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이노리티 시선 19
정은호 지음 / 갈무리 / 200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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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만에 다시 읽고, 다시 쓰는 소개글입니다 ^^;;;; 예전 글은 너무 부끄러워서~~)


- 책이름 :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 글 : 정은호
- 펴낸곳 : 갈무리(2003.10.30.)
- 책값 : 6000원



 ― 우리 삶을 옥죄는 비바람은 무엇일까
 [말을 붙잡는 시 5]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1〉 어떤 끝을 볼 수 있을까


 엊저녁, 잠깐 밤마실을 나옵니다. 언제 사 두었는지 알 길이 없는 김빠진 맥주 하나가 냉장고에 있더군요. 날이 차츰 쌀쌀해지고 있기 때문에, 머잖아 냉장고 돼지코를 뽑을 생각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를 돌렸지만, 추운 겨울에는 냉장고를 쓰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다치지 않아요. 마음 같아서는 여름에도 냉장고를 끄고 싶으나,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더군요.

 아무튼, 냉장고에 들어 있던 맥주를 치워내야 하기에, 안주거리 될 만한 과자부스러기라도 살 생각으로 동네 구멍가게로 찾아갑니다. 여덟 시만 되어도 가게문은 거의 다 내리고 조용해지는 배다리 골목길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쉬는 날
 저녁시장에 갔던
 아내가 내온 방울토마토
 웬 방울토마토?
 퉁명한 내 말에
 요즘 시장에서 제일 싼 게
 방울토마토라 한다
 …  〈방울토마토〉



  사람도 뜸하고 차도 뜸한 길을 설렁설렁 걸어갑니다. 얼마 앞서 다시 연 ‘24시간 불가마 찜질방’을 왼쪽으로 끼고 걷습니다. 저 찜질방은 이 동네에서 얼마나 장사가 되려나. 예전에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았을 텐데.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산업도로를 닦는다며 파헤쳐 놓은 길 옆을 지납니다. 그나마 마을 분들이 힘을 모아서 이 공사를 멈추게 했지만, 개발업자는 언제 다시 삽날을 들이밀지 모릅니다.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는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라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요,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입니다. 동네사람들도 참 어리석었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개발업자와 인천시 담당공무원 들은 ‘여느 길 하나 닦는다’는 거짓말로 동네사람들을 속였더군요. 아무렴. 컨테이너차나 덤프가 씽씽 내달리는 산업도로를 닦는다고 처음부터 말했으면 어느 누가 도장을 찍어 주었을까요.


 양손에 수갑차고
 끌려가지 않아도
 감방에 갇혀 있지 않아도
 우리들 생존의 벌판
 깊숙이 파고든 손길

 노동자 관리리스트
 A, B, C 등급
  A : 특별 관리대상
  B : 잡무 우선배치
  C : 특근 잔업 전혀 없음
 … 〈구속 2〉



 할배와 할매가 번갈아 지키는 구멍가게로 들어갑니다. “안녕하셔요” 하고 고개숙여 꾸벅 인사를 합니다. “어!” 하고 인사를 받는 할배는 가게 불을 켭니다. 손님이 들어올 때에만 가게 안쪽 불을 켭니다. 할배는 텔레비전 역사연속극을 보고 있습니다.

 과자부스러기 몇 점을 집다가, 막걸리도 한 병 집습니다. 늘 마시던 소성막걸리는 다 떨어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누룽지막걸리를 집습니다.

 우리가 고른 물건이 셈대 위에 놓이니, 할배는 뒤쪽에서 주판을 꺼내어 톡톡톡 알을 놓습니다. 속으로, ‘아이고, 사진기 가지고 나올걸. 잠깐 나온다며 사진기를 괜히 놓고 왔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할배가 한 마디 건넵니다. “옥상에 있는 꽃 사진으로 찍지 않을래?”


 일요일 한 번 쉬어 보는
 절실한 노동자들
 다 버려 두고

 통념도 상식도 다 무시하고

 공공부문
 몇 천 명 사업장
 먼저 쉬어야 하는가

 공익 위해서라도
 공공부문 사업장보다
 선방공 용접공 쉬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노동강도를 따져 보아도
 근무조건 열악한
 작은 공장 노동자들
 먼저 쉬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몇 천 명 쉬는 것보다
 몇 명 쉬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주 5일 근무 2〉



 할배는, 셈을 마친 뒤 가게문을 잠깐 내리고 우리를 이끌며 가게 옥상이 올려다보이는 골목 안쪽으로 갑니다. “저기 하얀 꽃 보이지? 희귀한 꽃이라는데 참 예쁘게 잘 피었어.” “그러네요. 지금은 어두워서 찍을 수 없고, 내일 아침이나 낮에 다시 올게요.” “그래, 아침에는 내가 없을지 모르지만, (할머니한테) 얘기하고 사진으로 찍어.”

 가지고 온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생각합니다. ‘할배네 옥상에 온갖 꽃이 가득하던데. 석류도 있고. 그 꽃들을 혼자서만 즐기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셨을까. 보기 좋은 꽃이라면 이웃들한테도 내보이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으셨을까. 골목길 바깥쪽에 크고작은 꽃그릇을 내놓고 키우는 모든 살림집 어르신들 마음도 이와 같을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화동 어느 집 감나무를 구경하면서 나무가 참 좋다고 말하니 그곳 집임자가 웃으면서 좋아했는데.’


 …
 담배 한 갑에도
 소주 한 잔에도
 온갖 세금들이 다 떨어지고
 의무만 존재할 뿐
 …  〈이민을 꿈꾸는 것은〉



 집에 닿아 먹자판을 벌여 놓고 창밖을 잠깐 내다봅니다. 영화를 찍는다는 대학교 아이들이 헌책방거리에 찾아와서 어제부터 무언가를 찍고 있습니다. 어제는 이른저녁부터 동틀녘까지 퍽 시끄러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내 주려나? 동네길에서 밤늦게까지 영화를 찍는다고 부산을 떠니, 그 소리가 집안까지 들려옵니다. 그나저나 저 젊은 아이들이 찍는 영화는 무엇을 주제로 삼고 있을까. 무슨 줄거리를 찍기에, 꼭 헌책방에 와서 찍어야만 했을까. 저 젊은 아이들한테 헌책방이란 어떤 곳일까. 저 젊은 아이들은 영화를 찍기 앞서, 그리고 영화를 찍은 다음에, 이 헌책방거리에 찾아와서 자기 마음밭을 일굴 책을 차분히 즐길 수 있을까.


 아이들 학원비며
 집장만하며 낸 대출금이자
 각종 공과금
 들어갈 건 많고
 손에 묻은 밥풀 같은 월급 쪼개어도
 생활비는 늘 모자란다
 …  〈금 닷돈〉



 남쪽 바다에는 태풍이 찾아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는 동네에도 거센 바람이 씽씽 붑니다. 아직 비바람으로 몰아치지는 않습니다. 낮에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더니, 매지구름도 보이고 먹구름도 드문드문 보이던데. 문득, 볕드는 날이 줄고 비가 잦은 올해 날씨는, 하늘에 짙게 드리운 먼지띠를 많이 씻어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먼지띠는 고스란히 바다로, 땅속 깊이 스며들었을 테지요. 덕분에 올해는 지난해와는 달리 햇볕 맑게 내리쬐는 날, 가끔이나마 눈이 살짝 부실 만큼 빛살이 좋고 하늘이 파랗기도 했어요.


 정규직은
 아예 모집하지 않는다

 정규직을 모집한다 해도
 젊은 사람 오지 않는 공장

 비정규직 라인에 붙이건만
 점심시간 되기도 전
 말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만
 남아서 일하고 있는 공장  〈3D 공장〉



 막걸리를 마시다가 다 마시지 못하고 1/3쯤 남깁니다. 늘 마시던 막걸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속에서 잘 안 받습니다. 마개를 꾹 닫고 자리를 치웁니다. 셈틀을 잠깐 켜고 버마사람들 소식을 살핍니다. 이제서야 이 나라 적지 않은 사람들도 ‘미얀마’가 아닌 ‘버마’임을 조금씩 느끼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로 이 땅을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 고향나라에서 민주주의 되찾는 싸움을 하다가 쫓겨나고 내팽개쳐진 ‘망명가’임을 차츰 깨닫고 있을까요. 글쎄, 글쎄. 글쎄, 모르겠습니다.


 …
 축배를 들며
 아이엠에프를 극복했다
 야단이면 무엇 하나

 늘 우리는
 하루 해가 길기만 하다  〈땜방〉



 어제는 도원역 건너편에 있는 닭집에 들렀습니다. 닭집에 앉아서 옆지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닭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을 뽑아야 하는데, 아직 못 뽑아서 이렇게 힘들어요.” 하고 말하는 두 분. 아주머니는 쉴 틈 없이 닭을 굽고, 아저씨는 숨돌릴 겨를이 없이 배달을 나가고.

 사람들이 집에 앉아 전화기 단추만 꾹꾹 눌러서 시켜먹기만 하는구나 싶은 한편으로, 이런 밥집이나 술집 일거리조차 안 찾는구나 싶은 생각.

 낮에는 헌책방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머리에 지식만 쌓아 놓고 있는 사람들은 헌책방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무식한 사람들이나 헌책방 장사를 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고. 가슴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네들은 헌책방 장사를 할 수 없다고.”


 큰놈 작은놈 데리고
 집 앞 놀이터에 갔다가
 체육공원 잔디밭 간다

 아이들은 신이 났고
 나는 일요일도
 공장에 일하러 간 날들을 헤아려본다
 …  〈일요일 2〉



 저녁 열한 시 넘어까지 다니는 버스. 열두 시 넘어까지 오가는 전철. 버스 소리와 전철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눕습니다. 때때로 짐기차가 지나갈 때면 건물이 웅웅웅 소리를 내며 조금씩 흔들립니다. 우리가 깃든 이 집은 1958년에 지은 집. 어느덧 쉰 해 동안 온갖 소리를 받아들이고 온갖 흔들림에 익숙해졌군요.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세월을 온갖 소리와 흔들림을 껴안으며 이 자리에서 꼿꼿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영화 찍는 젊은이들은 아직도 부산한가 봅니다. 오늘까지만 찍고 내일은 안 올까. 내일도 영화를 찍으러 올까.


 〈2〉 시집 하나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가
 갑자기, 직책이 뭐냐
 직장생활 십 년 넘도록 했으모
 무슨 직책이 있을 거 아니냐고 묻는다

 평생을 다녀도
 직책 같은 것 없이
 급수만 올라간다고 했건만

 직책이 없다는 말에
 마냥 섭섭해 하신다  〈직책〉



 시집 하나를 다 읽어냅니다. 네 해 앞서 한 번 읽고, 사이에 한 번 잠깐 들추었다가 책꽂이에 꽂아 두고는 잊었는데, 보름께 앞서부터 다시 생각이 나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읽어냅니다.

 시집에 담긴 이야기는 그대로이고, 시집을 써낸 사람도 그대로일 테며, 시집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대로일까요. 지난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까지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묵은 잡지, 1990년대 첫머리에 나온 어느 잡지를 보니, ‘미술경매 문제 있다’는 특집 꼭지가 있습니다. 특집 꼭지는 ‘1990년대 첫머리 그때뿐 아니라 열 해 앞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뒤로 열 몇 해가 흐른 요즈음은 어떠할까요.

 노동자 전태일 님이 죽은 1970년과, 노동자 배달호 님이 죽은 2003년은, 이 땅에서 노동자들한테 어떤 해였을까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정부단체 광고로 곳곳에 나부끼고 있는 2007년 오늘날, ‘경제에 도움이 되는 협정’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쓰는 정책’을 바라기는,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이 쓰면서 살 수 있는 세상보다는 적게 벌어도 걱정없이 살 수 있고 푸대접을 안 받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일이란 헛꿈이나 헛생각일까요.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도 일자리를 넉넉히 얻을 수 있는 한편 따돌림을 안 받을 수 있고, 몸과 마음이 고달픈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금 더 일삯을 받을 수 있으며, 주5일 노동을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먼저 하면서 이 사업장 살림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경제 움직임이란 바랄 수 없는 일인지. 그치지 않는 먹구름뿐이고, 쉴 사이 없이 찾아드는 비바람뿐인지. (4340.10.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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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방 하나를 조용히 꾸려가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적어 놓은 글을 읽고 댓글을 하나 남겨 보았습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는 ‘사교육(과외)’으로 쉽게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불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으로서 가장 쉽고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거고, 나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좀더 몸을 쓰면서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고. 이 마음을 앞으로도 고이 이어나갈 수 있다면, 나날이 추스르고 북돋우며 살뜰히 가꿀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한결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저는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희망도 없고 꿈도 없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러니? 네 곁에는 내가 있는걸.’ 하고 한 마디 해 줄 수 있겠네요. 〈한겨레〉에 시험 치고 들어가실 수 있다면, 들어가셔서 힘껏 싸워 주셔도 좋겠구나 싶습니다. 다만, 저는 〈한겨레〉가 ‘학력제한 없음’을 내걸고는 있지만, 여태까지 어느 한 사람도 학력제한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대졸자가 아니면서도 이곳에 취직한 사람이 없다는 대목에 슬프고, 학력제한이 없으면서 토익점수를 내라고 하는 입사자격제한이 슬퍼서, 예전에 특채로 뽑아 주겠다고 하는 제의를 거절하고, 토익점수 내라는 자격제한을 풀면 공채로 들어가겠다고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1998년과 1999년 사이에. 생각해 보면, 글은 길게 쓰거나 짧게 쓰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담아냈느냐, 자기 마음이 아닌 헛소리나 딴사람생각 짜깁기를 늘어놓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자기 삶을 찬찬히 담고 있다면, 짧은 글은 짧은 글대로 좋고, 긴 글은 긴 글대로 좋습니다. 지금 세상은 짧거나 길거나 제대로 자기 삶을 담아서 적바림하고 있는 글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고 느낍니다.” (4340.10.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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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ㅎ이라는 분이 쓴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 보았습니다. 문득, 나도 이 ㅎ님처럼, 누군가를 비평하거나 어느 작품을 비평할 때, 좀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미리 ‘마무리말(결론)부터 내려 놓고 밀어붙이기’를 하지 않았는가 싶어서, 또 ‘내 생각만 옳은 듯 칼부림 글을 쓰지 않았는가’ 싶어서.

 제가 적은 댓글은 이렇습니다. “어떤 작품을 이야기할 때, 그 작품을 쓴 사람이 그동안 이루어 온 다른 작품들을 함께 살피지 않고 이야기를 해야만, 올바르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최규석 같은 사람 다른 작품들은 인터넷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이가 다른 작품을 어떻게 펼쳐내고 있는가를 좀더 차근차근 살피지 않고, 이 작품 하나로만 평가와 결론을 내리는 일은 적잖이 섣부르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군요. 이른바 게으름이라고 할까요. 한편, 최규석이라는 분한테는 손수 인터넷편지를 띄워서, 이 만화를 어떤 생각으로 그렸는가 하고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직접 알아보고 쓰는 글하고, 자기 생각만으로 결론을 다 내려버린 다음에 쓰는 글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4340.10.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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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


 창가로 밝은 빛이 스며든다. 늦었나 싶으면서도 몸이 고단하여 조금 더 눕는다. 그러다가 이제는 더 어기적거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일어나서 시계를 본다. 여덟 시 반. 히유. 그다지 늦은 편은 아니구나. 열 시가 넘은 줄 알았는데.

 기지개를 켜고 찬물 한 잔 마신다. 씻는방에 들어가서 낯과 손을 씻은 다음, 어제 담가 놓은 빨래를 세 가지만 한다. 닷새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다닌 탓에 몸이 많이 찌뿌둥하다. 잠도 모자라다. 다음 한 주는 집에서 멀리 나가는 일을 줄여야겠다. 밀린 일도 많고.

 빨래 두 가지는 집안에 넌다. 하나는 마당으로 들고 나와서 빨랫줄에 건다. 잠깐 해바라기를 한다. 아침햇살은 늘 따뜻하고 반갑다. 담벽에 기대어 이웃집 지붕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추잠자리 세 마리가 잰 날갯짓을 하며 내 옆쪽 담벽에 앉는다. 잠자리가 나오는 철인가. 지난달에도 잠자리 한 마리 보았는데. 가만히 잠자리를 들여다보다가 사진기를 꺼내 와 몇 장 찍는다. ‘좀더 가까이’를 생각하며 살살 다가서니 호롱 하고 날아간다. 먼곳 사물을 잡아당겨 찍는 렌즈가 없으니 아쉽다. 도서관으로 내려와 창문을 하나씩 열고 물을 반 잔 마시고 밀린 설거지를 한다. 조금 있으니 배가 살살 아파서 책 한 권 들고 살림집으로 올라가 뒷간에 들어간다. 책을 펴고 똥을 눈다. 개운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온다. 마당 담벽을 슬그머니 바라본다. 고추잠자리는 한 마리만 보인다. (4340.10.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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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을 읽힐 수 있을까?

이런 책들은... 아직 너무 힘들라나... -_-;;




 중학교 아이들은 읽을 책이 없다


 중학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습니다. 동화책이나 동시집은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보는 책 같아서 가까이하지 않을 테지요. 소설이나 시는 아직 어려울 테니 읽기 힘들고요. 문학이 아닌 책은 중학교 다닐 만한 나이인 아이들 눈높이에 너무 높거나 낮아서 알맞지 않기 일쑤입니다. 예술이나 문화나 사회나 과학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말 그대로 사이에 낀, 가운데에 찡겨 버린 어중간한 나이처럼 되고 마는 아이들, 열넷부터 열여섯입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를 다닌다는 아이들한테는 소년소설도 즐기도록 하고 동시도 즐기도록 해 주어야 알맞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즐길 수 있는 문학’이건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 참 드뭅니다. 어쨌든, 동시도 그저 어린아이들만 읽는 문학이 아니라 낮은학년이 즐기는 동시와 높은학년과 열대여섯 아이들까지 두루 즐길 수 있는 문학이 따로 나뉘어 있어야 합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종교나 과학이나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책과 마찬가지로 ‘학교로 치면’ 중학교, 나이로 치면 열넷부터 열여섯 사이에 있을 아이들도 문학작품으로 문화와 예술과 종교와 과학과 철학을 맛볼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책을 펴내야 좋습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어느 만큼 전문성을 담아내는 책도 차근차근 맛볼 수 있도록 해 주면 더욱 좋고요.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운 과목을 좀더 어렵게 배우는 단계가 중학교가 아니라면, 고등학교 때 배울 지식을 조금 쉽게 풀어서 배우는 단계가 중학교가 아니라면, 이때 아이들이 즐기고 반가이 맞이할 책을 출판사나 책방이나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기꺼이 알뜰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초등학생도 사람이고 중학생도 사람이며 고등학생도 사람입니다. 어린이도서관이 있어야 하는 한편, 청소년도서관이 있어야 하고, 학문을 깊이 파고들 사람이 즐겨찾을 전문도서관이 있어야 하는 가운데, 늘 바쁘고 고된 일에 매여 있는 월급쟁이들이 마음 쉬며 찾아갈 쉼터 같은 도서관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도서관을 마련하자면, 무엇보다도 중학생이 즐길 책, 고등학생이 즐길 책, 여느 월급쟁이가 즐길 책을 차근차근 엮어낼 만한 문화와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어린이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제 또래보다 적잖이 앞서가는 책읽기를 하는 아이들, 그래서 열대여섯 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즐기는 열두어 살짜리 아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또래들보다 조금 눈높이가 낮은 열서너 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즐길 수 있겠지요. 그래, 나이나 학년으로 치면 세 해이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아래로 두 해, 위로 두 해 해서 모두 일곱 해를 아우를 수 있는 눈길과 눈높이를 살피는 책을 도서관에서 갖추어야지 싶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저뿐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중학교 다니는 딸아들 둔 어버이라면 으레 느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들도 몸소 느끼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머리’로는 알고 ‘입’으로는 말씀을 하시지만 실천을 못하는구나 싶어요. 몸으로는 못 옮기지 싶어요. 출판사에서 땀흘리고 힘들여서 중학교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책을 펴낸다고 해도, 잘 안 팔릴 뿐더러,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고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이 눈여겨보아 주지 않으니 버겁다고도 합니다. 더구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모든 ‘교양 책’을 버리고 참고서와 문제집만 달달달 외우도록 끄달리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 대학교 입시가 걸립니다. 중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 아이들은 입시에 억눌려서 책을 못 읽습니다. 책 읽을 틈이 없습니다. 교과서와 시험에 짓눌려서 마음이 답답하지요. 게다가 머리도 아파요. 아무리 좋은 책을 쥐어 준다 해도 그 책을 읽고 싶을까요? 아니, 읽을 겨를이 있을까요. 읽을 겨를을 내어주는 학교 교사가 있나요? 읽도록 마음써 주는 학부모가 있나요? 더구나 그런 책을 읽는다 해도 시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학생 스스로 그 책을 아주 좋아해하지 않는다면 한두 권 읽다가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 스스로도 그렇지만, 학생들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교사들이 이끌지도 않거나 못하곤 합니다. 교사들로서도 학생들이 시험점수 많이 내는 쪽을 더 좋아하잖아요. 학생들이 자기한테 좋은 책을 스스로 찾아서 읽도록 이끌자면, 교사들은 ‘교과서 진도 넘어가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마음이고 품이고 시간이고 돈이고 많이 들여야 합니다. 이런 데에 마음쓴다고 학교에서 돈이 나오지도 않고 사회에서 알아주지도 않겠지요. 더군다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밤 열 시나 열한 시까지 붙들어 매는 ‘거짓 자율학습’을 시켜야 하니, 몸이 지쳐서 제대로 된 배움을 나누는 데까지 마음을 기울이기 어렵구나 싶어요.

 그래서 중학교 아이들이 좋은 책을 가까이하도록 하자면 무엇보다도 입시제도가 사라져야 합니다. 틀에 박힌 교과서 굴레도 가벼워져야 하며, 아이들한테 지나친 공부 짐을 주지 말아야 해요.

 아이들이 모두 회사원이 되어야 할까요. 큰회사에 들어가 연봉 1억씩 받는 월급쟁이가 되어야 할까요. 모두 영어를 잘해서 세계시민이 되어야 하는가요. 아이들 앞날은 영업사원뿐인가요. 아이들은 인터넷 다루는 일만 해야 하는지요. 아이들이 할 일은 ‘돈 많이 버는 일’, ‘일등이나 일류가 되는 일’, ‘이름을 날리는 일’, ‘권력을 붙잡는 일’뿐인가요.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입니다. 저마다 다른 것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아이들 가운데 연예인이나 가수도 나와야겠지만 농사꾼과 노동자도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 가운데 교사도 나와야겠지만 청소부와 운전기사도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 가운데 공무원도 나와야겠지만 장사꾼이나 광부도 나와야지요. 고기잡이도,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책을 엮어내는 사람도 나와야 해요.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아이도 나와야 합니다.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나와야 합니다. 같은 노동자 가운데에도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 쇠붙이를 다루는 노동자, 종이를 다루는 노동자, 전기를 다루는 노동자, 용접을 다루는 노동자, 페인트바르기를 다루는 노동자 …… 들도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어른이라면, 이렇게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가며 일하고 어울릴 아이들임을 생각해서 아이들마다 ‘자기 됨됨이와 생각과 마음’을 알뜰하고 푸짐하고 너르게 가꾸고 추스르는 일을 학교와 집과 동네에서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좋습니다. 책은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자기 모습과 마음을 가꾸는 길잡이 가운데 하나로 곁에 둘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건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나라 중학교 아이들한테는 책도 없지만 삶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현실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동무도 없습니다. 뭐가 있습니까? 이것저것 많이 있는 것 같지요? 컴퓨터도 있고 손전화도 있고 이것저것 많이 가진 것 같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껍데기뿐이에요.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있어요. 바람만 불면 휙 날아가 버리고 마는 껍데기 말입니다.

 아이들한테는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알맹이를, 튼튼한 기둥을 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 스스로 이런 속살과 알맹이와 기둥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이끌고 살뜰하게 살아가도록 삶터만 마련해 주면 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기 삶을 마음껏 펼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책은 책대로 즐기고 다른 것은 또 다른 것대로 제대로 즐길 수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뚫린 것 없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꾸려가기 어려운 세상이고 현실인 이 나라인 터라, 아이들한테 주어진 것은 거의 없고 아이들 스스로 즐길 만한 것도 참으로 드물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책을 건네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이런 제 마음은 아이들이 ‘책만 보길’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책도 보고 다른 것도 즐기면서’ 자기 삶을 아이들 마음대로 신나고 즐겁게 찾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디 아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신나게 뛰어놀고 마음도 씩씩하게 가꿀 중학교 아이들, 열대여섯 살 이팔청춘 아이들 얼굴에 그늘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싱그러운 꽃잎이 달릴, 고운 몽우리로 피어날 꽃다운 아이들한테 어른인 우리들이 무엇을 주고 있고 무엇을 숨기거나 없애고 있는지 살피며, 또렷이, 아주 똑똑히, 빈틈없이 샅샅이 살피면서 알아차리고 다독이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아이들한테 책다운 책을 내어주고, 삶다운 삶을 꾸릴 수 있는 틈을 주면서. (4338.11.1.불./2007.9.26.물.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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