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어린이미술관 13
신수경 지음 / 나무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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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아닌 ‘좋은’ 그림쟁이 이인성
 [그림책이 좋다 61] 신수경,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책이름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글 : 신수경
- 펴낸곳 : 나무숲 (2009.3.4.)
- 책값 : 10500원



 (1) 즐거운 삶이 될 때 비로소


 지난밤, 책 하나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날밤을 홀딱 새웠습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 누구나 날밤 새우는 일을 밥먹듯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지 않은 터라 딱히 일감이 많지 않아 날밤 새울 일이 드뭅니다. 1인잡지를 엮을 때 며칠쯤 밤을 새우다시피 하지만, 아기 함께 돌보고 기저귀 빨고 해야 하기에 밤을 새우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어제 하루는 홀몸으로 인천집에 머물면서 책 만들기를 하다 보니 저절로 날밤 새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살풋 잠든 다음 다시 일어나서 여러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일손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손을 붙잡으면서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즐겁습니다.

 따로 어떤 돈을 버는 일이 아니요,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나, 저한테는 그지없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등짝이 쑤시고 팔 어깨 손목이 저리지만, 이렇게 아프고 쑤시고 저리고 결리는 몸뚱이를 다독이면서 눈을 밝힙니다.

 다른 책쟁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예 돈만 벌려고 일하는 분도 어김없이 있는 한편, 그저 좋아서,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적은 일삯을 받으면서도 책마을에 오래도록 몸담는 분이 많을 테지요.


.. 이인성은 ‘우리의 풍경’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자연의 색을 표현한 화가입니다. 색채의 마술사였던 이인성은 땅과 하늘, 산과 나무에서 우리 고유의 색을 찾아냈습니다 ..  (3쪽)


 사진을 찍으러 골목마실을 하고 헌책방마실을 하면 온몸과 손목이 저리고 결립니다. 골목에서는 사진만 찍지 않고 햇볕과 바람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헌책방에서는 사진만 담지 않고 반가운 책을 바지런히 살피고 보듬습니다.

 햇볕과 바람이 있고, 밤냄새와 이야기소리가 있어 즐거운 골목마실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있고, 마음을 건드리는 헌책방 일꾼과 책손 말씀이 있어 고마운 헌책방마실입니다. 이리하여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진을 찍게 되고, 두 손이 꽁꽁 얼어서 손가락을 꼬부리지 못하게 되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가방이 터질 듯 책을 채워서 집으로 돌아오고, 두 손이 책먼지로 시커매져도 까만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씨익 웃게 됩니다.


.. 이제 갓 스무 살의 이인성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까지 하자, 지역 유지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려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울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들은 경북여자고등학교 시라가 주키치 교장이 이인성의 유학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일본의 킹 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재주가 뛰어난 학생이 있는데 화가로 키우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  (12쪽)


 둘레 사람들은 저보고 왜 세탁기를 안 쓰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탁기를 쓰겠습니까. 제 옷이며 옆지기 옷이며 아기 옷이며, 손으로 빠는 느낌이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데요. 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하루 가운데 1/5쯤 잡아먹고(요사이는 아기가 오줌을 적게 누기에) 널고 개고 뭐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빼앗긴다고 하지만,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 시간을 넉넉히 나누어 쓰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북북 비비고 헹구고 탁탁 물 빼어 너는 동안 마음이 얼마나 고요해지는데요.

 몸이 여위고 힘들다 하여도 손빨래를 놓을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고 지쳤다 하여도 손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하루 한두 끼니 먹는 밥과 같이, 하루에 몇 차례 손빨래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고이 다스립니다. 날마다 누런쌀에 온갖 콩팥 섞은 밥으로 몸을 다스리는 한편, 훌륭하고 거룩한 책들로 마음을 다스리듯, 손빨래로 제 넋과 손발을 다스립니다.

 앞으로 아이가 무럭무럭 크면, 아이한테도 손빨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이 기쁨을 혼자서만 즐기기란 얼마나 아까운가를 차근차근 물려줄 생각입니다. 저부터 즐겁고, 저부터 기쁘고, 저부터 고마운 일이며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 이인성은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캔버스에 풀어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  (33쪽)


 열 해 남짓 사귀어 오는 술동무를 낮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제 모두들 시집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얼마나 바쁜 몸이 되었는지, 예전에는 거의 날마다 만나 술잔을 비웠는데 이제는 한 해에 한 번 잠깐 얼굴 보기도 힘들어집니다. 다들 아이가 좀 자라면, 다들 일이 좀 느긋해지면, 이리하여 우리들 나이가 쉰이나 예순쯤 되면 한갓지게 다시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창 바쁠 때에도 연락을 못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이이면서 나중에도 어울릴 수 있으려나요.

 좋은 사람들이라 저 스스로도 벗님들한테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고, 좋은 동무들이라 저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어깨동무를 하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좋은 자연과 벗삼으면 자연이 선물하는 좋음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연한테 선물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좋은 이웃과 좋은 마을에서 살게 되면 이웃과 마을이 베푸는 선물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이웃이요 마을문화 일구는 사람으로 새로워지자고 마음먹으면서 내 다른 이웃과 마을에 좋은 땀방울을 바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기쁨이라면 하루하루가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가 비손하는 믿음이라면 하루하루가 서로 손 맞잡으면서 부둥켜안는 넉넉함입니다.

 삶이란 문화이며 문화란 삶이고, 사랑이란 믿음이며 믿음이란 사랑이고, 일이란 놀이이며 놀이란 일이라고 느낍니다. 모두 한동아리가 되어 흐를 수 있을 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빚어진다고 느낍니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무지개이고, 자연스레 비가 되고 눈이 되는 물방울이며, 자연스레 싹이 트고 움이 돋고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로 뻗어나가는 푸나무입니다. 우리 사람한테도 이와 같은 자연스러움이 온몸과 온마음에 깃들면서 나와 너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저마다 선 자리에서 즐거이 호미 한 자루 쥘 수 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2) 그림쟁이 이인성 님 이야기를 담은 《이인성》


 그림이야기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을 넘깁니다. 1912년에 태어나 1950년까지 짧게 살면서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한 사람 발자취를 고이 담아낸 그림이야기책입니다.

 이인성 님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이런 모습을 보면서 둘레에서 일본으로 그림을 배우도록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인성 님이 살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였고, 이인성 님을 일본으로 보내준 사람은 일본사람입니다.

 발자취와 그림밭을 찬찬히 살피다가 흠칫 놀랍니다. 아니, 우리 나라를 짓누르고 있던 일본인데, 그 일본에서도 조선사람을 눈여겨보면서 고이 보듬던 손길이 함께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오늘날 독립된 나라로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어떠하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림밭에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밭이나 글밭에서 놀라운 솜씨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농사짓기를 훌륭히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살림을 알뜰살뜰 잘 꾸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바른 넋과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숱한 사람들도 ‘일제강점기 그림쟁이 이인성’ 님과 마찬가지로 고운 손길과 따순 사랑을 받고 있을까요?


.. 이인성은 평생 우리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  (21쪽)


 그림쟁이 이인성 님 그림밭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책에 실린 풀이말과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인성 님 붓질은 더없이 밝으며 맑다고 느낍니다. 그림을 즐기는 동안 눈이나 머리나 마음이 짐스럽지 않습니다. 홀가분하게 넘기고 가붓하게 헤아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고,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렸기’ 때문인가 생각해 보는데,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더라도 엉망으로 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린다 하여도 ‘우리가 어깨동무하는 삶터’가 아닌 ‘좁거나 치우친 눈길로 허투루 바라본 삶터’를 그리는 사람이 많아요.
 





.. 세상을 떠나던 해에 쓴 그의 글에는 화가의 자부심과 단호함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을 그린다는 신세인 만큼,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롬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개성을 짓밟히기는 싫다.” ..  (43쪽)


 그렇다면, 그림쟁이 이인성 님한테는 여느 그림쟁이와는 사뭇 다른 마음결이 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똑같은 밑바닥 사람을 보더라도 바라보는 눈이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짓눌린 이 나라 이 땅을 바라보더라도 여느 사람들 눈결과는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그리고 이런 다름을 고이 돌보고 북돋우면서 당신 나름대로 그림에 말을 걸었을 테고, 이런 말걸기는 그림을 즐기려는 우리한테 보람과 눈물과 웃음과 기쁨을 남기게 될 테고요.

 어떻게 본다면 이인성 님은 ‘천재화가’일는지 모릅니다만, 제가 느끼기로 이인성 님은 ‘천재’라 하기보다는 ‘좋은’ 그림쟁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살가운’ 그림쟁이로, ‘가슴 열린’ 그림쟁이로, ‘눈을 뜬’ 그림쟁이로, ‘제 길을 제 다리로 뚜벅뚜벅 걷는 동안’ 조금도 흐트러짐이나 망설임이 없이 힘차고 다부졌던 그림쟁이로 보아야 알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림을 즐기고 나누려는 많은 이들이 ‘천재’나 ‘뛰어나다’라는 이름에 매이기보다는 ‘좋다’나 ‘아름답다’나 ‘즐겁다’나 ‘반갑다’는 소리를 듣는 이웃 같은 그림쟁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면, 오랜 벗님 같은 그림쟁이로 뿌리내릴 수 있으면, 언제 보아도 허물없고 반가운 풀꽃과 같은 그림쟁이로 이어갈 수 있으면, 그림그리기와 그림즐기기는 모두 사랑이요 믿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4342.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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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란, 삶이란, 책읽기란, 글쓰기란
 ―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1 -

 전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따로 하지 않았으나, 고등학교를 다니며 늘 새벽과 밤으로 사십 분에서 한 시간쯤 보내야 하는 버스길에 올라야 하다 보니, 이 시간에 책이라도 읽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을 보고, 버스에 탄 다른 사람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 모습이나 사람 구경은 시들해졌고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고, 흔들리고 덜컹거리는 가운데에도 아랑곳 않고 책에 빠진 모습에 저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버스를 타며 무얼 했나 싶어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이때부터 버스에서나 전철에서나, 또 어쩌다 자가용을 얻어타게 되나 책을 펼쳤습니다. 버스에서 책을 펼치니 버스 기사 매무새가 가끔 달라지곤 했습니다. 새벽밤에는 으레 불을 꺼 놓고 다니셨는데, 고등학생 아이 하나가 책을 꺼내어 읽으니, 제가 서거나 앉은 자리 쪽에는 불을 켜 주곤 했으며, 책을 읽는 데에 덜 흔들리게 하려고 덜 거칠게 몰거나 퍽 부드러이 몰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불켜짐과 돌돌돌 굴러가는 바퀴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입으로 고맙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했으나 언제나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무거운 가방은 한쪽 구석에 내려놓습니다. 등허리를 펴고 한손을 번갈아 등뼈를 주무릅니다. 몸이 조금 풀렸다 싶을 때 책을 꺼내어 펼칩니다. 선 채로 한참 읽는데 속에서 불끈불끈 무엇인가 솟아오릅니다. 1500년대를 살다 간 서양사람 하나가 적어 놓은 이야기 《노예 근성에 대하여》(무림사,1980)를 읽는데, 자그마치 오백 해를 지난 묵은 이야기임에도 2000년대 오늘날과 맞대어 헤아려도 거의 달라지거나 어긋난 대목이 없습니다. 이 느낌은 무엇이고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서 갈비뼈가 뻑적지근해집니다. 가슴이 시립니다. 책 한 귀퉁이에 아무 말이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합니다. 책을 덮고 뒤쪽 빈자리에 또박또박 글을 적어내립니다.


 - 2 -

 글다운 글을 읽어 보지 못한 가슴은, 글다운 글 앞에서 가슴이 뭉클뭉클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슴이 움직여 본 적이 없으니, 그 뛰는 가슴으로 제 삶을 바로잡거나 일으켜세워 새로 태어나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 스스로 글을 쓰게 되어도 무엇이 글인 줄 모릅니다. 글이란 어떻게 쓰며, 누구한테 읽히는가, 글을 읽는 사람한테 어떤 씨앗이 뿌려져 그이 삶이 거듭나는가를 조금도 모릅니다. 알아보려고도 못합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마음그릇에서 사랑이 샘솟기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참사랑을 모르고 겉사랑만 아는 이들이 읊는 거짓사랑이 참사랑이라도 되는 줄 생각하는 사람한테도 우리들 참사랑을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참사랑인 줄 모를 뿐더러, 저희들한테 쓰레기를 준다고 여기면서 싫어하는데요.

 굳어진 삶을 말랑말랑 동글동글 손질하기란 어렵습니다. 어쩌면 손질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일, 이루지 못할 듯한 일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달프고 외롭습니다. 다만, 몸은 고되고 외로워도, 마음은 가없이 가뿐하고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저는 자유 민주 평화 평등 통일을 제 삶자락에 고이 담아낸다고 느끼니까요. 그리고, 이웃을 억지로 끌어당길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로지 제 삶에 따라 서로 어깨동무할 뿐입니다. 저는 씨뿌리고 가꾸는 사람이지, 밥상을 차려 숟가락에 밥을 퍼서 떠먹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비록 철부지 길을 걷는 사람들한테도 읽힐 글을 쓴다고 하여도, 떠먹이는 글이 아니라, 농사지어 갈무리하여 나눠 주는 글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에 오로지 셋을 담습니다. 사랑, 믿음, 나눔. 그리고 세 가지 길을 걷습니다. 땀방울, 다리품, 마음쓰기.

 읽어 주는 이가 많으면 좋습니까? 기쁩니까? 읽어 주는 이가 없거나 적으면 나쁩니까? 슬픕니까? 대꾸가 없으면 서운합니까? 대꾸가 많으면 흐뭇합니까? 글쓰기란 기다림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내 모든 삶을 실어서, 오늘 이 자리부터, 내가 글 한 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갈 뒷날까지, 나 스스로한테 보람있으면서, 내 마음 읽어 줄 사람을 꿈꾸고 바라는 기다림을 담는 일입니다.

 손목이 저리고 팔꿈치가 쑤셔도 볼펜 든 손을 놓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옮겨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옮겨적기를 끝마칠 때까지 저리고 쑤시고 아파도 참습니다. 글이 저절로 터져나올 때까지는 저 스스로 기다립니다. 먼저 책상 앞에 앉지 않습니다. 오래오래 길에 섭니다. 길을 거닐고 뛰고 자전거를 몹니다. 그런 시간을 길디길게, 아니, 이제 속으로 멈추라는 소리가 터져나올 때까지 견디고 버티며 땀을 쏟습니다. 그리고, 마음속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일을 그치고 볼펜을 듭니다. 밥도 잠도 사랑놀이도 그칩니다. 오직 한 가지, 마음속 터져나오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펼쳐 보이는 데에 바짝바짝 귀를 곤두세웁니다.

 제 손을 떠나면 제 글이 아니라고 하는데, 제 손으로 끄적여지는 모든 글은, 처음 쓰여질 때부터 제 글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살아가도록 이끌고 도운 온갖 사람들 넋이 담겨 있어서, 모든 넋이 다 함께 이룬 글입니다. 이리하여, 책은 ‘내 것’이며 ‘모두 것’입니다. 오늘과 어제와 앞날 언제나 찬찬히 이어가는 팔딱거리는 핏덩이입니다.


 - 3 -

 아침 일찍 깨어난 아기를 안고 방과 마루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어르다가, 때가 되어 옆지기한테 맡기어 젖을 물리는데, 아기는 다시 잠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엎어지고 기고 물건 잡아당기고. 아빠 책과 사진기를 붙잡아 입에 넣어 빨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잠깐 혼자 놀라고 놓아 둡니다. 틈틈이 옆을 보고 뒤를 보며 아기가 기어가는 곳을 살핍니다.

 삶을 담아내지 않았다면 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저런 글자가 낱말을 이루고 낱말이 글월을 이룬다 한들, 껍데기만 글일 뿐, 참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겉글과 거짓글도 글이라고 우기면 글이라 이름붙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글은 글을 쓰는 우리 뜻을 넉넉히 나누지 못합니다. 혼자만 좋자고 쓰는 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좋자고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좋으면서 이웃이 함께 좋자고 쓰는 글입니다. 나 스스로 좋으면서 내 동무가 함께 좋자고 쓰는 글입니다.

 삶을 담아내지 않은 글이란 쓰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이든 더러움에 찌든 삶이든, 글에는 그이 삶이 고스란히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겉멋과 겉치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놀랍거나 대단하게 느껴지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은 머잖아 속알맹이가 들통이 납니다. 속멋과 속치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놀랍고 대단한 글을 쓰기 일쑤입니다. 우리들이 속멋과 속치레를 가꾸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글을 곧바로 알아채면서 품에 꼬옥 껴안습니다. 우리들이 속멋과 속치레를 안 하거나 등돌리거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글을 놓고 ‘이게 글이냐?’ 하면서 비웃거나 따돌리거나 내팽개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어울리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품은 꿈대로 쓰는 글입니다. 나누려는 사랑대로 쓰는 글입니다. 함께하려는 믿음대로 쓰는 글입니다. 글 온 구석에서 빈틈이나 모자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면, 이이는 그만큼 제 삶을 알차고 빈틈없이 돌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글 어느 자리에서나 허술하거나 아쉬움이 느껴진다면, 이이는 그만큼 제 삶에 구멍을 내고 어수룩하게 보내면서 세상 흐름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 쓰여지는 글이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쓰여지는 글입니다. 참다이 쓰여지는 글만 있습니다. 꾸밈없이 쓰여지는 글입니다. 슬기로움이 담기고 어리석음이 담기는 글입니다. 넉넉함이 담기고 모자람이 담기는 글입니다. 거룩함이 담기고 못남이 담기는 글입니다. 반가움이 담기고 짜증이 담기는 글입니다. 이리하여, 돈을 바라는 사람한테는 돈 냄새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이름값 높이고픈 이한테는 이름티 내려는 글이 쓰여집니다.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사람한테는 힘자랑 하는 글이 쓰여집니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가난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말만 예쁘게 빚으려는 사람한테는 말만 예쁜 글이 쓰여집니다. 말이 무엇인지 종잡지 못하는 얼치기한테는 제 말 네 말 가누지 못하는 얼치기 글이 쓰여집니다. 미국을 섬기는 사람한테는 미국 섬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한테는 하느님 섬김이 알뜰히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과자를 즐겨먹는 사람한테는 과자맛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누런쌀을 날마다 먹는 사람한테는 흙내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 4 -

 쓰고 싶은 글대로 꾸리는 삶입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대로 가꾸는 삶입니다. 쓰고 싶은 글처럼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는 삶입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처럼 한 사람 두 사람 만나는 삶입니다.

 글에는 거짓이 스며들 수 없기에, 글쓰기는 두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글에는 참만 깃들 수 있기에, 글쓰기는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듯,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내 밥그릇을 생각한다면 내 삶이며 내 아이 삶이며 내 둘레 사람들 삶이며 내 밥그릇 챙기기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쓰는 글은 밥그릇 붙잡기에서 맴돌고 그칩니다. 모둠 밥그릇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밥자리와 밥나눔을 생각한다면, 내 글쓰기 테두리는 사뭇 달라지고 글에 담기는 넋과 얼 또한 크게 달라집니다.

 저한테는 책이 있고 사진기가 있으며 볼펜하고 수첩이 있습니다. 여기에 고운 옆지기와 술 한 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아이까지. 이렇게 어우러진 우리가 깃들 방 한 칸 있어, 두 다리 뻗어 함께 자고 밥먹고 놀고 일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습니다. 이밖에 달리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요. 자전거에 수레를 붙여 아이와 함께 마실 다니기? 이쯤? 그쯤? 아이가 볼볼 기어서 아빠 옆으로 옵니다. (4342.3.2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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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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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한테, 너는 나한테 좋은 벗님
 [그림책이 좋다 60] 아놀드 로벨,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 책이름 :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 글ㆍ그림 : 아놀드 로벨
- 옮긴이 : 엄혜숙
- 펴낸곳 : 비룡소 (1996.8.15.)
- 책값 : 5000원



 (1) 동무 사귀기


 ‘독후감 쓰기’를 해야 하는 중학교 1학년 처남이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읽습니다.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겉에는 ‘초등학교 1ㆍ2학년을 위한 그림 동화’라는 글월이 제법 굵게 적혀 있습니다. 왜 이 그림책을 초등학교 1ㆍ2학년을 생각하는 책이라고 못박을까 궁금한데, 아이들 눈높이를 헤아려 이와 같이 적을 수 있었겠으나, 이 그림책에 담긴 너비와 깊이를 살핀 우리 어른들이었다면, ‘예닐곱 살 어린이부터 함께 즐기는 그림이야기’라고 적어 놓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그림책이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화책 또한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을 초등학생만 읽는 책이라고 누가 말하든가요. 누가 그런 금을 함부로 그을 수 있습니까. 《몽실 언니》를 어린이만 읽어야 할까요? 《꼬마 옥이》를 아이들만 가슴 저미게 읽어야 할까요?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은 세상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한테,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알아가고픈 사람들한테 길잡이가 되어 주는 책입니다. 이리하여 어린 아이들한테 ‘동무를 사귀는 기쁨과 보람’을 차근차근 깨닫도록 해 주려는 싱그럽고 맑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왔단다. 집에 와서 또 다른 모퉁이를 보았지. 우리 집 모퉁이 말이야.”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너 거기서도 돌아다녔니?” 하고 두꺼비가 물었어요. “그럼, 그 모퉁이도 돌아다녔어.” 하고 개구리가 대답했지요. “무얼 좀 보았어?” “나는 해가 구름 속에서 나오는 걸 보았어.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것도 보았어.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꽃밭에서 일하시는 것도 보았어. 꽃밭에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 “드디어 봄을 찾았구나!” 하고 두꺼비가 기뻐 소리를 질렀어요. “응, 나는 정말 기뻤단다. 봄이 온 모퉁이를 찾아냈으니까.” ..  (26∼28쪽)


 중학교 1학년이 된 처남은 학교 말고 학원도 나갑니다. 다른 동무들도 학원을 나갑니다. 초등학교 때에도 학원을 나갔습니다.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는 아주 마땅한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학원 다니기인데, 두 나라를 빼놓고(어쩌면 중국도 비슷할는지 모릅니다만)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공부를 더 하거나 미리 하려는’ 학원에 다니는 나라는 지구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나라 많은 분들이 우러러 마지 않는 미국에조차도 입시학원이란 없습니다. 프랑스에 있을까요? 영국에 있는가요? 독일에 있는지요? 우리는 입을 벙긋할 때마다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선진국’이나 ‘경제대국’이니 읊고 있는데,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을 선물하는 나라가 무슨 앞서거나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아이다움을 키우면서 제 꿈과 뜻을 고이 펼치거나 나누도록 하지 않는 어른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나라가 어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학원에 다녀야 한다면, 노래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글을 배우고 연극을 배우며 춤을 배우는 한편 농사일을 배우고 뜨개질과 손빨래 들을 배우는 ‘삶이 있는 다른 배움터’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입시음악이나 입시미술이나 논술학원이 아닌 ‘삶을 가꾸는 노래’와 ‘삶을 빛내는 그림’과 ‘삶을 밝히는 글’을 익히는 새로운 배움터를 다녀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이런,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죄다 씻겨 내려갔네.”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걱정 마, 두껍아. 내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개구리와 두꺼비는 재빨리 가게로 달려갔어요. 그런 다음 둘이는 커다란 나무그늘에 앉아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었답니다.” ..  (40∼41쪽)


 어린 처남은 초등학교 때에도 동무들과 겨루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처남이 다닌 초등학교는 아주 작은 학교였고 반도 세 반에다가 한 반 아이들 숫자가 참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중학교에는 아홉 반에다가 한 반에 마흔이 넘는 아이들이 있고, 이 아이들은 서로서로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데로 내몰립니다. 아니, 교사 스스로 내몹니다. 교과서가, 교과 제도가, 교육 틀거리가 모두 입시지옥일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빛나는 마음과 넉넉한 얼과 따순 숨결을 북돋우는 터전이 아니라, 숱한 지식과 셈 잘하는 머리와 돈되는 일거리 생각하기에만 매이도록 하는 감옥과 같습니다.

 그래도 처남 스스로 제 삶을 잘 다스리면 될 노릇이고, 동무들하고도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즐겁게 뛰어놀 수 있으면 될 노릇입니다. 학교옷이 땀과 먼지로 뒤엉키도록 신나게 놀 수 있는 가슴과 팔다리가 있으면 됩니다. 어른들이 내어주는 ‘독후감 숙제’ 때문에 억지로라도 책을 읽게 된다 하여도, 제 깜냥껏 삭이고 빨아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느낌글이 어수룩할 수 있고 글씨가 삐뚤빼뚤일 수 있지만, 책마다 담긴 고운 이야기를 제 마음바탕에 담아 놓을 수 있으면 됩니다.


.. 개구리는 두꺼비 집에 와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침 다행이다, 두꺼비가 집에 없으니. 누가 갈퀴질했는지 모르겠지.” 두꺼비는 개구리 집에 와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침 다행이다, 개구리가 집에 없으니 누가 갈퀴질했는지 짐작조차 못하겠지.” 개구리는 열심히 일했어요. 갈퀴질을 해서 나뭇잎 더미를 만들었어요. 곧, 두꺼비네 마당이 말끔해졌어요. 개구리는 갈퀴를 집어들고 집으로 왔지요. 두꺼비는 여기저기 갈퀴질을 했어요. 갈퀴질을 해서 나뭇잎 더미를 만들었어요. 곧, 개구리네 마당에는 나뭇잎이 하나도 없게 되었어요. 두꺼비는 갈퀴를 집어들고 집으로 왔지요. 바람이 불어왔어요. 바람이 휙 지나갔어요. 개구리가 갈퀴질한 나뭇잎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어요. 두꺼비가 갈퀴질한 나뭇잎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어요 ..  (46∼50쪽)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사귀는 동무는 놀이동무입니다. 그 다음으로 소꿉동무이고, 그 다음으로 배움동무이고, 그러고 나서 일동무입니다. 그 뒤 한참 지나서 길동무를 만나고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를 만날 수 있지만, 이러한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는 놀이동무와 소꿉동무를 함께 거치곤 하지, 놀이와 소꿉과 배움과 일을 한꺼번에 뛰어넘으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어린 처남이 이런 흐름과 삶과 동무를 제 나이와 자리에 맞게 바라보고 어울리고 웃고 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합니다.

 저 또한 어릴 적부터 사귀고 만나고 어울려 온 수많은 동무들을 떠올리면서, 서로서로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즐겁게 제 길을 가면서 오래도록 한마음으로 기쁘게 술잔을 부딪힐 수 있기를 꿈꿉니다. 어느 한때 잠깐 스치던 사이가 아니기를 꿈꾸고, 저마다 제 밥그릇에 따라서 사귀다가도 헤어지다가도 등치다가도 하는 사이가 아니기를 꿈꿉니다.

 저는 동무한테 빛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힘이 되면서,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늙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동무한테 눈물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웃음이 되면서, 거리낌없이 술벗으로 만나는 동안 주름이 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동무한테 사랑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믿음이 되면서, 꾸밈없이 속을 털어놓는 말벗으로 복닥이고 복닥인 끝에 흙으로 조용히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그린 ‘아놀드 로벨’ 님은 1933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그림책만 하여도 1976년에 그렸습니다. 당신 나이 마흔셋일 때 빚은 작품이군요. 이밖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 《개구리와 두꺼비의 하루하루》, 《개구리와 두꺼비는 친구》 같은 그림책이 우리 말로 옮겨져 있습니다.

 개구리며 두꺼비며 겨울잠 없이 썰매를 타고 논다거나, 예수님나신날을 즐긴다거나, 얼음과자를 맛본다든가, 집 앞에 쌓인 가랑잎을 쓴다든가 하는 일이란,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만, 아이부터 어른까지 ‘개구리와 두꺼비는 징그러운 물뭍짐승으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톡톡 건드리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가만히 돌아보게 해 주는 반가운 벗님들 삶자락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 나름대로, 두꺼비는 두꺼비 깜냥껏 저희들 삶이 있고 저희들 꿈이 있으며 저희들 놀이와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고운 목숨을 물려받으면서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사람들만 바삐 살지 않아요. 사람들만 땀흘리지 않아요. 사람들만 사랑을 하나요. 사람들만 밥을 먹나요. 사람들만 동무하고 어울리나요.

 개구리는 개구리대로삽니다. 두꺼비는 두꺼비대로 땀흘리고 사랑하고 밥을 먹고 동무와 어울립니다. 흰둥이는 흰둥이대로, 깜둥이는 깜둥이대로, 누렁둥이는 누렁둥이대로 제 땅에 발붙이면서 삶을 꾸리고 사랑하고 어울리고 사귑니다. 못생긴 이나 잘생긴 이나 마찬가지이며, 돈 많은 이나 가난한 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똑똑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저마다 고운 삶이 있습니다. 저마다 고운 삶을 즐깁니다. 얕은 사람 눈길에는 조금도 고와 보이지 않을 테지만. 비뚤어진 사람 눈썰미로는 하나도 곱다고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 그런데 개구리가 거기 있는 것이었어요. “안녕, 두껍아, 늦어서 정말 미안해. 선물 꾸리다가 그만 늦었어.” “너 구덩이에 안 빠졌어?” “응.” “너 숲에서 길 잃지 않았어?” “으응.” “너 커다란 동물한테 안 쫓겼어?” “그래, 전혀 그런 일 없었어.” “와, 개굴아, 너하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  (62∼63쪽)


 아놀드 로웰 님은 개구리는 개구리대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껴안으면서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빚어냅니다. 두꺼비는 두꺼비대로 믿음직스럽게 헤아리고 보듬으면서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내놓았습니다.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사랑은 처음부터 돈을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름값으로는 믿음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살가운 믿음은 처음부터 이름값을 살피지 않음을 일러 줍니다. 힘이 세다고 평화를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평화는 처음부터 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러저러그러한 모든 이야기를 수수하게 그려 보이는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입니다. 책겉에 적힌 말처럼 ‘초등학교 1ㆍ2학년’ 어린이도 손쉽게 알아채거나 느낄 수 있도록 짜여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줄거리이고, 예닐곱 살 어린이가 아니라 너덧 살 어린이도 어버이가 조곤조곤 읽어 주면 좋아라 들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엮여 있습니다.

 읽거나 듣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읽어 주거나 먼저 살피며 책값 치르어 사드는 어른은 어른대로, 이 그림책 하나를 펼치는 동안 우리 앞에 펼쳐지는 푸르고 밝은 새나라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합니다.


.. “우리, 썰매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나는 싫어.” 하고 두꺼비가 대꾸했지요. “무서워하지 마. 내가 같이 탈 테니까. 썰매는 신나게, 빠르게 달릴 거야. 두껍아, 네가 앞에 앉아. 내가 너 뒤에 앉을 테니까.” ..  (8쪽)


 그림책은 누가 읽는 책인지 잘 모르겠다면 아놀드 로웰 님 작품을 살며시 집어들어 보면 됩니다. 그림책이 왜 좋은가 궁금하다면 아놀드 로웰 님을 비롯한 훌륭한 앞선 사람들 작품을 가만가만 돌아보면 됩니다. 그림책이란 어떤 책인지 아직 모르겠다면 나라 안팎 손꼽히는 그림책 작가를 알아보면서, 이분들 작품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뭉클하게 움직이는지를 아이 손을 붙잡고 함께 들여다보면서 느껴 보면 됩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울타리를 쌓지 않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너나없이 웃고 울며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보다가 찢어져도 괜찮고, 찢어지면 풀로 붙이거나 종이를 대면 되며, 망가지고 더러워져도 우리 아이들한테 두고두고 물려주게 됩니다. (4342.3.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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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장 삼대째 21 - 노르웨이의 어프로치
하시모토 미츠오 지음 / 대명종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따끔하면서 아름다운 만화 하나
 [살가운 만화 44] 미츠오 하시모토, 《어시장 삼대째 (21)》



- 책이름 : 어시장 삼대째 (21)
- 그림 : 미츠오 하시모토
- 글 : 마사하루 나베시마, 카즈토 쿠와
- 옮긴이 : 편집부
- 펴낸곳 : 대명종 (2008.10.30.)
- 책값 : 3800원



 (1) 그림과 말 하나마다 따끔한 만화


 띄엄띄엄 끊일 듯 이어지면서 나오는 만화책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덧 25권까지 옮겨진 만화로, 이 만화를 처음 알게 되어 1권부터 읽어 오는 여러 해 동안 ‘틀림없이 만화는 훌륭하지만, 널리 사랑받을 수 있을까? 글쎄, 아무래도 더 번역을 안 하고 사라질 듯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만화책을 스물세 권째 장만한 만화가게에서도 이 만화가 ‘새로 나올 때’ 딱히 돋보이는 자리에 올려놓고 알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어느 한 번도.

 그러나 이 만화는 여러 해 동안 숨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돋보이는 자리에 올려놓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받을 만한 만화로 여겼는지 모르고, 그렇게 구석진 자리에 꽂혀 있어도 소리 소문 없이 사랑하는 손길이 가 닿았는지 모릅니다.


.. “이건 트롤이라는 녀석이지. 북유럽 민화에 나오는 요정이라고 할 수 있네. 숲과 산속에 살면서 사람을 골리기도 하고 돕기도 하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고, 자연과 요정에 경의를 표하는 인간들에게 행운을 준다고 하더군.” “요정…이요? 그런데 별로 귀엽진 않네요. 좀 음침한 느낌.¨ …후후, 그렇지만 이 트롤은 노르웨이사람들에겐 무척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라네. 그걸 알고 나니 나도 귀엽게 느껴지더군.” “그래요?”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이 트롤은 노르웨이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상징이라네.” ..  (10쪽)


 아기를 낳아 기르느라 만화책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이 없던 지난 반 해 동안, 이 만화, 끊일 듯 이어지는 만화 《어시장 삼대째》가 21, 22, 23권이 잇달아 나와 있었습니다.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구나 싶고, 그렇게 긴 세월을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싶으며,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만화가 꾸준히 나오고 있었는데 몰라봤다 싶어 미안합니다.

 가방이 다른 책으로 무겁고 살림돈은 바닥을 헤매고 있으나, 기꺼이 세 권을 집어듭니다.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 꺼내어 읽을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다른 만화와 달리 《어시장 삼대째》 같은 만화를 전철길에서 읽다 보면 그만 눈물이 주르르 흘러서 남우세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두 번 겪고 나서는 《어시장 삼대째》는 반드시 집에서, 그리고 잠자기 앞서와 새벽에 일어나서만 펼칩니다.


.. “그럼 여기선 그 자연산 연어를 먹지 않나요?” “자연산 연어를 먹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건가요?” “자연산 연어를 먹는 건 곰뿐이에요! 당신 곰인가요?” “고, 곰? 이해가 안 가네. 양식 연어는 잘 먹으면서 자연산 연어는 왜 곰의 먹이로 생각하는 거지?” … “하하하, 여기서도 낚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잡은 연어를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연산 연어는 시장에 나오질 않습니다. 모두가 먹는 연어는 이런 팜(양식장)에서 키운 것들이죠.” “왜죠?” “야생의 곰이 야생의 연어를 먹는 건 자연계의 섭리죠. 인간이 거기에 개입하면 그 균형이 깨집니다.”..  (33, 50쪽)


 어느새 스물다섯 권째 나오는 《어시장 삼대째》인데, 책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어시장에서 삼대째 일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어시장 이야기가 나오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시장에서 다루는 물고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요, 일꾼도 한두 사람이 아니니, 적어도 100권쯤은 너끈히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루는 사람에 따라 200권도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만, 이렇게 권수를 늘릴 수는 있다고 하여도 깊이와 너비를 고루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땀을 쏟아야 할 뿐 아니라, 이 하나에 온몸과 온마음이 깃들어야 합니다. 땀방울이 바쳐지지 않는 만화는 우리한테 눈물방울을 뽑아낼 수 없습니다.


.. “여기선 모든 양식장에서 사용되는 먹이를 국가기관이 엄격히 조사해서 허가한 것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먹이는 열처리로 살균하고 항생물질 등의 약품도 전혀 들어가질 않습니다 …… 인간이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 “또 이 지역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입니다. 그 비와 녹은 눈이 암벽을 통해 풍부한 미네랄을 품은 다음 흘러내려 항상 신선한 바다를 유지시켜 줍니다.” ..  (43, 48쪽)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또는 할머니 어머니 나, 또는 할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세 집안에 걸쳐서 이어오는 중간도매상을 하는 ‘삼대째’는 만화책이 25권에 이르도록 어시장에서 ‘새내기’나 ‘풋내기’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도 새내기요 풋내기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런 생각은 바로 ‘언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로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물고기가 있으면 꾸지람을 듣더라도 만져 보고 여쭈어 보고 손수 사들여서 끓이거나 저며 보거나 삶아 보거나 구워 보거나 합니다. 먹어 보지 않고서는 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배우는 물고기에서, 머리로 배우는 물고기로 나아갑니다. 물고기 맛을 알고 잘 다룬다고 하여 훌륭한 일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욕심에 따라서 바다밭이 말라 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가게 매출을 올리자면서 아무렇게나 사들이거나 다룰 수 없습니다. 나아가, 고기잡이하는 사람들 삶을 껴안고, 나라밖 고기잡이 참모습을 돌아보면서, 주인공이 사는 일본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되짚습니다. 어시장 삼대째인 자기 스스로도 어떤 삶을 꾸려야 하는가를 돌아봅니다. 이리하여, 22권을 보면, “전 제 아이에게 풍요로운 바다와 생선 문화를 남겨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 아이가 어시장 사대째가 되어 주길 바라구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전 그걸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137쪽)” 하고 당차게 외칩니다.


.. “이 신문기사를 보면 유엔에서 국민이 풍요롭게 사는 나라의 랭킹이 나왔는데, 노르웨이가 6년 연속 1위를 차지했어.” “그래요?” “그런 노르웨이사람들의 오락이라면 자연과 접하는 것이라는군. 여가를 즐기기 위해 숲의 오두막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거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즐긴다고 하네.” … “지금까지 노르웨이 연어에 유해물질과 약품이 남아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만약 발견되면 그 양식업자는 바로 라이센스가 취소되고 영업정지를 당하게 됩니다.” ..  “난 여기에 와서 다시 노르웨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네. 이곳 수산업의 대단한 점은, 정부와 국민과 학교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야.” … “불필요한 인공구조물로 꽉 찬 일본의 해안선과는 다른 자연 그대로의 피욜도, 모두가 협력해서 미리 자연을 보호하고자 과감하게 금어 조치를 내리는 정부, 제가 여기서 느끼고 본 것은 모두 자연과 공존하려는 수산업의 현주소였습니다.” ..  (64, 69, 79, 84쪽)


 이어가려는 마음은 가꾸는 마음입니다. 지키려는 마음은 바로 이곳 이때에 즐기려는 마음입니다. 물려주려는 마음은 고마워하는 마음입니다. 나누려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만화로 들려주는 어시장 이야기는 어시장 사람들이 어떻게 바다와 우리 삶터를 사랑하는 길을 찾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화 바깥 우리들로서는 우리가 저마다 발딛고 선 자리에서 어떤 이웃과 어떤 매무새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한테 즐거울 길을 찾느냐 하는 물음표입니다.

 혼자만 잘 살겠다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 모두 잘 살자는 밥그릇 가꾸기입니다. 혼자만 배부르면 된다는 밥그릇 지키기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이 다 함게 즐거웁되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는 밥그릇 보듬기입니다.


.. “이 낡은 목조 건물이 수산선진국의 최첨단 연구소?” “이 건물은 전통 있는 무역상의 창고를 개축한 겁니다. 13세기에 지어진 한저 상인의 집이 지금도 레스토랑과 선물 가게로 사용되듯이, 우리는 낡은 건물을 소중히 여기죠. 좀 불편해도 수리하면서 사용하자는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남아 있었네요. 전부 다시 짓는 우리완 다른 느낌입니다.” ..  (66쪽)


 《어시장 삼대째》 22권을 보면, 어시장 사대째가 될 어린이 입을 빌어, “전 소용없단 생각이 들어요. 일본에서 MSC는 확산될 수 없어요. 아까 그 사람들 앞이라 말은 안 했지만, 생산자의 의식이 강해도 소비자의 인식이 낮은데 효과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본 적이 있잖아요. 마트나 수퍼에서 도시락이나 우유를 살 때, 모두 안쪽에 있는 유효기간이 긴 걸 찾잖아요. 금방 먹을 거고 마실 건데, 그것 때문에 많은 음식과 우유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 일들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될걸 알면서도 그러죠. 그런 일본에서 MSC 따윈 무시될걸요.(111∼112쪽)” 하고 따끔한 한 마디를 합니다. 이 어린이 말에는 22권이 끝나고 23권이 되도록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나오기 어렵지 않으랴 싶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일본이라고 하여도, 깨우친 생산자만큼 따라가는 소비자가 많지 않음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우치지 않는 생산자도 아직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는 어떠할까요. 우리 나라에서 깨우친 생산자는 얼마쯤 될까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깨우친 소비자는 또 얼마쯤 될까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일는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느 자리에 서도록 이끌고 있는 어른일는지요.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즐기는 사람일는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즐기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는 어른일는지요.


 (2) 그림과 말 어느 자리나 애틋한 만화


 《어시장 삼대째》는 어느 한편으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만화입니다. 그러면서 ‘홀가분’하게도 하는 만화입니다. 권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새로 나오는 만화를 집어들어 펼치면, ‘이 권수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겠지’ 하고 헤아리게 되고, 꼭 그 헤아림대로 줄거리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다 알 만한 이야기가 펼쳐져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웃음을 빼는 대목은 그리 안 많으나 곳곳에서 웃음이 묻어나도록 엮여 있는 한편, 눈물을 빼는 대목이 참으로 많습니다.

 슬픈 눈물이 아닌 아름다운 눈물로, 괴로운 눈물이 아닌 기쁜 눈물로.


.. “어이가 없군. 내가 이런 녀석에게 졌다니 한심해. 삼대째, 자넨 맛으로만 생선을 보나?” “왜 화를 내시는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곰치를 요리해 주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야! 내 말을 모르겠으면 오토메에게 물어 봐!” ..  (168쪽)


 만화를 넘기며, 또 만화를 덮으며 생각합니다. 그린이와 글쓴이는 어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기에 이렇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하고. 그린이와 글쓴이 어버이는 어떤 분이었기에 이런 마음결을 담아내도록 아이들을 돌보고 키울 수 있었을까 하고.

 고되고 벅찬 삶을 겪어냈다 하더라도 그 고되고 벅참을 짜증이 아닌 사랑으로 펼쳐 보이는 힘이 반갑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삶을 맞아들였다 하더라도 그 기쁨과 고마움을 지루하거나 어설픈 붓끝이 아니라 애틋하며 싱그럽게 담아내 보이는 기운이 좋습니다.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껴안고, 수월함은 수월함대로 부둥켜안는다고 할까요. 슬픔은 슬픔대로 힘이 되고, 기쁨은 기쁨대로 빛이 된다고 할까요.


.. “하지만 시어머니도 유미코 씨보다 더 곰치를 무서워하고 싫어하셨습니다. 그래도 유미코 씨를 위해, 귀여운 손자를 위해 곰치를 손질하고 요리했던 겁니다.” ..  (184쪽)


 삶이 묻어나는 만화이기에 즐겁게 장만하여 읽습니다. 삶이 배어든 만화이기에 깊은 맛을 느끼며 읽습니다. 삶이 삭여진 만화이기에 둘레에 널리 알리면서 읽습니다. 삶이 곧 만화로 다시 태어났기에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두고 도서관 손님들한테 읽힙니다.


.. “찰가자미국이 정말 맛있는 걸 알겠네요.” “삼대째는 드시지도 않았는데…….” “이시쿠라 씨 얼굴이 무지 편해졌거든요.” … ‘왜 이렇게 먼 기억까지 생각나는 거지? 이 맛은 그저 맛있기만 한 게 아니야! 그리움이야!’ ..  (130, 134쪽)


 그러고 보면 우리한테는 동해와 남해와 황해가 있습니다. 골골마다 냇물이 흐릅니다. 바다물고기와 민물고기가 고루 있습니다. 바닷가마을마다 어시장이 있고 갖은 물고기가 우리 밥상에 오릅니다. 그렇지만, 바다 이야기가 만화로 그려지는 일이 드뭅니다. 어시장 이야기가 만화로 담기는 일이 드뭅니다. 고기잡이 삶이 만화로 새로 빚어지는 일이 드뭅니다. 물고기 하나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싸안으면서 사랑으로 바라보는 만화를 구경하기란 아주 힘듭니다.

 늘 곁에 있어도 모르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있어도 알뜰히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한결같이 이웃으로 있으나 한결같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알아야 할 일이 많은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다른 큰일이 많은 우리들인지, 뭐가 그리 대단한 우리들인지 알 노릇은 없습니다만.


.. “이시쿠라 씨는 요리사라서 내가 모자라지만, 찰가자미 요리는 자신이 있거든요. 찰가자미 요리를 못하면 시집을 못 간다고 할머니가 가르쳐 줬죠.” “유코도 할머니를 좋아하는구나.” “예, 어릴 때 부모님이 일 때문에 바빠서 할머니가 절 돌보셨어요. 내 찰가자미 요리는 우리 할머니 솜씨랍니다.” ..  (100쪽)


 어제 하루와 오늘 하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을 우리 아이가 먼먼 뒷날 “우리 할머니 사랑이에요”나 “우리 할아버지 사랑이에요” 하면서 두 손 모두어 내밀 그 자리에 깃들 무엇은 어떻게 자리매겨질까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때까지 아이를 사랑으로 알뜰살뜰 보듬어야 할 테고, 그때까지 어버이 된 몸으로서 아프지 말고 튼튼히 잘 살아야겠지요.

 아이와 함께 즐거울 길을 찾으면 삶은 즐겁고, 아이와 같이 아름다울 길을 살피면 삶은 아름다워진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는 1권부터 21권에 걸쳐, 그리고 22권과 23권과 24권과 25권에서도, 또 앞으로 나올 수많은 뒷권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당신들 나름대로 고이 엮어내어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만화를 호수가 빠지지 않도록 잘 챙겨서 모아 놓고, 다가올 앞날을 기다립니다. 아이가 스스로 이 만화를 끄집어 내어 읽을 그 앞날을. (4342.3.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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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 임영인 신부의 노숙인 이야기
임영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93 ― 노숙자, 노숙인, 떨꺼둥이, 우리 이웃
 : 임영인,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



- 책이름 :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
- 글 : 임영인
- 펴낸곳 : 삶이 보이는 창 (2009.2.16.)
- 책값 : 1만 원


 (1) 이 땅에 새로 찾아온 봄볕을 느끼면서


 금토일 사흘 동안은 고향인 인천에 마련한 동네도서관을 열어 놓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금요일 아침 일찍 일산에서 길을 나섭니다. 옆지기가 식구들이 보고 싶다고 하여 지난주 월요일에 아기와 함께 일산에 온 다음, 옆지기는 내내 일산에 있고, 저는 혼자서 인천과 일산을 오갑니다.

 얼핏 보기에 전철로 움직일 수 있어 괜찮은 듯 여길 수 있지만, 국철 맨 왼쪽에서 3호선 맨 위로 오가는 길은 몸이며 마음이며 많이 지치게 됩니다. 어쩌다 한 번이야 그야말로 어쩌다 한 번이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오가야 하면 퍽 괴롭습니다. 그나마 날마다 오가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할 텐데, 이렇게 왕복 여섯 시간 거리를 오가면서, 지난 1994년 한 해 동안 인천 남쪽 끄트머리에서 서울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학교까지 전철로 오갔던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무렵(요즈음은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인천 서남쪽 끄트머리에서 서울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학교까지 전철로 오간 사람이 드물게 있었고, 네 해에 걸쳐 전철로만 다니고 하숙이나 자취를 안 한 사람 또한 아주 드물게 있었습니다. 그냥 전철만 타면 된다고 여기는 잘 모르는 이들은, 왜 우리가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집에서 나와도 학교에 아홉 시가 다 되어야 닿게 되는지를, 그리고 그런 통학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그리고 저녁에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전철역으로 달음박질을 치는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녁 여덟 시 사십이 분 전철을 이문역(이제는 외대앞역)에서 타면 집에 열두 시에 닿고, 저녁 아홉 시 사십팔 분 전철을 타면 집에는 한 시가 넘어서야 닿는데, 이튿날 다시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까마득했습니다.


.. 일반인이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면 공안원들이 그를 짐수레에 실어 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노숙인이라고 짐짝 취급을 한 것이다 ..  (190쪽)


 오늘도 머나먼 길을 빙빙 돌아 인천으로 옵니다. 한국에서 모든 길은 서울로만 이어질 뿐, 지역과 지역이 이어지는 길은 뚫리지 않을 뿐더러 뚫으려 하지 않으니, 애타는 사람만 애타고 애닳는 사람만 애닳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된 길을 오가게 되면서 고단한 마음을 조금씩 추스르면 ‘책읽을 겨를’을 좀더 낼 수 있곤 합니다. 그래 보아야 고단한 몸을 이기지 못하면 곯아떨어져 어설피 졸면서 다니게 되지만, 뒷목과 이마와 눈자위를 주무르면서 책장을 펼쳐 끝끝내 한두 권씩 읽어내곤 합니다. 어쩌면, 집과 가까운 데에서 학교를 다녔다든지, 옆지기 식구네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먼 길을 돌면서 책을 읽는 겨를을 못 내었을는지 모릅니다(그래도 그때에는 그 나름대로 다른 겨를을 내었을 테지만). 그리고, 새벽밥 먹고 서울로 가는 첫 전철을 거의 날마다 타면서 새벽바람으로 서울로 일하러 가는 아주머니들(거의 모두 서울 큰 건물 청소일을 하시던 분들) 삶자락 한 귀퉁이를 아주 살짝이나마 엿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단한 길을 늘 오가는 사람이 퍽 많음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지옥철’이 무엇이고, 어떻게 전철 한 칸에 사백 사람 넘게 꾸역꾸역 태워 숨도 못 쉬게 되는지를 몸으로 느꼈으며, 만화책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창문에 얼굴이 찡기는 일’이 만화가 아닌 진짜 날마다 늘 있는 일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뭐랄까, 제 몸은 군면제 대상자였음에도 줄을 잘못 서서 군대에 갔고, 그 군대도 강원도 산골짜기 민통선 안쪽 가장 깊숙한 데로 끌려가면서 군대란 어떤 곳인가를 몸소 깨닫게 되었듯, 고달픈 전철길을 여러 갈래로 타야 하는 몸이 되면서, 이 고달픈 길에 몸을 싣는 수많은 이웃을 알게 되는 셈이라 할까요. 책으로만이 아닌, 지식으로만이 아닌, 들리는 이야기로만이 아닌. 강 건너 불구경으로만이 아닌, 다른 나라 이야기로만이 아닌, 남들 얘기라 한귀로 흘리게 되는 모습이 아닌.


.. 10년 동안 계속된 거리 급식은 역설적으로 노숙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것이다. 자존감이 무너진 사람이 어떻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노숙인이 받는 느낌은 ‘예배와 밥의 거래’이다. 예배를 위해 역 광장이나 지하도 바닥에 앉아 있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갑다. 그 눈총에 짓눌려 벽을 향해 쪼그리고 앉거나 선 채로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기다리는 시간은 한 시간 이상이지만, 식시시간은 불과 3∼4분 … 거리에서 밥을 나눠 주는 모 교회는 교회 건물도 짓고, 병원도 짓고, 수련관도 지었지만, 여전히 거리 급식을 ‘강행’한다 ..  (173∼174쪽)


 동인천역에 내려 인현동 1번지 안쪽 골목길을 거닐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인천에 살아남은 어느 골목길이 안 그러겠습니까마는, 이곳 인현동 1번지 골목도 참으로 좁고 조용합니다.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조차 들어갈 수 없는 가운데, 국철을 바로 옆으로 끼고 있습니다. 국철이 놓이기 앞서부터 있던 동네라, 이곳 인현동 1번지는 국철길에 따라 둘로 쪼개져 있습니다.

 인천 바깥사람이 인천에 오면 늘 누구나 느낀다고 하듯, ‘전철과 고속도로 때문에 남과 북으로 나뉜’ 삶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속도로나 기찻길 때문에 동네가 둘로 갈리고 이웃이 멀리 떨어지는 일은 시골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서울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잘사는 동네와 덜 잘사는 동네로 나뉜다지만, 인천은 전철길과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못사는 동네와 또 못사는 동네가 갈려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까지 어느 한 번 ‘고속도로 소음피해’ 보상을 받은 적이 없고, ‘전철 소음피해’ 배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애써 일군 땅뙈기를 빼앗기며 조금 보상을 받은 적은 있으나, 소음과 진동으로 수십 해에 걸쳐 받은 피해를 갚음받아야 함을 어느 누구도 헤아리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전철길이 바로 코앞에 붙어 있는 데에도 인현동 1번지 골목이 참 조용합니다. 옐로우하우스와 산업물류 기차길이 집 코앞에 붙어 있는 신흥동3가와 숭의1동하고 비슷합니다. 참 뜻밖이라고 느끼면서, 이렇게 이곳에서밖에 살 수 없던 골목사람들은 이분들 나름대로 소음피해를 덜 받도록 집을 짜고 골목을 이루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스칩니다. 시끄럽고 고달파도, 다른 어디로 옮길 수 없는 형편이니, 이곳에서 뿌리내리면서 살아갈 마음으로 더 땀흘리고 애써서 동네를 가꾸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사회가 조금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그 동정과 연민을 넘어선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권’. 내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인권이다. 그러나 그때 그 자리에서 깔깔한 입안 탓에 채 못 다한 말이었다. 노숙인 문제를 인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숙인 문제가 인권 문제인 것은, 노숙인이 불쌍하기 때문에 돕는다는 것을 넘어,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인권의 묹는 개인의 느낌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람을 이성적으로 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 인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모두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나쁜 사람이라고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은 한 인간이 방치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가치가 추락하도록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55쪽)


 도서관에 앉아 밀린 일을 하고 고양이한테 밥을 주다가, 봄날 햇볕이 더없이 좋다고 느끼면서, 이 햇볕을 그대로 두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 문을 걸어잠그고 쪽지를 문에 붙입니다. 자전거를 어깨에 걸쳐 밖으로 나옵니다. 따순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달립니다. 옆지기가 손전화 쪽지를 보내옵니다. 내 얼굴이 지치고 화가 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지치기는 지쳤겠지만 화가 날 일이 없는데 왜 그리 느꼈을까 생각하다가, 사람이 너무 지쳐서 얼굴에 아무런 빛이 들지 않으면 뚱하거나 꿍해 보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화 안 나고 짜증 안 났어도 그처럼 보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옆지기가 이렇게 느끼면 아기는 어떻게 느끼려나? 아기도 지 아빠가 힘들어하는 줄 느끼면서, 아빠를 좀 쉬게 해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자전거를 몰아 도원동과 선화동을 거쳐 신흥동3가에 닿습니다. 오늘은 학익동까지 가기로 마음먹고 숭의1동으로 접어들어 기차길 옆 텃밭을 신나게 사진으로 담는데, 디지털사진기가 더 눌러지지 않습니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메모리카드가 0. 헉. 꽉 찼잖아. 아이고, 예비 카드를 안 들고 나왔네.

 이제 등판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즈음이었습니다만, 다시 돌아가야 할 판.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돌아가야지. 저런. 젠장. 바보. 밥통.


.. 그가 나가고 난 뒤 실무자들은 나를 구박했다. “신부님이 그렇게 원칙 없이 대하니까 우리가 피곤해요. 신부님도 피곤하고요. 우리가 상대를 하려고 해도 그냥 신부님만 만나려고 하잖아요. 그리고 …… 믿음이 가요?” 그래, 맞는 말이다. 피곤하고 서글픈 일이다. 그렇지만 노숙인에게 속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속자고 시작한 일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인생이란 속고 속이는 것 아닌가. 노숙인들만 거짓말을 하고 반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안 하는가. 그깟 만 원짜리 한 장에 뭐 그리 화낼 일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왜 작은 거짓에는 분노하고, 큰 거짓에는 관대한 것일까 ..  (102쪽)


 자전거머리를 돌려 돌아오는 길, 숭의1동과 숭의2동 갈림길 철길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는 떨꺼둥이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를 봅니다. 햇볕 잘 드는 곳에 띄엄띄엄 둘러앉아 낮부터 소주병을 까고 있으십니다. ‘여론은 겨울에만 노숙자 편’이라 했고, ‘자연은 봄부터 노숙자 편’이라 했습니다. 바야흐로 따뜻한 봄철을 맞이해, 살랑이는 바람결을 느끼고 따순 햇살을 받으면서 철길에 앉아서 까는 소주잔이라(이 철길에는 이제 기차가 다니지 않으나, 철길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저씨 아주머니 들이 그야말로 봄나들이 즐기시는 셈이로군요. 꽃지짐 없고 꽃노래 없지만, 꽃다운 날씨를 머금으면서 하루 한때를 마음껏 즐기는.


.. 노숙인이 쉼터를 꺼리는 사정도 있다. 쉼터는 대부분 옹색한 구조라서 군 내무반처럼 배치되어 있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해야 하니 개인적인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연히 규칙은 엄격하고 노숙인의 입장에서 볼편할 수밖에 없다 … 나이 40∼50인 사람들이 군인도 아닌데, 군 내무반보다 비좁은 공간에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1∼2년 이상을 청교도처럼 생활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그런 생활을 무난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게 아닐까? 노슥인들도 군 내무반 수준이면 살 만하다고 말한다. 물론 ‘노숙인 주제에 그런 시설만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  (23∼24쪽)


 다시 옐로우하우스 앞을 지납니다. 한낮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골목을 살짝 기웃거립니다. 어릴 적 ‘옐로우하우스’라는 이름은 익히 듣고 말했어도 무엇을 하는 줄 모르던 때에는 이 골목 안쪽에 있는 오락실에 가느라(그때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오락실이 여기에 있었기에) 늘 지나다니곤 했습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또는 여느 날 낮부터 오락실에 죽치고 있다가 해 저물 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며 ‘늦게까지 오락실에 있다가 가느라 또 혼날 텐데’ 하고 걱정하던 우리 같은 꼬맹이들을 바라보던 옐로우하우스 아가씨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스물 몇 해 앞서 이 골목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은 아직도 이 골목에서 일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다른 데로 옮겨갔을까요? 다른 데에서 다른 일을 할까요? 이 일을 접고 할 만한 다른 일이 있었을는지, 다른 일을 하도록 포주가 놔주었을는지, 그분들 다른 식구들은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는지, 몽실몽실 궁금해집니다.

 자전거는 달려서 신광초등학교 앞을 지납니다. 초등학교 앞임에도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건널목 푸른불을 아랑곳않으며 내달리는 수출입 물동량 실은 큰 짐차를 바라보면서 뒷덜미가 쭈뼛쭈뼛합니다. 이제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집에 갈 때인데, 저 큰 짐차를 모는 분들은 당신네 아이가 이 학교에 다녀도 저렇게 함부로 내달릴 수 있을까? 자기네 아이가 안 다닌다 하여도 이렇게 해도 되는가? 스물여덟 해 앞서 이 길을 날마다 걸어다니던 꼬맹이 얼굴을 떠올릴 문방구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가 싶어 천천히 지나가지만, 떠오르는 얼굴도 없고 저를 알아보는 얼굴도 없습니다.

 신흥시장 옆길로 빠집니다. 유동세거리 앞으로 나옵니다. 길을 건너고 전철길 밑으로 낸 개구멍으로 지나갑니다. 이제 배다리 헌책방골목이 나오고 집에 다 왔습니다. 자전거를 어깨에 이고 집으로 올라갑니다. 오늘 배다리 헌책방골목에 어느 방송사에서 취재를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습니다. 이분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찍고 무엇을 이야기하게 되려나 살짝 궁금하지만, 이 궁금함은 접어둡니다. 어쩌다 한 번, 아니 여태껏 돌아보지 않다가 한 번 찾아와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여쭙는 방송국 사람들한테 속깊거나 너른 생각줄기를 바라는 일은 처음부터 잘못이 아니랴 싶습니다. 늘 곁에 있으면서 돌아볼 줄 알고, 언제나 가까이에서 어깨동무하는 마음이 아니었던 사람한테 참과 거짓을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 보았댔자, 고이 받아들일 가슴이 있겠느냐 싶습니다.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조금도 없지는 않을 테지만, 왠지 서글프고 씁쓸합니다. 자전거를 메고 집으로 오니 고양이가 창문 턱에서 야옹거리며 반깁니다.
 





 (2) 떨꺼둥이와 어깨동무하는 삶,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


 성공회 신부 임영인 님이 서울역 둘레에서 떨꺼둥이(노숙자) 삶을 어깨동무하면서 보내 온 이야기를 담은 책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를 읽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떨꺼둥이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떨꺼둥이’란 옹근 토박이말로, “기대거나 지내던 곳에서 가진 것 없이 쫓겨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 낱말을 몰랐습니다만, 노숙자 인권을 헤아리는 일을 하는 분들이 내는 소식지 가운데 하나가 이 낱말로 되어 있어서, 이 소식지를 받아본 뒤로는 ‘노숙자’라는 말을 안 쓰고 ‘떨꺼둥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라는 책에서는 ‘노숙자’라 안 하고 ‘노숙인’이라 쓰는데, 이 낱말은 그리 알맞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고친들, 또 ‘장애우’로 고친들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노숙인’ 아닌 ‘노숙우’라 한들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어떤 이름으로 가리키든, 가리키는 우리 스스로 달라지지 않으면 이름만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는 세상입니다. 우리 스스로 ‘장애자-노숙자’라는 이름으로 떳떳이 말하면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자리에서 어깨동무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 일반적인 노숙인은 ‘주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빈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평범해서 노숙인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5∼10만 명 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숙인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라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노숙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들은 여인숙, 쪽방, 고시원, 사우나, 만화가게, PC방, 기도원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노숙인은 거리가 역사 주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의식하고 살펴보지 않으면 그들이 노숙인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  (13쪽)


 성공회 임영인 신부님은 ‘법에 없’을 뿐더러 ‘법이 지키지 않’는 사람들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다시서기센터’를 열고, 서울역 앞에 ‘다시서기진료소’도 열었습니다. 혼자힘이 아닌 여러 힘이 모인 일이며, 기꺼이 애쓰는 많은 이들 땀방울이 있기에 서울역 한켠에 컨테이너 건물로 진료소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법이 내친 사람이 떨꺼둥이이고, 법이 껴안지 않는 사람이 떨꺼둥이입니다. 그래서 떨꺼둥이와 함께하는 일은 법을 넘어서는 일이 될밖에 없습니다. 무료진료소도, 떨꺼둥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돕는 손길을 나누는 일도, 어느 개인이나 모임이나 종교에서 할 일이 아닌 나라에서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이런 데에 마음을 안 쏟습니다. 눈길을 안 돌립니다. 오로지 하나,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 수 있게 하는 경제성장 숫자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눈길은 오직 여기에만 가 닿습니다.


.. 노숙인도 똑같은 사람이다. 이들에게도 삶의 윤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고 꽃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에는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  (52쪽)


 못사는 사람, 없는 사람, 빼앗긴 사람, 잃은 사람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이며 이웃이고 동무이고 식구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만 한국사람이 아니라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도 한국사람입니다. 이름있는 사람만 한국사람이 아니라 이름없는 사람도 한국사람입니다. 집 있는 사람만 한국사람이겠습니까. 차 굴리는 사람만 한국사람이겠습니까. 대학 나온 사람만 한국사람이겠습니까. 영어 잘하는 사람만 한국사람이겠습니까.

 집 없고 차 없고 대학 안 나오고 영어 못해도 한국사람입니다. 이주노동자도 한국땅에서 함께 땀흘리고 어깨동무할 사람입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낯선 데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사는 고운 벗이요 이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네 보건복지 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다면, 떨꺼둥이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도, 장애 있는 사람들도, 어린 아이들도, 밑바닥과 벼랑과 구석자리에 내몰린 사람들도, 이주노동자들도 고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고르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한국이라면, 처음부터 떨꺼둥이가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구나 고르게 살 수 없도록 짜여져 있을 뿐더러, 우리 스스로 내 한 몸 밥그릇 더 단단히 움켜쥐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자꾸자꾸 밑바닥에 내몰리는 사람이 늘고, 그예 떨꺼둥이가 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나라 정책도 큰 잘못이지만 우리 생각과 삶 또한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 평일에도 (동냥을 하러) 하루 평균 20∼30곳 정도 교회를 다닌다. 그렇게 돌아다니면 힘들지 않냐고 묻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그래도 일 주일에 하루는 쉬어요.” 일 주일에 하루는 쉰다고? 녀석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 당혹스러움에 구걸이 무슨 직업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을 수는 없다. 적어도 그런 질문은 녀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능청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도 일 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하잖아요.” 녀석은 교회가 문을 닫는 월요일에 쉰다고 했다. 자식이 비록 교회 꼬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49쪽)


 이야기책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는 아주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엽니다. 우리한테 이야기를 겁니다. ‘도를 아십니까?’ 하는 말걸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아주 많은 사람들은 ‘떨꺼둥이를 아십니까?’ 하는 말걸기가 ‘도를 아십니까?’ 하는 말걸기로만 느껴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즈막하고 털털한 목소리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를 이야기합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글을 쓰지 못하는 숱한 떨꺼둥이 마음을 헤아리는 신부님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려 하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우리들한테,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라는 이야기를 꾸준한 말걸기로 일러 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이요, 다 같은 이웃이요, 다 같은 동무요, 다 같은 아름다운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4342.3.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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