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ㅎ출판사에 원고뭉치를 보냈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책 한 권 내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ㅎ출판사 분들은 이 일에 치이고 저 일에 바빠서 제 원고뭉치를 책으로 묶어낼 낌새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원고를 보내고 반 해가 지나도록 제 원고를 살펴볼 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먹고살 돈이 바닥을 칩니다. 이 원고뭉치로 책 하나 묶어내면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애가 타고 혀가 타고 입술이 타고 온몸이 바싹바싹 마릅니다.

 그러다가 지난달, 예전 원고뭉치는 없애기로 하고 새 원고꾸러미를 마련하기로 이야기합니다. ㅎ출판사 분들은 제 원고를 읽어 보지 않으셨으니 그 글 그대로 책 하나 묶어도 좋은지 모자란지 모르실 테지요. 반 해가 지나고 한 해가 되어 가는 동안 제 스스로 느낍니다. 예전에 쓴 제 글이 참 엉성하다고, 어줍잖다고, 어설프다고. ㅎ출판사에서 제 원고뭉치를 곧바로 책으로 묶어 주었다면, 저는 적잖은 글삯에다가 책 하나 세상에 더 내놓았다는 훈장을 가슴에 달 수 있었겠지요. 어쩌면 어렵지 않게 살림이 펴지면서 제 글을 좀더 단단하게 여미거나 튼튼하게 추스르는 쪽으로는 마음을 덜 기울여 버렸겠지요.

 프랑스 만화가 ‘기 들릴’이라는 분이 일 때문에 평양 나들이를 하게 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만화로 담아낸 《평양》(문학세계사,2004)을 보고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 큼직하게 걸린 포스터 하나를 17쪽에 옮겨 그렸는데, 포스터 아래쪽에 적힌 ‘한글’을 한국사람이 못 알아볼 만큼 옮겼습니다. 프랑스사람한테 한글은 낯설고 어렵고 꼬불탕꾸불탕거리는 지렁이 움직임이었을까요.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박병태란 분 글조각을 모아 엮은 《벗이여, 흙바람 부는 이곳에》(청사,1982)를 읽다가 “만약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발전을 막고, 인간으로서의 가치의 발현을 제거해 버렸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 자를 벌해야 할까.(82쪽)” 하는 물음에 잠깐 책을 덮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은 법에 따라 죄를 물린다지만,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그지없는 꿈을 짓밟은 사람은 어떤 법으로 죄를 물릴 수 있을까요.

 서울 대방동에 있는 헌책방에서 《서울의 양심》(시인사,1988)이라는 시모음 하나 만납니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어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제자리에 놓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 책꽂이에서 《서울의 양심》을 찾아내어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습니다. 세상은 정희수 시인을 절름발이라고 가리키지만, 정희수 시인을 가리켜 절름발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눈매가 바로 ‘절름발이’ 아니겠느냐고, “자네가 만든 그 팻션 중에 / 장애자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증인신문 4―앙드레 김에게)”라는 말처럼 비장애인들이야말로 절뚝절뚝 걷고 있지 않느냐고 되뇌입니다. 〈시민사회신문〉 18호 1쪽에 실린 광고를 봅니다. “20년 간 안심할 수 있는 신개념 주택”이 “사기 위한 집이 아닌 살기 위한 집”이랍니다(SH공사가 지은 아파트). (4340.9.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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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 대한민국 1호 여군 헬기 조종사 피우진 중령이 걸어온 30년 군 생활의 기록
피우진 지음 / 삼인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 글 : 피우진
- 펴낸곳 : 삼인(2006.11.21.)
- 책값 : 9000원



 이 책 하나 19 ― 사람이 땅개 되어 뒹구는 군대
 :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를 읽고



 인천으로 살림뿌리를 내리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다기보다 만나기 어렵다고 느꼈던 고향 동무를 다시 만납니다. 예전에는 어깨동무였다면 이제는 옆동네에 사는 사람, 이웃입니다. 인천공설운동장 건너편에 자리한 체육사에서 일하는 고향동무는 제가 펴내는 1인 잡지를 읽고 한 마디 합니다. “야, 조정래 씨 소설이 금서야? 나는 군대에 있을 때 《태백산맥》하고 《아리랑》 읽었는데. 보안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장 찍어 달라고 하니까, 아무것도 안 보고 그냥 찍어 주더라. (내무반 검사할 때) 도장 찍혀 있으니까 아무 문제 없고.”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잦아들었지만, 한동안 헌책방 일꾼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못살게 굴고 구속까지 시키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지난달입니다. 그리고 그때 ‘불온도서’로 찍힌 책들 목록에는 ‘조정래 씨 소설’이 빠짐없이 올라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내용 안 봐. 도장 찍혔는가 안 찍혔는가만 봐.” 고향동무 말마따나 보안검열을 하는 사람은 ‘불온도서가 왜 불온도서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불온도서 목록에 올라와 있으니까 불온도서’일 뿐입니다. 세월이 달라졌다면, 사회가 거듭난다면 ‘불온도서라는 목록이 있어야 한다고 해도 이 목록에 실릴 책은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불온도서라는 책이 있을 수도 없지만, 억지로라도 불온도서가 있다고 한다면.


.. 전역 심사를 하기 위해 상이 등급 판단을 위한 전공유무심사도 다시 했는데, 나의 상이 등급은 최하위인 7급으로 나왔다. 근무 여부를 결정짓는 장애 등급은 상위의 2급으로 판정되어 전역 대상이 되었는데, 막상 연금 액수가 걸린 상이 등급은 최하위인 7급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전공상심사를 주관한 의무부서에 항의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지금 활동하는 데에 아무 이상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상이 없다면 장애 등급은 왜 2급이란 말인가. 전역은 시키되 연금은 많이 줄 수 없다는 말인가? ..  〈244쪽〉


 지지난달, 헌책방 일꾼을 국가보안법 잣대로 들볶고 괴롭히던 때, 군대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습니다. 2007년 여름, 헌책방 일꾼은 ‘조정래 씨 소설을 팔았다는 까닭’으로 구속이 될 뻔했지만, 1997년 봄,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부대에 있던 스물세 살 젊은이는 ‘조정래 씨 소설을 불사르지 않았다는 까닭’으로 한 줌 재가 될 뻔했습니다.

 ○   ○

 1997년 봄, 강원도 양구군 동면, 대우산 선점중대에서 내무반검사를 하던 중대장은 1소대부터 화기소대까지 사병 캐비넷을 샅샅이 뒤지면서 ‘불온도서 색출’을 합니다. 이때 불온도서로 찍힌 책 들은, 《태백산맥》, 《아리랑》, ‘한겨레신문사에서 찍은 책’ 들과 몇 가지 섹스소설. 얼추 쉰 권 남짓 걸려든 불온도서를 불사르는 몫은 저한테 떨어집니다. 낑낑대며 책을 들고 소각장으로 갑니다. 몇 가지 책을 찢어서 태우다가 《태백산맥》과 《아리랑》까지 태우는 일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태백산맥》까지만 태우고 《아리랑》은 소각장 한쪽 구석에 잿더미를 쌓아서 안에다 숨겨 놓습니다.

 하지만 중대장은 남김없이 찢어서 태웠는가를 알아보려고 몰래 소각장에 왔고, 불쏘시개로 하나하나 뒤적이다가 한쪽 구석에 안 태우고 숨겨 놓았던 《아리랑》을 보고 맙니다. “너 이 새끼, 간첩이지!” “…….” “너 같은 새끼들 죽이는 거는 아무것도 아냐! 그냥 총질해서 죽인 다음에 철책 안쪽에 집어던져 놓고 월북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


..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취급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선택한 길이기에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버티고들 있습니다 …… 그나마 저마저 항공병과를 떠나면 우리 후배들은 어찌 될는지요. 규정을 운운하며 여군들에게만 철저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그들은 과연 규정을 얼마나 지키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들 있는지 ..  〈234쪽〉


 1997년 12월 31일, 함박눈이 쉬지 않고 쏟아지던 도솔산을 내려왔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내려갈 수 없으니 하룻밤 더 자고 가라는 대대장 말에, “걸어서라도 가겠습니다!” 하고 외치면서. 눈밭에서 뒹굴다가 골짜기에서 떨어지더라도 군막사에서는 1분도 더 있기 싫었던 전역동기들. 그예 대대장은 억지로 작은 군짐차 하나 바퀴에 쇠사슬 감아서 내려보내도록 했고, 걸어서 한 시간 길이던 곳을 덜덜덜 천천히 달리는 짐차가 두 시간이 걸려서야 비로소 산밑마을, 팔랑리에 닿습니다. 속속옷과 깔깔이는 후임병한테 빼앗겼고 장갑까지 빼앗긴 동기들도 있어서 두 시간 동안 벌벌 떨어야 했지만, 부처님오신날까지 녹지 않는 도솔산과 대우산 눈을 올려다보면서 ‘이제 눈은 참말 싫어’ ‘이 차에서 얼어죽더라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테야’ 하고 이야기하던 우리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서울에 닿아 전철을 타고 한강다리를 지나며 인천 부모님 집으로 갈 때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갈 무렵. 붉게 노을지는 햇살이 전철에 깃들었고, 저녁햇살은 머리 희끗한 아저씨 얼굴로도, 꾸벅꾸벅 졸다가 떨어뜨린 생활정보지로도 비추었습니다. 저 아저씨가 이런 시간에 왜 전철에서 생활정보지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줄은 한 주쯤 지난 뒤 알았습니다. 아이엠에프.


.. 나는 그 여군 장교를 고소하고 문제를 공론화시키라고 여군 하사관에게 충고했지만 본인이 주저하였다. 실상 그런 일은 아주 흔하다곤 할 수 없지만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여군들은 대개 혼자 눈물을 흘리며 잊어버린다. 군 생활을 거기에서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부사관이나 하급 장교들이 여군 고위직 간부와 정면 대립하기는 힘든 것이다. 자기 부하를 남군의 노리개로 전락시키는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사람은 대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녀 또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이해해야 하는 걸까? ..  〈201쪽〉


 아이엠에프는 전역하고서 한 주가 지나서 알았으나, 열 해가 지나도록 몰랐던 일이 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군대에서 ‘멀쩡히 있던 짐차 엔진이 한낮에 과열로 터져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와 ‘대인지뢰를 밟고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대인지뢰를 밟고 둘이 죽었다고 하던 그날 밤, 저도 밤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지뢰 터지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지오피 옆옆 소초에서 있던 일이었는데.


.. 언론은 그런 행사에 참석한 여군 장성, 전투기 조종사, 수석 졸업자 등등 성공한 여군들에게만 카메라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50년 넘는 세월 동안 남성 중심의 군 문화 속에서 여성의 자리를 찾기 위해 피땀 흘려온 사람들은 이름 없는 대다수의 여군들과 사회 각지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도와준 분들이다 ..  〈6쪽〉


 그제 밤마실을 하다가 옆지기한테 군대 적 이야기 하나 들려줍니다. 마침 빵집 옆을 지나가고 있었기에 그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첫 휴가를 나와서 친구들한테 크림 잔뜩 있는 케익을 하나 사 달라고 했어요. 생일도 아닌데 무슨 케익이냐는 친구들한테, 그냥 크림케익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군대에 가서 첫 훈련으로 혹한기훈련을 뛰었는데,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만큼 배고프지, 행군은 끝나지 않지, 그때 중대장이 뭔 일로 앵돌아져서 열여덟 시간 동안 못 쉬게 하고 산악행군을 했는데, 이등병이라고 처지면 미움받고 까이는 거 뻔하고, 밥도 안 멕이고 무거운 군장 멘 채 걷기만 하자니 죽을 맛이었어요. 그런데 내 앞에 가는 고참이 숲길에서 눈을 떠서 먹더라고요. 옳거니 나도 눈이라도 먹자 싶어서 자꾸자꾸 눈을 퍼먹었어요. 속으로 생각했지요. 난 진짜 케익 싫어하는데, 이 눈을 케익으로 생각하며 먹자. 그러니까 뒤에서 걷던 고참이 불쑥 한 마디 했어요. ‘야, 너무 많이 먹지 마. 탈난다.’”


.. 우리 사회에는 나이 어린 사람이 정면으로 지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있다. 원칙과 예의를 들먹이며 항의하는 나를 대견하게 보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마땅하게 보는 경우가 늘 더 많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학교 선생에게 100대까지 맞아 보기도 했다 ..  〈35쪽〉


 첫 휴가 받고 세상바람을 쐬게 되던 날(1996년 2월) 고향동무들이 고기를 사 주었습니다. 불쌍한 군인은 고기도 못 먹을 테니 고기 잔뜩 먹으라고. 저는 한손으로는 크림케익을 먹고 한손으로는 고기를 먹었습니다. 혼자서 케익 한 통 다 먹었습니다. 맛은 없더라구요.


.. 군대라서 남녀 차별이 없을 거라는 건 나 혼자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제도적으로 이미 여군은 남군을 보조하는 것으로만 정해져 있었다 ..  〈46쪽〉


 군대에서 벗어난 지 열 해가 지났습니다. 몸은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마음이나 몸이나 군대에서 못 벗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군대에서 못 벗어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몸짓이나 말투나 생각이나 마음까지도.

 군대에서 벗어나서 대여섯 해가 지난 때였나, 어릴 적부터 저를 알던 고향동무들이 ‘너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하냐?’고들 물었습니다. ‘왜?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했습니다만, 군대에 있을 적 아침부터 밤까지 욕이란 욕은 죄 주워섬기면서 모든 말마다 욕을 달았던 버릇이 씻기지 않았어요. 잠자리에 들 때만은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았지만,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눈알을 부라리며 미친년 개잡놈 씨부랄새끼 들을 주워섬기며 살던 말짓과 몸짓을 도무지 털어내지 못했어요. 저만 못 느끼고, 제 둘레사람들은 다 느끼고 있었어요. 이제는 그나마 욕설은 조금만 내뱉도록 추슬렀지만, 마주한 사람을 칼로 후비는 듯한 말투나 말씨까지는 추스르지 못했습니다.


.. 군기를 잡는 것과 기를 죽이는 것은 다르다 ..  〈61쪽〉


 살아남자고, 죽을 수 없다고, 나를 골로 보낸 뒤 군대 의문사로 지워버리겠다는 그 중대장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고, 주먹질이면 주먹질 욕질이면 욕질 삽질이면 삽질, 그 온갖 이야기가 그저 숨죽인 채 대물림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아직도 살아남아야 하나요. 아직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나요.

 머리에 별이란 것을 단 녀석이 부대방문을 한다는 계획이 연중행사 가운데 하나로 잡혀 있으면 ‘도로보수’라는 이름으로 한 달 동안 산골짜기 부대 흙길을 도톰하게 메우는 일을 합니다. 별 단 개새끼가 탄 찌프가 잔돌에라도 튕겨서 움찔하면 대대장한테 불호령이 떨어진다나, 중대장이 진급을 못한다나……. 연대에서도 설설 기면서 덤프를 지원해 주며 어디선가 모래를 퍼 옵니다. 덤프가 지나가면서 모래를 술술 뿌립니다. 그러면 주특기 100 우리들 땅개는 삽 한 자루씩 들고 조르르 서서 고 흙길이 올록볼록 하나 없이 반반하게 되도록 두들기고 밟습니다. 행정보급관은 옆에 서서 삽질이 어수룩한 땅개를 발로도 차고 주먹으로 배를 어루만져 주기도 합니다. 땅개니까,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이라면 10종이고 개라면 9종이었으니까. 비라도 오는 날이면 낮이고 밤이고 모든 훈련과 행사를 접어두고 ‘비상 출동’이 내려졌지요. 모래 다 쓸려내려간다고. 모래 쓸려내려가지 않도록 출동해서 물골을 트고 모래를 잡아 두라고.


.. 함께 조종사가 되었던 여군 동료들은 모두 정조종사가 되어 보지 못하고 항공단을 떠났다. 우선 후배가 가장 먼저 군을 떠났다. 출산 때문이었다. 여군도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를 낳으면 전역을 해야 했다. 그것이 규정이었다. 참 우스꽝스런 제도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여군이 무슨 성직자도 아닌데 결혼까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 말도 안 되니까 결혼은 허용한 듯한데 막상 출산을 하면 강제 전역시킨다. 결국 결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건 비합리적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제도다 ..  〈79쪽〉


 괴로워하는 후임병을 보면서, 익살쟁이 고참병 한 사람이 “야, 북한 애들은 천삽뜨기 운동(천 번 삽질을 한 다음 허리 한 번 펴기) 하잖아. 그러면 우리는 만삽뜨기 운동 하자. 헤헤헤.” 저도 따라 웃었지요, 헤헤헤. “하나, 둘, 셋, 넷, 다섯, …… 스물, …… 서른, 어 허리 폈네. 허리 왜 펴? 죽을래? 헤헤헤. 다시 만 번. 하나, 둘, 셋, ……”

 삽질을 해 보면 백 번을 뜨고 허리 한 번 펴도 힘든 판인데.

 그런 우리를 보며 행정보급관이 힘을 북돋워 준다면서 하는 말, “야, 늬들은 말야, 군대에서 좋은 거 배운다는 거 잊으면 안 돼. 늬들이 전역해서 뭐 할 일 있겠어? 공사판에나 가서 일해야지. 그때 우리 부대 야상 입고 나가란 말이야. 야상에 백두산 그려진 거(제가 나온 부대에서 쓰는 사단 무늬) 입고 가면 오천 원을 더 받아, 오천 원을, 알아?”


.. 어느 날 밤이었다. 10시 반쯤 잠을 자기 위해 누웠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내가 비행학처로 오기 전의 처장이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처장들하고 술 한잔 했는데, 2차로 여기서 한잔 더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취침중이라 안 된다며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그는 “왜? 술이 없어서 그래? 술하고 안주는 내가 다 준비할 테니까 어서 문이나 열어” 하면서 …… “여자 아니라도 취침중인데 취해서 찾아와 무조건 문 두드리는 건 결례 아닙니까?” “결례? 남자들은 상관이 술 마시자고 찾아오면 황공해 하면서 얼른 문 열어 줘. 내 부하 중에 너 같은 앤 하나도 없어. 알아?” “그럼, 그런 부하 찾아가세요. 왜 싫다는 사람에게 그러십니까?” ..  〈144쪽〉


 적으면 열아홉, 많으면 스물여섯이었던 젊은이들. 저도 젊은이였을까요. 제 입영동기인 또래 동무는 소대 배속을 받은 첫날부터 고문관으로 찍혀서 전역하는 날까지 눈치밥과 미움밥과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제가 병장 때 들어온 스물여섯 살짜리 후임병은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이등병 고참한테도 뒷간으로 끌려가서 얻어맞고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울고 있는 스물여섯 살짜리 고참(그때 제 나이는 스물셋)한테, “○○○ 이등병, 밖에 나가면 형이었을 텐데, 다들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 나도 그 꼴 보기 싫어서 남들보다 군대 일찍 들어온 편이지만, 내 바로 위에 동갑내기가 있었거든. 그 자식 생각만 하면 전역하고 대구에 가서 그놈 찾아내서 족치고 싶은데, 어쩌겠어. 살아야지. 진짜 힘들겠지만, 일 년 참아야지. 3소대 ○○○도 스물네 살에 들어와서 진짜 고생했는데, 이제 일병 달고 나니 많이 나아졌잖아. 이 좆 같은 곳에서 개죽음 당할 수 없잖아. 미쳐버릴 수 없잖아.” 하고 이야기하며 담배 한 개비 내밀었습니다. 이런 달래기가 몇 번 이어졌습니다. 아니, 거의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 전역할 사람, 스물여섯 살짜리 이등병, 중대장보다 한 살 어리고 모든 소대장들보다 나이 많은 이등병은 앞으로 스물넉 달을 군대에서 견뎌내야 할 사람.


.. 입맞춤을 당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이 한 번의 일로 그 여군 장교가 사단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노라고 군 검찰에 바로 고소할 수 있었을까? 나는 모든 여군들이 그러기를 바라고, 나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대개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일개 소위가 자기 부대의 사단장을 고소하여 그것이 제대로 처리될지 자신할 수 없고, 만약 흐지부지 끝나면 그 후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  〈196쪽〉


 저보다 열한 살 어린 고향후배 한 사람이 지난주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훈련소에서 한창 설설 기고 있겠군요. 그 어린 넋은, 아니 그 젊은 넋은 군대에서 얼마나 젊디젊은 넋 그대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옛날과 견주면 ‘좋아졌다’고 하는 군대이지만, 군대가 아무리 좋아진다한들, 남과 북이 총부리 맞들고 싸우는 지금 형편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미국한테 식민지처럼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며 온갖 무기를 사들여야 하는 쇠사슬을 끊지 않는다면, 나라가 아닌 권력을 지키는 군대 조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다면, 총이 아닌 낫과 연필을 들고 평화를 가꾸는 마음으로 우리 삶을 돌려놓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 땅에서 새로 태어나서 자랄 젊은 넋들은 어찌 될는지요. 아이를, 사내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4340.9.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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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개하는 글’이란 뭘까?


 새로 나오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누구나 읽으면 좋겠다 싶은 책을 하나 고를 수 있을까요. 수많은 책들은 수많은 ‘다 다른 읽을이’를 겨냥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 세상에서는 ‘자기 계발’이라는 탈을 쓰고 ‘돈벌이-이름내기-권력 얻기’에 매달리는 사람들 읽을거리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이런 책만이 읽힐 만한 책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계발’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책을 읽으면 자기 계발이 안 될까요. 교육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이책을 읽으면, 수필이나 시를 읽으면 자기 계발이 안 될까요. 이 세상 모든 책은 처음부터 ‘그 책을 읽는 사람한테 자기 계발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끄는 눈길과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교훈’이라는 말도 곰곰이 짚어 봅니다. 이 세상 어느 책도 ‘교훈 없는 책’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교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갈래로 나눌 만한 책인지, 어떤 이야기감을 어떤 눈높이와 생각과 마음밭으로 곰삭여서 펼쳐냈는지라고 느낍니다. 어떤 자리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인지, 어느 곳에서 담아낸 그림과 사진인지가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지율 스님이 밥굶기저항을 하며 썼던 글을 묶은 《초록의 공명》(삼인)이 있고 《지율, 숲에서 나오다》(숲)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책을 읽으면서 지율 스님 이야기와 성철 스님 이야기가 다르지 않구나 하고 느낍니다. 깊이가 다를까요, 너비가 다를까요. 두 분이 있던 자리가 다를 뿐, 그 다른 자리에서도 세상과 사람과 우리 삶터를 바라보는 눈매와 손매는 한결같구나 싶어요.

 아룬다티 로이 님이 쓴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를 거듭 다시 읽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시울)를 꼼꼼히 되짚으면서, 왜 우리 나라에서 ‘여성 작가’라고 하는 분들은 이렇게 ‘너른 어머니 자연’ 같은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둘레에 나누지 못할까 싶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제가 우리 삶터와 세상을 좀더 곰살맞게 헤아리지 못해서 드는 느낌이겠지요. 이효재 님 발자취만 더듬어도, 고정희 시인 발자국만 되밟아도, 그림을 그리는 박인경 님이라든지, 소설을 쓰는 공선옥 님 살아가는 이야기만 엿보아도 이런 말은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에는 ‘글쓴다는 여성’, ‘기자라고 하는 여성’, ‘활동가라고 말하는 여성’, ‘대학교수라는 이름쪽 내미는 여성’만을 곧잘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일본사람 우자와 히로후미 님이 쓴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소화)를 읽으며 울컥 합니다. 첫째,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은 우리 삶터에 걸맞게 우리 스스로 엮어내지 못한다는 슬픔 때문에. 둘째, 이런 이야기를 형편없는 번역으로 망가뜨려 놓았다는 짜증 때문에.

 1990년대 첫머리에 나온 《녹색평론》 서너 권을 헌책방에서 삽니다. 벌써 읽었던 글이 있고, 낯선 글도 있습니다. 뒷날 낱권책으로 묶인 글도 보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국사람이 쓴 글은 세월이 흐를수록 해묵었구나 싶은 느낌이 짙은데, 나라밖 사람이 쓴 글은 세월이 흘렀어도 빛이 안 바래네 하는 느낌이 짙습니다. 뭘까요. 문화제국주의에 찌든 눈길이라서 이럴까요.

 일본 그림쟁이 도미야마 다에코라는 분이 한국 그림쟁이 이응노 님을 파리에서 만나며 나눈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를 일곱 달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으며 어젯밤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응노 님이 펼친 이야기가 거의 막바지가 될 무렵, 다음처럼 한 마디 불쑥 합니다.


.. 도미야마 씨는 그렇게 서베를린에도 동베를린에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어떤 나라라도 여행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서 발표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일본사람은 행복한 거예요.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 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게 있습니다. 다만, 요즈음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자기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담아낼 자유’가 제대로 없습니다. 저마다 담아내는 이야기가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떠나서, 이런 옳고그름 가르기는 나중 일이고, 어떤 생각이든 이야기이든, 저마다 자기 깜냥을 살려서 나타낼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권리조차 없습니다. 아니, 자유와 권리를 느끼며 생각하고 살아가는 마음밭부터 일구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냈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고 합니다. 꿋꿋하게 가난과 싸우거나 가난과 하나가 되어 즐기는 사람이 몇 사람 있으나, 웬만한 사람들은 가난은 구질구질하다고만 여겨 쉬 내동댕이치고 돈사랑으로 끄달립니다.

 제도권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들 마음밭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습니다. 남자는 군대에 이끌리며, 여자는 상업주의로만 치닫는 자본주의에 물들며 젊은 날을 ‘돈’ 하나에 매달리도록 나뒹굴어야 합니다. 자기 먹을거리, 입을거리, 잠잘곳, 쓸거리를 손수 장만하거나 갖출 수 있는 터전이 온통 무너졌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제 손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합니다. 유기농곡식을 찾아도 생협 매장을 찾아가려고 하지, 텃밭농사를 일군다거나 스트로폼농사를 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옷 한 벌을 입어도 값싼 옷이든 예쁜 옷을 입으려 하지, 손수 천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실을 자아서 옷을 짓는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어쩌면 ‘실을 잣다’라는 말도 못 알아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을 자아서 입든 말든, 이렇게 할 생각을 처음부터 안 하도록 빈틈없이 제도권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살아갈 집을 마련하는 일도 그렇지요. 변기를 어떻게 쓰는지, 부엌을 어떻게 쓰는지, 방은 어떻게 쓰는지, 불은 어떻게 때는지, 창문은 어떻게 다는지, 마당은 어떻게 꾸미는지, 처마는 어떻게 다는지, …… 이 모두를 우리 손으로 하지 않아요. 물은 어떻게 마시겠습니까. 천장은 얼마만큼 높이겠습니까. 2층으로 할까요? 지하실을 놓을까요? 문은 어떻게 달지요? 바닥과 벽은?

 그 어느 것도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가꿀 수 없게 되어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개성이란 조금도 없는 한국 사회입니다. 대학교까지 안 나온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사회이지만, 대학교까지 다닌 사람들 깜냥(지식)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까지 나온 사람들 마음밭(정신세계)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까지 지낸 세월은 우리들한테 무엇으로 아로새겨진 슬기인가요, 경험인가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글로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사진으로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유경 님이 쓴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을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집어던지려다가 말았습니다. 〈시민의 신문〉이나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은 이렇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뭘까? 왜 그렇지? 글이 왜 이러지? 외국물 먹었다고 외국물 먹은 티를 내나? 아무래도 내 눈이 삐었는가? 아무리 요즘 한국사람들 글은 줄거리만 보아야지 문장을 보아서는 한 줄도 읽어낼 수 없다고 하지만, 줄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글을 이렇게 버려 놓으면 어쩌지?

 한국에서 사진하는 분들 가운데 ‘기무라 이헤이’를 아는 분은 몇 안 되리라 봅니다. 저도 이이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헌책방에서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를 운좋게 만난 뒤로, ‘이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진이 참 좋구나’ 싶어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거의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진평론가 와타나베 츠토무 님이 쓴 《현대일본 사진가》(해뜸)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립니다.


.. 이른바 신인 시대라는 것이 없이 젊었을 때부터 하나의 경쟁 목표가 되어 언제나 쫓기는 마음으로 근대사진의 길을 개척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작가 활동을 계속하여 오늘날에 이른 사람이 기무라 이헤이다 ..  (203쪽)


 아무것도 없는 맨땅, 풀도 자라지 않는 모래땅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했던 기무라 이헤이 님 같은 삶이었다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찍고’ 하는 골치아픈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힘겨워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삶터는, 나라는, 사회는 어떠할까요.

 일본에서 서른한 해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둔 평교사가 남긴 《교실 일기》(양철북)라는 책을 보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어쩔 수 없는 아이들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왜들 이렇게 영어를 좋아하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즉각 대답이 나온다. “멋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인기 가수들의 노래에도 영어가 잔뜩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영향일 것이다. “선생님, ‘미래’가 영어로 뭐예요? ‘출판’은요?”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댄다. 나는 영어 사전이 아니다. 그냥 아는 단어만 나열해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자신은 없다 ..  (193쪽)


 하, 저는 멋없이 살고 싶습니다. 아니 내멋대로 살고 싶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배가 고프니 쌀을 씻어 아침을 얹어 놓고 밥부터 먹어야겠습니다. (4340.9.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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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나올 <우리 말과 헌책방>에 들어가는 머리말.


여는 글 ― 기다리지 않습니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제 삶 서른세 해입니다. 저는 벌써 적잖은 분들보다 길게 살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꾼 김현식 님보다도, 서양음악을 하는 슈베르트보다도. 평론하던 채광석 님이 서른아홉에 돌아가셨는데, 서른아홉까지 고작 여섯 해 남았습니다. 만화를 그리던 송채성 님 나이는 진작 넘어섰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중국사람 노신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던 박병태 님은 군대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한참 앞서 이분 나이를 넘었어요. 역사로 치면 옛날사람이지만, 혁명가 김산 님이 세상을 떠나야 한 나이가 서른셋입니다. 소설을 쓰던 심훈 님은 서른다섯에 이슬이 되셨고, 김소월 시인은 서른둘에, 윤동주 시인은 스물여덟에, 신동엽 시인과 이육사 시인은 서른아홉에 짧은 삶을 마칩니다.

 크고 반짝이던 별과 크지도 않고 반짝이지도 않는 조약돌을 견주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합니다. 큰별이라고 해서, 반짝별이라고 해서, 그이들이 태어날 적부터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그이들 스스로 ‘기다리지 않고’ 자기 깜냥대로 할 수 있는 온힘과 온마음을 다했다고. 그렇게 가멸차고 다부지게 살면서 그 짧은 삶에도 굵직하게 발자국 하나를 남겼다고.

 이제는 헌책방 책시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책이 되고 있지만(새책방 책시렁에서는 더더구나 안 보이고요), 송건호 선생 책을 하나하나 갈무리해서 책꽂이에 꽂아 놓고 보니 74센티미터짜리 책시렁 한 칸에 꽉 들어찹니다. 송건호 선생은 전집이 나오기는 했으나 세상에 내놓지 않은 글이나, 당신이 기자로 일할 적에 내놓은 기사에다가 틈틈이 써 놓은 일기가 퍽 많은 줄 압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책 몇 가지, 또는 수십 권쯤이지만, 당신 한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우리가 볼 수 없는 자리에서 쪽잠조차 아껴 가면서 싸우셨다고 느낍니다.

 이번 《우리 말과 헌책방》에서 소개하는 인천 〈책사랑방〉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곰곰이 되짚었는데, 다가오는 대통령 뽑기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을 뽑거나, 가장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이 없다면 표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제가 엮어내는 이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은 제 온힘과 온마음을 다하기는 해도 3호에서 2호를 돌아보면 참 어설프고, 2호에서 1호를 돌아보면 꽤나 엉성합니다. 4호에서 3호를 보아도, 10호에서 9호를 보아도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대통령 뽑기에서는 ‘차선이 아닌 최선’을 뽑아야 한다고, ‘최선이 없으면 표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그대로입니다. 모자라기는 해도, 또 지지율이 낮다고 해도, 우리는 참말로 대통령이 되어야 할 만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 어떠하십니까?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우리 주머니돈을 털어서 사야겠지요? 그럭저럭 마음에 들 만한 책이 아니라. 저도 그렇습니다. 잡지를 내면서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큰힘을 쏟고 가장 알뜰하다고 여기는 글만 추려서 하나로 묶어냅니다. 2호까지 정기구독 하는 분이 105분이 되었습니다. 밑지지 않고 잡지를 묶으려면 적어도 300분은 되어야 하지만, 105분 모두모두 고맙고 소중합니다.

 2007년 8월 27일
 최종규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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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다시 쓰겠습니다


 그제, 강릉에 사는 띠동갑 후배가 인천으로 찾아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ㅁ대안학교에서 만난 후배입니다. 저를 보고 꼬박꼬박 ‘최종규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젊은 친구는 저를 자기 길동무로 생각해 줍니다. 스물한 살 젊은 나날을 보내며 부대끼는 온갖 걱정거리와 마음앓이를 털어놓고 자기 갈 길을 스스로 헤아리곤 합니다. 새벽 네 시가 넘도록 젊은 친구와 옆지기하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젊은 친구가 저를 처음 보았을 때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음 받은 느낌으로는, 저 사람 콧대가 높을 것 같다”였다고 합니다.

 옆지기도 웃고 저도 웃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거울을 안 보고 사는 제 얼굴이 이웃사람들한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잘 안 듣고 살았구나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며 거울을 꼭 봐야 하지는 않고 이웃사람들이 허튼소리를 할 때에는 한귀로 흘리며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지 못한 세상 모습을 들려준다든지, 제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엇나가고 있는 걸음걸이를 알려준다든지, 제가 느끼지 못한 사람들 아픔과 눈물과 웃음과 즐거움을 보여준다든지, 제가 알지 못하는 슬기를 깨우쳐 줄 때에는, 어느 자리 어느 때 누구 말이라 해도 고개숙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강릉 사는 젊은 친구한테 미처 묻지 못했는데, 저를 처음 본 2005년 여름 그날 콧대 높게 느껴지던 제 모습이, 2007년 여름 이날도 마찬가지일까요.

 어제 잠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서울로 사람 만나러 떠나는 젊은 친구가 혼자서 전철간에서 심심할까 싶어서 함께 갔습니다.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기 앞서 들른 헌책방에서 《텍스트》라는 ‘북매거진’ 35호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는데 거의 한 해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나온 35호를 보니 지난 34호를 낸 뒤로 사람품이며 돈이며 다른 여러 가지며 참 안 좋아서 한 호도 못 내고 있었더군요. 다시 펴내는 말을 이렇게 적습니다.


.. 이렇게, 다시, 결국, 시작합니다. 늘, 끝의, 시작입니다. 《텍스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많다는 것 잘 압니다. 어떻게 사과와 용서를 빌어도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컨대 그 불만과 불신을 온전하게 해소시키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다만 텍스트에 대한, 버리지 못한 욕망이 다시금 《텍스트》를 시작케 합니다. 그 욕망에 기대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일 따름입니다. 부디 그 텍스트의 욕망 안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오솔길이 놓여 있기를 희망합니다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글을 안 쓰면서, 제가 해 오던 수많은 글쓰기(우리 말 / 책 / 헌책방 / 자전거)를 많이 줄이거나 꺾거나 묻어 놓았습니다. 자원봉사로 몇 군데 자그마한 매체에 글을 보내기는 하지만, 정작 제가 세상에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털어놓고 있지 못했으며, 아니 안 했으며, 숨죽이며 또아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올해 4월 15일, 네 해 조금 못 되는 세월을 일하면서 보냈던 충주를 떠나 인천으로 왔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원고 갈무리는 지난해에 다른 분한테 넘겨 드린 뒤 다른 일거리 없이 자전거만 타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덕분에 자전거로 못 가는 곳이 없음을 느꼈고, 오른무릎과 오른팔꿈치는 맛이 가서 요 몇 달 동안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몸이 무너졌습니다.

 인천으로 오면서 여태껏 읽고 추슬러 온 책을 갈무리해서 ‘지역 전문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제 마음에 담겼다가 제 몸으로 드러나서 사람들한테 펼쳐질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제가 읽은 책을 이웃사람한테 선물로 드리는 일도 좋지만, 차곡차곡 모아 놓은 뒤 한꺼번에 드러내어 누구나 찾아와서 읽을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한결 좋겠구나 깨달으면서 일을 벌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부대끼며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글 한 쪼가리로 써낸다면, 이런 글은 종이에 옮겨지는 그때부터는 ‘제 것’이 아닐 테지요. 어느 누구 것도 아닌 ‘글’일 뿐이며, 이 글을 좋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한테는 좋은 이야기로, 얄궂게 받아들이는 분한테는 비판과 칼질을 해야 하는 못난 이야기로 다가가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읽으며 좋음을 배우고, 나쁜 글을 읽으며 모자람과 어리숙함이 무엇인지를 느껴서, 저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더 나은 길로 거듭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즈음 인천은, ㅇ시장이 벌이는 밑도 끝도 없는 재개발 공사계획 때문에 가난하지만 수수하게 살던 골목집 사람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천사람이지만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충주로 옮겨 지내는 동안 살갗으로 못 느끼던 일이었습니다. 지역신문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중앙신문에서는 ‘거긴 너네들 지역 일이잖니’ 하고 한수 접고 들어가는 일임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전거로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느끼기로, 골목집 문화가 남은 마지막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도시 삶터에서 이웃집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살 수 있는 한 곳이라면 인천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돌아가신 김기찬 선생이 온삶을 바쳐 찍은 《골목 안 풍경》은 이제 중림동에 없습니다. 사직동에 없습니다. 공덕동에 없습니다. 남산에 없습니다. 경교장이 있는 서울 종로구 평동도 ‘이명박 뉴타운’으로 지정된 지 오래이고,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가 사는 홍제동도 개미마을과 전철역 둘레를 중심으로 높직높직 아파트를 새로 짓는 계획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값이 높고낮음만 다를 뿐, 강아랫마을과 강웃마을과 강옆마을 삶터가 무엇이 다를까요.

 인천은 2014년에 아시아경기를 치르게 되면서, 2013년까지 모든 구에 걸쳐서 모든 서민들 집을 허물고, 이 자리에 아파트와 쇼핑센터와 대형할인마트를 올려세우는 계획을 ㅇ시장 지시와 명령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전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 없는 마을이 없고, 이제는 이 나라 사람들은 절반 넘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멍가게나 옛 저잣거리에서 장보기를 하는 사람보다도 대형할인마트에서 장보기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요. 두 다리로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장보기를 하기보다 덩치 큰 suv라는 자가용을 몰고 장보기를 하는 분이 더 많지 않을까요.

 이런 세상에서 글쓰기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아찔아찔 골이 아파서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혼자 깨끗한 척, 잘난 척, 모든 것을 아는 척 콧대를 세우고 우쭐거리는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운가 돌아보니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참말로 글은 왜 썼고, 책은 왜 읽었고,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그 어리숙하고 모자랐던 글과 사진은 왜 올렸을까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아보아 주지 않는 헌책방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리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헌책방 이야기를 알린다기보다는 ‘헌책방처럼 따돌림받고 푸대접받는 이웃사람들 삶과 삶터도 함께 느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올바르게 쓰지 않는 우리 말과 글을 살가이 돌아보고 느끼면서 말하고 글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 말과 글을 올바르게 쓰는 일보다는 ‘말과 글을 깨끗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게 추스르는 동안 우리 마음과 생각도 깨끗하고 알뜰하고 아름답게 추스를 수 있을 테고, 이러는 동안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곳에서 좀더 힘내고 기운차게 어깨를 겯고 일하고 놀고 싸우고 노래하고 술과 밥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과 잡지에서 알아보아 주지 않는 조그마한 출판사 알맹이 탄탄한 책도 좀 읽으면서 세상 공부를 해야 우리 사회 밑바탕이 차츰차츰 탄탄해지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묻혀 있는 책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삶과 경험을 톺아보면서 내 삶과 경험을 되새기고, 내 사는 이야기를 이웃사람과 나누며 우리한테 정작 중요한 일을 깨닫고, 이웃사람들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으면서 참말 우리가 깨닫고 맞서고 함께해야 할 일거리 싸움거리 걱정거리 이야기거리가 무엇인가 스스로 찾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 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저 어설픈 생각찌끄레기를 어쩜 저렇게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대단한 척 우쭐댈 수 있었나 싶어 예전 글은 다 불살랐으면 좋겠구나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도 앞으로 몇 해가 지난 뒤 다시 읽었을 때 똑같이 느끼겠지요.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모자람과 어설픔만 깨닫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모자람과 어설픔을 느끼기 때문에 날마다 더 애쓸 수 있고, 날마다 더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으며, 날마다 더 눈에 불을 켤 수 있을까요.

 나한테 깃든 모자람을 느낀다면, 내 이웃한테서 느껴지는 모자람을 더 따뜻한 눈길로 굽어살피고, 나한테 깃든 어설픔을 느낀다면, 내 이웃한테서 느껴지는 어설픔을 더 포근한 손길로 어루만져야 하는구나 깨닫습니다. 남이 나한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다가서야지요.

 내 잘난 이야기를 떠드는 일이 목적이었다면 글쓰기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이웃들 복닥이는 온갖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있고, 느끼는 가슴이 있고, 곰삭이는 머리가 있으며, 함께하려는 손발이 있다면, 그때에라야 비로소 볼펜을 들든 자판을 두들기든 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제가 썼던 〈오마이뉴스〉 기사는 ‘높지도 않은 콧대를 높이 세우면서 거들먹거린’ 이야기였구나 싶습니다. 높여야 할 것은 콧대가 아닌 붓대일지 모르나, 붓대조차도 높일 까닭이 없으며, 높여야 할 것이 없는 만큼 낮춰야 할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손을 맞잡고 저마다 자기 길을 다부지게 걸어가야지 싶습니다. 핑계만 가득한 생각쪼가리 늘어놓습니다. (4340.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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