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만
 ― 대통령 후보가 쏟아내는 말을 새겨듣는 귀를



 책을 보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를 느끼지만, 참말로 여러 가지를 못 느끼기도 합니다. 백 번 듣느니 한 번 가는 편이 낫다는 금강산 구경이듯, 백 번 읽고 생각하느니 한 번 해 보느니만 못한 책읽기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지 않았어도 올바르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 머리에는 지식을 집어넣지 않았으나 몸으로는 ‘그것이 지식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즐겁게 늘 하며 살거든요.

 책이나 글을 쓰는 사람을 그이가 써낸 책과 글로만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나 보고 겪어 보고 부대끼고 일을 함께 해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든 겪든 부대끼든 일을 함께 하든 그 사람이 지닌 온갖 모습 가운데 몇 가지만 느끼거나 알 수 있지, 모든 모습을 다 알거나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남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예부터 내려오지요.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남 이야기’는 그 사람이 지닌 온갖 모습 가운데 몇 줌 안 되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걸림돌이 있지요. 우리는 글을 쓰거나 책을 낸 사람을 모두 다 만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나라밖 사람도 몹시 많지요. 이런 사람들은 어쩌지요? 그네들이 남겼다고 하는 책 한두 권, 또는 글 몇 조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임을 헤아려야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모진 고문을 받고 억눌려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픈 말을 다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가 고문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먹고살 형편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릅니다.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면서 겨우 글 한 줄 썼는지, 배불리 먹고 놀면서 대충 몇 글자 휘갈겼는지, 남한테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듯 써제겼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몸소 만나고 부대끼는 가운데 그 사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몸소 만나고 부대끼면서 그이를 더 잘 안다고 한다면, 그이를 만나 보지 않고도 잘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어야 참다운 앎이라고 봅니다. 만나 보고 나서 ‘아, 이랬구나’ 한다면, 그이를 만나지 않고 글이나 책만 보았을 때에는 ‘잘못 알거나 비뚤어지게 생각하거나 어떤 굽거나 치우친 생각으로 그이를 바라보았다’는 이야기지요. 더구나 ‘글이나 책을 보니 참 형편없는 사람이군’ 하고 생각해 버리면서, 그 사람을 몸소 만나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 사람’은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자기를 엉뚱하게 바라보고, 잘못 아는 한편, 비틀어진 이야기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한테 시달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런 잘못되고 비틀리고 엉뚱한 말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느긋하게 숨 좀 돌려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즐기려고 태어났습니다. 즐겁게 살아가며 즐거움을 손수 맛보고, 이웃하는 이들한테도 즐거움을 선사하고 나누면서 서로 오순도순 살아가려고 태어났습니다. 책 한 권 읽든 글 한 줄 읽든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리면서 자신이 참답게 살아갈 길을 헤아리면 참으로 좋겠지요. 자기가 오늘 손에 쥐고 읽는 책을 펴낸 사람 됨됨이가 이러하느냐 저러하느냐를 따지기 앞서, 그이가 온삶을 바쳐서 일구어 낸 책 하나에 어떤 알맹이가 담겼는지, 어떤 줄거리가 살아숨쉬는지 느낄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그러니 우리들은 꽤나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찬찬히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눈길을 넓히고 눈높이를 알맞게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비록 몸소 만날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 해도,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글을 곰곰히 되새기고 곱씹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 글이든, 자기가 느끼기에 얻을 만하고 배울 만한 구석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개가 속임수를 쓰는지 뒤에 덮어놓거나 가리거나 숨기는 무엇이 있는가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만나도 참모습을 모르게 되기 일쑤입니다. 수많은 책을 냈어도 자기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고요. 어떤 속셈과 이익에 따라서 글장난을 치는지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을 쓰건 책을 내건, 그이들 삶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뭇사람뿐 아니라 그이 스스로한테도 더없이 아름답고 즐거운지도 헤아려 볼 수 있으면 한결 좋습니다.

 글만 읽어서, 책만 보면서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해서 ‘제대로 알려고 애쓰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느슨하게 풀어 놓아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제대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애쓰며 살잖아요. 제대로 받아들이기 벅찰 수 있기에 늘 곁에 놓고 되씹고 곱씹잖아요. 몸소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깊이 살피며 힘껏 돌아보아야 좋습니다. 글로만 보든 몸소 얼굴 마주하며 만나게 되든, 어느 때나 한결같이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기 잣대를 세우고, 둘레에서 퍼뜨리는 질낮은 허튼소리나 헛소문에 휘둘리지 않아야 좋습니다. 귀는 열되 파리나 모기가 꾀어서는 안 되며, 입을 열되 가래나 침을 마구 뱉아서는 안 됩니다.

 새 대통령 뽑는 날을 한 달쯤 앞두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숱한 말이 쏟아지고 있고, 숱한 사건과 소식이 넘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말잔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든지, 아예 귀를 틀어막든지, 자기가 보고픈 모습만 보려고 한다면, 새 대통령이 뽑히고 나서 또 다섯 해 동안 지긋지긋하게 이맛살 찌푸리며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갖은 나쁜법이 되살아난다든지 국가보안법이 다시 또아리를 튼다든지 한미자유무역협정보다 끔찍한 일들이 터져나온다든지 하는 소용돌이에 끊임없이 휘둘릴 수 있습니다. (4338.11.12.흙/4340.11.29.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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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신문>에 싣는 글입니다. 이 글을 속으로 잘 삭이면서 받아들여 주실 분들이 꼭 한 분은 있으리라 믿으면서, 알라딘 서재에도 함께 걸쳐 놓습니다.






 
 엊저녁, 책상셈틀을 끄고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섭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서 책을 잠깐 구경하고 귤 세 알 얻어먹습니다. 이곳 인천 배다리를 가로지르는 ‘너비 50미터 길이 2.41킬로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종합건설본부장이 아침에 찾아와서는, ‘내년 초에 공사를 재개할 것입니다’ 하고 말하기에, 헌책방 아주머니께서 ‘여기는 인천이라고요,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곳이 아니라고요!’ 하고 외쳤답니다. 인천시 공무원과 개발업체 사람들은, 골목집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곳을 책상머리에 앉아 길그림으로만 보면서, ‘시 재정에 도움이 안 되는 곳이라 시 재정에 도움이 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올려세워야 한다’는 자기들 생각을 대놓고 지역신문에 말하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나옵니다. 예닐곱 해 앞서까지만 해도 극장이 있던 터 옆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주의자들이 인천 항구를 거쳐 서울로 가던, 그리고 조선땅에서 빼앗은 물건을 일본으로 실어나를 때 지나다니던 쇠뿔고개길(우각로)을 걷습니다. 조금씩 살이 빠지는 보름달을 올려다봅니다. 차 다니는 길로 잠깐 나왔다가 손수레도 들어설 수 없는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창영동 골목길을 빠져나온 다음, 숭의동 달동네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이달 첫머리, 숭의동 골목집 할배 할매가 감을 따던 나무 앞에 섭니다. 까치밥 네 알 남았습니다. 뚱뚱한 사람은 지나가기 힘들 비좁은 골목을 사뿐사뿐 빠져나가고, 꽤나 비알이 져서 고양이도 굴러떨어질지 모를 길을 지나갑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 굴다리 밑으로 나오니 야구장 앞. 예순 해 가까이 된 이 ‘숭의 야구장’을 2008년 1월에 허문다는 인천시장 지시사항을 들어 보면, 야구장을 허물고 축구전용구장을 짓는다는데, 여기에 쓰인다는 돈은 10조에 가깝습니다. 야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야구장 건너편에 있는 체육사로 찾아갑니다. 국민학교 적 동무가 장사를 하는 집. 어제 징허게 술을 퍼붓느라 오늘 아침 이불에서 벗어나기 싫었다는 녀석은 하루 내 갤갤대다가 이제 일 마치고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연말이면 죽어야 돼. 업체 사람들하고 주말마다 술 마셔야 하니까. 화요일까지 죽어 있다가 목요일에나 정신을 차려. 그나저나 너, 두꺼운 책 낸 거 있다며? 나중에 그것 좀 갖다 줘 봐라, 보게. 아니다, 내가 너네 집에 갈게.”

 찬바람 부는 골목으로 다시 나와서 걷습니다. 야구장 둘레에 있는 닭집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열네 살》이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옆지기는 《동 키호테의 탈출》이라는 프랑스 그림쟁이 데생책을 보면서 콜라를 마십니다. 여러모로 칭찬과 추천을 받는 책들이지만, 책방 나들이를 해서 두 손으로 집어들어 펼쳐 넘기며 우리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를 헤아리기 앞서까지는 참말로 읽을 만한지 그냥 지나쳐도 좋을 만한지 알 수 없던 책들을 안주 삼아서 술 한잔을 마십니다. (4340.11.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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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한 비평 - 이현식 문학평론집
이현식 지음 / 작가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곤혹한 비평
- 글쓴이 : 이현식
- 펴낸곳 : 작가들(2007.6.25.)
- 책값 : 13000원



 이 책 하나 28 ― ‘어려움’을 뚫고 나온 문학평론 하나
 : 이현식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

 

 〈1〉 한일축구, 여수박람회, 겨울올림픽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벌인다고 할 때면, 열 가지 일을 제쳐놓고 축구 경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반칙을 해도 좋으니 이겨야 한다’. 이때 저도 한 마디 대꾸합니다. “한국이 져도 좋으니, 반칙을 안 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습니다.”

 지저분하게 경기를 한다든지, 성의 없이 땀 안 흘리는 경기를 한다든지, 일찌감치 두 손을 들고 온힘을 다하지 않을 때면,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솜씨와 재주가 몹시 뛰어나다고 해도, 맞은편 선수를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놀린다면, 이런 선수들은 조금도 달갑지 않습니다.

 지더라도 웃어야 하고, 지더라도 땀흘려야 하며, 지더라도 다시 애써서 다음 번에 이기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이겨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경기를 치르는 줄거리가 중요하지, 지고 이기고 하는 열매는 다음 차례입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즐거운 일이 운동경기요,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흘린 땀방울을 소중히 여기는 운동경기라고 느낍니다.


.. 4ㆍ19세대의 세대로서의 정체성은 온통 한글, 다시 말해 문화사적 의미에 가려 정치적 의미는 달아나 버린다. 1980년의 항쟁과 탄압 역시 김현에게 오면 ‘폭력’이라는 불투명한 단어로 바뀌어 버린다. 그가 1980년대에 했던 작업들, 예컨대 지라르에 대한 연구나 기타 그의 비평적 행위들에서 그가 폭력의 의미를 파고들었다는 점이 갖는 의의는 물론 높이 살 일이지만, 폭력이란 말은 또 얼마나 추상적인가? 그 언어로는 1980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건 ‘폭력’이라는 보통 명사로 지칭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현은 이 대목에 오게 되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그 특유의 열린 반성적 사유로 파악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성으로 완강하게 움츠러들어 왜곡시켜버린다 ..  〈29쪽〉


 “관람객 795만 명이 찾아 10조 원의 생산유발과 5조원의 부가가치, 15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인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파급효과가 큰 것이다.(오마이뉴스 2007.11.27.)”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올해 4월,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며 들어야 했던 소식인 ‘아시아경기대회 인천 유치’에 못지않은 씁쓸함 때문입니다.

 10조 원을 벌어서 5조 원이 남는다고 하면, 이 5조 원으로 무슨 일을 하나요. 15만 사람한테 일자리가 주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이 얻는 일자리는 무엇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일자리이며, 이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어디에서 어떻게 쓸 테며, 이 돈은 우리 자신한테, 우리 삶터에 어떻게 보탬이 되나요.

 795만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만한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더 많은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이들이 묵을 잠자리는 어떻게 풀지요? 새 호텔을 잔뜩 지으면 될까요? 새 아파트를 허벌나게 올려쌓으면 될까요? 이들이 타고다닐 교통편은 어떡하지요? 이들이 먹을 밥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하나요.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이들한테 팔아치울 먹을거리는 죄다 나라밖에서 사들여서 시세차익 남기기로 돈벌이를 해야 하는지요?


.. 김현은 이 글에서, 적어도 저항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 특유의 맥락적 사유, 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억압당해 온 사람들의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비판하되, 그는 그것의 맥락을 열린 자세로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드러난 폭력에만 집착한다. 그 이유는 그것 역시 억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억압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전에 그것이 폭력으로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저항에 대한 왜곡이 될 수 있다. 대항 이념과 저항이 왜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획득하려 하기보다 폭력으로 나아갔는지, 그리고 또 그것이 왜 또 다른 억압이 될 수도 있는지를 ‘사회ㆍ역사’적 맥락에서 사유하는 쪽으로 진전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억압과 폭력의 본질이 더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훨씬 더 ‘김현’다운 모습이다 ..  〈31쪽〉


 평창 겨울올림픽 끌어들이기가 여러 차례 실패했을 때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우리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은 어디인지, 우리가 몸을 움직일 일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돈이며 시간이며 땀방울을 쏟을 데는 어디인지를 넌지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900만 원을 신나게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을 벌어서 알뜰살뜰 40만 원을 쓰고 나머지 60만 원은 내 이웃이나 내 삶터 가꾸기에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벌어서 이웃돕기는 하나도 못하지만 제 앞가림하는 데에 허리띠 졸라매며 쓴다고 할 때, 어느 때가 우리한테 기쁨과 눈물과 웃음과 아름다움을 베푸는 일이 될는지요.

 저는 한 끼니에 밥 백 그릇을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지만, 하루 두 끼니여도 좋고, 하루 한 끼니여도 괜찮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만 원짜리나 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300원이나 500원만 들어도 좋습니다. 한 잔 술값이 십만 원이나 백만 원짜리가 아닌 천 원짜리나 이천 원짜리라 해도 좋고, 동무들한테 얻어마셔도 좋습니다.


 〈2〉 우리가 살 집


 지난 토요일, 참여연대 박원순 님이 우리 일터인 도서관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인천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신 김에, 〈스페이스 빔〉이라는 전시관을 찾아오셨다가,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손수 마련한 ‘시 다락방’ 구경을 하러 가는 길에 저와 만나서 들어오셨습니다. 죽 둘러보시며 도서관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물으시다가, “책도 파나요?” 하고도 물으시기에, “여기는 도서관인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무렵 최일수나 정태용의 민족 인식은 커다란 반향을 얻지 못했다. 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학계나 지성계, 넓게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들의 주장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한 변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40쪽〉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자리한 〈스페이스 빔〉 전시관에서  금, 토, 일, 사흘에 걸쳐서 연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뚫어서 ‘남북축 고속화도로’로 만들고, 길 둘레 살림집을 싹 쓸어내어 아파트며 쇼핑상가로 재개발하려는 안상수 인천시장 정책이 어떻게 얼마나 말썽거리인지, 우리 삶을 갉아먹는지를 살며시 들려주는 연극마당이었습니다. 이 연극마당 구경이며 일손 거들기를 마치고 신포시장에 있는 닭집으로 가서 술을 한잔 걸치며 고단함을 풉니다. 밤 열두 시 나절, 닭집 문 닫을 때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닭집 아저씨가 같이 한잔하자고 하셔서, 우리 무리도 닭집 아저씨하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불 다 꺼지고 조용한 신포시장을 나와 뒤쪽 상가거리를 걷습니다. 1990년대 첫머리, 이곳 신포시장 둘레를 서울 명동거리처럼 꾸미겠다는 시 정책이 있어서, 크고작은 새 건물을 무던히도 짓고 옷집이며 밥집이며 술집이며 잔뜩 들어섰으나, 거의 모든 가게가 파리를 날리다가 쫄딱 무너졌습니다. 이즈음, 인천 연수동과 청학동 들에 수십만 채에 이르는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이 둘레에 있던 학교도 터를 팔아 그리로 옮기는 바람에, 이 거리를 찾아올 사람이 확 줄었거든요(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 지역문학은 자기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활 현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70∼80년대 리얼리즘 문학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은 생활을 구체적인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상의 차원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80년대 문학이 갖고 있는 한계로부터 탈출한다. 아울러 방향 없는 일상성과도 거리를 둔다는 면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던 문학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 인천이 갖고 있는 정서와 부산의 정서는 다르다. 자연환경도 다를 뿐더러 지역의 역사도 다르다. 자연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다를 수 있다. 그런 정서와 풍토들, 거기에는 그 지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건강성, 그것의 문제성이 주목하자는 것이다. 80년대의 열정은 지역 안에서 구체화된 현실과 만날 수 있고, 90년대 애매한 일상의 모습이 지역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59쪽〉


 ‘건설 경기’를 북돋우면 일자리도 늘고 경제지표도 올라간다며, 온갖 건설계획이며 재개발계획이 쏟아집니다만, 이런 ‘조금 묵은 집 헐고 새 시멘트집 짓기’가 언제까지나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재개발한다며 옛집 헐고 아파트 올리는 일은 참말로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길어도 서른 해를 버티지 않게 짓는 아파트 문화는,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어 줄까요. 한 집에서 대여섯 해 살기도 힘들게 하면서 자꾸자꾸 이삿짐을 꾸리게 하는 우리 사회 우리 땅에서는, 참말로 누가 집임자요 땅임자일까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다섯 평짜리 작은 골목집보다, 빈 방이 남아도는 쉰 평짜리 아파트가 더 살기 낫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이미지)’은 누가 심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왜 우리들이 끄달려야 하고, 우리 사회는 왜 이런 쪽으로 흘러야 하나요.


.. 나는 두 가지 현실이 지역 차원에서 보다 첨예하게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즉 중앙의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문단구조가 더욱 극명한 형태로 뿌리깊게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들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중앙문단 중심의 보수적 문인 조직은 오랜 기간 동안 조직 차원의 개혁 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는 거의 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형해화되어 버린 제도이며 조직이고 형식화된 권력일 뿐이다 … 적어도 내가 보는 한에서는 문학에 대한 열의나 능력보다는 예산과 이권의 다툼장으로 변해버린 것이 지방의 보수적 문인 조직이다. 여기에 값싼 문인 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세력을 만들고 파벌이 형성되면서 지방문단 조직은 권력기관이 된다 ..  〈65쪽〉


 술집에서 나와 걷습니다. 시간은 벌써 두 시, 세 시……. 몸은 고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술은 들어갔으나 얼근하지 않고, 터덜터덜 골목골목 사잇길로 천천히 뚜벅뚜벅 걷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웃하면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집안 사람들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집들, 창문 안쪽 살림살이가 훤히 보이는 집들. 스무 해 앞서도, 마흔 해 앞서도, 한국전쟁 때 미군 함포사격을 맞는 바람에 새로 올린 집도 많지만 그때에도 살아남아서 고이 이어오고 있는 골목집들. ‘독립운동을 했건 일제부역을 했건’ 아랑곳하지 않고, ‘사상분자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해서, 일부러 온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함포사격을 오래도록 한 뒤 ‘인천상륙작전’을 하느라 애꿎은 백성들, 서민들, 밑바닥 사람들, 보통사람들 목숨이 하늘하늘 사라져 가야만 했다던 그 동네 골목길을 걷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깃들이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3〉 날씨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나 보니, 방 온도는 6도. 너무 쌀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살짝 보일러를 돌립니다. 보일러 돌리는 김에 머리를 감고 빨래 넉 점을 합니다. 천으로 된 시장가방은 마당 담벼락에 널어 놓고, 긴양말 두 점은 모기장 위에 얹고, 바지 한 벌은 큰방 문고리에 겁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학상 제도는 어떤 형태로건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 권위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힘들다 … 우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해서 그것을 곧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는 레테르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 인지도 높은 굵직한 문학상들의 제정과 운영에 애초의 순수한 취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신경숙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래서가 아니다. 조금 지명도 있고 팔릴 것 같은 작가를, 출판사마다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이름으로 서로 앞다퉈가며 끌고가려는 현실이 눈에 빤히 보여 그런 것이다 ..  〈80∼82쪽〉


 마당에 나와 둘레를 둘러봅니다. 앞집 감나무는 두 알 남고 모두 털렸습니다. 감나무 임자는 몇 알 남겨 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앞집 옥상마당에 고인 물이 살짝 얼어 있습니다. 그 옆집 옥상마당 빨랫줄에는 담요 한 장 널리고, 하늘빛은 파랗습니다. 구름 한 점 안 보입니다. 어제 그제 살짝 비가 듣더니 12월을 코앞에 둔 11월 막바지 하늘인데도 참 맑네요. 그리 쌀쌀하지 않으면서.


.. 추상적으로 규정된 개념어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있어서 일단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현대성’은 과연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전에 거기에 욕망이 결탁되고, 또 그것을 비판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개념적인 용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다가 문장을 충분히 풀어쓰지 않아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아니다 … 나름대로 문학에 대해 공부도 하고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는 내가 잘 이해하거나 납득되기 힘든 글이라면,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이 대부분일 일반적인 독자들도 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98쪽〉


 겨울이 겨울 같지 않은 미친날씨가 끝나고 추위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겨울 찬비나 겨울눈도 아닌 봄비로 느껴지는 따순 비가 내렸습니다. 겨울비 내린 뒤면 더 추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따뜻해지면서 아침에는 안개도 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날씨입니다. 덕분에 보일러는 덜 돌려도 좋아 기름 걱정은 덜할 수 있겠네요. 이만한 날씨에도 보일러를 팡팡 돌린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 자가용을 끌고 일터를 오간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추우면 옷을 한 벌 더 입고, 일터에 가는 시간이 늦을 듯하면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안 먹으면 되듯이, 꽃그릇 흙이 마르는가 싶으면 물을 주고 촉촉하면 안 주어야 하듯이, 우리 삶도 있는 그대로 있는 만큼 느끼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될 텐데.


.. 이문열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소설의 재미를 한껏 북돋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지식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현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아니면 현실의 특정 부분만 확대하여 과장한다. 그의 소설들에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방향이 잡혀 있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 삶이 흘러가는 과정은 그리 문제시되지 않는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의 힘겨움, 삶이 진행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이 세밀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다 ..  〈289∼299쪽〉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섭니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옵니다. 이부자리 있는 데로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 온도도 조금씩 올라가겠지요. 문득, 이 햇살을 그대로 보내기 아깝습니다. 이불 둘 걷어서 앞마당으로 나갑니다. 한손으로 뭉그러 잡고 한손으로 탁탁 텁니다. 잔먼지가 하늘에 폴폴 날립니다. 벽돌 둘을 대며 담벼락에 넙니다.

 이불을 넌 자리 옆으로 까마중 한 줄기 말라 있습니다. 봄에 줄기를 올려 여름내 까만 열매를 맺은 그 까마중. 우리 집에 놀러온 분들 가운데 도시내기는 손도 대지 않은 까마중이지만, 시골내기는 “엉? 까마중이 여기서 자라네?” 하면서 덥석 따서 먹었던 까마중. 다음해에도 고 자그맣고 까만 열매를 맺어 줄까요.


.. 작품의 배경이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쓰여지는 작품에서 이런 식의 언어가 과연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전후 맥락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문열 소설에는 이런 식의 구투 어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가 지닌 한문 교양을 드러내는 데는 흠잡을 데 없겠지만, 그건 권력의 언어고 억압의 언어다 ..  〈300쪽〉


 〈4〉 문학평론 한 권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을 읽습니다. 글을 쓴 이현식 님은 문학평론 등단을 한 지 열 해 만에 묶었다는 평론책 머리말에서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책을 사는 행위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닌 것이 요즈음의 세태”인데, 이런 문학평론 하나 내어놓는 일이 얼마나 쓸모있겠느냐며 걱정을 합니다.


.. 한국의 시민들은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공감한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제기하였다 … 《난장이》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문체의 도시적 언어이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말이다. 생활 속의 살아 있는 민중의 언어가 아닌, 일반화된 언어이다. 사투리도 거의 없고 비어나 속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하고 균형잡힌, 깔끔하게 다듬어진 언어가 《난장이》를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다. 그런 언어를 통해 시민들은 《난장이》에 친숙하게 접근한다 …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라는 육체적 조건을 제외한다면 난장이들은 시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다만 경제적으로 조금 더 궁핍할 뿐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  〈315∼317쪽〉


 “야, 우리 책 보러 가자!” 하는 사람은 없고, “야! 우리 영화 보러 가자!”나, “야, 우리 놀러 가자!”나 “야!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하고 외치는 사람만 가득한 우리 흐름입니다. 동네 꼬마들은 고무줄놀이며 제기차기는 할 줄을 모르고, 동네 어른들은 당신 눈길을 트고 마음문을 열어 줄 일거리나 놀이감과는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 흐름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길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곤혹한 비평》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갖 힘겨움을 제 몸뚱이로 껴안으면서. (4340.11.27.불.ㅎㄲㅅㄱ)


.. 문제는 서울과 지방이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체제이며, 그것을 해체하여 자유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질서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  〈67쪽〉

 

[글쓴이 이현식 님은] 1966년 외가인 여주에서 태어나 친가인 인천에서 자랍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마치고, 1997년 〈문학과사회〉 평론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재)인천발전연구원 문화정책 연구위원을 거쳐 인천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인하대학교에 강의를 나갑니다. 《문화도시로 가는 길》,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 들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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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 세 시 무렵,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셋이 쪼르르 놀러오곤 합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찾아옵니다. 한 번 놀러오면 저녁 여섯 시까지 보드게임을 하거나 저희끼리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밖에 나가 돈벌이를 하고, 집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만 계시다고 합니다. 보름쯤 앞서, 옆지기가 이 아이들한테 “너희들 고무줄놀이 아니?”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몰라요.” 하다가는, “(만화) 《검정고무신》에서 봤어요.” 하면서 옛날 옛적 놀이로 여깁니다. 그러다가는 “전통놀이 아니에요?” 하고 말합니다. 옆지기가 아이 둘을 세워 놓고 다리에 고무줄을 걸고는, 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옆지기는 스물여덟. 어릴 적에 고무줄놀이를 퍽 즐겼다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요즘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고무줄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노는 모습조차 거의 못 봅니다. 너덧 해 앞서도, 예닐곱 해 앞서도 고무줄놀이 하는 아이들을 못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인터넷게임을 하느라 그런다는 소리도 있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인터넷게임조차 할 겨를이 없다고, 학원에 가랴, 책 읽고 느낌글 쓰랴, 글짓기 숙제 하랴, 한문 숙제와 영어 숙제 하랴, 체험학습 다니랴, 몸뚱이가 열 몇 개라도 힘들 만큼 바쁘게 돌아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서울 나들이를 하며 홍제동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손바닥 만한 운동장에 아이들이 공차기를 하거나 줄넘기를 할 뿐, 다른 놀이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습니다. 그 흔한 비사치기도, 제기차기도, 구슬치기도, 땅뺏기놀이도, 말뚝박기도, 얼음땡도, 술래잡기도, 오징어도, 오재미도, 자치기도, …… 아이들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어느 때부터인가 갑작스럽게 언니 오빠 누나 형한테 물려받는 ‘동네 골목길 놀이’ 또는 ‘마을 고샅길 놀이’가 자취를 감추었으니까요. 놀이가 자취를 감춘 골목길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 있는 덩치 큰 자가용이 가득합니다. 서 있는 차가 없을라치면 배달오토바이가 씽씽 내달리고 크고작은 자가용이 쉴 틈 없이 오갑니다. 학원버스는 아이들을 집과 학원과 학교 사이를 이어줍니다. 아이들은 땅을 두 발로 디딜 겨를이 없습니다. 저나 또래 동무들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한글을 보았고, 숫자를 셌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파벳을 보았고, 띄엄띄엄 읽었습니다. 그래도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영어 동화책을 읽었고 고등학생 때에는 영어 소설을 읽었습니다.

 웬만하게만 만들어 내놓으면, 어린이책은 손해를 보지 않고 잘 팔립니다. 나라밖 명작동화만 잔뜩 옮겨내던 흐름이, 이제는 생활동화며 우리 문화와 철학과 사회와 역사도 다루는 테두리며 넓어집니다. 이 나라 아이들 마음과 삶을 헤아린다는 ‘참 좋아 보이는’ 어린이책은 앞으로도 꾸준히 나오겠지요. 아니, 많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이 어린이책을 볼 아이들한테는 자기 삶이 없는데, 자기 두 발로 디딜 땅이 없는데. 더욱이, 어린이에서 젊은이로 넘어가는 때에 읽을 책도 없는데. (4340.11.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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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일어나서 도서관 셈틀을 켭니다. 오늘 일거리를 생각하며 차가워진 손을 비빕니다. 먼저 잡지에 넣을 사진을 출판사로 보냅니다. 인터넷신문에 기사 둘을 띄웁니다. 어제 산 책을 추스릅니다. 몸이 떨려서 청잠바를 걸칩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손이 많이 시려워서 엉덩이 밑에 집어넣고 녹여 봅니다. 한 시간 남짓 그러고 앉아 있으나 손이 잘 녹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인터넷줄 긴 것이 위층 살림집까지 닿을까 헤아려 봅니다. 천천히 풀면서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방까지 죽 이어 놓고도 제법 남습니다. 문 닫을 때 줄이 걸리지 않도록 문 위쪽을 칼로 살짝 도려내 줍니다. 그러고 나서 책과 노트북을 들고 살림집으로 올라옵니다. (4340.11.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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