이며 마땅한 곳에 착 잠가 놓으면, 또는 자그마한 접는 자전거를 착착 접어서 날라 놓으면, 서울에서는 문화며 예술이며 장보기이며 모든 일을 훨씬 빠르고 가볍고 신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서울에는 한강 자전거길이 있어서 자전거 즐기기에 좋다고들 하지만, 저한테는 한강 자전거길은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한강 자전거길은 ‘지루한 고속도로’와 매한가지라고 느낍니다. 오로지 앞으로 달리도록만 하는 길이 한강 자전거길입니다. 가끔가끔 널따란 쉼터가 나오지만, 훨씬 긴 길은 자전거 두 대가 겹쳐서 달리면 아슬아슬한 좁은 자리입니다. 이 좁은 자리에 ‘걷는 사람-강아지 데리고 나온 사람-인라인 타는 사람-달리기 하는 사람-자전거 타는 사람’이 뒤죽박죽 섞여야 합니다. 빠르기를 짜릿하게 즐기고픈 사람이든 설렁설렁 타고 싶은 사람이든, 자전거를 자전거답게 즐기기 어려운 데가 한강 자전거길입니다.

 서울이 자전거 타기에 좋다면, 다름 아닌 찻길이 잘 뚫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로든 다 이어진 찻길들, 고가도로이든 지하도로이든 이 찻길들 한쪽 50센티미터만 자전거한테 내어준다면, 서울이라는 데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자전거 문화를 높이 이루며 널리 나눌 수 있는 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급한 일이 있지 않은 한 파리를 자전거로 달릴 때는 속도를 내지 말자. 왼편으로 센강이 흐르고 오른편으로 기차역 형태를 간직한 오르세 박물관이 아름다운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무에가 급할쏜가! 파리의 땅 아래에는 갈 길이 급한 사람들이 가득 찬 메트로가 달리고 땅 위에서도 갈 길이 급한 사람들의 자동차가 달리지만, 나 같은 한량의 자전거는 유유히 길 위를 날아간다 …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하려는 파리에서 오염물질 생산기계인 자동차 타기는 점점 힘든 일이 되어 가고 있다 ..  (256, 264쪽/서도은)


 그런데 서울사람은 서울길이 얼마나 잘 뚫려 있는가를 살갗으로 잘 깨닫지 못합니다. 오로지 자가용을 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가용이 없는 이는 버스나 지하철만 타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길흐름을 따라서 내가 가려는 곳으로 가 보면, 서울이 자전거로 오가기 얼마나 좋은 데인지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건만, 기꺼이 자전거로 돌아서지 않습니다.

 서울사람은 자전거를 타도 생활자전거로 타지 못합니다. 아이들한테도 ‘동무들 앞에서 뽀대 세우는’ 자전거를 사 줍니다. 이른바, 유사산악자전거를 사 줍니다. 어른들 스스로도 당신 삶을 살찌우는 자전거를 알아보지 못하고 즐겨타지 못합니다. 뱃살이 너무 나왔다 싶은 아저씨들이 아내 몰래 지름신에 따라 ‘뽀대 나는’ 자전거를 인터넷으로 지르곤 합니다. 자전거를 왜 타려 하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자전거를 어떻게 타려 하는지 살피지 않으며, 자전거를 타며 무엇이 나아지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몰려 있고, 너무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기름값이 그렇게 치솟아도 자동차는 줄어들지 않을 뿐더러, 더 많은 자동차가 새로 나올 뿐입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리는 끊이지 않아도 하나같이 ‘재개발 비싼 아파트’를 꿈꾸는데다가, 이웃끼리 오순도순 어울리는 낮은 자리 골목마을을 어깨동무하지 않습니다. 몸을 써야 하는 자전거요, 나 스스로 땀을 내야 하는 자전거입니다. 땀을 안 내고 탈 수 없는 자전거이고, 몸을 안 써도 되는 자전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서울은 모든 좋은 조건이 다 갖추어진 곳이지만, 이 모든 좋은 조건을 머리로만 깨닫고 몸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비계덩어리 뚱뚱이가 되어 버린 도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시도 비계덩어리 뚱뚱이이지만, 도시사람도 비계덩어리 뚱뚱이입니다.


 (2) ‘우리를 사로잡는’ 자전거를 말하는 책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이라는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아홉 사람이 아홉 가지 ‘자전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노래하는 사람, 그림을 말하는 사람, 자전거로 짐 나르는 사람, 노래를 말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회사원, 파리 유학생, 라디오방송 맡은 사람, 인터넷 자전거모임 꾸리는 사람, 이렇게 아홉 사람이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만나고 느끼고 사랑하는 자전거 이야기를 아홉 꼭지 들려줍니다.

 틀림없이 다 다른 아홉 꼭지입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즐겨타고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홉 꼭지를 읽어 보았을 때에는, 꼭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는 ‘자전거를 삶으로 받아들여서 지내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를 취미로 삼으며 지내는 사람’입니다.


.. 어느 날 사무실 마당 구석에 낡고 녹슨 자전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바퀴는 휘었고 브레이크는 헐거웠다. 무심코 그 자전거에 올라 골목길을 달려 봤다. 바람이 시원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지하철역 세 정거장 거리의 집까지 타고 와 봤다. 한 시간이 걸렸다. 자전거는 도로를 달려야 하는 차라는 것을 배웠다 … 나는 자전거를 선택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 우리 나라에서도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쌀, 우편, 신문, 우유, 채소 등등은 자전거가 도맡아서 배달했다. 넓은 지역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재래시장에는 이른바 ‘쌀집 자전거’를 이용해 화물을 나르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 물론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하기 때문에 타지 말아야 할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자동차다. 위험을 만든 것이 바로 자동차기 때문이다. 길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 걷는 사람, 자전거가 아니라 다름 아닌 자동차다 … 인도로 올라가면 자전거는 교통 약자에서 강자로 뒤바뀌고 만다. 인도에서 난폭하게 달리며 벨을 눌러대는 것은 도로에서 과혹하며 빵빵대는 자동차와 다를 바가 없다 ..  (78, 82, 83, 110, 112쪽/지음)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자전거 타기란 거의 ‘취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전거 동아리 또한 ‘취미’ 테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기쁘고 홀가분하게 나누는 모임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날마다 자전거 타는 고단함과 짜릿함과 힘겨움과 싱그러움을 주고받는 모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자전거 모임은 ‘중고 물품 사고파는 장터’ 구실 하나, ‘더 뽀내 나는 자전거 자랑하는’ 노릇 하나, ‘장비병과 지름신에 놀아나는 자위행위’를 달래는 쉼터 하나, ‘자전거를 차에 태워 주말에 어디 놀러다닐 만한 데 찾는’ 정보검색소 하나, ‘가까이에서 술동무할 사람 찾는’ 사귐터 하나, 이런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취미로 즐기는 자전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동무 사귀려고 자전거 모임에 들어와서 어울리는 일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띠 모임’, ‘지역 모임’, ‘나이 모임’, ‘학교 모임’처럼, ‘취미로서 자전거 모임’은 얼마든지 할 만합니다.

 그런데, 자전거 타기를 취미로만 그친다면, 어딘가 허전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 나들이를 취미와 사람 사귀기에서 멈춘다면, 무엇인가 쓸쓸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돈이 있어 더 크고 비싼 자가용을 끌듯, 돈이 있어 더 비싸고 넓은 아파트를 사듯, 돈이 있어 더 이름 높고 잘 빠진 자전거를 몰듯 할 수 있습니다.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음을 뽐낼 수 있습니다.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자유만 누린다면, 이런 자유 말고는 다른 자유를 찾지 못한다면, 이런 자유가 ‘모든 자유’인 줄 아는 가운데 자전거 손잡이를 붙잡는다면, 왠지 슬프고 딱합니다.


.. 평균 속도는 가장 느렸을 경우가 시속 8.3킬로미터, 가장 빨랐을 경우가 시속 25.3킬로미터, 전체 평균은 시속 17.0킬로미터였다. 내가 빠른 게 아니다. 도로에서 자전거 타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이 정도 속도는 나온다 … 사람들은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자전거는 생각보다 빠르다. 자전거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능력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 … 결국 우리 나라에서 90퍼센트의 (배달) 오토바이는 자전거보다 속도나 효율성 면에서 그다지 월등한 것도 아니면서 기름 낭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 도시에는 가난하면서도 우아하게 살 수 있는 기회들이 종종 있는데, 자전거는 그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는 식당도 술집도 극장도 콘서트도 학교나 학원도 거의 가지 않지만, 부족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  (96, 100쪽/지음)


 중국 나들이를 몇 번 하던 지난날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으레, 우리가 말하는 ‘짐자전거’를 타고다니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자동차가 부쩍 늘고 자전거 또한 짐자전거에서 ‘뽀대 나는’ 자전거로 차츰 바뀌고 있습니다만, 집과 일터를 오가는 사람한테는 짐자전거만큼 좋은 자전거가 따로 없습니다. 또한, 가게일을 보는 사람한테도 짐자전거처럼 훌륭한 자전거가 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안장에 앉고 한 사람이 짐받이에 앉기도 하는 짐자전거입니다. 아가씨가 안장에 앉아 사랑하는 님을 짐받이에 태우든, 젊은 사내가 안장에 앉아 사랑하는 님을 짐받이에 태우든, 짐자전거는 두 사람을 사랑스레 잇는 끈입니다. 더욱이,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는 한두 아이까지 함께 태울 수 있는 짐자전거입니다.

 산을 타는 자전거이든, 길을 싱싱 달리는 자전거이든, 반으로 뚝딱 접는 자전거이든, 짐받이 없는 자전거가 무척 많고, 이런 자전거는 처음부터 짐받이를 달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바구니를 안 달기 일쑤입니다. 이리하여, 이와 같은 ‘취미’ 자전거는 ‘삶’ 자전거가 되지 못합니다.


.. 대도시에는 차가 너무 많기 때문에 차가 빠르게 이동하지 못한다. 아무리 도로를 넓혀도 그에 비례하듯 차가 늘어나기 때문에 평균 시속에서 자전거는 차보다 빠른 경우가 많다. 택시와 견주어 봐도 자전거는 목적지에 당도하는 데 택시와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자동차 운전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자주 하는 이유가 어찌 보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차를 타고 있으면 당연히 자전거보다 빨라야 하고 도로에서는 항상 우선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자전거보다 빠르지도 않고 도로는 항상 차들로 북적인다. 개념과 현실의 괴리인 것이다. 빨리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탔는데, 지하철을 타고 온 사람보다 더 늦게 도착했을 경우 느끼는 허탈감 같은 것이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게 아닐까? … 교통체증은 본질적으로 집회가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자동차가 유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증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 대안은 비장애인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  (279, 303쪽/조약골)


 다만, 취미 자전거를 삶 자전거로 거듭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만 달리다가 혼인을 하면서, 때로는 사랑을 하면서, 짝꿍하고 함께 타려고 하면서 자전거가 달라집니다. 새 식구가 태어나면서 자전거 뒤에 수레를 달아 아이를 태우기도 합니다. 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아이가 혼자서 탈 자전거를 새롭게 장만해 주기도 합니다. 아직 아이가 없을 때에는 ‘자전거 빠르기를 늦추’면서 서로 페달질을 맞춥니다. 페달질을 늦추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운데, 함께 달리는 길을 더 느긋하게 즐깁니다. 천천히, 아니 서로한테 알맞게 달리면서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아예 자전거를 세운 다음 어깨동무를 하며 길가에 나란히 앉습니다.


.. 자동차를 운전하는 어떤 한 개인이 폭력적이어서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 속도와 석유에 중독된 문명에서 폭력이 자연스럽게 자라난다는 것이다 … 전에 지하철을 탔다가 지하철 한 대가 자동차 2247대를 절약하는 효과가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자동차보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방법이겠지만, 자전거를 타는 것이야말로 가장 적은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면서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겨울에 내복 입기 캠페인이나 여름철 냉방온도 높이기, 승용차 요일제 등이다. 솔직히 우습다. 초고층 빌딩 건축을 속속 허가하고, 전국에 골프장을 건설하고, 4대강 정비한다는 핑계로 운하나 파면서 무슨 에너지 절약이고 녹색 운운하는가 ..  (280, 292쪽/조약골)


 자전거책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에는 프랑스 박물관 이야기가 살짝 나오는데, 우리가 프랑스에 있는 어느 박물관으로 나들이를 가려고 한다면, 그곳에 있는 그림 한 점이나 유물 한 점 보려고 갈 수 있으나, 우리가 사는 집부터 프랑스 그곳 그 박물관까지 가는 길에서 만나고 스치고 어울리고 부대끼는 모든 삶자락을 내 가슴으로 느끼려고 하는 데에, 그리고 이렇게 느끼는 가운데 그 그림과 유물 한 점을 받아들이는 데에 깊고 너른 뜻이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여행은 내 삶일 때 비로소 여행입니다. 취미 또한 내 삶일 때 바야흐로 취미입니다. 자전거도 똑같아, 내 삶으로 자전거와 한몸이 될 때에 드디어 자전거입니다.

 자전거가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자전거가 우리를 잡아끈다면, 자전거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면, 자전거로 우리 삶이 아름다워진다면, 바로 ‘자전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전거는 바로 ‘내 삶이기 때문’이며, ‘자전거가 내 삶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입니다. (4342.7.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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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2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거를 안타는 것이 아나리 못타는 거죠.
요즘 웬만한 골목은 차들이 쌩쌩 다녀서 애들이 맘놓고 자전거 탈수가 없읍니다.도로역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는 넘 위험하지요.
마땅한 자전거 도로가 없는데 위험을 무릎쓰고 자전걸 탈순 없지요 ㅠ.ㅠ

파란놀 2009-07-27 12:16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못' 탄다고 생각했으나, 곰곰이 돌아보면 '안' 탄다고 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마음 놓고' 탈 길이 없다는 말은 늘 핑계예요. 아무개 대통령 허튼짓거리를 그대로 손놓고 바라볼 노릇이 아니라, 촛불을 들든 집회를 하든 부딪히듯, 우리는 자전거를 들고 길이든 어디이든 나와야 세상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9-08-0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거에 관련된 시민운동중에 critical mass라는게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떼를지어 주행하는 행사인데요. 원래뜻은 임계질량이란 물리용어로 핵분열 연쇄반응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질량의 뜻인데, 자전거씬에서는 자전거가 자동차로부터 위협받지않고 안전하게 도로를 주행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인원수정도로 쓰이고 있네요. 안전하게 자전거를 어디서든 탈수있는 우리의 권리는 기다린다고 얻을수있는게 아닙니다. 자전거를 타고 나오세요. 그게 시작입니다.

파란놀 2009-08-04 22:32   좋아요 0 | URL
우리 나라에는 발바리가 있고, 저도 퍽 예전부터 함께 달렸습니다.

크리티컬 매스이든 뭐든, 살아가면서 자전거를 타면 됩니다.
 
엄마의 밥상
박연 글.그림 / 얘기구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농사짓는 만화쟁이가 차린 ‘엄마 손맛 밥상’ 이야기
 [살가운 만화 48] 박연, 《엄마의 밥상》



- 책이름 : 엄마의 밥상
- 글ㆍ그림 : 박연
- 펴낸곳 : 얘기구름 (2008.8.5.)
- 책값 : 9800원


 (1) 집밥과 바깥밥, 도시락과 손맛


 일본만화 《아빠는 요리사》는 어느새 낱권책으로 100권을 넘겼습니다. 밥 이야기를 다룬 다른 만화 《맛의 달인》 또한 100권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와 같은 만화책을 보면 일본은 참 대단하구나 하고 느끼는데, 이런저런 밥 이야기 만화 가운데 널리 사랑받는 《미스터 초밥왕》이라든지, 또는 마실거리 만화 《신의 물방울》이라든지, 또는 《라면 요리왕》이나 《따끈따끈 베이커리》 같은 만화책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남자가 주인공이며 요리사이거나 장인입니다. 포장마차나 선술집 아지매나 할매를 빼놓고, 여자가 ‘밥하는 일’을 맡는 때는 퍽 드뭅니다.

 그러고 보면, 만화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둘레에서도 웬만한 ‘고급요리집 요리사’는 으레 남자입니다. 회집에서 물고기 비늘과 살점을 가르는 사람 또한 거의 남자입니다. 집안에서 집밥을 하는 사람은 으레 여자인 가운데, 집밖에서 바깥밥을 하는 사람은 으레 남자라고 할까요.


.. “정말 너무해!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끌고 오질 않나? 살찐다고 과자랑 음료수도 못 먹게 하고! 반찬은 맨날 풀만 준다니까! 지난번에는 준비도 없이 끌려왔다가 과자가 먹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엄마 몰래 준비한 비상식량인데 이것마저 못 먹게 하시려는 거야. 너두 먹어.” “아, 아니, 괜찮아.” “살찔까 봐 그러지? 나도 잘 알아.” “아, 아냐, 그게.” “깡마른 애들이 더 무섭다니까. 나 혼자 다 먹고 살찔 테니 걱정 마.” “난 먹으면 안 돼. 과자에 알레르기가 있거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과자 알레르기라니, 그런 게 어딨냐?” “진짜야.” “됐네!” “알았어. 그럼 딱 한 개만 먹을게.” ..  (23∼24쪽)


 몇 해 앞서 《빈민의 식탁》이라는 일본만화를 보며 참으로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만화감도 재미있고 이야기 짜임새도 재미있으며 마무리도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5권으로 끝나서 아쉬웠는데, 이 만화책 또한, 집에서 ‘가난한 식구들 밥차림’을 하는 사람은 아빠(남자)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부모님 집에서 나와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삶이 그때부터 오늘까지 열 몇 해째 고이 이어집니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아기와 씨름하느라 고단해도, 잠들기 앞서 누런쌀과 여러 잡곡을 씻고 일어서 불려 놓아야 하고, 아침이 되면 언제나처럼 냄비나 뚝배기에다가 밥을 안쳐야 합니다. 그나마 하루에 한 번 밥을 하고, 따로 여러 가지 반찬을 마련하지 않으면서 밥을 먹으니 일손은 적다 할 텐데, 그렇다 할지라도 집안일은 밥하기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에 날마다 만만하지 않은 일손에 치이고 시달립니다.

 꼭 이런 탓은 아니지만, 이렇게 스스로 밥을 차려서 먹어 온 삶이다 보니까, 집 바깥에서 돈을 치르고 사먹는 날이든 누군가 밥을 사 주는 날이든,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제 앞에 놓인 밥그릇을 깨끗이 안 비울 수 없습니다. 밥알 하나 반찬 한 점에 얼마나 많은 품과 땀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또렷이 알기 때문에, 언제나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아기한테 밥을 먹이다 보면 아기는 밥을 안 먹겠다며 고개를 홱 젓거나 손으로 숟가락을 쳐서 온 방바닥을 밥풀투성이로 만들곤 하는데, 옆지기와 저는 이 밥풀을 주섬주섬 주워서 우리 입에 넣습니다. 오래도록 밴 버릇이라고도 할 테지만,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밥을 남기거나 버리거나 하지 못합니다.


.. “엄마, 저 누나야! 저 누나가 우리한테 과자 줬어!” “헉! 안 돼!” “저 누나 때문에 우리가 아픈 거야!” ‘저, 저 녀석 자기 입으로 맹세해 놓고 이제 와서 배신을 때리다니!’ … “잘 한다∼ 과자 가방 메고 도망칠 때부터 사고칠 줄 알았어.” “히잉,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말야.” “가공 음식이나 과자, 음료수 종류가 얼마나 몸에 나쁜지 뉴스 보면서도 몰랐어?” “너도 생각이 있는 애라면 이번엔 느낀 점이 많을 테지?” “사람도 자연의 일부란다. 그러니 자연에서 나는 신선한 것들을 먹어야 건강한 거야. 엄마 아빠가 힘들여서 주말농장을 찾아오는 이유도, 도시에 길들여진 네게 자연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싶어서란다. 여름아, 사방을 둘러보렴. 눈길 닿는 곳마다 생명의 기운들이 가득하지 않니? 우리 앞으로 저 자연과 많이 친해지자꾸나.” ..  (33∼35쪽)


 엊그제 동네 이웃집에서 큼직한 북어 대가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어른 주먹 둘보다 큼직한 대가리로, 끓는 물에 한참 우린 다음 감자와 양파를 넣고 더 끓여 감자국을 했습니다. 소금과 된장으로 간을 맞춘 감자국은 국 가운데 가장 손이 덜 가고 쉽게 끓이는 국이라 할 만한데, 어릴 때에 집에서 감자국을 퍽 자주 먹었다고 떠올립니다. 제가 입이 짧아 자주 해 주셨는지, 살림이 팍팍해 다른 국거리를 장만하기 어려워 자주 해 주셨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참 푹 삶아 감자가 흐물흐물해지며 풀어지던 감자국 맛은 다른 어느 고기국이나 고기 반찬보다 제 혀에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입맛이 없을 때 무슨무슨 맛난 밥을 찾아서 먹는다고 합니다. 저는 입맛이 없은 적도 없지만, 입안이 텁텁하거나 힘들다고 느끼면 으레 감자국을 끓입니다. 감자만 넣든 감자와 양파를 넣든.

 이 감자국은 저도 먹고 옆지기도 먹고 아기도 먹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기는 이 감자국을 틈틈이 먹겠지요. 나중에 아기가 자라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된다면, 그때 우리 아이한테 감자국은 어떤 맛으로 남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냥 잊혀질는지, 아이도 무언가 이야기 하나 남은 국거리로 남을는지.


.. “세상에, 분꽃 좀 봐!” “예쁘죠? 여긴 제가 가꾸는 작은 꽃밭이에요. 그런데 분꽃은 항상 저녁에 피어요? 환한 낮에 피면 훨씬 예쁠 텐데.” “그러게. 어릴 때 고향집에서 보고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아주 잊고 살았던 꽃이야. 네 할머니가 분꽃을 좋아하셔서 마당 한켠에는 꼭 분꽃을 심으셨단다.” “헤헤, 할머니도 나처럼 꽃을 좋아하셨네요.” “저녁 무렵 꽃잎이 열리면 은은한 분꽃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어, 향기가 나는 줄은 몰랐어요.” ..  (143쪽)


 폭식증이 있는 옆지기는 속이 허전할 때면 감자 두 알쯤 강판에 갈아 감자지짐이를 합니다. 감자지짐이를 할 때면 가끔 “또 감자지짐이인데 질리지 않아요?” 하고 물어 옵니다. “난 감자지짐이만 날마다 먹어도 좋아.”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1∼93년 세 해에 걸쳐, 제 도시락은 꼭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1991년에는 김밥. 1992년과 1993년은 볶음밥. 어머니는 아버지와 형과 저, 이렇게 세 사람 도시락을 날마다 싸야 했는데, 형과 저는 밤 열 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얽매여 지내는 중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둘씩 싸야 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도시락 다섯 통을 싸야 한 셈인데, 이렇게 도시락을 싸자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반찬을 해도 빠듯합니다. 더구나 형이든 저이든 아버지이든 열한 시는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에도 또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차려 주셨으니, 날마다 고된 나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되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을 텐데, 어머니는 “도시락 반찬 하기 너무 힘들다.” 하고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반찬하는 고단함을 덜려면 어떡해야 할까’ 하는 걱정과 근심이 이어졌습니다. “그럼 날마다 똑같은 밥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날마다 반찬을 새로 안 해도 되는 도시락이면서, 날마다 가장 빠르고 손쉽게 싸는 도시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니, 김밥 싸기입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김밥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외려 김밥 싸기가 더 번거로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밥속 여러 날 치를 미리 만들어 놓고 둘둘 싸면 되니까 일손을 어느 만큼 줄일 수 있기는 했을 테지만, 더 손이 가야 하는 도시락이었겠지요. 김치와 밥만 싸면 되는 도시락이라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텐데, 제가 입이 짧아 김치를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에, 어머니로서는 걱정이 크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반찬을 생각하기보다 김밥을 쌀 때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해를 김밥 도시락으로만 들고 다니다가, 이듬해와 다음해에는 볶음밥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반 대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고, 군대에서 ‘김치 못 먹던 버릇’을 고쳤습니다. 군대 김치는 집에서 먹듯 매운김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어렴풋이 느꼈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고추가루가 범벅이 된 김치는 거의 삭여내지 못했습니다. 고추가루 기운을 물에 헹구어 내면 어느 만큼 삭여냈고, 흰김치는 때때로 먹곤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셨겠지만, 모든 사람이 ‘빨간김치’를 잘 먹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고추장에는 설탕을 타니, 단맛 때문에라도 먹는다지만, 맵기만 한 고추나 고추가루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양구 읍내 밥집에서 먹던 나물 반찬 때문에, 제 몸에 맞는 먹을거리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한테는 절인 김치가 아닌 ‘날것대로 먹는 푸성귀’나 ‘살짝 데친 나물’이 가장 몸에 잘 받는 먹을거리였습니다. 저는 찬국수(냉면)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콩국수 또한 조금만 먹는데, 차고 시큼한 국물은 제 몸에 안 받습니다. 뜨겁고 부드러운 국물만 제 몸에 받습니다. 김치찌개는 못 먹고 된장찌개나 청국장이나 우거지국은 잘 받습니다. 어릴 때부터 먹을거리를 놓고 하도 탈이 잦았기에, 탈이 나면서 조금씩 제 몸을 알아갔는데, 누군가 찬국수를 사 준다면서 억지로 시켜 제 앞에 차려 놓아 주면, 애써 시켜 주었기 때문에 안 먹을 수도 없어 몇 젓가락이라도 뜨는데, 이렇게 몇 젓가락이라도 뜨면 으레 한 주 내내 배앓이를 하며 밥을 못 먹습니다.

 옆지기는 저하고 거꾸로입니다. 옆지기는 매운김치도 잘 먹고 찬국수는 아주 좋아합니다. 국물 있는 국과 쌀밥이 잘 안 받습니다. 이런 엄마 아빠한테서 새 목숨을 받은 아이는 나중에 어떤 몸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엄마 밥상대로 차려 주어야 할는지, 아빠 밥상대로 차려 주어야 할는지, 아이는 아이대로 다른 밥상을 차려야 할는지 차근차근 지켜보아야 합니다.


.. “뭔 청승이여, 밥숟갈 뜨다 말고?” “아주머니 청국장에서 고향 냄새가 나서요. 이렇게 진하고 깊은 맛이 나는 청국장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청국장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어려운 거라고.” “아유, 모르시는 말씀 마세요. 도시 사람들은 이런 냄새 자체를 싫어하거든요. 청국장이 몸에 좋다고 하면서도 그 냄새는 싫어해요. 청국장 한 번 띄우려면 냄새 때문에 눈치가 보이거든요.” “하긴, 배때기가 불러서 그런가. 내 새끼들도 냄새 난다고 안 가져가더만.” “요즘은 냄새 안 나는 청국장도 나온다지만, 아, 냄새가 없으면 제맛도 안 나요. 한번은 몰래 청국장 띄우는데 딸애가 교복에서 이상한 쉰내가 난다고, 냄새가 지워질 때까지 학교에 안 가겠다면서 얼마나 울어대던지.” ..  (166∼167쪽)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어릴 때부터 제 어머니한테서 받아 온 밥상과, 혼인한 다음에 남편한테서 받은 밥상을 받으면서 저 스스로 제 몸에 맞는 밥이 무엇인지를 차츰차츰 깨달아 옵니다. 저는 저대로 제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받은 밥상하고, 혼인한 다음 옆지기한테서 받은 밥상에 따라 제 몸에 어떤 먹을거리가 알맞는가를 하나하나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옆지기 밥차림이 더 맛있다거나, 제 밥차림이 더 맛있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사랑과 믿음을 담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밥차림이 되고자 합니다.

 ‘엄마 손맛 = 고향맛’인 듯 여겨 버릇하는 사회 흐름이며, 이러한 사회 흐름이 문화라고 하는 우리 삶터입니다. 겉으로는 일자리에 높낮이나 계급이 없다 하지만, 어느 일자리이든 벌이가 다르고 대접이 다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버젓이 있고, 이주노동자 또한 숱하게 있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 여남평등 들먹이더라도, 집밥이든 집살림이든 여자한테 주어진 몫이라 여기는 한편, 아예 ‘여자(아줌마) 가정부’를 돈을 주고 쓰는 일도 흔합니다. 이리 되든 저리 되든, 한 사람으로서 밥을 하고 살림을 꾸리는 흐름과 문화는 거의 뿌리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조차 되지 않습니다.

 자유가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버스와 택시와 크레인을 여기사가 다루어야 평등이 되는지, 남간호사가 있어야 평등이 되는지, 일이름 앞에 ‘남-’이나 ‘여-’를 붙이지 않아야 평등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이라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제 앞가림을 저 스스로 하는 자유와 평등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제 앞가림을 저 스스로 하는 첫길은 바로 밥차림입니다. 다음은 옷차림입니다. 다름은 집차림이고, 집살림입니다. 제 밥을 제 손으로 차릴 줄 모르고, 제 옷을 제 손으로 손질하고 빨 줄 모르며, 제 집 치우기와 꾸미기를 제 손으로 할 줄 모른다면, 어떠한 제도와 이론과 학문으로 평등이나 자유를 외친들 모두 덧없는 지식조각으로 그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한테는 ‘엄마 손맛’도 ‘아빠 손맛’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 식구 손맛’이나 ‘사람을 살리는 밥 한 그릇 손맛’만 보여줄 뿐입니다.


 (2) 《엄마의 밥상》이라는 만화책


 만화쟁이 박연 님은 1980년부터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1982년부터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에 다시 서울로 와서 만화를 다부지게 그려 보자고 마음먹었다지만, 서울은 느긋하게 지내기 어려우며 천천히 둘러보며 걸어다닐 길이 너무 없다고 느끼며, 1987년에 다시 시골 농사꾼 삶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나라에 ‘농사를 지으며 만화를 그린다’든지, ‘만화를 그리며 농사를 짓는다’든지 하는 분이 몇쯤 될까 궁금한데, 박연 님은 퍽 예전부터, 그러니까 만화를 처음 그렸을 무렵부터 ‘농사꾼이며 만화쟁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화쟁이이면서 농사꾼’인 셈이었습니다.


.. “근데 넌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사진 찍고 있었어. 꽃 사진 찍는 게 취미야.” “꽃? 무슨 꽃?” “저기 봐. 하얀 민들레야. 신기하지?” “에이, 민들레가 뭐가 신기해. 흔한 거잖아.” “모르시는 말씀. 하얀 민들레는 우리 나라 토종 꽃이야. 우리가 흔히 보는 노란 민들레는 서양 꽃이고 …….” ..  (25쪽)


 박연 님이 처음 그린 작품이라든지 나중 그린 작품이라든지, 박연 님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헤아릴 만한 작품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5년에 내놓은 《들꽃 이야기 1》(허브)에 당신 삶을 소롯이 담아냈습니다. 그런 다음 세 해가 지난 2008년에 내놓은 《엄마의 밥상》에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하고도 함께 나누려는’ 몸짓을 부드러이 선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들꽃 이야기 1》만 나오고 2번이나 3번은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번마저도 출판사에서 더 찍어내지 않습니다. 지난 2008년에 펴낸 《엄마의 밥상》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주말농장 일구는 삶’를 줄거리로 담아내는데, 이 만화는 한 권으로 끝내는 작품이 아니라 《엄마의 밥상》이 1권이 되어 앞으로 2권이며 3권이며 나와야 할 작품이건만, 이참에도 뒤엣권이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농사짓는 만화쟁이 박연 님이 아무리 살갑고 따뜻하고 재미나게 《들꽃 이야기 1》하고 《엄마의 밥상》을 그려냈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들은 이 살가움과 따뜻함과 재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받아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엄마이든 아빠이든 어버이 된 사람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려 준 밥상에 담긴 맛과 멋을 아이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구나 아이한테 차려 주는 밥상에 제대로 사랑을 못 담고 있는 오늘날에는, 아무래도 《들꽃 이야기 1》하고 《엄마의 밥상》은 퍽 어려운(?)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우와 그럼 쟤(오리)들이 농사꾼이라는 얘기네.” “맞아, 쟤들이 사람 대신 여름 내내 벌레랑 잡초들을 잡아 주니까.” “야, 정말 신기하다.” “서울 촌놈에겐 신기하겠지!” “뭐, 서울 촌놈?” ..  (66∼67쪽)


 뭐랄까. 모두들 ‘서울 촌놈’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꽃내음 하나 맡을 줄 모르게 되었잖습니까. 장미 냄새는 맡을 줄 안다지만, 꽃다지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서울내기 코가 있겠습니까. 튤립 냄새는 맡을 줄 알아도, 냉이꽃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서울내기 코가 있을까요. 백합 냄새나 수선화 냄새를 맡는다 하여도, 오이꽃과 도라지꽃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서울내기 코는 얼마나 될까요.

 그나마 호박꽃은 보기는 보았을지 몰라도, 무꽃이나 감자꽃이나 고구마꽃이나 파꽃이나 배추꽃을 본 서울내기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른이든 아이이든. 지식인이든 노동자이든. 부엌데기로 지내는 아줌마이든 회사원으로 지내는 아저씨이든.


.. “난 울 엄마가 해 주는 거 맛없어.” “?” “밖에서 사먹는 게 제일 맛있어.” “그거야 미남이 엄마는 바빠서 신경을 많이 못 쓰니까 그렇지.” “맞아, 맞아.” “헹! 일요일에도 귀찮다고 시켜먹는걸.” “살림하랴, 직장 다니랴, 너무 힘드니까 좀 쉬고 싶은 거지. 그래도 네겐 항상 좋은 것만 주고 싶어하신다구. 그러니까 이모가 부탁받고 대신 해 주지 않니.”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 나도 우리 엄마의 손맛을 느껴 보고 싶다구요.” ..  (174∼175쪽)


 아침마다 언제나처럼 지난 밤에 나온 기저귀 빨래를 하며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빨래를 않고 있습니다. 아기하고 옆지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때, 아빠 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며 밀린 글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깨어나면 글쓰기고 책읽기고 할 수 없습니다. 얼른 글쓰기를 얼마쯤 마치고 아침밥을 안쳐야 하고, 그런 다음 기저귀며 여러 옷가지를 빨아야 하며, 마루바닥까지 훔쳐 놓아야 합니다.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숱한 일감인데, 이 일감을 기계한테 맡긴다면, 그러니까 빨래기계한테 맡기고, 밥기계한테 맡기고, 청소기계한테 맡기고, 냉장기계를 두면 일손이 줄어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집안일을 맡는 일손은 그냥 일손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집안일 맡는 일손은 살림하는 일손입니다. 살림이란 ‘삶’입니다. 살림꾼이란 ‘삶꾼’입니다. 내 목숨을 간수하는 일이 삶이고 살림입니다. 나한테 한 번 주어진 삶을 더 알차고 사랑스레 붙잡는 일이 바로 살림입니다. 집살림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해야 할 지겨운 일거리나 짐덩이가 아니라, 날마다 똑같이 맞아들이는 고마운 ‘목숨잇기’입니다.

 날마다 똑같이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면서, 날마다 똑같이 일을 하고 놀이를 즐기고 아이를 어릅니다. 어느 하나 이어지지 않은 고리가 없고, 어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습니다. 집안일을 하다가 왼손을 좀 크게 다쳐 두 달 남짓 손을 제대로 못 쓰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손빨래를 그치거나 남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밥하기를 다른 어느 누가 우리 집에 와 주어서 해 줄 수 없으며, 바깥밥을 사먹을 형편 또한 아닙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참고 견디면서 하루하루 내 온 땀을 들여 사랑이 밴 옷가지를 아이한테 내주고 믿음이 스민 밥그릇을 아이한테 내밉니다.

 우리 살림을 꾸리는 곳은 비록 도시이지만, 우리 살림을 이루는 무엇이든 시골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저와 옆지기 손품을 들여 서로서로 나누고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낮에는 갓난쟁이한테 기저귀를 안 채우는데, 마루바닥과 부엌 곳곳에 오줌을 싼 다음, 이 녀석이 엎드려서 오줌을 손바닥으로 휘젓습니다. 물장난을 치는가 싶기도 하고, 가만히 보면 지 엄마와 아빠가 걸레질을 하며 오줌을 닦아내는 모습하고 닮았습니다. 오늘은 한번 아기 손에 행주를 쥐어 줘 볼까 합니다.


.. 아기 피부같이 부드러운 흙속에선 봄이면 수많은 생명이 깨어나 기지개를 켠답니다. 꼬물거리는 작은 벌레, 딱딱한 씨앗을 뚫고 힘차게 자라나는 새싹, 그리고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짐승들까지. 봄의 밭에는 넘치는 생명이 가득하지요 ..  (40쪽)


 만화책 《엄마의 밥상》은, 《행복한 밥상》과 《소박한 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아직 뒷소식은 없습니다. 농사짓겠다고 도시를 등지는 사람이 제법 늘고, 주말농장 하는 분 또한 꾸준히 늘지만, 《엄마의 밥상》을 품에 안으면서 ‘나 스스로 내 발을 흙에 디디고 내 손에 호미와 낫을 들고 풀을 다스리려 하는 까닭은, 바로 이 흙이 우리 모두를 낳았으며 내가 오늘을 살게 하는 사랑터’이기 때문임을 깨닫는 사람까지는 좀처럼 늘지 못해서인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농사짓는 만화쟁이 박연 님 다음 작품을 몇 해 사이에 구경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그러나, 《엄마의 밥상》 하나는 튼튼하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둘째 아이(책)도 태어나고 셋째 아이(책)도 태어난다면 더 반가울 테지만, 아이 하나로도 얼마든지 기쁘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곰곰이 삭이고 찬찬히 되삭이고 꾸준히 거듭 삭이면서 이 하나를 사랑해 주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기다려야지요. 둘째와 셋째를.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를. 나아가 여섯째와 일곱째를. (4342.7.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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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봉지풀 느림보 그림책 15
방미진 글, 오승민 그림 / 느림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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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봉지가 ‘풀포기’가 되는 우리 삶터
 [그림책이 좋다 69] 방미진+오승민, 《비닐봉지풀》



- 책이름 : 비닐봉지풀
- 글 : 방미진
- 그림 : 오승민
- 펴낸곳 : 느림보 (2009.6.26.)
- 책값 : 9800원


 (1) 비어 있는 그림, 또는 열려 있는 그림


 그림책 《나무》가 있습니다. ‘옐라 마리’라는 분이 나무 한해살이를 말 한 마디 없이 그림으로만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무 말이 없이 어떻게 나무 한해살이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나누어 보여줄 수 있겠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막상 그림책을 펼치고 보면, 참으로 말 한 마디 없기 때문에 이토록 아름답고 싱그럽게 보여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빈자리가 있는 아름다움’이라고도 합니다만, 꼭 빈자리가 있기에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빈자리를 둘 수 있는 마음결이 되기에 아름다울 뿐입니다. 빈자리가 없도록 하는 마음밭이기에 아름다우며, 빈자리를 꾸밈없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바탕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림책 《비닐봉지풀》을 봅니다. 말마디가 아주 짤막합니다.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앞뒤 면지까지 해서 서른 쪽짜리 그림책을 살피는 동안, ‘말없는 그림책’이라고 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말뿐 아니라 그림까지도 붓질이 몇 번 가지 않은 그림이라 ‘그림 드문 그림책’이라고까지 할 만합니다.


― 비닐봉지는 혼자서 놀아. (3쪽)


 국민학교 그림그리기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어느 겨울날이었고, 저는 그때 3학년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러면 1984년쯤일 텐데, 교실에는 나무를 때는 난로가 한복판에 있고, 저는 난로하고 퍽 멀찌감치 떨어진 조금 뒤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추위로 곱는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겨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50분 동안 그림을 뚝딱 그려야 하기 때문에 옆 짝꿍하고 수다를 떨며 놀 겨를이 없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그려내지 못하면 선생님한테 긴 자로 머리를 짝 소리 나도록 얻어맞거든요.

 저는 여느 동무들처럼, 겨울날 눈싸움하는 동네 모습을 어기적어기적 그립니다. 눈이 오는 날 눈싸움 그림이니, 바탕은 온통 하얀 크레파스를 발라야겠는데, 그리 깨끔하게 그리지 못합니다. 그래도 추위에 땀 빼며 그려낸 내 그림이니 혼자서 잘 그렸다고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습니다. 다 그린 그림을 선생님한테 내는데, 어느 동무 하나가 도화지를 온통 하얗게만 발랐습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는 동무인데, 선생님이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니, 온통 눈밭인 모습을 그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뭐야? 그렇게 그려도 되냐?’ 하면서 흠칫 놀랐고,  동무녀석 말이 옳다고 느끼면서, 나도 저렇게 생각했으면 더 쉽게 그렸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동무녀석이 그렇게 하얗게만 바르며 눈밭을 나타내는 그림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누구한테서 들었는지는 알쏭달쏭입니다. 누구한테서 들었든 책에서 보았든, 그 녀석이 우리 반에서는 맨 처음으로 그렇게 그렸으니, 앞으로 다른 동무들은 그렇게 따라 그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 그리면 흉내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은 “아무개는 훌륭한 상상력으로 이렇게 그렸지만, 다른 녀석들은 이렇게 따라 그리면 맞아죽을 줄 알아!” 하고 윽박질렀습니다.


― 비닐봉지가 풀 사이에 앉았어. 조심조심 풀인 척. (11쪽)


 눈밭을 하얗게만 그리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데에서도 얼핏 들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점 하나만 찍는 그림도 있다는 이야기 또한 뒷날 들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점 하나 찍어 놓고서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점 하나만 들여다볼’ 뿐이고, 점을 둘러싼 아주 넓은 하얀 자리는 못 본다는 이야기도 어느 때인가 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학교 그림그리기 시간에는, 언제나 ‘종이를 꽉 채우는 그림’만 배웠습니다. 빈자리 하나 없이 무슨 빛깔로든 채우도록 배웠고, 못 채우고 남긴 곳이 있으면 자이든 몽둥이든 지휘봉이든 무엇으로든 신나게 얻어맞은 다음 채워넣기를 해야 했습니다.

 이제 와 그 지난날을 돌아본다면, 학교 그림그리기 시간은 우리한테 생각날개를 달아 주는 그림그리기라기보다 시간을 때우는 제도권 수업과정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 가만, 풀들이 손짓해. 같이 놀자고! (17쪽)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라고 떠오르는데, 이무렵 학교 국어시간에 ‘여백의 미’라는 말마디를 배웁니다. 쉽게 풀어내면, ‘빈자리가 있는 아름다움’이요, ‘빈 곳을 남기는 아름다움’이며, ‘굳이 다 채우지 않는 아름다움’입니다.

 채워서 맛이기도 하나, 안 채워서도 맛입니다. 역사책 《연려실기술》에는 빈자리를 마련해 놓았다고 하는데, 이 역사책을 처음 쓸 때에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대목’이 틀림없이 있을 터이니 뒷사람들이 채워 놓을 수 있게끔 빈자리를 두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리는 그림도 ‘그날그날 꼭 그리고픈 만큼’만 그린 다음, 나중에 더 생각이 나거나 다른 마음이 들 때 더 그려도 됩니다. 어떤 사람 눈으로는 ‘마무리 안 된’ 모습일지라도, ‘마무리 안 된 그대로 좋은’ 그림일 수 있습니다. 마무리가 다 되었다 할지라도, 기나긴 세월이 흐른 다음 돌아보면 ‘좀더 손질하거나 보태어야 할’ 그림이 될 수 있어요.

 그래, 그림책 《비닐봉지풀》은 빈자리가 넘실넘실거리는 그림책입니다. 빈자리가 가득가득인데 고작 서른 쪽짜리 그림책이면서 값은 9800원입니다. 책방에 선 채로 후루룩 라면 먹듯 훑으면 몇 분이 되지 않아 후딱 읽어치울 만합니다. 이 그림책 그림 하나하나를 한 시간씩 물끄러미 바라볼 사람이 있을 테지만, 이 그림책을 돈다발 세듯 주루룩 넘기며 “책 하나 다 봤어!” 하고 외칠 사람이 있습니다. 이 그림책을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서 덮었으나, 다음날 다시 한 번 들출 사람이 있고, 그 다음날 또다시 들출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거듭 들출 사람 또한 있겠지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에 넉넉한 자리를 두고 있다면, 그림책 《비닐봉지풀》이란 넉넉한 마음자리로 받아안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에 넉넉한 자리를 두지 못한다면, 그림책 《비닐봉지풀》이란 시시껄렁하다고 한 번 훑고 잊어버릴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2) 비닐봉지와 우리 삶


 그림책 《비닐봉지풀》은 세 해가 꼬박 들도록 애써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이라고 합니다. 말마디 몇 줄 없고 그림자리 몇 가닥 없는 데에도 세 해를 꼬박 바친 책이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비닐봉지풀》은 퍽 썰렁하구나 싶도록 느끼게 되는 그림책입니다. 다만, 몹시 바쁜 우리 삶에 잠깐 느긋한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쉬는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이야, 참 환한 그림책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어린아이 하나가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흐름을 좇을 수 있다면, 그림책 《비닐봉지풀》을 보면서 어렴풋이 그림책 《나무》를 떠올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에 흩날리다가 길가 풀포기에 걸린 비닐봉지를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가브리엘 벵상’ 그림책 《꼬마 인형》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켜보거나 바라보거나 들여다보아 주는 이 없는 ‘버려진’ 비닐봉지가 어찌 되는가에 눈길을 둘 수 있는 마음새라 한다면, 책을 덮고 나서 ‘마리 홀 에츠’ 그림책 《나무 숲속》이 생각나 이 그림책을 새롭게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랴 싶습니다.


― 비닐봉지풀은 바람이 되었어. (28쪽)


 시를 쓰면 문학잡지에서 으레 한 꼭지에 5만 원이나 10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긴시를 쓰건 짧은시를 쓰건 매한가지입니다. 소설이나 산문을 쓰면 원고지로 셈해 한 장에 1만 원을 주곤 합니다. 원고지 1장에 2만 원 넘게 주는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열 몇 해 앞서도 시값은 5만∼10만 원이었고, 소설이나 산문 쓰는 값도 원고지 한 장에 5천∼1만 원을 쳐 주었습니다.

 나라안에 시를 실어 주는 문학잡지는 그리 많지 않으며, 나라안 시인 숫자를 헤아린다면, 한 달에 두 군데 문학잡지에 시 두 꼭지씩 싣는다 하면, 시를 써서 20만∼40만 원을 버는 셈입니다. 그런데, 다달이 시를 실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문학잡지는 얼마나 될까요. 얼마나 많은 시인이 당신 시를 문학잡지에 실을 수 있을까요.

 그림책 《비닐봉지풀》을 덮으면서 문학쟁이들 글삯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ㅅ 일꾼하고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그분은 “아직도 원고지 한 장에 만 원밖에 안 줘요? 5만 원은 줘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3년 전 7월 어느 날, 은행나무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은행알들이 다글다글 붙어 있었거든요. 외로워서 저렇게 꼭 붙어 있구나. 꽃들도, 풀들도, 모두 외로워서 닿으려고 닿으려고 손을 뻗으며 안간힘을 쓰는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길가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낄 곳이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요. 사람들이 삼삼오오 오가는 거리에서 그 풍경에 녹아들지 못하는 내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그 비닐봉지처럼 느껴져서 한참을 바라보았지요 ..  (글쓴이 방미진 님 말)


 이 땅에서 ‘사람 돌보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랜드 노동자들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았을까요? 대학교 등록금이 한 해 천만 원이라지만, 오늘날 유치원 한 해 교육삯 또한 천만 원이 조금 못 미칠 만큼 들어가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학원을 보내고 학교옷을 맞춰 주고 급식비 내고 뭐 하고 저거 하느라 바쳐야 하는 돈이, 해마다 얼추 천만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해에 삼천만 원을 번다 한들, 아파트 장만하려고 진 빚을 갚느라, 자가용 굴리며 기름 넣고 보험삯 내랴, 또 때때로 식구들하고 나들이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책도 사 읽히느라, 또 가끔가끔 맛난 바깥밥을 사먹이고 동무들하고 술잔을 부딪히느라, …… 제법 많은 돈을 일삯으로 받고 있다고 하여도 모두들 한목소리로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가난한 이는 가난한 대로 힘들고, 돈있는 이는 돈있는 대로 힘듭니다. 모두들 너무 힘들고 고달프다 보니, 더 ‘내 한 몸 사리기’로 움츠러들고, 이러면서 바깥으로 내쳐진 사람이나 따돌려진 사람이나 시달리는 사람들은 더 춥고 배고프고 쓸쓸합니다. 가게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비닐봉지’를 못 쓰도록 법률을 마련했다 하여도 어느 가게에나 비닐봉지는 많이 쓰입니다. 게다가, 비닐봉지를 안 쓴다 하여도 큰 마트마다 물건들을 죄다 비닐이나 랩으로 뒤집어씌워 놓고 있습니다.

 맨흙이 드러나는 땅바닥이 거의 모두 사라져 버린 도심지에는 망초처럼 목숨이 질긴 들풀이 뿌리를 내릴 만한 구석이 거의 없습니다. 보기 좋으라고 심은 벚나무는 스무 해라도 버티면서 도심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 도시에서는, 또 시골에서도, 푸른빛을 뽐내는 풀과 나무를 만나기는 만만하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길에서 푸르디푸른 푸나무를 만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아파트에서 자가용으로 갈아타고, 자가용에서 내리면 곧바로 시멘트와 쇠붙이로 지은 건물에 들어가서 하루를 보낸 다음, 다시 자가용을 타고 몇 군데 가게를 들러 아파트로 돌아옵니다. 하늘 올려다볼 틈이건 땅 내려다볼 겨를이건 없는 가운데, 집구석에서 키우는 꽃그릇 하나라도 제대로 살펴보는 말미란 없다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비닐봉지풀’만 저 혼자 외따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다가는, 온 동네방네 심어 놓은 은행나무와 벚나무 가지에 걸려 새까만 나뭇잎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4342.7.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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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20 18:29   좋아요 0 | URL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ㅅ 일꾼이시라면 숨어있는 책 사장님을 말씀하시나요.이분이 헌책방하시기전에 무슨 출판사에 편집장으로 계셨다고 하시는것 같던데요

파란놀 2009-07-22 12:33   좋아요 0 | URL
<숨어있는 책> 사장님은, 열화당과 눈빛 출판사에서 일하시다가 그만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