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살이 (양장) 겨레 전통 도감 1
윤혜신 글, 김근희.이담 그림, 토박이 기획 / 보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전통문화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만 머물까?
 [잠깐 읽기 45] 토박이+윤혜신+김근희ㆍ이담, 《살림살이》



- 책이름 : 살림살이
- 기획 : 토박이
- 글 : 윤혜신
- 그림 : 김근희(세밀화), 이담(펼친그림)
- 펴낸곳 : 보리 (2008.12.30.)
- 책값 : 35000원



 (1) 집안살림과 집밖살림


 우리 어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집밖일을 도맡아 하는 분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삶을 들여다보면서, 저 또한 이러한 길을 걸었음직하지만,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은 조금도 안 걷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옆지기가 낳아 키우는 아이도 제 엄마 아빠가 걷는 길을 안 걸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남자 = 집밖일’, ‘여자 = 집안일’처럼 가르는 길이 마땅하지 않다고 느끼며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 길을 거스릅니다. 옆지기가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 집안일을 제가 거의 도맡고 있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할지라도, 저는 언제나처럼 집안일과 집밖일을 많이 맡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집안일을 제가 거의 다 하고 집밖일은 옆지기한테 맡긴다든지요.


.. 살림살이 가운데에는 지금 아줌마가 즐겨쓰는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어. 이런 살림살이는 사람들이 더 쉽고 편하게 살림을 하려고 만들어 낸 거야. 저마다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 조금씩 고쳐 가면서 점점 더 쓸모있게 만들었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살림을 하는 데 이 많은 살림살이가 다 쓰이고, 또 쓰임에 딱 맞는 것이 있다는 게 말이야. 아줌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바로 이 ‘살림’이라는 말이야. 말 그대로 살림은 우리가 먹고 자고 입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일이지. 우리는 살리는 일, 살림. 사람들은 살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 같아 ..  (머리말)


 어머니는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 나라 숱한 어머니는 모조리 ‘가정 주부’라고 봅니다. 엊그제 옆지기네 고모님 댁에 다녀왔는데, 옆지기네 고모님은 하나같이 ‘가정 주부’입니다. 빈 그릇 치우기라도 거들고 싶지만,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치울라치면, “최 서방이 일어나니까 우리가 앉아 있을 수 없네.” 하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릅니다. 사위를 고이 여겨 주시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예 밥상머리에 눌러앉아 밥술만 떠야 하니 속이 메슥거리고 방귀만 뿡뿡 나올 듯해서 힘듭니다. 잠깐이라도 일어나 빈 그릇도 나르고 설거지라도 하며 몸을 놀려야 할 텐데, ‘가정 주부’로 집안일을 도맡아 오신 당신님들한테는 사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외려 바라보기 힘든 노릇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목구멍까지 먹을거리가 차넘칠 때까지 겨우 견디며 밥상과 과일상 들을 받는데,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스스로 너무 오래도록 남자 다르고 여자 다르다는 울타리를 쌓는 바람에 모두 이렇게 생각이 굳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 조상들은 우리네 옛 살림이 사람힘으로만 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어. 세상 모든 일들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라고 생각해서, 늘 자연을 벗삼고 공경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지. 봄이 오면 그 따스함에 고마워하고 반기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였고, 부드러운 봄바람, 따뜻한 햇볕, 단비를 내리는 하늘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산과 들에 가득한 풀을 뜯고 나무에서 물을 받을 때는 땅에 절을 했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사람들은 봄의 충만한 생명력을 즐겼던 거야 ..  (14∼15쪽)


 집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도록 아기하고 씨름하느라 고달픕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우리 옆지기는 우리 아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살림을 꾸리며 아이 돌보는 일이란 그리 어렵지 않은 셈입니다. 우리 아이는 많이 얌전하다(?)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아이를 키우며 보내는 하루하루란 아이 없이 지내던 하루하루하고 견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 없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아이 없이 지내는 삶이 얼마나 단출하고 홀가분하고 호젓하고 손쉽던 나날이라고 떠오르는지. 아이하고 씨름하고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 뿐 아니라 힘들고 벅차다고 느껴지는지.

 그렇지만,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는 하루하루가 싫지 않습니다. 고단하고 지치며 보내는 하루하루이기 때문에 한결 크고 깊은 보람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기보다 먼저 곯아떨어지는 나날이라 하여도 이 삶을 끝끝내 붙잡도록 하는 새힘이 돋고, 이 일 저 일 밀리고 치이면서도 이렇게 밀리고 치이기 때문에 내 이웃 아이를 새삼스레 돌아보고 내 이웃 어른을 다시금 헤아릴 수 있습니다.


.. 예전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웠어. 그래서 아줌마네 어머니는 여름철이면 끼니때마다 식구들이 먹을 만큼만 음식을 만드셨지. 특히 열무김치는 사나흘에 한 번 조금씩 담그셨어. 김치를 담글 때마다 어머니는 빨간 고추와 마늘, 생강을 돌확에 넣고 확확 갈아서 양념을 만드시는 거야 ..  (120쪽)


 살림살이란 내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오늘 하루 내 모습이면서,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꾸리거나 이끌어 나갈 내 모습이면서 꿈과 생각입니다. 내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대로, 내가 앞으로 다른 곳에서 살아갈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기에, 입으로만 읊는 말마디나 믿음이 아닌 온몸으로 보여주는 말과 믿음이 됩니다.

 내가 갖추는 살림살이는 바로 오늘 내 생각과 매무새를 보여주고, 내가 갖춘 살림살이를 다루는 모습은 바로 오늘 내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길과 눈높이를 이야기합니다.


 (2) 살림살이는 ‘죽은 유물’이 될 수 없는데


 집살림 잘 꾸리는 사람을 일컬어, 또 돈을 허투루 안 쓰고 잘 갈무리하는 사람을 가리켜 ‘살림꾼’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어느 모임이나 일터를 잘 꾸린다든지 이끈다든지 하는 사람을 두고도 ‘살림꾼’이라 합니다. 집안 울타리에 머물던 살림꾼이 집밖 울타리 너머까지 뻗는 셈입니다.

 ‘겨레 전통 도감’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림살이》라고 하는 그림백과사전이 하나 선보였습니다. 그림백과사전 《살림살이》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따라, 우리네 여느 살림집에서 어떤 연장을 썼는가를 그림 하나와 글 하나로 나누어 엮어 보여줍니다.

 먼저 봄에는, “장독, 소쿠리, 체, 가마솥, 표주박, 빗자루, 이남박, 조리, 수저, 주걱, 밥통, 주전자, 칼과 도마, 양푼, 푼주, 냄비, 단지, 초병과 초 단지, 기름병, 기름틀, 자라병, 다래끼, 광주리, 동고리, 도시락, 찬합, 보자기”까지 스물아홉 가지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여름에는, “두레박, 바가지, 물동이, 방구리, 물두멍, 물지게, 살강, 찬탁, 그릇, 신선로, 수세미, 밀판과 밀방망이, 국수틀, 국자, 곰박, 확과 확돌, 화덕, 불씨 항아리, 손풀무, 석쇠, 돗자리, 죽부인”까지 스물네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멱둥구미, 바구니, 흡·되·말, 저울, 맷돌, 다식판, 약과 판, 상술 빗기, 술병, 뒤주, 채반, 망태기, 뒤웅박”까지 열다섯 가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겨울에는, “젓갈 항아리, 옹배기, 자배기, 앵병, 절구, 메주 틀, 두부 틀, 시루, 떡판과 떡메, 함지박, 쟁반, 가위, 화로, 곰방대와 장죽, 등잔, 요강, 약달이기”까지 열아홉 가지를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모두 여든일곱 가지 살림살이를 보여주는데, 오늘날 살림꾼 가운데 이 여든일곱 가지를 옹글게 떠올리거나 헤아리는 분은 얼마쯤 되려나 궁금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 여든일곱 가지를 또렷하게 알거나 쓰거나 다룰 줄 아는 분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 오늘날까지 두루 쓰는 살림살이는 많지 않거든요.

 《살림살이》에 나오는 ‘도시락’이나 ‘찬합’은 예전에 쓰던 살림살이이지, 요즈음 쓰는 살림살이가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며 수세미를 쓴다고 하여도, 《살림살이》에 나오는 ‘수세미’를 집에서 길러 마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풀무를 쓰는 사람도 없으며, 물지게를 일 사람 또한 없고, 살강 놓인 부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골 부엌도 죄다 ‘서양 입식 가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살림살이》에 나오는 ‘바구니’는 농사짓는 사람이 자연에서 거둔 들풀로 엮거나 짠 바구니이지, 플라스틱으로 공장에서 뽑아낸 바구니가 아닙니다. ‘가위’ 또한 대장간에서 불을 달궈 쇠망치로 두들겨 만든 가위입니다. 절구는 돌을 깎았을 테며, 떡판이나 시루, 다식판은 나무를 깎았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살림살이를 장만하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부모가 이와 같은 살림살이를 간직하고 있다면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 없다면 돈을 치러 살 수 있습니다.


.. 발효하는 것이 많은 우리 나라 음식에는 장독이 가장 잘 어울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꾸려 온 살림살이는 참 지혜로웠지 ..  (18쪽)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책 사이사이 틈틈이 나오는 “우리 조상들이 꾸려 온 살림살이는 참 지혜로웠지”라는 말마디처럼 우리 옛사람이 ‘슬기롭게 살아온 모습’을 오늘날 아이들한테 보여주며 가르치려는 매무새로 엮었습니다. 이 모든 살림살이는 꼭 알맞춤하게 만들었고, 어느 살림살이나 자연에서 나왔으며, 망가져도 버려지는 일이 없이 되쓰이거나 썩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 옛사람 ‘슬기로운 살림살이’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보여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네 슬기로운 살림살이’는 어짜하여 오늘날 거의 안 쓰이고 있을까요?


.. 옛날에는 빗자루가 흔해서 그랬는지,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어른들이 빗자루채를 거꾸로 들고 혼을 냈어. 커다란 빗자루에 몇 대 맞아도 별로 아프지도 않고 다치는 일도 없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빗자루는 사랑의 매였던 거지 ..  (30쪽)


 그림백과를 덮으며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네 슬기로운 살림살이라 하고 우리 옛사람 살림살이라고 하지만, 그림백과에서 보여주는 거의 모든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에 쓰던 살림살이’입니다. 그나마 ‘조선 전기에 쓰던’ 살림살이는 몇 가지 안 되며, ‘고려’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때 쓰던 살림살이까지 헤아리자면 얼마 없으며, 더 오래도록 이 나라 사람들이 써 온 살림살이가 무엇일까 하고 가누어 보면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참말 ‘살림살이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두고 살림살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림백과 《살림살이》에 나오는 살림살이는, ‘이 나라 여느 살림집에서도 두루 쓰던 살림살이’일는지, 가난한 집에서는 쓰지 않던 살림살이가 있는지, 돈 많거나 사대부집안에서만 쓰는 살림살이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욱이 ‘옛사람 슬기’라 하지만, 그림백과 《살림살이》에 보여지는 모습은 하나같이 ‘여자 손이 가는 물건’일 뿐입니다. 남자 손이 가는 물건이란 없으며, 그림백과 사이사이 곁들인 ‘펼친그림’에 비춰지는 사람들 모습 또한 ‘남자 = 위, 여자 = 아래’인 듯한 가부장 모습 그대로일 뿐입니다. 비록, 지난날 조선 때에 사람들 삶이 ‘여자는 죽도록 집안일을 하며 허리가 휘고, 남자는 양반다리 하고 앉아 높은 자리에서 밥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런 모습을 굳이 그대로 보여주는 일을 ‘전통’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또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문화가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아름답거나 훌륭한 우리네 전통문화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 아줌마가 시어머니께 살림을 하나씩 배워 가는 초보 주부였을 때 일이야. 한번은 시어머니께 크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어.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혼이 났냐고? 쌀을 씻다가 그만 쌀알을 조금 흘려 버렸지 뭐야. 한 스무 톨쯤? 시어머니는 귀한 쌀을 많이 버렸다고 혼쭐을 내셨지. 그때는 시어머니 말씀이 너무 서운했어. 먹다 남은 밥도 버리는데 그깟 쌀 몇 톨에 왜 그러실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줌마가 직접 농사를 지어 보니까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그 쌀 한 톨이 나오기까지 수고한 농부의 손길과 땀, 벼가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밤이슬을 견디고 자란 그 시간을 생각해 봐 ..  (32쪽)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 퍽 넉넉한 살림집 모습’을 바탕으로 ‘우리네 슬기로운 옛사람 전통문화’를 보여주는 틀로 짜여 있는데, 다른 출판사에서 펴내는 다른 전통문화 그림책과 이야기책에서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네 전통문화 연구가 ‘조선 후기 문화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조선 전기나 고려나 더 앞선 때 문화와 삶을 헤아릴 자료가 없는 탓이라 할 테지만, 연구와 상상력을 모두어 더 뿌리깊고 넉넉한 ‘참다운 전통문화 찾기’를 해 본다면 더 뜻이 있고 보람이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리고, 옛날 문화재 더듬어 보기에만 그치지 말고, 오늘날 우리가 기쁘게 즐기면서 앞으로 우리 뒷사람한테 신나게 물려줄 ‘오늘 우리가 누리는 전통문화란 무엇일까’에도 눈길을 둔다면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여자아이들은 예닐곱 살만 되면 작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연습을 했어.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인 만큼 그것을 길어 나르는 것도 큰일이었지. 그래서 부엌에 놓인 물두멍에 물이 얼마나 차 있는지를 보고 그 집 안주인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가늠하기도 했대. 어머니들이 지칠 줄 모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힘은 아마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 박 오가리는 졸여 먹기도 해. 껍질까지 잘 말려서 그릇으로도 쓰니,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다 쓰는 것이,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치는 어머니나 할머니와 마음을 꼭 닮은 것 같아. 박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셈이야 ..  (86, 88쪽)


 아쉬운 대목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세밀화’와 ‘펼친그림’ 두 가지 그림을 나누어 싣습니다. 먼저 펼친그림으로 이야기 흐름을 두루 보여주고, 다음으로 세밀화로 낱낱 살림살이를 도드라져 보이도록 합니다. 한쪽에 그림 하나를 큼지막하게 넣습니다.

 이렇게 넣은 펼친그림은 구수하고 따스하다 싶은 느낌이 배어들게 하고, 찬찬히 그린 세밀화는 ‘이제는 눈으로 구경하기도 어렵게 된 살림살이’ 모습을 잘 살펴보도록 돕습니다. 그림 짜임새를 돌아본다면, 으레 말하는 ‘여백의 미’, 그러니까 ‘빈자리를 두는 아름다움’을 살리려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백과 《살림살이》에서 베푸는 ‘빈자리 두는 아름다움에 따른 큼지막한 그림 하나’는, ‘사진으로 찍어도 되는데 왜 그림으로 굳이 그렸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진으로 찍는 모습하고 다를 다 없다’는 느낌도 듭니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쁨과 재미가 없다’는 느낌에다가, ‘덩그러니 하나만 보여주는 그림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판짜임을 줄이고 작은 그림으로 넣더라도’ 괜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35000원짜리 큰 판짜임으로 할 까닭이 없고, 주머니도감으로 엮어 한결 값싸고 가벼운 책으로 묶었다면 더 보람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왜냐하면, 살림살이는 ‘박제’가 아니요 ‘박물관 유물’ 또한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가까이에서 부대끼는 연장이요, 우리가 늘 만지는 연장이거든요. 이제는 흙으로 빚는 살림살이가 아닌 스테인리스로 찍어내는 살림살이라 할지라도, 살림살이란 다루는 살림꾼이 어떤 마음밭이요 매무새이느냐에 따라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옻이 아닌 니스를 바른 밥상이라 할지라도, 살림꾼 마음이 애틋하다면 살갑고 사랑스러운 손길이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보리출판사에서는 앞으로도 ‘겨레 전통 도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림백과를 더 펴낸다고 밝히고 있는데, ‘겨레 전통 도감’ 2번을 펴낼 때에는 1번인 《살림살이》에서 보여준 좋고 나쁨을 널리 굽어살피고 보듬어 준다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로 겨레 전통문화를 나누는 길을 찾으면 좋겠고, 죽어 버린 박물관 유물유먹 같은 값비싸고 껍데기 우람한 길은 이제 그만 접어두면 고맙겠습니다. (4342.7.13.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책방과 이명박 대통령
 ― ‘헌책방 주인’이 그렇게 고맙다고 한다면



.. 이 대통령이 사재 331억 4200만 원을 기부한 것도 ‘친(親)서민’에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이 대통령은 좌판 장사할 때 자리를 열어준 이웃 가게,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 환경미화원 시절에 일감을 주던 이태원 재래상인 등을 일일이 거명하며 친서민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  〈대전일보〉 2009.7.8.

.. 이 대통령이 중학교 시절 은사, 좌판 장사할 때 자리를 열어준 이웃 가게,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대학생 시절에 일감을 준 이태원 재래 상인들을 일일이 거명한 대목 또한 특기할 만하다. 출연 재산이 이들에 대한 보은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의 소외 계층을 위한 소중한 재원일 것임을 짚어 보게 한다 ..  〈문화일보〉 2009.7.7.


 헌책방버러지인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92년부터 헌책방을 다녔습니다. 1994년에 박상준이라는 분이 쓴 ‘헌책방 순례기’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분이 쓰지 못한 다른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끄적여 보았고, 1994년부터 혼자서 내던 소식지에 헌책방 소식과 이야기를 틈틈이 실으면서, 어설프나마 ‘헌책방 문화 나눔’을 해 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출판사에 다니며 서울에서 일하던 2003년 8월까지는, 짜투리에 아주 작게 실린 ‘헌책방을 다룬 기사’라 할지라도 신문을 모두 챙겨서 그러모았으나, 충북 충주 시골마을로 들어가서 신문 한 장 사읽을 수 없게 된 뒤로는 따로 그러모으지 못했습니다. 고향 인천에 와서도 몇 가지 신문은 도무지 살 수 없는 터라, 기사 모으기는 못합니다. 그저, 인터넷창에서 날마다 ‘헌책방’을 쳐넣으면서 오늘 하루 어떤 기사가 나오는가를 헤아려 볼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대통령선거 때부터, 이 ‘인터넷에서 헌책방 다룬 기사 찾아보기’가 퍽 고달픈 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에 대학교에 다녔다고 하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그무렵 ‘서울 청계천 헌책방’을 다니며 ‘대학교재를 거저로 얻었다’는 이야기가 몹시 많이 떠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선거유세를 할 때면 어느 유세에서든 꼬박꼬박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라는 말마디가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에 뽑힌 다음에 하는 인사말에도 이 말마디가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으로 뽑힌 뒤에도 서민 경제를 이야기하는 연설글에서 어김없이 이 말마디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앞서 313억이 넘는 큰돈을 내놓았다고 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마디를 넣었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 일꾼들은, 이렇게 자주 꾸준히 오래도록 당신들을 칭찬하고 알려주는 이명박 대통령이 더없이 고맙겠구나 싶습니다. 10대 일간지뿐 아니라 온갖 경제신문이며 지역신문이며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라는 글월이 깃들고 있으니까요.

 서울 청계천 헌책방 일꾼한테 고맙다고 밝히는 이 글월은 ‘부자 대통령이지만, 서민을 알고 서민을 걱정하려 한다’는 뜻으로 이명박 정권을 부추깁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어느 대통령도 ‘헌책방 아저씨 고맙습니다!’ 하고 밝힌 적이 없을 뿐더러, 당신들이 헌책방에 다니며 책을 사서 읽었다고 한 적 또한 없습니다. 반지하와 옥탑방을 모른다 할지라도, ‘가난한 학생이라면 으레 다니기 마련’이라 하는 헌책방을 안다고 하니, 다른 여느 정치꾼하고는 사뭇 견줄 수 있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몇 해 앞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똑같은 글월로 똑같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있는 말마디,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퍽 귀에 거슬립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하나같이 이야기합니다. “재래 상인들을 일일이 거명한 대목 또한 특기할 만하다”고. 그런데 조금이나마 이 연설글을 눈여겨보았다면 여러 해에 걸쳐 이 연설글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이어져 왔음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대통령후보로 있을 때, 대통령으로 뽑힌 뒤, 대통령으로 정권을 붙잡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연설글은 앞뒤 차례조차 바뀌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회창 님이 김대중 님하고 대통령 자리를 놓고 부딪혔을 무렵, 이회창 님은 당신 자서전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도 이회창 님은 ‘대학 때 가난해서 청계천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보았다’고 한 줄쯤 밝혀 놓았습니다. 그 책을 헌책방에서 선 채로 읽고 제자리에 내려놓았기 때문에, 당신 목소리를 고스란히 밝혀 놓지 못해 아쉬운데, 저로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에 내로라하는 분들이 젊을 적 가난한 살림이었을 때에는 한결같이 헌책방마실을 했다고 밝히는 대목이 놀랍습니다.

 그렇지만, 썩 반갑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회창 님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대학교재’ 사다 읽은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안 어느 헌책방이든 교재와 참고서를 팔아 살림을 꾸립니다. 교재와 참고서 아닌 책만 다루는 헌책방이 몇 군데 있고, 교재와 참고서보다 여느 인문책을 알차게 다루는 곳이 꿋꿋이 있습니다만, 헌책방에서 ‘교재 장사’는 아주 큰몫을 차지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나라 대한민국은, 아이들(학생들)한테 ‘교재 아닌 책은 못 보도록’ 시험 굴레를 뒤집어씌우니까요. 오로지 시험점수 잘 따도록 교재만 보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딴 책을 보라’고 말하니까요.

 그런데, 아이들은 대학교에 가서도 ‘교재 아닌 딴 책’은 못 보거나 안 봅니다. 대학교에 들어서면 또 그 나름대로 바쁘고 힘겨워 ‘토익이나 토플이니 다른 교재’에 잔뜩 매여 버리거든요.


.. 조선학 연구자는 아울러 고서 수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면서 열렬한 고서수집가가 된 김태준도 그러했다 … 최남선, 양주동, 방종현, 이희승, 이병기, 조윤제, 김태준, 이병도, 황의돈, 이인영, 김양선 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 국만학자ㆍ국어학자ㆍ국사학자ㆍ기독교사가를 아우른 공동 기반은 고서 수집이다. 1930년대 조선학이 논의ㆍ연구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고서를 모아 조선학 연구의 기초를 쌓아 나갔다 ..  《이중연-고서점의 문화사》(혜안,2007) 204∼207쪽


 아직까지도 숱한 언론매체에서는 헌책방(고서점)을 ‘교재나 소설책 싸게 사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지만, 또 이명박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을 들추고 있지만, 헌책방은 ‘교재 싸게 파는 곳’이나 ‘가난한 학생을 도와주던 곳’만이 아닙니다. 이런 얼굴은 헌책방 수많은 얼굴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예나 이제나 수많은 학자와 교수와 연구자들은 헌책방을 찾아다니면서 당신이 파고드는 학문길을 단단히 다스려 줄 좋은 책 하나 캐내려고 땀흘리고 있습니다.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여느 새책방에서 제대로 다루어 주지 않아 사라져 버린 좋은 책을 찾아 읽으려고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조금 눅게 책을 사는 맛도 있다지만, 눅은 값보다 ‘모든 책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꽂히면서 책다운 섬김을 받는’ 헌책방에서 책바다를 느끼고 책마음을 얻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자한테만, 또는 가난뱅이한테만 문을 여는 헌책방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문을 여는 헌책방입니다. 값싼 책만 있는 헌책방이 아니라, 값있고 값없는 모든 책을 골고루 갖추어 놓고 있는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이 없이는 책 문화를 말할 수 없고, 헌책방이 있기에 책 문화는 밑바탕이 튼튼하게 이루어집니다. 최남선 님이 헌책방을 날마다 숱하게 마실하면서 ‘단군 역사’ 자료를 찾아 헤매어 당신 연구를 이룬 일도, 양주동 님이 헌책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향가 읽기’ 자료를 맞아들여 당신 연구를 빛낸 일도, 언제나 한 뿌리입니다. 학문이 깊은 분들한테도 그렇지만, 학문길을 따로 걷지 않는 여느 사람한테도, 헌책방은 책으로 쉬는 곳이요 책으로 만나는 곳입니다. 책이 있어 반가운 곳이며, 책이 있기에 찾는 곳입니다.

 부산에서는 ‘헌책방 문화관’을 21억이나 들여 새로 짓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일꾼들은 지난 2004년부터 당신들 힘만으로 ‘헌책방 문화잔치’를 벌여 왔는데, 이렇게 여러 해에 걸쳐 구슬땀을 빚은 보람을 비로소 얻은 셈입니다. 다만, 이런 구슬땀은 ‘돈으로 새로 짓는 건물’에 있지 않았습니다만, 행정 관청 사람들한테는 돈으로 건물 짓는 데에서만 무언가를 찾아보고 있을 뿐인데, 그래도 이렇게 번듯하게 ‘헌책방 문화관’을 짓는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건물 하나에 수많은 자료를 모아 놓고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삼을 수 있습니다. 문닫고 사라지려 하는 헌책방에서 간판을 얻어 차곡차곡 모아 둔다든지, 전국 헌책방 연락망을 만들어 사람들한테 나누어 준다든지, 헌책방 문화를 나누는 소식지를 엮어 본다든지, 하다 못해 헌책방 명함이라도 골고루 모아 전시를 한다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청계천 헌책방 일꾼한테 더없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 청계천을 ‘헌책방 문화거리’로 삼아, 헌책방 일꾼이 비싼 건물임대삯에 시달리지 않게끔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며, 청계천뿐 아니라 서울과 온나라 골목길에 뿌리내리고 있는 헌책방이 고유한 맛과 멋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함께 마련하는 데에도 생각을 뻗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청계천 되살리기’를 하는 그때부터 장사를 제대로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 집 두 집 다른 데로 옮기거나 쫓겨났는데, 그토록 청계천 헌책방 일꾼을 고맙게 여긴다면, 이곳 일꾼들이 푸대접이나 막대접을 받게끔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가게들은 당신 가게 물건을 길바닥에 내놓아도 아무런 단속을 하지 않지만, 청계천 헌책방거리 가게에서 책을 길바닥에 내놓으면 동사무소 단속 짐차가 와서는 책을 착착 싣고 ‘빼앗아(압수)’ 간다고 합니다.

 길바닥에 책을 내놓아 걷기 번거롭게 하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가게들 앞에 쌓인 물건은 그대로 두면서 헌책방거리 앞 책만 단속하는 일은 어딘가 얄궂습니다. 더욱이, 청계천 헌책방거리 앞 찻길을 줄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정작 이곳 청계천을 관광지이든 명소처럼 꾸밀 마음이었다 한다면, 그곳에 주차장을 놓을 일이 아니라, 헌책방들이 ‘길거리 책꽂이’를 마련해 놓고, 프랑스 세느강 못지 않게 ‘책 난장판’이 이루어도록 꾸미면서 사람들한테 더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선사할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문화란 돈이 아니니까요. 문화란 돈으로 이루지 못하니까요. 문화란 삶이니까요. 문화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루니까요.

 이참에 이명박 대통령이 내놓은 313억이 넘는 그 어마어마한 돈 가운데 꼭 1억이라도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데에 쓰일 수 있기를 꿈꾸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헌책방거리를 살리거나 살찌우는 일은 돈으로 할 수 없기도 하지만, 돈으로 살리거나 살찌우는 책 문화는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책은 누구한테나 똑같습니다. 어느 누구든 책을 두 손으로 쥐어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몇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곰삭이며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부자라고, 대통령이라고, 책을 다르게 읽을 길이란 없습니다. 옆에서 누가 읽어 준다 한들 몇 시간이 걸려야 다 들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와 같은 책을 문화로 삼고, 책 다루는 헌책방을 문화로 여기려 하는 몸짓이라 한다면, 돈이 아닌 문화와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청계천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러한 눈길은 ‘헌책방에서 교재 값싸게 샀거나 거저로 얻었다’는 고마움을 넘어, ‘헌책방에 어떤 책이 깃들어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데로 옮아가면서 새롭게 발돋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런 마음씀과 생각줄기를 바탕으로 삼는 이명박 대통령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또다시 “대학 진학을 권한 청계천 헌책방 주인” 같은 말마디만 앵무새처럼 되뇌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런 소리는 그만 듣고 싶습니다. 한 가지를 더 바란다면, 여러 해째 똑같은 말만 되풀이되고 있는 데에도 ‘받아쓰기’만 부지런히 하고 있는 신문방송사 기자들 매무새도 이제는 달라질 수 있다면, 더없이 반갑겠습니다. (4342.7.9.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 - 안데스 음악을 찾아서
저문강 지음 / 천권의책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노래 없는 이 나라에는 노래만 없을까
 [잠깐 읽기 44] 저문강,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



- 책이름 :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안데스 음악을 찾아서
- 글ㆍ사진 : 저문강(조영대)
- 펴낸곳 : 천권의 책 (2009.5.1.)
- 책값 : 15000원


 (1) 노래와 춤과 잔치와 삶과


 저문강(조영대) 님은 1999년부터 꾸준하게 ‘안데스 음악 여행’을 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집식구가 있으면서도 안데스 노래에 빠져 홀로 비행기를 타고 중남미를 떠돌며 노래를 듣고 시디를 장만하고 악기를 배우는 당신은, 그동안 안데스 노래를 들으면서, “안데스 음악은 잠들어 있던 감성을 새롭게 일깨워 준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안데스 음악에 대해 물을 때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라고 답하곤 한다(311쪽)”는 말처럼 당신 넋을 빗질해 주는 노래와 늘 가까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참에 펴낸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라는 책 하나에는, 당신 넋을 빗질해 준 고마운 노래를 찾아나선 발자취를 그러모은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 사실 그들과 내 관심사는 전혀 다르다. 알렉스와 아기는 스페인 식민지 영향으로 세워진 성당이며 수녀원 등 식민지풍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 내 관심 밖의 일이지만, 삼사백 년 된 건물들이 여전히 아름답고 훌륭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는 게 감탄스러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 알다시피 볼리비아는 경제적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이다. 개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자체가 돈이 많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사회 간접자본의 축적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 경제적 측면으로 보자면 사람들도 매우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삶의 행복이 단지 경제적인 측면만으로 결정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볼리비아 사람들은 언제, 어떤 곳에서, 어떤 종류의 행복을 찾으며 삶을 즐길까 ..   (41, 112쪽)


 책을 펼쳐드는 저는 ‘안데스 노래’를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라디오도 안 들으니 다른 노래를 들을 길이 없기도 하지만, 엘피나 테이프를 장만해서 틈틈이 노래를 듣는다 하여도, 나라안에 널리 알려지거나 들을 만한 ‘안데스 노래’란 거의 없거든요. 보름쯤 앞서인가, 동네에 있는 오랜 술집에 잠깐 들렀을 때에 에프엠 라디오에서 ‘빅토르 하라’ 노래 둘을 잇달아 틀어 주어 고맙게 들었습니다만, 하라 노래이건 중남미 노래이건, 또 안데스 노래이건 우리들 여느 사람으로서 만나거나 마주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생각해 보면 안데스 노래 만나기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라고 하는 ‘굿’을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무형문화재이니 민속문화재이니 뭐니 하고들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신 김수남 님은 굿 사진을 부지런히 찍어 놓기는 하였어도, 정작 굿소리를 들을 마땅한 자리가 없고, 엘피도 테이프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굿뿐 아니라 여느 일노래와 놀이노래도 듣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저는 국민학생이던 1982∼1987년에 동네 골목길에서 동네 동무들하고 숱한 놀이노래를 부르며 술래잡기와 숨바꼭질 들을 하며 놀기는 했으나, 오늘날 동네 골목길 이웃집 아이들한테서 놀이노래를 들을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 집 둘레에 있는 골목집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골목에서 뛰놀기는 하지만 노래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줄넘기를 하고 손전화 놀이를 하고 유행노래를 부를지라도 ‘언니 오빠 형 누나’한테서 물려받거나 배운 놀이노래는 한 가지도 모릅니다.


.. 나는 오따발로 시내에서 직선으로 난 길로 다니는 파란 버스보다는, 시간은 좀더 걸리더라도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동네를 거쳐 가는 빨간 버스를 더 좋아한다. 파란 버스보다 2배 이상 걸리지만, 온통 푸른 색으로 내 눈을 꽉 채우는 오따발로의 자연이 그대로 펼쳐진 길을 마음껏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154∼155쪽)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탓이 있습니다. 가르칠 사람이 없는 탓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는 탓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저런 탓보다도 어른인 우리 스스로 우리 노래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대중가요도 노래이며 뽕짝도 노래이며 팝도 노래입니다. 락도 노래이고 민중가요도 노래이며 판소리도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 노래’는 무엇이지요? ‘한겨레 노래’는 무엇이지요? 안데스사람들도 안데스 노래를 차츰 잊어 가거나 멀리하고 있다고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에 나와 있는데, 백두산 넋을 받건 태백산 얼을 받건 한라산 마음을 받건, 우리들은 어떤 넋과 얼과 마음으로 어떤 노래를 즐기고 부르고 나누고 있는가요.

 하긴,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한테는 노래도 없고 춤도 없고 잔치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수 억이나 수십 억을 들이는 ‘축제’나 ‘이벤트’는 있어도, 동네사람 마을사람 어깨동무하면서 들썩들썩 신이 나는 잔치판이란 없습니다. 품앗이와 두레가 없으니 잔치판 또한 없겠습니다만, 어우르는 일, 울력이 없으니 일노래가 없을 테고, 어깨동무 씨동무 할 또래가 없으니 놀이노래가 없을 테지만, 어쩐지 쓸쓸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노래를 즐기는 매무새로 우리 노래도 함께 부르면서 ‘안데스 노래’를 찾아나설 만한 노래그릇이 못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허전합니다.


.. 한 인디헤나가 께추아어로 지은 아이의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한다. 그러자 담당자는 께추아어로 이름을 지을 수 없다며 그 자리에서 후안이라고 정해 준다. 그때부터 그 아이의 이름은 후안이 된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꽈도르에서는 께추아어로 이름을 짓는 것이 금지사항이었다고 한다 … 은행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렇다. TV를 보다 보면 스페인 방송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거의 백인들이 브라운관을 차지하고 있다 … 실제로 스페인에는 지금도 중남미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 인디헤나는 말 그대로 원래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인디헤나가 상층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차별은 말아야 하지 않을까 ..  (175∼177쪽)


 그렇지만, 우리는 중남미 인디헤나처럼 ‘우리 이름을 우리 나름대로 짓는 권리를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우리 이름을 우리 나름대로 지을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난해 8월 17일에 우리 아이(사름벼리)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가니까, “아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적지요?” 하고 묻더군요. “우리 아이 이름은 한자가 아닌 토박이말로 지은 이름입니다.” 하고 한마디 해 주니, “그래도 한자로 적어야 하는데요?” 하고 되묻기에 귀고 귓구멍이고 기고 콧방귀고 다 막혔어요. 동사무소(따지고 보면 동사무소가 아닌 동주민센터입니다) 일꾼한테 다시금 따졌습니다. “아니, 왜 아이한테 한자 이름만 지어야 합니까? 우리 말 이름을 지어 주면 안 됩니까?” “주민등록증에 한자를 꼭 입력하도록 되어 있어요.”  “나원참, 그러면,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 줄 때에는 반드시 한자로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는 소리이네요?”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우리 아이 이름은 토박이말이니까, 그 토박이말에 한자를 넣고 싶으시면 알아서 넣으셔요. 우리 아이는 한자 이름이 없습니다.”


 (2) 우리 가슴에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란


 1999년으로 떠오릅니다. 그때 김종필 국무총리께서는, 우리 주민등록증에 모조리 ‘한자를 넣도록’ 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무렵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님은, 김종필 님과 어깨동무하면서 대통령이 되는 가운데 몇 가지를 김종필 님한테 들어 주기로 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관공서 문서나 주민증 따위에 한자 함께쓰기 또는 밝혀쓰기’를 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자 없는 주민증’을 만들었지만, 그때 국무총리 되신 분이 아주 굳세게 밀어붙여서 나라돈 몇 조를 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때 길알림판 또한 한자를 넣어 새로 만드는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였고, 애꿎은 길알림판 또한 모조리 갈아치웠습니다. 이와 같은 정책에 찬반이 4:6이나 3:7쯤 되었으나, 이 정책대로 일이 풀렸고, 아무래도 이때 일 때문에 우리 아이한테까지 불똥이 튀는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잊은 옛일이겠지만, 그때에 주민증에 ‘손그림 넣기’를 억지로 시켜서 이 일을 놓고도 ‘주민증 안 받기’를 하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라는 숫자란 1968년에 박정희 독재자가 나라사람을 억누르고 휘어잡으려고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왜 있었는지를 떠올릴 줄 아는 사람도 얼마 없지 싶은데, 우리가 입으로는 ‘세계화’를 외치지만, 정작 세계 어느 나라에도 주민등록번호란 없고 주민등록증이란 없습니다. 더욱이, 나라사람을 범죄자로 여기며 지문을 받는 끔찍한 일을 하는 나라는 한국을 빼고 일본뿐인데, 일본은 제 나라 사람한테는 지문을 안 받고, ‘제 나라 사람 아닌 사람’한테만 지문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끌려갔거나 넘어가야 했던 재일조선인한테만 지문을 받는 셈이고, 이 일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인권을 끔찍하게 짓밟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새 주민증을 만든다고 하던 1999년 그때는, 오랜 군사독재정권을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로 뒤집었던 때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정권마저도 ‘주민증에 지문 찍기’ 같은 끔찍한 일을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어느덧 열 해가 흐른 일이니 아득한 일이라고 느낍니다만, 그때에나 이때에나 느끼기로는, 우리들 한겨레는 ‘생각힘이 너무 없’구나 싶습니다. 상상력이 없습니다. 애써 이룬 자유를 자유로 누리지 못하고, 힘써 이룬 민주를 민주로 펼치지 못했습니다.


.. 식사고 뭐고 없다. 넋을 빼놓고 그들의 연주에 빠져든다. 게다가 내가 신청하는 곡을 빠짐없이 하나씩 연주해 주는 것이 아닌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암, 안 되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폴클로레에 대한, 아니 저 연주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 선율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엔 연주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그만 동양인 하나가 자기네들의 음악을 신청하고 거기에 춤까지 추자 신기하고 반가웠는지 더욱 신나게 연주해 준다 ..  (44쪽)


 안데스를 밑돌 삼아 안데스 문화를 꽃피웠고 안데스 노래를 조촐히 지켜 나가는 안데스 토박이들은 안타깝게도 제 말과 글을 잃었고 제 삶터에서도 2등이나 3등 자리로 밀려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이곳 안데스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생각힘이 없을까요? 아직까지 ‘넋과 얼을 빗질하는 노래’를 부르고 즐기기는 하지만, 구석자리로 밀려난 채, 뒷골목으로 쫓겨난 채, 그저 숨죽이는 가운데 부르거나 즐기고 있을까요?

 《영혼을 빗질하는 노래》를 쓴 분이 안데스 나들이를 하면서도 ‘참다운’ 안데스 노래를 찾기가 만만하지 않았다고 밝히는데,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중남미 삶터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지 않을까요?


.. 여기도 서양 팝 음악이 흘러나오는 디스꼬떼가 많이 있지만, 볼리비아노들은 안데스 폴클로레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자기들의 기분을 발산할 수 있다 ..  (114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땅에서 참다운 우리 노래를 잃은 지 몹시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 삶터에서는 우리 노래로는 우리 넋과 얼을 빗질할 수 없을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안데스땅 곳곳에 안데스 노래가 넘실넘실 넘쳐나면서 안데스 삶터를 어루만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으나, 군데군데 듬성듬성 안데스 삶자락 어딘가에는 ‘넋과 얼을 빗질하는 노래가 남아’ 있다고. 이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아채어 우리들이 스스로 놓거나 내버린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고, 다시 태어나는 한 사람이 되자고 조용히 말걸기를 하고 있다고.


.. 힘들기야 하겠지만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님에도 다시 여권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엔 한국의 바람이 불듯, 안데스엔 안데스의 바람이 불 테니까. 안데스 악기는 안데스의 바람 속에서 본연의 소리를 낼 테니까 ..  (191쪽)


 덮었던 책을 다시금 훑습니다. 339쪽에 이르는 책에는 글과 사진이 골고루 섞여 있고, 책끝에는 ‘추천하는 노래’와 ‘안데스 악기 소개’가 붙어 있습니다. 야무지게 잘 엮었다는 생각이 들고, 감칠맛나는 글은 제법 잘 썼다고 느낍니다.

 다만, 좀더 느긋하게 노래로 스며들고, 더욱 부드러이 노래와 함께했다는 느낌은 옅습니다. 글쓴이 발자취를 바지런히 알려주면서 다른 이들한테도 이 길을 함께 걷도록 이끌려는 마음이었는지 모르나, 이 책이 ‘여행기’나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한다면, 글쓴이 나름대로 가슴속 깊이 파고든 ‘넋을 흔든 노래와 삶’이 무엇인지에 더 많은 자리를 나누어 주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얼을 달랜 노래와 사람’은 어떠했는가를 다루는 글에 좀더 길게 이야기를 모두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나라안에 ‘안데스 노래’를 맛보도록 이끌거나 일러 주는 이야기책은 몇 가지 없다고 느끼기에, 이만큼 엮고 쓴 책이라도 반갑습니다. 아직은 서툴 수밖에 없다고도 봅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아직 ‘안데스 노래’ 맛보기만 한 분이지, ‘안데스 노래’를 안데스 악기로 신나게 뜯고 퉁기면서 춤판을 벌여 줄 수 있을 만큼 무르익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마무리로 낸 책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첫 걸음마를 데듯 써낸 책이니까요. 이제, 이 첫 걸음마를 발판 삼아, 앞으로는 무르익은 이야기를 한결 곰삭이고 달래면서 펼쳐 줄 수 있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꿈꾸어 봅니다. (4342.7.8.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위 나의 인생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유시주 옮김 / 눌와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15 ― 두 아이 키우는 여자 과학자 삶이란
 : 마거릿 D.로우먼, 《나무 위 나의 인생》



- 책이름 : 나무 위 나의 인생
- 글 : 마거릿 D.로우먼
- 옮긴이 : 유시주
- 펴낸곳 : 눌와 (2002.3.11.)
- 책값 : 1만 원



 (1) 남자 세상과 여자 세상


 어제는 옆지기하고 아기와 함께 서울마실을 했습니다. 출판사에 들러 책을 하나 건네주어야 할 볼일이 있었습니다. 아기가 아침에 똥을 누지 않았기에 모르는 노릇이라 바지며 기저귀며 더 챙깁니다. 아기가 아주 갓난쟁이였을 때에는 함께 서울마실을 하러 길을 나설 때에는 기저귀를 열 몇 장을 챙겨도 빠듯했습니다. 어제는 고작 여섯 장을 챙겼으나 꼭 석 장만 썼습니다.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싶습니다. 하루하루 튼튼히 자라나며 일손을 더는 대목이 있는 가운데, 새로운 일손이 찾아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저귀 빨래는 조금 줄어 빨래감이 줄었습니다만, 그만큼 아기가 헤집고 다니는 품새가 늘어 옷가지를 자주 갈아입혀야 하니, 따지고 보면 빨래감이 줄지 않습니다. 나날이 무게가 느니 안고 다닐 때에도 팔이 더 빠지는데, 그래도 때때로 말귀를 알아들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끼어들고 싶어 뗑깡을 부리면 고단합니다.

 으레 남자가 바깥 볼일을 도맡고 여자가 집안 살림을 도맡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고 다른 여러 나라도 그렇습니다. 남녀평등이 잘 이루어져 있다는 서양나라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여자 권리가 높다는 중국이라고 해서 썩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이 하나 세상에 태어난 뒤로는 ‘남자 몫 여자 일’은 아주 또렷하게 금을 긋듯 갈립니다.


.. 그전에 나는 퀸즐랜드의 우림 속에서 포스터사의 맥주깡통으로 장식을 해놓은 (새들이 사는) 구애용 침실들을 본 적이 있었다. 자연이 인간의 습관에 적응한 슬픈 이야기들이다 …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환경을 소홀히 다루고, 오염시키고, 그것이 보내는 악화의 징후를 무시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자, 목축업자, 농부, 경제학자, 삼림관리자, 토지관리자, 정치인, 납세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잎병의 치유법을 찾아내고, 더 이상 잎병이 발생하지 않게 하고, 죽어가는 산과 들을 되살려 놓을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  (82, 99∼100쪽)


 서울마실을 떠나기 앞서 동네 머리방에 들릅니다. 옆지기가 머리를 짧게 친다고 해서 집에서 잘랐는데 아무래도 듬성듬성이 되어 놔서 손질을 할 생각입니다. 숱이 많아 삼십 분 남짓 걸려 머리를 다듬었고, 목덜미께 닿을 만큼 손질하니 시원하고 아기를 업었을 때 손을 뻗어 잡아당기지 못할 듯합니다.

 우리 아이가 크는 동안에는 웬만하면 집에서 머리를 잘라 줄 텐데, 나중에 차츰 크면서 제 머리 모양이나 길이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합니다. 옆지기는 아이가 웬만큼 자라면 머리를 다 밀겠다고 하는데, 아이는 사내아이 머리길이와 계집아이 머리길이를 어떻게 생각하거나 받아들이게 될까요. 제 엄마 아빠가 ‘남자 = 짧게, 여자 = 길게’라고 딱히 못박지 않을 뿐더러, 엄마가 아빠보다 머리가 짧고, 아빠는 머리를 기른다기보다 머리털이며 수염이며 그대로 두고만 있을 뿐인데, 이런 모습을 늘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우리 집에서야 이렇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모든 ‘남자 = 짧은머리, 여자 = 긴머리’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 훼손되지 않은 생태계 안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이 당면하는 또 하나의 무거운 과제는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섬은 대단히 예민한 생태계이다. 규모가 작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부의 어떤 요소가 사라지거나 밖에서 어떤 것이 들어오면 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해충 한 마리가 침입한 것이 그 지역의 식물상 전체가 궤멸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버린 온갖 찌꺼기들 또는 임의로 치워 버린 것들도 자연적인 평형 상태, 즉 자연의 균형에 그와 똑같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  (121쪽)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보며 으레 “남자 아이지요?” 하고 묻습니다. 어느 할머니는, “사내대장부답게 잘 커야지.” 하고 말씀하셔서 쓰겁게 웃었습니다. 아이가 계집아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사내대장부’를 말씀하셔서, ‘사내’면 어떻고 ‘계집’이면 어떠한데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들었습니다. 사내답게 키우는 길과 계집답게 키우는 길이 따로 있을까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딸아이는 하루하루 크면서 ‘여느 집하고는 아주 많이 다른’ 삶을 속속들이 느끼고 받아먹으리라 봅니다. 밥하기며 빨래하기며 집치우기며 웬만한 집안일은 아빠가 다하고, 또 밥벌이 삼는 글쓰기며 바깥일이며 아빠가 도맡다시피 하는 모습이니까요. 언뜻 보면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할 텐데, 애 엄마도 집 안팎에서 하는 일이 많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서 퍽 많은 일을 짐지워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눈길로 우리 옆지기가 ‘일을 얼마 못하거나 안 하는’ 듯 느껴진다 하여도 거리낄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눈높이로 온갖 일을 똑같이 해내야 하지 않으니까요.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저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세면 그만큼 더 할 노릇이고 힘이 여리면 그만큼 덜 할 노릇입니다. 누군가는 날마다 원고지 100장씩 글을 쓸 수 있다지만, 누군가는 한 주에 원고지 10장 겨우 채울 수 있습니다. 나날이 100장씩 쓰는 사람이 한결 훌륭하다거나 사람답다 말할 수 없고, 한 주에 10장 겨우 채우는 사람은 못났다거나 사람답지 않다 말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5인치밖에 안 되는 어린 나무가 35살이나 먹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우림의 보존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나는 어린 것들의 유아기와 성장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새싹과 아이들, 그 둘은 기쁨과 시련을 선사하며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 어린 시절,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나무를 기어오르고, 큰 가지 위에 요새를 짓고, 나무 밑 풀밭에 몸을 누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들을 쳐다보고, 민첩하게 나무를 타는 원숭이와 새들을 부러워하고, 썩어가는 나무 둥치 속에서 살아가는 조그만 동물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극히 제한된 시야밖에는 가질 수 없는 공간, 즉 땅 위에 서서 경이로운 심정으로 나무를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  (167, 169쪽)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어머니한테서 배우고 아버지한테서 배웁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도 배우고, 언니와 오빠와 동생과 형과 누나한테서도 배웁니다. 피붙이와 이웃한테서도 배우고 동무한테서도 배웁니다.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웁니다. 나이가 먹었다고 가르치기만 하지 않으며, 나이가 어리다고 배우기만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배울 일은 배우고 가르칠 일은 가르칩니다. 나이가 많아도 배워야 할 일은 배워야 하고 가르칠 때에는 가르치기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어버이 된 사람은 어버이가 되기 앞서도 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옳게 추슬러야 합니다만, 스스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몸이 될 때에는 한결 무르익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되도록 훨씬 힘써야 합니다. 때때로 길에서 스치는 이웃으로서 이웃 아이와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를 넘어, 늘 함께 먹고 자고 부대끼는 식구로서 내 아이와 배우고 가르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어버이가 아닌 자리에서도 나 스스로 올바르고 아름답고 맑고 빛나야 했던 애틋한 목숨인 우리들이었고, 어버이가 된 자리에서도 나 스스로 꿋꿋하고 야무지게 올바르고 아름답고 맑고 빛나야 할 사랑스러운 목숨인 우리들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내 아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아이가 생각하며, 내가 말하는 대로 내 아이가 말합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딴 사람 안 보는 자리이니까 허튼 짓을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라면, 이 마음은 고스란히 내 아이한테도 이어갑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내가 바빠 죽겠는데 골목에서 저 애들은 왜 뛰놀고 법석이야’ 하면서 빵빵대며 싱싱 내달린다면, 이 매무새는 그예 내 아이한테도 옮아갑니다. 어버이 된 사람이 국회의원 대통령 뽑는 매무새 그대로 아이들이 어른과 정치와 사회를 보는 매무새로 스며듭니다. 어버이 된 사람 하루하루가 당신 아이 하루하루를 엮어 나가고 이루어 나갑니다.


.. 수없이 개미들에게 물리면서 나는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보다 수천 배나 큰 존재를 공격해대는,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는, 그 조그마한 생명체의 극성스러움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조용히 걸어다니며 숲을 관찰하던 중, 우리는 나무 위에서 거미원숭이가 재롱을 피우는 모습도 보았고, 타이라 일가족이 나무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았다. 야생 동물들은 우리가 숲속에서 조용히 있을 때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류라는 종족의 한 사람으로서 숲의 거주자들과 함께 숲을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226, 292쪽)


 옆지기와 저는 아이를 배고 낳고 키우는 어제오늘 또 모레글피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는 딸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딸아이가 아닌 ‘한 사람’을 낳아서 기른다고 생각합니다. 너나와 똑같은 아이요, 어른아이 가르지 않는 목숨이며, 꼭 같은 한 사람 몫임을 느끼면서 함께 살아가는 벗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어 가기를 바라며, 이 삶터에서 아이 스스로 우뚝 서면서 사랑과 믿음을 다른 누구한테보다 나 먼저 참되게 맛보고 깨달으면서 이웃하고 살가이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아이는 아직 돌이 안 되었습니다. 다음달이 돌입니다. 우리는 돌잔치를 따로 할 겨를이 없기도 하지만, 돌잔치보다는 이웃을 한 집씩 불러 집에서 밥상 하나 차려 함께 나누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마련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돌이라지만 세월은 금세 흐르기에, 우리는 이 아이가 뒷날 학교에 들어가도 될까 안 될까를 곰곰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꼭 학교에 가야 할 까닭이 없으며, 굳이 학교를 안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 스스로 다니고프면 다닐 노릇인데, 학교에 간다고 동무를 더 사귈 수 있지 않고, 학교에 안 간다고 동무를 못 사귈 수 있지 않습니다. 또래동무를 여럿 두어야 아이가 맑고 밝게 크지 않으며, 또래동무란 학교 울타리 안쪽에만 있지 않습니다.

 저보다 나이든 살가운 동무가 있고, 저보다 나어린 살뜰한 동무가 있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스스로 좋아하며, 아이를 좋아할 동무가 있으면 넉넉할 뿐입니다.


.. 나는 내가 어머니이고 아내임을 좋아했다. 그러나 내 영혼은 그와 더불어 과학을 향한 열정도 지니고 있었다 … (첫) 남편은 내 연구가 가족보다 우선할 수는 없으므로, 가족용 차를 몰고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 1970년대의 호주는 백인 남성에게는 ‘행운의 나라’였을지 몰라도, 미국인 여성 과학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여자가 숲 우듬지를 연구하기 위해 혈혈단신 1만 마일을 날아 멀리 떨어진 대륙으로 온다는 것은, 내가 만난 호주인 남자들 대부분에겐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일 뿐 아니라 도대체가 미심쩍은 일이었다. 사실, 남자나 여자나 호주 농촌의 많은 사람들에겐, 부엌이나 침실에서 실용적으로 전혀 써먹을 데가 없는 어떤 지적인 생각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마 1백 마일을 여행하는 것조차도 우스꽝스럽게 보았을 것이다 ..  (14, 25, 44쪽)


 다만, 아이를 학교에 넣지 않으려 한다면, 그만큼 어버이 된 사람한테 주어진 몫이 큽니다. 지난날에는 어느 어버이도 아이를 학교에 안 넣고 죄다 집에서 가르쳤는데, 그만큼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일이 많았고, 챙길 일이 많았으며, 살피고 보듬을 일이 많았습니다. 요즈음은 이런저런 어버이 노릇을 온통 ‘돈’에만 맡기고 있을 뿐입니다.

 제도권학교도 돈이요 대안학교도 돈입니다. 제도권학교라고 돈을 안 내겠습니까. 우리가 낸 세금으로 꾸리는 곳이 제도권학교인걸요. 대안학교를 넣으려 하면 어버이 된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때때로 ‘대안학교에 넣었으면서 아이와 어울릴 틈이 더 없’기까지 합니다. 배움삯 벌려면 그만큼 허리가 휘니까요.

 여섯 살 아이를 유치원에 넣는 제 옛동무는 한 해 배움삯이 500만 원을 웃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치원에 바쳐야 할 돈이 대학등록금 못지 않다고 푸념입니다. 대학생들 목소리가 어린이들 목소리보다 커서 그렇지, 어린이들이 제 어버이 된 사람들 살림을 걱정하며 ‘유치원 배움삯은 나라가 내라!’ 하고 외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어버이들은 줄줄이 파산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요새는 셋째가 아닌 둘째를 낳아도 구나 시에서 돈(출산장려금)을 준다고도 하는데, 아이를 낳았다고 돈을 얼마 준다고 해서 살림이 필까요? 나라가 아이와 어버이한테 돈을 대어줄 노릇이 아니라, 아이와 어버이가 걱정없이 아이를 키우고 가르칠 터전과 삶터를 일구는 데에 올바로 돈을 써야 할 노릇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보도블럭 까뒤집기’는 이제는 참말 그만두고서라도. 고속도로 새로 하나 더 늘리는 일은 그만두고서라도.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속도로 하나 더 늘리지 않는다고 길이 막히지 않습니다. 고속도로 하나 덜 내면서 ‘아이 키우는 품’에 댈 보건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모두 남성이었는데, 그분들은 임신한 몸으로 현장 작업을 수행하는 데 대해 어떤 조언도 해 주지 못했으며, 남성 동료들과 정글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아이디어도 제공해 주지 못했다 … 20세기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지내던 이웃 농장의 여성들은 그들의 삶이 어머니 또는 시어머니의 삶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고민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 일반적으로 젊은 여성들은 지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아이들, 융자금, 갚아야 할 학자금, 연로하신 부모, 일반적으로 가정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배우자 … 이상하게도, 나는 (첫)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야 오히려 내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 더 폭넓게세상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 사탕가게에 들어간 아이처럼, 가깝게는 집 근처의 하버드대학, 멀게는 내가 상상하는 한 가장 먼 곳이었던 카메룬의 야운데까지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  (19∼20, 137, 201∼202, 236∼237쪽)


 어쩌면, 아이한테는 국어니 수학이니 영어니 하는 교과목 지식이란 하나도 없어도 됩니다. 이런 지식이 없다 하여 세상 못 살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아이가 여느 큰회사 사무직 일꾼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또는 은행 일꾼이나 병원 일꾼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이런저런 지식 갈래에서는 ‘대학졸업장’을 바라고 있으며, 대학졸업장을 따려면 갖은 시험지식을 높이높이 따내어야 합니다.

 이와 달리, 아이가 큰회사 사무직 일꾼을 바라지 않는다면, 농사꾼을 바라든 글쟁이를 바라든 시민모임 일꾼을 바라든 헌책방 일꾼을 바라든 한다면, 아이한테는 사뭇 다른 앎과 삶을 깨닫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양복 차려입고 구두 신은 채 도심지 한복판에서 자가용 달려 셈틀 앞에 하루 내내 앉아서 일하기를 바란다면, 옆지기와 저로서는 크게 마음쓸 대목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제도권학교에 넣으면 그만이고, 이렇게 학교에 넣으며 두 사람은 훨씬 기나긴 말미를 얻어 두 사람 마음 내키는 대로 먼 나들이도 다니고, 책도 읽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면서 제 마음과 몸을 함께 살찌우는 길찾기를 하려 한다면, 어머니 된 우리 두 사람은 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어깨동무를 하는 길동무가 되면서 아이한테 새길을 보여주고 우리 스스로도 새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으로서는 아이가 어느 길을 가든 아이 몫이니, 아이한테 여기로 가라느니 저기로 가면 안 된다느니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마음이 없습니다.


.. 아이는 《초록색 알과 햄》을 독파했을 뿐 아니라 오레일리의 우림에 있는 여관에서는 밥 먹을 때마다 메뉴를 주르륵 읽어내렸다. 그때 동행했던 동료들도 그 일을 나처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부모가 된다는 것과 과학을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나는 버스 안에서 아들과 함께 책을 읽었던 그 특별한 날을 가능케 해 준 것이 다름아닌 과학이라는 내 일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열대 우림 탐사에 나선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우듬지는 (아들) 에디와 제임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고,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걸 보게 된 나에게도 역시 그러했다 …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들은 원시 그대로의 우림 속에서 우림의 거주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자신들을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어린이들이 열대의 진흙에 몸을 적셔 보지도, 정글 속의 모험을 즐겨 보지도 못하고 자랄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속도로 우림이 계속 파괴된다면, 우리 아이들이 누렸던 그러한 특혜도 더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  (141, 259, 272, 274∼275쪽)


 우리 아이는 ‘우리 집 아이’이기 앞서 ‘한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는 두 사람이 배앓이하고 몸앓이하면서 낳고 키우는 ‘재산’이 아닌 ‘홀로선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먼저 우리 삶을 즐기고 넉넉히 채울 일거리를 찾습니다. 우리 아이 또한 제 스스로 제 삶을 즐기며 넉넉히 채울 일거리를 찾으면 될 뿐이라고 느낍니다. 즐거운 삶은 한 가지만이 아니며, 반드시 어느 곳에 있어야만 즐거운 삶이지 않습니다. 어김없이 어떠한 일을 해야만 즐거운 삶이 아니며, 더 많은 돈을 벌든 더 적게 돈을 벌든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 잘라말할 수 없습니다.

 만드는 삶이지 만들어진 대로 흐르는 삶이 아닙니다. 꾸리는 삶이지 틀에 맞추는 삶이 아닙니다. 몇 분 동안 기저귀를 삶고 햇볕에 몇 시간 쬐여 말린 다음 몇 센티미터로 나누어 개야 하는 빨래감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다르며, 그때그때 알맞게 하면 될 뿐입니다. 아침에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어른 두 사람 먹을 밥을 하면서, 늘 어림으로 쌀을 푸고 콩을 퍼서 하루 동안 불려서 냄비밥을 합니다. 냄비밥을 하면서 시간을 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날그날 냄새를 맡고 김빠짐을 살피고 하면서 밥물을 맞추고 밥을 할 뿐입니다.


 (3)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은


 ‘마거릿 D.로우먼’이라는 분이 쓴 책, 《나무 위 나의 인생》을 읽습니다. 식물학자라고 해야 할까, 생물학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과학자인 글쓴이입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깊이 생각을 하지 않는 가운데 덜컥 혼인을 하면서 호주 시골에서 아이를 둘 낳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엄마가 되면서 과학자였던 당신 삶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호주에 있는 (옛) 남편이나 시어머니나 마을사람들은 당신이 과학자였든 아니든 ‘이제부터는 시골 농장을 일구며 아이를 돌보는 엄마일 뿐’이라고만 외칩니다.

 이에, 글쓴이는 아이 엄마로서도 훌륭히 살고 싶지만, 아이 엄마이기 앞서 ‘마거릿 D.로우먼’이라는 제 이름에 걸맞는 과학자로 걸어가려던 당신 길 또한 훌륭히 걷고 싶어서 마음앓이를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앓이를 고이 간직하면서 지내고 길찾기를 하면서, 드디어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버젓이 살아남아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거세게 휘감고 있다 할 남성가부장권력’을 박차고 나옵니다.


.. 나의 부모님은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차를 타고 가다가 내가 무언가 건질 만한 것을 발견하면 언제라도 차를 세워 주실 만큼 이해심이 깊으셨다. 어머니는 무척 끔찍해 했지만, 내 침실 작은 장에는 생쥐가 살았다. 생쥐들은 나의 수집품 가운데 하나였던 자연 섬유들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것으로 북부 뉴욕의 추운 겨울을 나게 해 줄 둥지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이 내려준 소중한 선물로 나의 삶은 은혜로웠고, 나의 수집품은 과학적 호기심의 토대가 되었다 ..  (12쪽)


 《나무 위 나의 인생》은 과학자로서 한길을 걷는 사람 이야기를 하나 선보입니다. 다음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올바르며 곧은 길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가누어 본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톺아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터가 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한 사람으로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를 가슴 깊이 되뇌었던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 숲 우듬지 속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우리들이 가진 과학적 데이터들을 유권자, 경제학자, 정치가들, 즉 천연자원의 보존과 관련된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적 언어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도 나의 아이들이 그 속에서 즐거이 뛰놀 수 있는 자연림이 남아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나는 일반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능력이야말로 숲의 보존을 좌우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변수라는 걸 알고 있다 ..  (304쪽)


 저로서는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에서 네 가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다섯째 이야기와 여섯째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옆지기가 이 책을 함께 읽어낸다면, 또 우리 아이가 커서 이 책을 새롭게 읽어낸다면 일곱째와 여덟째 이야기가 나타날 테지요.

 그때그때 읽는 사람에 따라, 《나무 위 나의 인생》은 다 다른 이야기를 우리한테 베풀어 줍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네 가지 아닌 한 가지 이야기만 느껴질 테고, 어떤 이한테는 한 가지조차 느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책이란, 읽는 사람 몫이기 때문입니다. 쓰는 사람은 온삶과 온마음을 쏟아낸 책이지만, 읽는 사람 스스로 ‘책을 쓴 사람 삶’과 같은 자리에 서면서 헤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해, 아무것도 빨아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여성들이 길에 놓인 장애물들을 피하느라 먼 길을 돌아왔다. 현장 생물학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부닥쳐야 했던 어려움들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나를 단련시켰고, 내게 확고한 신념을 심어 주었다 … 나고, 자라고, 썩고, 다시 재생하는 잎처럼, 나도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직업적인 길에서나 그러한 과정을 경험했다 … 불평을 하는 대신 소리 지르는 법을 배우라,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값진 가르침이었다 ..  (305쪽)


 두 아이 키우는 여자 과학자 삶으로, 참 눈물겹고 애틋하며 딱하지만 힘차고 다부지고 당찬 이야기로 《나무 위 나의 인생》이라는 책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어떠한 삶인가를 헤아릴 수 있고, ‘아이 키우는 아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삶인가를 짚을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나무를 타고 우듬지를 돌아보면서 당신 삶을 찾았는데, 우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우리 삶을 찾을 수 있을까요. (4342.7.7.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으로 보는 눈 89 : 선생님이 읽는 책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어른을 두고 ‘스승’과 ‘교사’와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낳아 기른 어버이를 가리키는 한자말 ‘부모’ 뒤에 ‘-님’을 붙여 높이듯, 우리를 가르치는 분을 가리키는 한자말 ‘선생’ 뒤에도 ‘-님’을 붙여 높입니다. 가만히 보면, 토박이말 ‘스승’과 ‘어버이’ 뒤에는 ‘-님’을 안 붙입니다. ‘스승님’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으나, 따로 ‘-님’을 붙이지 않아도, 이 낱말 그대로 높이고 받드는 느낌을 나타냅니다. 지난날 여느 사람을 내리누르던 힘이 대단했던 ‘임금’한테 ‘임금님!’ 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오늘날 ‘선생님’은 사뭇 다릅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가 높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한편, 어렵고 힘들고 걱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대입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아이들이 스스로 ‘책읽기 모임’을 꾸려 ‘느낌 나누기’를 했던 발자취를 그러모은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삼인,2009)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은 깊은 뜻이나 생각이 없이, ‘대입시험에서 논술 잘 치르자’면서 책읽기 모임을 꾸렸고, 저마다 책을 읽은 느낌을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피면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무리에 듭니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니 ‘공부 잘하고 책 좀 읽는 티’를 내겠다며 부러 어려운 말을 골라 쓴 대목이 곧잘 보입니다.

 제가 이 아이들 나이였을 때를 떠올립니다. 저라고 이 아이들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저는 많이 모자라고 어줍잖다고 느끼지만, 그때에는 더 모자라고 어줍잖았으며, 제 둘레에 ‘책 좀 읽는’ 동무이든 어른이든 보이지 않았기에 우쭐거리거나 잘난 척해 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은 ‘낡은’ 말인 듯 생각하면서, 익었으니 고개 빳빳해야 하는 양 꼴값을 떨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시절 3년을 보내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다 안다 … 나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생각하기’의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130, 141쪽)

 논술 준비를 한다지만, 학교 안쪽에서 선생들이 이끌어 배우는 책읽기 모임 느낌 나누기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모임을 꾸리고 저마다 읽을 책을 생각했다는 일은 퍽 놀랄 만합니다. 우리 나라로서는 혁명일 수 있습니다. 비록 접시물에서 이루려는 혁명이지만.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다치고, 선생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생각없는 바보로 자라도 괜찮을까요. 선생님들 스스로 아이들을 바보로 키우고 가르쳐도 되는가요. 아이들 스스로 ‘우린 생각할 까닭 없이 시험만 잘 쳐서 대학 가면 그만이야’ 하도록 내모는 당신들한테 ‘선생님’이라는 거룩한 이름이 알맞습니까. 달삯 잘 나오고 연금 넉넉하고 방학 길고 심심풀이로 손발운동(체벌) 하는 월급쟁이로만 있고자 하는 분들한테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교사’라는 이름이 어울리나요. 교재가 아닌 ‘참다운 좋은 책’을 읽는 스승길을 걷는 분이 있기는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가지는 않으며, 모두 다 대학교에 갈 까닭은 없음을 되새기면서, 아이들한테 생각힘을 북돋우고 당신 스스로도 생각날개를 펼치려는 ‘선생님 노릇’을 계급장 떼면서 해 보고자 소매 걷어붙이는 분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4342.6.8.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