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그렇기 때문에 교의학은 자신의 대상을 항상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단지 <시간은 변화하고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이 매우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교의학의 대상은 그 대상을 추구하는 교의학을 지속적인 운동 상태에 놓는다. 그 운동은 끝이 없고 어떤 <결과>에 도달하지 않으며, 어떤 체계가 되는 법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또 다시 개방된 곳으로 접어든다(/2, 860).”(65,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렇기 때문에 교의학은 자신의 대상을 항상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단지 <시간은 변화하고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이 매우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교의학은 그 대상을 추구하는 교의학을 지속적인 운동 상태에 놓는다. 그 운동은 끝이 없고 어떤 <결과>에 도달하지 않으며, 어떤 체계가 되는 법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또 다시 개방된 곳으로 접어든다(/2, 860).”

 

독일어 원문: Deshalb und nicht etwa, weil »sich die Zeiten ändern und wir uns in ihnen«, muß sie[=die Dogmatik] ihren Gegenstand unter immer wieder neuen Gesichtspunkten anvisieren. Weil ihr Gegenstand so bewegend ist, darum hält sie[1] die ihm nachgehende Dogmatik so in Bewegung, daß sie[2] eigentlich an kein Ende, nicht zu einem »Resultat« kommen, nicht zu einem System werden, sondern immer wieder nur ins Offene münden kann (/2, 860).

 

sie[=die Dogmatik] = sie[1] =sie[2] = 교의학

 

주어가 교의학의 대상이 되려면 = er = ihr Gegen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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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것보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것들은 사정이 허락했다면 다루어졌을 것이지만, <내가여기서 수행해야 하는 바로 이 운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르트를 <골방 안의 히에로니무스>라고 불렀다(비교. /1, ). 그것은 뒤러(Dürer)의 그림 제목이었는데, 사자가 발 앞에 앉아 있고, 눈앞에는 해골이, 뒤에는 모래시계가 있는 어떤 학자를 그린 그림이었다.”(64, 문장부호 수정인용)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것>, 즉 그밖에 착수했던 것<보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내가여기서 수행해야 하는 바로 이 운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르트를 <골방 안의 히에로니무스>라고 불렀다(비교. /1, ). 그것은 뒤러(Dürer)의 그림 제목이었는데, 사자가 발 앞에 앉아 있고, 눈앞에는 해골이, 뒤에는 모래시계가 있는 그 학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독일어 원문: Er konnte sagen: »Wichtiger als alles andere«, sonst Angefaßte, »war mir die Bewegung, die ich ... hier zu vollziehen hatte.« »Hieronymus im Gehäuse« nannte man ihn deswegen (vgl. /1, ), nach dem Bild von Dürer, das den Gelehrten zeigt ein Löwe zu seinen Füßen, ein Totenschädel vor Augen, die Sanduhr im Rücken.

 

alles andere«, sonst Angefaßte, = 다른 모든 것, 즉 그밖에 착수했던 것

 

Hieronymus = den Gelehr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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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인식은 결코 그와 같은 대상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 대상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 대상을 스스로 설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인식에게 자신을 전제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며, 그 인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식은 믿음이 승인한 개방된-진리를 뒤따를 수 있을 뿐이며, 그 진리를 <확인>하고 그 진리와 일치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때 인식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그러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한도에서 그러한지>, 그리고 <사실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적으로 믿을 것인지의 물음이다.”(62-63, 문장부호 수정인용)

 

인식은 결코 그와 같은 대상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 대상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 대상을 스스로 설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인식에게 자신을 전제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며, 그 인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식은 믿음이 승인한 개방된-진리를 뒤따를 수 있을 뿐이며, 그 진리를 <확인>하고 그 진리와 일치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때 인식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그러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믿는 것이 오직 <어떤 한도에서 그러한지>에 관한 물음이다.”

 

독일어 원문: [...] Eben darum kann die Erkenntnis der im Glauben anerkannten Wahrheits-Eröffnung nur nachfolgen, sie »verifizieren«, ihr zu entsprechen suchen mit der Frage nicht ob, sondern nur, »inwiefern es so ist«, wie wir christlich glauben, »daß es so ist«.

 

»inwiefern es so ist«, wie A

 

= A가 오직 <어떤 한도에서 그러한지>

 

wie A [= wir christlich glauben, »daß es so ist«]

 

= <사실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믿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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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여기서 <인간학이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결정적인 명제들을 위한, 말하자면 인식론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로써 <나는 그 당시에거짓 신들에게 경의를 표한 셈이 되었다.>(/1, 30)”(59, 문장부호 수정인용)

 

여기서 <인간학이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결정적인 명제들을 위한, 말하자면 인식론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로써 <나는 그 당시에거짓 신들에게 경의를 표한 셈이 되었다.>(/1, 130)”

 

독일어 원문: Es sollte hier »eine Anthropologie ... angeblich der Erkenntnisgrund der entscheidenden Sätze über das Wort Gottes sein.« Damit »habe ich damals ... den falschen Göttern Reverenz erwiesen« (/1, 130).

 

인용문 출전의 쪽수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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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기초가 놓인 그 관계의 실행이며, 신구약성서가 통고하는 하나의 <계약>의 실행이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우선 하나님 그 자체만도 아니고, 인간 그 자체만도 아니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즉시 인간에 관해서도 말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해 오시고 전권을 취하시는 존재다. 이 점에서 윤리학도 교의학에 속한다.”(58, 문장부호 수정인용)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기초가 놓인 그 관계의 실행이며, 신구약성서가 통고하는 그 유일한 <언약>의 실행이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우선 하나님 그 자체만도 아니고, 인간 그 자체만도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을 먼저 보완적으로 그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즉시 인간에 관해서도 말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해 오시고 전권을 취하시는 존재다. 이 점에서 윤리학도 교의학에 속한다.”

 

독일어 원문: Das Theman der chlistlichen Theologie ist darum der durch Gottes Initiative begründete Vollzug deiser Beziehung, des im Alten und Neuen Testament angekündigten einen »Bundes« und darum weder Gott für sich noch der Mensch für sich, um sie dann erst nachträglich in ihrer Beziehung zu sehen. Von Gott ist darum nur so zu reden, daß sofort auch vom Menschen zu reden ist als von dem, den Gott anspricht und in Anspruch nimmt. Insofern gehöhrt zur Dogmatik auch eine Ethik [...]

 

des [...] einen »Bundes« = 그 유일한 <언약>

 

um sie[= Gott und den Menschen] dann erst nachträglich in ihrer Beziehung zu sehen.

 

= 하나님과 인간을 먼저 보완적으로 그 관계에서 파악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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