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말을 걸다 - 백성현 포토 에세이
백성현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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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삶’인 줄 알면, 사진은 저절로 예술이 된다
 [잠깐 읽기 23] 백성현, 《당신에게 말을 걸다》


- 책이름 : 당신에게 말을 걸다
- 글ㆍ사진 : 백성현
- 펴낸곳 : 북하우스 (2008.12.19.)
- 책값 : 15000원



 (1) 사진, 사진기, 사진쟁이


 사진 찍는 사람 많고 사진 즐기는 모임 많습니다. 이제는 사진이 따라붙지 않는 신문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사진이 함께하지 않으면 재미없어 하거나 지루해 하기까지 합니다. 글로만 이야기를 건네는 문학책에도 사이사이 사진(또는 그림)이 끼어들기 일쑤이고, 과자봉지며 길거리에 붙거나 흩날리는 광고전단지에도 사진이 박혀 있습니다.

 초상권이란 예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으나, 오늘날 최민식 님처럼 《인간》 사진을 찍으면 틀림없이 멱살잡이가 나오거나 법원에 서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필름사진만 있던 때, 35미리 필름 쓰는 사람을 바라보는 중형 필름 쓰는 사람은 ‘저걸로는 사진이 안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형 필름 쓰는 사람은 중형 필름으로는 사진이 나올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5미리 필름을 써도, 완전수동 기계식을 쓰는 사람은 완전자동 전자식을 쓰는 사람을 ‘사진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옛날, 그리 멀지 않은 열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 eos5, eos1 ……. 그건 선배들이 사용하는 까맣고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였는데, 그냥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선배들은 보도반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보여지는 것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 듯했다 … 요즘이야 디지털카메라를 쓰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수동 필름카메라를 보면 괜히 예뻐 보이고 무언가 특별한 듯 시선을 주곤 하지만, 그때는 단지 한물 간 카메라를 구입했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만 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인상을 쓰고 툴툴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새 카메라를 구경하자고 하셨는데, 나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게 왜 기분이 그리 안 좋은지 물어 보셨다. 나는 철없는 소리만 해댔다.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은 모두 좋은 카메라 쓰는데 나만 싸구려 옛날 카메라 쓰는 게 창피해요!” 나의 철없는 투정을 다 들으시더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펜을 쓴다고 글씨가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날 보도반 선배들이 한 명씩 새로 구입한 카메라를 보자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선배들이 추천해 준 좋은 카메라를 자랑하듯 꺼냈다. 나는 풀이 죽은 채 가방 안에 숨겨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 카메라를 본 순간 보도반 안에는 묘한 기운이 돌았다. 선배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다들 카메라를 새로 샀으니 열심히 하자며 교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친구들은 어깨에, 목에, 카메라를 자랑하듯 걸었고,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  (33∼34쪽)
 





 저는 1998년부터 사진을 배우고 찍었습니다. 그무렵 제 한 달 벌이는 16만 원이었고, 이 가운데 9만 6천 원을 적금으로 붓던 터라 사진기를 장만하는 일이란 꿈처럼 아득했습니다. 어렵사리 후배한테 미놀타 x-700을 빌려 썼는데, 제가 일하며 머물던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들어, 두어 달 만에 이 녀석을 잃어버렸습니다. 후배한테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하고, 저도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그때 우체국에서 이십만 원 빚을 얻어 미놀타 x-700을 재활용매장에서 13만 원을 주고 겨우 다시 장만했습니다. 저로서는 없는 돈을 털어 장만한 사진기였고, 이 사진기로도 제가 바라는 모습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었기에 늘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녔고, 집식구나 동무나 선후배들 사진을 즐겨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두 해 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들어간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새해 선물이라면서 저한테 캐논 이오에스 5번을 덜컥 장만해 주었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필름 사진기에서 이오에스 5번은 프로와 아마가 두루 쓰던 ‘값싼’ 장비라고 했는데, 그렇더라도 백만 원을 치러야 하는 녀석이었습니다(요즈음 이 녀석은 25만 원밖에 안 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한 달 일삯 62만 원을 받았고, 신문배달 할 때와 견주어 여러 곱이 되었기에 푼푼이 돈을 모아, 미놀타 사진기는 후배한테 돌려주고, 저는 캐논 AE-1로 기종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나 예전이나, 또 요즈음이나, 미놀타 x-700이나 x-300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캐논 AE-1을 쓰는 사람도 퍽 드물었습니다. 예전 35미리 수동사진기를 쓰는 이들은 으레 니콘 FM-2나 콘탁스나 펜탁스를 썼지, 미놀타나 캐논은 ‘쓸 만한 녀석’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도 저는, 13만 원짜리 미놀타에서 28만 원짜리 캐논으로 한 계단 올라선(?) 일만으로도 주머니가 홀쪽해졌고, 홀쪽해지는 주머니에도 ‘이제는 함부로 기계 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진쟁이도 비슷할 텐데(《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쓴 백성현 님도 이천만 원이 넘는 사진장비를 도둑맞았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캐논 이오에스 5번과 AE-1에다가 애써 찍은 필름이 든 사진가방을 두어 차례 도둑맞았고, 눈물을 쪽 빼면서 새롭게 사진장비를 장만할 때, ‘아예 더 낫다고 하는 장비를 써 보자. 또 도둑맞아도 나중 일이고, 어쨌든 쓰고픈 장비를 써 보자’고 하면서, 48만 원 하던 FM-2를 장만했습니다. 전자식 이오에스 5번은 중고 C급으로 70만 원을 치러 새로 장만하면서.


..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카메라(1회용카메라)를 맡긴 것이었다. 다음날 사진을 찾아 연습실에 들고 갔다. 사진을 찾아왔다는 말에 모두들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며 다들 말도 많고 웃음이 흐르는 즐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모두들 자기 사진을 보며 웃고 떠드는데, 나는 혼자 흐뭇함과 복잡함에 휩싸였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거구나 ..  (91쪽)
 





 처음 사진을 배우며 찍을 때 부럽게 바라보았던 FM-2를 손에 쥐니 살짝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사진관 분은 ‘니콘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써서 오히려 잔고장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캐논이나 미놀타가 값도 싸고 사진도 잘 나온다’고 값싼 녀석을 써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찍는 사진감인 ‘헌책방’을 무지개빛 필름으로 담아낼 때에는, 미놀타와 캐논보다는 니콘이 한결 잘 나왔습니다. 헌책방 사진은 늘 실내에서 찍어야 하고, 형광등 불빛 때문에 렌즈에 FL-W 필터를 꼭 끼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햇볕을 받으며 사람이나 풍경을 찍는다고 한다면 미놀타와 캐논도 훌륭하지만, 제 사진감을 헤아릴 때에는 달랐습니다.

 라이카 사진기만 쓰는 한 분이 ‘책’을 사진감으로 삼아 우리 동네 헌책방에서 사진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이분 사진기를 몇 초쯤 빌려 ‘라이카에 눈을 박고 헌책방을 죽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웬걸,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할 때에, 니콘보다 라이카가 느낌과 화각이 한결 뛰어납니다. 라이카 쓰시는 분은 ‘단추를 눌러서 한 번 찍으셔도 돼요’ 했지만, 단추까지 누르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눈물이 났거든요. 사진은 ‘돈으로 장만하는 장비로 찍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런 장비가 있으면 어마어마한 구석을 채워 주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이구나 싶고, 며칠쯤 사진기앓이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비를 쓰시는 분은 그분대로 푼푼이 돈을 모아서 장만하셨을 테고, 멋이 아닌 발바닥으로 찍으시는 만큼, 나는 나대로 내 발바닥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내 장비가 많이 뒤떨어지면 뒤떨어지는 만큼 더 부지런히 땀흘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좀더 헤아리면, 저보다 주머니가 홀쭉한 분은, 제가 쓰는 장비만큼도 못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진찍기를 하고 싶어도 사진기 살 돈조차 없을 뿐더러,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찍을 겨를 없는 분도 있을 테고요.


.. 런던의 한 노천카페 앞. 열 살 남짓 한 꼬마가 대낮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저 어이없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나는 카메라의 노출을 적정으로 맞춘 뒤, 아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순간, 셔터 소리를 들은 아이가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힌 아이는 내게 맥주캔을 집어던지더니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 아직도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나도 맥주 한 캔을 들고 그 옆에 앉아 시원하게 한잔 마시며 말동무나 되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  (177쪽)
 





 늘 느끼고 있는데, 사진을 못 찍는 바보 같은 마음일 때 장비 탓을 합니다. 또, 자기가 다른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찍든, 자기 마음에 찰 때까지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거듭거듭 찾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곳에서 그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김영갑 님이 찍은 제주섬 오름 사진은 제주섬에서 오름 곁에, 아니 오름과 함께 먹고살았기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김영갑 님 앞이나 뒤에 제주섬 오름을 찍는 분이 제법 많은데, 이분들은 한결같이 구경꾼 사진만 찍었습니다. 요즈음도 오름을 구경꾼 사진으로만 멋들어지게 담아낼 뿐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서 멋있다 말하고 훌륭하다 말하는 분이 꽤 많지만, 제 눈으로는 한낱 겉멋과 겉치레로만 느껴집니다. 제주 두모악갤러리에서 본 김영갑 님 오름 사진은 저를 그 자리에 못박히도록 하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게 이끌었지만, 김영갑 님을 뺀 다른 분들 오름 사진은 ‘이 따위를 사진이라고 찍었나?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자기 사진감하고 먹고살면서 일궈낸 작품으로 안승일 님이 빚은 《굴피집》이 있습니다. 안승일 님은 산 사진만 찍던 분인데, 자기 사진감으로 지루해 하던 어느 날 중국으로 사진여행을 하다가 문득 깨달아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한국다운 한국땅과 한국사람이 무엇인가’를 헤아린 끝에 강원도 산골짝 굴피집 한 채를 찾았고, 이 굴피집을 열 해에 걸쳐 뻔질나게 찾아가고, 때로는 두어 달씩 굴피집 두 늙은 식구와 한솥밥을 먹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굴피집 딸아들보다 더 살가이 지내며 사진을 찍은’ 안승일 님은 ‘다른 사진은 다 찍었지만 한 장을 아직 못 찍어’ 열 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 한 장은 가을날 산자락 논에 누런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담는 사진입니다. 둘레 산꼭대기에 올라서 굴피집 앞으로 펼쳐진 다랑이야 어찌 보면 흔한 사진인데, 아주 맑고 구름 몇 점 살짝 흩뿌려진 날씨에 누렇게 일렁이는 나락 물결을 담을 수 있는 날은 한 해에 며칠이 안 됩니다. 한 해 가운데 하루도 없을 수 있습니다. 있더라도 때를 놓치면 못 찍습니다.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이웃사촌 사진’입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길에서 살지 않았습니다만, 골목길이 훌륭한 사진감이 되는 줄 깨달으면서, 오래도록 골목길을 두 다리로 거닐고 골목집 사람하고 이웃이자 동무이자 말벗으로 사귀면서 사진을 일구었습니다. 골목사람 스스로 골목 삶터를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던 1980∼90년대에 부지런함 하나와 수수함 하나를 모아 눈물과 웃음이 함께 어우러진 사진 열매를 맺었습니다. 골목길은 있는 그대로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됨을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사진을 즐겼습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골목길을 사진감으로 삼는 이들이 꽤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구경꾼 곁다리 사진’ 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구경꾼이라 하여도 오래도록 머물고 자주 찾아오면서 골목을 마음으로 품어야 비로소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눈길이 틉니다. 그렇지만 빨리빨리 얼른얼른 예술작품 얻어내려는 싸구려 생각에 젖은 채, 자기 머리를 깨지 않으니 골목길을 골목길 그대로 담지 못해요.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나 마찬가지인데, 헌책방도 골목길도 ‘꾀죄죄하거나 퀴퀴한’ 곳이 아닙니다. ‘마냥 어둡기만 한’ 곳이 아니며, ‘추억이 묻은’ 곳 또한 아니에요. 무슨 얼어죽을 추억입니까. 당신들이 언제 헌책방을 열 해 스무 해 단골로 날마다 찾아다녔기에 추억이고, 당신들이 언제 골목집에서 태어나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살아 보았기에 추억입니까. 달콤쌉싸름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한다면, 헌책방과 골목길을 비롯한 모든 사진감은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녹여내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라야만 사진기를 든 우리한테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 니콘에서 나온 필름 수동카메라인 FM2는 사실 들고 다니기에는 꽤 무거운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다. 요즘에는 콤팩트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카메라를 거의 매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고생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필름으로 사진교육을 받았던 세대의 사람들이나 필름 특유의 색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단점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사진가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조금 무거운 카메라라는 이유는 눈꼽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 법. 마치 사랑하는 이의 단점이 문제되지 않듯 말이다 ..  (347쪽)


 우리한테 ‘아직’ 문을 활짝 열어 주지 않은 사진감한테 사진기를 들이대는 일은 주먹다짐이나 칼부림입니다. 어려운 말로 ‘폭력’입니다. 무시무시한 주먹다짐이고 소름돋는 칼부림입니다. 얼핏 보거나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할는지 모릅니다. 손뼉칠 만한 예술이라고, 돈이 되는 예술이라고 할는지 모릅니다(이를테면 배병우 님 사진처럼). 그러나, 사진쟁이로서는 더 뻗어나갈 예술을 이루면서 사진에 담아낼 수 있는 틀을 버리고 섣부른 눈요기에 머문 셈일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기다리면서 이루어지고, 오래오래 곰삭이면서 다시 태어나기 마련인데, 날짜를 못박고 이때까지 뭘뭘뭘 찍어대자고 한다면, 어줍잖은 틀로는 마무리될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담아낼 사람 삶터나 자연 삶터를 스며들게 하지 못해요.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진쟁이 많고, 사진잔치 끊임없이 전국 곳곳(거의 모두 서울입니다만)에서 다달이 수백 가지씩 펼쳐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는 아직 ‘사진문화를 즐기는 나라’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진기 든 손은 많으나 사진기를 배우는 손은 적고, 사진기를 휘두르는 주먹은 많으나 사진기를 쓰다듬는 손길은 드뭅니다. 사진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늘지만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적고, 사진으로 이름값 높이는 사람이 생기지만 사진으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은 드뭅니다.
 



 (2) 아직 설익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이지만


 사진과 글로 이야기를 건네는 《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읽습니다. ‘코요태 래퍼 빽가’로 방송에 얼굴을 내밀었다고 하는 백성현 님은, 연예인으로 뛰기 앞서 사진길을 걷고픈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안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사진길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지만 사진길을 놓고 싶지 않았고, ‘사진 = 삶’임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섰구나 싶습니다.


.. 아버지는 아주 검소하시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지 않으시고 대중교통만을 이용하신다. 그리고 3년 전부터는 자전거만 타고 다니신다. 부모님 집은 일산이고 내가 사는 곳은 강남인데, 일산에서 강남까지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신다 ..  (278∼280쪽)


 ‘사진 = 삶’인 까닭을 고개 끄덕이며 읽어내지 못하면 사진을 즐기지 못합니다. ‘삶 = 일’이자 ‘삶 = 놀이’인데, ‘일 = 놀이’입니다. 억지로 힘겹게 돈벌이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놀이 또한 돈만 펑펑 쓰면서 몸을 마구잡이로 부리는 억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남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즐겁고 기쁘게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그릇이라면, 자기가 즐기는 놀이도 돈하고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가슴벅참과 가슴뜀을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사진을 자기 일감이나 놀이감으로 삼을 때 시나브로 ‘사진 = 삶’이 이루어지면서, 자기가 펼치는 사진 하나마다 저절로 예술이 되고 바야흐로 문화가 되어요.


.. 많이 찍고 주변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남들이 좋아하는 구도와 당신이 좋아하는 구도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구도가 될 것이다 ..  (357쪽)
 





 그런데 백성현 님이 빚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는 스스로 ‘말을 건다’고 하면서, 백성현 님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는 않은 듯합니다. 좀더 남김없이 털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아직 자기 나름대로 사진길을 마무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고 있으니 ‘이것이 백성현 사진이다’ 하고 말할 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지 않느냐 싶습니다.

 앞으로 더 힘차게 사진길을 걷고, 더 바지런히 사진나라를 열며, 더 널리 사진밭을 일구면서 “당신에게 말을 걸다”가 아닌 “나(백성현)한테 말을 걸다”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나한테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땅을 디디고 땅냄새를 맡은 뒤 “당신한테 말걸기”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한테 말걸기를 할 만한 이야기가 넉넉하지 않은데 섣불리 말걸기부터 하고 나면 백성현 님 두 손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진길 걷는 수많은 분들이 소리와 이름 없이 열 해나 스무 해씩 자기 사진작품을 고이 모셔 두고 갈고닦으면서 기다리는 까닭을 백성현 님 스스로 더욱 곱새길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달라, 누구는 오래 곰삭이는 사진을 빚고 누구는 금세 짠하고 보여줄 사진을 빚기도 하지만, 곰삭이든 짠하고 보여주든 ‘똑같은 사진’입니다.

 백성현 님 스스로 다부지게 사진길을 걷노라 말하려 한다면, 사진작품 귀퉁이에 ‘백성현 것’이라고 이름을 안 적어 놓아도 ‘이 사진은 백성현이 사진이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게 사진기와 살아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사진길을 걷노라 당차게 밝히신 만큼, 이 길에서 흔들리지 말고 꼿꼿하게 길닦기를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4342.1.3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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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일본 최초의 시각장애 변호사 다케시타
고바야시 데루유키 지음, 여영학 옮김 / 강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장애인이 살 수 없는 나라, 한국
 [잠깐 읽기 22] 고바야시 데루유키,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책이름 :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
- 글 : 고바야시 데루유키
- 옮긴이 : 여영학
- 펴낸곳 : 강 (2008.11.28.)
- 책값 : 12000원



 (1) ‘루이 브라이’ 우표와 ‘박두성’ 기념관


 올 1월 2일, 2009년 첫 우표가 나왔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즐겨하던 우표모으기를 이제는 거의 못하지만, 이날만큼은 우표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우체국에 달려가 전지 두 장을 삽니다. 우체국 아저씨는 언제나 그러하듯, 우표 설명쪽지와 함께 전지 두 장을 건네주고, 어떤 기념우표인지는 딱히 살피지 않습니다. 전지 두 장을 받아들고 들떠 있던 저는, “아저씨, 이번에 나온 우표는 아주 대단한 우표예요.” 하고 말을 겁니다. “그래요? 어떤 우표인데요?” “이번 우표는 점자를 만든 사람이 나왔거든요.” “아, 그래요? 어디 한 번 봐야겠네.”


.. 다케시타는 대학 시절에 현재의 아내인 도시코와 결혼했다. 결혼을 앞두고 신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 그때까지 시각장애인이 사법시험에 응시한 전례조차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다케시타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어쩌면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강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났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다케시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안마 아르바이트까지 해 가며 가정을 꾸려 나가야 했다. 병원에서 신생아 안마도 하고 여관의 호출을 받고 노인들을 상대로 마사지도 했다. 되돌아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안마하며 나눈 소통의 경험이 후에 변호사 활동을 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병원에서 안마를 할 때는 ‘선생’으로 불렸지만 여관에 가면 ‘안마사’가 되었다. 사회라는 게 이런 곳인가 싶었다 ..  (26∼27쪽)


 1월 2일 우표는 ‘루이 브라유 탄생 200주년’을 기립니다. 이름을 보고는 ‘응? 루이 브라유?’ 하고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습니다. 1999년에 옮겨진 《루이 브라이》(다산기획/마가렛 데이비슨 씀)라는 책과 2007년에 옮겨진 《루이 브라이, 점자로 세상을 열다》(보물창고/데이비드 애들러 씀)라는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8년 5월에 나온 《세상 밖으로》(큰북작은북/러셀 프리드먼 씀)라는 책에서는 ‘루이 브라유’로 적습니다. 이제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라고 잘 말하고 있던 사람이름이 하루아침에 슬그머니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으로 바꿔 적도록 되었듯, ‘루이 브라이’로 오래도록 알려지고 사랑받은 사람이름 또한 하루아침에 살며시 ‘루이 브라유’가 된 듯합니다.

 아무래도 정부에서 내놓는 외래어적기법에 따라서 바꾸었구나 싶습니다. 하루아침에 제대로 알리지 않으며 이처럼 외래어적기법에 따라 사람이름을 쉽게 고쳐 버리는 일이 얼마나 옳으냐 싶은 한편, 이렇게 사람이름을 고치면서 ‘이름 고친 그 사람’이 한 일과 발자취는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사람이름을 올바르게 고치자면, 누구보다도 ‘반 고흐’라는 그림쟁이 이름도 고쳐야 합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원음주의’에 따르면, 네덜란드사람인 ‘Van Gogh’는 ‘퐌 호흐’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히딩크’라 말하는 네덜란드사람 또한 ‘히딩끄’입니다. 이준 열사가 죽은 곳은 ‘헤이그’가 아닌 ‘덴 하흐(Den Haag)’이고요.

 외래어적기법에 따르도록 한다면 꼼꼼히 살피며 제대로 추스를 노릇입니다. 외래어적기법에 따라 나라밖 사람들 이름을 고치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루이 브라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왜 했는지를 가만히 살피면서 이이 이름을 고쳐쓰도록 하려는 국어학자 매무새인지, 그저 이름만 뚝딱하고 고치라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정부 관리 움직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다케시타, 힘들 텐데 졸업식에는 안 와도 된단다.” 그제서야 다케시타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귀로 수업을 들을 수는 있지만 시험을 볼 수 없었고, 선생님들은 수업을 빠져도 된다, 졸업식에 안 나와도 된다, 하는 말을 예사로 했다. 하지만 다케시타는 되받을 말이 없었다. 그저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  (48쪽)
 





 서양에 루이 브라이 님이 있으면, 우리 나라에는 박두성 님이 있습니다. 루이 브라이 님은 알파벳 점글을 만들었고, 박두성 님은 한글 점글을 만들었습니다. 지난 2008년은 박두성 님이 태어난 120돌이 된 해였습니다. 이해를 기리며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여러모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박두성 님이 한글 점글을 내놓은(‘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때는 1926년 11월 4일이라고 합니다. 까마득한 일제강점기 때에, 앞 못 보는 이들한테 빛줄기 하나를 나누고픈 마음으로 일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문화인물로 뽑아 주고 박두성 님 기리는 위인전 몇 권 나오기도 하는 오늘날이라 하여도, 정작 인천에서 박두성 님 발자취를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강화섬에 기념관이 마련되었으나, 정작 인천 율목동에 있던 집은 허물려 없어졌고, 박두성 님이 점글을 만들어 점글책을 만들 때 고되게 점글찍기를 돕던 따님(박정희) 사는 집(인천 화평동/평안수채화의 집) 둘레도 아파트 세우는 재개발을 한다면서 말이 많습니다. 박두성 님 따님인 박정희 님은 나라와 인천시를 믿을 수 없어 당신 스스로 그 집을 지키면서 아버지와 당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그러모아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하늘나라로 떠날 마지막꿈 하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 대학은 시각장애인의 입학을 허가해 주기는 했지만 수업 시간에 쓰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시각장애인용 점자 책으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점자 교과서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 다케시타는 어떻게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말겠다는 의욕은 강했지만, 막상 공부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점자 시험 도입을 추진하기 위한 교섭과 회의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사지 아르바이트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법무성과 교섭을 하면서 마사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각장애인이 사법시험을 볼 수 없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이 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은 안마사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  (71∼72, 96쪽)


 올 2009년은 인천시에서 ‘인천관광의 해’이자 ‘인천세계도시축전’이 벌어지는 해라면서 적잖은 돈과 품을 들이고 있습니다. 시에서 말하는 ‘관광’과 ‘도시축전’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유인물을 살피고 인터넷방에 들어가면, 오로지 상품만 있습니다. 돈을 들여서 쓰고 버리는 상품 아니고는 없습니다. 무엇 하나 즐겨도 돈을 들여야 하고, 무엇 하나 보려 해도 돈을 바쳐야 합니다.

 관광이 문화가 아닌 산업이 된 지 오래라,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잔치판을 벌여도 마찬가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화 없는 상업(또는 산업)만 있다면, 더욱이 문화를 ‘문화산업’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뒤집어씌운다면, 이러는 가운데 인천이라는 곳에서 뿌리내리며 살았고 뿌리내리며 힘썼고 뿌리내리며 어깨동무했던 숱한 사람들 발자취를 톺아볼 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떡해야 할는지요.

 박두성 님뿐 아니라, 조봉암 님이나 함세덕 님이나 현덕 님이나 이승엽 님이나 김동석 님 같은 사람들을 기릴 만한 마땅한 집 한 채 없는 인천입니다(어쩌면 이런 이름이 한국사람들한테는, 무엇보다 인천사람 스스로한테 너무 낯선 이름일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야구선수 이승엽만 알 테지요). 한국을 식민지로 삼거나 짓누르려 했던 일본사람과 서양사람들 쓰던 건물과 집과 별장 들을 수십 억을 들여 되살리는 일을 ‘역사복원’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독립을 이루려 애쓸 뿐더러, 여느 사람들 삶과 문화를 북돋우고자 땀흘린 이들은 내팽개치거나 모르쇠를 하거나 아예 ‘있던 생가마저 허물’기까지 한다면, 무슨 관광이 즐거우며 어떤 축전이 보람찰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사고 쓰고 먹고 마시고 버리고 하는 일이 관광이고 문화라고 생각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스스로 품지 않습니다.
 





.. “나는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야. 세상 사람들은 장애인을 그저 눈이 안 보인다, 귀가 안 들린다, 다리를 못 움직인다고만 생각하지.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어떤 고생을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 변호사가 장애인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을 거야.” ..  (109, 142쪽)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면서, 이 버스와 전철에 앞 못 보는 사람이 얼마나 탈 수 있을까 늘 궁금합니다. 앞을 보는 저조차, 거칠게 달리며 흔들리는 버스에서 선 채로 몸을 버티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기를 안고 타도 자리 얻기가 어려운데, 앞 못 보는 사람임을 여느 사람이 알아본다 한들 거친 버스에서 걱정없이 다니라며 자리를 내어줄 마음그릇 되는 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지만, 이보다, 버스역이 비장애인한테도 버스 잡아 타기에 퍽 나쁩니다. 버스역 길이가 짧기도 하지만, 택시와 짐차를 비롯한 다른 승용차가 으레 버스역에 버티고 서 있기 일쑤이고,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뒤에 들어오는 버스를 알아보기 힘들고 놓치기 쉽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면 우루루 몰려들어 새치기하느라 다투는 사람은, 힘여린 사람이나 어린이나 늙은이를 모시지 않습니다. 바퀴걸상을 타고 전철을 타려는 사람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오르내리는 리프트를 기다리느라 애먼 시간을 길에서 버려야 합니다. 요즘 지하철이 오죽 땅속 깊이 들어가 있으며, 리프트는 얼마나 느릿느릿 움직입니까.

 문득, ‘관광의 해’니 ‘세계도시축전’이니 외치면서, 비장애인 아닌 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데에 얼마나 마음을 쏟는지 궁금해집니다. 행사 안내글을 앞 못 보는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점글로도 찍어서 나누거나 소리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테이프가 있는지, 나라 안팎에서 장애인들이 나들이를 와 즐긴다고 할 때에 얼마나 수월하고 거뜬하도록 시설을 마련했는지 궁금해집니다.

 따지고 보면, 관보와 신문기사도 점글로 함께 내놓아 주어야 합니다. 방송은 스물네 시간 모든 풀그림에서(하다 못해 새소식 알리는 때라도) 화면 아래쪽에 손말 하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또는 모든 말을 자막으로 함께 보여주거나. 승강기에만 층수 단추에 점글을 새길 노릇이 아니라, 아파트 들머리에 ‘이곳이 몇 동으로 가는 길목이고 이 앞은 몇 동인지’ 알 수 있도록 똑같은 자리에 어린이와 어른 키높이에 맞추어 점글로 된 알림판을 세워 놓아야 하고, 비장애인이 다니는 모든 길목에 ‘지금 이 자리는 무슨 구 무슨 동 몇 번지이며 갈래에 따라 어디로 갈 수 있다’고 밝히는 알림판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 도쿄에서 다케시타 외에도 두 명의 시각장애인 수험생이 사법시험에 응시했는데 다 같이 낙방하고 말았다. 몇 안 되는 시각장애인 수험생들은 쉽게 가까워졌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문제지에 오자와 탈자가 많다는 게 공통된 화제였다. 법무성에 문의했더니 오탈자 때문에 정정해야 할 문항이 열세 군데나 되었다고 시인했다. ‘잘못된 문제가 열세 개나 됐다면 당락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잖아! 일반 대학시험에서 틀린 문제가 열세 문항이었다면 재시험을 보든지 무효로 처리했을 거야! 시각장애인이니까 열세 군데나 틀렸어도 그대로 두는 거 아냐!’ ..  (183쪽)


 우리가 장애 있는 사람한테 마음쏟는 일은, 몸 어디가 다치거나 아픈 사람한테만 마음쏟는 일로 그치지 않습니다. 힘(권력)이 없거나 여린 이한테 마음쏟는 데로 이어지고, 돈이 없거나 적은 사람한테 마음쏟는 데로 뻗치며, 가방끈 짧은 사람한테 마음쏟는 데로 옮아갑니다.

 서울 용산 철거민을 비롯해 전국 모든 곳 철거민과 ‘재개발대상지역 주민’ 모두 자기한테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자기 주머니에 알맞게 살림을 꾸릴 권리가 있습니다. 길은 자동차가 달릴 권리만이 아닌 자전거가 함께 달릴 권리가 마땅히 있을 뿐더러, 걷는 사람한테도 권리가 있습니다. 걷는 사람에는 몸 튼튼한 어른뿐 아니라 몸 여린 어른과 키 작은 어린이와 늙은 어른이 함께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길알림판에 알파벳을 적어 넣을 뿐 아니라 한자까지 적어 넣느라 수 조에 이르는 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길알림판에 점글을 함께 적으면서 앞 못 보는 이들이 알아보기 좋도록 했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적 없습니다. 전국 동사무소가 ‘동주민센터’로 이름을 바꾸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기는 해도, 동사무소에 ‘점글로 된 안내책자’ 하나 번듯하게 놓인 모습은 이제까지 못 보았습니다. 건널목 가운데 띄엄띄엄 ‘소리가 나서 앞 못 보는 이들한테 도움 주는 곳’이 있습니다만,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비장애인이 건너기에도 짧습니다. 이런 일을 모르는 분보다 아는 분이 훨씬 많을 텐데, 우리네 뒤틀리거나 엇나간 모습이 쉬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익히 아는 분들이 새로 공무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지만, 정작 우리 사회 아쉬움과 모자람은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2) 장애인이 살 수 없는 나라, 한국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는, 일본에서 ‘앞 못 보는 사람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변호사가 된 다케시타 요시키라고 하는 사람을 다룬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은 우리와 견주어 문화와 복지가 훨씬 앞서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점글로 된 법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일본은 이런 점글 법전이 있으며, 다케시타 요시키라고 하는 이는 ‘사법고시를 점글로 칠 수 있도록’ 시험제도를 고쳤고, 다케시타 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는 ‘앞 못 보는 사람’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다케시타에게는 점자와 맺은 인연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점자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법률 공부를 한 것은 일본에서는 다케시타가 처음이었다 … 그러면 점자 육법전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일반 서점에서는 점자 육법전서를 취급하지 않는다. 재단법인 일본점자협회를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한 권짜리 책으로는 나와 있지도 않다. A4 크기의 종이 50쪽 분량으로 된 책이 51권이나 되며 책값도 12만 엔에 달한다. 일반 가정집의 안방을 꽉 채울 만한 분량이다 … 다케시타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일본에는 점자 육법전서는커녕 점자로 된 법률 서적조차 없었다. 시각장애인용으로 나온 육법전서나 법률서적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도 물론 없었다. 수요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각장애인은 사법시험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  (27∼30쪽)


 우리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에는 점글로 된 법전이 있을까요. 녹음테이프로 된 법전이 있을까요. 법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온갖 안내글 가운데 점글로도 된 서류는 얼마나 될까요. 그 흔한 ‘손전화 가입신청서’ 가운데 점글로 만들어진 안내글은 있기나 한지 모를 노릇입니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고 신용카드를 만들 때, 점글로 읽을 안내글이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앞 못 보는 이들이 읽고 배울 수 있게끔, 우리 나라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 이야기를 다룬 점글책은 몇 권쯤 도서관에서 갖추고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앞 못 보는 이들이 나라밖 말을 배울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점글 교재는, 또 점글로 된 영한사전이나 일한사전은 한 권이나마 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선생님, 전 대학에 가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과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를 할 겁니다.” 다케시타는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래, 대학에서 무얼 공부하기로 결정했니?” “법학부에 가서 법률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법학부? 법학부를 나와서 무슨 일을 하려고?” 다케시타는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전 변호사가 될 겁니다.” 담임선생님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비슷한 표정을 지어ㅏㅆ으리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멍청한 녀석!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그건 허공에 집을 짓겠다는 거나 다름없어.”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선 웅변부에서 말솜씨를 연마한 다케시타가 한 수 위였다. “선생님, 저는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  (58∼59쪽)


 ‘장애인’이라 하면, 으레 ‘비장애인이 도와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깁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이런 생각에 길들여지고, 학교에서도 이처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데가 오로지 비장애인만 다니도록 짜인 가운데,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도 비장애인이 배우는 데에만 맞춰져 있고, 교사들은 비장애인을 가르치는 솜씨만을 교대와 사대에서 익힙니다. 장애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뿐더러, 우리는 언제라도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애 있는 아이를 키우도록 찬찬히 이끌어 주는 책이나 이웃은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울타리를 높이기만 하는 우리 사회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팍팍하면 비장애인도 살기 팍팍한 줄 깨닫지 못합니다. 적게 배운 이가 살기 팍팍하면 많이 배운 이도 살기 팍팍한 줄 느끼지 못합니다. 힘여린 이와 돈없는 이가 살기 팍팍하면 힘있고 돈있는 이 또한 살기 팍팍한 줄 알지 못합니다.

 비정규직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정규직이라고 살기 좋을까요? 이주노동자가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한국노동자가 살기 좋을까요?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는 책이름마따나,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또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장애인은커녕 비장애인도 살기 나쁜 나라라고. 한국은 올바르지 못한 나라라고. 정치꾼만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도 올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4342.1.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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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74 : 기자와 작가들이 사는 집


 《나무 위 나의 인생》(눌와,2002)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은 ‘높이 자란 나무를 타면’서 나무 한살이를 살피는 생물학자입니다. 나뭇잎 한 장을 하루이틀이 아닌 열 해 남짓 지켜보기도 하면서 나무가 어떻게 살고 나무를 갉아먹는 벌레가 무엇이며 나무는 둘레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봅니다. 이이는 나무타기를 하면서 ‘어느 나뭇잎은 열다섯 해 동안 매달린 채 살아남기도 한다’고 밝혀냅니다. 열다섯 해 동안 그 나뭇잎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다섯 해 넘는 세월을 나무 살피기에 바친 까닭에, ‘나무타기나 나뭇잎 살피기를 몸소 하지 않고 논문을 쓰던 과학자’들은 자기 논문을 버리거나 고치게 됩니다. 또한, 이 책을 쓴 분은 호주에서 농장을 꾸리는 남자와 혼인을 하며 여러 해 함께 사는 동안, 자기가 얼마나 섣불리 혼인을 했고 호주라는 데에서 들살이를 살피는 생물학자로 사는 가운데 집살림 꾸리는 일은 얼마만큼 이루기 어려울 뿐더러 눈총과 구박을 받아야 하는가를 깨닫습니다. 혼인을 않고 혼자 살며 과학자 길을 걸었다면 연구는 더 깊어졌을 테고 개인 아픔도 없었을 테지만, 혼인을 해 보았기에 ‘여자 한 사람’이 두 갈래 길을 함께 걷는 고단함을 뼛속 깊숙하게 새겨 놓고 뒷사람들을 걱정합니다.

 서울 용산에서 ‘주민’이 아닌 ‘철거민’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쫓겨날 수 없기”에 공무원(재개발 정책 밀어붙이는 이들)한테 맞서다가 그만 목숨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저 또한 동네 골목집에 달삯을 내며 깃들어 사는 ‘주민’이면서, 어느 날 ‘철거민’ 신세가 되어야 할지 모르는 삶입니다. 제가 깃든 집이 있는 동네를 비롯하여, 인천이라는 곳에서는 ‘지도에 아파트로 그려져 있지 않은 데’는 거의 모조리 ‘아파트로 새로 짓는 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파트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아파트라는 데에 들어가 살 돈이 없습니다. 지금 살림집도 보증금과 달삯이 버겁습니다만, 돈이 넉넉해지더라도 아파트 아닌 골목집에서 땅에 등을 누인 채 빨래는 햇볕에 말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천을 비롯한 한국땅 어디에서든, 아파트 아닌 집에서 사는 사람은 ‘주민’이 아닌 ‘재개발지역 대상자’나 ‘철거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한테 ‘도시 서민’이나 ‘도시 빈곤층’이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우리든 중산층이든 대통령이든 모두 똑같은 ‘사람’이며, ‘주민’이고, ‘시민’이자, ‘국민’일 텐데.

 죽은 ‘철거민’이 아닌 ‘용산에 살던 동네사람’을 두고 “불법폭력시위”를 했으니 “법을 어겼다”는 말이 곧잘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법에는 ‘재개발을 하도록 하는 법’과 함께 ‘사람이 자기 살고픈 곳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 권리를 지키도록 하는 법’이 나란히 있습니다. 그저 이런 법(헌법)은 건설법, 경찰법, 집시법, 특별법, 국가보안법 …… 따위에 허구헌날 짓밟힐 뿐이긴 하나.

 생각해 보면, 우리 동네 골목집에는 국회의원이니 의사니 판사니 변호사니 경찰이니 기자니 안 삽니다. 공무원이니 교사니 작가니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쟁이도 그림쟁이도 만화쟁이도 글쟁이도, 요새는 가난한 골목집에는 안 삽니다. (4342.1.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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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책을 왜 ‘못’ 읽을까
 ― ‘책읽기 운동’이 널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까닭



 - 1 -

 옆지기가 아기와 함께 일산에 가 있습니다. 저는 인천과 일산을 이틀에 한 번씩 오가면서 도서관 지키기와 옆지기네 식구와 함께 지내기를 되풀이합니다. 길그림책에서 자로 죽 그으면 가까운 두 곳이라,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면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며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자가용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오로지 전철이나 버스로(또는 자전거로) 오가야 하는데, 부평역 앞으로 가서 버스로 타면 삼십 분쯤 시간이 줄지만, 그래 보아야 전철과 버스에서 두 시간 넘게 보내야 하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자전거로 오가는 길은 까마득하지만, 꼭 한 번 뚫어내고 싶습니다).

 삼십 분쯤 시간을 줄이는 버스 타기는 찻삯이 1600원 더 듭니다. 그러나 이보다 버스는 몹시 흔들리기에 책을 읽으면서 가기 힘들 뿐더러, 도원역에서 부평역으로 전철을 타고 간 뒤 기나긴 지하상가를 거쳐서 버스역 앞으로 빠져나오는 데에 고달프고 시간이 제법 걸리는 한편, 40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잡아타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리하여 몇 번쯤 버스 타기를 하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두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전철 타기만 하기로 합니다. 이러다 동안, 일산을 오가는 다섯 시간 남짓 전철칸에서 책 몇 권쯤 너끈히 읽어냅니다. 가방에 책을 한두 권만 챙기면 오래지 않아 읽을거리가 없어 지루해지니 너덧 권쯤 넉넉히 챙기고, 서울을 거칠 때 책방 나들이를 살짝살짝 하면서 몇 권쯤 더 장만합니다.

 그런데 처음 몇 번은 두 시간 반이 넘는 전철길에서 졸음을 좇아가며 책을 읽을 수 있었으나, 네 번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 오가는 회수가 늘어나면서 몸에 고단함이 쌓이니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은 꾸벅꾸벅 졸거나 자게 됩니다. 아무리 재미나거나 훌륭한 책을 손에 쥐어도 터져나오는 하품을 막을 길 없습니다. 감기는 눈꺼풀을 이길 수 없습니다.


 - 2 -

 옆지기 어머님은 하루 내내 집에 있어도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반찬을 마련합니다. 밥을 먹는 동안 아기가 잘 노는가에 눈길이 가고, 일찍 밥먹기를 마치고 아기를 어르거나 업고 재워 주려 합니다. 언제나처럼 설거지를 도맡고, 식구들 옷 빨래를 하며 식구들 지내는 방과 마루와 부엌과 씻는방까지 치우고 쓸고 닦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나 청소를 하노라면 어느새 낮밥 때가 다가오고, 낮밥을 먹고 잠깐 숨을 돌릴라치면 어느 결에 저녁 때가 다가옵니다. 커피 한 잔 느긋하게 즐길 틈 없이 저녁 늦게까지 몰아치다가, 바야흐로 저녁 연속극 할 무렵 텔레비전 앞에 풀썩 주저앉게 됩니다. 출퇴근길에 치인다거나 논밭 일로 몸을 쓰지 않더라도 하루 해가 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3 -

 어제 인천에서 일산으로 옵니다. 오다가 용산역에서 내려 헌책방 〈뿌리서점〉에 들릅니다. 헌책방 〈뿌리서점〉 아저씨는 지난 두어 주 사이에 책 갈무리를 크게 하면서, 이제까지 쌓여 있던 몇 만 권쯤 되는 책을 치워 책시렁 사이가 무척 넓게 트였습니다. “(책방도) 구조조정 해야지!” 하면서 웃는 아저씨는, 이 많은 책을 너털웃음으로 ‘구조조정’이라 하시지만, 얼마나 힘들고 가슴이 아팠을까 싶습니다.

 시원하게 트인 골마루를 슬슬 거닐면서 책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1984년 1월에 1쇄가 나오고 1988년 12월에 2쇄가 나온 《책은 만인의 것》(보성사)이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 곧잘 보이는 책으로, ‘출협 재직 18년 동안의 기록’이라는 작은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글쓴이 이경훈 님은 1923년에 파주에서 태어나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1961년에 열었고,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에서 오래도록 일한 깜냥을 이 책 하나로 모두어 냈습니다.

 1970년 1월 30일에 〈한국잡지계〉라는 잡지에 실었다고 하는 “독서운동과 우리의 문제점”이라는 글을 펼쳐서 읽어 봅니다.


.. 독서운동은 식자들 사이에서 제창된 지 오래고, 그 식자란 우리 온 민족이 숭앙한 선각자 지도자들로, 그들은 한결같이 이 운동을 부르짖어 왔다. 이렇게 독서하라고 외쳤건만 이 운동은 아직도 민중의 생활 속에 뿌리박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선 이 운동이야말로 절규나 호소 따위만으로는 안 된다는 반성과 함께, 보다 과학적ㆍ실무적이고 비근한 방법과 국가적 에너지의 투입을 절실히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301쪽)


 이 글이 쓰인 때가 1970년 1월이니 1969년까지 이루어지고 있던 ‘독서운동’에 얽힌 잘잘못과 아쉬움과 모자람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2009년이니, 꼭 마흔 해 묵은 ‘독서운동’을 다룬다고 할 만합니다.


.. 도서란 상품은 특수하여 그것을 안 읽는 국민에게는 가치없는 물건이 되며, 도서의 가치는 그 나라의 민권의 신장도와 정비례한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우리의 신소설류가 시장의 땅바닥이나 길가에서 뒹굴어 다니던 모멸의 시대를 회상해야 한다. 어린이에게, 그리고 직장에서 일하는 모든 샐러리맨에게 독서할 시간과 장소와 그리고 책다운 책을 주어라. 비근한 이야기로, 출퇴근 시간을 엄격히 지켜 책 볼 시간에 할애하라. 책을 읽고 좋은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라. 또한 독서하도록 여건을 부여하는 데 한걸음 다가서기 위해서 의식주 생활을 개선해 보자. 이 자세만이 독서운동의 지름길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책을 읽는다는 것 때문에 주위의 눈총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  (307쪽)


 2000년대 우리 나라에는 ‘북스타트’ 운동도 있고, ‘한 도시 한 책’ 운동이 있으며, ‘기적의 도서관’이나 ‘느낌표 책’ 운동도 있습니다. 김해 같은 도시에서는 ‘책도시’로 거듭나겠다고 외치며, 경기도 파주는 ‘출판도시(북시티)’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도 합니다. 책을 읽자는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 풀그림이 제법 있으며(다만, 이 풀그림을 볼 수 있는 시간대가 너무 아리송하지만), 신문과 잡지에서는 꼬박꼬박 ‘새로 나온 읽을 만한 책’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갖가지 ‘책읽기 운동’은 사람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책을 읽도록 이끄는 데에는 여러모로 모자라거나 아쉽다고 느껴집니다. 이경훈 님이 1970년에 말하듯 “독서할 시간과 장소와 그리고 책다운 책을 주어라” 하는 세 가지는 마흔 해가 지나도록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일본은 미국과 견주어 도서관 숫자가 1/10밖에 안 된다면서 ‘도서관이 너무 없다’고 말했다는데, 이무렵 우리 나라는 일본과 견주어 도서관 숫자는 1/100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몹시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1970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 나라 도서관은 얼마나 늘어났을까요. 우리 정부는 나라안 국ㆍ공ㆍ시ㆍ구립 도서관과 동네 도서관이 문을 열 수 있게끔 얼마나 뒷배를 하고 있을까요.


.. 다시 강조하거니와 모든 국민이 자기 집 가까운 곳에 아담한 도서관을 지어 주는 시책을 위해서라면, ‘특별세’라도 더 내는 것도 좋겠다고 하는 기운이 바야흐로 높아졌음을 첨언하는 바이다 ..  (125쪽/1979)


 2009년 한국 사회를 다시금 돌아봅니다. 나라살림을 꾸리는 이명박 대통령은 ‘네 줄기 큰 강’을 손질하고 ‘인천∼서울 물길’을 트는 데에 10조 원이 넘는 돈을 들이겠다고 외칩니다. 지금 외쳐지는 돈은 10조 원이지만, 공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훨씬 더 많은 돈이 바쳐지리라 봅니다. 여기에, 새로운 고속도로와 고속국도를 닦는 데에 몇 조 원이라는 돈이 또다시 바쳐지고 있습니다. 또한, 새 자전거길을 닦는다는 데에도 몇 조 원을 들인다는 계획이 나옵니다.

 가만히 살피면, 정부가 내놓는 계획은 오로지 ‘건설공사’일 뿐입니다. 있는 시설을 알뜰살뜰 가꾸거나 매만지면서 북돋운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도서관 하나를 짓는 데에 얼마나 큰돈이 있어야 하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동네마다 알맞는 크기로 조촐하게 짓는다고 한다면(10만 권쯤 갖추는 도서관으로), 책값을 더해서 15∼20억쯤 들리라 봅니다. 10만 권쯤 되는 책은 한 층짜리 건물로 예순 평이어도 되고, 두 층짜리면 쉰 평이어도 넉넉하며, 세 층짜리면 마흔 평이어도 괜찮습니다. 많이 잡아 20억이라 할 때에, 1조 원이라는 돈이면 아무리 못해도 500 군데에 이르는 도서관을 새로 지을 수 있습니다. 도서관 500군데라면 전국 시ㆍ군뿐 아니라 읍 단위까지 도서관을 하나씩 놓을 수 있고, 도시에서는 웬만한 구 하나마다 도서관을 새로 지을 수 있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주민 숫자가 적은 시골에서는 10만 권쯤 갖추는 도서관보다 5천 권이나 1만 권쯤 갖추는 도서관으로 더 작게 하여 리 단위에 하나씩 지을 때가 훨씬 도움이 되니, 이렇게 한다면, 우리 나라 전국 어디에나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 시설을 마련할 수 있어요. 나아가, 새 건물을 짓지 않고 ‘동네마다 지역 문화와 삶터를 보여줄 수 있는 집을 조금 손질해서 쓴다’면 책꽂이 값만 새로 들면 되기에, 5000군데나 1만 군데에 이르는 도서관을 새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도서관은 몇 해 사이에 아무리 적어도 1000군데를 훌쩍 넘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도서관을 골골샅샅 마련하면, 건물짓기나 건물늘리기로 그치지 않고, 우리 생활문화가 차츰 나아지면서 ‘좋은 책 애써 펴내는 출판사’에서도 힘겨이 펴낸 좋은 책이 ‘안 팔리고 묻히는 일’이 거의 사라집니다. 동네 사람들은 책이 베푸는 선물을 기쁘게 받아먹을 수 있고, 책마을 사람들은 더 힘을 내어 더욱 좋은 책을 펴내도록 뒷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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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에서 전투기 한 대 살 돈을 아끼어 도서관 백 군데를 마련하도록 마음을 쏟거나, 도심지 거님길돌을 갈아치우지 말고 이 돈으로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새책을 사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라에서만 애쓴다고 될 수 있는 ‘책읽기 운동’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책을 읽을 수 없도록 매여 있습니다.

 먼저, 아이들은 지옥과 같은 대입시험 틀거리에 매여 있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온통 고3 수험생 때 맞이할 수능시험에 맞춰져 있습니다. 집과 학교와 학원만 오가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교과서와 참고서 아니면 들여다보지 못하게끔 막혀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쓰여지는 돈은 아이 마음밭을 살찌우고 몸뚱이를 튼튼하게 북돋우는 데가 아니라, 나라안 일류대학교에 들어갈 시험을 잘 치러 한 문제라도 더 맞히게끔 하는 지식쪼가리를 머리속에 집어넣는 데에 바쳐집니다. 초등학교 들기 앞서부터 수많은 과외삯과 학원삯을 대야 하느라 어른들은 무척 바쁩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아이를 낳아 기를 때부터 ‘아이 키우는 돈(종이기저귀 값, 분유 값, 산후조리원 값, 놀이방 또는 유치원 값 ……)’을 버느라 아이와 함께할 겨를이 없을 뿐더러, 일터에서 돈버는 데에도 지칩니다. 어른들 스스로 자기 마음밭을 살찌우거나 몸뚱이를 튼튼하게 하지 못합니다. 집이고 일터이고 시달리고 지치다 보니, 전철을 타건 잠깐 숨돌릴 틈이 나건 책을 손에 쥐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자가용을 몰아 출퇴근을 해 버릇하기에 책을 펼 생각을 아예 못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책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거의 못 봅니다. 그나마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여러 가지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히지만, 중학교 들어갈 무렵이면 오로지 입시교재만 보게 되어 있는 데에다가 여러 해 동안 이런 흐름에 길들게 되기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교재가 아닌 진짜 책’을 볼 마음을 스스로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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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자’고 외치는 사람 스스로, ‘책읽을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지 않느냐 싶습니다. 1970년에도 2009년에도,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이 왜 책을 못 읽거나 멀리하는지를 ‘책을 읽자’고 말하는 사람들 스스로 잘못 알거나 엉뚱하게 헤아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책을 못 읽는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 가려면 무엇을 어찌 고쳐야 하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책을 쥐어 준다고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으며, 책을 쥐어 주어 억지로 읽게 해 놓았다 한들 이 책에 담긴 속살을 살뜰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습니다. 느긋하면서 넉넉한 매무새로 책을 가까이하고 읽고 새기고 나누며 펼칠 수 있도록 사회 틀거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삶터가 바뀌어야 합니다. 사회 틀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 삶터가 팍팍하고 메마르고 거친 그대로 이어져 있는 동안에는, 숱한 ‘책마을 잔치’와 ‘책읽기 운동’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여느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거나 아끼게 되는 일은 꿈꿀 수 없습니다.

 책다운 책을 우리 스스로 빚어내지 못하는 일은 대단히 큰 골칫거리입니다. 책다운 책을 우리 스스로 빚어냈어도 이와 같은 책을 너끈히 사들이고 갖추어서 널리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도서관이나 동네 책방이 아주 드문 우리 살림살이는 더할 나위 없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런 골칫거리와 안타까움을 풀어낸다 하여도, 사람들이 마음을 홀가분하게 다스릴 수 없도록 하는 사회 흐름입니다. 제도권 대입지옥 교육 짜임새입니다. 돈을 많이 안 벌면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경제 얼거리입니다. 문화도 없으나 복지도 사회보장도 없는 정치 틀거리입니다.

 우리 스스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쓰지 않고, 우리 밥그릇 하나 더 단단히 챙기는 데에만 마음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흐름과 모자란 짜임새와 슬픈 얼거리와 얄궂은 틀거리를 고치려 하지 않는 우리뿐 아니라, 이런 흐름이며 짜임새며 얼거리며 틀거리에 길들어지도록 하는 기득권을 보지 못한다면, 그 어떤 놀라운 ‘책읽기 운동’이 펼쳐진다고 한들, 정작 사람들이 책을 읽기 어려운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그대로 머뭅니다.

 ‘돈 잘 버는 회사원으로 키워내는 꿈에 따라 흘러가는 자녀교육’이 아니라, ‘착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어 사랑과 믿음을 두루 나누는 아이 키우기’로 우리 삶자락을 고쳐내는 일을 함께해야 비로소 ‘책을 읽읍시다!’ 하는 외침이 살갗으로 파고들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책을 읽읍시다!’ 하고 섣불리 외치기 앞서, 우리들이 왜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하고, 책을 읽지 못하게 가로막는 울타리를 허물도록 애써야 하며, 책을 읽지 못해도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인 구렁텅이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는 곳에, ‘사람들 땀방울이 알알이 배인 책’을 애틋하게 나누는 일이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 6 -

.. 일본사람이 저술을 시작할 때 참고문헌을 찾는 순서가, 첫째 자기가 갖고 있는 책, 둘째 고서점, 셋째 도서관의 순서라면, 구미 선진국의 연구자나 독서인은 우선 곧바로 도서관으로 갈 것을 생각한다 ..  《이경훈-책은 만인의 것》(보성사,1984) 76쪽


 한국사람이 책을 하나 새로 쓰려고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한국사람 스스로 새로운 책 하나 빚어내려고 마음을 바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한국사람들은 한국사람이 한국땅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기를 바라고 있기나 한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땅 이야기를 애써 책으로 엮어냈을 때에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이 우리들 이야기를 찾아서 읽고 되새기고 거듭나고자 할는지 궁금합니다.

 ‘돈 벌어야지!’ 하고 모두들 한목소리로 외치지만, 어떤 돈을 얼마나 왜 어디에서 어떻게 벌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히 드뭅니다. 그예 ‘돈 벌어야지!’일 뿐이고, ‘돈 많이 벌어야지!’일 뿐입니다. 돈을 벌고 나서 이 돈을 어떻게 쓸지, 누구와 쓸지, 어디에 쓸지, 언제 쓸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안 한다기보다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해야 하는 줄을 처음부터 모릅니다.

 생각하면서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이니, 생각하면서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서 돈 벌 길을 찾지 않는 사람이기에, 생각하면서 책읽을 길을 찾지 못합니다. 생각하면서 돈 쓸 자리를 살피지 않는 사람인 터라, 책을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권을 읽어도 책읽어 얻은 지식과 깜냥과 슬기를 어디에 어떻게 나눌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4342.1.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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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72 : 허영만 씨가 《퇴색공간》을 그릴 자유

 겨울철에는 낮 한 시와 두 시 사이에 어김없이 빨래를 합니다. 밤과 새벽에 한 차례 더 빨래를 하는데, 영하를 오르내리는 우리 집에서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한낮을 놓칠 수 없습니다. 이맘때 누군가 만나자고 한다든가 전화라도 한 통 걸려오면 고단합니다. 마침 가장 따뜻한 때라, 아기를 씻기며 남은 물로 빨래를 하는데, 씻기랴 빨래하랴 전화통 붙잡으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렇게 애먹지 말고, 종이기저귀 사다 쓰지’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단함이 종이기저귀 사다 쓴다고 풀리겠습니까. 외려 종이기저귀는 우리 삶뿐 아니라, 자라날 아기한테도 나쁘게 영향을 끼칠 텐데요. 빨래가 따사로운 햇볕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듯, 아기도 맑은 햇살과 파란 하늘을 즐기면서 무럭무럭 크기를 바랍니다.

 한창 기저귀를 빨면서 오늘 저녁은 무얼 마련하고, 저녁까지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지난달부터 붙잡고 있는 만화책 하나에 생각이 미칩니다. 서울 숙대입구역 둘레에 있는 헌책방에서 찾아낸 한 권짜리 대본소판 만화인데, 그린이는 허영만 님이고, 책이름은 《퇴색공간》입니다. 나온해는 1990년입니다. 만화쟁이 허영만 님은 잡지 《만화광장》에 1987년 6월부터 〈오! 한강〉을 이어실었고, 나중에 이 작품을 세 권짜리 낱권책으로 묶어서 1988년에 펴냅니다. 그런 다음 《퇴색공간》을 그린 셈인데, 《오! 한강》 세 권은 김세영 님이 글을 넣었으나, 《퇴색공간》은 글과 그림 모두 허영만 님 혼자 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시대를 읽은 훌륭한 만화작품’으로 《오! 한강》을 손꼽기도 하고, 대학생들한테는 필독서 못지않았다는 대접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참말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을 만한가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작품완성도’나 ‘작품 재미’로는 뛰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들은 무엇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고 있을까요.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은 배후조종자가 있고, 이들은 자본주의를 뒤엎으려는 폭동을 꾀하면서 우리 경제를 무너뜨릴 뿐’이라는 ‘서민들 생각과 목소리’일까요? 그린이 자유에 따라서 줄거리를 엮기 나름일 테지만, 《오! 한강》이며, 《퇴색공간》이며, 허영만 님이 바라보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보여주고프다면 보여줄 노릇이지만, 작품 하나가 독자들한테 받아들여지는 우리 얼거리를 돌아볼 때에는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으레 데모나 하고 있고, 이 데모 때문에 ‘착한 시민들’이 고달프다며, “좀 조용히 살자! 조용히! 누가 옳고 누가 나쁘든 제말 그만둬!(24쪽)” 하는 대사와 그림을 큼직하게 집어넣을 때, 이 나라 어린이와 젊은이는 이 만화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좌경세력에 의해서 노조가 결성되면 회사가 망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158쪽)” 같은 대사는 우리 삶터를 어떻게 보여주게 될까요.

 자유와 책임이 함께해야 한다고 말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허영만 님한테 ‘노동운동 = 빨갱이’라 말할 권리가 있되, 이런 만화를 그린 허영만 님을 비판할 권리 또한 누구한테나 있다는 말 한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4342.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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