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안녕하려면 - 하이타니 겐지로 단편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츠보야 레이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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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우리와 안녕하려면
- 글 : 하이타니 겐지로
- 그림 : 츠보야 레이코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양철북(2007.12.14.)
- 책값 : 9800원


 이 책 하나 32 ― 아파하는 이웃과 외로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 하이타니 겐지로, 《우리와 안녕하려면》



 (1)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


 지난주 토요일, 도서관에 놀러온 동네 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한창 하다가 저희끼리 속닥속닥 하더니 책상서랍을 몰래 뒤지며 키득키득 합니다. 살며시 웃음을 띠면서 “이것 주웠어요.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하고 말하며 ‘타먹는 커피봉지’를 흔듭니다. 그러고는 그 커피를 타서 마시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저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을까요. “그게 왜 땅에 떨어져 있는데?” 하고 묻지만, 아이들은 능구렁이처럼 모르쇠로 밀어붙입니다.


..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가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 ‘돼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선생님은 하나도 없었다 ..  (14쪽)




 이튿날, 동네 아이들이 컵라면을 들고 옵니다. 도서관에 놀러오면서 책 읽을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아이들. 컵라면에 물을 받더니 책으로 뚜껑을 받칩니다. “책은 종이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책이 다치잖아요.” 하고 말해도 못 들은 척. 그러면서 나보고 “나무젓가락 주세요.” 하고 말합니다. “내가 나무젓가락을 왜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무젓가락을 왜 써야 하는데?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나무젓가락을 왜 써야 하는데?” 하고 말하지만, “더럽잖아요!” 하고 말하기만 합니다.

 얼마 뒤, 바깥 나들이를 다녀온 옆지기가 아이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따끔하게 나무랍니다. “여러분은 친구네 집에 가서도 이렇게 해요? 친구네 집에 가서도 냉장고를 뒤져서 마음대로 먹을 것을 다 꺼내먹고 서랍을 뒤져서 자기 것으로 가지고 해요? 도서관이 뭐하는 곳이에요? 책도 안 읽으면서 그렇게 놀러만 오는 곳이에요? 지난번에 어질러 놓은 것도 하나도 안 치우고 가고. 그렇게 하려면 앞으로 도서관에 오지 마세요!”


..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하면 할 수 있어. 일본인을 이기는 조선인이 나타났지. 더러는 좋은 일본인도 있었지만, 못된 일본인이 더 많았어. 일본인을 이겼다고 몹시 구박을 하더군. 나는 고집이 셌기 때문에 아무리 구박해도 꿋꿋이 연습해서 시합에 나갔지. 그리고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지.” 다들 남자의 억센 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독일 선수가 왔을 때 최초로 국제 시합에 나갔지. 기뻤지. 열심히 해서 결승전에서 3등으로 들어왔어. 일본, 독일, 조선의 순서였지. 일본 국기가 올라갔고, 그리고 …… 그러고 나서 올라간 것은 역시 일본 국기였어. 나는 울었어. 관중들은 기뻐서 우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분해서 울었다. 그 뒤 난 수영을 그만뒀어.” 내 목이 꿀꺽 울렸다. “내가 다시 수영을 하게 된 것은 소순이가 수영을 하면서부터야. 오랫동안 나는 저항해 왔지. 오랜 저항이었어.” ..  (36∼37쪽)




 아이들은 도서관 전화로 장난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장난전화 하려면 전화 쓰지 마세요.”라 말해도 “뭐 어때요?” 하면서 스스럼이 없는 아이. 왁왁 소리를 지르고 손찌검을 하거나 회초리를 들어야만 말을 들을까요. 부드러이 타이르는 말은 귀에 꽂히기는커녕 한귀로 빠져나가거나 아예 귀로 들어가지도 못할까요.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들은 다른 동무한테 전화하면서, “○○야, 너, 왕따 시키고 싶은 애 있으면, ○○로 데리고 나와.”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 말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그저 장난으로 또는 재미로 다른 동무를 따돌리면서 재미있어 하는지.


.. 얼마 후, 선생님이 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국기게양 때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는 것도 벌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도요. 우리가 교장실에 몰려가려 하자 선생님께선 말리셨죠. 그리고 조금 쑥스러운 듯이 말씀하셨어요. “만일 나를 위해 뭔가 해 줄 생각이 있으면 오키나와에 대해 공부해 다오. 그걸로 충분하다.” ..  (56∼58쪽)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나서 심심하면, 그예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어른들 흉내’를 냅니다. 어디서 얻었는지 화장품으로 얼굴을 허옇게 바르고 눈썹을 세웁니다. 저 나이에 벌써 화장놀이, 아니 어른 흉내라니. 그것도 좋은(?) 어른 흉내가 아니라 껍데기만 들씌우는 어른 흉내를. “예쁘면 좋잖아요!” 하는 아이들 눈에는 어떤 모습이 예쁜 얼굴일까요.

 곰곰이 떠올리면, 우리들 어릴 적에도 텔레비전 가수나 연예인들을 따라하면서 놀았으니, 이 아이들이 ‘텔미’ 춤을 추면서 노는 일도 자연스러운(?) 문화가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텔레비전 연예인 따라하기가 참말 문화가 맞을까요.

.. 하지만 선생님, 스스로 맞서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들 너무나 순순히 규칙을 따르고 너무나 욕망에 약해요. 사친은 그것도 인간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은 결코 우리를 억누르지 않으세요. 그건 선생님께서 이제까지 사람들한테 억눌려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죄송해요, 선생님, 주제넘게 ..  (66쪽)




 어질러 놓기만 하고 조금도 치우지 않는 동네 아이들. 골목길 마실을 하며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얼핏설핏 흘려듣는 아이들 말이며 몸짓이며 볼 때면, 하나같이 안쓰럽고 걱정스럽고 슬픕니다. 이 아이들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요. 이 아이들 부모는 집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던져 주고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교사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설까요. 도서관에 오는 동네 아이들한테 책을 주면서 “너희 담임 선생님한테 드리렴.” 했더니, “우리 선생님은 책 안 봐요.”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집에서 부모님들은 책을 얼마나 볼까요. 아니, 책을 본다는 생각을 해 볼까요.


 (2) 이웃집 아이


 옆지기가 동네 아이들을 따끔하게 나무라며 내쫓은 뒤, 성당 반 모임이 있어서 이웃집으로 찾아갑니다. 반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거의 모두 아주머니와 할머니. 오늘은 할아버지 한 분이 있습니다. 1943년에 창영동에서 태어난 뒤 이 동네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할아버지입니다. “그 집에 불난 적 있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더라고요.” 할아버지네 집은, 배다리 골목집들 한복판을 꿰뚫으려는 산업도로 예정터 바로 옆에 있습니다. 당신은 태어나서 자라고 학교 다니기도 모두 이 동네에서 했지만, 부모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한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 딸아들이 늘  ‘이제 그 낡은 집은 보상 받고 팔아서 우리들(딸아들) 사는 아파트로 오시라’고 말을 해도.


.. “그럼 할머니 혼자 지내세요?” 할머니께선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아드님은 …….” “둘 다 천황 폐하께 바쳤지.” 선생님, 저는 그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천황 폐하께서 아직 감사의 말씀을 안 해 주셨어. 이웃 오야마 씨네도 외아들 미네요시를 천황 폐하께 바쳤지. 역시 아직 감사의 말씀이 없으셨지.” ..  (71∼72쪽)




 반 모임을 하는 집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가 있습니다. 옆지기가 이 아이한테 묻습니다. 우리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들을 아느냐고. 서로 안답니다. 그런데 이 집 아이와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 매무새가 아주 크게 다릅니다.

 이 집 아이는 동네 어른들한테 꼬박꼬박 인사도 잘하지만, 차 대접을 한다며 어머니가 쟁반에 찻잔을 올려놓으면 자기가 손수 들어서 나르고 할머니한테는 커피를 타 드리기도 합니다. 반 모임을 하는 동안 옆에 같이 앉아서 지켜보고 이웃 아주머니와 이야기도 나눕니다. 똘망똘망하면서 참 맑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눈이 크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 눈이 어둠 속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날아다닙니다.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도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루에 몇 번밖에 다니지 않는 기차를 한밤중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쩌다 도착한 열차에 벌떼처럼 모여든 거죠. 하지만 몇 명의 아이가 얼마만한 돈을 손에 넣을까요?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쫓아옵니다. 나는 아이들의 눈을 똑똑히 주시했습니다. 잊지 않으려고 뚫어지게 보았죠 ..  (88쪽)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들 부모는 저녁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집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만 계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네 부모는 두 쪽 모두 장사를 하는데 저녁 아홉 시가 넘어야 비로소 들어온답니다. 아침에도 일찍 나갈 터이니, 그 집 부모와 아이들이 만나는 때는 아주 짧습니다. 이와 달리 반 모임을 하던 집 아이는 아버지 일터가 바로 집이기도 해 언제나 아이와 함께 있기도 하고 어머니도 집에서 늘 아이와 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성당에 함께 다니고, 아이는 성당에서 피아노 치기도 하고 있어서(일요일 새벽미사 때 피아노 치기도 했다는군요)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훨씬 깁니다. 또, 부모와 아이가 함께 마음과 뜻을 나누는 일거리와 만남자리가 있고요.


..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눈이 참 예쁘구나’ 하고 나는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다시 했습니다. 눈이 살아 있구나 생각하고 나서 문득 일본 어린이들을 떠올렸죠 ..  (100쪽)




 월요일 아침, 옆지기 동생이 인천으로 찾아옵니다. 세 사람이 차를 타고 일산으로 갑니다. 옆지기가 닭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여 낮밥을 먹으러 어느 칼국수집으로 갑니다. 낮밥 때가 조금 지났는데도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아이 둘이 저를 빤히 바라봅니다. ‘뭐여? 이것들은?’ 저도 아이들을 빤히 바라봅니다. 5초 남짓 그렇게 서로를 바라봅니다. 이 아이들은 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볼까요.

 자리가 납니다. 세 사람이 둘러앉습니다. 옆자리에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방학 때가 되어서인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이끌고 나온 집이 많아 보입니다. 옆자리 아이도 저를 빤히 봅니다. 저도 마주봅니다. 수염 안 깎고 머리도 안 깎고 그대로 두는 남자가 드물어서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되는지. 하긴, 길을 가다가 저를 보는 아이들이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저한테까지도 들리는 목소리로’ “남자가 왜 머리를 길러?” “여자야, 남자야?” 하고 묻곤 하더군요.


.. ‘마사코는 자벌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127쪽)




 2008년에 새로 나올 교과서에는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2007년에 나온 교과서 그림을 가만히 보면, 아직까지도 ‘집안일 = 어머니 몫 = 앞치마 두르고 밥하기’에다가, ‘집에 있는 남자 = 신문 보며 담배 태우기 = 방에 앉아서 밥상 받기’입니다.

 더욱이, 여자는 혼인하면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까지 함께하면서 사회살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니,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기르는 몫은 오로지 여자한테 넘겨집니다. 아이한테는 어머니가 가르칠 몫과 아버지가 가르칠 몫이 함께 있는데, 두 사람이 함께 가르치고 함께 어울리며 함께 살아간다는 데까지 생각을 이어가는 남자가, 남자들 집안이 드뭅니다. 대학교를 나오고 나라밖 유학을 다녀왔어도 이런 매무새와 생각 틀거리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3) 겨울 안개


 낮밥을 먹고 얼음과자집에 들른 뒤 옆지기와 저는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연세대 앞에 있는 헌책방에 잠깐 들렀다가, 신촌에 있는 술집 ㅅ에 들러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술집 ㅅ 사장님을 알고 지낸 지 어느덧 아홉 해. 세상 부대끼는 이야기, 사진기 이야기, 사장님 후배가 신림동에 연 문화쉼터 이야기 들을 나눈 뒤 일산 옆지기 부모님 집으로 갑니다. 버스를 탈 때는 그다지 안개가 끼어 있지 않았는데, 수색을 지나고 고양에 접어들 무렵부터 안개가 짙어집니다. 탄현동에서 내리니 십 미터 앞쯤은 뿌얘서 거의 안 보일 만큼입니다.


.. 나는 되도록이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보다는 차라리 10분, 20분이라도 더 아이들과 함께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  (128쪽)




 겨울인데. 겨울에 어인 안개이지? 겨울이면 추워야지 춥지도 않고 웬 안개야? 대한이가 놀러왔다가 얼어죽었다는 소한을 지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올겨울은 ‘안 춥다 안 춥다’ 말이 많은데, 안 추워도 참으로 안 춥네. 기름값이 치솟아 겨울 난방값 걱정이 크다고들 하는데, 이만한 겨울이라면 땔감 걱정은 그럭저럭 안 해도 되지 않나.


.. 쳇. 이런 공부를 해서 뭐가 될까. 요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면 입시 경쟁에서 낙오된다고 꽤나 살벌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선생님이 있다 …… 입시 공부도 고등학교나 대학에 들어간다는 목적이 없으면 이 고문과 똑같으리라고 본다 ..  (152∼153쪽)




 이제 1월을 넘겼으니 2월도 있고 3월도 있습니다만, 앞으로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수 있을까요. 눈이 내릴 만한 날씨가 될까요. 겨울에 눈 아닌 비만 주룩주룩 내리지 않을까요.

 눈 없는 겨울로, 게다가 안개 짙은 겨울로, 날씨가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미쳐가는 우리 땅으로 치닫습니다.

 문득문득 드는 생각으로는, 사람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니 날씨도 제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 미쳐가니 날씨도 미쳐갑니다.

 날씨가 엉망이 되기 앞서 우리들이 마실 물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그지없이 사랑하는 자동차 덕분에, 끝없이 새로 닦으며 늘리는 찻길(고속도로 중심) 덕분에, 쉼없이 쓰고 버리는 온갖 물건들 덕분에, 우리들은 미국사람 부럽지 않게 갖가지 물질문명을 즐기면서 우리 땅을 병들게 하고 우리 날씨를 미치게 하며 우리 몸을 더럽히고 우리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 가령 우리 엄마는, “아파트란 사람 살 곳이 못 돼. 우리야 5층이라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12층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안 됐어.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느낌은 정신을 불안정하게 하거든.”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한다. 그럼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 자란 나나 남동생은 어떻게 되나? 그런 얘기는 무책임하다고 본다 ..  (156∼157쪽)



 하루가 지납니다. 안개는 걷히지 않습니다. 창문 밖으로 뿌연 자국만 보이고 집이며 길이며 사람이며 잘 안 보입니다. 오늘 낮까지도 안개가 이어질까요. 저녁까지도 안개는 걷히지 않을까요. 이 안개는 그냥 안개이기만 할까요. 우리들이 타고다니는 자동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와 날마다 먹고 마시며 버리는 모든 쓰레기에서 나오는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지는 않을까요.


.. 만들어진 걸 즐기는 것은 조금도 나쁜 게 아니다. 만들어진 것 가운데에도 진실한 것이 많이 있는걸.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유행만 좇아다니는 아이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사물을 정확히 꿰뚫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학교나 선생님이 정한 일을 단순히 지키기만 하는 아이들이 주로 인기가수 뒤꽁무니나 쫓아다닌다 ..  (173∼174쪽)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답답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어디로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없습니다. 어디로 떠난다 한들, 우리 발길 닿는 곳이 포크레인 삽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복부인 지갑에서 홀가분할 수 있는 곳이 우리 땅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 내 뜻대로 고생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억지로 주어진 고통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 지금 학교생활이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 스스로 변하는 것을 학교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명령이나 강제로 우리를 변하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일 주일에 한 번 복장검사라는 게 있다 ..  (184쪽)




 옆지기 동생이 모는 차를 타면서 2005년도 판 길그림책을 살피니, 남녘땅에 새로 닦고 있는 고속도로가 자그마치 열일곱 군데나 되었습니다. 서울-춘천, 평택-음성, 당진-대전, 청주-상주, 서천-공주, 순천-완주, 익산-장수, 고창-담양, 구미-달성, 부산-울산, 기계-신항만, 구미-화산, 대구-부산(2), 목포-순천, 무안-광주, 통영-대전, 서울 외곽.

 왜 고속도로로 새 길을 내야 할까요. 새 길을 내야 한다고 해도 여느 국도로 내도 괜찮지 않은가요. 자전거도 함께 다닐 수 있는 길로,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길로 닦아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기름을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다고,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길을 이렇게도 자꾸자꾸 새로 내고 있나요. 환경을 걱정하는 자동차도 아닌 기름만 먹어대는 자동차인데, 논밭을 갈아엎고 산을 깎거나 굴을 내면서까지 새 찻길을 늘려서 우리 삶터와 우리 몸뚱아리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새 길을 자꾸자꾸 닦아야 나라살림이 커지고 우리 살림도 나아지는가요.


 (4) 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 《우리와 안녕하려면》


 하이타니 겐지로 님 책 《우리와 안녕하려면》을 다 읽었습니다. 책을 덮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살며시 다시 펼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죽 살핍니다. 읽으면서 가슴에 콕콕 박혔던 대목을 소리내어 다시 읽어 봅니다.


.. 학교는 가르치는 일이 지나치게 중시되어, 어린이나 학생들의 목소리가 교사에게 닿지 않는 세계였습니다. 나는 이런 현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교육의 왜곡은 거기에서 비롯되는데……라는 생각에 슬픔이 더해졌지요. …… 생각해 보면, 나는 강한 것이나 너무 풍요로운 것에서는 무엇 하나 배운 것이 없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약한 것, 가난한 것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  (머리말)



 아파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보아 왔기에, 아니 겐지로 님 스스로 아파하면서 살았기에, 아니 겐지로 님 스스로 아파하는 만큼 이웃사람들 아픔을 구경하지 않고 어깨동무하면서 아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기에 《우리와 안녕하려면》이라는 책을 조촐하게 묶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배부른 사람은 배부른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배곯는 사람은 배곯는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다만, 그저 알 뿐이라면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떠올리지 못하듯 쉬 잊어버리거나 놓아버리겠지요. 머리와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간 다음, 몸을 움직여서 부둥켜안거나 부대껴야 비로소 ‘안다는 일이란 이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함께 살 수 있겠지요.

 자동차 배기가스를 듬뿍 들이마시면서도 찻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동안 이 나라 교통정책과 자동차꾼 마음씀을 느낍니다. 두 다리로 터벅터벅 걸으면서 온삶을 두 다리로 버티며 살아온 여느 사람들 발자취를 깨닫습니다. 팔이 다치고 다리가 다치면서 또 몸살이 나고 고뿔에 걸리면서 고단한 곁사람들 삶은 어떠할까 돌아봅니다. (43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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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만호-한밭의 해돋이를 휘돌아》(대전광역시 동구,1995)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발자취를 골목길을 구비구비 더듬고 헤집으면서 부대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구청에서 홍보자료로 묶어냈는데, 글쓴이는 홍보자료로 묶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대전사람들 삶과 문화를 말하고 싶어서 구청 부탁을 받아들여서 골목길 나들이를 했답니다. 벌써 열세 해 묵은 책인데, 대전 동구청에 연락을 하면 이 책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요즈음은 신문마다 ‘골목길 탐사’라는 걸 곧잘 하면서 ‘맛집 찾기’ 꼭지를 줄줄줄 이어싣기도 합니다. 나중에 낱권책 하나로 묶어내기도 하기에, ‘골목집 맛집 탐사’와 ‘빛깔 있는 골목과 거리’ 이야기를 다룬 책이 제법 많습니다. 이런 책들이 어느 곳 어떤 골목과 거리를 다루었는가 찬찬히 살펴보면, 하나같이 서울 인사동과 서울 홍대 앞과 서울 강남이나 압구정동이나 서울 명동,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 …… 서울, 서울, 또 서울입니다. 어쩌면, 서울 아닌 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골목길 이야기는, 그 서울 아닌 곳 사람들 스스로도 찾아서 읽지 않으니까 굳이 살펴볼 까닭이 없을지 모릅니다. 서울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서울 골목길 이야기만으로도 넉넉하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문화를 말하는 골목이나 거리’라 할 때에는, 먹을거리와 입을거리와 돈쓸거리를 선사해 주는 가게만 알려주면 흐뭇하다고 받아들이는지 몰라요.

 제주섬 중간산에서 홀로 살면서 오름 사진을 찍은 김영갑 님은 당신 삶을 조곤조곤 밝혀 적은 책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1996)에서 “우리는 그냥 소나무를 푸르다고 한다. 소나무의 푸르름은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확연히 다른데도 푸르다고만 한다.(58쪽)”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제주섬 오름 하나만 찍어도 아침과 저녁에 따라, 새벽과 낮에 따라, 어제와 오늘에 따라, 궂은 날과 맑은 날에 따라, 봄과 가을에 따라, 여름과 겨울에 따라, 비오는 날과 비 걷힌 날과, 구름이 몰려드는 날과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는 날과, …… 다른 모습 다른 느낌 다른 이야기가 참으로 많아서,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이 오름 하나라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인천은 온 골목길을 다 밀어붙이고 갖은 골목집을 싹 쓸어내면서 30층짜리 아파트, 50층짜리 아파트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시장부터 소매 걷어붙이며 나서고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헐리는 소식은 모두들 한목소리로 안타까워하는데, 인천 숭의동 공설운동장을 헐어버리려는 소식에는 인천 연고 야구단과 선수들도 아무 소리 안 냅니다. 서민 삶터인 배다리에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내겠다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그런 길을 내겠다고 하면 펄쩍 뛸 테지요. 인천을 비롯한 우리 나라 어느 곳이나 오로지 ‘서울로 가는 길’을 내려고 서민들 작은 집을 깔아뭉갭니다. 산과 들만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사람 삶터도 쓰러뜨립니다. (434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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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지기 신발 뒤축이 한쪽으로 많이 갈리는 바람에 걷기 몹시 나쁩니다. 걸음새가 한쪽으로 쏠리면 신발도 한쪽이 많이 닳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쪽만 갈리면서 걸음새가 뒤틀립니다. 신집에 가서 이놈 저놈 둘러보노라니, 신집 아저씨가, “신발이 안 갈리면 어떻게 해요. 우리들도 먹고살아야지요.” 하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니 마주보며 빙긋 웃습니다. 그렇지만 뒤축이 단단해 잘 안 갈리는 신발이라 한다면, 몇 푼 더 얹어 주고라도 그 신으로 사 신지 않을까요. 싸게싸게 많이 팔아도 장사가 될 수 있지만, 알맞는 값을 제대로 치르면서 팔아도 장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지난 토요일, 개봉동에 사는 고등학교 적 선배네 집에 놀러갔습니다. 선배네 집은 아파트. 아파트 이름은 ‘로즈빌’. 선배는 혼인한 뒤로는 책 한 권 사읽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갓 혼인했을 때 집들이를 가니 “내 꿈이 서재 하나 가지는 거다.” 하면서 “책이 얼마 없지만 함 봐라.” 하면서 자랑을 했건만, 이제는 ‘책 있는 방’이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선배는 날마다 현장에 나가 공무원들과 복닥이는 게 일이라는데. 자동차 몰고 쉴 틈 없이 출장을 다니는 만큼 마음 다잡고 책을 손에 쥐기 힘들겠지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밥먹고 아기 보고 텔레비전 보다가 술 한잔 마시고 잠들기 바쁠 테고.

 눈없는 예수님나신날이 지났습니다. 날짜가 12월하고도 25일이면 ‘세 번 춥고 네 번 따뜻하더라’는 우리네 날씨가 아니더라도 오들오들 쌀쌀해야 하건만, 자전거 타고 나들이 다녀오기에 걸맞을 만큼 따사롭습니다. 앞으로도 눈있는 예수님나신날을 맞이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래도 예수님오신날이라 하기에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골목길 마실을 다녀 봅니다. 옛 미림극장 앞을 지나고 화평동을 지나 화수동을 거쳐 화도진공원을 가로질러 만석동으로 갑니다. 너나들이가 사는 만석동 9번지 쪽방골목에서 서성거리며 사진을 찍다가 동인천 쪽으로 나오는 길, 9번지 들머리에 사는 아저씨가 빨래를 걷으면서 “포근합지요?” 하고 인사말을 건넵니다.

 만석동 9번지를 가운데 놓고 동서남북으로 제강소 제분소 철공소 방직공장 들이 줄줄줄 늘어서 있어, 걷는 내내 코가 냅습니다. 집에 뒷간을 들일 수 없어 공동뒷간을 쓰는 사람들. 이 골목 사람들한테 나라나 지역정부는 무엇을 베풀어 주면 좋을까요. 열 해쯤 앞서처럼 동네 1/4을 싹둑 잘라서 공장으로 드나드는 큰차 다니기 넉넉하도록 찻길 넓히기? 동네 1/5씩 잘라내며 빌라나 아파트 올려세우기? 만석동 9번지 사람들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까요? 큰 짐차 씽씽 내달리는 넓혀진 길에 이 골목 사람들이 차로 오갈 일이 있을까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집 허물고 30층 가까이 올려세운 아파트를 올려다봅니다. 놀이터 하나 보이지 않고 땅위 주차장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땅밑 주차장 들머리만 보입니다. 달동네 판자집처럼 다닥다닥 붙인 30층 안팎 아파트 건물들. 이웃끼리 얼굴 볼 일도 없겠습니다. (4340.12.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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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나들이를 하며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책 하나 선물해 줍니다. 제가 펴낸 잡지를 선물해 주기도 하지만,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천 원이나 이천 원쯤 주고 산 책을 곧잘 선물합니다. 함께 만난 분한테 밥이나 술이라도 얻어먹는 날이라면, 몇 만 원짜리 사진책을 슬그머니 내밀기도 합니다. 밥값이나 술값으로 돈이 나가는 일은 꺼리지만, 책값으로 돈이 나가는 일은 꺼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배보다 배꼽이 커지기도 합니다. 책 선물 받은 분이 다음에 다시 한잔 사겠다고 하면, 뭘요 얻어먹는 마음이나 얻어읽는 마음이나 다르지 않을 텐데요, 아무개님은 책방 나들이를 하기가 수월하지 않으나 저는 늘 책방 나들이를 하니까, 지금 책방 나들이를 해서 책 한 권 장만했다고 생각하시면 되지요, 저는 밥 한 그릇 사먹었거나 술 한 잔 사마셨다고 생각하면 되고요.

 모든 헌책 값이 ‘천 원’이지 않습니다. 요즘 물건값을 헤아리면, 헌책방에서 파는 여느 책 한 권 값은 ‘삼천∼사천 원’이 알맞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싸게 파는 헌책방이라고 해도, ‘한 권 = 천 원짜리’ 책을 사는 일이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천 원짜리 책 선물”이나 “삼천 원짜리 책 선물”이라고 말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값싸게 나오는 〈범우문고〉라든지 〈책세상문고〉라든지 〈살림문고〉는 삼사천 원이면 장만할 수 있습니다. 새책방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자리에 밀려나 있는 손바닥책이지만, 우리들이 찾아 주고 사랑해 주면 사람들 손길 많이 탈 만한 곳으로 옮겨나올 수 있겠지요.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3년까지, 인천에 있는 새책방들에서 〈서문문고〉와 〈을유문고〉를 천오백 원 안팎으로 사서 읽을 수 있었고, 손쉽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1970년대 세로쓰기판 소설책 재고가 남아 있는 새책방에서는 옛날 값으로 눅게 사들여서 읽은 뒤 동무들한테 선물하기도 했어요. 어쩌면 책 선물이란, 값나가고 소중하며 훌륭하다고 하는 책을 나누어 주는 일이라기보다, 값싸게 사서 읽으면서도 마음을 적시거나 움직이는 책, 단출해서 뒷주머니나 잠바 안주머니에도 들어갈 만한 작은 책, 예수님이나 부처님 말씀처럼 훌륭하다고는 못해도 고이고이 되새기며 헤아릴 만한 줄거리를 담은 책을 함께 즐기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주는 쪽에서도 짐스럽지 않고, 받는 쪽에서도 짐스럽지 않게. 주는 쪽에서도 ‘받아서 읽어 줄 이’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재미나게 읽고 받아들이거나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책, 받는 쪽에서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책을 골랐을까’ 헤아리면서 지금 내(받는 사람)가 내 삶을 어떻게 꾸리고 있는가 돌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책을 같이 나누는 일이기도 할 테고요.

 한두 주에 한 번쯤 서울땅을 밟아 봅니다. 인천땅 헌책방으로는 살짝 아쉽다고 느끼는 대목, 좀더 너른 헌책방 품을 느끼고 헌책방마다 다 다른 가슴을 맛보고 싶어서. 쉽지 않은 발걸음인 만큼, 한 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연락을 해 보며 만나자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반가운 이를 만날 때면, 헌책방에서 골라든 책을 죽 보여주면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하나 가져가시라 하거나, 예전에 읽고서 참 좋았다고 느낀 책을 다시 장만해서 조용히 내밀어 봅니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책을 선물하자면, 제가 선물할 책을 받는 사람이 반길 만한 책인지 아닌지를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책 선물을 받을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며, 어떤 사람들과 복닥이며 어떠한 걱정이나 어려움이 있는지를 짚어 나갑니다. 그분이 벌써 읽은 책이어서는 안 되고, 그분이 하는 일에서 다 느끼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 건네는 책이어도 안 됩니다. 책 선물 값으로 치면 다문 천 원, 또는 이천 원, 또는 삼천 원, 또는 오천 원쯤이지만, 이만한 돈을 들이는 일보다, 책 선물 받을 사람 형편과 매무새와 둘레 터전을 헤아리는 데에 들이는 마음씀이 훨씬 큽니다.

 옷 선물, 음반 선물, 공연표 선물, 물건 선물하고 책 선물이 다르다면 이러저러한 대목이라고 느껴요. 선물로 들어가는 돈은 적다고 하지만, 선물할 책을 고르는 데 들어가는 품이나 시간이며 마음씀은 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책 하나 선물하려고 생각하고 찾고 움직이노라면, ‘그러면 나는 어떤 책을 읽어서 마음이 흐뭇하지?’ 하고 되짚게 됩니다. ‘나부터 나한테 선물할 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곱씹게 됩니다. ‘내가 나한테 책 하나 선물하듯이, 내가 만나는 분한테도 책 하나 선물해야겠지.’ 하고 되뇌이게 됩니다.

 우리가 읽어서 우리 마음을 알뜰히 채워 주거나 쓰다듬어 주거나 북돋워 주는 책 하나 엮어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당신들 온삶을 바쳐서 책 하나 엮어냈는데, 이런 고마운 책을 내면서 돈을 조금 만진 사람이 있고, 돈푼 구경 못해 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글쓴이는 죽고 난 뒤 비로소 책 값어치가 알려져서 두루 읽히거나 사랑받기도 합니다. 우리들 ‘읽는이’는 돈 몇 푼 치르면 ‘글쓴이가 피땀 흘려 이뤄낸 열매’를 앉은자리에서 큰 고달픔 없이 맛볼 수 있습니다.

 책 하나 펴내는 어려움이자 책 하나 펴내는 즐거움을, 선물할 책 하나 고르면서 ‘책 하나 고르기 참 어렵네. 그래도 참 즐겁네’ 하고 생각하면서 살짝살짝 느낍니다. 책 하나 선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선물한 책을 나는 얼마나 마음깊이 되읽고 거듭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되묻습니다. 한 목숨이 죽어서 제 배속으로 들어왔고, 한 책에 바쳐진 피땀이 제 주머니돈을 거쳐서 다른 이 마음속으로 옮아갑니다. (4341.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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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 땅과 아이들을 살리는 먹을거리 교과서
요시다 도시미찌 지음, 홍순명 옮김 / 그물코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잘 먹겠습니다
- 글 : 요시다 도시미찌
- 옮긴이 : 홍순명
- 펴낸곳 : 그물코(2007.5.31.)
- 책값 : 6000원


 이 책 하나 31 ― 밥을 먹습니까, 돈을 먹습니까?
 : 요시다 도시미찌, 《잘 먹겠습니다》



 (1) 내 밥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밥을 먹기 앞서 두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이며 비손을 올립니다. 우리 옆지기는 천주교를 믿기에 천주교 틀에 따라 비손을 합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믿기에, 먹을거리를 내어준 흙과 뭇 목숨붙이들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 다음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 부디 옛날 어른들의 먹는 지혜에 귀기울여 주세요. 우엉도 대충 씻어 뿌리 잔털까지 먹었습니다. 우엉은 껍질에 맛이 있습니다 ..  (79쪽)


 조금 앞서 아침을 들었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베풀어 준 흰김치, 양조장집 아주머니가 베풀어 준 무채, 지난주에 성당에서 얻은 빨간무, 이웃 아주머니가 나누어준 달걀을 반쯤 익힌 것, 가게에서 사 온 콩과 누런쌀로 지은 밥, 이렇게 밥상을 차려서 먹었습니다.


.. 모든 먹을거리는 뿌리를 찾아보면 흙에서 나왔습니다. 흙이 변해서 된 우리들은 흙에서 가꾼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 튼튼한 아이를 키우고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려면 먼저 그 바탕이 되는 흙을 건강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7∼9쪽)


 술안주 삼아서 가끔 과자부스러기를 먹을 때가 있는데, 과자는 대여섯 봉지를 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여 방귀가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집에서 손수 쌀을 일고 씻고 안쳐서 지은 콩밥에다가 한두 가지 푸성귀나 김치로 밥을 먹으면 반 그릇으로도 배가 부르고, 한 그릇을 다 비우면 더는 밥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까지 배가 고프지 않고, 저녁에 밥을 먹을 때에도 반 그릇쯤 먹으면 속이 넉넉합니다. 이튿날 아침이면, 냄새 살짝 구수하고 푸른빛 슬며시 도는 똥이 시원하게 나오면서 방귀는 거의 안 뀌게 됩니다.


.. 자기들이 흙과 미생물과 연결되어 서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친근감이 나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체험이 없으면 자연 환경문제를 아무리 가르쳐도 다만 지식의 조각으로 끝나고 말 두려움이 있습니다 ..  (19∼20쪽)


 책상 앞에 앉아서 글쓰는 일을 해야 할 때면 힘이 많이 들어서 때때로 입이 심심합니다. 요즈음은 귤이 나는 철이니 썰렁한 부엌에 귤을 한 바구니 모셔 놓고서 두 알씩만 방으로 가지고 와서 천천히 벗겨서 먹습니다. 불은 잠자는 작은 방만 땝니다. 거의 ‘외출’로 맞추어 놓으니 불을 땐다고 할 수 없고, 잠자는 방바닥에는 이불이 늘 깔려 있습니다. 한참 일하다가 허리가 아프면 이불로 들어가 옹크리기도 하고 다리를 쭉 뻗어 보기도 합니다. 불을 때지 않아도 이불 속에서는 따뜻해서 손도 녹이고 몸도 풀어 줄 수 있어 좋습니다.


.. 고기, 달걀, 우유는 조금씩 소중하게 먹는 것이 좋습니다. 싼 고기, 달걀, 우유는 값을 낮추기 위하여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동물들을 기릅니다. 그런 동물들은 허약하고 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약품을 써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축과 연결된 우리들은 어떨까요? ..  (83쪽)


 우리 집으로 놀러오는 분들이 감이나 능금이나 배를 들고 오곤 합니다. 이럴 때 감이나 능금이나 배를 흐르는 물에 씻은 뒤 쟁반에 담아서 내옵니다. 우리 식구는 감씨는 못 먹지만 능금씨나 배속까지 오독오독 씹어서 먹습니다. 껍질은 열매에서 가장 맛있는 곳이니 마땅히 그냥 먹습니다. 손님한테 내어준다고 해서 껍질을 벗기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곳을 쓰레기로 버릴 수 없으니까요. 가장 맛있는 곳이니 “껍질째 드시면 훨씬 맛있어요. 열매는 껍질 맛으로 먹어요. 씨앗도 얼마나 맛있는데요. 감이나 능금이나 배가 다시 태어나자면 바로 고 작은 씨앗 때문에 다시 태어나잖아요. 새로운 열매가 될 유전자와 영양분을 담뿍 안고 있는 씨앗이니 오도독 깨물어 먹으면 우리 몸에도 좋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 인간도 닭장의 닭처럼 완전히 격리된 방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  (22쪽)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껍질이나 씨앗이나 배속을 남기는 분들이 거의 모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꺼려지기도 해서 그렇기도 하고, 쓰고 텁텁해서 입맛에 안 맞아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땅콩조차 껍질을 벗겨서들 먹고 있으니까요.





 (2) 선배와 후배와


 지난주 토요일, 개봉역 둘레에 우뚝우뚝 솟은 아파트 가운데 ‘로즈빌’이라는 곳 22층에 사는 고등학교 선배네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아파트 이름 ‘로즈빌’이란 무슨 뜻일까 한참 머리를 굴렸지만, 돌머리로는 그 뜻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24층까지 우뚝 솟은 아파트들인데,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가 매우 좁습니다. 햇볕이 들지 않겠군요. 놀이터는 놀이기구 몇 가지가 있지만 흙 한 줌 없습니다. 참 썰렁하네, 하고 느꼈지만, 다른 아파트도 이와 비슷하겠지요.


.. 역시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 넘쳐나는 정보 홍수에 밀려 생명이나 앞날에 관한 귀중한 정보는 여간해서 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 사람들은 그것을 싸다고 삽니다. 서로가 자기 돈벌이를 위하여 사는 사회, 청소년 흉악범죄는 그런 사회를 토양으로 자라난 검은 꽃입니다 ..  (29쪽)


 저도 어릴 적에 아파트에서 열세 해 살았습니다.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동과 동 사이는 5층 아파트 높이만큼 띄엄띄엄이었습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바닷가 항구 바로 옆에 있던 우리 아파트는, ‘전쟁이 나서 포탄을 맞아서 쓰러져도 옆 동이 닿지 않아야 한다’는 잣대가 있어서 그런 잣대에 따라서 지었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놀이터는 두 군데 있었는데, 두 놀이터는 따로따로 아파트 한 동 넓이와 똑같을 만큼 무척 넓었습니다. 그래서 이 놀이터에서는 11:11 공차기 놀이나 9:9 공놀이를 즐길 수 있었어요. 놀이터 바닥은 모두 모래였습니다.


.. 파리는 정화된 세계에 사는 우리들에게 함께 생활할 수 없는 보기 싫은 생물이지만, 지구에게 또 우리들에게 없어서 안 되는 귀중한 생명입니다. 병충해도 파리와 마찬가지로 지구를 청소하는 일꾼입니다 ..  (34쪽)


 승강기를 타고 22층으로 지이잉 올라갑니다. 승강기는 ‘장애인도 바퀴걸상을 밀고 탈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이런 편의시설은 참 좋군요. 그런데, 바퀴걸상을 타고다니는 장애인들이 이 로즈빌 아파트에서 전세라도 얻어서 살 수 있을 만한 살림일는지.


.. 예전에는 사람의 똥오줌을 통에 숙성시키고 농사꾼은 그것이 완전히 정화했는지 손끝으로 찍어 맛보고 나서 거름으로 썼습니다. 그런 거름으로 키운 채소에 병충해는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기생충이나 병원균은 덜 숙성된 사람의 똥오줌을 직접 채소 가까이에 뿌렸을 때 크게 생겨났던 것입니다 ..  (45쪽)


 선배와 형수는 큰상 가득 먹을거리를 차려 줍니다. 두 사람 다 바깥일을 다니느라 시간도 없을 텐데, 참말 힘들겠습니다. 상차림도 일이지만, 나중 뒷갈무리도 일이잖아요. 형수님한테 슬쩍 여쭈니, “평소에는 안 쓰지만, 오늘 같은 날은 자동세척기 쓰니까 괜찮아요.” 합니다.


.. 초등학생은 아직 괜찮지만 고등학생, 대학생이 될수록 먹을거리는 황폐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먹는 지식을 가르쳐도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없으니까 먹을거리도 아무거나 먹게 되는 것이겠지요 ..  (63쪽)


 동기 녀석 부부와 후배 녀석 부부, 혼자 사는 후배 하나, 이렇게 하여 아홉 사람이 큰상에 둘러앉아 젓가락질과 숟가락질을 합니다. 부지런히 술잔을 부딪힙니다. 예전에는 ㅊ소주만 마시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다른 ㅊ소주를 더 마시게 된다며, ‘ㅈ회사 불쌍해서 어쩌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뭐, 둘 다 어마어마하게 팔릴 텐데.

 고기와 회는 밖에서 사 왔지만 다른 찬거리는 집에서 마련하신 듯. 참으로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저와 옆지기를 뺀 다른 사람들은 돈벌이 이야기, 주식 이야기, 자동차 이야기 들을 주고받습니다. 다들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선배는 “야, 결혼하고 나서 여지껏 책 한 권도 못 사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선배는 책이 있는 방(서재)도 따로 있잖아요. 요새 그렇게까지 책 있는 방 마련해 놓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고 대꾸해 줍니다.

 작지 않은 차, 큰 텔레비전, 헹굴 때 속이 들여다보이는 세탁기, 단추만 누르면 알아서 씻기는 설거지 기계, 슥 밀기만 하면 쓸고 닦고 해 주는 청소기 ……, 참으로 많은 전자 설비를 쓰는 우리들은, 집안살림이나 바깥일을 보면서도 손쓰거나 시간 들일 일이 참으로 줄었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 틈 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갖 전자 설비를 쓰면서 아껴진 시간으로도 ‘더 많은 돈을 벌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힘들고 바쁜가 봐요.


.. 먹는다는 것은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입니다 ..  (74쪽)


 넌지시 물어 봅니다. “아이가 크면 나중에 학교 보낼 생각이에요? 학교 보내면 바보 될 텐데.” 선배는, “학교 왜 안 보내? 보내야지.” 하고 말하고, 동기 녀석은 “나는 안 보낼까 봐.” 하고 말합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다가 유치원까지 하면 열두 해는 훨씬 넘고 열대여섯 해쯤 되겠지요. 이만한 세월 동안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영어? 한문? 상식? 또 뭘 배우지요? 논술? 태권도? 컴퓨터? 그리고 또?

 수능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면 처음부터 수능 시험문제만 가르칠 일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이름있는 대학교에 가야 한다면, 그런 대학교에 가서 좋을 일이 무엇일까요. 나중에 돈 많이 주는 큰회사에 일자리 얻으려고? 그러면 처음부터 돈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시키면 될 노릇이 아닐는지.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수 아이들을 가르치면 될 텐데. 다들 대학교 나오고 어쩌고 하면서 다른 집 아이들 과외는 잘만 시킨 지식인들인데, 그런 지식으로 자기 아이 하나 못 가르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고, 돈벌이에 너무 푹 빠져서도 그러한지 모르며, 돈벌이보다도 일에 잔뜩 매이면서 자기 삶을 안 찾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아이들을 학교에 ‘버려’ 놓거나 ‘가두어’ 놓으며 햇볕 한 줌 바람 한 줌 못 쬐게 할까요.

 모두 다 똑같은 시멘트집 아파트에 살면서 집과 학교와 학원 사이를 자가용이나 학원버스로 오가며 땅 한 번 아이들 스스로 못 밟게 하는 이런 모습이, 부모가 할 노릇일는지요.


.. 영양사는 숫자를 맞추려 먹을거리 재료를 사방에서 모을 것이 아니라, 지금 지역에 있는, 농약이 적은 제철의 건강한 먹을거리 재료를 조사하여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아이들이 물리지 않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  (64쪽)


 저녁 열한시 즈음 자리를 접기로 합니다. 우리 식구는 전철을 타고 돌아가도 되는데, 인천 사는 후배가 자기 차로 같이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대리운전 부르면 된다고.


.. 왜 아픈 사람은 자꾸 늘고 새로운 병원체가 나타나는지? 왜 집중력이 약한 어린이가 늘고 돌발성 범죄가 느는지? 왜 사람은 툭하면 싸우는지? 앞날이 어두운데 왜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는지? 이 모든 현상의 바탕 원인에 대해 말로 하기 어렵지만, 우리들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언제부터인가 사람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도 얼마 전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어린이들도 지도자도 대부분의 사람이 잊어버렸습니다 ..  (98쪽)


 후배 녀석도 머잖아 색시를 만나 혼인을 하겠지요. 후배 녀석도 예식장에서 혼인을 할 테고, 청첩장 받아서 예식장을 찾아가면 뷔페로 밥 한 끼니 차려놓겠지요. 서양 예복을 입고 사진 촤라락 찍은 뒤, 케익을 자르고 나서, 비싼 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을 올린 다음, 다른 동무들이 꾸며준 웨딩카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나라밖 어디로 나들이를 한 주쯤 다녀올까요.





 (3) 작은 책, 《잘 먹겠습니다》


 고작 105쪽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 《잘 먹겠습니다》를 지지난달에 사서 이달 첫머리에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책상맡에 그대로 올려둔 채 틈틈이 집어서 되읽습니다. ‘땅과 아이들을 살리는 먹을거리 교과서’라는 작은이름이 붙은 조그마한 이 책은, 일본에서 ‘농사체험 학습’을 할 때 교과서처럼 쓴다고 합니다.

 일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하고 마찬가지로, 논밭에서 풀을 뽑으라 하면 잡풀이 아닌 곡식 풀을 땀 뻘뻘 흘리면서 뜯는답니다. 날마다 ‘어머니가 부엌일 하며’ 밥상에 차려 주니 먹기는 먹었겠지만, 벼가 어떤 모양인지, 보리가 어떤 모습인지, 수수가 어떤 생김인지, 감자풀과 고구마풀은 무엇인지 하나도 가려내지 못할 테지요. 고구마케익은 맛있다면서 먹어도 고구마줄기 하나는 못 찾겠지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다는 울릉도 호박엿’ 이야기는 흔히 들었겠지만, 그 호박이 얼마만한 크기와 빛깔로 꽃을 피우는지는 모르겠지요. 고기를 구으며 깻잎은 즐겨먹었어도 깻잎이 깨를 심어서 거두는 잎이고, 깨가 얼마나 자잘한 알갱이로 열매를 남기는지 모를 테지요.


.. 우선 알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행동에 주의하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지역기업이 자라납니다. ‘뭐야! 사회를 바꾸는 것은 먼저 자기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그때 왜 거기서 포기했을까, 그때 왜 좀 분명히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야깃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왜 학교의 교육위원회에서는 이런 것을 전해 주지 않을까?’라고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우선 그렇게 생각한 당신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  (31쪽)


 우리들은 무엇을 ‘안다’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장은 우리 아이들한테 ‘너희한테 지식이 얼마만큼 있고, 너희가 이 사회에서 얼마만큼 너희들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줄까요. 대학교 졸업장이 있으면, 혼자힘으로 꿋꿋하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졸업장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사람 쓰레기’일 뿐일까요.


.. 병원균이 세포를 침범한다기보다 건강치 못한 부위에 병원균이 모여들었을 뿐입니다 ..  (37쪽)


 오늘은 12월 25일, 예수님오신날입니다. 예수님오신날에 눈이 오면 ‘하얀 성탄절’, 영어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만,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12월 25일은 따뜻합니다. 2008년은 어찌 될까요. 2009년은? 2010년쯤 뒤부터는 우리 나라도 ‘반소매 옷을 입고 맞이하는 예수님오신날’이 되지 않을는지요. (4340.12.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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